소풍
성석제 지음, 김경호 그림 / 창비 / 200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득할 수록 기억은 아름다워진다. 감상적인 미덕때문인가. 부끄러움, 원망, 고통조차도 추억이 되곤 했다. 인간에 대한 그리움, 향수에 옭아 매지는 것은 현실의 불만, 미래의 불안이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보상으로 이어진다.

성석제의 산문집 ‘소풍’은 감각적인 기억을 반추하게 한다. 마치 거대한 바가지에 각각의 맛이 살아있는 온갖 나물을 쓱쓱싹싹 버무려 놓은 것처럼 다양하면서도 일정한 법칙을 따른다.

그 법칙은 맛이다. 사는 맛, 어울리는 맛, 인생의 한 컷을 장식하게 된 그 맛들…
1부에서 4부까지 이어지는 맛의 퍼레이드는 ‘이 사람이 먹을 것만 찾아 다녔나’ 싶을 정도의 집착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먹는다’라는 것은 가장 본연적인 행위이고, 그것을 함께 한다는 것(만드는 것, 먹어주는 것)은 소통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새끼를 낳은 어미의 첫번째 행위로 젖을 물리듯 ‘맛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 최초의 경험을 욕망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일 수 밖에 없다. 기억의 흔적을 모아야 한다. 옛 집의 마루, 문, 창, 지붕, 기둥에서 나는 냄새들처럼 이야기는 역사를 담고 있어야 한다. 사람이 묻힌, 사람에게 묻어나야 ‘진국’인 것이다.

그런데 매체의 영향으로 숨어있던 ‘맛집’들이 곳곳에 등장하셨다. 동네마다 있다. 어느 프로그램에 소개되었다는 광고판에 기댄 강력한 전시효과는 위압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그 집의 맛을 의심케 한다. 흔해빠진 ‘맛집’일 뿐이다. 우리가 찾는 것이 과연 유명세일까. 골목 곳곳을 누비고 다닌 이 책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유머로 감칠맛을 더한다.

“술이란 지집이 따러야 맛이제.”

그러나 책의 기획에 억지로 끼운 듯한 글들이 많다. 다시 말하자면 함량 미달이면서 구색만 맞춘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너무나 기억력에 의존했나. 표현의 맛은 ‘변산반도 쭈꾸미 통신’(박형진) 못 미치고, 진득한 인간의 이야기는 ‘마음이 배부른 식당’(김형민)에 이르지 못한다. 성석제의 입담에 기대를 했건만 그것마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삽입된 별쭝맞은 만화들이 신경 쓰인다. 재미도 없고, 그다지 인상적이지도 않은데 왜 그랬는지 의도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콤한 죄악 - 뱀파이어 헌터 애니타 블레이크 시리즈 1 밀리언셀러 클럽 36
로렐 K. 해밀턴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흔한 소재 중의 하나가 뱀파이어이다. 영화, 애니메이션, 소설 등 대중문화의 영역 곳곳에서 등장하는 뱀파이어가 매력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힘, 그 힘은 근육에서 솟구치는 근력 뿐만 아니라, 성적인 매력 또한 주요한 요소이다. 인간을 언제든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마력’은 어떻게 보면 신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고, 그것은 인간이 동경하는 힘이며 공포인 것이다. 지배하느냐 지배를 당하느냐, 인간의 두려움은 이중적이고 이기적이다.  

이 소설에도 뱀파이어가 등장한다. 좀비도 나오고 구울, 늑대인간, 쥐 인간 등 ‘포스트 인류’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곳은 인간들이 사는 도시.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은 비현실적이지만, 우리의 현실임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 과연 모두들 인간적일까? 인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평등할까? ‘인간’을 위한 법은 비인간에게는 법이 아니다. 이 소설에는 뱀파이어가 인간 세계에 편입되기 위한 조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조건에서 벗어났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제거’ 대상에 오른다.

인간들 중에 ‘제거’를 담당하는 자가 있으니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애니타 블레이크’, 그는 처형 집행자로 불리우는 뱀파이어 헌터이다. 제거와 제거 대상, 그 관계는 전복적이다. 두려움은 상호적이며, 죽음은 무작위적이다. 선빵을 날리는 자가 유리하고, 심장의 박동이 목까지 차오르는 공포를 억누르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 애니타 블레이크는 뱀파이어를 두려워하는 뱀파이어 헌터이다. 인간다움은 불완전함에 있기에 오히려 두려움이 없는 에드워드는 터미네이터 같은 살인기계에 가깝고, 뱀파이어 보다 더 괴물답다.

애니타의 이러한 성향은 뱀파이어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매력을 애써 거부하는 ‘여인’의 모습처럼 비춰진다. 마초적 남성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살아 남으려는 여성 말이다. XY염색체에 다가서는 순간 그녀는 무장해제 되어 버리니까. 헌터가 아니라, 헌팅이 되니까.

이 소설의 전체적인 구도는 바로 이것 때문에 적절한 긴장감이 있다. 공포와 동경, 사냥과 사냥감,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흡사 전쟁하듯, 연애하듯, 사냥하듯 팽팽하게 줄을 당겼다 풀었다 하는 구도 속에서 소설의 매력이 발산된다.

이 소설은 딱 영화나 TV 드라마용이다. 한마디로 비쥬얼이 강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액션은 선명하다. 부담 없이 보고 즐기기에 좋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05-29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장미와 씨날코 - 1959년 이기붕家의 선물 꾸러미
김진송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2월 25일, 빨간 모자 아저씨가 커다란 선물 꾸러미를 들고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선물을 나누어 준다. 아름답게 보이는 이 연례행사를 약간 변형하고 싶어진다. 만약 1년 내내 빨간 모자 아저씨의 집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에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바친다면,

그것은 선물일까?

어느 신문사에서 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이름과 물품 목록이 적혀있었다. 이기붕의 집에서 나온 것으로 매일 같이 많게는 하루에도 수백여명이 흔적을 남긴 방명록이면서 장부의 성격이 담긴 꾸러미였다. 그 물품 목록을 살펴 보면 백화점 진열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갈비, 생선, 과일, 코카콜라 한 상자, 씨날코, 휘발유 세 드럼, 포플린 세 필, 아이스크림 세 통, 병아리 세 마리, 이불, 새우젓, 소금, 장미, 십자매, 진돗개, 빈대떡, 만둣국, 게장, 간장, 뎀뿌라, 꿩, 노루, 우장춘 박사가 보낸 '씨 없는 수박 세 통 등' 80p

사과박스, 차떼기, 트럭정도는 되어야 하는 요즘의 상황과 비교되게 당대 최고의 세도가의 집에 들어오는 물품 목록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이승만은 군림하고 있었으며 이기붕은 통치하고 있었다. 군림하는 대통령과 통치하는 이기붕은 자식마저 주고받는 근친교배의 과정을 거쳐 생성된 자웅동체였다.” 268p

그렇다면 선물일까?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선물 경제는 시장 경제와 나란히 존속했으며 상호 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선물은 세계시장이 발달했어도 비 시장관계가 중요한 사회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인데, 그 관계는 역시 권력과 자본의 사적 소유를 위한 목적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부정과 부패와 횡령과 사기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의 주변에 있던 선택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짓은 적어도 돈과 물자 있는 곳 근처에 얼쩡거릴 수 있는 특권이 있어야 저지를 수 있는 범죄들이었다.
권력의 근처에 얼쩡거리지 않으면 도무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29p

그래서 뇌물일까?

황당하게도 저자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책의 의도가 아마도 그것을 밝히는 것이 아닌가 기대했던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사회적 정황으로 봐서는 선물로 보기 어렵고, 뇌물로 보자면 너무 보잘 것이 없다라는 것, 심적으로는 의심이 가는데 증거로는 불충분한 종이뭉치 일뿐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제목처럼 선물로서의 ‘장미’와 뇌물로서의 ‘씨날코’의 경계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가 밝히길, “이 문서가 의미가 있다면 바로 권력을 사유화하는 공식 장소의 출입자와 물품의 출납이 기록되어 있는 자료라는 것이며,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서 권력을 사유화하는 방법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붕의 집은 권력을 사유화하는 공적인 장소였던 셈이다. " 40p

물품 자체의 의미는 중요했던 것이 아니다. 그 물건들이 어떤 경로로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전해지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공적 영역의 정치가 끊임없이 사적 영역을 침범하는 과정을 발견해 낸 것이 커다란 수확인 셈이다. 사유화 된 권력이 재생산되고 있었던 당대의 풍경은 말한다. 1959년 이기붕의 집은 한국의 무능과 부패를 일삼던 정치 부라퀴들의 이합과 집산이 곰비임비 이루어지고 있었던 허브(Hub)였고, 그것은 역사의 순간에 머물지 않는 연속성과 지속성을 갖춘 권력의 단면임을 일깨워 준다.

“모든 것은 권력으로 집중되어버렸다.” 315p
"전쟁이 끝난 후 모두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고 누구는 '있다'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뭐든게 궁핍했다던 그 때에도 물자의 배분 문제 여전했다.” 142p
무능과 부패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는 권력과 물자의 집중화에 그 원인이 있다.
배분의 불평등, 권력의 집중화, 전쟁과 반공이데올로기가 만든 일상의 폭력, 정치의 부패와 정부의 무능이 불러온 사회적 현상들은 신기하게도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시킨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 꼬여버린 것일까. 어떻게 과거와 현실이 똑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역사로부터 응징을 받는다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과거의 야만은 득이 되면 받아들이고, 실이 되면 거부하는 단순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토론과 논쟁과 조정의 절차는 매우 낯선 일이었다. 이로우면 밀어붙이고 해가 되면 저지하는 야만적 절차에 수십 년 동안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정치란 매우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야만이 오늘 똑같이 보여주는 논리이다. 현재의 그들에게서 50년 전 과거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292p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행운’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이 보았고, 우리가 보고 있고, 누군가가 보게 될 익숙한 역사는 여전히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고 있다. 어이없이 ‘침목’이 되어야만 했던 사람들, 우리가 ‘침묵’하는 사람들, 현대사는 그렇게 달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지누의 집 이야기
이지누 지음, 류충렬 그림 / 삼인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 이야기를 한다고?
담, 마당, 지붕, 마루, 부엌, 창문, 우물, 변소 등의 용도 외에 더 알아야 할 것이 과연 있을까?
건축관련 서적도 아닌데, 무슨 할말이 더 있겠어.
현대인에게 오직 실용성과 편이성만을 강조하는 요즘에 구들과 벽창호, 기와를 이야기 한다니 어떤 의미가 있지?
홈 네트워크, 홈 시큐리티, 홈 오토메이션, 집안 어디서든지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디지털화 된 유비쿼터스 주거 시대가 곧 다가오는데 왠 복고풍!
어차피 인간의 주거문화는 기술과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 아닌가 … 라고 생각했었다.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듯한 이 책의 구성과 내용에 의문을 가질 만한 부분이다.

다분히 이 책은 과거 지향적인 면이 있다. 유년의 추억, 친환경적인 생활,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과거엔 이랬으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라는 식으로 전개된다. 무엇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것은 접어둔다. 다만 현재의 삶에 의문을 던질 필요는 있다고 본다.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풍수지리에 따른 배치, 삶의 철학이 담긴 생활의 소소한 모습들에서 이상적인 삶의 모습들이 언뜻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자연과 호흡하고, 가족간의 친밀함을 유지하며, 이웃과의 온정이 오고 가는 모습들은 ‘기술’이 줄 수 없는 너머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는 집이 삶의 질에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결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성을 점점 잊어간다.
기술이 주는 편리함은 인간에게 새로운 구속력을 강제하여, 스스로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한다. 현대인의 질병, 비만은 그 대표적인 현상일 것이며, 웰빙은 그것의 대안으로써 붐이 일었었다. 새집증후군처럼 인간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집에서 살아야 한다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획일화 된 주거문화의 대표격인 아파트가 신도시라는 투기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집은 또 한번 변질 되었다.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집에 묶여 살고 있다니… 10년을 모아도 자기 집을 구하기 힘든 이 세상에 집은 경쟁적으로 인간을 속박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고 만들어 가는 집이란, 진정한 의미로써의 집이란 무엇일까. 이 책은 집을 해부하듯이 보여주려 한다. 그 의미는 유효하며, 우리 삶의 질적 향상에 대한 고민과 방향을 잡아가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05-07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13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요즘 유, 아동 성범죄에 관한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범죄의 심각성보다는 수치심(?) 또는 정절(?)에 대한 병적인 집착 때문에 감추었던 예전과 사뭇 달라진 모습들이다.
이전에는 무관심이나 부모의 그릇된 가치관으로 인해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어야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보 제공, 경각심 같은 계몽적 성찰에 있다.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받아 적절한 방안을 모색하고, 피해자의 적극적인 대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건전한 사회를 위한 기초적인 노력이다. 
이제는 피의자의 부모들이 아이들이 받았을 정신적 외상의 심각성 및 그에 맞는 적절한 치유와 관심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고, 가해자의 재범 위험성을 사회적 이슈화하여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성추행으로 정신적 외상을 겪은 아이에 관한 성장 소설이다. 성장하는 아이들이 겪는 심한 내적 갈등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작위적인 설정(동일한 사건을 겪은 동명이인), 식상한 구도(두 명의 화자를 번갈아 이야기하는)가 인상적(?)이지만, 무거운 주제인 아동 성추행에 관한 사회적 문제제기를 재미있으면서도 호소력 있게 이야기 하는 것을 장점으로 들 수 있겠다.
또 다른 장점을 들자면,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의 캐릭터가 활력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말투, 그들의 고민, 학교 생활 등 세대차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작가의 세심함을 엿볼 수가 있다. 어쩌면 내가 겪었던 과거일 수도 있지만, 작은 차이일지라도 한껏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

상처 받은 자들에게 치유란, 관심과 정성을 넘치게 주는 것이다. 소설 속에 비유된 '깨진 그릇'처럼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깨지기 쉬운 그릇을 다루듯이 아이들 곁을 지켜줘야 하는 것이 어른들의 의무가 아닐까. 유진과 유진, 같은 이름, 다른 사람이지만 하나의 목소리로 어른들의 반성을 요구한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06-04-3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읽고 싶은데 아직 못 읽었어요.

라주미힌 2006-04-3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하늘바람님이 좋아하실 책인데...

석란1 2006-05-0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우리 가족은 돌려가며 다 읽었습니다. 중3아들 중1딸이 참 괜찮다고 친구들에게도 많이 권하더군요.

반딧불,, 2006-05-0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어떻던가요? 궁금합니다.
이런 상투적인 리뷰 말구요. 어떤 점이 좀 그렇더라 하는 점 말여요.

라주미힌 2006-05-08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남자의 입장이란 것이 어떤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위에 쓴것처럼,
작위적인 설정(동일한 사건을 겪은 동명이인), 식상한 구도(두 명의 화자를 번갈아 이야기하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3년전에 읽었다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다지 새로운 얘기를 했다고 볼 수도 없지만, 얼마나 편안하게 이야기 하는가가 주요했다고 봅니다 저자가 학생들하고 많이 이야기를 나눠봤구나라는 느낌은 받았어요. 없는 얘기가 아니라 진짜 얘기.
저처럼 학생들하고 대화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아이들 생각도 엿볼 수도 있고.. 그런면은 좋았어요.

반딧불,, 2006-05-08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점은 한계지요. 그래도 참 잘 쓴 책이긴 했어요.
표면으로 떠오르게 한 점도 그렇구요.
이금이님이 아니면 절.대. 못 건드릴 주제라고 해야할까요??
아쉽지만...
제가 묻고 싶은 점은 님도 어느 만큼의 동의를 하게 되는 면이 있는가거든요.
여성의 문제로만 몰리는 면이 강하니깐요.
하하..죄송. 이 책 읽으면서 계속 궁금했었어요.

라주미힌 2006-05-0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남성의 문제도 여성의 문제도 아니라고 봅니다. 어른과 아이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원하는 대답이 아닐수도 있을거에요 ^^; 소설 속의 어른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아이들과 소통을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별 구분의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거든요.
이런 주제를 다룬 책이 그 동안 별로 없었나보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던 것 같고요. 간격 좁히기라고 해야하나, 아이의 목소리로 전하는 상처의 깊이를 그리고 그것의 치유를 어른들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남자라서 뭐 특별히 다를 건 없습니다. 어른들의 책임과 관심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 정도...
저는 이 정도 밖에 더 떠오르는게 없네요 ^^;;

반딧불,, 2006-05-08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정확히 꿰뚫어 보셨군요. 바로 그거지요.
인간이니까.
집요한 질문 해서 죄송해요...^^;;

라주미힌 2006-05-08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 ㅎㅎㅎ 리뷰만 쓰고 땡~이면 재미없어요. 이런 저런 얘기가 오고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