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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수 우잘라 -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별이 뭘까?”
“저기 별 떴다. 보면 된다.”
“달은 대체 뭘까?”
“눈 있는 사람, 달 본다. 저게 달이다.”
“하늘은 어떤 의미일까?”
“환할 땐 파랗다. 캄캄해지면 까맣다. 비 올 때 흐리다…
다 볼 수 있어. 근데 대장은 맨날 묻는다. 대장 눈 나빠?”
122p
의미가 있는 곳에 시선이 간다. 시선이 가는 곳에 의미가 있다. 목적을 위해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은 언제나 옳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기술의 진보는 늘 전면에 나섰고, 성장과 팽창의 논리로 저항을 잠재웠다. 합리성, 그 무엇이라도 삼켜버릴 듯한 무한한 욕망 앞에 보이는 것들은 무엇이든 침묵을 강요당했다. 억눌린 소통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더 큰 욕망을 부르고 있다.
악의 순환… 무정지 시스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은 그래서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과 문명이라는 신앙에 광신적으로 집착하는 지금을 불행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는 계산이 요구되는데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데도 계산적이라고 생각해 보라. 단계가 많을수록 층위가 깊을수록 본래성은 멀어지게 마련이다.
이 복잡한 세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자기기만적 오류에 기인한다. 걷는 것 보다는 2만 여개의 금속세포로 구성된 기계를 선호하고, 자연 ‘풍’보다는 전기 ‘풍’을 원함으로써 문명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한다. 세련됨, 자연과 멀어짐으로써 더욱 문명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위대한 착각’.
편리함, 이것은 불편함을 제거하기 위해 그 무엇으로부터 착취하는 것이다. 자연에게서, 동물에게서, 사회적 소수에게서, 역사의 변방에서…
착취가 언젠가는 고갈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 자연과의 소통을 구걸해야 하는 문명인들의 미래를 알고는 있을까.
“나 이제 나이 58개야. 눈 나빠. 잘 안 보여. 사향사슴 쏴. 루바슈카 안 맞아. 나무 쏴. 안 맞아. 중국 사람. 이제 나한테 사슴뿔 안 사. 나, 겨울에 할 거 없어. 이제 뭐하지, 대장?”
272p
데르수 우잘라가 노안으로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서글픔이 흐른다. 숲사람인 그가 ‘문명인’과 닮지 않았기에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슬픔을 안고서 사라져 갈 운명…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금세 공중으로 퍼져 사라지지만, ‘더러운 물’(잉크)이 담긴 병에서 나온 말은 종이를 타고 멀리까지 간다. 337p
한 인간의 삶을 엿봄으로써 얻는 것은 말보다는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더러운 물’에서 나온 말이 이미 100년이 지나 이곳까지 흘러왔으니까.
Ps. 이 책은 연해주를 탐사한 20세기 초의 기록이다. 탐사라 하면 아마존, 남북극, 사막, 초원을 연상케 하는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의 ‘역사’와 ‘문화’를 살갑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 반갑다.
탐욕스러운 조선인도 까메오로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