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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야만행위로 비춰지는 것 중에 하나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한 쇼아(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이다.
그래서일까.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극단의 야만성을 역사적 교훈으로 세뇌시키듯이 끊임없이 확인시켜주는 작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 종교, 민족, 국경, 금은보화 등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인류에 대한 인류의 저주’는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정의를 부르짖어야만 하고, 폭력적이기에 평화를 외쳐야만 하는 현 상황은 지독하게 소모적이고 순환적이다. 게다가 평화를 위하여 우라늄탄, 클러스터 폭탄, 기화탄, 학교와 병원만 골라 맞추는 초정밀 크루즈 미사일 등을 선물로 날려주시는 ‘아메리카 쫑쫑’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겨버린 꼴은 가히 그로테스크하다.
이 책은 그런 점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 체험과 비체험의 만남을 주선한다. 시간의 장벽, 기억의 장벽을 넘기 위한 사다리를 놓는다.
네러티브는 다큐멘터리적이고, 이야기는 자서전 같고, 만화컷은 영화같고, 그림은 우화 같으며, 메시지는 역사적 증언만큼이나 묵직하다. 살아남은 자에 새겨진 피의 기록은 읽는 이에게 커다란 충격과 애환을 남긴다. 사실성이 주는 흡입력과 만화라는 장르적 편안함이 감성의 전이를 굵고 진하게 한다. 시대적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진실성만큼 좋은 재료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 형식 다 좋아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거….
살아남은 자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책은 커다란 혼란을 준다.
그들에게 쇼아의 피해자라는 면죄부가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침략국가 이스라엘의 인종주의적-반인륜적 범죄를 홀로코스트라는 ‘영원한 박해’ 속에 희석 시키고 있지 않은가?
아메리카 인디언, 제주도, 인도, 잉카, 난징, 나가사키-히로시마, 이라크, 테즈메니아 같은 곳에서 벌어졌던 야만적 행위보다 특혜(?)를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 건국 준비를 위해 그들의 희생을 침묵했던 이스라엘 지배계층의 정신 세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현실은 부조리를 내포하고, 세상을 향해 ‘나 여기 없어요~’(친절한 금자씨 버전)라고 외치는 듯 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고통이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질적 차이가 없음에도 똑같은 야만을 저지르는 것은 결국 그들이 나치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철저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절대로 잊지 아니하신다(시편 137:5-6).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사 역사가도 정치가도 그리고 유대인들 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건국을 허락하신다. 이 건국은 이스라엘의 땅의 회복을 의미한다.” 라고
‘십자군 전쟁의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일부 기독교인들과 부시에게 지옥은 언제나 오픈 되어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트 슈피겔만이 하고 싶은 말들…
앞으로 결코 있어서도 용납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쥐의 탈을 쓴 나치의 망령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