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국가라는 괴물과 살아가기 위하여....

국가라는 괴물과 살아가기 위하여....


솔직히 침잠(沈潛)해 있고 싶었습니다. 그간 너무 많은 말들을 대책 없이 쏟아냈다는 생각과 나의 말들이 굳건하게 서 있는 무감무심(無感無心)한 벽 어느 한 자락에 더러운 오물도 되지 못한다는 참담한 부끄러움이 말을 망설이게 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 다른 이들을 이끌고 시내를 건너고 계곡을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전쟁에서 정의로운 전쟁과 부당한 전쟁의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막연하게 정당하지 못한 어떤 폭력에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되는 폭력은 그나마 정당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내 집에 침입해서 내 일가족을 상하게 하고, 목숨을 노리는 도적 떼에게는 저항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미약한 인식일 겁니다.

우리가 배워 온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인식이란 대략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가족을 만들고, 그 가족들이 모여서 부족이 되고, 민족이 되고, 그들 나름의 영토와 주권을 가진 국가를 만들어서 그들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려 했다는 순진한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하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그 안에서 행해지는 가정 폭력도 존재하고,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노리는 범죄는 연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은 어쩌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민족이란 관념은 근대의 산물이라고들 합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내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길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도 나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씨족의 족보엔가는 올려지고,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고, 앞으로 살아가야할 경로가 정해집니다. 마치 통조림 공장의 통조림이 일정한 유통경로를 지니고 만들어져 유통기한이 지나면서 폐기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도 여러 가지 규정에 의해 이미 통제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제가 이 모든 것들을 부인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엔 저란 사람의 그릇이 너무 작지요.

조국은 당신의 피와 땀을 요구한다, 들어줄 것인가?

김선일 씨의 피납 소식이 알려져서 인터넷이 시끄럽던 지지난 주 화요일에 편집회의가 있었습니다. 아랍의 위성방송인 알자지라를 통해 김선일 씨 피납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부 당국이 직접 협상에 나선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편집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의견도 대체로 낙관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저는 속으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 가운데서도 속으로는 저처럼 생각했지만 차마 한 사람의 목숨을 두고 이러느니 저러느니 말하는 일 자체가 불경스럽단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김선일 씨의 “살고 싶다”는 절규를 들었고, 그가 군인도, 정부 요원도 아니고, 평화활동가로 자청해서 그곳에 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만 먹고 살기 위해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엔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남들처럼 아니, 우리들 자신처럼 누리고 싶었던 사람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방송을 비롯한 매스미디어에서 떠드는 것처럼 그가 별나게 성실하고, 특별히 더 착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회사에서 만난 동료, 내 학교 선배, 우연히 오다가다 마주쳤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 바로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이죠.

저는 김선일 씨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여러 생각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국가란 나에게 무엇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정보 없이 제게 암기되어 술술 나오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타이핑하면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귀가 내 안의 마인드맵에 이렇게 잘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태어나 교육이란 것을 받는 바로 그 첫날부터 아무런 고민 없이, 셀 수 없이 행해진 이 의식(儀式)들이 내 의식(意識)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국가가 무엇이기에, 민족이 무엇이기에 나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해야 하고,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인지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국가는, 민족은 내게 조국의 아들, 민족의 딸이 되길 요구하는 것인지요.

조갑제(월간 조선 편집장) 씨 같은 경우라면 저의 이런 반국가적 사고방식을 규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한 개인이 사라지면 내 안의 우주뿐만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던 우주도 사라집니다. 모든 인간은 살아남기 위한 욕망을 지녔고, 그것을 추구할 당연한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타인도, 그것이 설령 나를 이 세상에 내보내준 부모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시 거둬들일 권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와 민족이 무엇이기에 나에게 나가서 죽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타인을 위해 혹은 사회를 위해,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결심을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의에 의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이런 개개인의 목숨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와 민족을, 나의 가족 혹은 나의 생명과 동일할 것으로 아니 그 이상의 어떤 존재로 생각하도록 세뇌 받았습니다. 나의 생명과 안위를 곧장 국가와 동일시하게 되었지요. 저는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인식을 강요했던 국가주의자들은 정작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은 국가나 민족을 위해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들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생각하라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생각하기에 앞서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생각하라는 케네디의 말은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허구입니다. 일제의 잔인한 식민 통치에 저항하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던 독립운동가들은 우리가 독립한 몇 년 뒤 그들을 감옥에 가뒀던 일제의 주구들이 다시 대로를 활보하면서 자신들을 다시 감옥에 가두는 경험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얼마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수도 서울을 사흘 만에 포기하고 달아나면서도 서울 시민들에겐 정부가 끝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할 것이란 대통령 이승만의 녹음 방송을 돌렸습니다. 서울 수복 이후엔 도강파와 비도강파로 나눠 정부의 방침과 방송을 믿었던(정부를 의심하고 피난한 이들과 비교하자면 도리어 애국 시민인) 시민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형하거나 옥에 가뒀습니다. 이후에도 전쟁 기간 동안 북에 의해 전쟁포로로 잡혔던 이들의 송환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국가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대북첩보사업에 임했던 이들의 생사는 물론, 명예 회복 애초에 약속했던 보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냉전 기간 동안 납북되었던 어부의 송환 문제는 물론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북하여 주중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납북 어부임을 밝히고 한국으로의 귀환을 요청하는 국민에 대해 한국정부를 대표하는 외교기관인 대사관 직원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며, 국가를 생각해야지 당신이 세금냈냐고 오히려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수지 김은 한국 국적을 가진 평범한 국민이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살았던 여인이었지만 남편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그녀를 간첩으로 몰았고, 우리 정부는 자세한 조사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리어 정권 안보 차원에서 그녀를 간첩으로 규정하고, 그 유가족들을 억압했습니다. 남편은 그동안 안기부의 보호를 받으며 벤처사업가로 행세했고, 그런 일련의 공작을 추진했던 안기부장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었지요. 그런 중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백화점이 무너져 죽고, 성수대교가 끊겨서 죽고, 유람선이 불타서 죽고, 사람들은 지하철에 갇혀 오도가도 못 하고 죽거나 이제 유치원, 어린이집에 갓 입학한 어린 생명들이 밤사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건사고가 잇달아 일어날 때마다 정부는 재발방지를 약속했고, 그것은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서도 매일반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 개혁과 참여를 기치로 한 노무현 대통령은 다르리란 기대를 했었습니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침통한 표정으로 서희?제마 부대의 이라크 파병 결정을 내릴 때조차 여당이 소수인 상태에서 미국과 수구보수세력의 힘에 의한 강압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다고 믿었고,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것이 현실정치의 한계라고 여겨주었습니다. 그러다 대통령이 탄핵당했고, 잇따른 총선에서 소수 정당이던 열린우리당이 여당이자 원내 다수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라크 추가 파병 원칙을 재천명했고, 그 다음날 우리 김선일 씨가 참수당했습니다. 정부와 청와대,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물론 주무 부서인 외무부 어디에서도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서로가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 이 사태를 두루뭉수리하게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AP통신에서는 이미 사전에 김선일 씨 관련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해 이를 한국 정부에 문의했으나 한국 정부는 피납자가 없다며 이를 부인했고, 우리는 알 자지라 방송이 있기 전까지는 “살고 싶다, 살려 달라”는 김선일 씨의 피 끓는 절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고립당한 채 홀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처절하게 대면해야 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었습니다. 그는 병역의 의무도 다했고, 세금도 냈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특별한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들과 같은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이고, 국민이었습니다. 저 자신과 동갑내기였습니다.

국가의 3요소 - 국민, 주권, 영토에 우선하는 안보는 누굴 위한 것인가

우리의 민족주의는 김구 선생이 이야기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익, 우리들만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부당함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김선일 씨 본인조차 피납되기전 친구에게 보낸 이 메일에서 미군의 학살에 대한 증거 사진이 있다고 말합니다. 김선일 씨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를 죽임으로써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더 잘 알려질 것이라 믿는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우리는 공감을 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선일 씨의 죽음이 공허한 분노의 메아리로 돌아와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는 대한민국이 힘이 없어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힘은 이미 충분합니다. 강대국 미국민도 이라크에서 죽었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죽은 것도 아니고, 오무전자의 노동자들이 죽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죽은 원인은 분노와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안타까운 마지막 숨을 거두던 날 미군은 팔루자를 폭격해 이라크 민간인 20여명이 숨졌습니다. 미군은 우리의 광주 5.18 무렵 이라크 팔루자를 포위 공격해 800여명을 학살했습니다. 이라크인들은 오랫동안 평화를 원했으나 사담 후세인의 독재정권 밑에서 그들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애국 게임에 희생당해 왔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 끌려 나갔고, 쿠웨이트 침공에 끌려 나갔고, 걸프전에 이은 미국의 침공으로 세기를 넘기며 수십년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평화는 이라크인들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그들의 힘으로 국가를 재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평화와 재건을 목적으로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한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들이 원하지 않는, 미국의 요구에 의한 이라크 파병이란 사실은 우리들 자신부터 잘 알고 있은 일입니다. 김선일 씨는 왜 이역만리 먼 타국에서 목이 잘려 숨져야 했습니까? 그건 그의 조국이 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라크에 파병하는 나라 한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유 없는 전쟁에 병사를 내보내는 나라 대한민국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의 조국이 국민 한 사람의 희생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 그런 정권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사회 시간에 국가의 3요소를 배웠습니다. 국민, 영토, 주권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안보란 말 앞에서 침묵할 것을 강요당해 왔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누구를 위한 안보인가요? 정권을 위한 안보인가요? 국민을 위한 안보인가요? 어떤 이들은 제게 되묻고 싶을 겁니다. 네가 이라크인들의 손에 죽은 김선일 씨가 아니지 않느냐? 그가 이라크 근무할 때 이라크 사람들을 진심으로 생각했는지, 그가 그들 손에 죽임을 당한 뒤에도 여전히 이라크인들이 미국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계속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이죠. 김선일 씨의 부모님도 파병에 찬성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김선일 씨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듣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이유는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우리도 언제 그런 일을 당할지 아니, 이미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통해서도 보았지만 우리도 이미 그런 일들을 당했었고,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 중 누가 그런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가족이었습니다. 스페인 열차 테러 사건이 있을 당시 집권 여당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그 사실을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소행으로 규정하려 들었습니다. 스페인의 새로운 집권당은 이라크에서 철군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테러로 죽은 이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이라크에 또다시 대규모 전투 병력을 파견하자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노에 분노로 대응하려고 합니다. 이라크의 테러리스트를 상대하기 위해 우리도 테러로 맞서야 합니까?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를 빌려 쓰고 있는가?

저는 가끔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이 과연 우리나라 사람인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나라가 자기 조국이고, 자기 자식들도 계속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고 싶은가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자식들도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을 마치 세든 사람처럼 험하게 다루고, 그들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아이들을 위험 속에 방치해둘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이 나라 위정자들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이 땅을 잠시 빌려 쓰는 사람처럼 군다고 생각되곤 합니다. 어느 순간엔가는 이 땅을 버리고 모두 외국으로 떠나버릴 사람들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안보 없이 국가 없고 국가 없이 국민 없다”는 구호를 들을 때마다 저는 이런 구호를 만들어 낸 사람의 머리 속을 구경해보고 싶어지곤 합니다. 국가의 3요소란 국가가 존속되기 위해 필요한 3가지를 말합니다. 그 3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국가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안보를 가장 위에 둡니다. 안보가 필요한 이유도, 국가가 필요한 이유도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도, 국민도 안보를 위해 존재합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듭니다. 국가안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파병에 반대하던 국회의원들조차 입에 침도 마르기 전에 말을 바꿉니다. 당연히 국민들이 테러 대상이 될 줄 알면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으면서 국민의 희생이 어느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이때의 국가 안보에 국민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세워진 합법적 정부란 사실을 인정합니다. 정부의 권위도 인정합니다. 비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무현 정부를 지지해본 적은 없지만 그 절차와 과정의 합법적인 권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김선일 씨의 사망 과정과 은폐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지닌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고민해본 결과 저는 이 사건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종철 군이 독재 정부의 국가폭력에 의해 직접적으로 살해당한 사건이라면 김선일 씨의 죽음은 국가권력이 그들 정권의 안보를 위해 한 국민이 타국에서 살해당하도록 방치해둠으로써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는 점에서 결국 국가권력에 의한 살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독재권력이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 중 하나인 박종철을 강제 연행하고 결국 죽였다면, 지금 합법적 국가권력은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파병을 강행했고, 그 와중에 자신들이 구할 수도 있었던 한 개인을 죽도록 버려두었다는 겁니다. 국민들이 그토록 분노하고 있는 까닭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며 그 희생자가 우리들 중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때 국민을 버려두고 자기들만 도망친 정부에서 한 발짝도 더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

배타적 타자의 존재와 가위바위보 게임

근대국민국가란 것은 그 자체로 배타적 타자의 존재를 내포합니다. 즉, 우리와 다른 타 민족국가의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타국으로부터의 침입을 전제하여 군대를 양성하지요. 몽고메리는 전쟁의 여러 이유 중 하나, 특히나 현대전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빈번한 전쟁에 대한 또 다른 근본적 이유로 집단에 소속하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욕망을 들 수 있다. 한 사회 안에서 충성심이나 집단의 주체의식, 애국심과 같은 것이 발전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이웃 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적대적이게 된다. 라틴어 hostis가 '이방인'과 '적'을 동시에 뜻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상의 다양한 민족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남다른 문화에 강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한 문화와 군사제도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국민국가의 존재 자체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마치 “가위 바위 보 게임”에서 서로 가위를 내기로 약속했으나 상대방이 날 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모두가 주먹을 내는 게임처럼 입으로는 늘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상대방이 언제 날 공격할지 모른다는 의심으로 군대를 양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 제국주의 혹은 일본 제국주의, 중국의 제국주의를 입으로는 비판하면서도 그것은 남의 나라가 제국주의를 하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일 뿐 우리 안에서 제국주의는 절대악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그런 제국이 되지 못한 욕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김선일 씨의 죽음과 같은 사건을 겪을 때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요.

국가는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권위이며 최종 심판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탓에 독재정권 시절 반국가사범으로 분류되던 사람들조차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저항하다 받은 피해와 자신이 행한 투쟁의 정당성을 최종적으로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으려 합니다. 민주화운동 보상이 그것이죠. 우리는 마치 교회 혹은 절, 성직자 혹은 승려를 비난하면서도 예수님과 부처님은 비판하지 않는 것처럼, 정부와 정권, 정치인은 비판하면서도 국가에 대해서는 무심합니다. 우리 국가가 우리 국민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암암리에 내면화했습니다. 한국전쟁과 냉전 기간의 폭압적인 독재권력 밑에서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제 살 길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나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단속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국가주의는 알고 보면 그런 개인주의의 연장입니다. 작게는 나만 잘 살면 되고, 좀더 크게는 우리 가족, 좀더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 우리나라만 잘 살면 되는 식으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방인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합니다.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하면서도 이라크 어린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이런 마음들은 때로 효순이 미선이를 조국의 딸로, 민족의 숭고한 희생자로 숭앙하게 만들면서 그들이 일반적인 여학생들이었고, 그저 집에 가던 길이었다는 사실을 망각시킵니다. 효순이, 미선이 아니 김선일도 조국의 아들과 딸로서 죽지 않았는데, 우리들은 그들을 한 개인의 죽음으로는 슬퍼하지 못하는 걸까요. 왜 그네들에게 민족이나 조국의 아들딸이라는 빛 잃은 휘호를 드리워주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걸까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거나 “예술에는 국적이 없지만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표현은 얼핏 들으면 매우 일리있는 말인 듯싶지만 이것은 인류 보편의 가치인 과학과 예술을 국민국가의 영역 속으로 포섭하기 위한 욕망을 숨기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 그리고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민족주의의 태생적 정당성을 기반으로 한 "반외세적, 배타적 자세는 반미 = 세계화 반대/ 민중생존권 투쟁 = 민족적 정체성 강화" 같은 도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라지는 것이죠. 정치적 민주화만으로 국가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그 어떤 국가의 역사에도 자국민을 학살해보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국민 각 개인의 기본권 보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신앙, 표현의 자유는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지, 권력자들이 필요에 따라 "인정한다, 그러나"라며 개인의 기본권을 규제할 수 있다면 국가가 괴물로 돌변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미국이 괴물이냐, 이라크가 괴물이냐, 다른 어떤 나라가 괴물이냐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란 본디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인류의 가치를 위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빌미가 되었던 9.11테러 사건이 일어난 뒤에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결국 미국도 당했다”였을 겁니다. 그리고 각종 방송 매체를 비롯해 언론 기관은 앞 다퉈 테러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미국에 대한 비통한 염려와 심심한 위로를 보냈지요. 그러나 연이어 일어난 미국의 아프간 공격 당시 우리 언론들은 아프간 민간인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미국의 9.11테러 때와는 확연히 다른 보도 자세를 보입니다. 아프간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공습이고, 테러범들의 공격은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오직 하나 미국은 국가이고, 테러범들은 국가가 아니기 때문인 거죠. 우리는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이 희생당한 것에 대해 비통한 마음을 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프간의 평범한 시민들이 희생당한 것에도 비통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정부는 김선일 씨의 참수 동영상이 담긴 파일의 유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법적인 근거도 없지만 희생자의 죽음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부는 그보다 먼저 희생당한 미국인 노동자의 참수 동영상의 유포에 대해서는 일체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희생자의 국적이 다를 뿐 잔혹하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그걸 법의 잣대로 삼는다면 당연히 둘 다 금지되었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 정부는 그렇게 원칙도, 철학도 없는 정부란 사실을 자인하고 있습니다.

김선일 씨의 죽음 이후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라크 파병 요구가 강해졌다고 합니다만 저는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극히 일부의 정보만을 편향적으로 전달하고 싶어하는 이 땅의 파워엘리트들이 만들어낸 여론 조작의 결과라 생각합니다. 무려 40%가 넘는 네티즌들이 이라크에 전투 병력을 중심으로 파병하라하고, 신임 총리로 지명된 이해찬은 전투력을 보강한 군대를 파병할 계획이라고 천명하고 나섰습니다. 저는 이런 사태를 보면서 경악했습니다. 김선일 씨를 죽게 내버려 둔 사람들이 이제는 더욱 많은 피를 이라크에서 흘리게 하라고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한반도에서 효순이,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한 것을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광화문에는 수많은 촛불들이 양심을 밝히며 이 땅에서 미군이 나가줄 것을 요구했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한 마디가 삭풍이 되어 그 많은 촛불을 꺼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공을 반대하는 반전평화 촛불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때 광화문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여서 촛불을 밝혔습니다. 한국과 이라크는 먼 나라이지만 생명의 소중함에 경중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미 대한민국 외무부는 극구 부인하던 사실 - “APTN으로부터 피납된 한국인이 있는가?”하는 질의를 받았던 사실 - 을 인정했습니다. 김천호 사장의 행적을 비롯해 이번 사건과 관련한 수많은 의혹들이 있고, 그 의혹들이 비록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그 배후에 미국과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국과 우리 정부는 이라크 현지에 나가 있는 우리 정부의 대사관 직원은 물론, 국정원 요원들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김선일 씨 피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에 따라 김선일 씨의 희생에 대해 우리 정부와 미국의 책임이 전무하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드러나고 있는 사실들은 그런 의혹들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설령 그들의 주장대로 전혀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책임의 경중을 의미하는 걸뿐 살해당한 김선일 씨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돌아가는 여러 상황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언론은 물론 우리가 진보적이라 믿어왔던 여러 매체들조차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제대로 접근하고 있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록그룹 “U2”의 노래처럼 말입니다.

And through the walls we hear the city groan
Outside it's America
Outside it's America

벽을 통해 우린 도시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미국이 밖에 있다.
미국이 밖에 있다.


그렇다면 김선일 씨의 죽음은 단지 미국과 한국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기 위한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빚어진 결과이기만 했을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언제 말을 바꿀지 모르는 정치인들에게만 맡겨 두는 동안, 우리는 개처럼 전쟁터로 끌려 나갈 겁니다. 우리는 김선일 씨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수 차례 있었습니다. 가장 첫 번째 기회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고, 두 번째 기회는 이라크 전쟁에 서희/제마부대를 파병할 때였고, 세 번째 기회는 이라크 추가 파병을 노무현 대통령이 결정하려고 들 때였고, 네 번째 기회는 김선일 씨가 수십여일 동안 홀로 고독하게 죽음의 공포와 대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제 우리들 중 누구에게든 테러와 죽음의 공포와 홀로 맞서야만 하는 상황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국가 안보란 국민을 볼모로 삼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지금 파병 반대를 해야만 하는 이유. 그것은 단지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라크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민간인들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외견상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회가 더 이상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하여, 한 개인의 죽음이 곧 한 우주의 소멸이라는 사실에 대해 무심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반대말을 죽음이라 생각하지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자연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입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합니다. 자연이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그날까지 타의에 의해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전쟁은 죽임입니다. 전쟁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인류는 언제나 전쟁에 반대하다고 말하면서 어째서 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까? 그들은 충성심이나 집단의 주체의식, 애국심과 같은 것으로 포장하지만, 결국 전쟁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이들, 아니 전쟁과는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먹을 것이 없고, 의약품이 없고, 총에 맞고, 폭격으로 죽어가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화려한 옷을 입고 "즐거운 나의 집"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누가 파병을 주장하나요? 누가 전쟁을 말하나요? 바로 그들이 전쟁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국가의 최상층부에서 피 한 방울 묻힐 일 없이 살아가는 그들이 바로 전쟁을 말합니다.  전쟁은 그 자체로서 비참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란 극한 상황 속에 잠재해 있는 우리들의 야만이 우리들의 삶의 본성을 굴절시키기 때문에 비참한 것입니다. 전쟁이란 잔인한 게임은 우리들이 보호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들을 먼저 죽이고, 그들의 삶과 피를 먹이 삼아 살아가도록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 전쟁에 반대합시다. 이라크에서 우리 군대를 철수시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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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7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병반대 운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말해주는 좋은 글을 하나 퍼왔습니다. 지난 2주간 집회 쫒아다녀도 별 성과가 없어서 좀 지친 분들이 계신 듯한데, 이 글을 읽고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중요한 싸움인 만큼 쉽게 성패가 나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좀더 끈기 있게 저항해야겠죠. 이 싸움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모두 파이팅!!!!!
그리고 어떤 분들은 파병반대 운동진영이 분열되지 않았나 걱정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 집행부가 제대로 운동을 이끌어가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 대중들이 정당한 비판을 제기한 것뿐입니다. 집행부에서 자기반성의 움직임이 있다고 하니, 앞으로 좀더 효과적이고 결집력 있는 운동이 이루어질 듯합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 자꾸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게 돼서, 더욱이 굳이 반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이야기들을 반복하게 돼서 좀 지겨운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이야기는 이제 이 답변으로 끝날 수 있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여름아이 님께 답장을 드립니다.

 

여름아이 님이 정말 답답하신가 봅니다. 그렇지만 답답하면 답답할수록 사태를 좀더 정확히 인식하도록 노력하는 게 필요할 듯합니다.

우선 저는 민노당 당원도 지지자도 아닙니다. 다만 파병철회라는 쟁점(및 기타 몇 가지 다른 쟁점)과 관련하여 민노당, 또는 그 중 일부 분파들의 입장과 비슷한 입장을 갖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니 지지율 하락에 관한 민노당의 생각을 보시려면 [진보누리]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마침 이 문제에 관한 글도 하나 올라와 있더군요.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제가 '열우당을 까는 데' 그렇게 열을 올린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고작 지난 총선 때 "민노당으로 가는 건 다 사표다"라는 유시민의 발언에 대해 덧글을 하나 붙인 적이 있고, 얼마전 유시민의 연구회 명칭 도용과 관련된 글을 퍼온 적이 있고, 지금 유시민의 [반성문]에 대해 단상을 하나 쓴 게 전부 아닌가요? 아, 지난 번에 [노무현 정권의 생명은 사실상 끝났다]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지요. 그런데 그건 까는 거하곤 좀 다른 것 같은데 ...

민노당 지지자들 중에서 '열우당을 까는 데' 열을 올리는 이들이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세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첫째, 열우당이 현재 집권당인데, '개혁정당'으로서(이게 무슨 뜻인지는 열우당이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텐데요) 열우당의 정책이 실제로 이전의 집권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정책과 별 차이가 없지 않느냐, 개혁을 표방하면서 너희가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측면이 있겠지요. 둘째, 하나의 정당으로서, 또는 정당의 지지자로서 라이벌 정당의 약화나 분열을 원하는 측면이 있겠지요. 그럴수록 열우당의 지지자들, 적어도 가장 개혁적인 지지자들은 민노당으로 지지정당을 바꿀 확률이 높을 테니까요. 셋째, 열우당 지지자들과 반사적인 상호비방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이런 악순환의 근본적인 도화선을 제공해준 건 제가 보기에는 특히 유시민 같은 사람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측면 중 저는 첫번째 측면의 비판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몇 개의 글을 쓴 것도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고요. 두번째 측면이야 정당이나 정당의 지지자들로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잘했다는 말이 아니라, 정당이나 정당의 지지자들로서는 다른 정당의 약점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의 지지도를 높이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욕구일 거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세번째의 경우 지지자들 중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는데 비합리적이고 모욕적인 언사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그걸 모두 통제하기는 어렵겠지요. 물론 저야 좌파 정당을 지향하고, 또 좌파적인 성향을 갖춘 지지자들이 그런 식의 행태를 보이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민노당의 구성이나 성향을 본다면, 그런 걸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열우당이 개혁정당이라면, 파병철회와 같은 문제에서, 더군다나 자국민이 파병도 하기 전에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그것도 대통령의 파병강행 선언이 주요 빌미를 제공해준 상황에서는 적어도 당 내부에서 전향적인 토론과 논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너무 실망스럽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열우당은 틈만 나면 [조선] [동아] 같은([중앙]은 자주 빠지더군요) 수구언론을 비판하는 데도 불구하고, 중요한 정책들에서는 양자가 멋진 화음을 이룬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한나라당이나 [조선] [동아]와 세우고 있는 대립각이 지지자들을 묶어보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고 본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지요.

여름아이 님은 또 "민노당이 더 잘해서 열우당이 교정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가"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민노당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우당의 정책, 특히 파병정책을 교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은데, 여름아이 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문제가 있다면, 겨우 10여명의 의원을 지니고 있어서 원내 교섭단체에도 끼지 못해 정책토론이나 결정에서 영향력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겠지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열우당은 150석이 넘는 거대정당이고 집권당입니다. 열우당은 평화개혁정당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지만, 현재 열우당의 행태가 이 타이틀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시진 않겠지요. 저는 열우당이 독점자본의 폐해를 규제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정책을 수수방관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평화개혁정당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다면, 또 그 때문에 열우당을 지지했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탄핵으로부터 구하고 열우당을 과반수 정당으로 만들었다면,  열우당이나 열우당 지지자들이 그만한 정치적 책임은 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 과반수 집권당을 만들어놓고 실제로는 수구세력과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도, 그럴 줄 몰랐다, 실망이다, 환멸이다, 이런 말만 하고 끝난다면, 또는 더 나쁜 경우, 그래도 수구세력과는 다르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270석이 넘는 거대 의석과 대통령의 정책을 무엇으로 견제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열우당을 지지했고 또 지지하는 분들이 열우당을 교정하고 변화시키려고 나서지 않는 한,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이대로 파병이 된다면(지금 상태로 보면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사실 같은데), 노무현 정권은 훨씬 더 강력한 저항과 비판에 부딪칠 것입니다. 그러면 노무현 정권과 열우당을 지지하는 분들은 어떻게 될까요? 더욱 더 노무현 보위쪽으로 쏠리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노무현 정권의 정책들을 합리적으로 교정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줄어들 테고, 노무현 정권과 수구세력의 객관적 동맹은 더욱 더 강화되겠지요. 바로 이 때문에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는 분들이 노무현 정권에 맞서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던 겁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이지 않고 있지만 ...

마지막으로 여름아이 님은 "진보주의자들에게 실망한 측면이 많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에서 그러셨는지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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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7-0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발람스 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답답해서 님을 귀찮게 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보는 여러 익명의 사람들과 발람스 님을 구분짓지 못하는 식의 글을 쓴 것도 잘못인 듯하고요. 저는 정당 정책들을 꼼꼼이 읽어내고 분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대중적인 인터넷 글들만 보는 편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대로 넘어가는 사람이니 그 점은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사실 님이 민노당 지지자도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면 제가 더 드릴 말씀은 없네요. 나머지 얘기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진보주의자들에게 실망했다는 건 개인적 경험들입니다.
공적으로는 실망할 건수(?)가 아직 많지 않겠지요. 기껏해야 인터넷에서 보는 실망스러운 태도들 정도이겠고요. 개인적인 실망이라?면 학생으로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다수의 진보주의자들(학생회 간부 및 운동권?) 혹은 민노당당원들을 만나왔습니다. 거기서 겪은 것들을 모두 얘기 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적절한 공간인지도... 평범한 시민의 관점에서 보면 대체로 현재의 한나라당 만큼은 모르겠지만 열우당보다 낫지는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보고 겪은 것들을 저는 믿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진보정당에 관념적인 기대마저 접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죠

balmas 2004-07-0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를 하실 거까지야 ...^^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진보주의자들에게 실망하셨다는 건 정말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도 똑같은 놈들이구나 하고 환멸감만 느끼고 물러나시면, 정말 다 똑같은 놈들이 되어 버립니다. 어떻게든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지요.
ㅋㅋㅋ 그리고 제 아이디는 발람스가 아니라 발마스인데요.^^ 지난 번에 말씀드리려다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눈치채시겠지 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계속 발람스라고 하시네요. 계속 그렇게 부르셔도 상관은 없는데, 다른 분들이 헷갈릴까봐 ...^^

릴케 현상 2004-07-0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엠자가 알자와 겹쳐 보였습니다.

balmas 2004-07-08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러고 보니 또 그렇게도 보이네요.^^
 

 

자주국방과 한반도 군축

 

함택영(경남대 교수·정치학, 평화네트워크 자문위원)
2004년 7월 1일



이 글은 7월 1일 한국 국방연구원 주최로 열린 국방 NGO 포럼에서 평화네트워크 자문위원이신 함택영 선생님이 발표하신 글입니다. 협력적 자주국방이 국방 정책의 핵심 과제로 등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군비 증강 논리가 힘을 얻는 상황에서, 자주국방의 본래적 의미와 한반도 군축의 가능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커서 소개드립니다. 표는 생략했습니다. 한글 파일은 군축 자료실에 올려두겠습니다.

서 론

상호방위조약 체결 50년이 지난 오늘날 한미동맹은 전환기에 처해 있다.  미국은 대중 견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지역동맹을 원하는 한편, 보다 대등한 동맹관계를 원하는 한국은 또한 동맹이 한반도의 안보에 국한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반미감정이나 안보의식이 해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과거 어려웠던 시기에 전적으로 한미동맹에 의지했던 ‘무조건안보’에서 이제는 군사주권이나 대등한 한미관계를 포함하여 이른바 ‘안보의 질’도 추구하는 의식의 성숙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미국의 주한 미군 재배치 및 감축계획 발표는 한국민의 안보의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국민의 상당수가 주한미군 재배치나 철수 이야기만 나오면 불안해 하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계획은 한국군의 방어능력에 대한 신뢰와 GPR이라는 새로운 국방정책에 의거한 것이지, 한미관계의 변화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반미정서를 지켜본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내지 재배치계획을 발표하면서 한국민들의 대미 의존심리를 십분 활용하였다.

오늘날 자국의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자력국방’을 할 수 있는 국가는 거의 없다.  그러나 1970년대 시작된 ‘자주국방’에도 불구하고, ‘인계철선(trip wire)’ 역할의 주한 미 지상군을 근간으로 하여 한미동맹이 국가안보의 필수적이라는 뿌리 깊은 대미 안보의존의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최근 정부의 자주국방정책은 미군 재배치와 12,500명 감축에 대응하는 한국의 독자적인 전략기획 및 작전수행능력 배양보다는 미 첨단무기 구입이라는 군비증강책으로 변질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자주국방을 논의함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다.  한미동맹은 한미 우호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수단인 것이다.  또한 남북한의 화해협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사력균형(가능하다면 우위)을 통한 국가안보를 추구하는 비관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군사적 접근보다 군비통제 및 군축을 통해 ‘공동안보’를 모색하는 ‘포괄적 안보’ 접근방식이 탈냉전기의 시대적 요청이다.

남북한 군사력균형

국민들은 북한의 안보위협이 상존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주한미군 감축에 대응하고 자주국방을 구상함에 있어서 먼저 (남북한) 군사력균형을 새롭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국군은 교육훈련, 장비지원, 병참보급, 대비태세 등 조직적 역랑에서 세계적 수준으로서 인민군을 압도한다.  특히 최근 신기술(ET) 혹은 군사기술혁신(RMA)의 결과 정보화전력이 전력평가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력승수(force multiplier)가 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태적 분석의 기본 모델로 널리 이용되는 ‘란체스터 기하급수법칙’(Lanchester Square Law)도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화력×기동력×정보력’의 공식을 개념화한 것이다.  인민군이 기계화수준에 있다면, 한국군은 지금 C4I를 중심으로 한 ‘정보화’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정보화전력을 경시하고 단순화력을 중시한 ‘전력지수’가 부적절한 방법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주한미군이다.  1988년 기준 주한미군의 전력지수는 인민군의 5%(한국군의 8.3%)로 평가되었으나, 군사투자 재고는 1990년대초 159-160억불로서 국방부가 추정한 1990년 북한 투자비누계의 36.5%에 달하는 규모였다.  주한미군의 조기경보 등 정보화전력을 높이 평가하나, 이를 전력지수에 반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력지수는 또한 시간 개념이 배제된 일정시점 화력의 유량(flow, 電力의 KW)이지 지속성을 포함한 화력의 저량(stock, 電力의 KWH)이 아니다.

한편 군사력균형에 대한 동태적 분석은 전쟁/갈등의 시나리오에 의하여 결과를 예측하는 워게임(war game)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는 전투력의 각종 승수효과를 입력하고 교전쌍방의 사상자수 및 이에 따른 전선의 변화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정교한 워게임은 기밀로 분류되어 있으나, 통상적으로 기후·일기·지리·지형 등의 환경요인과 작전 임무, 공격·방어 간의 차이, 기습 효과 등 작전요인을 종합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경험은 산악과 구릉이 많은 한반도의 지형이 방어에 유리하고, 결정적인 병과는 포병의 지원을 받는 보병임을 일깨워준다.  ‘병력 대 공간의 비율’(space-to-force ratio)을 볼 때 전선이 정비되고 인접부대와 연계가 공고한 현재 남북의 대치상황은 한국전쟁 후반처럼 진지전이 될 것이다.  설령 인민군이 돌파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근접공중지원·이동식 대공방어·병참보급의 결핍 등으로 인해 소련식의 작전기동군(OMG)의 운용이 어렵다.  

한편 한반도의 상황에서 남한은 수도권이 DMZ에서 가까워 전략적 종심이 짧다는 약점을 안고 있어 기습에 의한 인민군의 전격전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인민군의 성공적 기습이나 화학전 감행은 ‘최악의 시나리오’로서, 남한의 성공적 방어를 위해 기습에 대비한 ‘조기경보’ 능력이나 대비태세는 충분하다.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전방의 보병군단들로만 공격을 감행해야 하기에 충격이 약하고, 돌파력을 위하여 제2선의 기갑/기계화부대를 동원할 경우에는 기습의 효과가 사라진다,  다만 수도권이 전선에 인접해 있어 북한은 장사정포와 같은 전술무기로도 수도권을 파괴할 수 있는 전략무기 효과의 이점을 누리고 있다.
군비투자는 군사력의 정태적 비교를 위한 보다 객관적인 척도이다.  국방부도 단순개수비교와 전력지수 외에 투자비누계, 즉 ‘군사자본재’(military capital stock) 비교를 이용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첫째, 한국군의 투자를 오랫동안 책임진 미 군원을 배제하고 ‘율곡사업’에 의한 전력증강계획만을 투자로 치부했다.  둘째, 북한의 국방비를 과대평가했다.  셋째, 군사자본재의 감가상각을 고려하지 않았다.  본 연구자는 ‘국방비+군원’을 총국방비로 규정하고, 북한의 총국방비를 여러 가지 가정하에서 추정하였다.  그 결과 연간 남한이 총국방비에서 1976년경부터, 그리고 투자비누계에서는 1980년대에 우위를 점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압도적으로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남한의 군비증강에 필적할 수 없었다.  경제쇠퇴 및 공산권붕괴에 따른 군사원조의 감축 때문에 1990년대 북한의 군비지출은 크게 감소하였다.  북한의 무기수입액은 1990년대 연평균 1억불 미만으로 급격히 축소되었다.  북한은 군사력의 현대화·정보화에 착수하지 못하였으며, 소련의 말기와 같이 각종 구식 무기를 비축해 놓았을 뿐이다.  더욱이 심각한 에너지난과 외화부족 때문에 노후화된 무기나마 효과적으로 운영유지할 수 있는 능력도 감퇴되었다.  그 결과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남한은 북한에 비해 잠재적으로는 물론 전쟁수행능력에서도 우위에 있다.  사실 남한은 근래 주변국의 잠재적 안보위협에 대처하는 미래지향적 군비증강도 도모하고 있으며, 계획중인 상당수의 첨단무기는 북한보다는 향후 일본 등 주변강국의 군사위협에 대비한 것이다.  주한미군 감축 결정은 이러한 군사력균형 판단에도 기초를 두고 있다.  군사력에서 남한이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부문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북한 따라잡기’ 식의 양적 증강에 치우치는 한편 미국에 의존하는 이른바 ‘독자적 전략기획 및 작전능력의 부재’일 것이다.

북한은 남한의 자본집약적 증강에 대처하여 병력증강이라는 ‘노동집약적 군비증강’을 추진했고, 최근에는 전쟁수행능력보다는 재래식 및 비재래식 대량살상/파괴무기 등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억지전력에 치중하는 등 ‘비대칭적 군비경쟁’으로 전환했다.  북한은 최후수단으로서의 비재래식 억지능력 외에도 적어도 남한에 대하여는 또 다른 재래식 억지력을 지니고 있다.  북한은 특히 제1차 핵위기 이후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 즉 수도권을 타격할 수 있는 240mm ‘방사포’와 170mm 자주포 등 500문의 대구경포대를 전진배치하고 있다.
요컨대 남북한간에는 남한의 재래식 ‘전쟁수행능력’ 우위 대 북한의 ‘억지력’이라는 ‘비대칭적 군사력균형’ 혹은 ‘위협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정보화를 중심으로 하는 남한의 재래식 군사력증강이 대북 억지의 측면에서 큰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예컨대 서울을 타결할 수 있는 장거리포대 및 미사일의 위협은 군비증강만으로써 해소하기 어렵다.  모든 북한의 위협이 제거된 ‘절대안보’란 달성하기 어렵다.  절대안보를 위한 남측의 군비증강은 북으로 하여금 더욱 다량의 값싼 공포무기를 갖추도록 부추기게 된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주한미군은 1953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하여 한미군사동맹의 상징이자 전쟁억지력의 핵심으로서 한반도의 안보와 동북아의 안정에 필수적인 요인이 되어 왔다.  앞으로 주한미군의 역할과 관련하여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한미동맹체제의 장래 비전을 정립하는 일이다.  한미 양국은 동맹의 성격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세계전략 및 아시아전략과 한국의 국지전략을 조화하여 양자간에 일치된 이익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과거 수차의 주한미군 감축이 모두 미국의 일방적 결정에 따라 추진되었다.  앞으로는 이 문제를 한미 양국이 긴밀한 협조에 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최근 논란이 된 미 지상군 재배치 및 감축은 한국의 안보에 큰 영향이 없다.  한국군의 증강과 경제난에 따른 북한의 군사력 쇠퇴로 인해 주한 미군은 ‘과잉 억지력’의 측면이 강하게 되었다.  또 병력은 철수하더라도 장비는 ‘사전배치’ 상태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서울을 겨냥하는 북의 장거리포대에 대한 대응책 외에는 한국군의 대체전력 확보 논의는 시급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오히려 한국군의 자주의식 배양과 독자적인 전략기획 및 작전수행능력 제고의 기회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남북한 군비통제 및 군축을 추진하는 기회로 선용할 수 있다.

일부 국민들이 우려하는 군사안보위협이나 나 체제불안 등 ‘안보공백’은 ‘마음 속의 공백’이다.  물론 국가안보에는 심리적인 차원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허위의식은 과감히 불식되어야 하며, 만약 북한측이 남한의 능력이나 의지를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면 현실을 보다 직시하도록 해야 한다.

향후 한미동맹의 성격은 한반도 및 동북아의 정세와 밀접히 연관된다.  국가간 힘의 구도를 중심으로 향후 동북아 안보환경을 살펴보면, 비록 한국이 세계 12위의 중진 경제강국으로 부상했지만 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약소국이다.  남북한과 타이완 3약국이 높은 병력비율이나 군비부담을 유지하더라도 군사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균형자(balancer) 역할도 하기 어렵다.  동북아의 열강이 힘의 정치와 군비경쟁에 나설 경우, 그 최대의 피해자는 한국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국력신장과 이에 따른 중·일간의 갈등 및 나아가 미·중간의 패권경쟁은 한국의 군사안보전략에 시련과 도전이 될 것이다.  한국은 미·중간의 군사적 갈등이 발생할 경우 참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중국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발전을 위하여 미·일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참여하여야 한다.  중국이 2015-2025년경 경제총량에서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는 <표 2>의 전망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또 비록 경제총량에서 앞선다 할지라도 군사력에서는 여전히 열세이며, 보다 중요하게는 19세기 영국과 20세기 미국이 보여주듯이 경제생산성·과학기술의 우위·사회문화적 가치에서 다른 나라들을 이끌지 못한다면 헤게모니를 누릴 수 없다.
그러나 한·미동맹에 주로 의존하여 왔던 한국의 안보전략은 장기적으로 보다 다변적인 안보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은 남북한 및 동북아의 군비통제와 군축을 적극 주도하여야 하는 한편 주변국에 대한 최소한의 자위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잠재역량의 배양, 특히 연구개발 사업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한국이 앞으로 전개될 미중대결에서 균형자의 역할을 택하든가 혹은 중립국이 되는 개연성은 매우 낮다.  장기적으로 한국은 대중 갈등은 물론 통상압력이나 방위비분담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미동맹 및 주한미군에 대한 냉철한 비용대비 효과 분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주한미군 없는 한미동맹’은 얼마든지 가능한 대안이 될 것이다.

결 어

자주국방의 기본은 자주의식에 있다.  자주국방은 자력국방은 아니다.  자주국방의 요체는 대미의존을 극복함으로써 통일조국의 독자적이고도 평화지향적인 정책과 철학을 갖추는 것이다.  현재의 비대칭적 한미 동맹구도와 대미 안보의존 심리는 과도하다.  한국민과 정부 모두의 ‘위기관리’ 체제와 안보외교능력을 배양함으로써 대미의존을 극복해야 한다.  향후 한미 동맹체제, 특히 미군의 재배치에 따라 주한미군의 지위와 역할,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등 동맹군 지휘체계, 무기개발 및 구매 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시기가 올 것이다.  나아가 자주국방은 ‘주한미군이 없는 한국의 안보’를 구상하고, 궁극적으로는 한미동맹의 유용성도 냉철하게 재검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주국방은 남한이 독자적인 전쟁억지력을 확보해야 하나, 이와 동시에 북한의 안보불안감을 자극하여 새로운 군비경쟁을 야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북한은 군사대립과 군비경쟁을 극복하고 긴장완화와 신뢰구축 및 군축을 통한 ‘공동안보’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대승적인 정치적 해결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남북한의 독자적인 안보정책은 비생산적인 적대와 군비경쟁을 낳을 뿐, 결국 각자의 안보를 증진시키지도 못했다.  GDP 15-20%로 추정되는 북한의 군비지출에 비해 3% 미만인 한국의 군비부담이 높은 편이 아니자만, 근비증강에 이미 한계효용의 체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성 공단 사업의 진척과 2004년 6월 장성급회담의 성과를 바탕으로 장기적으로 군비통제 및 군축이 진전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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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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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비핵화는 '말보다 실천'이 관건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3차 6자회담이 지난 6월 26일 베이징에서 막을 내렸다. 과연 이번 회담의 성과는 무엇인가. 북핵 문제 해결은 가시권 안에 들어온 걸까.


북한 핵포기 선언 용의 시사

6자회담 참가국들은 대체로 '의미있는 진전'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북한이 2003년 1월 NPT(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 북핵 공방이 재연된 이후 처음으로 핵동결을 위한 행동계획이 마련되고 논의된 게 이런 평가의 근거다. 중국 외교부의 장치웨(章啓月) 대변인은 "(북핵 동결과 보상에 관한 논의가)실질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북핵 공방'이 3차 6자회담에 들어 실질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음을 역설한 것이다. 한국측 대표단장인 이수혁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당사자들이 안을 낸 것은 처음이고 이견 차이도 크다"면서 "논의해볼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됐음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3차 6자회담을 정리하는 의장성명에서도 실질적인 성과에 대한 기대감이 배어나온다. 의장성명에서도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말 대(對) 말'에서 '행동 대(對) 행동'의 단계적인 과정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했다"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실무그룹회의를 열어 비핵화를 위한 첫단계 조치들(First steps)의 범위와 기간, 검증, 상응조치를 정의한다"고 사후 계획도 밝혔다.

이런 대화 분위기 조성은 무엇보다 미국이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의 핵폐기)원칙'을 탄력적으로 적용한 데 기인한다. 미국은 'CVID원칙' 대신 '포괄적 비핵화'라는 용어를 쓰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측 수석대표인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최종목표는 CVID이지만 중요한 것은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접근법"이라고 강조했다. 실질적 '비핵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전술적 후퇴란 의미다. 결과적으로 "만약 미국이 CVID를 고집한다면 어떤 결과물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6월 15일 외무성 논평)해온 북한의 체면도 살려준 셈이다. 미국의 융통성에 북한도 즉각적으로 호응했다. 북측은 "조선반도의 비핵화가 최종목표임을 밝힌다"면서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면 모든 핵무기 관련 계획을 투명성 있게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조건을 달았지만 핵포기 선언 용의를 시사한 것이었다.

북핵 타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북핵 해결을 위한 제안에서도 북한과 미국이 다른 화법을 쓰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하나같이 조건부 수용론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먼저' 이뤄지지 않으면 협상의 여지는 없다"고 분명히 선을 긋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6자회담의 목표는 한반도 비핵화 실현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선 북한의 핵폐기가 이뤄져야 한다. 첫 단계가 핵동결이다. 핵동결은 검증이 수반된다. 이것이 바로 6자회담의 중요한 의제다. 비핵화 실현을 위해서 핵시설 사찰 범위와 방식이 주요 논란거리다. 핵동결에 따른 상응조치도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 미국과 북한 사이의 '모순'이다. 북한과 미국이 제시한 해결방안을 비교해보면 이런 관계는 보다 분명해진다.

우선 핵사찰 범위와 방식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핵개발 계획을 동결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북한은 이에 반대한다. 평화적 핵활동은 동결대상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북한은 종전엔 핵위기의 출발점이 된 고농축 우라늄의 존재사실 자체를 부인해왔다.

다만 북한은 5MWe 원자로와 더불어 방사화학실험실(핵재처리시설), 이 실험실에서 추출한 플로토늄을 동결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나름대로 성의를 표시했다. 북한은 그동안 이 부분은 동결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HEU) 핵개발 계획을 동결대상에 포함시키지 않고, 평화적 핵활동은 동결대상에서 제외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협상 진전을 막을 수 있는 요소다.  북한이 HEU계획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 미국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핵동결 검증방법도 논란거리가 될 전망이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에 반대하고, 6자회담 참가국에 의한 사찰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북한은 IAEA 시찰의 근거가 되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다시 가입하지 않고, 핵동결에 대한 검증을 받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항구적으로 핵활동을 감시받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 제한적으로 핵사찰을 수용하겠다는 계산이다. 반면 미국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IAEA 사찰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제안은 북한 의지 시험용?

북한은 핵동결 대가로 요구한 보상안도 만만치 않다. 2백만㎾ 상당의 에너지는 열량 기준으로 중유 4백만t에 해당한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이 연간 제공했던 중유 (50만t)의 8배 규모다. 북한의 요구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제공을 약속한 경수로 발전소 2기의 발전량에 해당한다. 미국의 참여없이는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규모의 에너지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을 제외한 한-중-일-러가 에너지를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대신 보상안으로 ▲테러국 제외 ▲경제제재 완화 ▲외교관계 정상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타결이 불투명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미국이 요구한 핵폐기 입장을 '동결과 보상안'의 실시 뒤에나 가능하다고 밝힌 점은 북핵협상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미국은 북한이 핵폐기 입장을 먼저 밝혀야 하고, 또 핵동결은 핵폐기의 일시적 과정이 돼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6자회담의 결과가 북한과 미국의 외교적 간격을 좁혔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뒤늦게 제기되는 이유다.

여기에서 정작 궁금증을 낳게 하는 것은 미국의 태도다. 미국이 북한에 제시한 제안 내용은 사실상 한국안을 상당히 존중한 것이다. 다만 핵동결 기간과 관련, 완전한 핵폐기 준비기간으로 '3개월 이내'라는 조건을 달았을 뿐이다. 켈리 차관보는 "미국안은 한국안을 기초로 만들어졌다"면서 "단 핵폐기를 위한 사전 준비기간은(동결기간)은 3개월 정도로 짧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유연한 태도 변화는 북핵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설득과 한반도 주변의 압력이 주효한 것일까. 미국의 제안은 북한의 핵폐기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용이라는 측면도 있다고 미국 관리들은 전한다. 1, 2차와는 달리 3차 6자회담에서 대표단의 본국 브리핑조차도 중국 현지로 자리를 옮겼다. 이 의미는 종전의 협상전략과 전혀 변화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뉴스메이커 5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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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처를 밝힌다는 게, 깜빡했네요.^^
[뉴스 메이커]에서 퍼왔습니다.
 

프랑스 석학 자크 데리다 강연회 현장 중계
‘말’이 배반한 진실을 캔다

ⓒGAMMA
‘소유권 없는 텍스트의 저자’로 유명한 자크 데리다는 말과 글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독자에게 ‘전이’한다.
지난 6월9일, 프랑스 동북부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마르크 블로흐 대학의 한 강의실. 강의실에 10여 분 늦게 나타난 강연자는 우선 급한 대로 문가에 놓인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한 교수가 이 날 수업 내용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던 터였다. 책상에 쭈그리고 앉은 이는 다름아닌 자크 데리다.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에 자신의 권위를 각인한 해체주의의 거장이다. 이 날 강연의 주제는 ‘자크 데리다 주변에서’였다.

곧바로 한 여학생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이 날 초청 강연자가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철학계의 거두인 만큼 거창한 소개가 있을 법한데 생략. 문간에 앉아 있던 데리다는 얼른 가방을 뒤져 수첩을 꺼낸 뒤 학생의 말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드나들어 정신 없고 옹색한 자리인데도 데리다는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중간에 누군가 귓속말을 건넨 뒤에야 그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런데 하필 그가 앉을 자리는 여러 사람이 일어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계단 강의실의 긴 의자 한 구석. 그는 훌쩍 의자 등받이를 뛰어넘어 빈자리에 착지했다. 순간 좌중에서 웃음이 일었다.

‘해체’는 그의 텍스트에서만 아니라 이미 그의 몸짓에서, 그가 참석한 수업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거추장스런 의식과 절차를 해체한 것이다. 주최측도 마찬가지였다. 초대된 인사를 위해 굳이 따로 좋은 자리를 마련하거나 챙겨주지 않았다.

무신경은 자유로움이었다. 적어도 오늘날 프랑스 대학생이라면 데리다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의자 등받이를 뛰어넘었을 때, 1968년 이후 프랑스 사회에 스며든 ‘반권위’에 탄복해서 웃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젊은 날 한때 지네딘 지단 같은 축구 선수를 꿈꾸었던 73세 노인의 놀라운 운동 신경에 감탄하며 웃었을 것이다.

이 날 강연에는 학생과 선생이, 저자와 독자가 따로 없었다. 자크 데리다는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였다. 아니 듣기 위해 말하는 자였다. 오전 11시30분부터 시작해 저녁 7시30분까지 계속된 이 날 강연의 주요 발표자들은 그의 쟁쟁한 동료 철학자들이 아니라 데리다를 공부하고 데리다를 배우려는 학생들이었다.

석사 및 박사 과정 대학원생 4명이 높은 강단에 올라 서로 돌아가며 주제를 발표했고, 데리다는 이들의 발치 아래에서 그 어떤 학생보다 열심히 발표를 받아적었다. 그의 말마따나 ‘소유권 없는 텍스트’의 작가, ‘쓰되 내것이라고 굳이 서명하지 않는’ 작가 자크 데리다와 그의 철학이 있을 뿐이었다. ‘네가 데리다를 알아?’라고 누가 딴죽을 걸고 이죽거리겠는가.

“얼굴보다 글이 낫다”


ⓒ류재화
지난 6월 초순 자크 데리다를 초청해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대화’라는 강연회를 개최한 작은 서점 클레베(맨 위). 위는 서점에 쌓여 있는 자크 데리다의 저술들.
자크 데리다의 이 날 강연은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대화’라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다. 첫날은 고등학교 학생·교사 들과 함께 ‘가르치다’와 ‘전수하다’ 개념을 놓고 토론했다. 데리다가 개인적으로 갖는 두 가지 고유한 경험, 즉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자 책으로써 무엇인가를 ‘전수’하는 저자로서의 경험을 토로하며, 말과 글의 경계에 관한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일방적 전달 대신, 그는 ‘전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저자란 텍스트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개념이 도출되었다. 항상 무엇인가 벌려진 틈을 찾는 그의 철학적 변주는 ‘해체’의 가장 원천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자신이 하는 강연의 대부분을 미리 글로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가 행한 강연과 심포지엄은 현장에서 녹음되어 바로 출판된다. 그의 저서가 100 권이 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트라스부르 시와 클레베 서점이 함께 주관하는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대화’는 몇몇 테마를 가지고 매달 다양한 작가들이 독자들과 대화하는 프로그램이다. 클레베 서점은 시골의 한 작은 서점이지만 단순한 서점은 아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이 서점에는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방이 있다. 이 방을 르네 지라르·레지스 드브레·르 클레지오·아멜리 노통·줄리아 크리스테바·아시아 제바르·아민 말루프 등 프랑스 인문학을 대표하는 쟁쟁한 인사들이 다녀갔다.

자크 데리다는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의 책에도 사진을 거의 넣지 않는다. 사진거부증에 대해 하도 많은 질문을 받은 터여서, 데리다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얼굴보다 글이 낫다는 판단에서다”라고 농을 친다. 사진 자체를 싫어한다기보다 ‘저자’ 개념에 대한 각별한 철학이 있는 것이다.

독일과 국경을 맞댄 스트라스부르는 인구 30만이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지만 유럽의 심장부 구실을 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입법·사법 기관 및 유럽 인권위원회가 모두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자크 데리다가 결성한 작가국제회의와 철학자국제회의 사무실도 모두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스트라스부르 시가 내놓은 각종 안내 책자를 보면 네거리·교차로라는 뜻의 ‘스트라스부르’를 유난히 강조한다. 갖가지 이질적인 사고와 철학이 만나는 교차로 역할을 하고 있거나, 해야 한다는 뜻이다.

데리다는 스트라스부르가 ‘의회’의 도시라는 점을 부각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밑줄을 긋는 ‘의회(parlement)’란 의원들의 집무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이 서로 부딪치고 논박되는 ‘말하는(parler/parlementer)’ 공간이라는 의미다. 어떤 한 단어의 이면에서 철학적 주제를 곧잘 이끌어내곤 하는 자크 데리다는 일반 시민들과 가진 토론회에서도 스트라스부르를 은유해 자신이 최근 강조하는 ‘주도권(주권)’ 개념을 언급했다. 즉, 무엇인가 ‘교차’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도권이란 어느 누구의 일방적인 ‘주도권’이 아니라 상호의 적 혹은 상호 교섭자가 동시에 갖는 주도권을 뜻한다. 1인이 갖는 주도권이 아니라, 2인이 동시에 갖는 주도권이 현실 정치에서 가능할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 유럽과 미국 문제, 세계화 문제 등을 바라보는 그의 정치적 견해도 이 ‘주도권’ 개념을 중심으로 선회한다.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이 뜸했던 자크 데리다가 최근 다시 바빠진 것은 9·11 테러 이후 세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독일의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와 나눈 대담집 <9·11이라는 개념>이 최근 프랑스어판으로 출간되었는데, 데리다는 9·11을 어떤 ‘사건’이 아니라 ‘개념’이라고 정의한다. 9·11 테러라는 재앙적 사건은 그것이 과거가 되면서 트로마티즘(외상)을 유발한다. 그러나 9·11은 미래에서 오는 트로마티즘이다. 무엇인가 더 오리라는 것이다.

불가능의 가능성 역설하는 ‘마지막 검객’

알제리계 유태인인 데리다는 반유태주의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칼날을 들이댄다. “오늘날 가장 참아줄 수 없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은 이스라엘 샤론의 정책을 더 이상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유태주의만 문제 삼지 반유태주의가 왜 생기는지 자성하지 않는 미국과 시나고그의 지지를 받아 이스라엘 정치는 더 공고해지고 있다”라고 그는 일갈한다.

최근 데리다는 ‘문화와 독립’이라는 프랑스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심하게 말하면 냉전 시대가 오히려 나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늘날의 세계는 최악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트랑작시옹(교섭·transaction)’이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그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도권이란 단순화하면 교섭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다”라고까지 말했다. 그가 말하는 트랑작시옹은 깃발을 내리고 투항하는 식의 교섭이 아니다.

아카데미즘과 권위 체계에 정면 공격을 가했던 1960년대의 ‘검객들’(라캉·알튀세르·푸코·바르트·들뢰즈 등)이 모두 사라진 지금, 자크 데리다는 그 마지막 생존자로서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시대적 예언자도, 메가폰을 들고 외치는 ‘사르트르’도 아니다. 다만 그는 회의하고, 주저하고, 우회하며 끝없이 ‘진실’을 찾아 나서고 있을 뿐이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더듬거리면서라도 끝없이 파고들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우리가 파야 하는 우물은 ‘바닥 없는 우물’일 수 있다.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 2004/07/08 767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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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7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의 근황을 전해주는 반가운 기사가 있어서 퍼왔습니다. 작년 말 데리다가 오늘내일한다고 해서(실제로 프랑스 신문들은 데리다 추모 특집호를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건강을 되찾았군요.
한 가지 더. [법의 힘]은 다음 주 월요일 쯤 출간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알라딘에까지 이 책이 언제 나오는지 문의를 하셨다고 하는데, 이처럼 늦어져서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마침내 출간된다는 소식이 와서, 저도 오랜 짐을 벗게 되어 후련하기 그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