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과 극단의 피흘리는 공존

제국주의와 테러가 상부상조하는 ‘폭력의 질서’… 외부의 극단주의는 내부의 민주주의도 파괴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김선일씨의 피살 소식이 전해진 6월23일 새벽 3시. 텔레비전을 통해 김씨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회사원 정기호(32·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씨는 분노조차 치밀지 않았다. 함께 있던 친구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는 그저 멍한 무기력에 사로잡혔다. 고개를 떨군 김선일씨의 모습도 가슴 아팠지만, 핏발 선 목소리로 성명서를 읽는 테러리스트의 모습이 가슴을 후벼팠다. 그는 “테러리즘을 결코 지지하지 않지만, 이슬람 저항세력을 미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 생각해왔다”며 “참수 소식을 접하면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동정마저 거두게 됐다”고 말했다.


△ 공격당하는 바그다드. 한국도 파병 고수를 통해 극단주의 세계의 동조자가 됐다.(사진/ GAMMA)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세계는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끔찍한 질서의 체제였다. 부시라는 악의 축과 테러리즘이라는 악의 축을 중심으로 피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암흑의 세계였다. 양극의 극단주의가 만들어내는 폭력의 질서 앞에서 절망했다. 그리고 자문했다. ‘도대체 누가 김선일씨를 죽였는가?’

“이라크인들이 가장 큰 피해자”

같은 날 오후 7시께 정씨는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김선일씨 추모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집회장을 들어서는 순간, 피켓에 적힌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부시와 노무현이 김선일씨를 죽였다’. 명쾌한 논리였다. 어머니와 함께 걸어가던 꼬마가 피켓을 쳐다보며 물었다. “엄마, 정말 노무현 대통령이 죽였어?” 어머니는 대답을 하는 대신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씨는 그 아이가 던진 ‘순진무구한’ 질문을 옆에 있던 시민사회 활동가인 친구에게 다시 던졌다. “미국의 책임만을 묻는 것도 극단주의 아니냐?” 친구는 “물론 테러도 용납할 수 없다”며 “테러리스트에게 온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호소할 대상이 노무현 정부와 미 대사관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부시 책임론’이 터져나오는 집회장 바깥 세계에서는 ‘테러 보복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부시와 노무현을 미워하거나 테러리스트를 증오하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부시의 제국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는 ‘적대적 상호 의존 관계’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파견하는 ‘종군문인’의 자격으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다녀온 소설가 오수연씨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 초기만 해도, 테러리스트는 이라크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오히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선동만을 일삼는 ‘우스꽝스러운’ 세력으로 여겨졌다. 오씨는 “당시 다수의 이라크인은 후세인의 반미 독재도, 사우디아라비아식의 친미 정권도 아닌 이라크인의 자존을 지키는 합리적인 사회를 바라고 있었다”고 전했다. 점차 미군의 점령군으로서 성격이 드러나면서 이라크인의 불만은 커졌고 극단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다. 오씨는 “김선일씨의 희생도 더없이 안타깝지만,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이 차단되고 목숨 건 투쟁의 외길로 내몰린 이라크인들이 가장 큰 피해자”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도 파병을 통해 미국의 극단주의에 힘을 실어줘 극단주의 세계의 동조자가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양 극단주의는 표면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적대적 상호 의존 관계’다. 부시의 제국주의 정책은 이라크의 테러리즘의 토대가 되고, 이라크의 테러리즘은 부시의 제국주의 정책을 강화한다. 실제 양 극단주의 세력은 곤경에 빠질 때마다 ‘상부상조’해왔다. 우선 알카에다의 ‘9·11 테러’는 이라크 침공의 명분을 제공했다. 최근에는 부시가 ‘9·11 보고서’로 궁지에 몰리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인 폴 존스를 참수해 다시 한번 대테러전쟁의 ‘명분’을 살려주었다. 부시는 알카에다와 후세인 정권 사이에 연계가 없다는 조사결과를 담은 ‘9·11 보고서’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 폴 존스가 참수당하자 부시는 침공의 명분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했고, 들끓던 미국의 이라크 철군 여론은 힘을 잃었다. 극단주의가 서로를 부추기면서 합리주의가 설 자리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알카에다는 부시 재선을 원한다?


△ 제국주의와 테러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룬다. 6월17일 부시-체니 진영 선거기금 모금 행사장에서 부시 대통령이 손을 흔들고 있다.(사진/ GAMMA)

테러리스트는 평화운동의 훼방꾼이다. ‘세계사회주의 웹사이트’(wsws.org)의 편집자 배리 그레이는 “(김선일씨를 숨지게 한) 살인자들은 잔혹한 학살 행위가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에 혼란의 씨를 뿌리게 될 뿐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이들은… 국제적 반전운동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성전)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집단이 목표로 삼는 것은 아랍 민중의 해방이 아니라 아랍 지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레이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아랍 세계의) 지배 엘리트를 다른 지배 엘리트로 교체하는 것이며, 이들이 대변하는 것은 아랍의 지배 계급 중 비교적 소외된 세력의 야망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였고, 일부 테러리스트는 아랍 지배층과 연계돼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알카에다는 부시의 재집권을 원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저항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미군이 이라크 민간인 수백명을 학살한 팔루자의 비극처럼 날마다 점령군이 폭력과 살상을 자행하는 상황에서 점령군을 향해 총을 드는 것을 똑같은 폭력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경우처럼 이스라엘 정규군의 중무장과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빈곤한 화력을 같은 ‘폭력’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명분과 무장력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의 저항폭력은 우발적인 저항이 아니라 체계적인 질서가 됐다. 당초의 저항정신은 상실한 채 폭력의 질서에 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평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테러는 쉬운 방법이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평화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테러리즘이 제국주의를 몰아내는 데 성공할지라도, ‘해방된’ 국가 안에서 국가주의는 신성시되고 민주주의는 압살당하기 십상이다.

테러와 대테러는 마찬가지 살상

테러리즘은 피의 악순환을 불러온다. 미국은 김선일씨가 참수당한 뒤, 이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저항세력의 근거지인 팔루자를 공습했다. 미군은 팔루자에 김선일씨를 참수한 테러집단인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의 은신처가 있다고 주장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았다.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는 또다시 터키인을 인질로 잡고 참수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이들의 ‘보복’은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인 박순성 동국대 교수는 “참수 장면을 공개해 ‘충격’을 줌으로써 파병국에 ‘공포’를 조장하는 행위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작전명인 ‘충격과 공포’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테러리스트는 테러의 충격을 통해 파병국의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내 아들은 못 보낸다”는 파병국의 가족주의를 자극해 여론을 극단의 분열로 몰고 가려는 의도다. 테러를 통해 그들이 얻으려는 것이 ‘파병 철회’라면, 폭력의 질서 속에서 파병 철회를 외치는 평화운동마저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외부의 극단주의는 내부의 민주주의도 파괴한다. 9·11 이후, 미국의 애국주의는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검열을 강화했다. 테러의 여파로 2001년 제정된 미국의 ‘애국자법’(Patriot Act)은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했고, 전화와 전자우편의 감청을 광범위하게 허용했다. 한국에서도 제2의 국가보안법이라고 불린 ‘테러방지법’의 입법 시도가 있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득세는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옥죄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슬람 여성들을 차도르 안에 가두고, 동성애자를 돌로 쳐죽이고, 민주주의를 압살했다. 한국에서도 김선일씨가 참수당한 다음날, 이슬람 사원에 협박 전화가 걸려오고, 취객의 난동이 벌어지는 등 이슬람에 대한 혐오 범죄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다. 한국 내 이슬람 이주노동자들의 삶도 위태로워질지 모른다.


△ “정부와 부시가 김선일씨를 죽였다.” 6월26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린 촛불시위.(사진/ 박승화 기자)

하지만 테러리즘에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폭력의 질서를 해체하지 못한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바뀌지 않으면 이슬람 테러리즘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박순성 교수는 “폭력 질서의 근본 원인 제공자인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중간 원인 제공자인 테러리스트만 비판하는 것은 비겁한 논리”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 뒤, 미국에 대한 비판 없이 “테러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심지어 테러에 대한 보복론까지 판치고 있다. ‘테러리스트를 테러하자’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대테러전쟁을 역설하는 부시의 논리와 똑같다.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는 “부시의 ‘대테러’는 전쟁을 불러와 테러보다 더한 인명 살상을 낳았다”며 “폭력의 관점에서 보면 테러와 대테러는 마찬가지 살상 행위”라고 지적했다.

파병 철회로 악순환 끊어야

극단의 세계에서 이성이 발붙일 공간은 협소하다. 하지만 박순성 교수는 폭력의 질서를 넘어설 희망이 여전히 있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80년대 초 미국 패권주의가 저물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했지만, 80년대 말 미국 패권주의는 다시 부활했다”며 “거꾸로 지금은 미국의 패권주의가 영원할 것 같지만 머지않아 제국의 몰락이 찾아올 것”고 낙관했다. 그는 세계 시민사회의 반전 여론과 유럽 국가의 견제를 낙관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또 “테러리즘은 역사적으로 패배했다”고 덧붙였다. 1960년대 세계를 뒤흔들었던 적군파의 테러도, 70~80년대 여러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던 소수민족 분리주의자의 테러도 결국에는 잦아들었다는 것이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역설적으로 이라크에서 미국의 실패는 세계에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며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있지만, 아주 완만하게 이성의 힘이 승리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6월22일 발표된 민족문학작가회의 긴급성명 ‘이라크 파병을 철수하라-전쟁도 테러도 우리는 싫다’는 폭력의 질서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라크 사태가 증명하는 것은 이 지구상의 어떤 전쟁도 국지적 분란이 아니라 모든 국가와 인류 전체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전쟁 범죄라는 뼈아픈 진실이다. 우리는 이 시대 인류의 불신 체제가 연속적으로 만들어내왔고, 앞으로도 만들어낼 이 전쟁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어느 날 문득 폭력의 질서가 내 삶을 침탈할지도 모른다. 김선일씨의 죽음처럼. 그래서 파병 철회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일상의 평화를 지키는 절박한 행동이다. 피로 물든 극단주의 세계의 동조자가 될 것인가, 무자비한 폭력의 질서에 저항하는 시민이 될 것인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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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국가의 품격을 찾을 때다

송두율 교수 사건을 재판하는 서울 고등법원 항소심 판사 제위 귀하,
송두율 교수 기소 업무를 최종 주관하는 강금실 법무장관 및 송광수 검찰총장 귀하,
송두율 교수 사건을 지켜보는 대한민국 시민사회 시민 여러분,

우리 한국 철학인들은 재독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뮌스터 대학 송두율 교수가 작년 2003년 9월, 37년의 망명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국한 이래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말없이 주시해 왔습니다.

사실 이런 긴 방관은 그가 당한 불행하고도 부당한 고난에 비추어보면 참으로 무책임하고도 부적절한 처신입니다. 무엇보다 송 교수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한국 철학계 전체를 망라하는 한민족 철학자 연합대회의 공식 초청이었음을 감안하면 한국 철학계가 무관심 속에서 그의 고통을 방관했다고 지탄받아 마땅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국 초기 관계 당국의 조사 과정에서, 그의 지인들조차 몰랐던 과거 행적이 알려지면서 한국 지식인들과 일반 대중들 사이에 도덕적 실망감과 책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 때 우리 철학계는 송두율 교수와 더불어 사회적 견책을 같이 받는 심정으로 그 광적인 비방과 중상을 감내했습니다. 한 인간의 도덕적 실책에 편승하여 실정법의 이름으로 권력의 폭압을 가하라는 수구 언론의 비열한 선동주의를 통해서나마 도덕적 실망이 달래지길 바랬던 것입니다. 그것은 송두율 교수 개인이 감내해야 했던 윤리적 몫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민주화되고 있는 우리 국가의 법 기구가 나서서 냉철한 이성으로 송두율 교수의 삶과 그의 인간적 성과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민주화된 우리 국가의 품에 포용하는 조치를 취해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인권 기구, 국제연합 그리고 무엇보다 전세계에 산재한 우리 철학계의 외국 지성인 동료들이 한국 관계 당국에 간곡한 구원 요청을 제출하고 우리 철학계의 침묵을 질책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인내성을 갖고 대한민국 시민과 법기구의 민주적 양식(良識)을 우선적으로 존중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4년 3월 30일, 송 교수를 겨울 냉기가 몰아치는 독방에 5개월 넘게 감금하고 난 뒤 나온 1심 판결은 단지 송 교수의 신체와 그의 정체성을 위협에 빠트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그렇게 단죄하는 것을 허용한 이 국가의 품격을 심각하게 실추시켰습니다. 우리의 철학적 양식으로 보기에 대한민국 국가는 송두율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낙인찍음으로써 자기 손으로 제 품격을 망가트리는 오류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어느 면에서 송두율 교수 개인보다 이 대한민국 국가의 품격과 우리 자신의 인격이 위기에 빠지는 것을 구하기 위해 다시 한번 궐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1심 재판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에 강력한 의문과 규탄을 제기합니다.

1. 우선 우리는 1심 재판부가 송두율 교수의 제반 활동과 관련하여 양심과 사상의 문제에 관한 법적 판단에서 가장 중시해야 하는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을 입증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고 마치 송두율 교수의 행적이나 사상’때문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북한으로부터 우리 국가에 위협이 오는 것처럼 단정한 그 무분별한 판단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습니다.

   한 개인의 정신적 활동의 자유 및 그 제한의 조건과 관련하여 여러 판례를 통해 입증된 가장 적절한 규정을 담았다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요하네스버그 원칙> 제6조는 한 국가의 체제를 가장 극렬하게 비판하고 부정하는 사상을 표명하고 실천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경우가 아니면 절대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즉 그런 사상이 1)‘급박한’imminent 폭력의 사용을 선동하려고 의도한 경우, 2)그로 인해 ‘실제로’practical 폭력이 유발되리라고 판단되는 경우, 3) 이런 사상이 그와 같은 폭력이 발생했거나 발생할 조짐이 있다는 사실과 ‘직접적인’immediate 관련이 있는 경우에 한해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송두율 교수의 사상이나 학문, 또는 기타 북한을 드나든 행적이 급박한 폭력의 사용을 의도한 것이거나, 그런 폭력을 실제로 유발하였거나 유발할 조짐이 있던가, 아니면 북한에서 유발했다고 믿어지는 폭력 사태와 즉각적인 관계가 있다고 입증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송 교수의 행적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 체제 또는 그와 관련된 국가 활동이 명백하게 저해받을 정도로 위협받았던 경우가 현존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현행 <국가보안법>은 그 제1조 제1항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 규제 대상으로 삼으며, 특정 활동을 이런 반국가활동으로 해석함에 있어서 엄격한 해석을 의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찰에서 있는 대로 추적해 드러낸 송두율 교수의 37년 망명 생활을 샅샅이 훑어보더라도, 그가 노동당에 가입한 것까지 포함한 그 어떤 활동도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유신과 제5공화국에 걸쳐, 그의 귀국으로 인해 새로 드러난 북한과의 과거 접촉 활동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북한의 사회주의나 주체사상체제보다는 오히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복원시키는 데 유익하게 작용했던 활동을 더 많이 한 것으로 인식됩니다.

2. 무엇보다 우리는 학문을 전업으로 하는 철학자들로서 1심 재판부가 학문적 활동의 비판적 전문성 및 학문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진리 확정의 합리적 과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송두율 교수의 학술적 집필활동을 놓고 “순수한 학문활동의 일환으로 이러한 저술을 하였다고 볼 수 없고, 북한과의 의사 연락 하에 북한의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김일성, 김정일 체제를 선전할 목적으로 이와 같은 저술활동을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단정한 점에 관해 경악을 넘어 허탈함을 느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판결은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방법론이 “북한 사회의 결과물을 경험적으로 치우침이 없이 올바르게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북한사회, 김일성, 김정일을 미화, 찬양”하려는 의도에서 “분석, 평가대상에 대한 심한 편파성의 결과”로 나왔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재적 방법론은 남한의 ‘북한바로알기운동’을 겨냥하여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유포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채택된 선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정은 일단 학문적 논증 및 비판의 공동체 안에서 방법론이라고 고지되고 나면 그 방법론이 어떤 검증 절차를 거치는지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나온 그야말로 음모론적으로 굴곡된 피상적 추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1심 재판부의 피상적 이해와는 달리 학문세계에서 ‘방법론’은 연구 대상 전체를 샅샅이 보려는 관점에서 제시되지 않습니다. 방법론은 항상 그 방법을 통해 보고자 하는 대상의 특정 측면, 즉 특정한 학문적 문제 의식에 답을 줄 수 있는 부분을 보고자 해서 고안됩니다.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방법론은 외재적이거나 선험적 방법으로 볼 수 없었던 북한 사회의 부분, 그것도 중요한 부분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지, 북한 사회 전체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학문적 방법론의 숙명입니다. 따라서 어떤 연구 대상이든 한 방법론으로는 그 대상의 모든 측면을 볼 수 없습니다.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방법론은 북한 사회를 이해할 때 결여되어 있었던 그 사회 내의 행위 주체들의 동기연관, 그것도 그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동기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북한 지도층을 근접 관찰하고 그들과 비교적 솔직히 대담했던 결과적 정보들을 국내의 언론매체들을 통해 아주 정직하게, 그야말로 친북적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학문적 성과의 공개 원칙에 충실하게, 국내 독자들에게 공개했고, 이것은 당연히 한국의 학계에 찬반 양론의 담론장을 형성했습니다. 다시 말해 송두율 교수는 민주 사회에서 보장되는 학문적 검증 절차를 합리적으로 밟아나가고 있었고, 당연히 그 과정을 통해 내재적 방법론의 적용상의 문제점에서 내재적 방법론 그 자체의 문제점까지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지는 참이었습니다.

   학계에서 송두율 교수가 북한에 관해 공개한 정보들은 상당한 정확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면서도, 다른 그 어떤 방법론도 그렇지만, 완벽한 것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불완전성을 법적 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그것도 7년이나 징역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3. 우리는 송두율 교수의 저작물이 국내 주사파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때문에 한국 사회가 상당히 위기에 빠진 듯한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재판부의 판결을 보면서 한국 사법부의 일선 판사분들이 얼마나 한국 사회의 흐름과 두려울 정도로 차단되어 사회적 무감각 상태에 매몰되어 있는지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학생운동 및 그가 변혁 운동에서 주사파는 80년대 초 5공 군부독재체제의 폭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북한에 눈을 돌렸던 비뚤어진 기대 속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주사파 발생의 가장 결정적 계기는 폭력적 억압을 일상화시킨 결과 멀리 있는 북한 정권을 오히려 온정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전두환 정권의 공포정치였습니다.

4. 우리는 송두율 교수가 처음 자성적 성찰문을 발표한 작년 10월 2일부터 그 엄혹한 추위를 지낸 현재까지 일관되게 대한민국 헌법과 자유민주주의에의 충실성에 입각하여 모든 담론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재판부가 전혀 주목하지 않는 그 일방적 무신경에 분노합니다. 자존심을 가진 지식인이 공중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도 파괴되지 않은 자기 모습을 보여 주려고 분투하는 정경은 이 순간 우리 사회가 누리기에는 과분한, 인간 정신력의 또 다른 성과라는 점을, 바로 이런 점에 항상 유의하는 우리 철학인들이 주목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하는 것입니다.

송두율 교수의 범죄구성행위라고 하는 것들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분단체제 아래서 남한의 독재정권들이 북한보다는 남한의 국민들을 억압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며 통상적인 교류생활을 한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일상적 활동 범주들이 국가보안법에 반국가단체구성(3조), 잠입·탈출(6조), 회합·통신(8조) 등의 거창한 법률개념으로 채색되어 범죄구성요건으로 적시되어 있는 한 재판부는 그런 활동이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도 그런 활동을 범죄행위로 분류하는 거창한 재판 절차를 소모적으로 진행시켜야 할 것입니다.

현행 국가보안법의 취지를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더라도 송두율 교수의 범죄라고 되어 있는 모든 활동을 범법행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이런 우매한 법이 계속 존속되는 한 우리 국가의 시민의식은 계속 위축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 행위가 언제든지 범죄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국가의 언행이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국가의 품격을 찾을 때입니다. 이에 우리 철학인들은 항소심 재판부, 법무장관, 검찰총장, 그리고 시민사회의 시민분들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탄원합니다.

첫째, 재판부는 현행 국가보안법으로라도 송두율 교수를 무죄 석방하라.

둘째, 송두율 교수를 무죄 석방할 용기가 없으면 국가보안법의 유효성에 대한 국회의 토론 과정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불구속 재판하라.

셋째, 한국 사법기구로 하여금 계속 무의미하고 우매한 판결을 하도록 강요하는 국가보안법을 전면 폐지하라.


2004. 7. 15.

송두율 교수의 무죄석방과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를 요구하는 전국 철학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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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13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말씀드린 성명서 초안입니다.
저는 한두 개 문구의 내용에 동의하기가 어려워 아직 서명에 동참하지는 않았습니다(초안을 작성한 분들에게 수정을 요구했습니다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전출처 : 쎈연필 > 조까라, 마이싱이다!

조까라, 마이싱이다!

글 박민규_소설가. 1968년생. 소설 『지구 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등

 

1. 도대체 마이싱이란

학창시절 학교를 주름잡던 1년 터울의 선배가 있었다. 그 형의 별명은 ‘마빈 헤글러’였다. 실제로 머리를 빡빡 깎은 그에겐 언제나 화려한 소문이 뒤따랐었다. 즉 3대 1이라든지, 칼을 든 2명이 포함된 4대 1이라든지. 그러나 그 소문에 비해 펀치는 한결 부드러운 것이어서(맞아봐서 안다) 나는 그가 마빈 헤글러라기 보다는, ‘마빡 헤글러’일 뿐이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하루는, 그래서 넌지시, 담배를 피고 있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형, 지난 번에, 그러니까 4대 1 그거요 그거 어땠어요? 묵묵히 하늘을 응시한 채, 선배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건네왔다. 조까라, 마이싱이다. 북북, 꽁초를 담벼락에 부비며,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우선 말의 뜻을 짐작조차 못하겠거니와, 묘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과연 ‘마빈’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어쨌거나, 그런데 도대체 마이싱이란? 도대체 마이싱이, 뭐지? 나는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나는 작가가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하듯 그냥 어느 순간, 무작정 글이 쓰고 싶었다. 요약하자면, 나에겐 그것이 전부이다. 무작정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 것도 보름 전의 일이었다. 어디신가요? <대산문화>입니다. 요는, 젊은 작가의 변(辨)을, 듣고 싶다는 얘기였다. 평소, 이를테면 학술재단 같은 곳과 교류를 하면 작가로선 끝장이란 소신을 갖고 있었는데, 예, 예 잘도 대답을 하고, 쓰겠노라 동의를 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바로 그 순간 심하게 이 글을 쓰고 싶었고, 바로 그 순간 아무런 까닭도 없이 ‘조까라 마이싱’의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바로, 그래서다.  

2. 너가 당룡이냐

우선 나는, <대산문화>로부터 네 가지의 질문을 받았다. 해서, 짧게, 그것부터 답하고 보는 게 도리란 생각이다. 심사, 숙고 해보았지만, 4가지 질문 모두가 도무지 긴 대답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내 무식(無識)의 소산이거나, 정답이거나. 정답은 늘, 짧고 간략한 것이기 마련이라고, 나는 언제나 생각해왔다. ①자신의 소설이 지향하는 바는, 혹은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답. 모른다. 내가 소설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이, 나를 쓰고(用)있다. 그래서다. ②기존의 소설과 자신의 소설이 다른 점은 무엇인지? 답. 마치 ‘인류와 자신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의 질문을 받은 느낌이다. 나(내가 쓴 소설)는 유전자의 리바이벌에 불과할 따름이다. 흘러, 가자. 흘러가서, 전달, 하자. ③독자나 평론가들이 자신의 소설에 대해 오해, 오독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답. 누구에게나, 꼴린 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④자신을 비롯한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선배문인들의 평가(<대산문화> 2004년 봄호 기획특집 참고)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답. 수고하셨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도, 열심히 하겠다.

써놓고 보니, 마치 4대 1의 싸움이라도 한 듯한 기분이다. 그러니까 4대 1 그거요 그거 어땠어요? 묵묵히 하늘을 응시한 채, 나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건넨 건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대산의 질문들을, 나는 그런 분위기로 해석하고자 한다. 즉 70년대의, 이소룡 영화에서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너가 당룡이냐? 그렇다. 내가, 당룡이다.

3. 푸트웍 좀 해보자, 개새끼야

이른바 ‘등단’을 한 지, 이제 꼭 1년이 지났다. 소설이 무언지는 애당초 몰랐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생각이다. 그것이 나란 인간이다. 그냥 쓰고 싶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시간이, 없다. 오로지 그럴,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꼴린 대로 쓸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글을 쓰는 것인가? 그 이유를 나는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그러니까 돌대가리. 이, 마빡만 헤글러!

이유는 짜증이다. 짜증, 이라기보다는 하소연이고, 하소연, 이기보다는 외로움, 같은 것이다. 이런 얘길 할 수 있는 지면이, 도대체 없었다. 그래서다. 그래서 이것은 젊은 작가의 변(辨)일수도 있고(참, 어지간히도 젊다!), 변(便)일 수도 있다. 왜 그럴까? 이제 겨우 2권의 책을 냈을 뿐인데, 그리고 구만 리의 앞길이 남아 있는데. 바로, 그래서다. 이 구만 리의 앞길을, 또 다른 누군가가 밟고,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로선 길을 가야 할 이유가, 또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래서다. 문단인지 평단인지, 아니 세상이여! 우선 말하겠는데 제발 좀 문학의 위기, 소설의 위기라고 떠들지 마라. 호들갑 좀, 떨지 말아라. 나는 어디 핵이라도 떨어진 줄 알았다. 쉰 소리 하려면 집에서 쉬어라, 나오지 마라. 그것이 문학을, 또 우리를 도와주는 길이다. 단언컨대, 지금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가 아니다. 문학의 위기를 떠드는 놈들의, 위기일 따름이다. 아이고 귀야. 귀에 슨 녹슨 못을 뽑아내며, 나는 중얼거린다. 너무 그러니까 니들이 마치 ‘문학’ 같잖아? 니들이 ‘문학’이냐?

두 번째, 궁상 좀 떨지 마라. 즉 그것이 이곳의 풍경인데, 마치 위기론에 이은 예비군 훈련이나, 민방위 훈련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작가는 잡문으로 뺑이를 쳐야 하고, 또 그걸 당연한 걸로 생각한다(생각해야 한다). 안 팔려요. 안 팔리면 어쩌죠? 몇 푼의 계약금에도 손을 내밀기가 민망하고, 생활은 점점 좀스러워진다. 요는, 위기를 떠드는 놈들이 이 땅의 작가들을 자꾸만 작게 만든다는 것이다. 좀스럽고 비참하게 만들며, 왜소하고 말랑말랑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몇 푼의 선인세와 생활비에 손을 떨고 연연해야 하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 글이라면, 우선 나부터도 읽고 싶지가 않다.

세 번째, 근친상간 그만하자. 내가 볼 때 이 땅의 소설이 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각설하고 찢어지자. 그 동안 즐거웠다. 어찌나 문단속을 잘 했던지, 이곳에는 여지가 없다. SF도 추리도 공포소설도, 심지어 제대로 된 하이틴 로맨스도 있어야 정상이 아닌가? 아아 줄리엣, 우리 아버지들은 언제 죽을까? 오오 로미오, 오빠가 자꾸 나를 건드려요. 헤이 유! 근친상간이 바보를 만든다는 거, 꽤나 알려진 의학 상식 아닌가? 쪽 팔려, 박수 좀 치지 마. 어이, 저리 가! 접붙이지 마.

네 번째, 거 참 말 많네! 거 참, 말이 많다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이다. 말이 많은 건, 어쨌거나 말이 많은 것이다. 그뿐이다. 지금껏 나는 네 개의 질문을 받고, 네 개의 답변을 하고, 네 개의 푸념을 늘어놓았다. 요는 무엇인가? 나는 당룡이고, 그냥 날 내버려두란 얘기다. 어떤 면(面)에서 세상은 분명히 달라졌다. 네가 당룡이냐? 끄덕끄덕. 삼가 한수를 배우겠소. 오호라 학익(鶴翼)의 품세를, 그렇다면 용호(龍虎)의 권세로! 쿵후라는 이름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죽이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좋은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다. 문학이라는 이름만으로, 또 소설이란 이름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죽이던 시절이 있었다. 좋은 시절이었지만,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과거의 문학을 동경해 작가가 된 인간이다. 눈물이 날만큼, 그때가 그립다. 누군들, 품세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싶지 않으랴.

마치 문학처럼, 언제부턴가 복싱도 시시해진지 오래이다. 때문에 나는 이종격투기를 관람한다. 얼마 전 열린 이종격투기 대회에서의 일이다. 종이 울리자마자, KO로 승부가 난 경기가 있었다. 복서 출신의 패자는 습관처럼 푸트웍을 밟아보려다 불의의 기습을 당했다. 선공을 하지 말란 법은 없었지만, 뭐랄까 그런 기분이었다. 즉 삼가 한수를 배우겠, 에서의 ‘퍼벅’의 느낌. 정신을 차린 그의 표정에서 나는 그런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푸트웍 좀 해보자, 개새끼야. 수건을 던지지 마라 안젤로 던디(수많은 세계 챔피언들을 길러낸 많은 저명한 복싱 트레이너)여. 나 역시 푸트웍 한 번 밟아보는 게 꿈이다.

4. 조까라 마이싱!

세상은 나의 문파와 나의 품세 따위에 관심을 접은 지 오래이다. 작가로서, 이제 나는 실제로 충격을 주고, 파괴하고, 저것을 쓰러트려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 이 싸움은 더욱 실질적이고(비록 폼은 없어도), 냉정한 것이 되었다. 약속대련과 근친상간을 벌일 여유가, 나에겐 없다. 나는 실제로 강해야만 하고, 또 강해지고 싶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세계의 룰은 이 땅의 문학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어디 농업만의 문제이겠는가? 이제 이 땅의 문학은 제조업인가 서비스업인가? 텍스트와 번역의 댐이 언제까지 이곳을 지켜줄 것인가? 수입인가 내수인가? 질문은 끝이 없고, 간략한 정답은 보이지 않는다. 간략하게 - 나는 정말이지, 강해야 한다.

그래도 이 땅에 ‘작가’들이 있었다. 그래도 이 땅에 ‘소설’이 있었고, 나는 그 아름다웠던 싸움들을 가슴 속 깊이 저장하고 있다. 내게 힘을 주는 것은 바로 그들이고, 다름 아닌 그들의 소설이다. 경건하게, 나도 싸워나갈 것이다. 그 외의 문제라면, 몰라, 조까라 마이싱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느낌이지만, 어떤 면(面)에서의 세상은 또 분명히 좋아졌다. 지금 내가 쓰는 컴퓨터는 아폴로를 달에 착륙시켰던 컴퓨터보다 정확히 3배가 더, 뛰어난 것이다. 내 책상 밑으론 인터넷이 들어와 있고, 나는 더 이상 도서관이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뒤적이지 않아도 된다. 이런 환경에서 당신을 화성에라도 보내줄 만한 소설을 쓰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조까라 마이싱이다. 큐빅 퍼즐을 맞출 때의 요령으로, 어떻게든 그 좋은 면들을 나는 맞춰나가야 한다. 이 글을 쓰는 사이 시인 구상이 이 별을 떠났다. 구상 선생님 편히 잠드세요. 당신의 싸움은 아름다웠습니다. 저도, 힘을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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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13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까라 마이싱, 실로 오랜 만에 들어보는 욕이군요 ...
ㅋㅋㅋ(왜 웃음이 나오지? 비장한 글을 읽고^^)

조선인 2004-07-1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마이싱이 대체 무슨 뜻이에요?

balmas 2004-07-1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싱은 항생제를 가리키는 말인 것 같은데요. 특히 매독 같은 성병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항생제 ...
어릴 때는 뜻도 모르고 친구들끼리 서로 마치 노래가사의 후렴구처럼 주고받던 말인데 ...
ㅋㅋㅋ (또 웃음이 나오네)
 

 

“널 못 박다니” “저 땜에 불이익은”


△ 서울 대광고 류상태 교목실장은 예배를 거부하다 퇴학당한 제자 강의석군과 학교 밖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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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판] ‘퇴학’당한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얼굴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자책과 힘든 결정을 내린 ‘어린 제자’에 대한 대견함이 번갈아 지나갔다. 제자 역시 학교를 상대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스승이 내민 손이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11일 저녁, 경기도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학교에서 강제적으로 보게 하는 예배를 거부하다 제적당한 강의석(18·서울 대광고3)군과 강군의 스승인 대광고 교목실장 류상태 목사가 한자리에 앉았다. 지난 9일 강군이 기말고사를 치르다 퇴교당한 뒤로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자리다.

    류 목사는 강군이 제적된 지난 9일 학교 인터넷 홈페이지에 “강군을 제적 처리한 것은 헌법 정신을 위배한 것일 뿐 아니라 학교가 그토록 내세우는 설립 이념과 목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처사”라며 학교의 제적 결정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터였다.

    강군은 스승을 보자마자, “이번 일로 학교에서 불이익은 없었는지” 걱정부터 하고 나섰다. 류 목사도 강군의 까칠해진 얼굴을 보고 제자의 건강이 걱정된 듯 “밥은 잘 먹느냐”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가르치는 류 목사는 강군이 자신과 상의 없이 ‘일을 터뜨린 것’을 못내 아쉬워 했지만, “의석이가 결코 경솔하게 나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를 제기하는 절차와 방법은 잘못됐지만 종교의 자유라는 정당성은 의석이 손에 있다”며 강군의 태도를 옹호했다. 하지만 “학생 선택권이 없는 학교 역시 피해자일 수 있다”며, “종교 학교라는 큰 틀 안에서 조금씩 개선점을 찾아보자”며 강군의 이해를 구했다.

    강군도 스승의 애정어린 충고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헌법에서 보장된 종교의 자유가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강군은 “학교 선택권이 없는 학생들에게 원하지 않는 종교의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며 “학교는 자신의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학생들의 권리 역시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실이 아닌 곳에서 만난 스승과 제자는 서로 생각을 자유롭게 주고받았다. 류 목사는 “내 제자가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모른 척했을 것”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목사로서 “기독교라는 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그만큼 ‘나서기’ 어려운 결정이었던 셈이다.

    류 목사는 대화 중간중간 “학교가 받아준다면 …”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학교가 품어주지 못한 제자에 대한 애정이 큰 탓이었다. 강군 역시 그동안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 자리’가 마련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제적을 당한 처지이지만 지금이라도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마련됐으면 한다”는 뜻을 밝혔다.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강의석 군 제적 처리 잘못되었습니다

    강의석 군을 결국 제적처리한 것은 헌법의 정신을 위배한 것일 뿐 아니라 대광고등학교가 그토록 내세우는 대광고 설립 이념과 목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처사입니다.

    대광의 설립 이념과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참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기독교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에 근거하여 특정 종교의식과 교육 프로그램을 강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 당국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존엄한 사랑과 우주적 구원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려 다시 한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대광고등학교의 교목실장으로서, 그리고 한국의 개신교 목사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개탄스럽습니다.

    학교 당국은 이 잘못된 처사를 즉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교목실장 류상태

    지금 교장님과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아 이 곳에서 말씀드립니다.

    왜 이렇게 계속 악수를 두고 계십니까? 강하기만 하면 부러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모르십니까?

    우리 학교와 한국 개신교 전체가 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지실 것입니까?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조건 강의석 군을 품어주는 것입니다.

     

    “종교자유” 제적생 지원 확산

     

    시민단체 무효소 준비
    최순영의원 조사 나서

    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예배를 거부하다 제적된 강의석(18)군을 지원하고, 학교 현장에서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노력이 확산되고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인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은 지난 10일 강군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울 대학로를 찾아 ‘청소년 종교자유를 위한 서명’에 동참하고, 학교의 종교 교육과 종교 활동에 대한 본격적인 현황 파악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지난달에는 시민단체들과 함께 ‘학생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라’는 성명을 내고, “종교계 사립학교에 대한 실태조사”를 약속했다.

    최 의원은 “자율적인 종교 활동과 종교 과목 복수개설에 대한 지침이 있음에도,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일선 학교에서 ‘당연한 듯’ 어기고 있다”며 “이에 대한 보완과 함께 국정감사 등을 통해 종교 재단 학교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벌이겠다”고 말했다. 최 의원은 이미 서울시교육청에 종교 과목 편성 지침과 학교별 종교 활동 자료를 요구하고, 지침 위반 사례 조사에 들어갔다.

    청소년공동체 ‘희망’,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등 7개 단체로 구성된 ‘강의석 학생 부당 징계 저지와 학내 종교 자유를 위한 연대회의’는 강군 제적처분 무효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기독교 교사들의 모임인 ‘좋은교사운동’도 회원들을 대상으로 이번 문제에 대한 긴급 설문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한편, 강군은 13일 국가인권위원회에 ‘학내 종교 자유’를 요구하는 진정을 내고, 17일에는 ‘청소년 인권과 종교 자유를 위한 문화제’를 열 계획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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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lmas 2004-07-13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소식입니다.
    하지만 개별적인 사안의 해결에 그칠 게 아니라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학내 종교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분청사기 깊이 사귀기


    △ (왼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상감한 연꽃무늬뚜껑·꽃도장무늬(인화문)주전자·파초무늬병·박지태극무늬납작병

    문양·역사등 총망라 350여점 명품전
    “베일에 가린 궁금한 내용 해결하세요”

    텁텁한 담청색 자기 표면에 내키는대로 휘갈긴 추상적 선묘, 물고기·모란·풀 등의 소담한 무늬들. 한국인의 분방한 심성을 빼어나게 담아냈다는 조선초 분청사기를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이런 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판박힌 이미지 탓인지 분청사기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만큼 실체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호기심 동한 이들이라면 이런 물음들을 던질 법하다. 분청사기는 청자와 어떻게 다를까, 분청사기에는 청자, 백자에는 드문 추상무늬나 모란꽃무늬가 왜 그렇게 많을까. 왜 조선초에 반짝하고 나타났을까. 왜 생산된 지역별로 각기 문양이 다를까.

    9일 시작한 서울 신림동 호림박물관(관장 오윤선)의 ‘분청사기 명품전-분청사기, 자연으로의 회향, 하늘·땅·물’특별전은 이땅의 독창적 도자양식인 분청사기의 궁금증을 조목조목 풀어주는 전시마당이다. 기획전 사상 최대규모의 분청사기 컬렉션(350여 점)이 나온 이 기획전은 소품 연적, 잔부터 대형 항아리까지 분청사기의 온갖 형태가 상감, 박지, 인화문 등의 기법별로 총망라 되었다. 색다른 소주제 얼개로 분청사기 안에 깃든 선조들의 자연관과 미적 취향, 양식 변천사 따위를 이해하도록 한 노력도 느껴진다.


    전시는 분청사기 문양의 자연세계를 분석한 1부와 문화사적인 변천과정을 다룬 2부로 갈라진다. 1부인 1층 들머리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덤벙문항아리, 땅을 상징하는 풀잎 그려진 철화문 항아리, 물을 뜻하는 물고기 그려진 철화분청사기가 나란히 놓여 관객들을 맞는다. 분청사기의 문양을 하늘, 땅, 물로 갈라 하늘을 통해 자유로움을, 땅을 통해 생명의 다채로운 변화를, 물을 통해 여유로움을 탐구하려는 의도다. 백토물에 덤벙 담궈 백자인척 티를 낸 덤벙분청, 귀얄붓으로 백토를 입힌 귀얄분청 등은 칠한 부분과 칠하지 않은 부분이 대비되는 음양구도로 하늘의 변화무쌍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기품있는 모란꽃과 풀잎 무늬가 추상적 선묘로 새겨진 대형 항아리 명품들은 땅을 상징하는 볼거리들이다. 물을 상징하는 물고기, 연꽃 등을 담은 분청사기류에서는 보기드문 파도문양 항아리, 은은한 조명아래 왕관처럼 빛나는 상감연꽃잎무늬뚜껑이 잔잔한 감흥을 선사한다.

    2층 전시장은 문화·사상사적 맥락에서 분청사기의 변천사에 걸맞는 유물들을 한데 모았다. ‘상감청자의 여운’, ‘진정한 탄생’, ‘위대한 변신’, ‘예정된 종언’으로 전시장을 세분해 퇴락한 상감청자에서 출발해 지역별로 인화문, 박지기법 등으로 개성적 조형미를 뽐내다 사라진 분청사기의 일대기를 조망하고 있다. 고려말기 상감청자와 다를 바 없는 14세기 분청사기상감구름용무늬매병을 들머리에 배치한 뒤 인화문, 박지, 철화, 덤벙사기 등의 다양한 변용을 거쳐 마침내 백자로 흡수되는 과정을 전시장 말미의 순백자반합 명품 전시로 장식하는 동선의 흐름은 마치 연극적 구성과도 비슷하다. 주역의 음양사상과 연관된 태극무늬 편병, 귀얄붓으로 흰 백토를 칠한 뒤 위에 다시 상감을 한 파격적 기법의 연꽃버드나무무늬 항아리, 고대 토기처럼 굽다리가 달린 마상배(술잔), 정갈한 선으로 파초잎무늬를 올린 병 등 희귀한 문양과 기형들이 눈맛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도자사가인 강경숙 충북대 교수는 “화려한 컬렉션에 걸맞게 학문적으로도 갈무리가 잘 된 전시”라고 평했다. 10월31일까지. (02)858-2500, 3874.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호림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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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lmas 2004-07-1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받는 나날이 계속 되는데, 잠깐 열을 식힐 겸 광고 하나.
    무식해서(-.-;;;) 동네에 이런 박물관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런 좋은 전시회가 있다고 합니다. 시간되는 분들은 많이 가보시기를 ...
    수수께끼 님 덕분에 이제 이런 기사가 있으면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조선인 2004-07-13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림동에 박물관이 있다니 저도 처음 알았네요. ^^

    balmas 2004-07-13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동지 한 분 만났네요 ...(물귀신 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