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메디 한편…조선·중앙, 언론노조 위원장 집에 경품·무가지 살포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고 했는데….

신문업계에서 수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조선·중앙일보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신문시장의 혼탁상을 바로잡기 위해 최일선에서 뛰고 있는 신학림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의 집에 과도한 경품과 무가지를 살포하다가 걸렸기 때문이다.

http://news.media.daum.net/snews/society/media/200601/25/dailyseop/v11503254.html

 

ㅋㅋㅋ

인간들 정말 여러 가지 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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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1-26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놈들 잘 걸렸다. ^^

balmas 2006-01-2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happyant 2006-01-26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하. 재밌습니다.^^

비로그인 2006-01-2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ㅋㅋ

balmas 2006-01-2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appyant님/ 그런데 또 나름대로 어려운 사정들이 있더구만요.
한겨레 보니까 지국장 자살 기사가 있더라구요. 에효 ...
자꾸 때리다님/ 이건 또 무슨 이모티콘??

비로그인 2006-01-26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TL의 신 버젼 입져.ㅋㅋ

balmas 2006-01-2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렇군요 ...
 
 전출처 : 쎈연필 > 쌓인 눈은 누가 밟아 주리

죽음은 바로 옆에 있다. 죽음은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성큼 다가서 있는데. 죽음은 공유될 수 없다. 죽음은 오롯이 타인의 죽음이다. 내가 체험하는 순간 나는 이곳에 없다. 삶이라는 상자를 열고 날아가 버리는 것.

죽는 순간 몸 안의 배설물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안에 있는 건 유동적이고 흐물흐물하다. 딱딱한 건 안에 있을 수가 없다. 그것, 우리가 보기 싫어하는, 안 보는 우리의 몸이란 실상 얼마나 부드럽고 눅눅하고 따뜻한가? 죽음은 이러한 속엣것들이 밖으로 나오는 계기다. 집중된 힘이 흩어져 나가는 것. 탄력을 유지한다는 건 집중해서, 흩어져 나가는, 사라져 가는 것에 저항하는 것. 죽는다는 건 급속도로 흩어져, 잘려, 부서져, 찌그러져, 으깨어져, 떨어져, 분해되어, 부패해, 사라져 가는 것.

근사하게 말하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 그 과정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이를테면 여행도중 눈길에 미끄러져 전복된 승합차 안에서 온몸이 으깨어질지 모를 어떤 것. 몸이 불 구덩이 속에서 산산히 분해되는 것. 내가 죽어 누워 있지도 못하고 흩뿌려지는 것. 공기 속을 오래도록 부유하며 사라져 가는 것.  

우리는 죽음을 발설하고 싶지 않다.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을 환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재수 없기 때문이다. 저 너머에 봉인하고 싶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죽음을 향해 있고, 우리는 전생애를 감내하면서 죽음을 사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시선을 회피하는 저 너머를 응시해야만 자기의 존재를 개진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은 그 끔찍한 (어쩌면 진실로 안식처일지도 모를) 곳을 지독하게 응시하려는 사람이었다. 범벅된 피, 고통, 상처; 그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아갔다. 너무 아픈 글만 쓰는 그가 안타까웠고, 읽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는 그를 응원했다. 그가 나아가서 저 너머에 있는 죽음을, 이겨 버리기를.

그래서 죽음은 두려웠나 보다. 자기의 비밀이 시나브로 파헤쳐질까 봐. 죽음은 시인이 두려워서 일찍 잡아갔나 보다. 젊어서 죽음은 억울하다. 안타깝다. 아깝다.

나는 그를 단 한번 마주친 적 있다. 명동 어느 오르막길에 있는 까스등이라는 어두침침한 술집이었는데, 그는 말이 아예 없었고 표정은 어두웠으나, 늘 밝은 얼굴을 한 그의 애인과 퍽 다정해 보였다. 그의 애인은 그를 자랑하진 않았지만 자(사)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연인이었다. 그에게 어색한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으나 나는 원체 숫기가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와 나는 몹시 친해질 것 같은, 그래서 언젠가 형, 하고 부르게 될 것 같은, 그런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의 죽음을 슬퍼할만한 사람이 못 된다. 나는 그를 피상적으로만 알 뿐이다.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또, 아주 많이 외로웠던 사람이라고. 그를 모르지만, 그의 시는 안다, 고 말할 정도로 읽었다. 발표된 그의 모든 시를 애독했으며, 애독하며, 애독할 것이다. 그의 재학 시절 시들도 문집에서 모두 찾아 읽었으니 나는 그의 시를 조금이라는 수식어보다는 많이에 가깝게, 좋아하나 보다. 유고를 엮을 만큼 그의 시가 발표되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유고를 많이 사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할 수 있도록 건네 주는 일, 그리고 그가 개진했던 저 너머의 세계를 직시하며, 온 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일. 요며칠 슬프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그저, 아깝다, 안타깝다, 라는 말만 입으로 궁글리고 있다. 내일은 또 시를 제출할 테고,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께 마지막으로 시를 배울 것이며, 나는 학우의 시에 대해 떠들어 댈 것이다. 도대체.

그의 시 몇 편 그리고 그의 숨결이 생생한 홈페이지 주소다. 마치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한, 마지막 게시물과 배경음악이 자꾸만 가슴에 걸린다. 그의 명복을 빈다.

 

               가족사진 
                                           신기섭


그들은 모두 맨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저마다 간격을 두었지만 서로의 핏물이
커튼처럼 그 간격 꼼꼼히 닫아 주었다
무엇을 꼭 끌어안은 모습으로 누워있는 여자의
발치엔 아기가 구토물같이 엎질러져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마다 얼굴을 가린 여자들의
짧은 비명소리 같은 엄마!
(엄마, 언제부턴가 모든 엄마는 비명이었다)
깊이 파헤쳐진 무덤처럼 누워있는 여자
얼마나 귀가 찢어질 듯한 짧은 엄마인가?
혼자 멀찍이 떨어져 누운 여자의 사내는
여전히 술냄새를 풍겼으므로
그의 핏물은 거침없이 여자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피로써 스밀 수 있다는 걸
딱딱하게 굳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눈을 감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 순간
카메라 불빛이 터졌다, 그들도 이 생에서
눈을 뜨고 가족사진을 박는다

 

               나무도마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화색(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텨가 내려지고 있었다

 

               등대가 있는 곳


위층에서 터진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는 또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노를 젓는다
여자의 몸이 욕실바닥을 휘젓는 소리
살림이 난파되는 소리 비명소리 속으로
콸콸 물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오후 내내 베란다에 앉아있던 여자의
흐느낌은 물소리였다 이내 길고 긴
골짜기가 되었다 화분이 하나 둘 흘러갔고
앞날을 모르고 웃고 있는 환한 사진들이 흘러갔다
불붙은 편지는 뒷걸음질치며 느리게 흘러갔고
우수수 머리카락들이 흘러갈 때
멀리 먼 바다의 문어대가리처럼 지던 태양은
먹물 같은 어둠을 갈겨 버렸다
그때 첨벙첨벙 어둠을 밟으며 장화 신은 그가 온 것이다
늘 바다 비린내가 나는 그의 몸,
그는 거친 뱃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갑판에 올라본 적 없는 선장
토막나고 썩은 물고기만 가득 싣고
그의 배의 바깥 손잡이를 끌며
허우적댔다 시장과 거리에서, 그는 자주 목격됐다
과중으로 인해 배의 뒤축이 침몰해 버릴 때면
그의 굽은 몸도 덩달아 들려 올려져 배와 함께
물 위로 입을 내민 고래처럼 포효하곤 했었다
해가 저물고, 그의 배가 여자의 골짜기 끝에 정박했던 것이다
흘러간 것들을 다시 건져 올라온 그가
어딘지 모를 먼 곳으로 향해를 시작한 밤
물소리는 끝이 없고
도대체 저들은 어디까지 흘러간 것일까
귀를 막고 창문을 내다보면 너무 많은
등대의 불빛, 불빛들

 

              현기증


칼을 쥐고 변소에 갔다 변소에 매달린 끈을
끊으러 간다 끈을 잡고 반쯤 서서 일 보던
당신의 몸속에는 숭숭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들 중에 오래 전 내가 살다 나온 구멍 하나;
나를 내 뱉던 그날의 그 구멍처럼 변소가
뜨겁다 탯줄 같은 끈을 끊는데 우글우글 핏빛 똥통 속
구더기들 끓는 냄새 잉잉 파리떼 소리
덩달아 내 온몸에 맺힌 땅방울이 끓는다
툭, 끈은 끊어지고, 그러나 나는 왜 아직도 갇혀 있나?
자궁 속 태아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데
점점 밀려오는 환한 빛; 고개를 숙이고
빛을 향해 나는 머리부터 먼저 내밀고 나가는데
누군가 내 머리를 쭈욱 잡아빼고 있다
바짝 곤두서는 머리칼! 나의 몸이 솟구친다.
빛이 입속으로 들어와 빛을 먹여준다.
빛을 입에 물고 빛에 안겨 숨막히는 이 순간
나를 꼭 안았다가 다시 놓아주는 빛, 한없이
나는 떨어져 내리고 빛은 사라져서 그늘진
마당에 주저앉아 나 이제 숨 쉰다. 희뜩희득
엄마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 신생아처럼

 

              아버지와 어머니


그가 보는 동물의 왕국 속; (뱀이 뱀을 먹으며 죽어간다
같은 황토色 비늘이라 얼핏 보면 한 마리 같다
처음과 끝이 꼬리인 길고 긴 몸
뱀의 대가리는 몸 가운데에 멈춰 있다
그 두 눈빛은 핏빛이다 힘껏 뒹굴어도 끊어지지 않는
몸, 속으로 못 박히듯 또 다른 몸이 채워지고 있다
황토色 비늘이 붉은 잔금들로 깨지기 시작한다
천천히 먹어치우며 가는 몸은 멀고 먼 길이다
고독한 길 뱀은 자꾸 이빨을 박으며 간다
독은 길을 따라 몸속으로 서서히 퍼진다
이 끔찍한 길은 포장도로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꾸역꾸역 삼키며 가는 길 뱀은 찔끔 눈을 감는다
그러자 몸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길
어쩌면 처음부터 저도 함께 안간힘 쓰며
몸속으로 밀려왔을, 서로의 몸 끝까지 가지 못하고
멎어버린다면 그 모습 얼마나 웃길까?
사랑은 그런 것, 천천히 몸속을 기어가는 숨막히는 길
서로 다른 끝을 보며 스쳐가듯 하나가 되는 고통 속
다시 슬그머니 눈을 뜬 뱀의 눈이 깊어졌다
함께 가자,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뱀은 운다
커다랗게 부풀어오르며 완전히 하나가 된 시뻘건 몸
천천히 굳어가는데) 그가 보는 동물의 왕국 전원을
강제로 꺼버리는 그녀, 쩌억 벌어진 입에서
독이 쏟아지고 뱀 먹는 뱀처럼 갈 길이 정해진 듯
거실을 기어가는 늙은 몸 하나

 

              이발소 가는 길
 

손등에 글씨를 쓰고 날갯짓을 한 문창과 동생,
몸이 무거운 새* 그 날개에 남겨진 글씨; 삶이 무겁다
상투적이지만……이발소를 찾아가는 이 저녁, 삶이
무겁다 벌써 초겨울 낙엽 깔린 佛光洞 골목,
가슴을 내놓고 박수를 치는 여자; 이제 두 돌이 지났다고
많이 컸다고……(내 눈엔 보이지 않는 무게) 죽은 아기가
크고 있다 나날이 커질 무게, 행복하고 불행한 무게.
그나저나 이발소는 보이지 않고, 제 똥 보고 좋아라 하는
변비 환자같이 떨어진 무게를 굽어보는 홀가분한 가로수들,
처럼 잘라달라고 할까? 뜨거운 이발소 수건에 덮여
벌겋게 익을 얼굴 하얀 거품이 발린 무게 덩어리.
이발사는 칼을 들고 나를 내려다보며 말하리라, 눈 감으세요.
그러나 얼마 만에 와보는 이발소인데 어둡고 한산하다.
의자에 앉아 이발소의 꽃, 달력 속 벗은 여자를 바라본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발기하는 몹쓸 무게 순간
대문처럼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전신거울, 거기
환하게 나타나는 붉은빛 통로! 어서 건너오라고
내게 손짓하는 여자! 잘못 온 길인데 제대로 온 길같이
설레다 머릿속의 무게들이 가볍게 떨리고 온몸 가득
퍼져나가는 (((떨림))) 천천히 입이 벌어지고, 삶이……
상투적이라서 말하지 않기로 한다.


* 그의 문집 제목임

 

http://xodd1234.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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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으로 인권읽기]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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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숙 
이 원칙은 일명 '파리 원칙'(Paris principles)으로 알려져 있는데 1991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가인권기구 국제 워크숍에서 제정되고 1993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원칙이다. 유엔이 국가인권기구라는 제도를 얘기한 것은 일찌감치 1946년의 일이었다. '국가인권기구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지침' 등이 기본적인 문서 역할을 하다가, 여러 나라 국가인권기구들의 경험 축적을 기반으로 다시 집대성한 것이 이 원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11월에야 국가인권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설치 과정에서 국가인권위를 일부 국가기관의 부속물로 만들거나 그 권한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됐고 인권단체들은 4년여 동안 이에 맞서면서 두 차례의 폭염과 혹한 속에서의 단식농성으로 국가인권위의 제대로 된 설치를 요구했다. 국제기준에 턱없이 모자란다는 아쉬움 속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비빌 언덕이 되라는 기대를 갖고 국가인권위의 출범을 환영했다. 그리고 국가기관을 감시·견제하는 국가인권위의 활동을 감시·견제해온 것이 인권단체들의 활동이었다.

그런데 국가인권위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이란 걸 내놓은 요즘 비난의 폭죽놀이가 벌어지고 있다. 세금을 축낸다느니, 무국적 기관이라느니, 헌정질서를 무시한다느니, 산업현장에 갈등과 혼란을 부추긴다느니 하는 것들이다. 행동이 아니라 단지 입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일부 언론과 정치인, 재계의 면박을 받기 일쑤인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처지이다. 더 적극적인 국가인권위의 행동에 목말라하는 인권피해자들의 편에서 보면 국가인권위의 존재, 아니 인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한때 유행하던 우스갯소리로 약국에 가서 당근을 달라고 하는 토끼 이야기가 있다. 국가인권위에 대한 공격에 핏대를 올리는 이들을 보면 그 토끼가 떠오른다. 국가인권위가 뭔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역할을 바꾸고 호통을 치고 있다. 핏대를 올리는 자신들을 지켜보기 위한 감시견으로서 국가인권위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감시견이 자기 바지자락을 물었다고 항의하는 꼴이다.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에 따라 하나씩 살펴보자.

국가인권위는 국가 내부의 '반성문' 쓰는 장치이다. 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기관이 실제로는 인권의 주요 가해자인 일이 다반사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국가기관을 잘 살펴보고 반성문 쓰게 하고 대안을 만들라고 하는 장치이다. 민간 인권단체들이 분명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만, 국가인권기구를 설치하는 것은 인권보장이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민간이 할 역할은 역할이고, 국가 자신의 임무인 인권보장의 일을 똑바로 하라고 국가기구를 만들 것을 국제사회가 합의한 것이다. 자기 내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국가인권위를 국가기구로 만들더라도 다른 어떤 국가기구로부터도 영향 받지 않는 '독립적인' 국가기구여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예산을 깎겠다느니 없애버려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국가인권위의 독립성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짓이다.

국내의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 설치될지라도 국가인권위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인권규범을 자국에 적용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국내법만이 아니라 국제인권규범을 활동의 틀로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 인권위에게 국내법을 무시한다고 질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권에는 실정법이 아우르기 힘든 회색영역이 존재한다. 기존 질서에 부합되는 법규정만으로는 진전될 수 없는 인권상황이 존재한다. 사법기관의 판단과 다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존재한다. 그런 국가인권위에 법질서 훼손을 운운하는 것도 무지의 소산이다.

진보단체 쪽의 의견만 반영해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이 문제라 하는데, 그럼 국가인권위가 대기업이나 정부 관계자들과 친해야 할까? 인권피해자들이나 그들을 옹호하는 인권단체와 가까워야 할까? 민간 인권단체와의 협력은 국가인권위가 지켜가야 할 기본적인 행동양식이다. 인권단체와의 협력을 하지 말라는 것은 국가인권위의 타락을 방치하는 꼴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국가인권위는 국가기구를 내부에서 감시·견제하는 장치이고, 인권단체들은 여타 국가기구들과 국가인권위를 감시·견제한다. 인권단체들이야말로 국가인권위를 향해 항상 따가운 회초리를 준비하고 있는 당사자들이다.

입만 열면 '선진국' 수준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인권을 빼놓고 달리겠다 하니 그 차에 승차할 수는 없다.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을 기업이미지 광고의 화려한 영상이 악몽으로 보이고, 화려한 정부 정책의 청사진이 누렇게 보이는 것은 새로 떠오르는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오래전에 인정되고 확인·재확인돼온 기본적인 인권조차 무시하기 때문이다. 인권의 주인들은 인권 감시견을 인권가해자가 걷어차는 현실을 가만 두고 보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Principles relating to the status of national institutions, 유엔총회 결의안 48/134, 주요내용 요약)
[권한]
-국가인권기구는 인권을 보장하고 향상시키는 필요한 광범위한 권한을 확보해야 하며, 이러한 권한은 헌법이나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인권의 보호 및 향상을 위한 자문, 인권을 위한 교육과 홍보, 국제협력,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 및 구제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권한에 속하는 모든 사안을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독립성]
-국가인권기구가 국가권력의 남용을 견제할 수 있으려면, 헌법이나 법률을 통해 모든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지위와 권한의 독립성
-국가인권기구가 정부나 여타 공공기관, 사적 단체로부터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권한과 법적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가인권기구는 입법·사법·행정 등 모든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설치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업무의 독립성
-국가인권기구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절차규칙에 따라 일상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제공 요청 등 다른 기관, 특히 정부기관의 협조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

□재정적 독립성
-국가인권기구는 활동의 물적 기반이 되는 재정을 다른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안정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가 자체적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직접 국회에 제출, 승인을 요구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며 어떤 형식으로든 다른 정부부처의 예산에 연계되어서는 안된다.

[운영방식]
-국가인권기구는 권한에 관한 모든 사안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회의체계의 구성이나 소집 등 운영방식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의견이나 권고사항을 직접 또는 언론기관을 통하여 널리 알리고 여론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특히 취약집단이나 특정 지역의 인권을 보호하고 향상시키는 데 헌신하고 있는 민간단체와 협력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준사법적 권한]
-국가인권기구는 개별적인 인권침해에 관한 진정을 접수받아 신속하고 저렴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구제할 권한을 가질 수 있다.
-실정법상 명백한 범죄행위로 보기 힘든 이른바 '회색영역'의 인권침해문제를 조사하고 구제할 수 있다.
-국가인권기구가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와 구제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을 보장받아야 한다. 조사에 필요하다면 누구든지 청문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한 모든 정보나 문서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조사결과 인권침해가 확인되었을 때에는 피해자에게 적절한 구제조치를 제공할 수 있는 결정의 효력을 보장받아야 한다.
인권하루소식 제 2976 호 [입력] 2006년01월20일 0: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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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1-2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퍼갑니다. 고맙습니다.

balmas 2006-01-22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세요. :-)
 

ㅋㅋㅋ 불교계 사람들한테는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정말 재미있는 인터뷰네. 잘은 모르지만 불교계 내부의 사정을 잘 드러낸 것 같다.

재일 재미있는 말은 "너는 떠들어라, 그래도 우리는 아줌마 보살들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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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황우석 옹호, 지관 스님의 콤플렉스!

[신승근의 도전인터뷰]

‘100억원 모금’ 불교계에서 다른 목소리 내는 조성택 <불교평론> 주간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동일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가톨릭과 기독교가 생명윤리를 내세워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서양 윤리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엄호사격과 함께 황우석 교수에 대한 전폭적 지원에 나섰던 한국 불교계의 황우석 감싸기가 멈출 기미가 없다. 줄기세포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외부세력 음모론’을 제기했던 불교계는 줄기세포 연구가 총체적 조작과 사기극으로 판명났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자고 외친다. ‘황우석 박사 지키기 재가불자들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동산반야회 김재일 회장은 “황 박사의 연구 재개와 원천기술 재현을 위한 100억원 재단 설립 범국민운동본부 설립” 방침을 밝혔고, <법보신문>에 따르면 성금 기탁 의사를 밝힌 스님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불교계의 내부 인사인 조성택 교수(고려대 철학과·불교학 전공)가 자신이 주간으로 있는 <불교평론> 2006년 봄호 권두언을 통해 “불교계의 황우석 감싸기 중단”을 요구하며 자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겨레21>은 서울대 조사위의 발표에 대한 황 교수의 해명 기자회견이 열린 직후인 1월12일 오후 조성택 교수를 만나 불교계 내부를 향해 칼날을 세운 이유를 물어봤다.

2002년엔 나 혼자 황우석을 지지했다

곧 나올 <불교평론>을 통해 불교계의 황우석 옹호 분위기, 특히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황우석 지지 발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이건 단순히 황우석씨에 대한 옹호만으로 봐서는 안 된다. 가톨릭은 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자신들의 종교적 생명윤리에 저촉된다는 것을 파악해 반대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는 유용성을 살리려는 나름의 노력의 결과로 성체 줄기세포 연구에 1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가톨릭이 역사상 사회 문제에 관여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다. 하지만 불교계는 세속 문제에 대해 말하는 논리가 약하고 역사적 경험과 노하우도 적다. 근현대에 발생한 문제에 대한 대응도 상당히 미숙했다. 황우석 옹호는 종교 간 경쟁이 펼쳐진 현대적 다원주의 종교 체제에서 불교계가 지닌 콤플렉스가 작용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콤플렉스를 말하는 것인가.

=서구에서는 불교가 과학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종교라며 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이 지나쳐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얘기까지 한다. 황우석 감싸기는 한국 불교가 서양이 불교를 보는 이런 관점을 너무 많이 받아들여 “우리 불교는 이런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기독교보다 더 현대적인 종교다”라고 내세우려는 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가 종교로서 한 역할과 비교하면 불교의 역할은 적다. 문화적으로 불교가 우수하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근대 이후 불교는 극히 제한적인 역할을 했고, 오히려 반사회적·반민주적·반민족적 행태를 보여왔다. 이런 콤플렉스가 과학의 문제(황우석 사건)를 계기로 터진 것이다. 황우석 사건은 불교계의 호재였다. 무의식적으로 불교계가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본 것이다. 불교가 교리적 측면에서 이런 문제에 기독교보다 좀더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좋은 지점으로 생각한 것이다. 불교와 과학은 다루는 세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일 수는 있지만 불교가 과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은 줄기세포 연구에서 서양 논리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며 동양 논리를 강조했다. 과학적 연구에 유용한 측면도 있는 것 아닌가.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생명 개념 자체를 창조주에 의한 것으로 신성시하지 않기 때문에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논의는 가능하다. 다만 논의를 하되, 불교적 입장뿐 아니라 다른 세속적 사항, 과학과 윤리, 인류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고려를 생략한 채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이 자기 입장을 먼저 개진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돌아가신 전임 총무원장 법장 스님도 (줄기세포 연구 지지에) 적극적이었다. 그동안 불교학계의 논의를 보면 찬반이 나뉘었다. 하나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배아가 생명이냐 아니냐는 논외로 하고 이것이 가져다줄 요익중생, 즉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자비의 윤리가 더 크고 그게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뜻이라는 이유였다. 반대 논리는 비록 배아라 할지라도 생명으로 탄생할 수 있는 연장선에 있으므로 배아에 손대는 것은 ‘불살생’의 불교 윤리를 해친다는 것이었다. 불교학계에서 이 문제를 최초로 얘기한 2002년 <불교평론> 주최 생명윤리 세미나에서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찬성한 것은 유일하게 나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동국대 교수 등 나머지 분들은 전부 반대했다. 난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에 대해 종교가 잘못 재단했듯 종교적 가치와 과학적 사실의 문제는 다를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찬성했다. 당시 동국대 김종욱 교수 등은 불교에서 생명은 연장의 개념이고, 배아는 생명이 될 수 있는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손대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난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후 더 깊이 연구해 2005년 춘계학술대회 때 반대자가 됐다. 그런데 2002년의 반대론자들은 이제 전부 찬성론으로 돌아섰다.

전두환 보호와 황우석 보호의 차이

왜 그런 태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난 법장 스님의 원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황우석이 불교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랬을까. 정말 모르겠다. 그게 이상했다. 또 지금도 이해 안 되는 것은 불교계가 기독교와 달리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면 그 연구를 지원해야지, 왜 특정 연구자를 지원하냐는 것이다. 그건 황우석씨가 불교인이라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황씨 자신도 항상 염주를 두르고 다니지만, 불교계도 황씨가 불교인이라는 것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첨단과학에 종사하는 국민적 영웅인 황우석씨가 “나는 불교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교인에게는 상당한 자긍심을 주었다. 그게 (황우석 지지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거기에 법장 스님, 지관 스님 등 조계종 총무원장이 앞장선 것인데, 문제 있는 태도다. 가톨릭 주교나 추기경이 거느린 스태프의 전문성은 대단하다. 반면 조계종 총무원장이 갖는 전문성은 대단히 미약하다. 교육 과정에서 차이가 나고 신부들은 재가자(속세에 머문 교인)와 연대가 밀접한 데 반해, 조계종은 재가자의 개입을 제한하고 자기들끼리 한다. 불교계가 사회 현안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고 역사적 노하우도 적다 보니 대응이 미숙하고, 이번 (황우석 교수 파문) 같은 현안에 대한 발언도 상당히 촌스럽다. 불교계가 최근 세사에서 일반 정서와 달리 행동한 게 백담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받아들인 것인데, 이번 경우도 흡사하다. 그런데 전두환 보호는 사실 종교의 역할이다. 정치적 고려를 한다면 전두환을 받아들이면 안 되지만 정치 논리를 넘어 용서와 화해라는 종교 논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황우석 감싸기보다는 더 나은 사건이었다.

전두환을 받아들인 것보다 황우석을 두둔하고 감싸는 게 훨씬 나쁜 행동이라는 것인가.

=그렇다. 황우석은 사실의 문제였다. 모든 사실이 종결된 다음에 과학자가 아니라 인간 황우석을 불교계가 받아들이고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모르겠는데, 과학이라는 사실의 문제, 이미 조작이라고 명백히 밝혀졌는데도 자꾸 감싸는 것은 문제가 있다. 좋게 보면 우직하고 의리파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불교계가 그렇게 무분별하게 과학자 황우석을 감싸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됐다. 그건 아니다.

그럼에도 지관 스님이 황우석을 옹호하는 태도를 바꿨다는 기미는 없다. 혹시 불교계 전반이 황우석 옹호에 공감한 것 아닌가.

=불교계의 말없는 다수는 오히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다만 찬반이 쪼개진 상황에서 이미 돌팔매 맞고 있는 사람에게 돌 하나 더 던질 수 없어 침묵할 뿐이다.

불교계에서는 황 교수에게 원천기술의 재현 기회를 주자며 100억원 모금 운동까지 일고 있는데.

=말이 안 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종교도 하나의 단체고 하나의 구성원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공익적 연구에 민간기업의 돈이 투여되는 것을 우려한다. 100억원의 모금 주장은 황우석과 친한 특정 단체나 기업에서 황우석에게 100억원을 주겠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또 황우석의 연구 결과가 정말로 요익중생을 실현할 정도인가. 갈 길이 엄청나게 먼데, 100억원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다. 100억원 지원설은 그간의 지원을 볼 때 불교계의 스타 만들기 차원이지 진정으로 국익이나 요익중생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관 스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서양 윤리라고 무조건 황우석 연구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성체 줄기세포 연구 지원이라는 나름의 대안도 내놓았고, 개신교의 어른인 강원룡 목사가 배아 줄기세포 연구도 가능하다는 신학적 입장을 제기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배아가 생명이라고 해서 당장 연구 성과가 나오는 이것을 금지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불교계도 그렇게 다른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우린 기독교와 다르기 때문에 줄기세포 연구에 찬성할 수 있다는 것은 교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지율의 위험한 독선주의와 폭력

불교계에서는 그런 비판적 의견이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 말없는 다수가 있다. 지관 스님이 얘기한 것에 대해 동국대 교수 등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감히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현안 분석과 전문가적 안목이 필요한데, 그런 싱크탱크도 없이 그냥 총무원장의 개성이 드러나는 발언을 막 하는 것은 미숙한 행동이다. 불교도 세속 문제에 전문가적 안목을 갖춰야 한다. 전문성 없이 자꾸 불교적 논리만 갖다대니 항상 각론에서 논리가 달리고 밀리는 것이다.

어떻게 현안에 대한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가.

=출가자와 재가자가 좀더 긴밀한 연관을 가져야 한다. 출가자만의 집단, 출가자 우위는 곤란하다. 깨달음만 추구하는 조계종 중심의 출가자 집단이 아니라 일반 불교 지식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는 정치·교육·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부작용을 일으켰지만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 한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거의 무임 승차해왔다. 만해 한용운의 경우도 조계종단에서는 결코 띄우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결혼도 했고, 대처를 주장했다. 하지만 근대 정치·사상·문학에서 드문 스타고 그를 통해 불교가 가지는 사회적 이미지도 좋아지기 때문에 못 놓는 것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자꾸 황우석씨를 붙잡아두려는 것 같다.

지율 스님의 계속되는 단식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환경 문제는 사실의 문제다. 얼마나 훼손하는지, 개발하지 않는다고 다 보호되는지 등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간과한 채 자기 가치관의 심증적인 문제만 갖고 덤벼드는 게 있다. 환경과 과학 문제는 한국 불교계가 먼저 선점했다고 자부하는 분야다. 환경 문제는 더욱 그렇다. 환경이 근대화 이후에 빚어진 여러 문제를 다룬 것인 만큼 전통 종교들이 거기에 목소리 낼 지분이 있다. 실제 새만금 개발 반대 삼보일배, 지율의 단식 등 사회적 이슈를 선점해왔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목숨 건 단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대중과 함께 가야 할 문제다. 또 환경단체와 달리 종교인의 환경운동은 다른 지점이 있어야 한다. 새만금 사건 때 당진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했는데, 종교인은 내 뜻을 이루겠다고 이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없는 것이다. 삼보일배도 내 뜻을 이루는 게 목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는지 자신까지 부정의 대상으로 삼아보는 수행 과정이라야 한다. 무엇을 이뤄야 한다는 것은 환경운동가들의 시위와 다를 바 없다. 그런 부분이 전혀 구분 없이 이뤄지고, 그렇게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결국 근대화 과정에서 불교가 한 일이 없고 사회적 지분이 없다고 하는 나름의 자책감,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율 스님의 단식이 환경과 생명 존중의 중요성을 일깨운 긍정적 측면도 있지 않는가.

=물론,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우리 내부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도롱뇽이, 배아가 생명이다 어쩌다 할 정도로 고도의 생명윤리를 가졌다면 육식 문제도 깊이 성찰해야 한다. “도롱뇽이 아파요”라고 말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간과하는 식육 고기의 도축 과정에 대해 불교계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건 자기 모순이다. 또 불교 사찰 내에서 벌어지는 비환경적인 재건축 등 엉망진창인 일들은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그대로 놔두면서 천성산만 가지고 그러는데, 정말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반 환경단체 활동가라면 그냥 자기 목표가 ‘천성산 지키기’고 그것만 하면 된다. 하지만 종교인이기 때문에 자기 입장도 한번 물러서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종교인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인데, 그런 점에서 (지율 스님은) 차별성이 없다. 나만 죽으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독선주의고 엘리트주의다. 나 하나 죽어서 된다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이냐.

아줌마 보살들만 있으면 다다?

불교계를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불교계 안에서 생존이 가능한가.

=난 너무 궁금한 게 있다. 나는 황우석, 지율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불교가 깨달음이 아니라 행복의 종교가 돼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바로 조계종의 본질적 문제에 바로 칼을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런 블랙홀 같은 분위기가 기괴하고 음산하다. 아는 스님들에게 여쭈면 그냥 웃고 “할 말이 없는 것이겠지요”라고 답한다. 기본적으로 깨달음이 가능한가란 의문이 가능하고, 조계종의 화두선은 이미 말도 안 되고 물건너간 것이라는 비판도 많다. 조계종 존립의 근거 자체를 뒤흔드는 비판인데도 그냥 가만히 있다. 달라이라마가 히트를 치는 것 등은 한국 사회가 불교에 대해 다른 방식의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데도, 조계종은 거기에 답을 못 내놓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그냥 블랙홀이다. 돌아오는 답이 없다.

왜 그런가.

=너는 떠들어라, 그래도 우리는 아줌마 보살들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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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1-20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퍼갈게요.

balmas 2006-01-2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러세요.

라주미힌 2006-01-20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 귀에 경읽기가 불교에서 나온 속담인거 맞네요.
종교의 컴플랙스라.. 재미있는 현상이네욤.

balmas 2006-01-2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소귀에 경읽기 ...
어젠가 신문기사 보니까 1000억 모금도 가능하다고 하는 것 같던데요.
불교계에는 무슨 눈먼 돈이 그렇게 많은지 ... 그 돈이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
수십만을 구제하겠구만.

비로그인 2006-01-2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0억으로

비영리 기업 세워서 장애를 가지신 분들 자활 도우미 같은 것 하면

진짜 대단할 텐데. 웬 사기꾼에게.....ㅡㅡ;;


꼬마요정 2006-01-2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가 사회에 간섭하는 건...정말 어려운 일이에요...흠...
이 글을 읽고 성철큰스님이 그리워지는 건 왜 일까요..?? ^^;;

로쟈 2006-01-20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불교계 내부에도 '목소리'가 있군요...

깍두기 2006-01-20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한 마디는 참.....^^
이 분, 유머감각 있으시네요.

balmas 2006-01-2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때리다님/ 글쎄 말이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불교계도 그렇고 ...
꼬마요정님/ 종교인의 사회 관여는 사실 쉽지 않은 문제죠. 그래도 저런 식이면
정말 너무 한 것 같아요.
로쟈님/ 그 주장은 약간 편파적인 데도 있는 것 같군요. 지율 스님이야 어찌 되었든
계속 정부로부터 경원되고 기만당한 입장이니 같은 평면에 놓고 평가하기는 좀 어려울 듯 ...
깍두기님/ 압권이죠, 저 한 마디. ^^

릴케 현상 2006-01-21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하네요

수퍼겜보이 2006-01-21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요~

balmas 2006-01-2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오랜만이삼. ^^ 거침없죠. ㅎㅎ
수퍼겜보이님/ 감사. :-)

2006-01-22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역시 과갤에서 하나 더!

이런 센스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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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 33조 얘기하는 아그들 한번 봐봐라

 

오레오

 

진짜 뻘짓이긴 한데, 줄기세포 시장규모가 33조라는 것에 대해 이 흉아가 한번 분석해 볼께.
먼저 가정.
1. (만든 게 없다고 밝혀졌지만) 6개월 주면 황박이 줄기세포 만들 수 있다.
2. 그 줄기세포 이용해서 특허 딸 수 있고 기술료 벌 수 있다.
3. 그 무슨 연구소에서 발표한 33조 주장이 맞다.
4. (아무도 장담 못하지만) 줄기세포가 몇년 안에 임상에 사용되어 난치병 고칠 수 있다.

이 정도 가정이면 황빠들도 다들 인정하겠지? 그럼 진도 나가자.

우선 시장규모 33조라는 게 순전히 기술료 수입이 아니라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어. 그걸 좀 나눠보면 줄기세포 제작비용 + 기술료 + 시술비용 이렇게 나눌 수 있겠지?

우선 줄기세포 제작비용.
황박의 구라를 그대로 인정한다 해도 17개 정도에서 줄기세포 하나 나올꺼야. 그러면 2명 정도에게서 난자를 채취한다고 치자. 김수 연구원이 얘기한 딴딴한 난자가 하나도 안나온다는 가정 하에서 말야.
불쌍하게 신용불량자 처지에 놓은 두 여성이 난자를 내놓겠지. 150씩 줬다고 쳐. 이들에게 300만원이 들어가. 우리나라가 줄기세포허브 사업해서 난자 제공하면 전세계를 상대로 줄기세포 하나당 300을 벌겠지.
줄기세포 만드는 연구원들 인건비, 기타시설사용료 등등 해서 하나당 200씩 잡자. 그래서 500만원이 고스란히 대한민국에 떨어지는 돈이라고 보자.

둘째, 기술료
너네들 무지 착각하는 게, 기술료로 엄청난 돈 벌 수 있는 줄 아는데, 기술료의 패러독스는 "비싸면 안쓴다"는 거야. LG전자 (의 자회사인 제니스)가 디지털TV 원천기술 있는 것 알지?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TV로 업그레이드 하는 이 상황에 LG가 이 원천기술로 얼마나 번다고 그래? 신화창조의 비밀에도 나오고 그래서 참 자랑스럽긴 한데, 실제로 1년에 몇천억 수준이란다. 엄청난 기술료 주고 가져오는 퀄컴의 휴대폰 칩도 개당 10만원이 안된다고 들었어.
줄기세포 특허를 이용한 기술료? 이거 껌값이라고 보는 게 맞아. 더군다나 기술은 점점 개량될 것이고, 개량된 기술로 줄기세포 만들면... 지금 내놓은 특허는 오히려 개량된 기술에게 밀릴 가능성도 크지.
어쨌든, 정말정말 인심 써서 기술료 100만원 잡자. 너무 싸게 잡았어? 그럼 천만원 해볼까? 난치병 환자들에게서 집단 테러당할 일 있니? 어차피 기술료 역시 시장에서 결정되는거야. 비싸면 안써. 합리적인 가격을 매길 수밖에 없는거야.

세째, 시술비용
이게 진짜 돈되는 거야. 병원에 입원해서 각종 검사하고, 의사들 여럿 동원되어서 수술하고, 그러고 또 회복되는동안 입원해 있고...
좀 어려운 수술인 암제거 수술이랑 비교해보면 대략 5000만원? 우리나라처럼 건강보험공단이 시술료 낮게 책정하는데서는 이렇고, 미국처럼 의료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곳에서는 시술비용은 억을 넘어간다고 보는 게 맞지.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시술비용은 대한민국이 10%도 건질 수 없다는거야. 전세계 환자들에게 한국 와서 치료하라고 할래? 그냥 지네 동네에서 지네 의사들이 치료할꺼야. 그러니까 33조를 한국이 다 먹을거라는 착각은 제발 하지를 말아줬으면 해.

자 이제 더하기 들어간다.
제작비 (500만원) + 기술료 (100만원) + 시술비용 (5천만원) = 5600만원

이건 정말 싸게 잡은 1인당 치료비라고 볼 수 있지. 난치병 치료에 5600만원이라... 의사들이 웃겠지만...
어쨌든, 이제 33조를 5600만원으로 나눠보자.
대략 57만명이 나오네. 줄기세포로 치료할 수 있는 인간이 1년에 57만명 정도라는 거지.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순수하게 벌어들일 돈은? 57만*600만원 = 3조 4천만원.

어마어마하게 큰 것 같지?
하지만 기술료로 벌 돈은 1/6인 5천7백억 정도란다. 그나마 줄기세포 제작기술이 특허로 인정이라도 받는다면 말야. 노성일이 40% 먹고, 서울대 산학연인가 그곳이 60% 먹는다.
나머지는 줄기세포 제작하는 연구원에서 1조 정도 돌아가고, 난자 기증하시는 성스러운 분들이 1조 7천을 먹지.

근데... 이까지 계산하니까 조낸 이상하지 않니? 난자 기증으로 1조 7천을 먹을 수 있다고????
아까 환자 57만명이라고 그랬지? 1인당 2명의 난자 기증자로 계산했고, 그렇다면 1년에 114만명이 난자를 기증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네!!!! 이 장사 몇달이나 버티겠어? 난자 기증할 의지가 있는 2-30대 여성이 1년에 114만명이나 있어야 한다고????

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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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조는 줄기세포 제작비 + 기술료 + 시술비용을 포함한다.
그 중에 시술비용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게다가, 33조 벌려면 1년에 114만명이 난자를 기증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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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01-1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 33조원을 왜 5600만원으로 나눈 거죠?
33조원은 저 무슨 연구소에서 추정한 전체적인 '시장규모'이고
그걸 몽땅 '먹을 수 있는 돈'으로 치부한 것에 대해서 반박하겠다는 것 같은데,
환자의 숫자를, '33조 나누기 5600만원'으로 한 것은 이해가 안 가네요.

환자 한사람에게 치료비 5600만원씩 받는다고 치면,
33조 벌려면

딸기 2006-01-1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3조 벌려면 57만명 치료해야 한다, 그러니까 114만명이 난자를 기증해야 한다
그런 논리인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이 글 역시 말장난이 넘 심한 것 같아요.

balmas 2006-01-1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딸기님, 33조원을 5600만원으로 나눈 건, 33조원이라는 시장 규모를 가정했을 때, 그리고 난치병 치료에 5600만원이 든다고 가정했을 때, 난치병 환자의 숫자가
얼마인지, 그리고 치료에 소용될 난자의 갯수가 얼마인지 따져보자는 뜻이겠죠.
글을 쓴 사람은, 이런 가정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보여주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과갤은 나름대로 진지한 사람들이 많은데, 표현법들은 상당히 짓궃고
장난기가 많이 섞여 있답니다. 요즘 인터넷 글쓰기의 한 풍경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