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서문 

    1992년 여름, 나는 아제르바이잔Azerbaijan과 아르메니아Armenia간의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트랜스코카시안Transcaucasian지역의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를 방문하면서 앞서 구유고슬라비아에서 관찰한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발칸의 과거로의 퇴행이 아니라 전세계의 탈 공산주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현재의 특수상황이었다. 집에서 만든 유니폼을 입은 젊은이들, 절망적인 망명자와 약탈자, 신참 정치인들이 자리잡은 크닌Knin(당시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안 공화국의 수도라고 스스로 공포한)의 거친 서부적 기류와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는 꽤 독특해보였다. 그 이후에 나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의 성격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아프리카에서의 체험적 경험을 가지고 있던 동료를 통해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와 같은 곳에서 발생한 전쟁들과 내가 동유럽에서 주목했던 점들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타지에서 겪었던 전쟁의 경험은 발칸과 구소련에 대한 나의 이해를 설명할 수 있게 하였다.

    내 중심 논의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특히 아프리카와 동유럽에서 새로운 종류의 조직화된 폭력organized violence이 최근 지구화시대의 한 흐름이 되었다는데 있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폭력을 '새로운 전쟁 New war'으로 묘사한다. '새로운 new'이라는 이 용어는 2장에서 개괄하게 되는 이전 시대로부터 도출된 지배적인 전쟁에 대한 인식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다음 장에서 좀 더 분명하게 구별되겠지만 새로운 전쟁이란 용어가 전쟁(보통 국가간, 또는 정치적 동기를 위해 조직된 정치적 집단들 간의 폭력으로 정의되어진), 조직화된 범죄(사적인 목적들, 통상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사적으로 조직된 집단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 그리고 인권에 대한 광범위한 폭력들(정부나 정치적으로 조직된 집단들이 개인에게 저지르는 폭력)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지만, 새로운 종류의 폭력의 정치적 본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쟁 war'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대부분의 문헌에서 새로운 전쟁은 내전, 아니면 '저 강도 전쟁 low-intensity conflict'으로 묘사된다. 설사 이러한 전쟁의 대부분이 지역화 되어있다고 해도, 이들은 무수한 다국적 관계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내부와 외부, 침략(해외로부터의 공격)과 억압(국가 내부로부터의 공격), 심지어 지역적과 지구적 사이의 구별은 지속되기 어렵다. '저 강도 전쟁' 이라는 용어는 게릴라 전투나 테러리즘을 설명하기 위해 냉전 시기에 미군에 의해 만들어졌다. 비록 냉전 시기의 소위 저 강도 전쟁으로부터 새로운 전쟁의 진화를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들은 사실상 포괄적인 용어안에 뭉뚱그려져도 구별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저자들을 새로운 전쟁을 사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전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폭력의 사유화가 이러한 전쟁의 중요한 요소인 반면, 실제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정부와 비정부, 비공식과 공식, 경제적인 이유로 또는 정치적인 동기로 행해진 것 사이의 구별은 쉽게 적용될 수 없다. 더 적절한 용어는 아마도 몇몇 논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탈(후기) 근대'일 것이다. '새로운 전쟁'과 같이, 그것은 이러한 전쟁을 고전적인 근대성의 특징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전쟁으로부터 구별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또한 가상의 전쟁과 사이버공간에서의 전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더구나 새로운 전쟁은 전 근대적인 요소와 근대적인 요소 또한 포함하고 있다. 결국 마틴 쇼는 '퇴보된 전투 degenerate warfare'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십세기의 총력전과 그들의 집단학살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용어는 특히 군사력에서의 국가체제의 쇠퇴를 주목하게 한다.

    미전략가들 사이에 군사혁신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 에 대한 논의가 있다. 이 논의는 정보 기술의 도래가 미래의 전투에 대한 심오한 암시와 함께, 탱크와 비행기의 출현만큼이나 의미심장하고, 심지어 마력에서 기계적인 힘으로의 이동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혁신은 군대와 전쟁의 세습된 제도적 구조에 속하는 논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쟁을 새로운 기술이 과거로부터 대체로 단선적인 확장 안에서 발전한다는 전통적인 모델로 상상한다. 더구나 그 기술들은 냉전 시대의 상상된 전쟁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유지하기위해 디자인되고 자국의 사상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이들은 대형의 공중폭격 spectacular aerial bombing을 선호했는데 , 왜냐하면 이것이 공중파괴라는 고전적 전쟁의 양상을 재현하면서 지상에서의 현실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보드리야르Baudrillard의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유명한 논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은 많은 시민 사상자를 초래했음에도, 상대적으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며 이라크에서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헤르체코비니아와 소말리아에서도 사용되었다.  

    군사혁신이 있었다는 시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사회관계에서의 변화가 새로운 기술의 사용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전투의 사회적 관계에서 혁명이지, 기술에서의 혁명이 아니다. 수백, 수천의 쿠르드인과 시아파가 죽은 1991년의 이라크전쟁의 경우도 웅장한 전시적 효과보다 나의 새로운 전쟁의 개념으로 더 잘 설명이 되는 실제적 전쟁들real wars이 있다.

    나는 새로운 전쟁이 지구화라고 알려진 과정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의미하는 지구화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문화적인 지구적 상호연결interconnectedness의 강화이다. 내가 근대 혹은 그 이전의 시기에 그 근원이 있다는 논의를 받아들이더라도, 나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지구화를 최소한 부분적으로 정보 기술의 혁명과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처리에서의 극적인 향상의 결과로서 설명될 수 있는 질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상호연결의 심화 과정은 통합과 분열, 균질화와 다양화, 지구화와 지역화 모두를 포함하는 모순적인 과정이다. 새로운 전쟁은 종종 지구적 문제world affairs의 과도기에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힘의 공백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냉전 종결의 결과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잉여 무기의 유효,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신, 전체주의 제국의 붕괴, 초강대국에 의지하는 종속체제에 대한 지원철회와 같은 냉전종결의 결과가 새로운 전쟁의 중요한 방식으로 공헌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냉전 종결은 동시에 동부권이 영토 절대주권의 마지막 보루의 해체라는 피할 수 없는 지구화의 침략에 굴복하여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문을 연' 그 순간과 같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구화의 영향은 새로운 전쟁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가시적이다. 이 전쟁의 지구화적 실재는 국제기자, 용병부대와 군사고문, 이주자 집단의 자원봉사자와 진정한 국제 에이전시 부대인  옥스팜Oxfam,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s, 인권감시협회Human Rights Watch, 국제적십자the International Red Cross과 같은 비정부기구(NGO)들부터 유엔난민고등판무관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UNHCR), 유럽연합the European Union(EU), 유니세프the United Nations Children's Fund(UNICEF), 아프리카통일기구the 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OAU)와 유엔United Nations(UN)과 같은 국제기구와 평화유지군까지 포함하는 범위에서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전쟁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고, 팩스, 이메일과 위성 텔레비전에 접근성을 가지고 있으며, 달러나 독일 마르크 또는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지구화된 계급의 일원과 지구화 과정에서 배제되고 전자의 박애주의적 도움을 받거나 그들이 팔거나 교환한 것으로 살아가며, 길 위의 바리케이드, 비자와 여행 경비에 의해 활동이 제한되는 사람들, 그리고 포위, 강제된 기아, 지뢰 등의 희생자가 되는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종류의 지구적/지역적 분리를 함축하고 있다.

    지구화에 대한 연구의 주요한 관심은 영토에 근거한 주권의 미래에 대한- 즉, 근대 정부의 미래에 대한- 지구적인 상호연결의 함의와 연결되어야한다. 새로운 전쟁은 정부의 자주성의 쇠퇴와 정부의 해체라는 몇몇 극단적인 경우에서 등장했다. 특히 이는 합법적으로 조직화된 폭력의 독점이 쇠퇴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 독점은 위에서부터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붕괴되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동안에 시작된 군사력의 초국가화에 의해 위에서부터 침식되어왔고, 냉전 동안의 블록 시스템에 의해서, 그리고 전후 시기에 발전한 무장력들 사이의 무수한 초국가적 결합들에 의해서 제도화되었다. 다른 국가에 대해 일방적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성장하는 군사 기술의 파괴성과 특히 군사부분에서의 국가와의 증가하는 연계성이라는 실질적인 이유에서 기인한다. 오늘날에는 1, 2차 세계대전 동안 경험한 것보다 더 파괴적일 수 있는 큰 규모의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는 개별적 정부나 일련의 정부 집단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 더구나 군사 동맹, 국제적인 무기 생산과 교역, 다양한 형태의 군사 협력과 교환, 무기 통제 협정 등이 지구적 군사 통합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국제적 규칙의 진보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일방적인 공격이 위법이라는 원칙은 1928년의 켈로그-브리앙Kellog-Briand 조약에서 처음으로 성문화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후, UN 헌장과 도쿄와 뉘른베르크Nuremberg의 전범 재판에서 사용된 논증을 통해 강화되었다.

    동시에, 조직화된 폭력의 독점은 사유화에 의해 침식된다. 정말 '새로운 전쟁'이 근대국가가 전개해온 과정들의 전복의 과정에 속하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2장에서 주장하듯이, 근대국가의 성장은 전쟁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지배자들은 조세와 차관을 증대하고, 비효율성, 부패, 범죄의 결과로서의 낭비를 제거하며, 무장군대와 경찰의 조직화, 사병철폐, 경제력과 인력 육성을 위해 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이 국가의 배타적인 분야가 됨에 따라 다른 국가에 대한 전쟁의 파괴성의 성장은 안보의 성장과 대응해갔다. 따라서 '시민'이라는 말은 국내를 의미하게 되었다. 새로운 전쟁은 경제의 하락으로 인해 세입이 줄고 조직화된 폭력의 증대와 준군사 집단의 등장, 정치적 합법성의 소멸의 결과로 급속히 사유화된 범죄, 부패, 비효율성, 그리고 폭력이 확산된 국가에서 발생한다. 외부적인 미개함barbarity과 내부적인 문명성civility 사이의 구별, 합법적인 무기 소지자로서의 전투부대와 비전투부대 사이의 구별, 군인이나 경찰, 범죄자 사이의 구별이 무너지고 있다. 국가간 전쟁의 잔인함은 아마도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조직화된 폭력의 새로운 유형은 더욱 만연하게 되겠지만 아마도 덜 극단적일 것이다.

  3장에서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전쟁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을 새로운 전쟁의 주요 특징을 설명하기위한 예시로 사용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은 다른 지역에서의 전쟁과 많은 특징들을 공유한다.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예외적이다. 그것은 세계적 관심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어떤 새로운 전쟁보다도 많은 물자- 정부, 비정부적인- 들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일면으로는 이것이 사례 연구로서 전형적이지 않음을 뜻한다. 반면에 그것은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상이한 경험들이 도출되는 일반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예가 되고, 동시에 새로운 전쟁을 관리하는 다른 방법들이 실험되는 연구실이 된 것이다.

    새로운 전쟁은 목표, 전투수단, 자금조달 방법에서 이전 전쟁과 대비될 수 있다. 새로운 전쟁의 목표는 이전 전쟁의 지정학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목표와 대조적으로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에 대한 것이다. 4장에서 나는 지구화의 맥락에서 이전 시기의 영토적/이데올로기적 분할이 내가 세계시민주의라고 부르는 보편주의자, 다문화적 가치들을 포함한 것과 특수주의적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particularist identities 사이에서 등장한 정치적 분할에 의해 대체되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분할은 지구화의 진행부분과 여기서 배제된 두 부분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분할의 두가지 방식)이 동일하게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지구화된 계급은 배타적 정체성에 기반한 초국적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이다. 반면에 지역적 수준에서 분리주의 정치를 거부하는 용감한 개인들도 많다.

    나는 분리적 정체성 - 국가, 종족, 종교, 언어적 - 에 기반한 그 주장이 정체성의 정치에 의해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정체성의 충돌을 포함한다. 그러나 나의 관점은 이러한 이전의 정체성들이 국가 이익의 개념이나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하는지에 대한 미래지향적 사고와 관련되어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유럽의 민족주의나 탈식민적 민족주의는 해방운동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는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과 관련된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한 개념들의 표지들에 기반하여 힘을 북돋는 주장에 대한 것이다. 때론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는 냉전이나 식민주의에 속박된 이전의 증오들의 부활일뿐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의 정치의 서술이 기억과 전통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1세대 탈식민 지도자들의 국가 건설 수사학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과 같은 정치적 합법성의 실패라는 상황에서 재창조되었다. 이러한 퇴행적 정치 프로젝트는 미래지향적 프로젝트의 부재 속에서 등장한다. 모든 것에 열려있고 따라서 통합하는 경향이 있는 정치와는 달리 정체성의 정치의 이러한 유형은 태생적으로 배타적이며 따라서 분열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지구화와 관련된 정체성의 정치의 새로운 흐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첫 번째 흐름은 지구적-지역적, 국가적-초국가적인 것이다. 다수의 경우, 향상된 교통, 통신으로 영향력이 매우 강화된 주요한 이주자 공동체들이 있다. 발전한 산업국이나 산유국에서 이질적인alienated 이주자 공동체는 계획과 자금과 기술을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아주 다른 상황에 그들 자신의 환상과 좌절감을 강요한다. 두 번째로, 이 정치는 새로운 기술의 사용을 가능케 한다. 미디어에 의해 정치적 동원의 속도는 급속히 증가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TV와 라디오, 비디오의 영향력은 거대하다. 새로운 정치의 주역들은 특수한 문화적 정체성의 상표를 드러내는 표지로 구성된 지구적 대중 문화의 상징- 벤츠, 롤렉스 시계, 레이반 선글라스- 들을 보여준다.

    새로운 전쟁의 두 번째 특징은 전투 방식의 변화이다. 새로운 전쟁의 전략은 게릴라전과 게릴라 진압군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비록 그들은 매우 다르지만. 통상적인 전쟁에서 목표는 영토의 포획이다. 군사적인 의미에서 전투는 전쟁의 중대한 장encounter이다. 게릴라전은 전쟁의 일반적인 특징인 군대의 대규모의 밀집을 피하는 방법으로 발전해왔다. 게릴라전에서 영토는 군사적 진출보다는 주민들의 정치적 통제를 통해 획득된다. 그리고 전투는 가능한 피한다. 새로운 전쟁 역시 전투를 피하고 주민들의 정치적 통제를 통해 영토를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게릴라전은 최소한 이론적으로 마오쩌둥과 체 게바라와 관련되어있고, '가슴과 마음hearts and minds'을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전쟁은 진압군으로부터 '공포와 증오fear and hate'를 심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요의 기술을 빌려온다. 목표는 모든 이들의 상이한 정체성identity과 의견들을 제거함으로서 주민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쟁의 전략적 목표는 정치적, 심리적, 경제적인 위협 기제인 집단학살, 강제적 재정착과 같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민 추방이다. 이것이 이러한 모든 전쟁들에서 피난자, 이주자들이 극적으로 증가하고 대부분의 폭력이 민간인civilian들에게 행사되는 이유이다. 세기의 전환기에 민간인 사상자에 대한 군인의 비율은 8:1이었다. 오늘날 이는 거의 역전되었다. 즉 1990년대 전쟁에서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간의 비율은 대략 1:8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성문화된 전시법과 전쟁의 고전적 규약에 따라 금지된 비전투원에 대한 잔혹한 행위, 포위, 역사적 기념물 파괴와 같은 행위들이 이제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 전략의 핵심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낡은 전쟁의 전형인 종적으로 조직된 위계적 단체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런 단체들은 준군사조직들, 지역 군벌들, 범죄집단들, 경찰력, 고용된 무장력과 반체제적 단위들을 포함하는 정규군과 같은 서로 다른 종류의 집단들의 이질적인 범위까지 포함하는 전쟁을 수행한다. 조직상의 관계로 그것들은 매우 분산되어있고, 대립과 협력이라는 반대되는 측면의 혼합을 통해서 작동한다. 그들은 우리가 '고급기술' - 예를 들어 스텔스 전폭기나 크루즈 미사일- 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발전된 기술을 사용한다. 지난 50년 동안 경무기는 탐지불가능한 지뢰, 가볍고 사용하기 쉽고 정확해서 아이들에 의해서도 작동가능한 작은 무기들과 같은 중요한 발전을 이루어왔다. 이러한 발전은 동시에 이질적인 전투집단들 사이의 협상, 중재, 조정을 위해 휴대폰이나 컴퓨터 연결망과 같은 근대적 통신수단의 사용을 가능케 한다.

    새로운 전쟁이 이전의 전쟁과 대조적인 세 번째 특징은 내가 새로운 '지구화된' 전쟁 경제global war economy라고 부르는 것으로, 5장에서 전투 방식과 함께 자세히 서술했다. 새로운 지구화된 전쟁 경제는 1,2차 세계대전의 전쟁 경제와 거의 정확히 대조를 이룬다. 세계대전의 전쟁경제는 중앙집중화되고centralized 총체적이고totalizing 독재적autarchic이었다. 새로운 전쟁 경제는 분산적이다. 전쟁에의 참여는 낮고 실업은 극히 높다. 뿐만 아니라 이런 경제들은 외부적 자원resources에 강하게 의존한다. 새로운 전쟁 경제에서는 지구적인 경쟁, 물리적 파괴, 정상적인 무역의 중단 등으로 인해 국내 생산은 극적으로 줄어들고, 이에 따라 세입 역시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 단위들fighting units은 약탈, 암시장 혹은 외부로부터의 원조를 통해 자금을 스스로 조달한다. 후자(외부로부터의 원조)는 이주자들로부터의 송금, 인도주의적 원조에 대한 '과세', 주변 국가로부터의 원조, 무기나 마약 혹은 석유나 다이아몬드처럼 가치있는 상품들에 대한 불법 무역과 같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 모든 원천들은 반복되는 폭력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의 논리는 이런 전쟁 경제의 작동위에 세워져있다. 전쟁으로 둘러싸여 사회적 관계를 퇴보시키는 이런 상황은 난민, 조직적인 범죄, 소수민족 등을 통해 퍼져나가는 경향이 있다. 발칸지역, 코카서스지역,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의 뿔 지역(북동부, 소말리아인근), 중앙아프리카, 서아프리카 같은 지역의 전쟁 경제 집단, 혹은 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경제 집단들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을 하는 여러 당파parties들은 공포와 증오를 뿌린다는 목적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불안정하고 의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서 서로 도와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실제로 동유럽과 아프리카 모두에서, 군사·경제적 양 측면에서 상호 협력하는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정치를 신봉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 공공의 도덕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종종 최초의 공격의 목표가 되는 민간인 중에 포함된다. 따라서 새로운 전쟁은 서로 다른 언어, 종교, 민족적 집단 사이에서 출현하지만, 이 전쟁들은 모두 분리적 정체성의 정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문명과 다문화주의의 가치를 억압하는 점에서 연합 전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전쟁은 배타주의와 세계시민주의 사이의 전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전쟁에 대한 이런 분석은 갈등conflict을 다루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6장에서 이를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들은 광범위한 사회, 경제적 가지들 사이의 전투이기 때문에 포괄적인 접근은 실패하기 쉽다. 1990년대 초에는 인도주의적 중재가 민간인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단히 낙관주의적 전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인도주의적 중재의 수행은 새로운 전쟁의 특징에 대한 근시안으로 인해 제한되어왔다고 주장하고 싶다. 전임자로부터 인계된 권력 위임mandate의 존속, 새로운 전쟁을 전통적인 개념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은 인도주의적 중재가 전쟁을 막는데 왜 실패했는지 뿐만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중재가 사실상 전쟁이 유지되도록 도와왔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전쟁을 하는 당파에게 중요한 수입의 원천이 되는 긴급 구호 식량의 제공, 전쟁범죄자들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는 전범의 정당화 시도, 배타주의자들의 권력 장악exclusivist assumption에 기반한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려는 노력의 사례들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장기적인 해결책의 열쇠는 합법성을 회복하는 것, 공적인 권위로 조직화된 폭력에 대한 통제를 재건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역적이든, 국가 차원이든, 지구적 차원이든 말이다. 이것은 공적인 권위에 대한 신뢰를 다시 세우고 이를 지지하도록 하는 정치적 과정인 동시에 이 공적인 권위가 작동할 수 있도록 법적 규칙을 다시 만드는 법적 과정이기도하다. 이는 특수성의 정치에 기반해서는 달성될 수 없다. 지구적/지역적인 분리를 만나게 하고, 여러 가지 가치들이 민주적으로 놓여지는 것을 포함하여 합법성을 다시 세울 수 있는 대안적인 미래지향적 세계시민주의적 정치 프로젝트가 배타주의 정치에 맞서 제안되어야 한다. 모든 새로운 전쟁에는 배타주의 정치에 반대해서 투쟁하는 지역적인 사람들과 공간이 있다. 스스로를 후치Hutsis라고 부르면서 대량학살에 맞서 자신들의 지역공동체를 지키는 후투족과 투치족,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특히 사라예보와 투즐라에서 시민의 다문화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민족주의자, 북서소말리아 지역에서 평화를 협상하는 원로들이 그 예이다. 필요한 것은 지역에서 문명을 지키고자하는 사람들과 폭력을 제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을 수호하는 초국가적 단체들 사이의 연대이다. 이런 정책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구성요소를 포함할 수 있다. 이것은 전쟁에 대한 법과 인권에 대한 법을 모두 포함하는 국제 법에 바탕을 둔 세계시민주의적 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국제법의 틀 내에서 작동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평화를 지키는 것은 세계시민주의법 시행이라고 다시 개념화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새로운 전쟁은 전쟁, 범죄, 인권 침해의 혼합체이기 때문에 세계시민주의법 시행의 행위자는 경찰과 군대의 혼합체여야 한다. 나는 또 시민들 사이의 관계와 제도적인 관계라는 사회적 재건을 포함하는 재건의 새로운 전략이 구조적인 조장이나 인도주의적 접근이라는 현재의 지배적인 접근방식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지구적 질서에 대한 논쟁과의 관계에 대해 썼다. 새로운 전쟁이 아프리카와 동유럽,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지구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지구화와 전지구적인 네트워크가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고, 그 전쟁들이 전지구적으로 보도되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묘사한 새로운 전쟁의 특징들은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도 발견된다. 미국의 우익 민병대militia는 동유럽이나 아프리카의 준군사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사설 보안업체 직원이 경찰보다 2배이상 많다고 보고되고 있다. 정체성의 정치의 돌출과 기존의 정치에 대한 환멸의 증가는 남과 동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다. 서유럽과 북미의 도시 내부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전쟁으로 묘사될 수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선진산업세계는 통합되고 세계의 가난한 지역은 파편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북에서는 통합의 경향이 강하고 남과 동에서는 분산의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세계의 모든 부분이 통합과 분산의 결합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한다.
    이제 지구상에서 한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부터 격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조직화된 폭력의 특징 변화에 대한 나의 분석이 현실에 기반한 것이라면, 우리가 이슬람 대 기독교 식으로 정체성에 기반한 양극 혹은 다극의 세계질서를 다시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아프리카나 동유럽 지역같은 곳에서 무정부주의가 대안으로 포함될 수 있다는 생각 모두 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 당연히 그래야하겠지만 이것이 세계시민주의적 프로젝트가 그 적용에 있어서는 지역적이거나 지방적이라 하더라도 지구적인 프로젝트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이 책은 주로 새로운 전쟁의 직접적인 경험, 특히 발칸 지역과 트랜스코카시안 지방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헬싱키 시민의회HCA의 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지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고, 헬싱키 시민의회의 지역 지부에서 일하는 활동가나 비판적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HCA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의 대리인 자격을 부여받아서 전쟁 동안에 지역의 활동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그 나라들을 직접 가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국제 사회의 정책을 수행할 책임이 있는 다양한 단체들에 접근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HCA의 의장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런 생각들을 설명하고 지역 부문에 대해 각국 정부나 EU, NATO, OSCE같은 국제 기구들에게 제안하는 것이 내 임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학문적으로 관계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는 동료들과의 교류와 독서, UN 대학과 유럽위원회의 조사 프로젝트를 통해 추가된 사항들을 알게 되었고 이를 내용에 포함시켰다. 특히 이제는 매일 인터넷을 통해 받을 수 있는 전자메일과 뉴스 요약본, 도움을 요청하는 탄원과 모니터링 리포트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정보를 제공하고, 나의 주장을 실례를 통해 뒷받침하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이 책의 목표가 단순히 정보전달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목표는 다른 관점, 비판적인 정신을 가진 개인의 현장에서 나온 다른 관점, 다양한 국제적인 토론의 광장forum에서의 나의 경험들을 통해 형성된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세계의 많은 부분을 파괴하고 있는 비극이 끝나려면 반드시 착수되어야 하는 폭력과 전쟁의 형식을 재개념화 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나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실질적인 제안이 유토피아적으로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확신이라기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암울한 미래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제안한다.

◈ 번역: 적극적평화행동(평화네트워크 회원 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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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란에 다른 사람의 번역글을 올리는 건 처음인데, 아주 좋은 연재글이 있어서 퍼옵니다. Mary Kaldor 의 New and Old Wars: Organized Violence in a Global Era라는 책의 번역인데, [평화 네트워크]에서 연재를 시작했군요. 반전평화운동을 위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서문] 연재를 시작하며


 

 

 

 

 

 

 

 

 

 

 

 

 

 

Mary Kaldor 의
『New and Old Wars』를 번역하기까지

적극적평화행동
(평화네트워크 회원 소모임)



우리가 ‘반전-대항지구화’라는 이름으로 모인 것은 작년 10월이었다. 2004년 초에 인도에서 열렸던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겠다고 무턱대고 모였던 것이다. 우리가 처음 모였을 때, 공동의 화두는 막연한 ‘반전’과 ‘대항지구화’ 정도였다. 이라크 전쟁 반대와 세계사회포럼의 기본정신이라고 생각했던 아래로부터의 지구화, 그리고 전쟁과 지구화는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가 전부였다. 사회포럼에 그냥 구경만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 시작한 워크샵 준비는, 우리에게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워크샵 주제를 정하기에 앞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일회성 행사가 아닌 실천적인 국제연대를 만들어 보자, 한국의 문제를 지구적인 의제로 제시하자, 그리고 사회포럼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평화운동을 펼쳐보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동북아, 한반도에 일단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우리의 관심을 분쟁지역이 아닌,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곳으로 돌린 것이었다. 당장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곳, 전쟁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준비가 이루어지는 일상이 우리의 초점이 되었다. 반전을 넘어서 전쟁과 폭력의 요소를 제거해나가는 ‘적극적 평화’라는 개념을 자연스레 만나게 되었고, 인도로 떠날 즈음 모임의 이름은 ‘적극적 평화행동’이라고 바뀌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전쟁의 원인을 제국주의, 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전 세계적인 반자본주의 투쟁을 주장하는 논자들의 이야기는 환원론적으로 느껴졌고, 무엇보다 구체적 실천에 있어 공허했다. 결국 ‘MD(Missile Defense)와 북핵’이라는 주제로 워크샵을 준비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포럼 이후 한국에서는 30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추가파병을 막기 위한 파병반대 운동이 한창이었다. MD 문제에 대한 구체적 개입지점을 잡지 못하던 우리는 한국인 인질 살해 사건, 이라크 포로  수용소 학대 사건 속에서 파병반대 운동에 힘을 보탰다. 그러던 중 지속적인 세미나를 진행하며 Mary Kaldor의 『New and Old Wars』를 읽게 되었다. ‘지구화 시대의 조직화된 폭력’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지구화 시대의 전쟁과 폭력의 양상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을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일환이자 통치전략이라고 거칠게 정리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우리들로서는 더욱 그랬다. 영어 책 세미나 하는 김에 뭔가 성과물을 남기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세미나 겸 번역은 고난의 시작이었다. 많이 부끄러운 번역이지만, 이 글을 계기로 지구화 시대 새로운 전쟁에 대해 같이 생각해보게 되기를 바란다.


이른바  ‘새로운 전쟁(New Wars)’

저자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주로 아프리카와 동유럽에서 나타난 ‘조직화된 폭력의 양상’을 ‘새로운 전쟁’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이전 문헌과 연구에서는 ‘저 강도 전쟁(low-intensity conflict)’ 또는 내전이라고 묘사되어왔다. 이러한 폭력들은 보통 국가간 무력 분쟁을 지칭하는 ‘전쟁’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범죄 또는 내부분쟁이라고 왜곡되어 왔다. 하지만 Kaldor는 ‘조직화된 새로운 폭력’은 매우 정밀한 정치-문화 이데올로기 속에서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다양한 세력들과의 연계로 치명적인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이를 단순히 국가 내의 범죄나 내부갈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폭력의 양상들을 ‘새로운 전쟁’이라고 규정하며, 이를 범죄, 저 강도 전쟁은 물론이고 전통적인 의미의 전쟁, 낡은 전쟁(Old Wars)과도 구분한다. 또한 그렇게 정의된 ‘새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분쟁들의 올바른 해결과 재발방지를 위한 실천적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글의 후반부에 UN의 개입방법, 평화유지군의 역할 등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서술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전쟁은 목표, 전투방식, 전쟁경제에 있어 낡은 전쟁과는 다른 특징들을 보인다. 먼저 목표는, 분리적 정체성-국가, 언어, 종족, 종교-에 기반해 집단을 강화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까지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비롯한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식민지 해방이나, 국민국가의 건설을 추구하며 통합적인 방향으로 작동했다면, 새로운 전쟁은 분리적인 방향으로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분리적 정체성에 기반해 집단을 강화하고자 하는 목표는 전투방식의 변화 역시 수반한다. 20세기의 세계대전이 가장 완전한 방식의 국가 간 총력전을 실현했다면,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새로운 전쟁은 인종청소, 강제이주와 같은 방법들을 사용한 주민 배제를 이루어낸다. 따라서 새로운 전쟁에서는 국가나 집단 전체의 힘끼리 겨루는 총력전이 아니라, 소수의 무장집단에 의한 특정 지역의 주민 배제와 소거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대부분의 폭력은 민간인을 겨누게 되며, 실제 전투 횟수와 참가 인원은 소수이다. 국가나 특정 집단의 모든 힘을 쥐어짜내는 총력전이 아닌 새로운 전쟁에서의 전쟁경제 역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정상적인 경제활동, 사회조직이 붕괴된 ‘새로운 전쟁’의 사회에서는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자원이 생산될 수 없다. 따라서 전쟁경제의 자원은 대부분 외부로부터 들어온다. 국제기구를 통한 원조, 해외 집단을 통한 원조, 불법무역을 통한 이익이 전투 집단들의 자원이 되며, 전투가 격렬해지고 지속될수록 이들의 자원 역시 풍부해진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세계시민주의적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며, UN, EU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개입방식이 평화유지에서 세계시민주의적 법-강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문의 국제 면에 자주 등장하는 크고 작은 분쟁들과, 끔찍한 인종청소에 경악했던 구(舊)유고 전쟁들에 대해 그 발생과 작동방식, 해결방향까지 일목요연하게 읽어낼 수 있었던 ‘새로운 전쟁’의 개념 설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문제는 ‘새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을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트랜스코카시아, 발칸, 구소련, 아프리카를 벗어나서 적용할 때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동북아(한반도) 위기 등에서 저자가 이야기한 ‘새로운 전쟁’의 특징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저자는 새로운 전쟁이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며 서유럽이나 북미의 대도시 내부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설명은 친절하지 않다. 더 이상 지정학적인 의미에서의 진영 구분이 불가능하며, 지구화의 물결은 지구 곳곳에서 넘실대고 새로운 전쟁의 요소와 특징들은 어디에서든 발견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특정 지역을 넘어서는 다양한 사례 연구와 지구화 시대 폭력의 양상에 대한 일관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지구화 시대를 가로지르는 동시대의 비동시성

저자는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인권과 지구적 통치(Global Governence)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이자, 헬싱키 시민의회(HCA)의 의원으로 활동하는 활동가이다. 2차례의 세계대전과 동구권 붕괴를 거치면서 EU로의 통합을 가속화하고 있는 유럽의 상황과 그에 기반 해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저자의 의견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3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한국전쟁 이후 양 진영은 핵전쟁의 공포 속에 40여 년 동안 냉전을 치뤘으며, 한반도는 아직도 53년 정전협정 이후의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 일본, 미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뇌관으로 자리 잡은 한반도는 분명 새로운 전쟁의 모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20세기 초중반의 군사적 대립을 쉽게 떠올리게 한다. 중국-대만 간의 군사적 긴장은 높아져 가고, 북한을 핑계로 미국-일본-한국을 한 축으로, 중국-러시아를 다른 축으로 전개되고 있는 군비경쟁은 이미 다른 의미에서의 전쟁인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지구화의 주도 세력과 배제된 부분, 세계시민주의 세력과 정체성의 정치 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동북아시아의 모습은 상호 연결된 지구화의 주도 세력들이 정체성의 정치를 앞장서 펼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핵무기라는 큰 변수가 있지만, 유럽처럼 정치, 경제적 기능의 통합력이 상승하는 것이 곧바로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는 경제적 관련성만을 보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했으며, 현재 긴장이 높아져 가는 중국과 대만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경제교류를 하고 있다. 이처럼 동북아의 상황은 유럽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어떨까? 이 역시 국가 주권의 붕괴와 그에 따른 초국적 네트워크 속에서 진행되는 전쟁이라는 새로운 전쟁의 모델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석유를 위한 제국주의적 전쟁이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처럼 지구화의 주도 세력이자 세계시민주의와 친화성을 갖는 EU가 자리하고 있고, EU 주변의 발칸, 트랜스코카시아, 구 소련 지역 등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전쟁이라는 구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상황들과는 많이 다르다.

그렇다면 저자의 논의는 지역적 사안에 그치는 것일까. 저자는 새로운 전쟁은 분명 지구적 현상이라고 단언한다. 우리 역시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양상에서 새로운 전쟁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분리장벽, 유대인 정착촌 건설, 주민 강제 이주 등은 인종적, 종교적 정체성에 기반한 새로운 전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라크라는 국가 간 전쟁의 외관을 띄었지만,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계적 네트워크 조직,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부시 행정부의 기독교 근본주의적 성격 역시 새로운 전쟁과 관련을 가진다. 또한 미국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지만, 미군정이 이라크에서 각종 이권 배분을 통해 시아파, 수니파 갈등을 부추기고 종교 전쟁의 가능성을 언론을 통해 흘린 것은 전형적인 새로운 전쟁의 기반 만들기였다. 동북아시아의 경우 국가 간 대립이 당면 현상이지만, 장기적으로 중국 내 소수 민족 분쟁, 통일을 염두에 둔다면 북한 주민과 남한 주민 간의 대립, 상당한 정도로 진척되고 있는 계급 간 분리 등도 예상할 수 있다. 결국 국가 권력, 치명적 폭력의 유무와 국제기구의 개입 여부 등이 새로운 전쟁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지구화 시대의 조직화된 폭력’은 지구화가 야기한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분리에 기반한 폭력으로 넓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지구화는 정치, 경제,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가장 먼저 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 붕괴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 경제적 변화에 직면했던 동유럽의 국가들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다음은 7, 80년대 선진국으로부터 무상원조, 차관을 제공받았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많은 나라들이 IMF나 World Bank 등의 원조를 받았고, 이는 국가의 긴축 재정과 개입력 약화를 불러왔다.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나라에서 국가 기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종국에는 무장력의 독점이 깨지면서, 저자가 묘사하는 새로운 전쟁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특히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석유와 각종 광물에 대한 이권 다툼 속에서 선진국의 자본에 의해 무정부 상태와 살육전이 조장 된다.1) 국가의 붕괴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지구화,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계급 간 분리, 갈등은 선진국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사설 보안업체 직원이 경찰의 2배를 넘고, 세계 각지의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계급 간의 분리는 오래된 이야기이다.2) 하지만 저자는 지구화가 야기한 새로운 전쟁의 양상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략하고 있다.


세계시민주의적 접근이 가지는 한계들

저자가 ‘새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얻고자 했던 바는 국제분쟁 해결방식의 혁신이었다. ‘새로운 전쟁’은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분쟁 당사자들이 협상자가 되는 모순, 그러한 협상 테이블이 그들을 더욱 성장시킬 뿐이고 폭력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 현재의 방식대로 투여되는 국제원조는 오히려 전쟁원조가 되고 있다는 총체적인 문제제기를 가능케 한다. 저자는 대안으로 1)합법성의 재건 2)인도주의적 지원에서 재건으로 3)세계시민주의적 법 강제를 제시한다. 이 때의 합법성은 세계시민주의적이며 다문화주의적인 권력을 뜻한다.

이러한 대안의 문제는 먼저 실행주체에 있다. 세계시민주의 세력이 실행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저자가 현실적으로 목표로 두고 있는 것은 UN, IMF, WB의 개혁이다. 하지만 이들이 바로 새로운 전쟁을 야기한 지구화의 주체이다. 결자해지의 원칙을 적용하기엔 상대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특히 당장의 비인도적 범죄와 폭력에 대해서는 UN이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긴 하지만, 인도주의적 지원을 재건으로 바꾸기 위해 IMF, WB가 자신들의 기조를 바꾸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저자는 지구화가 야기한 새로운 전쟁의 양상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은데 이는 자신의 결론과 배치되는 논거들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리고 평화유지에서 세계시민주의적 법 강제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면서, 평화유지군의 적극적인 행동, 특정 지역에 대한 신탁통치를 예로 들고 있다. 이러한 강력한 수준의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UN의 위상이 훨씬 강화되어야 하지만, 이는 현재의 수준에서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강화된 국제기구는 반드시 그에 걸 맞는 민주적 절차와 통제, 참여가 가능해야 하지만 대안 세력의 힘이 약한 지금은 오히려 강화된 국제기구가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라크에서는 이미 ‘정체성의 정치’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군을 평화유지군으로 돌리면, 그 평화유지군이 세계시민주의적 법-강제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국제기구나 국제사회의 할 일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과 학살을 멈추도록 적절한 무력을 사용하고 그 지역의 자치적인 발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제한된다면, 세계시민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수립하는 것이 곧바로 서구적 가치를 이식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안에서 NGO나 시민단체가 주체가 되어서 그 지역의 ‘사람’들과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연계된다면? 하지만 좋게 말해서 법-강제이지, 사실은 더 압도적인 무력의 사용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개입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문제는 폭력의 사유화인데, 자치와 공동체만으로는 맞설 수 없는 상황이 있지 않은가? 무력이 개입된다는 것은 한쪽 편을 든다는 것이다. Kaldor는 무장개입이 가져왔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권관점에서 개입하지 않고, 그걸 벗어던지고 개입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과연 가능할까? 무력에 무력으로 맞서는 것은 정당한가? 무장력으로 인한 분쟁에 대한 해답이 비폭력 투쟁일 수 있는가? 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명확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새로운 전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우리는 많은 질문들을 안고 이 책을 읽었고, 여전히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이 책이 지구화와 전쟁, 평화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많은 질문들을 던지기를 바란다.



1) 현재 벌어지고 있는 수단 다르푸르에서의 인종청소는 수단 남부에서의 유전개발에 투자하는 중국 국영석유공사가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주거지역의 분류는 강남구 CCTV 설치, 타워팰리스의 요란한 보안절차와 같이 더욱 치밀하게 진행된다. 남미에서는 광범위한 부유층 납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헬기를 타고 다닌다. 사실상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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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9-2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퍼가서 나중에 읽을게요^^

chika 2004-09-20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

balmas 2004-09-20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러세요.
chika님은 처음 뵙네요.^^
 

* 이리가레의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를 같이 읽으려고 수업게시판에 올려 놓았더니, 발제를 맡은 학생들 중 한 사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곳들이 있다고 질문을 보내왔습니다. 그 질문들에 대해 몇 가지 답변을 해서 보내줬는데,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은 단지 학생들만의 어려움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답변이지만, 얼마간 읽는 데 도움이 될 듯해서 그 학생이 보내온 질문 내용과 그 질문에 대한 몇 가지 답변을 같이 올립니다.

각 질문에 묻고 있는 구절은 제가 따로 원문에 밑줄과 번호 표시를 해두었으니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I. 질문들

1) 2p "문제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休止)(또는 보편성과 휴지)이다(왜냐하면 이는 순수 진리를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러한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
 : 무엇이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인지…주어를 잘 모르겠어요. =_=;; 주어를 '매장'이라고 본다면, '휴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걸리거든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이라는 보편성을 휴지(하던 것을 그치다, 라고 국어사전엔 나오던데)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매장은 보편성을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환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했거든요. 즉 생물이라면 누구나 죽게 된다는 죽음의 보편성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인간존재의 보편성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매장을 통한 보편성의 고양이라고 (줄친 것 뒤 문장은) 읽었었는데 줄친 문장에서 말하는 보편성이 어떤 보편성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 가서 문맥이 연결이 안돼요.=_=;; "보편성의 휴지"와 "보편성과 휴지"도 해석이 달라질 것 같은데 주어 문제랑 보편성 문제가 걸려서 말로 잘 설명을 못 드리겠네요.=_=;;

2) 2p  "이러한 지고한 의무가 신의 법, 또는 독특한 개인에 대한 실정적인positive 윤리적 행동을 구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의 법은 독특한 개인에 대한 보호와 배려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를 부과한다. 사실 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성원은 독자적인 존립과 고유한 대자적 존재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정신은 여기서 자신의 실재성 또는 자신의 현존재를 재발견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은 전체의 힘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정신은 이 부분들[각각의 성원]을 부정적인 일자(一者, un) 안으로 결집시킨다."
: 안티고네의 매장 행위(의무)가 "positive한 윤리적 행동을 구성한다"고 나온 것으로 보아 그것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negative를 썼다고는 생각이 되는데, (물론 선생님이 번역하신 것처럼 '실정적인'의 뜻으로 positive를 읽는다면 '부정적인'이 positive의 대구가 아닐 수도 있지만요=_=;;) 여기서 '부정적'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_=;; 생산적인 권력이 아니라 금지하는 권력으로 작용하는 일자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건가요? 그렇다면 '지고한 의무'가 positive로 평가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행위성의 다른 관점-하느냐/하지 못하느냐- 때문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읽어선 안 될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_=;;;; 선생님 번역하신 대로 '실정적인'이라고 읽는다면 첫 문장은 이해가 가는데, '부정적인'의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3)3p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를 욕망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이러한 대자적 존재 tre-pour-soi를 주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에 대해 자유로운 개체성들로 존재한다."
: 줄친 부분 이해가 안 가요.=_=;; '이러한'이 나오면 뭔가 앞에 설명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인데 설명될만한 문장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ㅠ.ㅠ 이 글에서 '대자적 존재'가 많이 나오는데 그 뜻을 명확히 파악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대자적 존재'(간단히 말해서 의식화된 존재, 라고 이해했는데)는 아닌 것 같고, 어머니와 자식 간의 이자적 존재가 아닌, 이미 상징계로 진입해서 소외된 상태인 존재들 간의 관계(원초적인 연결고리가 없는)라고 이해해도 되는 건가요? =_=? 하지만 이 정도 이해만으로는 오누이 사이에 대자적 존재를 주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ㅠ.ㅠ

4) 3p "또는 오히려 이는 오빠와 누이가 동일한 정자를 공유하고, 이에 따라 혈족관계[근친교배]에 (또다른) 균형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정념(수난, passion)을 통해 마법적인 정념[수난]과 균형을 맞춤으로써 결국 혈족관계가 마법적인 정념[수난]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인가?
: '마법적인 passion'이 무슨 의미인지…ㅠ.ㅠ 다른 정념은 또 뭔지…ㅠ.ㅠ "동일한 정자를 공유"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선 생명을 만드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 같고, (나아가 부권적인 혈통을 강조하는 것 같고) 이렇게 해석한다면 '마법적인 정념'이란 생명을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는 관점, 혹은 모계혈통(이나 모권제혈통)을 의미하고 혈족 관계가 결국 이것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얘기는 모계혈통에서 부계혈통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제가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어요.=_=;;

5) 5p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매우 연약한 표상들(대표들, repr sentations)만 지니고 있어서 그녀의 욕망은 이러한 징벌을 견뎌낼(지양할, rel ve) 수 없다."
: 어째서 그녀에게 사랑이 연약한 표상들만 지니고 있는지, 연약한 표상들이란 무엇을 말하는지요.=_=;;

6) 5p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자신에게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se donnant elle-m me la mort) 자신의 향락의 애도(또는 이 애도는 바로 그녀의 향락이 아닐까?)를 받아들인다."
: 제가 아직, 안티고네가 주이상스를 중심으로 읽는 논의들이 잘 납득이 안 가서(중간대체 레포트에도 그 혼란이 고스란히 있지만) 이해를 잘 못 하는 걸 수도 있는데요,
① 그녀의 죽음이 주이상스를 애도하는 것, 이라 읽는다면 결국 그녀는 주이상스에 다다르지 못했고 주이상스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을 받아들이는 행위로써 죽음을 선택했다는 얘기인가요? '애도'라는 개념이 끼어든다면 죽음으로써 그녀가 주이상스와 만나는 낭만적인(?) 결과 따윈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② 애도가 곧 그녀의 주이상스라면, 그녀가 그토록 자신의 죽음에 과도하게 의미 부여를 한 이유를 주이상스를 통해서 읽을 수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그래도 혼란스러워요. 제가 그동안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주이상스 개념이 다 엉터리였던 것 같기도 하고…-_-;; 안티고네를 어떻게 주이상스와 죽음충동으로 읽을 수 있는지 가르쳐주세요.

7) 6p "더 성마르고 더 충동적이며, 노여움에 못 이겨 자신의 핏줄들을 다시 열어놓으려고 할rouvrir les veines de son sang 인물이다."
: 핏줄들을 열어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질문이 너무 간단한가=_=;; 이 문장 자체를 이해 못했어요.=_=;;)

8) 7p "곧이어, 유사한 외관을 지닌 것(자아Moi)의 지위stase 안에 응고된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 이외에 다른 욕망을 지니지 않은 신이 도래할 것이다."
: "응고된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모르겠어요. 안티고네가 옹호한 신의 법, 혈족을 위하는 욕망을 뜻한다고 읽는다면, 국법보다 가족법을 우위에 둔 신이 도래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뭔가 역사가 흘러온 과정상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으니 이리가라이가 이런 뜻으로 말했다고 생각하기가 애매하고=_=;;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바로 앞 문장들은 크레온이 상징하는 공적 권력이란 것이 어떤 것들을 희생시키고 어떻게 은폐해서 이루어진, 사실은 개인적인 권력임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곧이어"라는 접속사로 따라 나올 문장들은 그러한 공적인 권력의 도래를 의미해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저 위문장을 해석해야할지 혼란스러웠거든요.

9) 8p "환원 불가능한 변증법의 히포콘드리아, 멜랑콜리아. 이는 피흘리는 십자가를 상기시키는 응혈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는 변증법의 보좌를 보장해주지만, 동시에 절대 정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무(한)정한 어떤 액체의 거품이 고난의 술잔에 넘쳐흐르리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 혈전(들), 림프(들)은, 만약 이것들이 아무런 분비물 없이도 치유될 수 있었다면, 정신을 (단지) 바위와 같은 고독과 결백함으로 남겨 놓았을 (뿐일) 것이다. 바위가 자신의 둘레 안에 여성성의 죽음을 감싸안고 입회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 여기서 얘기하는 히포콘드리아나 멜랑콜리아는 억압되어 응고된 피, 혹은 여성성(이리가라이는 피와 여성성을 자꾸 같은 것으로 놓고 읽히게 만든다고 생각되는데) 으로서 이전 단락에서 남성성이 자신을 "살아있는 자율적 주체성"으로 구성하는 변증법적 작용을 일으킬 동안 그 변증법을 지탱해주는 동시에 그것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저 줄친 문장은 이해가 안 가요.=_=;;

10) 9p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현실성과 순수한 파토스로의 타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
: 왜 여기서 '죄'라는 표현을 쓰는지, 왜 여성성이 저지른 죄가 가장 순수한 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여기서 '여성성'이라는 단어를 쓴 건 선생님이 설명하신 것에 덧붙여서, 남성성/여성성의 관계가 의식/무의식의 관계와 유사점을 가진다는 이유도 있었을 거라고 이해했거든요. 이 앞 단락에 나오는 남성의 죄-유죄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상징계 내의 주체가 가지는 비극성("하지만 곧바로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독특한 [남성] 존재가 유죄라거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보편적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비현실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는 그가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다음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자기 자신 안에서 단절되었음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범행의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으로 이해를 했는데, 여성성과 윤리적 의식의 연결 관계, 그 죄에 대해서는 감이 안 잡혀요.=_=;;

11) 12~13p "그리고 만약 이 점들 안에서, 곧 정액, 이름, 온전한 개체 안에서 이것들이 딛고 올라설 수 있는/이것들이 자신을 지양할 수 있는 대표적인repr sentatif 지주를 발견하는 게 가능하다면, 자율적으로 유동하는 피는 재통합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눈은 보기 위해서 (적어도 절대적으로는)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정신 역시 (자신을) 사유하기 위해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 눈과 정신이 여기에 나온 이유(시각중심주의나 로고스 중심주의와의 연결?), 피를 요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왜 눈과 정신이 피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문맥을 이해 못하겠어요. 아울러 피를 여성과 연결시켜 읽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그건 또 나름대로 여성들에게 가부장제가 할당해온 자리는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고요.

II. 답변들

질문이, 정말, 많네 ... ^^ 그렇지만, 이게 *** 씨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번역이 불명확한 곳도 있고, 텍스트가 워낙 난해한 데다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도(또 보부아르의 헤겔 해석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도) 텍스트 안에서 이를 명료하게 밝히지 않고 논의를 전개하는 이리가레의 죄(^^)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고.
  책을 같이 보면서 답변을 해야 좀더 친절한 답변이 될 것 같은데, 내가 책을 학교에 두고 와서 일단 번역만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만 답변을 해보도록 합시다.
   
  1) 이 문장에서 주어는 "문제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 ... 라고 주장함으로써"이고 술어는 "이러한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라고 봐야지요. *** 씨가 잘 모르겠다고 하는 '주어'는 여성 또는 안티고네라고 봐야죠. 그리고 "휴지"는, 지금 책이 없어서 원어가 뭔지 확실치 않긴 하지만, 아마도 "repos"인 것 같아요. 이 단어는 영어로 하면 "rest"에 해당하는데, "정지", "중단" 같은 뜻이죠. 여기서 정지되고 중단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의식이 자기 의식으로 전환되는 보편성의 운동이고, 여성은 자연적 죽음 때문에 이러한 운동을 완성하지 못한 죽은 남자가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헤겔에 따르면 매장은 자연적 죽음을 맞은 남자(폴뤼네이케스)가 우연적인 자연적 죽음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개체성을 얻게 되는 계기이죠. 여자(안티고네)는 죽음을 무릅쓰고서 이러한 매장을 수행하기 때문에, 인륜성의 필수적인 계기가 되는 거고요.  
  
  2) "실정적인"이라는 말은 "실정법"에서 쓰이는 것처럼 "한번 확립되어 정해진 것"이라는 의미도 있고, "긍정적인"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데, "실정적인 윤리적 행동"이라는 말은 이 후자의 의미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군요. 반대로 다음 문장의 "부정적인"이라는 말은 국가의 법, 곧 크레온의 법이 이처럼 독특한 개인에 대한 매장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뜻이죠. 말 그대로 매장이 필수적인/긍정적인 윤리적 의무다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부정적인 일자"라는 말은, 전체의 힘으로서의 정신은 각각의 독특한 개인의 권리를 뒷받침하는 이러한 실정적인 윤리적 행위를 부정함으로써 전체의 고유한 권리, 전체의 통일성("일자")을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일자"는 정치적 공동체로서 도시국가를 가리키는데, "부정적인"이라는 말은 공동체의 법(공동체의 반역자인 폴뤼네이케스는 매장될 수 없다)에 따라 개인/가족의 의무(적이든 우리편이든 모두 같은 가족의 성원이므로 매장해줘야 한다)를 거부하고 억압한다는 뜻이고, "일자"라는 말은 공동체가 이처럼 개인의 다양한 요구들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죠.  

  3) "대자적 존재"는 헤겔철학의 전문 용어이고, 현재의 맥락에서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염두에 두고 이 용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 헤겔에게 "즉자적 존재"란,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직 독립적인 자기로 확립되지 못한 즉물적 상태에 놓여 있는 존재를 가리키죠. 따라서 어떤 존재가 즉자적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아직 독자적인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반면 "대자적 존재"는 독립성을 획득한 존재, 그런 상태를 가리키죠.
  그런데 이렇게 존재가 대자적 상태에 도달하면, 바로 타자의 문제가 제기되겠죠. 독립성을 획득한다는 말은, 자기 아닌 다른 것과 자기를 구분한다는 뜻이니까, 어떤 존재가 독립성을 획득하고 대자적 상태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자신과 다른 타자들과 직면하게 되지요. 그래서 대자적 존재는 항상 이미 타자와의 관계 속에 놓이게 되고, 이 타자와의 관계를 해결해야 합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바로 두 개의 대자적 존재가 벌이는, 생사를 건 투쟁이지요. 그리고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는 일차적으로 승리한 주인은 노동에서 벗어남으로써 보편적인 즉자-대자적 존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을 통해 부정의 힘을 획득한 노예가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존재로 지양됩니다.
  그런데 헤겔은 오빠와 누이동생의 관계는 이런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거지요. 대자적 존재를 주거나 받아들인다는 말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처럼) 서로가 대자적 존재로서 모종의 갈등 관계에 들어서고 투쟁을 통해 이러한 갈등 관계를 해결한다는 말인데, 오빠와 누이동생의 관계는 이런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4) "passion"이라는 말은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철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는 "정념"이라는 뜻이예요. 특히 17세기 철학에서 "관념"(idea)과 함께 정신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로 부각되고 많이 연구되는데, "욕망", "기쁨", "슬픔", "사랑", "미움", "희망", "공포", "열정", "회한" 등과 같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을 통칭한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의미로는 "감정"이라고 이해해도 상관은 없어요.
  이 경우에는 "수난"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은가 합니다. "passion"은, 알다시피, "수동성"을 가리키고, 수난이라는 것은 따라서 타자로부터 겪는 고통을 가리키죠. 이 경우 "마법적인 수난"은 오이디푸스가 신들로부터, 또는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으로부터 겪는 고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다른 수난"이란 오빠와 누이 동생, 특히 안티고네가 또한 겪게 되는 고통, 크레온으로부터 당하는 고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5) 이건 번역이 잘못 되었네. "매우 연약한 표상들(대표들)"이 아니라, "너무나 숙명적인fatale 표상들(대표들)"이라고 해야겠네.

  6) 이건 이 맥락에서는 너무 어렵게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향락의 애도"라는 것은 좀더 경험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태(곧 죽음의 다른 표현)를 가리키고, 반대로 이러한 경험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어머니와의 동일시에 따라, 또는 "어머니의 아들을 구하려는" 어머니의 욕망과의 동일시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이니까, 결국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하는 향락으로 읽을 수 있다는 뜻으로 보면 되겠지요.
  이러한 향락이 상징계, 상징적 질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는 문제는 이 문장 자체만으로 평가되기는 어려운 데다가, 부권적 혈통과 구분되는 여성의 계보의 (상징적) 가능성이라는 문제와도 연결이 되어야 하니까, 한 문장에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7) "자신의 핏줄들을 다시 열어놓으려고 할"이라는 표현은 사실은 좀 모호한 표현이죠. 불어에서 "s'ouvrir les veines"는 "(자살하기 위해) 스스로 정맥을 끊다"는 숙어인데, 이 문장에서는 "s'ouvrir", 다시 말해 "열다ouvrir"는 동사의 재귀형("스스로 열다/끊다")을 쓰는 대신, "rouvrir", 곧 "다시 열다"는 표현을 쓴다는 점이 다르죠.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이런 경우에는 "다시 열다"는 단어 대신 "다시 끊다"라고 번역하면 좀더 의미가 분명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 이런 경우는 폴뤼네이케스의 격정적인 행동이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가문의 파멸을 이끌게 되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겠죠.

  8) 이 문장은 번역이 의미를 충분히 못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좀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곧이어 신이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신은  유사한 외관을 지닌 것 자아 의 지위 안에 응고되어버린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말고는 아무런 욕망도 지니지 않은 어떤 [남성적] 신un dieu이다." 이렇게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은 점들이 좀더 분명해질 것 같군요. (1) "유사한 외관을 지닌 것 자아 "은 상징적 질서, 곧 국법에 따라 포섭된 (상상적) 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개인들은 국법에 의해 자신들의 원초적인 자연적 독특성(혈연관계, 피의 유대에서 성립하는)에서 분리되고 해체된 개인들이지요. (2) 이런 사태를 이리가레는 "지위 안에 응고되어 있는 피의 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아요. 곧 국가의 법, 부권적인 상징적 질서는 혈연관계를 국법/상징적 질서에 포섭하고, 이렇게 포섭된 혈연관계 속에 각각의 개인을 종속시킨다는 뜻이지요.

  9) 이 문장은 정말 상당히 모호한 문장이네 ... 문법적으로도 시제상으로도. 이 문장은 좀더 생각해 봐야겠네요.

 10) 여기도 번역이 약간 잘못되어 있는데, 새로 고쳐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 말하자면 불가피하게 여성성이 저지른 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윤리적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행위성과 순수한 파토스[수동성]로의 전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지해야/인정해야 한다."
  이 문장에서 "가장 순수한 죄"라는 표현은 법과 힘을 사전에 알고 있으면서도 저지른 죄라는 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점에서 바로 윗구절에 나오는 남성의 경우와 잘 대비가 되죠. 그리고 "윤리적 의식"은 안티고네가 국법에 맞서 가족의 성원에 대해 헌신하는 것을 뜻하겠지요. 헤겔 입장에서 보면 이 윤리적 의식, 이 의식에 따른 행위는 국법에 맞선다는 점에서 허용 불가능한 범죄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죽은 남자인 폴뤼네이케스를 자연적인 무매개적 보편성으로부터 지양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계기이고, 안티고네가 바로 이를 수행한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뒤에 나오는 문단은 이를 부연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고.

  11) 눈과 피를 연결하는 것은 이 글 맨 앞에 나온 헤겔의 인용문을 가리키는 거죠. 그리고 피를 여성과 연결시키는 것 역시 헤겔의 논의의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고. 이걸 이리가레 자신의 견해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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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6-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부분을 약간 더 보충했습니다. (1)과 (2)에서 고딕체로 밑줄친 부분이 추가된 부분입니다. 추가한다고 좀더 나아질지는 모르겠지만 ... ^^
 

* [여성의 유/여성 젠더] 후반부 번역본입니다. 전반부 번역과는 달리 "peuple des hommes"를 "남성들로 이루어진 사람들"로 하지 않고 "남성들로 이루어진 인민"으로 번역했습니다(그리고 "peuple"은 모두 "인민"으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croissance"는 "성장"이라고 하지 않고 "생장"이라고 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번역본은 인용의 대상이 아니므로, 인용을 원하는 분은 저에게 먼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여성의 유/여성 젠더

***

  오늘날 우리는 자주 의무와 의무의 희극적 충돌―여기에는 제도들을 수단삼아 이루어지는 것도 포함된다―에 직면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동성/수난passion, 정념들passions에 새로운 길을 부여하고, 파토스 또는 오히려 좀더 윤리적인 감각적 정신을 정련하는 데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반대로 의무에 대한 경쟁적인 선호는 애처롭고 가련하며 추상적이다. 사실 도덕이 감각적인 이것[“감각적인 이것”은 “un ceci sensible”의 번역이다. “ceci”는 개별적인 “이것”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다. 이리가레의 논점은 감각적인 것을 추상적인 도덕적 의무와 대립시켜서는 도덕의 희극적 순환성에서 벗어날 수 없고, 감각적 보편성을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에 맞서 [도덕적 의무를] 보존하려고 하는 곳에서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여성 젠더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때, 여성 젠더는 너무나 자주 권리들의 평등에 대한 주장에 자신을 위치시키는데, 이는 자신의 젠더를 파괴할 위험이 있다. 이 경우 권리들과 의무들의 충돌은 희극적이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충돌은 대립 속에 있는 절대자의 모순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 비극적인 희극은 아마도 전쟁의 파생물로서 기능하는 것 같다. 절대자를 전유하고 있으나, 자신이 직접적인 것/무매개적인 것과 맺고 있는 관계를 해소하지 못한 젠더에 속하는 전쟁 말이다. 광적인 학살을 벌이기보다는 차라리 웃는 게 더 낫다! 하지만 [양자 사이의] 경계는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경각심을 풀지 않고서 웃어야 하며, 최악의 것을 멀리하고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 직접적 폭력을 피하고 기다릴 시간을 벌기 위해서 웃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자기le soi가 자신을 둘이 아니라 하나와 같게 만들면, 만약 자기가 타자로서의 타자를 무시하고 동일자même 및 그것의 분열과 자신을 같게 만들면, 모든 작용은 무위에 그치고 만다. 이 질서에 따른다면 작용 없이 남아 있는 것만이 결백하다. 헤겔이라면 아마도 바위, 식물이 그렇다고 말했으리라. 여성들은 자주 자신들의 작용을 박탈당한 채, 바위처럼 식물처럼 존재해 왔다. 남성/인간을 형성하고, 남성 젠더에 동화된 작용들은 결백하지 않다. 또는 더 이상 결백하지 않다. 이 작용들은 심지어 두 개의 젠더들에 대해 유죄이다. 하지만 오늘날 윤리적 행동의 내용, 성들에 따라 가변적인 그 내용은 말소되고 있다. 남성들에 의해 관리되는régi 우주는 감각적인 것을 파괴함으로써 사고의 내용을 제거하고 있다. 평등하다고―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에 대해 동일하다고―주장하는 어떤 세계 역시, 모든 작용의 독특한 내용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이는 [여성적인] 한편에게는 범죄행위가 아닌가?) 감각적인 것을 파괴한다. 분명히 유죄인 것은 특수한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인민이며, 보편성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특수한 의무들과 결부된 쟁점들과 전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보편자 그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런 의무들은 보편자 내에서는 somme을 이루지도 못한다. 한쪽 편에서 보편적으로 입법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죄이고 범죄다. 전리품, 강간, 중죄의 몫을 나눠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 왜냐하면 그런다고 해서 그림자가 덜 커지는 것은 아니며, 그와는 정반대다. 차이의 한 부분은 훨씬 더 억압되고 부정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젠더들 사이의 차이에서는 진리의 절반은 더 이상 다른 절반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직 한 부분만이 자신의 유령들, 자신의 그림자들, 자신의 가면들, 자신의 죄들, 자신의 두려움들 ... 과 맞서 투쟁을 벌일 뿐이다. 적수의 실체 없음inconsistance은 그를 너무나 절망스럽게 만들어 그는 대립물들을 발명하고 야기하고 격화시켜 기어이 전쟁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되면 행위는 너무나 명백하게 파괴적인 게 되고 범죄는 너무나 분명하게 완수되어, 다시 정적이 찾아든다. 죄의식이 자신과 맞서 있는 한 대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태는 말하자면 전도되었다. 곧 개인성은 작용 일반의 형식적 계기이며, 내용은 법률들과 습속들moeurs에 의해 구성된다. 일단 태어난 이후 개인은 법률들 및 습속들에 의해 두 번째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 두 가지 탄생은 서로 다른 것 안에 끼워맞춰질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오늘날 인간/남자를 문제삼는 이들이 끊임없이 맹목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이 탄생은 유전적, 자연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인가? 이 질문은, 헤겔이 인간의 이중적 탄생 및 성들에 따른 이러한 탄생의 배분에 관해 우리에게 기술해준 것을 우리가 다시 받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질문은 두 개의 젠더에게 부여된 운명 및 과제에 관해 제기되어야 한다. 사실 질문이 이처럼 제기되지 않는 한, 각각의 젠더는 범행 및 죄에 대한 혐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곧 보편자가 [남성적] 대자pour-soi에 대한 관심을 정당화할 수 있다. 보편자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윤리를 변형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두 젠더는 하나의 주형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하나의 운명 안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모델, 하나의 빌려온 정체성은 이들이 진리를 지각하고, 자신을 진리로 지각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누구에게도 죄가 있지는 않다 ... 보편자는 생명을 그 형태들 안에서 완성시켜 주는 게 아니라 생명을 죽이거나 살상하는 규범들의 강제로서 존재한다. 자연적 보편자와 법적, 관습적, 진리적 보편자 사이에는 이행, 교차, 생성이 결여되어 있다.
  두 성의 이른바 자연적 운명은 이미 더 이상 자연적이지 않다. 법률들 및 습속들은 이미 한쪽편에 의해 제정된 보편자를 추구함으로써 자연을 도착시켰다. 인간/남자가 언어를 불가침적이고 중립적이며 보편적인(그러므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쉽게 설명된다. 언어는 한쪽편의 진리로 관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중성[ 이리가레는 예컨대 “on” 같은 단어를 “중성”으로 사고하고 있는 듯하다. “on”은 영어로 하면 “one”이나 “they”처럼 불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대명사이다. 블랑쇼의 저작들이나 초기 푸코의 문학 비평에서 익명적인 중성에 관한 탐구를 엿볼 수 있는데, 이리가레가 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이 이론적 위신을 얻고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희극적이다. 이는 또한 비극적이기도 하며, 폭력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 왜냐하면 각각의 젠더는, 하나의 중성, 그 자신의 중성이 문제이지 절대적 중성이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 채 중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개의 중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법을 제정하려고 한다. 하나는 특히 프로이트의 제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아이이며, 다른 하나는 일신론의 신, 특히 육화되지 않은 신으로부터 우리에게 유래한 어떤 의무이다. 성들 간의 전쟁 바깥에서 윤리적이고 싶어하는, 중성적인 것의 이 고립된 땅들은, 성들 간의 차이의 비극 및 그 수태 능력fécondité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한에서, 기술통치technocratie의 지배권 및 지배영토―이것들이 충동적 통치이든 로고스에 따른 통치이든 또는 도구들, 기계들의 효과이든 간에―와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예컨대 첨단 기술의 힘을 빌려 이루어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중성적인 것을 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에너지의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등급들 내지는 질적 차이들을 지니지 않은 동일한 유형의 에너지, 곧 사람들on, 무책임한 다수, 양적인 것 안에 멈춰 있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 전체, 인민들 전체 및 이들의 산출과 재산출, 이들의 발생적 원리에 맞서 아무런 정당한 객관성도 주체성도 없는 파토스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 의심할 여지 없이 논쟁―또는 중성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외견상의 화해―의 은밀한 열쇠인 아이로 되돌아가보자. 아이는 특정한 언어, 예컨대 프로이트의 언어나 헤겔의 언어 같은 특정한 언어들 안에서만 중성적이다. 따라서 국제 정신분석학회―이 문제를 둘러싼 분쟁지들 중 하나만 언급하자면―가 자신의 중립성/중성성을, 중성적이라고 간주되는 아이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는 모종의 공언어주의bilinguisme를 댓가로 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공언어주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으며, 내가 보기에 이는 성들의 차이에 대한 실어증 내지는 무기력증과 관련해 본다면 척추교정술과 비길 만한 것이다. 예컨대 안나 O는 자신의 대화 치료talking-cure에서[안나 O는 프로이트와 브로이어가 공저한 『히스테리 연구』에 나오는 히스테리 환자 중 한 사람의 명칭이다. 그녀는 정신분석의 치료법에 대해 “대화치료talking-cure”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단어들이나 표상들이 떠오르지 않을 때 자신의 정서들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려고 시도했다. 비록 중성적인 언어로 이야기되는 하지만―genre라는 단어를 희랍어에서는 [중성으로] 토 게노스to génos라고 하듯이. 타자에 대한 윤리와 관련하여 내가 다시 읽고 있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관련 구절에서 이 두 가지 중성 단어 사이의 관계를 확립해 보는 일은 흥미로울 것 같다―아이는 항상 성별화되어 있다. 아이를 중성적인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이에 대해 영속적으로 자행되는 대범죄이다. 누구의 이름으로 영속되는 범죄인가? 신? 정신? 양자 모두?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성별화되어 있고, 성별화로부터 태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죽음을 아이에게, 젠더에게, 산출에게, 생명에게, 성에게 강요하는 것인가? 어떤 권리로, 어떤 어둠을 틈타,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의 언어, 남자들의 언어는 중성적인 존재로서의 아이를 덮어싸고 조르고 질식시키는 것인가? 실존하지 않는 중성적인 신의 이름으로? 또는 성들 사이의 분유partage에 대한 무능력 내지는 분유의 거부의 이름으로?

  언어 안에는 중립적인 것의 두 가지 다른 저장소들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은 단지 내용(들)일 뿐만 아니라 형식(들)이기도 하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보기에는 의무권리의 저장소에 상응하는 것 같다. 이는 그리스-로마 문화 시기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이것이 우리의 개별적, 집합적 의식에 미친 충격에 관한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법, 권리는 중성/중립적으로 말해지지만, 이것들은 한쪽편에 따라 제정되었으며, 따라서 실제로는 중성적/중립적이지 않다. 이러한 비중립성은 성인 개인의 내용을 정의하는 법의 내용과 형식 안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이러한 중성성/중립성은 심각한 결과들을 낳고 있으며, 언어 및 주체의 지위의 변동을 수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중대한 저항의 보루를 대표하고 있다. 남자들 사이의 전쟁들 및 논쟁들을 사면하기 위한 영토로서 이 중립 지역은 남성 젠더와 여성 젠더 사이의 위계라는 문제 및 그것들의 불의, 그리고 이로부터 유래하는 언어들 및 가치들의―개인적이고 집합적인―병리적인 중립화/중성화라는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이러한 중성성/중립성은, 적어도 불어에서는 남성과 동일한 대명사로 번역된다는 점(곧 elle faut가 아니라 il faut인 것이다[“il faut”는 “~해야 한다”를 뜻하는 불어 숙어이다. “il”은 원래는 남성 3인칭 단수 대명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중성적인) 비인칭 주어로 사용된다. 이리가레가 “il faut”, “~해야 한다”의 예를 든 것은 법이 지정하는 의무와 명령, 권리의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을 덧붙여두고 싶다.
  거의 체계적인 자연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심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자연의 왕국/지배권l'empire de la nature 역시, 천둥치다il tonne, 눈내리다il neige, 바람불다il vente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성으로 표현된다[이 경우에도 역시 “il”은 비인칭 주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우리의 동양의 뿌리 및 그 분맥들에서는, 우주는 젠더들에 따라 배분되었고, 젠더들은 때로는 갈등을 겪으면서도 함께 우주의 요소들을 통치했다. 인간들의 세계는 단지 오늘날 이야기하듯이 별들에 의해 규정된 것만이 아니라, 그것 자신이 별들을 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두 개의 젠더/유 덕분이다. 그리스 비극은 우리의 사회 윤리의 몇 가지 토대들이 표현되고, 자연의 법칙들에 대한 신화적 표현이 상실되면서 그 법칙들에 대한 존중심의 상실이 언급되고 있는 장소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빛과 어둠, 뿌리들과 꽃들 사이의 차이들이, 사회적 의무들―이것들을 창조한 죄는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에게 있다―에 대한 준수라는 명목 아래 더 이상 지켜지지 않으면서, 그들은 미시적 우주 및 거시적 우주에 대한 통치를 상실했는데, 다른 젠더/유하고만, 다른 유의 잔여나 그 그림자 뒷면이 아니라 여성 젠더하고만 이 우주들을 통치할 수 있다. 두 개의 젠더 사이에 미시적 우주 및 거시적 우주에 대한 통치가 배분된다. 이러한 운명은 중성적이지 않으며 유일한 젠더/유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위대한 문화는 이처럼 말했다. 왜 오늘날 이를 잊어버렸는가? 우주의 질서 및 우리 자신의 육체chair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긴급하면서impérieux 또한 더 부드러운doux 의무가 우리에게 있단 말인가? 우리를 이러한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중성적으로/중립적으로 우리를 뿌리로부터 밀어내는 모든 것은 감각 및 사상, 예술, 윤리의 내용을 이루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우리의 신체 및 세계의 생명을 소멸시킨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가 남아 있다면, 이는 남자의 행위의 밤과, 아직 여성의 밤 안에 있는 것 사이의 대결에 있다. 우리는 다른 기회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분명히 문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근친상간이나 그것의 금지일 뿐만 아니라, 같은 나이에 속하는 두 개의 젠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이들이 생명, 감성, 형태 및 신과 사고에 대해 상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의식에 관한 물음을 몰아낼 이유가 되지 못하며, 무의식의 형성을 이중화해야 할 이유도 되지 못한다. 무의식은 작용 안에서 생산되어야지, 영속적이고 부동적(不動的)인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무한한 반복은 작업oeuvre 안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이 경우 타자성은 동일한 것 안에 머물지 않고 타자에게 되돌아가게 된다. 이는 [우리가 추구해나가야 할] 하나의 극한점이지만, 이러한 방향은 우리가 윤리적 감각의 순수성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헤겔은 안티고네 범행의 순수성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이보다 훨씬 더 거대한 순수성이 존재할 것이다. 왜 이 추정된 범행이 금지되는 것인지 아는 것이 그것인데, 이는 이러한 범행이 남자들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운명에게만 봉사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게 되면 외관상의 대립이 제거될 것이며, 여성으로서는 긍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성은 고유한 윤리적 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과 대립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에게 낯설게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녀의 즉자, 그녀의 본질이다. 하지만 여성성은 더 이상 자신의 즉자, 자신의 본질이 다른 성, 다른 젠더에 의해 정의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여성성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정의, 남성성의 실효성의 일부를 이루는 정의와 단순히 대립하지도 않을 것이다. 여성 젠더는 개인적이고 집합적인 측면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생성되기 위해 자신의 윤리적 생성의 질서에 따라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자기 자신과 투쟁한다. 이러한 생장, 한편으로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무매개성과 매개들 사이에서, 어머니와 여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기도 한 이러한 생장은 여성 젠더를 위해, 그리고 여성 젠더 안에서 열린 상태로 무한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장은 두 개의 젠더 사이의 만남을 위해 필수적이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의 가장 커다란 죄는 하나의 젠더로부터 그의 윤리적 의식 및 젠더로서의 실효성을 박탈했다는 데 있다. 이는 실체로부터 현실성(실행성, effectivité)을 분리시켰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철학자인 타이 그레이스 애트킨슨Ty Grace Atkinson은―내가 그의 분석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면―이러한 행위를 “형이상학적 흡혈주의”라고 불렀다. 나로서는, 그리고 그 결과들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이고 싶다. 
  만약 여성들이 다른 성의 확실성들에 따라 정의된 의무를 수행한다면, 여성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몫이 빠져 있는, 고유한 윤리적 목표가 빠져 있는 의무에 대한 파토스 말고는 어쩔 수 없이 우연적인 현실성 안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들의 목표, 그들의 목표의 현실성은, 비록 그들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이 제거된 목표로 머물고 말 것이다. 사회, 노동하는 세계, 전쟁이 아이와 남편을 그녀들로부터 앗아갈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행동 목표를 절단당한 채로, 선택하지도 의지하지도 못한 채 무관심하게 금욕적으로 남아 있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몇몇 신비가들이나 현인들이 금욕[“금욕”은 “renoncement”의 번역인데, 원래의 내용상으로는 “자기를 버림”, “무욕” 등이 더 어울릴 듯하다.]의 과정으로 기술한 것이 그들의 일상의 운명이 된다. 하지만 어떤 인민에게, 다른 인민의 목표라는 명목 아래 성인이 되도록 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사실―헤겔은 이 점을 매우 잘 간파했다―인민도 전쟁도 [단일한] 하나가 아니다. 반대로 그들 중 한 부분[이 경우에는 남성]은 자기 자신을 위해 윤리적 의식의 권리를 요구하면서도 다른 부분[곧 여성]은 목표와 현실성을 박탈당한 상태에서―자신의 분신까지는 아닐지 몰라도―자신의 그림자로, 자신을 회복시켜 주는 존재로 남겨둔다. 인간 유는 두 개의 젠더가 아니라 두 개의 기능, 두 개의 과업으로 분배되는 것이다. 여성은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은 “sous peine de mort”이다. 이 숙어는 일상 어법에서는 별 혼란이 없지만, 이 경우에는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곧 이 숙어는 본문처럼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으로 해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서”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 후자의 경우는 물론 안티고네를 지칭하는 말이 될 것이다.] 자신의 젠더를 포기해야 했다. 남성도 마찬가지이지만, 여성과는 상이한 의미에서 그렇다. 남성이 자신과 벌이는 논쟁은 자신의 젠더의 신 또는 정신과 벌이는 논쟁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남성과 여성이 각자 상이한 젠더를 주장하게 되면, 양자가 소통할 수 있을지 묻곤 한다. 아마도 그들은 결국은 서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간에 가능한 이행이 부재한 가운데, 상이한 의식과 정신, 인민의 모습들 안에 서로 분리된 채 갇히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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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가장 선진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들 중 다수가 근친상간을 성적 관계―무의식적 관계이든 의식적 관계이든 간에―[의 모델]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유/젠더와 그것의 배분이라는 문제를 해소시키지는 않는다. 근친상간은 세대간의 간격 및 젠더의 생식(산출, procréation)과 작용하지, 젠더의 정신과 작용하지는 않는다. 항상 나이, 생장, 세대의 간격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근친상간 및 그것의 위반을 문화적 운명의 극복으로 간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이미 언어의 기능방식에 관해 말한 것처럼, 일차적으로 실체는 여성들, 어머니들에 의해 주어진다. 남성은 이 실체에 표시를 하고 자신의 흔적들을 새겨넣고 재단하며, 기호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 실체를 용해시킨다. 하지만 그 다음 그는 이 기호들은 일의적(一義的)인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라고 주장한다. 예전에 존재했던 양의성(兩義性, équivocité)은 반드시 기호 내지는 합급(合金) 내의 전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안티고네 자신은 양의적인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녀는 이미 단 하나의 [젠더] 쪽으로 끌려가고 있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두번째의 토양, 곧 젠더와 무관한다고 하는 의미의 실체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들은 이 실체를 하늘을 향해,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기호들의 원천인 그들의 하늘을 향해 거의 동어반복적으로 열어 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타자, 여성의 개입을 금지하지만, 또한 그들은 여성을 성스러운 것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경외한다. 남성은 언어의 실체 내에서 여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닫아걸으면서, 이 실체에 대해 말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실체로 머물러 있되, 이러한 진리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도록 요구한다.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들,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말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여성에게는 생명의 집을 지키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그는 여성의 과업은 죽은 [남]자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는 어머니로서, 모체로서, (살아 있는 [영혼의] 보호막-무덤인) 신체로서, 영양 공급원으로서의 여성이 필요하다. 외관상으로는 그에게는 어머니이자 성처녀로서의 여성만이 필요하고 때로는 아주 애매한 방식으로 누이도 필요한 것 같지만, 여성으로서, 다른 젠더로서의 여성은 필요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근친상간은 젠더들 사이의 관계라는 물음을 해소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은 생명체의 산출 안에 또는 그것에 대한 부인(否認, dénégation) 안에 머물러 있으며, 젠더의 물음은 제기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은 맹목적이다. 정말이지 젠더에 맹목적이다! 내가 보기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근친상간에서] 그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한 여자도 문제된다는 사실에 가장 맹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적 차이에 무지하다. 담론과 주체의 분열, 파트너 없는 그 모순들은 분명히 근친상간의 욕망 및 그 금지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근친상간의 욕망 및 금지는 두 개의 젠더로 분할되어 있는 인간 유의 현실성에 상응하는, 감각적인 것에 대한 관계를 조절하지는 못한다. 근친상간은 의미의 이중적 토양 및, 여전히 항상 우리의 의미로 남아 있는 편파적인partiel 의미의 장벽을 위반하지만, 은폐되어 있는 전쟁polemos인 성적 차이의 물음을 제거하지는 못하며, 이 차이의 가능한 풍요성(수태, fécondité)를 제거하지도 못한다. 근친상간은 언어 및 자연과 작용하지만, 항상 그것들 사이의 분열 내에서, 그것들의 비-동맹 내에서, 그것들의 비-동시적인 생장 내에서 그것들과 작용할 뿐이다. 근친상간은 형태론morphologie은 위반하지만, 이는 수액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수액으로부터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주체가 열매로서 나무에서 떨어진 한에서 또는 나무로부터 분리된 한에서, 이 수액은 아직 또는 더 이상 주체의 수액이 아니다. 이는 아직 또는 더 이상 주체의 뿌리들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성별화된 두 인간을 현재, 현행적으로 현존시키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결함이야말로 인간/남자를 기술적 존재가 되게끔 운명지은 것이 아닐까? 가능한 일이다. 산출적으로, 성별화되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기계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가능한 일이다. 우리 시대는 이를 경향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하나의 성이 다른 성의 뿌리들을 탈취하고 거기에 기생하는(이는 이 뿌리들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박해하는 것이다) 순간부터, 한 성이 자신의 뿌리들을 상실하고 유한자로서 자신의 생장이 불확실한 상태임에도 불멸적이거나 영성적인 존재로 치켜 세워진 순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우리 문화의 퇴락의 원천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거기까지 나아가 봐야 하리라. 
  따라서 윤리적 죄가 발생한 곳으로 되돌아가, 남성들과 여성들이 복종해온 이러한 이중적 뿌리상실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질문해봐야 한다. 남성들과 여성들이 생장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그 순간은 양자에 대해 동일하지 않다. 이는 근친상간을 젠더에 관한 질문의 해결책 또는 해소책으로서 사고하려는 미혹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설명해준다. 사실 여성은 물질/질료적인 물과 하늘 사이에, 자연적인 대지와 태양 사이에 머물러 있던 데 반해, 남성은 그가 생명체로서 자신의 소명에 충실했던 때에는 우주의 생장의 작업자이자 조직자가 되었다. 하지만 자주 그의 반항과 그의 권력은, 유한자로서 자신의 생성 및 [여성] 젠더에 대한 자신의 빚을 부정하면서 물질/질료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물질[질료]를 탈취하곤 했다. 또는 탈취한다고 믿곤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두 개의 극 사이에 충분한 분절을 이루어내지 못한 채 인공적이면서 불균형적인, 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를 건립했는데, 이 세계는 중성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남성 자신의 세계이며, 토양 전체를 그 자신과 동화시키려고 하는 세계이다.
 
  최근 우리 시대는 양성성이 젠더들 사이의 분할에 대한 윤리적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해왔다. 이러한 해결책은 자주 [여성 젠더에게] 관대한 선택지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묻거니와, 어떻게 다른 젠더를 젠더로서 정의하지 않고서 다른 젠더와 자신을 동일화할 수 있는가? 문제는 단지 하나의 역할을 모방하는 것일 뿐인가? 과업들을 배분하는 것일 뿐인가? 아니면 다른 그밖에 다른 어떤 것일 뿐인가? 그리고 오늘날 어떤 남성이 여러 세기 이래 계속 되어온 여성 젠더의 사회적 운명을 인식하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 권력을 기꺼이 포기하려 하겠는가?
  게다가 관념론적 유토피아가 아니라면, 다소간 미혹을 불러일으키는 정신적mentale 형태들 속에서 형태론을 새롭게 제거하려는 시도가 아니라면, 우리가 다른 젠더에 우리 자신을 영성적으로spirituellement 완전히 동일화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양성성이 젠더들 사이의 윤리를 위한 도정을 구성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러한 도정이 존재한다면, 이는 성적 차이에서 출발하고 성적 차이에 도달해야 하며, 이를 영성적인 발견과 긍정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양성성이란 환상들 및 사변들에 젖어 있는 퇴락의 유토피아를 그려낼 뿐이며, [우리의] 문화를 생산하는 신체들에게 훨씬 더 이질적인 문화를 생산해낼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도 역시 인민들 중 매우 적은 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유형의 정체성과 사회적 스타일―여기에는 패션 및 패션산업을 수단으로 한 것도 포함된다―을 강제하려는 시도를 본다. 다시 한번 더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의 젠더를, 젠더, 젠더들이라는 질문을 확정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중성적인] 사람들on, 양적인 것, 사이비 중성성의 에너지를 증대시키고 있는 기술적으로 통치되는 우주의 평준화 효과가 아니라면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늘날 직면해 있는 가장 심각한 전쟁일 텐데, 왜냐하면 이 전쟁은 다른 전쟁들과 비교해볼 때 우리에게 어떠한 저항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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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6-03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오역이 하나 발견되어서(-.-;;;;) 하나 지적해 둡니다. 맨 앞에 세 차례에 걸쳐 나오는 "결탁"이라는 단어는 사실은 "충돌"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제가 collision을 collusion으로 잘못 읽었습니다.
벌써 복사하시거나 퍼가신 분들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읽기 위해 번역한 이리가레의 글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올린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와 마찬가지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및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글인데,  지난 번 글이 매우 함축적이고 난해했던 것에 비하면, 이번 글은 훨씬 평이하고 명시적인 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번역자에게는(-.-;;) 여간 까다로운 글이 아닙니다. 참고할 만한 다른 외국어본을 갖고 있지 못해서 오역이 적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수정할 생각입니다.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도 두어 군데 수정한 곳이 있는데, 나중에 따로 올릴 생각입니다.

이 글은 원래 글의 전반부에 해당하며, 후반부도 곧 올릴 생각입니다.

 

Luce Irigaray, “Le Genre féminin”, in Sexes et parenté, Minuit, 1987.


여성의 유/여성 젠더

[이 글의 제목에서 “genre”라는 단어는 다양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는 문법에서 명사나 형용사의 “성(性)”을 가리키는 단어이면서 젠더를 의미하기도 하고, “유類”(또는 속(屬). 영어로 하면 genus)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기계la machine는 성을 갖고 있지 않다. 자연, 그녀는 항상 성별화되어sexuée 있다. 분명히 기계는 때로는 성을 모방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녀(기계, elle)는, 특히 자신의 도구로서의 지위 때문에 한 성보다는 다른 성의 경제에 더 관련되어 있다apparenté. 기계, 그 생산 활동에서 성이 없거나 하나의 성만을 가지고 있는 기계는 때로는 생명을 보충[“보충”의 원어는 “protège”인데, 불어에서 “protéger”는 어떤 결함을 인공물로 보충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철이나 의족, 의수 등이 이러한 보충의 사례들이다.]하거나 보완한다. 그녀는 생명을 창조하지도 산출하지도 않는다.
  인간 정신은 성들 사이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만큼 이미 너무나 기술의 명령들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들 사이의 차이의 중요성을 긍정하는 사람은 때로는 수구주의자, 반동, 순진한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과학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남자들 또는 어떤 여자들은 분명히 수구주의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면, 우리는 성적으로 차이화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죽어 있는 셈이다. 담론의 성별화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가? 기계, 기계론 및―주체의 제어에서 벗어나는―어떤 에너지로 환원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살아 있는가? 우리는 생명, 형상, 정신을 산출하고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아직 충분히 살아 있는가? 생명체로 남기 위해, 우리 자신을 생명체로서 재산출할 수 있기 위해 우리에게는 성적 차이가 필요하다.
  이러한 차이는 정신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적 모순이다. 서툴게나마 위치시킬 수 있는 상호보완성도 없고, 획득된 객관적 위치도 없고, 대상도 모습도 없는 [차이이므로]. 성들 사이에는 분명 생리학적, 형태론적morphologique 상호보완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호보완성은 증식에 도움이 되도록 자리잡아야s'habiter 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성/되기에서는 주체적인 성적 차이는 존재했던 적이 없다. 이는 특히 사유 속에서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기회다.
  우리는 다른 환경으로 넘어가는 중에 있는데, 이 환경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연적 여건milieu이 된다. 기술의 여건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정상적인 환경으로 부과되는 것이다. 땅과 태양, 식물, 물, 공기가 존재하던 곳에 이제 콘크리트, 전기, 실내 공기 조절 장치, 기차, 비행기, 기차역, 주유소 등이 존재한다 ... 이처럼 보고, 들이마시고, 만지고, 맛보는 데서 [이전과] 차이가 존재하는 것 이외에도, 또한 소음bruit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 소음은 시계의 초침에 따라 규칙적으로 표시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음악가들은 소음에 리듬을 부여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지만, 이 소음은 더 이상, 예컨대 계절이나 풍경에 따라 규칙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므로 제멋대로 발생하는 셈이다. 기계의 소음은 일년의 절기나 지역 또는 세계 각 나라에 따라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정도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는 항상 거의 동일하다. 여기에서 지각 능력의 쇠퇴가 생겨나는 것일까? 오늘날 교대로 일어나는 것은 소음 또는 그것이 정지할 때 나타나는 정적이다. 하지만 정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교대는 인공적이고 거칠다. 참된 교대는 기계의 소음과 자연의 소음bruit[자연의 경우에는 “bruit”를 “소리”로 이해하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하지만 기계나 자연 모두 똑같은 “bruit”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존중하여 모두 “소음”이라고 번역했다.] 사이에 존재한다. 자연의 소음에는 리듬이 담겨 있다. 게다가 이 소음은 리듬의 차이들을 존중한다. 이 소음은 형상을 부여한다informe. 이 소음은 항상, 그리고 여전히 최초로 일어나는 소음이다. 이 소음은 또한 항상 젖어 있다. 곧 상처를 주지 않고 접촉할 수 있다[“이 소음은 또한 항상 젖어 있다. 곧 상처를 주지 않고 접촉할 수 있다”의 원문은 “Il est aussi toujours humide, c'est-à-dire capable de toucher sans blesser”이다. “humide”는 “축축한”, “습도가 높은” 등의 의미를 갖고 있고, “toucher”는 “접촉하다”, “만지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또한 “타격을 가하다”, “상처를 주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기계의 소음은 항상 동일하다. 이는 그것의 실효성의 조건 자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음은 반복하도록 기능한다. 기계는 반복적일 경우에만 신뢰할 수 있다. 반복되지 않을 때 기계는 손상되고 고장난 게 된다. 자연, 그녀는 반복하지 않는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생성한다. 비록 자연의 주기들 내에 유사성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녀는 결코 동일하게 반복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뿌리들 및 자신의 꽃들을 통합하면서 성장하고 생성한다. 그녀는 소리son 및 모든 감각들을 통해 그치지 않고 형상을 부여한다.
  자연은, 항상 도처에서 성별화되어 있다. 우주적 질서cosmique에 충실한 모든 전통은 성별화되어 있으며, 자연의 역량/잠재력들을 성별화된 항들에 따라 고려한다. 자연의 역량/잠재력들 역시 교대에 따라 규제되지만, 모순적이지는 않다. 봄은 가을이 아니고 겨울은 여름이 아니며, 밤은 낮이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우리의 논리에서 알고 있는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곧 하나가 다른 하나와 대립하거나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고 그리하여 열등한 것을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증식의 리듬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서 두 극은 필수적이다. 겨울은 여름을 파괴하지 않으며, 수액(樹液)이 땅 속으로 들어가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준다. 수액이 나무의 꼭대기에서 항상 열매를 맺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게 가능한가? 이는 확실치 않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 반대를 말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교훈을,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peuple des hommes은 잊어버린 듯하다. 이 인민은 정상으로 올라가 거기 머물러 있으려고 하며, 타자, 예컨대 여자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길을 상실한 채 땅 위에 매몰되어 있도록 내버려둔다. 어쨌든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과제, 성장하기 위해 자신들의 뿌리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 과제를 잊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항상, 자신들의 최초의 모성의 뿌리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지만, 그들은 문화 안에서 이러한 향수를 살해한다. 또는 직접성[무매개성]을 반박한다(모순화해서 지양한다, contredisent)[“contredire”는 단어의 의미대로 하면 “반박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리가레는 여기서 이 단어를 “contradiction”, 곧 “모순”과 관련시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contredire”는 시초에 주어져 있는 직접적인 자료(여기에서는 모성의 뿌리)를, 모순의 매개를 통해 지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질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꼭대기와 뿌리 사이의 이러한 교대들은 문화의 발흥과 퇴보를 통해,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전쟁, 많은 경우 기술의 확대에서 생각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전쟁은 부정의 부정일 것이다. 이는 감각적 직접성으로의 복귀로 이해될 수 있는가? 감각적인 것을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자신의 정신의 본성으로 육성하는 대신, 남자―좀더 정확히 말하면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이 감각적 직접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이를 자연의 타자에게, 특히 다른 젠더에게 넘겨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각에 대한 의무obligation sensible는 사적이고 공[개]적인 삶에서, 사적이고 공[개]적인 전쟁에서 그에게 다시 돌아온다. 공[개]적으로 볼 때 남자는 자신과 같은 젠더하고만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다른 젠더와 비공개적으로 벌이는] 또다른 전쟁은, 마치 이 전쟁이 절대 지식 또는 절대 정신 안에서 이미 해결된 것처럼, 은폐된 채로 비밀스럽게 남아 있다. 이 전쟁이 절대 지식 또는 절대 정신 안에서 이미 해결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완성된 정신 역시 부정의 부정처럼 보인다. 정신의 완성 역시, 부정되었던 것 또는 변증법화되지 못했던 것이 감각 경험 안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것으로서 복귀함을 의미한다. 감각 작용의 절대적 성격은 개념화의 절대자 안에서 복귀하는가? 절대자는 직접적인 것의 다른 이름이다. 적어도 남자에게는 그렇다. 절대자는 지식 안으로 감각적인 것의, 그리고 감각적인 것 안으로 지식의 회고적이며 포괄하는 복귀이다. 절대자는 정신 안에 들어 있는 감각적인 것의 쟁점이고 지평이며 목표이고 가면을 쓴 이행이며, 위상학적 총체성의 형태 아래, 잠재적으로 폐쇄된 우주의 형태 아래 감각적인 것의 복귀이다. 절대자는 또다른 세계, [기술적으로] 제작되고fabriqué, [자연의 대지로부터] 뿌리뽑힌 세계의 분신(分身, double)을 성취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절대자는 가장 개연성 있는 우주적 리듬과는 반대로 살해하고 탈생명화하는데, 왜냐하면 절대자는 자연으로부터 시간화 과정temporalisation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은 적어도 절대자가 젠더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표시된다. 정신은 자신을 완성하면서 땅 속에 자신의 뿌리를 더 깊이 박아두지 않는다. 정신은 자신의 일차적 뿌리들을 없애버린다. 문화, 역사가 정신의 땅이 되며, 이는 정신이, 인식하는 것의 신체적 규정들déterminations incarnées을 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특정한 문화들이나 종교들이 무어라 예견하든 간에, 죽은 [남]자들은 그 자체로 부활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부활한다면, 이는 절대 정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 감각적으로 상이한 세계 안에서 그렇다. 죽은 자들을 땅에 맡기는 것은 여성이다. 만약 그녀가 이러한 윤리적 의무를 아직 박탈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인간 유genre humain라고 불리는 남성이라는 유/남성 젠더는 자신의 타자와 유희하지만, 타자와 짝을 맺지는 않으며, 타자의 젠더를 망각함으로써, 이 젠더의 뿌리를 파괴함으로써 [타자와의 관계를] 끝맺는다. 아마도 그는 타자와 만나느니, 스스로를 변질시키려고 할 것이다. 스스로를 변질시키고 고통받고 죽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그와 그의 모든 화신들avatars은 가능하겠지만, 타자는 그렇지 못하다. 왜? 절대자를 원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것의 노동을 작동시키기 위해 직접적/무매개적 대자성을 포기하는 것이 함축하는 욕구불만과 결핍, 절제를 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주체, 한 유[젠더]의 절대 지식은 부정적인 것의 노동이 완수되지 않았다는 표시이다. 육화된, 성별화된 신은 무엇보다도 부정적인 것의 노동을 수락하는 것, 자기 자신을 신성화하기 위해, 완전성을 얻기 위해 신체를 얻어야 하는 필연성을 가리킨다. 한 쌍으로 된 신은 이를 좀더 변증법으로 말하지 않을까? 또는 말하게 되지 않을까? 어떤 신도 자신의 젠더 안에서 또는 이 젠더를 통해서는 절대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각각의 신은 일시적으로나마 젠더들 사이의 항상적인 접합으로, 성적 차이로 표상되는 생명체의 두 가지 모습 또는 구현incarnations 사이의 변증법으로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나 그 뿐이다.     


***

  여성들의 해방, 상이한 정체성에 대한 긍정을 둘러싼 질문들은, 자주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윤리적 비극이 지니고 있는 광범위한 쟁점들을 회피하곤 한다. 헤겔은 이 쟁점들을 감지했으며, 인륜적 질서는, 특히 인간의 법과 신의 법, 각자 남성과 여성의 의무(이자 운명?)로 귀속되는 두 법 사이의 해소할 수 없는 대립에 의해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리라고 예견했다, 또는 진단했다. 이처럼 제시된 [남성과 여성의] 과업들―여기에는 가족과 생명체, 신들을 보호하는 일이 포함된다―의 배분은 이미 신적인 것이 남성 젠더에 속하고 여성 젠더에서 제거된 세계에서는 낯설게 보인다. 두 젠더의 정신적 의무 사이에서 성취되는 변증법 대신에 헤겔은 우리에게 이중의 책략을 지닌 감금[“이중의 책략을 지닌 감금”의 원어는 “enfermement à double tour”이다. 이는 또한 “이중의 망루로 이루어진 감옥”, “이중의 여정으로 이루어진 폐쇄”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을 제시한다. 이로부터 헤겔 체계의 위력이 나오며, 내가 보기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이를 풀어내지 못했다.
  왜 이 체계는, 적어도 이중의 책략/이중의 망루에 따라 닫혀 있는가? 왜냐하면 여성이 자연과 유[젠더]를 주재하는 한에서, 여성이 가족을 보호하고 가족 중 죽은 [남]자들에 대한 제례를 존중하는 한에서, 여성은 신의 법과 함께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안티고네에 의해 완성된 법의 행사는 이미 남성적 보편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안티고네는 더 이상 빛과 화덕, 자신의 신들 및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여성이 아니라, 두 오빠가 논란을 벌이는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빚어진 가족의 파괴에 일시적으로 대처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이미 남성들의 신, 남성들의 파토스에 봉사하고 있다. 그녀는 죽은 [남]자들의 신을 달래고 살아있는 [남]자들로부터 범행의 흔적을 씻어내기 위해 범행을 사죄하고 죄를 없애려고 시도한다. 이미 문제는 여성 젠더에 속하는 한에서의 그녀의 과업이 아니다. 국가의 권력 및, 희생 위에 수립된 인간의 권리들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국가가 [죽은 [남]자들로 하여금] 흘리게 만든 피를 없애려고 안티고네가 시도하는 이상, 그녀는 이미 국가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le féminin은 이미 더 이상 자신의 젠더, 자신의 변증법에 봉사하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남성 지시대명사][“여성[이라는 남성 지시대명사]”는 “il”의 번역이다. 불어에서 “il”은 남성 지시대명사를 가리키고 “elle”은 여성 지시대명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불어에서 여성에 해당하는 “le féminin”은 남성 정관사 “le”가 붙는 남성 명사이다. 이 문장에서 이리가레는 “le féminin”을 받는 남성 지시대명사 “il”을 사용함으로써, 안티고네가 남성적인 권력에 봉사하고 있음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il”을 “여성[이라는 남성적 지시대명사]”으로 번역했다.]은 신의 법, 자연의 법, 생명으로부터 남성적인 인간의 법으로의 이행 속에 감싸여 있고 말려 있다[“감싸여 있고 말려 있다”의 원어는 “enroulé, roulé”이다. “rouler”이라는 동사는 “말다”, “구르다” 등을 의미하며, 구어로는 “말려들다”, “속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런 이중적 의미가 모두 표현되고 있다.]. 안티고네는 이미, 동일자의 타자를 대표하는 여자, 대표하는 [남]자이다[이 문장의 원문은 “Antigone est déjà la représentante, le représentant, de l'autre du même”이다. 이 중에서 “le représentant”은 “대표자”라는 뜻을 가진 남성 명사이며, “la représentante”는 이것의 여성형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이리가레는 같은 뜻을 가진 명사를 성만 바꿔 두 번 사용함으로써, 안티고네의 행위의 남성적 성격을 표현하려 하고 있다. 곧 안티고네는 남성이라는 동일한 젠더의 질서 내에서 표현된, 또는 이 질서 안으로 이미 포섭되어 있는 여성적인 타자라는 의미이다. “동일자의 타자”란 이를 가리킨다.]. 화덕(가정, foyer)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신의 과업에 충실하고, 화덕의 불꽃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는 그녀는, 남성적 질서가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전진하도록 해주는 일과 연결되어 있는, 화덕의 어두운 쪽만 담당하고 있다. 범행을 사죄함으로써 안티고네는 자신의 과업, 윤리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 관계, 자신의 신들에 대한 봉사를 더 이상 지키지 않고 있다. 여성 젠더의 독특성은, [한편으로는] 저항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적 신들 및 남자들 사이의 전쟁에 대한―모성적?―충실성[헌신]에 굴복하고 있는 이 인물에서 상실되어 버린다. 안티고네는 더 이상 여신이 아니다. 그녀는 남자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신들에 충실하며, 이 신들 때문에 죽는다. 하나의 [여성적인] 과업une tache을 다시 말소하기 위해. 어떤 과업? 근본적으로는 여성의 의식(양심, conscience)이라는 과업, 여성 젠더에 소속되는 과업, 자신의 모성적 혈통filiation이라는 과업이다. 여성 젠더에 대한 이중적으로 은밀한 이러한 소속에서 박탈당한 안티고네는 또한 남성의 잃어버린 뿌리들에 대한 충실성[헌신성]이라는 점에서도 소멸되어 버렸다.
  개념의 분열은 동일자 내부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개념 안에서 분열은 여성 개념과 남성 개념의 분열로 남는다[이 때 여성과 남성은 언어학적인 의미의 여성과 남성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 ]. 언어는 이러한 분열을 전도시키는 경향이 있다. 언어는 [분열의] 표시marque를 여성에게 유보시키고, 남성은 이러한 표시 아래에 있는 언어의 질료, 언어의 친숙한 실체로, 그리고 표시 위에서는 절대 정신으로 또는 신으로 존재하게 한다. [남성적 변증법 안에서] 남성은 [여성을] 포함하는 기체(基體, substrat), 여성[의 존재]을 보증해주는 원천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 발생한다. 곧 여성은 원천, 기체, 포함하는 것(용기, l'englobant)으로 남고, 남성은 (음성학적, 음운론적, 언어학적인 본성[자연]을 포함하는) 자연 및 자연으로서의 여성적 젠더에 대해 알지 못하는 표시이다. 하지만 전자는 표시, 부적절한 가면, 타자가 덮어씌운 겉치장으로 환원되고, 후자는 질료, 주체(기체, sujet), 포괄하는 절대자가 된다고 가정되어 있다. 언어는 변증법이 기술하는 것을 전도시키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원환은 이러한 전도, 비변증법적이지만, 담론 안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러한 전도에 의해 닫혀진다. 언어는 보편자의 도구이다. 언어[라는 여성명사]는 하지만 보편자가 아니다. 자연과 결부된 모든 것은 직접적으로/무매개적으로immédiatement 보편적이다. 분절articulation을 경유하는 것은 매개적으로만 보편적이다. 이러한 보편자는 가족의 정신, 성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들 중 하나로 삼고 있다. 보편적 도구는 시민들이 가족의 독특성의 시각에 대해, 가족의 법들 및 그것의 필연적인 성적 차이의 시각에 대해 중립적/중성적이기를 원한다. 성들 사이의 평등에 대한 옹호는 많은 경우 국가 및 국법들의 이익을 위해 가족 및 성적 독특성을 중성화하려는 기획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는 결국 기술로 귀착되는 우리 시대의 유물론적 전복들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법들은 공개적으로 여성을 희생시켰으며, 보이지 않게 남성을 희생시켰다.
  가족의 목표는 독특한 사람, 개인이지만, 이는 우연적인 개인이 아니라 더 이상 가족에 속하지 않게 될 미래의 시민이다. 가족, 젠더, 성욕sexualité의 목표는 보편자로서의 개인이며, 다이몬, 영혼 또는 개인은 우연적인 것들로서 부정된다. 비우연적인 이 개인은 전통적으로 여성, 유/젠더의 보호자에게 귀착된다. 여성들을 어떤 [남성적] 전체의 부분들([여성] 하나 + [여성] 하나 + [여성] 하나 ...)[불어에서 “un”은 남성 부정관사이고, “une”은 여성 부정관사다. 따라서 “un tout”는 “남성적 전체”이고, “une + une + une ...”은 “여성 하나 + 여성 하나 + 여성 하나 ...”가 된다.]로 정의하는 이론적 또는 실천적 사실은 여성들 각자의 고유한 젠더, 그들의 개인성에게 보편적 소명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방식이다. 여성들은 보편적 독특성/전칭 단수le singulier universel에 상응한다. 자신들의 개인성 안에서 여성들은 가장 독특한 것과 가장 보편적인 것을 결합한다. 여성들의 정체성은 자연과 정신의 체계적인 비-분열 안에서, 자연과 정신이라는 이 두 가지 보편자들의 수정/재결합retouche[불어에서 “retouche”는 “수정”, “가필”을 뜻하지만, 단어를 분철하면 “re-touche”, 곧 “다시 접촉함”, “다시 결합함”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안에서 성립한다. 여성은 온전하고 보편적이며, 너무나 온전할 정도로 보편적이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도 사물들의 질서를 전도시켜 왔다. 이는 우리의 문화에서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 낯설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여성들은 [남성적] 인간들hommes이라기보다는 다이몬, 비우연적인 개체들이다. 또는 그렇게 머물러 있다. 단지 어머니만이 아니라 이미 여성도 문제가 된다. 여성에게 바쳐질 숭배는 우리의 문명에서는―처녀성에 대한 자주 잘못 해석되어온 숭배를 제외한다면―반드시 다이몬, 곧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서, 근원적으로 분열되지 않은 자연과 정신으로서의 여성 자신인 다이몬에 대한 숭배인 것은 아니며, 드물게조차 이런 숭배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분명 헤겔에 따르면 죽은 [남]자는 마침내 평화를 발견한 자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있지 않고 계속적인 투쟁 상태에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또다른 평화, 식물적인 생명력의 성장이라는 평화를 얻게 될 수도 있다. 더욱이 헤겔의 체계 전체는 몇 가지 오류나 근거 없는 논변들을 제외한다면, 이러한 평화와 유사하다. 그의 철학의 일반 모델은 은밀하게 식물적인 모델이 아닌가? 하지만 체계의 내부에서 이 체계의 의식적 전개의 질서를 따를 경우, 독특성에서 벗어남은 죽음의 질서, 죽은 [남]자의 질서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념 또는 신념은 신체와 정신의 분열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분열은 여성이 국가에 희생될 때, 남성이 시민성 및 젠더의 관점에서 보면 중성화되어 있는 문화에 진입할 때 작동하게 된다. 사실 독특성의 지양은 성장에 대한 복종에 의해, 자연적인 보편적 리듬에 대한 귀속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 이러한 귀속은 심지어 독특한 죽음보다 더 보편적이다. 분명히 자연의 보편성은 복합적이지만, 자연은 끊임없이 완성되고 생성 중인, 완성되고 열려 있는 모습이며, 자신의 완성 속에서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가족에 빚진 게 없으므로, 생명에 대한 성별화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므로, 직접적/무매개적으로 생성된 자연의 존재는 죽음이다. 자연에 빚진 게 없으므로, 자연에 대한 복귀는 죽음의 질서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곧 자연적이고 가족적이며 여성적인―또는 원한다면, 한밤중의nocturne―정신의 희생은 뿌리내린 존재enracinement의 밤을 개념의 시대의 맹목으로 대체했다. 의식의 대자를 소멸시킨 다음, 남자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감각적인 것의 즉자, 감각적인 것이 즉자대자로 생성하는 것을 파괴한다. 이러한 파괴는 정신의 내용을 파괴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축소시킨다. 감각적인 것 그 자체는 정신의 생성에서 거의 사고되지 않고, 사고된다 하더라도 정신의 파토스[“파토스pathos”는 “passion”과 마찬가지로 “정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수동”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후자의 경우 “정신의 파토스”는 정신이 완전히 개념화해서 포섭할 수 없으며, 사고활동을 위해 정신이 항상 의존하고 복귀해야 하는, 개념의 타자, 사고의 원천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가 아니라 정신의 질료 내지는 실체로서의 감각 지각으로 사고되는 것 같다. 만약 분명하게 선언되고 벌어진 전쟁이 인민을 파괴한다면, 이 전쟁은 또한 의식이 정신의 가능한 내용으로서 감각적인 것의 파괴로 이끄는 좀더 은밀한 전쟁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이는 소음이 우리의 신체 균형에 미치는 충격에 의식이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의식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과거나 미래의 전쟁은 의식이 생명의 자양분이자 생명을 위한 피신처로서의 자연의 파괴에 직면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의식의 주의를 분산시킬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은밀한 파괴는 전쟁을 초래하거나 아니면 전쟁과 맹목적 폭력, 물자부족을 조장할 것이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결백한 듯한 인상을 주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의 명석한 부분을 대표하기(또는 대표할 것이라고 가정되어 있기?[“대표할 것이라고 가정되어 있기?”의 원어는 “représentrait?”이며, 이는 “représenter”라는 동사의 조건법(영어로는 가정법) 형태이다. 이런 의미를 고려해서 “이라고 가정되어 있기”라는 말을 추가했다.])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쪽을 억압한다. 웃으면서, 공손하게 의무에 따라 남자들은 상처를 입히거나 죽인다. 그들은 악에 대해 무의식적이다. 적어도 자신들이 문화를 완결하는 데 도구로 삼았던 절대적 의식을 지향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악을 영속시키는 순간에, 그들은 악에 대해 무의식적이다. 하지만 무의식에게 모든 권리를 부여하고, 모든 면죄부를 부여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나는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나의 답변, 정신분석학의 입장도 포함하는 나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세계 전체/모든 사람들tout le monde[불어에서 “tout le monde”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숙어이지만, 말 그대로 하면 “세계 전체”라는 뜻이다.]는 코드화된 언어 현상인 무의식에서 동일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무의식은, 부분적으로는 남성에 의해 다른 젠더 및 자신의 젠더의 그림자, 이 양자가 무의식 안으로 감금된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범죄이기도 한 이 밤의 파토스에 대한 권리를 왜 무의식에게 부여하는가? 다른 젠더가 우리 문화의 경제 안에서 동일한 행동의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데, 왜 그렇게 하는가? 여러 세기 동안 세계의 [여성적] 일부une partie는 헤겔의 관점에 따르면, 타자에 대해 범죄적이었다. 이는 이 일부분이 세계의 다른 절반의 윤리적 법칙을 깨뜨리거나 침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여러 세기 동안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윤리적 의식을 점거/탈취하고서s'empare, 윤리적 의식을 절대적으로 밝혀낼 수 있고, 그것의 진리, 모든 진리를 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여러 세기 동안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인간의 유[젠더]를 그 유의 파토스와 혼동해왔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여정은 우리 문화에서 정신의 이러한 생성에 대해 잘 기술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두 개의 유로서 실제로 인지하는 대신, 다른 젠더에서 유래하는 통찰―즉자적이고 대자적인 통찰―을 받아들이는 대신,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자신들이 모든 진리를 지니고 있고 전체에 관해 입법할 수 있는 권리(철학, 법, 정치, 종교, 과학 ...)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기 의식은 행위하자마자 유죄라는 사실, 그것은 분명히 그렇다. 그것은 특히 유죄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행위를 규정하고, 다른 젠더를 자신의 그림자 안에다 놓아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의 양가성을 부정하면서 또는 다른 젠더를 이러한 양가성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단순성을 주장하고 본질이 존재하는 그대로 자신에게 발현된다고―하지만 이러한 발현은 사실은 자기 의식이 어떤 대자 안에서 자기로 복귀하는 것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주장할 때, 자기 의식은 유죄이다. 게다가 종교적 계시révélation의 내용은, 이러한 계시를 종결/폐쇄시켜야clôture 할 필연성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젠더는 자신에게 어떤 신, 아버지 신, 아들 신, 성령 신을 필연적으로 부여할 수밖에 없음을 증거해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계시에 대해 어떤 것도 덧붙여지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 역시 증거해준다. 여성에게는 보호하는 게 범죄였던 반면에, 남성에게는 덧붙이는 게 범죄가 될 것이다. 그녀는 보호할 수 없는 반면, 그는 [덧붙이지 않고] 오직sans plus 보호[보전]해야 한다. 의무는 항상 동일하며, 심지어 언어 안에서도 그러하다. 실체 및 첫 번째 토포스topos[“토포스”는 희랍어로 “장소”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질료”라는 의미에 가깝게 사용된 것 같다. 곧 존재자들이 형성되기 위한 원초적 기반, 모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여성인 반면, 육화[신체화]되고 발현된 기호는 남성이며, 어떤 것도 이러한 구분을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러한 구분은 닫혀 있어야 한다. 여성이 덧붙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종결/폐쇄는 언어의 불가침성으로서 진리의 계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가?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의 정신에 대한 관점에 따를 경우, 이는 궁극적으로 최초의 운동자le premier moteur와 제일 질료la matière première[“최초의 운동자”는 순수 능동성을, “제일 질료”는 순수 수동성을 함축한다. 게다가 전자는 남성 명사이고 후자는 여성 명사이다.]가 서로, 신과 여성이 서로 접촉 불가능하다는 사실로 귀착되는 것인가?
  하지만 남성-신은 남성 젠더의 언어와 마찬가지로comme la langue du genre masculin, 여성으로부터, 있는 그대로 훼손되지 않고 찬양받는 어떤 질료―이 질료가 다양한 장식들로 치장되기는 하지만―로부터 탄생했다. 둘 사이에서 인간/남자가 성립한다. 만약 인간/남자가 자신의 그림자들과 빛들 사이에서, 자신의 밤들과 밝음들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면, 여성은 아무런 표시도 지니지 않은 제일 질료와 남성이 이 제일 질료를 치장하고 가리는 기호들 내지는 표장들 사이에서, 남성 및 그의 세계에 의해 분할되어 있다. 여성은 결코 자신을 재통합하지 않을 것이다. 또는 이러한 재통합은 아직도 도래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재통합은 아마도 기원에서는 발생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 또는 여러 여성들의 입술들/음순들 사이에서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탄트라 문화를 비롯한 몇몇 문화들이 이를 증거해준다. 히브리 문화, 적어도 카발라는 입술들을 전도된 이중의 yod[ “yod”는 히브리어의 10번째 알파벳 문자이다.], 전도된 이중의 언어로 표시한다. 기독교의 경우는 예수의 어머니에게서 침묵의 기호의 중요성을 통해, 그녀의 처녀성이 지닌 신성한 성격을 말하고 있으며, 입술들을 결합함/닫음으로써 종교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침묵 이외에, 이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문자는 m이다. 이 자음은 다른 모든 자음의 기원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하면서 또한 가장 모호한 자음이다. 이러한 m의 음성은 인도 문화에 따를 경우, 특히 aum이라는 신성한 음절에서 볼 수 있듯이, 발현되지 않은 것[밖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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