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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이제이북스 출판사에서 출간될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에 관한 논문집에 수록될 글입니다. 아직 교정이 완료되지 않은 번역이기 때문에, 역시 무단으로 인용하는 것은 금지합니다. 인용을 원하는 분은 역자에게 사전에 허락을 얻기 바랍니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 정치의 타율성. 루소에서 마르크스로, 마르크스에서 스피노자로[주 1: (역주)  이 글의 출전은 다음과 같다.  E. Balibar, “Le politique, la politique. De Rousseau à Marx, de Marx à Spinoza”, Studia Spinozana 9, 1995. 원래 제목대로 하면 [정치적인 것, 정치. 루소에서 마르크스로, 마르크스에서 스피노자로]가 되겠지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고려해서 제목을 약간 바꿨다. 첫째,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기획―곧 근대성의 기획 자체―은 루소가 가장 명시적으로 제시했지만, 이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곧 정치의 타율성의 발견에 따라 근본적인 변모를 맞게 된다. 따라서 이 글의 제목의 의미는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자율성의 기획과 마르크스의 정치(la politique)의 타율성의 문제설정 사이의 차이, 후자에 의한 전자의 지양을 함축한다. 둘째, 하지만 마르크스는 정치의 타율성의 조건을 경제의 영역에서만 발견했으며, 이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의 불가능성, 따라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종언의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그리고 이미 루소 이전에,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한계, 따라서 정치의 타율성의 또다른 조건을 이데올로기의 영역―스피노자의 용어법대로 하면 상상과 정서의 영역―에서 발견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이 양자의 결합 (불)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해명은 주류―곧 자유주의적―근대성 논쟁에서 억압되어온 핵심 쟁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주 4) 참조. ]

 

 


    1. 1925년 맨체스터에서 본(C. E. Vaughan)의 루소 연구 및 루소 저작의 주석본들에 대한 보충으로 그의 유작 연구논문집이 출간되었다. 『루소 전후의 정치철학사 연구』(Studies in the history of political philosophy before and after Rousseau)라는 제목을 지닌 이 책은 이후 정치철학 교육의 고전이 된다. 여러 세대가 이 책에서 제네바 철학자의 이름이 붙은 “부재하는 중심” 주위로[이 저서에는 루소에 관한 논문이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역자] 스피노자와 로크, 비코, 버크, 피히테, 마치니와 다른 사람들의 학설이 배치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와 『공산당 선언』(1947년 작성), 『자본』(1867년 1권 출간) 또는 『반(反)뒤링』(1878년)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세대와 『인간 불평등의 기원 및 기초에 관한 논고』(1754년)나 『사회계약』(1762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거리와 동일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앞서 루소에 대한 관계에서처럼 “마르크스 이전”과 “마르크스 이후” 사이의 대조가 스피노자를 포함하는 정치적 전통에 대한 우리의 독해―우리는 여기서 현재의 실마리들을 찾아보려고 한다―의 부재하는 중심을 구성하지 않는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루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그것들이 산출한 모순적인―혁명적이면서 반혁명적인―정치적 효과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각자의 세기에 서로 비교될 만한 중요한 후계자들을 지녀 왔다[주 2: 나는 각자의 세기들이라는 표현을 사후(après-coup)에 도래하는 것들로 이해한다. 곧 19세기가 “루소의 세기”였듯이 20세기는 “마르크스의 세기”가 될 것이다. 이는 19세기에 루소에 대한 관심이 소멸되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앞으로 수십년 동안 마르크스의 망각이라는 생각이 개연성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둘 사이의 유비는 훨씬 더 엄밀한 토대들을 갖고 있다. 『사회계약』 첫부분(1부 5장)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서 루소는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 따라서 그 내적 통일성의 원리에 관해 질문했다[주 3:(역주)  “그로티우스는 말하기를 인민은 국왕에게 자신을 바칠(se donner)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인민은 자신을 바치기 전에 이미 인민인 셈이다. 이 헌신(don)은 그 자체가 시민적인 행위이므로 공적인 토론을 전제한다. 따라서 인민이 왕을 선출하는 행위를 검토하기에 앞서 우선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행위를 검토하는 게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필연적으로 전자의 행위에 앞서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의 진정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Du contrat social, in Oeuvres complètes III, Gallimard, 1964, 359면; 『사회계약론』 이환 옮김(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17면(번역은 수정). 이에 관한 발리바르의 논의는 E. Balibar, “Ce qui fait qu'un peuple est un peuple―Rousseau et Kant”, Revue de Synthèse, 1989 [La crainte des masses: Politique et philosophie avant et après Marx, Galilée, 1997에 재수록] 참조.]. 이는 하나의 통치(정부, gouvernement)의 구성에 대한 모든 반성에 전제되는 질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 나름대로 계급투쟁과 대중운동 및 사회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 반성하면서, 국가 속에서 제도화된 하나의 인민의 내적 통일성이라는 문제로부터 인민 자체의 혁명적 통일성이라는 문제로 질문을 전위시킨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인민중의 인민”이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노동자 계급 안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 아래 이를 찾아내려고 한다. 이로써 그들은 근대 민주주의 정치사상만이 아니라―루소의 저작이 특히 분명하게 보여주는―이 사상을 특징짓는 “봉기”와 “구성” 사이의 내적 긴장 역시 발본화한 것으로 보인다(Balibar 1989/1991).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단순히 그 사상을 반대로 취했을 뿐이다. 
    마르크스 정치이론의 독창성 및 이것이 표상했던 절단(coupure)의 정확한 본성, 그리고 그 이후에 도래하는 이론에 이것이 부과하는 제약들(따라서 우리 모두는 돌이킬 수 없게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을 평가해 보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루소주의의 선례를 알고 있어야 한다.
    한 가지 본질적인 점에서 루소는 “구성”[헌정]에 대한 이전의 모든 이론과 단절했다. 이제부터 입법은, 인민주권의 표현이기 때문에 내재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정치를 규칙들의 집합으로 또는 통치와 통치자들(이들이 집단적이라 하더라도)의 “기술”(art)로 계속 사고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이 판명된다. 이 사실 때문에 그의 선행자들에 대한 독해와 활용은 완전히 의미가 변화된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이 점에서 양자는 사실상 분리될 수 없다)는 역사의 원동력과 의미를 의지나 이성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표상하는 이론들과 단절한다. 정치를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인”[관념론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이러한 단절을 완화시키기는커녕, 그 효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2.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 관념을 주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루소에서 마르크스로 나아갈 때 한 가지 전도가 이루어진다. 만약 마르크스가 완전히 의식적으로(특히 그가 사적 소유를 소외의 근원으로 들고 있는 루소의 이론을 자주 암시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 루소의 민주주의적 참여를 발본화했다면, 이는 정치라는 통념의 의미 자체를 전도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루소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관점의 탁월한 대표자다[주 4: (역주) 발리바르가 이 글에서 사용하는 “정치”(la politique)와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구분은 프랑스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의 구분을 차용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정치”, 곧 경제, 문화, 종교, 사회 등과 구분되는 제도적 영역으로서의 정치는 불어로는 “라 폴리티크”(la politique)에 해당한다. 그런데, 클로드 르포르는 이처럼 경험적인 제도적 구분을 전제하는 “라 폴리티크”라는 용어는 정치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정치의 핵심적인 의미는 사회의 한 제도적 영역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세계 및 자신들 사이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산출함으로써 사회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산출적 원리를 가리킨다. 곧 르포르에 따르면 넓은 의미의 사회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경제, 종교, 문화 등과 같이 사회의 한 제도로서 정치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 자체의 제도화를 실현하는 게 곧 정치다.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와 구분하기 위해 르포르는 이런 의미의 정치를 “정치적인 것”, 곧 “르 폴리티크”(le politique, 영어로 하면 the political)라고 부른다(『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19-20세기』(Essai sur le politique: XIXe-XXe siècles), Seuil, 1986에 수록된 여러 논문 참조). 그리고 르포르는 이런 의미의 “정치적인 것”의 차원(또는 사회의 상징적 차원)을 처음으로 발견한 공적을 마키아벨리에게 돌린다(Claude Lefort, 『저작의 노동. 마키아벨리』(Le travail de l'oeuvre. Machiavel), Gallimard, 1972 참조). 반면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상부구조인 정치의 본질을 하부구조인 경제에서 찾음으로써, 오히려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상징적 차원을 해명하지 못하고, 당관료제와 경제결정론의 이중적 굴레에 빠지게 된다. 르포르의 이런 구분법은 라클라우와 무페를 비롯한 영미권의 좌파 정치이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여기서 르포르를 따라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양자를 각각 “타율성”과 “자율성”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정치의 타율성”이란, 르포르식의 “정치적인 것”을 포함하는 모든 정치의 차원은 자기자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근원적 타자, 또는 이질적 차원에 의해 규정되어 있음(바로 이 때문에 정치는 타율적이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의 차원을 규정하는 이 타자(마르크스주의에서는 “경제”)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초월적 지위, 곧 최종 심급의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 타자는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 논문에서 발리바르가 보여주려는 것은 루소의 업적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발견해낸 데 있는 반면, 마르크스는 경제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근원적인 장소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정치(노동의 정치)의 가능성의 장소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치는 “인민 중의 인민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곧 역사의 주체의 선험적(또는 적어도 실제적)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곧 본질주의와 목적론의 굴레에 빠져들게 된다. 이에 비해 스피노자는 대중들(multitudo)이라는 개념을 정치의 중심 문제로 부각시킴으로써, 마르크스식의 정치의 타율성 이론이 지닌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곧 마르크스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정치의 타율성의 또다른 차원을 발견하며, 이는 마르크스 이론이 지닌 본질주의와 목적론의 한계를 정정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원천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발견한 경제의 차원을 경험적인 사회영역으로 환원시키는 르포르와는 달리, 발리바르는 경제가 함축하는 “정치의 타율성”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를 또하나의 정치의 타자, 곧 스피노자의 이데올로기론과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다(이 양자의 관계는 대립이나 모순이 아닐 뿐만 아니라, 종합이나 접합, 보완 또는 병치나 나열의 관계가 아니다). 발리바르의 이러한 이론적 문제설정은 다시 [정치의 세 가지 개념: 해방, 변혁, 시빌리테](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E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é)(in La Crainte des masses, 앞의 책)에서는 “시빌리테”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좀더 복합적인 시도로 전개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과 “정치의 타율성”의 구분은 르포르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인 전유의 시도로 읽는 게 타당할 것이다.]. “주권”과 “통치”를 분리시키고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들”을 최초로 전위시키면서 이러한 관점이 고전주의 시기 이후까지 살아남게 해준 것은 바로 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치는 조건들을 가질 수 있으며, “정념들”과 “이해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사회적 소재와 관계할 수 있지만, 그것은 최종 분석에서는 인민과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활동 또는 “구성적” 권력으로서의 자기자신 위에 합리적으로 기초한다[주 5: 근대정치에서 구성적 권력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서 네그리와 일치할수록, 우리는 그가 루소를, 루소가 중심적으로 대표하는 전통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시키는 데 더욱 더 놀라게 된다!(Negri 1982; 1992 참조).]. 따라서 우리는 일종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곧 정치는 자신이 그 조건들을 창출해 내는 개념들과 결단들의 자율성을 전제하는 것이다[주 6: 알튀세르가 자신의 1966년 논문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읽기에 『사회계약』은 정치적 자율성의 조건들―이는 또한 정치의 자율성의 조건이기도 하다―을 재창출하려는 아포리아적인(그리고 절망적인) 시도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선례를 시민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고대의 공화적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및 특히 『정치론』에서 민주주의를, 각각의 개인이 “역량만큼의 권리”(tantum jus quantum potentia)를 누리는 “가장 자연적인” 국가, 완전하게 절대적인(omnino absolutam) 국가로 정의할 때, 그에게서도 이 전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 및 미국혁명과 더불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또다른 자율성, 곧 집단적 주체로 생성하고 영속적인 “봉기”의 행위 속에서 인민주권을 강제하는 “인민” 그 자체의 자율성을 표현하는 경우에만 현실적인 것이 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이 전통에 속해 있는 마르크스는 정확히 말하면 그 이론적 표현을 완전히 전도시켰다. 곧 그는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에게 정치의 “진리”와 “현실성”은 그것의 고유한 영역 속에, 그것의 고유한 자기의식이나 활동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바깥에, 그 “외적” 조건들과 대상들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의 외재성은 정치를 내생적으로 구성한다.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 유물론의 근본 측면이 존재한다(반면 구성적 봉기의 영속적 흔적으로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 대한 루소주의적 관점은 근원적으로는 관념론의 쇄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물론을 환원주의나 속류 경제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다.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개인들 및 사회적 집단들의 활동이 포함되어 있는 정치적 과정을, 그것의 타자, 곧 넓은 의미에서 경제의 모순들의 발전과 변증법적으로 동일시했다. 그렇다면 정치적 실천의 존재를 무화시키거나 부정하는 게 문제인가? 반대로 좀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게 문제다. 이 경우 그것은 “계급정치”가 된다. 곧 그것은 양쪽 모두에서(혁명적 계급과 마찬가지로 지배계급의 관점에서도) 인지된 정치적인 것(du)의 제도적 한계들을 영속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사회적 실천으로 사고된다. 만약 착취와 지배, 따라서 사회적 생산관계 속에 함축된 적대의 결과들이 사회적 삶의 측면들 전체로 확장된다는 게 사실이라면, 정치를 달리 사고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마르크스로부터 물려받은 명시적인 역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인민의 자율성―인민의 자기규정 및 해방―을 정치의 중심에 실제로 기입하기 위해서는 근원적인 민주화주의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유지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인민 중의 인민을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으로 정의한다. 그는 이러한 동일화를 중심으로 정치의 타율성 이론을 구축한다. 분명히 이것은 정치와 그 타자, 곧 경제에 대한 도발적인 유물론적 동일화 위에 정초된, 근대철학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완성된 이론이다[주 7: 따라서 마르크스에서 정치주의에 대한 “경제적” 비판과 경제주의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결코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내가 다른 곳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그의 계급투쟁 이론에 특징적인 단락(短絡)으로 기술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Balibar 1985/1994).].
    마르크스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정치의 타율성에 대한 이러한 발본적인 정식화가 시대의 변화를 규정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자유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논쟁을 비롯한) 모든 정치적 논쟁은 전위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그것을 지탱하는 사회적 변화들에 의해 오늘 의문스럽게 된 것이 바로 정치와 경제의 이러한 단락(이것의 맞짝은 국가의 기능과정 자체 속에서 “노동의 정치”의 중심적 중요성이었다)이라는 점 역시 그에 못지 않게 분명하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이론으로서 “정치철학”이라는 관념이 전면에 재등장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는 루소로의 회귀나, 이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로크 또는 칸트로의 회귀로 제기된다. 이 때 스피노자로 회귀하는 경우는 훨씬 드문데, 그를 이러한 관점[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으로 이끌어오기란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철학적으로 결정적인 질문이며, 현재의 작업들 중 한 부분 전체를 관통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분명한 해결책을 얻지 못하고 있다.

    3. 스피노자의 사상과의 대면이 결정적이라고 판명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스피노자를 그의 텍스트와 콘텍스트 속에서 읽고, “스피노자주의적인” 개념들과 지향들을 근대정치에 대한 반성에 작동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정치의 이율배반들 속에서 작용중인 것과 함께, 그것들[이율배반들]을 봉기와 구성적 권력, 국가적 제도화라는 고전적 딜레마들에 결부시키는 것을 동시에 이해하게 해주는 수단이 되지 않겠는가? 이미 스피노자는 17세기에 “정치적 주체”를 민족이나 인민이 아니라 좀더 원초적인 실재인 대중 또는 “대중들”(multitudo)과 동일시하면서, 성숙기의 세 권의 위대한 저작(『윤리학』, 『신학정치론』, 미완성된 『정치론』)에서 정치와 존재론의 교차지점에서 자율성과 타율성의 딜레마가 제기하는 모든 질문들을 자신의 방식에 따라 조우했었다.
    우리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중요성은, 내가 다른 곳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그가 (시민들의 자연권을 다수자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으로 정의하면서) 대중들[주 8: 나는 multitudo라는 용어에 대한 가장 좋은 불어 번역은 복수로 사용된 “masses”[대중들]이라고 생각한다(Balibar, 1985).]에게 국가 속에서의 구성적 기능을 부여한다는 사실로부터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역사 속에서 “대중운동들”의 현상의 양면성을 탐구하는 방식에서도 비롯한다. 근저에서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대중운동들이 국가들(imperia)의 보존에 필수적인 “민주적” 합의의 필수적인 기초를 구성하면서 또한 동시에 (『정치론』 7장 25절에서 말하는 “대중으로의 복귀”를 통해) 그들의 실존을 가장 강력하게 짓누르는 파괴의 위협을 이루기도 한다는 것이야말로―고전주의 시기의 위기들과 혁명들의 정세가 강제하는―결정적인 정치적 문제이며, 이는 대중들의 “존재론”(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병인론(étiologie)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대중운동은 법과 정치적 권위를 활용해서 몰아낼 수 있는 “자연상태”의 환영들로 사고되어서는 안되며,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정치의 현실태 자체로 사고되어야 한다[주 9: 사람들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3세기에 걸친 “형이상학적” 독해들을 극복하고 스피노자가 위대한 (반종말론적) 역사이론가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Tosel 1994, Albiac 1994, Moreau 1994를 참조하라.]. 이는 상상의 요소 안에서 구성되고 진화하는 현실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고전주의 시기의 다른 이론가들과 비교가 안될 만큼 정치의 이러한 상상적 토대에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 역시도 심원한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중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Terrere nisi paveant)라는 타키투스의 표현(Annales I, 29)은 『정치론』 7장 27절에서 사용되고 『윤리학』에서도 약간 상이한 형태 아래 다시 사용되고(4부 정리 54의 주석(“우중들은 위협받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Terret vulgus, nisi metuat)) 있으며, 스피노자에게는 항상 설명적이면서 규범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법적 정의―그는 우리가 여기에서 “가장 본성적”이고 “가장 절대적인” 국가를 보도록 인도한다―를 아포리아적이게 만드는 원인들 중 하나가 여기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스피노자에서 민주주의의 아포리아(이는 주권적 대중들이 자신들의 정념들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또는 자기자신에 대해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제도적 메커니즘을 단번에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존재한다)는 우리가 그의 논거들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때로는 보수적이고 때로는 혁명적인 결과들을 설명해 준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의 철학의 가치 전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에게서 인간본성에 대한 독창적인 “관-개체적” 관점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유물론적 자유 개념을 읽어내지 못할 것이며, 정서적 동일화와 합리적 교통(개인들의 상호 유용성에 기초해 있는) 사이의 상호전제 관계들에 대한 해명에 기초하고 있는 역사 속에서 “공동체”의 변증법―이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에 대한 현재의 토론 대부분이 그에 종속되어 있는, 공동사회(Gemeinschaft)와 이익사회(Gesellschaft),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대립을 단숨에 뛰어넘는 것이다―도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분명 스피노자는 집단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들이나 권리들(특히 사고와 표현의 자유)의 상호보충적 기능들에 대해 매우 민주주의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서 전자와 후자는 최종 분석에서는 관개체적 코나투스의 구성적이고 활동적인 역량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그것이 지니고 있는 가공할 만한 실천적 난점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혁명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표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혁명들을 항상 고대적인 관점에 따라 대중적인 폭동들을 동반하는 정체형태의 변화나 통치자들의 개인적 교체로 생각했다. 분명 여기에는 민주주의 정치의 또다른 측면, 곧 하나의 국가“장치”나 국가장치 전체 속에 조직되어 있는 지배(또는 소외)와 차별(또는 불평등)에 저항하는 모든 봉기가 함축하는 부정성의 측면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그리고 우리가 그를 뒤따를 때, 우리의 무능력)이 존재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근대정치의 보편성이 전제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4. 나는 다른 곳에서(Balibar 1992) 이러한 이중적 봉기를 지시하기 위해 하나의 특이한 표현, 곧 평등한 자유égaliberté라는 명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근대혁명의 텍스트들(특히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평등과 자유가, 하나의 부정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이중 부정이라는 논리적 형식 속에서 원리상 불가분하며, 심지어 동일하다고 정립한다. 곧 평등 없이 자유 없으며, 자유 없이 평등 없다. 그것들은 이러한 동일성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동물(zôon politikon) 및 로마의 시민과 같이 국지적이며 배제적인 시민성만이 아니라, 또한 스토아적인 세계시민(cosmopolis)과 같은 도덕적 시민성 및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백성(civitas dei)과 같은 초월적 시민성과 대조적으로) “무한한” 실천적 시민성이라 불릴 수 있는 새로운 시민성의 정의를 정초한다.
    하지만 평등한 자유 명제는 안정적인 공리, 자기규제적인 법적 질서의 근본규범(Grundnorm)을 구성하지는 못한다. 일단 언표되면(역사 속에서 물질적으로 각인되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주 10: 가장 명시적이고 가장 결정적인 반복들 중 하나는 정확히 말하면 1864년 제1 인터내셔널의 창립연설이다. “노동자들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평등한 자유 명제로부터 비롯하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정확한 표현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 이후 무시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모순들이나 갈등 없이 제도들 속에 실현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들은 근대 정치의 제도들 속에 존재하는 평등과 자유의 두 가지 거대한 매개들, 곧 소유와 공동체(ownership and membership)에 불가분하게 관련되어 왔다. 왜냐하면 이것들 각자는 공개적인 갈등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곧 계급 공동체에 대립하는 민족 공동체(전자의 이상적 형태는 마르크스가 보기에 유일하게 현실적인 국제주의였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인데,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러한 반정립에 대한 고전적 정식을 제시했다)와, 자본주의적 (또는 독점적) 소유에 대립하는 개인적 노동 위에 기초한 소유(이들 각자는 상대편을 “수탈”이라고 부른다)가 바로 그러한 갈등들이다. 계급투쟁의 담론(그것이 부르주아적이든 프롤레타리아적이든)은 지난 2세기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두 개의 반정립을 교차시켜 왔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특히 흥미있는 것은 공동체가 사고되어 왔던 대립형태들 사이의 대결 및 따라서 근대 시기의 집합적 주체 내지는 역사의 주체의 모습이다[주 11: “역사의 주체”라는 표현은 19세기의 위대한 역사철학들이 활동 내지는 실천이라는 주제와, 집단적 의식 내지는 정신이라는 주제를 결합하고 있는 한에서―그것이 칸트의 인류이든, 피히테의 민족 또는 헤겔의 인민이나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이든 간에―그것들 사이의 전체적인 비교를 직접 요구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표현은 이 저자들 중 누구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표현을 발명하고 고전들에 대한 해석을 포함한 모든 현대철학들에 이 표현을 강제한 사람은 『역사와 계급의식』(1923)의 루카치다.]. 루소를 우회한 다음 다시 피히테를 우회해 보면 문제가 좀더 명료해질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빈발하는 너무 성급한 독해들이 주장하는 것(이는 특히 프랑스에서 그런데,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여기에는 견고한 민족주의적 편견들이 계속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과는 달리, 1808년의 『독일 민족에게 고함』에서의 피히테는 문화주의나 역사주의, 게다가 인종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독일민족의 선택”이라는 그의 표현은 종교개혁과 자코뱅주의의 이중적 유산을 결합하는 것으로 심원하게 보편주의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그것은, 능동성과 주체성이라는 변증법적 개념들 위에 기초하고 있는 집단적 동일성들의 형성 및 이상화에서 도덕적 보편주의(또는 상징적 보편주의. 이에 대해서는 Milner 1983을 참조)의 범주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또는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양자택일들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는 사람 모두에게 특권적인 반성의 요소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피히테의 민족에 대해 타당한 것은 거의 동일한 용어들 속에서, “사물들의 실존상태의 해소”를 통해 현재의 영역 자체에서 미래를 창출해 내는 힘으로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이것은 그 해소의 의식적 표현에 불과하다―에게도 타당하다.

    5. 다시 우리는 여기서 스피노자를 향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그의 철학은 정치, 따라서 철학에서 보편주의의 양면적 기능들을 분명하게 해명해 준다. (니체와의 몇몇 성급한 비교들이 제시하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분명히 반보편주의자로 간주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인간주의와 계몽주의에서 유래하는 고전적 형태의 보편주의의 옹호자도 아니다. 관개체성에 대한, 또는 개체들(여기에는 인간 개인도 포함된다) 사이의 현실적 관계들 전체의 무한한 연관망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그의 사상이 궁극적으로 준거하고 있는 개념은 보편성 개념이 아니라 독특성 개념이다. 일체의 목적론과 달리 그에게 보편자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독특한 본질들 사이의 갈등이나 구성적인 마주침들(합치들, convenientiae)에 대한 이성적이거나 정념적인, 얼마간 부적합한 표상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보편성에 대한 “형식적”이거나 “실질적”인, 그리고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관점들 사이에서 발생하기 쉬운 모순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준다.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라는 혁명적 관념(『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인터내셔널 창립연설』)과 민족공동체에 대한 그 역시 보편주의적인 표상(『독일 민족에게 고함』) 사이의 모순이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마르크스의 범주의 영역 내부에서 전개되는 모순도 그러한데, 이는 보편성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과 명백하게 관련된다.
    스피노자 철학의 이러한 비판적 기능은 경제와 정치, 정보의 “세계화”(Globalization)라고 불리는 것 때문에 보편성이 “현실적”인 것으로 되고 있는 오늘날 분명히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화는 계급이나 민족의 (또는 종족적이고 종교적인 공동체의) 투쟁들의 조화나 화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불행하게도―그러한 투쟁들로부터 비롯된 적대들의 세계 전체로의 확장이라는 의미의 세계화이다. 그것은 혁명 개념에 대한 우리의 용법에 관련하여 결정적인 것이다. 기성권력의 “전도”라는 은유는 알다시피 혁명 개념의 고대적인 용법 이래로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근대적인 의미는 무엇보다도 억압에서 저항으로, 감수된 불의에서 봉기로, 그리고 봉기에서 집단적 해방으로 인도하는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의미다. 이는 분명히 목적론적 도식으로, 만약 이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목표들”의 실현을 통한 “역사의 종말”의 이론, 곧 새로운 종말론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본 것처럼 연속적인 단계들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하는 역사의 주체에 대한 표상을 함축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교육과정(Lernprozess) 또는 도야과정(Bildungsprozess)은 주체 자신에 의한 주체의 구성이자 해방이다. 이는 근대의 위대한 “관념론”(루소 이후, 칸트에서 피히테와 헤겔, 마르크스 자신에까지 이르는), 곧 우주와 그 완전한 질서에 대한 표상의 관념론인 형상들이나 본질들, 이데아들의 관념론이 아니라, 혁명의 정세와 이상에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관념론인 역사적 관념론의 핵심이다. 피히테의 원민족(Urvolk)은 주체의 활동성(Tätigkeit)이라는 이러한 혁명적 이상의 순수한 표현이며, 이것은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의 위험스러운 마지막 정식에 이르기까지 다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상이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6. 그렇지만 여기서 철학 텍스트들을 관통하는 대립축들 사이의 복잡성과 긴장을 해소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세계의 변혁”의 형태이자 행위자인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는 확실히 자신의 고유한 해방과정 속에서 그 자신을 구성하는 역사의 주체의 한 모습이다. 피히테의 원민족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부여받은(스피노자라면 “선택”(élection)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도덕적 공동체를 명명하는 “경험적-초월론적”(empirico-transcendantal)개념이다. 마찬가지로 지난 2세기 동안 민족주의(또는 애국주의)와 사회주의는 호명하면서 동시에 호명되는 상징적 동일성들로서, 계속해서 대칭적으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내가 앞에서 정치의 타율성 이론에 따라 그 지평이 구성된다고 말했던 마르크스의 유물론 속에는 또한 아주 명시적으로 주체의 표상에 대한 해체의 요소가 존재하며,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에 작용한다.
    여기서 이러한 해체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생산과정(사상사가들은 자주 이러한 측면에서 마르크스와 스피노자 사이의 유비를 탐구해 왔다[주 12: 요벨이 잘 보여준 것처럼(1989/1991), 이러한 유비는 포이어바흐, 좀더 일반적으로는 자연주의적 전통의 매개에 따라 이루어진다])의 조직형태로서 착취에 대한 분석과, 적대나 “계급의식”(마르크스 자신은 결코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의 단순한 발전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계급투쟁들 및 그에 고유한 정치적 복합성에 대한 구체적 묘사(tableau)로부터 분리 불가능하게 도출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그리고 이러한 독창성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불러일으킨 대대적인 부인(否認)에 직면하여 이를 고집했다는 점에서) 옳았다. 곧 여러 가지 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는 역사의 주체라기보다는 역사 속의 비주체인 것이다[주 13: 이는 특히 마르크스가 그의 성숙기 작업들에서 “대중”과 “계급” 사이의 관계들의 “변증법”을, 완전히 이론화한 것은 아니지만, 실천적으로 취급했던 방식으로부터 비롯한다(Balibar 1985/1994 참조). 이는 스피노자와의 또다른 결정적인 대면지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봉기와 해방이라는 통념들과 양립 가능한 것인가?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혁명의 원리들이 사실과 권리의 독특한 응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진리의 요소와 양립 가능한가? 하나의 참된 명제가 주어진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생성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명제를 다른 모든 인간들에 준거시키는 인류의 한 부분에 의해, 그리고 그 부분을 위해―하지만 진리를 인지(reconnaît)하며 이 진리에서 자기자신을 [재]인지하는(s'y reconnaît) 그 집단이 거울에 스스로를 하나의 주체로 비추지 않으면서―이 명제가 언표된다는 것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간단한 게 아니며, 이는 계속해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토론에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스피노자적인 용어들로 하면 관념들과 정념들, 집단적 활동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문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의 한 요소가 절대자를 다룬 다른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피히테에게도 자주 전가되어 왔음을 알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피히테의 민족을, 인민의 자율적 구성을 필연적으로 되풀이하게 되는 상상적 공동체의 완전한 예시(민족 자체(Das Volk)는 하나의 민족(ein Volk)이 되며, 그 역도 성립한다)로 분석하는 것이 좀더 적합할 것 같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목적론적 표현들 및 프롤레타리아의 보편적인 역사적 사명에 대한 상상적 도표에 입각하여 마르크스를 위의 경우와 유비적인 스피노자적 해체에 종속시키는 것 역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Albiac 1994 참조).
    하지만 우리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나는 만약 이러한 비판이 스피노자와 마르크스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문제나 대상―직접적인 원천이나 영향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제쳐두고서―곧 “대중들” 및 역사에서 그들의 결정적 역할이라는 문제를 고려한다면, 훨씬 더 흥미롭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비교는 스피노자가 마르크스에게는 지각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어떤 것을 설명한다는 (그리고 따라서 이것은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모호하고 죽은 문자로 남아있는 마르크스 자신의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관념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의 맞짝(contrepartie)은 마르크스가 스피노자에게는 지각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어떤 것을 설명한다는 (그리고 따라서 이것은 대부분의 스피노자주의자들에게는―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은폐된 채 남아있는 스피노자 그 자신의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스피노자에게는 (정서적 모방으로부터 시작되는) 대중의 동일화들(identifications)에 대한 이론 속에 심리학적 분석 또는 “상호개인적인 정신현상”에 대한 분석의 한 요소가 존재하며, 우리는 이것을 단지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로서만이 아니라 유물론적 역사관에 본래적인 아포리아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분명히 정치에 내재적인 경제적 조건 및 더 나아가 그것에 내재적인 적대들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의 “생산”에서 개인적 역량들의 합성을 보는 공리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인) 관점 때문에 본질적으로 스피노자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신의 역사적 분석에서 상상적인 것의 필연적인 장소(이데올로기 또는 물신숭배라는 이름 아래)를 표시해둘 만큼 충분히 변증법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 역시 상상의 정치적 효과들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필요한 경우마다 용어의 넓은 의미에서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조건들의 필연성을 언급해둘 만큼 충분히 변증법적이었다. 우리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과 타율성이라는 반정립을 넘어서, 마르크스의 질문들과 스피노자의 질문들의 상호보완성을 정치에 대한 현재의 사고를 위한 특권적 지평으로―적어도 하나의 연구방향으로서―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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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 2004-03-22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논문집으로 나오는군요. 마슈레 책의 참고문헌을 보니 이제이북스에서 출간예정이라길래 기다리는 중입니다만 "스피노자와 정치"만 출판되는 것이 아니라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논문들이 함께 나오는듯 하니 더욱 기다려집니다. ^^

balmas 2004-03-23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에 관해 쓴 논문들이 꽤 많습니다. 10여편 가량 되는데, 특히 이번에 수록될 <대중의 공포>나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같은 논문들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준 중요한 업적들입니다(책에 대한 광고 같아서 뭐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욕심 같아서는 다른 논문들도 함께 묶어보고 싶은데, 이 정도로 낼 수 있는 것만도 지금으로서는 감지덕지해야 할 형편입니다. 앞으로 스피노자나 발리바르의 작업에 관심이 좀더 높아지면 기회가 생기겠지요.
 

* 역시  Multudes에 실린 글인데,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서 <다중>의 문제가 어떻게 제기되고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제시해주는 좋은 글인데, 다만 다중을 <주체>라 부르는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이는 비주체적인 정치학을 사고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한 사례인 것 같다. <multitude>라는 용어는 <다중>으로 번역했고, 본문에서 한 번 등장하는 <masse>라는 용어는 <대중>으로 번역했다. 이 글 역시 출판을 염두에 둔 게 아니고 충분한 교열을 거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공적 매체에 무단으로 인용하는 것은 불허한다. 인용을 원하는 분들은 역자에게 미리 허락을 얻기 바란다. 

 

Fillippo Del Lucchese, “S'accoutumer à la diversité: Figures de la multitude chez Machiavel et Spinoza”, Multudes 13, 2003.

상위성(相違性)에 익숙해지기: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서 대중의 형상들

 

평민들(plèbs)에게 인간의 악덕을 한정시키는 자들의 견해에 대해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가 보여준 불신에서 출발하여 이 논문은 두 철학에게 정치의 토대를 이루는 다중의 이론적 지위를 검토한다. 한편으로는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태도가 강조되는데, 두 사람 모두 다중을 그 자체로 찬양하지 않고 그 부정적 측면, 곧 마치 자신들의 구원이라도 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투쟁하려는 인간들의 성향을 포착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합리성의 가장 거대한 표현으로서 다수의 개인적 주체의 구성이 강조된다. 이 논문은 독특한 개인(le singulier)에 대한 다자(le multiple)의 우월성이라는 관념 및 갈등적인 질서와 협동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이론 사이의 연계를 보여주고, 이것들이 스피노자 사상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끝을 맺는다.

***

    마키아벨리에게 역사가들의 견해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는 이들의 결론이 취약하거나 근거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주저 없이 비판한다. 특히 의미심장한 비판은 “다중보다 더 변덕스럽고 지조 없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에 대한 비판이다. 이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마키아벨리는 “문사(文士)들이 대중에 관해 비난하는 이러한 결함들은 모든 사람들, 특히 군주들에 관해서도 똑같이 비난할 수 있다.”
    유비적인 방식으로 『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다중에 관해 품고 있는 부정적 선입견을 벗겨내기가 어려움을 시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서술한 내용은, 모든 유한자에게 고유한 악덕들을 평민들에게만 한정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조롱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모든 사람은 똑같은 하나의 본성(자연, nature)을 갖고 있다. 권력과 교육이 우리에게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뿐이다.”[『정치론』 7장 27절]
    다중을 지조 없고 신뢰할 수 없으며 악덕에 잘 끌려다니고 본성적으로 반항적인 존재로 지각하는 전통에 맞서 스피노자는 새로운 관점을 구성하는데, 여기에는 다자(le multiple)와 독특한 개인(le singulier) 사이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다중은 독특한 개인들의 권리-역량[역량으로서의 권리]이 자기 조직화되는 내재적 과정을 통하여 국가의 역량과 덕목을 표현한다. 계약론자들이 말하는 일자로의 환원(reductio ad unum), 다자로서의 다자의 통일적인 종합에 맞서, 스피노자는 동일성의 관개체적(貫個體的, transindividuelle) 구성과정을 통해 독특한 개체들로 구성되는 복합적 개체의 합성을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는 1) 자연법과 다른 법들에 호소하지 않고서도, 곧 국가를 자연과 관련하여 국가 속의 국가인 것으로(tamquam imperium in imperio) 간주하지 않고서도, 국가의 형성과 삶, 해체를 설명할 수 있다. 2) 마키아벨리가 제기했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갈등을 먼 과거의 자연상태로 몰아내거나 가둬두지 않고 계속해서 [국가를] 위협하는 것으로 고려할 수 있다. 3)독특한 권리-역량들이 합성되는 내재적 과정이라는 관념 및, 다중을 합성하는 다양한 독특성들, 상위성들, 갈등들을 유덕하게 관리한다는 관념, 한 마디로 말하면 독특한 개체에 대한 다자의 우월성이라는 관념을 가공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이 주제들에 관해 성찰할 때, 그에게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논거들은 말 그대로 진정한 개념적 ‘도구상자’로 제시된다. 그는 단지 홉스를 반대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마키아벨리의 가장 독창적인 입장들 중 몇 가지를 재-가공함으로써, 다양성의 윤리를 구성한다.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가 일치하는 첫 번째 요소는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을 구성하는 데서 모든 단순화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역시 여기서 구성적인 양가성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한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행위 및 예견의 불확실성과 관련하여, 정치 행위에서 일체의 궁극적 보증의 부재와 관련하여 그렇게 한다. 다중은 참주들과 지배자들이 설파하는 환상들에 사로잡혀 있다. 다중은 역설적이게도 또는 기회주의적이게도, 예속들 중에서도 가장 가혹하고 가장 비극적인 예속 안에서 자신의 생존의 이유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예속의 관념이 지니고 있는 적극적인 요소 중 어떤 것도 자유의 현존만으로는 그 자체로 제거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다중이 겪는, 하지만 또한 때로는 다중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통해 이와 유비적인 주제들을 깊이 탐구한다. 예컨대 대중은 미신과 무지, 거짓 종교(vana religio)의 가공할 만한 도가니이다.
    다중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탐구는 심화되고 명시화된다. 두 저자 각각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지배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적자들, 소수의 엘리트들(petit en tant que petit)의 유덕함 내지는 자유주의적인 사법적 기획이 추구하는 백인 성인 남성 소유자 개인의 유덕함)를 뒤집거나 부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반대로 이는 정치적 현실의 새로운 원리의 구성을 긍정하기 위해, 특히 유토피아적인 정치적 주체성의 목적론적 구성이라는 환상적 기획이 대표하는 함정을 피하기 위해 양가성들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약점들을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다중의 부정적 면모에 대한 서술은, 그로부터 출발하여 특히 정치의 차원에서 다자의 덕목을 드러낼 수 있는 첫 번째 요소로서 필수적이다. 예컨대 스피노자에 따를 경우 민주주의적으로 정돈된 상태에서 부조리한 행태를 두려워할 소지는 줄어드는데, 왜냐하면 “큰 회의체에서 다수가 동일한 한 가지 부조리한 짓을 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주의에서는 부조리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이는 허황된 생각이다). 하지만 이는 덜 해롭게 될 텐데, 왜냐하면 이성은 다수의 판단들 및 이 판단들 사이의 대결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합리성은 다중의 몸체 자체 내에서 작용하는 다수 개인들의 자기 구성의 동역학 내에서, 그리고 이 동역학에 의해 탄생한다. 양(量)의 윤리와 정치는 숫자로부터 생겨나는 이성과 역량을 표현한다. 하지만 다자로부터 생겨나는 합리성은 단순히 독특한 개인이 표현하는 합리성보다 더 큰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관계의 관념이 일차적인 것으로 부각되고 다중 개념에 대한 정의 자체를 위해 결정적이게 된다. 다중 내부에서, 다중을 통해 현실화되는 합리성은 정확히 말하면 다양성의 표현인 한에서 우월한 역량을 구성하는 것이지, 그 집합적이고 복수적인 차원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독특한 개인의 경우 합리성이 정서들의 다수성을 희생한 댓가로 긍정되지 않고 오히려 정서들의 동역학과 갈등들 및 차이들을 조직하는 데 기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자 안에서 규정되는 갈등들 및 차이들은 다중의 복합적 몸체의 역량―매우 많은 방식으로 변용하고 변용되는 방식―을 배가시킨다.      
    여기서 마키아벨리 사상과의 ‘마주침’은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들을 낳는다. 다중의 범주는, 이 범주를 스피노자 정치 사상의 중심축들 중 하나이자 근본적인 혁신점들 중 하나로 만드는 실정적, 정초적, 구성적인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마키아벨리는 대의(代議) 및 다자의 규율화, 그리고 다자의 단일화라는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홉스가 원했듯이 다중의 인민으로의 전환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맞선 도구로 활용된다. 모든 목적론은 포기된다. 이는 상이한 통치[정부]형태 사이의 형식적 선택에 따른 포기가 아니라, 인간들로부터 확정적으로 그들의 역량 및 자연권을 박탈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따라나오는 포기이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적 지평에서, 상위성들의 종합과정으로, 갈등들의 정상화로, 차이들의 승화로 이해된 대의/대표(tamquam imperium in imperio)는 불가능해진다. 『정치론』에서 계약론이 포기되는 것과 평행적으로 우리는 다수적 개체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다중에 대한 가치부여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스피노자가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러한 독해를 가공할 수 있게 해준 논거들을 명료하게 살펴볼 시간이 되었다.

복수화(plusieurs)하기: 다자의 표현으로서 정치적 합리성

    『군주론』을 시작하면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인민, 곧 “신분이 낮고 비천한”(『군주론』 강정인 옮김, 까치, 2003(제 2판), 10쪽) 사람들에 속함을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적-정치적 전장(戰場, Kampfplatz)을 공개적으로 선택한다. 그는 인민에서 발견되는 오류들 및 결함들을 잘 의식하고 있다. 자주 눈앞의 이득의 신기루에 눈이 먼 이들은 희망과 공포, 오만과 회한의 포로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들의 책임은 일방적으로 인민에게만 전가되어서는 안된다.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토대 위에서 그는 소수의 지혜에 맞서, 다자들에게 전가된 전통적인 무능력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인 정치사상가들이 인민과 평민에 대해 표명하는 불신에 반대하고, ‘군주의 이성’ 및 귀족들의 지혜에 대한 평행적인 변호론에도 반대하여 마키아벨리는 두 가지 원칙을 강력하게 긍정하고 있다. 첫번째 원칙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간에 인간들 사이에는 아무런 본성적 차이도, 후자보다 전자가 우월한 존재들로 고려될 수 있게 해주는 아무런 본성적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번째 원칙은 인간들의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단지 교육에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합한 일련의 제도들로 인민들 및 군주들에서 나타나는 결함들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군주들은 법에 의해 ‘규제’된다면, 유덕하게 통치한다. 하지만 다중 역시 일단 법에 의해 ‘규제’되면, 동일한 유덕함을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편견은 뒤집어지고, 우호적인 조건들―곧 다중이 좋은 법률로 규제되는 경우―에서는 정확히 로마 인민이 그랬듯이 다중이 “비굴하게 예속되지도, 무례하게 지배하지도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에게 좋은 법률이란 갈등에서, 곧 귀족들 및 군주들의 야심과 억압에 대한 다중의 저항 운동에서 생겨나게 된다는 점은 굳이 환기시킬 필요가 없다. 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민주주의 이념을 구성하기 위해 다시 취하고 있는 다중의 역량/유덕함의 자기 조직화와 긍정의 내재적 원리이다.
    따라서 만약 자연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다면, 만약 군주가 우월한 합리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면, 이는 다중이 다른 행위자들(배우들, acteurs)과 동등하게 정치의 무대에 등장할 권리를 옹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곧 다중에게 존엄성과 정치적 합리성을 부여했다는 점에 “불경한” 마키아벨리의 경악할 만한 가르침들 중 하나가 있다.  
    『피렌체의 역사』에서 분석은 좀더 심화된다. 마키아벨리가 3권에서 치옴피의 소요[137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일어난 하층노동자의 반란을 가리킨다. 치옴피(Chiompi)는 세모(洗毛), 소모(梳毛) 등 모직물 공업의 준비 공정 작업을 하는 종속 노동자를 의미한다―역자] 당시 익명의 연사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유명한 연설을 예로 들어보자. 이는 귀족들 및 군주들이 참칭하고 있는 지혜의 우월성에 기초하고 있는 질서를 전복하는 데 적합한 편파적(partial)이고 혁명적인 연설이며, 유일한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이고 무조건적인 긍정이다. 이 무명의 평민이 마키아벨리의 언어로 발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키아벨리 자신이 인민과 평민을 새로운 정치의 주체들로서, 더 이상 사려깊거나 유덕한 군주의 인정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율적이고 열렬하게 정치의 무대로 진입하는 정치적, 사회적 형태들을 표현하는 심급들로서 인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자신의 말을 인용해보자.

그들의 기원이 오래되었음을, 그들이 우리와 대립함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기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똑같이 오래 되었고, 본성상 동일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오. 우리 자신을 벌거벗겨 본다면, 우리 모두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우리가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이 우리의 옷을 입는다면, 우리는 분명 귀족들처럼 보일 것이고, 그들은 귀족들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오직 가난과 부만이 우리를 불평등하게 만들기 때문이오.

    익명의 연사의 문채(文彩, figure)는 추상성의 위험을 피하면서 인민 주체의 정치적 중심성의 획득과 군주 내지는 귀족에 대한 인민의 우월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는 모든 정치 질서의 필연적 우연성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적 질서의 이름 아래 존경과 복종을 요구하는 귀족정의 로고스는 인간들의 공통의 본성에 대한 인정에 의해 실격되고 있다. 랑시에르가 정당하게 쓰고 있듯이 “이 최초의 로고스는 최초의 모순에 의해 물어뜯기고 있다. 사회에는 질서가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한 부류는 명령하고 다른 부류는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질서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점이 요구된다. 곧 질서를 이해해야 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와 이미 동등해야 한다. 이러한 동등성이야말로 모든 자연적 질서를 갉아먹는다. 분명 거의 모든 경우에 열등한 자들은 복종한다. 그렇다 해도 이 사실에 의해 사회 질서는 자신의 궁극적인 우연성으로 반송된다.”[Rancière, La Mésentente, p. 39.]
    이렇게 해서 정치적 합리성[이라는 단수 표현]은 복수로 어미변화된다. 이는 다자의 표현인 반면, 정확히 말하면 군주의 모습을 띤 그 개인적 형태는 추상에 불과하며, 그것이 주장하는 우월성의 허상은 힘에 의해 벗겨진다.
    게다가 마키아벨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하나의 본성이라는 관념 및 개인에 대한 다자의 우위라는 관념을, 시간들의 변화 및 지배력(empire)이라는 질문과 연결시킨다. 이 질문은 인간 본성 및 그것이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모든 관점에 대해 중심적인 문제이다. 시간들이 극도로 가변적이듯이 인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견해를 바꾼다고 마키아벨리는 쓰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단지 가변성을 수동적으로 겪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변성을 하나의 덕목으로, 시간의 변화 가능성에 맞서 ‘작용’(유희, jouer)하기 위한 전략적 원천으로 활용한다. 곧 이는 세계 및 자연의 가변성에 맞선 정념들 및 행동방식의 가변성이다. 이것들을 모방함으로써 사람들은 이것들의 덕목 및 역량을 모방한다. 우리는 바로 정치적 차원에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심오한 표현을 발견하게 되는데, 개별 신체에 대한 다수의 신체의, 다중의 우월성을 긍정하는 원리가 그러하다.
    개별 신체[물체]들 및 혼합 신체[물체]들은 사실 모두 자신들의 퇴락을 막아주고 계속해서 새로운 힘들을 주입해줄 수 있는 작용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두 경우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혼합 신체[물체]가 개별 신체[물체]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와 달리 자신들의 시초로 되돌아가서 쇄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사론』에서 이러한 관념은 갈등 이론 및 귀족들과 심지어 군주들에 대한 인민의 우월성의 긍정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반대로 『군주론』에서는 이 증명이 군주라는 개별 형상의 다양성 및 가변성을 미덕으로 제시하는 이론의 측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다중이 자신의 다수적 구성에 의해 획득하는 결과들을 군주는 끊임없이 변이에 적응함으로써 얻게 된다. 군주에게 요구되는 자질들은 상이하고 심지어 서로 대립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군주의 덕목을, 모든 유형의 성질을 제시하고 다변화하는 자연의 모방에서 찾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또한 그의 한계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정확히 바로 여기서 그의 개별적인 본성은 상이한 ‘자질들’의 현행화의 한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한계와 목표, 위기와 역량은 마키아벨리의 담론에서 서로 뒤섞인다. 바로 여기에 켄타우로스 은유의 의미가 존재한다. 인간에게 키론[Chiron; 켄타우로스 중 하나로, 다른 켄타우로스와 달리 선량하고 정의를 존중했음―역자]은 장애물들을 분쇄하고, 자연의 변화들 및 다변성에 적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정하는 것에 굴하지 않으려는 시도를 표상한다. 곧 자연의 무한하고 다양한 가변성에 대립하는 개인적 다양성의 형상인 것이다. 이는 시점들(point de vue) 및 경험들을 다양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독특한 개인에게 이는 다자화함을 의미하며, 일자에게는 복수화함을 의미한다.

갈등적 협동에서 다중의 역량으로: 마키아벨리적인 도구상자

    하지만 이 원칙은 바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다면적인 주체는 다중임을 확언한다. 다중은 가장 커다란 정치적 합리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동시에 시간의 변화에 저항할 수 있고, 상황들 및 형세들의 무한한 변이에 적응할 수 있다.
    다자는 “시간의 변이들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 다자는 시간들의 변이 앞에서의 우월한 태도를 표현하는데, 왜냐하면 시민들, 체질들(humeurs) 및 정서들의 상이성은 자연의 상이성을 더 잘 반영하며, 이를 ‘모방하는’ 데서 훨씬 잘 성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키아벨리에서 다자의 형상의 구성 및 스피노자에서 이 형상의 활용에 관한 이 짧은 고찰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이 두 저자를 서로 접근시키고, 정치적-철학적 근대성과 관련한 이들의 독창성 및 이들의 전복적인 이례성을 심층적으로 고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다른 요소를 강조해 두기로 하자.
    『로마사론』 1권 20장에서 마키아벨리는 한 국가가 다수의 유덕한 군주들의 계승을 통해 일정한 수준의 유덕함과 역량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만약 유덕한 군주들의 계열이 중단되지 않는다면, 유덕함은 안정되고 사회의 정치적 삶도 안정시켜 줄 것이다. 공화국은 군주정에 비하면 이러한 안정화에 도달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 사실 공직자들의 다양한 가변성 덕분에 이 계열이 중단될 위험성은 최소로 줄어들고, 심지어 소멸된다.
    더욱이 자신의 갈등 이론, 곧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긍정성에 대한 명시적 확언을 통해 마키아벨리는 또한 덕목에 대한 두번째 긍정 원칙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의 책 중에서 가장 갈등론적 입장이 잘 드러나고 있는 구절들에서 이 두번째 원칙은 사회적 체질들 사이의, 귀족과 인민 사이의 대결로부터 직접 탄생한다. 덕목은 더 이상 유덕한 세대의 선형적 계열에 따라 긍정되지 않고, 정치적 갈등으로부터 직접 탄생한다. 만약 전자의 경우 덕목이 다자에게 동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왜냐하면 세대의 계승을 통해 거대한 공직자들이 생겨나리라고 기대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후자의 경우에 덕목은 외부에 실존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다양성 내에서,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에 의해 실존한다. 덕목은 다양성의 직접적 산물이며, 체질과 의견, 갈등의 상이성의 직접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이한 모델이 스피노자에서도 발견된다. 민주주의는 여러 통치 형태들 중 한 가지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다중의 역량의 연속적인 자기-조직화와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긍정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항상 열려 있는 이 과정―마키아벨리에서 권리와 갈등, 위기와 역량을 연결하는 회귀적인 동역학과 유비적인―은 필연적으로 갈등들을 포함한다. 다중의 다자적인 개별적 신체는 단지 정치적 갈등의 무대일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의 합리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는 이 신체가 자신을 합성하는 개체들 사이의 갈등적인 협동으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이는, 정치적 합리성이 복잡화하고 현행화되는 연속적 과정 중에 이 갈등들 안에서, 그리고 이 갈등들에 의해 살아간다.
    독특한 개인에 대한 다자의 우월성, 시간의 변화에 대한 다자의 적응 능력의 탁월성이라는 마키아벨리의 관념은 자연의 복잡성 및 가변성을 이해하려는 기획 내부에 기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특히 정치적 갈등에서 생겨나는 것으로서의 덕목이라는 관념―갈등적 질서에 관한 이론―은 이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마키아벨리 사상의 지적 도구 상자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다중의 역량 위에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통치[곧 민주주의―역자]를 정초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결함이 아니라 정치의 속성으로서 간주하려는, 따라서 이를 제거하거나 몰아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이를 고려하고, 이를 자신의 정치철학 전체의 기본 요소 중 하나로 만들기 위한 이론적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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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03-2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좋은 글 많이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공부가 짧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두고두고 생각할 문제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관개체성에서 '관'의 한자어를 '關'으로 쓰셨는데, 저번에 한번 뵜을 때 '관' 개념이 '貫'(그게 논어의 '오도는 일이관지'하고 관련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이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이 나서요. 제가 무슨 의견이 있는 건 아니고, 저번에 말씀하신 것과 다른 부분이 있어 혹시 생각의 변화가 있으셨던 건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이건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데, 내친 김에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스피노자와 정치'에 다른 번역글도 들어간다면, '지적 차이'에 관한 글이 함께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발리바르가 문화혁명과 스피노자를 경유하면서 정식화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그 자신이 별로 사고를 전개시키지 않아서인지 국내에 소개가 많이 되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역사유물론의 전화'와 '마르크스의 철학' 외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글이 있다면 그걸 소개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제 생각에는 '역사유물론의 전화'에 실린 글을 재번역해서 싣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책 자체가 절판되었는데다가 아무래도 번역에 문제가 있을 테니까요. 최근에 다시 읽어본 인상에 따르면, 이 글은 스피노자 독해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것 같고, 또 이 문제가 당대의 정치적 쟁점과 어떤 식으로 연관되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글의 배경과 관련한 선생님의 역주와 함께 다시 번역된다면, '스피노자와 정치'를 읽는 이들이 그 작업의 정치적 의미를 가늠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물론 짧은 생각이고 출판의 포맷도 있을 테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의견을 밝혀 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balmas 2004-03-2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자를 '關'으로 쓴 건 제 실수입니다.^^ <관계> 개념과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다 보니까 무심결에 그렇게 쓴 것 같군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논문집>(아직 제목이 미정입니다)에 지적 차이에 관한 글을 수록하자는 제안은 생각해 볼 만한 제안인데, 현실적으로는 조금 어려움이 있을 것 같군요. 이 책에는 <스피노자와 정치> 외에도 3편의 글이 추가되는데, 출판사 쪽에서 애써서 3편의 글을 별도로 계약해 준 마당에 다른 글들을 더 싣자고 요구하는 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내용상으로도 이번에 묶는 글들은 직접 스피노자와 관련된 글들인데, 스피노자 철학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스피노자 철학을 다루지는 않는 글을 포함시키는 건 책의 일관성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부담스럽군요.
내년 쯤 발리바르의 Nous, citoyens d'Europe(2001)을 번역, 출판하고(이 책은 <후마니타스>라는 신생 출판사에서 나올 예정입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발리바르의 책이나 글들을 꾸준히 소개할 생각인데, 언젠가 지적 차이에 관한 글들도 함께 묶어서 소개할 수 있겠지요.
 

이 번역본은 (당장) 출판을 염두에 둔 게 아니며, 아직 충분한 교열을 거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 번역본을 출력하고 옮기고 하는 것은 허락하지만, 공적인 매체에서 인용하는 것은 불허합니다. 인용을 원하는 분은 사전에 이메일로 역자에게 허락을 얻기 바랍니다.

* 이 글은 후기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에 대한 독해와 마주침의 유물론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및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론의 난점들을 넘어서려는 그의 시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해명하려는 한 가지 시도이다. 이런저런 점에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매우 집약적이고 풍부한 논점을 담고 있어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정세에서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는 데 여러 가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특히 이런저런 명목으로 정치 이론 및 정치적 실천에서 주체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복권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해 둘 점은, 이 글은 영어로 된 원고를 불어로 옮긴 글인데, 번역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불어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나 표현들이 여럿 눈에 띄고, 불어 문장을 그대로 따를 경우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역자가 임의로 약간의 첨삭과 교정을 한 곳이 두어 군데 있다. 나중에 영어 원고가 발표되면, 대조를 거쳐 교정할 생각이다. 꺾쇠들 중 하나는 원주이고, 다른 하나는 역자가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것이다(역자).  


Miguel Vatter, "Althusser et Machiavel: La politique apres la critique de Marx", Multudes 13, 2003.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비판 이후의 정치


  1977년 이후 알튀세르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하나의 "전회"를 실행한다. 이 시기의 유고들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위한 극히 풍부한 영감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두 가지 오류에 대한 논박을 보게 되는데, 이는 알튀세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뿌리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 대한 폄훼와 몰이해,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생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구성물에 대한 종속. 정치의 자율적이고 구성적인 차원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지평을 정의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로 복귀해야 할 필연성을 느끼고 있다. 역사에 대한 근대 철학의 압류(emprise) 및 역사적 주체에 대한 근대 철학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튀세르는 사건의 차원에 우선권을 주는 역사이론 및 역사적 생성의 모든 실체 및 주체를 비워내는 우연적 마주침의 이론을 소묘해볼 것을 제안한다. 정치의 필연성과 역사의 우연성은 "마르크스주의 이후" 마르크스를 재발견하기 위한 두 가지 선행조건이다.


    지난 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해 두 가지 근본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국가와 정치를 적합하게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아왔는데, 이는 그것이 정치적 "상부구조"와 관련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경제적 "토대"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사회를 표상하는 결함이 있는 은유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이론은 역사적 생성을 적합하게 고려하지도 못했는데, 이는 결정론적 법칙들과 과정들에 따라 전개되는 것으로 역사를 간주하는 결함이 있는 전제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대표한다고 자부했던 사람들 쪽에서 실질적인 답변이 제시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매우 드문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1977년 경 알튀세르의 사상은 예기지 못한 전회를 보여주는데, 이는 최근 그의 후기 저술들의 유고집 출간으로 해명되고 있다. 이 텍스트들에서 그는 이러한 비판들이 적절했음을 받아들이고, 이것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파멸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는 점을 수용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몰락 속에서도, 내가 보기에는 오늘날 좌파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혁신적인 답변들을 소묘해보려고 시도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 사회적 적대와 정치의 자율성

    1977-1978년 동안 알튀세르는 <자신의 한계들 안의 마르크스>[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 pp.359-524]라는 텍스트를 쓰는데, 이 텍스트는 그가 여기서 앞서 말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약점들을 이론의 "절대적 한계들"로, 스탈린주의의 공포와 유로코뮤니즘의 정치적 실패를 불러온 한계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두 가지 중심적인 해석적 테제는 알튀세르의 입장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의 관점을 넘어 전위시킨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에게 비판은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현실적인 것[실재, le reel]이다"라고 쓰면서, 공산주의가 "사물들의 실존상태를 폐지하는 현실 운동"과 동일시되고 있는『독일 이데올로기』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현실적인 것"을 "계급들에 대한 계급투쟁의 우위"에 준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계급들"과 "계급투쟁"의 구분은 절대적으로 결정적이다. 계급 개념이 생산의 사회경제적 문법(마르크스주의 용어법으로 하면, 생산력, 생산수단, 노동분할[분업])에 의존하는 반면, 계급들 사이에서 생산되는 투쟁 개념은, 계급들에 선행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러한 문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알튀세르는 투쟁이라는 개념을 생산관계의 문법과 연합시킨다. 항상 이미 정치적이고 착취의 사실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관계들은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며, 지배와 저항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들이 없이는 계급형성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그것 자체에 거슬러 받아들이면서 알튀세르는 필연적으로 적대를 어떤 종합 속에서 극복해야 한다는 일체의 주장과 독립해서 "계급투쟁의 우위"를 이해하고 있다. 특히 사회적 적대는 계급투쟁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그 다음에는 계급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목적론적 "이행"의 관념(마르크스는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내는 1852년 3월 5일자 편지에서 이를 옹호하고 있다)과 완전히 독립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그 모든 변종들 속에서도 사회적 적대, 곧 어떠한 보충적이고 해결적인 종합 없이 사회적 관계들 전체를 관통하는 "현실 운동"으로서의 투쟁을 사고하지 못했다. 사회적 적대를 총체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이를 하나의 종합 안으로 해소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알튀세르는 이러한 전통과 단절한다. 사회적 적대는 영속적이며, "역사의 종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해석적 테제는 사회적 적대의 영속성에서 따라나온다. 정치, 국가 및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단지 생산의 사회적 조건들의 반영 내지는 표현으로서, 이러한 조건들이 변혁되자마자 제거되는 것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은 고유한 별도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 사회적 적대의 영속성은 정치적인 것의 영속성을 요구한다. "국가는 물론 낡지만 영속적이다 [...] 국가는 계급투쟁, 곧 착취가 폐지되는 게 아니라 보존되고 유지되고 강화됨에 따라 [...] 낡게 된다." 알튀세르의 판단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법적-정치적 장치와, 소위 그것의 "토대"("생산관계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몰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상부구조"를 그 자체로 파악하지 못하며, 이는 그 이론의 "절대적 한계"를 나타낸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마르크스가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소묘한 이 관계에 대한 표상을 따르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법적-정치적" 상부구조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로부터 "성립된다."(erhebt)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이러한 성립의 순간, 이러한 관계를 결코 문제삼지 않았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상부구조의 "제도[화]" 및 "구성"은 결코 문제화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들 안의 마르크스>의 중요성은, 정치적인 것은 토대의 실존조건이어서 "계급투쟁"과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생산의 토대로부터 "성립"하거나 이 토대의 "반영물"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정치적인 것의 이러한 분리된 실존은 사회적 적대의 보존, 곧 착취가 그 내부에서 생산되는 생산관계들의 재생산을 자신의 대상으로 지니고 있다. 정치적인 것을 특징짓는 것이 적대와의 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적대가 자신을 재생산하도록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적대는 정치적인 것의 제도[화]의 원인일 수 없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국가가 지배계급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서는 계급들 사이의 투쟁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 테제를 사고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아마도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을 결론, 곧 정치적인 것은 자기-제도화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치적인 것은 투쟁의 효과이기는커녕 사실은 "계급투쟁에 영향받지 않고, 심지어 이 투쟁에 의해 "관철될"" 수도 없다.[앞의 책, p. 437]
    1977년의 텍스트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관한 1970년 논문에서 제시된 정식과 관련하여 자신의 재생산 이론을 심화한다. 정치적인 것의 분리 없이는 "계급투쟁"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분리되어-있음"이라는 점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생산관계들을 재생산하는 과제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 이제는 알튀세르의 테제가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비판받는 것은 이 이론이 어떤 의미에서 국가가 분리된 도구인지 또는 "기계"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에게 국가는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기계인 반면, 마르크스는 "생산의 사회적(이고 심지어 물질적인) 조건들의 재생산관계 하에서 국가를 파악하지 못한다."[같은 책, p. 457] 알튀세르의 테제는 정치적인 것이 생산의 적대적 관계들(여기서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에 의해 착취당한다)을 재생산하며, 역으로 이 적대적 관계들은 경제적 생산(곧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급들 사이의 투쟁은 생산과 관련하여(사회적 노동분할, 계급들과 관련하여) 우위를 지니며, 역으로 정치적인 것은 재생산과 관련하여, 그리고 따라서 계급투쟁의 실존 그 자체와 관련하여 우위를 지닌다. 이 때문에 생산(관계들)의 조건들은 정치적 가능성의 조건, 이 관계들의 재생산의 정치적 원인을 갖는다. 알튀세르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마르크스주의 도식을 완전히 전복시키며, 이렇게 되면 폐허만이 남는다. 계급투쟁은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소여이기 이전에 정치의 사실이다.

마르크스 이후의 마키아벨리: 공화주의적 자유의 회복

    유고로 출간된 {마키아벨리와 우리}(1972-1986)에서 알튀세르는 소위 경제적 "토대"와 관련하여 국가의 정치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국가와 정치에 관한 이론을 제공하려고 시도한다.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에 대해 마키아벨리로의 회귀는 무엇을 보태주는가? 우선 이는 화해 불가능한 사회적 적대의 심연적인 "토대"로부터 출발하는, 무로부터의 정치적인 것의 자기-구성이라는 이론을 보태준다. 피렌체 서기장의 중심적인 질문이 정확히 말하면 지속 가능한 정치적 국가가 무로부터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 하는 것 마르크스는 결코 이 문제를 검토하지 않는다 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구성적 권력으로서의 새로운 군주라는 오래된 그람시의 문제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독해에서 혁신적인 점은 그가 이 문제를『로마사론』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통해 해소한다는 점에 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로 돌아간다. 알튀세르에게 공화국은 국가의 지속의 계기를 포함하며 구성적 권력의 재생산에 따라 질서지어져 있다. 반면 새로운 군주는 단지 국가의 시작의 계기만을 포함할 뿐이다. 마키아벨리를 통해 알튀세르는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것의 공화적 형태 속에, 곧 군주적 형태가 아니라 법의 통치로서의 공화국 속에 담겨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이에 따라 알튀세르는 암묵적으로, 1971년의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관한 텍스트 속에도 여전히 현존하고 있는 계급의 "독재" 형태로서의 국가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념을 거부하게 된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독해를 통해 알튀세르는 재생산 문제에 대해 한 가지 보족적인 재귀성(반성성, reflexivite)의 차원을 추가한다. 곧 1971년에 일차적인 질문은 단지 생산의 재생산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마키아벨리에 관한 텍스트에서 일차적인 질문은 재생산 자체의 재생산이 된다. 새로운 군주와 공화국, 구성적 권력과 구성된 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은 자기 자신에 의한 국가(재생산 권력으로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 및 따라서 그 지속이라는 문제를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독해가 르포르의 혁신적인 마키아벨리 독해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한다. 르포르와 관련하여 그가 혁신적인 점은 "지속하는 국가"의 구성을 "무로부터의" 성립(emergence)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무"를, 정치적인 것(비르투)과 사회적인 것(포르투나)의 사건적이고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분절(표현, articule)하는데, 이는 가능한 일체의 역사철학 및 "역사의 법칙들"과 "역사적 필연성"에 관한 일체의 담론 바깥에 놓여 있다. 정치적인 것의 자기-구성을 사건과 우발성의 지평(그가 "정세적 결합"(conjonction)이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사고하면서,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두 가지 근본적인 이론적 한계, 곧 정치이론의 결여 및 역사의 형이상학에 대한 의존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을 찾으려고 한다. 알튀세르는 역사를 유물론적 사건이론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할 목적으로 마키아벨리로 되돌아가는데, 이 이론에서 사건들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 적대의 "현실 운동"의 "마주침" 내지는 "정세적 결합"으로 인식된다. 다만 이 적대는 더 이상, "최종 심급에서" 정치적 마주침의 방도(issue)를 규정하는, 구조적이거나 실체적인 과정(곧 생산의 존재론)으로 이루어진 "토대"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렇다. 반대로 사회적 적대는 "공백"으로, 정치적 마주침을 규정 불가능한 것으로, 따라서 자유로운 것으로 남겨두는 유일한 조건으로 이해된다.
    주요 논점은 이로부터 성립하는 정치적 형태들을 계급투쟁이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곧 계급투쟁의 적대는 단지, 그 결과 여부가 완전히 열려 있는 어떤 마주침의 "불충분근거"[충분근거율 내지는 충족이유율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 역자]일 뿐이다. 알튀세르에게 사회적 적대가 "규정적" 이것의 인과적 의미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적대 자체의 자기 동일성도, 존재론적 실재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키아벨리 독해에서 적대 자체가 소송의 대상, 갈등하는 관점들(perspectives)의 대상임을 의식하게 된다. "정치적 시점(point de vue)의 장소와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장소 사이에는, 정치적 시점의 "주체", 곧 인민과 정치적 실천의 "주체", 곧 군주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한 이원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원성, 이러한 환원 불가능성은 군주 인민 모두를 변용시킨다(affecte)."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그로부터 군주의 정치 전체를 정의하게 될 이 인민, 이 인민에 대해 어떤 것도 스스로를 인민으로 구성하도록, 또는 정치적 세력으로 생성되도록 강제하거나 심지어 제안하지도 않는다. ... 그리고 어떤 것도 마키아벨리가 어떻게든 이러한 분할을 극복하려고 시도했다고 지시해 주지도 않는다. 역사는 인민의 관점에서 군주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지만, 인민은 아직 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새로운 군주의 구성적 기획은 이러한 기획 바깥에 놓여 있고, 그 기획보다 훨씬 원초적인 어떤 관점에 따라 분석되고 평가된다. 곧 또다른 정치적 주체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합성과 순치(pacification) 이것이 어떤 정치적 형태를 띠든 간에 를 금지하는 사회적 적대에 대한 관점으로서 인민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여기서 장래의 마키아벨리 해석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그가 이룩한 중요한 진전은 "정치적 시점"과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 사이의 차이를 명료화했다는 데 있다. "정치적 시점"이 정치적 통치 형태들의 구성의 시점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인민의 관점은 정치 형태의 제도화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 어떤 정치의 원천이 된다. 이는 근원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정치가 해야 할 게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게 무엇인지에 관한 쇄신된 이해를 위해 지극히 의미심장한 직관적 통찰이다[Le pouvoir constituant, PUF, 1997에서 Negri의 마키아벨리 독해와 비교해보라. 네그리는 인민의 "정치적 시점"과 새로운 군주의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네그리는 인민을 새로운 군주로 이론화할 수 있는데, 이는 인민이 "민주주의"라 불리는 통치의 "절대적" 형태를 구성하도록 요구받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비르투(virt , 역량)가 사회적 적대의 "현실 운동"과 조우하게 되는, 사건의 근원적으로 우연적인 성격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구성적으로 관점주의적이다. "현실 운동"이 주어진 어떤 정치 형태 속에서 완전히 합성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적 사건 안에는 정치 형태의 구성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해야 한다. 정치적인 것을 통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형태의 "해체"이며, 또한 모든 정치 형태의 성립에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임박한 방식으로 따라다니는(귀신들려 있는, hante) 갈등적 사건 속으로 [정치] 형태의 복귀이다[해체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Derrida, Spectres de Marx, Galilee, 1993; Marx & sons, PUF/Galilee, 2002 참조].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과 대립하는 "정치적 시점"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사건 속으로 이러한 형태의 복귀이다. 인민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힘"[세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인민이 정치적 기동력(ressort)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은 정치적인 것이 형태를 구성하는 실천으로 환원되거나 이러한 실천으로 소진된다는 생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점의 차이는 이러한 전제를 반박한다. 마키아벨리가 끊임없이 지적하듯이 인민은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욕망"에 따라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인민의 정치적 행위는 항상, 어떤 정치적인 또는 적법한 지배형태 안에서 인민의 [구체적인] 표현 가능성(figurabilite)을 초과하며, 일차적으로는 통치형태들을 구성하는 것으로서보다는 해체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국가의 해체에 관해 다루기 전에, 국가의 구성의 비밀은 무엇인가? 한 국가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구성된 재생산의 권력은, 말하자면 구성적 권력으로서의 인민을 복속시켜야 하며, 인민이 자신의 "주체"로서, 자신의 "기원"으로서 기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마키아벨리가 로마 공화국에 대한 분석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마키아벨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 지속 가능한 국가의 정초, 시작인데, 이 국가는 일단 군주에 의해 정초되면 "혼합" 통치의 효과에 의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중심은 로마, [오랜 시간 동안] 지속했던 국가이다. 로마의 중심은 그 시작이다. 이 공화국의 시작은 군주정이었다는 데 있으며, 이 군주정은 이 국가를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적절한 어떤 통치[정부], 곧 혼합 통치를 로마에 덧붙였고, [이를 통해] 이러한 통치는 공화국의 관점에서 추구되었다."[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I, p, p. 96] 국가의 지속은 군주정과 공화정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한 국가의 구성에서 두 가지 계기. 1) 절대적 시작의 계기가 존재하는데, 이는 단 하나, "단 하나의 개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계기는 그 자체로는 불안정하다 [...] 2) 두 번째 계기는 지속의 계기인데, 이는 법률의 부여(donation, 제정) 및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이중적 작용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같은 책, p. 115] 이 두 번째 계기에서 국가는 군대, 동의(곧 종교)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에 의한 통치 같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통해 인민 속에 "뿌리내린다." 로마사에서 공화국의 계기는, 단지 자기 자신을 국가를 "보존하는" 권력으로 이해시키려는 목적으로 "절대적인" 구성적 시작으로 주어지는(se donne, 스스로를 제시하는) 재생산의 계기에 상응한다.
    알튀세르는 국가 이것 자체가 생산관계들의 재생산 형태이다 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해명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모델로서 로마 공화국 헌정[구성]의 발전에 대한 이러한 독해에 의지하고 있다. 로마 헌정의 발전은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재생산 형태로서의 국가)의 이데올로기(재생산)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이는 로마인들이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헌정을 발전시키면서 제도화했던 정치적 권위를 산출하는 체계와 다르지 않다. 국가의 권위(auctoritas)는, 정초자가 형태를 부여하고(agere) 다수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유지하는(gerere) 관계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가 설명하듯이, "국가의 건국에는 단지 한 인물이 적합하다 해도, 일단 조직된 정부는 그것을 유지하는 부담이 단지 한 사람의 어깨에만 걸려 있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정부를 많은 사람들이 보살피게 될 때, 즉 그 유지가 많은 사람들의 책임에 내맡겨지게 될 때, 그것은 실로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로마사론』1권 9장; 강정인·안선재 옮김,『로마사론』한길사, 2003, 109쪽]. 정치 형태는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를 뒷받침하려는 태세가 되어 있는 한에서만 지속할 수 있다. 이러한 뒷받침은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최초의 시작, 정초와 단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결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오히려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초를 완수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통치자에서 시민들로 전달되고 대의 정치 기구(본질적으로는 입법 의회) 안에 제도화되는 이러한 요청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호명이라고 부른 것에 밀접하게 상응한다. 호명의 기능은 인민을 정치적 기체(基體, subjectum), 국가를 구성하는 토대로 만드는 데 있으며, 역으로 이러한 토대는 국가가 실행하는 예속과 지배에 대해 지속과 적법성을 부여함으로써 국가를 정초한다. 
    로마 공화국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독해에서 알튀세르는 이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결정적인 직관에 대한 확증을 발견한다. 이 직관은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국가가 자기 자신의 정초, 지속 내지는 재생산을 위해 인민이 탁월한 정치적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곧 인민이 구성 권력이 되고 이를 통해 통치의 토대로 제공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이 텍스트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절대적 한계들" 너머로 나아가는데, 왜냐하면 그는 지속 가능한 국가의 토대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국가는 자신의 토양 내지는 자신의 토대를 자기 바깥에서, 예컨대 특수한 경제적 이해관계들에서 발견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로마 공화국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의적이고 입헌적인 민주주의 형태 안에서 발견한다. 대의·입헌 민주주의는 국가가 자신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소명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통치 형태이다. 이는 구성된 권력이 자기 자신을 구성 권력으로, 곧 국가의 주체로서의 인민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해주는 형태이며, 역으로 이 후자는 국가 자신이 가장 오래 지속되도록, 가장 효과적으로 재생산되도록 보증해준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재생산 이론이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담론에서 자신의 확증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의 마키아벨리 독해는 환원적이어서, 정치적 지배의 비밀들에 대한 이해가 아닌 정치적 자유의 가능성들에 대한 이해를 위한 담론적 함의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를 결여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유일한 통치 형태, 곧 국가가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통치 형태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인민의 시점을 군주의 시점에 종속시킨다. 잘 정초되고 지속할 수 있는 정치 형태를 지향하는 것은 오직 군주일 뿐, 인민도 그런 것은 아니다. 인민의 관점은 국가의 주체-기체(sujet-subjectum)의 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로마의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는 이전 및 이후의 모든 정치 사상과 관련하여『로마사론』의 진귀함은, 시민의 삶(vivere civile)은 정치가 잘 정초된 법의 통치라는 이상 이는 로마식의 권위 체계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을 초월하고 전복하는 한에서만 자유로운 삶(vivere libero)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주장은『로마사론』3권에서 등장하고 줄곧 옹호되고 있는데,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그 자신이 시초로의 회귀(riduzione verso il principio)라고 부르는 것을 경유함으로써만 정치체는 자유롭게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을 옹호하고 있다. 내용 및 형태에서 "시초로의 회귀"는 혁명을 의미한다. 여기서 회귀하는 시초는 권위의 시초, 정초의 절대적 시작과 동일한 "시초"이며, 이러한 회귀는 권위로부터 역사적 생성에 어떤 정치적 형태를 각인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고, 역사적 생성의 근원적 우연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이러한 근원적 우연성을 모든 정치 형태의 사건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을, 모든 정치 형태가 그로부터 성립해야 하고, 또 어떤 주어진 정치 형태가 확립한 특권 내지는 불평등이 이 정치 형태 아래서 번영을 누리고 이 정치 형태의 특혜를 받는 사람들을 타락시킬 때마다 모든 정치 형태가 거기로 회귀할 수 있는, 권리평등(isonomy)의 시공간으로 재정의한다. 타락은 불평등의 소외인데, 이는 모든 주어진 지배의 정치 형태가 고착되고 존속됨에 따라 생산된다. 이 때문에 공적 공간의 평등 및 자유로의 회-귀(re-duction)는 "시초로 회귀하는", 곧 정치 형태를 혁-명(re-volutionne)하고 정치체 내의 타락과정에 저항하는 사건 속에서만 생산될 수 있다.

사건들의 유물론을 향하여

    자신의 마지막 혁신적인 철학 텍스트인 <마주침의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1982)에서 알튀세르는, 하이데거, 푸코, 들뢰즈 및 데리다 같이 그보다 먼저 이 오솔길을 밟아간 일련의 철학자들에 강하게 준거하면서, 명시적으로 형태 및 사실에 대한 사건의 우선성을 주장하고 있다.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또한 "우발성의 유물론" 내지는 "사건들의 유물론"이라 불리기도 한다)은 사건들로부터 출발하여 형태들의 세계의 성립을 사고하려는 시도이다.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 정세적 결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는, 사건적인 마주침들로부터 출발하여 형태들의 세계의 구성 및 원자들의 결집을 설명하는 원자들의 클리나멘(clinamen) 또는 편향(deviation)에 관한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의 학설에 준거함으로써, 좀더 적합하게 마주침이라고 지시된다. "세계는 완성된 사실(기성 사실, fait accompli), 일단 사실이 완성된 후에 그 속에서 근거[이성], 의미, 필연성 및 목적의 군림이 시작되는 완성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의 이 완성은 우연의 순수한 효과일 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클리나멘의 편향에 기인하는 원자들의 우발적 마주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실의 완성 이전에는, 세계 이전에는 사실의 미완성만이, 원자들의 비현실적 실존에 불과한 비세계만이 존재할 뿐이다."[알튀세르,『철학과 맑스주의』서관모·백승욱 옮김, 새길, 1996, 39-40쪽] 어떤 것도 원자들의 마주침에 선행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이러한 마주침을 필연적인 것으로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의 완성"의 "구성적" 차원 그 자체가 하나의 우연적 사건이며, 이러한 차원은 알튀세르가 "사실의 미완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결코 규정될 수 없다. 정치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사실의 완성에서 완성된 사실로의 이행이 군주 또는 국가의 활동을 기술한다면, 이러한 이행의 우연적 성격, "완성" 자체가 지닌 사건적 성격 이는 완성이, 자신의 가능한 실현 여부에 대해 무-차별적으로(in-differente) 남아 있는 역량으로서의 "미완성"에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은 인민의 해-체적(탈-구성적, de-constructive) 활동에 상응한다. 이러한 해-체적 활동에서 인민은 더 이상 국가의 정치적 주체로, 국가에 의해 정립된 구성적 주체로 간주되지 않으며, 오히려 통치되지 않으려고 하는 정치적 행위자로 간주된다.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처럼 이 텍스트에서도 군주의 비르투는 마주침을 "지속"시키는 권력으로 정의된다. 군주는 "마주침의 효과들에 형태를 부여하는 형태들"에 상응한다. 군주는 "우연적인 것들의 마주침의 필연-화(필연적-생성, devenir-necessaire)"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이전의 마키아벨리 독해와 달리 여기서는 "필연의 우연에 대한 종속"을 사고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점을 함축하고 있다. 곧 "결코 어떤 것도 완성된 사실의 실재성그 영구성의 보증이 될 것이라고 보증하지 못한다. (...) 역사는 (...) 완성해야 할 또 다른 판독 불가능한 사실에 의한 완성된 사실의 영속적인 폐지이며,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이 폐지라는 사건이 일어나는지 결코 미리 알지 못한다. 다만, 패를 다시 분배하고 주사위를 빈 탁자 위에 다시 던져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철학과 맑스주의』, 46-47쪽] 지속하는 국가는 항상 이미 자신의 "폐지"의 내재적이고 임박한 가능성 내부에 기입되어 있다. "시초로의 복귀"가 단지 완성된 사실을 사실의 완성을 구성하는 권력으로 되돌려보낼 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으로는 완성 자체가 자신의 사건 및 자신의 비 사건에 대해 완전히 무차별적으로 남아 있게 만들 때, 그 때가 바로 "폐지"의 순간이다. 이러한 무차별성은 완성의 문법의 견지에서는 판독 불가능한 "또 다른 사실"에 상응할 것이다.
    알튀세르는 결코, 완성된 사실을 폐지하는 역량으로 이해된 인민의 역량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량은 새로운 구성적 활동의 전제일 뿐 아니라, 좀더 원초적으로는 인민 편에서 보여주는 주권적 무차별성[무관심]의 표현이며, 따라서 국가 및 정치 정당 체계가 부과하는 통치의 기획에 대한 정치적 시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인민의 역량이라는 관념과 관련하여 "통치에 대한 주권적 무-차별성"이라는 표현에 의지하여 나는, 소위 구성적이라고 하는 인민의 입장의 세 가지 특징을 부각시켜 보려고 한다. 첫째, 인민은 국가의 정초 기획에 대한 자신의 차이를 주장하는 한에서만 역량을 지닐 뿐이다. 그의 무-차별성은 이러한 차이 "내"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데 있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국가의 정초와 동일시하는 모든 전통적인 "공화주의" 기획을 좌초하게 만든다). 그 다음으로 비통치의 행위자로서 인민은 국가 및 그것의 통치 기획에 의해 정식화될 수 있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으며, 그의 "무-차별성"은 통치 가능성의 결과들에 대한 근원적 비-이해관계[무-관심]에 준거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문제가 되는 결과들에 대한 진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국가를 판정할 수 있으려면 인민은 국가 및 정치 체계가 적법성을 획득하기 위해 재합성해야 하는, 특수한 이해관계의 저장소로 기능해서는 안된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시민사회와 동일시하는 모든 "다원주의적" 시도를 좌초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인민의 주권적 무차별성은 의회의 호명에 대한 그들의 무반응(impassibilite)에 준거한다. 인민은 역량을 지니고 있을 때 정치적으로 대표되려고 하지 않는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국가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정치적 인정의 형태는 인민들의 예속적 주체화(sujetion)를 획득하는 주요 방식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선거 민주주의에 의해 구성된 공적 공간[공론장]과 동일시하는 모든 "자유주의적"인 시도를 좌초하게 만든다).
    혁명적 사건에서 인민은 더 이상 자신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가 욕망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국가에 의해 통치의 기획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 통치되지 않으려는 욕망은 국가의 관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며, 이러한 욕망이야말로 인민의 역량을 국가가 다루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민이 통치되지 않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때마다 재생산 과정은 정지의 고통을 겪고 국가의 기계는 중단된다.
    이러한 호명에 대한 위반들(manquements), 국가-기계의 갑작스런 중단들을 해명할 수 있는 인민의 역량이라는 관념은 이제 겨우 몇몇 사람들에 의해 파악되고 있다[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크 데리다와 자크 랑시에르가 최근 개진했던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들은 특히 풍부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이 과거에 알튀세르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 그렇다]. 이러한 인민의 역량이 마르크스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곧 국가의 궁극적인 파괴를 목표로 하는 국가 권력의 획득) 정식이나, "인민을 위한 인민의 통치"라는 참여 민주주의적 정식으로 파악될 수 없음이 이미 분명히 드러난다. 이 두 가지 정식은 헤게모니 투쟁의 형태, 곧 통치를 위한 투쟁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는 반면, 우리가 방금 호소했던 것은 정확히 말하면 가능한 한 엄밀하게, 통치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투쟁 이는 결코 명령하지 않는다 을 헤게모니의 세력과 정치적 실천들에 의한 이 투쟁의 "복속"으로부터 구분하려는 시도이다. 만약 인민이 역량을 지니고 있다면, 구성된 권력이 사회적 적대와 정치 형태의 분리를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이러한 분리를 항상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의 형태 아래 제어하며, 이를 명령의 대상이 되는 주체에 대한 투쟁이다. 하지만 "현실 운동"으로서 적대는 그 자체로는 헤게모니적이지 않으며, 헤게모니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구성된 모든 정치 형태와 관련하여 이러한 적대가 지니고 있는 무차별적이고 근원적으로 비정초적 성격은 재생산적이고 해체적이며 정초적이고 혁명적인, 정치적인 것의 두 가지 계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 두 가지 계기의 상호 작용이 없다면 정치적 자유는 인식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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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0-07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하신 수고에 감사합니다. 이 글의 원문인 영어본도 멀티튜드에 있더군요. 그냥 저자 이름의 링크를 따라가면 되더군요.

balmas 2004-10-0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말씀을요.
저도 얼마 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답니다. [Multitudes]에는 비프랑스어 논문의 경우 원문도
함께 실어놓았더군요. 제가 조금만 주의깊게 봤더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 ^^;;;

unsound 2012-05-28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발마스님!
얼마 전에 인터넷헌책방에서 알튀세르의 [철학과 맑스주의](새길)을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벌렁벌렁거리는 게 이거 뭐, 완전 사람 죽여놓는구만요. 뭐랄까... <마주침의 유물론>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최고의 시같다고 할까요. 과한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제게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는 말씀이죠. 몇년 전에 [스피노자와 정치]를 읽었을 때 기억도 새록새록 나면서...

이렇게 글을 남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혹 알튀세르의 책 중 번역 중이시거나 계획하시는 게 있는지, 아니면 다른 분의 번역 계획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는지 궁금해서요. 특히, [철학-정치 논집]에 대해서 궁금한데요. 기존에 번역된 알튀세르 책 중 오역 논란이 있던 것에 대해 재출간 소식을 들은 바가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알튀세르 효과]도 아직 엄두를 못내고 있지만. ㅎ

아, 그리고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재출간은 어떻게 되는지도 정말 궁금합니다. 어쩌다 구입 시기를 놓쳐 여태 아쉬워하고 있네요.

발마스님의 소개글을 보니, 위 페이퍼는 [철학과 맑스주의]를 끝내고 읽어보면 아주 좋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

balmas 2012-05-28 02: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오래된 번역글에 댓글을 다셨네요.^^ 년도를 보니 벌써 8년전입니다.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느끼게 되네요. :) [철학과 맑스주의]를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말년의 알튀세르 글들은 읽을수록 맛이 새로운 것 같더군요.

제가 지금 번역 중인 알튀세르 책은 프랑스에서 2005년에 나온 [역사와 정치: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라는 강의록과 [자본을 읽자]입니다. 앞의 책은 후마니타스에서 나올 예정인데요, 올해 안에는 출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마르크스에 대한 강의를 담고 있는데, 강의라서 그런지 훨씬 쉽고 재밌는 책입니다. 기대하세요. 그리고 [자본을 읽자]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랑시에르, 마슈레, 에스타블레가 공동으로 저술한 책인데, 저는 알튀세르의 논문 두 편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아마 내년쯤 나오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2학기쯤 나올 것 같습니다. 번역 원고는 예전에 넘겼는데요, 출판사의 출간 일정상 다른 책들에 밀려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Etienne Balibar, “Avant-propos pour la réédition de 1996”, in Pour Marx, La Découverte, 1996.

 “맑스를 위하여”―하나의 호소, 거의 구호에 가까운 이 제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또는 아마도 새롭게,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높고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하지만 다른 이유들 때문에, 그리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렇다. 알튀세르의 책은 이제 새로운 독자들에게 전달될 것이고,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예전의 독자들의 경우는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텍스트를 수용하는 방식까지도 크게 변화했다.

1965년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는 자신의 고유한 논리 및 윤리를 지닌 특정한 방법에 따라 맑스를 읽자는 선언과 동시에 맑스주의,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진정한 맑스주의(한 운동, 한 “당파”와 분리할 수 없는, 그리고 이를 공개적으로 내세우는 이론, 철학으로서)를 위한 선언이 중요한 문제였다. 오늘날의 경우는, 아마도 이 책에서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또는 심지어 상상적으로 이를 재개하려고 하는 향수에 젖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돌이킬 수 없이 끝나버린 맑스주의의 종언 이후, 맑스주의를 넘어서, 맑스를 읽고 연구하고 토론하고 활용하고 변혁하자는 호소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 세기 이상 동안 맑스주의로 존재해 온 것에 대한, 이를 우리의 사고 및 우리의 역사와 결부시키는 복합적인 연계들에 대한 놀랄 만한 무지나 또는 보수주의적인 경멸을 용인하면서 그렇게 하자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제(foreclusion)는 늘 그렇듯이, 때로는 상반된 색조를 띠기도 하는 가상과 오류의 반복만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호소는 맑스 자신이 맑스주의와 맺고 있는 심층적으로 모순적인 관계, 이를 입증해 주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분석하려는 집요한 노력에 대한 호소다.

사실 이 책에는 맑스주의에 이론적인 실체와 형태를 부여하고자 하는, 저물어가는 20세기에 이루어진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웅변적인 그리고 또한 가장 설득력 있는 논거를 지닌 시도들 중 하나가 담겨 있다. 맑스에 대한 해석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이 시도는 분명 맑스의 작업 및 그 계승자들의 “작업들”들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몰인식을 표현해 주었다(tradusait). 하지만 이 책에는 또한―적어도 나는 어느 때보다도 이를 더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맑스의 사고 양식, 또는 알튀세르가 제안한 표현에 따르면 그의 “이론적 실천”에 고유한 어떤 것이 다시 출현했는데, 이는 어떤 “맑스주의”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방식에 따라 맑스주의의 한계들을 드러내 주는 데 기여했다. 이는 이 사고양식에 구성적인 명제들 및 아포리아들로 거슬러 올라가서 내부에서 이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더욱 더 강력한 기여였다.

이 때문에 1965년 『맑스를 위하여』의 출간(및 몇 주 뒤에는 『자본을 읽자』라는 집단 저작의 출간)이 곧바로 점화하고, 앙리 르페브르 같은 위대한 맑스주의자들 및 레몽 아롱 같은 맑스주의의 위대한 적수가 참여한 “상상적 맑스주의”와 “현실적 맑스주의” 사이의 논쟁은 오늘날 더 이상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모든 맑스주의는 상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들 중 일부, 서로 매우 다르고 사실은 매우 적은 또는 소수의 텍스트들이 대표하고 있는 몇 가지 맑스주의는 여전히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따라서 현실적 효과들을 생산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맑스를 위하여』의 “맑스주의”가 능히 이것들에 포함된다고 믿는다. ...

하지만 꼭 필요한 몇가지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정보들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 기록과 그 독자들 사이에 여러 개의 가리개―여러 가지 설명틀―을 만들어 놓을지도 모를 “낡아빠진” 독해의 시도를 예방하고 싶다.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텍스트들은 1961년에서 1965년 사이에 출간되었다가 한 권에 묶였다는 점을 잘 알아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는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범죄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보고”(1956)와 부다페스트 봉기 및 수에즈 파병(둘 모두 1956에 벌어졌다), 쿠바 혁명의 성공(1959),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알제리 무장 봉기 이후 드골 장군의 권력으로의 복귀(1958-1962), OECD의 창립(1960), 베를린 장벽 축조(1961) 같은 프랑스사 및 세계사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1965), 중국의 문화 혁명(1966에 시작), 프랑스와 다른 나라(멕시코, 독일, 미국, 폴란드 ...)에서 68년 5월에 일어난 사건들, “프라하의 봄” 및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마찬가지로 1968년), 사회당과 공산당 사이의 “좌파 연합에 따른 공동 강령”(1972), 70년대 “유로 공산주의” 탄생, 아옌데 정권의 몰락 및 아옌데 피살(1973),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1974) ...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맑스를 위하여』의 테제들을 맑스주의 및 맑스에 대한 논쟁의 역사만이 아니라 20세기 철학사―이 테제들은 이 역사 안에 아주 가시적인 흔적을 남겨 놓았다―안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이 책이 1960년이라는 아주 놀라운 해 바로 다음부터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게 유익할 뿐 아니라, 아마도 필수불가결할 것 같다. 1960년 이 해에는 메를로-퐁티의 『기호들』([모스에서 레비-스트로스까지] 및 [마키아벨리에 대한 노트]가 수록된)과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레비-스트로스는 1962년 『야생의 사고』에서 이 책에 답변할 것이다), 질-가스통 그랑제(Gilles-Gaston Granger)의 위대한 인식론 저서 『형식적 사고와 인간 과학』 및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앙리 에(Henry Ey)가 조직한, 라캉을 중심으로 한 정신분석에 관한 본느발 회의, 마지막으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 의식』의 불어 번역(저자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이 출간되었다. 앙리 르페브르의 『일상 생활 비판』(1958, 1961)과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1961), 자크 데리다의 『후설 『기하학의 기원』 서론』 및 레비나스의 『총체성과 무한』, 하이데거의 『니체』 강의 출간은 『맑스를 위하여』의 시작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계획적으로가 아니라 “개입”이라는 우연적 기회들에 따라 『맑스를 위하여』가 쓰여지고 있는 동안, 장-피에르 베르낭의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상』(1965),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1963),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 변동』(1962),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1963), 르루아-구랑의 『행동과 말』 및 레비-스트로스의 『신화론』 1권(1964), 칼 포퍼의 『추측과 논박』과 비유멩의 『대수의 철학』(1962), 그리고 또한 코이레의 『뉴턴 연구』(1965)가 잇따라 출간됐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출간된 후 곧바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1차원 인간』, 피에르 쉐퍼의 『음악대상론』, 장켈레비치의 『죽음』, 바르트의 『비평과 진리』, 벤베니스트의 『일반 언어학의 문제들』, 푸코의 『말과 사물』, 라캉의 『에크리』, 캉길렘의 [개념과 생명][1968년 『과학사 및 과학 철학 연구』에 재수록] 등이 뒤따랐는데, 이 모두는 또 하나의 놀라운 해인 1966년에 출간되었다 ...

요컨대 프랑스 대학의 심장부에 거주하는 프랑스 공산당의 “기층”의 투사[평당원, militant “de base”]인 한 철학자의 『맑스를 위하여』의 저술 및 출간은, 점령 기간 중에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냉전이 “평화 공존”으로 역전(또는 연장)되었을 때, 탈식민화가 불가피하게―하지만 항상 힘겨운 투쟁 끝에―일반화된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들의 경제적 성장과 문화적 변동이 부와 권력의 분배에 대한 반대를 확대하는 데까지 이르렀을 때, 서유럽에서 (여전히) 민족적이고 (얼마간) 사회적인 국가가 세계화로의 전환점을 준비하고 있는 반면, 동쪽에서는 스탈린 이후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공연하거나 잠재적인 위기가 여러 가지 형태로 “혁명 속의 혁명”(레지스 드브레)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처럼 보였을 때인 전후의 긴박한 정세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두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고 이 책은 전쟁 직후와 관련하여 철학 논쟁이 자신의 대상 및 스타일을 바꾸고 있던 시기에 출현했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도 유익하다. 단지 “의심의 철학들”―그 위대한 스승은 니체이고, 부차적으로는 프로이트 내지는 “구조주의들”이다―, 즉 사회적 실천과 의미작용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들(disciplines)에게 그것들에 본래적인 과학성을 부여하려는 야심을 지닌 철학들이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푸코가 자신의 천재적인 종합적 정식화의 능력으로 곧바로 말하게 될 것처럼 “지식과 권력의” 질문들이 오랫동안 도덕과 심리학(여기에는 현상학적 심리학도 포함된다)의 질문들을 압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또한, 그리고 아마도 무엇보다도 이 시기 전체 동안 역사와 인류학, 정신분석과 정치를 관통하면서 철학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타자, 자신의 무의식, 비철학에 직면하고, 이것들과 대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철학이 당시에 추구하던 것이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판과 자신의 재구성의 수단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분명히 바로 이것이, 모든 믿음들 및 소속들과 관련된 문제는 제쳐 둔다면, 철학이 맑스와 치열한 논쟁을 벌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다, 이 모두는 유용하고 필수적이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맑스를 위하여』는 기록 문헌(document)이 아니다. 이는 책이며, 여기에는 두 가지의 타당한 이유가 존재하는데, 이제부터 가능한 한 간명하게 그 이유들을 환기해 보고 싶다.

첫째로 『맑스를 위하여』는 용어의 강한 의미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책은 알튀세르의 철학 스타일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해 주는 것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다수의 미간행 원고들―이중 어떤 것들은 매우 이른 시기의 원고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말년의 원고들이다―의 출간 덕분에 우리는 이제 이 스타일이, 고전들의 취향으로 가득차 있고 영성과 역사에 대한 관심에 푹 젖어 있는, 매우 논쟁적인 한 사춘기 소년의 펜으로부터, 그 이후에는 우수한 대학 논문을 쓴 젊은 필자로부터 쓰여진 몽상들과 에세이들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추구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중에 가면 이 스타일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을 그 고유한 지반 위에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려는(concurrence) 이론적 투사의 시도 속에서, 그리고 허구적인 법정에 제출하기 위해 쓰여진 검사의 구형논고이자 동시에 변론인 자서전의 고백(나는 이 주장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 속에서 사라지고, 예외적으로 번득이는 자취 속에서 엿보일 뿐이다. 하지만 『맑스를 위하여』에서―이미 저 비범한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PUF, 1959; 1992년 Quadrige 총서로 재출간]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마키아벨리와 우리』[L. Althusser,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ed.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5, pp. 42-168]라는 “책”(왜냐하면 이는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이 그의 책상서랍에서 그에게는 유일하게 “이론”의 영예를 얻을 만한 것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에서―이 스타일은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고 있어서 이 책의 첫 번째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는 과학의 엄밀함에 대해 말하고, 그 수사법적, 개념적 경제성을 통해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는 스타일이면서 또한 매우 예외적으로 정열적인 스타일이기도 하다. 즉 알아내기 힘든 원천들에서 체험된 그 모든 정열이 일종의 추상의 서정주의(언젠가 알튀세르가 크레모니니에 대해 “추상 회화”가 아니라 “추상적인 것에 대한 회화”라고 말하게 될 의미에서)로 표현되는 스타일인 것이다. “결과들의 힘”([아미엥에서의 주장])이 공언되는 이 스타일은, 원하는 모든 것을 파스칼과 루소에게, 페귀와 사르트르(이는 분명한 사실이다)에게, 맑스와 니체에게 빚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절대적으로 독특한,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공적인 어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이는 우리에게 글쓰기의 발명 없이는, 이 글쓰기가 “편”드는(prend le “parti”) 개념에 의한, 이 개념을 위한 글쓰기의 발명 없이는 철학―추론적이든 반성적이든, 아포리즘적이든 논증적이든 간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다.

두 번째로, 『맑스를 위하여』는 아무런 고유한 교의도 제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는 주어져 있는 한 교의(또는 이론), 즉 맑스의 교의를 위해 “봉사한다.” 하지만 이 교의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적어도 체계적 서술의 형태로는 실존하지 않는다(왜냐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화는 분명히 이 교의의 희화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는 기묘한 특수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설명하듯이 구상[ébauches]과 응용, “전제 없는 결론들” 내지는 “맑스주의의 이론적 작업들” 및 “실천적 작업들”에서 그 자체로 정식화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답변들의 형태로 이를 발견함과 동시에 진정으로 이를 생산해야 한다.

즉 개념들을 명명하고 분절하고, 개념들이 그 속에 놓여 있는 테제들(사실은 물론 가설들)을 언표해야 한다.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에서 맑스로 하여금 그가 실제로 말했던 것 이상을, 그리고 그와는 다른 것을 말하게 하면서, 하지만 또한 인식론과 정치, 형이상학의 모든 영역으로 맑스에서 유래한 질문들과 통념들을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으면서, 놀랄 만한 개념적 도구들의 배형(constellation)을 생산함으로써 끊임없이 수행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알튀세르는 [서문]([오늘], II, p. 24)에서 자신이 제시한 맑스 독해의 가설들을 “문제설정”(그는 이를 1963년에 죽은, 그리고 이 책이 헌정된 자크 마르탱(Jacques Martin)에게 빌려 왔다고 말한다)과 “인식론적 절단”(그는 이를 자신의 선생이었던 가스통 바슐라르에게 빌려 왔다고 말한다)이라는 주요한 두 가지 이론적 개념과 결부시켰다. 사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개념―이 개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과 함께―은 “알튀세르주의”의, 또는 오히려 그가 인식론 담론에 남긴 흔적의 서명 표시로 표상/대표된다. 『맑스를 위하여』의 기획에 본질적인 이 개념들은 하지만 분명히 『맑스를 위하여』의 이론적 내용 전체를 소진시키지는 않는다. 나로서는 이러한 단순화된 소개―여기서는 토론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논쟁의 소재를 지적해 두는 게 문제다―가 지닐 수 있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호 독립적인 통념들과 질문들의 세 가지 배형을 확인해 두고 싶다.

한 가지 배형은 “인식론적 절단”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사실 이 개념에는 이론적 실천, 과학성, 그리고 관념들이나 사고들 자체가 아니라 이것의 물질적 가능성의 체계적 통일성으로 사고된 문제설정(이 개념은 아마도 하이데거의 프로블렘슈텔룽(Problemstellung)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들뢰즈와 푸코의 “문제화”(problématisation) 개념과 이를 비교해 보면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같은 개념들이 속할 만한 충분한 권리를 갖고 있다.

여기가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지점인데, 이는 과학이라는 관념이 품고 있는 정서들 및 이 관념이 포함하고 있는 난점들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이 점에 관해서는 두 가지 관찰만 제시해 두겠다. 알튀세르는 상이한 자기비판들(특히 “변증법적 유물론” 또는 “이론적 실천의 이론”이 과학 담론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철학 담론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을 전개할 때에도 (『자본』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맑스의 이론이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적인 중핵을 포함하고 있다는 관념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은 반면, 맑스 이론의 과학성에 대한 관점에서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전혀 그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연구인 [알튀세르의 대상](국역: [철학의 대상: ‘절단’과 ‘토픽’],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맑스주의의 전화』(이론, 1993) 참조].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는 (이데올로기적 가상들을 넘어) “현실적인 것으로 회귀”한다는 관념으로부터 “이론적 전유”―이는 동시에 과학이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이자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가상적 권력에 대한 과학이기도 하다―라는 좀더 스피노자적인 관념으로 진화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맑스를 위하여』 및 후속 논문들이, 실존하는 과학성의 모델을 맑스주의적 논쟁 안으로 “수입”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또는 어쨌든 동시에) 역사유물론 (및 정신분석)이 구성하는 (갈등적이면서 엄밀한) 독특한 인식의 실천으로부터 출발해서 “과학” 개념을 개조하려고 한 것인지 질문해 볼 수 있다(또한 마땅히 질문해 봐야 한다). 이 경우 “과학”이 우리에게 절단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맑스의 절단에 고유한 명증성(흄식의 감각론적 형태뿐만 아니라 헤겔식의 사변적인 형태까지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경험론 및 직접성에 대한 비판으로서)이야말로 과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우리가 다시 질문해 보도록 촉구한다. 다시 말해 과학이 포함하는, 하지만 과학이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은, 인식과 진리 효과들 자체에 관해 질문해 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공된 두 번째 배형은 구조라는 통념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 통념은 분명 체계적 통일성 내지는 “총체성”라는 관념에 준거하지만, 이 후자는 완전히 내재적인 방식으로, 또는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효과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부재하는 원인”의 양식으로 자신의 효과들 안에서 주어질 뿐이다(알튀세르는 나중에 이를 자신의 다양한 양태들 안에 내속하는 스피노자의 실체와 비교하게 된다). 문제는 맑스 및, 그와 그 이후의 다른 맑스주의자들(특히 정세, “구체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할 때의 레닌)이 역사 안에서 발견하고 싶어 하는 인과성의 유형 자체이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의 다양성이 실천들의 다양성이라는 점이다. 실천들의 총화를 구조화하는 것은 실천들이 서로에 대해 작용하는 방식을 가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알튀세르는 실천들은 오직 본질적이고 환원불가능한 과잉결정의 양식으로 서로에게 작용한다고 말하는데, 어떤 “복잡성의 감축”도 이 과잉결정 너머에서 선형적 결정 관계의 단순성을 재발견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그와는 반대로 여러 실천들 중 하나에 의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 주장되면 될수록, 이와 상관적으로 이질적인 “지배”(domination), 또는 “지배작용”(dominance)의 필연성이 생겨 나고, 따라서 “순수한” 경제적 경향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의 다양화가 생겨 난다. 그리고 이 장애물들이야말로,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유일하고 진정한 “역사의 동력”을 이루는 계급투쟁의 소재 전체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관점 ... 은 인문과학들의 인식론을 분할하고 있는 방법론적 “개체론”과 방법론적 “유기체론” 내지는 “전체론”에 대한 이중적 거부에 의해 부정적으로 표시된다. 따라서 이 관점은, 적어도 형태상으로는, 근원적으로 관개체적인(transindividuelles) “관계들”(“rapports” ou “relations”)의 결합으로서의 사회적인 것을 이론화하는 데서 철학적인 표현을 제공해 준다.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고전적인 관념론 및 유물론에 직면하여 이러한 이론화의 필요성을 깨달은 뒤, 계속 이에 관한 작업을 시도했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주관적 시간들의 분리 내지는 거리두기의 구조라는 관점에서 비범하게 소묘되고 있는 “의식”이라는 인간학적 범주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대응물로 지니고 있다. 이 논문은 책 전체의 이론적이고 기하학적인 중심이지만, 이 책에서 이 논문은 “도둑맞은 편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누구도 이를 그 자체로[즉 이 책의 중심으로] 읽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이 논문이 미학에 관한, 연극에 관한 논문이라는 암묵적인 이유(raison honteuse)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다시 한번, 알튀세르가 여기서, 궁극적으로는 역사나 역사성이 아니라, 아주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 안에서 우연의 필연성을 사고하기 위해―단지 맑스 이론의 “시작들” 및 진화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구조”라는 관념을 활용하는 방식에 내재하는 난점이 드러나게 된다. 한편으로 과잉결정이라는 관념은 사건이 포함하는 예견불가능성과 비가역성의 역설적 결합과 함께 사건의 가지성에 응용되었다( ... “정세” ... ). 다른 한편으로 이는 생산양식들의 범역사적 비교에, 따라서 계급투쟁 및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경향에 응용되었는데, 여기서 문제는 이것들을 진보의 이데올로기들 및 경제주의적 진화주의와 “역사의 종말”이라는 종말론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한다면 한편으로는 공산주의 혁명들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적 이행들에 응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이 양자는 같은 것이 아니다. 연속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모순과 과잉결정], [유물변증법에 대하여]라는 위대한 두 논문을 읽거나 다시 읽어본다면, 내 생각으로는, 첫번째 논문은 사건에 대한 사고쪽에서 과잉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비해, 두 번째 논문은 경향 및 시기 구분쪽에서 이 개념을 이끌어낸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 하나의 관점을 다른 관점과 대립적으로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해결책은 『맑스를 위하여』에서,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구조에 대한 관념에서 이 두 관념 사이의 긴장, 또는 상호성으로서의 역사성이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은 아니겠지만, 매우 밀도있는 논의를 확인하는 데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라는 통념 및 질문 주위에서 조직되는 배형이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이면서 철학적인 이유들 때문에)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말하기를 중단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 통념에서 해석학이나 역사에 대한 담론의 계보학의 주요 장애물을 발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문제에 대한 30여년 간의 토론―이 역시 하나의 주기를 이루고 있다―이후에, 아마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점에 대해 간단히 몇 마디를 결론적으로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통념은 그의 철학적 기획 및, 담론으로서, 학문으로서 철학과 그가 맺고 있는 관계의 핵심 자체를 구성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통념은 철학이 자신의 “자기의식”―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간에―을 통과해서, 그 자신을, 그 자신이 아닌 것, 즉 사회적 실천들의 장 안에, 자신의 물질적 가능성의 조건들과 관련하여 위치시킬 수 있게 해주기(또는 가설상으로는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그 자신을 제거해 버리거나 “반영물”로 환원시키지는 않고서. 바로 이 점에서 이 통념은 알튀세르의 이론을 그의 철학적 모델들, 즉 스피노자 및 어떤 프로이트와 결합시키는 능동적인 혈통 노선을 구성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 담론의 자율성과 자족성의 이론가가 아니라 타율성의 이론가들이다. “토픽”, 즉 사고가 분석하는 갈등의 장 안에서 사고의 위치에 관한, 따라서 사고의 현실적이지만 유한한 역량에 관한 이론가들인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후에도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존재(Sein)에 대한 의식(Bewusstsein), “물질적인 실존 조건들”을 반영하고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있는”(즉 추상적, 관념적인) 담론들로 표현되는 “사회적인 의식의 형태”가 아니다. 이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실존 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를 상상적으로 영위하는 의식 및 무의식의(재/인지 및 몰인식의) 형태다. 바로 여기에 적어도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의, 특히 계급 투쟁의 연속적인 형성체들 속에서 역사적 이데올로기들(“중세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적”인)이 담당하는 기능의 기본적인 수준, 근본 층위가 존재한다.

이로부터,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의 종언 역시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종언 또는 사회적 관계들의 투명성으로의 회귀의 다른 이름인 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괴적인 사실의 확인이 직접 따라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알튀세르는 단지 “자신의 진영에 맞서” 집요하게 작업(그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의 본질적 기능들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철학자는 진영을 가져야 한다)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명백한 형태상의 모순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는 계속해서―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맑스를 위하여』는 오직 이를 주장하기 위해 쓰여졌다―이데올로기에 대한 이 정의는 유일하게 인식가능한 맑스주의적 정의, 어쨌든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이론화와 일관된 유일한 정의이며, 이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론을 보완할 수 있게 해준다. 분명 (다시 한번 내 주장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지겠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이러한 정의는 맑스 자신(엥겔스의 경우는 제쳐 두고)이 정식화할 수 있었던 정의들(특히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정반대일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의 집요한 적용은 사실은 맑스주의 이론 및 그 공언된 완결성에 대한 “해체”로 인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알튀세르가 그러한 정의야말로 “유물론적”이라고 주장하면 할수록, 아무런 어긋남 없이 “유물론적”이면서 동시에 “맑스주의적”인 철학의 지평은 점점 더 그 앞에서 멀어져 갔다.

분명 이 지점에서 알튀세르의 자기비판들에 대해 한 마디 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간략하게, 그저 독자들이 가장 특징적인 텍스트들을 참조하게 하는 정도로 그치고 싶다.

이제 우리는, 이름 그대로 지칭되든 아니든 간에, 다수의 “자기 비판들”을 보게 된다. 이 자기 비판들은,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을 정정하거나 와해시키고(심지어 자신을 파괴하고), 아마도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에게 복귀하려는 양가적인 성향을 표현하는데, 이는 전혀 알튀세르에게 (심지어 철학자들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의 경우에 자기 비판은 그의 실존 및 그가 이론과 맺고 있는 관계의 독특성을 비가역적으로 표시할 만큼 통상적인 비율을 넘어서는데, 이는 그의 사상의 내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주위의 끔찍한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정정들이 반복되고, 또 이처럼 반복되면서 전환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또한 알튀세르 자신이 제시한 몇 가지 “길 안내”를 갖고 있지만, 이는 같은 길을 지시해 주지 않고 있으며, 이는 심지어 『맑스를 위하여』를 독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여기서 제안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주해들―이것들은 때로는 그 자체로 매우 흥미있으며, 또는 문제를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을 사상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이를 텍스트의 문자에 체계적으로 투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앞에서 우리는 『맑스를 위하여』를 그 시대와 그 환경 속에서 읽어야 하지만, 이를 기록 문서로 전환시키지는 말아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재발간에서 편집자는 매우 정당하면서 신중하게도,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의 외국어 번역본들을 위해 1967년에 작성한, 그리고 거기에서 제시된 해명들 및 평가들은 프랑스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가치를 지니는 [독자들에게]라는 서문을 [후기]라는 이름으로 포함시키고 싶어했다. 이 [서문]에 반영되어 있는 입장들(“이론주의”에 대한 자기 비판, “구조주의”에 대해 거리두기, 과학과 철학의 차이에 대한, 그리고 철학과 정치, 특히 혁명적 정치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강조)은 『레닌과 철학』(1968) 및 『자기 비판의 요소들』(1974)에서는 이론의 시각에서, 『입장들』(1976)이라는 논문 모음집 안의 몇몇 텍스트들(특히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및 마르타 아르네케르의 저서에 대한 서문으로 쓴 [맑스주의와 계급투쟁])에서는 정치의 시각에서 다시 제시되고 가공된 자기 비판들과 같은 것들이다. 이 자기 비판들은 알튀세르 자신이 선택했던 투쟁 동지들이지만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던, 하지만 또한 이론의 고상한 시선을 위해 “계급 투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환기시키려고 했던 양쪽 편(프랑스 공산당(PCF)의 공산주의자들과 맑스-레닌주의 청년 동맹(UJCML)의 마오주의자들)에서 동시에 가해졌던 폭력적인 압박을 반영하고 있다.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 자기 비판들은 자신의 이론적 수단들을 통해 확장된 맑스주의 이론의 장―여기서는 착취 및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조건들이 “최종 심급에서 결정적이다”―안으로 당대의 68년 5월 및 다른 사건들을 끌고 들어가 해명하려고 했던 알튀세르의 시도를 반영한다.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자기 비판들은 하나의 “실천”으로서 이론을 끝까지 사고하는 데―이 시도가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해도―는 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아무런 회고적인 진리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이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상이한 시기에, 상이한 목적에 따라 생산되었고 상이한 측면들에 집중하고 있는 두 개의 또다른 “자기 비판”을 지적해 두고 싶다. 하나는 [아미엥에서의 주장](1975년에 쓰였고, 1976년 에디시옹 소시알에서 출간된 논문 모음집 『입장들』에 재수록)에서부터 1980년의 파국 이전이나 이후에 쓰인 매우 암시적인 또는 매우 밀도높은 몇 개의 텍스트들(1984년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철학에 대하여』, 서관모,백승욱 옮김(동문선, 1995)]에서 나타나는, 근대의 변증론자들보다는 에피쿠로스에서 영감을 받은 “불확실성의 유물론”을 인식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암시 같은 것들)에까지 진행된다. 과소결정이라는 단어가 이전의 저작들에서 단 한 차례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1975년 국가 박사학위 심사위원들에게 제출한 [아미엥에서의 주장]이라는 텍스트에서 모순과 그에 고유한 “불균등성”에 관해 수수께끼처럼, 과잉결정은, 이것 못지 않게 본질적인 과소결정이 없이는 결코 작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양자가 교대로 작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과적 결정 자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동일한 구조에 양자 모두가 구성적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여기서 주석 및 보충이라는 은폐된 형태로 이루어진 자기 비판을 읽어내야 할까?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자기 비판은 다른 것들보다 더 구성적이라는 점에서 훨씬 흥미로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비판이 제공하는 암시―우연의 필연성을 “구조적으로” 해명한 이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는 이러한 우연의 우연성, 동일한 사건의 내부에서 공존하는 가능태들 내지는 경향들의 “과소결정된” 다양성을 표현하는 것이다―는 하나의 테제나 심지어 하나의 가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적 프로그램이라는 점 역시 확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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