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만간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나올 에티엔 발리바르의 책 {우리는 유럽의 시민들인가?}의  

맨 앞 장의 번역본입니다.  발리바르 책이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소개할 겸 올려봅니다.  

이 책은 이 장까지 포함해 총 13장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책이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계화 시대의 세계정세를 분석하고 정치적 쟁점들을 인식하는 데, 또 실천적인 대안들을 모색하는 데 

이 책에 비견될 만한 책은 지극히 드물다고 봅니다. 이 책 전체는 이 장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개괄하기에 유용하다고 생각해서 이 장을 올려봅니다.  

아직 교열이 끝난 원고가 아니니까 당연히 인용은 불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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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막. 유럽의 경계들에서   

[1999년 10월 4월 데살로니카 프랑스 연구소와 데살로니카 아리스토텔레스 대학 철학과 공동 초정으로 인문대학의 원형 대강의실에서 발표한 강연. 이 강연은 Transeuropéennes n° 17, Paris, 1999-2000에 실렸다.]


나는 전통적인 형세―강력한 신화들과 더불어 역사적인 사건들의 지속적인 발생을 반영하는 형세―에서 볼 때 유럽의 “주변부”에 위치한 나라들 중 하나인 그리스에서 “유럽의 경계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카 자체가 이 경계의 나라의 경계선상bord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한편으로 외국인(숙적으로 전환된)과의 주기적인 대결과 다른 한편으로 문명들 사이의 소통(이러한 소통이 없다면 인류의 진보도 존재할 수 없다)의 변증법이 작용한 장소들 중 하나였다. 따라서 나는 내가 다룰 대상의 중심에―그것이 포함하는 모든 난점들과 더불어―들어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계frontière”라는 용어[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frontière”라고 할 수 있다. 불어에서 이 단어는 “국경”이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좀더 일반적으로는 “경계”라는 뜻으로 쓰인다. 발리바르가 이 책에서 논증하려는 주요 테제 중 하나는 국가의 영토적 경계로서 “국경”이 국민국가의 위기 속에서 좀더 일반화된 “경계들”로, 곧 이주민들, 난민들, 외국인들, 소수자들에 대한 배타적인 경계들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frontière”라는 개념은 보통 사회과학에서 의미하는 “국경” 이외에 경제적ㆍ사회적ㆍ인종적 “경계”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이 후자의 뜻이 좀더 핵심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는 이 개념을 주로 “경계”라고 번역하되, 특별히 “국경”이라는 의미가 강조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경계/국경” 같은 식으로 번역하겠다.]는 극히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다. 내 가설 중 하나는 이 용어의 의미가 심원하게 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여전히 국가의 주권적 기능들을 보존하려고 시도하는 새로운 정치ㆍ경제적 실재의 경계들은 더는 영토들의 경계선 상에 모두 위치해 있지 않다. 이러한 경계들은 정보와 사람, 사물의 이동이 실행되고 통제되는 곳이면 어디든지(예컨대 세계화된 도시들) 얼마간 분산되어 존재한다. 하지만 나의 테제들 중 하나는, 이른바 주변적인 지대들, 곧 세속 문화와 종교 문화가 충돌하고, 경제적 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심화되는 지대들은 인민peuple(demos)―인민이 없다면 고대 이래 민주주의 전통에서 전승되어온 의미에서 시민권citoyenneté(politeia)도 존재하지 않는다―이 형성되기 위한 도가니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계에 위치한 지대들과 나라들, 도시들은 공적 공간의 구성과 관련하여 주변적인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 만약 우리에게 유럽이 무엇보다도 해결되지 않은 한 가지 정치적 문제의 이름이라면, 그리스는 그 문제의 중심들 중 하나다. 그리스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우리 문명의 신화적인 기원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에 집중돼 있는 문제들 때문에 그렇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중심이라는 통념은 우리를 한 가지 선택에 직면하게 한다. 이 통념은 권력의 집중 및 가상적이거나 현실적인 국가핵심기관의 지방 분권 같은 국가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의 중심은 브뤼셀이나 스트라스부르 또는 런던 시티[“City of London”은 금융회사가 밀집한 런던 뱅크역(驛) 사방 1평방 마일의 지역을 가리킨다.]나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 또는 오히려 유럽 건설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국가들의 수도인 베를린에 위치할 것이며, 이차적으로는 파리와 런던 등에 위치할 것이다. 하지만 이 통념은 또한 다른 의미, 좀더 본질적이면서도 좀더 파악하기 어려운 의미를 지니는데, 이 경우 이러한 통념은 시민civique 의식의 창출 및 인민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의 집합적인 해결을 통해 인민이 구성되는 장소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유럽적인 인민”, 그것도 생성 중에 있는 그러한 인민은 존재하는가? 이것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다. 그리고 만약 유럽적인 인민, 아직 마땅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인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술관료적인 외양을 넘어서는 유럽적인 공론장이나 유럽적인 국가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몇 년 전에 “유럽에는 어떠한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Es gibt keinen Staat in Europa”는 헤겔의 유명한 정식을 모방하여 주장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이 책 9장 참조]. 하지만 이러한 질문은 열려 있어야 하며, 경계의 지점들에서는 특히 “중심적인” 방식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난점은 더 있다. 우리는 코소보, 발칸 또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직후인 지금 여기에 모여 있는데, 서구 열강들이 프리스티나Priština[코소보의 주도(州都)]에 설치한 보호령은 자리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의심스러운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반면, 베오그라드에서는 현 체제의 장래를 둘러싼 책략들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가까운 시일 내에 벗어날 수 없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하여 모두 동일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히려 이 문제에 관해 우리들 사이에는 심각한 이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얼마 전에 일어났던 전쟁을 가리키기 위해 우리가 똑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점에 관한 명백한 징표일 것이다.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각자 상이한 이유에 따라 나토의 개입을 비난했던 반면, 다른 이들은 또한 각자 상이한 이유에 따라 한 “깃발” 아래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아마 그럴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토의 개입에서 미합중국이라는, 헤게모니를 쥔 외부 세력에게 유럽이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던 반면, 다른 이들은 그러한 개입에서 유럽의 국가들이 대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의 무력을 용병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아마 그럴 것이다) 운운. 
 

나는 이러한 딜레마를 단칼에 해결하겠노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들이 유럽 건설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모순들을 무자비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나의 신념을 이 자리에서 밝혀보고 싶다. 유럽의 건설이 단일한 화폐의 설립과 그에 따른 사회ㆍ경제 정책을 위한 공동의 틀의 건설을 통해, 그리고 “유럽적 시민권”의 형식적 요소들의 실행을 통해 비가역적인 문턱을 넘어섰다고 간주되는 바로 그 시점에 이 사건들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사건들에서 사람들은 곧바로 유럽적 시민권의 군사적ㆍ치안적 맞짝을 감지하게 된다. 
 

사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행정과 세력관계의 “공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민들 사이의 소통과 협동의 “공적 공간”이기도 한 유럽 공간 내에서의 포함과 배제의 양상들에 대한 정의다. 결과적으로 이는 용어의 가장 강한 의미에서 유럽 건설의 가능성이냐 불가능성이냐가 달린 문제다. 코소보를 공동 보호령으로 설립한 것과, 간접적으로는 슬로보단 밀로세비치가 통치하는 세르비아를 봉쇄한 데서 볼 수 있듯이 발칸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불가능성이 압도하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지속될 것 같다. 비록 사람들이―내가 그렇듯이―진행 중에 있는 “종족 청소” 과정을 막기 위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을 더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비록 사람들이―내가 그렇듯이―정치적 제도의 역사에서 인민의 자기결정권에 관해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불신한다 할지라도 그렇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인 이유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구유고슬라비아 전체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출구도 없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는 발칸반도(및 좀더 일반적으로는 동유럽)의 인민들에게 결사associations라는 정치적 해법을 제안하고 발전의 전망을 열어주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의 침해에 맞선 효과적인 투쟁이 벌어지는 곳 어디에서든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에 대해 “유럽 공동체”가 무기력하고 무능력할뿐더러 그 책임을 거부했던 결과였다. 따라서 그 이후에 발생한 재앙들 및 그로 인해 오늘날 생겨나게 된 결과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바로 유럽, 특히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발칸 전쟁이 유럽 건설이 맞이한 곤경 및 그 불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정확히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유럽의 건설은 어떤 조건 하에서 다시 가능하게 될 수 있을지, 상이한 장래를 위한 잠재력들은 어디에 존재하는지, 과거 잘못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다시 그런 잘못을 반복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피함으로써 어떻게 그러한 잠재력들을 해방시킬 수 있을지 질문해보는 용기 또는 광기를 가져야 한다. 동일성에 대한 모든 신비화에서, 역사의 경로의 필연성에 대한 모든 환상에서, 그리고 특히 통치자들의 무오류성에 대한 모든 믿음에서 자유로운, 능동적인 유럽적 시민권에 대한 기획에 대해 유일하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노력을 나는 촉구하고 싶고 또 거기에 힘을 보태고 싶다. 우리는 경계라는 특별한 문제를 중심으로 유럽적인 인민 및 유럽에서의 국가라는 질문을 논의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경계라는 문제는 정치ㆍ경제 권력의 쟁점들과 더불어 집합적 상상계 속에서 전개되는 상징적 쟁점들, 곧 한편으로는 세력관계 및 물질적 이해관계라는 쟁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성에 대한 재현/표상들이라는 쟁점을 응결하고cristallise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일어났던 새로운 발칸 전쟁[발리바르는 여기서 1912-13년에 걸쳐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발칸 전쟁과 구별하기 위해 1990년대에 벌어진 발칸 전쟁을 “새로운 발칸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도중에 유럽이라는 이름이 서로 모순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기능했으며, 이는 내부와 외부라는 통념의 애매성을 잔혹하게 부각시켰다는 사실에서 나는 경계 문제의 중심성에 대한 충격적인 징표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유고슬라비아를, 하지만 또한 각자 상이한 정도로 발칸 반도 전체(따라서 여기에는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등이 포함된다)를 [유럽에 대한―옮긴이] 외적 공간으로 간주해왔는데, 이러한 공간에서는 유럽이라는 이름이 붙은 어떤 실재가, 내가 여기서 논의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유럽과 발칸 반도 사이의―옮긴이] 상호 외재성을 표현해주는 “개입 원칙”이라는 이름 아래 인류에 대한 범죄를 막기 위해, 필요할 경우에는 자신의 막강한 동맹자 미국의 도움을 받아 개입을 해야 할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발칸 반도는 유럽의 바깥에 존재한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컨대 알바니아의 국민작가 이스마일 카다레Ismail Kadaré가 제안한 주제들[“Il faut européaniser les Balkans”, Le Monde, 17 avril 1999.]을 빌려 말하자면, 이러한 개입은 유럽의 영토 위에서, 유럽의 역사적 경계 내부에서, 유럽 문명의 원리를 보호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돼 왔다. 따라서 이번에는 발칸 반도는 온전한 권리에 따라 유럽의 경계들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요컨대 유럽은 단지 도덕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특히 자신의 정치적 장래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자기 자신의 영토 위에서 주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나는 결코 이것이 순전한 선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유럽의 공적 공간의 일부라고 지칭된 발칸 지역의 통합을 예상하거나 가속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수반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실패작이었던 “발칸 회의” 기획의 와해는 이를 웅변적으로 입증해준다. 관련 당사국들 전체와 유럽 공동체 그 자체가 관여하는 복구와 발전을 위한 경제 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령 프랑스의 작가인 장 셰노Jean Chesneaux가 훌륭하게 제안했던 것처럼[“Quelle paix au Kosovo?”, Le Monde, 3 juin 1999.] 세르비아 군대 및 민병대에게 신분증을 빼앗긴 코소보 난민들에게 “유럽 주민증”을 부여함으로써 “유럽적 시민권”이라는 통념을 구현하려는 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 연합”으로 진입하기 위한 단계 및 기준들에 대한 재정의도 없었다. 
 

그리하여 발칸 반도는 한편으로 유럽의 일부를 이루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일부를 이루지 못한다. 분명히 우리는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대륙의 동쪽편에는 터키를 필두로 러시아와 코카서스 지역과 같은, 이것과 등가적인 경계 영역이 존재하며, 이러한 경계 영역은 도처에서 점점 더 극적인 중요성을 띠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지극히 역설적인 상황에 이르게 된다. 첫째, 코소보의 식민화(현재 코소보의 체제를 레지 드브레Régis Debray가 제안했던 것처럼 이렇게 부르고자 한다면. 하지만 나는 그가 알제리 전쟁과 비교한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생각을 달리 한다)는 (일종의 미국의 용병의 도움을 받아 진행된) 유럽에 의한 유럽의 “내부 식민화”로 제시된다. 하지만 나는 또한 다른 상황들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스가 자신이 유럽 주권 지역 내부에 속하는지 아니면 그 외부에 있는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인데, 그리스가 이런 질문을 제기한 것은 그리스 자신이 참여하려고 하지 않은 지상점령군의 진입지점으로 그리스 영토가 사용됐기 때문이다. 터키가 이 작전에 참여한 사실이 언급되었을 때 그리스의 어떤 “애국자들”은 [그리스와 터키라는] 두 “숙적” 중에서 정치적 유럽―군사적 유럽이 되어가고 있는―에 더 내재적인 쪽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을 만도 했겠다고 능히 짐작이 간다. 
 

이 모든 것은 경계의 표상/재현의 토대를 이루는 내부와 외부라는 통념들이 정말이지 지진 같은 변화를 겪고 있다는 점을 입증해준다. 이는 경계, 영토, 주권에 대한 표상/재현들 및 경계와 영토에 대한 표상/재현 가능성 자체가 비가역적인 역사적 “강압forçage”의 대상을 이룬다는 점을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표상/재현들은 정치적 공간을, 법의 부과이면서 동시에 육지의 분배로서의 주권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모종의 관점의 구성적 요소를 이룬다. 이러한 관점은 유럽 근대에서 탄생해서 나중에는 세계 전체로 수출되었다. 칼 슈미트Carl Schmitt가 자신의 1950년의 대작 󰡔대지의 노모스Der Nomos der Erde󰡕에서 유럽의 공법Jus Publicum Europaeum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또한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표상은 국가 제도에 본질적이기는 하지만, 유럽 역사를 구성하는 동일성들 사이의 복잡한 현실 및 그것들 사이의 상호 관계―때로는 평화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를 지탱하고 있는 위상학의 복잡성을 해명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이전에, 우리가 특히 중부 유럽에서, 좀더 일반적으로는 유럽 전체에서 관여하고 있는 것은, 단일한 블록들의 병치라기보다는―심지어 “소수자” 문제는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상호 모순적인 문명들 사이의 “삼중의 교차점” 내지 유동적인 “중첩 지대”라고 제안한 바 있다. 유럽은 모든 점에 있어서 다수적이다. 유럽은 항상 복수의 종교적ㆍ문화적ㆍ언어적ㆍ정치적 소속들 사이의 긴장의 본고장이자 역사에 대한 복수의 독해 및 나머지 다른 세계와의 복수의 관계 양상의 본고장이었다. 그것이 아메리카주의이든 오리엔탈리즘이든, “북유럽” 법체계의 소유적 개인주의이든 아니면 지중해 지역 가족 전통의 “부족주의”이든 간에 말이다. 이 때문에 나는 유고슬라비아의 상황은 사실은 전혀 유별난 것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특징적인 마주침과 갈등 도식들의 국지적인 투사라고 제안했었다. 그리고 나는 이를 거리낌 없이 유럽적인 인종 관계라고 불렀는데[“Les frontières de l'Europe”, in La Crainte des masses. Politique et philosophie avant et après Marx, Galilée, 1997; 「유럽의 경계들」,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 물론 여기서 인종이라는 통념은 종교적ㆍ언어적ㆍ계보적인 동일성의 지시체들의 역사적 축적을 자신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 

오늘날 나로 하여금 유럽의 동일성의 운명 전체는 유고슬라비아에, 좀더 일반적으로는 발칸 반도에 달려 있다(비록 이곳이 그 운명이 시험받는 유일한 장소는 아니지만)고 주장하게 이끄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한편으로 유럽은 발칸의 상황을 자신의 가슴에 이식된 괴물로, 곧 저발전이나 공산주의의 병리적인 “잔재survivance”로 인지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역사의 한 이미지나 효과로 인정하고, 정확히 이러한 사실과 대결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따라서 그것을 다시 문제 삼고 그것을 전환시키려고 시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유럽은 분명 다시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한편으로 유럽은 이렇게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고, 계속해서 이 문제를 외재적인 수단들(식민화라는 수단을 포함하여)을 사용하여 극복해야 할 외재적인 장애물로 취급하게 될 것이다. 곧 유럽은 미리 자신의 시민권에 대해 유럽 자신의 주민들이 넘어설 수 없는 내적인 경계선을 강제하며, 자신의 주민들을 거류 외국인의 상황으로 끝없이 몰아간다. 그리하여 유럽은 자신의 불가능성을 재생산하게 된다. 
 

이제 “경계의 시민권” 내지 접경의 시민권으로서 유럽적 시민권이라는 질문을 좀더 확장해보고 싶다. 우리는, 장기적인 역사의 관점에서 거리를 둔 가운데 사태를 다시 고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불가능성과 가상성들virtualités의 응축물인 이러한 시민권을 다시 작동시켜야 한다. 
 

고전주의 시기 이래 20세기 중엽 제국주의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주권이라는 질문이, 정치적이면서 또한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것으로서 경계/국경이라는 질문―“진영들”의 붕괴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이러한 유산을 물려받아왔다―과 역사적으로 한데 결부되어 왔는지 환기해보기로 하자. 유럽이라는 이름이 지닌 정치적 의미의 기원들 중 하나,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7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당대에는 대부분 군주적 주권 체제로 조직되어 있던 국민국가들 사이에서 “유럽적인 균형” 체계가 구성되었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종종 역사 교과서에서 읽는 것과는 달리 이는 “투르크의 위협”이라는 배경 아래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가톨릭 세력이 맞붙어 유럽을 폐허로 만들었던 30년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체결되었던 “베스트팔렌 조약”(1648)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조금 늦게 이러한 유럽적 질서에 대한 두 가지 관점, 프랑스 군주정이 대표하는 헤게모니적인 관점과, 국가들 사이의 형식적 평등 체제라는 의미에서의 공화주의적 관점―이러한 관점은 국내 질서에서 몇몇 시민권들을 인정하는 것에 상응했으며,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체결한 동맹에 의해 구현되었다―이 서로 대결하게 된 순간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빌렘 드 오라녜의 명령에 따라 작성된 선전문에서는 주권적인 국민들 내지 국가들 사이의 세력 관계와 교류 관계 전체―이 국가들 사이의 균형은 협상을 통한 국경의 확정에 따라 실현되었다―를 지칭하기 위해 당시까지 외교적으로 사용되던 “기독교 세계”라는 명칭을 유럽이라는 용어가 대체했다. 우리는 또한 이 통념이 때로는 민주주의적이고 세계시민적인 이상(칸트가 이론화한)을 향해 나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한 국가들에 의한 인민들과 문화적 소수자들의 움직임에 대한 감시(이는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비인 회의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를 향해 나아가기로 하는 등 계속해서 동요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현재 시기에 근접할수록 점점 더 심원하게 이 체계에 영향을 미치게 될 두 개의 진화 운동에 좀더 주목하고 있다. 
 

첫 번째 운동은 유럽적인 균형과 그에 상응하는 국민적인 인민 주권이, 17세기에서 20세기 중엽에 이르는 세계에서 유럽의 헤게모니적인 지위, 좀더 분명히 말하자면 유럽의 식민 열강들―여기에는 네덜란드나 벨기에 같은 “작은 국민들”을 비롯하여 러시아(이후에는 소련) 같은 주변적인 국민들도 포함된다―에 의한 세계의 제국주의적 분점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이나 칼 슈미트 같은 비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이 각자 자신의 용어법에 따라 강조했던 것이 바로 이점인데, 슈미트는 여기에서 “유럽 공법”이 위기를 맞게 된 원인을 찾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또 그 뒤에는 한나 아렌트 역시 이 점을 강조했으며, 우리 시대에 좀더 가까운 인물들로는 역사가인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과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있다.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구성되려고 시도했던 유럽의 공간 내에서 “정치적” 경계선을 긋는다는 것은, 원래는 그리고 중심적으로는 대지를 분할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따라서 대지에 대한 수탈을 조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세계 전체를 유럽의 확장으로, 좀더 나중에는 동일한 정치 모델 위에 구축된 “또 다른 유럽”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주변부에 “경계/국경 형태”를 수출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운동은 탈식민화에 이르기까지, 따라서 현재의 국제 질서의 구축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운동은 결코 완수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곧 독립적이고 주권적이면서 통일적이거나 동질적인 국민 국가들을 형성하는 일은 세계의 아주 많은 지역에서 실패로 돌아갔다. 또는 이는 단지 유럽 바깥에서만이 아니라 유럽 그 자체의 일부 지역에서도 의문시되었다. 
 

이는 분명히 매우 심원한 이유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이 점에 대해 좀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국민적인 “절대적” 국가 주권 형태가 보편화 불가능한 것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국민들의 세계”, 심지어 통일된 국민들nations unies[“nations unies”는 또한 “국제연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이라는 표현이 용어 모순이기 때문일 수 있다. 특히 한편으로 유럽 국민들의 구성과 그것들 간의 안정되거나 불안정한 “균형”, 그것들 간의 내적ㆍ외적 갈등과 다른 한편으로 제국주의의 세계사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연관성이 국경 갈등의 영속화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오늘날 유럽 인민들에 전형적인 인구학적ㆍ문화적 구조도 낳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유럽 인민들은 모두 포스트식민적인 공동체이거나,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면, 유럽의 공간 내부에 세계의 상이성이 투사된 것이다. 여기에는 이민이라는 원인도 존재하지만 또한 난민들의 본국송환 같은 다른 원인들도 존재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두 번째 운동은 정확히 말하면 인민이라는 통념의 진화와 관련되어 있으며, 앞의 운동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로부터 때로는 매우 폭력적일 수도 있는 강한 긴장이 생겨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국민국가들의 체계 및 그것들 간의 영속적인 경쟁 관계 속으로 주민들과 인민들이 역사적으로 삽입된 것이 이러한 인민들에 대한 표상 및 그들이 자신들의 “동일성”에 대해 지니는 의식을 내부로부터 변형시키는 방식이다. 
 

내가 월러스틴과 함께 1988년에 출간했던 󰡔인종, 국민, 계급. 애매한 동일성들󰡕이라는 저작에서 나는 사회들과 인민들, 따라서 문화들과 언어들, 계보들의 경향적인 국민화를 지칭하기 위해 “허구적 종족성의 구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이러한 과정은 인민에 대한 두 가지 통념이 대결하는 장소이지만 또한 상호 함축적이게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두 가지 통념이란 그리스 언어 및 그 이후의 정치철학 전통 전체가 에트노스ethnos와 데모스demos라고 지칭해온 것인데, 전자가 소속과 혈통의 상상적 공동체로서의 “인민”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대표와 결정, 권리들의 집합적 주체로서의 “인민”을 가리킨다. 이중적인 측면을 지닌 이러한 구성물의 위력, 또한 이를테면 그것의 역사적 필연성, 그리고 일정한 조건들 아래에서 그것의 우연성과 상대성을 이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개인들이 속하는 집단들 사이에 서로 삼투되지 않는 방수된 경계선들을 상상적으로 그림으로써, 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든 아니든 간에 위로부터 개인들에게 지정된 경계들을 서로 주관적으로 전유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문화적이거나 정신적인 민족주의(간혹 “애국주의”나 “시민종교”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를 발전시킴으로써 경계라는 관념을 주관적으로 내면화하는 것, 곧 개인들이 세계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서로 표상하는/재현하는 방식―아렌트를 따라서 개인들이 세계에 존재할 권리라고 말해두자―을 낳은 것이 바로 이러한 구성물이다. 
 

하지만 시민의 권리들―여기에는 교육권과 정치적ㆍ조합적 표현의 권리, 안전한 삶과 적어도 상대적인 사회보장의 권리가 포함된다―의 민주주의적인 보편성을 특수한 국민적 소속과 긴밀하게 연결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구성물이다. 이 때문에 국민이라는 형태 속에서 인민의 민주주의적 구성은 불가피하게 배제의 체계들을 산출하게 된다.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의 균열 및 좀더 심층적으로는 원주민으로 간주되는 인구들과 외래적이고 이질적인 존재들로 간주되고 인종적이거나 문화적으로 차별받는 인구들 사이의 균열이 그 사례들이다. 
 

이러한 균열들이 식민화와 탈식민화의 역사를 통해 강화되어 왔으며, 세계화의 시기에는 폭력적인 긴장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각각의 민족체 내부에서 이미 극적이게 된 이러한 균열들은 유럽 연합이 지향하고자 하는 포스트국민적이거나 초국민적인supranationale 공동체의 수준에서 재생산되고 배가되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프랑스 및 유럽에서 이민자들과 “미등록 체류자들sans-papiers”[“상 파피에sans-papiers”는 말 그대로 하면 “서류 없는 이들” 또는 “체류증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3개월 이상 장기 체류를 위해 필요한 체류증을 갖지 못한 불법 체류 외국인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이 책에서는 “미등록 체류자들”이라고 옮기겠다.]의 상황에 관한 끝없는 토론 도중에, 유럽적 시민권 그 자체와 동시에 형성되고 있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유령을 불러내게 되었다. 은폐하기 어려운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는 “동쪽”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남쪽” 주민들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가능하면서 불가능한 장래의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실재로서의 유럽은 허구적 종족성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유럽은 이러한 유형의 건설을 통해 자기 자신의 시민권에 대해, 곧 자신이 포함하는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유럽이 부여한다고 간주되는 새로운 권리들의 체계에 의미와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객관적인 제도들과 동시에 개인들의 상상계 속에 기입될 수 있는 유럽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표상을 구성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국민적 동일성 또는 내가 조금 전에 그 발생에 관해 환기한 바 있는 허구적 종족성에 특징적인 폐쇄성은 세계화의 사회적ㆍ경제적ㆍ기술적ㆍ통신적 현실만이 아니라 “유럽에서의 정치체의 권리droit de cité en Europe”라는 의미로 이해된 “유럽적인 정치체의 권리”라는 관념, 곧 유럽의 건설을 통한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관념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아포리아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곧 인민의 새로운 형상,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역사적 공동체들에 대한 소속(ethnos)과, 다른 한편으로는 집합적 행동, 생존과 노동, 표현에 대한 기본권과 동시에 시민적 평등, 언어들과 계급들, 성(性)들의 동등한 존엄성을 획득함으로써 시민권을 연속적으로 재창조하는 것(demos)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형상을 집합적으로 발명해야 할 필연성에,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그 불가능성에 바로 아포리아의 핵심이 존재한다. 오늘날 유럽적인 인민이라는 관념에 대해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민주주의적인 유럽 국가라는 기획에 대해 내용을 부여할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이 맞닥뜨린 두 가지 장애물―모든 유럽적인 사회 정책과 모든 유럽적인 사회 운동에 대한 부정, 유럽에 대한 소속을 규정하는 배타적인 경계선의 권위주의적인 확정―과 동시에 대결하고 그것들을 하나하나씩 해결하지 않는 한 인민의 새로운 형상을 발명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이름들의 존속은 모든 “동일성”의 조건이다. 우리는 어떤 이름들을 위해, 또 그 이름들을 전유하기 위해 다른 이름들에 맞서 투쟁한다(유럽, 유고슬라비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 하지만 또한 프랑스, 영국, 독일 같은 이름들). 이 모든 투쟁은 향수와 국경 또는 유토피아와 변혁 프로그램의 형태 아래 흔적들을 남긴다. 그리하여 유럽이라는 이름(이는 아주 먼 고대 시기에서 유래한 것이며, 처음에는 아시아나 소아시아의 작은 지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은 세계정치적인 기획들과 결부되어 왔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시도들 또는 그러한 시도들이 야기한 저항과도 결부되어 왔으며, 또한 세계 분점 및 “문명” 확산 프로그램―식민지 열강들은 스스로 문명의 수호자로 자처했었다―과도, 세계에 대한 적법한 소유권을 둘러싼 “진영들” 사이의 경쟁과도, 지중해 북부의 “번영 지대”와 “21세기의 열강”을 창조하려는 기획 등과도 결부되어 왔다. 
 

민주주의 정치가 직면한 어려움은, 역사적으로 해방의 기획들 및 시민권을 위한 투쟁들과 결합되어 왔으며, 나중에는 이러한 기획들과 투쟁들을 재개하고 영속적으로 발명하는 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던 표상들 속으로 폐쇄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동일화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구조들과 이데올로기(문화적ㆍ정치적 통일체에 대한 소속 감정들)라는 이중의 제약에 종속되어 있다. 현재의 쟁점은 유럽적인 동일성 그 자체에 대한 찬성이나 반대의 투쟁에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공산주의” 및 진영 분할의 종언 이후에 쟁점은 오히려 유럽의 경계들을 민주화할 수 있게 해주면서 동시에 유럽의 내적 분열들을 극복하고 세계 속에서 유럽 국민들의 역할을 완전히 재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시민권을 발명하는 과제를 중심으로 선회하고 있다. 중심적인 문제는 유럽 연합이 “지역적인 질서”의 보장을 감당할 만한, 또는 인도주의적이거나 신식민주의적인 개입들을 통해 대외적으로 자신을 “투사할” 만한 군사적인 역량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지중해 지역의 동쪽과 서쪽 및 남쪽과 북쪽에 공통적인 민주화와 경제 구성의 기획이 입안되고 인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불가능한 유럽, 가능한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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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2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9-04-13 01:21   좋아요 0 | URL
ㅎㅎ 그래 고맙다. 나오면 해줄게.^^

balmas 2009-04-13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 님/예, 그러시군요. 그런데 어떤 걸 보시고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nation을 국민으로 번역하면, nationalism도 국민주의라고 옮겨야 적절할 때가 있는 듯합니다. "국가주의"야 발리바르가 "etatisme"이라는 용어를 따로 쓰니까 혼동될 염려는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NA 2009-04-15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곧 출간이 될 모양이군요. 축하합니다. 빨리 번역본을 사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장의 한 구절을 보니 진태원 선배님이 nation을 국민으로 옮기고자 하는 이유가 조금 보이는군요. 전 여전히 nation을 민족이라고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이미 전에 충분히 말씀드렸으니 더 말씀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고, 오늘은 droit de cite를 '정치체의 권리'로 옮기신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우선 '정치체의 권리'라는 번역은 언뜻 보기에는 '정치체가 갖는 권리'라는 뜻으로 읽히는데, droit de cite는 오히려 cite에 대한 권리 또는 cite에 들어가고 머물고 떠날 권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de를 -에 대한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cite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있어서 그것을 정치체로 옮긴 것은 일면 수긍이 가지만(왜냐하면 정치체로서의 도시/국가를 의미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조금 부적절한 면이 느껴집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cite는 장소의 의미를 여전히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곧 도시/국가에 들어가고 머무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추상적인 정치체라는 말이 자칫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발리바르는 droit de cite를 한나 아렌트의 the right to have rights에 대한 비판적 가공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렌트의 개념이야말로 정치체를 가질 권리, 정치공동체에 속할 권리를 의미한다면, 발리바르의 droit de cite의 경우는 그 정치체에 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 그 장소에 권리들을 가지고 머물 권리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 cite를 정치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가 의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여기서는 그냥 씨테라고 놔두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아닌가 싶기도 하군요. 사람들이 cite, city라는 말 정도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balmas 2009-04-15 02:43   좋아요 0 | URL
예, 사실 droit de cite를 어떻게 옮길까 하는 것도 좀 고민거리 중 하난데, 최원 형 제안이 여러 가지로 유익한 것 같네요. 좀더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곧 도서출판 길에서 번역되어 나올 {Marx & sons}라는 데리다 책의 일부를 올려봅니다. 이 책은 원래 지난 1999년

미국에서 출간된 Ghostly Demarcations, ed. Michael Sprinker, Verso에 수록된 글의 불어 원본입니다. 이 후자의 책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나온 뒤 영미권의 마르크스주의자들 및 피에르 마슈레, 안토니오 네그리, 베르너 하마허 등과

같은 다른 나라의 이론가들이 {유령들}에 대해 쓴 글들을 묶은 책이며, 마지막에는 데리다가 이 글들에 대해

장문의 답변을 싣고 있죠. {Marx & sons}는 데리다의 답변의 불어 원본인 셈입니다. 도서출판 길에서 나올 책에는

데리다의 답변 외에도 마슈레와 네그리, 아마드의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올리는 이 글은 데리다의 답변 중에서 특히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문구를 해명하고 있는

부분이죠.(원서로는 pp. 70-82)  여기서 데리다는 이 문구와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 사이의 관계에 대해,

또 종교의 문제에 대해, 이데올로기에 대해 상세히 해명하고 있죠.

 

특히 이 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관심 있게 한번 읽어보시고

번역에 별 문제는 없는지 검토 좀 해주십사 하는 뜻에서 한 번 올려봅니다.

이 번역문은 당연히 아직 교열과 교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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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토피아적인 메시아성에 대한 이러한 사상 또한 벤야민의 전통에 진실로,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은 아니며, 제임슨과 하마허가 벤야민의 전통을 환기시킨 것은 분명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나의 화두propos를 이 전통으로 귀착시키거나 환원시키는 것은 아마도 약간 성급한 처사일 것이다(나 자신 역시 주에서 이러한 벤야민의 전통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주에서 공명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차이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공명하는 것 [...]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 왜냐하면 나는, 제임슨과 하마허가 생각하는 것처럼, 벤야민의 모티프와 내가 시도하려는 것 사이의 연속성이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해명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특히 충분하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재인지하고 동일화하려고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 벤야민의 화두가 다른 것과 동일화될 수 있을 만큼 그 자체로 충분히 명료하고 동일화 가능하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벤야민과 관련하여 존재할 수도 있는 이러한 간격을 내가 언급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어떤 독창성을 옹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예비적인 방식으로나마 적어도 몇 가지 점들을 정확히 해두기 위해서다.  

  1. 내가 보기에 유대 메시아주의에 대한 준거는 내가 준거로 삼은 벤야민의 텍스트에서 구성적인 것 같다. 그리고 명백히 삭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귀속은 그릇된 것일 수도 있으며, 나는 이 점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 경우,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메시아적인 힘”에 대한 벤야민의 암시를 모든 유대주의로부터 분리하기 위해서는, 또는 현재 통용되는 대중적인 의견만이 아니라 때로는 심지어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교리들에서도 군림하고 있는 현재 통용되는 일체의 메시아주의에 대한 모습이나 표상들로부터 어떤 유대적인 전통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거대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시도하고 있는 것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점에 관해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메시아적”이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활용은 결코 이러저러한 메시아주의적 전통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정확히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짧은 문구의 문자 그 자체를 강조해도 된다면, 내가 다음과 같이 쓴 것 역시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다음에 나오는 두 번째 테제는 메시아주의,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을 “약한 메시아적인 힘eine schwache messianische Kraft”(강조는 벤야민)이라고 부른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삽입구는 물론 나의 표현이지 벤야민의 표현이 아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격이나 번역 또는 등가어구가 아니라, 내가 표시해두고 싶은 지향 및 단절이다. 약화에서 무화(無化)로, “약한”에서 “없는”으로 나아가는 경향, 따라서 벤야민의 관념과 내가 제안하고 싶은 관념 사이에 존재 가능한 접근의 점근선, 단지 점근선이 문제인 것이다. “약한”과 “없는” 사이에는 어떤 도약, 아마도 무한한 도약이 존재할 것이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약화된 메시아주의, 감소된 힘을 지닌 메시아적인 기대가 아니다. 이는 내가 종교적인 전통에 준거하기보다는 어떤 가능성들에 준거하여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또 다른 구조, 실존의 구조이며, 나는 예컨대 언어행위이론이나 (후설과 하이데거의 이중 전통 속에 존재하는) 실존의 현상학이 이러한 가능성들에 대해 제시하는 분석을 지속하고 정교화하고 복잡화하면서도 또한 그러한 분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모든 언어 행위, 다른 모든 수행문 및 심지어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모든 전언어적인 경험을 조직하는 약속(하지만 또한 약속의 중심에 놓여 있는 위협)의 수행문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경험에 대한 분석이 문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위협하는 약속과 교차하는 기대의 지평에 대한 해명이 문제인데, 이러한 기대의 지평은 우리가 시간 및 사건, 도착하는 것, 도착하는 이, 타자와 맺는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기대 없는 어떤 기대, 말하자면 사건(기다려짐 없이 기다려지는)에 의해 그 지평이 파열된 어떤 기대, 곧 사건에 대한 기대, “도착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규정하는 예상을 넘어서고 놀라게 해야 하는 어떤 “도착하는 것/이”에 대한 기대가 문제가 된다. 미래 아닌 미래의 걸음[“미래 아닌 미래의 걸음”의 원어는 “pas de futur”다. 여기서 “pas”는 부정을 의미하는 부사이지만, 또한 “걸음”, “보폭”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pas de futur”는 “미래 아님”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미래의 걸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뒤에 나오는 문구들도 모두 이러한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pas”의 중의적인 용법은 모리스 블랑쇼에서 비롯한 것으로, 데리다는 이 점에 관해 상세히 분석한 바 있다. J. Derrida, “Pas”, in Parages, Galilée, 1986 참조―옮긴이], 장래 아닌 장래의 걸음, 다르게 다른 것 아닌 다르게 다른 것의 걸음.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사건 아닌 사건의 걸음, 혁명 아닌 혁명의 걸음. 정의 아닌 정의의 걸음. 이 두 개의 상이한 스타일의 사상(언어행위이론과 시간적이거나 역사적인 실존에 대한 존재-현상학)의 교차에서, 하지만 또한 그것들에 반대하여 내가 메시아적인 것에 대해 제안하는 해석은, 내가 보기에 벤야민의 해석과는 별로 닮지 않은 것 같다(사람들도 아마 동의할 것 같다). 메시아적인 것에 관한 나의 해석은 우리가 메시아주의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곧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과는 아무런 본질적인 관계도 없다. 메시아주의는 한편으로 역사적으로 규정된 계시―유대적인 계시이든 아니면 유대ㆍ기독교적인 계시이든 간에―에 대한 기억,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규정된 메시아의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그 구조의 순수성 자체에서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배제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 이러한 조건들을 거부해야 하기 때문도 아니고 필연적으로 메시아주의의 역사적인 모습들을 부정하거나 파괴해야 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그것들이 “메시아주의 없음”이라는 이 구조의 보편적이고 유사 초월론적인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모든 것은 “없는”이라는 이 짧은 단어의 “논리”와 이 단어에 대한 해석으로―비록 지나치는 김에 짧게 한 마디 해두는 것이긴 하지만―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점에 관해 다른 곳에서, 특히 블랑쇼와 관련하여, 또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길게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블랑쇼가 때때로 두 개의 동음이의어―거의 동의어에 가까운―사이에서, 두 개의 동음이의어, 그것들의 의미작용을 연결하는 유비의 중심 자체에서 그것들이 지닌 동의성이 중단되는 두 개의 동음이의어 사이에서(예컨대 죽음 없는 죽음, 관계 없는 관계 등과 같이) “없는”이라는 이 전치사를 활용하는 외견상 역설적인 용법을 알고 있다. 이 경우 “없는”은 반드시 부정성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만약 이 전치사가 어떤 추상/떼어놓음abstraction을 실행한다면, 이는 또한 추상, 있다의 추상abstraction du il y a, 있다는 것의 추상abstraction qu'il y a이 낳는 필연적인 효과를 해명하기 위해서다. 나는 처음에 내가 이 모든 “답변들”(물론 답변/해답 없는 답변들)을 “없는”에 대한 분석 및 이 저자들 대부분이 “없는”을 사용하는 용법에 대한 분석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 단어를 나에게 맞서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태연하게 확신하고 있다(늘 의기양양한 이글턴은 분명히 그의 글의 제목[「마르크스주의 없는 마르크스주의」―옮긴이]에서부터 어떤 “마르크스주의 없는 마르크스주의”(!)를 고발함으로써 군중의 갈채와 조소le rire 또는 분노l'ire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 그렇고 말고, 정말로 그렇다! 나는 기꺼이 이 점을 확증하고 또 서명해둔다). 다른 이들의 경우―예컨대 마슈레가 정당하게 그렇게 하듯이―이번에는 호의적인 방식으로, 지적이고 차분한 방식으로 “탈물질화된 마르크스”에 대해 우려한다. “사회 계급 없는, 노동 착취 없는, 잉여가치 없는 마르크스 [...]”(강조는 내가 했다) 그가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일리가 있다. 이러한 마르크스는 “그 자신의 환영 이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유령”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것은 무보다 더 못한 것이라고, 아무런 물질성도 없고 아무런 신체도 없는 순수한 가상적인 외양일 뿐이며, 또 진정한, 올바른 마르크스주의자는 모든 “유령” 및 모든 유령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훨씬 더 경솔한 짓이다. 이는 다시 한 번 이 책에 실린 나의 독자들 중 몇몇 사람들이 지극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간에 몰아내고 푸닥거리하고 부정하고 무시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유령의 논리로 되돌아가게 된다. 만약 환영이 환영에 불과하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님일 뿐이라면, 그렇다면 내 책은 당연히 아무런 주목할 만한 가치도 없을 것이다(이는 결코 배제해서는 안 될 가능성이며, 나 자신은 누구보다 더 이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앞서 말한 유령성과 무언가 공통점이 있는―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모든 가능성들(이데올로기, 물신숭배, 가치(교환가치나 사용가치), 언어 및 애도 작업이 생산하는 모든 것, 부정성, 이상화, 추상, 가상화virtualisation 등)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계급 없는”에 대한 암시를 인용할 순간에 이르렀기 때문에, 역시 “계급 없는” 인터내셔널에 대해 우려했고, “결집 없이, 당과 조국 없이 ... 공동 시민권 없이,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인 소속 없이”라는 문구에서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인 소속 없이” 부분만 강조하고 있는 루이스에게 내가 이미 제시했던 답변을 한 마디로 환기해두겠다. 문제는 계급적인 소속을 제거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시민권이나 당을 제거하거나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계급이나 당 또는 시민권을 본질적인 토대나 지주로 삼고 있지 않은 어떤 인터내셔널에 대한 호소다. 이는 계급이나 시민권 또는 당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규정된 맥락에 따라 가능한 한 엄밀하게 이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더욱이 루이스가 “계급 없는”이라는 규정에 대해 우려한다면, 왜 그는 “시민권 없는”에 대해서는 우려하지 않는가? 이는 시민권에 대한 준거 “없이” 인터내셔널이(심지어 예전의 인터내셔널의 경우에도) 실제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없는”이라는 것은 이 점에 관해 부정적인 것은 전혀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러한 인터내셔널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각각의 국가 내에서 시민들이기를 그치게 되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고유한 시민권을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당과 계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으며, 심지어 “당”과 “계급”이 더 이상 주요한 준거 및 결정적인 패러다임이 되지 못하는 경우에도(나는 오늘날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 점에서 나는 루이스 및 몇몇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하지만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니다―과 갈라서게 된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낡은 수사법에 따라 익히 비난하곤 하는 “제 3의 길”과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되면 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자신들의 익숙한 광경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자신이 어떤 우파의 적수, “계급의 적”과 맞서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이 어떤 친숙한 것chose familière과 관계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또는 그렇다고 믿는 척하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루이스가 찬양하는 아마드는 나의 화두를 정의하려고 애쓴다. 알다시피 그건 바로 “제 3의 길”이다! 그들이 진짜로 좋아하는 것은 가족, 인정된 계보, 가족적인 분위기다. 그들을 안도하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친숙한 것을 재인지하는 것이며, 스스로 안도하면서 자신을 재인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누가 누구고 누가 어떤 가문에 속하고, 어떤 혈통에 속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친숙한 영역 안에 들어서게 된다. 곧 제 3의 길로서 해체가 그것인데, 이는 확실히 우파와는 대립하지만, [데리다가] 앞서 말했듯이,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어가 역사적으로 의미했던 “모든 것”과도 대립한다.”         

  메시아주의의 모습들은 (다소 서둘러 논의를 진행하고 모든 코드들을 얼마간 혼융해서 교차시켜보자면) “종교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또는 물신화하는 형성체들로서 해체되어야 하는 반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해체 불가능한 이유는, 모든 해체의 운동 자체가 이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확실성의 토대로서, (마슈레의 성급한 해석에 따른다면) 코기토의 확고한 지반으로서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양상에 따라 전제되는 것이다.

  “유사 초월론적인” 이 전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일체의 메시아주의를 배제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보편적인 구조(어떤 다른 장래에 대한, 타자 일반의 장래에 대한 기다림 없는 기다림, 역사의 통상적인 경로를 차단하게 될 어떤 혁명적인 정의의 약속 등)를 기술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 왜 계속 메시아적인 것에 준거하는 것인가? 왜 메시아적인 것 또는 메시아라는 이 이름이 필요한가? 나는 가장 커다란 난점이 도사리고 있는 세 번째 논점에서 이를 다시 다루어볼 생각이다.

  2. 왜냐하면 나는 벤야민이 이 “약한 메시아적 힘”(eine schwache messianische Kraft, “weak messianic power”)의 특권화된 순간들을, 규정되어 있는 정치적ㆍ역사적 국면들 및 심지어 위기들과 연결시키고 있는지 자문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날짜 및 정치적 맥락(2차 대전 초기에 이루어진 독일과 소련 간의 [상호 불가침―옮긴이] 조약)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가설은 확언하기에는 충분치 않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벤야민에게는 결정적인 순간들(혁명 이전이나 이후의), 희망이나 절망의 순간들, 메시아주의의 모사물이 알리바이로 사용될 만한 궁지의 순간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약한”이라는 낯선 형용사가 붙는다. 내가 말하는 메시아성을 하나의 힘(이는 또한 하나의 약함 또는 일종의 절대적 무기력이기도 하다)으로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하나의 힘으로, 어떤 욕망의 운동으로, 예견 불가능한 어떤 장래의(심지어 다시 도래할 어떤 과거의) 거역할 수 없는 이끎 내지 도약이나 긍정으로, 비현재의 경험, 살아 있는/생생한 현재안의 살아 있는/생생한 비현재의(유령적인 것의) 경험으로, 경계에서 살아가기sur-vivant(모든 현시/현존화 내지 재현 가능성 등을 넘어서 있는 절대적인 과거 내지 절대적인 장래)의 경험으로 정의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이러한 “힘”에 대해 강하거나 약하다고, 다소간 강하거나 약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내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라고 부르는 보편적이고 유사초월론적인 구조는 역사(정치적 역사이든 일반적인 역사이든 간에)의 어떤 특수한 순간과도, 어떤 특수한 문화(아브라함적인 문화이든 아니든 간에)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아성은 어떤 메시아주의를 위한 알리바이로도 사용되지 않으며 어떤 메시아주의도 모방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주의도 확증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

  3. 이 도식을 좀더 복잡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떤 이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논거로 반론을 펼지도 모르겠는데, 나 역시 가상적으로 나 자신에게 이런 반론을 제기해본 적이 있다. 당신은 “메시아적인 것”이 모든 형태의 “메시아주의”와 독립해 있다(“메시아주의 없는”)고 말하고 있는데, 왜 메시아적인 것을 명명하지 않고서도, 심지어 어떤 메시아, 그처럼 명백하게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 하나의 “계시”에 결부되어 있는 [성경의―옮긴이] 메시아의 모습을 암시하지 않은 가운데 그러한 보편적인 구조를 기술하지 못하는가? 이러한 반론이 정당한 것이고 나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겨버릴 수 없을 만큼 매우 자명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제시해야 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제시해야 할 답변을 여기 적어보겠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전략적인 답변으로서,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답변의 계산은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없다.

  a. 한편으로, (메시아적이라는) 이 단어는 내가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임의적이거나 외재적인 것 같다. 이 단어는 수사법이나 교육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내가 메시아성이라고 부르는 것과 닮은 것(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거나 동일시되지는 않고서라고 곧바로 덧붙여 두겠다)을 친숙한 문화적 환경을 참조함으로써 좀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내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이 언젠가 이해가 될 맥락에서는―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전통적인 메시아주의나 “메시아”에 대한 암시 없이도, 심지어 “없는”이라는 말이 없이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낡은 단어들 아래서 모든 이름이 변화했던 게 될 것이다.  

  b.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처럼 임의적인 선택 및 이러한 교육학적 유용성 아래 아마도 좀더 환원 불가능한 어떤 애매성이 숨어 있을 것 같다. (보편적인 구조로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 일체의 역사적이고 규정된 메시아주의의 모습에 앞서고 또 그것을 조건 짓는 것인지(이 경우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모든 메시아주의에서 독립적이고 그것에 이질적인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이름 자체는 부수적인 것이 될 것이다), 아니면 이러한 독립성에 대한 생각 자체가 메시아를 명명하고 그것에게 규정된 모습을 부여하는 “성서적인” 사건들을 통해 비로소 그 자체로 생산되거나 계시될 수 있었고, 또 가능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인지, 이 양자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c. 이 마지막 가설에서(내가 이런 식으로 제기된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 가설은 열려 있고 유예된 것으로 남겨놓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이 제기된 채 남아 있게 하기 위해 당분간 “메시아적”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유지하겠다)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준거는 교육학적이고 잠정적인 도구로 취급하기는 훨씬 어렵다. 비록 그것이 “메시아주의 없는” 것으로 엄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 적어도 네 가지 이유 때문인데, 이것들을 생략적이고 경제적이고 건조한 방식으로 제시해보겠다.

  1. 첫째,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사건(및 그것이 지닌 모든 구성소와 전제, 결과)이 유럽적이고 유대ㆍ기독교적인 문화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경험적이고 한정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유럽적이고 유대ㆍ기독교적인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함축하는 모든 쟁점들을, 마르크스로부터 물려받은 담론의 논리와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이러한 유럽적ㆍ성서적 계보에 낯선 사회들이나 문화들에 이르기까지 측정해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전체는 “메시아”가 무언가를 의미하는 문화에서 출현했으며, 이 문화는 “국지적인” 문화 또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손쉽게 구획될 수 있는 그런 문화로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침전 작용을 다시 드러내는 일은 결코 무익하지 않으며, 이것이 그 침전 작용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정치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2. 둘째,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문화는 그 언어의 문자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내가 다른 곳에서 “라틴적인 세계화mondialatinisation”1)라고 불렀던 현상에 참여했던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메시아에 대한  일체의 준거를 말소하는 것은 어려울(그리고 그럴 수 있다 해도 그 경우에는 너무 추상적일) 것이다. 마르크스에 관한 내 저서는―나의 언급이 오만하다면 용서해주기 바란다―마르크스로 한정되지 않는 어떤 [이론적―옮긴이] 장치dispositif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3. 내가 보기에는 종교에 대한, 각각의 규정된 종교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이러한 비판이 아무리 필연적이거나 근원적이라 할지라도―믿음 일반을 침해해서는 안 되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나는 다른 곳, 특히 「믿음과 지식」에서 약속의 말에 담겨 있는 신앙, 신용, 믿음의 경험(모든 지식 밑 모든 “진술적constative” 가능성을 넘어)은 사회적 유대나 타자와의 관계 일반에, 모든 지식 및 모든 정치적 행위, 특히 모든 혁명에 함축되어 있는 명령, 약속, 수행성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시도한 바 있다. 과학적이거나 정치적 과제로 종교 비판 자체는 이러한 “믿음”에 호소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믿음에 대한 모든 준거를 말소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표현은 믿음과 종교 사이의 이러한 차이를 번역하는 데, 적어도 잠정적으로나마, 적합한 것 같았다. 

  4.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물음”이라는 이 민감한 장소에 이르게 된다.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파괴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생성되는 데서 종교가 수행하는 표본적인 역할, 곧 대체 불가능한 역할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긴급성에 대해, 곧 오늘날 지정학적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종교의 물음을 다시 사고하게 만드는 필연성(이 점에 관해 나는 제임슨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에 대해서까지 말할 것은 없고, 여기서는 내가 “메시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 및 유령적인 논리에 준거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해당 지면들을 참조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특히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두 가지 형태의 “환원 불가능성”, 곧 한편으로는 “유령의 환원할 수 없는 종별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구성에서 종교적 모델의 환원 불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답변을 준비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다. “종교적 세계에 대한 준거만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자율성을 ... 설명해 줄 수 있다.” 또는 좀더 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참조할 수 있다. “종교적인 것은 여느 이데올로기적인 현상이나 여느 환영의 생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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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사 2009-02-0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이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나 보네요. 특히 번역올려주신 부분은 많이 궁금하던 부분인데, 이렇게 먼저 읽을 수 있게 공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balmas 2009-02-05 01:08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됐다니 저도 기쁩니다.^^ 이 책은 아마 다음달 안에는 출간될 것 같습니다.
 

양윤선. 최원 님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글의 원래 출처는 아래 주소입니다.

 
 내용을 보니까, 발리바르가 최근 몇 년 간 유럽에 관해 작업했던 내용을 테제 형식으로 정리한 글이네요.
 
세계화 시대 좌파의 정치적 실천을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좋은 자료가 될 듯합니다.
 
한 번씩 읽어보시길 ... 누가 한번 번역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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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LEA FOR AN ALTERGLOBALIZING EUROPE: Theses

 

                                             By Etienne Balibar    

                                                        Translation by Anna Preger  

 

1. Now, more than ever before, politics, as Max Weber put it, can only be “global”. This does not mean that there is only one global politics possible: on the contrary there is necessarily a choice between several politics, defined by their objectives, their means, their conditions, their obstacles, their “subjects” or “wills”, the risks they involve. The field of politics is that of the alternative. If we posit that today all the possibilities fall within one trend towards “globalization”, the question then becomes: what are the alternatives to its dominant forms? Can Europe be an “alterglobalizing” force, and how?

 

2. To claim that politics can only be global does not equate to saying that politics is not concerned with the condition and the problems of “people” where they live, where their life history has placed them:  on the contrary, it equates to asserting that local citizenship has as its condition an active global citizenship. Every local political choice of economic, social, cultural, institutional orientation involves a “cosmopolitical” choice, and vice-versa.

 

3. Europe’s place in the world today – in spite of a few vague diplomatic impulses – is that of a dead dog that follows the water’s current, devoid of any initiative of its own. If not – given its economic and cultural “weight” – that of a dead elephant that goes with the flow. Examples abound: from the reform of the United Nations to the enforcement of the Tokyo Protocol, from the regulation of international migration to the resolution of Near and Middle Eastern crises or the deployment of back-up troops to the wars initiated by the US. Consequently, Europe lacks the means of resolving its own “internal” problems, including institutional ones. 

4. That Europe has no global politics entails that there is no – or hardly any – global politics emerging from the European nations, despite the desire of some to “keep their rank” of former great powers or to be a spanner in the works. European nations thus have no – or hardly any – home politics presenting real alternatives. National elections function in this respect as a trompe-l’œil, but one which fails to dupe everyone: hence depoliticization. Global issues therefore re-emerge in a purely ideological form: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like.  

5. The causes of this situation are to be found within the evolution of historically inherited power relations that have been reinforced by the current state of affairs. But this evolution – that confers either a purely reactive or a simply adaptive function upon the “European construction” – cannot stand as a total explanation. We must supplement this acknowledgement with another one: there is a disastrous collective inability, amongst the majority of the European population, to imagine alternative policies and forms of politics, and this cannot be dissociated from the uncertainty looming over the political identity of Europe. The failure of the Constitution treaty is not the source but one of the symptoms of this uncertainty.

6. France has a particular responsibility in this situation: not only as a “founding country” but as a nation that is forever projecting an illusion of leadership, grounded in the myth of its exceptionality (the “country of human rights”), in what remains of its colonial domination or in the spectre of Gaullism and its “independent politics”, whereas in effect France contents itself with establishing compromises between the interests of the dominant or emerging powers. And how could it be otherwise?

7. The construction of Europe as a new kind of federation began and developed during previous stages of globalization and international relations whose features have now undergone a total shake-up. This construction is an (uneven) asset, but not a necessity: its “expansiveness” must not mislead us in this regard. The USSR may have been dismantled 80 years after its formation due to its rigidity and its system of state control, but the corollary of this is not that, 50 years on, by virtue of its flexibility and liberalism, there is no risk of an EU break-up. However, such a break-up would not mean going back to square one: some things are irreversible. Thus the European construction will either establish new foundations and new objectives, or it will collapse taking along with it, for the foreseeable future, any chance of collective political action in this part of the world.

 

8. The forces – “right-“ as well as “left-wing” – that are opposed to re-launching the European construction, are both inside each country (as demonstrated by the “no” voters in France and the Netherlands who would have been joined by many others had the ratification campaign been pursued) and beyond Europe (in particular in the United States). But the determining factor is what I shall call “the contradiction within the European people itself”, with all its social and cultural dimensions. This is what needs to be tackled through discussion and mobilization: operating, initially, at one’s own level, across the borders. To this end, if not parties, then we at least need movements, networks, trans-European initiatives.

 

9. European identity – with regards to the legacy inscribed in the institutions, the geography, the culture that it must maintain – is faced with two problems whose solution will only be reached at the cost of conflicts and errors. On the one hand it must overcome its East-West divide, which shifts position at different points in time, is associated with antagonisms between “regimes” and “systems” (not without its paradoxes, for example when “Westernism” spreads to the East following “revolutions” or “counter-revolutions”), but never disappears. On the other hand it must find a balance between a “closed” Europe (therefore restricted, but within which limits?) that one may wish to homogenize, and an “open” Europe (not so much a Great Europe than a Europe of borders, acknowledging its constitutive interpenetration with vast Euro-Atlantic, Euro-Asian, Euro-Mediterranean, Euro-African spaces). This is where the “questions” now pending lie: the Turkish question, the Russian question, the British question… In order to go on, Europe must invent a variable geometry, a form of state and administration without precedent in history.

 

10. Facing the decline of the American hegemony in the world (which is relative, but irreversible and precipitated by the “neo-conservative” attempt to re-establish it by force), Europe must choose between two strategies, which will gradually entail consequences in every area of political and social life: either attempting to form one of the “power blocs” (Grossraum) that will compete with one another for supremacy over a new global configuration, or forming one of the “mediations” that will attempt to give birth to a new economic and political order, more egalitarian and more decentralized, likely to effectively curtail conflicts, to institute redistribution mechanisms, to keep claims to hegemony in check. The first way is doomed to failure (even at the cost of an evolution towards totalitarianism, that might increase insecurity, terrorism being one of its aspects). The second is improbable without a considerable degree of collective conscience and political will, rallying public opinion across the continent. What is certain is that the terms of the alternative cannot be conflated within a rhetoric of compromises between national and communitarian bureaucracies.

 

11. Between the “North”, which most of Europe pertains to, and the “South” (whose geography, economy and degree of state integration are increasingly changing), there is not only an interdependence but a genuine reciprocity of possibilities of development (or “co-development”). It is important to recognize this and turn it into a political project. The fact that Europe was the starting-point for the “Westernization of the world”, in ways that were, to varying degrees, marked by domination but which today are universally challenged, represents in this respect both an obstacle and an opportunity to be seized: these are the two sides of the “post-colony”. Only a project such as this would allow for a balance to be found between a Europe focused on law-and-order, violently repressing the migrations it itself provokes, and a Europe without borders, open to “unrestrained” migration (that is to say, migrations entirely ordered by the market of human instruments). Only this would allow for conflicts of interests and culture between “old” and “new”, “legal’ and “illegal”, “communitarian” and “extra-communitarian” Europeans to be addressed. It is thus not an administrative but an existential priority. 

12. Against the backdrop of the uninterrupted Middle Eastern crisis that is in the process of becoming a regional war, the war in Lebanon highlighted the urgency of creating a political space encompassing all the countries surrounding the Mediterranean – only such a space can offer an alternative to the “clash of civilizations” in this highly sensitive and crucial region. As for the Israeli-Palestinian question that is its epicentre, the extreme anti-Zionist discourse should not be condoned; rather, concertedly and without delay Israeli expansion should be stopped and the rights of the Palestinian people recognized – rights that are officially championed by European nations. More generally, this hotbed of wars and ethnic-religious hatred should be turned into a site of cooperation and institutionalized negotiation, with repercussions across the globe. It is, for obvious reasons, Europe that should take the initiative. France, with its shared and troubled history with the Maghreb, has a particular part to play here. 

 

13. Crucial to alterglobalization are the following legal and political projects:

    • The democratic regulation of migration flows, therefore the reform regarding the right to mobility and residence, still marked by national interests at the expense of reciprocity;
    • “Collective security” and, correlatively, the penal responsibility of states and individuals regarding supranational affairs, therefore the reform of the UN, still held back by its support of decisions inherited from the Second World War and the logic of power;
    • The reinforcement of the guarantees of individual freedom, minority rights and human rights, therefore the practical and legal conditions of humanitarian intervention.
    • The merging of the instances of economic negotiation and regulation, of those controlling tax evasion and those concerning social rights, so as to sketch out on a global scale a Keynesian model now dismantled on a national level;
    • Finally, the prioritization of ecological risks over the other factors of insecurity rehearsed by Kofi Annan in his Millennium speech.

This list is not a closed one, but it demonstrates how diverse and interrelated the elements now forming, on a global scale, the substance of real politics, are.

 

 14. The above theses are merely propositions to orient and open a debate. Rather than presenting solutions, they are attempts to explicate contradictions that cannot be evaded. It is now a question of establishing the touchstones of rigour and integrity for a political debate in Europe today. And this debate will enable us, hopefully, to then supplement, clarify and modify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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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20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이것도 인쇄해서 읽어봐야겠네요 ^^ ㅎ

balmas 2007-02-20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셈~ :-)

에로이카 2007-02-20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셨어요? 저는 발리바르의 최근 동향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요... 읽다가 그냥 요즘 드는 생각이랑 살짝 겹치는 부분이 있어 질문 좀 하려구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모든 권리(right)는 그 권리를 제정하고 집행하는 권위(authority)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인권에 상응하는 (곧 그것을 규정하고 집행하는) 권위가 있나요? 주권국가의 국민(citizen)은 특정 영토 내에서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그 인권을 보호받겠지만, 그렇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어떤 권위를 (마치 천부인권론 같은) 상정해야 하는건가요? 아니면 권위 없는 특수한 권리로서 인권, 인권은 권위가 없기 때문에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주장을해야 하나요?... 질문이 둘다 같은건가.. 모르겠습니다..

발리바르의 열세번째 테제를 보면서 든 생각인데요.... EU처럼 초국가적 권위가 상정이 될 경우 이민에 대한 "민주적" 조정을 얘기할 수도 있을 지 모르겠으나, 그런 권위가 없다면... 생각이 잘 정리가 안 되긴 하네요.. 질문이 산만해서 죄송합니다... 꾸벅..

balmas 2007-02-20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오랜만이십니다. :-)
좋은 질문을 주셨네요. 사실 이 질문은 제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발리바르의 [Nous, citoyens'Europe?]--영어로 한다면, [We, the People of Europe?]--이라는 책(2001년 출간)의 주요 주제 중 하나죠. (이 책은 최근 한 10여년 간의 발리바르의 작업이 집약되어 있는 중요한 저서인데, 저의 게으름 때문에 아직 국내에서는 빛을 못보고 있습니다. 출판사에는 이번 달 안으로 원고를 넘겨주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한 2달 정도는 더 걸려야 일이 다 끝날 듯 ... -_-;;;) 그래서 저도 관심이 많은 문제이고, 마침 에로이카님이 질문을 주셨으니, 질문에 답변할 겸 생각을 정리해볼 겸 페이퍼를 하나 써보고 싶네요. :-)
그런데 제가 지금 글을 하나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라서 며칠 동안은 페이퍼를 쓸 만한 여유가 없네요. 글이 마무리되는 대로 한번 페이퍼를 올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

balmas 2007-02-20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발리바르의 글이 두어 편 번역되어 있으니까 한번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발리바르, [인권과 시민권], 윤소영 옮김,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발리바르, [잔혹성의 지형학에 관한 개요 : 세계적 폭력시대의 시민성과 시빌리티], {사회운동} 2004년 6월호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058)
발리바르, [인간 시민권의 철학은 가능한가?], {사회운동} 2006년 11월호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624)

Chopin 2007-02-20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이에여~ㅠㅜ
그리고 이 할아버지는 누구?

에로이카 2007-02-21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꽁으로 먹을라고 했나 보네요.. 페이퍼까지 쓰신다니 황송해서... 헤헤... 가르쳐주신 글들 짬짬이 읽으면서 답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바쁘신데 서두르시지는 마십시오.

아, 그리고 페이퍼 쓰시는 김에 이 문제도 살짝 건드려주셨으면 하는 거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저는 글로벌 시민(사회)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고 (읽었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식의 용법이 가능하려면 국가/시민사회 대당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사회를 새로이 정의하거나, 혹은 (하트 / 네그리 식대로) 일국적 수준의 국가와 같이 지구적 수준에서 제국을 상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여기에 EU 같은 초국적 정치체 (constitution + authority)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논의가 달라질 것 같긴 합니다만, 발리바르는, 또 발마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제가 그냥 줏어들은 풍월을 읊은 거라 말이 안되는 질문일 지도 모릅니다만... 어여삐 여기시고, 쉽게 잘 설명해주세요.. ^^ 그럼.. 건강하십시오..

balmas 2007-02-21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팽님/ ㅎㅎㅎ ^^;; 제 서재 이미지의 인물은 바로 이 글의 필자인 발리바르랍니다. :-)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고, 지난 번 이미지의 주인공이었던 알튀세르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에로이카님/ ㅎㅎ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허접한 페이퍼가 될 듯 ... ^^;
그나저나 이 놈의 글이 빨리 다 끝나야 하는데 ... -_-+
 

[월간 사회운동] 12월호에서 퍼옵니다.

아래 주소로 가시면 다른 기사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653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을 향하여

한나 아렌트와 동일성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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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호니히 | 노스웨스턴 대학
역주: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이후 정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렌트는 그리 편치 않은 사이였다. 그 이유로는,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한 데 묶어 ‘전체주의’로 평가했다는 점,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을 체계적으로 평가절하했다는 점, 그리고 『혁명론』에서 사회 혁명이자 민중 혁명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혁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우리로서는 아렌트가 제기한 쟁점 중 많은 부분을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중 아렌트의 ‘전체주의’ 개념에 대한 체계적 비판은, Domenico Losurdo, Towards a Critique of the Category of Totalitarianism, Historical Materialism, volume 12:2, 2004를 참고하라.] 게다가 아렌트적 문제설정, 발리바르 식의 구분법을 사용하자면 ‘해방의 정치’를 주목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변혁의 정치’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대체물로 여긴다는 점도 우리가 볼 때 문제가 많은 접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가 정치 및 해방에 관해 매우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 그녀를 읽는 호니히의 작업은, 아렌트의 탁월한 통찰을 남김없이 취하면서도, 그 통찰에 따라 아렌트를 내부에서 ‘해체’함으로써 변혁의 정치와 양립가능하게끔 아렌트를 개조하는 비판적 독해의 전범을 보여 준다. 특히 이 논문에서 호니히는 (어떤) 페미니즘에 입각해서 아렌트를, (어떤) 아렌트에 따라 페미니즘을 각각 개조하는데, 우리는 특히 전자와 같은 접근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는 페미니즘이 보편적 이념 아래 종속된 특수한 분야가 아니라, 보편적 이념의 난점을 극복하고 그것을 한층 보편화하는 데 필수적일뿐더러 대체불가능한 지적․정치적 자원이라는 점을 실천적으로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본래 Feminists Theorize the Political, ed. Judith Butler and Joan Scott (New York: Routledge, 1992)에 수록되었다가, 갈등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후기를 포함하기 위해 상당히 개정되고 확장되어, Feminist interpretations of Hannah Arendt(Re-Reading the Canon), ed. Bonnie Honig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5)에 재수록되었다. 이 번역본은 재수록본을 옮긴 것이다.


페미니즘 정치의 자원을 넓히려고 애쓰는 사람이 한나 아렌트라는 인물을 주목하는 것은 뜻밖이거나 심지어 거북스런 일이다. 엄격한 공/사 구별로 악명 높은 아렌트는, 그녀 식 정치의 독특한(sui generis) 성격과 공적 영역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 정의와 성별 쟁점들의 정치화를 금지한다. 이 같은 종류의 업무는 정치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화한 것처럼 전통적인 가사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아렌트는 자신이 “여성 문제”라고 부른 것들을 정치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1)
그렇다면 왜 아렌트를 주목한단 말인가? 내가 아렌트를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성별 이론가라거나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페미니즘 정치에 크게 이로울 수 있을 갈등주의적(agonistic)[역주: 'agon'은 본래 고대 그리스에서 운동․음악․극 따위의 각종 경연이 벌어지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서, ‘갈등’이나 ‘분투’, ‘논쟁’, ‘고뇌’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 고희극(古喜劇)에서 주요 인물들이 서로 대립되는 주장으로 갈등하고 언쟁하는 부분을 의미하기도 한다.]이고 수행적인 정치의 이론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렌트를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정치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포함시키는 것 때문일 뿐더러, 그녀가 정치에서 배제시키는 것(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때문이기도 하다. 이 같은 배제에서 활용되는 용어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견고한 구별을 다루는 페미니즘 정치에게 유익하다. 아렌트가 공/사 구별에 집요하게 기대기는 하나, 그것을 정치화할 수 있는 자원들은 정치와 행위(action)에 관한 그녀의 설명 안에 제시되어 있다. 아렌트 정치의 갈등주의적이고 수행적인 충동에 기반하여 아렌트를 읽으려면, 바로 그 정치를 위해, 증대(augmentation)와 수정(amendment)이 미치지 않는 공/사 구별의 선험적 결정에 저항해야만 한다. (증대와 수정의 가능성을 영속시키려는) 이 저항 자체가 아렌트가 설명하는 정치 및 정치적 행위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나는 (반드시 저항이라고 할 수는 없는) 저항력(resistibility)이 아렌트 정치의 필수불가결한 조건(sine qua non)이라는 점을 논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 정치 영역에서 신체를 배제할 때 아렌트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간략히 검토할 것인데, 우선 아렌트가 이론화하는 바와 같은 신체의 일의적․전제적․불가항력적(irresistible) 성격에 초점을 맞춘 다음, 수행적 화행(話行, speech-acts)을 통해 정치적으로 쟁취된 동일성(identity)―아렌트는 이를 [높이] 평가한다―을 획득하는 행위하는 자아(acting self)의 다중성(multiplicity)을 조명할 것이다. 아렌트의 설명에서 동일성은 수행적 산물이지 행위의 본질이나 표현적 조건이 아니다. 아렌트 작업의 이 같은 특성이 작업 배치의 토대가 되는 공/사 구별과 결합되면서, 아렌트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판자들이 그녀가 여성 및 여성들의 쟁점에 호의적이지 않은 정치를 이론화했다고 비난할 여지를 주었다.2) 하지만 내가 볼 때 페미니즘 정치에 대한 아렌트의 가치는 그녀가 표현적이고 동일성에 기반을 둔 정치를 기각한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문제는 아렌트의 이러한 기각이, 성별과 같은 사적 영역의 동일성들을 잠재적인 정치화의 장소들로 대하는 것에 대한 거부에 입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아렌트가 그녀의 유대(Jewish) 동일성과 그 동일성에 동반되는 책임의 문제를 놓고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과 벌인 유명한 논쟁에 주목하는데, 이는 그녀가 (이른바) 사적 동일성들을 “전(前)정치적” 영역에 가두는 데 실천적으로 실패했음을 예증하며, 동일성의 정치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루되기 때문에 더욱 고무적인 저항과 재의미화(resignification)의 대안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가리킨다.
나의 결론은, 성과 성별을 이원적이고 구속적인 동일성의 범주로 구축하고 정치 공간을 공적․사적 영역으로 이원적으로 분할하려는 지배적 흐름에 (수행적이고 갈등주의적으로) 대항하려는 페미니즘에게 아렌트의 정치가 유망한 모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아렌트 자신은 이처럼 그녀의 작업을 급진화하려는 것에 틀림없이 반대했을 테지만, 나는 이 같은 시도가 그녀의 (정초적) 문헌들을 증대시키는 것인 만큼, 그녀의 정치를 매우 잘 따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치적 행위와 저항력

아렌트가 정치와 행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가장 간명하면서도 예리하게 논하는 것은 『미국 독립 선언』 독해에서다. 아렌트 설명의 모든 기본 요소들이 여기 다 나와 있다. 독립 선언은 정치적 행위이자 권력 행위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일련의 제도를 정초하고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구성/입헌(constitute)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낳”고, “새로운 관계를 확립하며 새로운 현실을 창출한다.”3) 그것이 정치적 행위의 “완벽한” 사례인 까닭은 그 본질이 “‘행위를 옹호하는 논증’에 있다기보다는” 말 속에서 출현하는 행위(an action that appears in words)에 있기 때문이다.4) 이는 수행적 언표이자 화행으로서, 공적 영역의 대등한 이들(equals)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 앞에서 수행된다.
“우리는 이 같은 진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한다”(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는 유명한 문구에 초점을 맞추면서 아렌트는, 새로운 정체(政體)의 권력과 권위가 자명한 진리에 대한 진술적/확인적(constative) 지시 관계(reference)가 아니라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5) 극적인 동시에 비지시적인 수행문은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낳는다. 그것은 “우리”를 구성한다. 이 화행은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언표(되고 반복)되는 순간(들)에 행위자들을, 말하자면 탄생시킨다.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과는 대조적으로, 자명한 진리에 대한 진술적 지시 관계는 자유로운 합류가 아니라 강박과 필연에 대한 고립된 묵종(黙從)을 표현한다. 자명한 진리에는 “동의가 필요치 않다.” 그것은 “논쟁적 증명이나 정치적 설득 없이 강제한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전제 권력’만큼 강제적이다.” 진술문은 “불가항력적”이다. 그것들이 “우리에 의해 견지(held)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에 의해 견지된다.”(OR 192~93). 자유로운 정치적 행위를 위해 아렌트가 독립 선언과 그 정초에서 숙정하는 것은 그 폭력적이고 진술적인 순간들, 신과 자명한 진리, 그리고 자연법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정박점이다. 이 같은 함(doing) 배후에는 어떤 “~임”(being)도 존재하지 않는다. 함, 수행이 전부다.6)
아렌트의 설명에 따르면 새롭게 정초된 공화국 권위의 진정한 원천은 진술적 순간이 아니라 수행적 순간이고, 고립된 묵종이 아니라 공동 행위(action in concert)이며, 자명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는 생각한다”이다.7) 그리고 공화국 권위의 진정한 원천은 이제부터 그 유지 방식, 재정초와 재구성/입헌에 대한 개방성이 될 것이다. “따라서 헌법의 수정은 미국 공화국의 기원적 정초를 증대하고 확장한다. 물론 미국 헌법의 권위 자체는 수정되고 증대될 수 있는 그 본래적 역량에 있다.”(OR 202, 강조는 필자) 헌법적 수정과 증대, 재정초에 이처럼 우호적인 성향을 지닌 정체는 신과 자연법, 그리고 자명한 진리라는 정초적 정박점을 반드시 기각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알다시피 신은 증대를 허용하지 않고, 또는 신은 증대될 필요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 자연법, 자명한 진리 이 세 가지 모두는 불가항력적이고 완전하다. 이 문장(紋章)들은 권력을 굳게 만든다. 이들이 수행문을 진술문으로 사물화(事物化, reification)하면 재정초와 증대가능성이 감소함으로써 정치의 공간이 폐쇄되고 정체의 권위가 박탈된다. 저항력, 개방성, 창조성, 그리고 미완성성은 이 정치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아렌트가 공적 영역에 신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고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단순하고 일의적인 신체

인간 신체는 한나 아렌트에게 있어 순수 과정의 결정과 필연성, 불가항력, 모방성의 주문(主文)이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 깨닫게 되는 가장 강력한 필연은 생명 과정으로, 이는 우리의 신체에 고루 미치고 신체를 항상적 변화 상태로 유지하거니와, 그 운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과 독립하여 자동으로 진행되고 불가항력적이다 ― 즉 압도적으로 집요하다.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적어지고 우리의 능동성이 낮아질수록 이 생물학적 과정이 더욱 강력하게 나서면서 그 본래적 필연을 우리에게 강제하게 되고, 모든 인간 역사의 기저에 깔린 단순한 발생의 운명적인 자동 운동으로 우리를 위압한다. (OR 59;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공적 영역의 행위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적 영역에서 노동하고 일하며 (무엇보다) 궁핍화된 존재들을 괴롭히는 순수 과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적어도 『혁명론』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것은 이런 식인데, 여기서 그녀는 프랑스 혁명의 막대한 실패를 기록하면서 그 책임을 “신체의 필요에 떠밀린 빈민들이 무대로 난입하여” “사회 문제”를 정치적 고려의 중심으로 만듦으로써 정치 공간을 실질적으로 폐쇄한 사실에 돌렸다(OR 59). 굶주리거나 가난한 신체를 대변하는 요구가 공적으로 만들어지면, 인간이 소유한 개성화하고(individuating) 능동화하는 능력은 침묵하게 된다. 난폭할 정도로 절박할 뿐더러 불가항력적이기까지 한 신체의 필요가 만족되기 전까지는 어떤 발화도, 어떤 행위도 있을 수 없다.
다른 저서인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의 강조점은 달라진다. 여기서도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고려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적의는 약해지지 않지만, “사회적인 것의 부상”은 행동주의(behaviorism)나 대중 사회, “가사적인”(housekeeping) 용무의 관리가 정치 영역을 찬탈한다는 견지에서 이론화되는데, 이런 것들은 신체의 집요함보다 그 압박이 덜하진 않지만, 불가항력 면에서 보자면 덜 집요해 보인다. 여기서 사회적인 것은 무대에 부상하긴 해도, 난입하진 않는다.
『혁명론』과 대조적으로 『인간의 조건』은 신체를 직접 논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신체의 문제가 다뤄질 경우 그 강조점은 신체의 불가항력보다는 그 모방성(imitability) 쪽에 놓인다.8) 아렌트의 말을 예로 들자면, 인간을 구별 짓는 정치적 발언과 행위에서 인간이 “전달(communicate)하는 것은 스스로이지, 단순한 무언가―목마름이나 굶주림, 애정이나 적의나 공포 따위―가 아니다.”(HC 176) 목마름이나 굶주림이 “단순한 무언가”인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생물학적 실존의 공통적이고 공유된 특성이며, 그 자체로는 우리와 다른 이들을 어떤 의미 있는 방식으로도 구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공통성(commonality, 평범함)은 근대에 들어 과대해지는데, 사회적인 것이 극히 순응적인 일련의 배치로 발전하여 “셀 수 없이 다양한 규칙들을 부과함으로써 … 경향적으로 그 구성원들을 ‘정상화/표준화’(normalize)하고 그 행실을 바로잡으며 자발적 행위나 걸출한 성취를 배제”(HC 40)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위해야 하는 이유는 신체를 벗어나 그 집요함에서,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지려는 필요성에 있지 않다. 대신 아렌트가 초점을 두는 것은 정치와 행위의 해독성 있고 독특한 소용(sui generis goods)을 통해 사회적인 것의 정상화/표준화하려는 충동에서 벗어나거나 그를 억누르려는 필요성이다. 행위해야 하는 이유는 행위만이 특유하게 갖는 개성화의 역량, 그리고 구별 및 개성화, 걸출한 성취를 향한 자아의 갈등적인(agonal) 열정에 있다.
그들이 행위할 때, 아렌트의 행위자는 다시 태어난다(HC 176). 혁신적인 행위와 발언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자신들의 특유한 개인적 동일성들을 능동적으로 드러내며, 이로써 자신들을 인간 세계에 출현시킨다.”(HC 179) 그들이 공적 영역에서의 행위에 순간적으로 참여할 때 동일성들이 생겨나는데, 이는 그들을 목격한 목격자(spectator, 관객)들이 그들의 영웅적 수행에 관해 말하는 이야기 속에 영원히 새겨진다. 행위 이전에 또는 행위와 떨어져서는 이 자아는 동일성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불분명할뿐더러 무엇보다도 전혀 흥미롭지 않다. 생명을 떠받치고 심리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며, 시시하고 모방가능한 사적 영역의 생물학적 피조물인 이 자아가 동일성을 얻는 것은 ― “누구”(who)가 되는 것은 ― 행위를 통해서다. 그것이 될 수도 있는 “누구”를 위하여, 자아는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공적 영역의 위험을 무릅쓰는데, 여기서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고, 행위의 결과가 “무한하고” 예견할 수 없으며, “생명이 아니라 세계가 쟁점이 된다.”9) 이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내버리는 것은 “무엇임”(what it is, 현재의 본질)이라는 안락한 안전함, 사적 영역에서 그것을 정의(하고 심지어 결정)하는 역할과 특성들, “그것이 내보이거나 감추는 특징들, 재능들, 솜씨들과 단점들,” 그리고 그 작인(作人)을 특징짓는 의도와 동기, 목표다.10) 그렇기에 아렌트의 행위자들은 결코 자기-주권적이지 않다. 사적 영역에서 신체들(과 심리들)의 전제주의에 추동되는 그들은, 마찬가지로 공적 영역에서도 자신들이 하는 것을 결코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 행위자로서 그들이 용감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행위는 자발적이고, 무에서 솟아나거니와, 가장 혼란스러운 점은 그것이 스스로를 놀라게 한다(self-surprising)는 점이다. “타인들에게는 그렇게 뚜렷하고 틀림없이 나타나는 ‘누구’는 그 개인 스스로에게는 숨겨진 상태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11)
우리가 “무엇”인가("what" we are)에는 흥미롭거나 별다른 것이라고는 없으며, 심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자아에도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사적 자아의 특성은, 우리의 장기와 마찬가지로 “전혀 특유하지 않다”(HC 206). 아렌트는 생물학적 자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이 내부가 드러난다면, 우리는 모두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12) 여기서 아렌트가 가치를 두는 수행적 화행과 대비되는 침묵은 난폭할 정도로 집요한 신체적 필요가 유발하는 묵언(muteness)보다는 차라리 엄격하게 (의사)전달적이고 극히 지시적인 ― 발화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시적인 ― 일종의 진술적 말하기이자 말없는 (의사)전달이다. 여기서 “발화는 부차적인 역할을 노는데, 그 역할이란 (의사)전달 수단이거나 말없이도 성취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부산물이다”(HC 179). 사적 영역에서 언어의 초점은 (신체의) “즉각적이고 동일한 필요와 부족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이는 의태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이 단순하고 일의적인 신체는 발언의 도움 없이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아렌트는 “기호와 소리면 충분할 것”(HC 176)이라고 말한다.

다중적인, 행위하는 자아

유일하고 일의적인 신체와는 대조적으로, 행위하는 자아는 다중적이다. 이 갈라진 자아는 진술적인 면과 수행적인 면으로 갈라진 독립 선언의 구조 위에 겹쳐진다. 진술문과 신체는 모두 전제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일의적이고 창조성이 없다. 양자 모두 분란을 일으키며(disruptive), 무대에 부상하거나 난입하여 정치 공간을 폐쇄시키겠다고 늘상 으르렁댄다. 이 항존하는 위협 때문에 우리는 신체적이거나 진술적인 강박의 침입에 맞서 공적 영역, 수행성의 공간을 방심하지 않고 경계(警戒)해야 한다.
행위하는 자아는 선언의 수행적 순간과 유사하다. 그것은 자유롭고 (자기)창조적이며 변혁적이고 모방할 수 없다. 아렌트의 수행문들은 복수성(plurality, 다원성)을, 그 행위자들은 다중성을 상정한다.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의 힘은 구별되고 다양한 개인들에 의해 현행화되는데, 이들은 행위 이전까지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구별을 향한 갈등적(agonal) 열정을 제외한다면 별 다른 공통점을 갖지 않는다(OR 118 곳곳).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행위자들이 행위하는 것은 그들의 이전 본질(what they already are) 때문이 아니며, 그들의 행위는 사전적인 안정된 동일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안정하고 다중적인 자아를 전제하는데, 이 자아가 추구하는 것은 기껏 해 봤자 행위에서의, 그리고 행위의 대가인 동일성에서의 일시적인 자기실현이다.
아렌트는 이 다중적인 자아를 투쟁의 장소로 특징짓는데, 이 투쟁은 자아가 행위하는, 그리고 수행적 산물인 동일성을 쟁취하는 각각의 순간에 일시적으로 진정된다. 투쟁은 사적인 자아와 공적인 자아 사이에서 벌어지는데, 전자가 위험을 기피하는 폐인(stay-at-home)이라면 후자는 우연적인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용감한 심지어 경솔한 행위자다. 이 같은 사적․공적 충동의 갈라짐이 자아에 새겨지지만, 자아의 파편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적 영역에 홀로 있을 때에도 이 자아는 세 가지 구별되고 경합하며 양립불가능한 정신 능력들―사고, 의지, 판단―에 고취되어 서로 갈등하는데, 이 각각의 능력 또한 내적으로 쪼개지고 “반사되며” “스스로에게 다시” 되튕겨진다. 아렌트는 항상 “이 같은 내적 저항이 남아 있다”13)고 말한다. 자율성이 부과된 구축물이라고 아렌트가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파편적이고 다중적인 자아에게 일의성을 부과한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아에 대한 지배와 타인들에 대한 통치에 의존하는 정복”을 포함한다. 그것은 아렌트가 설명하는 자아가 그것에 대해 저항하는 구성체(formation)다(HC 244). 이 자아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렌트가 (때때로) 정치라 부르는 갈등주의적인 투쟁의 장소다.14) 그리고 아렌트는 이를 찬성하는데, 왜냐하면 니체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 같은 자아의 내적 다중성이 그 힘과 활력의 원천이자, 창조적인 수행적 행위의 조건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15)
일의적 신체와 다중적 자아 간의 이 같은 갈라짐은 개별적 자아들의 속성으로 제시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아렌트가 친애하는 모형인 고대 그리스에서 일부 자아들을 타인들과 구별 짓기 위해 실제로 작동한다. 여기서 행위의 경험은 극히 소수에게만 허용된다. 신체의 판에 박힌 일상과 집요함은 『인간의 조건』에서 암묵적으로 ― 고대 그리스에서 명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 여성과 노예(그리고 또한 아이들, 노동자들, 그리고 폴리스의 모든 비-그리스인 거주자), 곧 “신체적 기능과 물질적 용무들이 숨어 있어야 하는”16) 사적 영역에서 신체와 그 필요에 전념하는 노동하는 신민들(subjects, 주체들)과 동일화된다. 이들 사적 영역의 주민들은 신체와 본성이 그들에게 강요하는 요구, 그리고 그들을 재산으로 소유하는 가구(household)의 주인이 그들에게 지시하는 명령에 수동적으로 종속(subject)된다. 지루할 정도로 뻔하고 반복적이며 순환적인 본성의 과정 및 가구의 전제주의 양 쪽에 희생당하는 그들은, 아렌트가 공적 영역에서의 행위와 동일시하는 자유를 행할 수 없게끔 결정되어 있다. 반면 자유로운 시민은 사적 영역에서의 자신들의 사적 필요를 돌볼 수 있지만(그보다는 신민들이 돌보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런 다음 이 숙명적이고 생명을 떠받치는 용무를 뒤로 하고 자유와 발언과 행위의 공적 영역에 입장할 수 있다. 사실 이 용무를 뒤로 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야말로 그들이 행위할 능력이 있다는 표지다. 정치에서는 어쨌거나 “생명이 아니라 세계가 쟁점인 것이다.”
자유로운 시민들이 이처럼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주기적으로 통행하는 것을 보면, 이 두 영역의 간극이 협상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HC 24). 그러나 이는 오직 시민들에게만, 그러니까 자신들의 신체화(embodiment) 조건과 본질적으로 동일화되지 않는 이들에게만 적용된다. 이는 실질적으로 그들의 시민권을 측정하는 기준이다. [반면] “타자들”, 그러니까 그들의 동일성이 그들의 신체화와 동일하다(이것이 그들의 야만을 측정하는 기준이다)는 본성 자체 때문에 결코 시민이 될 수 없는 이들의 경우 공/사의 불통(不通)을 협상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문제점이 많은 정치적 행위를 아렌트가 폴리스에 귀속시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를 아렌트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옳을까?17) 분명 아렌트는 그녀 식의 사적 영역과 거기서 일어나는 노동 및 작업 활동들이 특정 계급의 인민이나 신체, 또는 특히 여성과 동일화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러나 한나 피트킨이 지적하듯, 경우에 따라 사적 영역과 노동 및 작업 활동들은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보다는 “공적 영역이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 특정한 태도(들)”을 표상한다.18) 예를 들어 노동, 곧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조응하는 활동”이라는 하나의 양태 안에서는, 생명의 숙명론적 본질과 특정한 종류의 합리성의 도구적 성격이 우리를 너무나 철저하게 지배하는 나머지 정치의 자유 및 특유의 생성적인 수행성이 떠오를 수 없다(HC 7). 노동 및 작업에 관해 아렌트가 정말로 근심한 것은 그것들이 행위를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특수한 감성들(sensibilities)을 요구하고 일으킨다는 것이기 때문에, 피트킨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아마도 ‘노동자’는 그의 생산 방식이나 빈곤이 아니라 그의 ‘공정’(工程, process) 지향적인 관점에 따라 식별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가 필연에 떠밀리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그가 스스로를 행위할 능력이 없이 떠밀리는 존재라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19)
또는 차라리 정치적 행위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마도 노동하는 감성일 텐데, 이 감성은 활동으로서의 노동에 특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어떤 특정 노동자의 사고를 특징지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거니와, 이 감성은 노동자가 노동할 때 표현되는 노동하는 본성이나 본질을 신호하는 것으로 간주돼서는 안 된다. 이 함 배후에는 어떤 “~임”도 없다. 동일한 분석이 작업에도 적용된다. 이 설명에서는 정치적 행위에서 배제되는 개인들의 명확한 계급이란 없다. 대신 정치는 다양한 감성들, 태도들, 성향들, 그리고 접근들로부터 보호되는데, 이 모두는 모든 자아들과 주체들을 일정한 정도로 구성하고, 자아를 지배하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며, 아렌트가 가치를 두는 행위의 이해(들)과 양립할 수 없다. 요컨대 노동, 작업, 행위를 감성들로 해석함으로써 그것들을 탈본질화하거나 탈자연화(denaturalize, 변성(變性))할 수 있다. 각각은 스스로를 수행적 산물로, 즉 어떤 계급이나 성별의 진정한 본질의 표현이 아니라 개인들과 사회들, 그리고 정치적 문화들의 행위와 행실, 규준, 그리고 제도적 구조들의 항상 (침전된) 산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0)
노동과 작업과 행위를 이처럼 (경합하는) 감수성들로 읽는 것은 자아를 다중성으로 보는 아렌트의 관점과 양립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신체를 진술의 폐쇄와 모방성, 불가항력의 주문으로 취급하는 아렌트의 견해를 부드럽게 전복하는 길을 가리킬 것이다. 아렌트의 설명에서 노동은 결국 신체적 기능일뿐더러 신체에 전념하는 양태, “생명 과정 자체에 필요한” 사물들에 몰두한 양태가 되는 것이다. 만일 노동(모든 것을 때때로 떠미는 결정적 감성)이 수행적 산물일 수 있다면, 신체 자체는 왜 안 되겠는가? 노동, 작업, 행위를 감성으로 보는 이 같은 독해는 신체를 탈본질화하고 탈자연화하고, 아마도 복수화하며, 어쩌면 심지어 그것을 아렌트적인 의미에서 수행적 산물, 행위가 가능한 장소로 보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밀고 가지 않겠는가?

공과 사를 구별하기

이렇게 아렌트의 설명을 급진화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수행문과 진술문이라는 표제 아래 함께 모아 둔 일련의 구별들에 아렌트가 의존한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이 구별들을 협상할 수 없고 겹치지 않는 이원적인 대당으로 다루며, 그것들을 그녀 작업의 (움직이는) 중심에 놓여 있는 (역사적으로 매우 불평등한) 공/사 구별 위에 배치한다. 물론 앞으로 밝혀질 것처럼 방해가 되는 것은 하나 이상인데, 왜냐하면 아렌트가 다층적인 체계로써 자신의 공/사 구별을 확고히 하기 때문이다. 이 구별은 수많은 이원성을 낳는데, 각각은 그 이전 것에 덧붙여진 새로운 층의 보호막이며, 이들은 아렌트가 그것에 할당한 존재론화하는(ontologizing) 기능에 저항하는 구별을 더 견고하게 지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수행문 대(對) 진술문, “우리는 생각한다” 대 “자명한 진리”, 다중적 자아 대 일의적 신체, 남성 대 여성, 저항가능한 대 불가항력적인, 용감한 대 위험회피적인, 발언 대 묵언적 침묵, 능동적 대 수동적, 비범한 대 평범한, 개방적 대 폐쇄적, 권력 대 폭력, 자유 대 필연, 행위 대 행실, 비범한 대 평범한, 모방불가능한 대 모방가능한, 분란 대 반복, 빛 대 어둠, 요컨대 공 대 사.
왜 이렇게 많은가? (선)긋기가 아렌트적 의미에서 비범한 행위긴 하지만(그것은 새로운 관계들과 새로운 현실들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 구별을 긋는 것 자체에서 아렌트는 불안한 반복의 순환에 사로잡힌다. 이 모두를 필요로 할 정도로 희박한 구별이 침식당하는 것에 저항하려는 영웅적 노력 안에서, 이원적 구별과 형용사적 쌍들은 서로의 위에 덧쌓인다. 참으로 희박하지 않은가. 아렌트의 설명에서 이 같은 구별들이 서로 침투하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에 너무나도 쉽사리 식민화되고 사회적인 것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에 관해 아주 솔직하다.(그녀가 『인간의 조건』과 『혁명론』에서 대답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다.) 그녀의 솔직함 때문에 우리는 이 구별들을 긋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사적 영역의 제국주의에서 공적인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아렌트에게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사적 영역의 신뢰성, 일의성, 그리고 평범함을 행위와 정치의 분란에서 보호하는 것이다.21) 요컨대 아렌트는 행실뿐만 아니라 행위 자체도 길들인다. 그녀는 행위에게 근거지라 부를 만한 장소를 부여하고, 행위에게 그것이 속해야 하는 이곳에 머무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물론 행위는 이를 거부한다.
행위의 진정한 위험은 바로 여기, 이 거부에 있다. 스스로를 놀라게 하는(self-surprising) 행위의 특성은, 행위가 항상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의도대로 되어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제한되지 않는다. 또한 행위자로서의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된 것이 “누구”인지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가 스스로를 놀라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 곧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난다(it happen to us)는 의미에서다. 우리는 수행할 것을 결정하고 난 후에 공적 영역에 입장하여 그 영역을 특징짓는 우연성에 우리의 수행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종종, 정치적 행위는 우리에게 도래하며, 신중하다거나 계획적이라거나 의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휘말리게 한다. 행위는 그 행위자들을 생산한다.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episodically, temporarily) 우리는 행위의 갈등주의적 성취다. 아렌트의 설명에서 미국 혁명은 미국 혁명가들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으로 이끈 운동은 부주의(inadvertence)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혁명적이지 않았다”(OR 44). 그리고 때때로, 특히 그녀가 의지를 설명할 때, 행위는 원래 사적 영역에서, 사적인 자아에게 일어난다.
아렌트는 의지를 행위의 선행항로 간주하지만, 그것이 실은 행위를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기묘한 종류의 선행항이다. 반사적이고, 내적이며, 원함과 원치 않음(willing and nilling)의 잠재적으로 영원한 동역학에 사로잡혀 있고, 이 동역학을 저지할 능력이 없는 의지는 구원을 기다린다. 그리고 구원이 도래할 때, 그것은 행위라는 형태 자체로 온다. 행위는 의지의 강박적인 반복에 분란을 일으킴으로써, 의지의 마비적 “우려와 근심”에서 자아를 해방한다. 행위는 사적 영역에, 말하자면 진입한다(come in). 그것은 아직 채비를 갖추지 못하고 완전히 의지를 굳히지 않은(왜냐하면 또한 여전히 원치 않기 때문에) 사적 영역의 주체에게 일어난다. 쿠데타처럼 행위는 “벨레(velle, ‘원한다’는 뜻의 라틴어)와 놀레(nolle, ‘원치 않는다’는 뜻의 라틴어) 간의 갈등을 중단”시키고 의지를 구원한다. “즉 의지(Will)가 구원받는 것은 의지하기를 그치고 행위하기 시작함으로써이며, 중지가 의지하지 않을 의지(will-not-to-will)의 행위에서 비롯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또 다른 의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22)
공/사 영역의 이종교배 사례들은 넘쳐 난다. 그것들은 이종교배의 불가능성, 도착(倒錯), 기괴함을 설명하게 되어 있는 구별들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렇다면 성/성별 수행성을 다룬 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처럼 “신체 자체에 수행성을”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23) 무엇이 공/사 구별의 희석을 금지하는가? 사적 영역의 진술적 동일성들이 실제로는 개인들, 사회들, 그리고 정치적 문화들의 규준들과 제도적 구조들, 행실들, 행위들의 (침전된) 산물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에 대한 벌이 무엇인가? 내기에 걸린 것은 무엇인가?
아렌트에게서 내기에 걸린 것은 행위 자체의 상실, 행위가능한 것(actionable, 기소할 수 있는)이 허용되는 영역의 상실이다. 이것이 근심의 진정한 원인이며, 특히 사회적인 것의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규칙들”이 정상적이고 행실 바른 주체들을 생산하는 데서 거둔 놀랍고 불편한 성공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것을 허용하기 위해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서 거의 모든 내용을 비워 버린다. 내용을 가진 것들은 어쨌거나 진술문이고, 아렌트의 이론화에서 폐쇄의 장소이며, 수행문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장애물이다. 한나 피트킨이, 저 시민들은 “저 광장(agora)에서의 끝없는 회의(palaver)에서 [무엇에] 관해서 함께 얘기하는가”라고 어리둥절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24) 아렌트가 행위를 사실상 형식화하는 것, 협상불가능한 공/사 구별로써 행위를 보호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사회적인 것의 그 어떤 부상보다, 표면적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신체들의 그 어떤 난입보다 더 행위를 상실하고 폐색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공/사 구별의 침투성, 부정확성, 모호성은 그것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희석의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으로 새겨진 아렌트 자신의 공/사 구별을, 모래 위에 그어진 선, 그 자체로 부당한(illicit) 진술문, 구성적인 표식이나 문헌, 반박․증대․수정되기를 갈등주의적으로 호소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공과 사의 지리적이고 독점적인 은유를 없애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어떻겠는가? 아렌트의 공적 영역을 고대 그리스의 아곤과 같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행위를 일으킬 법한 ― 지형(학)적인(topographical) 동시에 개념적인 ― 다양한 (갈등주의적) 공간들의 은유로 대한다면 어떻겠는가?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건으로서의 행위, 평범한 사물의 질서에서 새로움과 구별로의 길을 여는 갈등주의적 분란, 불가항력적인 것에 대한 저항의 장소, 다양한 행실을 구성하고 통치하며 통제하려는 정상화/표준화하는 규칙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고 우리는 훨씬 더 광범위한 진술/확인의 정렬 안에서 정치적 행위의 장소들을 식별할 수 있는 위치에 설 것인데, 이 정렬의 범위는 신이나 자연, 기술, 자본 등의 자명한 진리에서부터 동일성, 성별, 인종, 종족성 등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행위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 사적 영역에서 말이다.
아렌트는 물론 그녀의 설명을 이처럼 수정하는 것이 지나친 정치화라고, (낸시 프레이저가 아렌트를 대변해서 쓰듯) “모든 것이 정치적일 때, 정치적인 것의 의미와 종별성은 희미해진다.”25)고 염려할 것이다. 프레이저가 볼 때 정치에 대한 아렌트의 이론화는 하나의 역설에 빛을 비춘다. 만일 정치가 모든 곳에 있다면, 그것은 아무 데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수정된) 설명에서 모든 것이 정치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단지 정치화로부터 존재론적으로 보호받는 것은, 필연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공과 사의 구별은 정치 투쟁의 수행적 산물로서, 어렵사리 획득되고 항상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 역설은 역전될 수 있다.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분할을 정초적으로 보존하려는 충동은 정치적인 것의 보존을 염려하는 것이라고 표명되지만, 그 자체는 반정치적인 충동이다. 아렌트는 이를 알았다. 독립 선언의 진술적이고 정초적인 토대를 그녀가 비판할 때 기초로 삼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선언의 자명성에 수행성을 적용하도록 그녀를 자극한 것도 이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충동이 아렌트의 공/사 구별 자체에 수행성을 적용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이 같은 갈등의 분산은 아렌트가 이론화한 정치의 또 다른, 사뭇 상이한 계기에 의해 정당화될 수도 있다. 아렌트는 상황의 긴급함 때문에 정치가 지하에서 움직이도록 강제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점령 프랑스의 지하 정치에 유의하면서, 저항의 장소, 전복적인 정치 행위의 네트워크가 증식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했다.26) 아렌트가 “사회적인 것의 부상”과, 틀에 박히고 관료적이며 관리적인/행정적인(administration) 정체(政體)에 의한 정치의 전위라고 묘사한 것을 점령이라는 용어로 불러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제도적 장소가 부재할 때 페미니즘 정치는 지하에 숨어들면서, 개인적이면서도 제도적인 동일성들의 틈과 균열에서 조심스럽게 스스로의 거처를 정하고, 새로운 관계들과 현실들을 확립한다는 희망을 품고 수행적이고 갈등주의적이며 창조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사적 영역에서 행위하기

사적 영역의 자명성 안에 위치한 갈등주의적인 수행성의 정치라는 이상의 개념을 탐색한 것은 주디스 버틀러인데, 그녀는 특히 성과 성별의 구축 및 구성에 초점을 둔다. 버틀러는 사적 영역의 진술―아렌트가 자연 순환의 무심하고 지루하며 완벽하고 억압적인 반복이라고 서술한 것―의 가면을 벗기고, 일상적으로 성/성별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수행성으로 이들을 재서술한다. 이 같은 수행들은 “이성애적 계약”에 의한, 그리고 그것에 중심을 둔 이원적인 성별 구성의 규제적 실천의 강제적 산물이라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행위들은 “내적으로 불연속적이다.” 그것들이 생산하는 동일성들은 “이음매가 없지”(seamless) 않다. “지시대상[자아]의 다중성과 불연속성은 기호[성/성별]의 일의성을 조롱하고 이반한다.” 이 조롱(mockery)과 반란의 공간들, “이런 행위들 간의 자의적 관계 안에, 다른 식으로 반복할 가능성 안에” “성별 변혁의 가능성들”이 있다.27) 전복적인 반복은 대안적인 성/성별 동일성들을 수행적으로 생산할 것인데, 이 동일성들은 증식할 것이고 이 같은 증식(과 전략적 전개) 속에서 지금 성/성별 동일성들을 규제하고 남김없이 구성하려 드는 사물화된 이원성들에 대항하여 저항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략은 동일화주의적인(identitarian) 관리, 규제, 표현에 저항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공간들을 식별함으로써 동일성들을 수행적 산물로 탈권위화․재서술하고, 성공적인 진술문을 열망하는 동일성들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렌트의 용어를 빌자면 이 전략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성별 동일성들이 행위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수정되고 증대될 수 있다는 믿음에 의지한다. 정치 이론의 과제는 새로운 시작들을 환대하는 (긴장과 결정불가능성, 그리고 자의성의) 공간들을 넓힘으로써 (재)정초의 실천을 돕고 북돋는 것이다.28) 이들은 정치의 공간, 수행적 자유의 (잠재력 있는) 공간들이다. 여기서는 사적 영역에서 행위가 가능해지는데, 왜냐하면 사회적인 것과 그 정상화/표준화의 장치들은 아렌트가 지나치게 속단한 것과 달리 완벽한 폐쇄를 획득하는 데 시종일관 실패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것의 야망이 이처럼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은 정치를 마비시키는 응고되고 딱딱하며 사물화되고 자연화된 동일성들과 정초들을 전복할 수 있다는 것, 행위가능한 것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것, 수행적 행위들을 진술적 진리들로 침전시키는 것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정치와 동일성의 문제에서는 그것을 바로 잡는다거나(get it right) 완전히 끝장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신념을 견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가능성은 아렌트의 공적․사적 영역의 필요와 억압을 구조화한다. 그리고 이는 어떤 동일성의 정치라도 문제시하고 저항할 수 있는 훌륭한 이유를 제공해 준다.
한나 피트킨은 이익, 그리고 공유된 물질적 필요 및 용무의 재현/대의(representation)의 재판정이나 실천으로 정치를 이론화할 것을 거부하는 아렌트를 열렬히 비판한다.29) 아렌트의 정치가 아무런 함의나 내용도 없을 만큼 형식적일 수 있다는 것을 근심한다는 점에서는 그녀가 옳다. 그러나 피트킨은 아렌트가 제시한 전망의 유망함(promise, 약속)을 헤아리는 데는 실패한다. 정치적 행위가 우리가 “무엇”인지를 ― 즉 우리의 사물화된 사적 영역의 동일성들을 ― 재현/대의하는 장소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아렌트의 태도에 유망함이 있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재현/대의의 정치는 부과적이고 어긋나는(ill-fitting) 이익들과 동일성들의 그릇된 공통성을 투사한다. 더욱이 그것은 중요한 대안을 차단한다. 그 대안이란, 우리가 “무엇”인지를 재생산하고 재-현(re-present)하는 대신, 우연적으로(episodically) 새로운 동일성들을 생산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를 갈등주의적으로 낳는 수행적 정치인데, 이 동일성들의 “새로움”은 “행위하는 인간들/여성들([wo]men)에 의해 ― 비록 의식한 것은 아니더라도 ― 시작되고, 그들의 후손에 의해 널리 상연되고 증대되며 오래 간직되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될 것이다.30)

동일성의 정치

아렌트의 행위 이론에서 수행성이 중심성을 차지하는 것은, 성별이나 인종, 종족성 또는 국적(nationality, 민족성) 같은 공유된 (공동체) 동일성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정치를 바라보려는 시도에 아렌트가 반대하는 데서 비롯한다. 수행성과 갈등주의는 아렌트의 설명에서 우연의 일치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아렌트의 정치가 항상 갈등주의적인 것은 그것이 표현주의의 매력에 저항하기 때문인데, 이는 자아를 그 동일성들이 항상 수행적으로 생산되는 복잡한 다중성의 장소로 보는 그녀의 관점을 위한 것이다. 이 갈등주의는 주체성의 무엇-임(what-ness)의 자기만족적 친숙함을 삼가고, 행위와 새로운 관계 및 현실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상쾌한 역량을 위해 사회적인 것의 유혹적인 안락을 거절한다.
아렌트의 시각에서 볼 때, 선재적(先在的)이고 공유되며 안정된 동일성의 기초 위에 스스로를 구성/입헌하는 정치 공동체는, 정치의 공간을 폐쇄하고 정치적 행위가 상정하는 복수성과 다중성을 동질화하거나 억압할 위험이 있다. 아렌트는 복수성이나 다중성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반드시 “공적 영역 자체의 폐지”와 “모든 타인들에 대한 자의적 지배,” 또는 “실재적 세계를 이 타인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상상적 세계로 교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HC 220, 234). 이 같은 교체를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치 공동체들의 비동일성과 이질성들로써, 그리고 또한 정상화/표준화적 주체성의 구축과 자율성의 부과에 대한(또한 성/성별 동일성들을 남성과 여성,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이원적 범주로 형성하려는 것에 대한) 자아의 저항으로써 정치 공간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자아를 정의하려 드는 사회적, 심리적, 사법적 범주들에 대한 자아의 갈등주의적 어긋남은 권력 발생의 원천이자, (대안적) 수행성(들)을 발생시키는 장소가 있다는 신호다.
아렌트가 민족 국가에 적의를 품었던 것은 이처럼 정치와 행위의 조건으로 차이와 복수성을 염려하기 때문인데, 민족 국가의 혐오스러운 “결정적 원칙”은 그것의 “과거와 기원에 대한 동질성”이다(OR 174). 그리고 이것은 또한 그녀가 페미니즘 정치라는 주제에 침묵한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아렌트는 “여성의 경험”이나 “여성의 앎의 방식” 안에서 동질성을 선포하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굉장히 경계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저 (이른바) 동일성의 경계 내부의 중요한 차이와 복수성들―또는 심지어 [동일성의 경계]에 대한 저항―을 숨기(거나 금지하거나 처벌하거나 침묵시키)는 보편성을 함축한다거나 그것을 열망하는 여성 범주에 의지하는 어떤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의견은 추리한 것인데, 왜냐하면 아렌트가 자신의 이론 작업에서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즘 정치라는 쟁점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그동안 아렌트에게 직접적으로 성별 문제를 제기하길 꺼려했는데, 왜냐하면 아렌트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자들이 이 문제를 도덕주의적인 방식으로 제기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렌트가, 여성으로서, “여성 문제”를 제기하거나, 적어도 여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를 이론화할 책임이 있다고 가정했다. 그녀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부역자(collaborator)로 규정된다. 이 같은 고발을 가장 쌀쌀맞고 강력하게 제기한 것은 아드리엔느 리치인데, 그녀는 『인간의 조건』이 “거만하고 불구적인 책”이고 “남성 이데올로기로 길러진 여성 정신의 비극”을 보여 준다고 묘사한다.31) 나는 여기서 가정하는 책임에 대해 별로 확신하지 않기에, 이 질문들을 제기하되 이런 방식으로는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이런 책임을 할당하거나 함축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렌트가 한 패(joiner)가 되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 동일성 정치와 동일성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을 그녀가 경계한 것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해(뿐만 아니라, 내 생각에, 그녀 자신에 대해) “그녀 세대의 모든 다른 여성들과 정치적 신념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린 여성해방운동에 대해 그녀가 보인 혐오는 중요한 것이었다. 여성 참정권론자(suffragette) 식 평등의 면전에서 그녀는 ‘작은 차이 만세’(Vive la petite différence)라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 같다.”32)라고 말하게 한 놀라운 외고집에 대해 얼마간 존경심을 느낀다.
괴짜스런 논평이다. 그 정치적 헌신을 정치가 아닌 “운동”과의 “불가항력적인” 동일화의 산물로 기각당한 여성 참정권론자들에게는 확실히 부당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논평이긴 하다. 이 룩셈부르크가 찬사를 보냈다고 아렌트가 상상하는 이 작은 차이란 무엇인가? 이는 성적 차이가 아니다 ― 이는 차이이며, 전혀 작지 않다. 작은 차이란 (비록 아렌트의 의미심장한 어법 선택으로 그 자체 성별화되긴 했지만) 성/성별-내적인 차이다. 그것은 룩셈부르크와 여타 여성들을 구별하는 차이다. 아렌트가 룩셈부르크에게서 존경한 것은, 아렌트 자신이 얻으려고 분투한 자질이다. 소속의 거부, 특정한 종류의 평등보다 차이나 구별의 선택이 그것이다.33) 그녀가 이 절에서 얘기하는 “여성 참정권 평등”은 이 여성들이 여전히 얻으려고 분투하는 남성 유권자들과의 공민적 평등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 참정권론자들 사이의 평등, 공동의 대의에 대한 그들의 헌신인데, 이 대의의 명목 하에 그들 간의 차이가 말소된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아렌트가 구성하고 찬사를 보내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외부자”이자, “그녀가 혐오했던 나라의 폴란드계 유대인”이며, “그녀가 곧 경멸하게 되는 [정]당”의 구성원이자, “여성,” 곧 여성운동의 “불가항력적” 꾐에 저항하고, 다른 투쟁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이로써 동질성이 아닌 구별의 동일성을 혼자 힘으로 쟁취한 탁월한 유형의 여성이다.
동일성의 정치에 대한 동일한 감정들, 동일한 거리두기의 기술과 혐오가 게르숌 숄렘과 아렌트의 서신교환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 서신교환은 아이히만(Eichmann)에 관한 아렌트의 논쟁적 책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은 또는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자칭 사적 영역의) 유대인으로서의 동일성이라는 용어에 관한 논쟁이었다.34) 이 짧은 서신교환은 동일성의 정치에서 계발적이고 도발적인 연구다. 아렌트에게 보낸 숄렘의 편지는 동일화와 정치화를 행사한다. 그는 아렌트에게 그녀의 책이 “신자의 확신”을 거의 담고 있지 않고, “허약함”과 “비열함, 그리고 권력욕(power-lust)”을 표출하며, “독자(one)에게 … 편집자에 대한 … 신랄함과 치욕의 느낌을 남긴다”고, 그는 그녀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그녀의 책에 흐르는 “냉혹하고” “거의 냉소적이고 악의가 느껴지기까지 하는 어조”에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켜야만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녀(“친애하는 한나”)에게서 어떤 “아하바트 이스라엘(Ababath Israel, 이스라엘을 사랑하라는 히브리어), ‘유대 민족을 사랑하라’”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고, 이 같은 부재는 “독일 좌파 출신의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전형적이다[고 말한다]. 무엇이 숄렘에게 이 모든 것들을 말할 수 있게, 그리고 그것들을 도덕적 결점으로 낙인찍을 수 있게 허가하는가? 그것은 그가 아렌트를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로만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35)
아렌트는 두 가지 전략적 거부로 대응한다. 첫째, 그녀는 그녀가 “전적으로” 유대적일 뿐, 차이들이나 다른 동일성들에 의해 갈라지거나 구성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둘째, 그녀는 유대적 동일성이 표현적이며, 공적 효과를 갖고 특정하고 분명한 책임들을 동반한다는 숄렘의 가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는 특정한 종류의 행위, 언표, 그리고 감정이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마땅하다는 주장에 저항한다. 그러나 시종일관 그녀는 숄렘과 마찬가지로 유대적 동일성이 (그녀의 다중적이지만 사적인 동일성의 다른 사실들처럼) “논의의 여지가 없고” 일의적이며 진술적인 “사실”이며 “논의”나 “논쟁에 열려 있지 않다”고 가정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녀에 관한 숄렘의 많은 진술들이 “단순히 틀렸으며” 그녀가 그것을 교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녀는 “‘독일 좌파 출신 지식인들’ 중 한 명이 아니다.” 만일 아렌트가 “‘어딘가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독일 철학의 전통에서다.”
숄렘이 “나는 당신을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로만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아렌트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진실은, 내가 나 자신인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식이라거나 다른 무언가인 척 해 본 적이 결코 없으며, 그런 방향으로는 유혹조차 느껴본 적 없다는 것이다.” 요점은 그녀가 유대 민족의 “딸”과 다른 무언가인 척 해 본 적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그녀임(what she is)과 다른 무언가인 척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그녀가 무엇인지(what she is)에 관해 결코 말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식별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전부는 “나 자신과 다른 … 무언가[인 척 하는 것은] …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 말하자면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다시, 그녀 자신에 대한, 이 경우에는 여성으로서의 긍정적 식별이 없고, 단지 그 역을 주장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그것을 긍정적으로 주장하면 어떻게 될까?)36)
숄렘이 그녀를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로만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는 곳에서, 아렌트는 그녀 자신의 “유대성(Jewishness)을 내 삶의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적 소여(所與, data) 중 하나”로 “항상 여겨 왔다.” 그녀는 자신의 유대성이 숄렘이 투사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전적으로” 구성하는 동일성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렌트는 다른 “사실들”에 의해서도 구성되는데, 그녀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그 중 두 가지다 ― 성/성별, 그리고 독일 철학을 수업한 것이 그것이다.37) 그렇기에 아렌트는, 그녀가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이라는 숄렘의 묘사는 그가 그녀에게 “붙이고 싶어 하는” “꼬리표”이지만, 그것은 “과거에 들어맞아 본 적이 없고, 현재에도 들어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38) 이는 어긋난 채 들러붙어 있는 꼬리표인데, 왜냐하면 아렌트의 유대성은 복잡하고 갈등적인 동일성의 파편이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볼 때, 그녀가 이해하는 식의 유대성이라는 사실에서는 아무 것도 따라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유대성은 사적 문제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며, 전혀 행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 그 사실성에 아렌트는 감사함을 느낀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에 대한 기본적 감사 같은 것이 있다. 주어졌던 것이지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퓌세이(physei, ‘자연적’이라는 뜻의 희랍어)이지 노모이(nomoi, ‘인위적’이라는 뜻의 희랍어)이지 않은 것에 대한,” “토론이나 논쟁 너머의” 것들에 대한 [감사]. 그녀의 종족적, 종교적, 문화적 동일성이 주어진 것이자 사적 사실, 만들어지거나 행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 같은 단언은 숄렘에게 보내는 아렌트의 편지에 구조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아렌트는 그녀의 사적 동일성이라는 사실들에 대한 토론으로 편지를 시작하는데, [이 토론은] 그녀가 사실적 오류라고 간주하는 것들을 겨냥한 일련의 정정으로 제시된다. 이 같은 사실에 관한 문제는 흥미롭지 않으며, “논쟁에 열려 있지 않다.” 아렌트는 편지를 전(前)정치적인 전문(前文)으로, 뒤따르는 정치적 논쟁과 분리된 것으로 제시한다. 오직 후반부만이 발언과 “토론할 가치가 있는 문제들”을 다룬다. 그녀는 이 구별을 강조하기 위해, 동일성에 중심을 둔 예비 단계가 끝나고 정치적 논쟁이 개시된다는 점을 표시하는 다음 문구로 문단을 시작한다. “요점으로 들어가자면.”
그러나 이 편지에서 아렌트가 감사해 한 바로 그것이야말로, 이 대립에서 숄렘이 그녀에게 용인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숄렘은 그녀의 유대적 동일성을 사적 사안으로 대하지 않으려 한다. 숄렘이 볼 때, 식별가능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특정한 공적 책임들과 함의들이 아렌트의 유대성이라는 논의의 여지가 없고 일의적인 사실에서 따라 나온다. 이것이 아렌트가 숄렘의 포함에 저항하는 이유고, 그가 유대 민족의 “전적으로 딸로만” 그녀를 기록하는 것에 저항하는 까닭이다. 그녀는 숄렘이 유대인에게 귀속시키고 요구하는 평등이나 동일성보다, 차이 심지어 작은 차이를 소중히 여긴다. 그녀는 그의 동일성의 정치에서, 행실이 동질화되게끔 통제하고 독립적 비판을 침묵시키는 음험한 자원을 본다.
유대적 동일성의 사적 자유, 곧 숄렘의 고발 및 매우 공적이고 극히 정치화된 이 동일성 논쟁에 의해 이미 문제화된 사적 자유를 고집하는 대신, 아렌트는 유대성을 동일성으로 구성하는 숄렘의 용어에 더 잘 대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아렌트가 쓸 수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숄렘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숄렘 모두 유대 동일성을 일의적이고 진술적인 사실로 간주한다. 그들이 의견을 달리 하는 것은 그것이 공적인 사실이냐 사적인 사실이냐 여부,39) 그것에서 행위를 위한 요구나 지침이 따라 나오느냐 여부일 뿐, 양쪽 모두 유대성이 “만들어질 수 없고”, 더욱이 말소(unmade)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것은 행위자가 하는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숄렘이 아렌트를, 그녀가 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외양상의 어떤 “아하바트 이스라엘”의 완전한 결여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렌트는 그녀가 무엇을 하든 유대인으로서의 그녀의 진정한(authentic) 동일성을 부인하거나 전복할 수 없었다. 이 점에 관해서 아렌트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녀의 방어 전략은 숄렘의 비난의 기본적 전제를 흉내 낸다. 그녀가 행한 그 무엇도 그녀의 유대성이라는 논의의 여지가 없고 진술적 사실을 의문시하거나 전복할 수 없다.
유대적 동일성을 진술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아렌트는 유대 동일성에 수행적으로 개입하거나 심지어 전복할 기회, 그 역사성과 이질성을 탐색할 기회, 일의성에 대한 그것의 열망을 몰아내거나 좌절시킬 기회, 그 분화된 가능성들을 증식시킬 기회들을 포기한다. 이 때문에 아렌트에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특정한 책임들을 함축하고 충성을 요구하는 동질적이고 알의적인 동일성으로 유대성을 묘사하는 숄렘에게 비판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어떤 자원도 남지 않게 된다. 좋은 유대인과 나쁜 유대인을 구별하는 숄렘의 진술적 기준은 본래대로 남아 있다. 건강한 여성과 불구화된 여성을, 충성스러운 여성과 배신한 여성을 구별하는 아드리엔느 리치의 전략에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그녀가 아렌트를 “전적으로 (여성으로)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독일 철학의 수업 같은) 아렌트의 다른 구성적 동일성들이 아렌트의 ― 여성으로서의 ― 진정하고 일의적인 동일성에 대한 배신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숄렘이나 리치, 나아가 모든 동일성의 정치에 맞선 보다 강력하고 고무적인 방어책은 불가항력적인 것에 저항하는 것인데, 그 수단은 그것을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자칭 불가항력적이고 동질적이며 진술적이고 일의적인 동일성의 가면을 벗겨, 그것이 수행적으로 생산된 것이고, 다중적인 수행과 행실의 균열되고 파편적이며 어긋나고 미완성적이며 침전되어 있고 이음매로 가득한 산물이며, 헤아릴 수 없는 반복과 강제의 자연화된 산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독립 선언의 “자명한 진리”의 강제적 폭력에 맞서 그 문헌의 “우리는 생각한다”에 힘을 불어 넣은 아렌트의 전략이다. 이 고무(鼓舞)의 전략을 전유하여, 어떤 유대적이고 페미니즘적인 동일성의 정치가 가정하는 일의성과 자명성의 폭력적 폐쇄를 폭로하고 개입하며 전복하거나 저항한다면 어떻겠는가?
여기서의 전략은 기성의 동일성들을 중단시키는 것, 그리고 동일자(sameness)의 평등을 위해 차이를 말소하지 않는 페미니즘과 동질화하지 않는 유대성을 이론화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전략은 차이들을 사물화하기보다 그것들을 증식시키고 탐색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자신의 유대성을 (행)하는(do one's Jewishness) 수많은 길, 자신의 성별을 (행)하는 수많은 길이 있다는 고무적인 발견이나 강조가 될 것이다.40) 어떤 (이른바) 사적 영역 동일성이 갖는 동질화하는 효과는 약화될 것이고, 이는 “동일성들” 자체의 틀 부에서 더 많은 분화와 대항가능성을 허용할 것이다.
이 중단의 전략은 아렌트가 찬사해 마지않았던 국외자(局外者, pariah, 최하층민)이라는 개념 및 국외자의 관점에 대한 중요한 대안을 구성한다.41) 아렌트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하여 아렌트가 존경했던 다른 이들로 상징되는) 의식적 국외자의 외부자(outsider)적 위치를, 그 곳에 있는 이가 독립적인 비판과 행위 그리고 판단에 필수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특권적인 장소로 간주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국외자 위치를 입지(location)하는 것은, 형성된 동일성들 내부에서는 어떤 비판적 지렛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문제적인 가정에 힘입는다. 아렌트가 국외자의 외부자적 지위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동일성들이 성공한다고, 그들이 분명 이음매 없음(seamlessness)과 폐쇄를 획득한다고, 그들은 필연적으로 동질화적이라고 그녀가 믿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전개하고 탐색한 갈등주의적인 수행성의 정치는 그 대신에 동일성들이 결코 이음매가 없지 않다는 것, 기존 동일성들의 단절, 부적합성, 그리고 어긋남들 내부에 비판적인 지렛대의 장소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것은 따라서 국외자의 위치는 그 자체로 불안정하다는 것, 국외자는 결코 실제로 외부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의 장소들은 다중적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이 다중적인 장소들은 아렌트적 정치의 특권화된 공적 공간을 탈중심화하고 행위의 장소들을 단일한 공적 영역 너머로 증식시킴으로써 잠재적 권력과 저항의 보다 광범위한 공간들을 탐색한다.42)
이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은 또한 갈등주의를 일종의 공동 행위(action in concert)로 가정함으로써 아렌트의 국외자에 함축된 개인주의에서 벗어난다.43) 갈등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이 개입하는 동일성들은 공유되며, 공적 실천들은 그저 개인적 개성들의 표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갈등주의적 행위가 한 명이나 여러 명의 행위자들에 의해 수행될 수도 있겠지만, 행위의 요점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차례에 각각 탐색하고 증대하며 수정할 수 있는 개성화와 정치의 새로운 공간들을 개방하고 정초함으로써 사회적인 것의 정상화/표준화하는 효과를 상쇄하는 것이다. 이 페미니즘 정치가 전제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이미 알려지고 통일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갈등주의적이고 차별적이며 다중적인 비동일화된/식별되지 않은(nonidentified) 존재들로서, 이들은 항상 생성 중이며 항상 증대와 수정을 요청한다. (어떤 동일성의 표현적인 열망에 저항하지만 마찬가지로 항상 감응하는) 갈등주의적이고 수행적인 이 정치는, 새로운 관계들과 새로운 현실들을 창조할뿐더러 낡은 것들을 수정하고 증대하고자 한다 … 심지어 사적 영역 안에서도 말이다.

후기: 갈등주의 대 연합주의?44)

정치 이론가들과 페미니스트들은 특히 아렌트 정치의 갈등주의적 차원을 들어 아렌트를 오랫동안 비판해 왔는데, 그 죄목은 갈등주의가 남성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이며, 폭력적이고, 경쟁적이고, (단순히) 심미적이며, 또는 필연적으로 개인주의적 실천이라는 것이다.45) 이 이론가들에게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이라는 통념은 기껏 해야 형용모순이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혼잡하든지 아마 위험한 관념일 것이다. 실라 벤하비브는 그들의 시각을 사실상 승인하는데, 그녀는 최근 일련의 유력한 논문들에서, 페미니즘에 적합한 아렌트를 구출하려는 시도의 수단으로써 그녀의 사고에서 갈등주의를 도려내려 한다.46) 벤하비브는 갈등주의를 “연합주의”(associationism)와 병렬하면서 이들이 두 가지 양자택일적인 “공적 영역의 모형”47)라고, 그리고 이들 중에서 연합적 모형이 우위를 점하는데 이는 그것이 “더 근대적인 정치 인식”일 뿐더러 페미니즘에게도 더 나은 모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벤하비브는 페미니즘에 대한 갈등주의의 의미와 가능성들을 재평가하기보다, 갈등주의를 남성 행위의 기원으로 [보는] 앞선 페미니스트의 성별화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상술한다. 그녀는 개인들이 각자와 공동으로 행위하는 연합적 모형을 특권화하면서, 모든 공동 행위의 필연적으로 갈등주의적인 차원에 대한 절실한 평가를 페미니즘에게서 박탈하는데, 이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연루된 개인들은 서로서로 함께 그리고 맞서서(both with and against) 행위하고 투쟁한다.
“페미니즘 이론과 한나 아렌트의 공적 공간 개념”에서 벤하비브는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완벽한 거울상으로 구축한다. “도덕적으로 동질적이고 정치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그러나 배타적인 공동체”를 전제하는 아곤과 달리, 근대 공적 공간은 이질적이다. “그것에 대한 접근이나 토론의 의제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동질성의 기준에 따라 미리 정의될 수 없다.” 아곤이 안정적인 공적 공간에 자유를 위치 짓는 반면, 연합적 모형은 공간이 아닌 실천으로 자유를 다룬다. 그것은 그것이 발생하는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공동 행위에서 출현”한다. “아곤적인 공간은 협력보다는 경쟁에 기초”하며, 이는 공동 행위가 아니라 “위대함, 영웅주의, 그리고 탁월함”에 초점을 둔다. 그것은 그들을 함께 묶기보다는 “그것에 참여하는 이들을 개별화(individuate)하며 그들을 서로서로 분리시킨다.”48)
[갈등주의의] 반대항으로 가정된 연합주의 편에서 이처럼 갈등주의를 기각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련의 문제적인 정의와 생략에 기초한다. 첫째, 갈등주의는 엄격하게 고전적인 용어로 정의되는 반면, 연합주의는 근대성에 맞게 개정되고 갱신된다. 이처럼 아렌트적 아곤을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고전적인 영웅적 개인주의의 장소로 그리는 것은, 갈등주의를 공동 행위의 실천으로의 아렌트 자신의 재의미화 앞에서 비산(飛散)한다.(아렌트는 자신이 설명하는 행위는 ― 그것의 가장 아곤적인 형태에서조차 ― 항상, 항상 공동적(in concert)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히 한다.)49) 그런 다음 벤하비브는 아렌트적 연합주의를 개정하고 갱신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데, 이는 그녀가 승인하고 싶어 하는 공적 영역의 보다 근대적인 인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다. 벤하비브는 아렌트가 “그녀 자신의 연합적 모형과 양립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녀의 공적 영역 개념을 제한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아렌트의 연합주의를 수정하여 아렌트가 반정치적인 것으로 기각한 용무들을 포함하도록 하고(갈등주의의 경우에는 이 같은 수정이 진척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아렌트 자신의 설명에 반하여, 연합주의를 공적 담론의 “실체적이지 않고 절차적인” 모형과 동일화함으로써 이 양립불가능성을 완화한다.50)
문제는 벤하비브가 아렌트의 설명을 수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with Arendt against Arendt) 사고”51)함으로써 진행되는 것이 자신의 기획이라는 입장을 아주 분명하게 취한다. 문제는 그녀가 아렌트의 다중적인 정치 행위의 전망을 두 개의 구별되고 분리되며 상호 배타적인 공적 공간 유형으로 가른다는 점,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녀가 역설한다는 점, 그 쌍을 비대칭적으로 간주함으로써 특정한 선택을 유도한다는 점,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별로 놀라울 것도 없지만) 연합주의가 두 가지 통념 중 더 근대적이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이라고 그녀가 결론을 내린다는 점에 있다.
다른 논문인 “한나 아렌트와 서사의 구원적 힘”에서 아곤은 다시 한 번 평가절하되는데, 이번에는 담론적인(연합적인) 공적 공간과의 대조를 통해서다. 벤하비브는 다시 한 번 비대칭적으로 나아가면서 아렌트적 행위의 담론적인 계기를 은유화하지만 그 갈등주의적 이면은 내버려 두는데, 이 때 갈등주의적인 공적 공간은 “위상학적이거나 제도적인” 장소라고 주장하는 한편, 아렌트의 보다 “근대적인” 통념인 담론적인 공적 공간은 “사람들이 함께 공동 행위하는 경우라면 언제 어디서든 출현한다”고 역설한다.52) 이 같은 은유화의 한계는 그러나 자의적이다. 다양한 다소 갈등주의적이면서 연합주의적인 공적 공간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 중에서, 후자가 전자보다 벤하비브가 추구하는 분산에 더 호의적(amenable)이라고 시사하는 것은 없다. 만일 우리가,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 인민들이 함께 공동 행위할 땐 언제나 연합적인 공적 공간이 출현한다고 말한다면, 인민들이 공동으로 각자와 함께 그리고 [각자에] 맞서(with and against each other) 행위하고 투쟁할 땐 언제나 갈등주의적인 공적 공간이 출현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벤하비브는 최근 논문 “국외자와 그녀의 그림자: 한나 아렌트의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 전기”에서 갈등주의/연합주의 이항을 한층 성별화하여, 남성적인 갈등주의적 공간과 이제 명시적으로 여성화된 연합주의를 병렬하는데, 여기서 후자는 살롱으로 모형화된다. 벤하비브는 낭만주의 시대 유대계 독일 살롱 여주인(hostess)에 대한 아렌트의 초창기 전기(傳記) 『라헬 파른하겐』을 과감하게 끌어들이면서, 연합과 친교, 대화와 우정, 그리고 여성 작인(作人, agency)을 북돋는 연합적이고 여성 지배적인 준(準)공적 공간으로 살롱을 옹호한다. 반면 아곤적인 공간은 여성을 배제하고 투쟁과 경쟁을 일으키는 곳으로 언급된다.53)
그러나 살롱이 지지하는 것은 벤하비브의 여성화된 연합주의보다는, 벤하비브가 보존하려는 대당들 예컨대 갈등주의와 연합주의 간의 대당이랄지, 공적 공간의 남성친화적 모형과 여성친화적인 모형 간의 대당들을 약화시키려는 (나 자신과 같은) 시도들이다. 여성들은 분명 다른 공적 영역들에서보다 살롱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졌지만, 그 권력은 공적이고 사적인 가부장 권력에 의존했다. 여성들이 주인 노릇을 한 살롱은 일시적으로 부재한 아버지들과 남편들의 소유였다. 라헬의 살롱이 거둔 짧은 성공은 부분적으로, 대학이나 의회, 궁정 따위의 경쟁하는 남성적 문화 중심지가 우연적․일시적으로 부재한 데서 비롯됐다.54) 더욱이 살롱은 우정과 교통, 친교뿐만 아니라 험담, 음모, 경쟁, 투쟁 등을 낳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사람들은 거의 … 갈등주의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벤하비브는 이 모두를 인정하지만, 그녀의 연합적 이상에 대한 살롱의 표상이 갖는 이 같은 결점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관심은 살롱 그 자체를 복원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연합주의의 “전조(前兆)”로, “그 미래 잠재력의 일부를 과거에 보유한 존재”로 다루는 데 있기 때문이다.55) 꽤 공평한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화된 연합주의의 모형으로서 살롱이 갖는 결점은, 살롱을 갈등주의/연합주의 이원항을 성별화하려는 수단적 형상으로 활용하는 벤하비브의 견해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가?56) 갈등주의적 차원과 연합주의적 차원을 복잡하게 결합하는 살롱은 아마 벤하비브가 살롱의 사례를 근거 삼아 제시하는 상호 배타적인 대당을 (지지하기보다는) 동요시킬 것이다.
이 논문에서 탐색한 유형의 갈등주의는 벤하비브가 기각한 갈등주의와 같지 않다. 이는 그녀의 이원항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초과하는 공동 행위의 일종이다. 영웅적 개인주의라거나 합의에 기초를 둔 연합주의가 아닌 이 갈등주의는, 항상 투쟁의 장소이기도 한 공동 행위, 차이와 복수성이 새겨지고 갈라진 세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항상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맞서 있는 공동의(concerted) 페미니즘적 노력의 모형을 만든다. 이 갈등주의가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아렌트의 재의미화된 갈등주의지, 고전적인 폴리스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남-녀 대당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것은 이 관습적인 대당을 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은 수월성(秀越性, excellence)이나 극적 자기과시가 아니라, 동질화와 정상화/표준화를 배경으로 하는 개성화 및 구별을 향한 탐험에 중심을 둔다. 벤하비브가 볼 때 갈등주의란, 행위자들이 “구별과 수월성을” 다투는 실천이다.57)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갈등주의의 구별-수여적(distinction-awarding) 효과를 명성이나 수월성에 대한 갈망과 즉각적으로 동일시하는 그녀의 견해는, 고전적 갈등주의에도 적용될 뿐더러 보다 (탈)근대적인 차원을 가질 수 있는 “구별”에 대한 대안적 독해를 박탈한다. 아렌트의 이론적 설명을 움직였던 구별에 대한 갈등적(agonal) 열정은 또한, 개성화 및 구별된 자아로서의 출현을 향한 투쟁으로 읽힐 수도 있다. 아렌트의 용어를 빌자면, “무엇”이라기보다는 “누구”, 명성 그 자체가 아니라 개성을 소유한 자아, 그것을 정의하고 고정하려 드는 (사회학적, 심리학적, 사법적) 범주들에 의해 결코 소진되지 않는 자아 말이다.
고전적인 아곤만이 수여할 수 있었던 명성과 수월성에 더 이상 속박되지 않을 때, 이 열정을 갈등적(agonal) 열정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승인된 페미니즘 실천들이 갈등주의적인 까닭은 그것들이 투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성별을 지배하는 실천들을 (재)정초하고 증대하고 수정하려는 정치적 투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아곤의 전투원들이 공적으로 지지되는 타자(Other)와 함께 그리고 맞서 투쟁하는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개성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갈등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동료들과의 투쟁을 지지하여 다양한 페미니즘들, 성/성별의 지배적 실천들과 동일성들, 그리고 그것들을 실천하고 강제하는 타인들과 함께 그리고 맞서 스스로를 개성화하고 위치 짓고자 한다.58) 갈등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관습적인 성/성별 실천을 중단시키고 관습적인 성/성별 이원항들의 자칭 우선성을 탈중심화함으로써 개성화와 구별을 획득하고 북돋는다.59) 이 개성화 과정은, 비록 일련의 행위들과 수행들을 누군가가 목격할 수도 있겠지만, 청중(audience, 관객)을 위해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와 같은 타인들과 제휴하여 개성화를 얻는 자아, 그리고 비록 항상 갈등적일 테지만, 이 공유된 지지와 투쟁의 실천들을 통해 동일한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타인들을 위한 것이다. 갈등주의적 개성화는 정치적인 또는 페미니즘적인 행위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다. 아렌트가 잘 알았던 것처럼, 개성화는 차라리 정치적 참여의 부산물 중 하나로 얻어지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인 공동 행위의 신고(辛苦)한 시험을 통해 아렌트적 행위자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발견한다. 이 같은 자기발견이나 변혁을 단순히 유치한(boyish) 태도로 회피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또한 현세적인 장치 안에서 특성과 개성의 발전을 신호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이 공동의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효과로 얻어지는 개성의 발전을 강조하는 것은,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한 동아리로 묶는 아렌트의 본래 시도를 복원한다.60) 이 복원은 현 시점의 동시대 페미니즘들에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여성”이라는 동질화적이고 규율적인 범주를 일부 페미니즘들이 활용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근래 우리가 차이와 복수성에 초점을 두다 보니, 일부 사람들이 통일적 동일성, 대의 또는 토대가 부재하는 가운데 어떻게 미래의 페미니즘이 공동의 행위를 추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와 복수성을 토대로 놓는 갈등주의적인 공동 행위를 이론화함으로써 (특별히 페미니즘을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돕는다. 그녀는, 주체성의 무엇-임(what-ness)을 행위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형상이 항상 이미 알려진 동일성을 의미하게 만들기보다는 “여성”을 의문시하려고 노력하는 페미니즘들을 위한 (의식하진 않았겠지만 귀중한) 모형을 제공한다. 아렌트는 (행위의 동작주(動作主, agents) 내부 그리고 사이에서) 차이들로 갈라진 공동 행위를 이론화함으로써, 공동 행위를 타인들과 “함께”일 뿐만 아니라 항상 동시에 “맞서는” 관계들에 우리를 연루시키는 (재)정초, 증대, 수정의 실천으로 생각하게 해 준다. 요컨대, 일단 우리가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상호 배타적인 양자택일로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는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 ― 페미니스트들이 항상 탈중심화하고 저항하며 초월하고자 노력했던 ― 지배적인 성/성별 이원항을 단순히 재활용하기보다는 그것에 개입하기에 좋은 위치를 점하는 갈등주의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정치 행위의 (증대되고 수정된) 전망을 전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다.61)



1) Rahel Varnhagen: The Life of a Jewish Woman, rev. ed., trans. Richard and Clara Winston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4), ⅹⅷ. 본문으로
2) 가장 적대적인 비난은 Adrienne Rich의 On Lies, Secretes and Silences: Selected Prose, 1966~1978 (New York: Norton, 1979)과 Mary O'Brien의 The Politics of Reproduction (Bost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81). 나는 리치의 비난을 아래에서 간략히 논하고 이 논문의 마지막 절에서 갈등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기각을 둘러싼 쟁점들을 취급할 것이다. 본문으로
3) The Human Condi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155, 200[국역: 한길사, 1996]; 이하 HC로 인용. 본문으로
4) On Revolution (New York: Penguin Books, 1963), 130[국역: 한길사, 2004]; 이하 OR로 인용. [역주] 아래에서 필자는 아렌트의 정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언어학적 개념을 사용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우선 기표(記表, signifier), 기의(記意, signified), 지시대상(referent)에 대해 알아보자. 기표란 우리가 말하거나 기록하는 시각적․음성적 물질성이고, 기의는 기표가 의미하는 개념이며, 지시대상은 기표나 기의가 지시하는 현실 속의 대상이다. 예를 들어 ‘집’이라는 글자, 그리고 우리가 ‘집’이라고 발음할 때의 음성적인 물질성이 기표고, 이 기표가 의미하는 내용인 ‘사람이 들어서 살 수 있게 만든 것’이 기의이며, 현실에 존재하는 건물이 지시대상이다. 한 편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것이 기호(記號, sign)이고, 이 결합 과정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부른다.
또한 필자는 영국의 언어철학자인 존 오스틴에서 유래한 진술문과 수행문의 구별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진술문이란 예를 들어 “당신은 나의 아내다.”처럼 참과 거짓을 따질 수 있는 문장이며, 수행문이란 “이 쪽으로 와라.”와 같은 명령, “당신은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 “이 달 말까지 재산을 양도하겠다.”와 같은 약속, 그리고 “이로써 폐회를 선포한다.”와 같은 선언 등, 발화 자체가 하나의 행위인 문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술문과 수행문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예로 든 “당신은 나의 아내다.”의 경우 참/거짓을 가릴 수 있다는 점에서 틀림없는 진술문이지만, 이 언표를 발화함으로써 부부 사이의 위계 관계를 (재)확립하고 아내로서의 의무를 암묵적으로 강제하는 효과가 수반된다는 점에서 수행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술문과 수행문을 엄격하게 나누고 그 중 어느 한 쪽을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라, 진술문 안에 내재한 수행적 계기, 수행문 안에 내재한 진술적 계기(또는 차라리 수행문이 진술적 계기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까닭)를 추적하고 폭로하여 다른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이 된다. 본문으로
5) 이하에서 나는 J. L. 오스틴(John Langshaw Austin)의 용어인 수행문과 진술문이 나의 아렌트 독해에서 필수적 역할을 놀게 할 것이다. 내가 다른 곳에서 논증했듯, 오스틴의 구별은 정초적 문헌의 두 계기 ― “우리는 생각한다” 대 “자명한 진리” ― 간의 부당한(illicit) 긴장에 관해 아렌트 자신이 만들어 낸 논증들을 유용하고 적절하게 예시한다. 이 긴장은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에 유리하게 그것을 해결하려는 아렌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것인데, 제도들이 스스로를 “앞으로 내내”(all the way down) 정당화하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아렌트는 그것에 응답하기 위해 권위를 비정초적이고 정치적인 증대와 수정의 실천으로 훌륭하게 이론화할 때, 그 불가능성을 사실상 긍정한다. 나는 여기서 이 실천은 또한 내가 갈등주의적 페미니즘과 동일시하는 동일성의 개입과 중단들을 망라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오스틴의 구별을 활용하는 것은, 실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가 주장하듯, “언어적” 구별을 사용하여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도 아니고, “모든 권력의 궁극적인 자의성이라는 데리다의 테제”(그런데 이는 전혀 그의 테제가 아니다.)를 방어하는 것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만일 그것이 벤하비브에게 그런 식으로 보인다면, 이는 그녀가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가 반드시 이론의 영역 내부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나 자신의 기획이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시도로 나타나거나 정당성의 문제는 해결불가능하다(혹은 이 경우에서처럼 어쨌든 둘 다 일 것이다)는 이론적 주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벤하비브의 시각이나 기획은 나와 다르다. 내가 오스틴과 데리다에게 도움을 받아 아렌트의 독립 선언 독해에서 끌어낸 교훈이란, 정당성 문제의 해결 자체는 진행 중이고, 끝없는 정치적 작업의 기획이자, 민주적 증대와 수정의 영속적 실천이지, 해결되어야 할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적 수준에서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또는 그것이 철학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는 그 정신 면에서 분명히 비(非)아렌트적이며, 정치를 전위시키려는 정치 이론이 갖는 일반적으로 문제적인 경향의 징후다. 더 요점으로 들어가 보자면, 정당성이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 문제라는 벤하비브의 가정은 자신의 진단적 선택지를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단 두 가지로 제한한다. 완전한 정당성과 완전한 자의성이 그것이다. 내가 볼 때 권위를 정치적 증대의 실천으로 이론화하는 아렌트의 주된 매력은, 그것이 이 이원항을 벗어나고 동요시킨다는 데 있다. Seyla Benhabib, "Democracy and Difference: Reflections on the Metapolitics of Lyotard and Derrida," Journal of Political Philosophy 2 (1994): 11 n. 24를 보라; 그리고 Bonnie Honig, "Declarations of Independence: Arendt and Derrida on the Problem of Founding a Republic,"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5 (1991): 97~113. 정치를 전위하려는 정치 이론의 경향에 관해서는, 나의 Political Theory and the Displacement of Politic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3)를 보라. 본문으로
6) 나는 니체를 빌어 말하고 있는데, 아렌트는 그에게, 비록 양가적이기는 하지만, 이 점에 관해 크게 빚지고 있다. Friedrich Nietzsche, On the Genealogy of Morals, ed. Walter Kaufmann, trans. Walter Kaufmann and R. J. Hollingdale (1887; New York: Vintage Books, 1969), 1, ⅹⅲ[국역: 책세상, 2002]. 본문으로
7) 나는 나의 글 "Declarations of Independence"에서 아렌트의 독립 선언 독해에 나타나는 이 같은 본질주의적 구성 요소를 비판하고 수정하면서, 자크 데리다를 따라, 독립 선언의 성공은 사실 그것의 실제적인 수행적 성격보다는 그것의 구조적 결정불가능성, 이 정초적 화행이 수행적 언표인지 진술적 언표인지 여부를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존한다고 논증한다. 여기서 나의 주장, 즉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이 자칭 진술적 동일성들을 수행문으로 재서술함으로써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겨냥하는 바는, 모든 동일성들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거나 손쉽게 재(再)제정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요점은, 모든 정체(政體)들과 동일성들, 정초들에 개입하지만, (자연과 신체, 또는 신의) 순수한 진술로 은폐되고 가장된 (진술문과 수행문 사이의) 결정불가능성을 되찾는 것이다. 이 구조적 결정불가능성은 증대와 수정의 공간이다. 그것은 자유롭게 부유하는 수행의 집합이 아니라, 진술과 자연화의 상당한 힘에 대한 일련의 정치적 개입과 투쟁을 가능케 한다. 본문으로
8) 한나 피트킨(Hanna Pitkin) 역시 이 차이에 유의한다. 그녀의 "Justice: On Relating Public and Private," Political Theory 9 (1981): 303~26을 보라. 그렇기는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다르게 읽는데, 그녀는 『혁명론』이 “더 솔직하”고, 신체와 사회적인 것에 대한 아렌트의 진정한 관점을 아마 보다 진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34). 그러나 이 같은 결론은 부당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이 얘기를 삼간다는 것을 함축하는데, 이는 전혀 아렌트답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피트킨이 신체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 중 하나를 다른 것들에 대한 얇은 베일로 간주하는 것은, 아렌트가 다른 것 위에 다른 하나를, 신체의 구별되는 특징화를 층층이 쌓는다는 점을 모호하게 만든다. 더 최근 논문인 "Conformism, Housekeeping, and the Attack of the Blob: The Origins of Hannah Arendt's Concept of the Social"(이 책의 3장)에서 피트킨은 덜 본질주의적인 접근을 택하는데, 여기서 그녀는 아렌트의 몇몇 문헌들을 가로지르는 그 복잡한 전환을 추적하면서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 개념을 탈자연화하려고 한다. 본문으로
9) Hannah Arendt, "What is Freedom?" in Between Past and Future, enl. ed. (New York: Penguin, 1977), 156[국역: 푸른숲, 2005]. 본문으로
10) Arendt, HC 179; 그리고 "What is Freedom?" 151~52. 아렌트는 이 같은 작인(作人, agency)의 속성들을 행동적으로(behaviorally), 그 자유를 타협하는 행위의 원인들로 읽는다. 본문으로
11) Arendt, HC, 179. 나는 “스스로를 놀랍게 하는”(self-surprising)이라는 용어를 조지 카텝(George Kateb)가 아렌트를 다룬 Hannah Arendt: Politics, Conscience, Evil (Totowa, N.J.: Rowman and Allanheld, 1984)에서 빌려 왔다. 본문으로
12) Hannah Arendt, Thinking, vol. 1. of The Life of the Mind, ed. Mary McCarthy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8), 29[국역: 푸른숲, 2004]. 이 주장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아렌트가 의미했던 것은 모든 “내부들”이 동일하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차이들은 흥미롭거나 중요치 않다는 것, 신체로서 우리 모두는 비슷하다는 것이었으리라. 본문으로
13) Hannah Arendt, Willing, vol. 2. of The Life of the Mind, 69. 아렌트는 이 주장을 특히 의지하기와 관련지어 제기하지만, 이는 정신 능력 세 가지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되튐에 특징적인 것이다. 본문으로
14) 내가 말하려는 것은 아렌트가 갈등주의적인 투쟁의 현상을 “정치적”이라고 이름붙였다는 것이지, 아렌트 자신이 이 내적 투쟁들을 묘사하는 데 “정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15) 엘리자베스 영-브루엘(Elisabeth Young-Bruehl)은 아렌트적 자아의 다중성에 유의한 유일한 아렌트 독자이지만, 그녀는 자아를 다중성으로 본 이 같은 관념과, 행위를 표현적인 것이 아닌 수행적인 것으로 본 아렌트의 접근을 연관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또 영-브루엘은 이 다중적 자아를 갈등주의적 투쟁의 장소로 보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녀는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견제와 균형”에 준거하는데, 이는 이 맥락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overarching) 통일성을 함축한다. Elisabeth Young-Bruehl, Mind and the Body Politics (New York: Routledge, 1989), 23을 보라. 본문으로
16) Arendt, HC 73.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그들의 신체로 삶의 신체적인 필요를 보살피는’[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 1254b25[국역: 박영사, 2006]를 인용하고 있다] 노동자들과, 자신들의 신체로 종의 물리적 생존을 보장하는 여성들”(72)을 묘사한다. 본문으로
17) 아렌트는 종종 그녀의 폴리스의 아곤(agon)적인 정치의 실천에 대한 (탄복스럽기 그지없는) 묘사와 그녀 자신의 정치 전망을 분명하게 구별짓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그녀의 비판자들은 종종 전자를 후자로 오해한다. 예를 들어 피트킨은 행위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이 “개인주의적”이라고 적는데, 그러나 피트킨의 인용구는(HC 41) 아렌트가 폴리스의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아렌트가 자신의 정치 관점을 묘사하는 곳에서, 심지어 『인간의 조건』같은 초기 저작―혹자는 이 역시 너무 갈등적이라고 말한다―에서조차 그녀는 그것이 항상, 항상 “공동적”(in concert)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18) Pitkin, "Justice," 342. 본문으로
19) Pitkin, "Justice," 342. 나는 “감성들”이라는 용어를 쉬라 도사(Shiraz Dossa)에게서 빌려오는데, 그는 피트킨과 아주 유사한 경우다. 그와 피트킨 모두, 노동, 작업, 행위가, 감성으로서 모든 자아들을 특징짓는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The Pubilc Realm and the Public Self: The Political Theory of Hannah Arendt (Waterloo: Wilfred Laurier University Press, 1989), 3장; 그리고 도사에 대한 나의 서평은 Political Theory 18 (1990): 322를 보라. 본문으로
20) 노동과 작업과 행위를 탈자연화함으로써 그것들의 효과를 우리 자신의 하기(doing)의 산물로 보라는 이 같은 요청은, 이 책에 실린 한나 피트킨의 논문에 담긴 입장과 유사하다. 피트킨은 아렌트가 사회적인 것에 할당한 믿을 수 없는 힘에 어리둥절해한다. “우리에게 우리의 힘을 가르치는 것―우리는 우리의 곤란의 원천이고 우리가 현재 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에 주되게 노력한 사상가에게서, 사회적인 것을 블롭(Blob, 유명한 SF 공포영화에 나오는 우주생명체)이라 보는 공상과학적인 전망[“우리를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우리의 자유와 정치에 달려든다.”]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다”(53). 본문으로
21) 아렌트는 정치“의 모든 영역"이 “제한”되어야 하고, 그것은 “인간과 세계 실존 전체를 포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Arendt, "What is Freedom?" 264). 본문으로
22) Arendt, Willing, 37~38, 101~2; 강조는 필자. 나는 다른 곳에서 아렌트의 설명에서 의지는 자기산출적이면서 동시에 그 고유한 활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Arendt, Identity, and Difference," Political Theory 16 (February 1988): 81. 그러나 이 글에서 강조한 문구 때문에 나는 아렌트가 후자의 특성을 의지에 부여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부여했다는 점을 납득하게 됐다. 본문으로
23)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and Gender Constitution: An Essay in Phenomenology and Feminist Theory," in Performing Feminism, ed. Sue-Ellen Cas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273. 본문으로
24) Pitkin, "Justice," 336. 본문으로
25) Nancy Fraser, Unruly Practices: Power, Discourse, and Gender in Contemporary Social Theor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9), 76. 본문으로
26) Arendt, "Preface," in Between Past and Future, 3~4. 본문으로
27) Butler, "Performative Acts," 276, 271, 280, 그리고 271. 본문으로
28) 이론의 고유한 사명은 정치 제도들의 포괄적인 정당화를 제공하는 데 있다는 관점에 맞서, 위와 같이 정치 이론의 과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옹호하는 나의 견해는 각주 5를 보라. 본문으로
29) Pitkin, "Justice," 336. 본문으로
30) Arendt, OR 47. Cf.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274. 본문으로
31) Adrienne Rich, On Lies, Secrets and Silence, 211~12. 아렌트의 독자들은 한 동안 이 인용문을 재유통시켰다. 리치의 논문 "On the Coditions of Work" 역시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어쨌거나 “불구적”인 책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만한” 책에서 인용한 문구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 본문으로
32) Hannah Arendt, Men in Dark Times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68), 44[국역: 문학과지성사, 1983]; 이하 MDT로 인용. 아렌트는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여성들이 여성 참정권 활동에 이끌린 이유가, 그 운동이 당시 여성에게 개방된 몇 안 되는 활용가능한 정치적 행위의 기회였기 때문이라는 가능성은 결코 고려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33) 이 얘기는 출처가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아렌트는 미국 정치 과학 협회 여성 간부 회의에 출석하기를 거부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34) 아렌트의 Eichmann in Jerusalem[국역: 한길사, 2006]의 출판을 둘러싼 논쟁은 Dagmar Barnouw의 Visible Spaces: Hannah Arendt and the German-Jewish Experienc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에 잘 기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35) Gershom Scholem, "'Eichmann in Jerusalem:' An Exchange of Letters between Gershom Scholem and Hannah Arendt," Encounter (January 1964): 51~52(강조는 필자). 이하 숄렘에서의 모든 인용문은 51~52에서다. 이 절에서 아렌트의 모든 인용문은 53~54에서다. [역주] 번역하기 아주 까다로운 이 문장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fact that he regards Arendt "wholly as a daugher of our people and in no other way." 본문으로
36) 그녀가 스스로를 “독일 철학의 전통”과 동일화할 때조차, 이는 조건부다. “만일 내가 어딘가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독일 철학 전통에서다.” 더 넓게 보자면, 이 같은 어법은 아렌트가 그녀의 기원이라는 문제가 단순히 발언의 주제가 아니기를 선호했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즉, 그녀는 “어딘가에서 온 것이라고 말해지길”(강조는 필자) 원치 않은 것이다. 본문으로
37) 그리고 숄렘 또한 마찬가지로 그의 유대주의와 시오니즘 이외의 차이들과 동일성들에 의해 구성된다. 아렌트는 그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는데 ― 그리고 그녀의 동일성을 그가 투사한 것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보복한다 ― 그 방법으로 그녀는 숄렘이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할 때 그의 히브리 이름 “게르숌 숄렘”을 사용하는데도 “친애하는 게하르트(Gehard)”라는 호칭을 쓴다. 본문으로
38) 나는 숄렘이 이 맥락에서 “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렌트가 성/성별 차이에 의해 구별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적 형상, “우리 민족”에 대한 의무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한다. 요컨대 숄렘의 문구에서 “딸”이라는 용어는 아렌트의 성/성별을 그녀의 유대 동일성 안으로 문제 없이(unproblematically) 동화시키려 든다. 본문으로
39) 동일성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아렌트의 주장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은 그러나 맥락에 따라 분명히 달라진다. 그녀는 누군가가 “공격당하는 동일성의 견지에서”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하는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스스로를 자신의 동일성의 견지에서 위치 짓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이 책에 실린 Dietz, 48 n. 106을 보라). 이 전략의 맥락의존성 때문에, 누군가는 항상 상황을 진단하고 행위의 공간에서 동일성의 (아렌트에게는 불운한) 적절성에 동의할 것인지 아니면 그 사적 자유나 부적절성을 고집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이 진단에 관한 토론은 페미니즘이 주기적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숄렘과 서신을 교환했던 이 경우에는, 아렌트가 상황을 잘못 진단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공격당하는 동일성, 유대인이 되는 그녀의 고유한 방식의 견지에서 대응했어야 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부분적으로는, 그녀와 숄렘이 둘 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녀의 유대 동일성은 공격당하는 것일 수 없고 마찬가지로 대응을 기초 짓는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그녀의 동일화주의적 가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본문으로
40) 나는 “자신의 성별을 (행)한다”라는 통념을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276에서 빌려 왔다. 본문으로
41) Hannah Arendt, The Jew as Pariah, ed. Ron H. Feldman (New York: Grove, 1978). 본문으로
42) 나는 아렌트의 설명에서 정치적 공간의 다중적인 장소들을 Political Theory and the Displacement of Politics, 116~17에서 추적한다. 본문으로
43) 사실, 아렌트의 국외자 관점에 함축된 개인주의는 숄렘과의 관계에서 그녀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숄렘은 자신이 배신자라고 간주하는 아렌트에게 회복시키고자 하는 유대 민족의 공동체적 형상을 되풀이해서 호소한다. 아렌트는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고 그 틀 내부에서 대응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견해에 동감했을 만한 (과거나 현재의) 타인들과 동맹을 맺을 수도 있었고, 유대 공동체에 대해 그녀 자신을 유대 내적 비판이라는 대안적인 유대 역사의 일부로 위치 지을 수도 있었다. 아렌트는 이 마지막 전략을 그녀의 레싱 연설에서 활용하는데 ― 리사 디쉬(Lisa Disch)가 주장하듯(이 책 12장) ― 이 때 아렌트는 독일 계몽주의 전통에서 레싱을 재생시켜 그녀 자신이 그 상속자인 대안적인 지적 계보의 일부로 그를 위치 짓는다. 본문으로
44) 이 절의 초안에 논평해 준 것에 대해 린다 제릴리(Linda Zerilli)와 모리스 캐플런(Morris Kaplan)에게 감사를 전한다. 본문으로
45) 예를 들어 한나 피트킨은 아렌트의 정치적 행위자들이 “유치하게 젠체하며” “낭만주의적”이고 “갈등주의적인 남성 전사”의 동호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비난한다("Justice"). 또한 Patricia Springborg, "Hannah Arendt and the Classical Republican Tradition," in Thinking, Judging, Freedom, ed. G. T. Kaplan and C. S. Kessler (Sydney: Allen and Unwin, 1989)를 보라; 그리고 Wendy Brown, Manhood and Politics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eld, 1988). 본문으로
46) 요컨대 벤하비브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논쟁들을 사실상 되풀이하는데, 이들은 아렌트가 팔로스중심주의적(갈등주의적)이거나 여성중심적(연합주의적)인 사상가라고 비난했다. 벤하비브의 혁신은 아렌트 사상의 이 같은 차원들의 한 쪽 면으로 그녀를 배타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렌트적 도식 안에 양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가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앞선 페미니스트들처럼 그녀는 이 두 가지 차원들을 대립적이고 위계적으로 위치 지으면서, 우리가 그것들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식으로 나아간다. (아렌트에 대한 앞선 페미니즘적 수용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나의 "The Arendt Question in Feminism,"과 Mary Dietz의 "Feminist Receptions of Hannah Arendt," 이 책의 1장과 2장을 보라.) 본문으로
47) Seyla Benhabib, "Feminist Theory and Hannah Arendt's Concept of Public Space," HIstory of the Human Sciences 6 (1993); 97~114. 본문으로
48) 위의 책, 103~4, 102. 본문으로
49) 각주 18을 보라. 벤하비브가 아렌트에 의한 갈등주의의 재의미화를 무시한 것은 이 맥락에서만이다. 다른 곳에서 그녀는 그것의 한 차원에 분명히 주목하면서, 아렌트는 “호메로스적 전사-영웅을 진압하고, 그렇다, ‘길들여’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중한 시민을 낳는다.”(위의 책, 103; 강조는 원문)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50) 위의 책, 104, 105. 본문으로
51) 위의 책, 100. 본문으로
52) Seyla Benhabib, "Hannah Arendt, and the Redemptive Power of Narrative," Social Research 57 (1990): 193~94. 본문으로
53) "The Pariah and Her Shadow," 이 책, 94~95, 97~100. 본문으로
54) 위의 책, 87~88, 93, 97. 파른하겐의 살롱이 거둔 매우 일시적인 성공, 그리고 그것이 가부장적 제도 권력이 겪은 이 같은 우연하고 일시적인 공백에 의존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이 사례의 진정한 교훈은, 연합주의를 옹호하려는 이들은 이 같은 귀중한 대안적인 행위의 공간을 국가와/나 가부장적 공적 영역의 헤게모니적 열망에 맞서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갈등주의를 배우고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55) 위의 책, 104 n. 23. 본문으로
56) 요컨대 여기서 나의 목표는 연합적이거나 페미니즘적인 공적 공간의 모형으로서 살롱의 장점을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이원적 대당으로 위치 짓고 ― 성별화하여 ― 합의적인 정치 모형과 담론의 공통 기반에 합치할 수 있는 아렌트와 페미니즘을 발전시키려는 벤하비브의 더 큰 노력 안에서 살롱의 역할을 간략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다. 본문으로
57) "Feminist Theory and Hannah Arendt's Concept of Public Space," 103. 본문으로
58) 아곤을 공동 행위와 동시에 투쟁의 장소로 설명하는 것에 관해서는, 나의 "The Politics of Agonism," Political Theory 21 (August 1993): 528~33을 보라. 본문으로
59) 이 같은 (변모하는 동맹적) 실천의 몇몇 사례에 관해서는, 이 책 14장에 있는 멜리사 올리(Melissa Orlie)의 논문을 보라. 올리는 성/성별의 정치가 또한 항상 인종, 계급, 성욕의 정치와 겹쳐 있는 방식을 소중하게 부각한다. 본문으로
60) 이 갈등주의가 아렌트의 그것과 갈라지려는 목적이, 그녀의 행위가능한 영역을 넓히고 이른바 사회적인 용무들과 이른바 진술적 사실들을 포함하는 데 있는 한에서, 갈등주의는 (이 책 36의 매리 디에츠와 반대로) 동일성을 그것의 필수적으로 중심적인 용무로 간주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만 이 논문에서만 그럴 뿐이다. 만일 이 갈등주의가 항상 얼마간 동일성의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동일성―특히 (사법적이거나 사회적) 법 아래서 주체성의 형성과 생산―이 항상 사회-정치-사법적인 질서의 하나의 효과나 수단이며, 따라서 정치적 개입의 필수불가결한 하나의 장소라는 점을 갈등주의가 알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1) 특히 이 문구 “함께 그리고 맞서”는 벤하비브가 독자로서 아렌트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Feminist Theory and Hannah Arendt's Concept of Public Space," 100). 그렇게 하면서 그녀가 갈등주의적 관계를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다. 그녀의 아렌트 독해는 벤하비브 자신의 입장을 동시에 개성화하는 공동 행위다. 또한 벤하비브 자신이 일시적으로나마 갈등주의와 그녀의 연합주의의 변종이 실제로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도 유의해야만 할 것이다. “구별과 수월성을 겨룬다는 의미에서 모든 진정한 정치와 권력 관계들이 갈등주의적 차원을 포함하는 한편, 갈등적 정치는 또한 설득과 함의의 힘에 기초한 연합적 차원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두 모형 간의 날카로운 분화는 완화될 필요가 있다”(103). 이렇게 말했으면서도 벤하비브는 계속 이 대당의 용법을 상술하고 그것을 완화시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식으로 계속한다. 본문으로
2006년12월12일 19: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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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21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감사힙니다.

Chopin 2006-12-2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는 벤야민의 먼 친척이라는 것 밖에 몰랐는데,,,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감솨~~~
 

지난 번에 발리바르의 영어 논문 한 편을 올린 적이 있는데(http://www.aladin.co.kr/blog/mypaper/900595),

사회진보연대 반전팀에서 이 논문을 번역했길래, 여기에 올립니다.

(출처는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1202)

[사회운동] 10월호에 이 번역본이 수록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바쁜 일정에도 애써 번역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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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서의 정치, 정치로서의 전쟁: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변이들



에티엔 발리바르 (2006년 5월 8월)

* 번역: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편집자주] 이 글은 에티엔 발리바르가 2006년 5월 8일 미국 에반스톤에 위치한 노스웨스턴 대학의 ‘앨리스 벌린 카플란 인문학 센터’에서 행한 공개강좌의 강연문이다. 전쟁과 폭력 문제에 관한 그의 분석은 이미 『사회운동』에 두 차례 게재되었다. 앞서 실렸던 두 글을 먼저 소개하면, 「평화를 향한 대장정」(사회운동, 2006년 1-2월호)은 1982년에 작성된 것으로 뉴레프트리뷰 출판사가 조직한 심포지엄에 제출된 논문을 편집한 『절멸주의와 냉전』에 담긴 것이다. 1970년대 말 미국과 나토가 유럽에 신형핵무기 배치를 강행하면서 강대국 간의 핵전쟁 위험이 다시금 고조되고, 이에 따라 서유럽에서 반핵평화운동이 다시 분출했다. 발리바르는 이 글에서 동서 핵대결의 ‘세력균형’이란 논리의 악순환을 깨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각국들이 먼저 핵무기 도입․배치를 중단․폐기하고 나토 동맹체계를 해소하는 ‘일방적 군비축소’와 ‘적극적 중립주의’를 단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또한 비슷한 시점에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을 비롯해 동유럽에서 민중운동이 확산되는 것에 주목하며, 냉전체제 전반에 균열을 가하기 위해 양 진영의 운동이 수렴점을 찾으려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도 지적했다.) 한편 두 번째 글, 「잔혹성의 지형학에 관한 개요: 세계적 폭력시대의 시민성과 시빌리티」(사회운동, 2004년 6월호)는 2004년에 출판된 것으로, 앞서의 글이 냉전 시대의 산물이라면 두 번째 글은 냉전이 붕괴된 후의 세계정세를 ‘세계적 폭력’이란 관점에서 조망한다. 이 글은 지금의 세계가 전쟁, 이른바 ‘인종청소’, 경제의 파멸로 인한 기근과 절대빈곤, 대재앙(외견상 자연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규모의 살인과 같은 유행병, 가뭄, 홍수, 지진) 등 잔혹한 폭력의 지대를 창출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극단적 폭력은 상이한 이유로 발생하지만 누적효과를 낳고, 결국 세계를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는 ‘초국경’(원한의 경계선)을 생산한다. 나아가 세계적인 시민성을 창출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조건으로 인하여 죽음의 지대의 인민은 불필요한 잉여로 간주되고, 외부세계는 예방적 반봉기라는 관점에서 이 지대에서 벌어지는 상호제거 또는 절멸을 조장하거나 이에 개입한다. 이번에 소개하는 「전쟁으로서의 정치, 정치로서의 전쟁: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변이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다양한 전쟁이론을 고찰한다. 저자는 전쟁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대표적인 명제들의 유효성에 대해 질문하고 그의 이론체계에 내재한 난제와 모순을 분석한다. 예를 들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대표적인 명제는 현실을 설명하는 묘사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역으로 군사적 목표가 정치의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처방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전투로 실현되는 군사전략의 자율화와 파괴 경향이 억제되지 않는다면 ‘제한전쟁’은 ‘절대전쟁’으로 극단화되고, 정치의 조건 그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왕조전쟁에서 19세기 국민전쟁으로 현실의 전쟁이 전개된 역사는 ‘극단으로의 상승’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이 극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 이르러서는 군사전략의 근대적 주체였던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가 해체되면서 폭력의 국가 독점과 민족국가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통합이 점점 더 의문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쟁의 역사는 한 단계 더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대별되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전통을 검토하면서 마오쩌둥의 ‘유격대․지구전’ 이론이 클라우제비츠의 경고를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경유해서) 인식하고 정치적 목적에 종속된 군사전술이란 지향을 실천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마오쩌둥 역시 혁명정당이 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문화혁명을 경과하면서도) 완전히 버리지 못했고, 유격대․지구전 이론을 통해 역전된 국가와 인민의 위계관계가 다시 당-국가의 우위로 재역전되는 경향을 막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억압적 국가장치의 재건)과 절대전쟁으로의 진화 경향(정치의 조건에 대한 파괴) 역시 재확립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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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중적 의미에서 진정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우선 활기차게 진행 중인 논쟁이 있다. 이것은 동시대 전쟁의 클라우제비츠적인 또는 비-클라우제비츠적인 성격에 관한 논쟁으로, 이는 ‘전쟁학자’들의 협소한 논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이 논쟁은 대략 25년 전[1980년대 초반 미국 레이건 정부 당시에] 시작되었다. 그 시점에서 [핵무기에 의한] 강대국의 상호파괴에 대한 전형적인 냉전 시대의 강박증은 주로 제3세계에서 발발한 ‘저강도분쟁’(low intensity conflicts)에 대한 군사전문가와 정치이론가의 첨예한 관심으로 대체되었다 (제3세계라는 범주는 제2세계가 붕괴한 후에도 여전히 많이 사용된다). 저강도전쟁은 극히 비대칭적이었는데, 게릴라 형태의 적에 대항하는 북반구의 기술적으로 정교한 군대의 개입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마틴 반 크레벨드와 미국의 사무엘 헌팅턴은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정치환경에서 ‘비(非)-클라우제비츠적’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들인 듯하다. 그 후 전(前)유고연방과 다른 지역에서 ‘종족전쟁’(ethnic war)이 일어났다. 이 전쟁들은 영국의 평화이론가이자 정치학자인 매리 캘도어와 다른 학자들로 하여금 과거의 전쟁(Old War)과 대비되는 새로운 전쟁(New Wars)이란 슬로건을 제시하도록 자극했다. 새로운 전쟁은 정규군을 지닌 민족국가가 아닌 [전쟁의 새로운] 역사적 ‘주체’를 동반한다. 또한 그들에 따르면, 클라우제비츠의 저명한 저작 『전쟁론』에서 파생한 관념들이 일반화되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전략적 관심사와 새로운 기술에 적용되고 지난 150년 동안 전쟁이론가의 주요한 관심사였더라도 그 관념들의 설명적 가치는 한계에 달했다. 전쟁과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 인종, 경제를 포함하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작용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만 그 관념들은 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현실 물리세계를 설명하며 영예로운 이력을 쌓은 후 어느 시점에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과 전쟁학은 또 다른 유형의 [군사적] ‘계산’(calculation)을 고려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새로운 비-클라우제비츠적 이해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현대 전쟁에 대한 분석가들이 클라우제비츠의 도식과 개념을 분석적으로나 규범적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옹호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나는 특히 『무질서의 제국』(Empire of Disorder)이라는 주목할 만한 저서를 발간한 알랭 족스가 그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는 클라우제비츠를 사회․정치적 현상이자 국가주권의 상관물인 전쟁에 대한 이론가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 그는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슈미트뿐만 아니라 홉스, 마르크스, 베버를 전쟁이론가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상당 부분 미국이 중동에서 전쟁을 개시하고 처음 3년 동안 전쟁이 전개된 방식의 결과다.


[미국의 중동전쟁에서] 신속히 이어진 성공적인 공격과 점점 더 어려워지는 방어 전투는 (심지어 퇴각의 가능성, 나아가 필연성에 늘 시달린다) 베트남 전쟁과의 유사성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지리적 또는 지리-문화적 조건에서 군사작전 내부에서 정치적 요인의 복귀에 관한 고전적 논의와,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군의 효율성이 감소하므로 결국 공격 전략보다 방어 전략이 우월하다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를 부활시킨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를 적용하기에는] 모두가 염두에 두는 난점이 있다. 그것은, 철학적 범주를 사용해서 말해보자면 ‘순수한’ 클라우제비츠 모델에서 결국 승리하게 되는 전략의 ‘주체’는 이미 형성된 것이든 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든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군대-인민-국가의 통일체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미국의 침략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에는 적용될 수 있지만 이라크 전쟁의 경우에는 매우 의심스러우며 아마도 부적합한 주장이 될 것이다. ‘인민의 저항’ 또는 ‘반제국주의 지하드’를 주창하는 일부 무명의 이데올로그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단순한 방식으로 반미 군사행동의 ‘주체’를 식별할 수 없으며 ‘이라크’ 국가와 통합된 인민의 존재 자체가 문제다.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적 관념이나 용어,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을 적용하려고 할 때 이와 비슷한 난점이 작용하는 듯하다. 현재 상황에 관한 표상은 두 적들 간의 (세계적 규모의) ‘격투’이며 각각은 상대방의 섬멸을 추구한다. 미국 정부는 이를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두 적들 간에 명백한 비대칭성이 존재하지만 현재 상황은 ‘순수한 전쟁’(pure war)의 법칙으로서 ‘극단으로의 상승’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 역시 난관에 부딪친다. 클라우제비츠의 모델에서 폭력을 극단으로 상승하게 하는 가동장치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사활적인’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각 적대국의 의지이며, 이는 합리적인 도박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극단으로의 상승에는 제한 또는 자기제한의 원칙 역시 포함된다. 전쟁을 위한 전쟁, 자신의 권력을 파괴하는 전쟁은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하며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전쟁, ‘악마’와 동일시되는 불확정적인 적에 대항하는 전쟁이란 관념 역시 불가능하다. 이러한 전쟁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전쟁’이라고 불러선 안 되며 정치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인 또는 신화적인 다른 이름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고찰이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 왜 전쟁과 정치의 본질적, 또는 구성적인 관계에 대한 반성이 심원하게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채로 남아있는지 사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 비판적인 의미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모든 명제와 정의를 재조사하고, 전도하고, 개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가 남편이 남긴 원고를 『전쟁론』으로 출판한 후 지난 150년 동안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그것은 필수적이다).1) 나에게 시간이 있다면 나는 클로드 르포르와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에 관해 쓴 모델에 근거해서 (그들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자신들의 정의를 클라우제비츠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클라우제비츠가 항상, 완전히 합리적이진 않더라도 정치를 사고 가능하게 하는 핵심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정치이론 내부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문헌에 대한 ‘연구’는 결코 끝나지 않으며, 여기에는 클라우제비츠를 독해함으로써 생산되는 영속적인 곤란함이 동반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문헌적 근거를 결여한 결론을 선취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히 문헌으로 돌아가서 개념적 독자성들을 개략적으로 평가하자.


나는 발표를 상당히 불균등한 두 부분으로 나눌 것이며, 각 부분은 훨씬 더 논의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첫 번째, 훨씬 더 긴 부분에서는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을 해석 또는 재구성하는 문제를 다룰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파생’된 개념과 클라우제비츠에 대한 ‘대응’을 다룬다. 이는 상이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클라우제비츠의 민족전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대응물로서 ‘계급’이 상기될 수 있다. 이어 매우 간략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서 나는 하나의 본질적 통일체 내에서 전쟁과 정치를 접합하는 방식들에 함축된 ‘주체’(또는 비(非)주체, 또는 불가능한 주체) 개념의 쟁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제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읽을 때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를 상기해보자. 그의 저작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고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저작의 상태는 파스칼의 『명상록』이나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와 비슷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저술 과정에서 결정적인 수정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작 전체를 다시 쓰길 원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저작에서 철학적, 실용적 수준의 내적 일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지금까지 수백 편의 논평들이 출판되었을 만큼 매우 어려운 과제다. 나는 이 논평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불완전하고 편향적일 수 있으나 인위적이지 않길 바라는 해석 절차를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나의 해석은 클라우제비츠의 명제가 계속 난점을 제기하거나 새로운 재해석을 요청한다는 독해 결과에 근거를 둔다. 나는 네 가지 명제를 추려내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 또는 공리로 구성할 것이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적 기획이 각 명제들의 (서로 분리되어 있든, 서로 반작용하든) 과도한 결론을 통제하려는 계속되는 시도라고 설명할 것이다. 나는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사상가들이 상이하게 이해하든가, 또는 재정식화하든가, 아니면 서로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문제의 명제들이 동일한 집단을 이룬다고 제안할 것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중에서 (최소한 현재에) 군사전문가 집단을 넘어서 가장 유명하고 자주 논의된 것은 전쟁의 정의 또는 특징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독일어로 Fortsetzung)”(때로는 단순한 계속이다)이라는 명제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략으로서 ‘방어’는 본질적으로 ‘공격’이나 ‘공세’보다 우월하다는 명제다 (그런데 전략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 역시 분명히 동반된다). 나는 두 명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할 것이지만, 다른 두 명제를 더 언급해야만 [체계 또는 공리가] 완성된다고 제안할 것이다. 나는 네 가지의 사실상 독립적인 명제들의 체계 또는 공리를 통해서만 클라우제비츠의 의도와 난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할 것이다.   


‘계속’ 명제는 『전쟁론』의 분리된 두 곳, 1편과 8편에서 [서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두 번 반복된다. 그것은 저작의 양끝에서 제시될 뿐만 아니라, 저자의 암시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상이한 개념들에 상응한다.


첫 번째는 확실히 전쟁이 ‘계속해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다른 수단을 통해’ 또는 ‘다른 수단을 도입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관념을 강조한다. 이 때 다른 수단은 위협이나 압박뿐만 아니라 현실의 폭력, 심지어 극단적 폭력의 수단이다. 이것은 정치의 통상적 또는 정상적 수단은 비폭력이며,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에] 불충분해지므로 정상적 수단을 넘어서 ‘다른 수단’(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면, 즉 정치의 가능성(과 권력)을 확대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정치 행위는 절대적 한계에 도달한다는 관념을 함의한다. 그러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며, 정치적 주체의 존재가 위험에 빠질 뿐만 아니라 [정치]행위의 정치적 성격과 정치의 정치적 ‘논리’ 자체가 전복될 수 있는 위험 지대, 제한 영역으로 진입한다는 관념 역시 함의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클라우제비츠는 폭력적 수단(전쟁이라는 수단, 군사제도와 애국주의의 발생과 같은 수단[전쟁]의 수단)의 사용은 정치에 반작용하거나 정치를 변화시킨다는 관념을 도입한다. 정치는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면 변형될 수밖에 없으며, 아마도 근본적으로 변형되고 변성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전쟁의 접합이라는 문제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처음 진술의 본체가 위태로워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즉각 변증법적 진술로서 제시된다.


하지만 두 번째 정식이 있다. 두 번째 관념이 강조하는 것은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일 뿐’이며 정치적인 것의 정상적 한계를 침해하지 않지만, 이러한 한계 내에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정치적 주체는 상황, 세력, 이익에 따라 어떤 정치적 ‘도구’로부터 다른 도구로 이동할 수 있으며 (클라우제비츠는 ‘도구’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한다) 이제 정치적 주체의 특징은 바로 폭력적 수단과 비폭력적 수단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비폭력적 수단의 사용에만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주권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확실히 이러한 정식으로부터 정치의 합리적 성격에 대한 어떤 표상이 나타난다. 특히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어떤 상황을 조정하기 위하여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정치의 합리성이 설명된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 역시 변증법적 관념이라는 것이, 또는 잠재적 긴장과 위험성을 동반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묘사로 해석될 수도 있고, 처방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한편으로 정치는 자신의 본성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의 폭력적 수단은 전쟁의 결과, 전쟁을 사용하는 자에게 끼치는 반작용 효과, 전쟁의 ‘논리’가 정치적 합리성을 벗어나지 않거나 전복하지 않을 때만, 즉 독립적 논리가 되지 않을 때만 정치적 수단으로 남는다는 경고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독립적’ 논리이지 않은가? 클라우제비츠가 함의하는 것은 정치가 전쟁을 도구화할 수도 있고 전쟁이 정치를 도구화할 수도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거나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는 정치에는 ‘논리’(logic)가 있고 전쟁에는 오직 ‘문법’(grammar)만 있을 뿐이며, 전자가 후자에 대해 최우선권(primacy)을 지닌다고 썼다.


내가 보기에 바로 여기에 난점이 존재한다. 우리도, 클라우제비츠도 이 난점을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클라우제비츠는 다른 정식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한 난점은 앞으로의 고찰을 통해 규명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정치와 관련하여 전쟁을 두 번, 서로 다른 두 각도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정치의 전부가 아니지만 (왜냐하면 정치는 전쟁과 다른 절차를 지니며, 이 역시 동일하게 필수적이다) 정치의 본질과 관계를 맺고 그것에 영향을 끼친다. 정치가 전쟁에 의존하는 방식과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정치에 미치는 결과는 정치의 본질을 드러내고 실제적으로 정치를 결정한다. 확실히 클라우제비츠가 피하고자 했던 것은 전쟁에 대한 의존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주장이며, 전쟁의 폭력적 수단의 사용과 전쟁의 논리적이고 실존적 함의(예컨대 하나 이상의 ‘적’을 지목해야 할 필요성)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처음 진술의 역(‘정치는 전쟁의 계속이다’, ‘정치는 전쟁의 결과다’)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이러한 주장을 피하고자 했지만 이런 시도 역시 난점들을 지니며, 그 문제들은 클라우제비츠의 계승자들을 늘 괴롭혔다는 것을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도구’로서 전쟁의 활용과 그것이 정치 그 자체에 미치는 역효과에 대해 문제제기하길 원한다 (또는 필요로 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이 과거 로마의 사법적․정치적 원리를 근대적으로 다시 정식화한 것이라고 이해하고자 할 수도 있다. “문관이 군을 제압한다”(cedant arma togae), 이는 전쟁의 무장행동과 군사제도가 문관의 최우선권에 복종되어야한다는 것이다.2) 그러나 규범적 가치를 지닌 이 정식은 클라우제비츠를 괴롭혔던 문제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전쟁은 정치에 반작용하고, 정치를 가장 심원하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하는 새로운 형태로 변형하며, 이러한 형태에서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문제가 되고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반면 전쟁을 정치적인 것의 최우선권에 영속적으로 종속시킨다는 것은 전쟁이 합리적이라고(또는 합리적인 채로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전쟁의 합리성은 하나의 고리를 형성하는 수단과 목적의 ‘실천적’ 관계를 통해 본질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전쟁의 합리성은 정치적인 것 자체로부터 유래하는 목적론적 합리성이며, 정치적인 것은 전쟁의 합리성에 대한 척도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놀라운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 폭력의 극단에 이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의 극단, 즉 현실적 파괴가 문제가 되는 폭력의 극단에 이른다는 것은 ‘순수한 폭력’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투(Gefecht)의 관리로 규정한 전술의 수준에서 폭력이 극단에 이르고, 여기서 인간이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다. 그러나 전술과 전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전쟁의 일부이며,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전략적’ 목표에 종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전략의 문제(전략의 정의, 기능)가 클라우제비츠에게 가장 중요하고 또한 아마도 가장 곤란한 문제인지, 결국에는 이 문제가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회피되고 마는지를 이미 이해할 수 있다. 전략은 전쟁에 대한 (역사적, 개념적) 분석 속에서 극단적 폭력(절대적 수단)의 수준과 정치적 합리성(절대적 목적)의 수준을 접합한다. 우리는 인간학의 용어법을 도입해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란 이름으로 정치와 결합시키는 ‘폭력’은 무제한적 폭력이 아니라 제도적 폭력이며, 제도적 폭력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은 ‘폭력이 정치의 계속’이 아니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에게 문제는 어떻게 폭력이 극단에 이르면서도 제도의 한계 내에서, 제도적인 것으로 남게 할 수 있느냐이다. 하지만 대립물의 통일이 유지될 수 없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또는 발생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변이들이 실천적 동기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매번 어떻게, 왜 발생하는지 이미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변이들은 ‘전쟁이 다른 수단, 즉 극단적 폭력의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며, (본래의 가설에 따라) 정치는 정치적 합리성 또는 목적에 종속된 도구로서 폭력을 사용한다’는 원리를 형식적으로는 유지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이들은 정치적인 것에 관한 통념과 ‘전쟁’의 정의에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다. 역으로 그 변이들은 정치, 전쟁, 폭력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만 ‘계속’이라는 관념을 주장하거나 문제로 삼을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러한 변이들은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이 지닌 순환성과 동시에 초기 조건을 훨씬 뛰어넘는 생산성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클라우제비츠가 더욱 구체적인 일련의 공리들 내에서 일반적 원리와 결부시킨 다른 명제들을 고려함으로써만 가능해질 것이다.


공격 전략에 대한 방어 전략의 우월성


『전쟁론』에서 발견되는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두 번째 명제는 ‘공격’에 대한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과 관련된다. 이 명제 역시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고, 여러 번 다시 정식화된다. 하지만 방어와 공격을 다루고, 이런 관점에서 상호 검토를 다루는 6편과 7편에서 주요 논의가 전개된다. 클라우제비츠는 방어의 우월성이 전술 수준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것도 아니며, 따라서 방어의 우월성이란 전략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수준에서 전형적으로 존재하고 전략 이론의 전체 대상은 이 명제를 확립하고 여러 환경과 조건에 따라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전형적인 순환을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방어의 전술적 우월성이란 주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전술적 공격은 모든 전략적 방어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관념은 그와 대단히 상반된다 (왜냐하면 전술적 공격은 적에게 피해를 주고 적의 전쟁수행 능력, 즉 기동과 판단 능력을 부단히 파괴하기 위해서 세력관계에서 나타나는 시공간적 불균형을 활용하며, 이는 특히 최초 공격에서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의 계승자 중에서 마오쩌둥은 유격대 전쟁을 이론화하면서 [방어 전략과 전술적 공격의] 상호 보완성를 일관되게 발전시킬 것이지만, 이는 클라우제비츠에게 이미 명백히 존재했다. 또한 ‘방어적 정치의 우월성’ 또는 본질적으로 우월한 방어의 정치(예를 들어 민족의 방어, 민족경계의 방어, 독립의 방어)라는 주장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이는 아마도 가장 어려운 지점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방어의 정치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 이론의 ‘현실주의적’ 판본과 같거나 그 일부다.3) 폭력의 적법성(ius ad bellum)의 근대적 판본은 오로지 외부의 침략에 반응하여 민족이 수행하는 방어적 전쟁만이 적법하다는 것이다. 이런 전쟁은 적법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리고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결국에는’이란 여러 예외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방어의 정치는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이 아니다. 그에게는 전쟁에 관한 도덕적이거나 신학적인 개념이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훗날 칼 슈미트가 유럽 공법(ius pulicum Europaeum)으로 체계화한 관념, 즉 민족국가는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전쟁에 호소할 고유한 권리를 지닌다는 관념의 전형적인 주창자다. 방어의 우위라는 관념은 정치적 목적(Zweck)과 무관하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 목표(Ziel)와 ‘오직’ 관련된다. 확실히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은 정치와 전쟁의 접합의 형식적 합리성에 본질적 한계를 부과한다 (물질적 한계 또는 유물론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치가 전쟁의 궁극적 목적을 부과하는 한에서만 이러한 접합은 합리적이거나, 이론화할 수 있는 합리적 구조를 보여준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전쟁 행위자가 정치의 결정을 의식하든 못하든, 모든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항상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로 군사적 목표의 달성 가능성이 정치가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한에서만 (대개로 사후적으로 결정한다) [전쟁과 정치의 접합은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는[군사적 목표의 달성 가능성은] 확실히 현실 전투의 형태로 결정된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낯선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전략’이 클라우제비츠의 숙고의 주요 대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이를 위해 역사적 상황을 비교하고, 전략의 천재성를 보여주는 군사 천재의 사례들을 검토하고, ‘전쟁계획’ 또는 ‘전략적 통일성’의 개념이 되는 특유한 ‘문법적’ 개념을 분리하고, 이러한 전쟁계획이 고안되고 실험될 수 있는 지리적, 시간적 한계(‘전투’, ‘전장’ 등등)를 지적하려고 대부분의 분석을 할애했다.4)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역설적이다. 그러한 작업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실체화될수록, 작업의 대상[전략]의 자율성은 점점 더 모호해지거나 문제가 되는 듯하고, 또는 오히려 논리적 역설에 말려든다. 즉, 이는 마치 전략적 사고와 전략적 계획의 주요 목표는 궁극적으로 전장에서 전략의 자율성과 같은 것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처럼 된다. 전략은 내적 긴장과, 아마도 전쟁 개념의 아포리아(aporia)[철학의 난제]를 응축한다. 세 가지 문제를 추가적으로 검토해서 이를 해명해보자.


첫째, 이는[전략의 문제는] ‘이론’과 ‘역사’가 문제의 통일체에서 만나는 곳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항상 독자적(singular) 과정이며 연역적인 전쟁과학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항상 강조했다. 그러나 『판단력 비판』의 칸트적 의미에서 정치와 전쟁이 접합되는 규칙과 경향에 대한 반성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반성은 가설로 남는다. 우리는 전략의 자율성이란 개념은 전적으로 자신의 조건들과 한계들, 그것들의 역사적 변이들과 관련을 맺으며, 자신의 유효성을 영속적으로 시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조정되는 개념이며 판단의 범주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합리적이며 주관적인 이유로 이러한 고찰에 흥미를 느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주어진 역사적 정세에서 역사로부터 끌어낸,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참여한 전쟁인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혁명전쟁과 제국전쟁으로부터 끌어낸 ‘교훈’이 결국 방어 전략이 승리하는지를 보여주는지, 이런 교훈이 미래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는 전쟁이 정치의 도구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또는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전쟁이 정치의 ‘계속’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또는 이미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또는 [정치의 계속이라는 전쟁의] 논리적 기능을 제거하는 위험을 무릅쓸 뿐이라고 의미하는지 결정하고자 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역사의 경향적 결과로서 방어 전략에 우월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방어 전략의 우월성을 다루는 논증에는 이 문제가 [항상] 수반된다. 클라우제비츠를 늘 괴롭혔던 이 문제가 전쟁에 대한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반성에 영속적으로 출몰할 것이고, 현재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그러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인상적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명제를 역설로서 제시했고 (어떻게 오직 소극적인 결과를 낳는 방어 전략이 적극적인 결과를 낳는 공격 또는 정복 전략에 비해 우월하다고 증명될 수 있는가?), 이러한 역설은 전쟁의 수단이 극단으로 나아갈 때 명백해질 어떤 잠재적 불가능성의 신호가 아닌지 의심했다.


둘째, 우리는 방어 전략과 공격 전략이 마치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처럼 두 가지 ‘상이한’ 전략들 각각의 특질을 비교하는 표면적인 도식을 극복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다른 것으로] 변형해야 한다. 그것은 방어의 공격으로의 변형과 반전, 또는 방어가 공격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의 탐색이라는 더욱 심원한 문제다. 이것은 전쟁의 시간과 공간의 문제 즉 전쟁의 ‘역사’의 문제이며, 전쟁 행위자의 문제이므로 다시금 실질적인 의미에서 전쟁의 역사의 문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격투’의 복합적 형태이고 시간에 따라 발전하며, 다시 말하자면 행위자들의 세력관계를 부단히 변형한다고 썼다. 그 행위자들은 복합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정부와 인민을 포함하고, ‘군대’란 전형적인 형태로 통합된 제도와 인간을 포함하며 (군대는 역사의 행위자가 전쟁의 영역에 등장하는 일반적 형태다) 동맹과 동맹의 변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시간은 공격에서 방어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지닌 시간이다. 그것은 예정된 순환을 지닌 순전히 논리적인 시간이 아니며, 결국 전략적 ‘태세’ 중 하나[방어 또는 공격]을 강화하는 모든 요인들의 경향적 우월성에 의해 지배되는 역사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의 효과를 요약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가 사용한 일반적인 통념은 마찰이다. 마찰이라는 용어가 암시할 수 있는 것과 반대로, 그것은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도덕적, 기술적, 심리적, 사회학적 요인을 ‘통합한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의 문제, 즉 전략적 숙고의 대상은 왜 즉각 성공하지 못한 (또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공격은 방어를 취하는 적에게 점차 굴복할 수밖에 없는지, 어떤 수단이 이런 불가피한 결과를 지연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방어 전략이 성공적인 반격의 준비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반격이 방어로부터 준비되며, 어떤 의미에서 방어는 내재적으로 공세국면에서도 계속되고 연장된다(fortgesetzt)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상적인 변곡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문제는 이런 변곡점을 규정할 수 있느냐, 어떤 종류의 사건이 이런 변곡점으로 규정될 수 있느냐가 된다. 클라우제비츠가 이 문제를 절대적으로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문제에 이론적 공식을 부여했다. 그것은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공세 전략’과 쿠투조프의 ‘방어 전략’의 대치 과정에서 거대한 규모로 실행되었다. 프러시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승자가 주도하는 동맹에 다소 자발적으로 참여한 후 [프러시아와 프랑스가 대(對)러시아 연합전선을 펴게 되자] 클라우제비츠는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서 러시아 군대의 보좌관으로 참전하기로 결단하고 전쟁에 참여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레오 톨스토이를 포함해 19세기 이후 전쟁 이론가들이 반복해서 언급할 정도로 극적인 사건은 보로디노 전투였다 (엥겔스와 톨스토이는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 착수하기 이전에 보로디노 전투에 대해 서술한 글을 신뢰했으며, 그 글은 나중에 클라우제비츠의 누이에 의해 출판했다).5) 비슷한 규모와 전력을 지닌 두 ‘대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보로디노 전투는 나폴레옹의 전술적 승리로 보였지만, 결국 나폴레옹의 전략적 패배로 입증되었다. 보로디노 전투는 즉각 러시아 수도의 정복을 낳았지만, 사실상 나폴레옹의 최후의 패배를 예비하였다. 그러나 이 대치 역시 [방어에서 공세로] 변곡점이 발생하는 어떤 전형적인 조건을 보여주었다. 그 조건은 전투의 지속, 광대한 지리적 환경, 주민의 적대감 상승으로 인한 정복 그 자체의 반(反)생산적 효과뿐만 아니라 정규전과 게릴라전의 결합, [정규전과 게릴라전] 양 측에서 전쟁의 주요 행위자로서의 인민의 무장과 통합이었다 (게릴라전은 스페인에서 수입된 새로운 개념이다. 비록 그러한 전투형태가 스페인에서 처음 벌어진 것은 아니더라도6)).


이는 우리를 세 번째 고찰로 이끈다. 그곳에서는 ‘정치’, ‘전략’, ‘전술’이라는 세 가지 수준은 더욱 명백히 변증법적으로 얽혀있다. 이는 아마도 클라우제비츠의 가장 심원한 딜레마일 것이다. 그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을 이해할 때 두 개의 논리적 ‘대립항’ 또는 ‘극단’이라고 묘사한 것들 간의 관계와 관련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쟁이 있는 곳에는 전쟁이 추구하고 직면하는 섬멸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고, 또 한편으로 전쟁에서 고유한 정치적 능력은 전쟁이 동반하는 특정한 위험과 전쟁이 정치적인 것에 미치는 특정한 효과 속에서 이미 시작된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또는 중단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 즉 언제, 어떤 대가로 ‘전쟁을 끝낼 것인지’ 결정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섬멸에는 한계가 있고, [섬멸이] 그 한계에 접근할 수는 있지만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믿는다. 그는 자신이 ‘절대전쟁’(absolute war)이라고 부른 것을 고찰했지만, 훗날 ‘총력전’(total war)이라고 불린 것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절대전쟁에서는 격투가 극단으로 상승하며 국가 또는 민족의 모든 세력이 전쟁에 참여하지만, 총력전에서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비전투원도 목표물이 된다. 정치를 계속하는 전쟁에서 문제가 되는 섬멸은 군대를 물리적으로 섬멸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진압하거나 해산시키는 것이고, 적이 타인의 의지와 목적을 강요당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전쟁을 중단하는 능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불린 프러시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를 클라우제비츠가 매우 존경했던 이유는 그가 정복지를 계속 보유하기 위해 자신의 승리들을 통제하고 유리한 순간에 화친을 맺는 능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결국 비참하게 끝나고 그와 그의 나라를 패배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정복의 논리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복의 논리에서는 모든 예정된 한계를 넘어서 전쟁규모를 확대해야만 [나폴레옹의] 정치적 목적이 달성될 수 있고, [러시아의] 방어가 우세하고 압도적인 반격을 준비하며 이전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극단 사이에 강한 긴장이 있다. 왜냐하면 전쟁을 중단하는 능력(이는 ‘부정적인’ 전략적 통념이고, 클라우제비츠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최우선권을 두었다)은 전쟁이 군사력과 자원의 일부분만을 포함할 때, 즉 적대국들 간에 섬멸의 가능성이 거의 없을 때에만 극대화된다. 반면에 물리적 섬멸이라는 전략적 목적은 군사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인력의 동원을 초래하고, 이는 의지에 따른 전장으로부터 철수를 불가능하게 하며, [철수가 시도된다면] 국가의 실존에 대한 배후의 공격[내분]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한다. 또 다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평형’점이며 또는 ‘불가능한’ 지점, 즉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관한 ‘불가능성’의 지점이다. 즉 그것은 전쟁의 불가능성이란 유령을 되살리지만, 그 유령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나를 마지막 고찰로 이끈다.


나는 시작 부분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주요 명제를 하나의 공리 형태로 배열할 수 있으며, 그 공리의 지위 자체는 명백하다기보다는 가설적이며 문제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공리를 구성하는 두 명제만을 검토했고, 각각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남은 두 명제를 급히 다루어야 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옹호하고자 하는 관념은 클라우제비츠의 담론이 네 명제의 결합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고, 전쟁의 주체(또는 전쟁의 ‘정치적 주체’, 따라서 전쟁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주체’)라는 그의 궁극적 문제는 네 가지 명제사이에서 아마도 끊임없이, 모순적인 방식으로 순환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한전쟁과 절대전쟁


세 번째 명제는 ‘절대 전쟁’과 '제한 전쟁'(limited war)의 구분과 관련된다. 이것은 그가 『전쟁론』을 저술하는 동안 생각을 바꿨고(그의 저작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론 전체를 고쳐 써야만 하는 ‘새로운’ 입장에 도달했다고 주장하게 한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분명하지 않고, 사실상 징후적 독해를 필요로 한다. 그 후 해석자들은 클라우제비츠에게 다양한 인식론적 도식(변증법, 이념형 등)을 투사하여 모든 가능한 방향에서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절대’ 전쟁이 아닌 것을 가리키는 두 가지 용어를 두고 주저했다는 점이다. 그는 ‘제한’전쟁과 ‘현실’전쟁(real war)을 언급하지만, 거기서 그는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전쟁은 항상 제한전쟁이고 절대전쟁은 가상적 모형이라는 관념으로 도약한다. 즉 가상적 모형에 따라 경험적 사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관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너무나 단순하며, 문헌과 사실상 모순된다. 아주 성급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관념이 레이몽 아롱과 어긋나며 엠마뉴엘 테레이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이 ‘절대전쟁’이라는 통념을 가상적 모형이나 이념형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역사적 현실 즉 역사적으로 관찰되었던 전쟁의 성격 변화와 관련을 맺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우리가 극적인 딜레마에 직면하게 한다고 믿는다. 분명히 ‘절대전쟁’과 ‘제한전쟁’은 상반되는 두 극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논리적 의미의 극점이고, 현실전쟁은 두 극점 사이에서 움직이고 다양한 단계와 결합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은 최소한 두 가지 상황에서 거의 순수한 방식으로 두 극점에 접근했다. 나는 최근 시기에서 그에 관한 등가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18세기 절대왕정 시기에 정부 간의 전쟁(Kabinettskriege)은 군사 카스트[특권계급]의 지휘 하에 용병, 직업군인, [모병된] 신병에 의해 강압적으로 수행되었고, 그것의 목적은 이른바 ‘유럽의 균형’ 내부에서 세력균형을 바꾸고 적대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동반하더라도 정의상 제한전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함께 개시된 ‘새로운 전쟁’(Volkskriege)은 절대전쟁이었고, 규모와 폭력의 측면에서 극단으로의 상승을 동반했다. 새로운 전쟁은 인민봉기에서 처음 나타난 ‘민족의 무장’을 동반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대륙의 헤게모니를 위한 제국주의 도구로 변형했다.7) 그 후 무장한 민족들은 서로 경쟁하고 싸웠으며, 각자는 민족주의적 비책을 계발했으며, 그들은 자신의 실존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싸웠다. 이러한 전개는 전쟁의 세계사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비범한 설명이 담겨있는 8편에 약술되어 있고, 이것은 뒤따른 시도들의 모형이 되었다 (여기에는 1860년대에 저술, 출판된 『신아메리카백과사전』(New American Cyclopedia)에 담긴 엥겔스의 항목도 포함된다). 그리고 클라우제비츠의 질문은 명백하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이러한 전개가 비가역적이고 역사는 ‘전쟁의 절대화’를 향한 방향으로 전개한다고 믿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떤 가능성에 의거해 이러한 경향에 저항해야만 하는가? 이런 경향은 민족과 국가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고, 모든 정치적 문제들 중에서 전쟁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게 하며, 결국 정치의 도구인 전쟁에 대한 정치의 최우선권을 파기한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 개인이 누구였는지 회고하는 게 유용할 것이다. 그는 불안한 귀족 가문 출신의 프러시아 장교로서 (주로 칸트적인) 철학교육을 받았고, 대적(大敵) 프랑스와 계속 싸우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떠나는 위험을 무릅썼고 직접적인 외교적 조정보다는 애국적인 관심을 우선시했다. 그는 인민 징병제에 기초해서 19-20세기에 이르러 거대한 군대로 발전할 것을 창안함으로써 프러시아 군대가 민족군대로 변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8) 하지만 이러한 전개가 군사 카스트와 국가 관료로부터 정치적 결정의 완전한 독점권을 박탈할 가능성에 대해 그가 우려한 것은 분명하다 (나아가 빨치산이나 게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궁극적인 무기이지만, 그들을 활용할 때 사회적 위험성이 동반된다는 점을 우려했던 것도 명백하다). 이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명제로 우리를 이끈다.


전략에서 도덕적 요인의 최우선성


네 번째 명제 역시 가장 크게 논쟁된 것 중 하나다. 그것은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에 대한 ‘도덕적 요인’의 궁극적인 최우선성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이라는 통념으로 열거한 일련의 복합적 요소들과 그것들이 철학적 견지에서 함의하는 바를 살펴보면, 우리는 매우 복합적인 힘들의 체계를 발견한다. ‘도덕적’ 요인은 확실히 도덕성에 대한 고찰과 관련되지만, 그것은 역사에서 주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개인적, 집단적 정서라는 더 광범위한 문제틀과 분리할 수 없다. 도덕적 요인들은 집단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것과 관련된다. 그래서 우리는 군대가 난폭한 죽음의 위험과 대치할 수 있게 하는 병사의 용맹과, 어떤 전장 상황의 무한한 복잡성을 독자적인 직관으로 대체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는 총사령관의 자질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국가의 ‘지성’ 또는 국가의 정치적 합리성이라고 부른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수단과 목적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우리는 인민의 애국심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군인의 전투능력, 자원과 인명의 희생을 유지할 수 있는 민족적 능력의 배경을 형성한다. 애국심 역시 새로운, 즉 ‘근대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모든 도덕적 요인은 집단적인 역사적 작용인, 또는 제도적 작용인의 차원 또는 계기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는 내가 말했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전략’의 수준이 분리될 가능성을 반영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도덕적 요인을 검토하는 것에 클라우제비츠가 대부분의 시간을 쏟은 이유다. 즉 그는 도덕적 요인을 군대의 통일성이 형성되고, 그것의 소멸에 저항하고, 적의 폭력을 압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검토했다. 역으로 다른 요인(예를 들어 경제적, 기술적 계기)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요인에 부여된 중요성은 다른 요인의 유효성을 더욱 심원한 도덕적 심급에 종속시킨다 (예를 들어 조세인상 등의 방식으로 경제자원을 전쟁에 동원하는 민족적 능력). 후대의 이론가들이 자신이 더욱 유물론적이고 현실주의적이라고 간주하고 클라우제비츠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예를 들어 클라우제비츠가 군사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전략의 역사적 변형과 전쟁의 결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등장한 생산양식과 결합된 기술변화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긴 연구(『신아메리카백과사전』의 ‘군대’ 항목)에 전념한 엥겔스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조차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이라고 부른 것의 등가물을 고찰해야만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쟁의 가능성과 전쟁의 발전에 관한 계급의식, 더욱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클라우제비츠의 네 명제 간 관계를 살펴보면, 각각의 명제가 다른 명제의 결과를 지지하고 규명하거나 또는 제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우리가 무한한 논리적 순환에 들어서게 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제한전쟁의 절대적 인민전쟁으로의 근대적 변형은 어떤 도덕적 요인에 결정적 역할을 부여한다. 도덕적 요인은 전쟁의 ‘정치화’라는 의미에서 방어 전략과 방어의 반격으로의 전환에서 사활적 요소다. 그러나 애국주의는 국가가 조종할 필요가 있지만 지배할 수 없는 대중의 정서이기 때문에 도덕적 요인은 정치의 합리성을 위협하는 양면성을 생산한다. 전쟁 시기에 애국주의는 공포를 포함하며 또한 공포를 압도하는 적에 대한 증오(Feindschaft)가 된다. 그것은 지배자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될 수도 없으며 (그것은 심지어 지배자에 반대하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를 통해 주관적으로 통제될 수도 없다. 그것은 정치를 파괴할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주체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가차 없는 질문의 비밀을 만나게 된다. [전쟁의] 직접적인 주체는 군대이지만, 군대는 최소한 근대 시대에 결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 없다. 군대는 계속 생산․재생산되고, 전쟁의 환경과 그 누적된 효과는 이러한 재생산을 변조한다. 그러나 군대는 하나의 괴물이다. 군대는 국가와 인민의 결합이자 접합점이며, 민족이라는 관념은 [국가와 인민이라는] 두 가지 계기로 분열된다. 이것이 클라우제비츠의 딜레마였다. 이제 전쟁은 오직 민족전쟁, 곧 민족주의적 전쟁의 형태로만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결론을 끌어내야 하지만, 역사의 무대에 출현한 새로운 인민권력을 통제해야 하며, 인민권력은 국가 자체가 인민의 정서를 영속적으로 능가하도록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민족국가가 일반적으로 직면하는 정치적 문제의 군사적, 전략적 등가물이었다. 즉 어떻게 ‘봉기를 제도화할 것인가’, 어떻게 대중들에게 고삐를 채울 것인가? 놀라운 것은 이 문제가 19세기 초반 혁명전쟁과 제국전쟁 직후 정치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떠올랐던 상황을 넘어서 의제로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전쟁과 마르크스주의 전통


복잡한 문제를 동반하지만, 나는 여기서 매우 간략하게나마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담론을 들여오고자 한다. 오늘은 [포스트-클라우제비츠 담론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담론만을 다룰 것이다 (만약 마르크스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 차이는 마르크스가 최소한 초기에는 클라우제비츠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클라우제비츠를 감탄하여 읽고 마르크스에게 그 중요성을 조언해준 사람은 엥겔스다 (1849년 프러시아 군대와 맞선 혁명세력의 분견대를 훌륭히 퇴각시킨 후 엥겔스에게 붙여진 별명은 ‘장군’이었고, 그는 항상 군사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9) 


그렇지만 비교는 『공산주의자 선언』을 새롭게 독해하면서, 특히 1장의 구절들을 엄밀히 독해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1장은 계급투쟁의 연속적 형태가 역사적 변형, 특히 국가의 상이한 형태와 정치적인 것의 상이한 제도들을 이해하기 위한 안내선을 구성하며, 계급투쟁은 계속되는 내전(civil war)과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내전이란 표현은 1장의 끝에 있으며, 분리되어 있지만 확실히 두드러진다).10) 내전의 행위자들(또는 정당들)은 전쟁과정에서 생겨나며, 가시적일 수도 비가시적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1장의 서두에서 제시한 놀라운 정식처럼 내전은 상쟁하는 계급들 중 하나의 승리로 귀결될 수도 있고, 상호 파괴로 끝날 수도 있다.11)


나아가 우리는 클라우제비츠와의 연결고리를 확립한 푸코가 제시한 논평을 따라 이러한 구절들을 독해하자. 1) 사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인종전쟁’으로서의 정치라는 이전의 해석을 ‘전도했다.’ 인종전쟁은 프랑스혁명 이전의 유럽 역사서를 지배했고 그 후에도 살아남았다. 2)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적 통념은 ‘인종전쟁’의 변질된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계급은 구체제 사회 내부의 인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은 19세기의 적대적 통념, 즉 ‘인종투쟁’의 통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와 마르크스를 넘어서 ‘인종전쟁’이라는 초기 관념으로 돌아가는 것은 투쟁 또는 갈등과 동일시되는 정치적인 것의 어떤 순수성 또는 확실성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통념에서 나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출현하는 것을 둘러싸고 전쟁과 정치의 통념에 대한 역사적, 논리적으로 엇갈리는 스텝(chasse croisé)이 존재한다는 관념만을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푸코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과 마르크스의 관념의 대결이다.


확실히 가장 인상적인 차이는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을 분산과 집적의 단계, 잠재와 발현의 단계를 지닌 내전(즉 일반적인 의미에서 혁명)으로 이해함으로써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범주에서 배제하길 원했던 바로 그것을 ‘전쟁’이라고 확실히 부른다는 사실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대외전쟁, 민족전쟁처럼 내전도 ‘순수한’, 무차별적 폭력의 형태가 아니며, 그 역시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내전은 심지어 문명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보일 정도로 (또는 과거에 그렇게 보였을 정도로) 잔혹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더라도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그러나 내전은 특정한 유형의 정치제도 즉 ‘도시’ 또는 ‘국가’의 파괴로서 나타난다 (또는 그리스 이후로 그렇게 나타났다). 바로 이런 이유로 클라우제비츠의 용어법은 ‘폭력의 합법적 사용에 대한 독점’이란 국가의 정의를 예상하며 (이는 폭력의 정치적 활용에 대한 독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용어법에 따르면 내전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반(反)정치의 도구다. 슈미트에 이르러서야 내전을 포함하는 반정치의 도구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이율배반적으로 통합된다 (나는 이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겠다). 사실 마르크스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두고 분열을 겪었던 듯하다 (우리는 이러한 딜레마가 결코 해소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계속 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치적인 것이 ‘정치국가’를 의미하며, 국가를 둘러싸고 정치적인 것의 분리된 공간이 공적 대행자로서 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만 외형적으로 또는 사법적으로 계급이익을 초월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인 것을 초과하며, 결국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정치국가를 억압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정치국가의 종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 투쟁, 투쟁의 증대되는 양극화, 투쟁에 대한 ‘의식’과 ‘조직’의 형성, 역사의 변화를 생산하는 투쟁의 역할을 의미한다면 정치는 바로 영속적, 초역사적 ‘내전’으로 정의된다. 그러한 내전은 결코 정확히 동일한 형태를 취하지 않지만 (‘최후’까지,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최종 대결까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쟁’이란 용어의 은유적 활용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클라우제비츠와 비교한다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내전은 전쟁의 개념을 확실히 반성적으로 활용하며, 특정한 전쟁 개념을 단순히 적용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와 변형을 동반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 또는 가설을 독해할 수 있다. 1) 오직 ‘내전’으로서 사회적 전쟁(social war)만이 ‘절대’전쟁, 또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전쟁이 된다. 그것은 극단에 도달하고, 절멸의 위험이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연의 의미에서’ 전쟁이다. 2) 이러한 전쟁은 ‘정치’를 구성하고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전도하지만, 클라우제비츠에게는 단지 경향(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포)으로 남아 있던 것을 논리적 결론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그 결론은 정치의 ‘수단’으로서 폭력은 정치적인 것에 반작용하며, 정치가 전쟁의 계속이 되게 한다는 관념이다. 나아가 이것은 전쟁 ‘주체’의 표상의 총체적인 변화와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제도적․사법적 주체 곧 국가가 아니며 오히려 내재적인 사회적 주체다. 전쟁의 사회적 주체는 자신의 역사적 형성과 부단한 자율화 과정 자체와 진정 구분될 수 없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가 (또는 마르크스를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사람들이 -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이들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계급투쟁이라는 약호를 통해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또는 클라우제비츠의 문제를 치환 또는 ‘번역’함으로써 그 명제와 문제를 부활시키게 한다. 


그러한 문제들 중 하나는 계급을 ‘군대’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된다. 이것은 계급투쟁을 점점 더 통일되고 양극화되는 두 적대적 세력들 간의 대결로 표현하는 것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자격부여(qualification)에 종속된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결과일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계급투쟁은 진정으로 자신의 행위자를 창조하거나 생산한다. 그 조건은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의 초역사적 대결의 마지막 무대 또는 등장인물,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경향이다. 오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편에서 계급투쟁의 조직자로서 직접적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 적대자는 어떤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볼 때 조직화된 세력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나 ‘정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마르크스는 그 개념[군대로서의 계급]을 최종적 결론으로 밀고 나아가는 데 주저했고, 좀 더 은유적인 활용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혁명을 계급전쟁(class war)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어도 공산주의 전통에서 1세기 동안 매우 강력했다는 것을 알지만, 마르크스에게서 군대 형태의 혁명정당, 즉 계급정당 또는 ‘전체 계급의 정당’이라는 개념의 가능성만을 발견한다 (왜 그런지는 조금 후에 말하겠다). 그러나 그 전에 방어의 문제와 관련된 두 번째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파생개념, 또는 클라우제비츠와 유사한 파생개념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비정치적’ 요소의 복귀를 준비하는 놀라운 역전을 목격한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심지어 혁명을 준비하고 자본가계급을 전복할 때라도 ‘방어적’ 투쟁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정치철학이 되며, 사실상 묵시론이 된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임금노동자를 절대적 빈곤과 실업에 빠뜨리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임금노동자, 더욱 일반적으로는 노동자[임금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노나 노예]가 사회를 부양하고 유지하므로) 사회의 재생산과 생존을 위협한다는 관념과 결합된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묘사한 것처럼, 자본주의에는 허무주의적 요소가 있으며, 이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사회 내부의 적에 대항하여 사회를 방어하는 것과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더욱 전략적, 또는 준(準)전략적 고려가 나타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자신의 힘, 의식, 조직을 경쟁하는 부르주아 조직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관념에 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라리아 계급 정당을 반(反)국가로 가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가 착취적 사회질서를 위해 사회를 억압하는 한에서 국가의 부정, 즉 ‘부정의 부정’으로 간주했다. 이 모든 것은 대외 전쟁의 상황과 반대로 ‘내전’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전쟁’에서 적대자들은 진정 외부적이지 않고,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들은 하나의 분할[분업] 형태에서 동일한 사회적 주체의 진화 양식이며, 그렇게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전쟁과 정치의 접합을 이해한 결과는 결정적인 동시에 모호하다. 적대의 화해 불가능한 성격을 현실화함으로써 내전의 모형은 계급사회, 특히 자본주의에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종언을 준비하는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이행의 형태로 명백히 나타나며, 우리는 이를 자기절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마르크스가 후속 작업에서 이러한 설명을 단념하거나 무시하게 하였는가? 후속 작업은 그가 계급투쟁의 전개에 관한 다른 모형을 모색하도록 이끌었고, 그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제시했던 반정치로서의 정치적인 것이란 날카로운 서술로부터 어떤 의미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왜 그런가? 내 견해로는 일련의 긍정적인 요인들이 작동했다. 그것에는 점증하는 빈곤과 부의 양극화라는 ‘묵시론적’인 선형모형을 희생시키는 자본주의 발전의 경제적 축적사이클에 부여된 중요성의 증대도 포함된다. 그러나 전쟁과 내전의 현상들에 대한 더 많은 경험 역시 부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 현상들은 계급투쟁을 내전과 유비하는 것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했고, 그것은 극단으로 밀린 내전 즉 ‘절대적 내전’으로서 혁명 모형에 관한 모든 부정적 측면을 보여주었다 (그 교훈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개량주의’와 ‘혁명주의’간에 뜨겁게 논쟁되었다). ‘제한적 내전’ 또는 ‘억제된’ 내전은 형용모순으로 보였다. 1848년과 1872년(파리코뮨)에 일어난 현실의 내전은 대량학살의 비극적 경험이었다. 이 때 부르주아 국가는 프롤레타리아를 궤멸시키기 위해서 (식민지 전쟁을 포함해) 대외전쟁 동안 형성된 군사 장치를 손쉽게 사용했고,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군대’가 아니었다 (심지어 게릴라 군대도 아니었다). 게다가 (20세기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 동안 민족전쟁은 계급투쟁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정치와 전쟁이 접합하는 바로 그 장소이자 전략적 사고의 장소로서 남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증거가 있었다. 민족전쟁을 ‘현실’과 현실의 ‘정치’과정을 은폐하는 외양 또는 인공현실로 묘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코 완전히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민족전쟁은 서로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이 ‘자신의’ 노동자가 서로를 절멸하도록 하고, 민족주의 담론으로 노동자를 기만하려는 노력을 결합해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민족전쟁의 엄연한 현실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했으며, 이는 클라우제비츠와 그의 문제를 직접 이해하는 것으로 복귀해야한다고 요청한 것이었다.


이는 엥겔스에 의해 준비되었다. 그는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을 ‘관념론적’으로 강조했다고 비판했고, 그것의 유물론적 등가물을 모색했다. 그것은 전쟁의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에 대한 강조와 양립할 수 있다고 입증되어야 했다. 이러한 등가물은 인민의 군대 또는 대중 징병이 (최소한 민주공화국에서는) 군대 내부에 계급투쟁을 잠재적으로 도입할 것이며, 따라서 군사문제에서 대중들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공포를 대중들이 국가와 군사장치를 희생시키며 새로운 전략적 행위자로서 부상한다는 예언으로 역전시킬 것이라는 관념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레닌과 마오쩌둥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변증법적 원칙이 전쟁과 정치의 새로운 접합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전략적 결합체에 대한 관념이 국가-군대-인민의 통일체로부터 계급, 인민, 혁명정당이라는 새로운 통일체로 대체되었다. 알다시피 레닌은 클라우제비츠를 철저히 읽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고 2인터내셔널과 반전결의안이 붕괴된 후 『전쟁론』에 관한 주석과 논평을 남겼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라는 구호를 기초했고, (적어도 자신의 나라에서는)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그 구호는 ‘도덕적 요인’(국제주의적 계급의식)이 시간이 지남에 따른 ‘대중’전쟁(즉 대중으로 구성된 민족군대가 수행하는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방어’로부터 준비되는 ‘공세’라는 관념에 대해 완전히 독창적인 해석을 제공하며, ‘절대’전쟁은 유지될 수 없거나 유지될 수 없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그 필연성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그것은[내전으로 전환은] 반드시 국가를 파괴해야 하며 차라리 국가를 희생시켜 정치의 조건들을 반드시 재창조해야 한다. 국가는 인민을 무장시키고 인민의 무장력 활용을 통제하는 능력을 보유하는 한에서만 정치를 구현할 수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박탈당하자마자 정치적 환영(幻影)이 될 것이다. 또는 합법적 폭력의 국가 독점으로부터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폭력의 계급 독점으로 변화되자마자 그렇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의 전위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칼 슈미트의 비정치적 개념의 출발점을 형성한다는 것에 잠시 주목하자.12) 여기서 주권은 계급투쟁을 예방적으로 억압하기 위해서 국가의 핵심에 ‘예외상태’를 설치할 수 있는 능력으로 동일시되며, ‘내부의 적’ 즉 ‘계급적 내전’의 적에 대한 정의는 대외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폭력의] 국가 독점과 그 능력을 항상 재창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오쩌둥의 ‘유격대의 지구전’ 이론에 이르러서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방식의 탈환이자 정치적인 것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영속적으로 클라우제비츠를 괴롭혔던 아포리아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사실 나는 여러 논평자들이 인정했던 것처럼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 이후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라고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는 클라우제비츠의 공리 중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모두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실제로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읽었거나 일부 인용문을 읽었는지 알기 어렵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이 그가 읽을 수 있던 유일한 언어인 중국어로 번역되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항일전쟁 이후 (더 정확히는 대장정의 종료 이후) 마오쩌둥의 다양한 소책자와 논문에서는 레닌이 제국주의에 대한 에세이에서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인용한 대목에서 다시 인용한 것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오쩌둥이 그 문제틀을 실질적으로 재구성했다고 시사한다. 모택동의 핵심적인 관념은, 처음에는 제국주의 적국과 지배 부르주아는 군대가 있지만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은 군대가 없기 때문에 방어 전략이 강요되지만, 이는 결국 대립물[공격전략]으로 역전되고, ‘가장 강한 적’의 실제 절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지구전’(또는 전쟁의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전쟁의 지속시간은 ‘마찰’의 변증법적 등가물이며, 농민 대중들 내부에서 피난처를 찾는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의 소규모 핵심에게 필요한 시간이다 (그들은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인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은 세 가지 결과를 동시에 추구한다. 첫째, 침략군의 고립된 분견대에 맞서 지역적 게릴라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적군의 희생을 대가로 스스로 무장한다. 둘째, 전장을 전국적 수준으로 (중국에서는 반(半)대륙 수준으로) 확장함으로써 전략의 기술을 ‘배운다.’ 셋째, 헤게모니를 외부의 권력(식민지 정복자 또는 민족의 특권계급)으로부터 내재적 권력으로 이동하고, 피지배계급들의 공통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인민의 적(또는 당의 적)으로부터 분리한다. 공산당은 바로 그 내재적 권력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장기간 동안 내재적 권력으로 머무른다고 간주된다). 


오늘 이런 분석의 맹목점은 오히려 더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다). 즉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민족 내부의 세력들만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처럼, 2차 세계대전의 국제적 맥락을 사실상 무시한다는 것이다. ‘자력갱생’이라는 마오주의의 위대한 구호는 잠재적으로 민족주의적 차원을 지닌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전쟁의 합리성이란 관념(이는 정치적 주체를 함축한다)에 대해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결과는 인상적으로 남는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완전한 순환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종결이 특히 국가가 수행하는 제도적 전쟁과 인민의 게릴라 전쟁 간에 확립된 위계적 관계의 역전이라는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역전이 클라우제비츠에서 발견되는 아포리아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 아포리아를 전위할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난점은 전쟁을 ‘절대전쟁’ 즉 무장한 인민이 수행하는 전쟁으로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서 수립되고 활용되어야 하는 ‘도구’에 대해 국가가 선험적으로 절대적 지배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또한 중국혁명의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끌어오면서 생기는 마오쩌둥의 난점 또는 우리가 그를 사후적으로 독해할 때의 난점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계급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민을 군대 또는 ‘인민군’으로 내부로부터 변형한 조직[공산당]의 내재적 권력, 즉 혁명정당이 스스로 국가가 되는 조건에서만 [방어에서 공세로] 전략적 반전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으며 정치적 대행자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이는 심지어 국가가 혁명적 사건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재건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하며, ‘문화혁명’으로 나아갔던 마오주의적 전망 또는 문화혁명 동안 교육되었던 마오주의적 전망에서도 그러하다). 사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민족해방전쟁의 조건에서는 가망성이 매우 낮지만) 혁명정당이 ‘권력장악’을 삼가거나, 또는 적의 완전한 파괴라는 ‘최종’목적(Zweck)까지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며, 따라서 ‘절대전쟁’을 ‘제한전쟁’으로 어떻게든지 축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략적 과정의 주체(또는 전략적 과정 내부로부터 결정되는 주체)는 모든 상황에서 분열된 주체 또는 주권과 봉기 사이에서 동요하는 주체로 머문다. ‘분자전쟁’(엔첸스베르거)에 대한 일부 근대 이론가와 논평자는 주체의 범주를 단순히 제거하거나 그것을 부정적이거나 불완전한 형상으로 환원함으로써 아포리아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전쟁’의 범주 그 자체가 유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끝>


1) [역주]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프러시아 부르크에서 태어나 1831년 51세의 나이로 프러시아 브레슬라우에서 콜레라로 병사할 때까지 39년간 군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폰 마리는 1832년 유고를 정리하여 10권의 선집계획 중 1차 저작계획으로 1권에서 3권까지를 묶어 『전쟁론』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마리는 남편이 생전에 자신의 저작이 출판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고 술회했다). 그 후 1837년까지 『전쟁과 작전술에 관한 칼 폰 클라우제비츠 장군의 유작집』이 10권으로 출판되었다. 


2) [역주] 마르쿠스 키케로(기원전 106년 - 기원전 43년)는 카이사르와 동시대 사람으로 기원전 63년에 집정관의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 63년에는 카틸리나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키케로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무기 삼아 이를 진압한다. 키케로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Consul sine armis(군사력을 갖지 않은 집정관), Dux et imperator togae(토가 차림의 최고 사령관), Cedant arma togae(文이 武를 제압하다). 키케로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고, 이는 훗날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계승된다.


3) [역주] ‘정의로운 전쟁’(just war=bellum justum) 이론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후 중세 기독교 전쟁사상의 핵을 이룬다 (콘스탄니누스(301-337)는 군대를 로마로 진격시키면서 군대의 방패에 십자가 표지를 달게 했으며, 테오도시우스는 416년 칙령을 내려 기독교도만을 군인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키케로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받아들여 전쟁이 다음의 조건을 갖추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전쟁이 사회의 보편적인 선을 위한 것으로 합법적 당국에 의해 선포되어야 한다. 둘째, 전쟁의 원인이 정당해야 하며, 결코 법질서에 위협이나 손상을 주어선 안 된다. 셋째, 전쟁의 목적은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법질서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합법적 당국을 황제로 규정하고 방어전이 아닌 공격전까지 정의로운 전쟁에 포함시키는 것이며, 정복전쟁 이후 적대국을 포괄적인 법질서로 융화시켜야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한편 십자군 전쟁의 참화가 지난 후 아퀴나스(1225-1274)는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을 재정식화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전쟁방식은 공격전이 아니라 방어전이어야 하며, 정당방위의 경우에만 살상이 인정되고, 전투요원이 아닌 민간인은 결코 전쟁 대상이 되어선 안 되고, 적을 살상하기보다는 적이 스스로 상용하는 처벌을 자임할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4) [역주] 클라우제비츠는 전략 일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략이란 전쟁의 목적(적의 무장해제)을 획득하기 위한 전투의 원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은 총체적인 군사행동에 목표를 부여하는 것이며, 전쟁계획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여러 행동계열을 하나로 묶어서 최종적인 결정행위로 유도하는 국면으로 연결시켜주어야만 한다. 요컨대 전략은 분리된 전역을 수행하기 위해 제반계획을 마련하며, 각 전역에서 행해질 전투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략의 구성요소를 ①정신적 요소, ②물리적 요소(전투병력, 조직과 편성, 3개 병종의 구성비), ③수학적 요소(작전선의 각도, 집중운동과 원심운동), ④지리적 요소(지형지세의 영향, 지휘소의 지점, 야산․삼림․도로), ⑤통계적 요소(모든 종류의 자재보급 수단)로 제시한다. 


5) [역주] 1812년 9월 7일 나폴레옹의 모스크바원정 도중에 있었던 최대의 격전. 초토화전술을 써가며 후퇴만 계속하던 러시아군은 신임 총사령관 쿠투조프 장군 지휘 하에 모스크바 서쪽 약 90㎞ 지점인 보로디노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맞아 싸웠다. 양군의 병력은 프랑스군 13만 5000명, 러시아군 12만 6000명이었으며, 쌍방 모두 500∼600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는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맹렬한 포격전에 이어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였는데, 프랑스군 5만 8000명, 러시아군 4만 4000명의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저녁까지도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다. 쿠투조프는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려고 야음을 틈타서 퇴각하였으므로, 프랑스군은 그대로 전진하여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이 전투는 표면상 나폴레옹군의 승리로 보이지만, 그 후 러시아군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군의 러시아 원정 실패의 시초가 되었다.


6) [역주] 게릴라는 스페인어로 ‘소규모 전투’를 뜻하는 말로서 나폴레옹이 스페인 원정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무장저항을 게릴라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전략적으로 열세한 측이 대중의 지지와 험준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스스로 선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형태로 전술적 공격을 취하는 전쟁과정 중의 한 국면을 이루는 싸움의 한 형태이다. 참고로 빨치산(partisan)이란 parti 즉 도당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게릴라전에 종사하는 인간의 집합체 조직을 뜻한다. 1818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시에 고전하는 자국의 군대를 도와 이에 저항하였던 러시아 농민을 프랑스군이 호칭한 데서 비롯된다. 또한 유격전은 중국의 마오쩌둥이 사용한 용어이며, 1927년 이후의 국공내전 및 대일전쟁을 통하여 중국공산당 무장저항조직의 별동대가 소부대로 유격하면서 틈을 보아 적을 치는 비정규적 방식의 전법을 지칭한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게릴라, 유격대, 빨치산이란 용어는 유래가 다르지만 지금은 대체로 혼용하여 사용된다.


7) [역주]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가 프랑스 국내의 반혁명파와 손을 잡고 혁명파를 공격해온 이후로 프랑스 군대의 역할과 성격은 변용되었다. 더 넓은 범위의 프랑스국민을 무장시킨다는 방침이 세워졌고, 정규군과 의용군의 통합이 이뤄졌다. 1793년 프랑스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법령의 문안은 다음과 같다. “모든 프랑스 국민은 군복무를 위해 징발된다. 젊은 남성은 전선의 전투부대에 참여하고, 기혼남성은 무기를 만들거나 군수품을 수송하며, 여성은 천막이나 의복을 만들거나 병원에서 복무하고, 어린이는 낡은 아마포로 붕대를 만들며, 노인은 광장에 나가서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공화국의 단결과 국왕에 대한 증오를 선전한다.” 이러한 국민총동원령에 따라 징병제(국민개병제․의무병역제)가 도입된다.


8) [역주] 나폴레옹이 프러시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강요한 조약은 1808년 이후 프러시아 육군의 규모를 4만 2천명으로 제한했다. 프랑스의 강제적인 동원해제, 점령과 징발로 인해 프러시아 국민들의 감정은 악화되었고, 1813년 해방전쟁이 시작되고 프러시아 정부가 대대적으로 징병에 돌입하자 국민들은 기꺼이 징병에 응했다. 클라우제비츠는 1812년 러시아로 넘어가서 러시아군 중위계급의 옷을 입고 참전했다가 1813년 프러시아로 돌아오고 3월에 프러시아 군으로 복직한다. 그는 프러시아의 ‘국민총동원’(Landstrum)과 ‘후방군 민병조직’(Landwehr)을 구상했지만, 국왕의 냉대로 인해 그 활동에 직접 기여할 수 없었다.


9) [역주] 엥겔스는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독일제국헌법을 반혁명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독일 라인 지방에서 일어난 바덴-팔쯔 봉기(badisch-pfälzischer Aufstand)에서 빌리히의 부관으로 직접 참여했다(프러시아 포병장교 출신 혁명가인 빌리히는 엥겔스를 ‘대단히 쓸모있는 장교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 해 10월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그가 겪은 경험은 그의 혁명적 군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0) [역주」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발전의 가장 일반적인 단계를 서술함으로써, 다소간 가려져 있는 기존 사회 내부의 내란[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바뀌고,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를 공개적으로 타도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는 데까지 고찰했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p 64, 거름, 1991.) 


11) [역주]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 (…)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p 52, 거름, 1991.)


12) [역주] 칼 슈미트(1888-1985년)는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이다. 1933년 그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나치 당에 입당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쓴 주권에 대한 저작들은 논쟁적인 저서로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주권이 존재하는 장소는 사법적 질서의 안과 바깥 모두이며, 주권은 어떠한 법률로도 제한할 수 없는 권력이고,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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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1 1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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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10-02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고맙습니다. 지적해주신 부분은 번역자들에게 알려주겠습니다. 아마 역자들도 좋아할 겁니다. 혹시 읽어보시다 더 지적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