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헤 1
미카 왈타리 지음, 이순희 옮김 / 동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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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누헤...두권의 시누헤 읽기를 드디어 끝냈다. 드디어!!라는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소설. 어찌 그리 읽히는 게 더딘지, 다 읽어야한다는 책임이 없었다면 다 읽어내지 못했을 것같다. 마치 대하소설 10권짜리는 읽은듯한 느낌이 든다. 방대한 내용이 있다는 것과, 길고 지루한 싸움을 끝냈다는 두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접해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인문서적을 통해 이집트를 많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읽기 힘들었다. 파로오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니라 의사의 길을 가는 시누헤의 입장에서 쓴 글이라 파라오 중심의 글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선함을 느꼈으나 시누헤라는 인물에 도저히 감정이입이 안되었던 것이다.

 

시누헤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노예이자 하인인 카프카가 더 와닿는 인물이었고 카프카의 처신이 더욱 이해가 가는 편이었다. 혼란과 무질서의 세계에서 시누헤를 붙들어준 것은 파라오도, 그의 신념도, 그가 사랑한 여인들도 아니라 바로 카프카였다고 생각한다.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했고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자였다.

 

그러나, 물론 시누헤의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다.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은 물론이고, 이집트의 하층민의 생활, 귀족이나 파라오가 아닌 이들의 삶을 볼 수 있었으니 이 책의 의미는 거기에서 찾아야할 듯하다. 내가 알고 있는 파라오와 다른 파라오의 모습, 신에 집착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개적 비공개적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파라오의 모습을 보았다. 또, 그러한 귀족사회의 혼란 속에서 이집트 민중들의 가난과, 고통이 어떻게 무시되고 있었는지를 보았다.

 

카프카라는 인물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비록, 그가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의적처럼 살아간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알고 있는 자였다. 시누헤와 카프카가 이야기를 나눌 때, 시누헤는 시종일관 카프카의 무례함과 오만함을 보았지만, 나는 시누헤의 멍청함을 보았다. 노예인 카프카보다도 사회를 보는 눈이 밝지 못했던 시누헤였지만, 자신의 의술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모습만은 본받을만하였다. 그 점조차 없었다면, 시누헤는 의미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 여겨질 정도이다.

 

더군다나, 시누헤가 네페르네페르네페르에게 빠져 가진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부모의 소박한 꿈마저 버려지는 모습을 보앗을 때는 어찌나 분통이 터지던지, 아, 눈먼 남자여~!! 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미네아와의 사랑이 없었다면 한심한 남자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했으리라..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 바로 미네아와의 사건이다. 미로 속의 미노타우로스 신화가 겹쳐지면서 지루했던 시누헤의 여행에 생동감이 넘치는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미네아의 죽음을 뒤로하고 다시 시누헤가 이집트의 일상으로 돌아와서부터 또다시 지루한 여행이 계속되었다. 사실, 전쟁과 관련된 부분이 나와 같은 여성(전쟁이나 싸움에 과심없는, 혹은 한참 유행이었던 시뮬레이션게임애도 흥미가 전혀 없는)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을듯.

 

그러나, 시누헤가 이집트 귀족의 일상이나, 파라오와 호화로운 생활을 할 때 보여준 권태로움과 지루함에 비해 시신처리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악어꼬리술집을 경영하며 곡물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카프카의 생활력은 재미를 더한다. 전체적으로는 끝까지 읽기가 힘든 소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소설은 파라오의 권력투쟁기도 아니요, 이집트에서 의사로 살아가기 위한 지식과 의술의 향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아니요, 혼란스러운 이집트에서의 신-아몬과 아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아케나톤의 혁명적 시도도, 마치 정신병자의 행동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그려져 있어 혁명이라고 이름붙이기 민망스러울 정도이다. 마치, 요즘의 정치상황을 보는듯한 느낌도 든다. 사람들이 자유를 억압당한 채 살았을 때는 그게 숙명이려니 생각하고 입 한번 놀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귀족과 노예가 다같이 평등하다는 사상과 더불어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 자유를 오히려 제대로 누리지 못한채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 어른들이 모 대통령시절이 훨씬 좋았다는 말을 할 때마다 느끼는 괴리감과 똑같다. 사실, 언제 우리가 대통령을 놓고 농담을 했고, 대통령이 하는 일에 대놓고 반대를 해봤는가? 그러한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자들이 여전히 설치는 사회, 그 사회의 모습이 이 소설 속에 녹아있었다. 물론 아케나톤의 행적이 모두 이해되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과도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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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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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웬만해서는 에세이류나 수필류, 자기고백적인 이야기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 때, 의외의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제목과 내용요약을 보고 내가 구입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책은 아니다. 그러나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은 책이기에 읽게 되었고, 나는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이 책의 저자, 대니얼 고틀립이 만약, 손자인 샘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책을 썼다면 이만큼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햇을 것이다. 자기자신의 고통만으로도 숨쉬기 힘들 것 같은 저자가 자신의 손자, 자폐증 진단을 받은 샘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는 그 고통을 밝은 희망으로 써내려간 메세지다.

만약 내가 고틀립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자신의 손자에게 닥침 불행까지 보게 되었다면 정말 세상을 살고 싶지 않았을것 같다. 물론 고틀립에게도 위기의 나날이 있엇겠지만, 이 책은 고틀립 자신의 불행보다 손자를 위한 따뜻한 마음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통 속에서 찾아낸 그의 메세지는 그 책을 읽는 부모에게는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p.34) 샘,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냥 다른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명심해라. 네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네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고틀립 자신이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그 고통을 뛰어넘는데는 이러한 생각이 한몫햇을 것이다. 앞으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손자에게 남기는 이 메세지는 그래서 더욱 힘을 더한다. 자신이 겪지 못한 아픔을 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의 고통을 뛰어넘은 사람의 메세지는 강한 힘을 가지기 마련이다. 남과 다르다는 것, 이것은 비단 고틀립처럼 육체의, 샘처럼 정신의 다름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p.102) 지금의 내가 나 자신이 바라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부끄러워한다.

(p.109) 부끄러움을 느낄 때면, 너를 사랑하고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아가기 바란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자신이 드러났을 때 맺어지는 친밀감 속에는 놀라운 기회가 숨어있다. 네가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가!

고틀립은 샘의 부모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모 외에 그런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엄청난 행운이라 생각한다. 부끄러움, 수치, 경멸받은 느낌...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고 지치게 하는가? 이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줄 수 있는 사람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틀립이 샘 뿐만 아니라 샘의 부모에게 남긴 말은 우리가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배려해야하는가를 생각케한다. 아이 싸움이 어른싸움이 되는 일이 너무나 당연해진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고틀립이 전하는 메세지를 들어보자.

(p.147) 우선, 너를 괴롭히는 아이들에 대해 알아야한다. (p.148)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p.148-149) 그런 친구를 만났을 때 피하라는 것은, 검쟁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현명한 아이가 되라는 말이다. (p.149) 그 다음에는, 너를 괴롭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얘기해야한다. (p.150-151) 자기 자식이 못된 아이한테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화가 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분통을 터뜨리기 전에, 먼저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아이를 가장 좋은 방법으로 도와주고 싶다면, 부모는 일단 자신의 분노와 불안을 접어둬야 한다. 아이가 다급한 위험에 처했다면 물론 즉각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대화하는 게 우선이다.

우리는, 아이의 상태를 이해하고 아이를 믿어주는 단게는 간과한 채 자신의 문제로 변절시켜 흥분하는 부모를 자주 본다. 얼마전 모대기업회장이 아들을 위한답시고 한 행동을 떠올려보라.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대신하여 싸워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심리상태를 이해해주고 다독여주는 일이다.

책 부분부부느 밑줄 그을 곳이 많은 책이었다. 편지의 형식으로 담담하게 써나가되, 웬만한 이론서를 뛰어넘는 내용을 가진 책. 부모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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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의 계절
온다 리쿠 지음, 임경화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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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책의 제목. 다 읽고났는데도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다. 계절을 어떤 형태, 그것도 구형(구형이라는 말, 어지간해서는 듣기 어려운 단어다.)이란다. 내가 모자란 탓이라 생각하며 다른 이들의 글을 읽어봐도 속시원하게 제목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없다. 정말 나만 모르는건가? ㅠ.ㅠ

내용은, 아, 온다리쿠의 소설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소설임을 눈치챌 만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학교에서의 생활(학교에서의 소문들, 주술의 유행, 사이코같은 선생 등등)은 옛날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그녀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물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는 몇갈래로 갈라진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각각이 하나씩의 단편같기도 하고, 그 인물이 다른 인물과 어떤 연관이 있는 인물인가 생각하며 읽게 된다. 조용한 시골마을의 학교에서 퍼지는 소문은, 역시나 듣는 사람에 따라 자기가 듣고 싶은 부분만 확대해서 들음을 보여준다. 이건, 어디서 봤냐면, 유지니아...구나. 유지니아에서 똑같은 사건을 두고 사람마다 다르게 회상하는 이야기가 있었지. 아니나 다를까, 이 책 역시 그녀의 다른 책들과 이래저래 비슷하기도 하고 형식이 닮아있기도 하다. 이제는, 그냥 이런게 온다리쿠다. 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집중해서 읽기에는 별로인것같다. 성과 이름이 각각 사용되어 어떤 장에서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어떤 장에서는 성으로 불리기 때문에 가끔 이 사람은 누구지? 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일본인에게는 그게 자연스럽고 익숙한지 모르겠지만 한국인 독자로서는 헷갈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번역이 직역한듯한 느낌이 드는 문장들이 있어서인지 어색한 문장들도 보여서 더 그랬나보다. 또, 시호와 미호는 같은 인물일까? 아닐까?

온다리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에 항상 어떤 역할을 할 것 같다가 그냥 사라지는, 왜 나왔는지 모를 인물들이 몇몇 있는데, 어김없이 이 소설에서도 등장한다.너무 많은 인물들이 난립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어쨌든, 이 소설 속의 아이들은, 여전히(그녀의 다른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들과 전혀 그렇지 못한 평범한 아이로 나누어진다. 가장 평범한 학생(여기서는 미노리)의 생각과 행동은 어쩜 그리도 평범하게 그려졌는지...딱, 나와 내 친구들의 여고시절을 보는듯하다. 그외에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들은 또다시 도코노 일족을 연상시킨다. 아, 온다 리쿠의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먼저 읽었던 다른 소설들이 겹쳐지는 것 같다.

온다리쿠의 팬이 아니라면 굳이 추천할 생각이 없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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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감동시킨 위대한 글벌레들 - 명문장가들의 놀라운 글쓰기 비법을 공개한다 세상을 바꾼 벌레들 1
김문태 지음, 이상미 그림 / 뜨인돌어린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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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를 보면, "명문장가들의 놀라운 글쓰기비법을 공개한다"는 문장이 눈에 띈다. 그러나, 나는 글쓰기비법이란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평소에 해왔기 때문에 이 문장에 별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글쓰기비법을 가르쳐야할 만큼 글쓰기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 글쓰기비법이란 것이 대학을 가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부정적인 측면을 배제하고서 생각해보면, 요즘은 1인미디어시대라 하며 개인블로그가 인기다. 개인블로그뿐만 아니라 인터넷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까지도 글쓰기의 장이 되고 있다. 자신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방법,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방법, 또 자신만의 노하우를 지식과 정보로 제공하는 방법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글쓰기다. 동영상(ucc)혹은 사진을 통한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은 글쓰기가 아닌가싶다. 따라서, 세상을 감동시킨 위인들의 글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하다.

 

7명의 위인들이 이야기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생각과 글쓰기에 대한 비법을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주로 어린이들을 앞에 앉혀놓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야기하듯 전개된다. 초등학교 3-4학년이면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아직 나에게는 그 나이의 아이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책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자주 하는 아이들의 수준은 생각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치더라도 여기 제시된 인물 7명은 적당하게 선정되어진 것일까? 정약용, 박지원, 이순신, 밀턴, 고흐, 다윈, 레이첼 카슨... 우선은, 아이들의 수준에 따라 책에 제시된 인물들에 대해 미리 선행학습을 하는 편이 좋을듯하다. 물론, 배보다 배꼽이 큰 선행학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레이첼 카슨은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인물이다. (어린이들이 지식과 정보를 두루 섭렵하는데 비해 성인의 경우, 개인의 관심에 따라 알고 있는 내용의 편차가 큰것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아이들은 알고 있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글벌레들. 책벌레에서 파생시켜 만든 단어일 것이다. 책벌레들이 책을 항상 끼고 살듯이 글벌레들은 늘 글을 쓰고 접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라 짐작된다. 여기 제시된 7인의 글은, 시, 소설, 일기, 서사시, 편지, 관찰기록문, 논설문 등 다양한 종류로 구분되어 있고, 그들의 직업 또한 다양하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아이들을 한권의 책을 통하여 글의 종류에 따른 글쓰기를 배우는 것과 동시에 다양한 직업관도 살펴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글쓰기 비법이라는 것이 말로 설명한다하여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이 쓴 글의 예문을 좀더 풍부하게 담아서 보여줬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인물에 대한 소개는 간단하게 제시하고 대신 참고도서를 제시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그들이 쓴 글에 대한 백과사전식의 설명 말고, 실제 글을 더 많이 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되어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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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2 - 세계신화총서 6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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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의 여정은 참으로 눈물겨운 여정이었다. 눈물을 흘려서는 안되는 마을에서 태어나, 눈이 아닌 머리카락으로 울수밖에 없었던 비누가, 손으로 발로 유방으로 온 몸으로 울고, 결국은 눈으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을만큼 힘든 여정을 끝내고 도착한 대연령에서, 그녀는, 죽은 남편 치량의 소식을 접했다.

참 바보같은 여자라 생각했다. 그깟 겨울옷이 무어라고, 남편에게 그 겨울옷을 입히려고 그 힘든 여정을 떠나나했다. 나는, 그녀를 비웃던 수많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1권에서도 만만찮은 여정을 가던 비누는 2권에서 더 힘들고 아픈 일을 겪는다. 그녀의 유일한 동반자였던 청개구리도 그녀의 구덩이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엉뚱하게 도적놈의 아내역할을 맡아 관에 발을 묶인 채 그렇게 대연령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편에게 줄 겨울옷에 대한 미련을 못버린 그녀는 소복을 염색하기도 하고, 헌옷가게에서 옷을 훔치기까지하면서 대연령을 향해 갔다.

결국 그녀가 만난 것은 남편이 아니라 죽은 남편 위에 세워진 장성이었지만, 그 장성마저도 무너뜨리는 비누. 비누의 눈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기억을 되찾게도 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참회하게도 하였다. 눈물의 힘이란 과연 그런 것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힘. 비누의 눈물이 힘이 있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자의 마음 때문이다. 남편을 그리워하고 남편의 걱정하는 마음, 오로지 다른 사심없는 눈물이었기에, 그녀를 위해 울어줄 청개구리와 풍뎅이와 흰나비떼가 그리로 쫓아올 수 있었지 않았을까?

황제의 권력이란 것도 무상하여 죽고 나니 썩은 생선만도 못하더라. 황제가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자신만의 여흥을 즐길 때, 그 밑에서 황제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어놓는 자들이 있었으니, 건설되지도 않은 운하에 띄울 배는 황제의 짐이 되었다. 권력이란 그리도 무상한 것이니, 제대로 묻히지도 못하고 길가에 버려진 도적 진쑤와 황제가 무에 다를까? 좋은 옷과 좋은 관 속에서 향내를 피우며 누웟던 진쑤도 결국은 길가에 버려져 제대로 묻히지도 못했듯 황제도 그러하지 않은가?

비누는 자신의 죽을자리를 찾아 구덩이를 파고, 다시 조롱박으로 환생하기를 원하지만, 세상은 그녀가 누울 조그만 자리 하나 비켜주지 않았다. 결국 조롱박이 던져진 곳은 남편이 죽어 무덤도 없이 스러져간 곳이었다. 온몸으로 우는 여자, 비누를 위해 울어줄 자는 누구인가? 그 어떤 인간도 아닌 청개구리와 풍뎅이와 흰나비떼였다. 그것은 그 어떤 인간의 눈물보다도 강한 메시지를 전하며 비누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한낱 미물보다도 못한 인간들을 꾸짖기라도 하듯.

눈물을 통해, 쑤퉁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중국의 신화나 설화는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것과 묘하게 닮아있다. 같은 문화권이고 옆에 붙어있다는 지리적 여건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낯설고 먼 서양의 신화와 설화에 익숙해진 터라 동양의 이야기에 괴리를 느끼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황석영의 바리데기가 생각나던지... 바리데기라는 한국의 설화를 현대에 재구성한 황석영의 바리데기와 쑤퉁의 눈물은 묘하게 닮아있다. 내용을 떠나 그 정서가 그러하고 윤리가 그러하다. 이번에도 세계신화총서는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듯하여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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