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띠 동물 까꿍놀이 (보드북) 아기 그림책 나비잠
최숙희 글 그림 / 보림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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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한솔이에게도 책선물이 도착했네요..
어쩌다보니, 아직 돌도 안된 아기에게 조금 레벨이 높은 책을 많이 보여주게 되어 내심 걱정을 했었는네, 이번에 [열두띠 까꿍놀이] 덕분에 이제서야 연령에 딱맞는 책을 보게 되었네요.
한솔이는, 개띠예요. 열두띠 까꿍놀이를 보면서 개 이야기도 많이 해줬답니다. 아직은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멍멍이 소리를 내면서 놀아주니 좋아하네요.

거기다가 책속 동물들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엄마 아빠도 한솔이 앞에서 온갖 표정을 지으며 까꿍~놀이를 했답니다. 아이가, 스윽~ 웃는 미소에서 벗어나 까르르 까르르 소리내어 웃네요.
눈 가리고 까꿍~놀이를 몇 번 하더니, 이제는 미끄럼틀 뒤에 숨어서 까꿍놀이를 합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열두 띠 동물 중 일부는 단체로 등장했다는 점이에요. 이왕이면 개별로 다 출연(?)을 해줬으면 더 좋앗을텐데 하는 욕심이 생기네요. 물론 그랫다면 책이 지나치게 단조로워질 수 있었을테니 까꿍놀이하는 동물들의 자세도 좀 바꾸고요. 지금 책은, 까꿍놀이를 하는 동물들의 표정 때문에 웃을 수는 있었지만, 연속해서 보기에는 지루한 감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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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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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유진과 유진>과 <쥐를 잡자>를 읽게 된 건 우연이었다. 굳이 성폭력과 관계있는 문학작품을 읽을 것이라고 의도한 바는 없지만, 각각 다른 지인으로부터 두 권의 책을 소개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읽었던 <쥐를 잡자>가 빠른 템포로 읽어나간 책이라면 <유진과 유진>은 천천히 읽어나간 책이다. 두 작품의 소재가 성폭력이라는 주제를 같이 다루고 있음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유진과 유진>은 동명이인의 유아가 같은 유치원에서 같이 겪은 성폭력이라는 사건 이후 다르게 성장한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유아를 상대로 한 성폭력에 대처하는 부모의 자세에 따라 아이들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큰유진은, 사건 이후 부모로부터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사건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게 된 경우다. 물론, 큰유진의 마음 속에는 치유되지 못한 채 응어리진 상처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큰유진은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밝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은 유진은, 피해자이면서도 오히려 죄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아이다. 그 상처는 드러나지는 않지만 되려 숨겨진 곳에서 곪아가고 있었다.

같은 사건을 대하는 두 부모의 대처방법은 확연하게 달랐다. 어쩌면 이것은 그러한 문제에 부딫쳤을 때 어떤 부모들이라 해도 두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을 할 수 있다. 그 때의 선택에 따라 우리의 아이는 큰유진이 될수도 작은 유진이 될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한쪽, 그러니까 이 책에서는 작은 유진의 부모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어리고 여리기만 한 미성숙한 존재로 보인다. 사실, 큰유진의 부모처럼 대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아동(유아)성폭력에 대처하는 부모의 자세로서 권장(?)되어야 할 방법은 큰유진의 부모가 했던 방법이다.

큰유진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밝게 만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학교생활을 통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여기서는 소라-를 사귈 수도 있었다. 작은 유진은 사건 자체에 대한 기억은 잃어버렸는지는 모르나 항상 뭔가 불안해하면서 살았다. 그 불안은 언제 어디서건 다시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었으므로 작은유진 뿐만 아니라 작은유진의 주변인들-외할머니, 친가쪽 조부모, 부모-에게도 그 사건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화약과도 같은 것으로서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또한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보일 수 없는 작은 유진은 친구도 없이 늘 혼자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사랑해줘야 할 부모로부터 냉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우리 주변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또래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만하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 그들에게도 생각하는 힘이 있고 그들만의 고민해결방법이 있다. 날라리로 치부되는 아이들도 그들만의 꿈이 있고 그들 나름의 고민해결을 위한 방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어른들-는 날라리는 날라리이고, 범생이는 범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날라리는 날라리끼리, 범생이는 범생이끼리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 아이와 놀지 마라. 라는 말은, 어른들의 이분법으로 아이들을 재단한 결과 나온 말이다. 사건 당시 아이들의 편에 서서 문제해결을 도와주었던 건우엄마도 자신의 아이와 연관이 되면 그 아이의 편에 서지를 못한다. 자기 자식 앞에서는 이성이 속삭이는 소리보다 감성의 소리가 먼저인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품고 안아줘야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부모으 역할은 가장 크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지 못하는 믿음을 다른 이에게서 얻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두 부모 모두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헸던 행동이었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달랐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잇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확인하고 나면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이 상처에서 빨리 회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아이들이여,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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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잡자 - 제4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푸른도서관 18
임태희 지음 / 푸른책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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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이제 돌을 앞두고 있다.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도 약간의 짐으로 다가왔었다. 더군다나, 사회에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한 아이의 엄마, 딸아이를 둔 엄마의 심정을 더욱 위축시키는 듯했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너에게만은 저런 상처 없이 예쁘고 건강하게 키우마..라고 다짐도 해보았다.




내가 살아온 시간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어떻게 하면 너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생각도 하기 싫지만, 너에게 이런 상처가 생긴다면 어떻게 보듬어주고 낫게 해줄 수 있을까?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 느끼는 감정은 여러가지였다.




책을 펼쳐든다. 갉작갉작... 쥐가 뭔가를 긁는 소리를 내며 세 명의 여자에게 다가왔다. 보잘 것 없는 쥐 한마리가 마음속에 들어와서는 불안을 자아낸다. 마치, 그 불안의 실체인양 쥐는 갉작갉작 긁어댄다. 교단에 선지 얼마 되지 않는 초보 교사의 마음속에도 쥐가 한 마리, 미술대학 조소과 강사인 젊은 엄마의 냉장고 속에 쥐가 한 마리, 주홍이의 뱃속에 쥐 한 마리, 이렇게 세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쥐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이야기는 주홍이에게 역점을 두지 않고 세 사람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무게감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하다.




쥐를 잡자. 쥐는, 최선생에게는 아이들과 교감하지 못하는 초보강사의 두려움으로, 주홍이엄마에게는 과거의 무게에 짓눌리고 억눌린 감정으로, 주홍이에게는 원치 않는 생명으로 자리 잡았다. 쥐를 잡자...쥐를 잡자...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파고든다. 하필이면 이 세 사람의 존재감은 나와 무관치 않다. 그 모든 공통점을 안고 책을 읽는다. 이 책 속의 세 사람은 마음을 열지 못하고 혼자 끙끙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 속의 쥐는 두려움과 아픔과 슬픔을 먹고 점점 커져간다.




주홍이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아이다. 그렇지만, 누가, 언제,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주홍이가 임신을 한 상태라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우리는 흔히 아이를 위한답시고 수많은 질문을 쏟아낸다. 그건 그 아이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는 행위라는 걸 인식하지 못한 채 또 한 번 아이에게 시련을 주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경계하고 있는 듯하다.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작가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세 명의 화자가 번갈아가며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서술방식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세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있게끔 도와준다. 그래서 나는 최선생이 되기도 하고 주홍이가 되기도 하고 주홍이엄마가 되기도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알아간다. 이 책 속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어 사건을 바라보던 우리를 반성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도 나처럼 세 명의 화자가 되어 볼 것이다. 나 혼자 그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누구나 불안과 고민을 내면에 품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 것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비록 주홍이가 낙태 후 심리적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자살을 했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을 읽는 어른들도 세 명의 화자가 되어 바라볼 것이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학교의 방침이라든가, 성폭력에 노출된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든가-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쥐들을 키우고 있는지를..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우리가 얼마나 무관심한 채로 살아왔는지를..




쥐를 잡자. 우리 마음속의 불안과 두려움, 슬픔, 속박을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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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랑 나랑 의사놀이 친구랑 나랑 놀이 시리즈
씽크밸리 글, 류수형 그림 / 효리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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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이들의 눈길을 끌기에 청진기와 주사기 장난감은 아주 유효했다.
글을 모르는, 아니 병원이란데가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는 우리 한솔이도
청진기와 주사기에는 푹 빠져버렸을 정도니까 말이다.
한솔이는 1살이니까, 책을 읽어준다고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거나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청진기를 귀에 꽂고 배에 갖다대니 불빛이 들어오면서 심장소리까지 나니
아이가 까르르 웃는다.
주사기로는 매번 예방주사 맞던 자리에 대고 흉내를 내었더니 금새 따라한다.
한참을 그렇게 놀고 나더니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때 책을 읽어주었다.

 
악어가 사탕을 먹다가 이가 썩은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원숭이 다리 부러진 이야기,
배아픈 곰이야기, 안대를 한 돼지까지..이야기를 들려주니 그림을 유심히 쳐다본다.

아이들이 병원을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뭘까? 주사가 아파서? 아마도 그렇겠지?
요즘은 의시선생님도 간호사 언니들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진료를 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옛날과 같이 무서운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아파서 병원에 가는 아이들은
병원 근처만 가도 울기 일쑤다.
아직 한솔이는 그런걸 모르는 때라 주사 맞을 때만 잠시 울지만, 곧 그런 걸 알게 되는 때가 오겠지.

이 책을 보면서 아이에게는 병원이 무서운 곳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병원에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다.
귀여운 그림이 아이에게 관심을 유발시키는 듯하다.
의성어 의태어의 적절한 쓰임도 괜찮은 것 같다.
 
마지막에 아기가 아이스크림과 사탕을 손에 들고 진흙탕에서 노는 장면은,
아이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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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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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간절하게 바라던 왕이 7명의 딸을 낳자 화가 나서 7번째 딸을 바다에 버렸는데 거북이 용궁으로 데려가서 거기서 자라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바리공주 -바리데기-인데 왕이 병이 들었는데 바리공주가 구해 오는 불사약을 먹어야 나을 것이라 하여 저승으로 가서 부처님을 만나고 신선에게서 약수를 구해 와서 왕을 살려냈다. 그래서 바리는 죽은 자가 저승 세계로 안전하게 가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하는 굿을 할 때 모셔진다.




내가 알고 있는 바리공주 이야기가 황석영의 바리데기에서는 어떻게 그려질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이 책(내가 읽은 것은 가제본 형태이다)을 읽었다. 옛 서사를 보면 바리는 자신을 내다 버린 부모를 위해 죽을 고생을 하고 생명수인 약수를 구해 와서 살려낸다. 그러나, 자신을 내다버린 부모에 대한 효가 중심이라기보다는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자들을 구해준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만약, 이 서사가 孝만 강조했더라면 오랜 기간 전승되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바리데기는, 옛 서사의 줄거리를 빌려왔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책 속의 바리는 현대의 북한과 중국, 영국을 거치면서 옛 서사 속의 바리데기처럼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생명수를 찾아 부모에게 돌아가야 하는 바리데기와는 달리, 책 속의 화자 바리는 생명수를 찾아 돌아갈 곳이 없다. 바리데기의 운명을 타고 났지만 바리에게는 그 생명수-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자신을 버린 부모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리에게 주어지는 고난, 중국에서 밀항선을 탔던 사람들의 고난, 이슬람 사람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생명수로 되살아난다. 바로 이 점이 바리데기의 주술적 역할-죽은 자들을 저승세계로 안전하게 인도하는-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바리의 고난은, 바리 개인의 고난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북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서 살 길을 찾는 사람들, 그마저도 어려워 다시 외국으로 밀항을 해야 하는 사람들, 외국에 가서도 불법체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의 고난이다. 이들의 고난이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도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최근 몇 년 동안 벌어졌던 사건들과 연관되기 때문일 것이다.




바리의 고난의 삶을 통해 황석영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람들의 욕망, 전쟁, 슬픔, 속박과 압제, 미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희망에 대한 믿음. 이 모든 것이 이 책 속에 있다. 우리는 그 중에 우리 각자에게 맞춤한 대답을 찾으면 된다.




황석영은, 얼마 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현대 한국문학은 다채롭고 힘이 있으며 라틴아메리카문학처럼 서구문학에까지 오히려 많은 영감과 반성을 줄 수 있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계간 창작과 비평 2007년 여름호, p.185) 바리데기가 바로 그런 서사를 가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적인 서사를 차용하여 소설의 무대를 넓히고, 다양한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풀어낸 점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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