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 & DAD -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학부모 세계의 진실
로잘린드 와이즈먼.엘리자베스 래포포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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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학부모는 아니지만, 세월 흐르는 걸 보면 금방인지라...나도 곧 학부모가 되겠지. 요즘은, 학교에 가기 전, 유치원, 유아원, 어린이집, 거기에 각종 문화센터에서도 학부모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는 터라 그렇게 먼 일만도 아닌 듯하다. 어쨌든, 좋은 학부모 이전에 좋은 부모 되기부터 시작해야겠지.

이 책은, 좋은 부모를 넘어서서 좋은 학부모가 되는 길,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학교와 학부모, 학부모와 학부모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류의 책이 흔히 그러하듯이, 다 읽고나면,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쉬쉬 숨기려고 했던 일들을 까발렸다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선, 이 책의 장점을 꼽자면, 아이의 교육에 관여하는 사람으로 엄마 만이 아니라 엄마, 아빠로 확대하여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학부모를 유형별로 분류하여 특징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그에 따른 대처법을 설명했다는 점일 것이다. 책의 앞부분의 절반을 차지하여 학부모의 유형을 살펴보면서 나는 어떤 유형이며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학부모의 스타일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유의할 점이랄까? 그런 걸 알수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나는 몇가지 유형이 섞인 복합형인데, 이 책에서는 복합형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학부모가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서로 따지자면, 가정 내에서 내 아이를 키우던, 집안일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학교라는 사회에 속한 아이를 따라 부모에서 학부모로 지위가 변함을 의미한다. 흔히들, 내 자식 내가 이렇게 키우든 저렇게 키우든 상관마시오라고 말할 때는, 가정사가 되므로 왈가왈부할 수 없지만,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나의 지위가 학부모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음으로써 가정사가 아니라 공식화된 사회적행동이 된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대로, 다른 학부모와, 학교를 상대로 한 관계 정립에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상대의 말에 숨어 있는 속뜻을 나름대로 풀이해놓았는데, 이것은 정답이라기보다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의 말에는 속뜻이 있으므로 잘 구분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건 굳이 학부모 세계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이 책에서는 상대를 다른 학부모와 학교, 혹은 교사로 설정을 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야기로 발전했을 뿐이다. 이 내용을 다른 사회생활에 적용해도 무리는 없어보인다.

이제 이 책의 단점을 얘기하자면, 외국의 사례를 에로 든 외국의 자녀교육서이기 때문에 학부모 세계의 보편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면,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은 서방세계의 교육환경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일본의 자녀교육서였다면 비슷한 점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우리나라 교육환경에서 우리나라 자녀교육전문가가 조사하고 연구한 내용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음에 있어서 사례로 제시된 내용들이 우리의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별세개밖에 주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리라 생각한다. 학부모가 된다는 것은 또다른 사회 속 관계를 만들고 유지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학부모의 영향이 우리나라만큼 큰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학부모의 사회적 역할은 크다. 자식사랑이 오히려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지 못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최근의 여타 사건들을 보면서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학부모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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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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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현대사회의 주류로 살아가기 위한 교양을 쌓는다며, 미술관이며 전시회에 쫓아다닌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나 전시물을 보며, 그림이나 전시물, 그 자체를 두고 다시 그것을 설명한 책자나 자료를 찾아서 머리 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어야하는 수고마저 아끼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작품은 없.다.

몇년을 그렇게 보낸 후, 나름대로 고흐와 클림트의 작품에 빠져 즐기기도 했는데, 이론서나 코멘트 없이도 내 나름의 미적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그림에 대한 해석이 다른 전문가들과 다르더라도 '모든 예술이 한가지로 해석된다면 그건 예술도 아니지'라며 건방을 떨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내가 미술작품이 아닌 책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떤 작품은,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구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남들에게는 대단한 책이 되기도 하고, 유치하다 싶은 책이라도 그걸 읽을 때 나의 심리에 따라 괜찮은 책이 되기도 했다. 물론 수많은 책을 두고 쓴 비평가들의 목소리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기도 하다. 책을 대할 때는 내 주관을 많이 개입시키는데 비해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남들에 맞춰야하지 않을까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의 통쾌함을 느낀 건 바로 이런 점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글은 날카로운 가시가 돋힌 독설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는, 인터넷 상에서 알게 된 어떤 블로거의 글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일견 이 책은, 해당 비평가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들었을 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쓰레기 전시장같은 작품들을 비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작품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 그런 작품을 평하는 비평가들에게 향하고 있다. 바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에 조롱이 담겨있다고 보는 그의 시각, 무조건 어렵고 난해하게 만들어놓으면 잘난 비평가들이나 무지한 대중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들을 비꼬는 그의 목소리가 잘 드러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는 아니나, 글의 다양성 측면에서, 예술에 무지한 나같은 독자의 가려움을 긁어준 그 시도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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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신문 읽는 여인
해리엇 스콧 체스먼 지음, 임후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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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메리 커샛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인상파니 뭐니하며 이름이 오르내리긴 했지만, 메리 커샛의 이름은 나에게 각인된 바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 조금 망설였다고나할까? 앞 표지의 그림을 보고, 이 여자 이야기인가? 하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인상파를 거론할 때 등장하는 수많은 화가들 틈새에서 메리 커샛을 찾아본다. 그녀의 그림은 많은 수가 아기와 함께 있는 여인의 그림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의 언니, 리디아를 모델로 한 그림 중에도 아이와 함께 있는 그림이 있긴 한데, 다른 그림에서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자, 책으로 돌아가보자. 메리 커셋은 프랑스에서 화가로서의 삶을 살면서 브라이트병을 앓고 있는 그녀의 언니 리디아를 모델로 한 몇개의 작품을 그렸다. 이 책은, 리디아의 시각으로 메리커셋을 바라보고 그녀의 연인인 드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메리 커샛과 드가의 러브스토리는 리디아의 주변에 머물 뿐이다. 병을 앓고 있으면서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는 여자, 리디아는 자신의 삶을 동생인 메리 커샛의 그림을 통해 연장한다. 그림의 모델이 되는 일은 고되고 힘든 일이지만 메리 커샛에게는 화가로서의 영감을, 리디아 자신에게는 삶의 연장을 의미했다.

병색이 짙어질수록 리디아는 자신의 삶이 다른 이들처럼 지속될 수 없는 아픔을 포착해내는 동생의 시선을 느낀다. 병으로 몸져 누워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사람은 생각이 많아진다. 리디아 역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수많은 생각에 빠져든다. 그림의 모델로서 시간을 붙잡고 있을 때도 그녀는 그녀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은 리디아의 생각 속을 헤엄치며 나아간다. 그림을 소재로 하여 그림 속 모델을 주인공으로 한 다른 소설, 대표적으로는 슈발리에의 [진주귀고리소녀]를 생각할 수 있다. 국내에 먼저 번역되어 나름대로 인지도를 높인 슈발리에의 코멘트는 그것을 노린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슈발리에의 소설 속 소녀와는 달리 이 소설 속 리디아는 침대에 누워, 혹은 모델로 움직임을 멈추고 있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일까? 인물들에게서 느끼는 생동감, 극적 장치들은 미흡해보인다. 잔잔하고 조용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대로 리디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리디아의 심리 상태를 작가는 상상력으로 복원해낸다. 책을 읽으면서 가끔 나오는 그림은, 그러한 상상력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좀 심심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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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우리 명절이야기
강난숙 지음 / 대교출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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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고 있는 우리의 명절은 몇개나 되나요??
 
나는, 명절이라고 하면, 설날, 추석, 그리고 단오를 포함하여 3대명절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이 세 명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터였다. 이외에도 더 많은 명절이 있겠지만, 실생활에서 명절 기분을 그나마 느낄 수 있었던 날은 이 세날이 아닐까?
 
그러던 차에, [소중한 우리명절 이야기]를 읽게 되었고 내가 모르던 명절이 참 많았음을 알게되었고 어, 이 날도 명절이라고 얘기할 수 있구나 하고 새로 알게 된 사실도 많았다. 내가, 이렇게 우리의 것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고, 이제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겠구나, 그리고, 나 스스로도 그날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나의 감상이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떤 점을 느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아직 아이가 어린 탓에 아이가 직접 읽어볼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을 읽은 어린이들에게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많은 명절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또한 엄마의 할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책으로 알게 된 명절이 많다한들 그것이 실생활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명절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 책의 장점은, 명절에 대한 설명을 쉽게 풀어놓았다는데 있다기 보다, 명절을 즐기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10개의 명절을 소개하고 그날의 의미, 그맘때 할 수 있는 놀이, 음식, 관련된 옛 이야기, 그 즈음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행사가 있는지까지 소개를 하여 명절을 고리타분한 옛것으로 느끼지 않고 실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컴퓨터 게임이나 텔레비전에 빠져있기 쉬운 아이들에게 우리의 전통놀이를 명절에 따라 (혹은 월별로) 소개하여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고, 음식 소개와 더불어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요리팁까지 소개하고 있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더불어 외국의 명절 (혹은 행사)을 같이 소개함으로써 시야를 넓게 확보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이 책이 2002년에 발행된 책이라는 점에서 벌써 5년이나 지나는 동안 우리 명절과 관련한 다른 책들이 많이 나왔겠지만, 5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만치 잘 짜여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단점은, 현대에 있어서의 명절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코너가 없다는 데 있다. 사실 여기 소개된 명절 중에서 나처럼 2-3가지 명절 외에 명절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옛날에는 왜 렇게 많은 날들(달마다 하나씩)을 명절로 기렸는지, 현대에는 이런 명절들이 왜 축소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꼭지, 혹은 생각하기 정도라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빠져있지만, 이 책을 읽는 아이에게 부모로서 도와주어야 할 부분이 이 부분이라는 말도 된다. 그리고, 우리의 풍물놀이를 [농악]이라고 표현한 부분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휘 선정에 있어서도 이왕이면 풍물이라 지칭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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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헤 1
미카 왈타리 지음, 이순희 옮김 / 동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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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누헤...두권의 시누헤 읽기를 드디어 끝냈다. 드디어!!라는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소설. 어찌 그리 읽히는 게 더딘지, 다 읽어야한다는 책임이 없었다면 다 읽어내지 못했을 것같다. 마치 대하소설 10권짜리는 읽은듯한 느낌이 든다. 방대한 내용이 있다는 것과, 길고 지루한 싸움을 끝냈다는 두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접해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인문서적을 통해 이집트를 많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읽기 힘들었다. 파로오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니라 의사의 길을 가는 시누헤의 입장에서 쓴 글이라 파라오 중심의 글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선함을 느꼈으나 시누헤라는 인물에 도저히 감정이입이 안되었던 것이다.

 

시누헤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노예이자 하인인 카프카가 더 와닿는 인물이었고 카프카의 처신이 더욱 이해가 가는 편이었다. 혼란과 무질서의 세계에서 시누헤를 붙들어준 것은 파라오도, 그의 신념도, 그가 사랑한 여인들도 아니라 바로 카프카였다고 생각한다.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했고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자였다.

 

그러나, 물론 시누헤의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다.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은 물론이고, 이집트의 하층민의 생활, 귀족이나 파라오가 아닌 이들의 삶을 볼 수 있었으니 이 책의 의미는 거기에서 찾아야할 듯하다. 내가 알고 있는 파라오와 다른 파라오의 모습, 신에 집착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개적 비공개적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파라오의 모습을 보았다. 또, 그러한 귀족사회의 혼란 속에서 이집트 민중들의 가난과, 고통이 어떻게 무시되고 있었는지를 보았다.

 

카프카라는 인물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비록, 그가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의적처럼 살아간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알고 있는 자였다. 시누헤와 카프카가 이야기를 나눌 때, 시누헤는 시종일관 카프카의 무례함과 오만함을 보았지만, 나는 시누헤의 멍청함을 보았다. 노예인 카프카보다도 사회를 보는 눈이 밝지 못했던 시누헤였지만, 자신의 의술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모습만은 본받을만하였다. 그 점조차 없었다면, 시누헤는 의미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 여겨질 정도이다.

 

더군다나, 시누헤가 네페르네페르네페르에게 빠져 가진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부모의 소박한 꿈마저 버려지는 모습을 보앗을 때는 어찌나 분통이 터지던지, 아, 눈먼 남자여~!! 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미네아와의 사랑이 없었다면 한심한 남자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했으리라..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 바로 미네아와의 사건이다. 미로 속의 미노타우로스 신화가 겹쳐지면서 지루했던 시누헤의 여행에 생동감이 넘치는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미네아의 죽음을 뒤로하고 다시 시누헤가 이집트의 일상으로 돌아와서부터 또다시 지루한 여행이 계속되었다. 사실, 전쟁과 관련된 부분이 나와 같은 여성(전쟁이나 싸움에 과심없는, 혹은 한참 유행이었던 시뮬레이션게임애도 흥미가 전혀 없는)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을듯.

 

그러나, 시누헤가 이집트 귀족의 일상이나, 파라오와 호화로운 생활을 할 때 보여준 권태로움과 지루함에 비해 시신처리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악어꼬리술집을 경영하며 곡물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카프카의 생활력은 재미를 더한다. 전체적으로는 끝까지 읽기가 힘든 소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소설은 파라오의 권력투쟁기도 아니요, 이집트에서 의사로 살아가기 위한 지식과 의술의 향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아니요, 혼란스러운 이집트에서의 신-아몬과 아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아케나톤의 혁명적 시도도, 마치 정신병자의 행동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그려져 있어 혁명이라고 이름붙이기 민망스러울 정도이다. 마치, 요즘의 정치상황을 보는듯한 느낌도 든다. 사람들이 자유를 억압당한 채 살았을 때는 그게 숙명이려니 생각하고 입 한번 놀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귀족과 노예가 다같이 평등하다는 사상과 더불어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 자유를 오히려 제대로 누리지 못한채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 어른들이 모 대통령시절이 훨씬 좋았다는 말을 할 때마다 느끼는 괴리감과 똑같다. 사실, 언제 우리가 대통령을 놓고 농담을 했고, 대통령이 하는 일에 대놓고 반대를 해봤는가? 그러한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자들이 여전히 설치는 사회, 그 사회의 모습이 이 소설 속에 녹아있었다. 물론 아케나톤의 행적이 모두 이해되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과도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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