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삼켜버리는 마법상자 모두가 친구 7
코키루니카 글.그림, 김은진 옮김 / 고래이야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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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상자가 하나 있다. 여기에는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든 삼켜버린다는 말이 쓰여있다. 싫어하는것은 모두 다? 우와 멋진 상자인걸. 그런데 그림톤이 그리 행복한 색깔이 아니다. 검은색 펜으로 그려진듯한 그림은 뭔가 불길하거나, 약간 어두울 거란 예상을 하게 한다. 즐거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거란 건 틀립없어.

 

살면서, 내가 싫어하는 게 얼마나 많았나 한번 떠올려봤다. 어렸을 때를 생각하니 이것저것 많이도 떠오르는데, 나도 이 아이처럼 생선을 싫어했고, 시금치도 싫어했다.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도 온통 잔소리만 해대던 사람들 뿐이었던것 같았다. 지금은 그렇게 싫어했던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 아마 싫고 좋음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습관적으로 싫다는 말을 한 건 아닌지, 그렇게 싫다고 한 후에는 그 말을 주워삼키지 못해서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싫어하는채로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 여러가지를 느끼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아이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걸 권하는 내 모습이다. 결국은 어렸을 땐 몰랐지만 그것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아직 좋다 싫다 말은 하지 않는 아이지만 조만간 말문이 트이면 제일 먼저 싫어 싫어를 연발하게 될지도 모를 아이를 위해 엄마인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본다.

 

아이들은 이상하게도 긍정적인 단어보다 부정적인 단어를 더 빨리 배우는 것 같다. 그것은 어른들이 하는 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 이건 없어, 저것도 없어. 이거 하지마, 저거 하지마. 그러니 아이들은 부정적인 단어를 먼저 배우게 되고,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니 싫어 싫어를 연발하게 되는 건 아닐까?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쓰게 되긴 하지만, 이제부턴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아이가 싫어 싫어를 연발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되겠다. 자, 그 다음엔?

 

여기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상자가 있단다. 뭐든지 네가 싫어하는 건 다 삼켜버린다니 최고가 아니냐~!@! 아이와 함께 이 책을 읽어보자. 주인공 아이는 자기가 싫어하는 것들을 모두 상자가 삼켜버리는 걸 보면서 좋아했을까? 강아지, 동생, 선생님, 그리고 엄마까지 삼켜버린 세상에 아이 혼자 남아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면서 지내면 행복할까? 함께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을 하게 하면 좋을 것 같다. 시끄러운 강아지가 사라진 세상, 매일 엄마에게 혼나게 하는 귀찮은 동생이 없는 세상, 잔소리하는 선생님이 사라진 학교 등등등...그 세상을 상상해보자. 아이가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앉아있는데도 웬지 허전함을 채울 수 없는 그림을 보면서 아이의 느낌을 함께 이야기해본다면, 이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는 곳이고, 내가 함께 있고 싶은 사람과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림책은 단지 그 상황을 한장의 그림으로 보여줄 뿐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기 위해선 아이의 상상력이 발휘되어야한다.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마법상자에 넣고 싶은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없어진 이후의 세상을 생각하고, 그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진 이후를 상상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는 혼자 사는 세상이 얼마나 외롭고 재미없는 세상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림책은, 그림을 통해 상상하는 책이다. 어떤 그림책은 아이의 상상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이 책은, 오히려 아이의 상상을 유도하는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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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올 에이지 클래식
낸시 가든 지음, 이순미 옮김 / 보물창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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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은 뒤, 내 머리 속에는 그 말만이 맴돌았다.

누구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고, 병도 아니고, 우리의 사랑이다...라는..

이 책을 쓴 낸시 가든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시종일관 어른들의 눈과 주위의 시선은, 너희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고, 비정상적인 형태이며, 성적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리자의 항변은 사랑이었다는 것이었다.




사랑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사랑을 좁은 의미로 남녀간의, 즉 이성간의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인류애적인 사랑은 그저 정신적 사랑만 해당하는 것일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동물을 늘 만지고 싶어 하고 가까이 두려한다. 그것을 사람들은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하지 않는 사람-먹거나 학대하는-들에 대한 비판마저도 서슴지 않는다. 단지, 수간이 아니다 뿐이지 스킨십은 허용하고 있는 사랑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여자는 여자를 남자는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될까? 정상적인 가족관계를 해치고, 사회체제에 반한다고 해서? 그것도 아니면 수많은 오해 속에 둘러싸인 에이즈 때문에? 정상적인 가족관계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현재의 사회체제가 정한 관습이 아닌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면 꼭 아이가 있어야한다는 말과 같은 이치가 아닌가. 사랑을 해도 결혼하지 않을 수 있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남녀가 아니라 여여, 남남이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내가 동성애를 지지하고 장려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것도 수많은 사랑 중에 하나이고, 사회체제를 전복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요즘처럼 출산률 저하의 시대에 비생산적인(?) 결합에 제동을 걸 수도 있겠다. 하~ 비생산적인...이라는 단어를 쓰고 보니 나는 이성간의 결합을 통해 이 사회에 아이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니까 논점은 이것이 아니다.




리자와 애니의 관계는 사랑의 한 형태일 뿐이다. 사랑하기에 만지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성적호기심과 쾌락을 향유하고자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게 아니란 것이다. 앞뒤가 바뀌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그랬다가 아니라 그러기위해 사랑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동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사랑의 하나로 인정할 줄 알아야 어두운 곳에서 오로지 쾌락을 위해 변질되고 있는 가짜 동성애를 뿌리 뽑을 수 있다는 말이다.




남녀 간의 결합이라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오로지 자신의 성적인 충족을 위해 사랑을 빙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12세의 아이와 24세의 어른(?)이 사랑한다면 문제가 되지만 48세의 어른과 60세의 어른이 사랑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12세의 아이는 가치판단을 할 때 조금 미흡할 수 있고, 그래서 어쩌면 약간의 강제성이 동원된 사랑이 아닐까 의심해서이고, 어른들의 사랑은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물과의 스킨십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면서도 수간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스킨십은 애정의 표시지만 수간은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에게 강제성이 부여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의 의지로 충분히 행동하고, 자신의 판단력과 가치기준이 있는 17세 소녀들의 사랑은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 17세라는 나이가 사회적인 통념상 어른보다는 아이에 가깝다고 느끼지만 이미 그들도 하나의 성인이기 때문에 존중해 주어야한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이해될 부분이기는 하지만, 낸시 가든이 이야기한 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서 모방한 것이 아니라 감정과 이성이 모두 적용한 결과로서 말이다.




어렸을 때, 중고등학생 때 많은 아이들이 동성 간의 친밀감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친밀감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는다. 사회적 통념상 그들의 감정은 우정이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동성 간의 사랑도 인정된다면-아, 사랑하는데 누군가의 인정이 왜 필요한 거야- 그들 모두 동성 간의 사랑을 키우게 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사랑(?)해마지 않았던 동성에 대한 생각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이성으로 옮아가는 것은 누구의 제재도 누구의 영향도 아니기 때문이다. 관심영역의 차이, 인식의 차이가 이성간의 결합을, 혹은 동성 간의 결합을 자연스럽게 이어줄 것이다. 동성애가 완전히 터부시되지 않았던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주 오랜 기간 인류가 유지되었던 것은 그래서이다.




그냥 사랑은 사랑이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당신의 아이가 동성 간의 사랑을 한다면? 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건 그 아이의 선택일 뿐이니까. 그러나, 사회적인 멸시의 눈초리를 견뎌야하는 아이의 생활은 걱정스러울 것 같다.




지금까지의 글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동성애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애니와 리자가 완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마음의 교감이랄까? 그런 것이 많이 드러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별로 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의 마음을 묘사하기보다 그들의 상황을 묘사하고 주위의 시선을 이야기하느라 분산되어서일 것이다. 결국은 낸시 가든의 이야기는 동성애를 지지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을 마치 벌레 보듯 대하는 사회에 던진 하나의 돌멩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하는 것은 독자의 몫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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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1-1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가는 도서에요. 잘 읽고 갑니다.^^
 
오디세이 왜건, 인생을 달리다
시게마쯔 키요시 지음, 오유리 옮김 / 양철북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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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사는것보다 죽는게 나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지...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속에서는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되새김할 수 있었다. 인생은 수많은 기로 속에서 선택을 하며 살게된다. 그 선택이 나에게는 최선이었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그때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 인생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순간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걸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단, 지금부터 남은 인생을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하며 보낼 수는 있으리라.

시게마츠 기요시의 책은 두번째이다. 두 번 모두 죽음을 테마로 하되 슬프고 맥빠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한편으로는 죽음이라는 테마를 이렇게 경쾌하게(?) 그려낼 수 있는 작가에게 신뢰가 생겼다고 할까?

어느날, 이제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나을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가즈가, 오디세이 왜건을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죽은 하시모토씨와 겐타를 만나 자신의 과거로 달려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즈가 간 과거에서 죽음을 앞둔 츄우상(가즈의 아버지)을 만나 자신의 과거(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만나기도 하고, 이제는 헤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와, 폭력적으로 변해버린 아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반추하게 된다. 가즈가 만난 과거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걸어온 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츄우상과 함께 그는 되돌리고 싶은 자신의 과거에 관여해보면서 지금까지 만들어온 과거는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되고 괴로워하지만, 이 여행이 끝나는 시점이 되면 그는 자신의 남은 생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죽음보다는 살아있는 생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축을 이루고 있는 이야기들은 이미 죽어버린 하시코토와 겐타의 이야기가 그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후회로 가득찬 삶을 살아온 것을 그들 역시 죽어서야 깨달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깨달음을 죽기 전에 느끼게 해주는 임무를 맡아 진행함으로써 그들 부자(父子)의 묵은 감정들도 함께 정리가 되어간다. 특히 겐타의 경우가 그러하다.

책을 읽는 내내 왜 과거를 여행하면서 그 과거를 바꿀 수 없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것은 그때의 선택 역시 당사자로서는 최선이었고, 그 결정에 책임이 따르고 있는 것이리라. 지금 이 순간순간을 다시 바꿀 수 있다면, 지금의 선택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있고, 앞으로의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결정도 지금의 선택도 모두 중요한 일인 것이다. 대신, 내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갈림길에 설 때 좀더 진지하게 내입장과 남의 입장을 두루 헤아리려는 노력을 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수밖에...

삶이 지독하게 힘들고 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또하나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책인 것 같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혹시나 과거의 결정에 손발이 더 묶여버릴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더 나은 앞으로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란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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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4 -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4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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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신화는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싶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알려져있고, 읽히고 있다. 그런데 또 이야기보따리를 이윤기님이 풀어놓으셨다. 이젠 그만 읽어도 될텐데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을 그냥 따라가보기로 하였다.

가끔 텔레비전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그리스로마신화를 재미있게 본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어도 또다른 형식으로 진행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도 그러하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글솜씨에 따라, 혹은 구성에 따라, 때로는 주제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맛이 있다. 이윤기님의 그리스로마신화는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듣는 옛날이야기처럼 구수한 맛이 난다. 우리것이 아닌데도 우리것처럼 읽힌다.

특히, 헤라클레스를 그린 그림이나 조각상들을 함께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이윤기님의 털털한 말솜씨(^^)도 재미나다. 나는, 그리스로마신화의 조각상이나 미술품들을 그냥 훑기만 했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조각상들이 유명 조각상들의 모조품(?)이라는 사실도 새롭고, 조악하게 흉내낸 조각상이 한국까지 와서 전시되었다는 사실도 새롭다. 다같은 조각상이 아니구나.

이윤기님은 예술가들에 의해 재창조되는 그리스로마신화의 영웅들을 이야기한다. 신화를 재해석한 화가나 조각가들의 작품처럼 이 이야기도 이윤기님에 의해 재탄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전문적인 식견으로 읽고자 하는 책이 아니라 교양으로 읽고자 하는 책으로서는 단연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래서 헤라클레스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무지막지하게 힘만 센 놈인가 했더니 나름대로 고민이 많은 놈이었다. 자기자신에게 유난히 엄격했던 헤라클레스, 술때문에 사고도 많이 쳤지만, 그때문에 괴로워하는 헤라클레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술은, 예나 지금이나 애물단지다. 물론 술김에 한 일이라고 선처를 바랄 수는 없다. 자신이 술에 유독 약하다는 걸 알고도 조심하지 않은 잘못이 있기때문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여, 헤라클레스처럼 될지도 모르니 조심하시오들..

신화는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 걸쳐 동기를 제공하고 영감을 준다. 그래서 신화는 계속해서 재탄생한다. 이윤기님도 문학동네에서 나온 세계신화총서를 관심있게 읽으시나보다. 두군데서 인용되고 있다. 그것은 역시 세계신화총서가 신화를 재해석하고 재탄생시키고 있기 때문일것이다. 신화의 내용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를 이해하려고한 사람들의 노력이고 시대의 가치를 흡수한 내용이기에 동양의 이야기와도 일견 통하는 구석이 있다.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람사는 곳이 다 그렇고 그런거 아닌가, 특별히 특이한 가치가 아닌 이상 비슷한 게 많을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더불어 동양의 이야기를 겹쳐놓은것도 읽을만했고 현대 한국화가에 의해 재탄생되고 있는 그림도 소개하고 있어 좋았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이야기보따리는 아직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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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곽재구 지음 / 이가서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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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한국문학에 있어서 시집이 제법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80년대와 90년대초 정도? 그런데 언제부턴가 시집이 손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왤까?

내가 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아니기때문에 말하기 조심스러워지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는, 시를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많이 사라졌다는 것, 함축적인 표현보다는 직설적인 표현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는 것, 혹은, 함축적으로 숨기지 않아도 될만큼 국내정세(?)가 나름대로 풀렸다는 것, 그리고, 시적감수성보다는 영화나 텔레비전같은 영상의 힘이 커졌다는 것? 정도???

어쨌든, 나 역시 시집을 사서 읽기가 많이 두려워진 사람 중에 하나다. 그런데, 이번에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를 읽어보니, 그런 마음을 조금은 다독여줄 시집이란 생각이 든다. 어느 누구 한명의 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시를 모았고-알만한 시인들이 모두 등장한다. 교과서 外적인 시인들이. 그리고 곽재구 시인의 설명은, 시 외에 또다른 한편의 에세이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어느 정도 시를 알고 시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에 차지않는 책일 수 있겠고, 시를 읽고싶은데 두려운 사람들에게는 편안하게 다가오는 시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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