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기도 전에 죽는 사람을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거추장스러운 내 안의 적들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김종래 <밀레니엄맨 칭기즈칸> 중에서

목에 칼을 쓰고 탈출하고 뺨에 화살을 맞고, 가슴에 화살을 맞으며 도망쳤다. 아내가 납치됐을때도 남의 자식을 낳았을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전쟁에 지고서도 더 큰 복수를 결심했고 군사 100명으로 적군 1만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칭기즈칸이었다.

더이상 앞으로 갈 수 없다고. 이젠 끝이라고 말할 때조차, 철저한 암흑에 빠졌다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때조차, 길은 앞에 놓여 있고 빛은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희망은 절망을 더욱 크게 만드는 부조리를 안고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놓지 않아야 할 끈은 희망이다. 희망을 품었을 때만이 차가운 가슴이 따듯해지고, 행복의 씨앗은 움틀 수 있다. 그 씨앗이 어떤 열매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희망의 빛과 물과 토양은 결국 아름다운 꽃을 피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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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이 유전자의 발현을 유발하기도 한다.-<개성의 탄생> 중

 

유전자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상하게도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신체적, 정신적 형태와 능력은 많은 부분 타고난다. 게다가 살아가는 동안 어떤 시기가 닥쳤을 때 찾아오는 유전적 발현도 있다. 가령 머리가 벗겨지거나 하는 것은 머리관리를 얼마나 잘 했는냐도 중요하겠지만 기본 바탕엔 호르몬 변화를 가져오는 유전자 영향이 크다. 그리고 이런 유전적 영향이란 타이머가 있어서 그 시간대가 되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어느 시기엔 어떤 변화가 나에게 찾아오는 것에 대해 이것이 유전의 타이머 작동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한번쯤 품어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숨죽여있던 유전자를 자극해서 어떤 형질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소위 열성적 성격의 유전자가 죽을 때까지 그 형질을 발현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떤 행동이 자극제가 되어 유전자가 우성적 형질을 띨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용불용설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다만 용불용설과 다른 것은 유전자의 속성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행동의 자극을 통한 유전자의 각성이란 타고난 운명이 아니라 운명의 개척을 말하는 듯하다. 따라서 감추어진 나의 능력을 깨우는 길은 모험의 연속을 통해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행동하라! 그곳에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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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를 따로 공부한 건 아니지만, 독서의 영향으로 세상을 저절로 시인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뜻인가요?

어느 날 보니 내가 시를 쓰고 있더군요. 처음에는 ‘이게 시일까?’ 의심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게 ‘시’냐고 어디 물어볼 데가 있나. 어쨌건 그때는 그냥 계속 써지더라고요. 나중에야 이게 ‘시’인가보다 싶어 다시 읽어보니까 감동이 ‘딱’ 생기는 거라…. 시는 자기 감동이 가장 중요해요. 그 후에 스스로 완성도가 있다고 생각한 시를 골라 잡지사에 보냈더니 나중에 연락이 왔어요, 시집에 실어주겠다는 거예요.

Q 스스로 시에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잘사는 방법은 자기가 잘사는 길을 가는 것이겠죠. 그러고 보면 지금 이게 내가 잘사는 길이다 싶으니, 책 읽고 글 쓰는 재주가 어디에 숨어 있었겠죠? 문학을 배운 적은 없어요, 자연에서 배웠죠, 자연은 시시때때로 주는 말이 많아요.

Q ‘자연이 주는 말은 어떤 말’인지요?

음…. 뭐랄까. 젊을 때는 자연이 너무 많은 말을 주니까 헤맸어요. 이 시기가 자연과의 갈등 시기지. 소쩍새가 울어도 왜 우나 싶고, 물소리가 들려도 가슴을 흔들어 버리는 그런 시기야. 그러다가 자연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편안해지는 시기가 오는 거야. 그냥 소쩍새는 소쩍새로, 강은 강으로 보이고 들리는 거지. 이 순간이 아마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얻은 순간이었을 거야.

Q 선생님의 시는 비판을 하되 ‘익명 비판’을 한다는 폄훼도 있어요. 예를 들면 ‘몹쓸 정치인들’이라고 하지 ‘몹쓸 ○○○’와 같은 비판을 피해 서정성의 그림자 뒤에서 그저 박수만 받으려 한다는 거죠.

사사로운 비판은 시인의 몫이 아니야. 정치인들이 할 일이지. 나는 사적으로 좌·우, 진보·보수의 대립도 정권을 잡기 위해 자기 주장을 하는 정치인들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해요. 시대착오적이지. 21세기적 사고는 문화·환경에 대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요구하는데, 시인의 역할은 고치고 대안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지. 거기까지가 시인의 역할이야.

Q.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통제 불능이야.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통제를 못하는 것은 위험한데, 파탄으로 가는 거지. 이미 위험한 길로 들어섰어. 새로운 시대정신이 도래했는데 우리만 외면하고 무시하고 짓밟고 있는 거지.

Q 새로운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생명정신이지. 예를 들면 기후 변화, 생태 순환, 환경 지향과 같은 거예요. 세계가 그렇게 변하는데 우리는 기껏 토목공사나 하려고 들지요. 나는 우리가 뒤처지고 있다는 것을 실체적 위협으로 느껴요.
Q 일생을 한 지역에서 일선 교사로 근무하다가 퇴임하셨는데, 우리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심각한 문제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 학생·부모·교사 간의 갈등은 조절하지 못할 만큼 커지고 파탄 상태지. 특히 교사 집단은 자기 개혁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어. 세상에 무심한 거지. 사회와 세계에 일어난 일에 가장 반응하지 않는 집단이 교사들이지. 교장 중심의 교육이 교사 집단을 가장 민주화가 안 된 후진 집단으로 만든 것이고. 시키는 대로 잘하는 교사들이 교육을 맡고 있으면 교육에 처방이 없어.

Q 교사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교육’, 그건 주입식 교육 같은 것인가요?

성과 중심이지, 성적 지상이고. 창의성 교육과는 거리가 멀어. 요즘 학생들이 시험은 잘 봐. 혼자는 무지 똑똑해. 그러니 나중에 회사에서 일은 잘할 거야, 그런데 문제는 살 줄을 몰라. 인간이 없어. 더불어 살지를 못해. 그러면 인생이 없어지지. 지금 봐,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어. 전부 공부하러 가고 없어. 놀이터에도 없고 운동장에도 없고 전부 학원에만 있어.

Q 그렇다고 섬진강 아이들처럼 그런 아이들과 달리 자라면, 그 아이들의 미래는 행복해 질까요? 경쟁에서 도태될 게 뻔한데, 그래도 ‘행복하다, 행복하다’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요?

그 아이들은 자기 선택과는 무관하게 여기 있는 아이들이야. 사회에서 힘들겠지. 하지만 사람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받는 영향이 있어. 어떤 선생으로부터 받았건 나름의 영향이 잠재돼 있을 테지. 경쟁하며 힘들더라도 혹은 경쟁에서 지더라도, 감성적인 부분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 믿어.

Q 시상이 그냥 ‘딱’ 하고 떠오를 때만 시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쓰겠다고 생각하고 쓰면 말장난이지. 시란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형식으로 가져온 것이거든. 안 살아보면 쓸 수가 없어. 안 살아보고도 아주 시를 척척 쓰는 시인을 보면 신기해. 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 현상을 종합한 내용을 시의 형식으로 형상화해낼 따름이거든.

Q 그럼 시인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보고, 그것을 시를 통해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건가요?

시는 세상을 종합하는 일이고, 시인이 시를 배우는 일이 세상을 배우는 일이에요. 시인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하지. 세상이 썩어도 시만 정신을 차리면 세상은 안 썩어. 그래서 시인이 현상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게 가능하지.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시인의 역할이 아니야. 철학자나 정치가가 할 일이지. 그런데 시인까지 안 본 것을 가지고 시를 쓰고, 시인이 대안을 내세우기 시작하고…. 그러고 다니면 큰일 나.

Q 선생님에게 독서는 어떤 의미입니까.

요즘은 독서하는 사람이 드물어. 특히 대학생들이 책을 놔 버렸어. 하지만 나중에는 책을 읽는 사람만 살아남을 거야. 책은 정신작용에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것을 찾도록 충동질하거든. 그러면 사람이 변하지. 독서로 정신이 풍요로우면 당당하고 자신만만해져. 비루해지거나 저자세일 필요가 없지.

[출처] 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9> 교사 정년 퇴임한 시인 김용택|작성자 시골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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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는 아이가 떼를 쓰면 엄마가 다가가서 손을 펼쳐보인다. 그리고 아이에게 손바닥을 깨물어보라고 한다. 손바닥을 깨물면 떼쓰는 것을 들어주겠다면서. 그러면 아이는 열심히 입을 벌려 손바닥을 깨물려 한다. 그러나 손바닥은 쉽게 깨물어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바로 이루어질 것 같지만 잘 안되는 것들이 있다. 아이에게 손바닥 깨물기를 시키는 것은 바로 그런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원한다고 해서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럼 어른들은 뭘 해봐야 이런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을까. 팔꿈치를 혀로 핥기 같은 아예 불가능한 것을 해보는 것도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어쩃든 내가 지금 바라고 있는 것이 손바닥 깨물기와 같은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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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파 파월은 우사인 볼트가 올해 세계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세계기록 보유자였다. 2005년 9.77초로 세계기록을 작성한 후 2007년 9.74초로 다시 경신했다.

파월은 190센티미터의 키에 88키로그램의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다. 보통 100m는 긴 보폭 또는 빠른 주법 중의 하나를 가지고 속도를 올린다. 그래서 대부분 큰 키를 가진 선수들은 긴 보폭을 이용하는 주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파월은 키가 크면서도 긴 보폭과 함께 빠른 보폭까지 사용함으로써 세계기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파월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는 138개의 자기공명영상촬영을 통해 파월의 근육을 분석했다. 배 속의 근육이 다른 선수들의 두 배에 가깝기 때문에 출발때 굉장한 스피드를 낼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를 다 찍고 나서 볼트가 세계 기록을 다시 세웠다. 그는 파월보다 키가 6센티미터나 더 크다. 아마 다큐멘터리를 찍고 나서 제작진은 파월을 다시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고심했을듯 하다)

그런데 파월의 경기 장면을 보면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100m 달리기는 단순히 기록경기이기만 한 것일까.

파월은 “세계 기록 보유자라는 건 늘 이겨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며 1위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가 세계기록을 달성한 대회는 가이나 볼트와 같은 막강한 경쟁자가 참여하지 않은 경기였다. 반면 자신과 막상막하의 실력을 갖춘 선수와 같이 뛸 때는 기록이 저조했다. 이것은 파월이 이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과 같은 위치에 또는 한발이라도 앞선 선수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심리적으로 무너져 몸의 균형이 깨지면서 긴 보폭과 빠른 주법이 통합되지 못하고 보폭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100m 경주라는 것이 기록경주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양궁 개인전은 7연패를 달성하지 못했다. 박성현조차도 결승에서 8점을 연거푸 두번 쏠만큼 아무래도 평상심을 무너뜨리는 강박관념도 패인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세계 정상이라는 굴레에서 이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보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편안한 상태에서 시위를 당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육상 100m로 돌아와서 16일 밤 치러지는 베이징 올림픽 육상 경기에서의 재미있는 관전포인트로는 파월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9.7초대의 사나이 세 명이 격돌하는 이번 대회에서 과연 신체적 탁월함을 바탕으로 경주에 나서는 파월이 이번엔 심리적 압박을 이겨내고 평상심으로 달릴 수 있을까. 아니면 100m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도 세계 기록을 달성한 볼트가 앞설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주법을 구사하는 가이가 세상을 놀라게 할까. 숨막히는 10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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