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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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뒤통수 치기다. 단편소설을 읽으며 한편으론 가해자의 뻔뻔함과  피해자의 황당함이란 이중감정을 즐긴다.뒤통수를 맞는 대상이란 대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거나 무뎌진 감성이거나 너무나 당연시 여겨온 의식의 화석조각들이다.책의 말미에 이르러 '아...'하는 탄성을 또는 '하....'하는 자성을 뿜어내지 못하게 한다면 내게 단편소설로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전적 소설론의 단어를 빌자면 '머리 맞으며' '카타르시르'를 느끼는 것이다. 최근에 본 몇몇 단편소설들은 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족삼아 예를 들면 카사이스의 <러시아 인형>,로맹 가리의 소설들,로제 그르니에의 <물거울>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현대 소설이 자리잡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안톤 체호프이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체호프는 역시 현대소설의 개척자라고 부를 만했다.나는 그의 단편집을 읽으며 몇번이나 고개를 끄떡이고 자성과 탄성의 한숨을 쉬었는지 알 수 없다.그의 소설은 단편소설이 가져야하는 미덕을 전부 가지고 있다.짧은 문장과 빠른 호흡,그리고 뛰어난 풍자성.이것말고도 단편소설이 가지고 있는 묘사의 서정성까지 .... 한마디로 현대소설의 시금석이 될 만하다.

가장 직접적인 사회풍자가 돋보이는 단편은 처음에 실린 < 관리의 죽음>이다.알아서 기는 소시민의 극단적 소심증이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까지 이끌고 간다.물론 한 희극적인 인물의 에피소드로 볼 수도 있지만 소시민의 작은 실수마저 위협했던 사회분위기를 생각한다면 그다지 희극적이지 않다.최근에 본 영화<효자동이발사>에서 독재자의 면도를 하다가 살을 베고 노심초사하던 송강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그는 그날 밤 사형장에서 총살당하는 악몽에 시달린다.우리에게도 소시민을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어디가나 말조심 자나깨나 다시보고..... ^^ 체호프가 살던 19세기말 제정러시아 역시 억압적인 사회분위기였나보다.<관리의 죽음>은 알아서 기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멋진 풍자였다.

체호프의 풍자가 사회적인 곳에만 머문것은 아니다.그는 인간 본성과 그 이면의 이기성에까지 깊은 풍자의 칼날을 던진다.<베짱이>나 <베로치카>에서는 허망한 욕망으로 인해 몰락하는 여인이라던지 자신의 삶을 내던져 사랑을 구하지도 못하며 머릿속으로 사랑과 세상을 만드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비웃는다.<내기>에서는 두 인물을 통해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하나는 돈욕심에 수감생활을 자청하는 인물이고 또 하나는 남은 재산을 위해 약속을 저버리며 살인을 기획하는 인물이다.결과는 긴 시간 수감생활을 통해 내면의 눈을 뜨고 만 수감자의 변화를 통해 욕망의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묘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은 <미녀>와 <주교>였다. 역을 지나며 바라본 두 명의 미녀에 대한 이야기와 어머니를 만난 주교의 이야기가 전부이다.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물을 어떤 감성을 가지고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 사물은 수없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전형을 보여준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특히 <미녀>에서는 체호프의 서정적묘사가 뛰어나다.<주교>의 경우 자유롭고자 하는 주교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직함이 주는 권위로 그를  어려워하는 주변인물을 통해 우리가 타인의 명함으로 인해 좋던 나쁘던 얼마나 많은 이미지를 만드는지 보여준다.이 작품에서는 어머니조차 그를 어려워함으로써 주교를 외롭게 만들고 만다.

사실 안톤 체호프의 책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하지만 앞으로 그의 팬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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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05-18 01:38   좋아요 0 | URL
전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님에도 유명작가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에는 늘 주눅이 들곤 합니다. 저에게는 체홉이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죠. 단편소설의 거장이란 타이틀 때문이라도 한번쯤 보았을 법한데, 어쩐지 체홉과는 인연이 잘 닿지 않고 비켜가기 일쑤더군요. 리뷰 말미에 체홉의 책이 처음이라는 고백, 힘을 실어주시는군요. 이번 기회에 얼른 읽어야지, 하고 다짐을..
그리고, 빼드로 빠라모를 읽으셨군요. 저도 읽는 내내 머리 속이 뒤죽박죽 돼서, 처음 얼마간은 읽은 곳 또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읽다 보니 꽤 매력적인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요. 낯선 작가, 낯선 작품인지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또, 서재결혼시키기는 확실히 멋진 에세이지요!
(말이 길어졌습니다. 근데 덧글 달아도 되나요? 너무 말끔해서 망설이다 쓰긴 썼습니다만.)

드팀전 2004-05-19 09:31   좋아요 0 | URL
^^ 관심있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침에 메일로 덧글이 달렸다고 왔더군요.냉큼 찾아봤습니다. ^^ 저도 님의 글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앞으로 참여적인 모습을 보여드려야겠군요.^^오늘은 날씨가 흐른데 분위기 업 업 업 하세요....
 
폭설
김영현 지음 / 창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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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쯤 김영현의 소설을 보았다.책 제목이 무척 맘에 들었기때문이다.단편집 <깊은강은 멀리 흐른다>였다.당시 지배적 분위기였던 민중적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소설집이었다.당시의 리얼리즘 소설들과 비교해 충분히 비교우위를 가진 소설이었다.같은 소재를 다루고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섬세한 문체와 소설적 서정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다.그 이유때문이었을까? 당시 선후배들 생일 선물로 김영현의 소설집을 몇권 사준 기억이 난다.

김영현의 <폭설>은 지극히 전형적인 후일담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일담 소설에 큰 점수를 주지않는 편이다.이 책 역시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로 고개를 끄덕이기 보단 조금은 삐딱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한 시대를 함께 고민했던 사람들이 시린눈으로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학이란 것 역시 시대의 고민과 작가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크게 유리될 수 없다면  후일담류의 문학작품이 쏟아진 것 또한 당연하다. 90년대 중반 한치를 알 수 없던 시대적 분위기가 어느사이 갑자기 안정을 되찾은 듯 했다. 사회과학 서점들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거리의 투사들은 하나둘 제갈길로 흩어져 자기 살길을 찾는 데 급급했다. 아직 갈길이 먼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보이는 작은 변화는 침소봉대되어 사회의 우경화를 이끌었다. 사람들은 많이 실망하고 많이들 절망했다.하지만 이미 시작된 흐름을 돌릴길 없어 강건너편 멀어져가는 연인을 바라보듯 그 시대를 보내고 말았다. <폭설>은 작가도 밝혔듯이 지나온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다.작가가 그렇게 밝히고 있으니 아직도 후일담이냐고 나서서 따지기도 뭣한것이 사실이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지나온 시절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정리해야 할 권리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후일담도 지겨워질 무렵 또 다른 후일담을 들고 나오니 진부하다고 해야할지 작가의 개인적 기록으로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야 할 지 난감하다.

이 소설에는 후일담류의 소설에 나오는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시국관련 수감자였던 형섭과 그를 기다리던 연희,그리고 주변에 비슷한 성향을 가지며 이들을 도와주는 조연들.또 극좌모험주의라고 할수있는 성유다와 그 주변인물들. 성유다의 캐릭터는 소설중에서 거의 종교지도자의 수준으로 그려진다.이 부분이 자못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때 지하조직의 지도부들이 신비화된 것에 비교해보면 아주 현실과 이반된 것은 아니다.한가지 아쉬운점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몫이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주체적인 듯 하면서도 늘 사랑과 외로움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이다.물론 20대라는 나이가 남과 여를 불문하고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부분일 것이다.하지만 형섭과 유다등에 비해 연희,미경,애림은 나름대로 주체성을 지니면서도 사랑에 목말라하는 무언가로 그려진다.마치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대상으로서 말이다. 결혼을 앞둔 미경이 마지막으로 형섭을 만나러 온다거나 만난지 몇번 안돤 형섭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의지하는 애림...그리고 형섭을 기다리다 유다를 만나 그의 아기를 가진 연희조차 끝까지 사랑하던 남자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자는 순정으로 기다리고 남자는 그들이 남겨 놓은 슬픔에 마음이 짠하다.이것은 좀 진부한 스토리아닌가 한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이 과거의 이야기를 멜로로 풀어낸다는 것은 아니다.물론 작가는 그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그 과정을 너무 드라마틱하게 형상화하고 싶은 열정에서 였을까 ...베스트셀러극장 대본 공모 당선작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름대로 이 소설을 각색하여 잔잔한 베스트셀로 극장으로 만든다면  괜찮은 작품이 될 듯하다.수미일관되게 폭설도 내리고 폭우가 내리는 날 공사장 사고도 나고...연희의 유골은 강가에 흘러보내고 ....유다는 법정에서 안중근의사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최후변론을 마치고......눈내리고 모두 가버린 교도소 앞에서 새로운 만남.....딱 그림이 나온다.

 작가에겐 분명히 그가 한복판에 있었던 시간들을 되새김질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독자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이다.그렇다며 김영현은 <폭설>로 그 일을 마쳤다.이 작품이 독자에게 큰 감동을 줄지 또는 작가 자신의 씻김굿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 그 작업은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 독자는 그에게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를 요청해도 무리가 되지 않을 성 싶다.그의 새로운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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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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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깊으면 골이 깊고 태양 빛이 강한 날엔 그림자가 짙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떠오르는 생각이었다.리라이팅 클래식의 출발을 알렸던 이 책은 여러 언론의 찬사를 받을 만큼 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우선 기획단계부터 신선했다.우리가 제목만 알고 읽기를 두려워 했던 책들을 순치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새롭게 번역하거나 평역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학자들의 시각으로 해체하고 다시 쓴다는 것이다.이러한 기획자체가 우선 매력적이어서 책이 출간된후 <이성은 신화다>를 읽었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나름대로 독해해 낸 책이었다.책의 내용 자체가 쉽게 이해되는 그런 류의 철학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리라이팅시리즈에서는 자기의 시각으로 읽어낸 글쓰기가 인상적이었다. 무슨 무슨 강독류의 책에서는 만날수 없는 신선함이었다.그리고 이어서 나온 니체의 책 역시 니체를 처음 접하는 사람조차 읽기 쉽게 쓰여져 있었다.물론 그 한권으로 니체 철학의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저작 전체를 망라하며 관통하는 사상의 맥을 짚어내는 데는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그 책으로 인해 더 많은 관심을 유발하고 다른 니체의 책 역시 손을 댈 수 있다면 리라이팅 기획의 승리가 아니였을까 한다.

이번에 읽은 <열하일기> 역시 가장 큰 미덕은 글쓰기에 있다.인문사회학 책들이 훈장처럼 달고 있는 의고적이고 번역투의 문장은 책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저자의 박지원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쓰기를 통해 따분한 책읽기가 아닌 즐거운여행기를 읽듯이 책장을 넘겨 갈 수 있었다.사실 개인적으로는 그것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일부에서는 저자의 주관적 애증이 너무 많이 배인것이 아닌가 하며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물론 사실이다.하지만 이는 인문사회학계에 팽배해 있는 아카데미적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는 차원에서 봐준다면 그다지 눈에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그동안 학자들은 자신들의 고루한 글쓰기와 현실과 유리된 언표를 통해 일반인과 유리된 '천공의 성'을 구축하였다.그들은 천공의 성을 기반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일반인에 대해 우월적인 위치를 누려왔다. 하지만 김종필 총재도 퇴임사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은 변했다고....... 외국서적을 대학원생들 시켜서 번역한다.그리고 한글문법에도 맞지않는 번역서를 자기이름으로 몇 개내고 연구실적이라고 올린다.아직도 이런 학자들이  많은 이 땅에서 자기식으로 읽고 자기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저자를 비롯해 수유연구팀이 고전을 읽어내는 잣대는 포스트모던론이다.특히 <열하일기>는 자살과 함께 국내  이름이 많이 알려진 들뢰즈의 이론이다.90년대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름이 처음 알려졌을때 난 그게 한 사람의 이름인지 알았다. '들뢰즈와'는 이름이고 '가타리'는 성이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당시 제국주의론을 읽고 프랑크푸르트의 비판 이론을 읽던 사람들이 이제는 들뢰즈의 신도가 되어있다.저자가 책 서문에 밝혔던 자신의 지적편력은 동시대 책읽기를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일반적인 경우이다.아마 그 전위에 수유연구팀들이 있었겠지만.... 저자는 들뢰즈의 용어들을 중간중간에 감초처럼 넣어가며 열하일기와 연암 박지원을 분석한다.우선 박지원과 들뢰즈의 이론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신선하다. 저자의 시각을 따라가면 연암은 18세기가 낳은 대표적 양반 노마드중에 하나 일것이다.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과거 개인적으로 즐겼던 어느술자리를 떠올리게 했다. 30대 중반의 대학강사들과 우연찮게 합석할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그들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푸코가 노가리가 되고 보드리야르가 고추장이 되고 부르디외가 이쑤시개가 되고 그랬다.물론 들뢰즈와 가타리도 후식으로 빠지지 않았다. 그들이 모든 이론에 정통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개괄은 하고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저자는 그 술자리의 담소처럼 박지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노마드를 들이대고 주름을 이야기하고 리좀을 빗대는 장면을 연출한다.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술자리 학출들의 지식인연하는 태도가 떠올라 조금 배알이 뒤틀렸다.(너 자유롭게 사는 구나 하면 될 걸...넌 노마드적인데..라고 한다.어설프기는...^^)

저자가 말하는 노마드니 리좀이니 하는 들뢰즈의 개념들이 매력적인건 사실이다.하지만 굳이 그런 심오한 말을 쓰지 않더라도 연암의 자유인적 속성은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자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의 지적편력과 자유인적인 기질은 여럿이 다루었다.이미 들뢰즈가 그런 용어를 서술하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기인들과 시대와의 불화를 겪었던 사람들은 있었다.오원 장승업은 어떻고 고려시대 만적은 어떠한가....그전까지 우리는 예인적 기질 또는 자유인 뭐 이런 비인문학적인 용어로 말했다.그런데 멋진 프랑스 용어들이 등장하니까 연암은 노마드가 되고 연암을 구속하던 조선이라는 공간은 홈패인공간이 된다. 훨씬 그럴싸해보인다. 저자는 자신이 공부한 들뢰즈와 가타리를 연암이란 대상에 맞춰 옷을 입히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역시 저자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저자가 말하는 노마드에 대해서도 한번 짚어봄직하다. 이건 사실 근대와 탈근대 논쟁에 늘 등장하던 이야기라 신선하진 않다. 또 한번 개인적으로 불운한 추억을 더듬거려본다. 몇년전 미국 유학을 앞두고 있던 한 여성학 강사를 잠깐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대충 들은바에 의하면 집도 좀 살고 남편은 좀 더 산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노마드'란 단어가 나왔다. 그 강사는 일반인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온것이 무척 신기한 듯했다.그 단어 하나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듯했다.(아마 이런 경험들많으실게다.언어는 권력 맞는 것 같다.)그분은 자신은 노마드적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자신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고.......솔직히 좀 웃겼다. 그녀의 노마드적인 삶을 바탕해줄 수 있는 것은 그의 든든한 재력과 학벌과 박사학위증이다. 하루 하루를 걱정하고 전세금 올려달라는 주인의 말에 부들부들 떠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유목민이란 과연 무었일까? 정규직의 절반도 못되는 임금에 언제 짤려서 정말 유목하게될지 모르는 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마드란 무었일까? 지나치게 극단적인 예를 드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하지만 노마드라는 것이 개인의 가치관에 변화를 주는 윤리적이야기라면 충분히 이해가된다.꼭 들뢰즈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박민규의 소설<삼미슈퍼스타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법정스님,전우익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 다 노마드의 실천적 예일것이다.하지만 전범일뿐 일상의 무었이 되기에는 지극히 관념적이고 현실도피적이다. 물론 글쓰는 재주가 있어서 조직에 얽매이지 않거나 도자기라도 빚거나 통나무집이라도 지을 기술이 있다면이야 노마드도 멋질것이다.하지만......대부분은 더러워도 가족생각하며 담배한모금에 비굴함을 참는 샐러리맨이거나 도서관에서 책상파보지만 보나마나 실업예비생이거나 주부이거나 중소상인인데야 .......어떻게 노마드들의 공동체를 구현할 것인가.?

뛰어난 노고에 대한 칭찬에 비해 되지도 않는 험담이 길어졌다.젊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정을 쏟아 우리사회에 지적결과물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것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앞으로도 이러한 작업이 계속될길 기원하며 더 좋은 노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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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아 2004-05-21 23:44   좋아요 0 | URL
며칠 전 부터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를 읽고 있는데
리라이팅이 꿈꾸는 반역의 글쓰기가
책보는 즐거움을 줍니다
또한 제 지식의 한계에 대한 계몽을 불러일으키는데
혹 그 계몽에 빠져서 어설픈 교양인이 될까
두려운게 사실입니다
그러자면 깨어있는 사람으로
반성하는 사유를 해야하는데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반성하는 사유님의 서재와 닮았네요

계속 반성하는 사유님의
지적인 글쓰기를 기다려봅니다

프레이야 2004-06-05 20:46   좋아요 0 | URL
이달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사서 보고 싶은 책입니다.
 
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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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형님을 안다. 중학교때 제도권 교육에 회의를 느끼고 뛰쳐 나온 사람이다.그후 10여년 독서와 소일로 자력갱생하다가 늦깍이 사회학도가 되었다. 그 형의 중학교 일이다. 수학 시간이었다. 요즘은 음수개념을 초딩때 배우는 걸로 아는데 그땐 중학교때 마이너스를 배웠나보다. 3의 음수는 -3이라는 것이 이해가 안됐다고 한다. 즉 마이너스란게 도대체 어디 있는 수인가 말이다. 예를 들자면 책상위에 연필이 하나가 있다가 어떻게 없는 연필 두개가 더해지면  없는 연필 하나가 되는가? (수식으로 나타내면 1+ (-2) = -1  이 되는 상황이었겠지.^^ )  궁금증을 참지 못한 어리한(?) 형님은 수학선생님께 강력히 어필하셨다.  결국 학교내 폭력의 당위성에 대해 충분히 내재화한 평범한 수학선생님은 형님을 향해 어퍼컷과 이단 옆차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손날 치기를 감행하셨단다. 이유는 간단하다.그러면 그런줄 알지 일부러 알면서 의도적 수업방해다. 바로 이게 그의 죄명이다.  아 ...교실 바닥에 버려진 휴지처럼 뒹굴던 형님.그분은 그때 결심하셨단다.' 나와 함께 할 곳이 아니구나. '.

 물론 형님의 질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죄가 있다면 너무 조숙한 질문이며 당연한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대학쯤 가면 우리가 흔히 수학에서 당연시 하는 원칙들이 도출되는 과정을 배운다고 한다. 정말그런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흘려 듣기에 그런 당연한 수학상의 원칙들을 '공리' 라고 한다던데...

이오네스코의 <수업>이란 작품에는 뺄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과 이를 설명하려는 선생이 나온다.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선생은 점점 더 어려운 개념과 점점더 헛갈리는 예만을 든다.나중엔 본인도 언어의 붕괴과정에 도달한다.학생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선생의 언어는 학생의 이해도에 반비례하여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결국 그는 살인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언어를 강제한다. 우리가 토론에서 또는 일상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폭력성과 권위주의는 <수업>이란 작품속에서 파멸을 길로 형상화된다. 지식의 정도가 다른 사람간에 또는 직장내 위계가 다른 사람간에 대화에는 늘 힘의 관계가 형성된다. 상대방 측이 아무리 민주적이며 열린 대화를 입으로 내뱉더라도 궁긍적으로 대화의 위계는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게 대화가 길어질 수 록 대화는 주입적인 형태로 바뀌어간다. 하지만 대화의 분위기만 좋다면 누구나 이 위계 관계의 폭력성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가 끝나면 열린 토론이었다는 식의  권력상위자의  입을 통한 흡족한 분위기로 마무리된다. 이오네스코는 <수업>을 통해 언어와 일상성이 가진 폭력성와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에 대해 말한다.그리고 이것이 결코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지속적인 피해자 내지는 순환구조를 통해 말한다.끝없는 언어의 무의미한 반복은 <대머리 여가수>의 결론에서 두드러지는데 마치 뱀꼬리를 물고 도는 뱀을 연상시킨다. <대머리 여가수>의 경우 등장인물 6명은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단절된 인물들이다. 이들의 단절은- 다른 상황의 정보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은 상황이므로 -언어가 가진 본질적인 한계때문이다.  마틴부부의 대화는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다. 이들은 서로의 공통점을 하나씩 찾아나가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그들이 수많은 다른 기억을 조합해 그들간의 관계를 인식한게 고작 서로 부부였다는 식이다. 일상의 대화란 것이 무의미한 음절의 남발이고 고작해야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의 병렬연결임을 작가는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무의미한 말들이다. 사실 그런 말들이 분위기를 돈독하게 하고 관계의 유연성을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의 의미성을 따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그러므로 이오네스코의 일상적 언어에 대한 풍자와  단절성에 대한 지적은 돌아볼 만한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실려있는 작품은 <의자>이다. 극으로 볼 경우를 상정해볼때 가장 흥미있지 않을까하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단지 3명이다.하지만 이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40여명이 등장한다.아니 그들의 의자가 등장한다. 노인과 노파는 일생 일대의 발표를 준비한다. 물론 그들이 직접하진 않을 예정이다.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대표해줄 변사를 초대하고 많은 지인들과 저명인사들을 초청한다.초청했는지 자기들이 찾아왔는지는 희곡에 나오지 않는다.물론 중요한 사실도 아니다. 황제까지 자리를 하고 기자들도 초청된다.가슴이 얹힌 한을 풀어줄 변사도 마지막에 등장한다. 하지만 노인은 모든 것을 변사에게 맡기고 자신의 소임을 다마친다.허나 그렇게 기다른 변사는.... 으 므 므 므 ....이다. ^^      언어에 대한 배신이다. 노인이 말하고자 했던 그 삶의 총체란 것은 결국 으 므 므...아 아 녕 .. 이다. 삶을 마친 노인도 허무하겠지만 보고 있는 관객도 허무하다. 사실 진정 허무해야 하는 것은 언어인데 언어는 인간이 아니므로 허무해하지 않는다.  사실 부조리극을 읽는다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각 문장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들이 등장하고 대화라고 보기에는 주고받음이 불분명한 말들이 부지기수다. 등장인물간에 상호관계성 조차 의심스럽다. 읽고 나면 무언가 본 것 같고 무언가 몽호한 느낌이 많이 든다. 하지만 그 몽환적인 느낌중 한자락이 와닿으면 그게 부조리극이 뜻한 무언가이자 전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ps) 기차는 달리고 복사기는 고장난다... 이런 장난해보면 재밌다.   맷돌은 도는데 TV는 언제 고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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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외가는 경북 고령이다. 방학때면 외가에 가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우선 멀리서 내려온 외손자에 대한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애틋함이 좋았다.그리고 신록의 우거짐이 내가 여름의 한복판에 와있음을, 즉 아직  나의 방학이 한창이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외갓집 앞으로 길게 늘어서있던 미루나무들은 마치 나를 반기는 도열식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하지만 몇년전 외할머니의 상여소리를 들으며 마지막으로 그곳을 다녀온 이후 간 적이 없다.그때도 아주 무더운 날이었다.상여꾼들의 선창에 매미소리가 화답을 하는 형국이었다. 푹푹찌는 무더위에도 길가의 느티나무들은 장성한 잎을 반짝이며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소설 <현의 노래>를 읽으며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던건 수천년전 그 땅의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풍광들이었다. 그리고 이어 그곳이 예전에는 가야의 중심이었다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생각을 했다.

최근들어 김훈의 활약은 눈부시다.늦깍이 데뷔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는 소설과 에세이들은 독자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상복도 많은 편이라 장편<칼의 노래>와 단편<화장>이 국내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그리고 이 소설 <현의 노래> 역시 좋은 평가가 예상된다. <현의 노래>에는 김훈의 글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특징이 함축되어있다. 우선 그의 글은 힘이 있다.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글에서 조차 그의 글은 우직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문기자 경력이 주는 단문의 힘일 수도 있고 허무주의적 의식이 그의 문장에 기름기를 뺀 것일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 순장에 대한 묘사에서 조차 그는 건조하다.물론 이것이 그의 묘사가 주는 서정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그의 묘사는 여러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마치 순장의 한복판에서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듯하다.김훈은 애상적인 장면에서 조차 관찰자로서의 거리두기에 충실하다.그리고 짧은 문장들로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한 인상을 남긴다.

김훈의 소설의 특징중 하나는 허무주의적 태도이다.<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가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라고 한다면 아마 허무주의의 반석일 것이다. 김훈의 허무주의는 불교적 허무주의와 맥락이 닿아있다. 이 소설에 수많이 등장하는 문장을 등식화 하면 이런 것이다. " A는 B가 아니다.그렇다고 B가 A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마나 한 소리 같고 조금 몽롱하게 들리는 소리이다. 하지만 불교적인 세계관에서는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김훈이 소리에 대해 밝힌 부분에서 그의 불교적 허무주의 세계관이 특히 들어난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다.

" 소리에는 무겁고 가벼운 것이 없다.마르지도 않고 젖지도 않는다.소리는 덧없다."

"사람이 그 덧없는 떨림에 마음을 의탁하기 때문이다.사람의 떨림과 소리의 떨림이 서로 스며서

함께 떨리기 때문이다.소리는 곱거나 추하지 않다."

이러한 비유는 이 소설 내에 여러번 등장하는데 즉 분별심에 대한 이야기이다.세상에 있는 만물이 있는 대로의 있는 것일 뿐 선악미추의 구분에서 욕심과 악행이 발생한다는 불교의 기초 원리이다.이 외에도 우륵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마치 선문답을 듣는 것 같다.분별심을 떠나보내려는 빈 마음 안에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바라보는 애통함도 순장 행렬 앞에서 노래하는 소리와 춤도 얽혀 얽혀 녹아드는 것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우륵을 중심으로 삼각축을 구성한다.바로 대장장이 야로와 신라장군 이사부이다.이들 셋은 같은 나이이며  공유하는 의식이 있다. 작가는 세상을 건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이 다르고 그들이 세상을 건너가는 방식이 다르다. 우륵의 대칭축에 있음직한 야로는 쇠로 세상을 건널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움직임에 민감하다.그가 말한 쇠에게는 주인이없다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승리주의적인 역사관이다.지극히 현실적이고 개인의 실리를 추구하는 야로에 반해 쇠를 신봉하지만 낭만적인 구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사부이다. 살육을 없애기 위해 쇠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이지만 쇠가 가져다주는 저 먼 세상에 대해 회의한다. 마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느낌과 일부 닿아있다. 우륵은 이미 가야의 멸망을 예단하고 소리의 영원성을 통해 이 세상을 건너려한다.소리는 살아있는 울림이며 스스로 울리는 것일뿐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우륵은 소리의 울림으로 가야의 노래를 현재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통속적으로 말하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것인가?

지극히 주관적이고 논리적 비약이긴 하지만 우륵과 야로를 보며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우륵과 야로를 생각했다. 우륵으로 대표되는 계층은 예술가이고 야로는 테크노라트이다. 개인적 불행이라 생각되지만 내가 만난 예술가와 전문인들은 대개 비정치적이고 탈정치적인 입장의 사람들이었다.또한 스스로도 그러한 탈정치적 입장이 그들 고유의 권리인 듯 믿고 있었다. 19세기 브루주아들이 테크노라트들을 자신들의 계급에 일부편입시키며 세를 안정시키려했던 노력들이 이제는  고착화되어 그 일부가 된 듯하다. 우리는 일제 시대를 겪으며 수많은 우륵과 야로를 만났다.그들중 일부는 붓을 꺽고 총을 든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정치와 예술은 또는 정치와 전문지식은 별개로 규정짓고 그 안에서 자족하였다.특히 테크노라트들은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서는 기득권의 이익에 충분히 수혜받고 또 불리한 형국에 들어서면 자신들은 전문관료,또는 전문인일뿐이라고 슬쩍 발을 뺀다. 우리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례는 수없이 찾을 수 있다. 가야의 대장장이 야로의 후예일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유한하며 그들이 만드는 역사 또한  그리 길지않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이 또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울리는 것은 소리가 그렇게 끊어질 듯 이어지며 늘 새로 태어나는 무었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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