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인간의 출현 - 게임이론으로 푸는 인간 본성 진화의 수수께끼
최정규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게임이론의 이야기를 하기전에 먼저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떠올려보자.러셀 크로우가 분한 존 내쉬는 수학천재이다. 대개의 천재들이 그렇듯이 좀 외골수적인 데가 있다. 내쉬의 카페씬을 떠올려보자.카페에는 무자하게 매력적인 여자가 있다.남자들은 전부 어떻게 해보려는 마음은 있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괜시리 접근했다가 여자의 콧대만 더욱 높여주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테이블 한쪽에서 이를 주시하던 내쉬는 이 상황을 수학적으로 정리한다.여자에게 접근했는지 아닌지는 오래전 기억이라 잘 떠오르지 않는다.이때 내쉬가 머릿속으로 정리한게 <게임이론>의 하나였을 것이다. 존 내쉬는 이 때 이 책에도 나오는 내쉬균형 (각 경기자가 상대방의 전략을 주어진 것으로 보고 자신에게 최적인 전략을 선택할 때 이 최적 전략의 짝)을 머릿속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이 책의 주제는 너무 단순 명료하다.  "이기적인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가?" 저자는 이책에서 게임이론과 이에 바탕을 둔 가설들로 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수학적으로 풀어나간다. 먼저 제시하는 게임은 너무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이다.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죄수1,2가 있다.둘은 완벽하게 차단당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는다. 형사가 제안을 한다.

너희 둘다 범죄를 부인하면 징역 1년씩, 한 놈이 자백하면 그 놈은 0년 ,나머지 부인한 놈은 괘씸죄 7년

둘 다 모두 자백하면 징역 5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답은 ...자백이 어찌되던지 유리하다.이다. 수식으로 살펴보면 아주 쉬워지는데,그건 책을 보시라. 다음으로 제시되는 게임은 <공공재 게임>이다.가로등 달기같은 것인데 쉽게 말하면 무임승차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이다.위의 게임에서 보듯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게 뭐로보나 유리함에도 실제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 인간들이다. 헌혈도 하고 이웃돕기 모금도 하고 가끔 선물도 하고...  이렇게 이타적인 협조행위가 발생하는 이유를 증명하기 위한 가설이 등장한다. 혈연선택가설(이기적 유전자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확산하려는 목적으로 협조한다)  반복-호혜성 가설(쉽게 말하면 니가 도와주니까 나도 한번 도와주지.또 언젠가 내가 손벌릴때가 있을지 모르잖아)등이 등장한다. 반복 호혜성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하지만 이것도 2% 부족한 가설이라고 한다.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반복성이  없어도 남을 잘 도와준다는 것이다.즉 다시 안 볼 놈도 도와주는 경향이 있더라는 것이다.이 한계를 풀기위해 값비싼 신호보내기 가설,유유상종 가설 등이 등장한다. 이 책의 장점 중에 하나가 이렇게 문제를 제시하고 그 한계와 그 한계에 대한 보충적인 가설등이 균형되게 설명되어있다는 것이다. 쓰다보니까 무슨 무슨 가설 괜히 어려워보이지만 저자는 아주 쉬운 예를 들어서 각 가설들의 예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값비싼 신호보내기 가설에서는 사자의 공격을 앞에둔 가젤이 도망가지 않고 펄쩍펄쩍 뛰기를 보여준다는 것,유유상종가설에서는 배우자를 고를때 정치적 성향상의 유사성이 중요하다는 것 등이다.

이외에도 <죄수의 딜레마>에서 만약에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까(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에 의문을 둔 의사소통가설, 개인은 이기적이나 집단이 이타적일 경우 생존 확률이 높기때이라는 집단선택 가설,그리고 국지화를 통한 공간구조가 영향을 미친다는 공간구조 가설등이 이타적 협조행위를 설명하는 가설로 등장한다. 이 가설들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지는 않으며 또 부분적 흠결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타작 협조행위의 진실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은 게임이론이 진행되는 과정을 각장마다 수식으로도 설명한다.근데 어떤 부분은 도표가 눈에 쉽게 들어오고 또 어떤 부분은 수식이 어렵게만 보인다.저자도 말한다.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그래서  나 역시 마음에 드는 수식만 따라갔다.굳이 수식을 읽지 않아도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는 상황에서 수식으로 넌덜머리 낼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 책에 나오는 게임 중 '표류'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이 있다. 세 부류의 그룹이 있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 TFT전략이다.남이 도우면 돕고 남이 거부하면 나도 거부한다.또하나는 무조건 협력 그룹이다.마지막은 이기적 그룹. TFT그룹에 이기적 그룹(무임승차)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그 사회는 전부 이기적으로 변한다. TFT그룹에 무조건 협력 그룹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사실 이 상태가 되면 무조건 협력과 조건부 협력 TFT가 별반 차이가 없다.계속 끊임없는 협력.즉 아무도 무임승차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면 이제 아무 문제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협조적인 전략을 강제하는 TFT가 없어졌다는데 딜레마가 생긴다..... 외부에서  무임승차가 들어와도 이제는 무조건 협조밖에 남지 않는 것이고  결국 안정성이 떨어지게 된다.

사실 이것만 봐서는 뭔이야긴지 알 수 없을 것이다.책을 참고하시구....저자는 표류의 문제를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인용하여 적용한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선한사람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게임이론을 다양한 예와 다양한 사회적용력을 동원하여 초보자들에게 설명한다.게임이론이란 낯선분야를 접하는 나같은 사람에겐 아주 재미있고 관심을 끌만한 안내서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5-02-05 11:16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두분이 다 일렇게 멋지게 리뷰를 쓰셨으니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불끈!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파이란.....1) 밀가루에 버터등을 넣을 섞어 반죽한 뒤 과일,잼 등을 넣어 만든 요리.

                 2) 원지름으로 원둘레를 나눈 비,원주율 ...3.141592.......

                 3)^^ ..... 이거 적다가 생각난 영화 <파이란> 의 여자 주인공:

      요즘 이 책의 인기가 상종가를 구하고 있다.그래서 그런지 업데이트 되는 리뷰의 숫자도 봄날 낙숫물 떨어지는  속도로 빨라진다.당연히 좋은 리뷰들도 눈에 많이 띈다. 좋은 리뷰가 많은 탓에 한 글자 더 보태려니 머쓱하다.머쓱함은 곧바로  장난끼로 이어진다.(아...편도선이 부어서 목이 아프네.침 먹어가는 소리가 통증의 예령같다.)  위의 3가지 (파이란 도 포함)와 소설 <파이 이야기>의 공통점은 뭐가 있을까?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해본다. 암기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각종 연상법을 떠올려도 그다지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에라...이럴 때는 이현령비현령 해도 되는 단어 하나 걸어 놓고 조립식 완구 맞추듯 우격다짐으로 밀어넣으면 된다.

역시 만만하니 " 삶 " 이다. 삶은 계란도 되고 삶은 고구마도 되고 어떤 사람은 라면도 삶아 먹는데...영화<원나잇 스텐드>에 보면 에이즈로 죽어가는 친구가 웨슬리 스나입스에게 그런다." 삶은 오렌지"라고 ...그렇다면 삶이 '파이'가 된다고 문제가 될 건 뭐 있는가? 단 삶이 삶기에도 용이하고 쓰기에도 편리하지만 진짜 살아가기에는 어렵다는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과자 파이도 삶이다.왜냐하면 이것 저것 섞어서 반죽하기 때문이다.우리네 삶이란게 원하는대로 마음 맞는 일만 발생하진 않는다.설령 사이가 안좋아도 밀가루와 사과쨈이 섞여서 버무러져야할 때가 있다.좋은 파이가 될려면.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소설의 주인공 파이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사랑스러웠을까? 기회가 닿는다면 물속에 빠뜨리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랬다간 파커의 레프트훅 한방에 생을 달리했겠지.주인공 파이가 호랑이를 다루는 방법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애초에 그 관계는 생존을 위한 훈련이었다.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호랑이와의 쟁투가 없었다면 주인공은 이미 상어밥이 되어있을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상생의 정전치가 구명보트 안에서 이루어진다. 애플 파이에도 사과쨈과 밀가루의 비율이 상호의존적이어야 한다.사과쨈만 좋다고 쨈만 듬뿍바르면 달아서 한두조각 외에 먹기 힘들다. 파이의 생존 원칙 첫번째는 결국 상호의존성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원주율 파이도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삶과 같다. 원주율은 10에 12승까지 소숫점을 구했다고 하는데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우리의 삶도 계속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은 또 그 삶을 이어가야한다. 줄초상이 난 집에서도 저녁 밥상은 올라와야한다. 깊은 슬픔과 충격속에서도 삶이 이어진다는게 가끔은 가당치않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땐 조상들의 말을 떠올려야 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

산 사람이 살아가면서 세상을 낙천적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는 나이가 하나둘 들어가며 깨우치고 있다. 예전에는 슬플때 세상이 끝난 듯 낙담하고 기쁠때 세상을 다 얻은 듯 사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마 꼭 그런 것 만은 아니었다.특히 어려운일이 닥쳤을 때 희망을 잃지 않고 낙천적으로 기다릴수 있는 사람은 가공할만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다. 말이 쉽지 실제로 사람들은 작은일에 쉽게 좌절하고 웃음을 잃어버린다.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 파이는 어떠한가. 하이브라이드 종교의 힘인지 생명보존의 열망때문인지 자신의 페이스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하루를 새롭게 만들고 또 하루의 발전에 희망을 얻는 이러한 낙천의 힘은 파이를 구명보트에서 살려낸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영화<파이란>...허참...장난스럽게 써놓고 결국 이것에 답을 해야하다니.이런걸 자승자박이라고 한다. 이것도 삶이다. 정답은 주인공 최민식에게 놓여있다. 젊은날 연극판에서 드라마로 뛰어들어 아기돼지 "꾸숑"으로 각광을 받았다.연기력있고 장래가 유망한 배우의 등장으로 당시 신문들이 호들갑을 떨었다.하지만 그 이후 기대와는 달리 대중들에게서 조금씩 잊혀져 갔다.간간히 얼굴을 비추며 '아 ..캐릭터 있는 배우 최민식이..."하는 정도로 잊혀질 듯 말듯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송해성 감독은 그를 싱크대에 오줌누는 퇴역 건달로 캐스팅했다. 인간말종 퇴역 건달이 파이란의 편지를 보며 등대앞에서 울던 장면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아...눈물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극장의 천장을 쳐다봤던 기억이 새롭다. 영화<파이란>은 돌아온 터미네이터보다 더 멋지게 돌아온 배우 최민식의 제2의 전성기를 알리는 예포였다.결국 그 여세를 몰아 <올드보이>로 세상을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꼭 상이 중요한건 아니지만 깐인가 베니스인가에서 < 올드보이>가  감독상을 받지 못했다면 남우주연상은 당연했다고 한다. 뭐 그동네 규정이 그런건 아니겠지만 심사위원사이의 안배가 있었겠지. 누가 최민식의 전성기를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게 삶이다.( ...어처구니 없다구.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한다.근데 쭈욱 보고 나니 뭐 그럴싸 해보이기도 한다.그게 삶이지 뭐 어쩔것인가?^^)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된다고 한다.영화가 어쩌면 소설보다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파아란 바다와 흰 구명보트와 오렌지빛 호랭이...어흥과 빛깔의 대비가 아주 좋다.이 소설이 영화로 되기에 좋은 이유가 또 있다.읽어보신분은 다 들 아실 그 끝에 반전.헐리우드 영화에서 좋아하는 류의 반전이다.입이 좀 근질근질하는데 .... 스포일러가 되진 않겠다.^^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5-01-31 18:59   좋아요 0 | URL
호호, 너무 재밌네요.
이 책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영화 파이란, 최민식과 엮어내시다니, 참.^^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 - 2000년 제31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가끔은 너무 유명해서 선 뜻 손이 안가는 책이 있다.내게 <내몸은 너무 오래..> 가 그런 책 중에  하나였다.특히  00문학상 ,xx 문학상 수상작 처럼은 특정시기에 관심이 증폭되는 작품들은 더욱 그렇다. 이런 책들은 읽는 시기에 따라 몇가지 외부요인에 의한 감정들이 발생한다.우선 책이 작품상이 수상되기 전에 읽는 경우이다.먼저 자신의 책고르는 심미안에 대한 뿌듯함을 느낀다.그리고 무슨 상 수상작 같은 표나 상업적인 멘트가 없는 책을 가지고 있는데 대한 가당찮은 프라이드를 느낀다.다음으로 수상작이 선정된 후 읽을 때이다.우선 서점에서 수상작 벨트를 메고 있거나 빨간 딱지를 두르고 있을 때 한두번 넘겨본다.그리고 당대의 취향에  함께 승차하기 위해 얼른 집어든다.나름대로 책을 들고 지하철 타기에도 쑥스럽지 않다.또다른 감정은 가끔 삐닥선을 타고 싶은 마음에 발생한다.남들이 다 "이상문학상이래 동인문학상이래..." 이러면 괜시리 거기에 편승하고 싶어지지 않는다.이렇게 될 경우 이 책을 만나게 되는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거기에 몇년의 시간이 흐르면 정말 다시 보기 힘들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2004년 00 문학상의 수상작이 나왔는데 1999년 수상작을 들고 읽기란 그다지 쉽지 않다.

이문구의 <내 몸은....>은 2000년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이 체질개선을 하고 처음으로 선정한 작품이다. 나는 이 책을 수상작 선정되기 전에 사서 당시 애인-지금 부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후 잊고 있었는데 결혼 이후 책들도 주인따라 섞이다 보니 책장에 이 책이 꽂혀있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의 첫장을 넘긴건 외국으로 나가는 비행기 안에서이다.지루한 비행시간 동안 이 책은 나를 충청도의 작은 마을로 데려갔다.몇장넘기지 않아 나는 어거지같은 나의 비딱선을 자책했다.  

어제는 마침 <인물현대사>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문구편이 나왔다.책도 다 읽은 마당에 관심이 가서 끝까지 보고 말았다. 이문구의 고향은 충남 보령이다.이문구의 소설에 나오는 쫀뜩한 사투리는 대개 충남 지역의 말이다.소설읽는 동안 나는 처가 식구들을 떠올렸다. 지역은 약간 다르지만 어쨋거나 자랑스런 충청인들로 구성된 처가식구들의 왁자지껄함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특히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연배가 비슷할 장인모님들을 소설 주인공에 대비시켜 그 언어를 연상하면 말의 맛이 그대로 살아났다. 동네 어귀에서  또는 상가집에서 교묘하게 말꼬리 이어가며 싸우는 이들의 모습은 글자로 만든 사람들의 형상이었다. 진짜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소설 속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를 따라가면 그 장면들과 그 분위기들을 그대로 그려볼 수 있다. 문단의 거목이라는 칭호가 아까지 않은 이문구 선생의 내공덕이 아닐까 한다.

소설가 김영현이 이문구를 평하며 민중의 해학성으로 인해 어려운 시기에도 비관주의로 떨어지지 않았다라고 했다. 이 소설에서도 문장 문장 사이에 넘쳐나는 해학성은 마치 마당극을 펼쳐놓은 듯 하다. 오피스텔촌 작가들의 건조한 웃음이나 재즈카페의 고독을 논하는 젊은 작가들의 뚝뚝 떨어지는 퍼질러진 낭만성과도 크나 큰 거리를 둔다. 이문구의 글은 바로 옆에서 막걸리 마시고 손으로 김치 뜯어먹으며 나눈 이야기들이 바로 문자로 변해버린 살아있는 글이다. 파닥이는 것이 생선만이 아니라면 이문구가 구사하는 사투리도 파닥이는 채소요 펄떡이는 과일이다. 언젠가 신문지상에서 이윤기와 어떤 평론가가 문학에 나타난 사투리를 두고 논쟁을 펼친적이 있다.평론가의 말은 우리 문학작품에 근거를 알수 없는 사투리나 비속어들이 지나치게 난무한다는 지적이었다.이윤기는 반대편에서 논박하였는데...경상도 사람인 이윤기가 한 말. "속닥하다"를 표준어로 고치면 진짜 그 맛이 안난다는 것이었다.나 역시 이윤기의 의견에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공문서나 방송등에서야 그렇다 쳐도 문학작품에서 까지 그런것 신경쓰면 뭐로 글쓰란 말인지...

이 책에서 이문구는 민중의 해학성을 바탕으로 세태풍자의 변을 늘어놓는다.정계를 비판하고 농업정책에 대해 꾸짖고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해 욕지거리를 해댄다. 조금 작위적인 모습도 없는 것은 아니다.장광설을 늘어놓는 주인공들을 보자면 충분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꾸 작가의 모습이 비친다. 꼭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의도가 과한건 아닌가 하는 정도의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문구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집안내력으로 부터 오는 감시로 인해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작가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불행한 가족사는 우리 역사의  안타까운 부분의 축소판이다.하지만 독자의 이기적인 입장에서는 그 불행이 거대한 밑거름이 되어 문학작품으로 세상에 큰 감동을 주었으니 전화위복이라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이문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고 한다.그가 이념적으로 양분된 문학계에서 양측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의 이러한 신념 덕이었을 것이다.

이미 고인이된 이문구 선생. 그의 새로운 작품을 이젠 만날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시간과 함께 고전이 되어 아무 시간에 아무에게나 읽힐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5-01-29 12:28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제 TV<현대 인물사>끝부분 밝에 못 봤습니다. 아쉽더군요. <관촌수필> 아주 오래 전에 읽어었는데...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 책 한번 읽고 싶군요.^^

로드무비 2005-01-29 15:32   좋아요 0 | URL
술자리가 있으면 쟁반을 들고 안주를 나르는 사람,
마지막 탁자 행주질까지 하고서야 자리를 뜨는 사람 이문구.^^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케네스 C. 데이비스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저널리스트들의 글을 좋아한다.아무래도 대학 전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일게다.저널리스트들의 글은 단순 명쾌하다.장황한 미사어구나 화려한 수식은 오히려 낙제점이 된다. 저널리스트들은 글을 읽는 대상을 고려해서 평이한 문체와 메시지가 정확한 글을 쓴다. 언젠가 신문을 보다가 한 학자가 우리사회를 분석하며 "아비투스"라는 단어를 쓴 글 본 적이 있다. 학자니까 충분히 이해가 된다.그런데 신문을 보던 대학을 갓 졸업한 후배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한다. 그 용어가 학자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일상적인 용어일 것이다.하지만 손님 기다리는 택시 기사나 좌판에 앉아 시간 때우는 상인들이 신문을 보며 그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사회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은 그 단어를 알 지 못한다. 저널리스트라면 그 단어를 좀 풀어쓰거나 다른 용어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책 <미국에 대해 알아야할 모든 것, 미국사>는 저널리스트형 역사서로서 훌륭하다.저자 케네스 데이비스는 미국 역사를 총 9개 장으로 나눈다.그리고 역사적 사안마다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알기 쉽게 미국사를 풀어가고 있다.이 책에 대해 일반적인 평가가 '읽기 쉽게 쓰여졌다'는 것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 할 수 밖에 없다.대개 역사서는 좀 고리 타분한 책으로 평가를 받는다.사실 역사서 만큼 읽기 쉽고 재미있는 책도 그다지 많지 않다.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사람들은 기가 질려서 역사서를 멀리한다.그리고 대개는 '국사 교과서형 역사의식'에 만족한다.아니면 손쉽게  TV 드라마가 제공한 'TV사극형 역사'로 자신의 정보를 한정짓는다.전자는 역사를 현(또는 역사적 사건의 현)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제단된 역사만을 정사로 이해하게 만드는 편협성의 위험이 있다.또 하나 TV사극형 역사는 드라마작가의 상상력을 역사로 이해하게 만들 염려가 있다. 케네스의 <미국사>는 미국에서 대안교과서로 이용될 만큼 흐름과 내용에 있어서 훌륭하다.또한 역사를 바라보는 가치에 있어서도 어느 한쪽으로 과하게 치우치지 않는다.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그들이 만든 규범을 신화화한 세태를 비판한다.또 흑인문제에 대해서도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권리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권리문제를 따라간다. 30년대 미국 재벌들의 역할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또 나름대로 의미로 인정한다.역사를 쓰는 사람이 그 나름대로의 사관을 버리기는 불가능하다.케네스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 하에서 적당한 줄타기에 성공하고 있다.그가 미국내 사회운동이나 사회주의에 대해 그다지 크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지적도 가능하다.하지만 일단 600페이지 정도의 통사에 그 모든 것을 꼼꼼히 다루기는 불가능했으리라 본다.일단 미국의 주류 역사에 대한 온건한 비판형 역사서로 파악하면 될 성 싶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은 역사서 틈틈이 들어가 있는 '유머'이다.저널리스트들은 자신의 글에 하나의 포인트로 유머러스함을 가미한다. 이 유머는 촌철살인의 요소를 지닌다.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서 동떨어진 유머는 생뚱맞을 뿐이다.가끔 진중권,강준만,김규항등 대중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의 글을 잡지에서 본다. 내용의 정당성과 당파성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그들의 글의 미덕은 유머이다.물론 가끔 과할 때도 있다고 본다.하지만 사람들이 그들의 글을 읽고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촌철살인의 유머러스한 문장이 한 역할을 할 것이다.이 책의 저자 케네스 역시 뛰어난 표현력으로 자신의 문장을 기억나게 한다.

"미국에는 늘 정신 질환을 앓는 이모 사진을 가족 앨범에서 떼어내려는,요컨대 과거의 어두운 부분은 지우려는 경향이 있었다."

"레이건은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그의 방망이로 후퇴한 것으로도 모자라 백악관을 아예 깡패설교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그의 설교는 좋았던 옛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90년대들어 케네디 암살사건등 각종 음모론 영화가 사실인 양 평가되는 것에 대해) " 이 세대는 반정부 음모의 과대망상증을 텔레비전 예술로 승화시킨 x파일과 함께 자라난 세대이기도하다"

(클린턴과 조지부시의 TV토론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그의 리무진이 엔진과 미터기가 돌아가는 상태에서 이중 주차가 돼 있기라도 한 듯 연신 손목시계만 들여다 보았다."

저자도 지적했지만 미국사는 사실 미국인에게나 우리에게나 영화나 다큐멘터리로 익숙하다.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은 반젤리스의 웅장한 음악으로 기억되는 영화<1492>로 남아있다.미국 독립전쟁은 멜깁슨이 나왔던 영화 <패트리엇>이 기억난다.미국의 흑인노예사는 알렉스 헤일리 원작의 TV시리즈 <뿌리>가 명작으로 남아있다.저자가 미국사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파악하는 남북전쟁은...내가 어려서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본 TV시리즈 <남과 북>을 떠올리게 한다. 웨스트포인트에 같이 입소하는 두 친구가 나중에 서로 남과 북군으로 갈려서 싸우는 내용이었다.그외에도 1차대전이나 대공황 시절을 다룬 영화는 수도 없다.그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강력한 이미지로 자리매김한다.2차대전 이후는 오히려 다큐멘터리가 익숙하다.미국의 매카시 열풍이나 케네디의 암살,닉슨의 워터게이트 등은 다큐멘터리로도 영화로도 수십편이 제작되었다.이 책을 보면서 알게 되었듯이 내가 알고 있는 미국사의 대부분도 이렇듯 영상 이미지에 고착되어있다.이러한 영상 이미지의 역사는 저자도 지적하듯이 역사를 왜곡하고 낭만주의적으로 채색한다.남의 나라 역사이긴 하지만 결코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듯 하다.

 나는 오히려 촘스키나 하워드 진의 책들 통해 비주류 미국사에 대해 먼저 알았던 것 같다.내가 미국민이 아닌 이상 비판적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더 옳다고 믿는다.하지만 이 책을 골랐을 때는 왠지 그냥 그 아이들의 주류 역사를 한 번 주욱읽고 싶은 욕구가 생겼던 것 같다.머리도 식히고 정리도 하는 기분에서 말이다.화장실에서도 읽고 사무실에서도 읽고 하면서 600페이지 가량의 책을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읽었다.쉬운 역사서이자 또 중도주의적인 미국사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leinsusun 2005-01-09 11:29   좋아요 0 | URL
이 책의 원제가 재미있네요. Don't know much about history.

시리즈물인 것 같네요. 이 책은 역사편인 것 같고...

보관함에 넣었어요. 미국사는 TOEFL reading에 항상 나오쟎아요. 예전에 TOEFL 선생님이 가람기획의 미국사 101장면을 읽으라고...그 책을 읽으면 지문을 대충 읽어도 내용 안다고 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ㅋㅋ 그 이후로 비판적 시각으로 쓴 책들만 읽었지, 주~욱 읽을 수 있는 책을 읽은 적이 없었는데 반가워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사마천 2005-01-09 22:38   좋아요 0 | URL
앙드레 모로아의 미국사가 참 좋은책인데 한번 살펴봐주시죠.

도서관여행자 2005-01-10 09:38   좋아요 0 | URL
이 책, 작년에 읽었었는데 저도 그 유머들이 기억에 나는군요^^

마냐 2006-02-11 03:59   좋아요 0 | URL
간만에 땡스투...^^
 
예수의 제2복음 1
주제 사라마구 지음 / 문학수첩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지금 신을 믿지 않는다.과거에는 믿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님 믿음을 강요당했던 것 같기도 하다.어려서부터 부모님들은 교회에 다니셨다.그래서 난 유치원도 그 교회의 부설 유치원을 다녔다.유치원 간식 시간에는 먼저 주기도문을 외워야했다.7살 먹은 녀석이 그 뜻을 어떻게 알수 있겠는가.단지  남들도 다 따라하고  나 역시 간식의 유혹에 뿌리치기 어려우니 열심히 따라외웠다.

초등학교때는 만화영화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부모님들의 설득보다 만화의 유혹이 컷다.(아마 만화에 악마가 깃들여 있었나보다.) 하지만 어머니의 쑈(?)에 의해 난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우리 어머니의 쑈는 지금 생각하면 좀 귀여운데가 있다.어느 일요일 아침 단단히 작정한 어머니는 내 손목을 끌고 교회로 가셨다.난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진짜 그랬다.) 완강히 저항했다.결국 새로놓인 8차선 도로앞에서 어머니와 나의 전선이 형성되었다.그때 우리 어머니..."니가 교회에 가지 않으면 엄마는 확 찻길로 뛰어들거야" 라며  찻길로 들어가셨다. 초등학교 4학년인 내 눈에는 어머니가 진짜로 길로 뛰어드는 것 처럼 보였다.결국 어머니의 블러핑에 엉엉울면서 "알았어..교회가면 되잖아" 라고 말해버렸다.진짜 애들 데리고 무슨 블러핑을 그리 세게 하셨는지....사실 우리부모님도 날라리 교인이신데.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데가 있다.

어쨋든 나의 패배로 종교를 둘러싼 집안내의 갈등은 사라졌다.하지만 중학교 2학년때 난 교회에서 발을 끊었다.이유는 너무 단순하게 교회에 진짜 맘에 안드는 놈이 설치고 다니는 꼴이 보기 싫어서였다.여차여차하다 고등학교를 가게되었는데 또 거기가 미션스쿨이었다.교가보다 '실로암' 이란 가스펠이 더 자주 불려지던 곳이었고 반에서 절반정도는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매주 수요일 예배를 봤는데 그땐 그다지 크게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예배때 가서 영어 단어장보고 그런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으니까.

야간 자율학습시간은 간간히 종교토론장으로 바뀌곤했다.열성 교인 친구들과 나같은 비기독교인들 사이의 말꼬리잡기 논쟁같은거다. 그때 많이 나왔던 말들이 대략 이런거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무고한 사람들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 있느냐? "천국이란거 가본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있다고 믿느냐?" "하느님을 믿는 거냐 교회를 믿는거냐?"  어차피 짧은 지식에 서로 사이비 논거를 들이대며 티격태격했다.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아직도 유효한 듯하다.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의 제2복음" 은 많은 예수관련 창작물들 처럼 성서에 나온 예수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기본뼈대는 복음서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장면들이 훨씬 더 많이 자리한다. 1부의 전반부 주요인물인 요셉의 경우만 보더라도 작가의 인간적인 상상은 성서이야기를 무시한다.아이를 잉태하게 되는 장면도 그렇고 요셉이 어리버리하다 십자가에서 죽는 장면들로 그렇다.또 다른 아이들을 살릴수 있었음에도 아이 예수를 살리기 위해 허둥지둥거리다 수많은 아이들 죽음으로 몰고간 죄책감 같은 것도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 작가의 상상이다. 주인공인 예수 역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과연 그런지 의심하는 인물이다.또 하나님이 만든 역사에 대새 세속적 의문들을 줄기차게 재기한다. 결국엔 하나님은 귀찮은 듯 "거 참 질문 되게 많은 놈이네.말좀 자르지 마라" 라고 면박을 준다.두어차레 등장하는 하나님과 예수의 만남은 기독교에 대한 일반인들 가진 세속적인 질문을 예수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예수의 똑소리나는 질문에 하나님이 전전긍긍하며 빠져나가기 급급한 모습이다. 주제 사라마구가 기독교의 신 하나님을 파악하는 방식은 그리스 신화의 한 신들과 같다. 예수가 왜 하나님이 직접 하시지 않고 나를 내려보내느냐고 물었을때 하나님은 신들간의 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발언을 한다.예수를 내려보낸 다는 것은 유대지방의 신에서 전 세계의 신으로 인정받겠다는 하나님의 세계패권주의적 포석이있는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미 알려진 기독교의 역사를 미래를 궁금해하는 예수에게 알려준다. 12제자는 어떻게 죽게되고 그 이후 하나님보다 더 많이 불리게 될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순교하게될 성인들의 이름까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성서에서 가장 극적으로 보여지는 십자가판결과 형집행은 오히려 간단하게 처리된다. <패션오브 크라이스트>가 예수의 수난을 가학적으로 그리며 기독교인의 감정적인 단결을 불러일으켰던 것과는 정반대이다.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피에타>의 눈물떨어뜨리는 마리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오히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속았다.원래 이렇게 죽음으로 끝나게 운명지워진것을"  예수의 입에서 속았다라는 말이 나오다니. 단순히 하나님에서 속았다는 뜻만은 아닐 성 싶다.자신의 운명이란 것에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예수의 정체성을 포고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번 크리스마스에서 교황의 메시지를 TV자막에서 봤다." 그리스도에게 고난받는 인류에게 평화를..." 사실 이건 좀 오타다.교황이 그리스도에게 고난받는 인류에게 평화를 기원했다.이런 내용인데 중간을 잘라버리니 다른 뜻 처럼 읽힌다. 근데 사실 이렇게 읽는 것도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개별 기독교인을 탓할 생각은 없다.(아니 사실 한국 기독교에 대해 할 말 많다만 여기선 아닐뿐이다.)  그리스도의 이름하에 쓰러진 영혼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예수는 또 뭔 잘못이 있겠는가? 자신들의 종교나 자신들의 종교해석이 유일하고 나머지는 다 이단(이것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어서 지목된다) 이라는 인간들의 미력함일 뿐이지.

<사족>

교회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은 읽지 마시길 바란다. 이분들은 대개 교회에서 배운것 외에 새로운 해석이나 소설적인 창작에 '신성모독'이란 단어를 내세워 거부하고 악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으므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주제 사라마구에 대한 편견만 심어놓을 것 같다.대신 종교색이 없는 그의 <눈먼자들의 도시>를 권한다.

그나저나  동남아시아의 지진과 해일로 3만명이 죽었다. 다 기독교인들이 아니어서 그런 모진 고난을 겪게하신건가? 아니면 이유가 뭘까 ?  평소에는 성경에 따라 모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다 아는 선택받은 어린양처럼 행동하면서 막히면 "신의 뜻을 어찌 인간이 알겠냐?" 며 회피하는 그런 대답말고....다른것 없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