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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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올라가 본 것이 언제인가? 가장 가까운 기억은 군대시절이다. 사단장 공관 뒤편 아카시아 나무에 전선 걸치러 올라갔다. 다리가 후들 후들 거렸다.혹시 내 발이 제대로 된 곳에 놓여있는지 계속 발위치를 확인 했던 기억이 난다. 밑에서 고참은 빨리 하라고 재촉하고 인사계는 "거기 말고 그 위에 가지 쪽으로.." 뭐 이러면서 염장을 질렀다. 조금 더 낭만적인 나무 탄 기억은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초등학교 시절 우리반이 담당했던 청소구역이 교문 옆 수목원이었다.10미터는 족히 넘어보이는 호도나무에 친구들과 함께 올라 갔다. 이유는 지금은 마트에서도 판다는 집게 벌레나 뭐 그런.... 남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뿔달린 벌레를 잡으로 올라갔었다.나는 앞서 올라가는 아이의 호기어림도 나몰라 하고 무서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코지모는 나무 위에서 산다. 그가 나무 위로 주소지를 이동한 것은 귀족적인 구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귀족적 세계관의 관습과 허식에 대한 불만은 '거리두기'라는 반항의 양식을 만들어낸다. 그가 몸을 의탁한 곳은 '나무 위의 세상'이다. 나무라는 공간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나무의 존재양식에 기인하는 이중성이다. 나무는 땅이라는 곳에 존재의 근원을 두고 있다.반면 나무가 아름드리 성장을 하게 되면 나무는 땅에 있으면서도 땅을 떠난 공간을 만들어낸다.대기와 땅의 점이지대가 나무와 숲이 할당받고 있는 공간이다. 땅에 바탕을 두면서도 객관적인 여유로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으로 나무 위만큼 근사한 곳은 없을 성싶다.칼비노가 주인공 코지모를 옴브로사 숲속의 나무위로 올려보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둔다" 는 코지모의 철학이 탄생하는 곳이다.주인공 코지모는 나무위에서도 땅의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귀족임에도 그 특권을 주저없이 버린 관계로 농민들이나 숯장이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희대의 도둑과도 스스럼 없이 독서교류회를 만든다. 태어난 근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무처럼 코지모 역시 가상의 공간인 옴브로사에 붙막이 하며 땅의 사람들과 함께 시대적 흐름을 함께  한다. 

칼비노가 환상동화 <나무위의 남작>에서 주인공 코지모에게 부여하는 캐릭터는 독특하다.우선 체제 반항적인 지사의 모습이 있다.평생을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한 강인한 모습도 존재한다.또 좀 무모한 신념에 대해 신봉하는 사람들이 갖는 희극적인 자기강박의 모습도 코지모는 가지고 있다.코지모의 캐릭터는 자유로우면서도 민중지향적이다. 또 한편으로 계몽주의의 지식인의 모습을 지향한다. 끊이없는 독서와 편지를 통한 교류를 통해 그의 지적능력과 활동이 유럽인들 사이에 각인된다. 지성적이고 유머러스한 반면 연애문제에 있어서는 나이브한 모습을 보인다. 구세대 유럽의 퇴폐적 낭만주의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다. 어린시절 헤어진 비올라에 대한 그의 맹목적인 애정은 촌스러울 정도이다. 시간이 흐른 후 여후작으로 돌아온 비올라의 독선적 사랑에 대한 코지모의 대응 역시 그 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고 인류의 지성이 발전해도 사랑문제만큼은 그 궤를 같이 하지 못하나 보다. 오히려 약간은 어설프고 맹목적인 사랑의 양식을 더 순수한 무엇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코지모의 시대에도 칼비노의 시대에도 유효했나보다.  

코지모가 살던 시기는 유럽 역사의 대변혁기였다. 코지모는 그 시간들을 '거리두기'방식으로 이해하고 그가 속한 공간에서 그 땅의 사람들과 대응해간다.코지모처럼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세상은 달리보인다.조금 떨어지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권력이나 돈을 통해 더 높이 올라가서 그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그들이 올라간 곳에서 아래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전부 딛고 올라온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무언가 한다는 것은 악어의 눈물일 뿐이다. 그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눈물 흘리지 않는 악어로 남고자 한다.일관성이란 측면에서는 정합적이다. 조금 떨어져서 본다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방하착' -아래로 내려놓는 것이다.코지모가 그의 귀족적 특권이나 엘리트의식을 내려놓고 세상과 존재를 대면하기 위해 나무위로 올라간 것 처럼. 분명 '내려놓기' 또는 '거리두기' 가 결코 쉬운일은 아니다. 조금만 더 위에서 보면 세상사의 많은 일들이 좀더 대범해 질 것임에도.....  

날씨가 차다. 나보다 서너배는 오래도록 세상을 지켜봐 온 감나무 위 올라가보고 싶다. 감이 주렁 주렁 달려있어도 좋을 것이다. 아래 세상에 대한 두려움없이 그 위에서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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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원년의 풋볼 - 오에 겐자부로 소설문학전집 7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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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책이나 CD를 사며 얻은 경험이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있을 때 구하자!" 이다. 음반매장에 가면 손에 몇장을 고른 후 하나씩 뺀다.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한다. '다음에 1순위로 사야지' .그러나 그 다음이 되면  소량 수입된 수입CD들은 매장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에 아믈랭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협주곡 1,2번이 그런 예이다. 음반매장에 전화해보면 다음번 주문에 올릴게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 런지 알 수 없다.

오에겐자부로의 <만년원년의 풋볼>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몇 년 전 서점 일본 문학 코너에서 겐자부로의 전집을 보았다.서점 진열대 밑에 쪼로록 숨어있었다.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과 이 책을 동시에 들고 고민하다가 한 작가의 책을  한번에 두 권사진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 도로 진열대에 꽂아 놓았다.몇 주 후 다시 가본 서점, 겐자부로의 전집은 종적을 감추었다.소문없이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이 책은 알라딘에서도 오래도록 품절이었다.그러다 몇달 전, 알라딘에서 이 책을  얻었다.(지금 보니 다시 또 품절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츠카모토 신야의 영화<쌍생아>의 그로테스크함을 계속 떠올렸다.마치 일본 귀신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강한 색채를 담고 있는 글이었다.한문장 건너 계속 이어지는 겐자부로의 메타포는 소설 배경의 선명성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다.또 그러한 강렬한 묘사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의식을 팔레트에 섞어 놓은 기괴한 물감처럼 펼쳐보여준다. 하지만 개별 장면의 묘사와 인물들의 감정에 대한 그로테스크함에 비해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는 낮게 깔린 어두운 먹구름을 연상시킨다.금새라도 천둥번개가 치고 광풍이 휘몰아쳐 모든 것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위기감과 긴장감이 페이지 사이를 휘감아 돈다.첫장면 부터 시작되는 폐쇄적 느낌,그리고 이구아나의 껍질을 만지는 듯한 불쾌감에 대한 묘한 호기심, 이 두가지 요소는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이다.

소설에는 세가지 시대가 등장한다.민중봉기가 일어났던 1860년대,그리고 대동아전쟁 당시, 마지막으로 일본내 좌우대립으로 혼란스러웠던 1960년대이다.주인공과 그의 아내,그리고 동생 다카시는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며 현재 삶속에서 살아 있는 지난 과거의 암울함을 찾아간다.마치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1860년대 봉기의 우두머리였던 증조부 동생의 삶과 조선인에게 맞아 죽은 S형의 행적이 현재 속에서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그리고 이 사이를 유유히 흐르며 유전되어 온  것을 찾아낸다.그것은 바로  '폭력'과 '공포' 이다. 전후 일본을 휘감고 있던 폐전국으로서의 우울함,단 한방으로 모든걸 끝장내는 핵 피폭의 공포,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일본 사회에 대한 두려움. 전후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잔재해 있는 무의식적인 공포는 오에 겐자부로의 글을 따라 명치시대부터 다시 재구성된다. 물론 겐자부로도 결국에는 희망을 말하고 싶어한다.하지만 그 희망에 큰 기대는 없다.주인공 일행이 고향 마을로 향하게 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바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때문이다.알코올 중독인 아내와 아이를 버린 죄책감과 친구의 엽기적인 죽음(머리에 붉은칠을 하고...겐자부로는 단 한번도 친구의 자살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죽음의 묘사로 친구의 죽음을 말한다.)으로 무기력증에 걸린린 주인공에게 동생이 건넨 유혹의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그리고 소설 말미 모든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다시금 아내가 남편에게 건내는 말 역시 그 <기대>이다.물론 주인공은 그것이 녹녹하지 않음을 알지만 수동적 순응을 한다.오에 겐자부로 자신이기도 한 주인공은 그러한 순응을 통해 불안감이 가득한 미래로 나아간다.

소설 속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은 동생 다카시이다.그의 삶의 편린 자체가 죄의식과 폭력,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가득차 있다.어떻게 보면 일탈적이고 매저키스트적 인간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러한 위악적 자기학대를 통해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자기 통일성이었다.타카시는 자기정체성을 얻기 위해 과거 민중봉기의 지도자 였던 증조부의 동생과 동일시 작업을 펼쳐나간다.마을의 청년단을 만들고 카리스마적인 행동으로 슈퍼마켓 천황의 권력에 도전한다.그러나 그의 작업은 퇴폐적인 낭만성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기 파괴적이다.그는 천황에게의 도전을 통해 마을에 만연한 패배주의의 그늘을 걷어내는데 일시적 성공을 거둔다.하지만 그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은 죽음을 통한 자기 통일성의 확립이었을 뿐이다.그의 죽음또한 책 서두에 나온 친구의 죽음처럼 그로테스크하다.그 둘은 죽음을 통해 <진실>을 완성한다.미성숙한 영웅의 비극적 죽음처럼 그들은  자기 희생이란 제의를 통해 자기완성을 이룬다.

그의 죽음에는 어떠한 면에서 순수한 영웅의 모습이 있다. 탈출구가 없는 암울한 세계 하에서 한 개인에게 더 가까운 것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통한 구출'이다. 애써 이것을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다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인생은 어차피 도덕 교과서가 아니고 '좋은 생각'류의 잡지가 아니기때문이다.평범한 일상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억의 조작과 편의주의적 망각, 폭력에 대한 굴복과 음험한 상상을 하는가?  정체성 같은 것은 이미 난지도 쓰레기 위를 뒹근지 오래되었다. 자신의 순결한 내적 통일성을 위해 날카로운 더듬이를 곤두세우고 추락의 끝자락까지 내려가 보길 두려워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낯설고 기괴할 수 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근친상간,일탈,군중의 폭력성...이러한 요소들이 소설 전편에서  숨을 쉬겠다고 헐떡거린다.불편한 소설이다.하지만 너무도 매력적이어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이런 말을 해야할 때가 올것이다.

         ...."진실을 알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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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cat 2004-09-14 16:07   좋아요 0 | URL
쌍생아를 뜻하지 않게 두 번 봤는데, 그때마다 드는 느낌이란 게 어릴 적 <전설의 고향> 볼 때의 똑 그것이더군요. 비록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는 온 몸이 곤두선 느낌...추천하고 갑니다.

마녀물고기 2004-09-14 16:21   좋아요 0 | URL
세 번째 단락, 소설 전반에 대한 사유님의 느낌 묘사가 꽤나 매력적인 리뷰네요. 그런데 오후, 품절이라니..
 
지하철 Jimmy Fantasy 2
지미 지음, 백은영 옮김 / 샘터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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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을 들으며 리뷰를 쓰고 있다.바흐의 음악과 왠지 지미의 <지하철>의 그림들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지하철의 계단처럼 오르막 내리막을 왔다갔다 하는 바흐건반 음악의 특징 때문일까?  아니면 이 책의 원제목인지 ( 혹은 부제인지 ?) "sound of colors" 라는 말때문일까? 책장을 넘기다 보니  바흐의 상승음계에 따라 한 여자 아이가 계단 위 상상의 나라로 들어간다.또 그 아이가 바흐의 하강음계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으로 따라 내려간다.   

전주곡과 푸가2번의 제 1 전주곡 -"나는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검은 굴 속 같은 지하철 안에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빽빽히 들어차 어디론가 간다.신문보는 아저씨,또 그걸 넘겨 보는 백발의 아저씨,첼로를 든 자매,곰 인형을 들어올린 사람,고민이 많은지 아님 치통을 앓는지 볼 한 쪽에 손을 대고 있는 젊은이.그런데 우리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어디갔지 ???  아 저기 뒤편에 그녀의 우산이 손잡이에 걸려 있네.사람들 속에 파묻혔구나.^^

전주곡과 푸가3번의 제2 푸가  -"어릴 때 말할 줄 아는 물고기를 키워 함께 바다밑을 잠수하고 낮은 목소리로 비밀을 속삭이는 꿈도 꾸었지"

소녀의 머리털이 한올 한올 떠올랐다.푸른 돌고래와 초록 돌고래가 동심원을 그리며 소녀와 원무를 추고 있다.주변의 눈이 동그란 물고기들로 줄을 맞추어 그들의 원무에 동참한다. 지하철 입구가 목욕탕 타일처럼 푸르다. 고대 등위에 누워서 썬탠을 하는 소녀.백사장 위의 썬탠보다는 고래등 모래사장이 훨씬 낭만적이다.소녀의 눈에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구름은 아직도 신비하게 여겨질까?"

전주곡과 푸가 5번 제1 전주곡- "어쩌면 우리도 작은 새처럼 훨훨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녀의 손이 6개가 되었나?아니 빨리 휘드르고 있구나.100개도 넘는 창문들을 배경으로 소녀가 날아간다.글렌굴드의 손가락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전주곡과 푸가 8번 제1전주곡- "이 도시 속에서 나는 끝도 없이 길을 잃고 헤맨다"

앙상한 가을 숲이다.계단이 뫼비우스 띠 처럼 이어진다.내려간 길은 결국 올라간 길이돼고 올라간 길은 종착엔 내려온 길이 된다.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소녀는 어디로 가고 있나. 전주곡이 흐느적 거린다.앞선 곡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이 방향을 잃은 음표들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푸가의 대답이 기다려진다.하지만 푸가는 더 무겁고 더 난망하다."계속 차를 잘못 타고 또 잘못 내린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랑의 지하철이 회색 승강장의 소녀에게 바람을 일으키며 제 갈길을 간다. "그래서 안개 자욱한 진흙밭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도 많이 있다."

전주곡과 푸가 9번 제1전주곡 - "나는 비밀의 화원에서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꼬마병정을 찾았다."

소녀는 그네를 타고 글렌굴드와 바흐도 함께 건반위에서 가벼운 그네질을 한다. 잘 차려입은 병정인형이 물끄러미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내게도 어린 시절 커다란 인형이 있었는데.크기가 과장하면 1미터쯤은 된 소녀봉제인형이었다.외할아버지가 일본에서 가져다 주신 인형.어린시절 그 인형과 함께 찍은 사진이 몇장 있다. 그런데 그 인형은 어디로 갔을까? 이미 세상을 떠난 건가?

전주곡과 푸가 10번 제1전주곡-"혹시 저를 위해 저녁 노을을 볼 수 있는 창가에서 시 한 수 읽어주실 분은 안계신가요?"

책이 사방에 가득 찼다.소녀가 창틀에 기대어 붉은 하늘을 본다.볼수 없다.글렌 굴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조그맣게 뭐라 하더니 소녀의 주문에 답한다. 음음음....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허밍은 자신을 위한 시이다. 그녀를 위해 시 한수 읽어줄 낭독 실력이 못되는 나는 그녀에게 바흐의  음악을 들려준다.붉은 노을을 닮은 전주곡과 푸가 12번. 한 음 한 음 노을 빛과 어우러져 붉은 빛이 짙어진다.종래에는 잦아드는 피아노 소리처럼 푸른 어둠이 내릴 것이다.

전주곡과 푸가 15번 제1전주곡."삶이란 이렇듯 예측하기 힘들어.우리 다같이 맘껏 노래나 부르자!"

모자쓴 코끼리가 춤을 춘다.펭귄은 일렬로 서서 쭉 미끄러져가고 곰돌이들이 탬버린으로 분위기를 맞춘다.돼지는 어느새 피겨스케이팅을 배운걸까.토기의 의상은 요즘 유행하는 줄무늬 스트라이프이다.

전주곡과 푸가 19번 제2 푸가 -" 나는 우울한 도시를 방황하며 열심히 찾아본다."

사람들이 길을 건넌다.비틀즈의 앨범 같은 표정이다. 모두 한 방향으로 걷는다.소녀만 다른 방향이다.저멀리 또 전철이 지나가도 그런 소녀을 바라보는  눈만 내민 소녀는 결국 나비가 찾는 꽃밭을 찾을까? 가끔 꽃집이 없는 도시를 생각해본다.난 퇴근길에 무었을 사 갈 수 있을까? 과일도 봉지에 담아 줄 때는 낭만적이었지만 지금은 검은 비닐이라 맘에 안들고...그나마 계절마다 마음이 동할 때 제철 꽃을 담아 가는 즐거움도 꽃집이 없다면 사라지겠지.꽃집 아저씨 아줌마 고맙습니다.좋은 꽃 좀 떼놓으세요.

전주곡과 푸가 24번 제2푸가-" 이제 나는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나는 애써 찾이 않아도 모두 볼 수 있으니까요."

소녀가 멀리 나가나보다.지하철이 도시 외곽형인거 같다.띠 하나 더 둘렀을 뿐인데.소녀가 미소를 띠운다.글렌굴드도 1집은 이제 다쳤다고 이제 밥먹고 또 하자고 마지막 곡에 힘이 들어갔다.열심히 딩동거린다. 하늘은 황금빛이고 길가에 가로수 잎이 깃발처럼 나부낀다.글렌굴드가 하도 힘있게 두드려서 나뭇잎이 다 떨어지겠다.

p.s)

연주는 끝이 났다.내가 원래 좋아하는 류의 책은 아니다.아포리즘에 대한 지겨움정도가 그 이유일게다.이 책에 나오는 글 역시 그런 종류중의 하나여서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다.하지만 그림은 너무 예쁘다.처음 볼때 예쁘다 였는데 다시 한장 한장 넘기며 주변 사물에 까지 시선을 미치니 더욱 맘에 든다. 그림책 보는 재미는 그런 건가 보다.앞으로도 진짜루 좋은 그림책 있으면 추천좀 해주시라.(그림 책 너무 비싸서 함부로 살 건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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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2 10:45   좋아요 0 | URL
너무 잘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멋진 그림이 내걸린 듯한
리뷰네요.^^

비로그인 2004-09-12 16:58   좋아요 0 | URL
'지하철'을 사 볼 생각이었는데, 이제 이 음악도 함께 들어야겠어요!

비로그인 2004-09-13 17:12   좋아요 0 | URL
제가 반성하는 사유님 서재에 한번 낙서를 했었군요... 기억력 빵점... 아일랜드의 식상한 부분이 뭔가 있는데, 했는데 벅벅 긁어주셨군요. 그래두 아일랜드만한 드라마가 없어서리... 저는 감지덕지...포기않고 기회닿는대로 보려구요...스타일은 스타일대로 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 작가도 홍상수같이 같은 걸 반복해서 지루하게 하는 일만 없으면 좋겠어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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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 포스티노>를 너무 좋아했다.기억에 한 세번쯤은 본 것 같다. 이탈리아의 소박한 리얼리즘적 전통도 살아있었고 배우들의 순박한 연기와 위트,그리고 영화음악까지... '아름다운 영화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적절한 예가 될 법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에 대해서는 이번 출판 전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영화와 소설의 완성도가 늘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기에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일 포스티노>에 대한 멋진 추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원제목은 <불타는 인내>이다.소설 속에 등장하는 네루다의 노벨상 수상 연설의 한 대목이다.작품의 제목은 이 소설이 영국인 감독 마이클 레드포드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로 바뀌었다고 한다.영화제목은 이를 더 줄여 <우편배달부>였지만... 영화는 아카데이 최우수 영화상 후보에도 오르고 전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나의 책읽기에서도 영화 <우편배달부>의 이미지가  결국 소설을 잠식해 버렸다.소설과 영화가 몇몇 다름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쪽 이미지로 소설을 읽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결국 그 나름대로 즐기기로 했다. 거기에 더하여 영화 0.S.T를 들으며 읽어버렸다. 소설을 읽는 동안 영화속에 보여지던 푸른바다와 마리오(마시오 뜨로이지 분)의 선한 눈빛과 네루다(필립누아레 분)의 뚱뚱한 여유로움이 떠올랐다.

영화와 소설이 다른 부분은 먼저 배경이다. 영화의 배경은 네루다가 망명생활을 하는 이탈리아 나폴리 어느섬 으로 설정되어있다.하지만 소설 속의 배경은 칠레의 이슬라 네그라라는 섬으로 설정되어있다.주인공 마리오 역시 소설 속에서는 17살의 청년이지만 영화속에서는 30대 청년으로 나온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30대설정이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어눌하면서도 시심이 가득한 마시오 뜨로이지라는 명배우의 공때문이 아닐까 한다.물론 결말 부분도 조금 다르다. 영화 속에서는 마리오의 죽음이 조금더 직접적으로 그려진 반면 소설속에서는 조금 상투적이지만 간접적인 암시를 띤다.소설이 영화에 비해 내용상 조금 더 강조했던 부분은 정치적인 주제들이다.그렇다고 심각한 접근을 의미하진 않는다.작가 스카르메타가 칠레 아엔데정권의 붕괴에 대한 아쉬움과 그 부당성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와 소설에서 공히 가장 멋진 장면은 마리오가 베아트리사를 꼬시기 위해 메타포를 배워가는 과정이다.또 영화를 이야기해서 그렇지만 그 설레임을 뜨로이지는 너무도 잘 연기해냈다.마리오가 베아트리스에게 한 첫번째 메타포 "당신의 미소가 얼굴에 나비처럼 번진다." 라는 구절을 읽는 동안 꼬질꼬질하면서도 순박했던 뜨로이지의 얼굴이 눈 앞에 선했다. (그런 배우가 안타깝게 그리도 일찍 세상을 떠나다니..) 또 하나의 멋진 장면은 네루다에게 섬의 소리를 녹음해 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읽을 때 사운드 트랙의 그 부분을 들었다. 영화의 장점은 그 부분을 소리로 표현해낼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갈돌을 굴리는 바다소리와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의 발길질소리..그리고 그것들을 채녹하기 위해 안간힘쓰는 마리오의 얼굴들. 소설이 가진 들려줄 수없는 한계를 영화는 영상화,음성화해 내었다.반면 소설의 장점은 멋진 표현으로 이 부분을 감당해낸 점이다. 마리오가 녹음한 소리는 이런 것이다.

  ' 불평이나 일삼는 무정부주의적인 펠리컨의 날개짓' ' 해변의 야생 들국화 꽃받침에 앉아 쫑끗거리는 주둥이로 태양의 오르가슴을 만끽하는 날렵한 벌 떼 소리.' '불꽃놀이처럼 쏟아져 내리는 별똥별을 보고 개들이 하릴없이 짖는 소리' 등등.....  이 정도면 활자들이 소리를 내는 듯 귀에서 울린다.

영화에 비해 소설이 확실히 우위를 점유하는 곳은 바로 재치넘치는 대화와 해학이다. 거의 모든 장면 장면 등장하는 인물간의 대화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게 한다. 우리 소설 춘향전에 월매의 대사처럼 마리오의 수작에 넘어간 딸과 과부엄마가 나누는 대사는 박장대소 수준이다.과부와 네루다의 통화 그리고 마음 졸여한는 마리오와의 대화에서도 한번씩 툭툭뱉어지는 대사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또 영화에서는 많이 삭제되었지만 순박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성적묘사의 해학성등도 소설 읽는 재미를 더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나온지 좀 되어서 비디어가게 구석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안보신분들은 한번 꼭 보시고 영화를 아끼셨던 분들 역시 추억을 되뇌이며 영화만큼 멋진  원작소설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음....그리고 오늘 계속 들었던 사운드트랙에 대해 한마디. 사운드 트랙에는 귀에 익은 주제곡도 있지만 네루다의 시를 유명 영화배우,가수들이 낭송하는 트랙이 전반부를 차지한다. 스팅,웨슬리 스나입스.사무엘 잭슨,랄프 파인즈,앤디가르시아,줄리아 로버츠,마돈나.....  궁금하신분은 한번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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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8-30 18:33   좋아요 0 | URL
훌륭한 리뷰입니다. 네루다를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로서 읽고 추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시는군요. 참말로 잘 읽었습니다. 저는 아직 영화도, 책도 읽지 않았습니다. 좋은 것일수록 천천히 즐기자는 뜻도 있지만 역시 게으른 탓이지요. 덕분에 저는 책을 먼저 읽고 나중에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군요. 이럴 땐 게으른 것이 나쁜 것만 아닌 것 같습니다. 리뷰에도 별을 준다면 서슴없이 다섯 개 모두 드리고 싶습니다.

마녀물고기 2004-08-30 19:22   좋아요 0 | URL
마리오가 네루다를 위해 섬의 소리들을 녹음하는 모습을 보면서 코 찡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네루다를 향한 마리오의 존경과 사랑이 네루다에게 무참하게 꺾이는 것 같아 가슴 아팠던 일도요. 며칠 전 민음사세계문학전집 몇 권을 사면서 이것도 넣을까 하다가 영화의 이미지가 너무 아름다웠던 탓에 그만 두었었는데, 엄.

파란여우 2004-08-30 22:16   좋아요 0 | URL
불행(?)하게도 영화와 책 둘 다 접하질 못했습니다..떠도는 소문만 접했지요. 언제 시간이 되면 완파하리라 마음만 먹다가 님의 멋진 리뷰에 반합니다. 저는 님의 리뷰를 보면서 이제 책을 골라야 할까 봅니다.허락해 주실꺼죠?^^

stella.K 2004-08-31 00:31   좋아요 0 | URL
바람구두님 때문에 여길 다시 오게 되었네요. 님은 가끔 제 서재에 들려주셨는데요. 바람구두님이 어찌나 님 자랑을 하는지...^^
<일 포스티노>는 저도 본 영화죠. 참 좋은 영화예요. 다시 한번 보고 싶네요. 근데 정말 님의 글을 읽으니 저도 책으로 읽어 봐야겠네요. 오래 전 저도 이 책 보관함에만 남아 놓고 있었는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축구의 사회학 - 지구를 정복한 축구공, 지구를 말하다
리처드 줄리아노티 지음, 복진선 옮김 / 현실문화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축구는 유사종교이다. 축구팬들에게 스타디움은 성전이요 외치는 구호는 그들만의 주기도문이다. 그 구호소리가 높아져가면 마치 통성기도장의 신도들 처럼 그들 내부에 뭉클함이 떠오르고 눈에는 눈물이 흐른다.언젠가 외신에서 보니 아르헨티나에서는 마라도나를 신으로 모신다는 우스운 종교가 나왔다고 한다.물론 스타플레이어를 신으로 모시는 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하지만 스타디움 안에서 스타플레이어의 존재감은 성경의 선지자 역할은 충분히 할 것이다. 축구가 가진 광적인 몰입과 스타플레이어에 대한 숭배,타자에 대한 배타성등은 종교의 속성을 닮아 있다.사회학적으로도 종교가 국민통합의 목적으로 장려되었듯이 축구 역시 20세기 초반 근대국가 형성기에 국가정체성을 담보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축구를 바라보는 두개의 시선도 종교의 그것 처럼 양분될 수 있다.종교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이 있고 그걸 삐딱하게 바라보는 비판자가 있듯이 축구 역시 옹호자와 비판자가 선을 긋 듯 나뉘어진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선이 우리 앞마당에서 확실히 보여진 적이 있다.마치 후천개벽이라도 일어날 듯 치솟았던  2002년 월드컵의 붉은 물결-이젠 인용자체도 진부해서 이번으로 끝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집단주의의 한 단면으로 바라보고 멀리 파시즘의 요소까지 읽어내단 비판자들.우리들의 축구에 대한 시각은 그 양 극단 속에 어느 한 점 속에 위치한다.

하지만 이 두가지는 축구를 둘러싼 우리사회의 독특한 사회구조 분석에 촛점을 맞춘 시각일 뿐 축구 일반에 대한 통시론적 관점은 아니다.세계 최대의 문화현상인 축구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사실 별로 없다.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축구를 사회학의 한 대상으로 파악하여 객관적으로 해부한다는 것이다.여기에는 물론 축구의 사회적 속성이 된 국가 통합의 문제,축구팬의 문제,인종의 문제,미디어와의 관계,젠더의 문제들이 포함된다.

이 책 전반부에 등장하는 원시 축구의 발생이나 근대 축구의 노동계급 출발설등은 축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도 새로울게 없는 사실이다. CATV에서 가끔 하는 다큐멘터리에도 나오는 이야기 니까 언젠가 흑백화면에 축구하는 그림 나오면 한번 보시길 바란다. 이 책 전반부에 가장 중심을 두고 다루는 주제는 역시 축구 팬과 관련된 사회학적 접근이다.결국 환원해서 보자면 계급과 축구의 문제이다.저자는 20세기 중반을 거치며 축구의 주요 참여층이 노동계급에서 화이트칼라 중산층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이게 현대축구를 둘러싼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라고 생각한다.이 중심 계급의 변동은 축구 클럽 문화의 변화를 가져오고 축구 시청층과 여성축구팬의 증가라는 새로운 변화를 일궈낸다.그리고 이는 과거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담보하던 축구클럽의 변화까지 유도할 수 밖에 없다.즉 세계적인 축구클럽으로의 도약이 불가피하며 지역 정체성보다는 국제적 비즈니스로의 축구가 등장한다.결국 참여적 축구팬문화는 상대적으로 약화되며 소비자로써의 축구팬이 부각된다. 축구 자체의 변화가 물론 축구 팬층의 계급적 변화 일부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환원주의의 우려가 있으나 결과적으로 미디어의 발전과 팬층의 변화에 그 원인의 출발점을 찾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축구 내부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포메이션과 스타플레이어가 있다. 초기 축구는 개인기 위주의 플레이였다.테일러이즘이 사회에 지배적 관점이 되면선 WM 형의 축구가 선보인다.이탈리아의 빗장수비같은 경우는 체계적 분업의 대표적 모습이다.하지만 네덜란드의 토털사커가 등장하며 다기능전문화 축구가 지배적인 분위기로 변해간다.하지만 이 역시 축구의 세계화와 더불어 순환구조를 갖는다.앞으로 어떠한 포메이션이 등장할지는 미지수다.축구장의 꽃 스타플레이어 역시 보스먼 평결이후 세계적 물류 흐름 처럼 여기저기를 오고 간다. 아프리카는 한동안 유럽축구 시장의 식민지시장 역할을 해왔었다.그러한 흐름은 이제 아시아로 까지 번지고 있는데 이는 곧 자국 리그의 위축을 의미한다.월드컵 스타들의 해외진출을 막연히 국위선양이라고 홍보하는 언론이 늘 외면하고 있는 점이다.

결국 이점은 팬문화 형성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축구 팬문화에 있어서도 저자는 여러 연구를 이용하여 훌리건,카니벌등의 팬문화를 설명한다.우리의 붉은 악마는 애써 끼워맞추려면 카니벌적인 팬문화에 가까울 듯 하다.한가지 다른점이 있다면 이러한 팬문화가 유럽에서는 클럽 위주의 팬문화인 반면 우리에겐 그러한 팬문화가 전무하다는 점이다.생각을 멀리까지 뻗어 본다면 결국 우리의 축구 팬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인가 '국가대표 축구'를 쫗아하는 것인가 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내 나름대로의 답은 단연코 후자이다.우리에겐 유럽과 같은 축구 팬문화가 전무하다.경기장에도 사람이 없는 와중에 무슨 팬문화가 있겠는가. 축구는 강한 라이벌성을 바탕으로 하고 잇다.대개 지역적 라이벌 관계이다.하지만 국내 축구에는 그러한 라이벌 관계가 희박하다.그렇다보니 국가적 라이벌 구도가 비정상적으로 확장된다.한일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결과적으로 붉은 악마들은 축구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국가와 연결된 축구의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다.만약 축구를 좋아한다면 월드컵 기간중 한국경기를 제외한 타 경기장이 그렇게 비어있을 수는 없었다.

축구를 싫어 한다는 사람들의 비판의 목소리도 사실 그 지점에 가장 닿아있는데 축구와 연결된 국가주의가 싫다는 것이다. 대개의 스포츠가 근대국가 건설에서 국민통합의 기능을 했다. 이 책에도 인용된 에코의 말처럼 "축구가 열리는 날에 혁명이 가능한가 ?" 하는 말은 축구가 가진 정치적 모습-즉 정치권력에 이용되는 순응주의-을 보여준다.그런데 이런 식의 사회적 접근에만 촛점을 맞추면 스포츠가 가진 하나의 자율세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된다.전통적으로 축구 비판자들은 부르주와와 엘리트층이었다.(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특히 엘리트층의 경우 축구가 가진 공격성,원시성,하층계급민들의 축제에 대한 반감을 교묘하게 위장했었다.현재는 이러한 비판이 많이들 수그러 들었지만 과연 전부 그런지는 의심이다.아직도 공부 잘하는 몇몇 사람들은 스포츠에 대해 미개한 무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특히 한국 사회에서 그러하다. 분명 세상의 한 구석을 똑똑한 머리와 근거없는 자부심으로 모르고 죽는것이다.

뱀다리 1)....  이 책의 직역투 번역(마치 대학 다닐때 교수님이 원서주면 스터디그룹끼리 나누어서 번역하고 합쳤던 듯한..물론 그정도는 아니지만)과 오자와 탈자는 비판 받아야한다.

뱀다리 2) ....축구에 관심이 없는데 축구에 대해 이해보려는 가상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분들도 가급적 피하시길 바란다.우선 영국 위주의 사례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축구와 연관된 다양한 사회학적 접근이 등장하므로 머리가 복잡해져 축구가 더 싫어질 수 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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