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시간을 역행하는 기차에 오른다.시간이 뒤로 뒤로 흐른다.때는 80년대 중반 아침등교길, 선도부들이 학교 앞에서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있다.마치 죄지은 사람들인 양 학생들은 명찰과 옷단속에 분주하다. 무언가 하나 빠진 친구들은 교문 100여미터 멀리서부터 정문을 통과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자못 진지하다. 딴에는 자신있게 교문을 통과하다 무언가 걸린 학생들은 엎드려 뻗쳐 자세로 고개를 처박고 있다.위풍당당 선도부들의 머리 위에는 교문 전체를 덮어 쓸 만한 플랫카드가 하나 걸려있다.

"  경축!!  00고등학교 00년도 졸업생 개똥이, 소똥이,말똥이,새똥이 00차 사법고시 합격 "

선생님들이 엎드려 있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너희들 자랑스런 선배들은 저렇게 잘나가는데 니들은 도대체 정신이 있냐 없냐.그 썩어빠진 정신상태로 뭘하겠다는거냐 ? 전부 일어나! 지금부터 운동장 끝까지 선착순 1명!! "

대한민국이 생겨나고 나서 아니 일제시대때부터 사법고시는 국가가 인정하는 최고의 시험이었다. 옛날에 시골에선 한 마을에서 사법고시 합격하면 군수,경찰서장 이런 사람들이 집까지 찾아와서 축하인사를 하고 갔다고 한다. 고시에 합격하면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영감'이 되었다고 한다.어린 시절 그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감은 할머니가 부르는 할아버지 호칭인데 왜 20대 젊은이를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영감이라 부를까? 

법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법은 사회적 강자들과 권력자들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경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수도 없이 있었다. 이런 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독재정권과 그의 수족 역할을 해 온 법조인들 때문이다.이 책 <헌법의 풍경>은  크게 두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번째는 뼛 속 부터 특권화된 법조인들의 모습이다.이들은 법 정신을 수호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반인들의 위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 두번째는 헌법의 조문과 헌법의 정신이 현실에서 어떻게 왜곡되며 형식적으로만 실천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김두식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특권화된 법조인들의 모습을 살핀다.그는  법전 해석의 권한을 법조인들이 독점하면서 특권이 출발한다고 말한다.즉 법조인들은 일반어와는 다른, 난해하고 현실어와 동떨어진 이상한 말들을 공부하며 자신들의 장벽을 친다는 것이다.이건 누구나 동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에게 가장 밀접한 법인 < 주택임대차 보호법>같은 것만 보더라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몇번을 읽고 읽어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어떨때는 부동산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해야 할 때도 있다. 생활과 관련된 법이 그 정도인데 다른 법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물론 법조계에서도 이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 턱도 없이 멀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법연수원생들의 오버는 가히 코미디 수준이다.고시원에서 쩔쩔매던 시절에 대한 복수인양 자신들이 얻은 특권을 마음껏 향유(?)한다. 그들의 막나가는 특권은 아무도 못 이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배울 만큼 배웠고 법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너희들보다 똑똑하니까 ... 이들이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다. 공부하시느라 연애질도 제대로 못해보시고 인간사의 갈등과 인간에 대한 이해도 공부만(?)하신 판사님들이 법(?)에 입각해서 재판을 한다.도대체 법전만 파고 다닌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 최고 권력기관인 검찰은 어떤가? 한 체제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고민은 합격하고 나서 하자고 작정한분들이.... 합격하고 나면 생각이나 해보시는지. (물론 법조계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다.특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성공보다는 양심과 소신에 따라 행동해온 지사형 법조인들께 박수를 보낸다.) 어쨋거나 20-30대에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은 역시 검사들이다.검사들 앞에가면 높은 사람들도 다들 주눅든다는데 일반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큰 소리 한번만 치고 으르렁거리면 꼬리내리며 정신 놓아버리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법조인들은 법의 객관성만을 내세워 자신들은 객관적인 법정신 아래서 일한다고 말한다.하여간 아전인수격으로사용되는 '객관성,중립성,불편부당' 이런 단어들은 사전에서 다시 용어정리 해야한다. 언론도 그렇고 법조계도 그렇고 이 용어들의 성 속으로 쏙 숨어 버리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들에게 '객관성,중립성,불편부당'을 독점할 권한을 주었는지...  요즘은 판사님들의 오버 시즌이다. 노 대통령의 형이 뇌물문제로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나보다.집행유예인지 무혐의인지 하여간 풀려났다.재판부에서 노건평씨에게 대통령의 친인척으로써 행동에 주의하길 바란다는 멋진 말을 남겼단다. 언론에서는 다들 감동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 했다.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아니 법적으로 문제가 되면 대통령이든 뭐든 법대로 하면 되고 아님 풀어주면 되는 거지 재판부가 그런 충고를 할 권한이 있는가?  재판부의 오버다. 

 김교수의 두번째 이야기는 헌법정신에 대한 부분이다.우리나라의 헌법이 명문으로 만 지켜지고 현실에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헌법의 정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관용의 정신이라고 설명한다.독실한 기독교인인 김교수는 관용의 정신이 부족한 보수적 기독교의 양심적병역거부 문제에 대해서도 헌법정신을 들이 밀며 비판한다. 표현의 자유문제나 정치적 자유문제에 있어서도 관용의 정신을 주장한다.하지만 정작 현실은 아직도 색깔론이 정치권에서 정쟁의 도구로 이용되고 주요언론들은 이를 지원해주고 있으니 전부 헌법정신에 위배된 작당들이다.그러면서도 그들의 수장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지 않으려면 국가 문을 닫아야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위대한 정신은 헌법의 정신이 아니라 반공의 정신인 듯하다. 차라지 정권을 잡으면 헌법 1장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말을 삭제하고 '대한민국은 전세계 최고의 반공국가이다 '라는 말을 넣던지.(진짜 그러기만 해봐라.웅 흥분을 가라앉히자..)

이 책에는 그 외에도 헌법에 보장된 권리들이 잘못 적용되고 있는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묵비권'  즉 '말하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도 신문에 난 주요 사건들을 예로 들며 친절하게 보여준다. 검사가 '임의조사'를 할 경우 대답하기 싫으면 "저 인제 좀 지겹거든요.갈께요.안녕히 계세요." 하고 가도 준법적이란 거다.과연 실제로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또 피의자의 인권측면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어떻게 경찰과 언론의 담합으로 무너지는지 구체적 사례들이 등장한다. 힘없는 피의자는(그 죄의 경중을 떠나) '유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고 힘있거나 좀 귀찮게 할 피의자들은 완벽하게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잘못된 사례들이 인상적이다. 물론 여기에 언론은 알권리 운운하며 맞서겠지만 굳이 헌법정신을 위배해가면서 까지 경찰서에서 고개 푹숙이고 있는 피의자들을 보여줄 필요는 또 뭐있겠는가.다 똑같은 그림이던데....

우리나라의 지난 50년은 독재와 반독재 투쟁의 시기였다.그나마 이제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다.형식적 민주화란 절차적으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민주화가 진정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현재 헌법에 보장 받고 있는 권리들이 실제적으로 지켜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가능하다.그러기 위해서는 일부 세력들에 의해 독점된 법해석이나 특정시대에 만들어진 법해석등을 과감히 재해석하고 비판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또한 악법도 법이라고 지킬 것만 강요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악법이면 고쳐서 개인의 양심과 자유가 실제적으로 보장되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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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8-15 14:32   좋아요 0 | URL
우와...이거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중입니다. 님의 멋진 리뷰를 보면서 저는 아무래도 이 책 리뷰 쓰는거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흑흑..너무 잘 쓰셨잖아요...추천 꾸욱~

바람구두 2004-08-31 17:53   좋아요 0 | URL
정말 잘 쓰셨습니다. 관점도 잘 잡고 계시고요. 사법개혁의 물꼬가 어찌되었든 트이는 모양입니다. 저도 추천해요.

마립간 2004-09-09 21:06   좋아요 0 | URL
반성하는 사유님, 첫 만남에 불쑥 질문을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개인의 양심과 자유가 실제적으로 보장되는 제도'에 해당하는 대안적 방법이 있을까요?

드팀전 2004-09-10 09:32   좋아요 0 | URL
최근에 어떤 대학법대 교수를 만나 이야길 했습니다. 그냥 반 왈...법의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운용이 결국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 하더군요.얼핏 그럴듯 해보이는데...과연 법의 운용자가 선의로만 법해석을 할 지 아닐지 누가 알겠냐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만 참았습니다.
대안적 방법이란 것이 각 항목에 대한 각론을 이야기하는것은 아닐겁니다.결국 너무도 광범위한 인식의 변화라든가 사회 여론의 변화라든가 뭐 그런 이야길 해야 될 겁니다.개인의 권리는 이미 헌법에 잘 보장되어 있읍니다.그런데도 잘 이행되지 않는 것은 헌법의 정신이 기타 영향에 의해 무시되고 곡해되어서 형식법처럼 되어 있다는 거겠죠.제 생각에 헌법 기본정신에 대한 침해나 왜곡에 대해 좀더 단호하고 선진적인 판례들이 나와야 된다고 봅니다.물론 현재 고루하신 헌재에서 기대하긴 어렵겠지만....학교내 종교의 자유 1인시위나 양심적 병역거부 재판등 이어지는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일반인들의 법감각보다 훨씬 느리신 헌재판사님들도 마지 못해 그런 주장에 법적인 힘을 실어주실 수 밖에 없겠죠.
님의 질문에 대답이 되긴 제 생각이 짧지만....위의 질문은 세가지 뉘앙스로 들립니다.하나는 "저런 식의 막연한 문제제기는 하나 마나 한 것 아닌가?" 하는 것과 두번째는 " 말은 좋은데 저게 과연 어느 세월에 가능하겠어" 하는 느낌.또 하나있다면 현재의 정치 체제하에서는 개인의 자유는 원래 구속의 속성을 갖기 때문에 완전한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 연대를 구상하는 아나키즘적 속성.
이러저러한 점에 대해서 저 역시 공감하고 마음 한 구석에도 그런 감정이 남아있습니다만...
그래도 현실적 부정에 대해 작은 지껄임들이 조금씩 모여 움직임을 만드는 거라 생각합니다.사법 개혁이 조금씩 박차를 가하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마립간 2004-09-10 12:54   좋아요 0 | URL
반성하는 사유님,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의 해결책을 여기서 모두 찾을 수 없지만 반성하는 사유님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질문의 뉴앙스 대한 이야기는 따로 글을 쓰겠습니다. 초면에 실례를 한 것 같은데, 반성하는 사유님이 충실한 글을 주시니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씀드립니다.

드팀전 2004-09-10 14:38   좋아요 0 | URL
무슨 별말씀을 ^^ 저 역시 저 분야에 전문가가 아니니까 당위론적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아쉽긴합니다. 설령 전문가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뾰족한 수를 내더라도 결국 도루묵이 되기 쉽겠지요.
어제 대학생들을 좀 만났는데....넌지시 국보법 폐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습니다.
제길 그 자식들이 뭐라냐면..." 전 그런 쪽 관심 끊은지 오랜되요" " 그거 정치하는 넘들 이야기죠" "그거 생각하느니 영어 한문장 더 외우죠." " 국보법이 뭐에요? " ....
뭐 특수한 아이들이 아니고 진짜 평범한 대학생들이었습니다.제가 분통터져 죽는 줄 알았습니다.가끔 제가 여기다 글쓰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분들과 이야기나누고 뭐 이러는게 전부 지랄병같은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위와 같은 답을 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 안하고 10명중 8명은 저런 류의 대답을 합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문제가 도대체 무슨 장판뜯는 소리인가 싶습니다.....
 
나, 황진이 - 주석판 - 역사와 소설의 포옹
김탁환 지음 / 푸른역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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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개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생각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생각해 본 때의 인식수준으로 남아있기 마련이다.황진이에 대한 나의 생각 역시 마친가지이다.고등학교 시절 그녀의 시 한수를 배웠다.그리고 참고서에 달린 그녀의 일화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벽계수,서경덕,지족선사들과 관련된 일화들이다. 여염집 여인들에 비해 사회적 교류가 잦았던 기생이란 신분이 그녀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당시 기생과 요즘 술집에 나오는 그런 여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강조하셨다.당시 기생은 지조도 있고 시와 예에도 능한 격이 있는 엔터테이너 였다는 것이다. 내가 황진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딱 그정도 수준이었고 그후 황진이에 대해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다.

이 책은 황진이에 대한 기존 시각에 더하여 변혁을 꿈꾼자라는 덧옷을 입힌다.황진이에 대한 기존 문헌의 시각을 한번 비틀어 봄으로써 새로운 황진이의 모습을 형상화 해 낸다.기존 문헌에 등장하는 황진이의 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재능있으며 어리숙한 사대부들을 비웃는 명기로서의 이미지이다.작가는 기존 문헌들이 황진이가 비웃던 사대부들의 손에 의해 씌어졌음에 그 혐의를 둔다.당대의 명망있는 선비들이라 하더라도 체제를 뒷받침하던 성리학의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음이다.이 책에서 황진이는 직접 자신에 대해 변론을 펼친다.우선 시류에 도는 일화들이 자신의 신분을 우스개꺼리로 받아들이려는 시정의 어리석은 이야기임을 말한다. 황진이는 스스로 가슴속의 한과 재능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을 찾고자 했던 것 뿐이었다.그녀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의 신분이나 학식에 연하지 않고 함께 소리를 나누고 함께 세상을 유랑한 것일 뿐이다.황진이가 서경덕을 만나 그를 스승으로 모신 것 역시 비록 세상을 구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무리속에 희망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세상은 서경덕이 뛰어난 인격으로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쳐 천하의 황진이도 감동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개탄한다.황진이는 오히려 그런한 태도는 화담의 인품과 학식은 염두에 두지 않은채 남녀간의 상열지사문제로만 시선을 맞춘 한심한 일이라 탄식한다. 이 책을 보며 나 역시 힘을 가진 자들의 시각으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그녀에 대한 내 생각이 머물러 있던 시점에서 그녀가 다시 복원되어 살아난 것이다.물론 황진이의 개인적 변론을 그대로 따른 다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녀를 둘러싼 야담과 오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가능성은 충분히 열어준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주석의 한시를 읽는 재미이다.혹자는 본문보다 많은 주석읽기가 책읽는 재미를 떨어뜨린다고도 한다.물론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본문의  문장 하나 하나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중국의 당시,송시부터 우리의 한시들까지 두루 포함되어 거기서 한문장씩 따온 것임을 생각하면 작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인용된 구절 역시 당대에 내노라하는 명시들로 구성되어있다.개인적으로 한시에 애정을 갖고 있는 나로써는 시를 읽는 재미도 솔솔했다. 딱히 주석이 너무 많아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은 그냥 본문만 읽어도 상관이 없을 듯 하다.우선 다 읽은 후 다시 책을 대략 넘기다 맘에 드는 구절이나 모르는 부문이 있었다면 그 곳만 찾아서 읽은면 된다.

여름휴가 기간 동안 강원도 산골에서 한장 씩 넘겨서 그랬는지 다른 책들보다 여유롭게 읽었다.책보는 동안 어딘선가 난 향이 풍겼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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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2005-02-08 18:11   좋아요 0 | URL
이 책을 보았을 때,저는 좀 어렵다 생각했는데 님 리뷰 읽어보니까 다시 한번 읽을 용기가 생겼습니다.; 한시도 그렇고,처음에 읽었을 때는 그저 내겐 너무 어렵다-이런 생각 뿐이었는데,다시 읽는다면 황진이에 대해서 좀 더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을까요.
 
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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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TO : 아룬다티 로이 씨께

열대야가 이어지고 있는 날입니다. 태양의 따가운 독설이 낮에도 모자라 밤까지 이어집니다.늘 차가워보이는 도시마저 살바토레 달리의 그림 마냥 축축 늘어져 혀를 쭉 빼물었습니다.손부채질을 하며 양심수로 수십년 복역한 신영복 교수의 글을  떠올려 봅니다. 잠시 옮겨보겠습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여름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때문입니다.이것은 옆사람을 단지 삼십칠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며칠간 이어진 열대야속에서 로이씨의 <9월이여,오라>를 읽었습니다. 당신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주었다는 <작은 것들의 신>은 지금 이곳에서 구하기가 어렵더군요.소설가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먼저 읽어서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만은 좋은 글은 언제나 살아나기 마련이니 조만간 당신의 소설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로이씨께서 쓴 정치평론과 각종 연설문들이 8편 들어 있더군요. 글 전체에서 반세계화 ,반미,반개발정책에 대한 당신의 쟁쟁한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당신이 직접 행동하고 있는 댐건설에 대한 당신의 우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화려한 경제 지표상의 성장이란 미명아래 사라지는 댐아래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인도가 세계에서 수력발전에 가장 의존하는 국가란 것도 당신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또 그만큼 댐건설로 삶의 모든 터전을 잃어가는 인도 하층민이 많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학교에서는 댐건설에 대한 긍적적인 것들만 배웠습니다.단 한번도 댐건설의 패해에 대해서는 언급된 적이 없었습니다. 나이들어 뉴스에서 수몰민들의 애상적인 모습이 그나마 그 분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명절 즈음해서 수몰민들이 저수지 한가운데로 배를 타고 나갑니다.그리고 수십길 물 아래 부옇게 남아 있는 마을의 모습을 찾아냅니다. '저기...저기가 우리집 장독대가 있는 곳인데...어..저기가 옛날에 우물자리....' 이렇게 말이죠. 가라앉은 추억은 단지 애상만이 아님에도 우리는 물 아래 있는 마을이란 신비함으로 그들의 삶을 접했습니다. 몇푼 안되는 보상금으로 나머지 수십년의 생활을 이어가야하는 그들의 삶은 뉴스가 끝나면 머리속에서도 지워집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스위치를 켜서 불을 밝히고 냉방을 하고 목욕을 즐길 수 있도록 누군가가 먼 곳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잇는 지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착취자이며 착취자인지도 모르고 우리 삶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나눔,나눔 많이들 입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인들의 삶의 희생속에 또는 착취구조속에 무의식적으로 영입되어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돈 벌어 내 맘대로 한다.'는 식의 사고가 얼마나 소아기적 가치관이고 유아병적인 자본주의 인식인지 다시금 생각합니다.

당신은 책의 많은 부분에서 미국 주도의 세계화와 아프칸,이라크 침공의 부당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이윤이다.'라고 당신은 세계화의 본질을 선언합니다.즉 이윤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세계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지 않는 주먹'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정부들은 '보이지 않는 주먹'은 은폐합니다.그리고 그 주먹의 부당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반시장주의자 커뮤니스트라고 비난합니다.가장 좋은 예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일 겁니다. 대한민국은 냉전시대 미소의 대리전을 치루었던 곳입니다.그리고 여전히 미군이 주둔하며 주먹을 으르렁거리고 있는 곳입니다.해방이후 60년 가까이 미국을 우리의 구세주로 여기는 사람들이 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지난번 이라크 파병 논란이 빚어졌을때 우리의 안위와 미국의 안위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는 현명한(?) 학자,정치인,언론계인사들이 수두룩했습니다.마치 미국의 에이전시같은 인상이었습니다. 미국정부는 그렇게 자신들의 제국을 확장시키기 위해 지역 엘리트들을 포섭해 놓았습니다. 미국 정부와 다국적 기업,그리고 주변국들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상호 이익을 위해 대다수의 민중들을 삶은 안중에도 없습니다.당신도 지적했듯이 한통속이 된 언론을 통해 그럴싸한 현실주의와 냉소주의,패배주의만을 살포하고 있습니다.이들 언론은 파병에 반대하거나 경제정책의 분배를 강조하거나 또 미국의 부당성에 대해 지적하면 이념공세를 하거나 현실성이 없다고 몰아부칩니다.그들은 세계화와 반미,또는 평화주의자들을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비춰지게 만듭니다. 당신도 몇번을 강조하였듯이 미국을 정점으로 다국적기업과 정부,미디어 기업이 한 덩어리라는 것을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이해하길 바랍니다.

막막한 현실에서도 당신은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유일하게 세계화 되어야 할 것은'저항의 세계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최근에 들어본 세계화 구호중 가장 멋진 것이었습니다.즉 지역적인 반세계화 저항이 국제적인 연대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세계화의 흐름에 중대변화를 가져 올 만큼 커다란 저항의 결과물을 낳지는 못했습니다.하지만 당신이 싫어하는(?) 댐이 작은 구멍 하나에서 붕괴되듯이 작은 꽃들의 저항이 뭉치다 보면 그 속도와 방향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꿈꿔봅니다. 당신이 있는 인도와 제가 있는 한국은 같은 것보다는 다른 것이 더 많은 공간일 겁니다. 하지만 소수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작은 행복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것은 거기나 여기나 마찬가지 일겁니다. 거대한 제국의 공격에 저항하는 작은 몸부림이 점점 그 물리적 공간의 거리를 좁혀 큰 힘을 얻어내길 기대해봅니다.

제가 있는 이곳은 이제 태양이 중천으로 떠올랐습니다. 인도는 이제 막 아침 햇살이 뜨겠군요. 제가 아침에 본 바로 그 태양을 로이씨가 보고 계신 겁니다.같은 곳을 바라보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햇빛이 골고루 나뉘어지길....

앞으로도 좋은글 기대합니다.

FROM  ;   동쪽 아시아 끝에 붙은 나라에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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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30 19:32   좋아요 0 | URL
아룬다티 로이, 오늘 우연히 들른 서재 세 곳에서 이 이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리뷰를 보니 책을 다 읽은 듯하네요.
너무 꼼꼼한 리뷰라...^^;;;
잘 읽었습니다.
 
옛 다리, 내 마음속의 풍경
최진연 글 사진 / 한길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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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년 전 휴가를 앞두고 중고차를 하나 샀다. 결국 차값보다 수리비가 많이 들긴 했지만 그 자동차와 함께 한 첫번째 여행은 아름다웠다. 이름하여 남도여행. 전라도 순천으로부터 해서 화순,보성,구례 등등... 그날 그날 다음 여행지를 찾아가는 즐거움에 전북 고창,변산반도까지 돌아다니고야 말았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에 갔던 기억이 새롭다.조금 철지난 휴가여서 선암사 올라가는 산길은 고즈넉했다.비에 젖은 흙을 스르륵 밟으니 물기가 마음속 까지 소르륵 스며들었다. 몇 십분 올라가서 만난 무지개. 빨강 자주 보랏빛을  뿜어내는 무지개가 아니라 사람의 발자욱 소리가 들리는 무지개였다. 이 책의 소제목을 인용하자면 '시간마저도 멈춰세운' 선암사 승선교였다. 산길에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비에 젖은 돌들을 헤치고 냇물가에 앉아서 승선교의 홍예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 처럼 시간이 가는 걸 잊을 수 있더라.바위들의 배치를 바라보고 바위 틈 사이의 이끼와 흙들을 응시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와 어울려 그 다리를 지나갔을 수많은 발소리를 들었다. 다리를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느낀 최초의 경험이었다.

이후 다리에 관한 좋은 인상은 충북 제천의 농다리로 이어졌다.진천 문백에 있는 농다리에 다녀온 것도 그러고 보니 비 온 다음날이었다. 농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교중에 하나라고 한다.내가 간 날은 그 전날 폭우로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다리 중간 중간이 물에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지네처럼 강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저편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갈 수없는 길들이 더욱 매력적이라 했던가.다리만 있었던들 다리만 잠기지 않았던들. 몇 백년전 언젠가 물건너 편으로 시집가면서 맘속의 연인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도 이 다리는 기억할 것이다.그의 아들의 아들중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피난 짐을 짊머내고 허겁지겁 이 돌다리를 건넜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농다리 앞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콸콸콸 흐르는 물길속에 농다리가 외로와 보였다.다리를 이루고 있는 돌 하나 하나가 살아 있는 살점인 양 물속에서 용트림을 하는 듯 했다. 어찌보면 용이 되고자 했던 이무기의 한이 농다리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이것이 내가 다리에 감동한 두번째 이야기이다. (진천의 문백은 농다리에 어울릴만큼 산수가 아름답고 조용했다.그래서 나이들면 은퇴하고 이리로 들어와야겠다 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행정수도가 연기쪽으로 결정되면 가까운 진천 문백도 돈 많은 이들이 가만 놔두지 않으리라. 아깝다. 내 미래의 은신처를  놓쳐버리다니...)

이 책은 저자가 발품 팔며 기록한 옛다리에 대한 기록이다. 알려진 다리들도 있지만 풀숲에 가려져 잊혀진 다리들도 또 시멘트 바닥에 묻혀버린 다리들도 있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강원도 동강 근처에 있었다는  나막다리와 섶다리들이다. 영화같은데 보면 가끔 등장하여 아스라함을 주는 나무로 만든 임시적인 다리들이다. 동강이 인기있는 강이 되면서 시멘트 다리가 놓이고 더이상 아무도 나무다리를 짓지않는다고 한다. 돈도 없고 지원도 없는데 마을주민이 한해 쓸 다리를 만들 이유가 무었이겠는가. 그곳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무도 나막다리를 짓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세상의 아름다움은 편리와 과학기술이라는 이름하에 또 하나 지구상에서 없어지는 것이다.사실 나 역시 섶다리나 나막다리를 직접 본적이 없다. 하지만 사진으로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인다.덜컹거리는 다리위를 걸으며 아래로 흐르는 물살을 보고 싶다. 아찔하겠지만 영원히 기억될 풍광일텐데.....

다리라는 건축물은 어찌보면 가장 민중적이고 서민적인 건축물이다. 지역마다 민초들의 필요에 의해서 세워졌고 그들이 그 다리를 건너며 삶을 이어갔다. 이 책에 등장하는 궁궐의 다리보다 시골 장터를 이어주던 다리가 훨씬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때문이다.거칠 거칠한 돌 속에 또 다리위를 덮은 이끼와 다져진 흙속에 그들의 발자국과 숨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궁궐의 다리를 보면 금새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반면 장삼이사들의 평범한 다리를 보면 장똘뱅이 아저씨와 빨래감을 이어진 아줌마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리위를 뒤덮은 왁자지껄한 소리도 쟁쟁하다.

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이 자주하는 말중에 파리와 프라하의 다리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 조형미와 아름다운 야경 등등. 반대로 우리 도시의 다리는 냉혹하다. 다리를 그냥 기능적으로만 이해하는 자들의 냉정함이 대도시의 삭막한 다리를 만들었다. 하도 여기 저기서 뭐라하니까 이제야 한다는게 조명가지고 어떻게 바꿔본다는게 전부다. 그나마 안하는것보다는 낫다.하지만 빈 집에 조명 비춘다고 온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의 다리에는 세상을 건너고 삶을 이어맬 온기가 있었다. 그 정다움이 그립다. 

 

p.s) 올 여름 휴가를 강원도 쪽으로 가련다. 아직까지 몇개 남아있다고 하니 나막다리를 눈 속에 담아오고 싶다.어디에 남아 있는지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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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07-20 17:10   좋아요 0 | URL
전 모릅니다. -.-
다리 이야기 하나로 나즉나즉하게 써내려 간 글, 잘 보았습니다. 한적한 산길에 앉아 소슬바람 맞으며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어요. 아, 좋아요..
 
페르디두르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1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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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한다.내 의식은 지금 그대로 인 상태에서 과거의 내가 되는거다.

때는 80년대,내 친구들은 어리숙한 중학생.선생님은 그들을 상대로 진실을 가장한 허구를 전달한다.난 그때 손을 들고 말하는거지.

"그건 상황의 한면만을  부각한 지배 이데올로그의 전형적인 왜곡방식인데요." ㅋㅋㅋ

물론 먼지나게 두드려맞겠지.그럼 의식있는 젊은이로서 폭력의 부당성에 대해 끝까지 준법투쟁을 하는거다.ㅋㅋㅋ 상상만해도 통쾌하다.

이런 상상을 해보는 건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20대 후반의 어린 선생님들의 개인적 가치관이 마치 진실인양 강요되던 교실이 억울해서이다.그때야 뭐도 잘 모르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그게 억울하다.지금 성인의 의식으로 몸만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내 논리로 선생님들의 논리를 무찌를 수 있을 텐데.^^

소설<페르디두르케>의 주인공 유조,그는 어느 날 뜬금없이 미성숙한 소년으로 둔갑한다.어떻게 그럴수 있냐구.모른다.작가가 그렇게 그냥 만들어버렸다.그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니까.... 소년이 된 유조가 처음 겪게 되는 것은 "순진"과 "타락"의 갈등이다.시폰과 미엔투스로 대변 되는 두 친구가 이 이분법적 갈등의 전사들이다.결국 폭력에 의존한 미엔투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지만 승자 미엔투스 역시 피투성이의 낯짝을 갖기는 마찬가지이다.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된 것이다.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원시적 삶에 대한 강박증을 보인다.이름하여 "머슴"에 대한 동경이다.여기까지 읽었을 때 상황이 좀 개연성이 없긴 하지만 두 관념의 갈등과 대결 양상은 흥미진진했다.

그러나...이게 왠 말인가.갑자기 <어른이며 아이인 필리도르의 서문>이라니...이건 정말 당혹 그 자체였다.드라마 보고 있는데 갑자기 M뉴스의 엄기영 앵커가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는 격이다.4장과 5장에 해당하는 <필리도르>이야기,중간에 끼어든 내용이 왠 서문이람? 어쨋거나 서문에선 갑자기 작가 곰브리치의 비평가들에 대한 불만과 예술에 대한 대중들의 편박함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다.그리고 본문에 해당하는 이야기에는 총합과 분해의 대가인 필리도르와 안티 필리도르의 피튀기는 대결이 시작된다.그로테스크한 우화인데 결국 총합과 분해의 갈등은 어처구니 없는 마무리를 빚고 "뭐든 뒤집어 보면 다 어린애랍니다."라는 말로 결론 짓는다.총합은 결국 근대적 가치의 전형 아니던가....그리고 분해와 다양성이란건 탈근대적 가치가 지향하는 바이다.너무 이분법적이라고? 맞다.내가 그런게 아니라 작가 곰브로비치가 그렇게 만들었다.그는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제시한다.하지만 그가 과연 이분법의 신봉자였을까? 그의 이분법은 위악적일 뿐이다.

 소설은 유조의 첫번째 변신과 감금을 한 장으로 하고 그 다음 유조가 탈출하여 미엔투스와의 여정이 또 한 부분으로 나뉘는 듯 하다.물론 내 개인적인 구분일 뿐이다.첫장의 마지막은 현대적 여고생으로 대표되는 므워드지아코프 일가의 근엄함,세련됨,현대적 감성에 대한 처절한 조롱과 복수로 일관된다.유조는 관음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지탱하지만 결국 현대성에 대한 위악적인 보복을 가한다.그 보복의 방법은 삼각관계의 더러운 욕망을 폭로하는 방식이다.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 욕망이 타인에게 폭로될 때 이는 붕괴로 이어진다.마치 더운 여름날 땅바닥에 떨어져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처럼.....

작가는 이 책에서 수시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일상적으로 쓰이는 단어들을 들먹인다.자신의 욕망이나 자아라는 것 역시 타아를 매개로 한 것임을 주장한다.또 우리의 삶이 내적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것을 부정하고 형식의 승리를 주장한다.또 총합에 대한 부정,완성된 의식에 대한 부정,미성숙에 대한 동경등이 수시로 등장한다.툭하면 등장하는 궁뎅이,낯짝,장딴지등은 관념성 속에서 무지되어 온 에로스와 육체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라고 볼 수 있다.대체 하늘에 궁뎅이가 걸려 있다는 상상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책의 후반에 해당하는 미엔투스와의 동행은 유조의 이모 집에서 시작된다.미엔투스가 그리도 찾던 머슴이 등장하는 것이다.미엔투스와 머슴의 형...제되기는 결국 기존 체제에 대한 붕괴를 보여준다.하지만 이것을 계급투쟁의 상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80년대 같으면 이를 계급투쟁의 한 상징적인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이는 좀 더 광범위한 가치의 붕괴와 생성으로 바라봄이 옳을 듯 싶다.미엔투스와 머슴의 관계는 동성애적 성향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정상과 비정상의 구분,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성숙과 미성숙의 구분....작가는 이 모든 이분법적 구분에 위악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독설을 퍼붓는다. 소설은 주인공 유조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사랑의 도피로 미성숙에서 발을 빼고자한다.하지만 독자들은 작가가 결코 미성숙과 불완전성의 미덕을 포기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작가는 늘 "인간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미성숙"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성숙된 문화,성숙된 인간,성숙된....무었을 존재의 끝으로 짐작해왔다.가벼운 예로 책을 보는 행위에도 성숙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라는 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다분히 완성이란 덕목을 위한목적론적이다. 곰브로비치는 미성숙과 불완전함이 성숙과 완성의 폐쇄와 답답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미덕으로 본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 꼬인 세상 역시 지나치게 많은 성숙한 무었때문에 이렇게 막혀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추신) 그나저나....이 책을 보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다음 보는 책은 좀 쉽게 읽을 수 있는 녀석으로 골라야지....휘휘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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