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컴퓨터상....

알라딘 메인페이지는 화면 전체에 100%차는데 왜 내 서재로 로그인 하면 서재 90%정도 나오고 그  오른쪽은 흰색으로 짤릴까요?

그냥 보통때처럼 글을 썼는데 어떨때는 옆으로 퍼져서 밑에 바를 드랙해야지 전체글을 다 볼 수 있을까요?퍼오기 원문이 넓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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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7 2006-06-18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그런데요. 왜그럴까요? 다른 포털사이트에서 펌한건 가끔 그렇게 되긴하던데 정말 궁금하네요. 다른분은 안그러실까요?

mannerist 2006-06-18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둘 다 1024 * 786에 최적화되있긴 한데, 알라딘 메인페이지는 가운데 정렬이고 알라딘 마을은 왼쪽 정렬이네요.

2. 대게 에디터 상에서 600 dot정도는 강제 정렬 되도록 테그를 짠 모양인데, 가끔 퍼올 때 원래 사진이나 단락 크기대로 출력되도록 포함된 테그가 있을 경우엔 그렇게 보이더군요. =)

가을산 2006-06-1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님 말씀을 다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특히 2번) 음.... 그렇구나~~~ ^^

2006-06-21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28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한겨레는 흥미있는 기사가 많다.스파이더맨 골세레머니한 에콰도르 선수는 사고로 죽은 후배선수를 기념하기 위해한거란다.죽은 후배축구선수가 생전에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쓰고 골세레모니를 했다고 한다.그 경기를 봤는데..첨에는 튀려고 많은 걸 준비했네 하면서 그 준비성에 웃음을 보냈지만...그게 아니었다.

내일 새벽에는 프랑스와 축구 경기를 한다.이기면 좋겠다만...새벽에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프랑스와 관련된 기사하나.....지난번 생애첫취업법 반대 투쟁이나..이거나..

노쇠해도 역시 전통이 있긴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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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이민자 자녀 숨겨줍시다” 프랑스 새 시민운동 번진다
벌금·징역 각오 운동 벌여
한겨레 유강문 기자
프랑스에서 강제로 추방당할 처지에 놓인 불법이민자들의 자녀를 숨겨주는 운동이 새로운 시민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프랑스 학부모와 교사, 성직자들이 주도하는 이 운동은 2차대전 당시 나치의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을 숨겨주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이 15일 보도했다.

아제르바이잔 출신 불법이민자를 부모로 둔 알렉(10)은 요즘 10여명의 프랑스인 ‘양부모’와 함께 살아간다. 지난 4월 경찰이 들이닥쳐 추방령을 내리자 단속을 피해 부모 곁을 떠났다. 프랑스인 양부모들은 차례로 돌아가며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한다. 동생 다비드(7)도 다른 프랑스인 양부모들 집에서 숨어 살고 있다. 불법이민자 지원단체인 ‘국경없는 교육연대’는 이렇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리용에만 60여명에 이른다고 말한다.

프랑스인들의 불법이민자 자녀 숨겨주기 운동은 지난해 11월 파리 소요사태 이후 우파정부가 불법이민자 강제추방에 나서면서 불붙었다. 니콜라스 사르코지 내무장관이 올해 2만5천명의 불법이민자들을 추방하겠다고 공언하고 단속을 강화하자, 일부 학부모와 교사들이 반발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불법이민자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까지 제공하며 불법이민자 청소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 운동에는 우파정부를 지지하는 이들도 참여하고 있다. 브레스트에서 러시아연방 다게스탄 공화국 출신 불법이민자의 자녀를 돌보는 양부모 모임에는 프랑스군 장교 부인도 포함돼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들은 적발될 경우, 3만유로의 벌금과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

프랑스는 2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내놓으라는 나치의 강압에 시달렸던 기억을 안고 있다. 일부 프랑스인들은 유대인 아이들을 숨겨주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한 프랑스인 양부모는 “21세기 프랑스에서 그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리라곤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며 “나는 ‘시민’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엔 현재 20만~40만명의 불법이민자가 존재한다. 이 가운데 7만여명이 공식적으로 추방령을 받은 상태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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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일...

출근길에 10년 넘은 자동차 수리를 맡겼더니 엔진오일 통에 금이갔다고 한다.현재 수리중.비용 ㅠㅠ

회사 왔는데 사람들이 별로 없다.직능단체 쪽 연합체육대회가 있다고 다들 그거 준비하고 나갔다.

나는 그쪽 직능 단체 소속이 아니라서 갈 이유가 없다.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는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곧 리뷰쓰겠지만 별 다섯이다.)를 조금 보다가...책에 나오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전문을 읽어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인터넷에서 <조선혁명선언> 전문을 찾아서 읽었다.인터넷 조금 보다가 신문을 읽었다

.이헌재 론스타 뇌물 수수 조사,북한 미사일 발사 가능 미,일 긴장.... 그리고 이 기사도 읽었다.

노가다도 파업한다.할만하면 해야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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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너무 힘들어” 1000명 목숨같은 일당 포기
“평당 1천만원 시대에 수입 10년전보다 되레 줄어”
한겨레 박영률 기자
사상초유 ‘노가다 파업’ 보름째 계속

건설노동자 문강호(45·대구시 달서구 감삼동·사진)씨는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산하 대구경북지역건설노조 조합원 1천여명과 함께 지난 1일부터 보름째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른바 ‘노가다’(토목건축분야 건설일용노동자)들이 목숨같은 일당을 포기하고 사상초유의 대규모 파업에 나선 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다. 경력 28년의 베테랑 형틀목수(집이나 아파트를 지을때 콘크리트를 부을 거푸집을 만드는 일)인 문씨가 받는 하루 일당은 9만~10만원. 동절기나 비올 때 등 일거리가 없는 날을 빼면 한달 평균 120만~150만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쓰메끼리’(유보임금) 관행 때문에 1~2달씩 월급을 미뤄 주고 부도가 나던지 십장이 돈을 들고 튀면 받을 길이 막막해 진다. 다단계 하청도 판을 쳐 몇단계를 거치다 보면 일당이 몇만원씩 더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전국에서 한해 800명이 공사현장에서 죽어가고 2만명이 재해로 다치는 상황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산재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공상처리되면 다행이다. 일부 업체에서는 산재책임을 시공참여계약서를 통해 인력 동원하는 십장에게 돌린다.

중3, 중1 두 아이는 커가는데 줄곧 월세집 신세다. 안주값을 아끼려 슈퍼에서 산 900원짜리 깡소주로 동료들과 힘든 노동의 피로를 씻지만 외환위기 당시 진 빚은 아직도 700만원이 남았다. 그는 “평당 1천만원이 넘는 아파트 분양금은 누가 챙기는지 한여름 지옥같은 작업장에서 검은 작업복이 저녁이면 소금땀에 하얗게 변하도록 일을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답답해 했다.

건설노조는 물가와 다른 직종의 임금은 뛰는데 ‘건설노동자’임금은 10년 전보다 오히려 내려가는 추세라고 밝혔다. 특히 대구경북지역에선 외환위기 이후 지역 건설업체가 줄도산하고 들어온 외지 건설업체들이 외지인력들을 데려오면서 인력공급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게다가 기업체에서 정리해고된 인력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넘쳐나면서 임금까지 떨어지자 더이상 참지못한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현재 사상초유의 ‘건설 노가다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800~1000여명, 갈수록 참여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노조쪽은 밝혔다. 이로 인해 대구지역 아파트와 주상복합건물 공사장등 38곳의 작업이 중단됐다. 이들은 △적정임금보장 △유보임금(쓰메끼리) 근절 △불법 다단계 하도급 근절 △4대 사회보험 적용 △산업안전보건법 준수 등을 내걸었다. 협상파트너인 전문건설업체 쪽은 “불법파업을 풀어야 협상에 임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다 파업이 장기화되자 최근에야 교섭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문씨는 “파업이 시작되자 당국은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부쳤고 언론은 외면했다”며 “하지만 파업 동안 나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배웠고 이제 아무런 성과도 없이 파업을 끝낼 순 없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대구/글·사진 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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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6-1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닌데....중복되는 것도 있지만...님은 소설은 잘 안보시잖아요.아닌가? 님이 훨씬 어려운 책을 봅니다....전 이것 저것 다중성격을 살린 책읽기.ㅎㅎ

드팀전 2006-06-18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치긴 했는데 얼핏 보니 비슷하지 않나요 ㅎㅎ
 

월드컵 열기 중에 많은 것들이 묻혀 들어 갑니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미 FTA문제입니다.월드컵 16강을 가건 못가건 월드컵은 순간의 흥분인데 비해 FTA의 결과는 향후 10년 아니 20년 이상 한국 사회의 지형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월드컵에 대한 관심의 10분의 1만 국민들의 관심이 모여진다면 앞으로의 전개도 달라질텐데...가장 나쁜 건 역시 언론입니다.9시 뉴스의 40분 중 어떨때는 20분이 축구이야기입니다.축구를 좋아하는 저이지만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프로축구 구장은 늘 텅텅비어 있으면서...이러니 월드컵의 과잉열기를 한국의 민족중심주의니 국가주의니 하는 비판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한미FTA처럼 국가적 관심은 아니지만 월드컵의 광풍에 묻혀 가는 사건이 시각장애인 안마독점권 위헌 결정입니다.지난 25일이었던 걸로 기억나네요.헌법재판소가  안마사 자격을 시각장애인들이 독점하고 있는 것은 국민의 직업선택 자유에 위배된다면서 위헌결정을 내렸습니다.3년전에도 똑같은 소송이 있었는데 그때는 5:4로 합헌 결정이 내렸지요.3년 사이에 헌재의 결정이 뒤바뀐 것입니다.

객관과 합리를 주장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시각장애인만 특정 직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그들이 이해가지만 법적으로는 옳지않은 것 아니냐?  이런 접근이 아마 법을 글로만 이해하는 분들이 가장 쉽게 저지르는 합리적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법리 논쟁은 잘 모르겠지만 결국 이 문제 역시 '자유권'과 '사회적 평등권' 사이의 시각차이겠지요.

법적으로 공평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런 판단을 하기 전에 반드시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한번 쯤은 생각해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시각 장애인들은 많은 분들이 중도장애자입니다.다른 말로 하면 어느 정도 시력을 갖추다가 점점 시력을 잃게 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물론 거기에도 고도약시가 있고 아예 아무것도 안보이는 전맹이 있습니다.하지만  차이는 중요치 않습니다.설령 조금 보인다해도 장애판정을 받은 시각장애인들은 거의 형태만 알아 볼 뿐 입니다.그러니 사회에 나와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겠지요.그래서 그들은 대개 안마직에 종사합니다.눈이 안보여도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안마 밖에 없습니다.그 외 소수 대학 졸업자들이 복지사로 일합니다.

가장 형편이 풍족하지 못한 시각장애인들은  안마 이외에는 아무런 소득원이 없습니다.그들은 대게 기초생활대상자가 되어 살아갑니다.한달에 60-70만원을 가지고 한 가족이 살아갑니다.시각 장애인 가장은 어떻게 든 살아보기 위해 안마를 배우고 일자리를 찾습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시각장애인 부인은 아이들과 임대아파트에 삽니다.그녀 역시 기초생활대상자입니다.생계를 위해 점자를 배우고-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점자 해독률은 2%가 조금 넘습니다- 안마 교육을 받습니다.하지만 헌재의 위헌 결정은 이들이 살아보려는 작은 희망마저 움츠러들게 만듭니다.

장애인 복지의 가장 기본은 그들에게 온정을 배푸는게 아니라 그들이 일반인들 처럼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학교 보내는 것입니다.그런데 그런 기회를 더 제공해야하는 대한민국은 오히려 그들의 일자리를 나누자고 합니다.그게 평등이고 공평이라고 합니다.10개를 가진 사람이 오직 단 1개의 생존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것까지 가져 와서 11개를 놓고 우리 공평하게 출발하자고 합니다.이런 평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평등입니까? 

내일은 명동성당에서 천여명 모이는 시각장애인집회가 있습니다.전국에 있는 맹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대거 상경집회를 합니다....좀 열받아서 하는 말인데...마음 속의 행복을 찾으라는 말들... 이 분들 앞에서  당당하게 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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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아무도 <미디어 오늘>에 대해 말씀 하지 않아서...생각난김에 쓴다.미디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고착화시키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한다.교육만큼이나 국가(정부)가 생각하는 것을 주입시키는게 미디어다.몇 년 전부터 미디어에 대한 비판 프로그램이 생겼다.나름대로 훌륭한 시도들이 많았다.그러한 미디어 비판에 가장 앞장 섰던 것이 <미디어오늘>이다.원래는 언론노조의 노보에서 시작해서 어느덧 11년을 맞았다.예전에 공부할 때 정기구독했었는데......요즘은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다. www.mediatoday.co.kr

즐겨찾기에 추가하셔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신문이다.....

아빠, 또 오월이에요
[전라도닷컴] 시민군 김영철의 딸 김은형
2006년 05월 18일 (목) 12:05:20 전라도닷컴 남인희 기자

'전라도닷컴'(www.jeonlado.com)의 양해를 얻어 기사를 전재합니다. / 편집자

그 해 오월 그의 어머니는 임신 7개월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폭도'라는 이름으로 옥중에 갇혀 있었다.

   
  ▲ 시민군 고 김영철의 딸 은형씨. 김영철은 80년 5.18민중항쟁 기간에 투사회보를 만들고 도청항쟁지도부 기획실장 일을 맡아 했다. 5월27일 새벽 도청 사수 중 계엄군에 체포된 그는 잔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정신이상에 시달리다 지난 1998년 숨을 거뒀다. ⓒ전라도닷컴 김태성 기자  
 
김은형. 80년 7월3일 광주 생. 예정일을 훨씬 넘겨 태어난 아이는 2kg에도 한참 못 미쳤다. 인큐베이터에 넣어야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간첩으로 몰려 수감돼 있었고, 이제 아이가 셋인데 집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가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독한 마음으로 금방이라도 목숨이 꺼질 것 같은 아이를 안고 퇴원했다.

아이는 살아났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처음 본 것은 이듬해 겨울이었다. 20년형을 선고받았던 그의 아버지는 1981년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돼 집 앞에 던져졌다.

아빠는 잔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

시민군 김영철.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를 중심으로 지역주민운동을 펼치고 한편으론 들불야학 강학으로 뛰어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순수한 열정을 쏟아내던 청년. 그는 5·18민중항쟁 기간에는 투사회보를 제작하고 도청항쟁지도부 기획실장 일을 맡아 했다. 그리고 5월27일 새벽, 도청을 사수하다가 계엄군에 체포되었다. 계엄군들은 그의 등에 '선동, 총기소지자'라고 매직으로 썼다.

1980년 10월25일 살벌한 공포 분위기 속에 진행된 보통군법회의에서 김대중씨를 사형 구형한 군검사들은 자기네들 각본대로 재판을 진행시켰다. 관선변호사들은 변호를 한답시고 "잘못했제" "다음부터는 안 하겠제"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그를 폭도, 빨갱이로 매도했다. 간첩이라는 누명이 억울하고 의동생 박용준, 윤상원 동지 등이 죽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김영철은 상무대 영창 안에서 수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이때의 부상과 잔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그는 석방된 후에도 머리가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정신을 놓을 때가 많았다. 잠을 자지 않고 사방에 머리를 찧고 엉엉 울었다, 비오는 날이면 옷을 죄다 벗고 골목으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대낮에 골목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느님, 용서해 주세요"라고 울부짖는 일이 많았다.

   
  ▲ ⓒ전라도닷컴 김태성 기자  
 
동지는 가고 없는데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그의 정신에 그처럼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신병원 입퇴원을 거듭했다. 그것이 석방된 김영철의 삶이었다.

"아이들이 '너희 아빠 미쳤지' 하는 말이 어린 맘에 상처가 됐어요. 우리 아빠가 다른 아빠와 다르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어요."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하는 아빠는 정신이 들 때나, 나갔을 때나 누구에게도 단 한번도 성을 내는 일이 없었다. 은형인 친구들이랑 노는 것보다 집에서 아빠랑 노는 게 재미있었다. 어리지만 아빠를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불렀어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과수원길' '청실홍실'… 아빠가 그런 노래를 부르면 은형인 율동을 했다. 은형은 아빠가 좋았다. 그리고 아빠가 불쌍했다. "아빤 왼쪽 팔, 왼쪽 다리가 저려 많이 고통스러워 했어요."

결혼기념일마다 아내에게 500원짜리 맛동산 선물

과일과 채소장사로 아이 셋을 키우며 '간첩'으로 소문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해야 했던 김순자씨. 젖먹이딸 은형을 업고 교도소로 면회를 다니던 김순자씨는 몸도 활발치 못하고 정신까지 온전치 못하게 된 남편을 보고 처음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펑펑 울기만 했다. 나중엔 면회실 앞에서 울부짖고 나뒹굴었다. "내 남편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저렇게 만들어놓고 내보내 주지도 않느냐"고.

"울 엄마 옛날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나요. 그렇게 순하고 그렇게 여린 사람이 저렇게 억척스런 사람이 됐어요." 정신을 놓고 사는 남편에 어린 삼남매를 키우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던 여자가 얼마나 간난신고의 삶을 살았을 것인지 은형씨는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한다.

그런 엄마에게 아빠는 1년에 꼭 한 번은 작은 위안을 주곤 했다. "결혼기념일을 한 해도 잊지 않으셨어요. 결혼기념일이면 항상 엄마 가게 금고에서 돈 500원을 꺼내와요. 그리고 맛동산 하나를 사 두었다가 엄마한테 주는 거예요." 누가 아빠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게 전두환이었다. 그래서 어린 은형이 최초로 미워하게 된 사람이 전두환이었다

은형인 아빠한테 떼쓰듯 물어보곤 했다. "아빠를 그렇게 만든 전두환이가 밉지 않아?" 하고. 아빠는 언제나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은형아, 그러면 안돼. 전두환이라 하지 말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해라. 아빠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하나도 안 밉다." 그런 아빠였다. 아빠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남들이 모두 정신이상자라고 하는 아빠가 하는 말은 정신이 온전하다는 사람들의 말보다 더 선량했고 더 진실했다.

"온 우주를 사랑하라"던 아빠의 말이 귀에 박혀 지금도 그녀는 '코스모스(우주)'라는 말을 제일 좋아한다. "은형아 하느님이 지으신 만물을 사랑해야 한다. 제 속에 탐욕이나 불의를 갖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겐 미움 대신 연민을 가져야 한다."

5·18시민군이었던 아빠가 국립 나주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사이, 은형도 면회하러 가는 엄마 손을 잡고, 혹은 약 타러 가는 아빠 손을 잡고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상원이 삼촌, 관현이 삼촌한테서 받은 위안 

   
  ▲ ⓒ전라도닷컴 김태성 기자  
 
아빠의 병세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은형은 자주 병실에 갔다. 정신병원에서도 병실에서도 아빠는 늘상 엄마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나 집에 가고 싶어요, 나 안 아파요, 나 안파요, 여보!" 엄마가 자리를 비우면 은형에게도 애원을 했다. "은형아, 아빠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엄마한테 니가 말해서 아빠 집에 데려가자고 해!"

그런 아빠에게 가슴에 못 박히는 말을 하고도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딱 한번이었지만 주워 담지 못해서 지금에도 회한으로 남는 말을 하고 말았다. "아빠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죽어버려." 그때 아빠는 웃었다. "허허허! 은영이는 아빠가 죽었으면 좋겄냐." 문을 닫고 나와서 보니  아빠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맘에 없는 소리였다고, 그 말 한 것 용서해 달라고 말하지 못했는데 아빠가 돌아가셔 버렸다. 1998년이었다.

사람들은 아빠가 전두환 사면 뉴스를 보던 도중 빵을 먹다 기도가 막혔다고 했다. 은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양원이 아니라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병원에만 계셨어도 아빠는 살아 계셨을 거라고 아쉬워하고 또 아쉬워하며 산다. 삶이 허망하고 외롭고 힘든 날 은형이에게 위안을 주는 곳은 망월동 구묘역이었다.

"은형아, 상원이 삼촌 용준이 삼촌 관현이 삼촌 안 죽었다 안 죽었다." 귀에 박히도록 들은 이름들이어서 진짜 삼촌 같았다. 엄마도 그 이름들을, 함께 어울렸던 그 날들을 늘 그리워했다. 

"들불야학 강학들과 아파트 청년, 야학생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면서 '선구자'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같은 노래를 자주 불렀지. 상원이 삼촌은 구성진 판소리와 봉산탈춤을 잘해 인기가 대단했고, 노란 삼베 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닌 관현(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삼촌은 각설이타령을, 용준이 삼촌은 가곡을 정말 잘 불렀어. 나는 청실홍실이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는데 상원이 삼촌이 참 좋아했어."

한번 본 적 없이 땅 속에 묻힌 삼촌들이 은형을 위로했다. "우리 아빠를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은 삼촌들 곁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어요. 상원이 삼촌한테는 편지를 써서 갖다 놓기도 했어요."

몸에 갇힌 희로애락 춤으로 풀어내

다른 아이들은 대개 엄마가 따라 오는 견학에 은형은 아빠 손을 잡고 갔다. 엄마는 장사를 해야 했으니까. 

"아빠랑 같이 소풍간다고 좋아라고 갔는데 버스를 잘못 탔었나 봐요. 거기 도착했더니 아무도 없었어요. 근데 그 날 둘만의 소풍이 잊혀지지 않아요. 날씨가 참 좋았어요. 아빠가 노래 부르고 손뼉치고 나는 율동을 했어요."

아빠 앞에서 율동을 하던 어린 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것이 무용이었다. 하지만 먹고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지금은 그 꿈이 이뤄졌다. 늦깎이 무용 공부를 지지해 주는 남편도, 춤을 출 수 있도록 오래 이끌어 준 장경숙 선생님도, 이상준 선생님도 꿈을 따라 가라고 은형을 격려해 주는 이들이다.

춤을 춘다. 엄마의 등에 업혀 교도소에 면회 갔을 때 아빠는 어린 은형을 보았을 것이다. 엄마 혼자 낳은 막내가 아빠한테는 참 짠하고 이쁜 아이였을 것이다. 아빠랑 소풍갔던 너럭바위를 생각한다. "은형아 '국립나주정신병원'(아빠는 꼭 그렇게 말했다)에 약 타러 가자!" 아빠가 말하면 좋아라고 따라 나서곤 했던 어린 날의 나들이를 생각한다.

한을 풀기 위해서 추는 춤 아니다. "내 몸이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 너무 오랫동안 세상의 눈치를 보느라 표현하지 못하는 희로애락을 몸으로 풀어내는 것이 좋다." 중국어를 전공한 은형은 지난해 광주여대 무용과에 편입했다. 박선옥 교수의 지도로 <오월아리랑> 공연에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영상자료물을 모으면서 사진을 고르는데 아빠가 재판 받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아, 우리 아빠다!" 그의 말에 모두 놀랐다.

그때까지 그녀가 시민군 김영철의 딸이란 것을 주변에선 몰랐다. 이 공연에서 그는 희뿌옇게 동터오는 새벽을 응시하는 시민군 중의 한 명이었다. 쇠사슬에 묶여 구르는 장면에서 그때 아빠는 어땠을까 생각했다. 오월의 넋을 씻겨 천도하는 씻김굿 장면에선 아빠의 영정을 들고 붉은 천을 자르는 길을 따랐다. 영정 속의 아빠는 은형의 속엣말을 들었을 것이다.

"아빠가 있어 행복했어요. 아빠도 그곳에선 삼촌들이랑 행복하세요."

※증언자료 <광주여 말하라>(증언자 : 김영철, 조사 정리 : 신봉화)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전라도닷컴 / 남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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