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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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편혜영의 단편은 '첫 번째 기념일'을 옛날에 읽었는데, 이 단편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택배원 얘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읽고 그냥 잊어버린 이름이었는데, 대학교에 입학한 뒤에 (다시)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통조림공장'을 읽었다. 줄거리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느낌은 정말 선명하다. 역겨움, 징그러움, 더러움. 읽고 나서 속이 굉장히 안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느덧 5년이 지나, 나는 그녀의 단편집 <아오이가든>을 집어들었다.

 

최근에 편혜영의 장편 <선의 법칙>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제목이 주는 끌림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읽으려면 먼저 이 작가가 어떤 글을 썼는지 봐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도서관에 들렀다. 초기작을 빌리려고 했는데, 장편은 다 빌려가고 없는 상태여서 이 책을 빌려서 읽었다. 편혜영의 작품세계에 대한 소문은 예전부터 많이 들어서, 벌써 5년이나 지났는데 나도 어느 정도 비위가 강해졌겠지...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징그럽고, 속이 안 좋았다.

 

괴기 소설,이라는 명칭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류의 소설군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한국문학에서 그런 괴기함을 다룬 소설을 찾기는 어렵다. 리얼리즘의 전통이 강한 탓인지, 환상성을 전면에 내세운 소설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편혜영의 소설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설의 제목이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 랜드'였는데, '시체'와 '괴담'이야말로 아홉 편의 단편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다.

 

표제작 '아오이가든'을 읽으면서 자꾸 메르스가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일까? 역병이 돌아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아오이가든의 모습이 메르스 사태가 터졌을 때 우리의 모습과 자꾸 겹쳐진다. 다만 그것이 더 징그럽고 역겨운 이미지로 형상화될 뿐... 9편의 단편에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작가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한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는 듯이.

 

예전에 정용준의 <가나>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불구성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 불구성은 편혜영의 <아오이가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불구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기이하면서 역겹고, 공포스러운 세계와 인물들이 등장한다. 정용준의 소설이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불구자들을 다루었다면, 편혜영은 처음부터 불구성을 내포한 세계를 독자 앞에 들이민다. 그리고 독자는 읽는 내내 불편하고, 메스꺼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괴이한(더 심한 수식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세계가 현실에 대한 비유라면, 그렇게 징그럽고 역겹기까지 한 이미지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단면이라면, 우리는 현실의 역겨운 냄새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이 소설들에 나오는 인물들과 별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닐까.

 

읽으면서 '이게 뭐야?' 싶은 단편들도 여럿 있었고, 너무 더럽고 불쾌해서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적도 있었는데, 다 읽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한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아오이가든'과 '만국 박람회', '문득,'이 인상적이었고 '저수지'랑 '서쪽 숲'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읽어볼 것 같지는 않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비위가 굉장히 약하단 걸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에. 하지만 편혜영이 누구도 개척하지 않은 영역에 깃발을 꽂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선의 법칙>은 지금까지의 편혜영 작품과 많이 다르다는 얘기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가계는 여덟 달 만에 망했다. 단지 옆 가게라는 것 때문에 내개 몇 권의 책을 집어갈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 책은 가게 안에서 쓰레기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라는 제목의 추리 소설을 골랐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삼류 주간지의 헤드라인 같은 제목이었다. 가장 추리 소설다운 제목이기도 했다. 아무리 제목이 거창하더라도 결국 추리 소설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누가` 멋진 그녀를 혹은 돈 많은 그를 죽였나가 그것이었다. `왜`가 없는 세상, 그게 바로 추리 소설의 세상이었다.
- `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

만국 박람회는 나에게 있어서 첫번째 박람회였다. 개막일에 맞춰 물속에 잠긴 집으로 돌아가게 되건 말건 나는 박람회 개막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똑똑히 봐둘 작정이었다. 큰 칼로 명치를 잘라 뜸을 들이다 개의 숨을 끊는 삼촌에게 미래는 연필심처럼 가느다란 칼로 단번에 개를 죽일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이른바 세기의 마술사에게 미래란 검은 천이 없어도 자유자재로 속임수를 쓸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미래란...... 짐작할 수 없는, 내가 알 바 아닌 시간이었다.
- `만국 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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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미래 Kong's Garden K-픽션 6
황정은 지음, 전승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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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한국문학을 조금이나마 읽어온 바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한국문학은 역사적으로 장편보다 단편이 훨씬, 정말 훨씬 우세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대소설의 효시라고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이 장편소설이었지만, 이후에 발표된 작품들을 생각하면 역시 단편이다. 100년에 가까운 근현대 문학사에서 황석영은 101편을 집어냈지만, 이 목록에는 '이건 왜 빠졌지?'하는 의문이 남는 단편도 몇 편 있다. 그런데 만약 장편이라면? 카프처럼 사상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고르라고 해도, 50편도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근대문학의 태동기에 소설이라는 것이 신문지상에 게재되는 형식으로 발표되고, 출판사가 존립하기 어려운 시대에, 언제고 붙잡혀 갈 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편을 발표한다는 건 모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견이다. 오류를 범한 것일지도) 그렇게 불운하게 가꾸어진 문단 시스템이 답습되어 오늘날 단편은 넘쳐나고 장편을 보기 힘든 풍경이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성급한 일반화일까?

 

갑자기 지루한 역사 얘기를 한 건, 이 'K-픽션' 시리즈가 단편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들어서다. 번역의 부담이라는 문제도 있겠으나, 장편으로 하더라도, 세계에 당당히 소개할 수 있을 만한 보편성을 갖춘 장편소설이 많이 있을까...하는 회의가 들어서다. 단편은 삶의 한 단면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장편은 삶의 총체적인 양상을 다룬다는 일반론적인 정의를 생각했을 때, 한국의 장편소설 중에 정말 그런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장편은 많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게 많지 않다고 대답하면, 한국문학을 무시하는 발언이 될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노블리스트는, 있을까.

 

 

 

 

 

 

 

장편소설에 대한 고민은 잠시 접고, K-픽션 6번째 책인 황정은의 '양의 미래'를 이야기하려 한다. 영어 제목은 'Kong's Garden'인데, 왜 제목이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아예 감도 안 잡힌다. 하지만 디자인은 정말 마음에 쏙 들었는데, 책이 진짜 예쁘고 깔끔하게 나왔다. 예전에 양장본이 한창 유행할 때, 굳이 양장으로 안 해도 될 법한 분량의 책도 양장으로 만들어서 짜증나는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시리즈의 책은 정말 심플하게 나왔다.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을 만큼 아담한 사이즈기도 하고. 다만 아쉬운 건 사진처럼 한글 한 쪽, 영어 한 쪽으로 편집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래 한글본 영어본 다 나온 건 저렇게 되어 있나? 차라리 한글만 쭉 하고 뒤에 영어를 쭉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이 작품은 조금 있다가 읽어야지, 하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충동적으로 구매를 해버렸다... 그리고 오자마자 읽어버렸다... 이 단편에서 황정은은 정말 말도 안되게 쿨한, 아니 쿨하다 못해 차가운 문장을 구사하며 이 세상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걸 드러내는 듯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여자이지만, 대학생이 아닌 고졸 출신이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20대를 다룰 때에는 마치 20대라는 단어에 함의된 의미 자질인 양 대학생 혹은 대졸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데, 황정은은 20대 중에서도 소수인, 해설을 빌리자면 '프레카리아트'를 화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 사람들, 심지어 같은 나이의 청년들마저도 그들에게 편견의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재는 포기했던 학위를 받으려고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적어도 학사인 나라에서 학사도 받지 못한 남자는 곤란하다, 라는 것을 절감했다, 라고 호재는 말했는데 어떤 상황에서 그런 것을 절감했는지는 끝까지 말하려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나는 다만 그렇게 생각했고 호재 때문에 조금 마음이 아팠다.  (24쪽)

 

그렇다고 학위를 받은 자는 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가. 그것은 현실에서도, 이 소설 안에서도 아니다. 더욱이 화자의 눈에 비친 그들은, 같은 운명에 속해 있는지도 모르지만 결국 자신과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에 불과하다. 그들은 '아무것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므로.

 

재오는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렸는데 명문대를 졸업한 고시생이었다. 본격적으로 국가고시를 준비하기 전에 용돈이나 벌려고 서점에 들어왔다고 그는 말했다. (...) 쾌활한 편이었는데 말하다 보면 이상한 방식으로 대화가 꼬였다. 재오는 아무것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하지 않은 걸 했다고 대답하거나 한 것을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일도 많았다. 자기가 모르는 것에 관해서도 안다고, 자기가 아는 것이 옳다고 무섭게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은 몰랐고 틀렸다는 게 증명되면 여태까지의 고집이 다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그런가 보네, 하고 말았다.   (36쪽)

 

재오의 '그런가 보네' 인식은 어쩌면 '난 곧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야'라는, 학위를 가진 자의 현실도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에게 재오는, 바쁜 시기에 통보도 없이 알바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달라고 협박하는 재오는 자신을 생각해주지 않는 타인에 불과하다.

 

소설의 가장 큰 사건인 소녀의 실종은 소설의 후반부나 되어서야 나온다. 해설에서는 이 실종 사건을 통해 '나'로 대표되는 '비인들에게 타인에 대한 윤리나 책임 등을 묻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묻고 있다고 했으나, 내 생각에는 소녀의 실종 역시 '나'에게는 별다를 게 없는 일로 비쳐진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사건 이후 온갖 질문의 대상이 된 '나'의 문장은 여전히 차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터널이라는 것이 있든 없든,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낙하하다'보다 더한, 염세적 세계관의 정점을 찍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는 없고, 지금과 다를 것 없는 삶만이 있을 뿐이라는 메시지를 이렇게 담담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전달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더 안타까운 건 너무 허무주의 아니냐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만드는, 한숨부터 나오는 뉴스가 넘치는 현실일 것이다. 문득 박솔뫼의 '우리는 매일 오후에'의 그 문장이 생각난다. '우리에게 예언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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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북플을 시작할 때, 많은 사람을 팔로우해야 여러 가지 책들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검색하면서 사람들을 찾았었다. 그때 내가 보았던 주된 기준은 마니아였는데, 그때만 해도 내가 이 분야, 이 작가의 마니아라고 선택할 수 있는 건줄 알았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내가 마니아라고 하는데 알라딘에서 '니가 마니아라는 걸 증명해봐'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근데 아직도 마니아가 되는 것의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알라딘에서 뭘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마니아 항목에 별로 관심을 안 두고 있었는데, 오늘부로 나는 (알라딘에서 인정한) 황정은의 40번째 마니아가 되었다... 뭔가 난 원래부터 마니아였는데, 알라딘에서 '아이구 그동안 열심히 썼네. 그럼 인정해줄게.'하는 느낌이어서 아무튼 좀, 그렇다.

 

 

 

 

 

 

 

 

 

 

 

 

 

아직 중학교 국어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이던 때에, 교과서에는 오정희의 단편 '소음 공해'가 수록되어 있었다. 자꾸 드르륵드르륵하는 소리에 처음에는 경비실을 통해서 항의만 하다가 슬리퍼를 사들고 올라갔더니, 위층 사람이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었다는 얘기. 소재만 놓고 보았을 때, 황정은의 '누가'는 2014년판 '소음 공해'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는 걸 우려한 것일까. 항상 보일 듯 말 듯하지만 잘 보이지 않게 이야기를 펼쳤던 황정은은 (뭔가 황정은답지 않게) 이 작품에서 '계급'이라는 단어를 등장시켰다.

 

석 달 동안 그녀의 몸엔 특별한 증상도 없이 미열이 이어졌다. 그녀는 그게 소음들 때문이라고 믿었고 공기관에 민원도 넣어 보았는데 그때뿐이었다.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때 자신이 계급적 인간이라는 것을, 자신이 속한 계급이라는 걸 알았다. 이런 거였구나. 이웃의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다는 거. 계급이란 이런 거였고 나는 이런 계급이었어. 왜냐하면......  (16쪽)

 

이웃들 간의 배려의 문제였던 소음이 '계급'이라는 말로 인해 계급의 조건, 가난으로 전환된다. 인용한 부분의 뒤에 나오는 독백은 작가의 개입이 조금 지나친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웃 공동체 안에서의 배려라는 화제로 벗어나는 것을 막고 계급에 초점을 두기 위한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황정은은 단순히 '소음=가난의 증거=계급의 조건'에서 작품을 끝맺지 않고 더 나아간다. 자신이 들어온 방에 원래 살던 노인 이야기, 한밤중에 듣게 되는 쿵쾅대는 소리들.. 결국 소음을 참지 못한 화자 '그녀'는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천장을 향해 내던진다. 이런 행위로 인해, 그녀는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었다.

 

그녀는 열쇠 구멍 쪽에 바짝 귀를 대고 누구시냐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아래층이야 씨발 년아.  (28쪽)

 

황정은은 라디오 책다방에서 화자가 남자였어도 '씨발 년아'라고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더 모욕적이고 공격적인 욕설이므로... 같은 주택에 사는(많은 분들이 배경이 아파트라고 생각하시는데 사실 배경은 주택이다라고 황정은은 말했다.) 그들은 계급이라는 조건에서 서로 다를 바가 없음에도 '누가' '지랄'을 하는지 찾아 서로를 공격하고 공격받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것이다. 황정은은 이 단편을 통해 가난이라는 조건을 공유하는 공동체 사이에 연대는커녕 소통도 불가능하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더욱이 소설에서 그녀의 직업은 금융권의 상담원으로, 고객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직업이다. 사실 그녀가 상대하는 고객과 그녀의 조건은 다를 것이 없는데도, 그녀는 그들을 '공격'하고 '공격'할 수밖에 없는 조건 안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주택 사람들과 완전히 같다고 볼 수는 없는데, 이유는 천장으로 물건을 던지는 그녀의 외침에 있다.

 

나는 그 노인보다 낫지만 지금의 나하고 그 노인 사이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언제고 나는 그 노인이 있었던 곳에 스무스하게 당도할 것이다. 그 거리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돈뿐인데 나는 돈이 없지. 이상하게 지금 돈이 없고 어쩌면 영원히 없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방법이 없는 거야. 나는 미래에 아주 매끄럽게 그 노인처럼...... 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 예감이고 그런 예지다. 그 와중에 니들 같은 인간들한테 시달리면서...... 니들 같은 이웃한테 시달리면서...... 그냥 죽 사는 거야. 니들은 다를 줄 알지? 다른 줄 알고 다를 것 같지? 그런데 니들하고 나하고는 다른 게 없지. 완전 같지. 서로가 서로에게 고객이면서, 시달리면서, 100퍼센트의 고객으로는 평생 살아 보지도 못하고 어? 나는 이게 다 무서워서 불쾌한데 니들은 이게 장난이고 나만 미쳤고 내가 우습지?  (27쪽)

 

그녀는 자신이 처해 있는 조건이 자신이 속한 계급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옥죄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과 불쾌함이 있다. 하지만 열심히 소음을 일으키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인식조차 없다. 그저 시끄럽다고 항의하면 '죄송합니다아아아아'하면서 무시하고, '꿍, 꿍, 꿍' 소리를 내며 '무라무라무라'하고 떠들 뿐이다. 이사를 하면서 자신이 노인을 몰아내는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이 속한 계급에 무서움과 불쾌함을 느낀다는 점에서 그녀는 분명 다른 사람과 다르지만, 그런 인식이 대안을 마련해주지는 못한다. 가난이라는 계급적 조건의 힘 때문이다. 결국 그녀도 '씨발 년'이 되지 않았던가.

 

소리에 대한 얘기를 빠뜨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른 황정은의 작품들에서 보여주듯, '누가'에도 너무 낯설어서 당혹스럽지만, 어느 순간 수긍하게 되는 의성어들이 등장한다.(어떻게 그렇게 표현할 생각을 해요?라는 질문에 황정은은 저는 그렇게 들려요... 라고 했다.) 떠드는 소리를 '무라무라무라'하고 표현한 것도 그렇고 다음 장면도 그렇다.

 

핸드폰 매장은 처음부터 최저가 판매, 사거리 어느 집보다 싼 집, 어떻게 하면 안으로 들어와 보실래요? 등등의 문구를 유리에 덕지덕지 바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공기를 넣어 부풀리는 풍선 간판을 세우고 LED 조명등을 설치하고 바깥을 향해 스피커 두 개를 설치해 음악을 틀어 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즈음 실업 급여를 받으며 집에 머물고 있었고 그 음악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쿵 칙 쿵 칙 쿵 직 쿵 직 붕 지 붕 지, 하는 소리들. 소음들. 음악 말고 소음들.  (15쪽)

 

어떻게 들어야 소리가 붕 지 붕 지 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한 건, 점점 수긍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고... 그리고 다음에 실제로 그 소리를 들을 때는 정말 그렇게도 들린다. 매장의 풍선 인형들은 정말 붕 지 붕 지 하고 펄럭일 것 같고, 시계바늘은 정말 책 책 책 하는 소리를 내는 것 같은('야행'), 그 이상함이란...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소음이라는 소재를 계급이라는 문제로 잘 풀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작가의 개입이 좀 티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예전에 '옹기전'을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황정은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의 독백은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뭔가 인물이 말하듯 매끄럽지 않고 딱딱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는데, '누가'에도 그런 부분이 있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그리고 이 작품은 들여쓰기를 안 했다. <계속해보겠습니다>도 들여쓰기가 안 되어 있는데, 황정은은 라디오 책다방에서 글이 아니라 말하는 것처럼 쓰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차이는 잘 모르겠다.

 

한동안 황정은의 작품을 읽을 일은, 새 책이 나오지 않는 이상 없을 것 같다. 아직 '양의 미래'와 '아무도 아닌, 명실'이 남았지만... 좀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읽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는 작품집을 다 읽고 글을 쓰려고 했지만, 황정은의 40번째 마니아가 된 기념으로...

 

덧 ) 자선작은 '낙하하다'가 실렸는데, 이 작품은 <파씨의 입문>에도 실려서 이미 읽었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단편인데, 나는 이 소설을 소설로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수필로서 좋아하는 것 같다. '낙하하다'를 생각하면 황정은이 떠오르고, 황정은의 세계관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건, '낙하하다'에 나타난 세계관이 나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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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0 0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0 0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0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0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07-10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라마다 동물 울음소리를 다르게 표현하듯이 ˝붕 지 붕 지˝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 2015-07-10 23:42   좋아요 1 | URL
제가 너무 관습에 젖어있었나요? 뭔가 보면 맞아 이 소리를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싶어서... 개인적으로 가장 아차 했던 건 초침가는 소리를 책책 이라고 했을 때인 것 같네요^^

AgalmA 2015-07-10 23:44   좋아요 1 | URL
아, 그 책책 페이지 보고 좌절! 나도 그렇게 해 보고 싶었는데ㅎㅎ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 <사랑의 역사> 소설 속 시도들도 정말 선수 뺏긴 거 같았어요ㅎㅎ
 
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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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015년 작품집을 읽고 이제 2013년까지 3년치를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14년과 15년 수상작품집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냥 그런, 딱히 시선을 확 끄는 단편이 보이지 않는 책이었다. 하지만 13년 작품집을 보고 나서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김종옥이라는 새로운 작가의 발견일 것이다.

 

김종옥의 '거리의 마술사'는 왕따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마술이라는 소재와 함께 굉장히 잘 엮어낸 수작이다. 남우라는 아이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이 단편은, 희수의 입을 통해 남우가 어떤 아이였는지를 조금씩 보여준다. 남우는 교실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가 전혀 없는 무색무취의 존재다. 작가가 다른 사람의 말에는 큰따옴표를 붙여주었으면서 남우의 말에만 붙이지 않은 것은, 남우의 말은 이 세계에 속할 곳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남우의 마술은, 나를 봐라, 나 여기에 있다라는, 그런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 세계에 대고 말하고 싶었던 남우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떤 마법 같은 일은 분명히 그 순간에 일어났다고 그녀는 믿었다. 그것을 세상이 일순간 아주 평화로워진 것 같은 마법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남우를 내려다보는 학생들 모두가 일순간 그 세계 속에 포함되게 하는, 마치 그들 모두가 하나의 눈을 가진 하나의 영혼이 되게 하는 마법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본 모든 것이,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햇다. 그것은 분명히 남우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 모두가 남우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세상 전부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 순간 붙잡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10쪽)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장면은 두 개였다. 하나는 마지막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남우의 마술이다. 남우가 태영이에게 보여준 그 마술. 그 마술은 성공적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피가 흐르는 장면을 보았고, 태영이는 마술에 속아서 (그 순간에는) 죽었다. 하지만 이후 남우는 공중부양 마술에 실패해 죽는다. 태영이 어머니와 같은 어른은 이를 자살이라고 생각하지만, 희수의 말처럼, 남우는 다시 한 번 마술을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술은 실패하지 않았다. 남우는 희수 앞에 거리의 마술사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의 재현은 교실로 대표되는 현실의 문제가 우리와 마주하게 한다. 남우가 홀로 오롯이 짊어지고 있던 그 문제를.

 

소설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도 역시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안나라는 아이의 존재다. 안나는 남우의 옆에 앉음으로서 교실에 남우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부각하는, 아이들이 남우의 존재를 인지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하지만 안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나, 하는 의문이 든다. 태영이가 남우의 뒤통수를 친 것도 안나가 남우의 존재를 인지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태영이가 남우를 때린 이유를 '그냥'이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과연 안나가 꼭 필요한 인물이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 번째로 아쉬웠던 건 바로 이 장면이다.

"그래요, 저는 이 일을 겪으면서 오히려 선(善)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악을 통해서 선을 보는 거죠. 어디선가 악은 악을 바라보는 그 눈 속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건 그 반대의 경우죠. 선은 악을 바라보는 눈이 없으면 볼 수 없어요. 악을 통하지 않으면 볼 수 없어요. 모든 게 그 눈 속에 있죠. 하지만 그 눈은 언제나 속고 말아요. 진실을 보지 못하죠. 마치 마술을 보는 것처럼. (30쪽)

이게 고등학생(단편에는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분명히 명시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무래도 고등학생 같다)의 입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 말인지 나는 계속 의구심이 들었다. 고등학생의 수준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유가 태영이 어머니 앞에서 이야기하는 상황과 희수라는 아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난 아닌 거 같다. 그런 점에서 저 장면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장면이라는 판단이 든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 마술의 상징성이라든가, 남우의 행동, 거리의 마술사... 이런 장치들을 보면서 굉장히 감탄했고, 다른 소설도 찾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정말 멋있고, 아름다웠다.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 등장하는 하루오는, 내가 한때 동경해 마지 않던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인물이어서 눈길이 갔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하루오는 입사지원자 하라 쿄스케가 되었고, 이것을 보면서 여행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어느 순간 종결될 것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니 쓸쓸해졌다. 결국 어느 순간에 이르면, 여행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황정은의 '上行'에 대해서 몇 마디 더 하자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와 오제의 관계는 '상류엔 맹금류'에 등장하는 '나'와 제희의 관계와 많이 닮았다. '상류엔 맹금류'에서 '나'가 제희의 가족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는 것처럼(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의 경계에 있다), '上行'의 오제 역시 현실의 벽 때문에 '나'와 아주머니가 발견하는 일상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의 월식은, 정말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오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는 점에서 보아, '나'를 '별세계에서 왔냐'며 힐난하는 오제에게는 월식 역시 그저 자연현상일 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월식을 보려하나 잠들었던 '나'를 깨우는 오제의 목소리라고 보아 오제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해석이다. 문단을 나누었다는 점을 보았을 때, '나'는 이번에는 월식을 보려 하였으나 다시 잠든 것으로 보이고, 오제가 월식을 볼 수 있도록 깨워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해석이 더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러면 뭔가 황정은스럽지 않은 것 같다.

 

정용준의 '당신의 피'는 투석이 갖는 모순을 상징으로 굉장히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나는 이 작품을 보기 전까지 투석이 영양분을 빼앗는다는 사실을 몰랐다.(내가 투석을 아는 것도 미드 하우스를 보기 때문이지만, 거기에 그런 설명까진 안 나오므로..) 살기 위해선 투석을 해야 하지만, 투석을 하면 피 속의 영양분까지 빼앗기므로 죽음에 다가간다.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한다. 하지만 먹는 순간, 투석하지 못하는 신장으로 인해 다시 죽음에 다가가게 된다는 모순... 이를 통해 보여주는 부자(父子)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나는 청결해졌다, 고 선언할 수 있는 투석이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정짓고 싶지는 않다. 내 마음 한 구석엔 인간이 언젠가는 투석을 통해 온전한 실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남아 있으므로..)

 

박솔뫼의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이번 작품집을 통틀어 나에게 가장 어려운 작품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 의미를 찾는 게 어렵다. 그의 문체는 굉장히 신선하면서 불편하다. 불편한 건 그의 문체 때문일까, 아니면 미래가 없는, 반복되는 현재를 살아갈 뿐인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까.

대부분은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었는데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어제의 일 엊그제의 일, 최근이라면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에 관해서는, 글쎄.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고 궁금해지지 않는다. 남자는 작아졌고 이제 우리는 예전과 같이 질문을 하자. 우리에게 예언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60쪽)

어제는 남자가 몸이 작아졌고 고리원전에서는 사고가 일어났고 사람들은 부산을 제2의 도시라고 하는데 원전은 부산에도 있어 해운대와 아주 가깝게(그것은 마치...... 마치...... 신세계백화점처럼!!). 일 년 전에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고 이 일은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제를 포함하고 그것을 말해준 남자의 몸이 작아진 것은 우연한 일이었고 그 밖에 많은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지만 그 많은 것들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던지면 우연을 남용하지 말라고 대답하는 것은 우연 그 자신이었다. (273~274쪽) 

남자가 여기가 제일 따뜻하다면서 여자의 질 속에 몸을 넣고 잠을 자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읽으면서 나의 시선을 끌었던 건, 분명 일본에는 대지진과 원전 사고가 일어나고, 고리원전 사고가 일어나고, 남자가 다람쥐처럼 작아졌는데도, 이들은 전혀 놀라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런 사실들이 산책을 하면서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지? 어제는 그런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는 '아주 쓸모없는 이야기'에 불과한 세계가 소설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세계, 예언이 없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과거에 대한 인식도, 미래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고 현재에 대한 인식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현실에 대한 깊은 허무주의가 보인다. 이런 굉장히 독특하면서 불편한 자신의 문장을, 작가는 어디까지 끌고 갔을까.

 

읽으면서 나는 황정은의 '上行'을 제치고 김종옥의 '거리의 마술사'가 대상을 받은 이유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황정은의 팬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작이라니,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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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08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마술사> 희수 대사에 대해서 저도 동감...작가 개입이 바로 드러나 보였죠.

박솔뫼 작가의 문체는 제게도 좀....말하는 것들의 불편이 아닌 문장 자체가. (뭐, 제가 남의 문장 어쩌고 할 주제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어렵다 말하는 한유주, 배수아 작가의 문체는 제게 읽는 데 불편이 없어요...한유주 작가 생각하면 세대 차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무 2015-07-08 07:51   좋아요 0 | URL
배수아 작가는 예전에 `시취`를 읽었었는데, 그때는 문체가 불편하다고 느끼진 않았어요. 근데 박솔뫼 작가의 문체는 좀... 중간중간에 끝난 듯 끝나지 않는 문장들이 튀어나와서 뭘까 이건 했었죠..

보물선 2015-07-08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년꺼 떨어진다는 말씀에 공감.

아무 2015-07-08 19:12   좋아요 0 | URL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없네요ㅠ
 

 

 

 

 

 

 

 

 

 

 

 

 

 

애초에 이 책을 빌린 건 황정은의 '上行'을 읽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上行'을 먼저 읽었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황정은의 작품에는 항상 뭐랄까,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이 있는 것 같다. '上行'도 작품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한 편의 풍속화로, 거기까지만 이해하려고 한다. 더욱이 작가후기에는 이런 말까지 썼으므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소설 속 서술자는 작가가 아니라고 배웠고, 대학교에서도 같은 걸 배웠다. 하지만 나는 황정은의 작품에서 ''라는 말이 나오면 항상 황정은을 대입하게 된다. 뭔가, 내가 본 황정은은 (그래봤자 직접 본 건 두 번이 전부지만)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그런 사람일 것 같다. 말하는 것도, 바라보는 것도 ''라는 인물답지 않고 뭔가 황정은스럽다. 이렇게 말하면 황정은은 기분 나빠할까.

 

황정은의 작품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황정은의 문장이 갖고 있는 독특한 리듬에 대해 말한다. 황정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황정은 특유의 의성어들, 그리고 건조한 듯하면서 또렷한 문장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어떤 리듬을 말하는 걸까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上行'을 읽으면서 아, 이런 걸 말하는 거였구나..하고 깨달았다.(그래서 내가 시를 잘 못 읽나...) 그러면서 자기만의 문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벌써 자신의 이름이 걸린 문장이 회자된다는 것은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팟캐스트에서 황정은의 작품에 대해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황정은풍의 문장, 황정은틱한 문장이라는 말을 한다. 문학평론가 송종원 씨는 라디오 책다방에서 황정은 작가 이후 신춘문예 작품 중에 황정은풍의 문장을 쓰는 사람이 늘었다는 말을 했다.)

 

들어와.

깜짝 놀랄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밥 먹어.

밥 있어.

- 141

 

동네가 아주 조용하다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여태 그랬지만 최근엔 여름이 되면 도시에서 피서객들이 몰려온다고 말했다. 걔네들이 와서 돈 좀 쓰고 가겠네요, 라고 말하자 걔네들이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 라고 아주머니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 145

 

이 집 팔아서 뭘 한대요.

오제의 어머니가 물었다.

글쎄 뭘 한다나 사업을 한다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지랄하고.

노부인이 말했다.

늦게 팔려라.

오제의 어머니가 말했다.

늦게 팔려라.

노부인이 말했다.

- 157

 

그럼에도 역시 의문이 남는 것들이 있다. 오제가 어렸을 때 벽으로 손을 뻗어 손을 통과시켜 알람시계를 끈 장면도 그렇거니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월식은 정말이지 미스테리다. 라디오 책다방 종방에서도 '上行'의 월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본 청중 분이 있었는데, 그때도 황정은은 굉장히 모호한 답변을 했다(아니, 그렇게 대답한 것으로 기억한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아마 그땐 이 작품을 읽지 않아서겠지.) 송종원 씨도 황정은 작가가 자기 작품에 대해 이정도 대답한 거면 진짜 많이 대답한 거라고 했었는데, 많이 대답했다고 하기에는 정말 수수께끼같은 대답이었다. 마무리를 짓는 마지막에, 갑자기 월식 얘기를 집어넣은 건 도대체 왜일까.

 

이제 황정은의 작품은 '양의 미래''아무도 아닌, 명실'만 남았는데, 도무지 구할 방법이 없다. 도서관에는 그 단편들이 수록된 책만 쏙 빠져있으므로... 사면 되겠지만, 사는 건 황정은의 단편집으로 오롯이 나왔을 때로 미루고 싶은데...

 

) 사진 방향이 이상해서 컴퓨터로 수정했는데, 했더니 북플에 글이 안 보이는 오류가 나서 다시 올린다. 이게 뭐람.... 저자를 추가해서 그런가.. 추가하는 거 빼니까 멀쩡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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