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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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하우스>의 주인공 하우스, 그리고 퀸시 사이의 공통분모는 바로 '마약'이다. 고등학교 화학 교사였던 월터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가족들에게 돈을 남겨주고 떠나기 위해 자신의 옛 제자 제시와 함께 마약 제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마약을 제조하는 일 자체에 중독되어 버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합리화 기제로 전락했고, 그는 마약 제조만이 자신의 실존을 확인시켜 주는 듯 마약 요리(cooking)에 집착했다.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이하 <고백>)을 읽으면서 월터를 떠올린 이유는, 마약 제조에 자부심을 넘어 장인 정신까지 느끼는 월터의 모습이 퀸시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Breaking Bad Season3 ep4. 'Green Light')

 

 

<고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고하는 제1부과 아편을 복용하게 된 시기를 다룬 제2부, 그리고 부록으로 되어 있다. 1장은 아편 복용 이야기를 하기 전 자신이 아편을 복용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한 장인데, 이 부분은 사실 잘 읽히지가 않았다. 퀸시의 어린 시절은 흥미로웠지만... 이 책의 본격적인 정수는 2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04년 치통을 이겨내기 위해 처음으로 아편을 복용한 퀸시는 아편이 주는 놀라운 쾌감에 반하여 아편쟁이가 되었는데, 여기서 퀸시는 아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아편의 쾌락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그 중에서 내 이목을 끌었던 부분은 음악에 대한 부분이었다.

 

아편은 정신 활동을 크게 증가시키기 때문에, 당연히 음악과 관련된 그 특별한 형태의 정신 활동-우리는 이 활동을 통해 기본적인 소리를 원료로 하여 정교한 지적 쾌락을 만들어낼 수 있다-도 대체로 등장시킨다. (...)

정교한 화음의 코러스가 아름다운 무늬를 넣은 벽걸이처럼 내 모든 과거를 내 앞에 펼쳐놓았다고 말하면 충분하다. 지나온 내 인생은 기억의 작용으로 상기된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떠오른 것처럼 내 앞에 펼쳐졌다. 과거를 곰곰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괴롭지 않았지만, 지난 사건들의 세부는 지워졌거나 몽롱한 추상으로 융합되었고, 과거의 열정은 고양되고 정화되고 승화되었다. 5실링만 내면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98p)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발휘했던 퀸시에게 아편은 자신의 지성을 더욱 자극시키고 그의 열정을 북돋아준 기폭제로 작용한 듯하다. 저 부분을 보면서 어린 시절 한 번뿐인 삶에서 한 번쯤은 마약의 느낌을 경험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일이 다시 떠올랐지만, 이미 <브레이킹 배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기에 나는 얼른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고백>이 당시의 아편 중독을 부추겼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 아닐런지. <고백>을 읽고 감명받았다는 보들레르도 아편을 탐닉하는 퀸시의 모습에서 강렬하게 살았던 인생의 아름다움을 본 것이리라. 이런 그의 아편 예찬은 뒤로 갈수록 더욱 강렬하다.

 

오, 공정하고, 교묘하고, 강력한 아편이여!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마음에도, 결코 치유되지 않을 상처에도, "정신을 반역으로 유도하는 고통"에도 위안을 가져다주는 아편이여. 강렬한 설득력을 가진 아편이여! 뛰어난 수사법으로 분노에 찬 결심을 슬며시 훔치는 아편이여. (105p)

 

찬사는 뒤 페이지까지 이어지지만 생략하기로 하고, 2부의 '아편의 쾌락'이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1813년 그를 덮친 위장염으로 인해 그는 아편 중독에 빠진다. 1804년부터 1812년까지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을 복용하며 그 쾌락을 즐기던 프로페셔널한 마약쟁이는, 궁핍한 어린 시절의 상흔에서 발생한 위장염의 고통으로 인해 마약 중독자가 되어버렸다. '아편의 고통'에서는 아편 중독이 그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아편 중독의 고통에 빠진 퀸시는, 이제 월터의 모습을 잃고 통증을 피하기 위해 바이코딘을 사탕처럼 먹는 괴짜의사 하우스가 되었다.(하우스를 본 사람은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으나, 고통받는 퀸시의 모습에서 나는 모든 통증을 피하기 위해 바이코딘을 복용하는 하우스가 떠오른다)

 

 

(House Season6 ep1. 'Broken')

 

 

'아편의 고통' 장에서 퀸시는 아편 중독으로 인한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자신의 정신이 어떻게 빛을 잃었는지에 초점을 둔다. 통증을 이겨내기 위해 복용하기 시작한 아편은 온갖 망상과 악몽을 낳았고, 그것은 그의 정신을 갉아먹으며 학문적 열정마저 잃게 했다. 악몽을 묘사하는 그의 묘사는 너무나도 생생해서, 지독히도 끔찍한 고통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2부의 마지막에서 그는 아편 중독을 극복한 듯 이야기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부록은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위통으로 인해 오는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음을 말해준다. 그가 쓰다가 보내지 못했다는 편지에는 그 고통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다.

 

아편의 지배 아래에서 꼬박 1년 동안 나에게 유입된 생각보다 지금 한 시간 동안 나에게 흘러들어오는 생각이 훨씬 많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아편 때문에 10년 동안 동결되었던 생각들이 옛날이야기에도 나오듯 이제 단번에 녹아버린 것 같습니다. (...) 나는 육체적 고통과 수면부족으로 지쳐 있지만, 2분도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177p)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고백>은 읽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글의 전개가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고 퀸시가 그때그때 떠올렸던 생각들이 즉흥적으로 개입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콜리지의 말을 빌리자면 '간절하면서도 지지부진하고, 너무나 정확성을 기한 나머지 혼란에 빠지고, 합리적인 동시에 미궁적'인 그의 문체는, 때때로 독자를 미궁 속에 빠져들게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미묘하게 어울리는 것은 그의 문장이 가지고 있는 어떤 힘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낭만파 문인들에게 영향을 받았을 그의 낭만주의적인 색채와(특히 워즈워스에 대한 퀸시의 찬사는 그의 시를 수없이 인용한 것에도 알 수 있다) 표현들은 아편의 환희와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아마도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 책을 남아있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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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서평은 '책의 내용에 대한 평'이라는 뜻이다. 위키백과에는 '일반적으로 간행된 책을 독자에게 소개할 목적으로 논평이나 감상 등을 쓰는 문예 평론의 한 형식'이라고 나온다. 이것만 가지고 보았을 때, 서평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소개'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평과 비평의 차이는 무엇일까. 비평을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찾으면 '문학작품을 정의하고 그 가치를 분석하며 판단하는 것'이라는 정의가 맨 처음 나오는데, 그렇다면 서평과 비평을 구분짓는 기준은 소개 외에는 없는 건가. 그리고, 서평은 어떤 글이어야 할까. 어떤 글이어야 좋은 서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평의 시대가 가고 서평의 시대가 왔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비평이 그만큼 독자들과 유리되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혔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서평은 비평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걸까. 좋은 서평이라 함은 소개하는 책을 읽어보고 싶게끔 하는 매력을 갖춘 글이어야 할 텐데, <악스트>에 실린 서평들은 그런 매력을 가지고 있나. '어려워요!'라고 말하는 독자에게 '그러면 공부를 더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서평의 일인가.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 지식이 부족한 탓인가. 서평을 쓴 평론가, 작가, 번역가들이 서평을 비평처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현재 서평을 다 읽고 천명관의 인터뷰까지 읽었는데, 잡지에 실린 열네 편의 서평 중 내 이목을 끌었던, 그래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서평은 그리 많지 않다. 서평의 내용이 어려워서 따라가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하나를 꼽자면 <구의 증명>을 다룬 송지현의 서평이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최진영이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으므로. 외국문학을 다룬 서평 중에는 정영목 번역가의 서평이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몇몇 서평들은, 서평 자체가 어렵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서평과 비평을 가르는 경계가 단순히 분량만은 아닐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지돈은 지난 번에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많이 실망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호기심의 영역 안에 있는 작가인데, 이번 서평을 보면서 작가가 지향하는 바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정지돈과 박솔뫼가 같이 서평을 쓴 걸 보니 김태용도 후장사실주의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에서 추상회화의 전통은 너무나 익숙한 형태로 관람객에게 안착했다. 추상뿐 아니라 수많은 형태로 가지를 쳐서 다양하게 변모했다. 그런데 소설은 여전히 구상의 단계를, 그것도 단순하고 선형적인 구상의 우물에 고여 있다. 어떤 소설가들이 어떤 시기 구상을 벗어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독자만 잃었다.

- 정지돈, '리뷰 급구' 중에서

 

 

정지돈과 박솔뫼의 서평을 보면 김태용의 <벌거숭이들> 역시 굉장히 난해하고 접근하기 어려울 작품일 것이 확실한데 이상하게 읽고 싶어지는 이 기분은 뭘까. 고생길이 훤할 것이 보이는데도 묘한 끌림에 한 걸음씩 나아가는 느낌이 들어 뭔가 홀린 기분이 든다.

 

천명관의 인터뷰는 흥미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작가 천명관이 어떤 사람인지 단서를 던져주는 것 같아 그랬을 것이다. 프레데리크 시프테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듯이, 철학(문학도 포함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이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저자의 생의 정황까지 드러나야 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대중의 무분별한 호기심이 아닌, 저자들의 세계를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하나의 창구가 될 것이므로.

 

자신이 문단과 문단 바깥의 경계에 있다고 말하는 천명관의 한국 문단에 대한 분석은 신랄하면서도 시원하다. 그 안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글을 쓸 따름이다. 인터뷰를 다 읽고 내가 들었던 생각은, 이 사람은 소설이라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프로'구나... 하는 것이었다.

 

문학은 종교가 아니다. 숭고한 신념이 필요한 게 아니라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말 중에 조이스 캐롤 오츠의 말이 있다. 문학에 예술만 있고 기술이 없다면 개인적인 일일 뿐이다. 반면에 기술만 있고 예술이 없다면 그것은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의 신념』에 나오는 말인데 여기서 기술(Craft)은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라 오래 축적된 장인적 기술, 즉 대장장이가 쇠와 불을 다루는 기술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문학에도 그런 기술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한국에서 문학은 종교처럼 숭고한 태도와 정신적 가치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밥벌이는 천한 일이고 예술은 숭고하다는 식의. 이런 분위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 천명관+정용준, '육체소설가의 9라운드' 중에서

 

 

어쩌면 문학을 대하는 이런 태도가 오늘날 독자들에게 천명관하면 기대하게 되는, 하나의 보증수표를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를 이을 보증수표는, 과연 나올까.

 

실려있는 서평에 대한 아쉬움과, 서평이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품으며, 이제 남아있는 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 나는 지금껏 글을 쓰면서 서평을 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조금만 다듬으면 '좋은' 서평은 아니더라도, 서평이라고 말할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마 안 될 것 같다. 서평은 보여줌과 감춤의 완급 조절이 필요한 것이지만, 나는 못 참고 내가 느낀 바와 나름의 해석을 다 풀어버릴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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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5-07-28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쓰는 것들은 그냥 `리뷰`정도일까요ㅎㅎ 저는 아무님이 쓰시는 글도 좋은 서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이고 비평이고 그냥 책많이 읽고 많이 씁시다 ㅋㅋㅋ

아무 2015-07-28 10:22   좋아요 0 | URL
정확하게 이거다! 라고 할 기준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ㅎㅎ 이러나저러나 중요한 건 lovelydew님 말대로 많이 읽고 쓰는 거겠죠? 그 와중에 더 나아진 독자가 된다면야..^^

[그장소] 2015-08-26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저는 도무지 어려워요! 리뷰도! 서평도 그 근처도 못 갈 수준이라!!^^
예전엔 독후감상문 쓰기 대회 같은 게 있어서 곧잘 했던것 같은데, 어느 정도 지나선 그 마저
파괴된 것 같아요. 일정 양식이..ㅎㅎㅎ

아무 2015-08-26 07:32   좋아요 0 | URL
어릴 때 독후감상문 쓰라고 할 땐 정말 싫어했는데, 크고 나니까 이렇게 쓰게 되네요 ㅎㅎ 저도 항상 쓰면서 어려워요ㅠㅠ 계속 쓰다보면 조금씩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하며 쓰고 있지만..^^
 
누가 - 2014년 15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문학의숲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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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유감이지만, 별 3개 중 2개는 황정은의 몫이고 나머지 하나는 윤성희의 몫이다. 심지어 윤성희의 작품은 수상작도 아닌, 기수상작가 자선작이었다... 내가 여태껏 읽은 문학상 단편집 중에 제일 많은 단편을 실었는데, 결과가 이렇다니...

 

김사과의 단편을 이번에 처음으로 읽었는데, 감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상하다. 읽는 내내 맥을 잡는 게 어려워서 힘들었다. 그래도 서사가 흐릿한 소설의 맥을 나름 잘 짚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이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날의 혼잡한 현실이 이런 식으로 구현된 걸까, 하는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박솔뫼의 '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은... 김사과의 작품보다 더 이상했다. 도대체, 왜 작가는 쉼표를 단 한 번도 안 쓴 걸까. 그의 요상한 문체가 일상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는 사실의 반영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래도 그의 문장은 여전히 나에게 낯설다. 이 두 작품을 읽으면서 예전에 이상의 '종생기'를 읽던 기억이 떠오르는 건 그 난해함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상은 '날개'에서 아스피린과 아달린의 비유를 잘 녹여냈는데, 이들의 작품에도 그런 상징이 숨어있는 걸까. 그걸 못 찾아내는 건, 나의 눈이 어두운 탓인가.

 

윤이형의 '러브 레플리카'는 소재와 이야기는 흥미로웠으나, 그것을 끝까지 끌고 가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행기 안에서의 그 일이 최경이 진짜 모습을 찾은 거라면, '나'는 왜 그 이후에 최경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최경의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인간은 삶을 살면서 보고 들었던 모든 텍스트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런 얘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최경은 자신이 보았던 텍스트들을 남의 것인지도 모르게 자기화해 버리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그렇다면 비행기 안에서의 그 사건 이후의 그녀는, 자신의 고유한 텍스트를 찾았을까.

 

조해진의 '문래'가 끌리지 않았던 건, 내가 갖고 있는 자전소설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해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은 자신의 세계,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이 빈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물론 자전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쓴 좋은 소설들이 많이 있지만, 김원일의 '어둠의 혼'이 '도요새에 관한 명상'보다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듯, 나는 '문래'에 대해서도 그런 평가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천운영은 예전에 단편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가 인상적이어서 단편집 <바늘>과 <그녀의 눈물 사용법>, 장편 <잘 가라, 서커스>도 찾아서 읽었었는데, 실망도 그만큼 커서 한동안 찾아보지 않았었다. <생강>이 이근안을 다루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찾지는 않았었고... 그녀의 작품에는 어딘가에 집착하는 인물들이 자주 나온다. '바늘'도 그랬고,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도 그랬다. '다른 얼굴'에도 정원에 집착하는 한 여자가 나오는데, 여전히 그녀의 묘사는 섬세하고 치밀하다. 하지만 지갑 절도 사건 얘기는 왜 나온 걸까, 탈일상적인 그녀의 행동의 시발점 같은 거였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를 않는다.

 

최은미의 '백 일 동안'은 이야기 자체는 흥미로웠고, 전통적인 이야기의 틀을 가지고 있어서 빠르게 읽었는데, 마지막 결말 처리에서 실망을 했다. 너무 급작스럽기도 하고,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인과응보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뻔한 의미가 되어버리니 그건 아닐 테고...

 

최제훈의 '단지 살인마'에서 나는 단지가 부사 '단지'인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단지(斷指)' 였다. 손가락을 자르는 연쇄살인이 엽기적이기도 했으나, 다 읽고 나서 어쩌면 연쇄살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편이 좀더 섬뜩하면서 의미있는 구조가 될 것 같다.

 

요즘은 모든 화제가 증폭되어 돌아다닌다. 이슈가 되는 검색어 하나를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쳐 보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비슷비슷한 기사들, 똑같은 사진들, 이를 퍼 나른 각종 웹 페이지가 끝없이 이어진다. SNS에서는 사람들의 한마디가, 그 한마디를 리트윗한 한마디가 미처 읽을 새도 없이 격류처럼 흘러간다. 정보의 망망대해로.

일말의 회의도 없이 계속되는 자기 복제. 정작 검색창에 쳐 넣은 단어는 한없이 가벼워져 휘발되는 느낌이다. 혹은 한없이 무거워져 제 무게에 압사되는 느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지우는 시스템이라...... 생각해 보면, 매우 윤리적인 소멸이다.

- 최제훈, 단지 살인마

 

윤성희의 단편은 읽을 때마다 항상 재미있다. 이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건 뭐지하며 생각할 필요 없이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도 그랬고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도 그랬고, '모서리'도 그렇다. 소설이 재미있기만 하면 다냐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녀의 작품에서는 그렇다. 익살스러움을 즐기며 읽다보면 어느샌가 '찌질이'같은 인물들에게 눈길이 가게 되므로... 그녀의 단편에서는 항상 이야기 자체에 초점이 놓여지면서 흐르고, 등장인물들은 어딘가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지만 힘든 현실을 견디고 있는 그런 사람일 것 같다. 여기에 황석영이 한국 명단편 101선에서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를 평한 내용을 잠시 인용한다. (한국 명단편 101선 10권에도 실려 있고 문학동네 네이버 까페에 가면 볼 수 있다.)

 

앞의 몇몇 작가들과 더불어 치열하고 날카로운 존재의 싸움터를 헤치고 나오려니 어느 동구 밖 나무 아래서 한가로이 쉬다 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윤성희의 단편들을 몇 편 읽고는 이내 원기를 좀 차리게 된다. 이번에는 그의 단편소설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를 읽어보자. 박민규의 파격적인 서사에 비해서 이번에는 소설의 격식을 좀더 갖추고 있으며, 재미있고 술술 잘 읽힌다는 공통점이 있다. 윤성희의 소설은 민담처럼 이야기가 그 주제이고 구성이며 형식이다. 한 페이지 속에서도 끊임없는 에피소드들이 발전하고 곁가지가 뻗어나가고 사건은 엉뚱하며 그 어떤 장면도―사실은 비약과 충격의 연속이지만―극적이지 않다. 그것은 민담에서처럼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윤성희의 이야기는 박민규의 ‘구라’와 목소리만 다를 뿐 비슷한 계통이다. 인물과 사건의 엉뚱함과 비약과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서는 인간의 생로병사는 그래서 익살스럽다. 박민규의 웃음이 블랙 유머 계통이라면 윤성희는 따뜻한 익살이다. 그의 소설들이 현대 도시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도 어느 오래된 저잣거리에서 벌어지는 옛날이야기 같은 인상이며 아련한 공동체적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주인공인 '염'의 엄마와 새아버지 이야기가 궁금하긴 하지만, 그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어서 언급 안했겠거니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불안한 20대를 지칭하는 것 같은 염과 조의 모습은 전혀 불안하지 않고 코믹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가 그냥 아르바이트 말고 부모님의 전 가게를 물려받기로 했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쓸쓸함도 그때뿐, 작가는 그것도 익살스럽게 넘겨버린다. 가끔씩 읽을 때면, 익살스럽게 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익살스럽게 쓰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왜 제목이 '모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효석문학상 작품집을 처음으로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실망을 많이 해서 올해 작품집이 나와도 내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올해 작품집에는 황정은의 작품이 기수상작가 자선작으로 실릴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말은 결국, 올해 작품집도 보게 되리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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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당일배송은 무섭다. 아침 10시에 주문한 책이 오후가 되니까 바로 도착했다. 서울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

 

 

 

목차를 보면 진짜 구미가 당기는데, 아직 천명관의 인터뷰만 잠깐 읽고 읽지를 못했다. 하지만 천명관의 인터뷰는 뭔가 촌철살인과 같은 면이 있었다. 인터뷰가 두 달 전이었으니 신경숙 사태가 벌어지기 전일 텐데... 빨리 새 장편소설이 나왔으면 좋겠다.

 

 (아무리 예쁘게 놓아보려고 해도 안 된다. 이게 최선인 듯....)

 

되게 오랜만에 연필을 잡아봤는데, 뭔가 편안하면서 잘 써지는 것 같다. 연필에도 깨알같이 도끼 문양을 박아놨다. 연필잡고 공부하는 것도 오랜만이고...

 

정기구독 신청할까,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현재 내 재정 상태로는 <악스트>를 정기구독하면 월간 <책> 정기구독을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듯하다. 둘 다 놓치기는 싫은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고민중. 하지만 이런 잡지가 나왔다는 것 자체로도 주목할 만한 일이고, 현재의 문단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악스트>를 받은 지는 일주일이 넘었다. 근데도 여태껏 읽은 게 인터뷰 하나라니, 나도 참 게을러졌다는 생각을 한다.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책을 열어보기란 정말 어렵다. 원래는 공부하면서 하루에 단편 하나씩은 읽으려고 했는데, 저녁에 읽으려고 하면 지쳐있기도 하고, 귀찮아지기도 하고 해서 자꾸 안 읽게 된다.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건 내 게으름에 대한 변명밖에는 되지 않는데도, 이것을 지키는 건 정말 어렵다. 덕분에 읽어야 할 책만 계속 쌓여간다... 

 

 

 

 

 

 

 

 

 

 

 

 

 

 

 

 

이효석문학상 작품집은 아직 단편 네 편이 남았는데, 아직까지 '누가'를 빼고는 와닿는 작품이 없다. 특히나 김사과와 박솔뫼의 단편은... 음... 나중에 다 읽고 리뷰 쓸 때도 얘기하겠지만 정말 이상하다.

<문장강화>는 현재 3장까지 읽고나서 답보 상태다. 읽으면 읽을수록 왜 사람들이 문장 공부의 바이블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정말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담긴, 교과서 같은 책인 것 같다. 얼른 마저 봐야 할 텐데...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전집을 살 때 문학동네 1년 정기구독권에 당첨이 됐는데, 저번에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보내더니 이번에는 이 책을 보냈다. 계간지도 열심히 안 읽고 있는데... 문학동네에서 대학소설 공모를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는데, 알았어도 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앞에만 살짝 훑어봤는데, 기대라기 보다는, 뭔가 호기심이 생긴다. 위에 두 권 다 보면 이거부터 읽게 되겠지..

 

 

 

 

 

 

 

 

 

 

 

 

 

월간 <책>은 아직 6월호도 손을 못 댔는데, 7-8월 합본호가 와 버렸다. 점점 숙제가 되어가는 이상한 기분은 뭘까. 틈틈이 짬을 내서 읽어야 할 텐데 이것도 참...

 

 

 

 

 

 

 

 

 

 

 

 

 

 

 

사실 이효석문학상 작품집을 읽고 읽으려던 책은 <스토너>와 <제5도살장>이었다. 보네거트의 작품이 대부분 품절이나 절판된 상태이고, 이동진 씨도 <제5도살장>을 제일 좋아하는데 절판된 책이라 빨간책방에서 못 다루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다행히 도서관에는 책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직 못 읽은 것들이 수두룩한데 언제 찾아볼 수 있을지...

 

읽을 책을 정리해보고 나를 채찍질하려고 작성한 건데, 쓰면 쓸수록 막막하기만 하다. 어떻게 해야 시간을 잘 쪼개서 읽을 수 있을까... 공부를 하다가 고개를 들면 책들이 언제까지 안 읽고 냅둘 거냐고 질책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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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5-07-24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중도책상인가요? 책상이 깔끔하네요.

2015-07-24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붉은돼지 2015-07-24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악스트 책과 사은품 받고 페이퍼로 올리려고 이리놓고 찍고 저리놓고 찍고
이리저리 아무리 놓아봐도 왠지 구도가 안나와서
결국 페이퍼 작성 포기했던 기억이....ㅎㅎㅎㅎ

책상 위가 정갈합니다.^^

아무 2015-07-24 12:04   좋아요 0 | URL
이리저리 해봐도 다 마음에 안 들더라구요ㅠㅠ 그래서 저걸로 그냥 만족하기로.. ㅎㅎ
책상은... 저 때만 해도 깨끗했는데 지금은.. 그냥 웃지요 허허허
 
바벨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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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없는 세상의 모습은 어떨까. 언어를 말할 수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세상. 입을 열면 목숨을 잃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정용준의 <바벨>은 언어가 없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여태껏 다른 소설들이 다루었던 디스토피아의 모습과는 다르다. 아마 그의 서정적이면서 시적인 문체가 결합했기 때문이 아닐까.

 

프롤로그에 제시된 아이라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이 언어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암시를 주지만, 이 동화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바벨>의 시작은 매우 어둡고 암울하다. 아이라에서는 언어가 얼음이 되었지만, 언어를 말할 수 없는 바벨의 세계에서 언어는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펠릿으로 변한다. 처음에 펠릿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사전을 검색했을 때는 우라늄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이런 건가 했는데,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언어를 내뱉는 순간 언어는 펠릿이 되어 악취를 풍기며 인간의 주위에 고이고, 계속 말을 하는 인간은 펠릿에 둘러싸여 그 냄새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노아는, 베일에 둘러싸여 있다.

 

이야기는 정부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잡지 <횃불>의 편집장인 요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요나가 실제로 이 소설에서 취하는 액션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여러 소설과는 달리, 그는 그저 사태를 관망하거나 서술할 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소설은 인류에게 닥친 재앙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보다 재앙과 대면한 인간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초점을 둔다. (근데 오늘날 현실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자꾸 겹쳐지는 건 왜일까?) 책을 읽는 독자는 요나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노아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하며 책을 읽어 나가지만(내가 책장을 넘기게 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소설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주지 않는다.

 

소설은 요나가 정부에 의해 수배되면서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듯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요나와 마리의 언어를 둘러싼 논쟁은 흥미로웠다.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서로가 보이는 의견의 대립점이 분명함에도 편안함을 느끼면서 가까워지는 지점에 눈길이 갔다. 물론 이 둘의 관계가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특히나 두 인물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이 나누는 언어의 모습은, 해설의 한 꼭지 제목처럼 '언어를 만지는 언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나>에서 보여주었던 정용준의 문체, 너무나 아름답지만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그 문장은, <바벨>에 이르러서 그 완급이 어느 정도 조절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너무 지나친 비유다, 라는 불편함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역시 작가는 장편소설에서 빛을 발한다는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서사 역시 다음 내용을 확인하고 싶게끔 유혹하면서, 언어가 사라진 세계의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아쉬운 건 '갑툭튀'한 마리와 요나의 관계 발전의 작위성과, 요나의 동생 룸의 역할이 잘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왜 룸이 노아에게 필요한 인물이었나 하는 점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사소하지만, 노아가 펠릿 실험에 실패한 것이 어떻게 세계에 여파를 끼치고 전 인류가 말을 할 때마다 펠릿이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계속 궁금증이 남아있다. 전체적인 내용과는 별로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정용준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의 결말은 암울하기도 하고, 허무주의적이기도 하다. 요나는 결국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끝까지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시민들의 저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고 요나를 둘러싼 사건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도 못한다. 이렇게 무력한 주인공, 아니 주인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설정한 건 암울한 세계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을까.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처음으로 노아의 언어가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장이 반드시 있어야 했을까하는 의문이 많이 든다. 작가는 비극과 허무만이 존재할 뿐인 결말에서 '차가운 북풍을 뚫고 바다를 건너 기어이 고래의 배 속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을까.(고래의 배 속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요나'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에필로그로 제시된 장은, 바벨의 세계와 격리되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인물이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말은, 왜 노아가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날 잡고 소설을 종일 읽은 것도 되게 오랜만인데, 역시 소설은(특히 장편은) 하루 날을 잡고 흐름의 끊김 없이 쭉 읽어내려가서 한 호흡에 끝내야 제격인 것 같다.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고, <바벨>의 서사는 단편에서 보여주었던 위태위태함을 어느 정도 해소한 것 같아 좋다. 아무래도 언어가 물질화된다는 상상력이 나를 자극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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