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의 작품은 <광장>과 <회색인> 외에는 읽은 기억이 없다. <광장>이야 워낙 유명하고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딱히 할 얘기는 없지만, 요즘 들어 <광장>이 걸작으로 언급되는 이유는 시기를 잘 타고나서 그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전후 문학이 시대 외적인 분위기로 인해 이데올로기에 대한 접근을 제대로 못하고 있을 때, 최인훈이 밀실과 광장이라는 상징을 이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 관념소설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아마 거기에 (다른 작품에 비해) 상징이나 관념이 쉽다는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럴' 연작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제대로 이해한 걸까 하는 의심과 어떻게 느낌을 정리해서 써야 할까라는 복잡한 심경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이하 '캐럴') 연작은 총 다섯 편으로 되어 있는데, 따로따로 보아도 의미를 찾을 수 있고 한 흐름 속에서 그 의미를 추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1234 / 5 로 나눌 수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매우 어려웠다는 데 있다.

 

이 연작을 어렵게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아버지와 '나' 사이의 종잡을 수 없는 대화에 있다. 언어유희를 활용하기도 하고, 서로의 생각을 관념적으로 피력하기도 하는 이 대화는 이따금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고 갑자기 이런 얘기를 왜 하나 싶기도 하다. 아직도 이 대화가 갖는 의미를 다 이해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자신이 없어서...

 

'캐럴 1'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외박을 하려는 옥이와 이를 막으려는 아버지, 그리고 그 뜻에 동조하는 '나'(철이)의 해프닝이 주된 내용이며, '캐럴 2'는 다시 찾아온 크리스마스에 어머니와 옥이가 교회에 가려는 이야기를 다룬다. '캐럴 3'은 칫솔이 없어지고 행운의 편지가 오는, 뜻밖의 해프닝이 연출되고 있으며, '캐럴 4'는 'R-'로 유학 온 철이가(여기서는 '그'로 나온다) 한 노파를 만나면서 겪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 네 편의 연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캐럴 4'를 유심히 봐야 한다. 철이는 유럽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서양의 문화가 우월한 것이 아닌, 하나의 풍속임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매일 벤치에 성경을 품고 앉아 있는, 수호 성녀라고 불리던 할머니를 외경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귀국한 뒤 할머니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와중에 옥이가 친구들을 불러모아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질펀한 파티를 벌이는 것을 보고 토기(吐氣)를 느끼는데, 이는 서양 문화에 짓눌려 있었음을 자각한 지식인의 부끄러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R─로. 사람도 죽어서 가죽쯤은 남기는, 그 짐승다운 냄새에 절어 있는 도시의 저 우중충한 신학교 기숙사로 가서 거기 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높은 벽에 달린 동그란 층으로 비집고 들어온 여린 햇빛이 조금 묻어 있는 손잡이에 머리를 기대고 이 메스꺼움을 입 안에 토해내자. 그리고 그 토사물─나의 핵(核)을 천천히 씹어보자. 크리스마스가 페스트처럼 난만하게 번지고 있는 이 서울의 밤이 샐 때까지.

- '크리스마스 캐럴 4' (103-104쪽)

 

여기서 옥이와 그의 친구들은 서양인들에게는 하나의 풍속인 크리스마스를 '하느님을 구실로 암숫이 재미보'는 날 정도로 여기는, 자신만의 문화를 전유하지 못하는 대중으로 불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남의 잔치에 춤을 추느라 자신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캐럴' 1~3에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벌어지는 해프닝은 서양 문화의 범람 속에서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확립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한국 사회의 풍속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대화에서 서양 문화의 비정함을 비꼬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통해 부자지간에 벌어질 수 없는 해학적인 관계를 연출하며 '부자유친'으로 대표되는 유교 문화를 비꼬기도 한다.

 

"부자유친, 엄격한 옛 사람들이 하필이면 부자지간을 말하는데 유친이라 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야."

(...)

"내 생각으로서는 아마 이렇다. 부자지간은 서로 도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로서, 말하자면 도우(道友)라 할까, 그런 점으로 본 것 같단 말이야. 옛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여러 관계 가운데서 철학적인 담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를 으뜸으로 친 모양이야. 말하자면 부자지간을 길동무로 보았단 말이지."

"옳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아마 섹스의 관계를 으뜸으로 본 것이죠. 부자지간은 그런 까닭에 서로 경쟁할 처지에 있는 수컷과 수컷으로 본 것입니다. 박력 있는 견햅죠?"

- '크리스마스 캐럴 3' (64쪽)

 

"너는 뜻이 없느냐?"

"네?"

"왜 그리 경풍들린 아해처럼 놀라느냐? 경풍들린 십삼 인의 아해들처럼."

"네?"

"또. 지엽말단을 꼬집어 뜯지 말고 큰 줄기를 대답하란 말이다. 어떠냐 넌 뜻이 없니?"

"글쎄올습니다. 뜻이란 말씀의 뜻이 무슨 뜻이온지 뜻을 몰라서 어떤 뜻의 답변을 올려야 할지 뜻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뜻이라 말씀하신 뜻을 자세히 뜻풀이를 해주시는 게 미상불 뜻을 물으신 뜻에 합당할 줄 압니다."

- '크리스마스 캐럴 3' (75쪽)

 

여기서 지식인을 대표하는 철이는 뚜렷한 입장에 서 있지 못하다. 아버지가 '넌 양식의 편이냐 숙이의 편이냐'라고 물어도 '괴롭습니다'하며 대답을 회피하고('캐럴 3'), 옥이의 외박을 막으려는 아버지와 옥이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 대답하지도 않는다.('캐럴 1') 말하자면 주체를 확립하지 못한 지식인인 것이다. 이런 그의 인식은 '캐럴 5'에서 그의 겨드랑이에 파마늘이 돋아나기 시작하면서 전환되는데, 통금을 어기고 야간 산책을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겨드랑이에서 돋는 날개, 날개의 통증을 없애고자 감행하는 산책은 이상의 '날개'를 생각나게 한다. 그는 산책을 하면서 4.19 혁명이나 5.16 군사 쿠데타와 같은 역사의 현장에 직면하게 되고, 외국인을 만나기도 하면서 서울 곳곳을 누비게 되는데, 여기서는 이런 철이의 일탈과 '날개는 사람을 가렸'다는 사실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마 날개가 사람을 가렸다는 것은 날개가 적대적이지 않았던 이들을 통해 근대로 나아가는 희망을 품을 수 있으리라는 작가의 전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어느 순간 날개의 재촉이 없어도 산책을 즐기게 된 철이는 서울의 구석구석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근대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것에 대한 애정이 우선해야 한다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연작에는 분단에 대한 작가의 소신과 같이('캐럴 2') 다양한 요소가 삽입되어 있으며, 이것들이 표현되는 방식이 난해해 이해하는 데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고,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는 확언도 못하겠다. 하지만 이 안에는 여전히 근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반영되어 있으며,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우리는 여전히 남의 잔치에 춤을 추느라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8-22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2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씨의 선생님이 말합니다.

위문편지를 씁시다. 나라와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편지를 씁시다.

파씨는 안녕하세요, 저는 파씨입니다, 열살입니다, 삼학년 십이반입니다. 제일 잘하는 과목은 미술입니다, 크리스마스엔 선생님께서 아홉 가지 색깔의 연필을 주셨습니다. 파랑과 노랑이 제일 먼저 사라집니다. 흰색과 빨간색이 그다음으로 사라집니다. 파씨는 어제저녁에 추웠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추울 예정입니다. 아저씨도 춥습니까, 거긴 춥습니까, 세계는 춥습니까, 파씨는 세계라는 것은 잘 모르지만 거기가 춥고 아저씨가 너무 추워서 지금 울고 있다면 세계는 빌어먹게 나쁜 곳입니다,라고 씁니다. (...) 계속 세계의 평화를 지켜주세요,라고 제대로 된 위문편지를, 그러니까 위문慰問이라니 깜짝이지 싶지만 어쨌건, 진심을 다한 위문으로 위문편지를 쓰라고 말합니다. 파씨는 종이에 안녕하세요, 한 줄을 적고 나머지를 빈 채로 남겨둡니다. 왜냐하면 파씨는 조그맣고, 조그만 파씨의 조그만 평화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세계의 평화 같은 거대한 것은 파씨가 감히 소원해볼 수 없는바, 파씨는 편지를 빈 채로 내버려두고 부엌으로 내려가서 불을 켭니다.
- 황정은, '파씨의 입문'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 때 당신들은 젖비린내 나는 애들에 불과했다고요. 이층에 있는 저 애들처럼!"
나는 인정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는 전쟁 때 이제 막 아동기를 벗어나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이었다.
"그런데도 소설에는 그렇게 안 쓰겠죠?" 이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규탄이었다.
"모─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난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었던 것처럼 쓸 거고, 영화화 되면 프랭크 시나트라나 존 웨인처럼 매력 있고 전쟁을 좋아하고 지저분한 배우들이 당신 역을 맡겠죠. 그럼 전쟁이 아주 멋져 보일 거고, 그러면 우리는 훨씬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되겠죠. 그리고 그런 전쟁에서는 이층의 저 애들 같은 어린애들이 싸우겠죠."
(25p)

"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지구인들을 연구하지 않았다면"하며 그 트랄파마도어 인은 말했다. "나는 `자유 의지`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거요. 나는 우주의 유인 행성 서른한 곳에 가 보았고 1백 곳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했소. 자유 의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는 행성은 지구뿐이더군."
(104-105p)

이 소설에는 대단한 인물이 거의 없으며, 극적인 갈등도 거의 없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심하게 병들고 심히 무력한, 거대한 힘의 노리개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쟁의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대단한 인물이 될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191p)

파티 손님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검안과 관련이 있었는데, 트라우트만 예외였다. 또 그 혼자만 안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모두들 그 파티에 진짜 작가가 참석한 사실에 몸이 떨리도록 흥분한 것이다. 그의 책은 읽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198p)

대피소 밖은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만큼 안전해졌다. 미군들과 경비병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시커먼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태양은 성난 작은 못대가리였다. 드레스덴은 이제 달 같았다. 미네랄 덩어리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돌들은 뜨거웠다. 인근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
그렇게 가는 거지. (207-20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게임을 즐겨하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하는 게임은 베데스다에서 나오는 폴아웃 시리즈인데, 핵전쟁 이후 황무지로 변한 'The Wasteland'를 무대로 한 것이다. 그 게임의 엔딩은 항상 이렇다. 'War, war never changes.' 전쟁이라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항상 반복되어 온, 인간의 잔인함이 가진 끝을 보여주는 역사다. 드레스덴 폭격을 다룬 <제5도살장> 역시 이런 가치관을 바탕에 깔고 시작하는 듯하다.

 

한번은 영화 제작자인 해리슨 스타에게도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반전(反戰) 책이오?"

"예, 그럴 겁니다." 내가 대답했다.

"반전 책을 쓴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뭐라는지 아시오?"

"아니요. 뭐라고 하시는데요?"

"'차라리 반빙하(半氷河) 책을 쓰지 그래요?' 그럽니다."

물론, 그의 말은 전쟁은 항상 있는 거고, 빙하만큼이나 막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동감이다.

그리고 전쟁이 빙하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밀려오지 않더라도, 그 흔해빠진 죽음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13p)

 

여태껏 내가 전쟁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읽은 이후 형성되었던 것이었는데, 보네거트의 이 소설은 그런 관습적인 이미지를 걷어 차버리고 시간여행과 외계인이라는 요소를 함께 엮는다. 사건을 직접 겪은 작가에게 그 끔찍한 실상을 전달하는 방법은 이를 통해 시간을 뒤틀어 버리는 형식으로 서술하는 것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덕분에, 소설은 다른 전쟁소설과 다르게, 비선형적인 서사 속에 허무주의와 풍자, 블랙 유머를 곳곳에 숨겨 두었다.

 

드레스덴 폭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2차 대전 중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이 소설을 읽고 처음 알아 인터넷을 찾아봤을 정도니까. 어쩌면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입은 피해였다는 점이 다른 역사적 사실에 비해 부각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서사를 풀어내는 보네거트의 모습에서는 비관론과 허무주의가 보인다. 죽음이 나타날 때마다 등장하는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에서 보여주듯, 그의 서사는 냉정하다 못해 무감한 것 같다. 4차원의 세계를 보는 트랄파마도어 인을 등장시킨 것도 그런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모든 시간은 모든 시간일 뿐이오. 그것은 변하지 않지. 그것은 경고나 설명의 대상이 아니오. 시간은 그저 존재할 뿐이니까. 각각의 순간을 떼어놓고 보면, 우리는 모두, 내 이미 말했듯이, 호박 속의 벌레가 되는 거요. (104p)

 

빌리와 트랄파마도어 인, 그리고 서술자에 의해 기술되는 전쟁과 인간의 모습에는 어떤 온기도 없다. 시간여행이라는 요소가 운명론적인 시각을 더욱 부각시키며, '그렇게 가는 거지.'로 요약될 수 있는 비관론과 회의론은 빠르게 넘어가는 책장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혹자는 이런 비관적인 시각이, 인간에 대한 어떤 믿음도 없는 듯한 이 분위기가 마음에 걸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읽으면서 나타나는 우스꽝스럽지만 슬프면서 끔찍하기도 한 '슐라흐토프-퓐프'의 모습을 읽다 보면, 어느새 보네거트에게 동조하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랬다. 물론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한몫을 했겠지만.

 

"불가피한 일이었소." 럼퍼드가 빌리에게 말했다. 드레스덴 폭격을 두고 한 말이었다.

"압니다." 빌리가 말했다.

"전쟁이란 그런 거요."

"압니다. 전 불평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지상은 지옥이었겠소?"

"그랬지요." 빌리 필그림이 말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시오."

"이해합니다."

"선생은 심정이 착잡했겠소? 거기 지상에서 말이오."

"상관없었습니다." 빌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모두들 자신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나는 그것을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웠습니다."

(231-232p)

 

전쟁이 끝난 이후 사람들이 하는 가장 큰 잘못은, '너무나 큰 비극이었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일 것이다. 그 합리화의 주체가 거대할수록, 그것은 하나의 담론이 되어 수많은 죽음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형성한 담론들은, 살아남은 인간 공동체의 회피 기제일 뿐이며, 이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같은 일을 되풀이하게 할 것이다.

 

인간은 전쟁을 다시 되풀이할 것이다. 언젠가는. 이것은 얼마나 도덕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결코, 변하지 않으므로. 현재에 머물기를 지속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가는 거지,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기증.감정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마주(Hommage), 라는 단어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마주는 원래 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을 이르는 용어다.(네이버 백과사전) 명백하게 말하자면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은 오마주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테지만, 이 소설의 모습을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오마주라는 단어뿐이었다. 언어 수준의 빈약함이란...

 

소설은 분명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굉장히 집중해서 작가가 어딘가 슬쩍 집어넣었을 카프카의 그림자를 찾고 그것을 추적해야 작품의 묘미를 알 수 있다. 작품 곳곳에는 카프카의 단편 '사냥꾼 그라쿠스'의 변주가 숨겨져 있는데, 세 번째 장인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에 줄거리가 나와 있지만(일곱 쪽밖에 되지 않는 짧은 단편이므로 거의 모든 내용을 다루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편을 먼저 읽고 보는 것이 작품을 읽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실제로 책을 읽다가 도중에 '사냥꾼 그라쿠스'를 읽은 뒤, 다시 앞부분을 읽으면서 아, 하고 깨달았던 순간이 있었으므로.

 

리바의 부둣가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두 소년이 벌써 나와 앉아서 주사위놀이를 하고 있었다. 벨은 마담 게라르디에게 육중한 낡은 배 한 척을 가리켜 보였다. 돛대는 위에서 삼분의 일 정도 지점에서 부서졌으며 누렇게 변색된 돛은 다 찢어져 너덜거렸다. 그 배는 아마도 방금 부두에 도착한 듯이 보였는데, 은색 단추가 달린 검은 옷차림의 두 남자가 들것 하나를 배에서 육지로 운반해내는 중이었다. 들것은 보풀이 인 커다란 꽃무늬 비단천으로 덮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마담 게라르디는 기분이 좋지 않아 그 자리에서 당장 리바를 떠나자고 말했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27p)

두 소년이 방파제 위에 앉아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다. (...) 푸른 작업복을 입은 한 남자가 상륙하여 밧줄을 고리에 걸어 당겼다. 은단추가 걸린 검정 저고리 차림의 다른 두 남자들이 사공 뒤에서 들것을 들고 들어오는데, 그 위에는 꽃무늬에 술이 달린 큰 비단보에 덮여 분명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 이주동 옮김, '사냥꾼 그라쿠스',『카프카 전집 1 - 변신』, 솔출판사

 

소설은 스탕달의 전기를 다룬 첫 번째 장, 1980년과 1987년 화자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일을 다룬 두 번째 장, 카프카가 1913년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시기를 다룬 세 번째 장,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고향 W로 돌아와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네 번째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홀수 장은 실존 인물들의 이탈리아 여행을 다루고 있어 짧고, 짝수 장은 분량이 길어 '약-강-약-강'과 같은 모습을 띠는데, 곳곳에 카프카의 그림자가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제발트 본인일 거라고 추측되는)의 이탈리아 여행 역시 카프카의 이탈리아 여행의 궤적을 밟고 있으며, 곳곳에 등장하는 그라쿠스의 변주들은 너무 많아 다 적을 수도 없다. 내가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스탕달-카프카-제발트의 모습이 굉장히 닮아서, 그들의 모습이 하나로 겹쳐지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독하고, 현실과 미지의 세계를 오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곳곳에 나타나는 그라쿠스의 환영은 이런 겹쳐짐을 더욱 극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수많은 접점들을 통해 제발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알다시피, 사실과 기억은 전혀 다르다. 벨 스스로도, 설사 직접 체험한 일에 대한 생생한 기억의 장면이라 할지라도 그 신뢰도는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다고 썼다.'(12p)라고 나와있듯, 사실과 기억 사이에서 떠도는 더없이 초라한 존재의 모습이었을까.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역시 현기증과 감정들이다. 화자는 놀라울 만큼 해박한 지식으로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다가도, 불현듯 찾아오는 현기증과 감정들로 인해 미지의 경계를 떠돈다. 문제는 이렇게 현실과 미지를 왔다갔다하는 과정에서 점차 네 개의 장의 인물들이 하나로 겹쳐진다는 것이다.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그라쿠스 역시 죽었지만 생과 사를 떠돌게 되었다는 점에서 같이 묶을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스탕달과 카프카의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충실한 기록으로 보이는 1장과 3장 역시 화자에 의해 변형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실과 기억은 전혀 다르므로.

 

이 소설은 어렵다. 문장에 담긴 단어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야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스탕달과 화자의 연결성에 대한 확신이 아직도 없으므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의 소설들과는 분명히 다른 지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 현기증이라는 경계 사이에서 떠도는 화자와 인물들의 모습에서 어느 순간 그 겹쳐짐에 감탄하는 순간이 오리라는 것. 자신도 모르게 그라쿠스-카프카-제발트로 연결되는 지점을 찾게 되리라는 것. 내가 이 소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그 정도인 듯하다.

 

덧 ) 번역의 문제는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역자 해설에 붙은 말처럼 '제발트적 울림'을 줄어들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직역한 것 같이 갑작스럽게 삽입되는 문장, 띄어쓰기와 오탈자는 지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설을 독자가 제발트를 어느 정도 알 것이라는 전제하에 쓰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이 작품이 제발트의 첫 소설인만큼 제발트를 이 책으로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많을 텐데, 이런 식으로 해설을 쓰면 안 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어로 읽으면 좀더 제발트의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 일은 아마도 내겐 없을 듯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윗듀 2015-08-2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진짜. 이 책 언제 읽지. ㅋㅋㅋ

아무 2015-08-21 19:19   좋아요 0 | URL
3일만 투자하시면 됩니다 ㅎㅎ.... 오랜만에 보물찾기하는 느낌이 들었던 책.. 덕분에 카프카 전집까지 찾아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