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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근대의 자장에서 벗어나자는 탈근대적인 운동도 이미 오래된 이야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인류 문명은 근대의 사고에 빚지고 있는 것이 많은 문명이다. 세계사는 인간 이성이 어떻게 발달해 왔는지 그 자취를 추적하는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건만, 우엘벡의 입장에서는 그건 아니올시다, 인 듯하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성(性)에 묶여 있는,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느리고 차가웠다. 그래도 따뜻한 것이 있기는 했다. 여자들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68쪽)
이 소설의 서사를 지배하는 힘은 바로 육체가 갖고 있는 원천적인 에너지, 바로 섹스다. 작가가 풍부한 지식을 뽐내며 이야기하는, 인류의 성 풍속 변천사의 흐름 안에 두 인물, 브뤼노와 미셸이 있다. 둘은 여러 측면에서 대조적이지만, 성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둘의 대립점은 극에 달한다. 브뤼노가 자신의 성적 욕구에 충실하며 자신을 역사의 흐름에 내던진다면, 미셸은 반대로 성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며 살아간다. 작가는 두 인물의 이야기, 특히 브뤼노의 이야기를 통해 섹스를 끝없이 갈망하던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몰락해 나가는지 보여준다. 브뤼노는 68혁명 이후 문란해지고 타락하는 인류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늙는다는 게 바로 그런 걸 거야. 감정의 반응은 무뎌지고 원한도 기쁨도 별로 간직하지 않게 돼. 그 대신 몸 여기저기에 이상은 없는지, 기관들의 균형이 무너져 있지는 않은지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되지. (205쪽)
성적 욕망을 향한 끝없는 갈망은 젊음을 욕망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이는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혐오를 낳았다. 사람들은 늙은이들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미래(늙은이가 될 것이라는 미래)를 부정한다. 하지만 늙음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지는 못하고 공허함만이 남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 공허함을 성 풍속의 해방으로 해소하려 하였다. 이를 바라보는 우엘벡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못해 조롱하는 것 같다.
미셸과 브뤼노, 두 형제의 삶은 암울하다. 특히 브뤼노의 암울한 삶은 성적 욕망만을 추구하다 모든 것을 잃은 현대 인류(우엘벡은 특히 68세대를 겨냥하는 듯하다)의 반영이다. 여성과의 섹스를 끝없이 갈망하지만 번번이 좌절되는 브뤼노의 모습은 68혁명이 가져다 준 성적 해방과 자유가 인간을 얼마나 황폐화시켰는지 보여준다. 이런 그의 삶은 크리스티안을 만나면서 행복을 찾는데, 이는 섹스와 사랑이 결합한 형태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뤼노가 크리스티안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다른 사람과 달리 크리스티안이 자신의 몸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라는 점, 자신의 육체가 생명력을 잃자 그녀가 자살을 택했다는 점은 결국 인간은 (싱싱한) 육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였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사랑 없는 섹스가 만연한 시대에 섹스마저 잃은 인간의 미래는,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미셸의 삶에는 활력이 없다. 이는 그가 섹스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며, 사랑과도 격리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와 거리를 둔 그는 놀라운 지적 성취를 이루며 다른 인물들과 대비되는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성관계를 통해 만나고 헤어지는 시대에서 섹스 없이는 사랑도 없기에, 그의 삶은 외롭고 쓸쓸하다. 아나벨과의 늦은 만남이 그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아나벨은 두 번의 죽음을 맞으며 그와 이별한다. 자궁을 들어내 생식 기능을 상실한 여성은, 이 시대에 머물 곳이 없다는 비극이 드러나는 것이다.
에필로그를 통해 드러나는 제3의 종이라는 대안은, 현재의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냉소다. 생식 기능을 제거한 인류의 출현만이 생존의 대안이라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성적 욕망이 증폭되어 그것이 존재 이유인 양 행동하는 인류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랑이 구원이 될 수 있지만 이미 그것이 가치를 상실한 현실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우엘벡 식의 비관론이 이 소설을 지배하는 법칙인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셸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한 것인데, 이 때문에 미셸이 어떤 계기와 과정을 거쳐 자신의 사고를 완성하게 되었는지 추적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미셸보다는 브뤼노의 모습에 눈길이 많이 간 것이 사실이다. 그게 바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브뤼노의 모습은, 68혁명의 여파가 지난 현실을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일까.
참신하고 충격을 줄 수 있는 내용과 이를 담아낼 수 있는 탄탄한 형식을 모두 갖추어 잘 전달하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흔히 말한다. <소립자>는 형식에 있어서 미흡한 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놀랄 만큼 충격적이고, 독보적이기까지 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 우리는 이 소설을 보며 지난 시기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지 않을까. 물론 조금이나마 변화했다는 전제 아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