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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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다 읽고 나서 오는 저릿한 감정은 말로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모르겠다는 양희에게 난 반했다. 덤덤한 수준을 넘어선 부동(不動)의 관계가 내게 주는 떨림. 자신의 청춘을 바친 기업에 팽()당한 뒤 살아가는 필용, 그는 다른 메뉴로 바뀌지 않고 사라져 버린 피시버거인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은 그냥살고 있는 양희의 모습은 비웃질 않는 나무 그 자체 같다. 삶을 마주하는 자세는 서로 다르지만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한낮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런데 문득 조중균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돌아가는 길에 필용은 맥도날드에 더 이상 피시버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고 아예 사라져버린 그 메뉴란 것에 대해. 만약 피시버거가 사라지지 않고 뭔가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면 불쾌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주 결연하게 사라졌단 말이지. 이제 맛볼 수조차 없게 아주 그냥 끝. 다신 맛 못 봐, , 끝이야, 아주 없어, 이렇게. A가 유사한 A'B가 된 것이 아니라 AA인 채로 사라져버렸다는 건 햄버거 같은 정크 푸드의 역사에서도 아주 비장한 신이었다. (11)


필용과 양희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필용이 앞으로 펼쳐질 인생,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이겨내야 할 어려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야 갖게 될 성취와 인정에 대해 상상하며 지냈다면 양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양희에게는 현재라는 것만 있었다. 하지만 그 현재는 지금 생생하게, 운동감 있게 펼쳐지는 상태가 아니라 안개처럼 부옇게, 분명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게 풀풀 흩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뭔가 생활 자체가 그랬다. (15-16)


사랑한다며?”

,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렇잖아.”

,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22)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구요.”

필용은 양희 뒤에 서서 양희에게로 손을 뻗어보았다. 닿지는 않았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손이 닿을 수도 있었지만 필용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간절함으로, 연민과 구애의 감정이 뒤엉킨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걸, 자기 자신만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필용은 말없이 르망에 올라탔다. 문산까지 오는 동안 필용이 전율했던 사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 뻥 뚫린 것처럼 없어지고 말았다. 필용은 울었다. 울면서 무엇으로 대체되지도 좀 다르게 변형되지도 않고 무언가가 아주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38)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필용은 가로수 밑에 서서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구고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43)


3. 정용준, 선릉 산책

 

대성당같은 엔딩은 현실에 없다. 잠시나마 한두운을 이해했다고 여겼던 착각은 정해진 시간이 넘어서자 무너진다. 장애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오만이 아닐까. 그랬기에 결말은 모르겠다.”의 연속일 뿐.

 

4. 장강명, 알바생 자르기

 

문득 채만식의 치숙을 생각했다. 전적으로 은영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작가노트에 나온 것처럼 “‘교활한 서민층 어린애한테 걸려 고생하는 착한 중산층 여자 이야기냐’”고 읽을 수 있겠지만,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은영은 치숙만큼이나 신빙성 없는 화자다. 전체 구조에서는 을이지만 자기보다 못한 병의 입장인 혜미(대화체를 제외하면 그녀는 항상 이름이 아닌 여자아이로 불린다)에게 하는 행동은 유사-갑질과 다르지 않다. 더한 것은, 은영 부부가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퇴직금과 4대 보험료를 받으려 하고, “어시스턴트가 아닌 어드미니스트레이터로 기록된 서류를 받기 위해 따지는 혜미를 욕할 수 있을까. 단지 밀린 월급을 달라고 했을 뿐인데 동전 더미를 던져주는 현실에서, 혜미는 자기 나름의 생존법을 배운 것뿐이다. 사장과 은영의 입장에서 싹싹하지도 않고 나서서 일하지도 않는 혜미가 못마땅했겠지만, 이런 시각은 알바생들을 양산한 구조를 은폐하고 감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은영의 시점으로 풀어낸 건 그동안의 장편에서 보였던 작가의 중립적인 시선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건 자기도 몰랐잖아.

-?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걔도 알바를 열 몇 개나 했다며.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걔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본 적 없잖아? (170)


6. 최정화, 인터뷰

 

그를 나락으로 가라앉혔던 인터뷰의 원본. 항상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어느 호프집에서 인터뷰의 사본을 각색해본다. 한 남성의 허위와 위선, 그리고 불안. 그를 이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단둘이 남게 되자 나타나는 공감의 결여. 그리고 이를 간파한 남자의 불안이 또다른 사본을 만든다. “아니, 남자였습니다.” 하고.


최정화의 소설 속에서 인간은 내면과 사유가 결여된 공허한 존재이다. 그들은 정합성 없는 사회(언론)를 신봉하고, 타인들의 환심을 사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이 실존의 전제조건이 된다고 했지만, 최정화가 그려낸 불안한 현대인들에게는 개심이나 구원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이런 회의주의로 말미암아 최정화는 이전 시대의 대표적 작가들과 구별된다. (261)


7. 오한기, 납치

납치라는 모티프가 작품 내용과 상관없이 계속 반복되면서, 떠올린 모티프를 소설로 만드는 데 실패한 작가의 ()일상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이후 두 번째인데, 전에 읽은 게 더 나은 것 같다. 왜 그의 소설 속 화자는 모두 (실패한) 소설가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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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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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삼각관계가 있다. '우현-순미-나(기현)', '그-어머니-아버지'. 삼각관계라고 정의할 관계는 아니지만, 이 3자 관계는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어떻게 보면 이들 사이의 이야기를 통속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문장은 단단하고 강렬하다.


두 다리가 잘려나간 형을 사창가에 데려다주는 화자가 있다. 소설은 이 두 형제의 사연을 천천히 되짚으면서 시작한다. 우현과 순미 사이의 사랑과 이를 질투하는 나. 결국 '나'의 치기로 우현은 군대에 끌려가 두 다리를 잃었고, 순미도 잃었다. 그리고 이 셋은 모두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있다. 그녀가 평생동안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 민들레 식당에서 처음 만난 둘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세상은 그 둘을 갈라놓았고 그가 임종을 맞이할 때가 되어서야 재회한다. 그리고 어머니만을 사랑했던 아버지는 그 과거를 알면서도 평생 그녀와 함께한다.


닮지 않은 듯 보이지만 닮은 두 관계에서 주목할 점은, 이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식물, 정확히 말하면 나무에 있다는 점이다. 우현이 산책하며 바라보는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 거대한 물푸레나무. 숲 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 소나무를 휘감고 있는 때죽나무. "식물과 교감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한다며 식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그의 사랑을 표상하는 야자나무.


그 열매가 태평양을 건너왔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그것이 무슨 상징처럼, 예컨대 두 사람의 숨찬 사랑처럼 여겨지는 것이어서 숙연해졌다고 했다. 사랑을 걸었다고 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그 나무에다 전이시켰던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나무가 정말로 자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니까......" 그 말을 할 때 어머니는 울컥 속에서 치미는 무언 가를 삼켰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지만 보란 듯이 하늘을 향해 서 있는 한 그루의 야자나무가 그녀의 눈시울을 축축하게 하고 있었다. 상징목이라는 단어가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처럼 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177쪽)


화자인 '나'는 자신이 형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다시 사진을 찍으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순미와 다시 만나도록 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어머니의 숨겨진 사랑 이야기, 순미의 숨겨진 상처와 대면하게 되고, 동물적인 충동과 욕망 속에 살았던 그는 점점 그들의 식물지향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때의 식물은 무동성(無動性)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인 나무, "좌절된 사랑의 화신"으로서의 나무를 말한다. 세상이 사랑을 허락하지 않아 나무가 되었다는 수많은 (우현이 수집한) 신화들 속에서, 그리고 삶에서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나무가 되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는 순미의 꿈을 통해 작가의 식물지향성, 아니 나무지향성은 세상의 동물지향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끝에 "기후도 풍토도 다른" 야자나무가 자라는 공간, 남천이 있다. 작가가 지향하는 나무-인간의 모습은 그의 단편 제목처럼 '신중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순미와 우현이 마침내 재회했는지는 결말에 나와있지 않다. 그들은 남천에서 재회했을까. 하지만 나는 재회하지 못했을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사랑은 결국 소나무와 때죽나무의 모습이어야 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통속적이고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건 작가의 문장이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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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6-1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요즘 이 책 읽고 있어요 ^^

아무 2016-06-13 17:19   좋아요 0 | URL
저도 <생의 이면> 읽은 뒤에 반해서 열심히 찾아읽고 있습니다 ㅎㅎ 어느 책을 읽어도 특유의 강철같은 문장이.. 여태껏 왜 몰랐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
 










『자기만의 방』을 구매할 때 끝까지 고민했던 것은 민음사본을 살까, 펭귄클래식본을 살까였다. 고민했던 이유 중 하나는 두 책의 구성이 달랐기 때문인데, 민음사본은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펭귄클래식본은 「자기만의 방」과 「여성의 전문직」이 수록되어 있었다. 결국 민음사본을 주문하고 펭귄클래식본은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는데,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연락이 왔다. 책을 빌리러 가면서 나는 내가 이제 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학교도서관의 경우 희망도서 신청 후 수령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일주일이었다).


「자기만의 방」 부분은 따로 읽지 않았는데, 민음사본을 읽는 데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굳이 비교를 해봐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뒤에 실린 주해만 확인해 보았는데, 민음사본의 주보다는 이쪽이 더 자세했다. 하지만 「여성의 전문직」이 생각보다 짧아서 민음사본을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난 아무래도 「자기만의 방」보다 「3기니」에 더 손이 가기 때문이다...


「여성의 전문직」에서 울프는 여성 작가로서 자신이 부딪혀야 했던 심리적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녀는 그것을 "가정의 천사"라고 부른다. 그것은 문화 안에서 소위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강제되었던 성격적 특질들의 총칭이다. 동정심이 많고, 헌신적이며, 가정생활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자기희생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그 천사/유령은 그녀가 비평을 쓰려고 할 때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저명한 남자가 쓴 소설을 비평하려고 손에 펜을 쥐자마자, 천사는 내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서는 속삭였습니다. "아가씨, 당신은 젊은 여성이에요. 당신은 남자가 쓴 책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호의를 베푸세요. 부드럽게 대하세요. 듣기 좋은 말을 해주세요. 기만하세요. 당신의 성이 가진 모든 기술과 책략을 동원하세요. 당신이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세요. 무엇보다 순수함을 지키세요." (161-162쪽)


그녀는 천사에게서 벗어나고자 그의 목을 죄고, 잉크병을 던짐으로써 그를 죽이려 한다. "자기 자신만의 정신이 없다면, 또한 인간관계와 도덕, 성에 관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고서는 한 편의 소설도 비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울프를 비롯한 여성 작가들이 소설을 쓸 때마다 부딪쳐야 했던 것은 남성들이 규정하는 '여성'이라는 관념이었다. 이 관념의 벽 앞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낚싯줄처럼 빠져나가고, 그들은 예술가로서 곤경에 빠진다.


그녀는 실제로 가장 어렵고 심각한 곤경에 처했습니다. 비유 없이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육체에 관한 어떤 것을, 여성으로서 입 밖에 내기에는 적절치 않은 정욕에 관한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성이 그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남자들이 충격을 받을 거라고요. 자신의 정욕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여성에 대해 남성이 할 법한 말을 의식하자마자 그녀는 무의식이라는 예술가로서의 심적 태도에서 깨어났습니다. (...) 남성이 이러한 측면에 대해 의식적으로 자신에게는 많은 자유를 허락한다 해도, 그러한 자유를 누리는 여성에 대해서는 극도로 엄격하게 비난하는 자신의 태도를 자각하거나 통제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165-66쪽)


사실 지금도 이런 시선은 유효하다. 남성의 욕망은 남성성의 발현이 되지만 여성의 욕망은 여성성의 상실로 규정되는 것, 그것은 여전히 순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모습이 아닌가? 욕망에 솔직해지는 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과연 순수라는 이름의 프레임에서 욕망이 정말 '동등하게' 자유로운지는 의심스럽다.


울프는 여성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겪었던 모험 중 "가정의 천사"를 죽이는 일은 성공했지만, "하나의 육체로서 경험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남성 중심 사회의 시선이 내면화되어 또다른 제약으로 남은 것이다. 자신의 사례를 통해 그녀가 묻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성의 전문직 중 가장 자유롭다고 인식되었던 작가가 받는 제약이 이렇다면, 다른 전문직은 얼마나 더 심할 것인가? 그럼에도 전문직에 진출한 여성들이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환영과 장애물"을 규정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논지다.


글이 발표된 시기를 보면 순서는 「자기만의 방」→「여성의 전문직」→「3기니」인데, 이 글은 양성성을 추구했던 「자기만의 방」과 차이를 강조했던 「3기니」의 과도기에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녀는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것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3기니」를 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의 전문직」에는 구체적인 대안이 없고, 「자기만의 방」과 「3기니」의 대안은 현실성이 없어보인다. 그러나 나 자신도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식만 가지고 있을 뿐. 울프의 시선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여전히 사회는 은연중에 규정된 성 역할을 강요하고, 혐오의 언어는 나날이 과격해진다.


+) 밑줄은 책 말미에 수록된 미셸 배럿의 해설로, 1993년에 쓰여졌다.

우리는 울프의 개념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현대 페미니즘이 맞닥뜨린 주요 딜레마를 발견할 수 있다. 때때로 `평등/차이 논쟁`으로 요약되는 이러한 딜레마는 페미니즘이 부당한 현실에 맞서 평등주의를, 더 나아가 `양성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지, 아니면 더 나은 가치의 사회와 국가조직을 추구하기 위해 남녀의 현존하는 차이를 발판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관련되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예술에서 양성적인 이상을 지지하는 편에서 차이의 힘을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편으로(여성은 사회적인 `아웃사이더`라고 단언하는 것에서 이러한 입장이 특히 두드러진다) 옮겨 간다. (170쪽)

울프의 주장은 유물론적이지만, 환원적인 경향이 덜하다. 울프는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한다고 본다. (..) 울프의 표현을 따르자면, 작가가 처한 물질적인 상황이 작가의 `시각`을 결정한다. 1940년 브라이턴 노동자교육협회에서 주최한 연설에서(이 연설문은 여성의 이해관계와 노동자계급을 연관시켜 보는 흔치 않은 중요한 글이다), 울프는 작가의 시각이나 관점은 그가 받은 교육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계급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175쪽)

페미니즘에서는 이른바 `평등`을 강조하는 고전적인 주장이 바로 울프의 이러한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 울프가 차용한 양성적 정신론은 다른 이들이 성적 차이를 발견하는 곳에서 성적 상보성을 발견한다. (..)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자신이 사는 시대가 특히 이러한 이상적인 양성성 모델을 적대시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선거권 운동은 남성의 기성 사고에 이의를 제기했고, 여성과 남성 모두 "성 의식"을 강화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울프는 작가에게 그러한 `성에 대한 의식`은 재앙에 가깝다고 결론을 내린다. (180-181쪽)

버지니아 울프가 사유했던 개념 가운데 많은 것들(정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완결성, 시야, 진리 등등)이 내포하는 의미는 오늘날에는 미적 판단과 주체의 동일성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시되는 것들이다. 울프는 소설에서 단일한 모순 없는 동일성이라는 가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 하지만 그러면서도 울프는 파편화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배치되는 어떤 알 수 없는 자신의 기질을 버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현대에 우리가 상대적인 관점에서 특수한 역사와 문화 환경의 소산으로 보는 `자유`, `진리`, `상상력`과 같은 개념을 별다른 문제 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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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0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면 남성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일단 환영합니다. 다만, 여성이 공인이면 남성들이 인정해주는 반면 일반 여성이 그러면 ‘김치녀’라고 무시합니다. 나머지 반응이 아예 무시하는 겁니다.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자세를 헤픈 태도로 여깁니다. 여기서도 ‘김치녀’로 무조건 대입시킵니다. 잘 해도 김치녀, 못 해도 김치녀.

아무 2016-06-02 17:21   좋아요 0 | URL
어떤 행동을 하든 씌워지는 프레임이 같다는 게 더 무섭죠 사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 남성을 지칭하는 언어는 무표적인데 왜 여성을 지칭하는 언어는 유표적일까.. 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돌아다니는 언어에 비하면 얌전한 수준이라는 게 더 안타깝습니다..
 
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의 초대 지식인마을 34
김석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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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어차피 이 책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그건 내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제 이야기를 해야될 것 같다. 이 책의 부제는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면 '무의식에로의 초대'로 나오는데, 내가 받은 책의(난 3월 초에 알라딘 중고샵에서 이 책을 구매했다) 부제는 '무의식의 초대'다.




이런 까닭에 마음 한구석에 뭔가 찜찜한 구석이 가시지 않았다. '무의식이 초대'하는 것과 '무의식으로 초대'받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지 않은가... 혹시 파본?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프로이트'보다 '라캉'에 초점을 둔 것이었는데, 오히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설명이 쉽게 되어 있어서 몇 가지 오해를 풀 수 있었다. 특히 1차 정신 기구 모델과 2차 정신 기구 모델의 차이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기에 충격이 좀 컸다. 그동안 상담이론 등에서 정신분석에 대해 이따금씩 듣거나 심리학 교양수업을 찾아 들을 때도 '의식-전의식-무의식'과 '이드-자아-초자아'가 서로 다른 모델이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상담이론에서 정신분석학이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데도 원인이 있는 듯하다. 교육학 쪽에서 주목받는 심리 분야는 학습에서는 인지주의, 상담 쪽은 인본주의다)


라캉의 경우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장을 나누어서 각각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읽으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이 매우 돋보였으나, 애초에 개념 자체가 어려운 것이기에 어느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다. 나로서는 이번 독서를 통해 '상상계'가 'imagine'의 의미보다 'image'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에 의의를 둬야 할 듯하다. 이러한 오해는 세 가지 계를 이해할 때 들었던 체스 게임의 비유를 내가 잘못 해석하면서 발생한 것인지도. 그 외에도 오이디푸스 단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욕구/요구/욕망의 차이를 정확히 아는 것, 자아와 주체가 얼마나 다른지(맨 처음 통상적인 의미로 두 개념을 이해했다가 매우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 등 라캉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지적해 둘 것은 프로이트와 같이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보니 프로이트와의 차이가 부각된다는 점, 그리고 주로 언어의 문제와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본 라캉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초대', '만남', '대화', '이슈'로 구분되어 있는데, 두 인물의 사상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건 '만남'이다. '초대'는 그야말로 프롤로그에 가깝고, '대화'는 프로이트와 라캉이 대화를 나누는 가상 장면을 설정하여 두 인물의 차이점을 부각시켰다. '이슈'는 성차와 관련해서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의 관점을 비교해 놓았는데,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이 부분을 참고하면 좋겠다. 나로서는 관심이 많이 가는 이슈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이 책만 읽고 '나 프로이트 좀 안다'고 젠체할 수는 있겠으나, 라캉은 아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보다 심화된 수준에서 논의하고 있고, 그의 사상 전반을 다루고 있지만, 이 역시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개념들은 이런 것이다 정도에서 정리될 수 있겠다. 나 역시 라캉을 '공부'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지만, 아직 나의 언어로 정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인 '학습'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로쟈의 인문학 서재』). 앞으로 몇 번 더 읽어보며 확인해야 도달할 수 있을 장소이리라. 다행인 것은 책 말미에 프로이트와 라캉의 사상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핵심어들의 정의와, 깊이 읽기 위한 추천도서들이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다른 책을 읽으면서 개념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하며 읽을 수 있게 되어 좋은 참고서를 얻은 느낌이다. 다른 책을 읽는 데 좋은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른 책들은.. 살레츨이라든가, 지젝이라든가, 지젝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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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17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에로의 초대’보다는 ‘무의식의 초대’가 어감상 좋아 보여요. ‘무의식에로의 초대’에 글자 한두 개 빼고 읽으면 ‘무식에로의 초대’가 되잖아요. 무식과 에로의 묘한 결합... ㅎㅎㅎ

아무 2016-05-17 16:21   좋아요 0 | URL
`에로의`라는 조사 자체가 원래 없는 말을 억지로 만든 듯한 어감이 있습니다. 조사 3개를 연달아 붙여버리니.. 그냥 `으로의`처럼 2개로만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요. 그래도 무의식의 초대 보단 못한 면이 있죠.. ㅎㅎ
무식과 에로..ㅋㅋㅋ 최근에 롤리타를 읽어서 그런지 `에로`라는 단어가 심상치 않게 다가옵니다 ㅎㅎ 무식에로의 초대라는 제목도 나중에 교양서 제목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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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생각해보니, 두 달만에 처음으로 소설을 집은 거였다. 두 달 동안 읽은 책이 열 권도 채 되지 않기에(그런 것으로 짐작되므로) 놀라운 것은 아니겠지만, 소설 편식쟁이로 살았던 독서 편력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조금씩 읽고 있지만 아직 다 읽지 못한 책 중에도 소설이 없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놀라운 일이다. 읽어야 되는 의무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 책도 책장에 꽂힌 채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롤리타'라는 이름은 소설 제목보다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로 익숙하다. 그 이름은 주로 좋지 않은 일들과 어울렸기에, 거기에 덧붙은 의미 역시 부정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현재, 이름을 둘러싼 의미와 사건들이 『롤리타』의 아름다움을 덮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보코프의 말처럼, 이 소설에는 "어떠한 도덕적 교훈도 없"고, "감각적 요소와 관능적 요소를 엄밀히 구분하는 일"(505쪽)은 포르노그라피의 낡은 문법을 따라가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롤리타』의 줄거리를 재미없게 요약하자면, '소아성애자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를 욕망하고 취하였으나 결국 그녀를 잃게 되고 파멸하는 이야기' 정도가 되겠다. 작품을 읽으면서 험버트의 애정행각에는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으나, 험버트/나보코프가 그려내는 "시적 에로티시즘"의 세계(해설에는 포에로틱(poerotic)한 소설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감탄할 만한 것이어서, 소아성애라는 요소만 빼면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이해/착각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롤리타의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지만, 그 전에 앞서 지적할 점은 이 욕망의 서사가 포우의 시 「애너벨 리(Annabel Lee)」의 "바닷가 공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내가 어느 여름날 첫번째 여자애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롤리타는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바닷가 공국에서였다. 아, 언제? 그해 여름 내 나이는 그때로부터 롤리타가 태어나기까지의 햇수와 엇비슷했다. 살인자는 으레 이렇게 문장을 애매모호하게 쓰는 법이다. (18쪽)


그의 첫사랑이었던 애너벨 리(Annabel Leigh)와 해변가에서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과 좌절이 소설의 전반부를 이룬다. 유년 시절의 이미지는 그에게 하나의 환상이 되어 남고, 환상은 그의 삶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따라다닌다. 그는 님펫(nymphet)이라는 신조어를 설명할 때 "롤리타와 같은 부류는 남들이 들어갈 수 없는 매혹적인 시간의 섬에서"(29쪽) 노닌다고 적는데, "매혹적인 시간의 섬"이야말로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환상의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롤리타를 만나는 순간, 그의 환상에 자리하고 있던 애너벨은 롤리타로 대체된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잠시 후 이 새로운 소녀, 이 롤리타, 나의 롤리타는 그녀의 원형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여기서 꼭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는데, 내가 그녀를 발견한 것은 결국 고통스러운 내 과거와 '바닷가 공국'이 낳은 운명적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두 사건 사이에 겪은 모든 일은 암중모색과 시행착오, 그리고 보잘것없는 가짜 행복에 불과했다. 이제 수많은 공통점이 두 사건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66쪽)


험버트가 끊임없이 님펫을 갈구하고 마침내 롤리타를 만나 그녀를 차지하는 과정은 환상의 현실화, 즉 "나에게 주어진 초라한 현실과 나에게 약속된 위대한 이상"(423-424쪽) 사이의 격차를 메우려는 몸부림이다. 끝없는 시도의 결과, 롤리타가 먼저 유혹하여(험버트의 진술에 따르면) 마침내 환상은 현실로 구현된다. 그러나...


우리는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러나 사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기나긴 여행은 이 아름답고 믿음 깊고 꿈 많고 드넓은 국토를 구불구불한 점액의 흔적으로 더럽혔을 뿐이고,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귀퉁이가 접힌 지도 한 다발과 너덜너덜한 여행 안내서, 닳아빠진 타이어, 그리고 한밤중에─밤이면 밤마다─잠든 체하는 내 귓가에 울리던 그녀의 흐느낌이 전부였다. (280쪽)


롤리타는 어리석고 교만했으며,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였다(험버트의 서술에 의하면). 미국 여행 내내 그들은 다투고 신경질내며, 비어즐리에 정착한 이후에도 갈등은 계속된다. 이 와중에 험버트를 사로잡는 것은 질투, 즉 자신의 환상이 산산조각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고, 그는 자신의 환상을 붙잡고자 롤리타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결국 그 환상은 무너지고 마는데, 그가 사랑한 것은 '롤리타'였지만, 그녀는 '롤리타'가 아닌 '돌로레스'였기 때문이다(그녀의 이름이 '고통(dolor)'을 생각나게 하는 건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걸까). "내가 미친 듯이 소유해버린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창조물, 즉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롤리타, 어쩌면 롤리타보다 더 생생한 롤리타였다"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죽을 때까지 욕망하고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그녀는 그의 환상에서만 존재하는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상 속의 그녀는 목소리가 없다. 주체가 아니라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험버트는 님펫(nymphet)이라는 말로 아름답게 표현했지만, 결국 그녀는 철저하게 대상화된 펫(pet)이었던 것이다.


험버트는 회고록에서 어떻게든 "지옥 같은 부분과 천국 같은 부분을 가려내"고자 하지만, 그리고 온갖 엄격한 규제와 돈으로 환상의 붕괴를 막고자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가리고 싶었던 실재, "낙원에 박힌 빙산"은 끄트머리에 가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첫 여행을 할 때, 말하자면 첫째 낙원에 올랐을 때, 어느 날 나는 나만의 환상을 마음 편히 즐기려고 뻔히 보이는 사실을─그녀에게는 내가 애인도 아니고 매력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아예 인간도 아니고 다만 (언급할 수 있는 부분만 언급하자면) 두 개의 눈과 1피트의 충혈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무시해버리기로 굳게 다짐했다. (…)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거울의 각도와 열린 문틈의 우연한 조합 덕분에 그녀의 표정을 얼핏 보게 되었는데……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그 표정은…… 그야말로 완벽한 무력감의 표현이랄까, 상심과 좌절이 한계에 도달하여─그리고 어딘가에 한계가 있다는 말은 그 너머에도 뭔가 있다는 뜻이므로─오히려 아주 편안한 공허와 무심한 깨달음의 경지로 접어든 표정이었다. (…) 독자 여러분도 당시 내가 품었던 계산적 욕정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그리고 그녀 때문에 나 역시 얼마나 절망했는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55-456쪽)


하지만 그는 환상을 버릴 수 없다. 환상의 세계, '바닷가 공국'이야말로 삶의 목적이자 전부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험버트는 카르멘을, 베아트리체를, 롤리타를 떠나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서 그녀를 빼앗았던 남자에게 복수할 것을 결심하지만, 이 행위 역시 일종의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환상을 무너뜨린 것은 결국 험버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환상을 차지하고 유지하려는 욕망이 오히려 환상을 무너뜨린 것이다.


험버트가 자신의 욕망을 쟁취하고 파멸하는 이야기는 감각적인 문장으로 인해 낭만적 세계를 형성하고, 시적인 문장들이 관능적인(erotic) 세계마저 환상의 낙원으로 탈바꿈시킨다. 개인적으로는 험버트의 행동을 지켜보며 "이런 미친...(뒷말은 생략한다)"이라는 말이 종종 튀어나왔지만, 그럼에도 이 남자가 몰락하는 과정은 어쩐지 처연하다. 그것은 그가 욕망을 실현하고 환상을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감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은 소아성애라는 자극적 소재가 아니라(소아성애는 범죄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환상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몸부림, 그리고 이를 묘사하는 탐미적(耽美的)인 문체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부림은 환상에 이미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으로 인해 더욱 비극적인 성격을 띤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님펫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환상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술뿐이라는 작가의 문학관이 담겨있는 듯하다.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 처음 목차를 보았을 때 해설을 쓴 사람의 이름이 매우 친숙하여(하지만 이 친숙함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해설을 통해 작품에 대한 보충 설명,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데 서술자가 '나'에서 '험버트'로 바뀌는 부분에 대한 설명은 내가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 것 같다. 처음에 읽으면서 나는 이것이 자신과 롤리타의 사랑을 어떻게든 아름답게 포장하지만, 이것이 롤리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알고 있는 험버트의 (무의식적인) 도피 또는 회피의 반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해설에서 말하는 대로 서술자의 전환이라면 3인칭으로 전환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겹쳐놓은 나보코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효과는 무엇일까.


+) 전체적으로 술술 읽히는 편이었으며 막히는 부분도 딱히 없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줄표나 괄호를 '적극적으로' 원문과 다르게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으니 가독성을 고려한 번역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하지만 원작이 담고 있는 언어유희가 최대한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한 부분이 많이 띄어서(저 수많은 미주들을 보라) 읽을 때마다 "나 엄청 공들였다!"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사소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험버트가 가스통과 체스를 두는데 갑자기 가스통이 "장군 받으시게!"(290쪽)라고 말하는 바람에 읽다가 엄청 웃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체크'나 '체크메이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가스통의 어벙한 성격을 드러내게 하는 말을 찾기도 어렵긴 하다...


+) 어제 책을 다시 훑다가 문득 생각난 것은 그리스 신화의 황금 양털 이야기였는데, 내가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르센 뤼팽 전집에서도 이 황금 양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지난 모험들 중 몇몇을 되도록 충실하게 기술한 책들을 지금 다시 훑어보노라면, 한마디로 그 각각은 여인을 쫓아다니느라 나 자신을 던지는 순간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황금 양털(Toison d'or)이 모양만 변했을 뿐 내가 이제껏 손에 넣으려고 그토록 헤매온 것이 바로 그 황금 양털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상황에 따라 내 이름과 성격을 달리 해야만 했기에 그때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느낌이었고 이전까지는 결코 사랑해본 적도 없으며 이후에도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각오를 매번 새롭게 다져왔던 것이다.

- 모리스 르블랑, 『불가사의한 저택』(까치글방, 2003, 5쪽)


역자 성귀수는 해설에서 융을 인용하며 황금 양털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열망'을 대변한다"고 썼다(『바르네트 탐정사무소』, 까치글방, 2003, 213쪽). 이아손의 황금 양털을 향한 여정과 획득, 그리고 비극의 이야기가 험버트의 일생과 겹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따지고 보면 황금 양털 역시 가지고 있으면 나라에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인간이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 낸" 롤리타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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