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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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첫 번째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은 정희진의 추천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첫 번째 페미니즘 도서는 아니었지만, 이 책을 첫 번째로 읽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이라 얇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분량이 무색하게 술술 읽히는 문체와 사실적인 경험이 주는 흡입력이 이 책을 읽는 원동력이 된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이 잘 녹아 있는 에세이이자, 페미니즘 고전에 대한 한 권의 서평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저자는 한때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누리던 여성이었으나, 결혼과 육아를 겪으면서 아내와 엄마의 역할 사이에서 고뇌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자문하게 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모교로 돌아가 페미니즘 고전 강의를 듣기로 결심한다. 이후 대학 강의에서 페미니즘 고전을 읽으며 토론 수업에 참여하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고전의 내용과 자신의 삶을 결부시키며 서술하는 능력이 탁월해서 저자의 삶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토론 수업이라는 형식이 한 권의 고전에 대한 다양한 시각 차이를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적절한 형식을 취했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페미니즘 고전은 워낙 다양해서 이를 일일이 거론하면 어마어마한 분량이 될 듯하다. 그녀가 다루고 있는 책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부터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까지 매우 다양하며, 1세대 페미니즘부터 포스트모던 페미니즘까지 고루 분배되어 있다(원래 네 번이었던 강의를 세 번으로 나눈 것도 페미니즘의 시기 구분 때문이었을까?). 페미니즘의 역사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개관을 조망해볼 수도 있겠다. 이 책이 훌륭한 서평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양한 고전을 쉽게 정리해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토론의 방식으로 고전의 한계를 지적함과 동시에 저자의 적극적인 해석이 가미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의를 들으면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작품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추적하기도 하고, 젊은 시절의 우상이었던 보부아르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성장 과정이 페미니즘 고전 읽기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저자가 읽는 다양한 페미니즘 고전을 함께 읽는 기분으로 이 책을 만날 수 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저자의 훌륭한 정리가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 보이는 몇 가지 한계점들이 있는데, 하나는 정희진이 해제에서 지적한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는 저자의 위치다. 처음에 정희진의 해제를 읽을 때는 이런 한계가 그렇게 크게 드러날까.. 하고 반신반의했었는데, 읽다보니 정희진의 지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가사 노동자의 등장.


경제적 능력이 있고 그럴 의향이 있는 사람들은 프리단의 조언에 따라 전통적으로 여자들에게 떠넘겨졌던 가사와 육아를 수행할 다른 여성들을 고용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불운한 계층의 여자들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소수만을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지난 20년 동안 가사 노동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제3세계 여성들의 유입도 점진적으로 증가해 왔으며 이는 세계화 추세와도 꼭 들어맞았다. (...) 「메리 포핀스」(1964)나 「내니 다이어리」(2007) 같은 인기 영화들은 유모 산업에 얽혀 있는 인종과 계급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이 관계에 내재된 권력 구조는 미국에 온 많은 여성을 열악하거나 심지어 폭력적인 환경에 밀어 넣는다. 그들은 법적인 배우자의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며 많은 경우 정당한 피고용자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고용주의 사적인 생활에 상당 부분 관여하는 일을 한다. (298-299쪽)


이후 책에서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와 앨리 혹실드의 『글로벌 우먼』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지만 "L교수는 토론 주제를 국소적인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 토론에서 나오는 학생들의 발언 역시 국소적인 차원에 머문다(L교수가 스웨덴의 예를 들자 어떤 학생은 "스웨덴과 비교하다니 말도 안 돼!"라고 말했다). 게다가 저자는 이례적으로 토론 장면만 제시할 뿐 자신의 생각을 적지 않았다. 「3기니」에서 '교육받은 남성의 딸'이라는 계층이었기에 노동 계급에 속하는 체하는 것을 경계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입장과 비슷한 것일까? 육아와 가사 노동의 전가에 대한 문제는 이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저자는 자신이 속한 계층이 한계라는 것을 인식하고 깊은 접근을 생략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수강생의 대부분이 백인 중산층이어서 그랬는지도.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글이 품고 있던 저자의 열정이 점점 힘을 잃는데, 이는 3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이 문장에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성 역할, 또는 남성/여성의 이분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장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런 주장이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저자의 눈으로 그들을 읽었기 때문이겠지만. 저자-나의 이런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부분은 서아프리카 유학생인 프리실라의 발언이다.


학기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면서 수업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심리 분석이나 급진적 여성 동성애 등을 다루기 시작했다. 프리실라에게는 곤혹스러운 주제였을 것이다. 프리실라와 대화를 나누며 서양의 페미니즘을 사치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제게는 이 이론이 낯설게 느껴져요." '여성성의 신화'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여자가 '이진법'에서 탈출해 성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레즈비언이 되는 것이라는 프랑스 페미니스트 모니크 위티그(Mnique Wittig)의 주장에 대한 프리실라의 의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주제에 대해 논의할 일이 없을 거예요." (392쪽)


현실은 여전히 "어머니 세대가 해결하려 했던 것과 똑같은 문제"가 남아있는데, 이론만 홀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성도 성별도 없으며 정체성의 허구만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나는 여성이기 전에 나 자신이다'라는 말이 담겨있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나 식수와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이론들은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저 멀리까지 간 것이 아닐까. 저자도 그런 식으로 글을 마무리하긴 하지만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이론만 제시할 뿐이라는 관점을 바꾼 것 같지는 않다.


그 외에도 한계는 아니지만, 종종 저자가 학생들과 세대 차이를 느끼는 부분이 등장한다. 특히 내가 주목한 부분은 포르노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미국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포르노의 긍정적 측면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공개하는 시대, 아무런 체에도 걸러지지 않는 발언들이 넘치는 시대에 무엇을 바라겠냐마는, 포르노그래피가 아무리 좋아진들, 심지어 페미니즘 포르노가 만들어진들, '창녀에 대해 쓴 글'이라는 포르노그라피의 어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식의 성 해방, 또는 욕망의 해방은 전혀 쿨하지도 힙하지도 않다. 로빈 모건을 인용하자면, "포르노물이 이론이라면 강간은 실제다." 저자는 캐서린 매키넌을 인용한다.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에 나오는 행위가 여자를 신체로부터 소외시킨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포르노그래피가 자신의 행위를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처럼 멀찍이 떨어져 경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방정식이 뒤집혀 사람들은 자신의 섹스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과 비슷하게 보이지 않으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330쪽)


이런저런 한계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첫 번째 페미니즘' 책이 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한 여성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 공감하기도 하고, 언제나 알고 싶었지만 아무도 풀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페미니즘 이야기를 접하게 될 것이다. 또는 페미니즘을 알기 위해 어떤 책을 찾아보아야 할지 고민하는 이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읽으면서 정말 많은 부분에 밑줄을 쳤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을 콕 집어서 인상깊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누군가 내게 책장을 다 접을 거면 왜 접냐...고 물었다), 특히 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어서 이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하고, 70년대와 9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씁쓸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미국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좌파에 속하던 메릴린 살즈먼 웹은 다음 선언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 여자들은 억압받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가장 대우받아야 마땅한 우리 여자들은 팔과 다리가 잘린 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단상 아래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웹은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들을 물건 취급하는 체제를 맹렬히 비난했다. 남자들은 주먹으로 위협하는 동작을 하며 오싹한 말들을 내뱉었다. "미친년!", "저년 끌어내!", "뒷골목으로 끌려가 강간당하고 싶냐!", "벗겨 버려!" 이미 좌파 운동가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남자들을 규탄하기 위해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 소리쳤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 여자들은 여러분들이 무슨 뜻으로 혁명을 외치는지, 그저 권력을 더 얻으려는 목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남자가 대부분이었던 청중은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다. (269-270쪽)

후일담에 따르면 1970년대의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주도했던 행동가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미쳐 버린다. (...) 몇몇 페미니스트는 영혼과 정치를 맞바꾸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문화적 페미니즘으로 전향한다. 작가이자 행동가였던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미즈(MS.)》의 전 수석 편집자였던 로빈 모건 같은 사람들은 끝까지 남아 잘 싸웠다. 그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기를 포기했다.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가 『역풍(Backlash)』이라는 제목의 책에 기록했듯, 1980년대에 불어닥친 역풍은 가공할 수준이었으며(여자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을 기본으로 하는) 페미니즘은 다시 한 번 욕설 비슷한 단어가 되었다. (271-272쪽)

하지만 새로운 시대는 낯설었다. 분노에 차서 클래런스 토머스의 인준 청문회를 지켜보던 내가 어느새 모순으로 가득한 「앨리 맥빌」을 시청하고 있는 짝이었다. 대학 졸업 무렵 페미니즘은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권위자들은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며 우리가 이제 후기 페미니즘(혹은 후후기 페미니즘)에 해당하는 립스틱 페미니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만......"으로 시작하는 학생들의 발언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다른 곳에 신경 쓰느라 이런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하고, 데이트하고, 결혼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었다. 어깨 위에 책임이 하나둘 쌓여 가면서 페미니즘은 나보다 어린 여자들, 《비치 오어 컨트(Bitch of Cunt)》 같은 파격적인 잡지를 구독하며 몸 여기저기에 문신을 한 젊은 여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여전히 페미니스트라 부르기는 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 확신하지 못했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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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8-18 0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켑틱 4호 커버 스토리에서도 남녀에 대한 진화심리학 내용이 많은데, 리뷰를 정리하자니 머리가 아프더군요. 남녀를 가르며 결정짓는 잣대와 구분들이 너무도 넘쳐나서.
분명한 건 성sex자체의 다름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각자가 젠더gender(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성)로서 상대를 구분짓는 게 문제인 거죠. 저도 리뷰 마저 정리하게 되면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무 2016-08-18 00:50   좋아요 2 | URL
스켑틱에서 진화심리학을 다뤘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어떻게 정리하실지 궁금하네요^^ 듣기로는 진화심리학을 둘러싼 논쟁들(과학이다 원형과학이다 등등)에 대해서도 다뤘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자연주의적 오류에 가장 빠지기 쉬운 학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냐에 대한 문제도 얽혀있으니... 사실 그래서 진화심리학이 미덥게 보이진 않아요..
아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젠더(gender)를 `성별`이라고 번역해서 초반에 좀 많이 헷갈렸습니다. 영어 병기라도 해주지.. 개인적으로는 이런 책이 필요했거든요. 일종의 개론서 같은 책... 아마 제가 나중에 더 찾아볼 저자는 주디스 버틀러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ㅎㅎ

AgalmA 2016-08-18 02:07   좋아요 2 | URL
차이에 집중하는 진화생물학은 진화심리학에 비해 결과 도출이 쉬운 건지도 모릅니다. 모호한 본성의 보편성을 좇는 진화심리학은 잘못하면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가 되기 쉬우니 신빙성을 얻기가 참 힘들죠. 최근엔 데이타가 많아지고 뇌과학 등 연구방법들도 늘면서 인간의 심리 네트웍을 들여다보기 쉬워진 데다 스티븐 핑거 같은 거물이 진화심리학에 힘을 실으니 세력이 커졌죠. 두 학계 간의 문제 역시 ˝패러다임˝ 싸움. 사람 사는 데가 어디든 그렇죠;
암튼 그런 논쟁들을 정리하자니 한숨이;
주디 버틀러, 저도 주시하고 있던 저자입니다. 예전 책은 번역 문제가 많다 들어서 주저주저 하고 있었는데, 최근 주디스 버틀러 책이 속속 나오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yamoo 2016-08-2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페미니즘 책은 기피도서인데, 리뷰를 보니 이거 한번 책장을 넘겨보고는 싶네요~
잘 읽었어요!^^

2018-07-01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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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를 읽은 게 벌써 6년 전이다. 내용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그때도 단편집을 읽으며 느꼈던 건 이야기가 아프면서 명랑하다는 것이었다. 웃프다고 해야할까. 그리고 6년 만에 다시 단행본으로 『비행운』을 읽으며 난 생각했다. '아, 김애란이 돌아왔다.' 『달려라 아비』에서 느꼈던 김애란 소설의 특징들─뒤집기, 결말 처리 방식, 명랑한 슬픔 등등─은 더욱 강해졌고, 길이는 더 길어졌고, 내용은 더 깊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웃픈 이야기'에서 '웃'보다 '픈'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분노가 아닌 체념과 견딤의 모습으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런 장면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처연해진다.


여전히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혼자다. 생존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하지만 그 노력을 격렬한 감정으로 표출하지 않는 도도한 인물들. 하지만 이전 작품집보다 삶의 모습은 더 독하다. 그만큼 세상은 더 잔인해지고 냉혹해졌기 때문에,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쪽 편만 드는 십자가" 같은 세상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의 비행(飛行)을 꿈꾸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비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추락을 마냥 슬프게만 다루지 않는다. 인물들은 김애란 특유의 뒤집기 방식을 통해 추락한다. 교도소에 있는 아들이 처음 보낸 편지에 '엄마, 사식 좀.'이라는 다섯 글자만 담겨 있을 때(「하루의 축」), 그들의 소비를 따라잡고자 손톱케어를 받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녀의 축축한 겨드랑이만을 기억할 때(「큐티클」) 등등. 이런 방식이 웃음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 웃음이 씁쓸한 웃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까움, 분노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고개 좀 들고 다녀라,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친근한 표현인지, 애써 상대의 성(性)을 지워버리려는 노력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선배는 곧잘 나를 '녀석'이라고 불렀다. 그런 뒤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줄 때면, 뭉클하니 아늑해져 까치발을 든 채 '더요! 더요!'라고 외치고 싶어지곤 했다. 어쨌든 1분도 안 되는 시시한 순간이었지만, 준이 선배는 그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요한 일을 하나 해내고 있었다. 내 머리에 붉은 동그라미를 그려준 거였다.

- 「너의 여름은 어떠니」(15쪽)


나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핫도그만 먹었다. 되도록 카메라에 얼굴을 비추고 싶지 않아서였다. 선배는 스케치북을 가져와 뭐라 급히 갈겨썼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와 종이를 들고 흔들었다. 나는 선배에게 과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해 머리를 더욱 수그렸다. 선배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얼마 뒤 물을 마시려 시선을 돌리는 순간, 선배가 들고 있는 도화지 속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고개 좀 들어, 이 녀석아.

'......'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핫도그를 든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양손 아래로 끈적끈적한 케첩과 겨자 소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작진에서는 난리가 났다. 피디가 어떤 신호를 보내는 듯했고, 선배는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 도화지에 뭐라 열심히 썼다. 그러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구조 신호를 보내듯 종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고개 좀 들어, 미영아. 고개 좀 들어, 제발.

「너의 여름은 어떠니」(36-37쪽)


한때 흠모했던 선배가 순식간에 추락하는 모습은 선배가 움켜잡은 팔에 생긴 상처와 어린 시절 물에 빠진 화자가 움켜잡은 병만의 팔의 상처가 겹쳐지면서 더욱 비극적인 색채를 띤다. 하지만 더 슬픈 것은 작품 속 누구도 손가락질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준이 선배도 그렇고, 「벌레들」에서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아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남편도 그렇다. 『비행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이 땅에선 도저히 살 수 없어 비행(飛行)을 시도하다 추락하거나, 비행 마저 포기하고 어떻게든 지상에서 견뎌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벌레들처럼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애써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을까) 어디에나 있으며, 사실 우리도 이 세상에선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죽어서도 박스를 줍고" 있어야 한다. 한쪽 다리를 절름거리면서.


서윤의 양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생전에 폐지를 모아 자신을 키운 할머니 생각이 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할머니가 자기를 못 알아보는 게 서운해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서윤이 그토록 서럽게 우는 건 할머니가 죽어서도 박스를 줍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호텔 니약 따」(280-281쪽)


대부분의 작품들이 모두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내 마음에 선명하게 각인된 작품은 「서른」이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문장을 만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게 만드는 작품. 서간문의 형식으로 아는 언니에게 심경을 토로하는 이 작품은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자화상이자 풍속도다. "하부 판매원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모든 판매원들에게 득이"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다단계의 구조야말로 개미지옥 같은 현대 사회의 본질이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새 물건이 아닌 사람을 팔며 윤리성마저 상실한다. 한때 신뢰했던 전 남자 친구에게 이끌려 들어간 지옥에 자신을 신뢰했던 제자를 밀어넣으며 빠져나가는 소설의 구조가 내 마음을 계속 아프게 한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김애란은 명랑하지 않다. 애잔하고 처연한 슬픔을 천천히 끝으로 밀고갈 뿐.


문체에 대해 한 마디만 보태면, 명사구나 부사구로 문장을 끝맺는 방식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첫 작품집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이런 방식으로 문장을 썼을까를 곰곰히 생각해봤다. 첫째, 한국어의 특성상 대부분의 문장이 '-다'로 끝나기 때문에 이로 인한 단조로움을 깨기 위해 사용했을 가능성. 둘째, 도치를 통해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 특히 어떤 이미지를 두드리지게 하려고 사용했을 가능성. 쉼표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표가 나와 흠칫 놀라면서 읽었다. 이런 문장의 활용이 문장의 단조로움을 깨고 신선함을 주기도 하며, 특정한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한다. 특히 결말을 하나의 풍경이나 이미지로 제시해 끝내는 방식은 볼 때마다 놀랍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이런 것도 너무 자주 나오면 그 신선함을 잃기도 하고 흐름이 끊어진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작가가 의식적으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자주 돌출되는 문장은 그 신선함을 잃기 쉬워진다.


한때 내 기억속의 김애란은 세대를 다루는 작가였지만, '비행운'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단편집에서 주목해야 할 키워드 중 하나는 계급이다. 작가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한국 사회가 당면한 계급적 풍경을 김애란식으로 보여준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의 소설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날카롭게 보여줄 그녀의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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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첫 번째 가능성에 한 표. 김애란은 아마도 - 다로 끝나게 될 때의 지루한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유독 명사구와 부사구가 많은 듯합니다..좋은 작가입니다..

아무 2016-08-10 13:34   좋아요 0 | URL
저도 첫번째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 작품 중에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를 다시 읽어봤는데 그때는 자주 쓰지 않았더라구요. 이상문학상 받은 「침묵의 미래」도 전 나름 좋았습니다. 다음에 나올 작품이 참 기대되는 작가죠..ㅎㅎ
 
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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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후장사실주의자로 알려진 8명 중에 소설가는 4명이다. 오한기, 이상우, 박솔뫼, 정지돈. 나는 오한기와 이상우는 포기했고, 박솔뫼와 정지돈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지돈의 경우 「건축이냐 혁명이냐」, 「미래의 책」,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를 읽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단행본으로 쭉 읽다보니 흐릿하게나마 그림이 잡히는 듯했다. 물론 아홉 편의 단편 중에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없었지만, 정지돈의 작품론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홉 편의 단편들은 '장'과 '우리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 기준은 작품에 '장'이라는 인물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다. '장'으로 분류된 네 편의 단편은 공통적으로 어떤 인물이 책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그린다. 그 책은 가상의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기도 한데, 이 과정 중간중간에 특정 작가(사데크 헤다야트, 보리스 사빈코프 등등)와 관련된 사실들이 '인용'된다. 이것 때문에 그의 소설을 두고 지식조합형 소설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인용은 기억상실에 걸린 '화자-나'(「뉴욕에서 온 사나이」)가 세계를 이해하려는 방식에 가깝다. 에리크가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판본을 모으고(「눈먼 부엉이」), 장이 일기에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을 받아적는 것(「창백한 말」) 역시 이와 연결되며, 작가가 소설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관련이 있다. 「일기/기록/스크립트」에서 인용되는 유리 로트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예술 텍스트의 규범과 법칙을 지향"하는 행위시학의 방식, 예술과 삶이 뒤섞이는 방식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에리크는 자신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했다.

- 「눈먼 부엉이」 (34)


장의 이야기는 그가 글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한 것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에게 어느 날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문장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그 양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노트를 가득 채웠으며, 회사 일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는 쏟아지는 문장에 파묻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정신을 잃거나 몽유병자처럼 떠돌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생소한 공원이나 카페, 건물의 계단 위였다. 장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 「미래의 책」 (104-105)


'우리들'로 넘어가면 작품의 서사는 더 줄고 인용이 압도적으로 늘어나는데, 이 역시 '장'에서 살짝 드러났던 메타소설적 요소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주말」은 어느 날 서해안의 항구들을 여행한 뒤 고다르의 「주말」(1967)을 보며 떠올랐던 이야기의 인용이며, 「건축이냐 혁명이냐」 역시 고다르의 「김중업」을 찾다가 발견하게 된 황손 이구와 그가 살았던 건축사(史)의 인용이고,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도 책을 찾다가 발견하게 된 프레데릭 키슬러와 레이몽 루셀에 대한 인용의 연속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작가가 소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살짝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대화의 내용보다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며, "소위 말하는 미술품보다 이런 기록물이 더 미학적"이라는 것.


어느 순간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이라는 프랑스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그의 책 반딧불의 잔존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말을 하자 동기는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지금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사진작가 아르노 지쟁거와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환영의 새로운 역사Nouvelles Histoires de Fantômes라는 전시를 진행 중이며 전시의 부제는 새로운 유령의 이야기라고 했다. 전시장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과 아르노 지쟁거가 수집한, 언뜻 봐서는 연관을 찾을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와 수집물로 가득하며 그러한 이미지는 통상 말하는 예술적인 무언가가 아닌 단순한 기록 사진과 사소한 물품이 뒤섞인 것들로, 이를 통해 기획자들의 이미지의 도서관, 그러나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찾을 수 없고 고정된 정보가 존재하지 않으며 기묘한 확장성과 통일성이 있는 이미지의 궁전을 만들어냈다고 말하며 이는 아비 바르부르크로부터 이어져온 프로젝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박찬경이 한 이야기, 자신은 이상하게도 1960년대에 찍힌 다큐멘터리 사진, 전혀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없는 사진을 보며 매력을 느끼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미술품보다 이런 기록물이 더 미학적이기 때문에, 빈티지한 취향이나 사회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그런 기록물이 앞서기 때문에 그런 기록물을 수집하는 행위로 작품을 만들어왔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 「건축이냐 혁명이냐」 (165) (강조는 인용자)


물론 나의 이 독법으로는 「만나는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를 설명할 수 없다. 이 작품은 화자인 '정지돈'이 엔카베데(소련의 정치경찰)에게 붙잡혀 콜호스로 가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도 여러 인물들이 나오지만 내가 알아본 인물은 조지 스마일리밖에 없다... 물론 그것이 나에게 더 공부해야 되나라는 고민을 안겨주진 않는다. 이 소설집은 아는 만큼 보이는 소설들의 집합이고, 이 소설집이 아니었다면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인물과 책과 영화 들의 쓰나미 같아서 도저히 찾아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쓰는가.



인터뷰에도 나오지만 작가가 가장 큰 관심을 드러내는 사람은 장 뤼크 고다르다. 매체에 대한 고민과 문학과 예술에 대한 조예를 영화에 녹여내는 방식, 그리고 매체를 뛰어넘어 영화에 대한 정의를 바꾸겠다는 의지 등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다르에 대한 이야기는 2분 10초쯤부터 나온다). 소설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많이 녹아있는 글이 「일기/기록/스크립트」인데, 그는 서두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미술도 문학도 어느 순간 연주자의 시대가 되었다"고. 이후 그가 니콜라 부리오의 "기호 탐험가semionaut"를 인용하며 지목하는 소설가는 제발트, 데이비드 실즈, 엠마뉘엘 카레르다.


데이비드 실즈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2014)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위대한 인물이 방에서 홀로 걸작을 쓴다는 생각을 이제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병리학 실험실, 쓰레기 매립지, 재활용 센터, 사형선고, 미수로 끝난 자살 유언장, 구원을 향한 돌진으로서의 예술이다.” 그는 소설가였지만 어느 순간 픽션 쓰기를 그만둔다. 그는 자신이 끌어 모은 온갖 잡다한 메모와 기억을 콜라주한다. 그의 글은 논픽션인가, 에세이인가, 자서전인가. 이건 그냥 책이다. 빌렘 플루서는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1987)에서 새로운 창작자는 자기 스스로를 더 이상 독창적인 창작자로서가 아니라 언어 배열자로서 인식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가 조작하는 언어도 역시 그에게서는 더 이상 그 자신의 내면 속에서 집적되어 있는 원자재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매개로 배열되기를 그에게 강요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체계로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 흐름들을 짜깁기하고 있다. 그는 더 이상 행을 따라가면서 읽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망을 짜고 있다.” 잘나가던 소설가였던 카레르 역시 어느 순간 픽션 쓰기를 그만둔다. 카레르의 리모노프(2011)는 논픽션인가 팩션인가 에세이인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나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는 어떤가.

- 「일기/기록/스크립트」 (289-290) (강조는 인용자)


그는 사람들이 흔히 '형식'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현재에 적확한 형식이 있다는 환상을 부정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려는 거부감이 그의 작품에서 움틀댄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어떤 사조가 개가를 올리는 그 시점에 이미 거기서 이탈"하려는 작가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우리는 외친다. 볼라뇨라고."를 패러디해서 "우리는 외친다. 후장이라고."라고 외치며 열광하게 될까. 나는 이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그들이 배수아나 정영문의 흐름을 새롭게 이으려고 노력하는 작가들로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잡학사전 같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있는 작품은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의 마지막 부분이다. 마지막에 모든 일에 실패하고 다시 필경을 시작하는 그들의 모습을 인용한 것은 필경-인용이야말로 새로운 예술-삶의 모습, 김수환이 『책에 따라 살기』에서 말하는 "책 읽기 모델"이라는 암시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소설이 앞으로 소설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내 좁은 눈이기에 판단을 유보해둔다..

‘책에 따라 살기’는 유리 로트만이 쓴 표현으로 행위시학이라는 로트만의 연구영역의 "집중적인 고찰 대상"이다. 행위시학이란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예술 텍스트의 규범과 법칙을 지향했으며 직접적으로 미학적인 것으로 체험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김수환에 따르면 삶과 예술을 섞어놓으려는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 예술-삶의 뒤섞임은 모든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예술이 결과적으로 닿았던 최종적인 형태이며 작가들이 탐구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주제이다. 그러니까 김수환/유리 로트만의 ‘책 읽기 모델’은 예술-삶이 맞이하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 아닐까.
- 「일기/기록/스크립트」 (300-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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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30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리 로트만 진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영화적 서사와 소설의 서사인가... 뭐 그런 책이 있었었었는데 말입니다..

아무 2016-07-30 14:03   좋아요 0 | URL
저도 에코 때문에 기호학 공부를 해볼까 생각할 때쯤에 이름만 듣고 읽어보진 못했는데, 이번에 찾아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건 몰라도 지적인 자극은 충분히 준 소설집이었습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7-30 14:11   좋아요 0 | URL
정지돈 정지돈 하네요.. 여기저기서.... 그래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솔직히 고백하면 전 한국 소설 스타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 글 읽으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 2016-07-30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면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저도 흥미롭지만 소설로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ㅎㅎ 그래도 영화에 대한 지식이 저보다 많으신 곰발님은 다른 재미를 찾으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전 고다르 영화를 한편도 본 적이 없어서..^^;;

곰곰생각하는발 2016-07-30 14:22   좋아요 1 | URL
전 제가 읽은 책 가운데 팔 할은 재미없어 하기에 추천한 책이 재미없다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유독 책 거의 안 읽는 사람들이 추천해 달라고 해서 추천하면 재미없다고 지랄하더라고요...
그래서 책 안 읽는 사람이 책 추천해 달라고 하면 추천 안 합니다..ㅎㅎ

cyrus 2016-07-31 13:17   좋아요 1 | URL
To. 곰발님 // 캐공감입니다! 전 제 동생에게도 책 추천하지 않습니다. 동생이 책을 많이 읽지 않거든요. 보긴 하는데 거의 여행 에세이를 선호하기 때문에 제가 다른 분야의 책을 추천하는 의미가 없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3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실히 깨닫게 되죠. 책 안 읽는 사람에게 책 추천하다가는 욕만 잔뜩 먹는다는 사실. 책 추천은 알라디너끼리 하는 게 최상입니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평소에 '삶'과 '생활'이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생활'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을 산다는 것은 착각이고, 사실 모든 것이 지리멸렬한 '생활'로 편입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주인공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기력하다. 실제로는 열심히 무언가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의 행동도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제스처가 아닌, 그냥 일상으로 편입되어버리는 소극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단편 안에서 비슷한 문장 구조가 반복되거나 변주되고 이를 이용한 언어 유희가 종종 등장한다.


영철은 집에만 오면 밥 생각이 없어졌다. 그에 비해 아내는 온종일 밥 생각뿐이었다. 그녀에게는 끼니 해결이 하루 일과 중 가장 큰 고민이었다. 영철이 출근한 뒤에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었고, 영철이 퇴근한 뒤에 그와 함께 먹는 밥은 더 맛이 없었다. 그녀는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고민을 토로했다. 엄마, 뭘 먹어도 맛이 없어. 나 알지? 뭐든지 맛있게 먹는 거. 김영철이랑 같이 살면서부터 입맛이 죄다 떨어졌나 봐. 어쩌면 좋아? 친정 엄마는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했다.

- 「영철이」 (87쪽)


나도 며칠 그랬어. 그럴수록 잘 먹고 잘 자야 돼. 당신 밥은 잘 먹고 살아? 아내가 물었다. 밥맛이 없네. 혼자 먹어도 맛이 없고, 동생 식구랑 같이 먹으면 더 맛이 없으니. 아내는 영철에게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했다. 

- 「영철이」 (106쪽)


비슷한 문장이나 단어의 반복이 주는 리듬감이나 언어 유희가 단편들을 읽는 하나의 재미이긴 하나, 이것이 가끔 과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이를테면 "괜찮찌개" 같은 것들(「그의 사정」). 이런 문장의 반복들이 특징없는 인물들과 결합하면서  무의미함과 덧없음이 증폭되는데, 이런 인물들을 그려내는 데는 작가의 세계관이 한몫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는 "떡이나 개, 가끔은 좆"으로 요약되는, 원하는 고기를 먹기 위해 사장이 주는 "그 개 같고 좆같은 떡을" 받아먹으며 자아실현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돼지우리의 세계다.


라라 양은 내가 아는 돼지 중에 가장 똘똘하고 예뻐요. 내가 잘 먹이고 잘 키워줄게요. 뭐든지 잘 먹어야 해요. 자, 아아. 사장은 서빙 아줌마가 놓고 간 인절미를 라라의 입 앞에 내밀었다. 그다음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아앙. 라라가 그 개 같고 좆같은 떡을 받아먹은 것이다. 라라는 인절미를 모두 삼킬 때까지 웃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저것이 라라가 말하는 직업윤리와 자아실현의 길이라면, 과연 그녀는 돼지였다.

- 「돼지우리」 (28쪽)


떡 이외의 모든 음식에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우라라가 사장이 주는 떡을 넙죽 받아먹는 장면, '나'가 자신의 손이 "돼지 족"이 되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은 '돼지우리'라는 고깃집 이름과 연결되며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라라와 '나'는 사장에 대한 강한 거부감도, 번듯한 직업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도 보여주지 않는다. 우라라는 의식주 중 '식'만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고기만 먹으면 되는 (비)정규직에 지원했을 뿐이고, '나' 역시 불어오는 살을 바라보며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돼지우리 속에서 살아가는 돼지족(族)의 자화상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이들이 보여주는 일상은 현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하루하루를 들여다보면 제각기 다른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것들이 삶의 전환점이 되거나 의미를 획득하지 않고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듯이, 그들이 도박장에서 운수 좋게 삼뻑을 하거나, 바다로 갑자기 떠나거나, 어떤 새 폴더도 아닌 '느시' 폴더에 매뉴얼을 저장하기로 하는 행동들도 어떤 전환점이 되지 않고 일상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Y에게 사기를 친 김수동이 누군지(「어느 겨울날」), 왜 하필 '느시' 폴더인지(「느시」), 왜 E가 발목을 돌리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지(「고산자로12길」)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어차피 작가는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단편들은 발표된 순서대로 실려있는데, 뒤로 갈수록 안 그래도 약했던 인물들의 활동은 점점 더 축소되는 모습을 보이고, 점점 더 무기력해진다. 심지어 「고산자로12길」과 「느시」로 가면 인물들은 이름마저 상실하고 a, b, c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회사에서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일상을 보내는, 일하다가 다른 듯 비슷한 메뉴의 점심을 먹고 뒤풀이를 하는 패턴만 보여줄 뿐이다. 단편집을 처음 읽을 때는 충격적일 만큼 단조롭고 무기력해서 흥미있게 읽었지만(무사건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신선함에 익숙해진 뒤에도 이런 작법이 의미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시의성은 가질 수 있겠으나, 삶과 생활의 경계마저 붕괴된 인물들의 무기력한 삶을 그려낼 뿐 질문을 품고 있지는 않다는 인상평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 그래서 등단작인 「돼지우리」가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장편소설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건 나는 이제 직업을 가진 거야. 여기가 내 첫 직장이니까 축하나 해줘. 나는 직업윤리를 엄수하는 성실한 일꾼이 되겠어. 라라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진짜 내가 돼지가 되었다 치자. 너도 들었지? 본연의 모습을 찾는 거래. 자아실현이야. 그거야 말로 내가 바라는 거야. 이제 떡 같은 면접은 집어치우는 거야. 자유야 자유. 나는 내가 되는 거야. 돼지가 되는 거라고. 라라는 입을 크게 벌리고 괴상스럽게 웃었다. (「돼지우리」, 27쪽)

너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냐? 대뜸 영철이 팔광에게 물었다. 테트리스요. 팔광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테트리스? 벽돌 쌓는 게임 말이냐? 영철이 소주를 홀딱 원샷하며, 되물었다. 그냥 쌓기만 하는 거 아니에요. 이상하게 쌓으면 죽어요. 잘 쌓아야지 없어지고 다시 쌓을 수 있어요. 또 쌓고 없애면, 벽돌이 내려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요. 나는 그 속도를 따라서 계속 쌓고 없애야 돼요. 속도를 못 따라가면 나는 죽어요. 없애기 위해서 쌓는 것 같지만, 쌓기 위해서 없애는 거예요. 팔광은, 테트리스를 신앙 삼은 듯, 허공에 대고 빠르게 이야기했다. 미친놈, 그게 왜 인생이야? 영철이 헛웃음 치며 물었다. 죽으면 열 받거든요. 팔광이 단호히 대답했다. (「삼뻑의 즐거움」, 42-43쪽)

행복이 뭐예요? 다섯 살 된 영철의 조카는 TV를 보다가 이것저것 영철에게 자주 물어보았다. 행복이 뭔지 모르니? 영철이 조카에게 되물었다. 몰라요. 조카가 대답했고, 나도 몰라, 너도 죽을 때까지 모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제 너희 아버지가 케이크를 사 와서 네 기분이 어땠니? 조카에게 물어보았다. 빨리 초 켜고 싶었어요. 불 끄고 먹고 싶었어요. 빨리 먹고 싶었어요. 조카는 어제 먹은 케이크의 기억이 생생했는지 양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게 행복이란다,라고 영철은 말해주려다, 아이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니 어쩌면 조카에게는 그것이 행복일 텐데 싶어서, 그게 행복이란다, 말해주려다, 아무래도 영철이 생각하기에 행복이란, 행복이라는 게 그러니까 그렇게 그런 게 아닌데 싶어서, 그랬구나, 케이크를 좋아하는구나,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철이」, 103-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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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2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집 읽었씁니다. 말장난 같다고나 할까요. 적당히 쓰면 좋은데
과도하게 쓴 느낌.. 오히려 말장난을 위해서 서사를 비튼 것 같기도 한 작품 읽은 듯한 느낌..
뭐야. 이거 이런 생각이들더군요..

아무 2016-07-21 13:47   좋아요 0 | URL
말장난이 과하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죠. 사실 뒤로 갈수록 서사도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 작품이라.. 언급하지 않은 작품은 개인적으로 정말 별로여서 할 말이 없었던 작품입니다. 표제작이라든가.. 기타 등등..
한번쯤은 읽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작품도 계속 볼지는 잘 모르겠네요 ^^;;

cyrus 2016-07-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장난은 곰발님처럼 읽는 사람 마음을 밀당하면서 써야 재미있습니다. 이 책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괜찮찌개’는 억지스러운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아무 2016-07-21 14:47   좋아요 0 | URL
`괜찮다`는 말을 반복, 변주하면서 나왔던 말이었습니다. 그것도 밑줄에 적으려다 그냥 안 적었는데.. 말장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밀당이죠. 제가 매번 곰발님 글을 보며 감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즘 마음속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 중 가장 큰 것은 당연히 사드 배치 문제와 개돼지 발언이다. 하지만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는, 언론에서 '문학동네발(發) 공급률 인상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출판사와 서점 사이의 문제다. 나는 이 소식을 문학동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처음 접했는데, 여기에는 온라인서점과 도매 유통사에 대한 공급률을 인상하면서 보낸 공문과 이로 인해 타격받을 수 있는 중소형서점에 직접 거래를 제안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https://www.facebook.com/munhak/posts/1740862802595651)


인상과 관련해서 국민일보에 기사가 났고[(링크)문학동네, 공급률 인상서점계 동네서점 죽이기반발], 문학동네에서는 이 기사에 대한 반박문을 다시 페이스북에 올렸다(홈페이지에도 올라갔을 것이다). 요지는,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의 공급률 인상을 위해서는 도매 유통사 공급률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 국민일보의 기사는 오보이며 한쪽의 입장만 들은 악의적인 기사라는 것. 인상으로 인해 운영이 어려워진 동네서점의 경우 직접 주문해달라는 제안을 했다는 것(입장 전문 링크). 결국 갈등 끝에 문학동네는 공급을 중단했다. [링크_문학동네, 서점에 책 공급중단]


페이스북에서 이 게시물을 읽기 전까지 나는 공급률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몰랐기 때문에 출판 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이것이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급속하게 추락하고 있는 출판업계의 실태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알 것 같다. 소위 대형 출판사라고 불리는 문학동네도 몇 년째 신규 사원 채용을 못한다는 사실은 참 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문학동네가 취한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지지하기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1) 문학동네는 중소형서점이 주문할 경우 선입금 조건을 걸었으며, 10권 이상 주문할 것을 요구했고, 반품률을 8% 이내로 고정시켰다. 이는, 중소형서점이 직접 거래를 하기 위해서 항상 일정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함을, 그리고 책의 판매율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소위 3대 문학 관련 출판사 중 가장 규모가 큰 문학동네의 책을 모두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을 만큼의 자금력이 중소형서점에 있을지, 작금의 출판 현실을 고려해보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2) 두 번째 입장을 발표하면서 문학동네는 글 말미에 '본 게시글에 공감해주시고 공유해주신 분들 중 500분을 추첨해서 문학동네가 역량 있는 신예작가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정 시행하고 있는 ‘젊은작가상’ 올해 수상작품집을 선물해드리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달았다. 이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대형 출판사가 논란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한국의 역량 있는(적어도 문학동네에서 있다고 판단한) 신예작가들의 작품이 이런 언론 플레이에 이용할 수단밖에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도서정가제가 출판업계에 미친 영향으로 옮겨간다. 나는 보통 기사들을 볼 때 댓글을 꼼꼼히 보는데(보고나면 마음이 항상 좋지 않은데도 계속 본다), 책값이 왜 이렇게 비싼가, 도서정가제 단통법 폐지 안하냐는 댓글이 대다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책이 그 가치에 비해서 헐값에 취급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다른 문화생활에 비해 책 소비에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출판업계도 지금 상황에서 책값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종이의 재질 문제나 양장본 남용 문제 등등. 물론 이런 걸로는 새발의 피겠지만.


출판업계도 억울한 점이 있을 것이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출판사의 리퍼브 도서 판매는 금지시키면서 중고서적 판매는 허용하는 등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에 유리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니까. 그런 불만이 쌓여서 문학동네가 총대를 멘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도매 공급률을 올리는 것이 인터넷서점 및 대형서점에 영향을 줄 것인지, 아니면 중소형서점만 덤태기를 쓰고 사장(死藏)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문학동네가 지금 취하는 행동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 같다.


법에 대해서도, 출판계 사정에 대해서도 모르는 일개 독자의 입장이라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섣불리 판단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일개 독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워낙 굵직굵직한 일들이 터지고 있는 요즘이라 중요한 일임에도 그들만의 리그로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까워 몇 자 적었다. 물론 나는 무슨 이슈를 가리려고 이걸 터뜨렸네 하는 음모론을 믿지 않는다(너무 속이 빤히 보이는 북풍은 제외하고). 다만 하루에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아수라의 세계에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모든 일에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뿐인데, 이것은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힘도 필요하다..


+) 정가제 시행 이후 도서 매출이 전체적으로 급감했다고 하는데, 인터넷서점은 10% 할인 + 5% 적립금까지 주면서 무슨 돈으로 굿즈에 사은품까지 이것저것 주는지 내 좁은 소견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알라딘 17주년 이벤트에 참여해 굉장히 많은 상품을 받았다. 본투리드 에코백, 『가만한 당신』 신문, 부채, 마음산책 스티커, 엽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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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3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3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7-13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번 상황은 씁쓸하네요. 뭐 저도 상품에 욕심이 많은 놈이지만, 저런 출판사의 홍보는 불편하게 느껴져요. 선물을 내세워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동시에 출판사를 옹호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확인시키는 고도의 전략 같습니다. 이러면 독자들은 일방적으로 출판사의 편을 들어주게 됩니다.

아무 2016-07-13 16:56   좋아요 0 | URL
페이스북 댓글 반응은 8대2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꼭 사은품 때문이라고 볼 순 없겠지만, 너무 저급한 전략이라 말이 안 나왔습니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작으로도 보이고.. 공급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듯 싶습니다..

samadhi(眞我) 2016-07-14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하는 짓이 꼭 남양유업 행태랑 비슷하군요. 제가 무척 좋아했던 출판사인데 정말 씁쓸합니다. 누구를 위한 도서정가제인지. 언 놈 뱃속으로 눈 먼 돈이 들어간 건지...

아무 2016-07-14 08:51   좋아요 0 | URL
남양우유는 지금도 안 먹습니다. 문학동네 저도 참 좋아했는데,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네요. 다 어렵다고 하면 돈 챙기는 왕 서방은 대체 누구인지 참...

Aid. 2016-07-2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인터넷 서점 같은 경우에는 할인율이 고정되면서 예전 할인해주던 금액이 수입으로 들어오니 그 금액으로 굿즈 등 이벤트에 더 힘을 쏟고 있는거 같아요.

아무 2016-07-20 17:33   좋아요 0 | URL
아마 그렇겠죠? 여러모로 적립금 혜택이나 굿즈의 비중이 많이 늘었습니다. 전 차라리 그 돈이 책의 품질에 갔으면 하는데요.. 이 글을 쓴 이후에도 몇 번의 입장발표와 기사가 있었는데, 볼 때마다 답답한 건 똑같습니다. 전국서점조합연합회도 그렇고, 문학동네도 그렇고...

cyrus 2016-07-2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문학동네가 서점 공급률 인상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를 했더군요.

아무 2016-07-21 14:23   좋아요 0 | URL
검색해보고 알았습니다. 아직 문학동네 페이스북에는 안 올라왔더군요. 요 며칠 동안 계속 확인하다가 `서점연합회와 문학동네에 고함`이라고 쓸까 하다 참았는데.. 감시 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이긴 하지만, 며칠 간 이루어진 논의에 독자는 안중에도 없더군요. 결국 독자층이 늘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문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