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이 책을 빌린 건 황정은의 '上行'을 읽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上行'을 먼저 읽었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황정은의 작품에는 항상 뭐랄까,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이 있는 것 같다. '上行'도 작품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한 편의 풍속화로, 거기까지만 이해하려고 한다. 더욱이 작가후기에는 이런 말까지 썼으므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소설 속 서술자는 작가가 아니라고 배웠고, 대학교에서도 같은 걸 배웠다. 하지만 나는 황정은의 작품에서 ''라는 말이 나오면 항상 황정은을 대입하게 된다. 뭔가, 내가 본 황정은은 (그래봤자 직접 본 건 두 번이 전부지만)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그런 사람일 것 같다. 말하는 것도, 바라보는 것도 ''라는 인물답지 않고 뭔가 황정은스럽다. 이렇게 말하면 황정은은 기분 나빠할까.

 

황정은의 작품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황정은의 문장이 갖고 있는 독특한 리듬에 대해 말한다. 황정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황정은 특유의 의성어들, 그리고 건조한 듯하면서 또렷한 문장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어떤 리듬을 말하는 걸까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上行'을 읽으면서 아, 이런 걸 말하는 거였구나..하고 깨달았다.(그래서 내가 시를 잘 못 읽나...) 그러면서 자기만의 문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벌써 자신의 이름이 걸린 문장이 회자된다는 것은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팟캐스트에서 황정은의 작품에 대해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황정은풍의 문장, 황정은틱한 문장이라는 말을 한다. 문학평론가 송종원 씨는 라디오 책다방에서 황정은 작가 이후 신춘문예 작품 중에 황정은풍의 문장을 쓰는 사람이 늘었다는 말을 했다.)

 

들어와.

깜짝 놀랄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밥 먹어.

밥 있어.

- 141

 

동네가 아주 조용하다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여태 그랬지만 최근엔 여름이 되면 도시에서 피서객들이 몰려온다고 말했다. 걔네들이 와서 돈 좀 쓰고 가겠네요, 라고 말하자 걔네들이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 라고 아주머니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 145

 

이 집 팔아서 뭘 한대요.

오제의 어머니가 물었다.

글쎄 뭘 한다나 사업을 한다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지랄하고.

노부인이 말했다.

늦게 팔려라.

오제의 어머니가 말했다.

늦게 팔려라.

노부인이 말했다.

- 157

 

그럼에도 역시 의문이 남는 것들이 있다. 오제가 어렸을 때 벽으로 손을 뻗어 손을 통과시켜 알람시계를 끈 장면도 그렇거니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월식은 정말이지 미스테리다. 라디오 책다방 종방에서도 '上行'의 월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본 청중 분이 있었는데, 그때도 황정은은 굉장히 모호한 답변을 했다(아니, 그렇게 대답한 것으로 기억한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아마 그땐 이 작품을 읽지 않아서겠지.) 송종원 씨도 황정은 작가가 자기 작품에 대해 이정도 대답한 거면 진짜 많이 대답한 거라고 했었는데, 많이 대답했다고 하기에는 정말 수수께끼같은 대답이었다. 마무리를 짓는 마지막에, 갑자기 월식 얘기를 집어넣은 건 도대체 왜일까.

 

이제 황정은의 작품은 '양의 미래''아무도 아닌, 명실'만 남았는데, 도무지 구할 방법이 없다. 도서관에는 그 단편들이 수록된 책만 쏙 빠져있으므로... 사면 되겠지만, 사는 건 황정은의 단편집으로 오롯이 나왔을 때로 미루고 싶은데...

 

) 사진 방향이 이상해서 컴퓨터로 수정했는데, 했더니 북플에 글이 안 보이는 오류가 나서 다시 올린다. 이게 뭐람.... 저자를 추가해서 그런가.. 추가하는 거 빼니까 멀쩡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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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연평해전>에 대한 평을 쓴 것이 뉴스에 올랐다. 별점을 2개를 주고 전체적으로 낮은 평가를 내린 것이 화제가 되어 블로그 댓글이 500개가 넘어갔다는 기사였다. 뭐가 그렇게 문제인가 싶어서 직접 블로그에 들어가서 평과 댓글을 읽어봤다.

 

http://blog.naver.com/lifeisntcool/220404326622 

 

평을 보고나서, 왜 이렇게 사람들이 열을 올리지... 하는 생각을 했다. 비평의 내용은, 영화의 내용적 요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 방식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연평해전>에 대한 비판이 터부시되는 양, 비난을 쏟아붓고 있었다. '<연평해전>은 연평해전을 다룬 영화다 → 연평해전은 우리의 젊은 장병들이 목숨을 희생한 전투이므로 숭고하다 → <연평해전>도 역시 숭고하다'라는 일반화가 '이동진은 <연평해전>을 비판했다 → <연평해전>을 비판하는 건 그 컨텐츠인 연평해전을 비판하는 것이다 → 연평해전은 숭고하다 → 이동진은 숭고한 전쟁을 비하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낳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댓글 중에는 <연평해전>은 다큐멘터리 영화인데 이동진이 드라마 장르의 틀로 비난했으므로 잘못됐다는 논쟁도 있었으나, 나는 영화 장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므로 언급하진 않겠다.)

 

그럼 <연평해전>의 작품성을 비판하는 평론가는 다 연평해전을 비판하는 좌파가 되는 건가? 그리고 <연평해전>이라는 예술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들어간 건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느꼈던 내가 아는 이동진은, 영화뿐만 아니라 문학, 인문사회 쪽에서도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말을 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다. 언어를 함부로 구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과연 비평을 쓰면서 그렇게 오해될 수 있는 소지를 남겼을까. 이건 마치 영화에 대한 광적 신앙이 낳은 마녀사냥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연평해전에서 목숨을 잃었던 장병들을 비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들을 정녕 위하는 방식이 <연평해전>의 신성화와 주례사 비평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들의 소모적인 논쟁이 오히려 가치를 퇴색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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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7-01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낫! 방금 리뷰를 읽고 왔는데 아무님 말씀처럼 작품성에 관해 논할뿐인데 많은 분들의 논란을 받는다는게 좀 의아합니다. 아무래도 이동진씨도 많이 당황스러우실듯 해요 ㅠㅜ

아무 2015-07-01 21:45   좋아요 0 | URL
기사 보고 뭐지? 싶어서 찾아봤는데 참.. 그렇더라구요ㅠ
 

 

 

 

알라딘 이벤트에 당첨돼서 영화 <파울로 코엘료>를 보고 왔다. 감상평을 짧게 말하자면, 코엘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2장이라 친구랑 보고 왔는데, 친구는 코엘료 작품을 한 권도 읽지 않았던 사람이라 영화가 끝나고 나서 조금 미안했다. 영화는 세 가지 시간으로 나뉘어 철저하게 파울로 코엘료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다룬다. 60년대의 젊은 코엘료, 80년대 산티아고로 순례길을 떠나는 코엘료, 그리고 2013년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코엘료.

 

영화에 대해선 이 정도까지만 얘기하고(더 할 얘기도 없다), 영화를 보면서 코엘료를 읽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연금술사>를 중학교 때 처음 읽은 이후, 코엘료가 쓴 소설을 미친 듯이 찾아 읽었던 기억들. 그 때 나는 <연금술사>의 어떤 면에 반했던 걸까. 그리고 <연금술사> 붐이 일어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읽을 수 있는 동화적인 스토리, 그리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전 우주가 도와준다는 메시지 때문일까? (너무나 좋아하던 문장이었는데, 최근 어떤 분이 적절하지 않은 맥락에서 사용하는 바람에 온갖 패러디와 풍자의 소재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유행하고 있는 '힐링'을 제외하면, 무엇이 전 세계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열광했던 건, 그 당시 두 소년이 품고 있었던 낭만주의의 표상 때문이었을지도. 어쨌든 코엘료는 분명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독서 경험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게 하나의 목표가 되었을 정도로.

 

 

 

사실 코엘료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그리고 일곱번째 날...> 3부작이다. 7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 외엔 공통점이 없는 작품들이지만, 제한된 시간이 주어지면서 전개되는 스토리나 철학적인, 혹은 종교적인 질문들이 잘 어우러져 있는 작품들이라고 난 생각한다. 물론 종교적인 색이 강해서 공감대를 얻기 힘든 작품도 있지만, 코엘료를 이야기할 때 종교를 떼어놓는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기에, 종교가 없는 나도 눈감아줄 수 있다. 더욱이 이 사람은 종교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영적 체험을 강렬하게 했으니...(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그런 것들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세 작품 중에 가장 훌륭한 작품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일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질문인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물론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나 <악마와 미스 프랭> 역시 살면서 한번쯤은 품게 될 질문들을 다루고 있다. 사랑에 대해서, 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악마와 미스 프랭>의 결말은 마음에 들었다. 인간이 결국 선을 선택하지만 그 이유에 있어서 꺼림칙한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이후에도 신작이 나올 때마다 열심히 찾아서 읽었는데, <오 자히르> 이후로는 종교적인 색채가 지나치게 짙어져서, 공감하기 어려웠던 게 많았다. 종교 얘기가 거의 없는 <승자는 혼자다>의 경우에도 많이 실망해서, 그 이후로는 안 찾아봤던 거 같다. 새로 나온 <불륜>도 그렇고... 청소년기에 너무나 강한 인상을 주었던 작가이기에, 언젠가는 찾아서 읽어보겠지만, 과연 다시 예전처럼 열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 의문) 영화를 보면서 계속 의문이 들었던 건데, 코엘료는 영화에서처럼 정말 뒤에 꽁지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걸까? 평소에 보던 사진은 앞모습만 찍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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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출판사(그 이름만 생각해도 분노에 차오르므로 언급하지 않겠다)의 팟캐스트 마지막 방송에 방청을 간 일이 있었다. 그 때 김두식 씨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이름은 김두식도 아니고, 황정은도 아닌 바로 정지돈입니다." 대본 담당이라 잠시 무대에 올라왔던 그는 훤칠한 키에 턱수염을 길렀고, 심지어 훈남이었다. 근데 그 목소리는... 너무 가늘고 여렸다. 정말 안 어울리게. 아무튼 나는 그 방송 이후로 어떤 글을 썼기에 김두식 씨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고, 정, 지, 돈. 이라는 그 석 자 이름을 가진 작가가 궁금해졌다.

 

현대시 수업 때 교수님은 이런 말을 했다. 정말 모던한 작품은 교과서에 실을 수 없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김수영 작품은 <풀>이랑 <눈>만 지겹도록 실리고, 이상은 <거울>이랑 <날개>만 오지게 실린다고..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 내가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한 건 정말 모던한 작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나 자신을 변명하기 위함이다. 건축에 대한 무지막지한 양의 지식이 담긴 이 소설은 건축에 대한 지식과 심미안이 전무한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면 건축에 대한, 아니 건축사에 대한 지식을 조금 쌓으면 이해할 수 있을까?

 

정지돈이라는 작가의 글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약간 실망스러웠다. 마치 뭐랄까... 서사성과 주지성(이라고 말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으나)의 균형을 잃어버린 느낌? 나로서는 그래서 진짜 다루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지만, 금정연의 해설을 읽어봐도 이건 뭐지...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금정연의 해설도 어렵다. 해설이라는 건 작품으로 가는 한 가지 길을 보여주거나, 여러 갈래로 가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창구가 되어야 하는데, 이 해설은 그 자체로 해설이 필요한 텍스트가 되어버렸다. 이런 게 후장사실주의라면, 난 이 주의 반댈세.

 

물론 소설의 작법은 끊임없이 혁신되어야 한다는 논제에 나는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실험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새로운 실험을 지지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것이 소설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았을 때이다. 소설의 본질이 뭔지 아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사라고 말하겠다. 서사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야기라고 하겠다. 아무리 혁신적이어도, 이야기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정지돈과 그 외 다른 작가들의 지적인 소설로의 실험은 높게 평가할 만하지만, 이 <건축이냐 혁명이냐>만을 가지고 보았을 때, 지적 실험이 실패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담겨있는지 이해해보려고 어느 출판사(역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이 꼴도 보기 싫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의 계간 봄호에 실린 황정은과의 인터뷰를 찾아 읽었다. 근데 그래도 모르겠다. 이 작가의 정체를... 왜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황정은은 '유덕문은 부군당은 왕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곳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같은 문장을 보고 감탄한 걸까. 여전히 궁금증투성이다. 첫만남인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난 계속 찾아볼 것 같다. 이 작품이 완전 꽝은 아니었으므로, 건축사 자체의 서사성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읽을 때 엄청 술술 잘 읽혔으므로... 아직 이 책에 담긴 다른 작품을 읽지는 않았으므로 뭐라 평하진 않겠다. 다만 오늘도 계속 읽을 뿐.

 

덧) 후장사실주의라는 게 무엇인가 찾아보니, 정지돈의 '후장은 그 후장이 맞아요...'하는 인터뷰랑 누가누가 동조하고 있는지 정도의 설명밖에 찾을 수 없다. 근데 어떤 글에서 이 사조는 이들이 지향하는 어떤 포즈를 말하는 게 아닐까하는 글을 봤다. 볼라뇨의 '내장사실주의'에서 따온 거 아니냐는 말이 있었지만, 나는 아직 볼라뇨의 작품을 사놓고 읽지 못했으므로 패스. 그리고 그들도 인터뷰에서 보면 제대로 설명하는 것 같지 않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그 '주의'를 표방하는 것이라면, 나는 김수영의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그들은 모더니즘의 코스튬만 걸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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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15-06-21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속이 다 시원하네요.

아무 2015-06-21 11: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보물선 2015-06-21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제가 말하고 싶은걸 이리 명확하게 해주시다니~~ 공감백배^

아무 2015-06-21 11:04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사실 금정연씨의 요상한 해설이 이 글을 쓰게 만든 주범... 소설리스트에 쓰던 서평은 좋았는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아쉬웠어요ㅠ

CREBBP 2015-06-21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봐주겠는데 저 역시 금정연씨의 설명은 허세가 지나쳤다고 느꼈어요..

아무 2015-06-21 17:06   좋아요 1 | URL
저도 공감해요 더 미궁에 빠지게 하는 해설이라... 소설보다 더 난해해서 힘들었어요..

2222 2015-06-22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휴. 제가 쓴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완전 공감이요.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전집이 집에 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양장이 아닌 것도 좋고.. 책장에 꽂아놓고 보니 뭔가 뿌듯하고 그렇다. 원래 이런 전집을 사면 순서대로 읽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무거나 들어서 보고 싶은 단편을 골라 읽는다. 제일 먼저 읽은게 황정은의 묘씨생이었고,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명절을 쇠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열 권 중 9권만 가지고 와서 하나씩 읽고있다. 그냥 시간 날 때 하나씩 읽으면서, 이 전집이 내가 여태껏 읽지 않았던 작가들의 작품에 호기심을 갖게하는 촉매제가 되는 것 같다. 성석제나 은희경, 한강.. 이런 사람들. 읽어야지, 읽어봐야지하면서 한 권도 찾아보지 않았던 그런 작가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욕구를 다시 피워주는 것 같아 고맙고,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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