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想 하나. (2021년 12월 18일)


  청담에 갈 일이 있어서 내려간 김에 소전서림이라는 곳을 방문했다. 서점이 아니라 도서관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신간 진열대에 있는 신간은 담당자 분에게 말하면 구입할 수 있는 듯하다) 이곳은 유료로만 입장이 가능하고, 전일권과 반일권 중에 선택할 수 있다. 음료 반입은 안 되고, 1층에 있는 2X2라는 카페에서 구매하거나 안에서 물(아마 탄산수)을 구입해야 하고, 텀블러가 있다면 주전자(?)에 담긴 커피와 식수대를 이용할 수 있다. 나는 반일권(3만원)을 구입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고요하고도 널찍한 공간이었고, 앉아서 책을 보기에 편안해 보이는 의자와 공간들이 많이 있었다. 파티션으로 분리된 공간에는 편안한 소파의자가 있어서 조용히 책을 볼 수도 있고, 한쪽에는 다리를 뻗고 앉을 수 있는 1인 소파들이 쭉 펼쳐진 공간도 있다. 곳곳에 숨겨진 책장들도 많아서 찾는 재미도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서관 식으로 책을 분류하고 있어서 우리가 흔히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전집류의 진열을 볼 수 없다는 것.
















  안마의자도 하나 있어서 안마를 받으며 책을 볼 수도 있었지만 이미 다른 분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 둘러본 뒤 DVD 영화를 보라고 마련된 공간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잔류 인구》를 잠시 읽었다. 너무 따뜻해서 꾸벅꾸벅 졸았지만... 잠시만 있을 수 있어서 금방 나와서 집으로 향했다. 다음에는 여유를 두고 오래오래 있으면서 책을 보기에도 좋을 것 같다. 텀블러도 꼭 챙겨서..


  

 



단想 하나. (2021년 12월 21일)

















  자정을 넘기고 잠들기 전에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다가 최승자 시인의 에세이를 펼쳤다. 앞의 두 꼭지를 읽는데 '아, 그렇지. 이것이 내가 알던 최승자이지.'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특히 첫번째 꼭지인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1976)은 모든 부분에 밑줄을 치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내가 그녀의 초기 시에서 받았던 느낌의 시 세계가 두 쪽 반짜리 글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서늘하고 쓸쓸한, 그러나 단단한 결의.


  그래서 때로 한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꾸는 죄도 벗어버리고 깊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

  그러나 언젠가 깨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의 황량함, 아아 너무 늦게야 깨어났구나 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간답게 죽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대항해서 싸우는 필사의 길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밤에도 나는 이를 갈며 일어나 앉는다. 끝없이 던져지고 밀쳐지면서 다시 떠나야 하는 역마살의 청춘 속에서, 모든 것이 억울하고 헛되다는 생각의 끝에서, 내가 깨닫는 이 쓸쓸함의 고질적인 힘으로, 허무의 가장 독한 힘으로 일어나 앉는다.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독毒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

-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14쪽)



단想 둘. (2021년 12월 23일)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의 두 번째 단편 〈마리의 춤〉을 다 읽었다. 〈최후의 라이오니〉는 내가 익히 알던 김초엽, 그러니까 《우빛속》의 김초엽이었는데, 이 단편에서는 변화가 느껴진다. 《사이보그가 되다》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고 해야 할까.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김초엽이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 분명하게 보이고, '모그'라는 존재에 대한 설정에서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P선생'이 떠오르기도 했다. 추상적인 형태만 자각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인지하지 못하는 P선생의 사례에서 색스는 현대 과학의 맹점을 짚어내지만, 김초엽은 이러한 상태를 장애라고 부르길 거부하고 새로운 (소설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같다. 올해 읽을 마지막 책으로 완독하고자 하는 목표는 이룰 수 있을까?



잡想 하나. (2021년 12월 24일)

















  아니, 김초엽의 신간이 또 나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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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2-24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로로 운영되는 도서관 스타일의 서점(?)이라니 좋은 아이디어네요!! 저도 저 김초엽의 신간 보고 신선한 시도네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저는 김초엽의 책은 읽은 것이 없네요. ^^;;; 서늘하고 쓸쓸하지만 단단한,,이라는 표현이 최승자 작가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아참!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길요.^^

아무 2021-12-24 22:43   좋아요 0 | URL
《쓸쓸해서 머나먼》이라는 시집이 생각나서 저렇게 적어보았습니다^^;; 《므레모사》는 이것저것 준다길래 얼른 구매를 했는데, 장르가 SF호러라고 나오네요? 호러는 좋아하지 않는데... (공포영화 절대 보러 안 가는 1인)
라로님도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416일이 돌아올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여러 문장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자주 떠올리는 문장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의 한 대목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연민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일깨우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이렇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154)


이 대목은 연민에서 그치는 것이 침묵하는 권력에 동조하는 것이기에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로도 읽히지만, 불의와 폭력에 맞서 끊임없이 행동하고 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연민에 머무르며 자신이 힘을 쓸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숨는 것은, 개인을 '비-존재'의 영역으로 몰아가는 세계를 묵인한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일인시위용 피켓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동생에게 그 자리에 같이 가자고 말하자 단번에 싫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곰곰 생각하더니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용산이 참혹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알며 그러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기는 무섭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처지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만 생각해보자. 광장에 모인 오십만, 칠십만의 촛불을 향해 촛불을 들지 않은 나머지 사천 몇 백만의 손이 있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시절에, 당신의 침묵과 부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 황정은, 입을 먹는 입(문학동네 61-2009.겨울, 51-52(쪽수는 전자책 기준))















6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월호에서 우리가 (프리모 레비가 줄곧 말해왔던) 세상에 대한 수치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변화해야 할 지점들과 기억해야 할 이름들, 그리고 발화해야 할 언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공공연하게 세월호를 깎아내리는 발언이 전파를 타고, 탄핵 이후 청산될 줄 알았던 적폐의 정치는 산재해 있고, 진상조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촛불이 광장을 가득 채웠던 혁명의 시기를 지났음에도 세계의 움직임이 너무나 미미해서 변화하는 것 같지 않아 눈을 돌릴 때, “침묵과 부재는 권력이 과거를 되풀이하도록 만들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또다시 우리에겐 세상을 바꿀 힘이 없었다며 면죄부를 줄 것인가.
















니체의 입장에 우리가 난감해하는 것은 그가 수치심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쳐서가 아니라 고결한 자의 수치심과 선한 자의 연민을 대비시키며 후자를 집요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고결한 자와 비교했을 때 연민의 정을 지닌 선한 자는 사실 자기 역량의 최소치만을 사용한다그들은 고통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 아주 소량의 도덕적 선행만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도덕주의자들을 마비되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앞발을 갖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그런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그들은 자신의 역량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진은영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눈먼 자들의 국가, 72-73)


6년 전 오늘의 나는 사건의 존재마저 알지 못했던 무지하고 침묵했던 이였다. 6년이 지난 오늘은 총선 결과가 도래했고, 앞으로 도약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나는 다만 6년 전의 수치심을 간직한 채 감각을 곤두세우고,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화할 따름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호명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 걸음일 것이다. 여전히 발화되어야 할 목소리들은 우리와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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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3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9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을 읽던 중 연도의 오류가 눈에 띄어 짤막하게 적는다. 이 작품은 거칠게 정리하자면 1950~60년대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줄스와 모린이 겪는 이야기인데, 210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9667. 줄스는 북쪽으로 돌아온 것이 아직 몹시 기뻤기 때문에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매주 어머니를 차로 데려다주는 일이 전혀 싫지 않았다.”(470) 13장까지 줄스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말미에 어떤 극적인 사건을 줄스가 겪는 것으로 2부가 끝난다. 그리고 31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9664. 사랑에 빠진 소녀가 거울 앞에 서 있다. 꼼짝도 않고.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모습에 고정돼 있다. ‘모린 웬들이라는 이름이 그 모습에 붙어 있다.”(563)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19664의 모린은 ‘19667이후의 줄스가 겪은 사건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뒤에 이어지는 줄스의 이야기를 보았을 때 ‘19664‘19674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이 작가의 오류인지 아니면 출판사의 오류인지는 원서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확인하기 어렵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14(2016).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읽었는데,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전개와 문체, 구성은 대가의 솜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 겪는 이야기라는 점은 최근 번역된 카시지와 유사하나, 69년에 출간된 그들 더 높은 성취를 이룬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토록 참혹했던(혹은 여전히 참혹한) 무형태의 현실에 문학은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챕터의 말미에 총잡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전형적이었지만.¹ 카시지를 읽은 후에도 정리를 하고 싶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하지 못했는데, 그들에 대해서도 전체를(그러니까 717페이지를) 아우를 수 있는 글로 정리했으면 싶다. 하지만 미루지 않고 할 수 있을지?















¹ When in doubt how to end a chapter, bring in a man with a gun. (This is Raymond Chandler's advice, not mine. I would not try this.) 조이스 캐롤 오츠가 트위터에 공개한 글쓰기를 위한 10가지 조언(tip) 중 다섯 번째. 해석은 이렇다. "어떻게 한 챕터를 끝내야 할지 망설여질 땐, 총을 든 남자를 등장시켜라(이건 내가 아니라 레이먼드 챈들러의 조언이다. 나는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10개의 조언 전체는 다음 링크에서 찾을 수 있다.

원문: https://www.huffpost.com/entry/joyce-carol-oates-writing_n_3617152

번역(은행나무 출판사): http://ehbook.co.kr/24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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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히 세워졌다고 믿었던 정신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최근 몇 차례 있었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오랫동안 감춰두었던 끝없는 우울과 고독의 심연이 다시 드러나고 있음을 실감했다.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하든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오래 전 외로움에 대해 썼던 잡스러운 에세이에서 인용했던 노래 가사를 다시금 떠올려야 했다.












너를 떠나 살 수 있을까

나의 가장 오랜 벗이여

나는 네가 없이는 내가 아닐 것 같아

차가운 너의 품 안에서 눈 감으면

어느새 꿈속을 걷는다

- 자우림, 슬픔이여 이제 안녕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음에도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사랑하는 손)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던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연달아 읽으며, 그녀의 시 세계 전반에 깔려 있는 괴로움/외로움/그리움/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내 청춘의 영원한)로 함몰하는 나를 보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과정을 감내하면서 끝까지 읽어낼 수밖에 없는 것은, 허무와 죽음만이 상존하는 세계 한복판에서 자신의 고통을 끊임없이 언어와 이미지로 잡아내려는 시인의 처절한 외침이 토해내는 정서가 나를 끊임없이 붙잡기 때문이다. 김치수 평론가는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잡아냈지만, 난 그녀의 시를 읽을 때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때의 외로움이란 감상(感傷)으로서의 외로움(loneliness)이 아닌, 모태의 순간부터 죽음에 진입하고 있음을 체감한 시인의 외로움(solitude)에 가깝다. 나를 맴돌고 있는 트라이앵글의 한 축으로서의 외로움이 결국 고독이라는 근원에서 뿜어내는 핏물과 같은 것인지를 생각하며, 여전히 나는 처음으로 만났던 그녀의 시, 외로움의 폭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만남 이후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집을 완독하였지만, 여전히 첫 시를 가장 좋아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죽음과 어둠이 전부인 곳으로 존재하며, 그 안에서 외로이 살아가는/죽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때로는 골수와 핏물이 넘치는 모습으로, 때로는 사지가 절단되어 내버려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살아 있다는 것이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찌기 나는)는 시인에게 청춘()이란 초록의 무서운 공황이자 귀신 같은 푸르름(무서운 초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비극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음에도 서른 살은 온다(삼십세)는 것이며,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이가 시인 자신뿐이기에, 너희들 문간에는 언제나/외로움의 불침번이 서 있"음에도 "고독한 시간의 아가리 안에서/너희는 다만/절망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절망하기 위하여 성교(과거를 가진 사람들)할 뿐이기에 더 거대하게 다가온다. 그녀의 시가 표출하는 이미지들이 섬뜩하면서 잔혹하고, 때때로 추악한 모습을 띠는 것은 정과리 평론가의 말처럼 죽어가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 너희들을 깨우기 위함일까.

  













즐거운 일기에서도 시인의 인식은 거의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에게서 세계 자체로 시선을 돌리는 시편들이 눈에 띈다. 여기에서 시인이 인식하는 세계는 유해 색소의 햇빛에 조금씩 들끓으며/발효하기 시작하는 거대한 반죽 덩어리이자, 입으로는 하루종일 먹었던 온갖 더러움을 게거품처럼 조용히 게워내는 세계이다(여의도 광시곡).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읍니다.”(즐거운 일기) 시인은 홀로 대낮에 서른 세 알 수면제를 먹고도 잠들 수 없는 사악한 밤의 세계에서(수면제), 어느 한 순간 세계의 모든 음모가/한꺼번에 불타오르(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는 곳에서 폐광처럼 깊은 잠을잘 수 없고, 항상 깨어서 이 피곤한 컹컹거림(시인)을 멈추지 않는 것이 자신의 숙명임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울부짖음은 불발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어서, “공포이자 암흑덩어리인 세계는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악순환)처럼 악순환을 반복할 따름이다.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간 아이들은

남아연방의 피터마릿츠버그나 오덴달루스트에서

질긴 거미집을 치고, 비율빈의 정글에서

땅 속에다 알을 까놓고 독일의 베를린이나

파리의 오르샹가나 오스망가에서

야밤을 틈타 매독을 퍼뜨리고 사생아를 낳으면서,

간혹 너무도 길고 지루한 밤에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언제나 불발의 혁명을.(겨울엔 바다에 갔었다, 강조는 인용자)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우리의 노쇠한 혈관을 타고 그리움의 피는 흘렀다. 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술과 불이 우리를 불렀다. 향유 고래 울음 소리 같은 밤 기적이 울려 퍼지고 개처럼 우리는 제기동 빈 거리를 헤맸다. 눈알을 한없이 굴리면서 꿈속에서도 행진해 나갔다. 때로 골목마다에서 진짜 개들이 기총소사하듯 짖어대곤 했다. 그러나 197×, 우리들 꿈의 오합지졸들이 제아무리 집중 사격을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의 총알은 언제나 절망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197×년의 우리들의 사랑아무도 그 시간의 화상(火傷)을 지우지 못했다, 강조는 인용자)


그 와중에 조용히 죽음은 우유 배달부의 길을 타고 온다.”(무제 2) 여전히 더럽고 오물로 가득 찬, 절망과 고통과 공포와 죽음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시인의 외침은 단순히 울부짖음으로 끝나는 것인가. 때로는 죽음 충동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는 멈추지 않겠다는 아픈 다짐을 본다. 근원적으로 피비린내나는/이 세상의 고요 속으로/나는 처음으로 내려서겠읍니다.”(하산)와 같은 구절에 보이는 마음가짐에서, 나는 끝내 잠들지 못하고 고통을 이야기하겠다는 다짐을 읽으며 아파하는 것이다.




그녀의 시에서 나타나는 처절한 비극의 언어는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때로는 극언의 형태로 충격을 안기며 온다. 그것은 이미 죽음이 전체를 덮은 세계 때문이기도, 모태를 벗어난 순간부터 세계에 홀로 내던져진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나 시인은 컹컹대며 현실의 맨얼굴을 말하겠지만, 어떤 언어로도 외로움, 괴로움, 그리움의 트라이앵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녀의 시가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트라이앵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시인뿐만 아니라는 것을, 뒤로 벌렁 누운/거대한 다족류의 벌레와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고/죽어가고 있는 피골이 상접한 내 정신(여의도 광시곡)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매번 읽을 때마다 실감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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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7-03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넘 오랜만입니다! 최승자 시인 시 읽으면 말씀처럼 절절한 외로움 때문에 읽는 게 괴로울 지경... 님 글도 참 힘든 게 느껴져서 ;_;).... 바다 구경이 필요할 듯!

아무 2018-07-03 20:35   좋아요 1 | URL
따뜻한 환대 감사합니다^^ 말씀처럼 그냥 읽어도 괴로운 시를 휑한 마음으로 읽는 건 참 고통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런 마음 상태가 아니었으면 두 권을 연달아 읽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싶어요. 최승자 시인도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몸부림치는 듯한 시를 쓴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문득 어깨에 손을 올려 사람을 놀라게 하는 벗 같은 존재라고 여기며 보내려고 합니다. 바다를 보며 뻥 뚫리는 기분도 느끼면서.. ^^;;

2018-07-04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6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22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1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1-12-22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링크타고 와서 읽었습니다. 아무님은 정말 평론가 같으시네요. 요즘 최승자 에세이 다시 나오고 있는거 같죠. <이 시대의 사랑>은 제게도 최고의 시집입니다. 나중에 에세이 읽고나면 한번 더 읽으러 올께여 ㅎㅎㅎ

아무 2021-12-23 00:00   좋아요 1 | URL
과찬이십니다😆 뭔가를 쓸 때마다 항상 걱정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가 이걸 잘 이해해서 쓰는 건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어렵게 쓰고 있는 건가?‘하는 것이에요😅 어려운 것, 혹은 감정이나 상념처럼 언어로 잘 표현하기 어려운 걸 쉽게 풀어서(또는 빗대어서) 쓰는 능력을 갖는 게 제 목표 중 하나입니다 ㅎㅎ.. 에세이는 딱 두 꼭지만 읽어보았는데 여전히 좋았어요. 내년에 다 읽고 다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쟝쟝님 건강 조심하시고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잘 마무리하시길 바랄게요🥳 북튜브도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공쟝쟝 2021-12-23 12:39   좋아요 1 | URL
어렵게쓰는 것도 능력이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ㅋㅋ 하지만 잘 풀어쓰고 싶은데 어렵게 써진다면 더 연마 하셔야…(응?) 북튜브… 아무님 보지 마세요 ㅋ 그거 보지말고 책보고 글써요 ㅋㅋㅋ 자주 많이 쓰라고요!! 주간 아무르 홧팅!!

아무 2021-12-24 17:28   좋아요 1 | URL
유튜브는 잘 안 봐도 북튜브는 나름 챙겨보는 것들이 있답니다... ㅎㅎ 연말 업무폭탄들만 잘 처리하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혼자이든 여럿이든 평안한 크리스마스 연휴 보내시길😁
 

출장을 달고 아이들과 김수영문학관을 방문했다. 아이들은 김수영에 대해 1도 관심이 없었고 나 역시 쌓여있던 피로감에 처음 시청하는 영상을 보면서 꾸벅꾸벅 졸기도 하였으나, 문학관을 천천히 돌다 보니 1년도 안 되어 피폐해진 새로운 일상에 꺼져 있던 필심(筆心)에 불씨 하나가 피는 듯했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그의 시보다 산문에 눈이 가는 나를 보며, 역시 나는 산문형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도 했다(그래서 나의 생활이 한없이 풀어져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3월부터 지금까지 예전의 열의를 가지고 책에 손을 댄 것이 몇 번이나 되었는지를 헤아리며,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할 때면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 다음 날의 일을 또다시 준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그것은 결국 핑계일 뿐인 걸 잘 안다.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 달에 한 권도 못 읽는 일이 잦았을 것이다. 독서가에서 수집가로 전락하는 순간들. 결국 독서라는 것은 체력과 의지의 문제임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일터에서 나의 정신을 피로에 쩔게 만드는 사건/사고/사람들이 좀 줄었으면 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은 지지 않았다.


김수영의 글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고 이렇게 간만에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마 그의 글에 담긴 치열함 때문일 것이다. 옳고 그름, 좋은 시와 나쁜 시의 구분을 떠나서, 그의 글에는 지금이 아니면 끝이라는 치열함이, 그가 말했던 '온몸의 시학'이 구현되어 있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도 결국 '온몸'이라는 말의 어감과 의미가 주는 울림 탓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불온한 시'와 '시인의 헛소리'가 오늘에 더더욱 요구되는 때라고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고.


넋 놓고 시간만 때우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마음에 드는 시를 필사하게 했더니, 아이들은 그나마 짧은 <눈>과 <풀>을 적기 바빴다. 언제쯤 이 아이들은 김수영이 가졌던 치열함의 태도를 이해하게 될까. 앎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제 수집가에서 다시 독서가로 돌아갈 힘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경험이 '낙숫물' 한 방울의 힘이 되길 바랄 따름이다. 내일 모임에서 이야기할 책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다. 슬슬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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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5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1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무님의 글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 2017-09-16 13:53   좋아요 0 | URL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ㅎㅎ 저도 좀더 짬과 의지를 내야 할 텐데요ㅠㅠ 저도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노력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cyrus님이 그동안 쓰신 리뷰들도 쭉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