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B라는 친구가 있었다. A는 B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A가 B를 일방적으로 싫어했다는 말이 맞겠다. 생각해보면 B가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좋지 않았는데, 나는 A와 친했고 B와도 그냥 나쁘지 않은 사이여서 그냥 그렇게 지냈다. 시간이 지나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다시 A를 만났다. 그때 A가 이런 말을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자신이 왜 B를 싫어했는지 그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이유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싫어했던 감정만 남았다고.















악스트 3호의 작가는 공지영이었다. 나는 공지영의 소설을 네 권 읽었고, 작가 공지영은 좋게 생각했었다.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실망하긴 했지만. 그렇지만 나에게는 공지영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는데, 이번에 책 표지를 보고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공지영에게서 등을 돌린 이유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작가로서의 그녀가 싫었던 것도 아니었고, 페미니스트로서의 그녀가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더욱이 나는 내가 모르는 것에 있어서는 물러서므로,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트위터 때문에? 혹시나 싶어 트위터를 보았지만 최근 글에는 리트윗한 것들뿐이어서 관두었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아, 이유를 생각하는 일을 관두고 무의 상태로 다시 보기로 했다. 아마 내가 등을 돌렸던 이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 때문이었을 것 같지만, 그 기억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어찌됐든, 어떤 사람에게나 새겨들을 말은 있기 마련이다. 설령 적이라도.


그럼에도 그러한 소설들이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수동적인 여자들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들이 그런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말을 바꾸면 어떤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게 남성들이고 남성들이 선택한 게 수동적인 여성상을 선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소위 진보적인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조차도 소설 안에서의 여자가 진보적인 건 수용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로 소위 진보 문학권에서도 『토지』를 인정한 적 없잖은가. 『토지』의 서희가 우리 문학의 여자 계보에서 보면 대단히 선진적인 여자가 분명함에도 인정받은 적 없다고 생각한다. (...)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나는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더니티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를 지금 읽으면 지금에서의 모더니티가 살아난다. 왜 그러냐면 캐릭터가 시대에 함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 그 시절에 맞는 모더니티가 생겨나는 것이 작품의 생명력이다. (...) 우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아직 춘향이도 못 넘고 있다. (112쪽)


"저보다 더 늙은 것 같아요, 젊은 작가들이"라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요즘의 한국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무기력함을 보면 수긍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모든 활동들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정치적인 이념의 영역이지만, 그녀가 자신이 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하고 뛰었던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듯하다. 인터뷰를 천천히 읽으면서 내가 왜 등을 돌렸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내가 한국문학에서 그렇게 후진 존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같은 말을 자기 입으로 하는 건 좀... 나랑은 안 맞는다), 그녀에게 상당히 가혹한 프레임이 씌워지고 대표로 공격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거침없음을 불편해 하던 사람들에게 등을 돌릴 계기를 부여해준 꼴이라고나 할까...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음을 유지하고 끌고가는 작가의 모습이었다.


인생을 살아오며 절절히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언제나 똑같은 원칙이 보였다. 그것은 그나마 진실이 모두를 덜 다치게 한다는 것. 진실이 우리를 해칠 것 같고, 바르게 얘기하면 고통을 받을 테니 숨겨야 할 것 같지만, 아니다. 진실만이 우리를 가장 덜 다치게 할 수 있다. (124쪽)


공지영이 바라보는 한국사회는 가혹하고 폭력적이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어떤 희망적인 시선을 놓지 않는 듯하다. 종교의 힘인 것일까? 3호의 작가가 공지영이라는 사실에 걱정이 들었었지만, 나에게는 작가 공지영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괜찮았던 것 같다.


서평으로 돌아와서, 이번에 실린 서평들을 읽으며 내가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전반적으로 '문학적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이 표현이 서평에 붙을 수 있는 찬사인가, 비판인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서평이란 리뷰(review)로써 독자에게 프리뷰(preview)를 제공해야 하는 글쓴이의 외줄타기 같은 것인데, 문학적인 서평은 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의문이 남는다. 이는 아직도 내가 서평이 어떤 글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심이 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나는 목차를 보고 내가 읽은 소설이 고작 세 편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하였다. 그리고 황현진의 서평을 읽으면서 자신이 쓴 단편이 포함된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 서평과 서평이 다루는 책은 결국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중언부언이기도 하다. 과연 저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난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확신할 수 없는데.


쭉 읽으면서 지난 호보다 장르가 다양하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만화에 대한 서평(그렇다. 그것도 아직 연재중인 순정만화에 대한 서평이다)이 실려 있어 약간 놀랐다. 정영목 번역가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대한 서평은 영화 <가족의 탄생>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본 사람이라면 좀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으면서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책과 영화를 끌어온 건가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평은 조르주 바타유의 <불가능>에 대한 김뉘연 편집자의 서평이었는데(제일 짧아서 그랬던 건 아니다), 최근에 이성복 시집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이 쓰여있어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시란 "도달할 수 없는 가능성들에 대한 언어적 환기일 뿐"이라는 바타유의 말처럼, 결국 나도 이 시에 도달할 수 없는 건가라는 아득함이 몰려왔다. 결국 나는 '불가능'을 말할 수밖에 없는가. <불가능>을 읽어보고 싶은 밤이었다. 바타유, 바타유...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였더라...


볼라뇨의 <2666>에 대한 서평을 읽으면서, 1752쪽짜리 소설을 서평으로 다루겠다는 글쓴이의 분투가 대단하기도 하고,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결국 이 서평을 통해 전체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건 맹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이다. 작년에 잠시 불었던 볼라뇨 신드롬을 잠시 생각하며, 그때 구입한 그대로 책장에 꽂혀 있는 그의 처녀작 <아이스링크>를 바라보았다. 저걸 읽고 마음에 들면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사야지, 라는 생각으로 샀던 것인데 아직 저 책도 읽지 못한 현재에서, 대작인 <2666>은 나에게 미독이 아닌 비독의 영역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저어하였다. 그렇게 하나둘씩 멀어지는 건가, 하고.


작가 인터뷰까지 읽었는데 세 시간이 흘렀다. 몇 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다(아, 옛날이여...). 소설들은 뒤로 미루고, 따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야심한 시각에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소설 다 읽고 따로 리뷰를 쓸 마음이 들긴 할까. 아니, 곧 바쁜 시간이 엄습해서 4호가 나오는 다음 달까지 미루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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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12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셨어요~^^
가끔 뭔지 모르게 휘둘릴적 있죠..
싫다는 건 그만큼 지배받는단 것이기도 해요..^^

아무 2015-12-12 09:23   좋아요 1 | URL
싫다는 건 지배받는다는 것이라는 말이 와닿네요^^ 그땐 뭔가에 휘둘렸던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결국 지금부터 다시 찬찬히 보고 판단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들고..

AgalmA 2015-12-12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등을 돌렸어도 서로가 재고할 수 있다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겠죠. 그 재고에 구구절절 근거를 따진다면 접어야죠. 마음이 있다면 이성의 잣대란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잖아요? 1.2.3....그렇게 재고한다면 그건 교우가 아니라 비지니스겠죠.
헌데 작가는 참 곤란한 상황인 듯. 한 번 돌아선 독자가 작가에게 다시 마음을 주고 책을 사서 혹은 빌려서라도 읽기란 참 어려운 일이잖아요. 독서는 가장 이기적인 교우라고 할 수 있으니. 작가의 일방적 노력이 절대적이죠. 아무님께 공지영 작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했다니 Axt 큰일 했는데요!

<예술가의 항해술>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존 스테제이커에겐 일명 ˝B타령˝이란 게 있어요. 수십 년간 블랑쇼, 바슐라르, 바타유, 바르트 등 첫글자에 B가 들어가는 인물들의 이론만 가르쳐대니 뿔난 원로들과 사서들이 그의 책을 금지하는 사태도 있었다지 뭡니까ㅋㅋ 그런데 전 존 스테제이커 그 심정을 너무 알겠더란 말이죠. 제가 흠모하는 철학자를 그렇게 줄줄이 말하고 있는 그의 강의가 얼마나 듣고 싶은지!

바타유! 바타유!

아무 2015-12-12 09:52   좋아요 2 | URL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 한 번 등돌린 작가의 책을 읽어본다는 건 확실히 어렵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공지영 소설이 가진 사회적인 힘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소설을 낼지, 그 소설을 다시 찾아 읽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낸 소설들을 다시 찾아볼 거라는 생각은 드네요..

저라는 사람이 과격한 것, 또는 극단의 위치에 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요즘 같은 세상에 회색분자라고 욕먹기 딱 좋은 사람이죠) 제가 등을 돌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내용이 가치있어도 그것을 담는 표현이나 형식이 잘못된 것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아마 그런 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등을 돌리게 된 이유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은 하는데.. 하지만 특히 공지영 작가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고,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여류 소설가`라는 이름을 씌워 별난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이혼율이 이렇게나 높은 사회에서 이런 프레임으로 비난의 빌미를 준다는 게 우스운 일이기도 하고..

오래 전에 인터뷰 기사에서 본 것 같은데, 그녀가 이상문학상을 받을 때 시상식에 온 작가가 그 전 해 수상자였던 박민규 작가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구요(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작가들이 보여주는 탈정치적인 모습도 보이고, 사회적 목소리를 드높이는 작가에게 우리 사회는 얼마나 가혹한지도 생각해 보게 되네요. 꼭 진보적인 작가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예술가의 항해술>은 아직 못 읽었지만, 바타유에 대한 부분은 유심히 보게 될 것 같은...^^ 조만간 읽어봐야겠어요!

AgalmA 2015-12-12 15:13   좋아요 2 | URL
해외엔 마르케스도 결혼 3번, 그 이상인 작가도 많죠. 결혼 2번은 아주 흔해서 얘기거리도 안되고ㅎ 누군 그 정도 해도 되고 누군 안되고 그런 게 있습니까. 특히나 매우 사적인 일을 공적으로 비난하는데 누구 윤리를 말하는지 우스워지는 대목입니다. 작가들 이혼은 빈번한 일이기도 한데 그걸 특이사항으로 볼 정도인가요. 일반인 재혼도 많은 마당에. 공지영 작가 이혼에 대한 가타부타는 아주 많은 레이어들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뿌리깊은 가부장제 의식, 여성 사회 참여에 대해 우습게 보는 일(이외수 작가 트윗과 좀 다른 맥이 있지 않나 싶죠), 유명세에 대한 시기와 폄훼, 글과 현실 동종에서 품위를 바라는 대중적 기대심리...참 많은 게 섞여있죠. 모두들 자신은 있는 그대로(이상인 걸 알면서) 봐주길 바라며 작가라면 이름값 하라는 식은 우리 안의 또다른 엘리트주의 아닐까요.
공지영 작가 소설이 제겐 대체로 다 취향에 맞지 않지만(노력해도 이건 참^^;;) 한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사회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노력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면 뭘 무조건 옳고 제대로 해! 식의 채찍질...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고 말해야 될 테죠. 작가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좌충우돌하는 인간이잖아요. 이리 말해도 저도 종종 경솔할 때 많죠. 작가에게도, 친구에게도.

[그장소] 2015-12-12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떠올릴 만한 근거가 당장은 주변에 없으므로..
왜였는지도 기억이나지 않을 수있죠..언젠가 그모든것이
번개가 치듯 연쇄적으로 떠오를 수도 있겠고..영영 깊이 가라앚을 수도 ..있는 ..거죠.
불현듯 ㅡ떠오르는게 기억인 거거든요.. 꺼내려 않해도..^^
애쓰지 마시길~^^
 

고시생의 하루하루는 쳇바퀴처럼 무료하다. 뭔가 일이라도 생겼으면 싶지만 그런 사소한 일도 없이 굴러가는 일상. 이런 일상에서 좋은 소식이라도 들렸으면 좋으련만, 최근 들어 듣게 되는 뉴스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국정화 문제, 표절 문제... 등등. 하나같이 염세적인 눈을 들이대게 되는 사건들이다. 요즘 들어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의 대부분은, 문제가 원래 갖고 있던 본질이 흐려지고, 본질이 아닌 엉뚱한 것들만 붙잡고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정화 문제가 가지고 있던(혹은 가졌어야 할) 본질은 가려지고 이념 대립을 통해 편 가르기에 열중하는 여야 세력과 같이.


 















표절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면 신경숙 작품의 표절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일단락되고, 그동안 소홀했던 표절에 대한 깊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그들은 여전히 표절이냐 아니냐를 놓고 왈가왈부한다. 문자적 유사성이 어떻네 하면서.

 

'창비 라디오 책다방 시즌 2'를 3회까지 들었다. 원래 1, 2회를 들은 뒤 짜증나서 듣지 않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3회에 나오는 게스트가 시즌 1의 진행자였던 김두식 교수와 황정은 작가였기 때문에 3회도 들어보기로 했다. 3회 동안 표절 문제를 다루기로 한 것은 진행자인 박혜진 아나운서가 강하게 주장을 피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표절 문제를 제대로 다루겠다면서 보여주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이게 제대로 다루겠다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김두식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책다방은 표절 문제를 다루면서 1회에는 공동 진행자이자 창비 편집위원인 송종원 평론가의 설명과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고(도대체 왜 그는 끊임없이 김슬기 기자에게 언론에도 잘못이 있다며 그를 꾸짖는가), 2회에는 오랫동안 창비의 편집위원이었던 최원식 평론가를 게스트로 불렀으며, 3회에는 전 시즌의 진행자를 불렀다. 이런 모양새를 보면 제대로 다루겠다는 말의 진의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1, 2회를 통틀어서 제대로 말했던 사람은, 1회에 게스트로 나온 김슬기 기자와 박혜진 아나운서뿐이다.


황정은 작가가 나왔으니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들은 3회에서는 김두식 교수와 황정은 작가의 말들이 독자들을 어느 정도 대변하고 있고, 그나마 날선 비판을 하고 있어서 속이 조금 시원했다. 그나저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황정은 작가가 이렇게 목소리에 힘을 주고, 이렇게나 길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 봤다...


제가 송종원 선생님의 이야기를 1회 때도 듣고 지금 방송으로도 또 듣고 있는데, 제가 정말 불편한 지점이 뭐냐하면, 왜 이렇게 자꾸, 창비 쪽에서 자꾸 이렇게 ‘하지만’을 붙여서 얘기를 하는지... 그러니까 대중이 정말 궁금해 하는 것하고, 창비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내용하고 괴리가 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 창비의 가을호를 기다렸는데, 저는 다양한 형태의 성찰과 논의가 실릴 거라고 예상을 했는데, 예상하고 거리가 상당히 멀었어요. 그리고 책다방 이번 시즌의 앞선 내용들도 계간지 내용하고 별로 다르지 않았고.. 백낙청 선생님이나 송종원 선생님이나, 그게 실은 옳은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작가로서, 그리고 일개의 독자로서, 저는 계속 허탈한 거죠, 이 상황이.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는데, 비유를 좀 해보자면, 최근에 영화 <베테랑>에서 유아인의 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면서요.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라졌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했더라구요. 그런데 이 경우에도 그게 사라진 거예요. 갑자기. 작가는 열심히 쓰고 독자는 읽고 있는데, 각자의 맷돌을 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이가 사라졌어. 뺏긴 거예요. 어디 갔는지 없어져 버린 거야. 근데 그걸 가져간 측이, 사과를 하는데, ‘어, 미안하다’, 근데 여기에 자꾸 '하지만'을 붙여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러면서 자꾸 뭘 붙이는데, 이게 그것도 대단히 어렵고 단호한 어휘로, 점점 더 많이 뭔가를 계속 붙이고 있는데.. 또 이 사태에 가장 어이가 없는 건 한국문학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들일 테고. 그런데 이 독자들한테 자꾸 뭔가 삿대질하는 느낌이 있다는 거죠. ‘미안해. 근데 하지만 당신들이 몰라서 이러는데..’ 이러면서 뭘 자꾸 덧붙여요. 그래서 저는 창비가 ‘하지만’이라는 것을 바깥에 호소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해 물을 수 있는 집단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현재까지는 그걸 볼 수가 없었어요. 제가 좀 이 상황이 답답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한테는 충분하지 않고, 창비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들이 분명 있을 텐데 큰 선생님들 목소리만 들린다는 거죠. 이 상황이 대단히 한국적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맥빠지기도 하고. 문제가 터지고, 비난과 비아냥은 압도적으로 쏟아지는데, 이것에 관한 지속적인 논의나 성찰의 장은 대단히 드물고, 그리고 관심은 속된 말로 짜게 식어버리고, 그 와중에 당사자들, 한국문학의 작가들하고 독자들은 찐빵처럼 벙쪄가지고 무기력과 이런 걸 경험하면서 이러고 있는 상황이란 말이죠. 특히 한국문학의 젊은 작가들, 저보다 더 젊은 작가들, 이 사람들은 그냥 바바파파가 돼버렸어요. 이게 사람들 사이에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게 안 보이는 존재들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있는데 없는 거야. 이런 존재가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저는 사태가 이렇게 되어버린 데 창비의 태도가 한몫을 크게 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창비가 이런 점은 간과를 하고,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만약에 아니라면?' 이걸 붙들고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황정은 작가와 김두식 교수의 말들은 문학동네 좌담에서의 손아람 작가만큼 날선 발언들은 아니다. 하지만 처음 두 회를 듣고 이걸 들어서인지 표절 사태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 허탈함을 이야기하고 있어 속이 시원했던 것 같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창비의 태도는 한국문학을 읽어왔던 독자들을 봉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표절의 본질을 의도성이라는 단어로 자꾸만 흐리게 하고, 감춘다. 표절 문제의 본질이 의식적이냐 무의식적이냐는 전혀 상관없는 주제다. 하지만 송종원 평론가는 3회에서도 그 전과 다름 없는 모습을 보인다. 김두식 교수가 나와서 했던 말들은, 문학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훅 들어오는 면들이 있었다. 차마 다 받아적을 자신이 없어, 일부분만을 인용한다.


근데 의도성을 단정할 수 없는 거는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의도성을 단정할 수 없다라고 하는 표현을 자꾸 쓰는 거 자체에 이미 어떤 의도가 담겨있다고 보이는 거죠. 그래서 대중들이 아마 분노하는 걸 거구요.


창비의 태도는 그의 말처럼 표절 문제에 앞장서겠다는,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헤쳐보겠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면서 문자적 유사성이니, 의도성이니 하는 단어를 휘두른다. 이런 제스처뿐인 말과 논의 속에 본질은 사라졌고, 관심은 빠르게 식어갔다. 그럼 그렇지, 하면서.


창비가 표절에 대해 취하는 모습은 정치권의 모습과 닮았다. 본질을 흐린다는 점에서. 시간이 약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문제의 본질에 칼을 들이대지 않으면, 한국문학은 계속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곧 내가 받게 될 문학동네 겨울호나 창비 겨울호에 대한 기대가 식어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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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5-11-0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과 전혀 관계없는 잡담: `비밀독서단`이라는 TV 프로에 이동진 작가가 나왔다는데, 황정은 작가의 <百의 그림자>를 추천해서 함께 이야기했다고 한다. 알라딘 검색창에는 `비밀독서단에 나온 최초의 소설` 이런 식으로 나오던데, 이 방송을 한 번도 안 봐서 모르겠으나, 보니까 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도 나온 것 같던데... 아무튼 황정은의 팬인 나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조만간 책을 다시 읽고 여태껏 쓰지 않은 황정은의 장편 3편에 대한 리뷰를 써서 정리를 해야 될 것 같다..

아무 2015-11-17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련기사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32&aid=0002648682&sid1=001
 
세계와 작가

먼댓글이라는 걸 처음 해봐서... ㅎㅎ

 

장강명 작가의 인기의 시작이 확실히 현재 사람들의 울분과 통했기 때문이라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대표적인 게 <표백>과 <한국이 싫어서>가 되겠죠. 그리고 현재 한국문학의 특징이 말씀하신 세 가지 안에 다 들어간다는 것도 슬프지만 사실이구요. 대표적인 것이 백수죠. 혹자는 2000년대 초까지 한국문학의 지배소가 신경숙의 고백하는 문체였다면, 현재의 지배소는 백수 캐릭터라 말하면서, 한국문학사상 가장 처치곤란한 인물들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한국문학에서 현실성이 강한 소설이 거의 대부분을 이루는 건 리얼리즘이 현실 참여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전통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현실이 더 소설같은 상황에 그 이유가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국적인, 혹은 스케일이 큰 문학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비판을 피할 수 없겠죠(본격문학만을 중시하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라고 봅니다).

 

운동권 자살을 같이 엮었던 건, <표백>에서 중간중간에 나오는 자살 선언 관련 기사 중 '88만 원 세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이 있어서 떠올렸던 것입니다. 찰스 맨슨에 대한 얘기가 앞부분에 나오는데, 자살 선언은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세계에 대한 복수' 역시 마찬가지로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저 역시 자살이라는 방식이 표백 세계에서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대안은 아니라고 보구요.

 

장강명 작가의 강점이라면 그동안 굉장히 어렴풋이 에둘러 다루었던 현실을 마치 날것인 듯 독자들에게 들이밀었다는 점이겠죠. 그 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면 근력을 좀더 키우는 몸 만들기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을 하더라구요. 다양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전략이라고 하고, 방대한 주제를 다룬 소설을 쓰는 것이 야심 중 하나라고 하니, 저는 앞으로의 행보가 좀더 기대됩니다. 현재 작가는 좀비물(...)을 연재하고 있고, 한국전쟁에 대한 스릴러와 문학상 관련 논픽션을(저번 북토크 때 설문조사를 부탁하시더라구요..ㅎㅎ) 준비 중이라고 하네요(http://blog.aladin.co.kr/line/7756829)

 

답이 충분히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한도에서 최대한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횡설수설한 느낌이네요^^;; 그러니 제목도 횡설수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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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0-1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을 바랐다기 보다 장강명 작가 얘기가 나와서 저도 이런저런 생각을 말해본 거였는데, 수고를 끼친 듯해서 죄송한데요^^; 하지만 아무님의 진지한 성찰을 또 읽어 좋네요~

한국 실정상 ˝잉여인간˝은 늘 주요소재였죠. 전쟁으로든, 정치 사회적으로든, 노동으로든 파생될 수밖에 없었죠. <광장>이나 <무진기행>도 본질적으론 그 카테고리라고 저는 생각하고요.
그래서 <잉여인간>이란 제목을 아예 붙이고 나온 손창섭과 장강명을 비교 분석해도 재밌을 것이란 말을 한 것이고요. ˝반사회성˝ 의 발전상까지 비교해 볼 수 있겠죠.

저도 인터뷰 보고 스케일이 큰 작품 구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애초에 장강명 작가가 sf에서 소설쓰기를 시작했고, 작품에 과학을 많이 담는 게 보여서 좀 더 확장된 한국문학을 선보여주길 바라죠.

아무 2015-10-17 18:39   좋아요 1 | URL
저도 항상 생각만 했던 이런 얘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좋네요^^
댓글을 읽다가 문득 한국문학에서 `잉여인간`이 그 모습만 바꾸었을 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사회성`의 발전상처럼 그런 인물의 변천사를 다루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러면서도 요즘 다루어지는 `잉여인간`들이 여태껏 보아왔던 인물들 중 가장 무기력한 유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표출하지 않고 꾹 참는 첫 번째 유형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겠지만, 손창섭의 <비 오는 날>이나 <잉여인간> 같은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있었던 반면 지금의 작품들에는 그런 것도 부재한 것 같은, 세계 자체에 대한 무력함이 표출되는 것 같다고 할까..(당장은 윤성희의 작품이나 천명관의 `숟가락아, 구부러져라`가 생각나네요)
장강명 작가가 최근의 한국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특이한 면이 많이 있긴 해요. 그래서 제가 계속 기대하며 작품들을 찾아보는 걸지도.. ^^
 

올해는 문예지를 구독하고 문학상 수상집을 여러 권 읽게 되면서, 작품 해설이나 문학평론을 읽을 기회가 평소보다 많았다. 이런 글들이 선입견을 준다든지, 그 해석에 갇히게 만든다는 위험성이 있지만, 가다머의 말을 도용하자면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런 선이해가 쌓이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작품 뒤에 실리는 해설이나 비평을 피하지는 않고 항상 다 읽는 편이었다(하지만 그런 '해석학적 순환'이 정말 진정한 이해로 나아가게 해줄까? 글쎄..) 그런데 그런 선이해로 나아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를 가로막는 암벽들이 있었으니, 들뢰즈, 라캉, 아감벤, 한나 아렌트, 데리다... 그리고 지젝이었다. 평론이나 작품 해설을 읽다가 그런 암벽에 막히면, 나는 주위 맥락을 살펴보며 스리슬쩍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 무지막지한 사상가들의 암벽은 그런 행위를 허락해주지 않아 나는 번번이 선이해로 가는 걸 포기해야 했다. '왜 이렇게까지 어렵게 해설을 써야 돼?' 하며 짜증내기도 하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나를 막는 수많은 암벽 중 '지젝'이라는 이름의 암벽을 타기 위해 내가 부른 전문가 같은 책이었다. 언제까지고 이 암벽들을 빙빙 돌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 책은 지젝의 수많은 저서 중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이하 <실재의 사막>)를 주된 해설 대상으로 삼는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실재의 사막>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안내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필자가 '피상적인 읽기'를 지향하고 있는 만큼, <실재의 사막>을 읽지도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오랫동안 지젝에 관심을 두고 주목해오던 필자의 설명은 굉장히 이해하기 쉽게 지젝의 사상을 풀어내고 있다. 덕분에 어느 정도는 막힘 없이 책을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좋은 암벽 타기 선생님을 찾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문제는, 암벽은 결국 혼자 타야 되는데, 전문가의 조언만으로는 이것이 안된다는 것이다. 지젝을 좀더 매끄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캉, 헤겔, 마르크스, 레닌이라는 근육을 써야 하는데, 이건 내가 써본 적도 없는, 쓰려다가 좌절을 맛보았던 근육이었다. 한때 <소피의 세계>나 <철학 콘서트>, <시간여행>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헤겔만 나오면 그렇게 술술 넘어가던 책장이 안 넘어가던 기억이 선명한데. 그리고 구조주의 비평에 대해 공부할 때 외계어를 듣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라캉인데, 지금 이 암벽은 나에게 그들의 이름을 한 근육을 쓰기를 원한다. 이건 전문가 열 명이 와도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단련시키는 것밖에는.

 

헤겔과 라캉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하다 싶은 나에게 4장 '라캉주의 좌파'는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다른 장에서는 필자의 친절한 설명과 예시(지젝이 드는 예시+a)가 있으므로 그렇게 겁먹고 읽을 필요는 없었다. 지젝이라는, 굉장히 과격하면서 파격적인 주장을 하는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9.11 테러 이후의 세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과 허상을 짚어내는 지젝의 사유는, 생각하지 못했던 지평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특히 내가 인상적으로 읽었던 부분은 '냉소주의'에 대한 내용이었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란 한마디로 말하면 '냉소주의'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면, 냉소주의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면서도 한다"이다. 대신에 투덜대면서, 아닌 척하면서 한다. "내가 이런 걸 꼭 해야 돼?"라면서도 마지못하는 척하는 것, 그것이 냉소주의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상징적 임무를 전적으로 떠맡지 않으면서,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것을 수행한다." (<실재의 사막>, 102쪽)

(109p)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요체인 현대 사회에서, 냉소주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지배하는, 그리고 불합리한 체제를 움직이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을까?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남사스러운 시대를 보면 이 주장은 유효해 보이고,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치적 무관심과도 연결되기까지 한다. 어쩌면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인상깊게 기억되는 것일지도...

 

9.11 테러 사태 이후의 사건들을 분석하는 지젝의 시선은 냉철하고, 그 이면에 담긴 계급적이고 사상적인 시도를 들추어낸다. 하지만 정작 그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새로운 공산주의는 굉장히 막연해 보이는데, <실재의 사막>에는 이것이 제대로 설명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급진적인 그의 사상이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으며, 괜히 동유럽의 기적이라고 불린 건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사상에 100%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다른 저작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암벽은 반도 오르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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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에 홈스와 뤼팽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책이 있었다. 그 책이 나에게 추리소설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둘 다 매력적인 캐릭터였지만, 나는 뤼팽에게 더 눈길이 갔다. 그 당시에 <기암성>도 있어서 읽었었고...(전집은 아니었고 선집 중 하나였다) 그렇게 읽은 뒤 그 둘은 나에게서 잊혀지는 듯 했으나, 중학생이 된 후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1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을 발견했다. 그 책에서 신출귀몰하는 뤼팽의 모습이란... 하지만 도서관에는 전집이 없었고, 나는 알라딘(아직 aladdin이던 때)에서 전집을 발견하고 꼭 사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당시 가격도 15만원 안팎이었던 터라 부모님은 반대했다. 책을 사는 것에는 전혀 반대하지 않았던 부모님이었지만, 그 때는 정말 완강했다. 왜 이런 책을 굳이 사냐며... (장르문학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여전히 그러하듯) 며칠 동안 조르고 조른 뒤에야 나는 까치글방에서 나온 아르센 뤼팽 전집 스무 권의 주인이 되었다. (셜록 홈스 전집이 오기까지는 몇 년이 더 지나야 했다)

 

 

 

 

 

 

 

 

 

 

 

 

 

 

저작권 기한이 만료되어 우후죽순처럼 나왔던 뤼팽 시리즈 중 성귀수 씨가 번역한 까치글방 판은 여전히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황금가지 지못미... 하지만 표지는 예뻤어). 성실하면서도 깊은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한 번역의 질과 해설도 한몫을 했겠지만, 유일하게 <아르센 뤼팽의 수십 억 달러>를 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때만 해도 그의 해설에는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사랑>은 원고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정말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우연히 알라딘에서(이제는 aladin)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고 흥분에 젖었었다. 그리고 읽었는데, 흠...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치밀한 구석이 많이 사라져서 안타깝기도 하다. 코라라는 여성도 그렇고... 뤼팽의 꼬마 특공대는 홈스의 베이커가 특공대를 생각나게 했다. 뤼팽 시리즈의 명실상부한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 의의를 두어야 할 듯하다... (이것 역시 성귀수 씨 번역이며, 출판사는 문학동네)

 

어렸을 때만 해도 뤼팽과 홈스의 대립 구도 같은 것이 있어서, 네이버 지식인에도 '뤼팽과 홈스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같은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올라오던 때였다. 나는 둘 모두 좋아하지만 뤼팽의 호탕함과 유머러스함을 더 좋아했으므로, 철없는 마음에 인터넷에서 열폭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이 둘은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셜록 홈스 시리즈가 추리소설에 속한다면,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모험소설로 확대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대결 구도를 만든 건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의 잘못이 크다. 자기 멋대로 홈스를 작품에 등장시켰으니...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설정으로. 그런데 이 작품에서도 셜록 홈스의 이름이 또 언급된다. 하....

 

읽으면서 어렸을 때 뤼팽 전집을 쌓아놓고 같은 작품을 네다섯 번씩 읽었던 기억도 떠오르고, 여전히 뤼팽은 화끈하고 유머러스했다. 작품성만 놓고 보면 다른 작품에는 못 미치지만, 오랜만에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줬다는 것에 의의를 두련다. 이제 팡토마스를 찾으러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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