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난한 하루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성동구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이해타산적인 공부를 하고, 6시가 지나서야 상암동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도 앱은 이름도 생경한 디지털미디어시티역까지 한 시간이 걸린다고 알려주었으나, 실제로 걸린 시간은 30분이었다(그리고 30분 동안 길을 잃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걷다 서점에 도착했고, 좁은 공간이었음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30분이 조금 넘는 당신의 이야기와,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사람들의 질문들. 질문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작가의 삶을 꿈꾸는 이들이었고, 나는 질문하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에서 나서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고 당신의 싸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나는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며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로 들었다, 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그 중 한 사람은 백의 그림자를 읽었을 때는 인물들이 찢어지게 가난했어도 요즘 한국소설답지 않게 징징대지 않아서 신선했는데, 이번 작품에는 징징거리는 작품들이 많아서 좀 그랬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지만 징징, 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이 생각했던 징징, 이라는 말이 내가 생각했던 징징, 이라는 말과 같은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난 3년 동안 당신의 글들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은 징징, 과 같은 단어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징징, 이라는 말이 이 작은 연서를 쓰도록 마음먹게 했다.

 

길 위에서’, 라는 말이 더 맞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 많은 소설 속의 화자들에게 징징, 거릴 수 있는 삶은 없었다. 냉혹한 조건들은 이미 삶의 전제가 되어 있다. 그리고 화자들이 마주하는 생의 갈림길 위에 나는 자꾸 나를 위치시킨다. 내가 제희의 어머니라면, 내가 서점 앞에서 그 소녀를 보았더라면, 내가 도도라면, 내가 앨리시어라면... 그리고 내가 '나'라면. 거기에서 묻게 되는 질문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까이다. 바스러져 가는 존재들을 위해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질문. 하지만 그 길 위로 나를 안내했던 당신은 더 이상 없다. 잃어버린 길 위에서 답을 찾는 건 온전히 내 몫이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 싸인을 받았다. 처음 만난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쑥스럽고 긴장이 돼서, 눈도 못 마주치고 싸인하는 손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 한 사람 그대라는 말이 작은 울림을 주었던 까닭은, 그 말이 아무도 아닌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서다. ‘단 한 사람 그대라는 단독성이 아무도 아닌아무것도 아닌을 구별해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아닌을 종종 그 누구도 아닌으로 바꾸어 부르고 싶어진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이라고 생각하는 게 싫어서.

 

한 시간 반 동안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다시 한 시간 동안 당신을 보면서 여전히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나보다 훨씬 많이 아팠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작년 봄에 만났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마웠다. 옹기전을 용산과 겹쳐서 읽고, 웃는 남자를 세월호와 겹쳐서 읽는 것은 편협한 독서이지만, 지난 시간 동안 세계가 우리에게 가했던 모든 일들이 당신의 문장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읽을 때마다 느낀다. 그래서 항상 고맙고, 그 자리에 언제나 있어 주었으면 싶다.

 

아무런 친분이 없음에도 당신, 이라고 호명하는 것은, ‘와 같은 말이 주는 분리(또는 격리)의 느낌이 싫어서 그렇고, 당신의 글을 볼 때마다 내가 내 앞에서 나를 비추는 거울을 보는 것 같아 그렇다. 나를 비추는 라는 거울 말고 또다른 거울. 그 거울은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지 처럼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두 번째 책에 싸인을 할 때 나는 내 쑥스러움을 넘어 폭력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당신은 지금 현실에 너무나 폭력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 계속 밀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라고 짐작했던 말이었다. 내년에도 나는 마냥 기다리고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냥기다리는 것이 기다려지는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을 당신이 호명해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싸인을 다 받고 인사를 할 때 나의 눈과 당신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눈은 여전히 깊었고 맑았다. 소설과 작가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말했던 그 사람과 달리, 나는 당신의 글과 당신 자신이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재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제대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감상의 언어, 파토스의 언어를 최대한 아끼겠다고 다짐했었다. 설령 내가 책을 읽고 느낀 감상이 감정의 몰아침이어도, 그것을 어떻게든 이성의 언어로 붙잡는 것이 결함 많은 언어로 사고할 수밖에 없는 나의 다짐이었다. 언어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부딪치는 것이야말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숙명이라고, 그런 엄정함이 나의 존재론적 깊이를 파고들게 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사로잡았던 상념들은 감정의 언어로밖에 쓸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다짐을 허물고 이렇게 연서를 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당신과의 만남이 준 감정에 젖어서.

 

서점을 나와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또 길을 잃고 헤맸다. 집으로 가는 막-지하철은 이미 지나고 없었고, 신논현까지 빙빙 돌아가 좌석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서 당신의 필체를 다시 보면서 생각했다. 올해의 마지막은 아무도 아닌의 리뷰로 갈무리해야겠다고. 읽고 있던 두세 권의 책을 한쪽에 밀어두고 읽는다. 대부분 재독(再讀)이지만,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보이는 당신의 문장과 세계관을 생각하면서, 나는 밑줄을 긋는 것으로 당신의 아픔에 최대한의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만의 황정은론을 쓰겠다는 목표의 실현이 조금은 앞당겨져야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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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2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님은 황정은론 정말 잘 쓰실 분이시라는! 이 연서 보고 있는데 제가 다 감격스럽네요. 짝짝짝)))

아무 2016-12-24 19:3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네요^^;; ... 항상 생각만 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인데, 쓰려면 좀더 더듬어 보아야 할 길들이 있어서.. 몇몇 단편들은 아직 저에게 안개 자욱한 길이라서요;; 그 외에도 쓸 때 참고해야겠다 싶은 책들도 찾아봐야 하고... 내년부턴 조금씩 시작할 수 있을지도ㅎㅎ

2016-12-24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해 내가 했던 수많은 미련한 짓 중 하나는, 계간지가 나올 때가 되면 주요 계간지 및 문학 잡지의 목차를 알라딘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계간지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황정은 작가의 신작이 실렸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는데, 가을호까지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아서 아마 올해에 새로운 작품을 만나긴 힘들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창비 겨울호에 중편 웃는 남자가 실려서 깜짝 놀랐고, 곧바로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려 너무나 반가웠다. 신작은 나오자마자 구입했지만, 읽어야 할 책이 계속 밀려서(반납 기한이 있는 도서관 책이 상전이다. 이러니 산 책은 끊임없이 뒷전으로 밀려난다) 아직 읽지는 못했다. 목차를 보니 한 편을 뺀 나머지 단편들은 다른 경로로 읽고 리뷰까지 각각 썼었다..
















사실 내가 황정은 작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계속해보겠습니다가 나온 이후에야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데도 황정은 작가는 현재 생존해 있는 한국 작가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나는 도대체 황정은 소설의 어떤 점이 좋았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나는 황정은 소설에서 보이는 세계관과 윤리(윤리라는 말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에 깊게 공감했던 것 같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풀어내는 작가의 방식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문장은, 신작 아무도 아닌에 작가의 말처럼 붙어있는 제사(題詞).



글귀를 보는 순간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마음이 울렸고, ‘역시 나는 이 작가를 애정할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아닌아무것도 아닌’. ‘이 들어갔느냐 아니냐의 차이뿐이지만 이로 인해 생기는 의미의 차이는 크다. ‘아무것도 아닌은 말 그대로 nothing, 즉 그 존재 가치가 부정되어 ()’로 규정된 대상이다. 내 식대로 규정하면 비-존재다. 하지만 아무도 아닌이라는 말은,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규정하려고 해도 규정할 수 없는 개별적 사건으로서의 존재를 가리킨다. 그렇기에 아무도 아닌, 명실」(*)이라고 불렀을 때 명실이라는 개별적인 존재가 오롯이 빛나는 것이다. 그리고 명실이 가진 개별자로서의 존재성은, 세계에서 비-존재가 되어버린 실리를 기억하기 위해 글을 쓰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것이 황정은 작가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작가로서의 사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에 의해 비-존재가 되어버린 존재들을 기억하는 것, 기억하기 위해 쓰는 것. 그리고 그 쓺을 통해 존재성을 찾도록 돕는 것.

 

태블릿 PC가 세상에 등장했을 때부터 내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저 안에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증거가 들어있지 않을까... 였다. 결국 그 안에서는 찾을 수 없었지만. 일련의 국정농단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들은 정말 많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들, 청와대에 계신 당신들이 세월호를 비-존재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7시간 동안 무슨 공작을 벌였는지에 대한 진실이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지만, 드러난 것은 7시간 중 겨우 20(이라고 당신들은 말한다)에 지나지 않는.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지만, 촛불은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헌재의 탄핵 인용도 끝이 아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게 한 변화의 물결이 박근혜라는 한 인간의 물러남으로 끝난다면, 병들고 곪아버린 나라의 시스템은 다시 본 궤도에 진입할 것이다. 첫 걸음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는 사이, 당신들은 또다시 반격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의 광장이 지난 주보다 훨씬 더 뜨겁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권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광장이야말로, 당신들의 세계가 비-존재로 만들어버린 세월호를 기억하고 몸으로 쓰는 행위, 더 나아가 세월호를 다시 존재로 호명하는 행위의 공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 『아무도 아닌에 실린 명실은 한겨레에 아무도 아닌명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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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무도 아닌 자 Niemand˝, ˝아무 것도 아닌 것 Nichts˝을 부정에서 건져내는 파울 첼란
    from 공음미문 2016-12-11 05:29 
    찬미가 아무도 우리를 또 다시 흙과 점토로 빚지 않으리라.아무도 우리의 먼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리라.아무도. 찬미 받으소서, 아무도 아닌 자여.당신을 위해우리는 피어나오니.당신을 향해. 아무것도 아니었다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으리니, 활짝 피어서.아무것도 아닌 것의,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꽃술과함께 영혼 환하게 황량한 하늘에 꽃실을 가지고우리가 노래했던 심홍색 말의꽃관으로 붉게가시
 
 
오거서 2016-12-1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 이름을 기억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무 2016-12-10 13:23   좋아요 0 | URL
저도 감사합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작가지만, 그래도 좀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ㅎㅎ

AgalmA 2016-12-11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울 첼란 시를 읽던 차 아무님 글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 먼댓글 페이퍼를 썼습니다^^ 짧게 시만 옮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아무님이 그간 관심 가지던 주제와 읽어오시던 책 프리모 레비, 수잔 손택, 한나 아렌트, 바우만 등등과도 연결되겠죠.
인간을 비존재로 만드는 폭력성에 대한 저항, 인간 본질에 대한 의문, 윤리의식 그런 것들에 늘 공감했었고 저 또한 그랬고...

아무 2016-12-12 09:50   좋아요 0 | URL
‘아무도 아닌‘과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가 연결되는 부분이 있네요. Niemand라는 명사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하고.. 파울 첼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그가 말한 ˝대화의 문학˝을 보니 바흐친과 블랑쇼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뷔히너 문학상은 아마 게오르크 뷔히너인 듯한데(맞겠죠? ㅎㅎ), 뷔히너의 <보이체크>는 제가 좋아하고 여전히 시의적인 희곡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전 그 희곡을 <당통의 죽음>보다 좋아하고.. 재작년 즈음에 뮤지컬로도 봤었는데, 희곡으로 받았던 느낌이 잘 와닿지는 않더라구요..

폭력이라는 주제가 제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여전히 고민중인 문제이죠. Agalma님도 마찬가지이시겠지만.. 하기야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문제로 잠시나마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폭력‘, ‘자유‘, ‘공동체‘의 문제는 여전히 제가 고민해야 할 과제들이고, 그래서 계속 찾아보고 있기도 해요. 답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답을 만들기 위해서..
 

거의 한 달만에 서재에 방문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수선했던 한 달이기도 했고, 그래서 책읽기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 리뷰가 아닌 것은 제 게으름 탓입니다 ㅎㅎ...


제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독서 모임에 함께 하실 분을 추가로 모집하려 합니다. 어수선한 시기인 만큼, 책을 읽는 것보다 필요한 건 행동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아 글을 올리는 게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혼란한 때에 이런 글을 올리는 이유는, 눈앞의 모든 것이 희부옇게 사라지는 것 같은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라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책은 말걸기 혹은 부름이다단장(短章)의 멜로디로 끊임없이 나를 읽어줘요읽어줘요!”라고 말하는 초대요청부름기도를 담은 은은한 저음이 이어진다그리고 이 기원문은 계속 속삭인다심지어 저자가 나를 읽지 말아요!”라고 하거나 내 책을 던져버려요!”라고 소리칠 때조차도 계속된다.

-뤽 낭시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책 속에 길이 있다거나,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책에 담긴 세계와 대화하는 것, 그리고 그 대화가 무한히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독백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울리는 즐거운 공명(共鳴), 그것이 제가 믿는 대화의 힘입니다. 서로의 말과 생각이 엇갈리는 순간에도, 대화가 주는 변화의 순간은 반가운 손님처럼 온다고 믿습니다. 그 대화의 즐거움을 더 많은 분들이 누리시고, 대화를 통해 변화하는 자신을 발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책 읽을 시간이 없는 시대, 책의 가치가 점점 옅어지는 시대에 독서 모임을 꾸준히 진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한 해 동안 저를 즐겁게 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제 시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게 한 것은 책과의 대화, 그리고 그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과의 대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순간을 더 많은 분들과 함께 누리고자 합니다.

 

*

독서 모임 <Les Sept>은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3주에 한 번씩 책을 선정해 대화를 나누는 모임입니다.

함께 하기를 희망하시는 분께서는 성함과 연락처, 거주 지역(//), 희망하는 요일/시간/장소, 기타 문의사항을 18()까지 ljh2839@gmail.com으로 보내주시면, 다른 분들과 상의 후 22()에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현재 주로 모이는 장소는 강남역 인근에 있는 힐스터디입니다)

 

개인적인 일 몇 가지만 마무리되면 다시 제대로 서재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종 짧은 리뷰는 올리겠지만요 ㅎㅎ


그럼 남은 한 해 잘 마무리하시고, 지금 품고 계신 횃불이 9일 이후에도 지속되길 간절히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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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9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09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09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무님. 잘 지내셨죠? ^^
서재 활동을 다시 시작하신다면, 독서모임에 대한 기록도 남겨주세요. 독서모임에 참여 안 해본지 3년이나 지났어요. ^^;;

아무 2016-12-09 13:28   좋아요 1 | URL
cyrus님도 잘 지내시나요? ㅎㅎ 독서 모임도 11월엔 잠시 쉬었습니다. 가끔 올리고는 싶은데 따로 기록을 남기진 않아서..^^;; 아마 이번 달 안에 다시 시작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때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올려볼게요. 제 기억에 의존해서라도..ㅎㅎ
 

엘리엇은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나에겐 10월과 11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현재 내 생활은 일정한 패턴으로 쳇바퀴 돌 듯 굴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10월 즈음이 되면 권태가 정점을 찍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때가 책을 가장 안 읽는 때이기도 하고, 정서적으로 가장 가라앉아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위안이 될 만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래도 책은 최대한 읽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점점 읽을 수 있는 시간도 줄어 최근에는 서재에도 거의 들어오지 못했다(그래봤자 2-3일 정도 비운 것이지만). 쓰는 시간은 읽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준다.


최근까지 나는 『모든 것은 빛난다』를 읽고 있었다. 결론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내용이 너무 흥미로워서 다른 책들을 제쳐놓고 읽는 중이었는데, 자꾸 예정에 없던 책이 불쑥 들어와 한 권을 진득하게 읽는 걸 방해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서관 희망도서인데, 신청을 해도 오는 데 최소 2~3달은 걸리기 때문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올 무렵이면 이미 잊어버리고 있던 책이 대다수다. ‘신청은 니가 원하는 때에 했지만, 오는 건 니가 원할 때가 아니란다라는 식이다. 여하튼 이번 달은 오래 전에 신청했던 책들이 돌연 폭탄처럼 쏟아졌고, 그 중 한 권이 바네사 R. 슈와르츠의 구경꾼의 탄생이었다. 이 책은 독서 모임을 같이 하는 분이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고 추천하기에 신청해 두었던 책이다(무려 넉 달 전에!). 이번 주에 문자가 왔고, 도서관에서 빌려와 맨 앞에 실린 역자 해제를 읽다가(역자 대표로 노명우 씨가 썼다)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인지 의문을 품게 하는 문장을 보았다. 안 그래도 가라앉았던 기분은 짜증으로 바뀌었다.
















한국어 번역서는 본제목 ‘spectacular realities’를 직역하지 않고, 세기말 파리 군중이 사로잡혀 있는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구경꾼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선택하였다. 또한 책에 종종 등장하는 ‘spectacle’이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스펙터클과 구경거리로 번역했다. 장엄한 광경임을 표현해야 하는 문맥에서는 스펙터클로 옮겼고, 구경에 해당하는 문맥이 강조될 때는 구경거리로 번역했다. 구경꾼의 탄생에서 언급하고 있는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구경거리의 사회라고 번역해야 하나, 이미 출판된 드보르의 한국어판 제목이 스펙터클의 사회이기에 독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드보르의 책은 예외적으로 책 제목을 그대로 옮겼다. (41, 강조는 인용자)


마침 읽고 있었던 책이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였는데, 이 부분을 읽고 이 사람은 스펙타클의 사회도 안 읽어봤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책을 덮을 뻔했다. 1장만 읽어봐도 스펙타클이라는 개념이 구경거리로 치환될 수 없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 구경거리의 사회라니. 그리고 스펙터클구경거리’를 구분하는 기준도 웃기지만, 책 제목을 구경거리의 사회로 바꿔야 된다고 생각하는 상상력 자체가 어이없었다. 이 글을 보고 그 분이 번역한 사회학의 쓸모』를 읽기 싫어졌다. 이미 샀는데. 저자의 서문을 읽어보면 19세기 말 파리 문화의 변화에 따라 발생한 구경구경꾼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두고 있어 구경꾼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바꾼 것을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나에겐 과한 개입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제목을 맘대로 바꾸는 것이 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죽음의 스펙터클의 원제는 HEROS: Mass Murder and Suicide’인데, 저자가 일차적으로 주목하는 것이 스펙타클과 현실의 경계가 붕괴된 모습을 보이는 다중살인사건인 건 맞다. 하지만 실제 책에서 저자의 논의가 기대고 있는 이론은 기 드보르가 아니라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도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 Living in the Aftermath of Tragedy’인데, 처음에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한국어판 제목을 너무 자극적으로 정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과 반감을 동시에 부르는 제목이라고 해야 할까. 마케팅 측면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엄마의 심판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사이의 간극은 너무 멀어보인다. 마지막으로 빨래하는 페미니즘. 이 책의 원제는 Reading Women: How the Great Books of Feminism Changed My Life’, 그러니까 여성 읽기정도다. 제목이 너무 밋밋해서 바꿨겠지만, 다 읽고 나면 빨래하는이라는 수식어가 이 책과 너무 안 어울린다는 느낌은 분명히 있다. 차라리 부제를 적절히 축약해서 제목을 짓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구경꾼의 탄생을 읽다가 성질이 나는 바람에 주절주절 썼지만, 개인적인 느낌이기에 비판의 여지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래도 구경거리의 사회는 용납할 수 없다!).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지 모르겠으나, 한 사람의 독자로서 책 제목도 잘 다루어 주었으면 싶다. 괜히 열폭해서 썼다는 생각도 들지만(이게 다 희망도서 때문이다).

 

+) 스펙타클의 사회4장까지 읽었는데, 얇은 책이지만 내용이 정말 깊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물론 풀어서 설명하고 논증하는 책이 아니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꽤 있지만. 종종 기 드보르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새로운 자본론을 쓰려고 했던 걸까라는 생각도 들고.. 다만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세계의 부유한 곳, 그것도 뉴스가 오락으로 뒤바뀌어 버린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극소수의 교육받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을 보편화한다고 비판한 것을 기 드보르가 들었다면 어떻게 반박했을까라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손택은 사라예보를 당일치기로 갔다왔던 몇몇 주목할 만한 프랑스인들이라는 말까지 썼는데, 남은 부분을 읽고 나면 기 드보르의 반박을 정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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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구경거리에 대한 보고서
    from 공음미문 2016-10-23 01:13 
    프란츠는 갑자기 이 대장정이 끝에 다다랐다는 인상을 받았다. 침묵의 구경꾼들은 유럽으로 좁아들었고, 대장정이 완수되는 공간은 지구 한복판에 있는 조그만 연단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때 연단 밑에 몰려들던 군중은 이미 오래전부터 외면한 터였고, 대장정은 관중이 없는 고독 속에서 계속되었던 것이다. 프란츠는 생각했다. 그렇다, 세상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대장정은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신경질적이고 과민한 어떤 것으로 변해 버렸다. 어제는 미국의 베트남 점령에
 
 
AgalmA 2016-10-23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의 마지막 문단을 보고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생각이 나서 먼댓글로 남겼습니다.
기 드보르에 대한 아무님의 정리를 기대하며/

아무 2016-10-23 09:42   좋아요 1 | URL
<스펙타클의 사회>는 천천히 읽고 있는 중이에요. 포스트잇도 열심히 붙여가면서 읽고 있는데, 이러다 책 페이지 수만큼 포스트잇을 붙일 것 같아 걱정입니다 ㅎㅎ 아마 리뷰를 쓰게 되면 예전에 썼던 리뷰처럼 장황하게 쓰진 못할 것 같고, 기 드보르처럼 짧게 짧게 쓰지 않을까 싶네요^^;; 다만 읽다보니 스펙타클이라는 단어가 오늘날 너무 남용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원래 의미와 상관없이 막 쓰는 느낌이랄까.. 그러다보니 단어에 때가 타서 그 진의가 상실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읽으면서 국내에 번역된 책이 너무 없다는 것도 아쉬웠어요. 자서전이나 평전 같은 책도 찾기 어렵고... 개인적으로는 <스펙타클의 사회에 대한 논평>이란 책도 번역돼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AgalmA 2016-10-23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펙타클의 사회> 읽을 때 옮겨 쓰다가 지쳤던 기억이ㅎㅎ; 문장마다 전율하게 하는 힘이 있죠. 기 드보르 일생을 봐도 그렇고 마르크스랑 비슷하긴 했죠. 사상의 힘도, 레닌의 보조를 받던 상황도.
기억하기로 기 드보르가 생활이 어려워져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는 <스펙타클의 사회>을 재출간해야 했을 때 탐탁지 않게 생각한 거 보면 성격 나오잖아요ㅎ 그의 다른 글, 평전 꼭 보고 싶은 사상가입니다.
 

네이버 뉴스에서 '밥값내기' 비슷한 제목의 칼럼을 보려고 했는데, 우연히 황현산 문학평론가의 칼럼이 눈에 띄었다. '여성혐오'라고 번역되는 '미소지니(misogyny)'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온 역사에 대한 것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단어가 사회학자보다 문학연구자들이 먼저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물론 내가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나 기타 책들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문학사는 작가들의 이런 태도를 총괄해서 미조지니라고 불렀으며, 그 말을 한자 문화권에서 여성혐오라고 옮겨서 잘못될 것은 없다. 그러나 번역 이론가들이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 하나가 이 번역어와도 연결되어 있다.

(...)

다른 작가들을 스탕달과 비교할 때 그들이 어떻게 여자들을 삶에서 소외시켜 종속적 존재로 만들었는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미조지니라는 말은 저 작가들이 여자를 현실에서 소외시킨 모든 태도와 방법과 의식을 함축하게 된다. 그 의미의 폭이 이렇게 확대된다. [링크]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한창 논란이 뜨거울 때(지금도 물론 뜨겁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가 적절한 번역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읽었던 적이 있었다. '혐오'가 연상시키는 'hate'라는 단어가 어떤 극단적인 감정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비판도 있었고,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남성혐오'라는 대립항을 상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인지될 수 있기에 문제가 된다는 의견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번역어로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당시에 작은 논쟁이 있기도 했다. 정희진의 경우 번역의 정치성을 지적했고, 제대로 번역이 되지 않는 말을 번역하면서 남성 중심적 문화가 반영되었다며 '미소지니'라는 말을 그대로 쓸 것을 주장했다. (정희진의 견해는 예전에 스크랩해둔 미디어오늘의 기사[링크]를 참조했다) 내가 처음에 미소지니라는 말을 영어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았을 때 그 해석이 매우 포괄적이어서 번역어가 적절한지에 대해 호기심을 항상 갖고 있었고, 황현산 평론가의 이번 칼럼은 내 궁금증을 자극해주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네이버 메인에도 안 올라와 있었기에 우연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내가 어떤 의견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나는 1개 국어 이용자인데다 국어를 전공했다..) 딱히 덧붙일 말은 없지만, 요즘 종종 불편하게 다가오는 부분은 이런 내용의 칼럼을 본 사람들이 '당신 같은 기성세대가 문제를 키웠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가부장적 구조에서 그들이 받은 수혜를 무시할 순 없겠지만, 이런 식의 댓글들은 '당신만 깨끗한 척하지 마라', '수혜자였으면 닥치고 있으라'는 말로 보여 불편하다. 얼마 전 문유석 판사의 칼럼(링크)에 대해서도 페이스북의 '자유주의' 페이지에서 반박하는 게시글(링크)을 올렸는데, 게시물에 달린 댓글의 반응도 판사라는 직함을 가진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말할 자격 있냐는 둥, 당신 같은 기성세대가 어떻다는 둥하는 반응이 대다수다(게다가 저 칼럼은 대단히 일반적인 내용만을 다뤘다. 지면상의 문제 등이 있었겠지만..). 그 사람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수혜자들의 반성도 분명 필요하지만, '기성세대 책임'이라는 식으로 그들 모두의 목소리를 막는 행위, '너는 깨끗한 줄 아냐'는 식의 반응은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막을 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바꾸려는 생각이 있는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 있는지도 나는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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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북 `자유주의` 페이지가 아직도 있군요. 되도 않는 논리, 특히 자유경제원 소속 인물들의 생각을 인용해서 별로에요.

아무 2016-09-09 13:57   좋아요 0 | URL
여전히 잘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자유경제원 쪽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나 기타 사상에 부정적인데, 그쪽에서 무슨 근거로 이야기하는지 보려고 찾아봅니다. 볼 때마다 그런 되도 않는 논리 때문에 ˝내가 왜 이걸 보고 있나..˝라는 생각은 들지만..

2016-09-13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3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3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4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1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세요. 무슨 시험인지 모르지만, 열심히 준비하면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

아무 2016-09-13 23: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대구 쪽은 이제 여파가 가셨는지 모르겠네요. 어제 독서실에서 책상이 흔들흔들하길래 뭔가 싶었는데, 수도권이 이정도면 정말 큰일났었겠다는 생각이...;; 아무튼 좋은 결과 있을 거라고 믿고 잘 준비해보겠습니다. cyrus님도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