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잡지 <Axt>가 1주년을 맞아 형식에 변화를 시도했다. 전체적으로 다른 부분은 평소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흥미로웠던 것은 'hyper-essay' 부분이었다. 총 네 편의 글이 실렸는데, 그 중에서도 내 눈길이 갔던 부분은 황현산과 이명현의 글이었다. 짤막하게나마 기억할 만한 부분을 적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러면 금방 잊어버리니까...


1. 황현산, 「폐쇄 서사 ─ 영화 <곡성>을 말하기 위해」
















황현산 평론가는 영화 <곡성>의 서사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텍스트를 가지고 온다. 드니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와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기욤 니클루의 『잭 몽골리』다. 세 편 모두 읽어본 적이 없으니 글쓴이의 말을 빌려오면, 『라모의 조카』는 "악이 그 자신의 입으로 저 자신을 고발"(72쪽)하며 와해하는 서사이며, 『경마장 가는 길』은 "객관적 시선으로 위장한 이 철저한 편파성에 의지해"(74쪽) "악이 악의 테두리에 갇혀서 스스로를 고하는 서사"(76쪽)이고, 『잭 몽골리』는 "제가 제기하려는 주제 속으로 실종하여 그 주제 자체가 되어버리는 서사"(76쪽)이다. 그렇다면 <곡성>은? "어느 쪽 서사도 철저하게 실천하지 못한 서사"라고 글쓴이는 말한다.


그는 영화의 주제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설을 제시하는데(저자 스스로 스포일러가 있다고 했으니 해설의 내용은 적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를 안 본 사람 입장에서 읽으니 이게 스포일러인가...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렇다고 영화를 볼 것 같진 않지만..), "나홍진 감독은 두 번째 해석의 관점에서 영화의 서사를 이끌려 하였으나 그 자신이 첫 번째 해석의 관점에도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었다고"(77쪽) 쓴다. 그리고 영화에서 낚시라고 이야기되는 요소들은 모두 "첫 번째 해석의 관점과 '공모'한다"고, "그 낚시질에 가장 먼저 걸려든 것은 감독 그 자신"이라고 쓴다. "마약 조직에 신분을 숨기고 잠입한 수사관이 끝내 헤어나지 못하고 그 자신이 진짜 조직원이 되어버린 꼴"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감독은 자신이 외부적 관찰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글의 결론이다.


우리는 벌써 과학적이지만 국가와 민족과 사회가 제 일에 끼어들기 시작하면 비과학적 사고가 용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서사가 새로운 틀을 만들려 할 때 자주 머뭇거리게 되는 이유의 하나가 거기 있다. (78쪽)


2. 이명현, 「과학자가 문학을 즐기는 여러 가지 방식」
















천문학자 이명현은 '다윈주의 문학 비평'을 소개한다. 그는 "진화 이론과 진화 심리학을 바탕으로 문학 텍스트를 분석하고 문학 이론을 체계화하려는 시도"(90쪽)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인간 본성과 문학을 포함한 인간의 문화적 현상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를"(90쪽) 하는 입장이다. 이 비평의 입장에서 문학은 "진화적인 존재인 작가가 인간 본성을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으로 반영한 문화적 결과물"이다. 작품 속 인물들의 행위 동기를 유전이나 진화론적인 관점으로 추적하고 인간 본성의 맥락에서 성찰하는 비평인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또다른 비평이론은 피에르 바야르의 '개입주의 문학 비평'이다. 이는 문학작품을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오브제로 보고 평론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필요하다면 작품을 변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입주의 문학 비평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추리 비평 : 텍스트 자체를 변형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문학적 결론을 재검토해서 문제가 있다면 다른 해석을 하자는 입장

2) 개선 비평 : 결말의 재추론에서 더 나아가 필요하다면 작품을 뜯어고치자는 입장

3) 예상 비평 : 미래는 현재에 흔적을 남긴다는 시간의 흐름의 방향을 무력화시킴으로서 문학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입장


바야르가 제시한 개입주의 문학 비평의 바탕에는 정신분석학이 자리잡고 있다. 작가의 무의식이 작품 속에 반영되기 때문에 작가가 작품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결론을 무조건 믿을 수가 없고, 비평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저자는 바야르의 주장에서 다윈주의 문학 비평과의 접점을 발견하는데,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모순된 본능들의 집단인 인간 본성을 갖춘 작가가 만들어낸 진화적인 존재인 등장인물들이 판치는 불완전한 텍스트"(92쪽)가 바야르가 말하는 문학 텍스트의 '유동성'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개입주의 문학 비평은 현대 과학의 인식론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야르도 사적인 자리에서 저자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한다)


바야르는 개입주의 문학 비평의 궁극적인 종착점은 '창조 비평'이라고 말한다. 논픽션인 문학 비평이 픽션인 소설과 제3의 지대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창조 비평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개입주의 문학 비평을 통해서 문학 비평이 점차 논픽션에서 픽션으로 전환되도록 시도하는 것이다. 문학의 본질을 픽션으로 보는 바야르의 관점에서 시작된 시도다. 다윈주의 문학 비평에서는 이야기의 기원도 진화적 적응 과정에서 생긴 결과물로 파악한다. 바야르가 완성하려고 하는 창조 비평은 어쩌면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분화되기 전의 '이야기'로 거스러 올라가서 비평과 창작을 통합하겠다는 큰 꿈일는지도 모르겠다. (93쪽) 


개인적으로 '창조 비평'에 대해서는 회의적인데, 이 관점대로면 평론가에게 중요한 것은 일종의 예술적인 감식안이나 통찰력, 또는 텍스트를 하나의 아포리즘으로 압축하는 능력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평이 과학이냐 예술이냐라는 이야기와도 연결될 수도, 평론가에게 우선하는 자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순간적으로 무릎을 탁 치며 받은 통찰(그것이 옳든 그르든)을 아름답게 꾸며낸 아포리즘의 비평보다, 성실하게 분석하고 그 결과로 독자에게 읽기의 저변을 넓혀주는 비평을 읽고 싶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다른 글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노승영 번역가의 「작가-번역가 커플을 찾아서」도 흥미로운 빅데이터 분석이었다. 오역이 없는 번역은 없다지만, 글에 제시된 '작가-번역가 공식 커플' 표를 보며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번역가의 궁합이 잘 맞는지 작품을 보며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단편 중에는 백민석의 「소돔 0일」이 흥미로웠지만(멀지 않은 미래여서 그런가?), 다른 작품들은 난해하기도 하고 너무 짧아서 제시된 상(像)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백수린의 「고요한 사건」은 유년시절의 성장기를 전형적으로,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다루고 있었지만 마지막 눈 오는 장면에서의 몇몇 문장은 힘을 준 게 티가 났다. '이게 중요한 문장이다'라고 못 박은 느낌이랄까. 서평을 기고한 사람들의 범위가 넓어진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말로는 지지난번에도 기고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고... 작가 지망생과 블로거가 기고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응준 작가는 지난번까지는 '소설가'로 소개됐던 것 같은데, 왜 이번 호에서는 '경(輕)수필가'로 소개된 걸까? 하성란과 오한기의 장편연재는 좀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지난 호까지 연재되던 이기호와 김이설의 연재는 중단된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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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30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윈주의 문화 비평은 신선한 내용입니다. 이과와 문과의 만남인가요? ㅎㅎㅎ 이 지구상에 나온 비평 이론을 열거하면 얼마나 될까요? 복잡해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같아요. 어차피 텍스트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은 다양하니까요.

아무 2016-08-30 20:21   좋아요 0 | URL
90년대에 나왔다고 하는데 저도 처음 봅니다. 문이과의 만남이라고 하시니 통섭비평?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ㅎㅎ 읽으면서 신선하긴 했어요 이 관점으로 본 문학작품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저자는 김유정 작품을 다르게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ㅎㅎ

AgalmA 2016-09-0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입주의 문학비평은 정신분석과도 겹치네요.
치료자가 환자의 감정에 휘말리는 `역전이` 처럼 적극적이면 추리비평, 부정적이면 개선비평이 되겠고, `시간을 무력화시켜 문학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예상비평은 심리의 본질로 가려는 `최면술`? ㅎㅎ 프로이트가 최면술을 신뢰하지 않아 정신분석이 튼튼해진 기틀이 되기도ㅎ

저는 비평도 창작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 창조비평을 하나의 장르로서는 인정합니다. 단 비평하는 작품에 대한 월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렇다면 전문가인 비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의 주체성이 중요하다고 하겠죠.

곡성은 나홍진 감독이 코미디를 생각하고 만든 거라 하는데, 그래서 보는 자와의 괴리감이 그리 커진 건지도.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저도 코미디 소스 하나 얻게 되려나 합니다ㅎ

백민석 작가라면 당연히 소돔을 잘 말할 만한 작가 아닌가! 매우 궁금함!
이응준 소설가 소개는 작가가 고집한 게 아닐까요. 그 사태에 대한 자조 섞인 농담으로.

아무 2016-09-04 20:06   좋아요 1 | URL
바야르가 애초에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개입주의 비평을 제시했다고 해요. 예상 비평은 악스트에 딱 저만큼만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하긴 어렵지만.. 생각해보면 개입주의에서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걸 다윈주의 비평에선 본성이라고 부르는 거 아닐까 싶네요 ㅎㅎ

저도 ˝비평=창작˝이라는 관점을 너무 부정하면 어떤 비평도 작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결론에 빠져서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 월권의 경계라는 것이 모호하니.. 결국 주체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긴 하죠.

제가 1년에 영화를 열 편도 안 보는 사람이라서(극장과 집에서 보는 거 전부 포함해서) <곡성>은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전 제가 좋아하는 감독 영화도 챙겨보질 않거든요..^^;;

전 백민석 작품을 처음 읽어봤는데, 멀지 않은 미래에 대한 소극처럼 느껴져서 재미있었습니다. 서평 중에 <헤이, 우리 소풍 간다>를 다룬 것도 있어서 궁금해지기도 하고.. 이응준 작가는 예전에도 악스트에 한두번 기고했었는데 그때는 소설가로 소개됐거든요. 이번에 실린 게 에세이라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에세이 내용 자체가 다 허구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게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요즘 마음속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 중 가장 큰 것은 당연히 사드 배치 문제와 개돼지 발언이다. 하지만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는, 언론에서 '문학동네발(發) 공급률 인상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출판사와 서점 사이의 문제다. 나는 이 소식을 문학동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처음 접했는데, 여기에는 온라인서점과 도매 유통사에 대한 공급률을 인상하면서 보낸 공문과 이로 인해 타격받을 수 있는 중소형서점에 직접 거래를 제안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https://www.facebook.com/munhak/posts/1740862802595651)


인상과 관련해서 국민일보에 기사가 났고[(링크)문학동네, 공급률 인상서점계 동네서점 죽이기반발], 문학동네에서는 이 기사에 대한 반박문을 다시 페이스북에 올렸다(홈페이지에도 올라갔을 것이다). 요지는,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의 공급률 인상을 위해서는 도매 유통사 공급률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 국민일보의 기사는 오보이며 한쪽의 입장만 들은 악의적인 기사라는 것. 인상으로 인해 운영이 어려워진 동네서점의 경우 직접 주문해달라는 제안을 했다는 것(입장 전문 링크). 결국 갈등 끝에 문학동네는 공급을 중단했다. [링크_문학동네, 서점에 책 공급중단]


페이스북에서 이 게시물을 읽기 전까지 나는 공급률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몰랐기 때문에 출판 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이것이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급속하게 추락하고 있는 출판업계의 실태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알 것 같다. 소위 대형 출판사라고 불리는 문학동네도 몇 년째 신규 사원 채용을 못한다는 사실은 참 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문학동네가 취한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지지하기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1) 문학동네는 중소형서점이 주문할 경우 선입금 조건을 걸었으며, 10권 이상 주문할 것을 요구했고, 반품률을 8% 이내로 고정시켰다. 이는, 중소형서점이 직접 거래를 하기 위해서 항상 일정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함을, 그리고 책의 판매율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소위 3대 문학 관련 출판사 중 가장 규모가 큰 문학동네의 책을 모두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을 만큼의 자금력이 중소형서점에 있을지, 작금의 출판 현실을 고려해보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2) 두 번째 입장을 발표하면서 문학동네는 글 말미에 '본 게시글에 공감해주시고 공유해주신 분들 중 500분을 추첨해서 문학동네가 역량 있는 신예작가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정 시행하고 있는 ‘젊은작가상’ 올해 수상작품집을 선물해드리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달았다. 이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대형 출판사가 논란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한국의 역량 있는(적어도 문학동네에서 있다고 판단한) 신예작가들의 작품이 이런 언론 플레이에 이용할 수단밖에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도서정가제가 출판업계에 미친 영향으로 옮겨간다. 나는 보통 기사들을 볼 때 댓글을 꼼꼼히 보는데(보고나면 마음이 항상 좋지 않은데도 계속 본다), 책값이 왜 이렇게 비싼가, 도서정가제 단통법 폐지 안하냐는 댓글이 대다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책이 그 가치에 비해서 헐값에 취급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다른 문화생활에 비해 책 소비에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출판업계도 지금 상황에서 책값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종이의 재질 문제나 양장본 남용 문제 등등. 물론 이런 걸로는 새발의 피겠지만.


출판업계도 억울한 점이 있을 것이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출판사의 리퍼브 도서 판매는 금지시키면서 중고서적 판매는 허용하는 등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에 유리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니까. 그런 불만이 쌓여서 문학동네가 총대를 멘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도매 공급률을 올리는 것이 인터넷서점 및 대형서점에 영향을 줄 것인지, 아니면 중소형서점만 덤태기를 쓰고 사장(死藏)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문학동네가 지금 취하는 행동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 같다.


법에 대해서도, 출판계 사정에 대해서도 모르는 일개 독자의 입장이라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섣불리 판단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일개 독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워낙 굵직굵직한 일들이 터지고 있는 요즘이라 중요한 일임에도 그들만의 리그로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까워 몇 자 적었다. 물론 나는 무슨 이슈를 가리려고 이걸 터뜨렸네 하는 음모론을 믿지 않는다(너무 속이 빤히 보이는 북풍은 제외하고). 다만 하루에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아수라의 세계에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모든 일에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뿐인데, 이것은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힘도 필요하다..


+) 정가제 시행 이후 도서 매출이 전체적으로 급감했다고 하는데, 인터넷서점은 10% 할인 + 5% 적립금까지 주면서 무슨 돈으로 굿즈에 사은품까지 이것저것 주는지 내 좁은 소견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알라딘 17주년 이벤트에 참여해 굉장히 많은 상품을 받았다. 본투리드 에코백, 『가만한 당신』 신문, 부채, 마음산책 스티커, 엽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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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3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3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7-13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번 상황은 씁쓸하네요. 뭐 저도 상품에 욕심이 많은 놈이지만, 저런 출판사의 홍보는 불편하게 느껴져요. 선물을 내세워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동시에 출판사를 옹호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확인시키는 고도의 전략 같습니다. 이러면 독자들은 일방적으로 출판사의 편을 들어주게 됩니다.

아무 2016-07-13 16:56   좋아요 0 | URL
페이스북 댓글 반응은 8대2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꼭 사은품 때문이라고 볼 순 없겠지만, 너무 저급한 전략이라 말이 안 나왔습니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작으로도 보이고.. 공급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듯 싶습니다..

samadhi(眞我) 2016-07-14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하는 짓이 꼭 남양유업 행태랑 비슷하군요. 제가 무척 좋아했던 출판사인데 정말 씁쓸합니다. 누구를 위한 도서정가제인지. 언 놈 뱃속으로 눈 먼 돈이 들어간 건지...

아무 2016-07-14 08:51   좋아요 0 | URL
남양우유는 지금도 안 먹습니다. 문학동네 저도 참 좋아했는데,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네요. 다 어렵다고 하면 돈 챙기는 왕 서방은 대체 누구인지 참...

Aid. 2016-07-2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인터넷 서점 같은 경우에는 할인율이 고정되면서 예전 할인해주던 금액이 수입으로 들어오니 그 금액으로 굿즈 등 이벤트에 더 힘을 쏟고 있는거 같아요.

아무 2016-07-20 17:33   좋아요 0 | URL
아마 그렇겠죠? 여러모로 적립금 혜택이나 굿즈의 비중이 많이 늘었습니다. 전 차라리 그 돈이 책의 품질에 갔으면 하는데요.. 이 글을 쓴 이후에도 몇 번의 입장발표와 기사가 있었는데, 볼 때마다 답답한 건 똑같습니다. 전국서점조합연합회도 그렇고, 문학동네도 그렇고...

cyrus 2016-07-2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문학동네가 서점 공급률 인상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를 했더군요.

아무 2016-07-21 14:23   좋아요 0 | URL
검색해보고 알았습니다. 아직 문학동네 페이스북에는 안 올라왔더군요. 요 며칠 동안 계속 확인하다가 `서점연합회와 문학동네에 고함`이라고 쓸까 하다 참았는데.. 감시 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이긴 하지만, 며칠 간 이루어진 논의에 독자는 안중에도 없더군요. 결국 독자층이 늘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문제겠죠..
 















『이방인』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은 예전에 읽었던 게 분명한데 이렇게 새로울 수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져서 읽는 장면마다 새로웠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뫼르소가 사제에게 고함을 치는 장면뿐이었고, 예전에 읽던 책도 이 부분만 접어놓았다. 이전까지 줄곧 눈에 보이는 것만을 묘사하고 말수가 적었던 뫼르소가 죽음을 앞에 두고 폭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고, 그래서 내가 여태껏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의 번역은 개정 전과 후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


나는 그의 사제복의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여 솟구쳐 오르는 가운데 나는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부었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군, 안 그래?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죄다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도 못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셈이지.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2015, 174쪽)


나는 그의 신부복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버렸다.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2009, 156-157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너'가 '그'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란 무엇일까? 김화영 교수의 해설 서두에는 "자유간접화법의 어감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변화도 그 일환인 것일까? 네이버 지식백과의 문학용어비평사전에서는 자유간접화법을 "인물의 생각이나 말이 서술자의 말과 겹쳐져 이중적 목소리로 서술되는 화법"이라고 정의하는데, 거기서 들고 있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직접화법 : He said, "I love her now."
간접화법 : He said that he loved her then.
자유간접화법 : He loved her now.


쓰고나니 '너'와 '그'의 차이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애초에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해설에서 그 단어만 보고 '이 변화가 자유간접화법의 반영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어제부터 계속 고민했었다. 생각해보면 '너'로 표현된 전집판의 경우는 직접화법에 가깝지만, 개정판의 경우는 뫼르소가 하는 말이 뫼르소의 의식이라는 "유리창"을 거쳐 전달되는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구성이 갑작스레 직접화법이 등장하는 것보다 일관성 있는 형식이라는 생각은 든다.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다시 읽으면서 공들였던 부분은 전에 미처 읽지 못했던 해설 읽기였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사르트르는 『시지프 신화』의 철학이 옮겨진 것이 『이방인』이라 간주하고 해설을 썼는데, 상당 부분 연결이 되긴 하지만 기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뫼르소가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부조리의 인간'의 한 전형이라고 보긴 어려울 듯하다. 두 번째로 읽는 것이지만 여전히 이해가 미진한 부분이 많이 남았는데, 어쩌면 그런 애매성이야말로 『이방인』이 지금까지 논의되고 고전이 된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뭐라고 딱 규정하기 어려운 것을 남겨둔 채 그냥 마무리해야 될 것 같다. 재독의 감상을 정리하자면, '그때도어렵고지금도어렵다'.


+) "오래간만에 처음으로"는 개정판에도 그대로 남았다. 이 단어의 어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데, 가운데 쉼표를 넣어봐도 매한가지다. 개정판을 내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손보았는데도 이 부분을 유지하기로 한 이유가 무엇인지, 역자의 설명이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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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04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예 기억이 안 나네요..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역시 책은 다시 읽어야 제맛인 것 같습니다..

아무 2016-07-04 10:32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읽는데 다시 읽는다는 느낌이 거의 안 들더라구요.. 시지프 신화를 읽고 나니 조금 낫긴 하지만, 난해한 건 여전합니다 ㅎㅎ...

cyrus 2016-07-0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판과 개정판을 같이 읽으면서 번역의 차이점을 확인하셨군요. 정말 대단한 집중력입니다. ^^

아무 2016-07-04 19:15   좋아요 0 | URL
정말 집중력이 많이 필요하더라구요. 번역비평하는 분들에게 존경심이..^^;; 저도 처음엔 전부 비교하려다가 금방 포기하고 핵심 장면들만 골라서 비교했습니다. 저 장면은 워낙 차이가 많이 나서 찾아보기도 하고..
 

독서 모임에서 다음에 다룰 책으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선정했는데, 나는 이미 한 번 읽은 책이어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방인』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대략 6~7년 전에 읽고 처음 읽는 것인데, 줄거리도 가물가물해서 몇몇 장면들만 기억하고 있고, 엄청 읽기가 어려웠다는 기억만 남아있다(그래서 난 지금도 『이방인』보다 『페스트』를 더 좋아한다). 이후 개정판이 나왔을 때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해서 사두긴 했지만 여태껏 한 장도 읽지 않았었다.
















1) 오늘의 한국어가 허용하는 한 가장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과 단어로 번역하도록 노력했다. 가장 단순한 것이 항상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니므로 그에 따르는 위험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2) 독자의 가독성을 돕는 의역을 가능한 한 피하고 원문의 탈색된 문체를 그대로 유지, 표현하고자 했다.

3) 카뮈의 원문이 가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는 한,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인과 관계나 시간적 선후 관계에 대한 해석을 임의로 추가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 '2015년 새 번역에 부치는 말' (2015, 8쪽)


얼마나 바뀌었는지 비교해보자는 마음에 두 가지 판본을 대조하며 읽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읽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져서 1부의 1절,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는 부분까지 비교해본 뒤 포기하고 개정판에 집중했다. 앞 부분을 비교해보면서 눈에 띄었던 차이점은 이렇다. 1) 기존 전집판에서 "엄마"와 "어머니"가 혼용되어 쓰이던 것을 "엄마"로 통일했다(현재 2부의 앞부분까지 읽었는데, 뫼르소가 "어머니"라고 지칭하는 표현은 딱 한 번 나왔다). 2) 기존에 한 문장으로 번역했던 문장을 둘로 쪼개어 번역한 것이 많았다. 3) 기존 판본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던 이중 부정문을 많이 없앴다. 4) 부사어, 관형어 등의 수식어가 줄었다. 5) 기존에 한 문단으로 처리한 것을 둘로 나눈 것이 종종 있다. 기타 등등. "가독성을 돕는 의역을" 피했다고 하지만, 나는 개정판이 훨씬 잘 읽히고 눈에 잘 들어온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카뮈가 『이방인』에서 구사하는 구어체 느낌을 더 잘 살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방인』은 소설에서 흔히 구사하는 문어체(단순과거)가 아닌 구어체(복합과거)로 쓰여졌다. 자세한 것은 네이버 지식백과(링크) 참조)


특이했던 것은, 영안실 안에 있는 여자 간호사를 '아랍인' 여자 간호사라고 밝힌 점, 그리고 양로원 원장이 뫼르소에게 반말(정확하게는 하게체)을 하는 걸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간호사의 경우는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레몽의 여자도 무어인(전집판은 아랍인이라고 썼다)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런지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고민되는 부분이다. 반말의 경우, 뫼르소와 원장이 이미 서로 아는 사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존대에서 반말로 바꾸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음 부분은 조금 마음에 걸린다.


층계로 나서자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조그만 영안실로 어머니를 옮겨놓았네. 다른 원생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원생이 하나 죽을 때마다 이삼일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든. 그렇게 되면 일하기가 어려워져." (2015, 28쪽)


층계로 나서자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시신은 조그만 영안실로 옮겨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지요. 원내에서 사망자가 생길 때마다 2, 3일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일하기가 어려워진답니다." (2009, 24쪽)


원장에 대한 서술이 많지 않아서 성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무적이고 인정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없었는데, "하나 죽을 때마다"라는 표현에는 사무적이고 비정한 느낌, 원생들의 죽음을 귀찮은 일로 인식한다는 인상이 실린 것 같다. 과잉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런 몇 가지를 제외하면 개정판의 번역이 훨씬 나은 편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의 구성인데, 전집판에는 사르트르의 해설, 피에르-루이 레의 카뮈 입문서 전문, 로제 키요의 논문이 함께 실려 있지만, 개정판은 김화영 교수의 해설만 실렸다. 해설이 감상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해설이나 부록을 다 읽어보는 입장에서 다양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가 그만큼 줄어 아쉽다. 김화영 교수의 해설도 60여 쪽에 이르는 분량을 자랑하고 나 역시 신뢰하는 편이지만, 민음사판에 실은 해설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아 자료를 상쇄할 만한 만족감을 주는 건 아니다. 나 같으면 양장본으로 안 만들고 저 자료를 넣었을 텐데... 괜히 양장본으로 만들어서 가격만 올랐다.


다시 읽으면서 눈에 띄는 점은, 햇살이나 빛에 대한 뫼르소의 서술이 상당히 안 좋게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읽을 때는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문제의 총살 장면 이전에도 햇살/빛은 따귀를 때린다거나, 머리를 쿡쿡 찌른다거나, 눈이 피로해지게 만든다는 식으로 서술된다. 이런 것들이 일종의 복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미국판 서문'이나 '《이방인》에 대한 편지'에서 카뮈가 생각하는 『이방인』의 의미가 생각보다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점도 이번에 읽으면서 알았다. 예전에 나는 대체 무엇을 읽은 것인가... 이번에 다 읽고 나면 예전에 읽다 포기했던 사르트르의 해설부터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내용이 기억에서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 뫼르소의 일갈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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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06-3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그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지요. 햇살이 따가웠다는 것. 거의 그 장면만 기억납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좋았구요.

아무 2016-06-30 09:51   좋아요 0 | URL
저도 이방인에서 기억나는 게 따가운 햇살과 마지막 부분에서 뫼르소의 일갈이에요. 시지프 신화를 읽고 다시 읽으니 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많이 띕니다. 이런 게 재독의 즐거움...^^

북깨비 2016-06-30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뮈 전집을 내고 나서 다시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냈어요? 그럼 카뮈전집 시지프 신화를 샀는데 그것도 개정판이 나왔나요? 아흐응~ 전집본 하나씩 천천히 사모으려고 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일까요 ㅠㅠㅠ

아무 2016-06-30 11:03   좋아요 0 | URL
이방인 개정판은 작년 12월에 나온 걸로 되어 있네요. 시지프 신화는 이번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왔는데(번역자는 똑같이 김화영 교수) 많이 수정했다고 합니다. (http://blog.aladin.co.kr/m/mramor/8583402) 저도 새로 사진 않을 거 같긴 한데..ㅠㅠ 이미 갖고 있는 책의 전면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마음이 휘청하죠. 다시 사야하나 하는 마음에..ㅠㅠ

북깨비 2016-06-30 11:47   좋아요 1 | URL
흑흑 아무님 제 심정을 정확히 아시는군요. 시지프 신화를 불과 몇달전에 구입해서 더 휘청했어요. 그나마 표지가 새로나온 민음사 것보다 전집본 것이 맘에 들어서 위안이 됩니다.

cyrus 2016-06-3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정판이 나올 때 저는 구판은 책장 장식품으로 사용하고, 개정판은 도서관에서 빌려 봅니다. 구판과 개정판의 번역 차이가 크지 않으면 개정판을 사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 책 살 돈이 있으면 개정판도 장만하고 싶습니다. ㅠㅠ

아무 2016-06-30 17:23   좋아요 0 | URL
저도 웬만해선 개정판을 사지 않는데(아무래도 돈의 압박이..) 이방인은 번역 논란이 불거진 적도 있고 해서 궁금한 마음에 샀어요. 근데 생각보다 차이가 큽니다.. ㅎㅎ 시지프 신화는 못 살 거 같아서 도서관에 신청만 했어요. 언제 올진 모르겠지만..ㅠ
 








입은 얄궂다. 물리적으로는 가장 얇은 외피로 덮여 있으며, 가장 깊은 입구이자 출구라 할 수 있는, 이 구(口)가 일단 충족되지 않으면 몸의 나머지 기관들이 제대로 일해주지 않는다. 시험에 떨어지고 사랑에 실패하고 굴욕적인 노동을 하고 불시에 사고를 당해 손발을 잃고 애착하는 이의 죽음을 겪고도, 사람은 밥을 먹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구차하고도 귀한 기관을 통해 먹고 마시고, 나와 남의 사정에 관하여 발설한다. 이러한 입을 얻어맞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심을 느끼며, 각별한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다. 먹는 입을 향한 주먹질은 먹지 말라는 의미이고, 말하는 입을 향한 주먹질은 닥치라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황정은, '입을 먹는 입' (28-29쪽)


특별한 일이랄 것이 없는, 평범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독서실에 있었고, 밀린 방학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Axt』 5호를 읽기 시작했고, 『시지프 신화』의 두 번째 장을 읽었고, 『불안의 책』은 200번대에 진입한 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마지막 유세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누가 당선될지 알 것 같았고, 뉴스는 암담하거나 시답잖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집에 와서 오로지 황정은 작가의 글을 보기 위해 구입한 『문학동네 61호』를 폈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정치적 소견이나 성향을 드러내는 일을 기피했다. 이는 사람들이 정치적 성향이라는 잣대를 내세워(때로는 휘두르기도 한다) 사람을 판단하는 이분법적 잣대가 싫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점점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가 그런 화제를 피하는, 그리고 그런 화제에 무관심한 것이 당연한 것 같은 분위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가끔 나의 입, 누군가의 입을 향한 '주먹질'이 생각났던 것 같다. 이 안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하나의 주먹이 되고, 주먹에 맞기 싫어서 입을 다물고, 주먹은 말이 없어 무용해진 입을 먹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감옥(監獄)으로 자진해'(이성복, '1959년') 가는 꼴이었다.


무관심이, 침묵이 미덕인 양, 쿨한 것처럼 치부될 때도 있었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이 때탄다고 말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것이 유효해 보일 때가 있지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희대의 오지라퍼'(구병모, '이창')로 손가락질받던 시기는 지났지만, 이미 먹힌 입은 뚫리지를 않는다.


일인시위용 피켓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동생에게 그 자리에 같이 가자고 말하자 단번에 싫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곰곰 생각하더니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용산이 참혹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알며 그러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기는 무섭다고 말한다. (47쪽)


'입을 먹는 입'은 용산 참사를 다룬 일종의 르포다. 글의 말미에서 황정은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침묵과 부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고. 지금 이 세계에 '침묵으로써 일조했던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 2016년 현재, 내 입은, 안녕하지 않았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넓지 않다. 그리고 깊지도 않다. 그런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손이 가는 대로 써 버렸는데, 어쩌면 주먹보다 무서운 것은 내 입에 주먹이 날아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 입을 먹은 것은 내 입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내일 선거가 나의 일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나는 집에서 1분 거리에 있는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하고,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잠을 잘 것이다. 없는 입을 앙 다문 채. 당장 입을 되찾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작은 틈이나마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잠을 청해야겠다. 그리고 내일 내 입에 낼 그 틈이 여전히 '1959년'을 살고 있는 이 세계에도 틈을 내서, 다음에는 불만이 덜해진 선택지를 들고 나를 찾아왔으면 싶다. 물론, 주먹은 사양이다.


질문을 해보자.

그들의 국가와 당신의 국가와 나의 국가가 다른가.

어떤 대답을 고를까.

같아도 문제, 달라도 문제 아닌가.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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