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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이시바시 재단 소장품전 도록을 봤다

아니 17세기 렘브란트 작품도 있었어? 마네의 이 작품도 있었어? 모네 마네 이렇게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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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은 대부분 전시가 휴무, 갈만한 곳은 다 가서 오늘은 사 놓고 안 읽은 기생수 1권을 드디어 읽기 시작


연상호 감독의 넷플 시리즈 기생수 더그레이도 봤는데 원작은 아직이었다. 진정한 역주행? 아직 슬램덩크도 안 읽어서 곧 봐야한다. 이것도 슬램덩크 극장판 애니를 먼저 보고 원작 만화를 뒤늦게 접하는 셈. 이외에도 4년 전에 풀컬러판 사서 드래곤볼 처음으로 읽었다. 관련 레퍼런스와 밈만 수없이 접하다가. 일본도 도쿄나 오사카나 후쿠오카가 아니라 쓰시마가 첫 여행이었지. 뭔가 늘 주변부를 돌다가 나중에서야 중심부로 향하는 묘한 팔자다


외계에서 박테리아가 날라와 지구생명체에 침입해 체형을 변화시킨다는 테마인데 바이오 미생물에서 기계공학으로 프레임을 바꾸면 트랜스포머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외계사이보그가 머신에 들어가 변신로봇이 되니까. 다만 바이오쪽이 조금 더 기괴하고 깨림칙한데 인간도 대상이되는 까닭. 따라서 전자와 달리 스파이물이 된다


젓가락에서 펜, 컷전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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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제곧내다. 제목이 곧 내용, 즉 결론이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믿는 흐름은 실제가 아니라 측정시계나 세포노화 같은 관측자의 입장에서 발생하는 착각이라는 것이다. 시간의 실체를 부정하고 사건 간의 관계성과 열역학적 비가역성만을 인정한다. 과거만 고정되어 있고 바람이 나를 스쳐지나갈 때 현재가 느껴지며 미래는 내 뒷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그리스인이나 오세아니아인의 해양민족 특유의 비선형적 시간관이나 불교의 윤회적 시간관이 현재→과거→미래라는 선형적 시간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로벨리는 시간 자체가 본질이 아닌 인간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비교되는 흥미로운 시간관이 하나 더 있다. 수학의 시간이다. 구조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주사위를 두 번 던질 때 나오는 수 중 3의 배수가 존재할 확률 같은 경우의 수 문제에서 분명 두 번 던지는 과정 중의 시간의 흐름이 있으나, 무작위 추출이라는 확률적 분석의 시간은 정지된 것으로 가정한다. 그래서 시간의 방향성이 무의미하게 설정되는데 이런 맥락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생략되거나 멈춰 있다고 간주된다. 로벨리는 그래도 흐름이 있다고 했으나 통계적 모델링에서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한편 통계학이 다루는 사회문화적 현상은 분명한 시간의 변화와 맥락적 진화를 전제한다. 따라서 수학적으로 정태적인 모델 안에서 시간은 사라지지만, 실질적으로는 시간성이 통계의 근간을 이룬다. 흥미롭지 않은가? 통계학자가 배우는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데 통계학자가 연구하는 대상의 시간은 흐른다니. 4년 전 통계청장이 세바시에 나와 인구주택총조사 질문을 통해 한국사회의 발달사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더 것이 기억난다. 모두가 안 하거나 모두가 하고 있으면 물어볼 이유가 없고, 애매하게 하고 있을 때 정밀한 조사를 위해 물어보는 질문들이 매5년마다 바뀌어간다고. TV가 있는지부터 반려동물이 있는지까지.


그러나 로벨리의 생각에는 몇 가지 맹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의 정신을 제외했다. 물리학이 아니라 의식이 존재를 구성하기 위해 필수로 요구하는 지각의 구조이고 인간 정신 내부에서만 발현된다. 둘째, 시간은 인간 언어와 이야기 서사의 도구로 만들어진 문화적 산물로 존재론이 아닌 기능적 도구다. 셋째, 시간은 생명이 출현한 이후에만 작동하는 특수한 현상이다. 하여 생명이 없는 영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기적 기억과 목적이 시간성을 창출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시간이 없고 변화의 관계성만이 실재한다는 로벨리의 주장은 오히려 관찰자 없는 수학적 우주를 상정하며 인식 주체를 제거함으로써 이론적 모순을 낳는다. 또한 열역학적 시간만을 진정한 시간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생명이나 목적 혹은 의식 등에서 나타나는 베르그송적 시간경험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는 주장을 선형적이고 시간적 언어구조로 기술해야만 하는 아이러니는 이론 자체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는 Ted Chang원작의 <Arrival>의 동시적synchronous 헵타포드 언어를 어떻게 생각할지. 인과관계가 없고 과현미가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언어말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을 수도 있을까? 시간의 정지말이다. 문득 일본애니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등장하는 디오의 스탠드가 생각난다. 더 월드는 몇 초에서 몇 분에 이르는 짧은 시간 동안 외부세계를 정지시키고 그 안에서 자신만 자유롭게 움직이는 능력이다. 이 설정은 시간의 멈춤이 물리적 실재로 구현 가능하다는 전제에 입각해있다. 능력이 성장함에 따라 멈출 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난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시간의 정지 속에서 상대의 몸에 구멍을 내고 피가 튀기는 등의 변화는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리학적으로 시간은 변화의 순서를 의미하므로 변화가 없다면 시간도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디오 본인이 움직인다면 그 자체가 변화이므로 시간은 멈춘 게 아니다. 모순이다. 게다가 디오가 사람을 때려서 상처를 입히고 물체를 움직인다는 것은 운동의 발생, 에너지 전달, 분자 간 반응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그러나 시간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힘=질량×가속도인데, 가속도는 시간의 함수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완전히 정지시키는 게 아닌 조금 더 유연한 모델로는 마블의 퀵실버나 DC의 플래시가 생각난다. 이 캐릭ㅓ들은 시간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도를 극도로 높여 상대적으로 주변 세계가 정지해 보이게 만든다. 시간 정지가 아니라 시간의 상대적 인지속도의 차이를 극대화한 효과다. 이 방식은 일반상대성이론이나 생리학적 반응 한계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상상이다. 상대적으로,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생명체가 그 속도를 견디며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건 비현실적이다. 공기저항, 마찰열, 시각처리, 반사신경 등도 초월해야 하기 때문. 초고속으로 주변 물체와 충돌하면 에너지 전달량이 어마어마하게 커져 현실에서는 즉사하기 십상이다.


디오 더 월드의 시간정지든, 플래시나 퀵실버의 시간지연이든 픽션에서 펼치는 상상의 나래로만 취급하기엔 아직 재미있는 생각의 실타래가 남아있다. 그래도 그 능력들을 현실가능하게feasible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타협해보는 게 좋을까?


일단 시간정지는 뇌의 처리율을 변화시키는 능력일 수 있다. 커피가 주는 효과다.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주파수를 빠르게 공명시키는 것이다. 왜 어릴 때는 방학이 너무 긴데 나이가 들면 깜빡깜빡할까? 작년에 왜 어제같아질까? 어렸을 때는 경부선 타고 귀향하는 길이 천년만년 같았는데 왜 지금은 눈 깜짝할새일까? 뇌에서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주파수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커피가 그 주파수를 원래 리듬대로 조여 인식속도를 빨라지게 한다. 단, 5분간만. 그래서 사람들이 커피를 그렇게 쪽쪽 수혈하는 것이다. 실제로 머리가 좋아지는게 아니라 시간을 정교하게 인식하는 것일 뿐인데 능률이 좋아진 것 같은 플라시보 효과를 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뇌처리율을 높여 외부세계가 멈춘 듯 인지되도록 만드는 착각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인식의 흐름이 빨라진 것이지 물리적으로 빨라진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물리적인 효과를 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특정공간 내에서만 시공간을 왜곡하거나 중력장을 생성하여 국소적 시간버블을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복잡한 수식과 이론은 생략. 아니면 최근 회빙환+시스템관리자계열 웹툰에서 상상하듯이 운영자 권한으로 시간을 편집하고 정지한다는 설정도 있다. 마치 게임에서 일시정지하고 캐릭터를 이동시킨 뒤 다시 재생하는 것처럼. 시간은 실제로 멈춘 것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에 개입하는 API같으 고차원적 존재가 일시정지-수정-재생한다는 급진적 생각이다. <테넷>도 리와인드라는 카메라의 기능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한 것이고, 멀티버스 세계관도 게임의 캐릭터 사망 후 리로드, 리플레이를 스토리로 재해석한 것이듯, 한 콘텐츠의 시간에 대한 생각은 다른 미디어에도 영향을 준다.


카를로 로벨리까지 경유할 필요 없이 시간은 절대적이며 전 우주에 균일하게 흐른다는 전제는 이미 현대 물리학에서 부정되었다. 다만 그렇다면 이제 어떤 시간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가 관건이다. 변화가 있으면서도 시간을 부정하는 주장은 개념적으로 자기모순에 가깝고 시간 없이 순서를 말할 수 없다는 언어적 한계가 있다. 시간정지나 시간지연, 다른 시간선 모두 흥미롭지만 인식주체 없는 외부세계만을 상정하는 환원주의적 시야를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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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중남미의 영향이 없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천경자와 이쾌대

채도 낮은 그레이 계열과 채도 높은 원색이 공존하는 묘한 남미적 화풍이다

이쾌대는 10년 전 국현미 덕수궁에서 전시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의 일본 유학시절 디에고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 등의 벽화운동을 접하고 대다수가 문맹인 민중에게 고대문명과 전통민속을 대중매체인 벽화와 시각적 언어로 보여주는 멕시코의 탈식민지 문화운동에 감명을 받았다

올해 암스테르담 출판사에서 이쾌대의 예술을 식민, 분단 등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분석하는 책이 나왔다. 일독을 요한다

어떤 이는 전생의 기억 때문일까 어떤 나라에 특히 끌린다. 대표적으로 아프리카 인도 중남미 티벳 몽골. 돈 벌고 잘 살다가 갑자기 번개를 맞고 훌쩍 혈혈단신으로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소식이 간혹 있다.

예술가는 어떤 나라를 보면 갑자기 영혼을 한 톨마저 그 나라로 진공흡입해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전생의 인연이리라



책 소개

좋은 표현


This book celebrates the life and works of Lee Qoede (1913–1965), who focused on art’s social purpose and representation of civilians. He believed “art must be an integral part of the struggle in reality. It cannot simply be a still-life of apples, flowers, or scenery.” Born in South Korea, he was a prisoner of war, defected to North Korea, was politically purged, and died at fifty-two. His works were banned in South Korea until 1988.

This monograph explores Lee Qoede’s art within the context of Cold War politics and international leftist exchanges, including his experiences of civilian massacres, prisoner-of-war camps, and his defection to North Korea. It examines social realism, socialist realism, and Mexican mural influences on Lee’s oeuvre, reevaluating his place in South Korean art history. Highlighting the global impact of Lee’s work, the book integrates insights from international artists and movements, challenging Eurocentric modernism and offering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his artistic journey



귀찮아 구글번역기 돌림


이 책은 예술의 사회적 목적과 시민의 재현에 초점을 맞춘 이쾌대(1913~1965)의 삶과 작품을 기념합니다. 그는 "예술은 현실 투쟁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사과, 꽃, 풍경의 정물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믿었습니다. 남한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포로로 월북하여 정치적 숙청을 당하고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1988년까지 남한에서 금서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단행본은 냉전 정치와 국제 좌파 교류라는 맥락 속에서 이쾌대의 예술을 탐구하며, 민간인 학살, 포로수용소, 그리고 월북 경험을 다룹니다. 사회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그리고 멕시코 벽화가 이쾌대의 작품 세계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며, 한국 미술사에서 그의 위치를 ​​재평가합니다. 이 책은 Lee의 작품이 세계적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하며 국제 예술가와 운동의 통찰력을 통합하여 유럽 중심적 모더니즘에 도전하고 그의 예술적 여정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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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포콩은 사진 도록의 말미에서 이와 같은 에필로그를 적었다


나의 연출 사진과의 이야기는 끝났다. 나의 20년간의 되찾은 낙원(Mon histoire avec la mise en scène photographique est terminée : mes vingt ans de Paradis retrouvé)


사진이라는 두 번째 낙원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어린 시절의 낙원 이후에 잃어버렸던 그 세계를 이 최고의 순간들로 엮어보려 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된 글들로만 한정했다 (사실 다른 언어, 특히 일본어로 된 글도 많이 존재한다). 단지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모국어와는 숙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이렇게 자문했다. 세상은 그것을 처음 이름 붙인 언어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을까? “행복”, “좋은 하루”, “휴가”를 말하기 위한 다른 소리들, 다른 음악들이 존재할까? (d’autres sons, d’autres musiq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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