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과거의 일로 마음이 많이 아프고, 마타라는 존재를 미워할지도 모르지만, 니가 승낙한다면, 나는 너의 맹세를 듣고 싶어. 너와 특별한 관계가 될 수 있다면 좋겠는데..나에게 올래?]
좀 전에 토끼의 고백을 들었을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었다. 일전에 맹세를 받을 때, 나와 함께하게 됨을 진심으로 기뻐하던 그의 모습이 기억나 용기를 내 제안했다. 내 말이 끝나자 광장 안은 무중력 상태처럼 변했다. 시간마저도 사라진 듯 얼어붙었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을 피부로 느꼈지만 토끼만 응시하며 반응을 기다렸다. 천년이 지난 듯 한 기분이 들 무렵, 토끼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격해지는 감정이 공기를 타고 다가와 부딪히자 내 몸도 조금씩 흔들렸다. 토끼는 뒤로 돌아 여전히 멍한 표정의 석고상들을 둘러보았다. 잠깐 머리를 들었던 늑대가 앞발에 고개를 묻었다. 토끼는 다시 나를 향해 몸을 바르게 세웠다.
[나의 주인, 나의 목숨. 당신은 내 영혼의 마타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에게 내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토끼가 말을 마친 후 내 앞으로 다가와 손등에 코를 문질렀다. 그러자 나 역시도 뭔지 모를 격한 감정이 발끝부터 밀려와 덥석 안아버렸다. 부드러운 털에 코를 박자마자 토끼가 사람으로 변했다. 길고 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지닌 여자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나는 아름답고 눈부신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 감촉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손 안에서 춤을 추며 부드럽게 움직였고, 그 아래엔 길고 하얀 속눈썹과 동그란 눈이 촉촉한 눈물에 젖어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게다가 어린 시절에 잠시 가져봤던 바비 인형의 향수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참 아이러니 한 건, 이 순간 그녀의 피가 먹고 싶어졌다. 내 송곳니가 간질간질해지며 그녀의 가늘고 어여쁜 목이 확대되어 보인다. 입술이 본능을 따라 조금씩 벌어졌다.
[드시고 싶으세요?]
그녀의 눈이 내 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알았구나]
[뱀파이어니까 당연하죠. 드셔도 되요]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무척 아플걸 알면서도 나를 위해 희생을 하겠다는 그 마음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 대한 책임감도 솟아올랐다. 나를 허기지게 만드는 본능을 잊기 위해 간신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광장 반대편에 모여 있는 프릭스들이 우리의 대화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좀 있으면 해가 뜰 거야. 집으로 돌아가야되]
고양이 상태의 프릭스가 생각을 보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토끼를 향해 말했다.
[저녁 때 우리 집으로 와]
[네]
간단하게 대답한 그녀는 다시 토끼로 변해 내 품을 벗어났다. 그만 돌아가라는 표시로 손을 흔들자, 웅성거리는 무리들 속으로 뛰어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힐끔거리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마타이기 전에 뱀파이어야. 너희들을 갑자기 해칠 수도 있고, 피를 빨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최대한 노력해서 너희들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옅은 주황색이 섞인 미세한 새벽빛이 바닥에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다시 앞장을 서 회색의 숲속 길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몇 발자국 걸었을 때, 토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에스더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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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관계를 두려워 해]
[내가?]
[너의 곁에 있은 후로 단 한 번도 니가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듣지 못했어]
가디건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숲길을 되돌아올 동안에 프릭스는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예리함에 놀라며, 조용히 경청했다.
[너의 스승님, 아줌마 그리고 나, 아니 이 세상의 너를 뺀 모든 생물들은 모습만 있을 뿐, 의미가 없어. 아까 네가 한 말이 진심이 되려면 마음을 열어야되]
[이름이..그렇게 중요해?]
[꼭 이름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는 뜻이야. 네가 안아준 토끼도 에스더라는 자신만의 이름을 너에게 말했잖아. 니가 그걸 부르지 않으면 에스더는 저 숲 어딘가 있는 수많은 토끼들과 똑같아져]
집에 도착해 안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나를 남겨두고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창문으로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사람이었을 때, 소중한 이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다. 어쩌면 그건 형제들 사이에 흔히 생길 수 있는 일들 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마음에서 그 기억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혹시라도 또다시 상처 받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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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들은 보통 새벽빛이 올라올 무렵에는 잠자리에 든다. 계속 깨어 있다 보면 체력 소모가 엄청나 정작 밤이 되면 쓰러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몇몇의 뱀파이어들만이 낮에도 밤처럼 빛을 피해 돌아다니는데, 내가 집으로 들어갔을 때 지친 나와는 다르게 스승님은 활기찬 모습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건너편에 앉아 말없이 바라보았다. 프릭스의 말처럼, 나는 단 한 번도 스승님의 진짜 이름을 볼러본 적 없다. 아니, 더 정확히는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슨 할 말 있니?]
핸드폰을 탁자에 놓으며 나를 바라보는 스승님의 눈이 엄마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어요. 그냥..옆에 있으려고요]
스승님은 탁자를 돌아와 옆 자리에 앉았다. 크고 강한 팔로 부드럽게 내 어깨를 감쌌다.
[스승님은 가족이 있었나요?]
[가족?]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음..있었지]
[누구누구요?]
[부모님과 동생 둘 셋 정도..아니 더 있었나?]
[에이..몇 십명도 아니고 겨우 두세 명을 정확히 모르다니..]
농담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스승님의 옆구리를 살짝 쳤다. 그는 진심으로 아픈 척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는 남자들이 정식 부인 이외에 다른 부인을 여럿 두는 게 당연했거든. 그래서 어떤 사람은 형제만 스무 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어]
[와~고대 이집트에서 살기라도 하신거에요?]
대답은 없지만 표정이 상당히 진지했다. 순간 진짜 이집트에 살았던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스승님은 몇 천 년도 더 된 뱀파이어일 것이다. 나는 그의 팔을 살짝 꼬집어보았다. 피부가 말랑말랑하고 탱글탱글한 도토리묵 같은 게 너무 완벽해 정말 그만큼을 살았나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