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사투리 쓰는 비중 있는 조역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무슨 연고가 있어서도 아니다. 마치 기본 설정처럼 으레 나와서 높은 진동수로 관객 귀를 훑어버린다. 재미 더하는 한 축이라 여기면 그만이지만 조폭 빼곤 대부분 경상도 사투리라는 사실에 이르면 문제로 삼아야 한다. 왜 하필 경상도 사투린가.

 

조금 더 문제를 확장하면 답은 절로 나온다. 경상도 억양을 쓰는 방송 진행자가 많다. 심지어 아나운서도 있다. 표준어가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정치적 음모가 끼어 있지 않는 한 공적 방송에서 사투리 억양을 여과 없이 내는 일은 잘못임이 분명하다. 문제 삼지 않게 된 사회적 기류는 모름지기 정치적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대통령을 포함한 지배층에 압도적으로 경상도 출신이 많아 청와대나 재벌가 공용어에 경상도 사투리가 들어 있다는 말이 떠돌았었다. 이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실상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수많은 사람 무의식에 유구한, 그러니까 저 신라적 우월감이 똬리 틀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상업적 드라마나 영화 대본을 쓰는 작가들은 누구보다 세태를 꿰뚫고 민감해야 한다. 그들 작품에 나타나는 어떤 생각이 당위냐, 현실이냐, 논란 여지가 있으나 대개 해피엔딩이라는 가짜 당위를 내세운 현실임이 맞다. 특히 인기 있는 드라마 작가 집단은 이 혐의에서 더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흐름에 정치적 요인이 좀 더 강하게 작용하면 급기야 드라마 주인공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날이 온다. 나아가 저녁 9시 뉴스도 경상도 사투리로 듣게 될 날도 온다. 정치판이 요즘 같다면 말이다.

 

2. 경상도 사투리는 높아져 봐야 결국은 식민지 말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제국 말이다. 일제를 거쳐 USA 제국 포식 언어에 포박된 상태로 나날이 생명력을 잃어가는 모국어에 극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내력은 이렇다.

 

우리는 이미 오랜 세월 한자 식민지로 살아왔다. 우리 글이 없었던 탓으로 말하자면 불가피한 일이니, 식민지라 표현하는 일은 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에도 5백 년 동안 한자가 공식 문자였다는 사실과 마주하면 유구한 특권층 부역 세력이 만들어 놓은 기득권 시스템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글이 공식 문자인 현재도 여전히 한자-어는 한글-말과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세력을 떨치고 있다. 이 바탕 위에 한자 의존도가 훨씬 높은 일본어가 들어와 식민 그늘은 더 어두워졌다.

 

일본어 식 말하기와 글쓰기가 깊숙이 자리 잡았고, 일본식 한자어가 우리식 한자어를 대체했으며, 일본 어휘를 우리 어휘인 양 쓴다. 일반 대중이 이런 오류에 휩싸여 있는 일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국어학자, 교육자, 전문적 글쓰기를 하는 지식인, 문학인, 언론·방송인 입에서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일은 실로 참담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도리어 언어 대중을 오염시키니 말이다. 설상가상 미군정 이후 영어가 또 다른 지배 언어로 등극했다. 영어식 폭력은 더욱 큰 위력으로 우리 말글 목을 조른다.

 

말글 부역 본진은 물론 제국에 부역하는 특권층이다. 저들 내부 공식 언어는 당연히 일본어와 미국식 영어다. 유학을 통해 습득한 저들 종주국, 아니 조국 언어는 의당 다른 근본 없는” “들 언어와 결별해야 했다. 그리고 근본 없는 것들은, 일본어·영어식 한국어쓰게 하면 감지덕지할 일이라고 여겨 만든 조직이 다름 아닌 국립국어원이다. 공식적으로 표방한 목적과 일반인이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국립국어원은 어지러운 국어 상태를 고의로 방치 심지어 유도하고 있다. 그 결정적 증거가 표준국어대사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큰사전이 널리 쓰이는 길을 원천 봉쇄해버렸다. 이는 조만식을 위시한 자주 인사들이 민립대학 운동을 벌이자 이를 무력화하려고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던 사건과 그 맥이 닿아 있다. 실제로 그 경성제국대학 부역 인맥이 국립국어원을 장악했고, 지금까지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출신 철밥통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국립국어원을 혁파하지 않으면 우리말은 말라 죽는다. 말이 죽으면 말 공동체도 죽는다. (이상 내용은 공시적 이야기-아베의 축원<말글 부역 서사> 일부를 가져옴.)

 

3. 정치적 중요성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생명 자체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는 진실과 마주친다. 반제국주의 서사 의학, 그러니까 녹색의학 이야기에 말 문제를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공용어인 영어 지배력은 제국주의 백색의학에서 더욱 강고하다. 의학 드라마를 보면 대뜸 알아차릴 수 있다. 조사 접미사 빼고 모든 말을 영어로 한다. 영어로 구축된 제국주의 백색의학 체계는 생명을 팡이실이로 인식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한다. 네트워킹 생명을 절멸시키는 거대 전략이 다름 아닌 제국주의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언어는 생명을 팡이실이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말이다. 그 말에 가장 적합한 말이 우리말이다. 국뽕이 아니다. 수많은 근거가 있지만 세 가지만 언급한다. 첫째, 우리말은 동사 중심이다. 영어는 물론 명사 중심 말이다. 영어에서 형용사는 명사 수식어로 명사에 가깝지만, 우리말 형용사는 동사에 가깝다. 동사 중심 말은 세계를 정적 구조·실체로 이해하지 않고 동적 사건·과정으로 이해한다. 구조·실체는 사건·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한 양상일 뿐이다. 그 양상을 영속한 권력으로 둔갑시킨 이데올로기가 제국주의 백색문명 백색의학이다.

 

둘째, 우리말은 나와 너, 평등한 상호 주체 사이에 일어나는 비대칭 대칭 사건을 말속에서 구현한다. 그 증거가 바로 주어-목적어-동사 어순이다. 주어-동사-목적어 어순을 지니는 영어와 정반대다. 내가 하는 행동보다 그 행동 상대를 앞세우는 이 사유야말로 팡이실이 정신이다.

 

셋째, 이 부분은 매우 중대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합용병서(合用竝書) 원칙을 천명했다. 이렇게 하면 무려 400억 개 소리글자가 만들어진다. 이런 다양하고 섬세한 표현 자체가 창발적 생명현상을 풍요롭게 드러내는 길을 열어준다. 그런데 총독부에서 박정희 정권까지 이를 가로막아 40개 자모만 쓸 수 있게 가두었다. 이 과정에 참여한 학자, 대표적인 예가 특권층 부역자 최현배다. 최현배는 현재 건국유공자 반열에 올라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무늬만 독립 국가일 뿐 우리는 여전히 식민지를 살고 있다.

 

4. 221은 국제 <모국어의 날>이다. 개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 요소이자, 공동체 생명·문화 구성을 담당하는 언어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다양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정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 약 6,000종 가운데 절반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으며, 실제로 2주마다 1개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이상 내용은 공시적 이야기-아베의 축원<말글 부역 서사> 일부를 가져옴.)

 

언어가 사라지는 일은 생명 다양성이 사라지는 일이다. 제국이 노리는 바다. 제국에 맞서 생명을 한껏 펼쳐내 지구 생태계 파괴를 저지하려면 녹색 언어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언어공동체는 각기 자기 말을 지키고, 말들 사이 팡이실이를 만들어야 한다.

 

내 개인적인 생각을 보탠다: 인간 너머 비인간 생명들이 하는 말도 이 운동 주체로 세워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진실을 누락시킨 채 또다시 인간중심주의로 내달려서는 안 된다. 고래도 버드나무도 송이버섯도 mycobacterium vaccae도 말을 한다. 인간 귀로 듣지 못한다고 해서 없다고 하면 안 된다. 귀가 아닌 다른 통로를 찾으면 된다. 아니. 어쩌면 인간이 백색 귀를 버리고 녹색 귀로 복귀하면 바이러스 말도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 DNA 적어도 8% 이상, 심지어 50%까지가 바이러스에서 왔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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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병을 화두 삼다

 

아픈 사람은 온통 아픈 생각뿐이기 십상이다. 통증이 심하면 더욱 그렇다. 병이 중할수록 더욱 그렇다. 아픈 생각에 빠져들고 만다. 병 생각에 빠져드는 일은 병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병 악화에 에너지를 보탤까. 가볍게 답할 일 아니다. 반대 경우를 살펴보자. 낫는 생각에 몰두하는 일은 어떤가. 병 호전에 에너지를 보탤까. 가볍게 답할 일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문제에 가볍게, 그리고 쉽게 답하는 여러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가장 유서 깊은 말은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출처가 어딘지 잘 모르지만, 불가에는 이미 진리처럼 각인된 말이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모르지 않는다. 불가 수행 범주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이 말은 개소리가 된다. 암에 걸리는 일도 마음 지음이고 암에서 놓여나는 일도 마음 지음이란 말은 얼마나 가볍고 쉬운가. 그다음 긍정주의. 모름지기 일체유심소조의 세속 판 현대 버전쯤 되겠다. 여전히 어느 제국에서 왕 노릇 하거니와 이 또한 개소리임이 분명하다.

 

이런 말도 들어왔다. 병은 그저 나한테 있게 된 무엇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해서 들어온 무엇이 아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다고 나가는 무엇이 아니다. 병이 어떻게 들어왔든 의학적 치료로 낫게 하면 그만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결곡한 합리 얼굴을 하고 있으나 이 역시 개소리다.

 

이 개소리들 촐싹거림은 질병 자체를 질병 앓는 사람에게서 떼어내어 사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질병은 사물이 아니다. 앓는 사람 삶, 그 살아 움직이는 과정 일부다. 사람에게서도 삶에서도 분리할 수 없는 사건이며 대부분 물적 근거와 영역을 지닌 실재다. 그런 실재에 걸맞은 대우는 단연 화두 삼기. 분명히 하자. 화두 들기가 아니다. 드는 짓은 남성 가부장 선객이 하는 짓이다. 우리는 화두를 선 방편 사물로 들지 않는다. 화두를 인연으로 받아들인다. 화두와 전 인격으로 관계 맺는다. 삼아지는 화두에는 우리 인생 전체가 연루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을 화두 삼는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질병을 처치대상 사물로 폄훼한 역사를 통렬히 반성한다. 질병은 앓는 사람이 잘못 해서 들고 들어온 몹쓸 물건이 아님을 선언한다. 질병은 마음만 먹으면 후루룩 삼켜버릴 수 있는 라면 같은 물건이 아님을 명토 박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과도 질병 앓는 사람과도 평등하게 상호소통하기 위해 작고 적게 배어드는 마음(小少沁心)이며 그 몸짓이다.

 

2. 홀로 선(獨禪)이 아니라, 서로 선(共同禪)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질병과 질병 앓는 사람을 화두 삼을 때, 그 선 수행은 당연히 홀로 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둘 이상이 서로 주고받는 질문과 질문에서 답의 답을 구해간다. 질병을 앓는 사람은 질병과 말을 틈으로써 이 과정을 시작한다. 거기에 의자가 참여함으로써 삼자 서사가 형성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백색의사 홀로 선(獨禪)이므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과 환자, 그리고 의자 사이 서로 선(共同禪)이다.

 

질병이 서사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있다. 때려잡지만 않는다면 질병은 스스로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을 귀 있는 환자가 먼저 듣는다. 환자 귀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면 들을 귀 있는 의자가 먼저 듣는다. 둘 다 묻지 않는다면 질병은 침묵한다. 질병 침묵을 딛고 행해지는 온갖 처치는 폭행이며 살해다.

 

환자가 서사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있다. 의자가 눈만 내리깔지 않는다면 환자는 스스로 말한다. 그 말을 들을 귀 있는 의자가 들으면 함께 질병에 귀 기울인다. 삼자가 주고받는 이야기는 벼락이 되어 함께 깨칠 틈을 낸다.

 

반제국주의 백색의학이 홀로 선으로 사회를 의료화했으므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서로 선으로 의료를 사회화한다. 사회화된 의료는 스스로 특권 거점을 지운다.

 

3. 언어, 그 너머(頓悟漸悟)

 

서로 선은 묵언-일극-개체-집중-중심 시선으로는 할 수 없다. 서로 선은 대화-양극-전체-주의-비 중심 시선으로만 할 수 있다. 다 말한다. 다 듣는다(). (냄새) 맡는다().

 

최후 답은 말이 아니다. 말 아닌 답에 이르려면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말은 비상하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비상한 말이 소통, 깨침, 치유, 그리고 마침내 장엄을 일으킨다. 장엄을 일으키는 비상한 말은 상스럽다. 상스러운 말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것은 비명이며 욕설이며 신음이다. 그다음이 시쳇말이다. 전문용어는 대개 상스럽지 못하니 비상하지 못하다.

 

서로 선 대화는 전문용어로 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영어(일부 라틴어), 한문 아니면 입도 벙긋 못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chill 아니고, 惡寒 아니고, 으슬으슬하다(오싹오싹하다). 한의학 진단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말 가운데, ‘장마철 반지하 방이 있다. 생체진동수가 떨어져 대사 속도가 느려진 몸 상태를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할 때 쓰는 비유다. 아니고, 冷寒 아니고, 아니다. 심지어 차고 축축하다는 말보다도 오만 배 빨리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 말로 떠는 위세나 독점하는 정볼랑은 백구한테나 던져줄 일이다.

 

고백건대 나도 역시 한자 말, 뭐 어떨 땐 영어도 쓴다. , 알아듣게 풀고, 알아들을 만할 때만 쓴다. 대부분 용어는 환자 스스로 쓰는 말을 그대로 받아서 쓴다. 환자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때는 시쳇말, 일상어부터 대신 제시하면서 말문을 튼다. 아무튼 바꿀 수 있는 의학용어는 모조리 바꾸고, 바꾸기 어려운 용어는 적절한 비유나 이미지를 동원해 소통을 도와야 한다.

 

말로 소통해서 서로 언어 감각과 뉘앙스, 그 너머 언어-()을 알아차리면 눈빛만 보고도 안다. 특히 숙의치료 하다 보면 놀라운 경험을 드물지 않게 한다. 의자와 환자 사이 구분이 무너지고 평등한 선문답 수준 언어와 직관이 오간다. 서로 새로움을 생성해낸다. 환자가 의자를 넘어서는 순간도 허다하다. 서로 치유하고 서로 자라간다. 서로 깨달아가고 서로 깨쳐간다. 서로 돈오(頓悟)의 큰 기쁨에 이르고 서로 점오(漸悟)의 괴괴함을 지난다.

 

4. 마침내 큰 수레(大乘)

 

빨빨 기어 다니며 탈 없이 크던 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열을 펄펄 끓이며 앓는다. 젊은 엄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할머니가 웃으며 말해준다. “아유, 우리 강아지가 걸으려나 보다!” 아기는 앓고 난 뒤 영락없이 걸음마를 시작한다. 온 가족이 함께 아기 한걸음 한걸음에 환호하며 행복감에 싸인다.

 

아기 열병과 걷기 사이에 어떤 의학적 인과가 존재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질병 자체를 환호 대상으로 이해하는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질병을 삶 큰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써 지혜를 얻고 행복을 예감하는 일은 하등 이상하지 않다. 질병을 두고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에 따라 인간은 사뭇 다른 결로 삶을 산다. 삶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질병은 질병을 앓는 사람과 그를 치료하는 사람과 그를 돌보는 사람을 함께 깨달음으로 이끄는 큰 수레(大乘)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그 큰 수레를 보지 못한 채, 각기 괴로움과 시큰둥함과 마지못함으로 허정허정 걸어갈 따름이다.

 

바야흐로 한 생각 크게 돌이킬 때가 왔다. 질병 인식 패러다임 전체를 뒤집어엎어야 한다. 인류가 당면한 생명 위기는 창궐하는 질병 탓이 아니라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질병을 잘 못 인식하고, 거기 터 하여 치료 약이랍시고 뿌려대는 화학합성물질 때문이다. 이제 질병은 백색 독극물로 때려잡을 적이 아니다. 인류 구원 서사를 실을 큰 수레다. 이 큰 수레를 끌 주체는 백색 요법 포르노와 독극물을 거절한 질병 인민이다. 만국의 아픈 이여, 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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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꺼낸 걷기 이야기 핵심에 놓여 있으면서, 그 흐름 전반을 관통하는 종자 논리가 형식 논리일 수는 없다. 걷기 동작 그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 걷기 이야기 종자 논리는 A이기도 하고 non A이기도 한 무엇, A도 아니고 non A도 아닌 무엇을 인정하는 다치(多値) 논리다. 다치 논리는 무한한 비대칭 대칭을 품는다. 비대칭 대칭은 평등한 상호 소통을 전제한다. 상호 소통은 반제국주의 녹색의학과 제국주의 백색의학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형식 논리에 터 한 이종 의학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종 의학이 모든 증상을 병으로 오인하고, 모든 병을 적, 그러니까 non A로 오인해서 무조건 때려잡는다는 사실 또한 논리적 필연으로 알고 있다. 이런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구조상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안을 수밖에 없다.

 

첫째, <19. 녹색 면역은 제국주의 이종의학을 넘어선다>에서 이미 상론했듯 자가면역 이론 구조가 취약하다. 이론이 취약하니 치료 구조도 그러하다. 역설 이론을 세울 수 없는데 어떻게 역설 치료가 가능하겠는가. 그러니까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예컨대 혈소판 감소가 자가면역으로 발생하면 비장을 제거한다, 이런 식으로 치료한다. 이는 물론 치료가 아니다. 쌍방향 면역 조절이란 개념 자체가 없으므로 양의사도 그들에게 치료(?)받는 환자도 속수무책이다. 아니, 무엇보다 말을 못 알아듣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쌍방향 면역 조절 이론을 알고 있으며 치료 또한 가능하다. 이는 결정적 차이다.

 

둘째, 상호소통이 그 자체로 의학이라는 인식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세계를 다만 질량과 에너지로 인식하고 만다. 질량은 구조, 에너지는 물리화학적 기능이다. 이 둘에 문제가 생긴 사태가 질병이므로, 구조를 조정하고 기능을 개선하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질병과 질병을 앓는 인간을 분리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모든 질병은 그 질병을 앓는 사람 삶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질병을 치료하는 데 삶 문제를 소거할 수는 없다. 삶 문제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곡절과 의미를 담은 소식이다. 질병에 관한 소식을 주고받는 그 자체가 의학이라는 진실을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모른다. 그 작은 일부를 플라세보라는 이름으로 비틀어댈 뿐이다. 백색의사들은 질병 자체에 대한 정보조차 소상히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 아픈 삶에 일절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의학 서사 근원 주체인 아픈 사람을 도리어 철저히 소외시킨다. 이는 다만 의학적 구조 오류가 아니다. 범죄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과도 질병 앓는 사람과도 소통한다. 질병 자체로 가치로우며, 질병 앓는 사람 자체도 가치롭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이는 절대적인 차이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알 수 없다. 제국 백색문명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치료라는 대의명분이 있으니까. 이런 제국주의 백색의학에서 질병과 질병 앓는 사람을 구해내는 유일한 길은 저들을 아예 입에 담지 않고 고요히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팡이실이를 진행하는 일뿐일는지 모른다. 입에 담을수록 사악한 구조는 그 말을 먹잇감 삼아 끈질긴 생명력을 더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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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걷기를 꺼낸 까닭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걷기는 인간이 우주 운동을 체현하는 방식이다. 걷기로서 인간은 걷기로써 인간이며 우주다. 이 인간됨을 제국 백색문명이 망가뜨렸다. 망가진 인간됨을 복원한다는 뜻을 지니고, 걷기를 마음에 두는 일에서 반제국주의까지 이야기를 펼쳐보았다. 꼭 한 가지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가짜 걷기 이야기다.

 

규칙적 운동 장소 하면 대뜸 헬스클럽을 떠올리는 현상은 오늘날 도시인에게 자연스럽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러닝머신은 단연 총아다. 총아 태생은 어둠이었다. 리베카 솔닛이 걷기의 인문학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러닝머신, 그러니까 트레드밀은 19세기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순치하기 위해 만든 징벌기구였으니 말이다.

 

아무 제재 없이 걷기만 하면 되는 이 기구가 어떻게 징벌의 공포를 몰고 올 수 있는가? 죄수들이 두려워한 까닭은 가혹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 반복 동작을 지속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순 반복 동작 지속이 형벌 본질을 지닌다는 사실을 놓고, 리베카 솔닛은 시시포스 신화를 거론한다. 여기에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으리라.

 

문제는 지금 우리가 그 단순 반복 동작을 자진해서 한다는 데 있다. 물론 목적은 건강이다. , 이 목적이라면 당시 교도소 측에서도 똑같이 지녔던 바다. 비대칭 대칭을 이루는 또 다른 교도소 목적 하나는 무엇인가. 죄수들 정신을 순응적으로 만들기 위함, 바로 그거였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스스로 알아서 제국 백색문명에 순응하려고 트레드밀 위를 달린다는 말이 아닌가. 아뿔싸!

 

그렇다. 트레드밀 위에서 몸을 튼튼히 하는 행위는 마음을 제국 백색문명 충직한 노예로 만들려는 목적 때문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한다. 이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걷기다. 이는 반우주적 운동이다. 이 순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당장 그만두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트레드밀 위 걷기는 엄밀히 말해서 가짜 걷기다. 앞으로 나아가는 환상이 있을 뿐, 제자리 걷기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앞으로 나아갈 때 쓰는 근육과 다른 근육을 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실제 앞으로 나아갈 때 마주하는 시공간적 변화가 거세되어 있다. 가상적 조건을 설치하는 짓은 더욱더 큰 속임수일 따름이다. 중독 메커니즘이다. 인간을 포기하고 알량한 몸 이득을 위해 땀 흘릴 일, 결코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실을 추가한다. 이런 제자리 걷기를 반복하면 소뇌 감수성이 손상된다!

 

백색 가짜 걷기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녹색 진짜 걷기를 곧바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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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도에 나오는 관악산 중앙계곡으로 향한다. 일명 수영장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전에는 계곡 아래 서울대 수영장이 있었다. 물을 그 계곡에서 끌어왔음에 틀림없다. 진입로 계단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인적이 끊어져 오히려 없어진 상태보다 더 을씨년스럽다. 게다가 출입을 금하며 위반 시 벌금을 낼 수도 있다는 경고판을 보니 살짝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깊숙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한눈에 보아도 작은 계곡이다. 물은 이미 말라버린 상태다. 조금 더 들어가자 물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물을 통제하려 쌓은 석축이 무너져내린 곳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다. 물길에 그런 식으로 손댄 석축이 여러 군데 보인다. 인간이 편의에 따라 변형시킨 숲 풍경을 나는 극도로 싫어한다. 숲에서 인간은 길, 그것도 최소한을 내야만 한다. 오늘은 능선까지 가지 않는다. 제의 공간으로 삼을만한 곳을 찾은 다음 훌쩍 뒤돌아 내려온다.



올라올 때 처음 물소리를 들은 곳에 이르러 건너편으로 넘어간다. 옆 계곡으로 가는 산자락을 돌기 위해서다. 물론 방향만 그럴 뿐 지도에도 없는 소로를 따라가면 목적지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다행히 전파천문대가 나오고 포장도로를 따라가니 저수지 계곡 입구가 나온다. 계곡 입구부터 술판 벌이는 사람들 왁자한 소리가 들려온다. 무심히 지나쳐 소음이 사라질 무렵에 이르자 물 흐르는 널따란 바위가 나온다. 여기도 제의 공간 후보지다.



 

물속에 발을 담가 체내에 쌓인 정전기를 흘려보낸 뒤 훌쩍 뒤돌아 내려온다. 이번에도 다시 옆 계곡으로 가는 산자락을 돈다. 마침 그 길은 한번 가본 길이다. 관악사 운동장 뒤로 난 관악 지리계곡으로 들어간다. 폭포에 이르러보니 이끼 위로 졸졸거리며 소량 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그 너머에서 저수지 계곡보다 더 큰 소음이 들려온다. 마침 일정에 따른 이동 시각이 돼서 여기도 제의 공간 후보지로 일단 낙점해 놓고 훌쩍 뒤돌아 내려온다.



관악산 북쪽 계곡 셋을 순례한 까닭은 내가 숲에 드나드는 목적과 부합하는 지성소가 있다면 찾아보기 위해서다. 낙성대 입구로 내려와 점심을 먹으며 아니라는 잠정 결론을 내린다. 다음 주쯤 내가 들고 나기로 정한 13, 14번째 마지막 계곡까지 가본 뒤 최종적 결론을 내리기로 한다. 관악산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고 숲이 건네는 말을 다 듣고서야 갈 길을 알 수 있으리라. 나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백악산으로 향한다. 백악산은 내게 상수다.



청와대 전망대에서 늘 하는 제의를 마친 뒤 다른 시선으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산 숲에 오는 까닭 하나를 홀연 깨달은 덕분이다. 산 숲에 서면 국적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 숲을 밀어내고 육중하게 들어찬 전경을 더 넓게 볼 수 있다. 그 점령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절멸적인지 맹렬하게 실감할 수 있다. 거대한 부역 백색 도시를 통째로 직시할수록 내 우울증은 한층 건강하게 깊어진다. 이 깨달음만으로도 오늘 숲 걷기는 다시없는 축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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