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라는 책에서 통합사상가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역이자 화폐, 경제적 지대 제거·공유자원 고갈에 대한 배상, 사회·환경 비용 내부화, 경제·통화 지역화, 사회배당금, 경제 역성장, 선물문화와 P2P 경제를 골간으로 하는 신성한 경제가 분리 문명, 그러니까 제국 백색문명을 극복하고 재통합 세계를 여는 중요한 요소라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허황한 낙관론 같지만, 근원적인 문명비판이면서도 당장 개인적 실천까지 가능한 톡톡한 담론이다.

 

저자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 나는 의학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 한다. 이미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경제적 기치>에서 개론 수준 이야기는 했다. 분리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분리 의학은 몸 병과 마음 병, 병과 병 있는 사람, 병 있는 사람과 치료자를 포함한 병 없는 사람, 병 있는 사람과 사회정치, 병과 자연, 병 있는 사람과 자연을 철저히 갈라놓았다. 진단 기준과 치료(?) 약물 보편성을 통해 병 있는 사람이 지닌 고유함과 관계적 존재성을 제거했다. 이렇게 병과 병 있는 사람을 클론으로 찍어낸 다음, 값을 매김으로써 불멸 화폐가 다스리는 영원한 수탈제국에 의료 봉토를 헌정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내용 전반을 관류하며 이야기하는 바는 선물 개념이다. 선물 경제 복원 문제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21선물 속에서 일하기가운데 <신성한 직업>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선물 모델은 무형인 가치를 전달하려는 직업에 특히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음악인, 화가, 성판매자(매춘부로 번역되어 있으나 인용자가 바꿈), 치유자, 상담자, 교사. 이 모두가 값을 매김으로써 가치 저하된 선물을 제공하는 일들이다. 우리가 제공하는 바가 신성하다면, 명예롭게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선물로 주는 일뿐이다. 아무리 높은 가격도 무한한 무엇이 지닌 신성함을 반영할 수는 없다. 내가 구체적인 강연료를 요구한다면, 내 선물 가치를 떨어뜨리는 셈이다. 만약 당신이 위 직업 중 하나에 종사한다면 선물 모델을 한 번 실험해보아도 좋다.

 

한의사지만 하는 일 내용으로 따지면 나는 치유자, 상담자, 교사다. 나아가 인터뷰 전설 오리아나 팔라치가 한 인터뷰는 사랑 이야기다. 섹스다. 너를 홀딱 벗기고 나를 홀랑 들이붓는 싸움이다.’라는 말에 인터뷰 대신 숙의치료를 집어넣어 바꾸고, 숙의 또한 예술인 측면을 고려하면, 나는 위 모든 직업에 해당한다. 나는 그동안 숙의치료에서 선물 모델을 꾸준히 실험해 왔다. 물론 성공한 경우보다 실패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여태까지는(!), 생각하고 있다. 실패(했다고 생각)한 결과는 값을 매김으로써 가치 저하된 선물을 제공하는관습으로 정착되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의사가 숙의로 마음 병을 치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숙의 1회에 90-120, 심지어는 식사까지 해가며 5~6시간 넘게 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이른바 상담 치료비문제가 초기부터 지금까지 가장 큰 고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지난주에도 상담 치료비에 부담을 느낀 어떤 사람이 예약을 취소했다. 좀 더 세밀하게 선물 모델을 연구해서 다시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무 준비 없이 무조건 선물로 제시했다. 그러니까 숙의를 진행하고 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만큼 사례하고 가도록 했다. 그냥 가는 사람, 5천 원 내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그까짓 대화하고 나서 무슨 돈이냐?’며 도리어 화를 내는 사람까지 있었다. 감사를 느끼며 성의껏 내는 경우도 대개 5만 원을 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물색없었다.

 

그다음부터는 설명을 붙였다. 상담 치료 본질과 가치, 상담 치료 일반적인 풍경, 역술인 예, 의료인 아닌 상담사 예, 정신과 양의사 예, 외국 예, 상담 시간 비교 들을 간략하게 했다. 공감하고 수긍하면서 내고 가는 돈은 대략 5~10만 원 선이었다. 희귀한 예외가 없지는 않았다. 30만 원 선뜻 낸 사람이 더러 있었다. 심지어 100만 원을 내며 이런 상담은 처음 받아본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상담해보지도 않고 먼저 값을 물어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화로 예약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상담 치료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지 못한 채, 많은 사람이 비용 문제 때문에 포기했다. 반대로 돈깨나 있는 강남 사람들 가운데는 한 번에 몇백만 원씩 카드로 긁고 가는 패키지 상품을 원했다. 그 상황을 타개하려고 홈페이지에 상담 치료비 문제로 공개 글을 써 올리기까지 했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적절한 금액을 원칙으로 분명히 제시하고 경제적인 상황을 포함한 조정 요건을 설명해주는 정도로 타협을 보았다. 지금도 이 문제는 표류 중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도 현실적 고충을 잘 알고 있다.

 

남들도 다 같이 실천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는 한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타당한 생각이며 합리적으로 반박할 수도 없다. 다만···당신 마음이 이성 너머 무언가에 이끌리는 순간을 알아차리기만 바랄 뿐이다. 이성, 현실성, 안전성 추구가 이끄는 대로 살아온 지금 결과를 보라. 이제는 다른 무언가에 귀 기울일 때인지도 모른다.

 

고백건대 선물 모델 실패 의식에는 저평가된 내 선물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과 더불어 수천만 원대에 이르는 치료비를 받지 못한 기억이 작용하고 있다. 기존 분리 모델에서 온전히 놓여나지 못 한 자아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거다. 문제는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나는 내 선물을 눈물겨운 포옹으로, 자기 삶을 전복함으로 받아준 사람에게 새삼 정색하고 감사한다. 나는 내가 받은 고귀한 선물을 감동과 함께 기억한다. 무엇보다 내가 참으로 막다른 길로 몰렸다는 섬뜩한 느낌에 시달릴 때, 기적으로 찾아온 선물 앞에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선다. 이성 너머로 나를 이끄는, 그 다른 무언가에 귀 기울인다. 신성한 경제학 시대를 열어가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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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째 한의원에서 함께 살고 있는 녹보수 생명력이 경이롭다. 7~8년 동안 아예 잎을 피우지 못하고 사실상 죽었던 가장 작은 줄기가 올여름 끄트머리에서 연두 한 점을 밀어 올렸다. 그 연두 점은 빠르게 번지고 자랐다. 이제 제법 초록으로 짙어져 간다. 나는 마치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얼마나 더 자랐는지 확인하고는 한다. 나무 생명이 이런 부활 풍경을 빚어낼 때 인간은 다만 수구 살풍경을 조작질하고 있다.

 

속이 불편할 때 찾아와 멸치국수로 점심을 먹는 식당이다. 개신교 신자 여럿이 식사 후 차 마시면서 정치 얘기를 한다. 이승만 기념관, 이영애, 좌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먹는 얘기 아님 부동산 얘기나 하던 종자들 입에서 문재인 간첩 얘기가 튀어나온다. 김미화는 본래부터 좌파고 효리는 돌아왔다나 뭐라나 암튼 어이 상실 무인지경이다. 대체 개신교는 어디까지 망가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뭐 이런 개

 

리베카 솔닛을 음미하며 잠잠히 나를 돌아보다가 우당탕 내던지고 네가 중첩 식민지 삶을 알아?’ 하고 냅다 소리칠···뻔 한다. ··이 패거리가 하는 짓이 온통 암흑이어도 한 줄기 빛을 찾아 나서야 하고, 천 길 벽이어도 문 있는 곳을 감지해야 하지만, ‘이념 전쟁이 두 번째 경술 늑약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꼬락서니가 무섭고도 우습다. 이영애 칭찬하는 개독쯤이야 얼마나 귀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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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근원과 연대하는 일은 연대 자체로 극복 운동이다. 극복 운동은 미래를 끌어당겨 세계 연속성에 이어주는 일이다. 연속은 불연속, 그러니까 분리 악을 관통한다. 분리 악을 제국은 백색문명으로 체제화했다. 제국 백색문명을 스티브 테일러는 타락(the Fall)-자아 폭발(ego explosion)-이라 묘사한다. 제국 백색문명을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분리 이데올로기/흐름이라 표현한다. 제국 백색문명을 거대 음모로 각색하고, 그 가짜 음모에 부역하며 거들먹거리는 세력이 지닌 야심을 염두에 두어, 나는 이를 이간(離間) 문명이라 이름 짓는다.

 

이간질은 악의적으로 둘 사이를 갈라놓는 짓으로 유구한 제국주의 통치 전략이다. 이간 문명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팡이실이를 거세한다. 역동적 팡이실이 대신 가짜 초월, 사이비 보편을 옹립한다. 그렇게 옹립되어 마침내 완성된 초 일극 집중구조 유일신이 바로 돈이다. 돈 지배체제인 제국 백색문명, 그 하부단위인 백색의학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다름 아닌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돈 노예로 살기를 거절하는 결단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삶을 선물(찰스 아이젠스타인)이게 하는 운동이다.

 

선물을 쌓아 올려 공동체를 지어낸다(찰스 아이젠스타인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102).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녹색출산, 녹색장례, 녹색농업과 연대하여 이런 열린 공동체를 향해 간다.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아라한 집단을 꿈꾸지 않는다. 아라한 집단은 자기들만 깨달았고 자기들만 깨끗하다고 기만하는 병든 게토다. 병든 게토는 공동체를 입자로만 생각한다. 파동으로서 공동체도 있다. 입자와 파동을 가로지르며 중재하는 존재가 의(). 의는 만신이자 술이다. 나는 만신이자 술로 산다.

 

2.

 

()는 앓는 소리를 뜻하는 예()에다 술 단지를 뜻하는 유()를 더하여 만들어진 글자다. 고대에는 술로 병이나 상처를 치료했기 때문에 이런 글자가 형성되었다. 오늘날 서양 과학적 지식으로 판단한다면, 에탄올 작용을 핵심으로 이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술은 증류주든 발효주든 순수 에탄올 너머 약 성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동북아시아 고대 의학에서 주로 사용한 탕약은 대부분 물로 달이지만 술을 넣어 달이도록 한 처방도 있다. 이는 에탄올 추출이 더 나은 경우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술과 더불어 복용하도록 한 처방도 있다.

 

자연스럽게 , 우리가 아는 의사나 치료라는 기본 뜻 말고, 술이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하지만 술이 지닌 최초 위상은 신성한 무엇이었다. 종교 지도자가 신을 만나는 방편이었으니 말이다. 술 치료 기능은 아마도 그 신성이 확장, 세속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음 직하다. 이렇게 종교 지도자는 의사이기도 했으므로 에 만신이라는 뜻이 담기는 일 또한 자연스럽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치지도자가 종교 지도자이자 의사였다. 에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뜻까지 담긴 점은 이 사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에 담긴 이런 다중 의미를 오늘날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간 문명이 가르고 또 갈라놓아 모든 존재가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의사는 요법 포르노 기술자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본디 의사는 영적 사람이었다. 세상을 보살피고 돌보는 공적 사람이었다. 녹색 의술을 시행하는 치유적 사람이었다. 본디 위상을 복원해야 한다. 사제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영성과 공공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법 포르노를 떠나서 전인 치유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자연과 자연 사이를 흐르는 파동 공동체 매개변수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만신이자 술인 사람이 빚어낼 옹근 삶이다.

 

3.

 

<반제국주의 의학 서사>를 꾸준히 읽는다는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파동 공동체가 무엇입니까?” , 나 또한 이간 문명 흔적을 지닌 채 글을 쓰고 있구나. 자그마하게 배어드는 마음(小少沁心)으로 이야기해야 마무리가 되겠구나.

 

파동 공동체는 입자 정체성을 지닌 고립된 자급자족 계획공동체(찰스 아이젠스타인)’를 염두에 둔 대안 용어로 내가 고안해낸 말이다. 고립된 자급자족 계획공동체는 공동체를 양(가시적 조직)으로, 영역으로만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종교(성을 띤) 공동체, 명망가 중심으로 특정한 목적·방식을 가지고 꾸린 공동체가 바로 그런 예다. 어떤 정체성 안에서만 연속될 뿐이어서 이간 문명 속성 또는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다.

 

파동 공동체는 질(상호교류), 팡이실이로 생각하는 공동체 개념이다. 이런 예는 어떨까. 가령 통일 문제를 말할 때, 보통 반사적으로 남북 영토적 통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남북한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는 한인들을 팡이실이로 연결한 유연한 공동체 형성을 통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중국, 중앙아시아, 미주, 일본 등에 적지 않은 한인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데, 이들을 영토적으로 묶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북한 영토적 단일성 문제도 절대적인 사항은 아니다. 이따금 벌어지는 충돌에서 보듯 휴전선은 그 어느 국경선보다 살벌하고 견고한 분리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상과 삶을 공유한다면 카자흐스탄 고려인 마을에 사는 사람과 LA 한인 마을에 사는 사람을 공동체 구성원이라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한 줌 무리 이끌고 어느 섬으로 들어가 울타리 두른 다음, 녹색의료·녹색출산·녹색장례·녹색농업 일구어 우리끼리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율도국공동체 만드는 꿈을 꾸지 않는다. 율도국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구축해 지구를 율도국 분점으로 덮는 꿈은 더욱 꾸지 않는다. 비밀리에 율도 특전사를 양성해 전 세계를 율도 제국 통치 아래 두는 꿈은 더더욱 꾸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각각 그 인연에 따라 고유한 율도국을 만들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깨달아 고유한 율도국을 이루도록 소통하는 계기공동체를 꿈꾼다. 계기 이상(의 권력)이 되면 스스로 거점을 지워 나아가는 공동체를 꿈꾼다. 이런 공동체가 다름 아닌 파동 공동체다.

 

파동은 에너지를 공급하거나 구조를 세우지 않는다. 파동은 자그마하게 소식(news)을 주고받는다. 자그마하게 주고받은 소식은 각자에게 복음(the Good News)이 되어 인연에 맞는 에너지와 구조를 스스로 일구도록 조절한다. n개 녹색공동체는 n가지 스펙트럼 녹색 빛을 낸다. 이간 문명 극복은 이토록 다양하고 풍요롭게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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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큰 수레는 질병, 질병 앓는 사람,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 질병 앓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 사이 평등한 소통, 더불어 깨달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근원을 향해 나아간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주의를 기울이는 근원적 지점은 바로 출산과 장례, 그리고 농업이다.

 

출산과 장례는 의료 영역이 아닌데 제국 백색문명이 산업 의료에 복속시킴으로써 그 식민지가 되었다. 이를 제자리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불가피하게 연루된다. 미셸 오당이 농부와 산과의사,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과학화에서 말한 자연 출산 문제는 화급한 현안이다. 잘못된 출산은 비가역적 재앙을 초래한다. 이미 우리 아이들은 이 재앙에 던져진 상태에서 예측 불가능한 저주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제국 백색문명에 중독된 대중이 둔감하고 근시안적인 탓만은 아니다. 사회적 의제 설정을 주도하는 세력이 무관심, 아니 백안시하는 탓이 더 크다.

 

장례 시스템도 심각하기는 매일반이다. 더군다나 이 문제는 아예 이슈조차 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다. 장례 시스템을 넓은 의미에서 바라보고 공공 측면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죽음 이후 처리 문제에서 지금처럼 의학·의료기관이 일방적으로 과도하게 개입하면 안 된다. 본인, 가족, 사회복지 관련인, (해당되는 경우) 종교인들이 숙의 당사자로 참여함이 바람직하다. 본인 의사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기까지 한 연명 기술을 의학이라 기만하는 사태부터 먼저 사라져야 한다. 식민지 유제인 허례허식이 과도한 비용을 일으키는 문제도 반드시 손봐야 한다. 죽음을 둘러싸고 빚어내는 인간 사회 행위와 제도에 관해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사상으로 본격적인 성찰을 시작해야 할 때다.

 

인간 생명과 먹을거리, (자원)으로써 불가분적 관련을 맺는 농업은 녹색 본질에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현재 제국 백색문명에 심각하게 침윤된 관행농법은 녹색 본질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과 치유 관점을 공유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원적인 지점은 사람 생명 앞에 선 의자와 땅·식물 생명 앞에 선 농자 마음가짐이나 손길이 같다는 각성이다. 녹색의자도 녹색농자도 생명 상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행위든 폭력이며 수탈이라고 여긴다. 연대는 여기부터다. 제국 백색문명 폭력과 수탈에 맞선 근원 연대 샘 자리다.

 

삶과 죽음 문제를 분리와 이종 관점에서 해결하려 제국 백색문명을 일으킨 인류 도정을 접을 때가 왔다. 백색 인류 도정은 눈부신 개명을 이루었으나, 그 개명이 결국 옴니사이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의학·출산·장례·농업, 이들은 하나다.

 

2.

 

미셸 오당이 쓴 농부와 산과의사,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과학화필독을 다시 한번 권하면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근원 연대>에 조금 더 보탠다.

 

한의사로서 예비부부, 또는 부부와 함께 임신 문제를 상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의외로, 아니 예상대로 대부분 제국 백색문명이 대중매체 등을 통해 던져주는 가짜 정보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실제로는 물론 산부인과 양의가 내린 제국주의 백색의학 진단에 따라 움직인다. 유산과 그 사후 처리 과정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지니는 한계에 봉착한 후에야 누군가 권유해 한의원을 찾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 냉증은 매우 중대한 개념이다. 확실한 녹색 진단과 녹색 치료 방법이 있음은 물론이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이에 무지하므로 인정하지 못한다. 냉증이 난임과 유산 원인인 경우가 많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침, 쑥뜸, 본초(약용 식물 뿌리, 줄기, 가지, 껍질, , 열매, 그리고 전초(全草)) 배합 탕약 등으로 냉증을 치료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냉증을 치료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있다고 한들 백색화학합성물질일 테니 그 자체가 또 문제다.

 

난임 원인이 남성 쪽에 있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자 개체수가 모자라거나, 활동력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녹색 방식이 존재한다. 여기까지 와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임신 문제가 의학 영역으로 넘어온 경우를 먼저 언급했지만, 사실 그보다 먼저 임신을 계획하고 구체적인 준비 과정을 거치는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대중매체나 책자에 실린 내용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제국 백색문명 논리를 전제하고 있기에 그렇다. 이런 오해와 무지가 임신·출산을 산업 의료에 예속시키는 빌미로 작동한다. 현재 상태로는 기대 난망이지만, 학교 교육이나 사회교육을 통해 임신·출산은 질병이 아니므로 근원적으로, 기본적으로 병원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이 널리 공유되도록 해야 한다.

 

출산 문제는 위험 요인이 있으므로 무책임하게 말할 부분이 아님을 모르지 않는다. 응급상황이 터져 산업 출산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내 딸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나 자신부터 현실을 무시하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산업 출산은 산모에게도 아기에게도 재앙에 가깝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과도한 의료화를 혁파해서 의사 지휘 아닌 의사에게서 독립한 조산사 도움 중심으로 자연 출산을 복원해야 한다.

 

나는 여생을 숲에 깃든 농투성이 의자로 살면서 임신-출산-양육-교육-죽음-장례로 이어지는 삶의 과정에서 제국 백색문명 독을 빼고 새로운자연 상태를 창조하는 팡이실이 운동을 꿈꾼다. 어찌 가닿을지 알 수 없고 심지어 가닿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해도 내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뒤를 잇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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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사투리 쓰는 비중 있는 조역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무슨 연고가 있어서도 아니다. 마치 기본 설정처럼 으레 나와서 높은 진동수로 관객 귀를 훑어버린다. 재미 더하는 한 축이라 여기면 그만이지만 조폭 빼곤 대부분 경상도 사투리라는 사실에 이르면 문제로 삼아야 한다. 왜 하필 경상도 사투린가.

 

조금 더 문제를 확장하면 답은 절로 나온다. 경상도 억양을 쓰는 방송 진행자가 많다. 심지어 아나운서도 있다. 표준어가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정치적 음모가 끼어 있지 않는 한 공적 방송에서 사투리 억양을 여과 없이 내는 일은 잘못임이 분명하다. 문제 삼지 않게 된 사회적 기류는 모름지기 정치적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대통령을 포함한 지배층에 압도적으로 경상도 출신이 많아 청와대나 재벌가 공용어에 경상도 사투리가 들어 있다는 말이 떠돌았었다. 이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실상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수많은 사람 무의식에 유구한, 그러니까 저 신라적 우월감이 똬리 틀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상업적 드라마나 영화 대본을 쓰는 작가들은 누구보다 세태를 꿰뚫고 민감해야 한다. 그들 작품에 나타나는 어떤 생각이 당위냐, 현실이냐, 논란 여지가 있으나 대개 해피엔딩이라는 가짜 당위를 내세운 현실임이 맞다. 특히 인기 있는 드라마 작가 집단은 이 혐의에서 더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흐름에 정치적 요인이 좀 더 강하게 작용하면 급기야 드라마 주인공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날이 온다. 나아가 저녁 9시 뉴스도 경상도 사투리로 듣게 될 날도 온다. 정치판이 요즘 같다면 말이다.

 

2. 경상도 사투리는 높아져 봐야 결국은 식민지 말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제국 말이다. 일제를 거쳐 USA 제국 포식 언어에 포박된 상태로 나날이 생명력을 잃어가는 모국어에 극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내력은 이렇다.

 

우리는 이미 오랜 세월 한자 식민지로 살아왔다. 우리 글이 없었던 탓으로 말하자면 불가피한 일이니, 식민지라 표현하는 일은 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에도 5백 년 동안 한자가 공식 문자였다는 사실과 마주하면 유구한 특권층 부역 세력이 만들어 놓은 기득권 시스템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글이 공식 문자인 현재도 여전히 한자-어는 한글-말과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세력을 떨치고 있다. 이 바탕 위에 한자 의존도가 훨씬 높은 일본어가 들어와 식민 그늘은 더 어두워졌다.

 

일본어 식 말하기와 글쓰기가 깊숙이 자리 잡았고, 일본식 한자어가 우리식 한자어를 대체했으며, 일본 어휘를 우리 어휘인 양 쓴다. 일반 대중이 이런 오류에 휩싸여 있는 일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국어학자, 교육자, 전문적 글쓰기를 하는 지식인, 문학인, 언론·방송인 입에서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일은 실로 참담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도리어 언어 대중을 오염시키니 말이다. 설상가상 미군정 이후 영어가 또 다른 지배 언어로 등극했다. 영어식 폭력은 더욱 큰 위력으로 우리 말글 목을 조른다.

 

말글 부역 본진은 물론 제국에 부역하는 특권층이다. 저들 내부 공식 언어는 당연히 일본어와 미국식 영어다. 유학을 통해 습득한 저들 종주국, 아니 조국 언어는 의당 다른 근본 없는” “들 언어와 결별해야 했다. 그리고 근본 없는 것들은, 일본어·영어식 한국어쓰게 하면 감지덕지할 일이라고 여겨 만든 조직이 다름 아닌 국립국어원이다. 공식적으로 표방한 목적과 일반인이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국립국어원은 어지러운 국어 상태를 고의로 방치 심지어 유도하고 있다. 그 결정적 증거가 표준국어대사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큰사전이 널리 쓰이는 길을 원천 봉쇄해버렸다. 이는 조만식을 위시한 자주 인사들이 민립대학 운동을 벌이자 이를 무력화하려고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던 사건과 그 맥이 닿아 있다. 실제로 그 경성제국대학 부역 인맥이 국립국어원을 장악했고, 지금까지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출신 철밥통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국립국어원을 혁파하지 않으면 우리말은 말라 죽는다. 말이 죽으면 말 공동체도 죽는다. (이상 내용은 공시적 이야기-아베의 축원<말글 부역 서사> 일부를 가져옴.)

 

3. 정치적 중요성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생명 자체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는 진실과 마주친다. 반제국주의 서사 의학, 그러니까 녹색의학 이야기에 말 문제를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공용어인 영어 지배력은 제국주의 백색의학에서 더욱 강고하다. 의학 드라마를 보면 대뜸 알아차릴 수 있다. 조사 접미사 빼고 모든 말을 영어로 한다. 영어로 구축된 제국주의 백색의학 체계는 생명을 팡이실이로 인식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한다. 네트워킹 생명을 절멸시키는 거대 전략이 다름 아닌 제국주의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언어는 생명을 팡이실이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말이다. 그 말에 가장 적합한 말이 우리말이다. 국뽕이 아니다. 수많은 근거가 있지만 세 가지만 언급한다. 첫째, 우리말은 동사 중심이다. 영어는 물론 명사 중심 말이다. 영어에서 형용사는 명사 수식어로 명사에 가깝지만, 우리말 형용사는 동사에 가깝다. 동사 중심 말은 세계를 정적 구조·실체로 이해하지 않고 동적 사건·과정으로 이해한다. 구조·실체는 사건·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한 양상일 뿐이다. 그 양상을 영속한 권력으로 둔갑시킨 이데올로기가 제국주의 백색문명 백색의학이다.

 

둘째, 우리말은 나와 너, 평등한 상호 주체 사이에 일어나는 비대칭 대칭 사건을 말속에서 구현한다. 그 증거가 바로 주어-목적어-동사 어순이다. 주어-동사-목적어 어순을 지니는 영어와 정반대다. 내가 하는 행동보다 그 행동 상대를 앞세우는 이 사유야말로 팡이실이 정신이다.

 

셋째, 이 부분은 매우 중대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합용병서(合用竝書) 원칙을 천명했다. 이렇게 하면 무려 400억 개 소리글자가 만들어진다. 이런 다양하고 섬세한 표현 자체가 창발적 생명현상을 풍요롭게 드러내는 길을 열어준다. 그런데 총독부에서 박정희 정권까지 이를 가로막아 40개 자모만 쓸 수 있게 가두었다. 이 과정에 참여한 학자, 대표적인 예가 특권층 부역자 최현배다. 최현배는 현재 건국유공자 반열에 올라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무늬만 독립 국가일 뿐 우리는 여전히 식민지를 살고 있다.

 

4. 221은 국제 <모국어의 날>이다. 개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 요소이자, 공동체 생명·문화 구성을 담당하는 언어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다양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정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 약 6,000종 가운데 절반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으며, 실제로 2주마다 1개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이상 내용은 공시적 이야기-아베의 축원<말글 부역 서사> 일부를 가져옴.)

 

언어가 사라지는 일은 생명 다양성이 사라지는 일이다. 제국이 노리는 바다. 제국에 맞서 생명을 한껏 펼쳐내 지구 생태계 파괴를 저지하려면 녹색 언어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언어공동체는 각기 자기 말을 지키고, 말들 사이 팡이실이를 만들어야 한다.

 

내 개인적인 생각을 보탠다: 인간 너머 비인간 생명들이 하는 말도 이 운동 주체로 세워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진실을 누락시킨 채 또다시 인간중심주의로 내달려서는 안 된다. 고래도 버드나무도 송이버섯도 mycobacterium vaccae도 말을 한다. 인간 귀로 듣지 못한다고 해서 없다고 하면 안 된다. 귀가 아닌 다른 통로를 찾으면 된다. 아니. 어쩌면 인간이 백색 귀를 버리고 녹색 귀로 복귀하면 바이러스 말도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 DNA 적어도 8% 이상, 심지어 50%까지가 바이러스에서 왔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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