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에 이 영화의 포스트를 보는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왔다. 붉은 철근 앞에 보이는 한 여성, 붉은 드레스에 붉은 장갑까지 착용한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나의 페티시즘을 자극한다. 정열이 넘치는 붉은 색, 그것은 피와 같은 색이며, 프랑스의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박애도 의미한다. 그녀의 붉은 색은 정열과 피가 넘치며 또한 박애도 넘친다. 그녀 스스로 박애가 가득한 것도 아니고, 세상이 넘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박애로 넘치는 이유는 그 욕망에 가려진 인간의 본능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박애롭게 보일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부터 생각났다. 왜일까? 이미 포스터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에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나에게 다가왔다. 마치 자신만을 봐달라고 애원하듯 바라보는 그녀의 강렬한 눈빛은 나로 하여금 그녀의 깊은 눈빛과 그 검은 머리와 붉은 장갑과 드레스에 모든 것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보면서 심지어 나의 성욕까지 사로잡았다. 그녀가 나온 영화는 그녀로 통한 현대사회에 연예인에 대한 미디어적인 욕망에서 그 부조리에 대해 폭로한다. 그 부조리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녀는 TV 앞에서 무조건 완벽한 여인이 되어야 했다.

 

드라마, CF, 모델 심지어 자기 가족까지도 말이다. 그녀는 자기가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여동생이 있었다. 주인공 리리코가 유명인사가 될 때 리리코의 가족에게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리리코는 자신의 성형수술의 성공에서 자신의 여동생도 새로운 삶을 가기를 바란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무단한 현실이었다. 리리코의 기획사 사장은 리리코에 의해 벌어들인 돈을 모두 착복하고 있었다. 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말인가? 스펙타클이란 인간의 관계적인 여건에서 현실적인 인간관계보다 이미지라는 것이 매개가 되는 사회를 말한다.

 

이미지라는 것은 프랑스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처럼 실제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실제와 상관없이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정보가 제공되는 것이다. 사실상 리리코의 모습을 스크린 안의 TV 속의 모습을 보면 정말 완벽하다. 미모의 그 완결성은 모든 잡지의 표지를 차지하고, 그녀의 잡지는 언제나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재벌2세에게 구애를 받았다. 그녀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의 이미지로 통해 모든 것을 사로잡은 것이다.

 

리리코의 모습이야 말로 완벽한 스펙타클이었다. 그 스펙타클이란 대중을 사로잡는 것에서 리리코의 존재야 말로 대중들이 바라는 신적 존재였다. 신이란 과거의 종교적인 한 완벽한 존재적 위치보단 차라리 TV의 연예인처럼 새롭게 숭배 받는 존재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미디어는 결국 정치적인 목적과 더불어 경제적인 요건도 중요하다. 그 경제적인 구조에서 리리코는 환상의 존재로 되어야 했고, 때로는 신과 찬양도 받아야 했다. 스포트라이트로 쏟아 치는 찬란한 카메라 셔터 소리는 그녀가 이미지로서 살아있는 여신이었다.

 

그러나 사실 카메라는 대부분은 남자의 손에 들려있고, 남자의 눈으로 보고 있다. 이 작품의 특징 중에 하나 카메라의 눈은 남자이나, 그 카메라의 눈이 남자라는 것을 영화 내의 3인칭 카메라로 보고 있다. 영화감독이 나나카와 미카라는 여성이었다. 즉, 이 영화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여자연예인이 어떻게 착취되고 망가져 가고 있는지 그 연예인이란 존재가 여성이란 점에서 외모와 관련된 자본주의 시장체계에 대한 비판을 날린다. 그 비판은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가지는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처음을 보면 리리코의 탄생이 나온다. 그녀는 붕대로 온 몸을 감긴 채로 점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는데, 유방과 음부를 가린 채 푸는 장면에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연상하게 만든다. 비너스의 탄생은 결국 최고의 미를 가진 아프로디테에 대한 것으로 미인의 탄생은 신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에 의해 생기는 인위적인 것이다. 그런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인간의 미에 대한 종교적 관념을 무시하는 미쟝젠 요소가 나온다. 그것은 리리코의 방의 장식이다. 일본 영화를 그렇게까지 많이 본 것은 아니나, 일본 여자감독을 보면 실사영상이든 애니메이션영상이든 모두 소품의 배치가 탁월하다는 점이다.

 

헬터 스켈터에서 리리코의 방을 잘 봐야 하는 이유에서 그녀의 방이 대부분 붉은 색이란 것과 동시에 천주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상이 보통과 다르다는 점이다. 헬터 스켈터에서 리리코의 종교는 알 수가 없다. 그녀의 방에 천주교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이 2가지 상을 보면 눈을 모두 가리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이 탄생하는 것에서 절대적인 가치는 태어나면서가 아니라 인조적으로 성형수술을 하여 재창조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존재는 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 절대적 가치에 대한 부정조차 부정하는 것에서 영화는 부정의 부정의 긍정이 아니라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진다.

 

영화 자체에서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 완벽한 리리코이나 그 리리코는 인간들의 욕망을 대표하는 신화적 존재다. 외모가 화려한 여성이 TV에 나와 대중들의 이야기거리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 리리코의 이미지가 곧 일본 사회의 대표성이란 점이다. 리리코란 존재의 시뮬라크르는 결국 스펙타클로 전환된 것이다. 그런 욕망의 현상은 실재의 리리코를 대신하여 이미지라는 환상으로 통해 대중에게 노출된다. 왜 그들은 그렇게 리리코에게 열광할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 본연의 욕망, 즉 자신에 대한 욕망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대중문화에 내재된 전체적인 흐름에 자신을 맡기려고 하는 동물화적인 모습이다. 자크 라캉에 의하면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리리코에 대한 욕망은 결국 대중문화에서 나오는 끊임없이 미디어에서 터져 나오는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인간상이다. 문제는 그 본래의 인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망가지는 것이다. 리리코의 여동생을 본다면, 분명 리리코는 미인은 커녕 아주 못난 얼굴과 외모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녀가 처음 스포트라이트에 의해 유명해지자 그녀가 뒤로 하는 짓은 추악한 본능이었다. 어느 잘생긴 남자와 무대대기실에서 갑자기 섹스를 하고, 자기의 인기가 고즈에의 의해 위기를 받자, 그 스트레스로 인해 변태적인 섹스를 요구한다.

 

자신의 유능한 매니저인 하다의 남자친구를 보는 순간, 하다가 보는 앞에서 하다의 남자친구와 섹스를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 하다에게 명령하여 하다와 하다의 남자친구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섹스를 하도록 명령한다. 물론 그 이전에 하다에 대해 동성연애를 하는 리리코에게 그녀는 인간의 성적인 도덕을 파괴하는 행위를 보여준다. 일탈된 행위로서 자신이 유지하고자 하는 완벽함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스트레스에 대한 기제적 반응이 결국 리리코로 하여금 변태적인 성적 도착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그것은 코즈에 대한 테러와 마약투여까지 실시한다.

 

그녀가 그렇게 비뚤어지게 되는 이유는 그녀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부분이다. 그것을 강조하고 마치 그런 사회적 구조를 비웃듯이 그녀가 선전하는 아이스크림 선전이 인상 깊다. 마치 남자의 성기인 것처럼 보이는 빨간 아이스 바를 핥는 그녀의 모습은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애무하는 펠라치오처럼 보인다. 처음에 리리코가 하다가 추후에는 코즈에가 한다. 대중문화는 리리코가 성형미인이든지 혹은 코즈에가 자연미인이든지 상관 없다. 단지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는 신데렐라가 필요하다.

 

신데렐라의 한계성은 그녀의 젊음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도 있지만, 그 젊음을 가지고 있어도 오래가지 않았다. 리리코의 데뷔가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코즈에의 등장은 결국 대중들이 사로잡힌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을 부응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여기서 인기 여배우는 철저하게 도구화 된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은 리리코가 방소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생일 이벤트에서 이상한 나비가 보이면서 결국 기절하는 모습이 나온다. 기절과 동시에 코즈에에게 해를 가하려는 하다의 모습은 몽타주로 나온 듯이 상반된다.

 

그리고 그 몽타주의 결말은 리리코의 패배이고, 그녀는 결국 많은 마이크를 앞에 선 데스크에 앉아 카메라만 가득한 무대 밖을 본다. 거기에는 그 어떠한 인간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고 단지 카메라만 눈 부신다. 리리코 스스로 자신의 눈에 칼을 찌르고 있을 때, 카메라가 순간 멈추나 아무도 그녀의 안전이나 위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리리코가 마약중독에 빠진 여배우라는 특종만 파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리리코는 눈물 대신 아주 빨간 피 눈물을 흘린다.

 

이 작품의 미쟝센의 조건에서 붉은색이 아주 중요하다. 붉은 색은 박애적인 의미도 되나, 결국 피를 의미하고, 그 피를 만든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리리코와 그 욕망의 조류에 타고 싶은 리리코의 욕망마저 이 시대의 도구에 불과했다. 이미지가 매개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리리코는 아주 뛰어나고 우월한 여배우로 알았으나 최후에는 버려지고 자신을 대체할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들 역시 물화되어버린 도구가 되는 것이다. 리리코의 성적욕망에 대한 부분에서 리리코 자신이 재벌과 하다의 남자친구와 섹스를 나누는 것도 있으나, 위에서 지적하다시피 카메라를 기본적으로 남자의 눈이다.

 

그러한 남자의 눈으로 가득한 카메라 세계 이외에 욕망의 세계는 아주 심연적인 공간이 있다. 마지막에 리리코가 사라지고, 그것도 모두의 기억에 사라질 무렵에 코즈에는 무대촬영을 마치고 뒤풀이를 간다. 과격한 쇼가 이루어진 어느 클럽에서 코즈에는 리리코의 매니저인 하다를 본다. 하다를 보고 뒤따라 간 곳에는 리리코가 도도하게 미소짓고 있다. 그녀의 미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리리코는 단순히 성형미인에 대한 것보단 성형미인으로 새로 태어나 대중문화에 등장한 신데렐라다.

 

대중들의 욕망이 미디어로 통해 나오는 것만 아니라 그 이면을 자신이 지배하고 싶다는 것이다. 리리코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이미지로 통해 하나의 소비기호에 불과했다. 하지만 뒤 세계로 보이는 클럽은 자신이 하나의 숨은 여왕이었다. 대중들이 항상 열광하는 곳은 이미지로 통해 욕망이 자신에게 투영된다면, 클럽에서 자신이 실제적으로 욕망을 조장하는 곳이다. 그래서 영화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으로 가기보다는 다른 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로테스크한 요소에서 일관적으로 리리코의 시술 장면과 부작용, 하다와의 섹스관계이다.

 

특히 하다와의 섹스에서 리리코는 그저 성적욕망을 여성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거대한 기대의식과 코즈에에 대한 거세공포로 인한 방어기제다. 하다에게 성적욕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서 리리코가 흥분을 느꼈을 뿐이다. 자신의 음부를 하다에게 핥아 라고 명령하는 리리코와 그런 리리코의 음부를 핥는 하다, 리리코의 명령에 의해 같이 망가지는 하다와 하다의 남자친구의 모습에서 우리는 욕망이란 것이 결국 상대방에 의해 같이 심연의 세계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리리코의 어긋난 모습에 대해 그녀를 시술한 의사들의 대화가 기가 막힌다. 리리코의 수술에서 리리코의 몸은 귀와 눈, 그리고 음부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가 모두 제거되고 다른 사람의 몸으로 대체되었다. 그 대체된 몸은 시체의 살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리리코의 살은 검게 부패되어가고, 그런 시술을 받을수록 자신은 더욱 추하게 변해간다. 그런 지저분한 모습은 결국 의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부르주아에 대해 해보자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결국 돈을 위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은 부정한 세력이 겉으로 나오지 않으나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에 대해 리리코로 통해 이율배반적으로 보여준다.

 

재벌2세에 대한 리리코의 연애 루머에서 보는 것에서 재벌2세가 결국 톱스타 미녀를 차지하게 되고, 결국 그 미녀는 거짓으로 이루어진 고깃덩어리 사실에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모두 거짓이고 속임수라는 것을 폭로한다. 물론 리리코 역을 맡은 사와지리 에리카는 본래 자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리리코의 연기에서 인간의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세계와 달리 인간 본연의 실제성에서 이중적이고 더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나 리리코에 대해 더럽다고 하나, 그 더러움을 만든 것은 대중의 욕망이다.

 

대중의 욕망으로 탄생한 리리코, 결코 대중들은 자신들에 대한 문제보다 리리코에 대한 욕망과 가십거리만 찾을 것이고, 거기에 대체되는 또 다른 리리코만 찾을 것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러지 아니한가? 스펙타클의 전복은 또 다른 스펙타클로 이어진다고 말이다.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해 절규함>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기대감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리리코의 신화를 창조하고 파괴한다. 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바로 대중이란 점이다.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드러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만족하지 못하는 심리이기에 끝도 없는 반복된 이야기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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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조가 살던 시대적 배경

일제강점기 시대에 독립운동가 및 역사학자인 위당 정인보는 이렇게 말했다. “다산 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대사상의 연구요, 조선 혼의 명암, 또는 전 조선의 흥망쇠멸에 관한 연구”라고 말이다. 또 일본의 학자들조차 “다산은 조선의 영광”이라고 했다.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살던 조선 후기는 곧 조선의 정치, 철학, 문학, 경제 등의 부흥이 일어난 르네상스와 같은 시기였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이 살던 시절은 정조임금이 군주로 있었던 시기고,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해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시기다. 따라서 <역린>이란 영화를 봤을 때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은 정약용 선생이 떠오르는 것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을 때 정약용 선생의 아버지인 정재원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회의를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

 

영화 <역린>에서 이런 역사적 조건이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정조가 펼친 탕평책과 그 탕평책을 시도한 영조,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죽음이 영화 <역린>의 모티프와 세계관을 만들었다. 더 올라가, 영조 한참 이전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의 복상을 가지고 노론과 남인이 대립했다. 남인은 조대비의 상복을 3년으로 하고, 노론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정치적 논쟁으로 휘말린 것이 예송논쟁이고, 이 논쟁으로 인해 노론과 남인은 피로 피를 씻는 숙청을 겪어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유배 내지 사형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노론이 득세하고, 그 노론은 계속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영조시대에는 왕도 위협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2. 사도세자와 정조

보통 조선왕가의 군주는 자신의 어머니가 양반가문의 규수로 선택하나, 영조의 어머니는 천한 신분이었고, 그것이 하나의 콤플렉스로 된 영조는 평생 노론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했다. 그것에서 왕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노론의 반대세력인 남인과 소론을 등용해야 했고,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런 남인세력 중에서 젊고 개혁적인 사대부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사도세자의 행동을 노론에게 큰 걸림돌이었고, 영조는 정치적 힘이라는 대립관계에서 노론을 따르게 해야 했고, 사랑하는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굶주림과 목마름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정조는 영조가 아버지를 죽게 만들 수밖에 없는 정치적 권력 관계에서 노론에 대한 복수심과 더불어 노론이 득세하면 조선이란 국가가 위험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을 빚게 된다. 노론이 예송논쟁에서 상복 1년의 착용과 남인이 상복 3년의 착용은 효종이란 군주에 대한 군주로서 가치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군주의 권력을 지지하는 남인, 신하의 권력을 지지하는 노론의 대립관계가 결국 붕당정치에서 대립관계를 보였고, 그것은 사도세자의 죽음에서도 대립관계를 보인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게 보는 벽파, 그의 죽음이 잘못된 것으로 보는 시파로 분리된다.

 

3. 남인과 노론

영화 <역린>은 그런 역사적인 조건과 흐름에 따라 스토리가 시작한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처음 정권을 잡던 시기, 정조에 대한 암살사건이 일어났으나, 거기에 대한 미수로 불발되었고, 그 사건에 대한 상상적인 스토리텔링을 불어 넣은 것이 <역린>이다. 실제로 정조는 홍국영과 연합하여 노론의 많은 세력을 죽였고, 후에는 홍국영도 죽이게 한다. 작품 내에 정순황후가 영조가 늙은 나이에 들어온 후처로, 그녀는 노론의 실세 중심이었고, 그녀의 가족은 정조에 의해 숙청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801년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에서 남인의 씨를 모조리 마르게 한 여인이다.

 

그 정도로 당시 남인과 노론의 대립은 매우 심각했다. 영화 <역린>에서 그런 모습을 잘 드러냈고 그 설정관계를 보이기 위해 왕의 강연을 하는 많은 신화들이 정조를 우습게보고 말장난을 치는 것이 나온다. 영화가 끝나고 화면 위로 올라가는 출연진에서 중요한 2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하나는 심환지와 하나는 번암 체제공이다. 체제공은 조선의 3정승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인물로 영조에게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신하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충신이고, 정조에게는 정치적 지원군이고, 사도세자에게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제대로 기억해주는 신하였다.

 

체제공의 등장에서 정조와의 친밀한 관계가 어전에서 보이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에 대한 강조성이 없었다. 영화는 분명 정조 VS 노론의 형태이고, 그것은 정조 & 남인 VS 노론의 형태이어야 했다. 작품의 세계관 설정에서 다소 아쉬운 이유는 노론의 암살 작전에만 치중했지, 그것에 대한 반대전략을 제대로 보여주기보단 그저 정조와 홍국영이 대장군을 설득하거나 궁중 호위대와 암살대의 싸움에 치중하려는 것으로 정치적 대립관계를 강조한 것이 아쉽다. 소설 <역린>과 영화 <역린>의 차이는 자세히 알 수 없겠지만, 이런 갈등이 있었기에 <역린>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4. <역린>과 정조

정조는 어린 시절에 암살의 위험에 시달렸고, 새벽에 첫 닭이 울 때까지 잠을 들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항상 마음에 독을 품고 있었으며, 그 어떤 문신보다 학문이 출중하고, 왜만한 무신과 대등할 정도로 무술에 능숙했다. 실제 정조는 활을 잘 쏘았으며, 신하와 강연할 때도 자신이 직접 시험을 볼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너무 뛰어났기에 노론의 입장에서 계속 견제를 받아야 했다. 영화 <역린>에서 카메라 앵글이 참 중요한데, 이른바 편집과 편집이란 몽타주적인 기법보단, 영화는 미쟝센이란 카메라의 구도와 명암, 소품과 인물의 배치로서 상황을 보여준다.

 

정조가 나오는 장면에서 close-up이 자주 등장하여 정조의 심리적 상황에 대해 초점을 보여주었고, 정순황후를 비추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정면이 아니라 밑에서 위로 보는 low-angle로 드러낸다. 그것은 밑에서 위로 보게 하여 피사체의 대상인물이 작품에서 권위가 있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다. 정조가 정순황후를 알현할 때 그녀는 발을 정돈하고 있었는데, 정조가 발밑에 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있었으며, 주변 궁녀들에게 그의 목숨을 가지고 농담 던지는 것도 정조의 목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 <역린>과 정순황후

하지만 암살이 실패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정조의 관점으로 정순황후가 스스로 유폐되는 것을 선택할 때 over shoulder shot(어깨너머로 보이는)로 연출한다. 카메라의 연출이 중요한 것은 정조와 정순황후의 정치적 대립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카메라의 대립관계는 정순황후 서재에 붙잡힌 혜경궁 홍씨인데, 정순황후의 자리는 높은 자리에서 곰방대를 피우고, 혜경궁 홍씨는 낮은 자리에서 결박당한 채 붙잡혀 있다. 카메라가 배우와 사물의 배치, 그리고 등장인물의 조명 등에서 그들의 상황과 인물의 속성을 보여준다.

 

살인청부업을 양성하는 노파가 처음 등장할 때 빛의 굴절을 이용하여 얼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빛의 대비가 강하다. 영화에서 그가 위험한지 그가 얼마나 주도하고 있는지를 빛의 명암 대비로 보여준다. 또한 공간적인 요소로도 보여준다. 정조가 제대로 머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존현각이고, 그의 처소는 군주의 자리를 생각하면 너무 초라했었다. 하지만 정순황후의 처소는 항상 밝은 빛이 들고 있고, 그녀는 자신의 권위를 잘 보여주기 위해 곰방대를 입에 물고 맨발을 드러내고, 가뭄이 들어 물이 귀한데 따뜻한 물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이어야 할 정조와 너무 대비된 상황이었다.

 

6. 정조 암살 미수

정조는 국가의 왕이지만 왕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바로 정순황후와 그녀의 주변세력인 노론에 의해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현실이었다. 그리고 <역린>은 영화와 소설로서 노론세력에 대항하는 정조를 보여준다. 군사와 인사권을 모두 노론이 잡고 있었고, 그들은 이권으로 결탁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한다. 남인과 노론은 각자의 세력들에게 혼인관계를 보내 친척관계와 더불어 학문적 스승과 제자로 유지한다. 그런 정치적 세력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단순히 누구 하나만 제거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 단단한 카르텔을 해체해야지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

 

정조 암살사건이 미수하였더라도 한 나라의 왕을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바로 신하들의 권력이 너무 강력했다는 점이다. 정조가 살인청부자 보스를 칼로 베는데, 그 보스가 말한다. 내가 죽어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이다. 정치란 사실 어느 국가와 사회를 위해 조율 및 조정하는 것으로 정치를 펼치는 것은 사회적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여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문제없이 영위할 수 있어야 해야 하나, 정치란 결정해야 하는 권력자가 필요하기에 그 입장과 상황에 따라 특정 세력에게 이권을 부여하게 된다. 이권의 유지는 결국 그 이권을 가져가는 만큼 누군가는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 피해자는 1차는 왕과 그 반대세력이겠지만, 최종적으로 백성이어야 했다. 국가예산이 부족한데 계속 낭비하여 세금을 거두어야 하고, 세금을 계속 거두면 백성의 생계는 어려워지며, 백성의 생계가 어려워지며 민심이 흉흉하게 된다. 그런 상황이 누적되면 범죄가 일어나고 역모가 발생하며 나라의 변이 생기고 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치관이 세워야 하나, 올바른 정치는 윤리도덕적 가치보단 자신들의 이익이 곧 도덕적인 가치로 변하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정조와 노론의 대립관계는 계속되는 것이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노론에서는 정조를 죽이는 편이 유리한 것이다. 어차피 노론의 사람인 정순황후가 정조의 할마마마로 있었고, 그녀가 왕의 책봉을 결정지을 수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왕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었다.

 

7. 영화의 명장면

이런 대립관계에 기반 하여 영화 <역린>은 명장면이 등장한다. 서로 반대되는 세력이 충돌이 일어날 때 찰나의 순간이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정조와 조정석의 대결, 암살집단과 호위무사의 대결, 홍국영과 구장군의 대화 등을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보여준다. 또한 카메라에서 처음에는 왕궁을 멀리서 촬영하는 익스트림 롱 샷 → 롱 샷 → 풀 샷 → 클로즈업으로 연결되는데, 표적은 정조라는 것을 설명하고, 존현각이 유일한 정조의 공간이란 것을 보여준다. 실제 존현각의 정조는 적의 화살을 피하면서 적을 활로 공격하기 위해 문과 문 사이로 적을 교란한다.

 

위치적인 전략에서 정조는 배수진을 치고 있었고,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취한 것이다. 생과 살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조의 전투는 좋은 연출이었다. 그리고 정조가 조정석과 대결하면서 슬로우 모션을 이용하여 긴장감을 드높이고, OST와 주변배경소음을 이용하여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카메라의 영상구조가 빠르지 않고 느리므로 작품에서 긴장감을 유지하는 수단은 소리와 카메라의 명암, 그리고 클로즈업과 롱 샷으로 처리한 것이다. 빗속의 대결과 위기의 순간은 바로 카메라 앵글과 OST로서 보여준 것이다.

 

8. 작품의 한계성

영화 <역린>은 주인공 정조를 맡은 현빈보다 주변의 조연들의 연기력이 너무 뛰어나서 현빈의 모습이 많이 가려진 것이 한계성으로 보였다. 액션물이나 혹은 일반적인 배역이라면 어렵지 않으나 사극이란 특유의 장르이기에 정조의 현빈과 정순황후의 한지민의 한계성은 보일 수밖에 없다. 어느 특정인물을 겨냥하고 오는 관객에게 다소 좋은 서비스가 초반에 나왔고, 물론 그것은 정조가 평소 단련하는 모습을 강조하는 모습이기도 하나, 캐릭터를 이용한 영화제작진의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주가 작은 것으로부터 계속 실천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분명하나, 일일이 군주가 동으로 서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작품의 전개가 산만해질 수 있다. 마지막에 정조가 백마를 탄 상태로 풀 샷으로 보여주나, 그것은 차라리 풀 샷보단 정조가 높은 곳에서 궁과 궁 너머의 한양을 over shoulder shot로 본다면 정조의 정치적 이상을 더 보여주기 좋았지 않았나 싶다. 작품은 카메라의 구도로서 모든 것을 잡아내려고 했기에 그런 부분이 아쉬웠다. 또한 상황적 조건이 너무 억지스러운 것과 부드럽지 못한 것도 그렇다. 등장인물마다 과거의 회상이 많이 차지한 점에서 작품의 세계관을 설명하기보단 그 개인의 입장만 밝히고 있었다.

 

영화제목이 <역린>이란 말처럼 역린(逆鱗)이란 단어가 나온 만큼 그 대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정조가 정순황후에게 말하는 피바람을 직접 말하기보단 그 피바람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제목과 더 어울렸을 것이다. 아마 이것은 영화자체보다는 영화 시나리오근본이 되는 소설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역린의 대가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하나의 개연성을 더 강조한 점을 단지 살인청부업자의 보스를 참하는 것이 마무리 짓는 것은 <역린>이란 제목적인 요소를 생각하면 너무 사소하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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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작품에 대한 리뷰와 달리, 다소 다른 글의 내용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아니 반드시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작품을 리뷰하기 위해서는 먼저 담론이란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담론

 

을 하는지 어떤 계기로 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번에 살펴보는 작품은 <이브의 시간>이나 단순히 <이브의 시간>만을 볼 수는 없다. 이것은 기존의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란 것이 표현주의 미학과 더불어 사실주의로부터 탈피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사영상이 리얼리즘의 모든 것을 가진 게 아니다.

 

최근에 일본 문화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 교수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과 같이 오타쿠와 같은 하위문화에서 게임과 라이트노벨, 애니메이션 등에서도 리얼리즘이 등장한다. 단지 애니메이션학이나 영상학에서 다루는 리얼리즘의 영상요소와 달리 그 리얼리즘이란 것은 그 세계관에서의 리얼리즘이다. 안티-리얼리즘의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여 그 세계관 자체가 실사영화의 세계관과 반드시 어긋나 있다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생각해보자? 미래의 암울한 인류상을 그리는 <이퀄리브리엄>이나 혹은 복제인간이 대두되는 <블레이드러너>와 같은 작품들은 차라리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아니라면 조지 오웰의 소설인 <동물농장>을 실사영화보다는 오히려 존 할라스 감독 작품이 더 표현력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담론이란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영상에만 집착하여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그 세계관에 대한 개연성이나 필연성을 보는 것도 중요한 관찰이다. 단순히 애니메이션 한편 본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감정적인 여운이나 순간적인 만족만 준다고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작품에서 의미하는 바, 혹은 주장하는 바, 거기에 대한 비슷한 유형과 반대되는 유형까지 고려하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다.

 

이 리뷰를 적은 동기는 영화전문잡지 씨네21에서 나온 진중권 교수의 미학에세이에서 시작했다. 이 칼럼을 읽을 쯤에 딱 <이브의 시간>이란 작품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브의 시간>과 같이 씨네21에서 기고된 미학에세이에 눈을 돌리는 것인가? 우선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에서 하나의 미학을 가진 예술품이란 가정 아래서 시작해보자.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 미학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던 건국대학교 영상대학원에서 강의하는 김윤아 교수의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란 도서에 나온 내용이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인형이나 만화 캐릭터, 로봇과 같은 인공체들이 인간을 닮아 갈수록 호감이 상승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정도가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닮은 존재가 나오면 인간은 그 존재에 대해 혐오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중권 교수의 미학에세이에서 시작되는 작품명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2기인 이노센스이다. 1기인 극장판 Ghost in the shell과 같은 경우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이 인형사와 결합하여 공안9과에서 무단이탈하는 것에서 끝나고, 이노센스에서는 본 모습이 아니라 섹스로이드의 몸을 빌려 나온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 섹스로이드의 형상이 완전체에 가까운 성인보다는 10대 어린 소녀에 가까웠다.

 

공각기동대 이노센스 작품을 보면 그 소녀 섹스로이드가 사람을 살해하는데, 아무리 기계라도 인간의 감정적 반응이 필요했다. 그 반응을 위해 유괴범이 소녀를 납치하여 그 아이의 감정을 프로그램으로 저장시킨 것이다. 겁에 질린 소녀가 가진 적대의식이 결국 살인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어째든 이노센스 메인을 보면 2가지 피사체가 나온다. 하나는 강아지 1마리와 어설프게 분해된 기계인간이다. 강아지는 공각기동대 남자주인공인 바트가 키우는 유전자 복제생물이다.

 

공각기동대를 보면 인간의 존재라는 관념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요소가 강하다. 쿠사나기 소령은 자신이 원래 남자인지 여자인지 의심스럽고, 자신의 의체조차 자신의 본래 신체가 아니다. 단지 전뇌로서 그 신체를 조정하고, 공안요원을 그만둘 경우 공안요원이란 사실조차 잊게 된다. 인간의 기억이 전자프로그램에 따라

 

조작되고 형성되고, 게다가 신체조차 자신의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서 2기 이노센스에서 실제 미국 급진적 페미니스티인 해러웨이를 오마주한 캐릭터가 나온다. 그 사람은 토구사의 질문에 “나는 미스도 미스즈도 아니오. 그저 해러웨이요”라고 답한다.

 

사이보그 페미니즘으로 오이디푸스 가부장체계를 거부한 그 해러웨이 교수로서는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서 완전히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셈이다. 그러나 그 원초적으로 돌이켜 본다면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 아니 생명에 대한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것이 이미 없어진 것과 같다. 쿠사나기나 바토라는 인간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이 아니었는지, 혹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도 없다. 그들이 살아간 인간이란 세월조차 하나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유효하다. 실제 인간과 같은 모습이라도 인간이 아니니 말이다. 사이버펑크적 요소의 영화는 바로 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부정한다.

 

 

삶과 죽음이 같이 존재하는 실존주의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단두대 아래 목이 잘린 그 순간을 기다리는 그 새벽에서 자신의 실존성을 발견한다. 죽음이 있어야 내가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실존적 자세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존재성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없는 것이 아니다. 진중권 교수의 에세이나 혹은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분명 타나토스로부터다. 한스 밸머의 망가진 인형을 보는 순간, 나는 공각기동대 이노센스부터 생각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파괴된 소녀인형에서, 인형은 원래 제의적 요소에서 왕에서 시작하여 왕을 대체하는 살아있음이 중요하지 않은 상징적 육체이다. 제의에서 왕의 시신이란 생물학적 정의가 아니라 제의적 정의가 중요하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다미엥이 루이15세를 암살 기도를 하다가 잡혀 사형선고에서 그는 신체적 죽음보단 신성성에 대항한 점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잔인하고 끝없는 고문이란 인간의 육체보단 정신을 먼저 죽이게 한다. 죽어도 그는 또 다시 죽어야 한다.

 

죽음의 요소에서 파괴에 대한 본능은 또한 점령이란 부분도 강할 것이다. 다미엥의 죽음은 루이왕권의 보존이고, 짐은 곧 국가라는 전제군주적인 요소에서 항상 희생양은 그만큼의 대가를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스 벨머가 살던 시절은 전제군주가 살던 시절이 아니라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있었던 사회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독일은 패전국에서 다시 히틀러에 의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을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민족이라 하며 타 민족을 열등하게 보았으며, 이때 등장한 수용소의 잔혹함은 이미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시기에 한스 밸머는 반나치적 인물이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협력자이기에 그는 독일수용소에 갇혀야 했다. 죽음에 대해 광기에 젖은 사회에서 오히려 그것에 대해 빠져들기보단 자신의 광기를 지닌 자만이 더욱 인간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신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으면 거기에 대한 반사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그의 죽음의 충동적인 파편들은 저 인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인형이란 살아있지 않으나 우리 인간의 모습에 딱 맞추어 인간의 취향에 맞게 만들었다. 인형이야 말로 오히려 제일 완벽한 존재일까?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죽은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변하나 인형은 변하지 않는다.

 

적어도 물리적 충격에 의해 찢어지거나 부서지지 않은 이상 말이다. 나무나 가죽으로 만들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될 수 있겠으나 잘 관리하면 부패되지 않는다. 인간에 삶과 죽음이 확실히 존재하는 만큼 변하지 않은 인형이란 인간에게 가장 완벽해도 한편으로 혐오적인 존재일 것이다. 특히나 어린 소녀의 모습이란 특이한 요건을 부여한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처럼 희생양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서 아버지 살해라면 후자로 가면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는 오이디푸스 가부장체계이다.

 

그러면 누가 희생되어야 하는가? 아버지를 죽일 수 없는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고, 아버지 역시 자신의 대를 이어가기 위해 아들을 거세하지 못한다. 따라서 희생양은 점차 약하고 저항이 불가능한 인간으로 대체된다. 그것은 연약한 소녀이다. 대부분 비합리적이거나 미신적인 희생의식에서 가장 많이 죽는 존재는 소녀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육체와 영혼이란 점에서 희생이 되기 쉬운 점이다. 그래서 이때까지 이래저래 흘러간 글들을 다시 원점으로 모이면 공가기동대 2기인 이노센스에서 섹스로이드로 들어 가보자. 왜 많고 많은 기계 중에 왜 섹스로이드는 어린 소녀이고, 그것은 왜 메인 포스터에서 훼손되어 있는가? 한스 밸머의 작품과는 어떤 관계인가?

 

그런 희생된 모습을 그로테스크로서 보여주기에 우리에게 하나의 의구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다시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을 읽으면 프랑크푸르트대학파의 대표적 사상가인 아도르노가 제시한 담론이 나온다.

 

“‘타락한 세계를 고발하기 위해서, 능욕당한 미의 명예를 위해서 예술은 추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잔혹해야 하고 혼돈을 가져다주어야 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의 공범자가 되어 화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기만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닌 것이다. 예술은 삶에 대한 부정성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하며 그 방식은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일 때만, 자신의 타자 성을 내세우고 모순과 불협화음, 비동일성, 분열 속에서 스스로를 지킨다고 역설한다.”

 

나치의 파시즘에서 자신의 실존성을 지키는 것이 언캐니 밸리 이펙트를 만든 한스 밸머의 슬픈 모습이다. 인간이 아니 인형의 파괴, 하지만 인간은 정신적 파괴로 자신이 아닌 인형 같은 타인을 파괴한다. 나치수용소에서 실행된 호모 사케르, 즉 살해당할 수는 있지만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은 존재들의 죽음이 오히려 그 사회에서는 당연시 되는 것에 대한 반발적 의식일 것이다. 곧 그것은 남을 인정하지 않은 배타주의적인 부도덕한 사회가 오히려 도덕적인 사회로 변함에 따른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에 대한 반발감과 더불어 좌절감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불편한 것에 대해 직시하기 보단 회피하려 한다. 신화의 탄생에서 은폐의 역사가 반드시 존재한다. 은폐하는 이유는 불편한 기억과 드러나지 않고 싶은 진실이 숨어있다. 신화라는 것은 그런 은폐로 숨어있는 희생이 있으며, 그 희생은 결국 폭력, 착취, 억압의 제공자들을 오히려 새로운 영웅으로 승격한다. 그것은 당시 그 희생을 동조하거나 외면하는 이들의 거짓된 양심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인간이 자신도 인간이면서 타인들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인형의 부조리한 모습이다.

 

 

특히 어린 소녀라는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의 희생양의 모습은 불완전한 신체적 구조를 지닌 인간이 완전한 인체를 지닌 인형 같은 존재를 만들면서 결국 그것을 혐오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그 인형의 낯설고 보기 싫은 모습은 결국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아니라면 인간이 타자에 대한 공감으로 통해 이해하기 보다는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이런 대사내용이 나온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합리주의적 사고를 창출한 르네 데카르트가 알고 보면 딸의 슬픔으로 인해 인형을 마치 자신의 딸처럼 대했다고 한다. 이성 중심의 서구에서 데카르트가 분명 합리주의자이면서 가장 비합리적인 행동을 한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외로움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을 타인과 서로 나누기보단 공각기동대 이노센스 포스터처럼 인형이나 개와 같은 애완동물에 의지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부분을 다르게 보는 작품이 바로 <이브의 시간>이다. 이브의 시간에서 말하는 언캐니 밸리 이펙트의 요소는 매우 대단하다. 만약 인조인간의 머리 위의 전자 링이 보이지 않으면, 진짜 인간과 구별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분명히 인간처럼 생겼으나 인간이 아니다. 오로지 주인에게 복종하고, 시키는 명령에 대답하고 행동할 뿐이다. 문제는 그런 기계인간에게도 인간과 같은 감정과 판단력이 있다는 것이다. 기계인간에게 이성은 있다. 주인의 명령을 바로 수행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기계인간에게 이성은 감수성이나 감정은 없는 것이 바르다.

 

 

아무리 합리적인 인간이라도 순간적으로 감정과 무의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기계인간에게 순간적인 충돌이 존재하지 못하는 이유는 감정과 무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있다면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사이버펑크 작품에서 기존에 공각기동대에서 원래 인간이었을 쿠사나기 소령이다. 전뇌를 가지고 있어도 쿠사나기 소령은 바토와 같이 스쿠버를 즐기고, 인형사에 대해 의문을 품고 같이 프로그램까지 공유한다. 그러나 이브의 시간은 다르다. 처음부터 인간형 로봇이 아니라 단순한 모양으로 생긴 로봇부터 시작하여 인간형까지 발달한다.

 

 

만약 작품을 보면 구식로봇인 카트란과 텍스의 경우 확연히 인간과 구별되는 로봇이다. 이런 로봇을 옆에 있다면 분명히 인간과 구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기능적 요소를 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간하고 완전히 닮고, 게다가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의상까지 착용한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지만 마치 인간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들의 편리함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기분이 나쁘게 여기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진정으로 언캐니 밸리 이펙트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똑같이 생겼기에 그들은 오히려 인간과 같이 지내는 모습과 더불어 외면당하기도 한다. 인간은 왜 인간과 같은 모양을 만들려고 하면서 그들을 외면할까? 고대신화에서 바벨탑을 보자. 인간은 신이 사는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의 오만을 상징하는 바벨탑을 건축하나 결국 신의 분노를 사고, 서로 대화할 수 없을 정도로 언어가 갈라졌다고 한다. 신의 입장에서 인간의 오만에 분노했을 것이다. 신의 형상은 항상 인간의 모습과 흡사하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는지, 아니라면 인간이 신을 창조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이 인간의 영역 이상을 침범할 때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을 맞이한다는 점이다. 그런 인간이 이제는 로봇을 창조한다. 신화라면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니, 이제는 인간이 기계인간을 창조했나이다. 게다가 그 기계인간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기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타적인 모습을 말이다. 인간의 가장 숭고한 정신은 타인을 위해 선을 제공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정언명령이라고 한다. 기계인간은 주인을 위해 그 정언명령을 수행한다. 거짓된 마음은 없고, 오로지 주인의 선(goods)에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런다고 그 역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형식적 요소다. 하지만 그 형식이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브의 시간에서 보이는 갈등은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 리쿠오는 평범한 남자고등학생이다. 안경을 끼고 조용한 편이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항상 손에 핸드폰을 만지고 무엇을 관찰한다. 그것은 자신의 집에 있는 기계인간 사미의 활동기록이다. 사미는 젊은 여성처럼 생긴 기계인간이다. 그저 집에서 리쿠오의 가족들에 가사업무를 맡는다.

 

 

이브의 시간에서 중요한 부분은 대부분 기계인간들이 인간의 다른 영역보다는 가사업무를 맡는다는 점이다. 요리와 세탁, 심지어 비오는 날 마중가기도 한다. 또한 어린 아이를 돌보기도 한다. 이브의 시간에서 주요 배경이 되는 카페인 이브의 시간은 인간이나 기계인간이나 모두 차별 없이 머물 수 있다. 그 중에서 인간이 누구이고? 인간이 아닌 자는 누구인가? 오히려 인간이 아닌 기계인간이 더 인간다워 보인다. 활발한 소녀 아키코,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는 리나와 코지, 치에를 돌보는 시메이, 이들은 모두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처럼 보인다. 아니라면 더 인간이 가지고 있을 따듯한 마음까지 지니고 있다. 여기서 주인공인 리쿠오와 그리고 사미를 보자. 사미는 본래 커피를 탈 때 있는 것으로 타다가 어느 순간 맛이 바뀐다. 우연히 사미가 이동경로가 명령한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는 것을 알고, 리쿠오는 그 위치에 가서 우연히 그곳이 인간과 기계인간의 구분을 하지 않는 카페라는 점을 알았다. 거기서 마시는 커피가 집에서 마시는 커피맛과 비슷하다. 게다가 사미가 그곳에 온 것까지도 알았다. 사미는 왜 그곳으로 가서 커피를 받아 집에서 타줄까?

 

 

사미는 평소대로라면 가사 일만 하는 기계인간이나, 막상 이브의 시간에 가면 말이 없고 조용한 아가씨다. 머리모양도 긴 생머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옆쪽으로 묶는다. 집에서 가끔 머리모양을 보면 헤어밴드를 하거나, 의상도 바뀌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리쿠오의 어머니가 그렇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작품을 보면, 사미가 직접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용모를 단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이 기계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인가? 사미는 기본적으로 여성형 기계인간이다. 하지만 기계인간에게 여성인가? 남성인가? 문제는 중요하지 않으나, 사미는 여성으로서 매력을 보여준다.

 

 

이브의 시간이란 가게에서 나기와 대화를 나눌 때, 리쿠오에 대해 걱정한다. 그가 어느날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는 것과 그 이후로 삶의 활력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리쿠오를 위해 사미는 커피를 타주는 점에서 변화를 준 것이다. 기계인간이라면 프로그램이 있으나, 그것을 초월했다. 오로지 리쿠오라는 남자고교생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어느 점이 더 인간다울까? 집에서 리쿠오는 조용한 성격이고, 누나는 대학생이라 술을 마시며 늦게까지 논다. 어머니는 그저 쇼핑이나 TV보는 것을 좋아하며, 아버지는 항상 출장 중이라 집에 오지 않는다.

 

 

이 작품에 보이는 것은 가족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다. 심지어 나기나 리쿠오의 친구인 마사키조차 어린 시절 로봇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러나 양육된 로봇에서  나기의 카트란은 그 이용가치가 다 되자 기억과 일련번호를 지워진 채 버려지고, 마사키는 아버지가 로봇혐오주의자에 따라 마사키와 대화조차 나눌 수가 없었다. 이런 2가지 엇갈림에서 나기는 이브의 시간을 만들고, 마사키는 차라리 만나 상처를 받을 바에 기계인간에 대해 부정하여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결국 로봇이란 타자성, 인간이 만든 인형에서 그 인형이 오히려 인간적이기에 그 인간적인 사랑을 받는 것만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같이 나누어주는 것인가에서 가치관의 차이다.

 

 

그런 가운데, 리쿠오는 사미의 이상한 행동을 지켜보며 나기가 가지는 기계인간에 대한 애정(집에서 누나가 리쿠오에게 기계인간에 빠져있는 사람 같다고 놀린다)과 더불어 기계인간에게 패배했다는(피아노 연주대회에서 기계인간의 연주에 졌다는 패배의식) 2가지 마음이 교차한다. 왜냐하면 기계는 정확한 연주, 즉 음의 높낮이와 더불어 박자만 정확한데, 리쿠오는 피아노를 치는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피아니스트의 손맛을 그 기계인간에게 느꼈던 것이다.

 

 

결국 인간이 아닌데도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연주를 한 것이다. 아니라면 원래 진짜가 아니기에 오히려 진짜이고자 하는 그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연주였을 것이다. 리쿠오에겐 그런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브의 시간이란 카페에서 보인 사미의 행동, 리쿠오에게 사미란 기계인간은 가사업무를 맡는 안드로이드에서 한 사람의 인간(여성)으로 보이기 시작한 점이다. 사미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히거나 또는 사미의 정성에서 다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형에 대해 인형이 아닌 인간으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의 무서움이란 인간이 가장 원하는 대상을 만들었을 때 그 대상이 가장 무서운 존재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봤을 때, 그저 같은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이 아닌 인간이 만든 인형 혹은 기계인간에게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이면서 한편으로 낭만적일 수 있다. 없는 것에 대한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란 실존적 존재가 결국 유물론적인 부분에서 관념적인 부분으로 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인형이 딸이라고 여긴 르네 데카리트의 코키토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한다. 인간의 존재성에서 형이상학적으로 들어가면 존재의 있음을 존재가 바로 물리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고 인식해야만 비로소 존재의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이브의 시간을 보면 한국 rock밴드 부활의 곡 중에서 <인형의 부활>이란 가사가 생각난다.

 

 

 

 

한 마음과 한 곳만을 보며, 우는 모습이 무엇을 말하려하니.

마주보이는 그곳을 슬프게 보며, 말 못할 사연을 커다란 눈으로 나에게 말하려나!

말 못하는 너의 조그만 입이 너무 안타까워.

그 눈물은 이별 그리고 슬픔 그런 걸 거야, 무얼 말하려하니.

마주 보이는 너에게 슬픔이 보여.

말 못할 사연을(사랑과 이별을) 커다란 눈으로 나에게 말하려나.

(이제는 너에게도 생명이 있네, 인형아~)

 

 

 

 

아무리 가사를 봐도 리쿠오에 대한 사미의 마음이다. 아니라면 어린 시절 상처를 받은 사카이의 마음일 것이다. 자신을 돌본 구식로봇 텍스에서 말이다. 이 작품에서 성우진도 조금 보면 재미있는데, 리쿠오에게 한 마음으로 보는 사미의 성우가 다나카 리에이다. 다나카 리에의 배역 중에 CLAMP가 만든 <쵸빗츠>에서 역시 기계인간인 치이와 프레이야 역할을 맡았다. 거기서도 치이는 순진한 청년 히데키에 대해 인간과 기계인간의 사랑에 대해 그린다. 기계음성이 지닌 그 특유한 딱딱한 뒤에 숨어진 깊은 감성을 지닌 목소리도 이브의 시간을 감상할 때 주요 포인트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복귀하여 한스 밸머의 그로테스크한 파편화된 인형,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의 표지, 그리고 이브의 시간에서 보이는 사미, 나오는 배경적 차이는 분명하나 인간이 아닌 인간이 만든 존재에 대해 논하고 있다. 사실 인형이라고 하나 그 인형의 모습은 분명 인간이 상상하고 만든 존재이다. 하물며 애니메이션 영상조차도 작가와 애니메이터의 손길이 들어가 있다. 한편으로 이들의 공통적인 부분은 인간임에 대한 물음이다. 점차 갈수록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 긍정적 요소로 강해지면, 마지막엔 인간과 기계인간 사이에는 우정과 애정조차 가능하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존재로서의 타자인지,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타자인지는 우리가 결정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언캐니 밸리 이펙트가 사실 인간이 만든 존재가 진짜 인간처럼 보여서 그렇다고 하나, 그것을 만든 것은 인간이다. 결국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 대해 그것이 자아든 타자이든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글을 적는 나라고 하여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되지 않기에 이런 글을 적어본다. 우리 인간 자체가 언캐니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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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단원고 비극에 대한 국민들이 느껴야 할 내용을 200자 정도로 적어보았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희생자를 생각하면 나는 그들이 죽어서 슬프기보다 그들의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펐다. 남들은 이상하게 여기나, 계속되는 비극이 되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정부기관에 대한 비판의 날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그러나 이것은 알아야 한다. 그 정부를 만든 당사자는 바로 국민들 자신이란 것을 말이다. 왜 정부는 비판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은 비판하지 않을까?

 

국민의 심판이 다음 선거라고 하나, 지금 이 비극이 터진 정부도 앞과 전의 선거로 탄생한 것이다. 그들을 선택하고 나서 이제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하는 국민들, 그것은 국민의 권리이나, 책임의식은 안 보인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그런 자신을 비판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역사는 계속 되풀이는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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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이나 혹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 나보다 더 앞 전 시대라도 이 노래 가사는 알 것이다."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의 주제가 구절로 어린 시절에 보던 만화영화에서 아주 인상깊은 구절이다. 그래서인가? 영화를 보러 극장가에 왔는데 제법 나이가 있는 분들도 관람하러 오셨다. 대략 30대 내지 40대의 여성분들이 친구끼리 오거나 혹은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같이 영화를 관람했다.

 

그 자리에서 영화를 보던 사람 중에 남성은 나 홀로라는 사실은 조금 서글프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에 봤던 만화영화를 다시 본다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알 것 같기도 하면서도 잘 떠오르지 않은 지난 날을 다시 조우하는 것은 가슴이 뛰면서도 한편으로 조금 슬프기도 하다. 그 만큼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는 세상의 혼잡함에 덧칠하였기 때문이다. 극장 안에서 보는 내내 그 때의 그 감정이 새롭새롭 떠오르니 정말 네버엔딩 스토리인가보다.

 

<빨간머리 앤>은 본래 TVA로 나온 작품이다. TV에서 장편으로 방연한 프로그램으로 사실 아주 예전에 나온 작품이라 캐릭터 디자인이나 배경 등은 매우 과거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작화를 보면 마치 거리와 자연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 수채화적인 영상과 애니메이션이란 하나의 표현주의적 양식을 고려하면 지금 다시 봐도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의 감독은 일본 최고의 애니메이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같이 스튜디오 지브리를 이끄는 다카하타 이사오로서 <평성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나 <추억은 방울방울> 등과 같은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을 보면 자연주의적 요소와 더불어 그 자연적인 요소를 의 서정성을 반영하여 메말라 비틀려버린 인간의 감수성을 다시 되살린다. <빨간머리 앤>을 보면 앤은 이런 질문을 매튜 아저씨에게 한다. 주변에 강이 있냐고 말이다. 자신의 꿈은 강이 주변에 있는 집에 살고 싶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공기, 이것은 우리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존재다. 단순히 맑은 물과 공기는 인간의 건강만을 지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매튜 아저씨와 같이 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마을 어귀에 벚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길이 나온다. 벚나무가 마치 태양과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길게 뻗어 꽃잎이 터널처럼 연결된 그 길은 너무 아름답고 경이로워 보는 순간 마음 한편에 뭔가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 벚나무에 피어난 벚꽃들이 사실은 꽃잎만이 아니라 요정이 같이 숨어 앤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황홀한 연출이 아닐 수가 없다.

 

왜 인간은 자연과 같이 생활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늘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고 게다가 불모지로 만들었다. 대지란 모든 생명을 품고 있으며, 그 생명으로 통해 우리는 다시 생명을 얻어가는 것이다. 자연의 파괴와 착취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으면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고 착취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마저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로 되어 버린다. 자연을 아낀다면 그 모든 것이 소중한 법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언제나 말이 많고 감정이 풍부한 앤, 앤의 그런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종종 오해하거나 혹은 그녀를 알게 되면 재미있어 한다. 그녀의 순수한 매력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은 순수함이란 무엇일까?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게 <빨간머리 앤>은 잊혀진 우리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주는 느낌이었다. 작품은 TVA 장편에서 중요한 부분을 골라 편집하여 극장판으로 만든 것이다. 처음 초록지붕 집에 와서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를 만나고, 그리고 평생 친구인 다이애나를 만난다.

 

학교에서 길버트와 만나 싸우고, 이후 라이벌로서 계속 학교 내에서 만난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로 주요 장면을 넘기고 나서 이 작품의 최후의 클라이맥스인 매튜 아저씨의 운명이 나온다. 매튜 아저씨는 앤을 자신의 집에 살게 해주고, 거기다가 학교에 보내준다. 앤은 열심히 공부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여 상급학교에 입학하고,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의 자랑스러운 가족이 된다. 그래서일까? 매튜 아저씨가 죽기 얼마 전에 앤과 같이 목장을 걸을 때, 앤에게 한 말이 인상 깊다.

 

"앤, 넌 내 딸과 같다", 마릴라 아주머니도 "앤, 넌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와 같다.", 참으로 감동적인 대사였고, 매튜아저씨의 죽음 역시 슬픔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작화와 지금의 작화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성우의 연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치 애니메이션 안의 무생물인 앤이 정말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성우분들의 그 진심어린 연기와 매튜아저씨의 죽음이 많은 관객들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오는지 어느 분들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눈물일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남성 나홀로 있어서 같이 동조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가슴 속에 뭔가 아련하고 잔잔한 파도가 일어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앤은 작품에서 공부를 잘하여 좋은 대학교를 장학금을 받고 좋은 환경에서 학업을 이끌어갈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록지붕의 집에서 마릴라 아주머니를 돕고 그녀를 보살피며 같이 살기로 결심한다.

 

나이로 인해 실명이 올 정도로 건강이 나쁜 마릴라 아주머니를 앤은 못본 채 하지 않고, 그녀와 같이 매튜아저씨의 죽음을 슬퍼하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것을 결정한다. 자신의 성공이란 출세보단 소중한 사람과 같이 있기를 선택한 앤에게서 우리 인생이란 서로와 서로를 보담아주고 위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한자어 중에 사람인 人이란 글자가 있다. 저 한자가 왜 ㅅ자 모양인 것을 생각하면, 사람과 사람은 서로 받쳐주며 같이 살아가야 하기에 사람인자라는 한자어가 생겼다고 한다.

 

가족과 친구, 어느 것 하나 버릴 것도 없이 모두 소중하기에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된다. 작은 것에서 행복과 삶의 목표를 찾는 것이 어째보면 우리의 행복일지 모른다. 출세도 물론 중요하나, 출세하여 마지막 혼자만 만족해야 한다면 그것만큼 쓸쓸하고 허무한 일은 없을 것이다. <빨간머리 앤>은 아주 오래된 작품이고, 추억의 만화영화로 나오지만, 거기에 담은 아름다운 이야기와 모습은 영원할 것이다. 작품을 보면서 생각하거만 대사가 참으로 아름답다. 풍부한 감정과 다양한 표현, 대사 하나 하나가 모두 시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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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4-28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댓글은 없군요. 무플방지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4-28 14:45   좋아요 0 | URL
역시 곰발님이십니다. 그려~
그런데 공감은 6개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