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블랙 불릿을 처음 보면서

블랙 불릿(black bullet)이란 작품을 보는 순간, 제법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란 것을 알았다. 예술이란 것은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 그것은 단순히 보기가 좋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가령 우아한 자신들의 팀을 위해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는 일명 “잇쇼겐메이(いっしょけんめい)”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것이다. 다르게 설명하자면 예술이란 것은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협화음 내지 추악함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요소들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예술이라 함은 근대까지 다른 모습으로 이른바 탈근대적인 모습으로 인간이 절대적으로 여긴 것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을 파괴해야 하는 점이다.

 

근대중심의 사고는 이미 낡아버린 사고방식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이 어느 절대적 가치아래 묶이는 것 자체가 바르지 못한 방식이고, 그런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은 파시스트적인 요소로 변질된다. 이미 오래 시간을 들어 20세기 역사에서 그런 현장을 보아왔다. 하지만 거기에 대항하는 안티적인 파시스트적인 존재 역시 파시스트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나는 생각하고 있는가? 아직 일본은 2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태평양전쟁 이전의 인간과 이후의 인간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평양전쟁 중심의 사회보다는 태평양전쟁이란 속성이 가진 인간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그로테스크적인 요소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블랙 불릿은 그런 인간들의 투쟁을 보여준다. 그로테스크라는 일그러지고 낯설며 불편한 진실이란 무엇인가? 동경에어리어에 살아가는 인간과 그 뒤에 숨어 있는 권력집단,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는 자의 광기가 있기에 흉측한 인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블랙 불릿은 10년 전에 야생의 가스트레아라는 괴물집단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보통 공격으로 죽지 않은 무서운 괴물인 가스트레아는 살아있는 인간 그리고 동물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2. 가스트레아와 인간

그들은 인간을 죽이고 포식하며, 때로는 그들의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과 동물들을 감염시켜 버린다. 감염된 인간과 동물은 세포 안에 침식된 가스트레아 바이러스로 인해 숙주가 되고, 그 숙주는 바이러스의 영양분이 되어 마지막에 가스트레아에 의해 잡혀먹게 된다. 바이러스에 대한 처방이 되는 백신을 즉시 접종받지 못하면 인간은 죽게 되는 점이다. 그런 절대절멸적인 비참한 상황에서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보통의 공격으로 죽지 않고, 자위대에서 출동한 전투기 폭격이나 탱크의 공격으로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가스트레아 일정 등급이상이 될 경우 보통의 무기조차 통하지 않는다.

 

이른바 바라늄이란 금속으로 가스트레아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바라늄이란 금속은 현실적인 화학에서 등장하지 않은 금속이나 인간이나 보통 동식물에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금속이다. 하지만 가스트레아나 또는 가스트레아 세포 내지 바이러스가 있는 생물체에겐 매우 효과적인 영향을 준다. 가령 보통 총알에 의해 가스트레아가 죽지 않으나 바라늄으로 만든 총알 앞에서는 무력화될 수 있으며, 동경 에어리어를 막고 있는 모노리스 성분이 바라늄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금속 중에서 특정한 파장 내지 혹은 성분을 포함하는 금속이 있다. 가령 구리는 살균효과를 지니며, 수은은 소독효과가 있으며(대신 인체에 과도노출 시 미나마타병에 걸릴 수 있음), 게르마늄 같은 경우 인간에게 좋은 파장을 내뿜는다고 한다.

 

하다못해 우라늄 같은 경우 핵에너지를 발산하고, 세슘의 경우 인간에게 폐질환을 주기도 한다. 바라늄의 속성이란 결국 가스트레아를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가스트레아 세포와 바일러스까지 섬멸할 수 있는 금속이어야 한다. 바라늄으로 무장한 민간경찰과 그들을 돕는 이니시에이터인 10세 소녀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일하게 가스트레아를 막을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3. 저주 받은 아이들

민간경찰의 경우 대부분 총과 칼, 그리고 무기들을 바라늄으로 만들고, 그들의 이니시에이터인 10세 소녀들은 태어날 때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가스트레아 바이러스로 인해 유전자가 변형된 인간이다. 고의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적인 조작으로서 태어난 소녀들은 눈이 붉고, 보통 인간과 다른 신체적 능력을 갖추었다. 이들의 존재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로 비추어져 가스트레아가 아니지만 가스트레아의 세포를 가진 이유로 차별을 당한다. 인간의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자면 옳지 않은 일이나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보다는 감정이나 무의식에 의해 더 심하게 움직인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이니시에이터인 소녀들은 보통 인간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은 존재이나, 감정이나 무의식적인 영역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 소녀들은 보통 인간과 다른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으로 가스트레아를 헤치울 수 있기 때문이다. 괴물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과 인간의 중간에 있는 존재다. 그래서 반괴물이란 입장에서 이니시에이터는 싸움에 빠진다. 그 소녀들이 싸움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평등이란 이름의 부당함이다. 인간의 불평등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따르면).

 

하나는 선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것이다. 후천적인 것은 사회적 지위, 경제적․ 문화적 조건, 교육의 수준 등과 같이 자연적인 인간이 아니라 비자연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선천적인 것은 성별, 인종, 나이, 민족 등이다. 소녀들은 나이나 성별, 그리고 민족적인 조건에서 전혀 불평등을 받을 이유는 없으나, 그녀들이 단지 가스트레아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태어난 죄로 불평등적인 차별을 당한다. 대부분 부모들은 그녀들을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사람들은 가스트레아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면 아무 죄도 없는 소녀들에 대해 폭력과 협박을 가한다.

 

4. 인간의 이면적 모습

자신이 현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서 자신보다 더 약한 약자를 박해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의를 관철한다. 엔쥬 역시 평범히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히루코 카케타네의 책략으로 엔쥬는 학교로부터 외면당한다. 엔쥬가 학교에 평소에 남에게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학교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 싸우는 자에 대한 자세에서 오히려 박해를 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이란 이성보단 무의식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사상의 기초는 계몽주의에 의해 태어났기에 근대사상은 이성에 의해 인간이 인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고 여기나 그 진실은 오히려 인간이 계몽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억압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블랙 불릿은 가스트레아와의 전투보단 그 가스트레아의 전투로 통해 보는 인간상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작품 원작이 라이트노벨이고, 원작에 비해 짧은 애니메이션 편성으로 본래의 내용을 충실하지 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 전개상 이해하기 힘든 전개나 상황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부연적인 설명이 없었기에 작품을 오락적 요소로 본다면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하겠지만, 그 작품에 담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가치는 최근 본 작품 중에서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5. 일본의 모습

블랙 불릿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은 21세기 일본 동경이란 점이고, 동경의 통치자는 성천사라는 16세의 미소녀다. 거의 천사와 같은 외모와 지성, 그리고 인간성을 갖춘 완벽한 소녀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진정한 용기와 자비심은 분명히 말하자면 이상적인 정치인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있다. 그녀는 현실을 각인하고 있지만, 현실주의자로 남아있기 보다는 이상주의자로서 살아가려 한다. 현실에 타협하여 적당히 넘어가자는 관료주의적인 정치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상징 Icon이다. 마지막 화에서 알데바란을 무찌르는 장면에서 성천사가 기거하는 건물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등불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 축전지를 보급 받아 가스트레아의 행진을 관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누군가의 음모로 축전지는 오지 않아 위기에 처한 순간, 성천사는 자신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주변에 모인 시민들과 같이 하늘 위로 등불을 보낸다. 무력한 인간이나 누군가의 도움이 되기 위해 그 마음을 직접 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주 받은 아이들에 대한 태도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버린 받은 아이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며,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바라늄 폭탄을 그들의 피난처에 날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극도의 잔인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성천사와 함께 보내는 등불에서 버린 받은 아이들 중에 한 소녀가 옆에 한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미소를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은 아무 이상 없이 태어난 당신만이 아니라 저주 받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란 뜻이다. 단지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이지 결코 그것을 원한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를 위협할 생각도 없다. 너와 나는 다르게 보이지만, 근본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가진 인간이란 점이다. 인간의 마음이 없는 정상적 육체를 가진 인간과 아니라면 가스트레아의 세포에 의해 기형적으로 태어난 소녀 중에서 누가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은 신체적 조건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인간으로서 보여주는 말과 행동이다.

 

바로 일본은 2가지의 모습에서 갈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태평양 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야생의 가스트레아가 왜 일본 동경에 오게 되었는가에서 텐도 키사라의 가족들이 꾸민 짓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가스트레아가 생겼는지에 대해 알 수는 없었다. 라이트노벨이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스트레아의 존재는 유전자가 조작된 생물체에 의해 기인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형적인 생물이 나오는 배경은 20세기 들어와서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죄 중에 하나인 원자폭탄과 방사능사고다. 일본의 경우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게 되고, 그 결과로 태평양전쟁은 종료된다.

 

6. 텐도 가문과 정치적 이권

태평양전쟁과 텐도 가문의 관계는 무엇인가? 텐도는 작품에서 일본에서 오래된 유서깊은 집안이고 실제로 텐도 키사라의 오빠는 카즈미츠는 일본 국토교통성의 부대신이다. 게다가 키사라의 할아버지인 키쿠노죠는 성천사 옆에서 정치적 보좌를 맡고 있다. 성천사가 어떻게 통치자가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으나 기본적으로 텐도 가문은 작품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존재다. 그들은 알데바란이 동경지역에 나오게 한 것에 대한 책임과 있음과 동시에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이권을 누린 존재다. 그들이 누린 방식은 기존 관료들이 가진 특권의식으로부터 시작되는 점이다.

 

일본 경제성장에 주목할 만 점은 토목산업이다. 키사라의 오빠는 국토교통성에서 부대신이란 점이 중요하다. 국토교통성이란 기구는 한국으로 따지자면 국토교통부와 같은 곳이다. 국토교통부의 차관급인 키사라의 오빠는 상당한 권력을 가진 정치가이다. 그런 정치가가 손을 댄 것이 바로 모노리스의 건립이다. 모노리스는 고순도의 바라늄으로 제조해야 하나 일정 농도만 유지하면 등급이 낮은 가스트레아를 막을 수 있는 이유로 농도를 조절하여 그 차액을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국토교통부에서 제일 중요한 사업은 바로 건설 사업이다. 건설사업의 비리 내지 유착의 부패는 수많은 인명을 희생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토목건설의 사업비는 상당하고, 특히 원자재에 의한 차액은 엄청나다. 가령 철근 콘크리트에 10㎜ 짜리 철근 10개 대신 8㎜짜리 8개를 넣는다면 약 30% 이상의 차액을 챙길 수 있다. 모노리스 건설에서 바라늄의 농도는 중요하다. 그 농도의 약화로 모노리스가 침하되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가스트레아 진격에 대한 방어에서 민간경찰과 이니시에이터 역시 희생이 만만치 않게 크다는 점이다. 그런 원인을 제공한 텐도 가문, 어떻게 보면 텐도가문은 일본 극우적인 집안과 연결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선 텐도 가문이 세운 모노리스에 의해 알데바란이 침공하고, 야생 가스트레아가 왜 일본 중에 동경에 왔는지도 의문이다.

 

그 중심에 모든 것이 텐도 가문이고, 그것을 주도한 자는 텐도 키사라의 할아버지인 키쿠노죠라는 점이다. 키쿠노죠는 막대한 권력을 가진 일본 집안의 인물이고, 그가 어떤 일을 꾸미고 진행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총 5인의 인물에서 주도적인 사실이다. 그가 10년 전의 비극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본다면 그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시민들은 누구란 말인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범죄국가의 죄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독일과 같은 경우 나치의 행태를 평생 나오지 않도록 국법으로 제정할 정도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본은 평화헌법을 무시하고 자위대를 군사화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1945년 핵의 투하는 누구의 잘못으로 인한 것인가?

 

7. 텐도 키사라의 악

미국이 단지 투하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심리 내지 보상심리 그리고 저항의식도 아닌 반항심에 사로잡힌 극우적 일본정치가들의 자위행위는 도가 지나쳤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으로 다른 국가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자국민들을 군국주의사상으로 무장하여 희생시키며, 전쟁에 패배하여 전쟁전범들은 반성하기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애국자라고 선전하는 현실에서 블랙 불릿의 텐도 키사라의 할아버지와 오빠는 대표적인 위선자라고 볼 수 있다. 성천자는 분명히 이상적인 정치지도자이나 그녀 옆에 있는 키쿠노죠의 위선은 일본이란 나라의 양면성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텐도 키사라는 명문집안의 규수로 태어나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무술까지 겸비한 소녀지만, 그녀에겐 어둠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부모님이 텐도 가문의 비리와 어둠을 고발하려고 했으나, 일족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집안의 이익을 위해 집안의 양심을 스스로 죽인 셈이다. 양심적인 지식인의 죽음은 그 사회의 죽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양심적 지식인들이 존재해야 그들로 통해 시민들의 자각심을 일깨우고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이 정치적 주권자이라고 해도, 시민의 권리를 행세하기 쉬운 반면 그 권리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수행하기 어렵다.

 

책임의식을 가지게 되려면 사회적 문제를 올바르게 지적하고 생각해야할 것이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대가 되어 정치적 자유주의로서 행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중심에 필요한 것이 지도자이고, 양심적 지식인이다. 누군가 그 문제점을 파악하고 알리지 않으면 시작부터 되지 않기 때문이다. 텐도 가문의 가족 비극사는 키사라로 하여금 광기에 빠지게 만들었다. 겉으로 좋은 회사동료인 키사라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깊은 어둠과 광기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오빠와 결투 후에 무참하게 갈라버린 그녀는 자신에게 정의는 없다고 한다. 단지 악을 처벌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8. 왜 그로테스크인가?

악을 대항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악이라는 설정은 결국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한 저항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부정하는 것이다. 키사라의 광기는 자신의 행위를 두고 스스로 악이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에게 악이지만, 키사라 본인에겐 정의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부모의 원수, 그리고 자신이 짊어지는 그 죄의 무게를 스스로 벌하겠다는 말이다. 결국 가족에 대한 처벌은 자신의 가족을 죽이는 것으로 스스로를 처벌하는 것과 같다. 죽음의 충동으로 행동하는 키사라에게서 인간의 삶은 어느 것으로 지탱하는지 의문스럽게 만든다.

 

분명 린타로와 엔쥬는 서로를 바라보면 의지한다. 그리고 린타로는 저주받은 아이들에게 무자비한 세상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더 좋은 미래가 올 것이고, 그때까지 서로 살아가야 한다고 한다. 절망적인 세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미래가 오는 한 가닥 빛줄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린타로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눈 한 쪽, 팔 하나, 다리 하나가 인체가 아니라 바라늄으로 만들어진 반 기계인간이었다. 심한 부상에서 수술로 다시 회복한 린타로는 물질적으로 인간이기보단 기계와 같은 속성을 가진 것이다. 기계적인 신체가 되어버린 린타로에게서 기계화된 인간병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린타로는 분명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 속에서 그 모습이 슬프지 않게 되는 자신이 슬프다고 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 중에 슬픔은 아주 중요하다. 슬픈 감정이 있기에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이해해주고 싶으며, 때로는 원망도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저주받은 아이들을 외면해도 린타로는 끝까지 그 아이들을 지켜주려 한다. 심지어 눈앞에서 죽어간 동료들까지도 말이다. 인간이 죽음 앞에서 마치 스쳐가는 풍경이라면 그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감정 없는 로봇이다. 단지 싸우고 죽이고 부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감정 없는 것도 광기 중에 하나다. 왜냐하면 처음에 린타로는 가스트레아가 아니라 히루코와 싸웠기 때문이다. 히루코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원하며, 민경들과 정부에 대한 반국가적인 행동만 한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기계화 병사였으며, 그 옆에는 자신을 두고 아빠라고 부르는 저주받은 소녀 코히나가 있었다. 히루코의 딸인 코히나 역시 아버지를 닮아 광기에 빠져 살육을 즐기는 소녀다. 그러나 그 소녀가 왜 히루코와 같이 광기에 빠졌는가? 히루코는 평화보단 전쟁을 원한다고 하면서 처음에 동경에어리어의 위협이 되었지만 알데바란이 침공한 후부터는 린타로의 든든한 아군이 된다.

 

위기에 빠진 린타로를 그리고 알데바란 섬멸 작전 전에 퀸에 대한 섬멸작전을 도운 것도 히루코다. 그는 왜 린타로를 같이 하려고 했는가? 그는 전쟁을 위해 억지로 만든 몸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마저 저주 받은 아이들처럼 되었다. 전쟁이 끝나 기계화된 병사는 필요 없고, 딸은 타인들에게 거부당한다면 히루코가 남은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순수한 증오와 저주일 뿐이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은 희생했으나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10년 전 사건 이후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로 되었기 때문이다. 가면 아래 숨겨진 얼굴은 알 수 없으나 그 눈빛에는 온갖 절망과 증오 그리고 파멸이 숨어 있다.

 

린타로의 공격에 목이 돌아가도 죽지 않고, 다시 원상 복구하는 히루코의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과연 누구로부터 시작했는가? 전쟁에 필요한 군인들은 처음에 상관들에 의해 멋대로 개조되다가 어느 순간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진다. 버려진 자들에 대한 반발의식은 그 모든 것에 대한 파괴본능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저주 받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아무런 죄도 없지만 무참히 죽거나 핍박받는 모습에서 그들이 느낀 세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점에서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가스트레아보단 오히려 인간의 말과 행동에서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이란 과연 자신들이 희생할 만큼 지켜줄 가치가 있는가에서 작품 전체에서는 없는 것 같이 보인다.

 

9. 블랙 불릿과 일본이란 사회

하지만 린타로는 그래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언젠가 자신들이 그곳에서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 날을 위해서 그 사회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 아래서 말이다.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 라는 의문처럼 말이다. 동경을 지키는 린타로와 엔쥬를 비롯한 무리들은 버린 받은 아이들로 하여금 그 자리를 만들어주는 존재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로부터 차별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오늘 하루 무사히 보낸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나, 그 희생은 누군가는 잊은 채 그저 두려움과 적의로서 대한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낸 근본적 범죄자들은 표면 위가 아니라 수면 아래 자기들의 이익만 추구한다. 만약 단순히 10년 전의 가스트레아가 괴물이 아니라 일본의 현실이라면 어떻게 볼 것인가?

 

그동안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그림자 뒤에서 온갖 공작을 부린 세력가들이 존재했고, 그들로 인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또 다시 위기를 맞이한다. 정치가보다는 그동안 일본국민들의 정직한 직업정신과 장인정신으로 일본은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버블경제 이후 부동산문제나 물가상승, 최근에 노후화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한국 역시 물가상승, 고령화, 사회적 불평등의 심각성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블랙 불릿은 일본이란 국가에서 누군가 노력했다면 그 성과가 그 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누군가의 이익으로 돌아간 점과 그것도 모자라 그들이 이룩한 성과를 모두 파괴된 점이다.

 

10년 전 가스트레아 침공에서 동경에어리어의 시민들은 거의 모든 것을 잃었고, 그 후에 태어난 저주받은 아이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원망과 증오를 받아야 할 이유는 바로 진정 비판받을 대상은 표면에 나오지 않고 숨어있는 것이고, 도리어 아무 죄 없는 이방인 같은 존재만 희생되는 점이다. 블랙 불릿의 관동 회전에서 예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이 생각났다. 본래 지진이란 지구의 맨틀의 운동, 화산활동 등의 지형지질적인 운동에서 시작되나,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음모로 여기고, 죄 없는 조선인들을 살해하거나 핍박했다.

 

그런 점에서 저주받은 아이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배척받는 것과 당시 희생된 조선인들과 비교하여 기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불안과 공포를 전가시키고, 극단적인 폭력으로서 상대방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의라고 여겼다. 단체가 개인에 대한 폭력행사에서 폭력을 가하는 자는 자신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행하고 있다고 여긴다. 폭력이 하나의 미적 기준으로 되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 바로 파시스트의 모습이다. 하지만 폭력이야 말로 유일한 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점은 프랑스대혁명처럼 구시대의 모순을 뒤집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단지 그 폭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집단우월주의인지 혹은 그것을 뛰어넘은 인간의 일반의지인지가 구분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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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조금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사랑이란 에로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문학이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깊이 다양하게 파고들어가겠지만, 결국 사랑은 인간의 본능적인 에로스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행위다. 그런다고 사랑은 단순히 에로스로 보는 것일까?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애적인 사랑, 아가페도 존재한다. 사랑이란 이름은 어떻게 보면 숭고하고도 때로는 무서운 이름이 된다. 사랑의 깊이는 결국 증오와 질투의 깊이까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2014년 봄 신작이던 <건전로봇 다이미다라>는 상당히 적나라한 언어와 이미지로 범벅된 작품이다. 일어는 자세히 모르나, 미다라인 단어가 음란하다면, 다이 미다라는 2가지 음란하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음란한 짓을 할 수 있는 것은 남자 1명이나 여자 1명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녀 1쌍이 모여야 그 음란한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야한 농담이나 저속한 단어 그리고 여체를 강조하는 그림이나 또는 실제 남자주인공인 코이치가 자신의 파트너인 쿄코를 상대로 무자비하게 가슴을 만지는 것은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격에 빠뜨린다. 게다가 청소년이나 여성들이 보면 상당히 기분이 나쁘거나 유해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작품 결말부를 보면 조금 생각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미소녀 내지 미녀들은 많으나, 남자주인공들은 오로지 자신의 파트너에게만 충실할 뿐이다.

 

특히 여자 가슴이라면 죽음을 불사할 코이치의 경우, 지나가는 여자들의 가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자신이 다이미다라 파일럿이 될 때는 같이 동승하는 쿄코를 아주 사납게 가슴을 만진다. 이와 다르게 다른 다이미다라 파일럿인 키리코의 경우, 자신의 동급생 친구인 소마와 같이 동승을 한다. 소마와 키리코는 과격한 코이치와 다르게, 계속 손을 잡고 공공장소에서 키스를 하거나 포옹까지 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민폐를 넘어 짜증이 밀려올 정도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다이미다라의 주인공들에서 대부분 파일럿이 고등학생이란 점이 중요하다.

 

일단 키리코와 소마는 고등학교 3학년 정도 되고, 코이치는 2학년 정도로 보인다. 이에 다르게 쿄코는 키리코가 선배라고 부른 점과 예전에 있던 학교 선생들이 얼굴을 아는 점에서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이다. 쿄코가 어른이고, 코이치는 학생이나 서로 커플로 나오는 장면에서 코이치가 여자 가슴에 대한 정렬적인 집착은 결국 성숙한 여자의 몸을 원하는 것이고, 키리코와 소마는 성숙하기보단 핸드터치 및 서로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사이로 나온다.

 

물론 2가지 다 에로스에 기반하고, 그 에로스는 다이미다라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하이에로입자, 에로입자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에너지 중에서 프로이드가 주장한 id(이드, 무의식)에서 libido(리비도, 무의식적 성적 에너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처음 작품 오프닝에서 넘치는 리비도를 힘으로 바꾸어 라는 말이 결국 리비도가 <건전로봇 다이미디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왜 리비도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펭귄이란 존재다. 펭귄은 일반적으로 남극에 서식하는 날지 못하는 새가 아니라 인간의 몸에 마치 인형 탈을 씌우고, 꼬리가 뒤가 아니라 앞으로 길게 나온 생물이다.

 

펭귄은 인간과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문제없으나, 하이에로입자를 강력하게 주입된 펭귄은 인간으로 변하고, 하이에로입자가 빠진 남자는 펭귄으로 된다. 펭귄은 자신의 부족한 하이에로입자를 구하기 위해 지구로 오고, 인간의 하이에로입자인 리비도를 회수한다. 리비도는 성적인 욕망을 의미하기에 그들이 빨아들인 리비도는 결국 사회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효과가 나타난다. 다이미다라 파일롯이 활약하지 못하던 시기에 펭권들이 야한 콘텐츠를 가지고 가자, 편의점 한 편에 위치한 에로잡지코너가 사라지고, 수상한 가게들도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키리코가 돌아오고, 코이치가 다시 돌아오자 이런 상품코너는 증가하고, 정부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다이미다라 운영기관인 미용실 프린스를 숙청하고자 한다. 이유는 건전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고, 그 건전함은 특히 청소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왠지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의 현실이 왜 이리 비슷한 것일까? 흔히 아청법이라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로 이른바 아동 및 청소년에 성적인 자극을 주는 것을 통제하겠다는 것처럼 인간본연의 생물학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것과 같다.

 

왜 이것이 문제로 떠오르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야한 것을 직접 보지 않아도, 야한 것을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몽정기에서 반드시 AV 내지 포르노를 보지 않아도 사람(남성)은 수면 중에 단순히 꿈에서 무의식적인 상상의 세계에서 상대 이성을 보고 사정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우연히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 중에 야한 것들을 접하게 되면, 각인에 의해 몽정을 할 가능성은 더 높다. 그런다고 그 몽정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란 사실이다.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가려진 성적인 호기심 및 욕망을 막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의 조건에 어울리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왜 펭귄황제는 하이에로입자를 모우는 것인가이다. 바로 원인은 인간이 리비도란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이 리비도라는 에너지는 하이에로입자로 변환하여 자신의 DNA를 닮은 존재를 만들어낸다. 즉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식기능이다. 펭귄황제는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펭귄코만도를 만들어낸다. 펭귄코만도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펭귄황제가 하이에로입자를 에너지로 하여 복제를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펭귄황제는 감정을 그렇게 잘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때에 따라서는 매우 합리적이며 괜찮은 인성을 가진 등장인물이다.

 

그가 말하기로 인간에게 하이에로입자가 없으면 자신과 같은 펭귄이 된다는 점이고, 남성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구사회의 이분법적인 관념에서 남성은 이성적인 존재고, 여성은 감성적인 존재라고 본다면, 펭귄황제는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그에게 부족한 감정적인 존재는 오로지 펭귄코만도로 나온다. 펭귄코만도는 이성적인 판단력으로 활동하기보단 욕망과 충동에 의해 활동한다. 그런 점에서 황제펭귄과 펭귄코만도는 서로 다른 성향을 보인다. 결국 황제펭귄의 유전자를 복제한 펭귄코만도들은 황제처럼 이성적인 판단보단 오히려 재미와 성적인 욕망을 앞세운다.

 

펭귄황제가 그러길 바라는 이유는 바로 펭귄제국의 멸망과 관련해서이다. 인간들이 펭귄처럼 된다는 사실은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 그 사회나 국가를 계속 유지해야할 재생산적인 운동이 계속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재생산의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역시 남녀 간의 결혼에 의해 탄생하는 새로운 생명이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는 남녀 간의 리비도로서 결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문제는 왜 일본정부에서 프린스 미용실을 돕다가 배신을 하는가이다.

 

결론은 국가라는 조직은 국가운영을 위해 출산을 통제하여 필요한 만큼 인구를 유지해야할 목표가 있는 셈이다. 펭귄제국이 처음 나올 때는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야 했고, 이른바 풍속문화를 계속 탈취하기에 사회적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펭귄코만도 활동에서 처음에 야한 행동과 언사를 날렸으나, 그들의 활약이 오히려 그 사회의 야한 행동과 생각들을 모두 가지고 간 셈이다. 하이에로입자 저하는 결국 모든 사람들이 건전해진다는 논리로 가겠지만, 문제는 인간은 결코 무의식적으로 건전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억지로 건전성만 강조하면 인간은 역으로 더 음란해지거나 또는 스트레스나 노이로제로 인해 정신적인 증세가 오기 마련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독일 성심리학자인 빌헬름 라이히에 제기한 의견이 있다. 그는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친분이 깊은 학자로서 그가 남긴 말로는 "성의 억압이 파시즘 낳는다."고 하고, 영국 철학자 겸 수학자인 ​버트란트 러셀은 “가장 음탕한 사회에서 금욕주의가 싹튼다.”고 한다. 성으로 그 사회를 권력으로 억압할 경우, 인간의 본래 펼쳐야 할 정신적인 에너지를 분출하지 못하므로 그것이 역으로 변태적인 요소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건전로봇 다이미다라>에서 다이미다라는 결코 건전한 에너지로 움직이지 않으나, 오히려 그런 음란함이 있기에 그 사회는 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하다시피 코이치는 오로지 여자가슴만 좋아하는 열혈남자이나, 그는 다른 여자보다는 오직 쿄코의 가슴이 최고라고 한다. 펭귄제국의 공격을 받고 죽을 위기에 처할 때, 그는 쿄코를 살리고, 대신 죽기로 결심한다. 이때 코이치는 “좋아했어, 쿄코의 가슴을”이라고 한다. 목숨을 던지면서 쿄코를 구했다는 점은 코이치는 진심으로 쿄코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평행세계에서도 돌아온 것도 역시 쿄코에 대한 마음이다. 에로스라는 것은 단순히 야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힘 즉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문명은 오히려 인간의 본래의 성질을 파괴하고 성장하기에 인간은 그 자연적 성질을 되찾아 회복해야 하나, 도리어 인간은 더 문명적 업적으로서 대체하고, 다시 새로운 파괴와 건설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여 최후에 착취하는 것은 인간 본인이라고 한다. 자연스러운 에로스의 흐름을 파괴하는 것이 결국 인간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적당히 이성적으로 억제하여 통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 통제성은 개인과 개인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나, 오히려 자위대의 출현은 국가의 폭력으로서 성을 통제하려 한다.

 

그 이유는 청소년이 너무 음란하여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거리와 가게 한 편에는 야한 잡지가 돌아다니고, 밤거리는 너무 유혹적이라고 한다. 물론 다 그런 흐름이 좋다는 것은 아니나, 그 모든 것을 억압하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의 윤리 내지 도덕성을 상대방에게 강조하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 일방적인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심어주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시에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어야 말로 폭력을 미학으로 간주하는 파시스트적인 사고방식이다.

 

물론 상대방의 동의 없이 몸을 더듬거나 혹은 성희롱하는 것도 문제다. 코이치의 경우는 처음부터 로봇에 탈 마음이 없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특이체질과 그것을 권유하는 쿄코에 대한 음란함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음란함이 사랑으로 이어진다. 소마와 키리코의 경우 서로 간의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우연한 기회로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아직 미성년자인 그들이 지나친 성적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좋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권리를 무조건적인 박탈은 옳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어른들은 어른이란 이유로 그 권리를 가지고, 밑에 있는 사람에게는 누리지 못한 것이 분명 불평등한 처사다.

 

단지 조건은 여자가 임신할 수 있는 상황까지 가거나, 또는 그렇게 되었다면 그 에로스를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성으로 가야할 것이다. 펭귄황제의 충고는 매우 중요하다. 언젠가 펭귄제국처럼 인간도 변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리비도라는 무의식적 성적욕망과 더불어 리비도가 사랑으로 이어지면 에로스로 변하고,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 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숭고하고 아름답다고 하나, 유럽의 고전주의 시대에는 그만큼 불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으로 살아가야 하나, 오히려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 내지 무의식적인 충동에 의해 현실을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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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

 

Lumière: L'Arrivée d'un train a la gare de ciota

 

1분짜리 필름인데, 시작은 10초가 되면 나온다. 잔잔한 클래식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저 멀리서 레일 위로 열차가 한 대가 다가온다. 그리고 열차는 멈추면서 승객이 내리고, 다른 승객이 올라탄다. 지금 보면 옛날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유럽의 풍경으로 보이겠으나, 당시 프랑스인을 비롯한 많은 관객들이 실제 열차가 자신에게 들이 닥치는 것으로 착각했다.

 

이른바 가상의 세계가 현실의 인간을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이다. 화질도 흑백인 점에서 분명 당시 사람들은 이 필름에서 흑백이겠지만, 본래의 존재성에서 컬러를 인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화관은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1950~60년대 흑백 TV가 보급될 쯤, 드라마에 나온 인물을 보고 많은 시청자들이 말을 걸었다고 한다.

 

실제하지 않은 존재, 혹은 파생실재라는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만이 아닐 터이다. 하지만 지금과 당시의 차이점은 당시로는 가상적 존재가 물리적인 영역까지 넘어온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물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가상과 현실 자체가 뒤죽박죽이 되어 극현실적인 Hyper-reality로 되어버렸다.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에서 보듯이 1분이란 시간동안 우리가 볼 수 것에서 그 어떤 연출이나 편집은 없다. 시퀀스는 연속으로 이어지는 롱 테이크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연기자들의 연기력과 카메라 감독의 촬영기술 그리고 녹음, 소품, 미술 담당 등의 호흡이 맞춰지지 않으면 롱 테이크이란 시퀀스를 소화해내기 어렵다.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는 단지 들어오는 기차를 보고 찍었기 때문에 미쟝센적으로 그저 철로 역에 서서 고정된 기차역의 풍경만 찍은 것이기에 큰 구경거리는 없다.

 

그러나 지금과 달리 상황은 어떨까? 그때 사람들이 촌스럽다고 말하지 마라. 우리는 아예 가상으로 이어진 존재에 대해 - 그것이 파생실재에 의한 연예인이든지 애니메이션으로 의한 캐릭터이든지 - 마치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소중하게 다루고 있지 않은가? 연예인이든 캐릭터이든 존재성에서 그 자체로서의 존재할 수 없다. 연예인들은 내가 영상으로 본 1초와 지금 상황의 1초가 다른 존재고,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시간적 초단위는 무의미하기에 다들 그 존재성으로 존재할 수도 혹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있는 영상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이미지라는 관념세계로 통한 자기 의식 합리화이지, 물리적 존재는 변화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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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16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인문학'이란 책 어떻습니까. 읽은만합니까 ? 워낙 비슷비슷한 내용의 책을 진중권이 많이 써서 겹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만화애니비평 2014-06-16 21:02   좋아요 0 | URL
비슷비슷한 내용이 많으나, 이번에는 조금 어렵고 색다른 내용이 많네용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세계에서 과연 몇 위나 될까? 예전에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강의하시는 한창완 교수의 <애니메이션 경제학>이란 도서를 보았다. 이 책이 나온 시기가 2004년 정도였고, 2003년까지의 데이터를 토대로 만들어진 도서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경제학인 만큼 책의 내용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과 더불어 경제학적인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왜 한국의 애니메이션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2004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2014년에 오면서 세계 애니메이션시장 규모가 달라졌지만, 당시 한국의 세계에서 차지하는 애니메이션 시장규모는 3위였다.

 

3위라는 규모를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하다. 왜 3위인데 이렇게 힘든 것일까? 애니메이션영화 <고스트메신저>를 극장에서 보기 전부터 나는 이 생각으로부터 버릴 수가 없었다. 우선 <고스트메신저>가 예전에 OVA로 출매 되었을 때 나는 DVD-CD를 구매하여 감상하였다. 감상하면서 느낀 점은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유아 내지 아동용이었고, 그 외는 인디애니메이션 내지 블랙코미디라는 성인용으로 제작되는 흐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토리텔링으로 보아도 너무 뻔해 보이는 설정 내지 혹은 현실에 대한 강한 염세적인 비판이 녹아 들어간 것이다.

 

물론 후자에 대해서는 좋은 작품이 많았다. 예술이란 것은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에서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인용한 것처럼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라 하여 보기가 거북한 그로테스크를 연출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들 이상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에는 성적인 요소보단 폭력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 폭력성에는 이른바 현실적으로 도저히 쾌감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추의 미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추의 미학에서 보일 수 있는 미적인 영역이란 우리가 볼 수 없거나 보지 않으려한 것에 대한 성찰이다.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란 헤겔이 말한 변증법인 부정과 부정에 대해 결국 틀어진 것에 다시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는 것, 즉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안이란 딱히 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만든 자나 보는 자나 다 같이 생각하고 찾아가야 할 또 다른 방향이다. 우리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바로 부정의 부정이 긍정으로 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부정으로 가고 있었다. 지난 1970년대 만화분서갱유부터 시작하여 2000년대 애니메이션 시장의 몰각에서 시장경제는 좋아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런 어둠의 시기에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큰 도전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인 만큼 우리 주변은 대부분 일본 만화애니메이션과 혹은 미국 애니메이션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시장규모는 누구의 문제일까? 독자의 선택권이란 결국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고, 그 물건을 구매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사회적 구조와 여건이다. 사실 작품에 대한 리뷰를 하면서 한국애니메이션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담론을 꺼내는 것이 엉뚱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과정적인 현상에 대해 논하려면 결국 왜 이렇게 되었는지가 현재를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고스트메신저>를 OVA로 보고 난 뒤 극장에서 보면서 매우 놀란 것이 있다. 처음 바리낭자가 나오면서 그녀가 손에 잡고 있던 신문이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신문은 다른 신문도 아닌 바로 한겨례신문이었던 것이다. 한겨례신문은 한국 언론문화에서 진보성향이 강한 신문사이다. 굳이 신문사의 이름을 표기할 필요가 없고, 하다못해 다른 신문사를 만들어 이름을 내세우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겨례라는 검정글씨가 녹색 사각형 안에 명확히 새겨진 것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의 의도? 아니면 감독의 지시? 분명히 편집과정에서 그것을 놓칠 리가 없을 터이다. 한국에서 만화라는 여전히 탄압을 받고, 철저히 검열을 받았던 매체다. 최근에 발매된 만화비평지 <엇지>에서도 다루고,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에서 나온 <만화비평>에서도 그런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만화문화에 대한 비평과 성찰에서 한국 애니메이션문화가 같이 엮이는 것은 당연하다. <고스트메신저>를 보면서도 이런 상황을 열외로 둘 수가 없다. <고스트메신저>에 대해 내가 내놓는 평이 나오는 이유도 다 이런 연유에서 발생된 하나의 과정이다.

 

애니메이션이란 것은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어야 만들어지는 하나의 노동집약적 산물이다. 한국에 대다수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들은 자국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아니라 OEM 방식으로 일본에서 외주를 받아 작화하는 것이다. 가끔 일본 애니메이션 엔딩 자막을 보면 한국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하청으로서 활발한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스트메신저의 엔딩장면에서 일본 TVA에서 나오는 제작팀과 비교가 가능할 정도의 인원이고,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인원과 작업규모는 비교조차 힘들다.

 

한국의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인력이 있어도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이 없고, 제작해도 자본의 융통성에 대해 지지해줄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시장규모가 조성되지 않은 점이다. 작품을 보면서 제일 아쉬운 부분은 더빙과 스토리 전개에서의 부드러운 흐름이었다. 대사와 입 모양이 거의 일치하지 못했다는 점은 기본적인 설정방향이 많이 아쉬웠다. 작화에서 입모양을 못 맞출 리가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전투하는 모습은 참 잘 짜진 플롯이었기 때문이다.

 

사라도령의 권총과 강림도령의 칼을 들고 서로 다투는 모습은 영화 <이퀄리브리엄>에서 보여주는 전투장면이 생각날 정도다. 정확하게 상대를 향하여 타격하나, 그것을 피하고 연속적인 격투의 장면은 정말 작화가 깨끗하게 잘 되었다. 2D와 3D 영상, 셀 영상과 컴퓨터 그래픽 영상을 적절히 조화했을 것이다. 그런 전투 장면에 대한 강력한 스펙타클화는 성공했으나 정작 스토리 진행에서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맺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이다. 장점이 분명히 많고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무리 보아도 좋은 인상으로만 남기기 어렵다.

 

애니메이션 역시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갖춘 서사라는 점이다. 서사에 대하여 음악과 영상이란 멀티플레이가 조합되어야 좋은 미디어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스트메신저>가 아까운 이유는 이야기 흐름만 잘 조절했으면, 정말 재미있을 작품이란 점이다. 플롯의 구조에서 복선이 되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 점과 기존 한국에서 한국 전통문화에 대해 이야기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을 제대로 살리려 했던 것이다. 현대사회가 21세기 정보화시대라는 점을 이용하여 저승사자의 무기가 핸드폰이란 것이고, 영들을 봉인당할 때 디지털 화면을 상징하는 사각박스처럼 변하는 것이다.

 

저승사자가 소환한 것들을 보면 조선시대의 양반의 모습을 한 로봇이 나와 악령을 끌어당기는 모습은 <고스트메신저>에서의 백미라고 볼 수 있다. 유령이 디지털화 되어 잡을 수 있다는 발상은 쉽지 않을 터이다. 영화 <고스트버스터>에서 유령을 잡는 기계라도 그것은 아날로그적인 방법이면 <고스트메신저>는 디지털의 방법이다. 한국인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세계의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추어질까? 한국 역시 서구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침투하면서 동양의 고전적인 문화가 그대로 유지될 리가 없다. 그런다고 한국인이란 정체성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외국에 가면 한국인에 대해 Do you from Japan(or china?)라는 말을 얼마 전까지 계속 들어야 했다.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방향을 애니메이션에 담아 그것도 세련한 디지털 문화로 복합적인 영상을 보여준 것은 정말 좋은 방향이다. 등장인물의 무기에서 바리낭자의 핸드폰은 부채처럼 되고, 마고는 곰방대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 곰방대는 단순히 무기기능만이 아니라 암호를 모두 해제하는 해킹도구로 나오는 것도 역시 좋은 소재다. 등장인물에서 바리낭자는 저승과 이승을 주관하는 신이고, 마고는 한국의 땅을 만들어낸 여신 중에 하나로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에서 인간과 신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던 자가 인간으로서 살지 못한 채 저승으로 가게 되어 신이 된 점은 한국의 전통문화사상에 매우 부합된다. 애니메이션이란 Anima라고 불리는 영혼에서 시작된 용어다. Animate 혼이 없는 대상에 혼을 넣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존재성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에게 무한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동경심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무한성은 그 자체로 생명이 없다. 유한한 존재에 의해 연속되어 갈 뿐이다. 신화라는 존재가 결국 인간의 유한성의 연속성에 태어난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다. <고스트메신저> 첫 번째 극장판은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하나의 끝은 하나이란 의식이 강림이란 소년으로 통해 보여주었다. 그는 인간이 들여서 안 될 공간을 계속 들어가려고 한다.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은 욕망, 그 욕망이 실현될 수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의 세계인 저승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인간이 죽으면 저승에 가서 삼도천이란 곳을 밟게 된다. 과거 인간이던 시절에 시간적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마 죽을 위험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종종 주마등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강림소년이 강림도령과 만남에서 실제 한국 신화에서도 강림도령은 정상적인 죽음에 의해 저승사자로 발탁된 게 아니라 사고에 의해 죽게 되어 저승사자가 되었다. 강림소년, 꼬마 강림의 경우에도 삼도천을 지나는 모습은 죽지 말아야 할 자가 죽게 되면서 그의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강림은 그런 선택을 해야 할까? <고스트메신저>에서는 단절된 가족에 대한 보상심리 내지 피해의식이 나온다. 꼬마 강림이 학교 내에서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과 필요 이상으로 할아버지에 대하 보호의식, 그리고 죽은 어머니에 대한 악몽은 끊임없이 꼬마 강림을 궁지로 몰아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 사회라는 공간은 학교와 직장 같은 하나의 커뮤니티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이 처음 시작하는 사회는 곧 가족이 존재하는 가정이다. 가정의 해체는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큰 문제점을 안겨준다. 심각한 우울증 내지 과민반응 또는 무관심이다. 꼬마 강림이 선택은 그가 정상인이 아니라 비정상의 영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사의 시작에서 등장인물은 모두 비정상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비정상이어야 정상으로 가야 하는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꼬마 강림과 비밀이 있는 저승사자의 강림도령의 만남은 비정상인 두 인물로 통해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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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슬롭스키(Kieslowski)의 세 가지의 색은 아주 유명한 영화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색이란  '자유·평등·박애'를 의미하는 블루, 화이트. 레드의 의미다. 프랑스 국기를 보면 삼색기가 같은 면적을 가지고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프랑스의 상징이면서도 프랑스의 가치이기도 하다. 물론 프랑스 모두가 저런 자유주의, 평등사상, 박애정신으로 무장한 것은 아니나, 17897월 프랑스대혁명이 삼색기로부터 1830, 1848, 1871년에도 프랑스의 삼색기의 정신은 유효하다. 아니라면 19685월 프랑스 혁명 그렇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프랑스인이 생각하는 삼색기의 정신처럼 키에슬롭스키(Kieslowski)의 세 가지의 색에서도 저런 정신이 나온다. 그러나 단순히 형식주의 내지 상징적인 요소로서 보여주는 것보다는 어느 인간들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매우 특별하다고 볼 수 없으며, 단지 조금 다른 누군보다 특별한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블루에서 주인공 줄리는 어느날 남편과 딸하고 같이 도로를 달리는 도중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그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줄리 한 사람이었다. 줄리는 자신의 가족이 죽은 것도 모자라 그녀의 남편에게 다른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 정부는 남편의 아이마저도 임신하였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이 사라지고, 그 가족과 함께 나눈 추억마저 배신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줄리는 아무 곳에도 갈 곳이 없는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살던 집을 정리하고, 조용히 혼자 살려던 줄리에게 어느 순간 세상과 단절감을 느끼게 되면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자유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 자유는 혼자만의 자유이지, 그 자유 안에서 고독과 방랑이라는 이름까지 얻는다.

 

인간의 자유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나, 태어나면서사회가 있기에 그 사회에 의해 구속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줄리를 보면 루소의 자연주의적 사상에 따라 그녀는 인간 원초적인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혼자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자유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독신생활은 오히려 슬프고 외로우며 때로는 낯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 보면 어느 푸른 수영장에 혼자 빠지는 줄리를 보거나 혹은 혼자 넓은 집에 푸른색 상들리에 조명을 받는 그녀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푸른 색으로 물든 수영장에 혼자 빠지는 줄리의 모습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처럼 보이나 그것으로 통해 진실한 자유는 볼 수 없었다. 어두운 밤에 방에서 푸른 상들리애 조명이 비추지만 그것 역시 자유보다는 고립에 가까워 보였다. 블루라는 하늘색은 바다와 같고 하늘과 같은 색이다.

 

바다와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인간은 그저 자연 속에 하나이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위대하다. 하지만 바다와 하늘은 우리 인간 모두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므로 모두 인간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 혼자라는 것은 누군가 이익을 서로 협조하는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대하여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인간관계가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것이다. 아무리 줄리가 모든 것을 체념해도 그녀는 외로움과 허무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줄리가 느낀 세상에 대한 무관심, 그것은 분명히 자유이다. 때로는 그런 자유가 남에게 이타적인 가치로 돌아온다. 작품에서 시골이 아니라 도심지 작은 아파트에 살 때 아파트 주민들이 어느 서명서를 줄리에게 건넨다. 아파트 한 가구에 어느 젊은 여성이 사는데, 그녀는 온전한 직업이 아니라 성인클럽의 쇼걸이란 이유이기 때문이다. 줄리가 그녀의 퇴거를 원하면 그녀는 집에서 내쫓겨 갈 곳이 없어지게 되나, 줄리는 세상과의 단절로 인해 그녀가 무슨 직업을 가지든 말든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다며, 서명을 거부한다. 나중에 그 젊은 여자가 찾아와 줄리와 같이 자신이 일하는 가게에서 대화를 하고, 그 여자는 줄리에게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한다.

 

그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이 여기서 일하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에는 별로 슬프지 않지만,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앞에서 나체로 춤을 추고 있을 대 그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얼굴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자유의지가 있고, 직업의 선택과 유지에서 천하든 귀하든 그 선택자의 자유고 책임이다. 그러나 정작 그것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냉소는 너무 슬픈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줄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자신과 자신의 남편의 친구가 사실 줄리를 좋아하던 것이다.

 

그는 계속 줄리에게 구원했고, 작곡가인 남편의 악보를 가지고 와서 다시 작업을 하여 줄리와 같이 완성시킨다. 남편의 기억과 추억 그리고 모든 흔적을 지우려던 줄리, 세상과의 단절과 체념을 원한 그녀에게 그의 등장은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다. 본 작품은 19세 미만이라 다소 성적묘사(그런다고 노출이 드러나지 않는다)가 나오는데, 줄리와 그가 죽은 남편의 악보작업을 마치고 침대에서 서로 사랑을 나눌 때, 그녀는 이때까지 느끼지 못한 인생의 행복함을 느낀다. 어찌보면 자유라는 것은 혼자만이 고립되어 타인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같이 즐거움과 슬픔을 나누어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자유라는 것은 단지 그 상태가 독단적이어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와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프랑스대혁명의 영웅이면서 공포정치를 펼친 로베스피에르는 파리의 시민에게 연설하기를 자유라는 것은 혼자만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를 주어야 비로소 자신도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에 누군가 의지하고 서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사회계약적인 요건에 따라 구속당할 수 있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구속과 억압이 시작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회계약론>으로서 인간의 자유를 서로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 정치제를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에 대한 포용력은 어디까지 있을까? 줄리는 남편의 정부에게 찾아갔을 때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사랑하던 딸은 그 자리에서 죽었는데, 남편이 바람핀 여자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사실이다. 남편의 정부는 줄리에게 매우 미안하다고 하나, 자신의 뱃속에 아이에 대해 줄리에게 자비를 구하려 한다. 자유의 포용력에서 아무리 남편이 바람피우고, 그 남편에게 사과와 해명조차 듣지 못했지만, 새로 자라나는 어린 생명에겐 아무 죄가 없다. 그런 생명조차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 부정하게 태어나더라도 생명자체는 천부인권을 보장받을 자유, 그것이 블루에서 말할 수 있는 주제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물론 기본적인 자유는 고립만이 아니라 서로 간의 교감이란 사실은 중요하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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