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가산점에 대한 부분에서 조금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이란 나라는 왜 서로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가라는 점이다. 결국 그것은 본질을 보지 않고, 본질이란 뒤를 가리고 있는 장막을 열심히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군가산점에 대해 찬성하고 또 지지한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를 넘어 인권과 관련된 것이다. 진보적인 성향은 인간의 권리를 추구하고, 보수적인 성향은 기존의 체계를 지지한다. 그렇다면 군인에 대해 어떻게 보는 것일까? 나 같은 경우 군복무 생활을 좋은 환경에서 한 편이다. 공군을 나와 도시의 비행장에서 하사로 전역한 사람이다.

 

일반 사병과 달리 급여도 받고, 사회생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반 사병에 대한 인권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근무한 부대에서 구타 및 가혹행위가 있었고, 물론 이에 대한 처벌도 있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육군 총기사건이나 자살사건이 그렇게 일어나지 않았고, 대부분 대학교 휴학생이 온 곳이라 병사들은 사회적인 결여성이란 거의 없었다. 조금 튀거나 특이한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그렇게 전역하고 사회로 나갔고, 예비군 훈련에서도 만날 때도 있었다. 공군이었기에 나름 편한 군복무 생활이라 해도 그래도 군대는 군대다.

 

군대에 복무하는 청년들은 대부분 20대 남자들이고, 그들은 집과 떨어져 2년 내외를 군대에서 복무한다. 하지만 그들이 복무하는 동안 잃는 것은 그들의 시간이 아니다. 시간은 어느 병사 1명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친구, 주변사람들의 시간도 공유한다. 특히 방송에서 보이는 군의문사는 개인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 가족의 죽음까지 연결된다. 수많은 군인들이 매해 죽어나가고, 게다가 의문사로 죽은 군인들은 명예조차 회복하지 못한 채 가족들의 가슴을 울린다.

 

그렇다면 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수, 그런 군인에 대해 다른 식으로 보는 진보, 여기서 나는 진보적 성향이나 진보의 착각과 진보가 아닌 진보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우선 한국에 가장 심각한 부류가 페미니즘이 아닌 페미니스트들이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에 대해 논하고 추구하는 점에 대해 옳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타인의 권리를 빼앗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은 문제다. 왜냐하면 대부분 군대를 가는 부류는 대다수의 한국의 남자고, 그들은 대부분 평범한 집안의 사람이다. 한국의 사회가 일부를 제외하면 경제상황이 그렇게 좋지 못한 점을 고려하면 군대 가는 남자의 반 이상은 대한민국 경제사정에서 50% 이하가 가고, 특히 특권층이나 재벌의 면제가 눈에 띄게 높은 점을 고려한다면 힘도 없고, 인맥도 없는 남자가 대부분 가는 곳이 군대다.

 

따라서 군대 가는 남자를 두고 그들에 대한 혜택을 빼앗는 행위가 과연 인권과 여성의 권리에 도움이 되는가? 군에서 의문사가 아니더라도 병사가 죽거나 다치면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그 군인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여성이 아닌가? 여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런 여성에 대한 고려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군인 중에 사병이 한국에서 대략 40~50만 명이라면 그들의 어머니도 대략 40~50만 명 사이 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인권은 무엇인가? 어리석고도 한심한 페미니즘은 다른 페미니스트들까지도 욕먹게 만든다.

 

그들은 타인, 그리고 특히 약자에 대한 보편적 인권의식이 없고, 단지 자신들 엘리트적인 여성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투쟁으로 이어간다. 그들의 투쟁이 결국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익이 여성의 인권증진으로 생각한다. 한국에 비정규직에서 기혼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하고, 그들은 식당아주머니나 우유나 요구르트 배달, 하다못해 공장에서도 일하는 부류가 수 백 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4천원인생>에서 그런 아주머니들이 전국적으로 포진하여 있다면 페미니스트들이라면 그런 아주머니에 대한 인권은 생각하지 않은가?

 

자신의 이익이 결국 여성인권 신장이라 생각하는 멍청한 인간들에게 한국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인구가 감소한 점에서 위기의 순간이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아이를 가지면 이 경제적 상황에서 도저히 아이를 기르기가 힘들고, 설사 기른다고 이 비참한 환경에서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하냐고 말하는 부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이기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4천원인생>에 나온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식들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그녀들이 힘내는 이유는 아이들이 있고, 그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집안 여건문제로 역시 경제활동이 원활하지 못하다. 비정규직의 굴레와 더불어 각종 어려운 환경에서 그들은 결혼을 포기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만약 결혼하면 집은 어떻게 하고,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며, 이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일까?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그저 나라에 아이가 없어서 출산을 해야 한다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구호는 코미디가 따로 없다. 하나 낳으면 몇 십만을 준다 해서 그 돈으로 과연 충당이 얼마나 되는 것인가?

 

물론 있으면 좋겠지만, 그 조건으로 성립불가다. 여성인권을 운운하는 입장하는 사람이고, 그들이 관료조직이나 고위직 내지 전문직으로 가면 물론 한국의 앞날을 걱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타파하는 방안이란 무엇인가? 남자들의 군가산점 문제는 이런 것과 많이 맞물려 있다. 조금 너무 앞서 나갈 수 있는 사고일지 모르나, 한국에서 대부분 남자들은 여성보다 높은 임금과 위치가 되어야지 여성과 결혼할 확률이 높다. 즉 여성이 자신보다 낮은 남성과 결혼할 확률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없다는 게 아니라 확률적으로 낮고 그 상황은 현실에서 당연한 세론이란 점이다.

 

남성이 취업하지 못하거나 비정규직이거나 임금이 적다면 그들은 결혼할 수 있는가? 여성들도 원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남성 스스로가 그런 자기에 대한 무기력에 의해 의지를 상실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군대라는 곳에서 돈도 얼마 받지 못하고, 가족과 떨어져서 고생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아무런 보상이 없다. 군대 가는 남자에 대해 성범죄예비자로 보면서 정작 그들이 놓인 인권의 벽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각을 다르게 해야 한다. 군대 가는 남성보단 그들은 그저 힘도 없고 인맥도 없는 서민의 자식이고, 서민 중에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100%까지는 아니나 기본적으로 대다수가 대한민국 남자와 결혼할 것이다. 그런데 결혼해야 할 남자들의 조건이 점점 하락하여 원하는 대상을 찾지 못한다면 과연 이것은 누구와 누구에 대한 손실인가? 물론 현실적으로 전문직을 제외하면 여성의 위치가 불리한 것은 맞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야 하는 점은 대한민국에서 불리한 사람들은 힘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저 그런 서민들이다. 서로 서민이면서 싸우는 모습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처럼 흘러가나, 그 투쟁은 의미 없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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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우 2015-09-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희생을 외면하고 강제성속의 희생의 의미를 인정하려들지 않는 이들이 바로 변질페미니즘 즉 여성이기주의론자들인 거죠.기본적으로 받아야할 권리가 제대군인가산점인 것이구요.

만화애니비평 2015-09-26 11:11   좋아요 0 | URL
국가를 위해 봉사(폭력적인 강제성)하는 사람을 천대하니..어휴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를 지배하여 강탈하고 치욕을 주던 시기, 일본에도 다양한 인간들이 존재했다.대부분은 흔히 말하여 군국주의정신 "천황폐하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신들의 우월감에 젖은 인간들이 넘치는 반면, 그러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제2차 세계대전에 강제차출 되면 일본군 내에서 많은 말썽이 있었는데, 일본인은 1등 황국신민이고, 우리는 2등 황국신민이란 딱지에 불평등한 조치가 내려졌다. 물론 다카오 마사오군과 같은 아주 훌륭한 대일본제국의 장교들은 언제나 천황폐하를 위해서라면 초개처럼 부하들의 목숨을 버릴 각오는 되어 있지만, 막상 초개처럼 버려질 운명의 조선인들은 군 내부에서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내부에서 탈영하여 독립군이나 광복군, 혹은 연합군 진영으로 넘어가 반대로 그들의 군사조직에 편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물론 일어와 한국어가 되는 점과 더불어 외국어까지 되는 사람이 있다면 일본군을 상대하는 작전에서 매우 유익한 방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선인들의 탈영 내지 불성실한 자세만으로 일본군 내의 골치만이 아니었다. 일본군 내에서도 일본인 역시 골치가 아픈 자들이 있었다. 일본인 내에 마르크스주의자 내지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의 총구가 적의 진영이 아니라 적의 진영으로 달려가는 일본군에게 향한 채 발포한 경우도 있었고, 무기를 정리하여 일본군이 퇴각할 대 그 무기가 그대로 상대진영에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인인데도 한국 독립군과 같이 연대한 부류도 있고, 한국 아나키스트와 결혼한 일본인 여자도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박렬 열사의 아내는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라는 여자다. 그녀는 일본에 대한 반정부세력으로 낙인찍혀 사형을 당해고, 그녀의 무덤은 한국의 박렬 열사와 같이 모셔져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무조건적으로 일본인에 대한 적대의식은 가지는 것은 바르지 못하며, 오히려 일본인 중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광복,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원한 자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에 대해 직접적인 원조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제국주의 활동에 크게 반대하는 인물 중에 코바야시 다키지란 인물이 있었다. 그의 유명한 소설로 <게공선>라는 작품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노동문학에서 일본의 대표적 작품이다. 게공선은 공장도 아니고, 배도 아니다. 배라면 분명 어선 관련 법을 적용하고, 공장이라면 공장법을 적용받아야 하나, 그 두 가지가 아니므로 이들은 갖은 착취와 억압,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힘든 생활을 한다.


인간이 가혹한 환경에서 노동착취를 당하면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해지며, 육체적으로 파멸한다. 총을 들고 있는 감독대행이란 자는 심심하면 위협하고 같은 인간인대도 불구하고 악랄한 행동만 골라서 한다. 게공선은 실제 있었던 일들을 토대로 만들었으며, 아주 잔혹한 사실은 배가 침몰되어도 배 안의 선원노동자는 아무런 위로와 배상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배가 침몰하여 보험금을 선주가 타는 것이다. 배는 오래 되어 고장이 잦으며, 상태가 좋지 않아 늘 수리가 필요하다.


배가 가라앉기 전까지 노동자들이 고생하고, 배가 가라앉으면 노동자는 죽는다. 그들의 고생과 죽음은 다시 선주의 주머니의 화폐로 이어진다. 그런 모습을 보며, 사조산업의 선원들이 처해진 광경은 왠지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과 유사하게 보였다. 정말 배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하루에 8시간이 아니라 그 배를 일하는 경우도 많고, 안전장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부상을 쉽게 당하며, 조선소에서 용접공들은 사고사로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배라는 공간은 육지에서 멀어져 있어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들의 거칠고 나쁜 환경은 인간들의 마음을 황폐화 시킨다. 선원이 마도로스라는 이름으로 낭만적인 이름을 르넹상스 이후 유럽에서 달고 다닐 수 있겠지만, 목숨을 담보로 하고, 죽어도 시체조차 가져갈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저 죽을 때까지 일하거나 죽지 않아 하선한다면 가난에 의해 여생이 힘든 경우가 많다. 배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함에 의해 탄다. 가난이 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세상은 그들은 죄인처럼 만들어준다. 배를 타는 사람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처우와 현실을 개선하고, 그들에 대한 보장을 약속하지 않는다면, 외국사람들이 들어오게 된다. 외국사람 역시 한국사람처럼 인간이다. 그들이 피부와 머리카락 색이 다르다고 하여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존엄성을 받지 마라는 것을 우린 주장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배타적인 인간상으로 그들은 배척하고, 그들을 업신여긴다. 과거 미국이나 유럽에 일하러 가면 우리 역시 부당한 억압과 차별에 시달렸다. 왜 인간은 기본적인 중요한 점은 망각하는가?


더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저런 배를 타는 것은 남자다. 나이를 보니 40~50대 사이가 집중적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집안의 가장이며, 집에는 아내와 자녀들이 있다. 그들이 죽어 보상금이 나오더라도 생계수단이 막막해지는 것이고, 남편과 아버지 없는 설움은 그대로 이어간다. 죽는 자가 나오면 죽은자보다 더 불쌍한게 그들의 가족이다. 


아직 세월호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 억지로 찢어진 상처에 바느질을 하여 오히려 상처를 감추려다 더 심각해지는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번 사조산업 선박사고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전불감증만이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없고, 그저 이익만 추구하거나 또는 대다수 국민들은 자기가 안 당하니 상관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타는 사람은 배를 타고 싶어 타는 것보단 탈 수밖에 없기에 타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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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3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12-03 14:24   좋아요 0 | URL
게공선 제법 유명하더군요. 좋은 책이니 추천드립니다.
 

<사이코 패스> 1기에서 분명 코가미 신야가 정신분석자 겸 범죄심리학자인 사이가 죠지의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 코가미 신야는 가상의 마키시마 쇼코를 자신의 내면으로서 대화를 나눈다. 

그의 대화에서 자아를 가진 코가미 신야와 자신의 가상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마키시마 쇼코에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변증법적인 논리로서 대화를 이어간다.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부터 시작한 파놉티콘, 사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고, 흔히 겪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이해하기란 어렵다.


 

인간은 평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대부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인간은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에서 어느 일정 틀을 부족하면 사회적 비적응자로 판단하고, 그 이상으로 되면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취급한다. 인간의 능력이 과소하면 문제지만, 그 이상으로 되는 경우 배타적인 대상으로 된다. 인간의 재능이 때로는 남들에게 차별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경우가 있으며, 그런 점에서 니체는 평범한 인간들의 도덕의 정의를 지루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토크빌이 주장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쉬운 정치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보편적인 인간은 과연 판단력의 한계성이 어디까지인가? 분명 밝힐 점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언급한 의지에 대한 설명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여 모은 의지를 일반의지라고 한다. 이에 반해 개인적인 이익을 대중들이 하나의 연결성으로 이어질 경우 바로 그것은 전체의지다. 그래서 일반의지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체제도의 목적이나, 대부분 민주주의는 일반의지보단 전체의지에 의존하고, 그런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난해한 경제적 이익이란 점이다.

 

자유에 대한 정의와 철학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자유라는 것은 정치, 사상, 철학 등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 가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나, 사실 대부분 신자유주의국가에서는 자유주의라는 것은 인간의 판단력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판단력을 크게 좌우할 이익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결국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 누군가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가는가? 라는 것이 제일 중요한 관심사항이다. 가령 한국경제가 어렵다고 하여, 물가가 상승하여 서민경제는 어렵고, 임금을 제대로 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내지 부동산의 거품은 계속 올라간다.

 

계속되는 부동산의 투기열풍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중되고, 그 토지 내지 건물에 임대받는 자들은 부동산 거래가격 상승에 따라 지대나 임대료가 올라가고, 그에 따라 다시 상품이나 인건비 모두 상승한다. 이런 연쇄적인 반응에서 본다면 제레미 벤담이 말하는 공리주의 이상은 현대의 자유주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벤담이 영국인이란 점에서 영국의 마지막 고전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로 넘어가면서 그는 벤담의 공리주의와 다른 길을 찾아간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모든 utility 즉 공공성을 가질 이익을 공평하게 분할하는 것이고, 존 스튜어트 밀은 상대방의 차이에 주안점을 두었다. 양적인 공리주의와 질적인 공리주의란 바로 여기서부터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사실 전자의 경우 다소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같은 조건을 주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조건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차이점을 인정함으로서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불평등은 없다는 것에 의해 불평등이 심각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지, 누구에 대해 그 공정함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사이코 패스>에서 지적하는 바로 이런 공리주의 이상이 시빌라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려고 하나, 문제는 시발라 시스템은 인간이 가진 잠재적인 요소를 하나의 데이터 통계로 나타내 그들을 계속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잠재범죄자로 격리할 것인지, 더 나아가 처벌로 통해 사회에서 사라지게 할 것인지를 판단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서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결국 시스템에 의해 관계를 맺어지게 되는 점이고, 인간의 관계성이 서로 외면되는 순간, 인간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시빌라의 의지로서 의존하게 되고, 자신의 판단력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는 의지가 아니라 시빌라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선택하는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시빌라의 침식아래 인간의 선택점은 계속 수동적인 인간으로 되게금 하고,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가 아니라 만들어진 세계인 즉 스펙타클에 의해 모든 것을 움직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왜 파놉티콘이 중요한가? 파놉티콘은 거대한 원형탑에서 소수의 감시자가 360도로 모든 사람을 감시할 수 있다. 단지 조금 다른 점은 감시당하는 자는 자신이 현재 감시자로부터 통제받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파놉티콘의 시스템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감시당하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감시의 체제가 하나의 편리함으로 대체된다.

 

<사이코 패스>2기 8화에서 카무에 대한 추적에서 조금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시빌라 시스템이 파놉티콘 시스템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점이고, 파놉티콘은 경제와 교통을 통제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18세기 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계급은 이미 상승하고 있었고, 프랑스대혁명부터 시작하여 19세기 혁명의 시대는 왕정시대에서 의회민주주의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1차 및 2차 대전으로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존재는 계몽으로서 자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계몽에서 멀어진 존재로 보았다.

 

근대 이후 탈산업 시대에 도래에 따라 인간은 점점 물질적 문명에 길들여져 가는 것에서 자신들의 삶을 감시와 처벌로서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경제와 교통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는 2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적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 인간이다. 교통이란 것은 물리적으로 인간이 직접적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개인이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목적지를 알고, 실시간으로 그가 어디에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완벽한 감시가 되는 점이다. 또한 경제라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이 생산하여 소비할 수 없다.

 

자신이 생산하여 소비하는 시대는 위에서 언급한 18세기로 끝이 났다. 농경산업시대에는 자신이 곡물을 생산하고, 가축을 사육하여 가족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유럽에서는 페스트나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노동인구의 감소 및 농경지의 황폐화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시장구조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래도 역시 중상주의 이전에 중농주의이란 점이고, 농업이 중심이 되는 것은 결국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자녀들을 계속 출산해야 하는 점이고, 그런 방식으로 재생산이 가능한 사회구조였다.

 

하지만 19세기 자본주의 시장구조가 발달되고, 20세기에 기계의 발달로 대부분 산업구조는 1차인 농업에서 2차인 공업, 더 나아가 3차인 서비스로 변경되었다. 결국 자신이 생산한 식량과 재화로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생산품에 의해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코 패스>에서 그 사회의 토대가 되는 식량을 생각하자. 인간이 없는 무인시스템이 자동으로 곡식을 키우고, 그 곡식이 사회의 운영에서 토대가 된다. 제 아무리 3차 서비스 산업이 90% 넘더라도 기본적으로 식량산업이 운영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고, 그 식량을 가공할 수 있는 2차 산업이 중간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역시 그 사회는 버틸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1차와 2차 산업에 대한 점유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함에 따라 경제적인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 생계의 유지는 곧 소비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소비는 결국 경제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경제활동이 사회생활이 되는 것이고, 경제의 흐름에서 소비자가 무엇을 사고, 무엇을 파는지 확인함으로서 그의 식생활과 취미, 생활패턴까지 읽을 수 있다. 감시라는 것이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감시가 더 이상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그런 사회적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더 불편한 일이 되는 것이다. 왜 시모츠키 미카는 츠네모리 아카네를 의심하고, 그녀와 관련된 것을 찾으면서 시빌라 시스템이 꾸미고 있는 하나의 계획에 다가가게 된다.

 

그것은 분명히 카무이와 관련된 어떤 상관지점이 있고, 또한 그것은 정치적인 권력으로 통해 어떤 이익을 노린 것이다. 그 이익이란 바로 법 위에 군림하는 자 Nomos라는 점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이유가 바로 법이란 제도적인 체계가 있어서이다. 하지만 법이란 것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인간의 활동에 의해 비로소 그 체계가 반영되는 것이다. 법 위에 군림하는 자는 우리 일상생활에 쉽게 볼 수 있다. 길거리만 지나가도 보이는 경찰, 관공서의 공무원,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헌법을 비롯한 다양한 법에 의해 활동하나, 그들이 법의 규정에 따라 움직이기 위해서는 법 위에 군림해야 하는 셈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모든 인간들의 생활을 윤택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 사회, 공안, 보건 행정이 복잡하게 섞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권력의 연속화, 즉 인간이던 자들이 인간의 조건이 되는 육체라는 껍데기를 버리고, 오직 뇌로서 활동하면서 인간 아닌 인간 이상의 존재로 되고자 했다. 시빌라 시스템에 의한 면죄체질은 바로 시빌라 시스템이 가할 수 있는 처벌을 초월한 존재이다. 즉 사회통제시스템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빌라 시스템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점이다. 이들은 공리주의라는 이념으로 활동하나, 그 이념 뒤에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보통 인간에게 은폐하여 하나의 신화로서 작용한다.

 

시빌라 시스템은 완벽한 체계가 아니라, 완벽한 체계로 되도록 해야 하는 점이다. 그래서 강제적인 처리방식이 보이고, 그런 방식에 허점과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런 허점과 오류를 인정하는 순간 시빌라 시스템이 군중들에게 아주 우수하고 문제없는 체계라는 사실을 부정해야 하게 되는 것이고, 그 자체가 시빌라 시스템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아이러니가 된다. 그런 점에서 <사이코 패스>를 프랑스8대학에서 언론정보 및 사회학자로 활동 중인 아르망 마틀라르의 <감시의 시대>를 보면 상당히 적용하기 좋은 말이 나온다. 기본적으로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을 시작하여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이어지면 더 좋은 이 책에서 인용한 문구를 생각해봐야 한다.

 

① 법치주의와의 갈등은 민주주의의 야만화라는 가치 퇴행을 동반한다. "악"이란 규범에서 벗어난 의심의 논리는 공포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피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이 가한 처벌의 흔적이 지극히 정상이며 상식적임을 강조한다. 기능적인 의미와 국가이성에 반하는 모든 이는 가장 어둡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연구하는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비평가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되풀이하며, 이를 통해 형성된 역사적 시각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례적으로 위급한 상황과 연결된 복잡한 관계에 대해 언급할 때 다른 방식을 찾는 것은 위기와 사회통제의 관계를 설명할 때 다른 방식을 찾는 것과 같다. 가장 먼저 여론에 대응하는 방식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례적인 상황은 설득, 억압, 캠페인, 프로파간다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심리전 전문가가 규정한 '정신적인 전사'라는 용어로 설명한다면 신체의 통제를 함축한다.(페이지 6)

 

기본적으로 <사이코 패스>에선 집행관이 집행하는 과정에서 죄 없는 시민들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범죄수치가 급격히 증가한 점에서 원인자 문제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범죄수치가 높다는 이유로 무조건 살인을 합리화 하는 과정이 보인다. 그런 모습에 대해 일절 의구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조차 국가의 정당성만 찾을 뿐이다. 이런 억압과 프로파간다적인 방법은 감시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시빌라 시스템은 바로 민주주의 정치체계가 아니라 단지 공리주의 체계로 추구할 뿐이었다.

 

② 법률적 공리주의의 창설자이자 다수의 형벌제도 개혁안을 완성했던 영국의 철학자 벤담은 처벌법으로서의 형법에 대한 실용적인 이론의 연장선에서 파놉티콘 개념을 공식화했다. '파놉티콘'은 건축양식 중 하나로 원형 감옥을 말한다. 원형 감옥의 구조는 감방이 벌집처럼 들어차 있고 중앙에 감시탑이 있어 감시인이 한눈에 죄수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다. 반대로 감시를 당하는 이들은 타인과 분리된 채 개인 감방에 격리되어 자신을 감시하는 이들을 볼 수 없다. 이 같은 공간의 조직화 방식은 사회구조 전반에 관한 계획과 연결되어 일종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토대가 되었다. 벤담은 파놉티콘과 같은 이상적인 모델을 "일정 수의 사람을 감시하는" 기능을 지닌 기관이라면 그 어떤 예외도 없이 적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수감 시설만이 아니라 학교, 고아원, 공장, 보호시설, 병원, 군대와 같은 감금 시설에도 응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페이지 16~17)

 

감시의 대상은 학교, 공장, 병원, 군대, 감금시설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낙인이 찍힌 자들은 모두 격리수용시설에 갇히고,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거기서 계속 썩을 때까지 살아갈 것인지 아니라면 감시관 감시 아래 집행관으로서 더러운 일을 하는 사냥개로 남는 것에 대한 차이다. 길가에 언제나 시빌라 시스템의 눈이 작동하고 있으며, 실시간으로 감시하여 사회적 비적응자를 배제하고 제거한다. 그것이 바로 <사이코 패스>에서 보여주는 안정된 세계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라이스가 <서양의 문명사회와 관습>을 증명한 것처럼 ③ "내부적인 통제와 외부적인 통제의 왕래"는 점진적으로 "감정적인 삶의 제한과 규제, 즉 일종의 '자기통제' 혹은 '자기규제'에 의해 해석되는 예속화와 의존성의 강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합리화'란 "인간의 모든 심리적 체계를 일괄하는 변형의 다양한 측면 중 하나에 불과하며 자아와 초자아의 통제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충동의 통제"라고 기술했다. 이런 심리적 자기통제를 변형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상호 의존성, 인간 상호 관계의 집합 그리고 사회조직의 통합으로 이는 언제나 한정된 의미에서 행해지는 변화일 뿐이다."(페이지 17)

 

감시라는 것은 당연히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통제와 감시는 그 사회의 전반적인 당위성이 되어 하나의 도덕과 정의로서 활용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람들조차 모두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게 되는 눈이 된다. 뭔가 누군가 다르면 이상하게 여기고, 그 이상의 시선은 의심으로 변해버리며, 의심은 하나의 잠재범죄자로 보게 된다. 감시와 처벌은 단순히 감시자에 의해 움직이는 체계가 아니라 감시당하는 자까지 서로 감시해서 모두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정치공학적 방법이기도 하다. 타인의 눈에 의해 인간은 자신을 통제하고 스스로를 거기에 억지로 끼워 맞춘다. 문제는 이런 점은 법적인 제도에 의해 맞춰 가는 게 아니라 문화적인 흐름까지 인용되는 것이다.

 

생리학자 프란츠 요제프 갈은 인간과 기능과 성향은 모두 인간 내부인 두뇌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두개관찰법으로 통해 두개골 두피표면을 조사했다. 그가 조사한 인간들의 두뇌는 감옥, 보호소, 구제원, 고아원, 군대 같이 시체를 손쉽게 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가 두개골을 관찰하여 두뇌의 소유자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골상학을 정립하였다 ④ 같은 두개골 관찰로 통해 인간에게 27가지의 기능 혹은 27개의 핵심적인 기관이 존재하며 이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추론했다. 여기에는 결혼에 대한 성향, 살인에 대한 성향, 소유에 대한 성향, 비축하고 저장하려는 성향, 절도 성향, 형이상학적 정신과 영혼의 깊이와 관련된 기관, 정의와 비리의 감정, 선과 시정을 관할하는 융기부, 헌신의 기능 혹은 새로운 현상을 수용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 확고부동함과 관련된 기능, 참을성의 기능, 인내심의 기능, 완강함의 기능 등이 있다. 갈은 그가 완성한 새로운 규칙은 단순히 인간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의학적 연구, 도덕, 교육 그리고 입법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의 규칙은 훗날 형법 개혁에 일조하게 된다.(페이지 21~22)

 

<사이코 패스>에서 처음 인간의 심리를 체크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시점은 어디일까? 분명히 작품에서 언제 어디서부터 라기 보단 단지 과거 베테랑 형사 마사오카 젊은 시절에 없었던 시빌라 시스템이란 점에서 감시체계가 사회적으로 적용된 시기는 작품 내에서 20년 내외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초반에 어떻게 하면 인간의 심리를 확인할 수 있는가? 도미네이터의 눈으로 본다면, 인간의 범죄수치를 찾아낸다는 것은 상당히 초과학적인 기술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불안하고, 그의 심리적인 요소에서 무의식적인 요소까지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동공과 맥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뭔가 불순한 생각이거나 불안하다면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내지 뇌의 활동범위가 스캐너의 검사대상에 해당되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해도 인간이 침착한 상황에서 범죄를 계획하는 것이라면 상당히 난해한 부분이다. 시빌라 시스템에서 인간의 통제를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미 인간의 유형별 데이터가 모집된 점이고, 그런 데이터에 의해 적용되거나 판단될 수 없는 자들이 이레귤러이고, 그들은 시빌라 시스템에서 처리가 불가능하기에 시빌라 시스템의 일원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선택점은 바로 골상학의 시작지점처럼 통계수치화 되지 않은 인간이므로 시빌라 시스템은 바로 골상학이 시작한 통계에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⑤ 범죄수사를 목적으로 생체측정기술이 최초로 적용되면서 이 같은 생각은 집단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1885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교정학회에서 프랑스 법무부 소속 교정 시설장은 "개인등록증"처럼 개개인의 인체 측정 정보가 담긴 "신분증명서" 발급을 옹호했다.(페이지 23) 7년이 흐른 뒤,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범죄인류학회 참석자들은 "단지 재범자의 신분 식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신분을 빠르고 정확하게 검증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인체 수치 측정 수치 시스템을 도입하고 보편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바람을 드러냈다.(페이지 23)



문제는 이런 감시체계가 반드시 <사이코 패스>에만 적용된 게 아니라 이미 19세기부터 인간의 감시를 위해 체계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사이코 패스>만 인간을 스캔한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기술이 부족해도 그에 버금가는 사회적 구조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것을 해서 누가 이익을 보는 것인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정치적으로 관료주의와 만날 경우 공동적인 카르텔을 형성하게 된다. 관료들은 기술로서 국민을 통제하고, 기업은 그 통제로 통해 상품을 판매하거나 특혜를 가지며, 그 이익을 관료들과 분배하는 것이다.

 

가령 지리학적으로 길가의 도로가 계속 정비되고, 구획이 일정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길가의 시민들의 통제가 쉽고, 교통의 통제가 쉽다는 것이다. 복잡한 길이라면 교통의 통제범위에서 벌어지고, 감시대상자들도 쉽게 놓칠 수 있다. 그리고 거리가 구획이 되면서 기존 살던 사람들은 퇴거된 후에 새로운 건축물이 올라가고, 도로가 확장된다. 거리는 차를 가진 자들이 편안하게 다니고, 백화점과 상가에는 좋은 상품이 많이 올라온다. 골목안의 가난한 자들은 집을 잃고, 재래시장의 소멸로 생계를 위해 계속 변두리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변두리에 거대한 건물인 아파트 안에서 집단으로 거주하게 되어 같이 옆에 있어도 서로 분리된 존재로 각인한다.

 

감시와 통제는 최종 목표는 모든 것을 감시자로부터 감시할 수 있는 기술과 체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시당하는 자들이 서로 감시하여 사회적 구조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이퀄리브리엄>에서 보이는 세계관은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와 유사해 보인다. 서로를 감시하고, 어떤 감정이나 특이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만약 한다면 내부고발로 통해 그 사회에서 제거된다. 속전속결로 제거되는 감시사회에서 가장 좋은 감시체계는 내부의 감시다. 사생활의 영역은 감시의 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 경제활동과 교통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란 내부의 감시를 더 초월한 감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평소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관찰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을 관찰하여 확인할 수 있다면? <감시의 시대>에서 테러리스트 검거에서 수만 가구의 세금납부 현황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카드로 결재하거나 또는 계좌이체 하는 사람 이외 누가 현금으로 결재했는가? 그리고 그 결재대상자는 얼마나 자신의 집에서 거주했는지, 금액은 어느 정도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면 같은 규격의 집에 거주하는 사람과 지불하는 금액이 유사할 것이나, 특이하게 높거나 낮다면 의심이 강하다. 다행히 검거대상자는 테러리스트이겠지만, 하다못해 독재자나 군부정치가 심한 곳이라면 분명 암울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다. 감시대상자가 특정 범죄자가 아니라 불투수 대다수의 인간이라면 그것만큼 위험한 사회가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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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이라는 도서가 있다. 인간의 존재에서 철학은 인간에게 본연을 묻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방법이다. 그래도 철학이란 것은 있어도 살 수 있지만, 없으면 살아가는 게 조금 어려워진다. 인간의 세상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동물화되어 살아가게 될 경우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감이 하나의 타인으로 되어 버린다. 결국 인간은 자아라는 자신의 인격과 개념에서 탈피하여 자신이란 존재를 하나의 군중 내지 집단에 파묻혀서 더 이상 자신의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철학이란 것은 자신의 본질적 관계와 더불어 세상의 관계까지 사유하게 된다. 19세기 사회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철학은 세상에 대해 원리를 밝혀내질언정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철학이란 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법칙을 찾아내는 점에서 탁월한 학문이다. 그러나 철학 그 자체가 세상은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에 대한 법칙을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프랑스혁명에서 장 자크 루소의 <에밀>, <사회계약론>, <인간불평등기원론>이 기본 베이스가 되었듯이, 그 책 자체가 하나의 혁명을 하자는 의미가 들어있기보다 혁명을 하는 원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하나의 답변서인 것이다. 물론 루소의 서적들은 18세기에 완성되었으나 아직까지 21세기에서 통용될만큼 매우 탁월한 도서이다. 그런 점에서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는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제시하는 불평등의 2가지가 모두 나타난다.

 

작품 자체에 큰 철학적 요소나 탐구에 대한 정신은 없다. 그저 그 작품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불평등 요소란 바로 마왕의 딸인 피노와 영웅지망생인 라울의 관계부터다. 마족의 정점인 마왕 후보생과 인간의 정점인 용사 후보생이란 이분법적인 요소에서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제시하는 태생적인 문제인 인종, 성, 나이 등과 같은 불평등이 발견된다. 그리고 2번째 불평등은 사회적인 위치에서이다. 마왕의 패배와 더불어 마족인 피노는 하나의 은신자가 되어 인간세계에 온다.

 

마족으로서 활동하기 보다는 인간세계에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활동하는 피노는 마왕의 패배와 더불어 모든 지위나 조건이 박탈된다. 결국 피노는 하나의 실직자 내지 사회부적응자로 된 것이다. 시작은 인종적 부분에서 시작된 것이나, 종착지는 업체에 소속된 직원으로 되었다. 물론 작품 중간에 마왕의 몰락으로 인해 실업자가 되어버린 용사 내지 용사에 대한 상품을 제조하는 사람들은 실직 내지 많은 이익을 잃게 된다. 그래도 피노와 라울의 입장에서 보면 매직 상점에서 일하는 직원이란 점이고, 그들의 경쟁사는 아이리가 근무하는 아마다 상점과 경쟁구도로 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국부론과 자본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일 처음 나온 것은 자본론이다. 마법상점에 비해 아마다 상점의 상품은 생각보다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점이다. 가격의 저렴함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지 생각하면 작품 중간에 아마다 상점의 상품을 공급하는 공장에서 알 수 있다. 마족과의 전투 이후 패배한 마족 중에 하위 몬스터들은 공장에서 근무하게 하는 것이다. 상품의 가격에서 제일 중요한 3가지 가격요소는 원자재, 생산설비, 그리고 노동력이다. 추가로 더하자면 운영경비(물, 전기, 세금 기타 경비 및 잡비) 및 운송수단이겠으나, 최초로 제품이 생산되는 과정으로 보면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원자재, 생산설비, 노동력이다.

 

아마다 상점에 공급하는 공장에서 터문 없는 가격으로 원제품을 생산하는 바람에서 아마다 상점에서 판매하는 상품들의 가격이 모두 저렴하게 판매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가격의 요건을 다룰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가령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재료를 생각하면 유리, 플라스틱, 나무, 철, 구리, 알루미늄 등과 재료를 사용한다. 어떻게든 기술이 좋아지나 나쁘게 되더라도 기본적인 틀 안에서 같은 사양을 시판할 경우 재료의 선택차이점은 별로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에 생산설비에서 공장에서 운영하는 제조시스템을 1번 교체하는데 필요한 예산과 기간은 막대하다. 그러므로 1번 생산설비를 갖추게 되면 시스템의 물리적 내지 프로그램 수명이 유효할 경우 끝까지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공장에서 가장 높은 비용을 차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토지, 그 토지 위에 올리는 건축구조물 및 설비, 그리고 공장 안의 제조시스템이다. 하지만 제조시스템의 경우 그 역시 하나의 생산품 이전에 사업자에게 큰 자본지출 사항이다.

 

그렇다면 원재료와 생산설비의 구비에서 더 이상 사업자의 주머니에서 지출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로지 노동력이다. 아마다 상가에 상품을 공급하는 공장에서 노동하는 존재를 보면 기존에 분명 사람이나 혹은 지능이 높은 마족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단순작업에 얼마든지 투입이 가능한 하급몬스터였다. 이들은 단순한 지능에서 반복적인 노동에서 임금지불이 아주 저가이거나 혹은 지불하지 않을 정도로 노동을 착취한다.

 

반복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하급몬스터들은 견디지 못하여 쓰러지는 모습이 나오는데, 전형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육체적 과로로 인한 생리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하급몬스터의 노동착취 모습에서 분명하게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밝히는 생산수단이 나온다. 가격의 조정이 가능한 것은 바로 노동력의 착취라는 점이다. 하급몬스터라는 정신수준 이하의 생물을 착취한 만큼 당시 19세기 유럽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많은 노동에 시달렸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은 기본이고, 심지어 새벽까지 넘을 때도 있다. 연속 20시간도 있었으며, 중간에 밥조차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다.

 

이와 반대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적인 요소는 피노가 월급을 타고 나서이다. 피노가 자신이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으므로 일을 하는 것, 즉 노동하는 게 좋은 일이라고 한다. 나는 분명 나의 이익을 위해 혹은 가게의 이익을 위해 일을 했으나,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가는 것은 결국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빵을 만들어 파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지만, 타인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 활동에 따라 빵을 사고 파는 자에게 이익이 가고, 국가적으로 상업적으로 활발하여 부가 축적되는 것을 설명한다.

 

문제는 자유경제주의자들의 원전인 <국부론>은 그 경제적활동이 서로간의 도덕적인 조건과 더불어 공정한 거래가 성립되어야 한다고 했다. 가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조차 읽지 않은 자칭 시장자유경제주의자들의 비논리적인 상식이란 바로 공정한 거래와 도덕적 관계의 성립이란 점이다. 물론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그런 철학적 관계를 다루지 않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라울이란 용사 옆에 마왕의 딸 피노 외 다수의 미소녀가 얽히는 하렘구조에서 그런 심도있는 내용은 깊이 전개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소재가 에피소드에 나온 만큼 "국부론이냐? 자본론이냐?"이란 담론은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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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란 책을 보았다. 지금 나는 한가하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막중한 압력감에 오히려 지루함으로 가득하다. 지루함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는 인간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 일과 시간조차, 그리고 잠자는 시간조차 그 하루일과를 위해 우리는 맞추어야 한다. 물론 인간은 동물적인 요소로서 낮에 활동하고, 밤에 수면을 취하는 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좋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잠을 자는 시간이든 아니든 집에 가면 언제나  TV 앞에 멍하니 보고 있을 경우가 많다.

 

TV를 보는 이유는 단지 그 TV에서 어느 방송프로그램이 방영되고, 그것을 우리는 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여가생활조차 하나의 정당화된 획일화된 양식, 취미나 취향 따위는 가장 진부한 이야기 거리 중에 하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부류들의 고상한 척이 가장 싫다.

 

우리는 상대방의 직업과 연봉을 묻는 것은 속물적인 유형으로 분별된다. 그저 뭐하는지 것으로 직업적 현재만 아는 것으로 단순히 이 사람의 사회적 위치만 알 뿐이다. 그렇다면 남은 소재는 문화적인 자본, 즉 취향과 취미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데, 영화를 좋아하는데 거기서 마치 고상한 것처럼 무슨 수준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가장 싫어하는 인간들은 최신에 나온 영화와 대중가요를 찾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자기 생활을 투자하는 부류다. 요새는 뭐가 좋고 전에는 이래서 그렇고, 평론가적인 지식과 교양은 눈꼽만큼 없으면서 마치 있는 것처럼 말하는 부류, 이 글을 보는 당신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뭐 그리 아냐고 하겠지만, 이 글을 보는 당신들이라고 피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취향과 취미로 수준높기보단 비판적인 독설로서 공격적인 글을 적는 나라고 하여 비판의 대상에서 피하기란 어려운 것은 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보고 듣는 것은 다르지만, 결국 그 안에서 돌고 도는 지루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예를 들어보자. 영화 좋아하는 것에 대해 나쁘지도 않고, 그것에 취미를 두는 것은 나름 자기 생활의 에너지다. 문제는 그것을 보고 대단하거나 놀라운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작품이 그래 대단하고 잘나서 보는 것에 대해 왈가불가할 게 못 된다. 단지 그것을 보고 자신이 마치 문화인양 착각하는 것이 짜증날 뿐이다. 최근 한국에서 <명량>이 흥행했을 때 나는 보지 않았다. 안 봐도 비디오, 국가위기와 국민통합이란 전형적인 이데올로그만 담론되어 있는 작품은 예술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그저 미디어로서 경제적, 정치적 이익만 뭉친 잡동사니다.

 

최근 <인터스텔라>가 흥행하면서 어느 신문기사에서 놀란 감독이 놀란 하는 글귀를 보았다. 이 작품에 대해 옆에 계신 분들에게 들어서 나름 흥미롭고 과학적인 요소를 많이 반영하여 SF영화로서 완성도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단지 걱정인 것은 영화의 흥행이 그 나라의 문화수준인 것처럼 혼자서들 자위하는 인간들이 넘칠 게 분명할 것이란 나의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다. 

 

수준 높은 영화를 즐겨 찾아라는 슬로건에 왜 수준이 높은지에 대해 제대로 밝힐 인간은 없다. 단지 보았고, 계속 다른 신작들만 찾아 떠나는 부류는 결코 수준이 높은 게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거기에 보낼 뿐이고, 남들이 보니깐 볼 것 같으니깐 거기서 떨어지기 싫어서 계속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고 있다.

 

다르게 생각하면 영화흥행은 그래 높으면서 왜 우리 영화는 외국에서 흥행이 되지 않은걸까? 국내에서 성공하지 않은 작품들이 프랑스나 유럽에서 상을 받고 다닌다. 이게 바로 대중문화 현실 속에서 보이는 문화의 수준인 것이다. 유향의 시대에 소비만을 추구하는 부류는 대다수고, 대다수의 가치는 하나의 도덕이 된다. 니체가 그런 인간들에 대해 일침을 가한 이유는 다수의 인간들의 가진 판단된 옳든 그릇되어 버리든 그들 자체에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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