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적 동기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네이버 블로그 이웃님의 홈을 보고 조금 관심이 있어서 감상했다. 물론 애니플러스로 통해 작품 검색하다가 조금 흥미가 있어서 보기로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나는 중장기적인 편수보다 12화 내외의 작품을 보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24화로 그 편수 조정이 다소 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4화까지 보았다. 신작이 아닌 구작이기에 한 순간 몰아보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며 느낀 점은 정말 잘 만든 것이다. 인간의 대립이란 항상 나와 타자, 내가 속한 집단과 남들이 집단이다. 그것은 마치 토마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생각날 수준이다.

 

인간이란 결국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다. 자신의 안위와 상태가 보장받지 못하면 타인에 대해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다고 동물처럼 본능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겐 인간 최대의 딜레마인 이성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성은 모든 걸 판단하는 척도가 되지만, 한편으로 그 이성이 자신을 무너뜨리는 함정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완벽하지 못하고 항상 이율배반적인 모순에 놓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말려들기도 하고, 때론 순수하게 자신을 희생한다. 그런 점에서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아주 심오한 주제를 남긴다. “발브레이브 그것은 세계를 파헤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세계를 파헤치고 밝히는 일을 결국 세계란 무엇이고, 그 세계에 사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파헤치고 알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 <혁명기 발브레이브>를 알아가는 것은 인간과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을 넘의 철학이란 학문과 연속되는 점이다. 철학을 아는 것이란 결국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고, 도 나아가 사회의 존재성까지 이어진다. 철학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정치라는 무거운 세계인 것이다.

   

2. 민주주의와 혁명기 발브레이브

<혁명기 발브레이브>의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을 지오르 학생들이 만들어가는 정치체계다. 1화에서 도르시아 제국의 테러로 인해 지오르 국가는 수많은 인명과 시설피해를 입는다. 어른들은 모두 강제로 납치 되고 남은 것은 고등학교에 남은 학생들이다. 그들은 싫든지 좋든지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모두 죽을지 아니라면 한 치조차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인지 말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학생들은 어른들이 모두 납치된 가운데, 임시정부개최를 선언하고, 자신들의 정부대표를 뽑기 위해 선거를 개최한다. 즉. 시민 한 명에게 투표권과 정치적 참여권을 부여한 셈이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원칙이 따르므로,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자만이 정치적인 행방을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다고 하여 그 대표를 따르는 사람이 대표에 대한 권한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같이 권한을 부여하여야 한다. 단지 대표자는 그 권한을 결정하고 판단하여야 하고, 모든 시민이 자신들의 권한을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철학의 핵심이다.

 

이런 기본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이유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어보면 나온다. 그것은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 중요하게 여기는데, 자유라는 것은 방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다. 책임 없는 자유란 의미 없는 비겁한 발언이다. 대표자를 뽑아놓고 모든 문제와 해결을 맡기고, 자신은 뒤로 숨은 것은 부당한 일이다. 하지만 대표자가 1명이 천 명 정도라면 같이 시민주의로서 대표를 맡을 수 있으나. 만 명 내지 10만 명을 넘게 될 경우 매우 어려워진다.

 

권력관계에서 대다수의 시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대표자에게 향하는 권력은 강해진다. 모든 시민에 대해 대표자가 만날 수 있는 여건이 존재하지 못한다. 따라서 민주주의 정체제도의 한계성은 대표자가 모든 시민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주인공인 쇼코는 모든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며, 그들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는 활발한 소녀다. 그런 소녀가 대표자로서 정치적 자유주의를 펼칠 수 있는 이유는 소수의 지방자치단체로 이루어진 국가이기 가능하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모인 인구수가 적어야 가능하다. 정치적인 선택에서 참고할 만한 도서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인데, 사회계약론의 관점으로 본다면, 정치적 선택은 결국 일반의지이어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 자신과 반대되어도 상대방의 의결이 채택될 경우 그것에 대해 지지해주는 것이다. 일반의지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의한 선택지점이다. 하지만 인구가 많을 경우 많은 인간들이 거기에 대한 선택 지점에서 전체의지로 전환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존재할 경우 자신의 의견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고, 거대한 소수 의견으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3. 프랑스대혁명과 <혁명기 발브레이브>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중에 토크빌이란 사람이 있다. 그의 유명한 저서 중에는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이란 책이 있다. 여기서 앙시앵레짐이란 구체제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구체제에 해당되는 시기는 정확하게 말하여 1789년 7월 파리에서 일어난 프랑스대혁명 두고 나온 의미이다. 프랑스대혁명과 관련하여 그 원인은 루이왕정은 불안한 권력과 귀족의 세력다툼 그리고 교회세력도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주어서였다. 그런다고 프랑스 루이왕정이라고 하여 어느 시대에도 그런 정치적 견제를 받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토크빌의 서적에서는 분명히 밝힌다면 경제적인 조건을 들었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하였는데, 그 이유는 영국이 자신들과 경쟁국가라는 점이었다. 전쟁의 물자소모는 무척이나 크고, 군수물품을 위해 많은 인력과 자원이 필요했다. 게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대부분 원자재들이 전쟁물자로 사용하기에 식량이나 의상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당시 유럽에서 경제적 기본바탕은 역시 농업이다. 물론 파리나 도시로 향하여 찾아온 빈민들이 많이 있었다. 유럽에서 빈민들이 많아진 이유는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해 농경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무역으로 통해 식량을 구매했다. 식량 구매를 한다면 당연히 화폐나 다른 지불조건이 필요하다.

 

그때 양털이 좋은 상품이고, 기존에 밀과 농산물이 나던 땅은 모두 양을 방목하기 위한 들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도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많은 작품에서 배경적 상황이 19세기 전후의 유럽이고, 그 작품의 주인공이 소년이라면 양을 치는 경우가 많다. 양치기 소년이 단골메뉴로 나오는 것은 괜한 이유가 아니다. 그런 유럽의 경제적 상황조건, 특히 프랑스의 상황에서 혁명의 시작은 당통, 로베스피에르, 마라 등과 같은 자코뱅당에 의해 주도되나, 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던 것은 도시빈민과 시골농민들의 분노였다.

 

따라서 혁명의 원인이 되는 근본적 원인은 프랑스대혁명처럼 인간의 생존과 연결되는 경제적 조건일 수도 있고, 혹은 부당한 억압과 독재에 대한 반항일 수도 있다. 혁명의 원인이 제각기 다르지만,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은 그 사회가 부조리하거나 문제가 심각하여 더 이상 현상 유지가 불가능 할 때 일어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서 모두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혁명가들이 나오더라도 민중의 지지가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혁명은 많은 사람과 무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역사적 교훈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1919년 3·1운동에서 많은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했으나, 일본군의 총칼에 의해 무참하게 밝혔으며, 무력항일투쟁을 하던 독립군도 소수인력과 보급문제로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혁명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부조리한 사회구조에서 억압을 받는 피지배계급자들에게 지배계급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점이다. 가령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자, 그 영화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왕정에 대항하나 총과 대포에 무참히 쓰러진다. 총과 칼에 대해 총과 칼로 대항하더라도 그 무력의 차이가 결국 혁명의 패배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프랑스혁명역사와 더불어 <혁명기 발브레이브>를 보면 혁명은 2가지로 형태로 이어진다. 1가지 혁명은 사키모리 학생들이 납치로 인해 부재중인 어른들과 아루스 및 도르시아의 무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독립군으로 선언한다. 그런 정치체계에서 어른이라는 기성세대들이 비록 모두 납치되어 그 직권을 가지고 있어도, 그 직권을 대신하여 스스로 정부를 만들고 정치조직을 정비했다는 점, 발브레이브라는 전투장비로 통해 무력으로서 주권과 영토를 방위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혁명을 하여 정부를 세운 이유는 단 1가지다. 자유분방한 생활을 누리고 싶은 것도 있으나, 도르시아에게 가면 안전을 약속받을 수가 없고, 아루스는 그저 발브레이브의 기체에 욕심만 있었다. 게다가 아루스의 의원은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의 탈출이 어렵게 되자, 발브레이브와 하루토만 아루스로 데려가려 했다. 게다가 자신들만 도망치기 위해 학생들에게 총을 겨누어 발사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학생들이 혁명을 일으켜 시민국가로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능이었다.

 

원인은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프랑스대혁명이나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이나 모두 위기에 닥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섰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오르 정부를 수립 후에 계속하여 위기에 봉착한다. 그것은 도르시아군대가 계속 침공하고, 추후에 지오르정부마저 마기우스의 공작에 의해 지오르의 학생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기 때문이다. 혁명의 성공에서 역사적인 교훈은 단순히 자국만의 성공만이 성공이 아니라 그 이후에 닥치는 위기를 극복해야 혁명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르시아의 혁명은 어떤 것인가?

 

 

4. 러시아혁명과 <혁명기 발브레이브>

세계사에서 혁명에 대한 역사적 사건에서 3가지가 있다. 위에서 소개한 1789년 프랑스대혁명,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이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러시아혁명을 거론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바로 도르시아라는 국가가 러시아혁명과 아주 관계가 깊다. 우선 도르시아는 도르시아제국보다는 도르시아 연방이라고 한다. 결국 연방이란 말을 사용한 국가는 20세기 태어나고 소멸한 소비에트 연방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원래 연방 국가보다는 군주가 통치하고 있었던 왕국이었다.

 

그 국가에서는 천 년이나 평화롭게 통치되어 있을 정도로 군주는 국민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피의 목요일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고, 아루스에게 군사적으로 열세했던 도르시아는 순간적으로 군사강국으로 태어난다. 문제는 피의 목요일이란 단어가 어디서 나왔을까 라는 점이다. 1905년 러시아에서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에서 가폰 신부가 수많은 노동자를 이끌고 거리에 가두 행진하였다. 그는 러시아황제인 차르에게 부디 자비를 베풀어 달라면서 차르의 사진을 들고 평화롭게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군대가 들이닥쳐 사격을 가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런 비극적 사건을 두고 피의 일요일이라 하고, 이에 대한 불만으로 러시아 내에서는 각종 파업과 시위가 발생했다. 그런 점에서 약간 의아스러운 것은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천 년의 왕국이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피의 목요일이 러시아혁명에서 피의 일요일이란 모티브를 가지곤 온 셈이다. 그렇다면 국왕이 국민들에게 미움을 살 정도로 실정을 저질렀는가? 라는 의문이다. 카인 대령의 부관인 크림힐트는 카인 대령이 소속된 반정파가 아니라 왕당파였다.

 

크림힐트와 기존 도르시아 군주를 지지하는 수많은 왕당파들이 도르시아 군대 내에 잔존하고 있었다. 작품에서 엘 엘프는 도르시아 국가에 대해 말하자면, 너무 무력에 치중한 나머지 그 무력으로 인해 나라는 더욱 암울해졌다고 말한다. 도르시아는 본래 아루스와 외교적으로 갈등을 빚은 국가이며, 아루스보다 군사력이 약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러시아혁명과 더불어 아루스를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가?

 

5. 러·일전쟁과 <혁명기 발브레이브>

<혁명기 발브레이브>에 대해 조사하다가 조금 의아한 면을 찾았는데, 각본가인 오코우치 이치로가 이전에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의 각본가였다는 점이다. 코드기어스와 같은 경우 브리타니아제국이란 군국주의 국가에 대해 eleven이라 불린 일본에서 제로와 흑기사 조직이 레지스탕스를 펼쳐 결국에 브리타니아제국의 세계제패를 위한 폭력을 해체한다는 것으로 끝맺음을 낸다. 주인공인 를르슈를 떠나 작품 전반을 보면 백인의 서구중심 세계 권력에 대해 일본이란 국가가 대항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코드기어스 시리즈 중에서 <망국의 아키토>와 같은 경우는 배경이 일본이 아닌 유럽인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피해의식이 무의식적으로 남아 자위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피의 목요일이 왜 러시아혁명에서 피의 일요일을 봐야 하는 점이다. 1904년~1905년 사이 일본은 대한제국이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청나라와 전쟁하고 그 후에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다. 이때 러시아가 패배를 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전쟁물자로 인해 국민들에게 식량과 의복이 부족해지고, 경제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실직되었다. 즉, 생존을 위한 인간의 의식주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피의 일요일은 러·일 전쟁의 러시아의 패배로 인한 결과고, 1905년에서 12년 뒤인 1917년에는 2월 혁명과 10월의 볼셰비키혁명까지 일어나는 도화선이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시기를 보면 혁명이 있던 시기는 반드시 전쟁이 있었다.

 

1차인 1905년은 러·일 전쟁, 2차는 제1차 세계대전이 연접했다. 당시 러시아군대가 제1차 세계대전을 참전했을 때, 그들은 단지 총알받이 불과했으며, 많은 군인들이 지휘관의 어리숙함으로 전쟁에서 죽었고, 그것도 모자라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기도 했다. 그런 군인들이 수 백 만 명에 이른다고 했으니 혁명의 기회는 결국 전쟁에 의해 국내 상황이 불안해지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 조건은 전쟁의 위치적 조건이 자국 내부거나 혹은 자국이 패배할 경우에 높다. 전쟁의 패배는 고위관료들에게 치명적인 실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도르시아의 경우 아드라이는 본래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의 출신이 왕자이지만, 왕자이기 때문에 국가가 살벌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했다.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폭력을 두고 정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의라는 이름은 결국 물리적인 수단으로 실행하여 현실의 부조리 내지 문제점을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카인이나 반정파가 기존의 왕당파의 화목주의를 유지하는 것을 동의했다면 아드라이나 혹은 엘 엘프가 카인과 총통에 대하여 대항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시작에서 독특한 설정은 도르시아 총통과 카인이 일으킨 반정이 12년 전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 1917년 볼셰비키혁명에서 그런 시간적 차이는 과연 우연일까?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아루스와 도르시아는 본래 적대 국가이나, 마기우스의 정체를 은폐하기 위해 지오르에 대해 세계의 적으로 만드는 공작을 펼친다.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나 영국이 동맹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2차 세계대전 때 나치독일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때는 어느 정도의 명분이 있었지만, 지오르의 발브레이브 조종사들이 불사의 몸이고, 팬텀을 보여주어 지오르에는 괴물 내지 위험한 생물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언론에 퍼뜨린다.

 

6. 미디어와 <혁명기 발브레이브>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여러 가지 작품설정에서 아주 중요한 상황적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디어라는 정보다.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과 PC로 통해 실시간 SNS를 사용하고 그것으로 통해 지오르의 상황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 지오르의 교역을 나누던 아루스의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일으킨다. 하루토가 혼자 발브레이브에 탑승하여 도르시아 군대를 무찌른 것과 루키노 사키가 같이 싸우고, 노래하는 아이돌로 나오는 것까지 나온다. 심지어 사키로 통해 광고모델로 활용하여 지오르 국가가 운용할 수 있는 예산까지 확보한다.

 

하루토가 처음 활약한 후에 하루토가 SNS로 메시지로 보내자 세계는 그에게 답장을 수도 없이 보내주고, 그에 대한 열기는 마치 신앙과 같았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심지어 유명한 연예인과 스포츠스타까지 하루토를 만나고, 그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미디어의 힘이고, 미디어는 모든 대중을 사로잡는 무기가 된다. 하루토의 활약이 자금이 모인다는 점은 미디어는 결국 정치적, 경제적인 요소가 배제될 수가 없으며, 바로 그 미디어를 통제할 수 있는 자가 국민을 통제할 수 있다.

   

어느 사상가의 말을 빌리자면,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은 국가권력보다는 미디어가 훨씬 유용하다.”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중2병 데이즈>에서 그 문제되던 대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미디어 장악은 문화장악의 기본이니까.”, 이 말은 나치독일의 대표적인 군중선동가인 괴벨스 박사의 정치수단이었다. 마기우스는 사람의 몸을 옮기고 다니면서 세계적으로 권력이 막강한 사람들에게 기생하면 살아가고 있다. 대규모 은행이나 방송사의 지배자로서 말이다. 대중에 의한 통제는 결국 정보력이고, 사키를 배를 찌르는 도르시아 총통의 행동은 결국 미디어로 통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타파한 것이다.

 

영상으로 이루어진 정보는 우리 인간이 그 실질적인 물리적 공간에 있지 않아도 그 공간에 있다고 여기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가상적인 영상이 마치 실재와 같이 느끼는 가상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미디어로서 보이는 정보가 여러 가지가 아니라 단순하고 일정한 정보라면, 그 정보를 공유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은 유사하게 될 것이고, 거기에 대한 반응과 답변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돌출될 것이다. 언론이라는 미디어가 결국 인간에게 같은 생각과 유사한 행동을 하기를 원한다. 미디어의 장악이야 말로 세계의 여론을 잡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키모리학원의 학생들이 지오르 군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도 그 누구도 구원해주지 않았다.

 

내가 적고 있는 글에서 토크빌이란 이름을 거론했는데, 그가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중요한 말이 나온다.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쉬운 정치제다.”, 그런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강렬한 힘을 실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국민들의 여론이고, 그 여론은 미디어에 의해 좌우된다. 왜 미디어는 계속 국민들에게 전체주의적인 요소를 요구하는 것일까?

   

7. 일본 VS 일본 <혁명기 발브레이브>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는 일본이 2가지로 나온다. 하나는 지오르라는 중립국으로 학생들의 이름은 일본식이고, 학교 인근에 신사가 위치한 것과 전통음식이 나오는 것을 본다면 일본문화를 표현하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지오르는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한 지오르로 나온다. 아루스는 대통령이라고 하나 지오르는 총리대신이 정치적 결정권자로 등장한다.

 

아루스의 정치 최고결정권자는 대통령이나, 그 국가는 기본적으로 일본을 의미한다. 단지 시장자유주의가 미국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 아루스라는 일본은 기존 미국에 의해 영향을 받은 일본일 것이다. 아루스 대통령이 일부러 마기우스의 정보를 알려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그들이 막대한 자본과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루스의 은행장부터 가장 먼저 잡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인 상징이 되는 은행에 누군가 침투했다로 볼 수 있다. 아루스는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다고 지오르라는 일본이 아루스에 의해 미국의 영향권에 벗어나고 싶어 한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인가? 그것도 아니다. 일본 역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나, 아직까지 천황이 살아있고, 천황의 생일은 국경일로 지정하여 휴무일로 기념한다. 게다가 일본은 전범들의 후손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며, 야쿠자들도 정치권에 크게 관여한다. 그런 점에서 지오르의 학생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지오르 총리대신인 쇼코는 도르시아 장군과 화상통화를 하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인질로 잡힌 것을 확인한다.

   

쇼코는 아버지의 목숨과 지오르의 국가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상적인 가치관이라면 모두 국가라고 하나, 그것은 막상 개인의 상황이라면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쇼코는 인질을 비인도적으로 협박하는 도르시아 장군에게 비겁하다고 한다. 쇼코의 답변을 들은 도르시아 장군은 어른이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칭찬이라며 잔인한 미소를 짓는다. 쇼코가 원한 국가인 민주주의에서는 어른의 사기나 비겁함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일본에서 그런 문제가 없을까? 그래서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매우 혁명적인 사고방식으로 쇼코로 통해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지오르의 정치관료가 지금 일본의 정치관료 체계가 유사하고, 아루스는 미국과 비슷하나, 도르시아의 관계를 보자면 또 하나의 일본과 연결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저항의식은 주인공인 하루토에 의해 보여준다. 발브레이브는 지오르 어른들이 만들었고, 지오르의 어른들은 모두 군인들이었다. 학교의 선생님도 거리의 상인들도 항구의 직원들조차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발브레이브에 왜 룬을 집어넣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자신들의 아이들을 모두 발브레이브 파일럿으로 만들기 위해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점이다.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억지로 조종하려 했다. 그래서 하루토가 지구에 가서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자 말자, 아버지는 하루토를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대한다. 아버지는 하루토가 원하는 답변보단 오히려 아버지를 원망하게 된다. 자신들의 신체를 억지로 바꾼 것도 모자라 발브레이브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은 모습과 발브레이브 운용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생명을 빼앗아 가는데도 오히려 그것을 두고 연구를 위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루토는 아버지의 그런 비인간적인 발언에 분노하여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린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 어른들에 의해 조장된 아이들의 미래, 이것이 지금의 일본사회에서 가능한가? 일본이 제 아무리 개인적인 국가라고 해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버지를 때리거나 죽이는 행위들은 용납되기 어렵다. 어른들의 부조리를 강요하는 것도 모자라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혁명은 반드시 정치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인 영역까지 이루어져야 그 사회와 국가가 변화한다(단재 신채호 연구자료 참조).

 

8.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이상적인 나라란 어떤 것인가?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이상적인 나라란 어떤 것인가? 기본적으로 지오르의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이 만들고 싶은 국가란 누구나 대화를 할 수 있고, 서로 다투기보단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공화주의국가로 만들고 싶어 한다. 따라서 전쟁과 무력은 남을 공격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투쟁에 가깝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을 보면 시기적으로 하루토와 엘 엘프가 만나던 시점이 현재라면 과거의 12년이 있다면, 앞으로의 12년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미래의 12년은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12년 후의 지오르 국가인지 모르나, 아직까지 어린 모습이 나음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은 어느 모두 성인이 된 장면이 나온다. 그때 어떤 남자아이의 모습이 나온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왕자라고 불리고, 머리카락 색과 모양은 엘 엘프와 흡사하고, 동공의 색은 녹색이었다. 이런 외형적 특성을 비교하여 판단하면 아마 엘 엘프와 쇼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가장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 남자아이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과거 사키모리학원들의 학생들은 바로 자신들이 있을 곳이란 미래가 있는 곳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미래가 있는 곳에는 무력과 공포로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아름다운 새소리와 맑은 물소리가 나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르시아 국가는 마기우스의 정체의 탄로와 도르시아 내의 왕당파의 복권으로 다시 과거의 군주정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 반정파에 대한 왕당파의 혁명의 성과에서 가장 공이 큰 사람은 도르시아 국가의 엘 엘프와 아드리아이다. 특히 아드리아의 경우, 출신이 일반 국민이 아니라 왕자였다. 그는 왕자로서 반정에 대한 위기에서 구한 영웅인 것이다. 아드리아의 공을 생각하면 그는 다음 왕권을 넘겨받을 정도로 큰 성과를 남겼고, 아드리아 자체의 목표도 공포와 무력에 의한 정치보단 평화로운 정치를 원했다.

 

지오르 국가가 추구하는 정치적 체계는 바로 공화주의라는 점이다. 그러나 왕자가 있다면 왕자의 아버지인 왕과 어머니인 왕비는 분명히 존재한다. 지오르 제국이 공화주의적 입헌군주제라면 그 군주가 되는 자는 어떻게 정치를 하는 것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쇼코가 자신의 나라에 침입한 2사람의 외계인을 조우할 때 그들을 향해 응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를 나누자고 한다. 자신의 보물은 자신들의 존재를 있게 해준 과거의 친구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자신들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파괴하려는 침입자를 막아야 하나, 한편으로 상대방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 역시 자신들의 자유와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9.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희생, <혁명기 발브레이브>

가끔 자유와 평화를 위한 희생자들의 추모행사를 열리는데, 그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하루토는 자신이 타는 기체인 발브레이브를 다른 사람들이 타는 것을 심하게 반대한다. 발브레이브를 타는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경고문이 뜨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는 더 이상 보통 인간과 어울릴 수 없고, 화신(化神)이 되어 불사의 몸으로 적들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발브레이브 1호기는 아주 치명적인 장치가 숨어있다. 강력한 힘이란 결국 그 힘만큼 적을 이길 수 있는 만큼 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하루토는 그것을 두고 저주라고 한다. 저주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일이 일어나도록 사주하는 행동 중에 하나이다. 저주를 걸어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혹은 치명적인 상황으로 가게 할 수도 있다. 저주는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이나, 그런 인간의 심리적인 요소가 남에 대한 적대행위로 표출되기도 한다. 하루토는 발브레이브를 저주받은 무기고, 자신은 발브레이브에 의해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제일 중요한 대사는 하루토는 그 저주는 자신이 마지막이 되어야 하고, 최후에는 모든 발브레이브를 파괴해야 한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발브레이브는 파괴되지 못하나, 대신 그 저주의 굴레를 모두 하루토가 짊어진 채 운명했으며, 그 저주의 굴레를 스스로 이어가고 있기에 미래의 지오르가 있었다. 현재의 평화가 결국 과거의 전쟁과 재앙으로 이루어졌다는 변증법적인 현상에서 어떤 목적지가 있다면 그 목적지와 반대되는 현실과 싸울 수밖에 없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가 형성된 점이다. 대립관계의 충돌은 새로운 결과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또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역사가 축적되어 나타난 결과인 점이다.

 

따라서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역사를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그 희생에 대한 기억을 유산으로 남기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의 정통성이 되는 셈이다. 지오르 제국은 왕자가 있다는 점에서 군주제가 있지만, 한편으로 민주제도 포함되어 있다. 쇼코가 투표에 의해 총리가 된 점이고, 과거 프러시아의 군주 프리드리히가 자신은 “모든 국민들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없기에 대표자로서 그 의결권을 주는 것이 민주주의제도에서 볼 수 있는 행위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인간의 피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기에 쇼코는 하루토가 입던 붉은색 슈츠를 입고 하루토와 친구들의 모습이 새겨진 흉상 앞에 있는 것이다. 지오르제국에 자유와 평화가 깃든 것은 모두 이들의 희생이라고 말이다. 그 희생에서 하루토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미래를 찾아갔다. 그가 원한 미래는 인간이나 혹은 마기우스였던 리제로테 또는 인간도 아닌 마기우스도 아닌 그 누구라도 같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를 원했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는 자유와 평화를 모두에게 누려야 하는 천부인권이 부여되어야 하며, 공화주의 국가는 국민이 전쟁 등에 의한 위험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10. 전쟁과 <혁명기 발브레이브>

전쟁이 일어난다면 각 국가 간의 무력과 병력에 의해 승패가 갈리며, 무력과 병력에 의한 소모전이 장기화되면 국민들에게 생명과 재산이 위험해지는 것이다. 진실로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치적인 갈등이 있는 국가와 서로 협력하여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갈등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권을 노리는 경우도 있다. 아루스처럼 처음에는 자신들의 지지도를 유지하기 위해 지오르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마기우스의 사주를 받아 지오르의 학생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아루스의 대통령을 볼 수 있다.

 

아루스의 대통령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이 아루스를 위협하는 괴물로 취급하여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안보팔이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괴물처럼 몸이 변한 사람은 하루토를 비롯하여 총 5인의 학생이며, 나머지 학생들은 발브레이브의 존재도 모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살해하는 무기조차 가지지 않은 민간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루스의 대통령과 도르시아의 총통은 이들에 대해 위험생물로 간주하여 잔인한 살인을 한다. 그리고 아루스의 군인들도 그들이 겉보기에 자신들에게 저항할 힘도 없는 것을 알고 있으나 단지 상부의 명령에 의해 살인행위를 저지른다.

   

폭력의 수단과 방법에서 국가의 폭력만이 오직 합법적이고, 폭력의 행위로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폭력의 희생자가 누구인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희생양이 되는 인간은 대부분 지오르의 학생이고, 그들은 민간인이다. 무장한 세력은 오직 엘 엘프와 발브레이브 조종사들이다. 지오르 학생들의 희생을 보면 처음 도르시아 군의 폭격이 시작으로 가장 잔인한 학살은 도르시아 군의 독가스 살포다. 베르사유조약과 같이 현대인류는 전쟁에 독가스 살포를 금지하도록 세계조약을 만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19세기가 지나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전쟁의 양상이 군인들끼리 싸우는 것보다 군인이 상대국가의 군인 및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보면 항공기술이 발달하여 공중폭격이 주요전략이 되었는데, 그 공격대상이 군사기지나 작전지역이 아니라 민간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장소인 것이다.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적진의 보급과 안전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민간인이 상대편의 전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타국의 국민과 군인은 결국 같은 국가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전쟁은 민간인 학살이 주를 이루었으며, 공격수단이 총과 칼처럼 백병전이 아니라 미사일이나 독가스를 이용한 광역적인 공격방법이란 점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을 읽다보면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에 대한 일화가 나오는데, 전쟁 중에 총과 칼에 의해 죽은 사람보다 화학전과 세균전에 의해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이 가장 많이 희생당한 때가 바로 도르시아 군대가 거대한 드릴로 침공하는 장면에서 독가스이었다.

   

전쟁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인도적인 세계조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민간인을 학살하는 행위를 누가 사주하고, 그로 인해 무엇을 얻는 것인가? 그것은 뒤 세계에서 계속 권력을 유지하던 마기우스의 안위다. 그 존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국가를 공격하고 사라지고, 그 국가의 민간인들을 살해하며,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으로 세계의 평화가 지켜진다고 한다. 처음부터 아루스와 도르시아는 적대국이지만, 마기우스 평의회에서 몰래 비밀 회담을 열어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려고 했다.

 

11. 마기우스와 <혁명기 발브레이브>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마기우스의 존재는 특이하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어떻게 보고 판단하는 것인가? 의식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가 있어서 의식이 있는 것인가? 마기우스는 육체적 조건이 없다고 단지 정신적 영역을 가진 존재다. 그들은 계속 어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몸으로 이동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결국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그것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육체의 소멸은 정신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체의 소멸로 끝나는 것이다.

 

마기우스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실존하는 존재는 아니나, 적어도 작품 내에서 인류에 의해 탄압을 받는 과거가 나온다. 그 중에서 17세기 마녀사냥 광기에 휩쓸린 유럽의 모습이 나온다. 그것은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누가 거기에 불을 질러 화형에 처하는 모습이다. 마녀사냥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심한 고문을 받고, 거짓자백을 하여 결국 최후에는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이 부당하게 죽어야 한 이유는 보통 인간과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르게 본다면 마기우스는 부당하게 타인의 몸을 점령하여 그들의 존재를 그들의 것이 아니라 마기우스의 것으로 바꾸었다.

   

몸을 빼앗아도 그 인간의 기억과 경험은 여전히 존재하는 점에서 마기우스는 작품으로 본다면 원인미확인 존재이고, 현실에서 본다면 인간을 지배하는 사상 내지 변질되는 인간의 모습이다. 카인은 12년 쿠데타에선 우정과 명예를 중시한 군인이나, 지금은 잔혹한 권력자로 나온다. 아니라면 반드시 카인이 아니더라도 어긋난 권력자는 늘 존재한다. 최근 독일에서 등장하는 네오나치나 혹은 일본의 전범후예들이 보여주는 언행은 마기우스와 같은 존재는 계속 끊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왜 마기우스는 인간을 지배하려고 뒤에서 세계를 조종할까? 처음부터 그들은 인간을 농락할 생각은 없었으나, 인간들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그 두려움은 폭력으로 변모되어 마기우스를 공격했다. 만약 서로 간의 공존을 위해 도모했다면 비극은 되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기우스는 자신들의 안위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권력욕에 빠져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들이 잡은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서 전 세계적으로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인간의 집단적 행위에서 폭력이 하나의 정의가 되었기에 마기우스는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12.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대하는 인간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제1의 자신이기도 하나 제1의 타인이기도 하다. 아기와 어머니는 본래 하나였으나 결국 분리되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의해 분리된 인간이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이 처음에 자신인줄 모를 수도 있지만, 결국 자신이라는 사실을 각인한다. 인식에 대한 조건에서 인간의 감각에 의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 정보를 습득한다.

   

그리고 그런 정보가 하나의 기억으로 축적되어 자신의 인성을 형성하게 된다. 인간은 원래부터 이성적인 동물로서 이성을 소유하고 있으나, 그 이성 자체는 인간이 살아오면서 축적된 하나의 기록이며 역사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너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이에 대해 대부분 “나는 일을 하거나 또는 공부하는 는 인간이고, 가족과 함께 어디에 살고 있으며, 지금 친구나 애인과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에서 본다면 결국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 싶은 존재라는 점에서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말하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지 먼저 정립해야 한다. 그런데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하루토와 그 이전의 마리에가 발브레이브 1호기를 타면서 자신의 기억을 자꾸 지워버리게 된다. 마리에는 학교에 오기 전에 기억이 전혀 없었으며, 1호기 안의 피노의 기억장치로 인해 자신이 예전에 발브레이브 1호기 실험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발브레이브의 에너지는 조종사의 기억과 생명이다. 발브레이브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력을 소모하고, 기억을 삭제되어야 했다. 하루토가 처음 엘 엘프를 덮친 이유는 생명력을 담보로 했기에 새로운 생명의 힘이 필요했고, 루키노 사키를 강제로 덮친 것은 인간은 생명이 위험해지면 자신의 DNA를 유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계속 누군가를 덮치는 것은 누군가를 희생하는 것이고, 그런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하루토 스스로를 희생해야 했다. 그것은 마리에와 같이 기억상실이고,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회색빛 재로 변하는 죽음이었다. 인간이란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혼자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인간과 같이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적 존재가 같이 시간적인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면 같이 어울릴 수가 없고,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도태되어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분명하나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 마리에와 하루토의 죽음에서 그들은 자신이 이때까지 쌓아온 시간들이 모두 사라져서 그 생명이 사라졌다. 시간이 없는 인간은 죽음이다. 곧 자신의 존재는 시간의 축적에 의해 조성되고, 미래라는 것은 현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시간적 축적이다. 인간은 지나간 존재에 대해서 시간이라고 하나, 현재에 대해서는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시간이기에 기억으로 남을 수 있지만, 공간은 시간에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그리고 시간에 의해 변화되는 공간은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증거다. 인간은 계속 이동을 하는 존재이기에 같은 공간에 언제까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은 기억에 의해 존재하면 타인과의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과거가 모조리 없어지면 현재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누구인가는 결론적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그것으로 인해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성이 존재한다고 인식하지 못하면 자신만 아니라 세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미하는 것이다.

 

13. <혁명기 발브레이브>와 오마쥬

사전에서 오마쥬란 단어를 찾아보면, 오마쥬란 hommage란 불어에서 온 말로 '경의의 표시' 또는 '경의의 표시로 바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술작품의 경우 어떤 작품이 다른 작품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일부러 모방을 하거나, 기타 다른 형태의 인용을 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는 오마쥬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사소한 것까지 모두 찾을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독수리5형제>와 같이 팀플레이 전개로서 발브레이브를 운용하는 것은 메카닉 계열을 보여주며, SF메카닉 애니메이션의 큰 반향을 일으킨 <퍼스트건담>을 연상하게 된다.

 

우선 하루토가 지구 지오르인들일 찾으러 갈 때 자신의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하루토가 발브레이브 조종하는 것만을 신경 쓰지 그 이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퍼스트건담>에서 건담조종사 아무로 레이는 아버지가 건담을 만든 사람 중에 하나인 것을 아나, 그가 자신이 겪은 괴로움과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 부분과 일치한다. 또한 하루토의 기체는 다른 기체와 달리 검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퍼스트건담>에서 아무로 레이가 조종한 건담은 레이저 검으로 적의 기체를 베는 모습이 나온다. 하루토의 발브레이브 역시 검으로 적을 베는 모습이 나온다.

 

또 다른 오마쥬로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네르프의 작전으로 사도를 물리치는데 있어서 에바라는 인간형 로봇이 등장한다. 에바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조종사가 필요하나, 에바를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신지, 아스카, 레이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같은 학교에 같은 반

 

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미사토가 네르프와 에바에 대한 의문을 품고 조사한 결과 에바 파일럿은 모두 신지가 다니고 있던 학교의 학생이었던 것이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사키모리학생들은 모두가 발브레이브를 조종할 수 있는 신체를 선천적으로 타고 난 점이 중요하다. 아루스의 유명한 파일럿이 발브레이브 1호기를 탑승하려다 결국 죽고 만다.

 

학교 안의 학생들이 모두 파일럿 후보라는 점과 그것을 일부로 어른들이 조장한 점을 보면 오마주적인 요소가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단순히 메카닉적인 요소로서 <퍼스트건담>과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차용한 것이 아니다. 주제적인 요소에서도 <퍼스트건담>에서 전쟁과 평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인간의 실존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경우에는 기존의 기성세대와 그에 저항하는 신세대, 제일 무서운 적은 강력한 타자보단 자기 자신이란 점이다.

 

14. <혁명기 발브레이브>에 대한 정리 및 평가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SF메카닉 작품으로서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전쟁에 말려든 신세대들의 이야기다. 기성세대들의 정치적인 이권에서 신세대들의 인생까지 억지로 조작하려는 점과 상대방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와 협박으로 대하는 점에 대해 큰 불만을 느끼고 이에 대해 저항하는 모습이 나온다. 부조리한 현실과 부당한 처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결론적으로 지오르의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은 스스로 국가를 조직하고, 국가가 존위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필요하고 또한 영토가 필요했다.

 

따라서 이들은 민주주의의 절차에 따라 정치적 제도와 체계를 정비했지만, 아루스 고위관료와 마기우스가 잠입한 도르시아 권력자들의 이권을 위해 희생당한다. 따라서 지오르는 자신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무력투쟁을 하게 되며, 무력투쟁을 위해 하루토를 비롯한 학생들은 발브레이브에 탑승한다. 발브레이브의 강력한 무력을 얻는 대신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했고, 심지어 전투 중에 죽거나 또는 하루토나 마리에는 정보기억이 소멸하여 죽게 된다.

 

자신들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폭력으로 대항하나, 그 힘에 대한 대가는 무척 위험했고, 그 저주받은 힘은 계속 이어지면 안 되고, 그 힘에 의한 희생자는 하루토 자신이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루토가 목숨 걸고 싸우는 이유는 자신이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이나 혹은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친구를 위해 싸우고, 그런 친구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다시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서 싸우는 것도 있지만, 결국 친구가 죽거나 다치면 나 역시 슬픔과 고통을 받게 되고,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친구를 위해 싸우는 것은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과 같다. 그 친구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싸우는 이유는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다. 어느 누가 다른 누군가를 강제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평화롭게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을 말이다. 만약 그런 국가가 생긴다면 누군가는 불편할 것이다. 평화롭게 사는 것은 자유와 평화라는 것을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권력자인 마기우스 입장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지오르에 대하여 계속 무력으로 억압했고, 결국 마기우스는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멸망한다.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작품 이름 자체에서 나타나듯이 발브레이브는 조종사를 죽이게 하는 강력한 병기이나, 혁명을 위해 사용되는 기계이다. 혁명이란 지배계급에 의해 핍박받는 피지배계급이 그 지배계급을 전복시키는 현상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자신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권력체계와 무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발브레이브와 같은 강력한 무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이중적인 일본을 보여준다. 일본 문화적 특성 중에 할복을 작품 내에서 보여주는데, 발브레이브 1호기의 임계게이지가 666에 도달하면 할복블레이드 사용한다.

 

 

할복이란 것은 일본의 유미주의(唯美主義)적인 요소가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일본에서는 불꽃놀이와 벚꽃놀이가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불꽃을 쏘아 올리면 가장 아름답고 화려할 때 사라지고, 벚꽃놀이도 가장 활짝 핀 벚꽃 잎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아름답다. 결론은 가장 아름다울 때 사라지는 것에서 유미주의에 대한 성향이 드러난다. 할복블레이드 한 번이면 도르시아 대규모 부대조차 퇴각시킬 정도로 매우 강하고, 그것은 곧 지오르의 생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오르의 위기에서 생존에 대한 유일한 방법이 할복블레이드라는 점에서 할복 자체가 지오르의 운명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일본 VS 일본이란 대립구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 지오르는 기존의 기성세대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지만 한편으로 할복이란 일본 특유의 문화를 작품에 반영했다. 제 아무리 민주주의국가조차도 자신들이 가진 역사와 문화적 전통에 의해 그들만의 성향이 도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혁명이란 단어가 나오므로, 혁명은 그 자체로 성공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혁명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단순히 A-1라는 자를 쫓아낸 B-1이란 자가 다시 A-2로서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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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년 전 글이지만 댓글 남깁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은발소년이 머리는 엘엘프인데 눈동자색은 녹색이 아니고 파란색이에요 쇼코 후손 아닌 걸로 보여요

만화애니비평 2022-03-11 16:00   좋아요 0 | URL
나중에 확인해 볼게요
 

개인적으로 문화인류학적인 요소로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대해 이번에는 단군신화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동기는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도서를 보면서, 단군역사에 대한 연구를 보면서이다. 딱히 본 서적에서는 그런 내용을 상세히 다루지 않으나, 적어도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원래 민족주의자 내지 사회진화론자에서 아나키스트 내지 사회개조론조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단재 선생 역시 역사관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의 사상은 근대주의에 입각했다. 근대화라는 산업체는 1960년대부터라도 근대사상은 이미 일제 강점기 독립군 내지 열사들과 같은 시대지식인에 의해 확립된 셈이다. 그러나 근대사상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반영되지 않았고, 단지 경제적 근대화만 이룩했다. 뿌리 없이 자란 풀과 같아 모서리의 잎자락이 모두 병에 시든 것이다. 어쨰든 단군신화를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그 시대적 요건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선 곰과 호랑이에서 우리는 토템이즘이라고 하는 동물숭배 원시적 종교체계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환웅일족이 가진 것은 풍백, 우사, 운사, (뇌사) 무리 3000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환웅이라는 군주는(배달국을 세운 것이 한국의 최초의 국가이지 단군이 세운 것이 최초의 왕국이라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는 것은 나 역시 그래 여긴다.) 토템이즘이란 종교적인 사회구조가 아니라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정령적인 존재를 신으로 받드는 부족의 수장이다.

 

그가 배달국을 만들 시기에 문화인류학적 관점 또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인 요소로 본다면 결국 지리적, 기상학적, 환경학적, 경제학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우선 우사와 운사, 풍백은 기상조건을 말한다. 그것은 기상학을 알던 지식인들이 환웅일족은 보유하고 있고, 그들은 농경사회의 기술을 가진 셈이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벼농사로 통해 얻을 수 있는 쌀이란 식량이다. 벼농사 경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강우량이다.

 

 

비나 바람은 농경사회에서 벼를 가꾸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자다. 한국의 기후가 몬순기후로 여름에 많은 호우와 가을에 건조해지는 점에서 특히 한가위라는 추석문화는 벼농사의 전형적인 축제문화로 볼 수 있다. 벼는 여름에 많은 물이 필요하고, 가을에 건조해야지 수확을 제대로 얻을 수 있다. 벼가 여물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 크기가 되어갈 때 호우가 내리면 벼이삭이 무거워서 모두 농경지로 빠져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환웅일족은 농경사회로서 그들은 농사를 짓기위한 도구를 지니고 있었다. 즉 신석기 이후의 뛰어난 석기문화와 더불어 청동기문화가 그들의 중요한 농경문화라는 점이다. 그가 가지고 온 삼부인에서 칼이란 권력적 상징이 중요한데, 칼을 가지고 있으면 구식무기에 비해 단단하고 날카로워 살상력이 강력하다. 만약 청동기문화 부족이 석기문화를 가진 부족과 만나면 석기문화족들은 모두 사멸한다. 망자의 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흡수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토템을 가진 부족은 어떠한가? 곰과 호랑이에서 나는 그들의 음식문화에 대해 생각해봤다. 곰이란 동물은 육상의 나무와 풀에서 나오는 열매와 과실을 먹고, 또한 육상동물이나 강에서 나오는 물고기도 섭취가 가능하다. 곰이란 동물은 생물학적으로 잡식성이고, 생물이 살 수 있는 조건이라면 식량공급이 가능한 동물이다. 하지만 호랑이는 대부분 육상동물을 먹는다.

 

음식문화에 대한 조건적으로 곰과 호랑이는 식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금 알아야 할 점은 흔히 우리는 곰은 순하고 둔하다고 하나, 야생의 곰은 사납고 빠르고 무서운 동물이다. 곰이나 호랑이 모두 야생에서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두려운 존재다. 호랑이와 곰을 만나면 어디가 더 치명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동물이다. 그러나 토템적 요건에선 결국 음식문화로 넘어간다면 환웅일족과의 만남에서 농경사회부족과 채취 내지 사냥일족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원시부족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에서 원시부족 중에서 평화로운 부족이 있는 반면 매우 사나운 부족이 존재한다. 그들의 성질을 좌우하는 것은 일정한 토지위에 놓인 인구수가 문제라는 점이다. 만약 1제곱킬로미터 내에서 인구가 100명과 1000명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그들의 식량공급이 사냥 내지 채취, 수렵이라면 결국 계속되는 사냥과 채집으로 식량이 되는 동식물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같은 식량을 두고 서로 싸우는 것이다. 원시부족들이 전쟁한다고, 그리고 살해하고 인육을 먹는 것은 잔인하고 야만적이나, 우리가 그들의 생계를 책임을 질 수 없다.

 

환경적인 조건에서 야생의 생활은 생존적인 법칙이 곧 인간들에게 식량의 유한성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전쟁노예 이전에는 전쟁포로는 대부분 돌려보내거나 모두 죽이는 것이 관례인데, 그 이유는 전쟁포로를 수용할 수 있을만큼 식량이 넉넉치 못했다. 그래서 인육을 먹는 부족이 생긴 이유다. 그렇다면 문명을 가진 환웅부족에서 곰과 호랑이가 서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곰만 남고 호랑이가 나간 이유는 무엇인가?

 

곰은 3·7일만에 인간으로 된 것은 결국 농경문화에 적응했냐이다. 다시 넘어가면 식량은 벼농사 위주이기 떄문에 쌀을 주식으로 삼고, 채집이나 사냥이 아닌 탄수화물로 영양분을 보충해야 한다. 하지만 쌀을 이용한 탄수화물보다 오히려 고기로 통해 얻는 지방과 단백질이 칼로리도 높고, 특히 단백질은 인간에게 다양한 영양소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쌀로만 보충할 수 없는 영양성분들을 쑥과 마늘과 같은 약용채소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본다.

 

고기만 먹던 수렵부족에겐 쌀을 비롯한 약용채소가 자신의 식성에 맞지 않아 스스로 떠나갔을 확률이 높다. 곰은 동물도 비롯하여 과일과 야채도 먹기 때문에 곰 토템을 지닌 부족이 농경문화에 적응했을 것이다. 농경문화의 이전은 결국 식량문제에 의한 인구증가 문제다. 같은 땅에서 수렵이나 채렵으로 얻는 식량보단 농사로 얻는 식량이 더 많고, 게다가 농사는 혼자가 아니라 집단노동이기 때문에 야생으로부터 안전을 지킬 수 있으며, 인간들 무리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장소에 살지 못하거나 혹은 살 수 없도록 내친 종족들은 유목지를 이동하면 살 수밖에 없다. 계속 한 곳에 정착할 경우 동물들은 모두 잡혀 먹히게 되고, 그 동물들을 키우기 위해 식생들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런 환경적인 조건에 의해 유목은 비과학적인 생활이 아니라 오히려 더 경제적인 조건과 환경적인 조건을 생각한 과학적인 생활양식이 된 것이다.

 

신화라는 것은 신의 이야기라고 하나, 사실은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이란 본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나, 혹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고 그것에 대한 욕망으로 통해 나올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억압과 통제, 왜곡에 의해서도 신화라는 이야기는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화는 하나의 과학성보단 공시적으로 비과학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 단군신화가 한국의 건국신화라고 하나, 그 이면에는 역사적 과학적 증거가 있을 터이다. 이번에 내가 적은 글에 대해 이미 누군가 연구했거나 학설로 인정받거나 또는 어느 서적에 실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런 것을 누가 제시하기보단 스스로 사고하여 적는 것도 역시 좋은 학문적 업적이라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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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웃기는 일이 있었다. 조경태 의원이 친노보고 민주당에서 나가라고 했다. 게다가 지금 안철수 의원과 당을 합하는 꼴에 친노보고 나가라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나 내 책상에는 조경태 의원이 저술한 세상과의 소통이 있다. 그나마 내가 예전에 조경태 의원을 좋게 본 것은 그가 토목공학 출신자고, 게다가 대학원출신이라 테크로라이트라는 이른바 기술관료가 없는 이 정치체제에서 공학출신자인 만큼 정확한 도시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그가 문재인 의원에 대한 비판까지 좋다.

 

하지만 자신이 노무현의 후광을 얻고, 그 책에는 노무현의 이름으로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 했다. 그런 그가 하던 말이 무엇인가? 요새는 정치에 염증이 나서 이제는 거의 어둠의 오덕세계에 깊이 열반을 들어가고 있다. 하루 평균 애니메이션 시청시간 2시간 정도, 물론 주말이 아닌 평일에는 일도 하고, 야근도 하고, 이래저래 하다보니 주말에 몰아보나, 오덕을 위한 오덕으로서는 충실한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물론 책도 읽고 하고, 서평도 적기도 하지만, 그런 정신적 스트레스를 벗어나고 한다. 그럴 때에 안철수가 바보 노무현이란 이름을 들먹이고 있다. 솔직히 안철수 의원이 지난 대선부터 총선까지 봉하마을을 오고가고 한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명제에서 어긋난 이유는 그 주변의 인물이다. 그의 측근과 민주당 요원들이 노무현과 친노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말을 생각해보자. 정말 표리부동하다. 바보 노무현이란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지지도가 불리하기 때문이다. 친노를 뺏자고 해도, 과연 민주당에 친노는 몇 %? 라고 되묻고 싶다.

 

최근에 봉하마을의 권양숙 여사가 봉하마을 사저를 노무현재단에 위탁기부하고 자신은 다른 집에 간다고 한다. 노무현재단이라고 해보았자, 거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진 재단으로, 봉하마을에 가면 봉하사저를 제외하고 어디를 누벼도 통제하는 곳은 없다. 사람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남의 가게나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어디든 누빌 수 있다.

 

전에 봉하마을에 갈 떄 권양숙 여사가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이 생각난다. 딱 경호차량 1대 후에 본 차량이 등장한다. 처음에 오는지도 몰랐다. 알고보니 지나간 것이다. 정치적 명제를 위해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명제조차 사실은 권력유지라고나 혼자만의 숭고한 의지라거나 또는 빛 좋은 개살구, 요새 안철수 의원 주변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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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키안입니다.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많이 힘들다. 그렇다면 안녕하세요. 키안입니다.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많이 힘들다. 그렇다면 한국에 종사하는 많은 애니메이터들, 만화가들, 외에도 관련 종사자들(게임개발자,일러스트레이터)은 과연 한국을 떠나 해외로 나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래도 계속 한국에서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좋을까?"
~라는 주제로 토론발의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 콘텐츠업계가 왜 힘든가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주셨으면 좋겠고요.

회원분들 각자의 의견주장은 되도록 댓글이 아니라 게시글로 했으면 좋겠다는 것도 언급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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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키안님이 저에게 주신 내용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실제로 그 바닥에 근무하지 않은 지라 정확한 데이타나 통계는 알 수 어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에 종사하는 많은 애니메이터들, 만화가들, 외에도 관련 종사자들(게임개발자,일러스트레이터)이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간다는 점입니다.

 

많은 인력들이 특히 일본에 집중되며, 때에 따라서는 미국이나 유럽으로 갑니다. 미국에는 디즈니와 같은 대규모 자본을 갖춘 업체가 있고, 유럽의 경우 예술성을 강조하기 그렇습니다. 다르게 본다면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가 우리로선 일본에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나. 프랑스 안시영화제나 앙굴렘 만화전은 세계적인 만화애니메이션 행사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도 만화규장각에서 운영하는 부천국제만화축제와 부천국제애니메이션축제 등의 행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밖으로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운영하는 서울애니메이션축제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 앙굴렘이나 안시와 같은 사례를 보면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곳은 도시 전체가 축제라면 우리의 경우는 도시에서 축제하더라도 일부 구나 동으로 제한될 뿐만 아니라 많은 참여객들을 위한 인프라조차 부족합니다.

 

예전에 저도 부천국제애니메이션축제(PISAF)나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행사에 참여할 때, 2011년 PISAF 떄는 숙소예약이 가능했지만 2013년 BICOF에서는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방문객도 아니고, 표찰에 Guest 내지 VIP를 차고 있는데도 말이죠(여담이나 BICOF 2013년 행사 위원회 부위원장이신 교수님이 부산에 사시는데, 여관에서 제자들과 방을 잡아 주무셨다고 합니다).

 

종사자는 아니나, 비종사자로서 보는 입장이라면 그 만큼 유관행사에 대한 인프라 내지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실제 만화규장각을 가면 주변에 식당이 부족하고, 여러모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합니다. 물론 내부에 전시관이나 상영관 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나, 이용자에 대한 접근성이나 편의성을 보면 많은 불편함은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행사조차 불편함이 감내해야 하는 현실에서 종사자에 대한 현실성은 당연히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행사는 그 개최를 위한 기획과 예산, 실행이 필요하지만, 이와 반대로 이런 특별한 이벤트가 없다면 종사자들의 일상적인 부분은 어떤가라는 의문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우리가 즐기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기획하는 입장이나, 평소 전반적인 상황을 보자면, 그들은 우리에 비해 매우 심각한 상황에 놓인 것은 분명합니다.

 

자세한 통계까지는 아니나 대략 년간 애니메이션 관련 인력배출을 고려하면 천 명 이상이 될 것입니다. 각 지역별에 있는 만화애니메이션고등학교 및 영상영화예술고등학교(하단 참조, 자료출처 :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http://www.koscas.com)에서 배출디는 인원이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예전에 비해 만화애니메이션 전공을 다루는 대학교는 점점 늘어가는 추세고, 만화애니메이션을 다루는 특화고등학교 역시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해마다 인력이 증원되는데, 이 많은 인원이 국내에서 활동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결론은 만화작가 내지 라이트노벨작가, 게임제작진 내지 애니메이터 등으로 활동하는 것이 이들의 직업일 것입니다. 디자인 내지 일러스트로 통해 활동할 수 있겠지만, 디자인 역시 만화애니메이션과 연계되므로, 이들이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확대적 방안은 매우 부실합니다. 애니메이션은 제작에서 화면에 대한 편집과 동화작업이 위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음향적 조건과 더불어 서사적 조건이 따릅니다.

 

특히 서사적 조건인 스토리텔링에서 지나친 규제와 여성가족부의 개입, 각종 시민단체(일부 여성 및 기독교단체)들에 의한 제재에서 창의력이 기본이 되는 만화애니메이션에 치명적입니다. 그림이나 영상으로 드러나는 모습 자체가 하나의 서사를 가지므로, 그 서사적인 담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규제가 너무 심한 점입니다. 규제의 압력은 TV 애니메이션에서 상당히 치명적이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 OVA 내지 극장용으로 되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TV 애니메이션 이외에는 광고 내지 홍보수단이 열악하므로, 이에 대한 문제점이 따릅니다. 결국 한국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산업을 흥행하기 위해서는 TV 애니메이션 규제 문제와 더불어, 그밖의 매체에서 홍보할 수 있는 전략적 수단이 갖추어야 합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러하나, 지금 대부분의 만화애니메이션 정책제안자 내지 창작들이 놓치는 부분이 바로 소비자에 대한 기호분석과 접근방법입니다.

 

최근 시드노벨과 같은 라이트노벨제작업체에서 라이트노벨 카페 내지 동호회, 사이트에 직접 활동하여 홍보하거나 또는 고객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시장에 대한 전반적인 개발과 홍보를 병행합니다. 그리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빠른 정보와 명확한 발매소식을 접하므로 서로간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조가 되기 위해서는 결론적으로 만화애니메이션 정책제안자 내지 문화산업의 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전환이 시급합니다.

 

그 이유는 제 아무리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국가 내지 지방자치단체에서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고시 및 공고, 조례 등을 내세워도 결론적으로 지원만이 모든 해결책이 아니라 그 지원 후에 얻을 수 있는 성과입니다. 결과론적인 세견과 성과주의적인 요소로만 분명히 문화산업에 대하여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 성과나 결과에 대한 비판과 자숙은 필요합니다. 그 과정과 원인에서 정책제안자나 결정론자가 소비되는 시장구조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과거 하이텔이나 천리안 등과 같은 초기 전화모뎀 시절의 동호회들은 온라인활동과 동시에 오프라인 활동을 매우 중시합니다. 한국의 서브컬쳐 문화에서 대표주자인 ACA라는 동호회는 1990년대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규모 동호회였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 젊은 중학교 내지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지금은 30~40대에 이르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당시보다 현재가 그들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 유리할 겁니다.

 

그러나 ACA라는 조직은 사라지고, 대신 여러 가지의 인터넷 동호회가 생기고, 그 동호회의 회원들은 ACA에 비해 활동범위가 주로 온라인에 머물려 있지만, 온라인이란 특성으로 많은 회원들이 가입하고 활동합니다. 특히 21세기에 이르러 모바일로 통한 스마트폰의 대두는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에게 실시간 활동이란 장점도 전달해줍니다. 그렇다면 대부분 젊은 계층인 10대부터 20대, 그 너머의 30대까지 동호회에 활동하고 그들만의 취미생활을 즐깁니다.

 

이들에게 늘 새로운 정보와 즐거움이 필요하고, 거기에 호응할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그런 콘텐츠홍보전략이 부족하며, 그들의 소비계층과 소비구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제가 딱 꼬집고 싶은 부분은 만들기 위해 인력을 배출한 것까지는 좋으나, 만들고 나서가 제일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자신들이 만든 물건들은 창고에 재고로 쌓여 있으면서 아무도 사지 않으면 결국 부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소비자에 대한 접근도가 떨어지고, 이들에 대한 정보력이 없다면 결국 무엇을 만들어도 소용없다는 점입니다.

 

소비되지 않은 한국, 소비되기 어려운 한국, 어떻게 소비되도록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수요와 공급을 맞춘다면 인력이 증가하게 되는 겁니다. 아직까지 많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등은 여가생활을 위한 문화콘텐츠입니다. 한 번 나오고 싶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문화적인 성과가 축적되어야 발휘되는 하나의 숙성된 장의 맛입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 만화작가나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은 단순히 점수가 되어 누군가의 권유로 하여 들어온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좋아해서 어렵지만 그래도 좋아하니까라는 자신의 의지로 온 겁니다. 그들이 가지던 의지가 결국은 소비자라는 입장에서 생산자로 가게 된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그들이 과거의 모습을 잊었을까요? 꼭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신도 소비자에 있었는데, 결국 생산자로 간다고 해도 좋아하는 것은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인력구조가 시작되었을까요? 개인의 능력과 역량,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천재인 월트 디즈니나 미야자키 하야오 등의 거장들이 있으니깐요. 그러나 그들은 정해진 인원이고, 그 사람만 볼 수만 없으면,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는 만화나 라이트노벨처럼 소수정예로서 움직일 수 있는 미디어가 아닙니다. 대규모 자본과 인력이 동원되어야 가능합니다. 좋은 감독이나 애니메이터 밑에 우수한 직원이나 지원군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직원이나 지원군이 누구일까요? 결론은 힘들게 고생하고 대접 못받는 것을 알면서도 한치 앞도 보지 못할 꿈을 찾는 소비자들이 아닐까요? 소비자를 배려하지 않으면 결국 추후에 그 소비자가 생산자로 될 경우, 많은 제약과 난관에 봉착합니다. 한국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산업이 쇠퇴하니 당연히 그것에 맞추어 소비자들의 입장이 곤란합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잘못 봐도 오타쿠라는 낙인이 이상하게 찍히는 세상이니깐요. 결국 약자는 누구일까요?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고생하는 분들일까요? 아니면 그분들이 생산하는 콘텐츠를 보고 즐기고, 향후 그들의 자리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얼마 전에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문화산업 부흥을 위한 "애니메이션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두고 국회에서 방청객을 모시고 토론회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과연 무엇이 얻어지고, 무엇이 나올까요? 다들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특히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국가에서 국회라는 곳은 국민의 대표자를 모아 국회의사당에 법률을 제정 및 개정, 그리고 여러 국가대사를 결정하고 운영하는 곳입니다. 막상 거기에 가도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대표로서 애니메이션을 위한 토론을 제대로 했을까요? 아니면 거기 참석한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나 제작사 관계자들이 국민 속에 있는 소비자를 생각했을까요? 저는 그 자리에 가고 싶어도 회사일로 또는 너무 멀어서 못갔으나, 주변에 아는 분의 소식통으로 조금 들었습니다.

 

덧붙여서 한국에는 만화애니메이션과 같은 서브컬쳐만 아니라 영화나 소설과 같은 대중문화도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원래 강대국과 같이 어느 정도 요건이 되는 국가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찾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역사적 전통을 살리고, 문화예술을 발달시킨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프랑스, 독일, 스위스, 영국 등과 같은 유럽국가에서는 세계적인 관광소가 되고, 다양한 문화유산과 전통문화가 남아있습니다.

 

게다가 문학과 영화, 미술과 음악, 철학 등과 같은 학문적 역량도 탁월합니다. 그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마법이 아니라 그 마법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번역이나 암기는 잘 합니다. 그러나 창작이나 그 이상의 성과는 나오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최근 규제개혁이란 정치적 이슈에서 우리에게 반강제적으로 인입된 계몽 아닌 계몽부터 청산하는 게 바르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계몽이란 그 유명한 계몽주의 관념철학자 칸트의 말처럼 누가 깨우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우쳐야 하니 말이죠. 그런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은 이상 문화강국은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강원대학교 영상문화학과 http://vculture.kangwon.ac.kr
경기대학교 다중메체영상학부 애니메이션과 http://web.kyonggi.ac.kranimation
경동정보대학 게임애니메이션과 http://ga.kdtc.ac.kr
경민대학 카툰애니메이션과 http://kcms.kyungmin.ac.krcartoon
경북과학대학 포장디자인계열 산업디자인전공 http://www.kbcs.ac.kr
경북전문대학 영상미디어과 http://blog.naver.com/kbcackr
경성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부 http://ks.ac.krDicon
계명대학교 미디어아트대학 영상애니메이션과 http://www.vakmu.co.kr
계원조형예술대학 디자인계열/애니메이션전공 http://www.kaywon.ac.kr
공주대학교 영상보건대학 만화학부 http://www.mongchi.com
공주영상정보대학 애니메이션과 http://cafe.naver.com/anisul.cafe
극동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과 http://www.kdu.ac.kr
극동정보대학 영상컴퓨터과 http://home.kdc.ac.kr/motion/
 
남서울대학교 애니메이션과 http://ani.nsu.ac.kr
 
대구미래대학 예체능계열/애니메이션과 http://ani.dmc.ac.kr
대구예술대학교 디자인계열 애니메이션전공 http://www.tau.ac.kr
대불대학교 디자인학부 만화애니메이션과 http://class.daebul.ac.kr
동강대학 정보산업디자인과 애니메이션전공 http://www.dkc.ac.kr
동서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부/애니메이션 전공 http://dicon.dongseo.ac.kr/VR
 
명지대학교 디자인학부 영상디자인전공 http://design.mju.ac.kr
명지전문대학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 http://www.mjc.ac.kr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만화.애니메이션과 http://home.mokwon.ac.kr/~ani
 
백석대학교 디자인영상학부 영상애니메이션 http://community.bu.ac.kr/design
벽성대학 공업계열 VR 게임개발과 http://www.byuksung.ac.kr
부산경상대학 컴퓨터그래픽디자인전공 http://www.psks.ac.kr
부산예술문화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 http://ani.pia.ac.kr
부천대학 FX애니메이션과 http://club.cyworld.com/fxani
 
상명대학교 만화 디지털콘텐츠학부 http://web.smu.ac.kr/art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과 http://design.ac.kr
선린대학 시각디자인계열 http://design.sunlin.ac.kr
성균관대학교 예술학부/영상학 전공 http://art.skku.edu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과 http://www.sejong.ac.kr
숙명여자대학교 디자인학부 시각영상디자인전공 http://www.sookmyung.ac.kr
순천대학교 조형예술학부 만화예술전공 http://cafe.naver.com/scartoonart.cafe
순천향대학교 공연영상미디어학부 영화애니메이션전공 www.sch.ac.kr/filmani
신라대학교 IT디자인대학 만화/애니메이션디자인전공 http://cadesign.silla.ac.kr
 
아주대학교 정보통신대학/미디어학부 http://media.ajou.ac.kr
안산 1 대학 디지털에니메이션과 http://ani.ansan.ac.kr
영산대학교 CT대학 시각영상디자인학과 http://vdmg.ysu.ac.kr
예원예술대학교 만화게임학부 만화애니메이션전공 http://www.yewon.ac.kr/Subject/cartoon
용인대학교 예술대학 디지털미디어과 http://df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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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대학 애니메이션과 http://www.yuhan.ac.kr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학부 영상디자인전공 http://mid2008.cafe24.com
인덕대학 만화영상애니메이션과 http://animong.ind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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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대학 게임전공 http://game.jangan.ac.kr
전주대학교 문화산업대학 만화애니메이션전공 http://club.cyworld.com/jeonjuani
조선대학교 미술대학/만화애니메이션학부 http://www.chosu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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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사전적 의미와 환경과학적 고찰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 가르간티아의 의미를 찾아보니 스페인어로 gargantilla로 나타내며, 사전적 해석은 목 주변에 두르는 여성의 장식품, 목걸이, 염주 등이다. 즉 여자가 목에 두를 수 있는 장식품을 의미한다. 그리고 취성(翠星)이란 푸른 별이라는 의미다. 취라는 한자어는 푸른색과 물총새(조류) 등을 의미한다. 결국 <취성의 가르간티아>이란 의미는 푸른 별의 여성의 목에 장식하는 목걸이를 의미한다. 그럴 이유를 생각하면 취성은 푸른 별인데, 지구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면 푸른색의 공처럼 보인다.

 

물론 중간에 녹색과 황새 그리고 흰색이 보인다. 녹색은 숲이고, 황색은 모래의 사막, 흰색은 구름과 얼음이다. 대규모로 조성된 도시지역에서 불빛이 가득해 보이나, 기본적으로 지구는 푸른 별이라고 한다. 그것은 태양에서 빛을 지구로 보내면 다른 색들은 전부 흡수할지어도 파란색의 파장은 반사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태양의 프리즘에서 푸른색을 반사하는 지구는 푸른 별로 보이는 것이다. 푸른색은 결국 지구의 생명이 넘쳐나는 생태계적인 별이라는 점이다. 물과 생명이 어울려진 생명의 푸른 별 지구, 그것만으로 지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자연주의자 내지 환경론자들의 입장에서 지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고, 인간의 존재는 자연 앞에서는 그저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식량과 물 부족, 에너지자원부족, 환경오염 등과 같은 자연적 재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자연재해라는 것은 결국 자연의 운동에 의해 발생되는 태풍이나 해일이 존재하나, 그것은 하나의 자연적 법칙에 의한 운동으로 볼 수 있다면, 이제는 인간의 지나친 개발에 의해 자연의 법칙과 운동은 무너지게 되어 지구는 각종 환경재난으로 가득하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 지구에는 인간이란 생명체가 존재한다. 하지만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이에 따른 환경오염이 가중되고, 언젠가는 자원의 고갈로 인한 전쟁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구에 심한 자연재해가 닥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환경과학적으로 지구환경시스템을 본다면, 우선 현재 우리는 지구대기 온난화로 인해 기온이 상승하고, 지구의 온도를 컨트롤하는 극지방의 얼음이 녹고 있으며, 지나친 산림파괴로 숲과 나무들이 사라진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밀림, 그런 밀림들이 조성된 곳에 대해 마구잡이로 벌목을 하고, 지나친 개간과 화전은 지구의 대기오염을 가중시킨다.

 

이런 연쇄적인 환경적 작용으로 인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담수의 상당히 많은 양을 차지하는 극지방의 빙하가 사라지면, 그 작용으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한다. 매해 해수위를 측정하면 계속 상승 중이며, 그로 인해 군도와 같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은 해수로 인해 육지부가 사라지고, 해수위의 상승으로 인해 바다의 파도의 힘이 강력해지기 때문에 그 만큼 해일에 의한 피해도 가중된다. 실제 미국 플로리다주에 닥친 해일피해나 동남아시아권의 쓰나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2. 분쟁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인가?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도 그런 분쟁적 동기가 바로 지구환경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 온난화가 지속되면 지구의 기온이 계속 상승하기도 하나, 간빙기라는 빙하기도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지구의 미세먼지가 계속 대기권을 가리거나 또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운동, 내지 자전축의 기울기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심지어 지구의 기온이나 기상학적 조건은 달의 인력이나 태양의 흑점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거대한 에너지가 지구 내만 아니라 지구 외부에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는 바로 그런 지구환경시스템이 인간에게 좋은 환경이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벌어지는 것이 사건의 시초다.

 

발단의 원인에서 처음에 인류은하동맹이란 인류가 만든 조직에 속한 레드 소위라는 청년은 오로지 동맹의 적인 히디어즈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다. 그는 오로지 히디어즈를 멸살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다. 그가 히디어즈와 대규모 전투 도중에 조난당하여 우연히 지구라는 별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곳에 사는 인간들은 문명사회(레드소위)의 거주자인 레드 소위 입장에서는 미개한 수준의 문명이었다. 레드 소위는 첨단화된 정보통신체계의 체임버를 조종했고, 그가 도착한 가르간티아라는 배는 디지털로 통해 자동으로 운영하기보단 인간이 직접 몸과 정신으로 노동하는 문명이었다.

3. 레드 소위가 바라본 가르간티아

문명적 수준으로 본다면 항공기는 없었고, 선박으로 해양을 이동하면서 물고기나 해산물을 낚시하여 생존하고 있었으며, 체임버라는 첨단기기보단 윤보로라는 인간이 직접 운전하는 로봇이 있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모두 문명의 혜택보단 자연의 공간에서 문명의 소유물로 통해 살고 있었다. 자연이란 인간에 대해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맞추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레드 소위는 가르간티아와 조우하면서 그들이 오랜 전에 자신과 같은 인류였고, 그들은 지구에 계속 남아 오랫동안 거주한 것을 알았다.

 

결국 진화라는 관점에서 레드 소위는 문명이 진화한 세계에 있었고, 가르간티아의 사람들은 문명이 진화보단 퇴화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미개했던 것이다. 가르칸티아이란 것은 대규모 선박들이 하나로 연결하여 선단을 꾸민 공동체로서 가르칸티아가 여성의 목걸이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배는 여자의 이름을 붙인다.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에서 안개라고 불리는 배들의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 보여준 모습은 모두 미소녀 내지 미녀였다. 그들이 여성이 나온 이유는 인간은 선박을 여성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적인 요소로서 모자, 신발은 여성성을 의미하는데, 배도 역시 담을 수 있는 그릇이란 점에서 여성으로 본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승무원으로 여자를 태우지 않은 이유는 배 자체가 여성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태우지 말아야 하는 관념(터부)이 있었다. 하지만 물질적 조건으로 여성은 주기적으로 배란에 의해 생기는 월경이 원인이었는데, 그 이유는 옛날 선박은 모두 엔진이 아닌 인력이나 풍력, 조류에 의해 움직이므로 해상 위에서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만약 바다로 출항하면 상어나 위험한 바다동물이 월경으로 인해 배출된 혈액의 냄새를 맡고 찾아와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자면 문화인류학적(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으로 이슬람문화가 돼지고기를 혐오하는 것은 자신들의 문화적인 관념이나, 오랜 고문서에는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던 만큼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이유가 결국 물질적 조건에 의해 되었으며, 그것이 하나의 금단의 조치가 된 것이다. 생각하면 간단한 것이, 돼지는 건조하고 마른 곳보다는 축축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 살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사막지역에는 습기가 부족하기에 돼지를 키우기가 어렵고, 실제 키운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른 경제적 비용은 막대하고,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관건이 조성되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가르칸티아는 레드 소위가 보기에 매우 비효율적인 연합이다. 많은 배가 같이 있으면 행동하기 어렵고, 강한 무기도 없으며, 해적이 나와도 멸살하지 않고 최대한 희생을 줄이려고 한다. 게다가 자신들이 싸운 히디어즈와 비슷한 고래오징어가 나와도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레드 소위가 고래오징어를 죽이면 주변 사람들이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레드 소위를 바라본다.

 

4. 레드가 보는 가르칸티아의 삶

레드 소위는 단지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헤게모니, 즉 히디어즈를 모두 섬멸하는 것만이 전부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는 전사이다. 그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고, 오로지 전투를 수행하는 전투요원이었다. 하지만 레드가 가르간티아에 오자, 전투가 전부인 그에게 여기는 다른 가치관을 받아들이야 했다. 그것은 레드라는 인간이 오로지 전투를 위해 살았다면, 여기서는 전투가 아니라 삶이란 자체를 위해 살아갔다. 모두가 서로 돕고, 될 수 있는 한 모두가 자신만의 일을 하여 그 노동의 가치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특히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여자주인공인 에이미의 경우 그녀의 남동생인 베벨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 베벨은 심장이 매우 약한 소년으로 조금만 무리하면 생명에 큰 지장을 줄 수 있을 만큼 약하다. 그래도 바벨을 위해 에이미는 열심히 일을 하고 그를 돌본다. 레드 소위는 그런 에이미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런 힘도 없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베벨을 보면서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레드 소위의 가족들은 연맹의 판단 아래 필요성이 없다고 여겨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은하동맹은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행동한다.

 

즉 그곳은 인간이란 존재란 서로 간의 교류에 의해 존립되는 곳이 아니라 상하체계가 명확하고 오로지 명령과 복종만 강조되는 사회다. 문명발전 수준은 현재 과학기술과 비교조차 되지 않으나, 정치제도를 보면 전형적인 군국주의 내지 전체주의이다. 군국주의는 국가나 국가의 부속원인 국민이 모두 군대에 있는 것과 같은 사회체계이다. 그러므로 레드 소위는 계속 전쟁을 수행하며, 그의 가족들은 전쟁에 필요 없는 존재이기에 폐기처분 되었다. 인간의 존재적 가치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국가의 필요 여부에 따라 삶과 죽음이 나누게 된다.

베벨은 그런 레드 소위에게 보자면 새로운 존재였다. 베벨은 육체적 노동을 할 수 없으며, 군인으로 살아온 레드에게 군인은 적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육체적 노동력이 없는 베벨에겐 전투력이 없다.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인간이 속한 사회에서 필요한 인간이어야 하고,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노동으로서 인간의 가치가 정해진다. 베벨은 사회적 가치 내지 노동력이 없으므로 어떻게 보면 에이미에게 짐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에이미는 오히려 자신이 여기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베벨이란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과 인간은 서로 마음을 의지하고, 도움을 나누며, 내가 아닌 타인과의 공존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레드 소위에게 인류은하동맹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거기서 죽으면 끝이고, 살아남으면 전투 중에 진급하고, 또는 그의 상관처럼 사라져갈 수 있다. 레드 소위가 본 가르칸티아에는 분명 신분적 차이는 있었다. 그래도 그 신분은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통제하기보단 선단을 운영하기 위해 선단장과 각 선주들이 모여 있으며, 이들 각 선주에게는 자치적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대규모 선단에서 각 선박 내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고, 이들 역시 사로 의지하고 살아간다.

 

5. ​가르칸티아라는 코뮌(Commune)

이런 사회적 공동체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프랑스어로 ​코뮌(Commune)이라 한다. 코뮌(Commune)이란 단어가 유명해진 시기는 1871년 코뮌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은 루이왕정을 붕괴한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 이후로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그리고 1871년 파리코뮌이 발발했다. 역대혁명 중에서 가장 잔인하게 많이 희생당한 혁명이었으며, 당초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달리 부르주아 지식인보단 일반 시민들이 주축이 된 혁명이었다. 그런 코뮌이란 단어는 결국 공동체이고, 서로 경쟁하기보단 공존의 길을 선택한다.

 

그런 코뮌이란 체계와 유사한 선단이니 공존의 대상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에게도 마찬가지다. 히디어즈의 동족이던 고래오징어에게 위협 내지 공격하지 않으면 고래오징어가 공격할 이유가 없으며, 심지어 해적이 습격해도 방어하여 도망치거나 물리칠 뿐이지 그 이상의 희생을 내지 않은 이유도 그렇다. 결국 공존을 잃게 되면 어느 한쪽이 무너질 경우, 단순히 그것이 무너진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피해가 막대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전쟁과 같은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고, 생존조건상 육상이 아닌 해상이기에, 해상 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살아갈 터전조차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결국 살아남는 방법은 경쟁이란 대립이 아니라 공존이란 방법이 우선인 것이다. 공존의식이 레드 소위에게 없는 것은 사회라는 조직이 그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라면 그 조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인지에서 차이점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평화적으로 그리고 가장 민주적으로 생존할 수 있던 시기는 열악한 환경에 일정 무리만 존재하던 원시시대이다. 서로 돕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지금이야 냉장고와 같이 음식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도구도 있고, 의약품이 보급되어 심한 질병이 아닌 이상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원시시대에는 파상풍이나 이질 등과 같은 질병에 죽거나, 또는 어떤 충격에 의해 부상당하면 생존이 불가피하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였으며, 인간수명이 길지 않았기에 연장자들의 경험이나 지식이 없으면 많이 곤란할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부족이나 씨족단위로 서로 뭉쳐 같이 무리를 지어 식량도 나누어 먹고, 다치면 서로 돌봐주기도 했었다. 단 조건은 다른 씨족과 부족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정도로 활동범위가 넓고 자유로워야 했다.

설사 서로 조우해도 서로 공격해보았자 희생만 늘어날 뿐이므로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가르칸티아의 선단은 그런 점을 보면 다른 선단과 조우할 기회도 적고, 설사 조우한다고 해도 서로 가진 물건을 물물교환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도태될 뿐이고, 정보력이 부족하면 바다 위에서 생존이 힘들어진다. 선단에서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기 위해 누군가의 정보가 필요하고, 태풍이나 해일 등과 같은 자연재해의 정보도 알려면 누군가의 정보가 필요하다. 특히 마실 물이 귀중하기에 기상정보는 매우 중요할 것이다.

 

6. 야생의 사고의 <취성의 가르간티아>

왜냐하면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 육지부가 나오는 장면을 제대로 못 보았기 때문이다. 레드 소위와 피니언이 고래오징어의 서식처가 있는 해저로 갈 때 거기는 어느 연구시설과 같이 보였으며, 주변에는 온갖 잔해물이 보였다. 환경과학적으로 보면 대기기상의 이변으로 처음에는 간빙기가 닥쳐 인류가 서로 갈등이 생겼다면, 그 후 지구는 온난화로 인해 해수위가 상당히 높아졌을 것이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의상을 보면 대부분 여름에 입는 옷이고, 베벨이나 에이미의 의상은 남미 전통복장이 생각나는 의상을 입고 있다.

 

남미권의 기후가 열대성을 띄고 있고, 인간의 몸에 열이 쉽게 빠져 나가기 위한 점과 더불어 작품 내 여성캐릭터의 모에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노출도 높은 편이다. 대기기상을 생각하면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건조하고 기온이 높은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상조건, 고래오징어의 정체성, 지난 인류의 역사 등을 현재의 가르칸티아의 선단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레드 소위가 보기엔 그들의 행동이 너무 무의미하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체임버를 사용하면 효율적인 전투, 효율적인 어류공급, 잃어버린 보물인 과거의 문명까지 쉽게 습득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레드 소위의 방법이 더 이상하고 바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가르칸티아 선단사람들에게 문명이 없는 것은 아니나, 레드 소위에는 야만 내지 미개한 종족으로 보았을 것이다. 특히 에이미가 레드 소위에게 처음 건네준 생선을 보고, 레드 소위는 어류의 시체로 여겼다. 어류의 시체를 먹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먹고 난 뒤에 그것이 제법 먹을 수 있는 식량인 것을 알았다. 결국 그들은 레드 소위에게 있어서 야생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가르칸티아라는 선단은 문명이나,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인 바다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문명이 아니라 인간이 부유하고 있는 자연이란 거대한 존재다. 레드 소위 기준의 이성적인 사고에서는 도저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무의미한 행동들이 알고 보면 오히려 그것에 대한 의미가 있었다. 무의미에 대한 의미에서 선단의 생활양식은 인간의 의식으로서 행동하기보단 무의식적인 생활양식에 의해 행동한다. 그러나 가르칸티아 선단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생활양식은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과학적인 요소가 담긴 것이다.

 

7. 쿠겔 중령의 망령

그런 공동체적인 코뮌 대신 다른 생활조건을 갖춘 조직이 있었다. 그들은 가르칸티아에 사는 사람들처럼 모두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행동양식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트라이커라는 인류은하동맹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후예들이다. 처음 인류가 간빙기의 도래로 인류의 멸망을 두려워하여 일류과학자들은 인간의 지능과 생존력이 높은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히디어즈와 고래오징어의 시작은 인간의 유전자조작으로 탄생이었다. 그것을 만든 자들과 반대하는 자의 대립이 시작되고, 결국 반대하는 자들은 우주로 나가 인류은하동맹을 만들었다.

 

그리고 쿠겔 중령과 레드 소위는 인류은하동맹 지휘아래 전쟁을 수행하였고, 2사람 모두 지구로 불시착했다. 지구로 온 레드는 운 좋게 살았지만, 쿠겔 중령은 목숨을 잃고, 그의 머신 캘리버가 쿠겔의 유령이 되어 스트라이커를 지휘한다. 스트라이커는 이른바 계몽이란 이름 아래 그들을 전체주의적인 광신도로 만들었으며, 계몽은 스스로 깨달아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억압이란 이름으로 스트라이커를 지배했다. 그 결과 스트라이커들은 이상한 의례로 사람들을 강제로 물에 빠지게 하여 수장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누군가의 희생, 그리고 그 희생으로 인해 살아남은 자들의 위안과 조직의 결성은 전형적인 전체주의국가 형태였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 조직을 결속하고 지배하며 이끄는 행위에서 가르칸티아의 생활과는 전혀 달랐다. 가르칸티아는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이 없었다. 하지만 스트라이커의 쿠겔 중령의 유령은 인간 위에 인간이 있기 보단 인간 위에 신이라는 존재로 있으려 했다. 인간의 집단에서 발생되는 군중심리는 논리적 이성이 사라지고, 군중심리로 작용되는 폭력적 성향조차도 하나의 정의와 도덕으로 변질된다. 유럽의 광기이던 나치의 잔인한 행위와 대동아공영이란 이름을 내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하는 잔인한 행위와 폭력은 부당한 것이나, 그들에게 부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스럽고 당연하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내보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 망령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상징성이 필요했다. 그 상징으로 쿠겔 중령이었고, 쿠겔 중령의 망령은 그의 머신 캘리버가 조종석을 여는 순간 확인할 수 있었다. 쿠겔 중령은 병으로 사망하였고, 시체마저 부패되지 못했다. 이미 인류은하동맹의 정치구조가 군국주의 내지 전체주의이기 때문에 쿠겔 중령의 유령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스트라이커를 지배했고, 그들은 다시 다른 선단의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했다.

8.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작품적 의의

<취성의 가르간티아>은 작품성으로 보면 13화로 끝내기에는 조금 짧았다고 판단된다. 거기에는 다양한 담론이 숨어있다. 처음으로 인류의 위기에서 그 위기를 대처하는 방식에서 인간의 유전자조작이란 윤리적 문제가 처음이다. 과학의 윤리성이 현재 큰 문제로 부상하는 것이 유전자조작에 의해 탄생되는 생명체다. 복제되는 동물들이 탄생하고, 시험관아기도 이제 이슈에서 낯선 존재가 아니다. 생명의 윤리성에서 동물을 넘어 인간의 탄생까지 넘보게 되었다. 인간이란 신이 만든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의 영혼이란 진짜 보이지 않으나 그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정신세계가 있는지 혹은 인간의 기억이란 단지 데이터이고, 그 데이터조차 위조 및 조작할 수 있는 것에서 인간의 존재성이 이 작품에서 큰 의의로 다가온다.

 

또한, 인류은하동맹과 히디어즈의 관계이다. 히디어즈의 유년 모습은 마치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 고래오징어의 어린생명이 처음 레드 소위를 볼 때, 그들은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손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레드 소위는 두려움으로 그들을 죽인다. 붉은 피가 흐르는 순간, 레드 소위는 자신이 멸살시킬 괴물 히디어즈를 물리쳐서 임무를 수행 중인지, 아니라면 인류의 후손으로서 또 다른 인류를 파괴하고 있는가에서 심한 동요를 느낀다. 또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반대되는 것이라도 결국 그들이 가진 존재성과 의지를 무조건 부정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가르칸티아의 선단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점이라고 볼 수 있다. 코뮌이란 말은 공동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고 이끌어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럽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가르칸티아의 선단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거기에서도 갈등과 문제점이 없을 리가 없다. 세상에서 완벽한 정치제도를 가진 국가나 사회는 없다. 단지 그런 이상적 가치를 삼아 끊임없이 노력하고 이끌어갈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인류가 닥친 자연적 재앙이다. 히디어즈가 탄생한 원인도 가르칸티아의 선단들이 바다를 떠돌며 살아가는 것도 자연적 조건에 의해서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대립관계를 살펴보면 ① 유전자조작으로 통한 인류의 진화론자 ↔ 그것을 반대하는 도덕론자, ② 히디어즈 ↔ 인류은하동맹, ③ 명령과 임무에 의해 사는 레드 소위 ↔ 공존을 위해 자연적 조건과 평화적으로 살아가는 가르칸티아, ④ 가르칸티아를 지켜려는 레드 소위 ↔ 전체주의적 독재정치를 만들려는 쿠겔 중령의 망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간의 가르칸티아의 선단과 해적의 전투, 피니언이 유물을 찾으러 갈 때 싸우던 고래오징어의 다툼도 있었지만, 중요한 대립은 위의 4가지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인간은 자연적 조건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누가 강제로 해야 하는지 다소 난감한 선택에 봉착한다. 인간이 자신 자유와 권리를 가질 수 있 결국 인간 모두 태어날 때 자연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물론 태어나면서 인간에겐 쇠사슬이란 억압을 받게 되나, 그 대안으로 인간들은 사회계약론을 맺게 된다.

   

사회계약론으로서 인간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 더 나아가 박애정신으로 통해 서로 간의 공존과 평화를 도모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인간을 구속하고 착취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이제 인간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욕구는 일시적으로 해소가 가능하나, 욕망은 끊임없이 그 이상의 요구하게 된다. <취성의 가르간티아>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자연까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에서 자코뱅당 출신으로 국민공회의 위원을 맡았던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연설이 생각난다.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가 아닌 타인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만일 타인이 자유가 없게 되면, 그 타인은 다른 자의 자유를 박탈하려고 하는 점이다. 만일 누군가의 희생을 강조하는 사회라면 이 작품의 각본을 맡은 사람이 만든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처럼 계속 희생을 더 큰 희생으로서 씻어져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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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25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진짜 대단합니다.
일단 밥 먹고 읽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3-25 12:26   좋아요 0 | URL
이게 바로 오덕력이란 심오한 세계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