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안타까운 뉴스를 접했다. 3모녀가 가난과 질병에 이기지 못해 마지막으로 방세를 봉투에 남긴 채 운명을 했다. 그들의 죽음에서 생각하는 바에서 단순히 이때까지 3모녀와 같은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이 드물었다면 문제가 덜 하겠으나, 저들의 죽음 이후 밝혀지는 죽음들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3모녀의 죽음은 이른바 사회의 제도 안에서 해결되지 못한 죽음이었다. 아무도 위탁할 수 없는 현실과 국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구원의 손길은 무리였다.

 

심지어 일을 하던 모친도 병으로 노동할 수 있는 육체적인 조건마저 상실했다. 그런 점에서 해고는 살인과 같다는 말은 바로 저러하다. 이 문제에 대해 논하자면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경로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흔히 저런 사람들에 대해 평소에 문제의식이 없다가 언제 어느 순간 미디어에 노출될 경우 모두 아쉬워하며 그들의 입장을 가엽게 여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쓸데 없이 보이는 참견이나 오버일 수 있으나, 평소에 저런 사람들은 많이 있다는 점이다.

 

TV에 나와 성금 얼마 주고 나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 순간이 기다리면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의 이슈로서 몰려드는 시야에서 결국 그때이지 그 후는 아니다. 돈이 몇 천만원이 기부되어 들어가면 무엇하느냐? 결국 병치료와 생활수단으로 인해 어느 순간 금방 돈은 소비된다. 그래서 일회적인 차원을 떠나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일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려면 결국 누가 할 것인가이다. "진짜 불쌍해!"라고 외치는 사람이라든, 혹은 "허허, 참 세상을 그렇게 떠나다니"라고 말하는 사람이든, 또는 이렇게 글을 적는 나도 마찬가지일 수 있을 거시다. 무관심한 자들은 몰라도, 만약 그것에 대한 사회적 이슈로서 문제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저들은 계속 일방적으로 관심갖고 도와줄 수 있는가?

 

결국은 사회적인 제도아래 명확한 관리로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럴려면 결국 사회적 함의, 즉 일반의지로서 시행된느 법과 제도가 정비되어야 하고, 그것을 하는 것은 국민이 아니라 이른바 국민들의 대표자란 점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국민전원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를 처음에는 인정하다가 지금은 하찮게 여기는 이유는, 투표권을 시행하는 자들이 정말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사회의 이익, 공공의 이익, 자신보다 처지가 어려운 이들을 위한 투표권을 수행하느냐이다.

 

대부분 옆에 들으면 그런 일반의지가 아니라 전체의지 내지 개인적 이익으로 통해 움직인다. 특히 한국과 같이 지연, 학연, 혈연이 강한 곳에는 도저히 실행되기 어렵다. 저런 자들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려면 결국 국민들의 선택점이 달려있다. 그래서 나는 3모녀를 죽음에서 자살이 아니라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것과 같이 사회적 타살이고, 그 주범은 국민들이다.

 

국민들의 외면이 죄가 아니라, 그들을 궁지로 몰리게 만든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책임이다. 투표권의 시행에서 자신의 선택이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과연 공공의 이익과 타자의 인권과 처우를 정당히 말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참고로 덧붙이면 자살한 3모녀의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거나 혹은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소시민이다. 그런 소시민들을 궁지로 몰아내면서 외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죽이는 사회와 대중들이 그들에게 보이는 눈빛에 대해 나는 한줌의 구역질과 가십감이 든다.

 

자신들이 3모녀의 죽음, 그리고 계속 터지는 비보 속에 안타까워 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위해 제대로 된 보장제도를 만드는 과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가 그런 감정을 품어 누군가에게 말함으로써 자신은 매우 인간적인 인간으로 착각한다. 그런 착각이야말로 가장 한심하다. 그 감정을 가지고 느끼는 것을 지나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정작 자신이 정의롭다면 평생 책임질 수 있는가? 소외독거 노인의 죽음과 입양아의 수치가 거의 올림픽의 메달순위권에 있는 나라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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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 축구 이야기가 나왔는데, 외국 벨기에가 엄청난 축구강국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벨기에 선수들이 유럽의 명문강호에서 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들으면서 요새 생각해본 것이 경제성장이란 담론인데,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1차와 2차를 넘어 3차인 서비스직렬에서 공학 전공자인 나로서는 3차 서비스로서 엔지니어에 속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 내의 국토개발은 많이 이룬 것이고, 더 이상 국토개발로 통한 경제활동은 좋지 못한 것 같다. 

 

특히 환경을 파괴하여 만들어 놓은 지난 한국경제는 오히려 재난이나 물부족, 대기오염 및 수질오염, 소음진동 및 일조장해 등과 같은 환경오염이란 막강한 적이 들어왔다. 결국 2차에 의한 공장이나 혹은 개발사업에 의한 국내 경제활동은 한계가 있다. 결국 국토개발은 보전 및 복원이란 환경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예전처럼 친환경적 개발이란 이름만 붙은 개발사업이 아니라 복원적인 요소로 환경사업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하천정비나 숲가꾸기 사업은 콘크리트화 된 하천이나 또는 자연환경을 원상복원은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천을 유로변경이나 준설, 숲에 있는 식물의 종을 멋대로 변경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이제는 자연을 파괴하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접어야 한다. 대신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점이다.

 

최근 국가경제의 말에서 이미 1차 산업인 농업은 거의 경고를 지나 생존위기인듯하고, 2차 산업에서 공정단계가 상당히 발전한 점에서 2차 산업 공업도 인력을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보인다. 3차 산업인 서비스도 거의 한계점을 보인다. 주택가들이 밀집한 마을에 길가를 지나가면 주변에 피자, 통닭, 토스트, 커피가게다. 이제는 이런 사소한 물품들도 대기업 자본이 들어와서 기존의 영세업체도 밀리는 판국이다.

 

4차로 보면 정보디지털인데, 이미 한국은 인터넷 보급은 세계 최고이니 이 방면도 다 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컴퓨터 핵심부품과 운영체계를 만들 수 없기에 한계성이 있다. 디지털강국이라도 결국 정보매체는 떠돌아다녀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는 역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취약하기 작이 없다.

 

그런 5차라고 불리는 여가 및 취미는 어떨까? 내가 갑자기 잡담을 적는 이유는 바로 취미 및 여가의 활동으로 경제성장을 볼 수 있나다. 예전에 국민의 정부 시절, 대기업에서 1년 동안 파는 자동차보단 영화 쥐라기공원이 더 많은 경제활동결과를 낳았다. 문화산업이 결국 21세기의 갈 길이고, 젊은 취업준비생이나 혹은 실직자에게 좋은 일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가시간이다. 한국은 여전히 일하는 시간이 많다. 누군가는 한국인이 일하는 시간을 너무 적게 주어 나중에 무엇을 할지 몰라 고민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낯설어 보이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최고의 인생은 자기의 여가시간을 내어 자기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서 취미라는 것이 딱히 좋게 볼 수 없고, 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역시 취미가 예술적 요소를 기반한다고 하나, 지난 18세기에는 산업체계가 이미 농경사회라는 점과 농민의 집단적 노동이 놀이로서 형태를 드러난 바가 있다.

 

한국에서 농사짓는 농부들이 모여 서로 노래를 만들어 같이 작업하거나 혹은 농악으로 축제를 열고 했다. 문제는 지금은 집단협력으로 통한 직업을 하는 게 아니라 분리된 공정과 조건으로 일을 하는 점이다. 아마 사무실에서 같은 팀에 있는 것보다 취미 생활로 모인 사람들이 더 많은 집단구성을 이룰 수도 있다. 취미라는 것은 인간의 시간적 소비만이 아니라 능력개발, 자아발전, 사회유대관계도 확대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여가생활은 거의 최악이다. 개인적으로 TV 드라마 공화국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끔찍한데, TV 앞에 모여 드라마를 보고 마치 현실처럼 보이는 파생실재에 현실로서 받아들이거나 혹은 현실에 적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고 착각하는 중2병 내지 오타쿠보다 심각하다.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에 빠진다는 점은 점점 일원화적인 문화형태로 되어 결국 다양성을 만들지 못한다.

 

취미나 여가생활은 다양한 문화나 활동에 기반되어야 산업적인 요소가 된다. 이른바 스토리텔링화 한다는 문화산업에서 그것이 기반되는 콘텐츠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중권 교수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아주 좋은 말이 나온다. "상상력은 미래의 윤리"라는 점이다. 상상력이야 말로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문화산업의 기반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력이든 문화적이든, 스포츠든 여가공간이든 취미생활이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나 혹은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말해두고 싶은 게 있지만, 지금은 21세기이고, 20세기의 정신으로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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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금 역사전쟁을 하고 있다. 교학사에 대해 학부모 단체, 시민단체, 역사학자 그리고 학생들까지도 말이다. 그런 지경에 일본에서 근대역사 왜곡이 들아와 있다. 최근 민족주의적 파시스트적인 요소가 한일 양국 사이에 갈등을 빚는다.

 

과거 나도 한일전이 오게 되면 눈에 레이저를 키며 TV를 바라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그것이 과연 중요한가? 라는 의미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TV 보며 열광하는 자와 그리고 교학사를 반대하는 자들의 행동도 좋다.

 

하나는 자국과 역사에 대한 사랑이니 말이다. 그런데 왜 아무도 교학사를 만든 과정에서 참여한 정치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가이다. 한일 스포츠 경기에서 일본 위안부 및 각종 행위 심지어 독도문제를 거론하여 교과서가 이제는 국가 간의 국민에게 전가되었다.

 

일본인에 대해 그렇게 혐오스럽진 않으나, 일본이란 국가관료집단은 협오스럽다. 미국의 자유주의 철학자 존 롤즈는 2차 세계대전을 참전했다. 그가 <만민법>과 각종 자유주의철학도서를 저술하며 인상깊은 내용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도 그것은 장교와 정치인의 문제이지 일반 국민의 문제가 아니라며 미국의 핵투하를 잘못되었다고 한다.

 

대부분 논에서 일하던 농부나 물고기 잡는 어부, 시장에서 물건이나 팔고 사는 일반사람들이 피해를 겪는다. 문제는 그런 문제를 일으킨 전범과 그 후예들은 자신들의 과오로 저지른 학살에 대한 원인을 반성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심리적인 피해망상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망령을 쓰고, 그런 망령의 손길이 한국에 어느 단체에게 자금이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렇다면 교학서 교과서 채택은 문제삼아도 누가 그런 것을 만들고 힘쓰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한일전에서 분노의 응원이 왜 필요할까 싶다. 근본은 보지 않고 여전히 흘러가는 급류에 휘말려가고 있다. 왜 역사는 2번이나 반복되는가에서 2번이 3번, 4번 되면 비극이 새로운 비극이란 코미디로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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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enterani

 

이 글을 적게 된 동기는 우연히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학과에서 만화콘텐츠를 가르치시는 박인하 교수님의 블로그를 보고 나서 적은 글이다. 글을 적으면서 느끼는 것은 박인하 교수님이 읽어내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역과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 현황은 상당히 탁월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소에 자주 블로그에 가서 글을 보고 덧글을 나누고 하는데, 최근에 교수님의 블로그에서 재미있는 글을 보았다. 그것은 국내 인터넷 사이트에서 대단한 화제로 떠오른 어느 만화작가에 대해 교수님의 제자가 물어본 것이었다.

 

질문 요지는 “엉덩국 만화...엉덩국은 고등학교 1학년인 걸로 알려져 있는데, 만약 애가 저희 학교로 포트폴리오 전형으로 지금까지 그렸던 엉덩국 만화들을 들고 교수님을 찾아 뵈었다. 이러면 어떻게 되나요???????”

 

이때 교수님의 반응은 상당히 신선했다. “이정도 포폴이면 입학은 마음대로겠지만 졸업은 아니란다.~ 찰지구나!!!”라고 말이다. 게다가 그 아이콘에는 교수님을 미국 어느 게이영화에 출현할만한 근육질의 남성으로 그려진 모습으로 표현했다. 물론 이 그림은 교수님의 제자가 교수님에게 웃음반 재미반으로 그려준 그림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런 블로그 포스팅에 엉덩국에 대한 전반적인 비평적인 글이 있었다. 그것은 만화 자체가 워낙 특이하고 요상할지도 모르나, 그 속에는 우리나라 한국이란 곳에서 보이는 남성성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우선 이 작품에서 존슨이란 사람이 우연히 게이바에 들어가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보고 위험함을 느껴 도망치려고 하나 결국 붙잡히고 몇 년뒤에 그 게이바의 대장으로 군림하게 된 점이다. 중요한 점은 게이라는 존재가 남성들끼리의 동성연애자란 점인데, 그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담론이나 색다른 고찰이 필요한 것 같았다.

 

교수님이 지적한데로 이것은 겉으로 보자면 웃음반 재미반 농담반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한편으로 보자면 신입 게이인 존슨은 우리 한국사회로 보자면 사회로 뛰어드는 남자라는 점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게이바는 단순히 게이들만의 집단으로 보는 것보다는 우리나라 사회라는 것으로 하여 영역을 넓혀 가면 된다.

 

조금 영역자체를 확대해석할지도 모르나, 이것은 우리 사회구조와 남성사회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고려할 만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남자들은 언제나 남들과 경쟁해야 하고, 사회의 암묵적인 법칙에 따라 길들어져 간다. 존슨은 멋모르고 이 게이바 즉 암묵적인 법칙이 따르는 세계에 들어왔으나 잘못 옴을 인지하고 벗어나려고 했으나 이 사회와 게이들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뒤에 그 세계에서 대장이 되었다는 점은 암묵적인 사회의 법칙을 완전히 통달하여 이제 기존 대장을 이은 차세대 암흑적인 사회의 법칙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 남자들을 보면 뭔가 얽매이고 뭔가 속박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 얽매이는 속박이 결국 자신의 굴레로 되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빠져 살아가는 현상들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한번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겠다. 우선 게이라는 존재에서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구분점을 생각해야 한다.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게이들을 연상하면 남자인데 의상을 여장을 하며, 거기에 여자처럼 말을 하고 여자처럼 행동한다. 이것은 남성성 안에 깊이 들어있는 여성성, 즉 아니마(Anima)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성성 안에 여성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성들도 여성성 속에서 남성성이 존재한다. 이것을 우리는 아니무스(Animus)라고 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성이 아닌 타인의 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인간들이 흔히 자신이 원하는 이성을 찾을 때 자신의 이상형을 그려 보라고 한다.

 

이때 남자들은 쭉쭉빵빵한 소녀시대나 아이유와 같은 아이돌 여자가수를 연상한다면 여자들은 원빈이나 현빈, 강동원과 같은 남자 스타들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보자면 우리 인간이 가진 상대 이성에 대한 욕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욕망은 자신이 만들어낸 욕망보다는 타인들이 만들어낸 욕망을 당사자가 욕망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욕망도 타자에 의한 욕망이란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게이들은 자신들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임을 원하고, 또한 여자이라는 하나의 가상적인 사고로 통해 자신이 여자로 생각한다. 그러면 자신이 여자가 되었으면 상대이성인 남성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솔직히 동성연애를 가지고 정신분석이나 심리분석과 같은 높은 학문적 영역을 필자는 갖추어지지 않아 거기에 대해 자세히 풀어 설명하기란 어렵다.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엉덩국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 지나친 게이가 아니라 남성성으로 가득한 마초이즘(남성적 기질을 지나치게 강조해 남자로 태어난 것이 마치 여자를 지배하기 위한 특권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하는 일련의 증상)적인 남성이라는 점이다.

 

물론 엉덩국의 작품에서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소 마초이즘 요소가 보이는 이유는 남성성 안의 여성성으로 게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남성성의 강조로서 게이를 표현한 것이다. 이런 엉덩국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런 남성성으로 가득한 동성애적인 부분은 지금 막 나온 것이 아니라 이전에도 잔존했다.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 문화인류학자로 유명한 마빈 해리스(2001년 작고)의 “작은 인간”이란 도서를 참조하면 남성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소주제는 “남성끼리의 동성애”에서 각 나라와 부족에 대한 동성애 이야기가 나오는데, 고대 그리스 병사들은 매우 용감하고 엘리트적인 부대였는데, 이들은 사실 동성연애자였다는 사실이다. 전투기술이 뛰어난 전사는 나이가 어린 소년에게 전쟁기술을 가르쳐주는 대신 소년에게 섹스파트너로서 대할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이 소년은 이런 요구에 응한 점과 차후 이들은 다시 전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동성애적인 부분은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보인다. 플라톤의 “향연”을 참조하면 “여자와 동침하면 육체를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고 믿었다” 여기서 이 동성애적인 부분이 육체적인지 혹은 정신적으로 대하는지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늙은 남자와 어린 소년이 동성애적인 관계에 대해 사회적으로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철학의 기원인 그리스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 점과 그 외로 일반 원시부족 성격을 지닌 민족에서도 이런 경향이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파푸아 뉴기니아 산악 지방에서 소년 견습 병사와 상급 전사의 관한 이야기는 아주 독특하다. 이 부족은 사춘기도 지나지 않은 어린 소년을 이십대 초반으로 이루어진 남자 전사들 사이에 보내지는데, 이들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7세 정도 되지 않은 남자아이들로 하여금 오랄섹스를 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서 배출되는 정액에 대해 많이 삼키는 남자아이일수록 더욱 남자다워 진다고 믿는다. 물론 이 젊은 남자는 25세가 되면 일반적인 여성과 결혼하여 그 세계에서 벗어나겠지만 계속 이런 문화적인 현상은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런 지나친 남성성에 대한 집착은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사실은 이런 지나친 남성성을 지닌 부족들은 아주 호전적이고 전쟁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대부족이 자신들의 군락에 찾아올 경우 면담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대방이 무기를 손에 놓는 순간 뒤에서 공격하거나 또는 다른 부족 마을 앞에 잠복하여 새벽에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을 습격하여 죽이는 행위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민족은 일부다처제라는 특징이 있으며, 여성은 인간이라는 존재보다는 하나의 재산으로 보는 것이 심하다. 갖은 구타와 노동력 착취는 이런 부족들에게 보이는 특징이며, 또한 전쟁으로 남자들이 사망하면 여자들은 그 남자의 동생에게 다시 소속되는 점이다.

 

이런 문제점이 등장하는 이유는 아마 인간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한정적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일정한 영역의 영토에 적은 인구수가 분포하면 식량으로 인한 다툼은 없다. 하지만 공간이 좁아지고 단백질을 섭취할 동물이 적어지고 게다가 토지마저 황폐하게 변한다면 다른 군락이나 부족과 필연적으로 다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전쟁에서 남자들은 문화적으로 전투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남성을 리비도 즉 성욕에너지로 충만한 존재로서 성욕으로 통한 정복욕까지 이야기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마빈 해리스는 프로이트의 이론보다는 남성이 전투적으로 변화한 것은 원래 전투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남성들을 난폭하게 만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나친 남성성은 자연환경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제한된 자원으로 통해 서로 경쟁하게 되면서 상대세력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전투능력이 여성보다 뛰어난 남성이 주도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서적에서는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전투적인 기질을 올린다는 것을 비판하는데, 그런 부분은 본래 생리적인 기능보단 생리적인 기능으로 조성된 일련의 문화적인 인자가 강하다는 점이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남자들의 신체구조는 보통 사람에 비해 키가 크거나 덩치가 좋으며 근골계가 상당히 발달해야 한다. 그런 점은 그리스 고대석상 헤라클레스를 연상하면 매우 좋을 것이다. 그런 남근중심적인 사회문화에서 강력한 사회지배통치력은 바로 남성의 강인한 남성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가 엉덩국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대부분 남성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하나같이 일반인들에 비해 덩치가 크고 근골격계가 발달한 편이다. 전형적인 남성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단지 인용한 인물들이 게이포르노 배우라는 점이나 그들에게서는 보이는 남성성 안의 여성성은 없다. 단지 남성성으로 무장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남성성으로 무장한 이들에 대해 엉덩국 만화에서는 이것이 정당하다는 느낌보다는 다소 풍자와 조롱이 묻어 나온다. 작가 본인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렸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단지 내가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은 그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남자 고등학생이란 점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가 살아가는 환경이나 일상 그리고 현재 한국사회를 보자면 남성들은 억지로 자신들의 남성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가부장체계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것이 예전만큼이나 통용되는 시대는 아니다. 다시 그 남근중심적인 사회로 가고 싶은 회귀의식일까 아니면 그런 남자들이 가지는 억지스러움을 놀리고 싶은지는 그 본인의 기분이나 적어도 국내 인터넷 만화인 웹툰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결코 적지 않은 영역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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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놀이로서 가치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어렵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농사문화에서 봐야할 것이다. 농사문화가 원래 힘들고 고된 노동이나 하루에 일정량만 노동을 하고, 계절적으로 겨울이 오면 더 이상 노동 대신 여가를 구사하게 된다. 단지 현대사회는 자본주의구조와 더불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1차 산업으로 해결할 수 없고, 자본주의구조를 가진 나라라고 해도 1차 산업을 배제하면 살아날 수 없다. 우선 인간이란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1차 산업이 대부분 식량과 관련된 산업이기 때문이다.

 

놀이와 관련하여 노동이 유희적 놀이로 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습관이나 취미를 넘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포스트모던 사회로 인해 서로간의 오프라인적인 인간관계 형성보다는 온라인적인 인간관계가 강하다. 비록 같은 학교 친구라고 해도 그들의 만남은 실존적으로 놀이터나 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게임으로 이루어지고, 얼굴을 직접 마주보며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을 이용한 문자, 전화, 카톡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통한 인터넷의 세계까지 잠식했다.

 

따라서 노동이 놀이로 되기 위해서는 개인과의 격차를 분리되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여기에 대한 새로운 대안점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의 communist요소와 마르크스의 communist를 나쁘게 사용한 마오주의나 스탈린주의와 달린 마르크스는 미래의 노동은 놀이로 보자고 했다. 노동에서 해방되어 인간이 정신과 육체의 활동은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것이다.

 

놀이와 관련하여 서양의 동굴벽화 중에 프랑스 라스코 동물벽화를 잘 생각해야 한다. 당시 인간은 1차 산업의 대표주자격인 농업과 축산업 대신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고 물고기를 잡은 원시적 경제활동이었다. 가령 문화인류학 도서를 보면 원시부족이 하루 3시간만 일해도 며칠은 놀 수 있는 것은 자연의 혜택이 존재한다는 점과 그들이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놀이로서 사냥은 한다. 의식을 치루고 노래를 부르며 춤도 춘다.

 

문제는 춤과 노래는 인간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활동이면서도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대화라는 것이다. 인들에게 신이란 정말 신이 아니라 이들의 공동체사회에서 필요한 놀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예술에 대해 알베르 카뮈가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기에 그렇다고 한다. 예술이란 어떻게 보면 만드는 그 순간에 예술을 만들겠다는 것보다는 하나의 상징적 권위적 요소로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방가르드 이전의 예술들은 왕권, 귀족, 교회의 신성함과 위대함을 많이 내세운다.

 

예술품이 지금에서 예술이나 당시로는 예술보단 하나의 상징이고 권위다. 우리가 보는 유명한 건축 중에서 왕궁의 웅장함과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이란 모두 상징적 권위다. 보기에 아름다우나 거기에 노동이란 인간착취가 숨어있다. 만약 건축에 대한 부분에서 노동이 아닌 놀이라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는 조금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방가르드의 예술적 미학은 예술의 파괴다. 그러나 예술을 파괴하려면 또 다른 예술이 대체되기에 아방가르드는 20세기 상황주의 인턴내셔널의 해체와 끝으로 사라진다.

 

그런다고 아방가르드 역사에서 우리는 그것을 배제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가 손 놓고 멀뚱히 보던 속박적인 현실을 정면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다.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로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이면서 전위적인 활동가다. 하지만 진실로 그가 전위적이기에 19685월 혁명 이후 그는 잠적을 감춘다. 자기 자신이 spectacle이란 존재로서 군림하지 않기 위해서다.

 

인간이란 자신의 노동에 속박을 갇히는 경우가 있다. 인간이 기계가 아니나 기계가 되는 부분이다. 나의 관점에서 말할까? 아니면 어떻게 볼까? 유명한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지에서 그가 연기한 것을 보아라. 기계가 인간을 조종하는지 아니면 인간이 기계를 조종하는지? 인간이 인간으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물화(物化) 되어버린다.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보다는 하나의 상품으로서 떨어지게 되는 점이다.

 

어제 주말 아버지와 나하고 대화하면서 조금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형제를 위해 계속 노동한다고 하는 아버지의 근무환경은 정말 철저하고도 잔인하게 낙후되었다. 인원이 적은데, 기계는 노후화되어 필요이상으로 노동을 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노동력이 있을 때가지 일을 해야지라고 말할 때 인간의 물화라는 것은 끔찍한 이야기다. 찰리 채플린의 기계는 수명완료에 따라 강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부품으로 교체되나, 인간의 육체는 교체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노동의 상실은 곧 인간의 수명의 상실이다. <자본>을 읽게 되면 지나친 노동착취로 인해 대부분의 국민들의 수명이 짧아짐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의료기술의 발달과 그때보다 노동력의 착취강도, 근무지역의 보건위생환경이 조금 우량해졌기 때문에 가능했으나, 계속 노동자의 죽음과 부상은 끊이지 않는다. 인간에게 노동을 해방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점은 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나둘 경우 인간에게 노동에서 놀이문화는 바뀌지 않는다.

 

노동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노동 자체가 놀이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감성적 영역을 무디게 만들고, 이성적 판단력을 멈추게 하는 순간 인간은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것이 된다. 창조적인 인간을 만들기에는 이런 사회적 구조에서 보이는 기계화는 우리는 반영구 기관조차 가지지 못한 기계로 전략한다. 단순히 놀이문화를 왜 추구하는가에서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상실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공간에는 죽음과 삶이 공존한다. 4계절에서 겨울은 모든 것을 삼켜 생명을 앗아가는 것처럼 봄은 다시 희망과 삶을 부여한다. 삶과 죽음이 있기에 놀이가 가능하다. 놀이는 변화하는 자연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예술은 곧 놀이의 미학이다. 예전에 부천 만화규장각에서 제작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이란 도서에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의 인상 깊은 문구가 있다.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이다.”

 

대중예술이 발견성은 곧 놀이라는 것이 예술이란 특정 계층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놀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적 변화와 인간이 그 속에서 어울리는 하나의 소통이다. 소통에서 문명화라는 것은 인간을 하나의 상품 내지 도구로 보기에 인간 스스로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물화라는 가치로 통해 보기에 창조성을 가지기는 어렵다. 인간 스스로가 기계가 되어 모든 것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놀이문화로서 단체생활 내의 창조성을 개발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인간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기계에서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오려면 인간의 기본인 유치찬란한 세계가 필수다. 문명화가 진행되고 세분화된 분류 속에서 인간에게 공통된 한 가지를 요구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문명화에서 파편화된 취미와 취향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 속에 대부분 사람들의 취미는 대다수 비슷하다.

 

일단 취미를 말해보라고 하면 음악 듣기, 영화 보기, 운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취미라기보다는 일련의 삶이라고 보면 좋을 듯 하다. 왜냐하면 가령 음악이라고 하면 rock/metal, Jazz, blues, soul, hiphop 등 다양한 장르가 있으며, 음악 활동도 단순히 귀로 감상하는 것을 지나 라이브공연과 실제 자기가 연주자가 될 부분이 있다. 영화 역시 그렇다. 최근 극장가에 나온 인기몰이를 하는 영화나 혹은 신작영화에 영화관란 취미라고 하는 것은 영화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화라는 상품을 소비할 뿐이다.

 

현대사회의 spectacle적인 문화소비 형태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이라기보단 레디-메이드처럼 똑같은 상품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문화적 소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창조성을 요구하기란 어려운 부분이다. 직접 음악을 하거나 직접 영화를 찍거나(혹은 연극을 하거나) 또는 그 이상의 프로듀싱도 좋다. 문화적 공간에 의해 창조성이 표현되는데, 표현주의 미학이 약한 한국으로서 이런 부분의 집단적 발전을 기여하는 것은 매우 난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그 조직과 그들이 하는 업무와 사업을 알지 못하면 매뉴얼을 할 수 없다. 단지 이 글에선 칸트 <판단력 비판>에서 기준을 설정하기 보다는 그 기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 글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 Kyoto Animation에서 만든 작품인 <K-on>에서 감독 야마다 나오코씨가 애니메이터 직원을 불러 이렇게 주문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그 때 그 시절로 가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넣어보세요!” 덕분에 작품은 흥행하고 관련 OSMU 사업까지 성공하여 상당한 이익을 Kyoto Animation에 안겨주었다. 21세기 사업은 바로 문화콘텐츠이고,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하는 것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여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한 게 아니다. 실제 <K-on>을 보다보면 미쟝센의 연출이 매우 독특하고, 작품 내 인물들의 인상이나 표현력이 매우 넘친다.

 

결국 표현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에서 콘텐츠의 질이 높일 수 있다. 작품 제작에서 애니메이터들은 분명 노동을 했을 것이다. 그 노동에 대한 놀이적 유희를 투영할 수 있다면, 그들은 노동착취로 통한 스트레스보다는 놀이로서 노동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가이낙스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만든 만화책 부록에서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독특하다. 회의실 안에 에반게리온 프라모델이 있고, 오타쿠적인 요소가 다분한 점이다. 또한 연말 회식자리에서 가이낙스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 하나인 사에키 쇼지가 동물의상을 입고 코스튬 하던 모습이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가이낙스 대표이사 겸 애니메이션 감독인 야마가 히로유키 감독이 2011PISAF에서 초청강연하는데, 이때 가이낙스 초반의 이야기를 해준다. 가이낙스에 대해 이야기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말하는데, 이때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작화 쪽이었다. 가이낙스 대표적인 기법으로 우주전쟁이 매우 탁월하다. 그들의 셀이 여기저기 사용되는 점에서 안노 히데아키는 우주전쟁이나 폭발장면 전문가였다. 대신 사람의 얼굴을 잘 못 그리는 것이 단점에서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에서 한계성이 보인다.

 

안노 히데아키의 오타쿠적인 기질이 발동된 것은 1988OVA로 제작된 <건버스터>에서 각종 오마쥬와 패러디로 작품을 매우고, 특히 주인공 여자가 자신의 가슴을 쥐고 뜯는 장면에서 여자의 가슴이 신체와 별도로 움직인 점에서 이때까지 미소녀 애니메이션에서 연출하지 못한 부분을 만들었다. 지금이야 거대한 여성의 가슴이 출렁거리는 장면이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나, 그것을 획기적으로 만든 것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었다.

 

그러다가 1990<이상한 바다의 나디아>에 이어 1995<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나왔다. 그들의 특징들은 오타쿠 기질이란 점이다. 남들과 다르기에 창조성이 있었다. 집단적 창조성의 발전에서 그들에게 오타쿠가 되라는 것은 아니나 오타쿠에 대해 뭔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최근 아키바계 소비주의적 오타쿠들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안타까우나 본래의 오타쿠 기질에서 한 곳을 집중적으로 빠져들어 거기에 매진하는 부분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집단에서 그런 행위란 무척이나 어렵고, 그런 업무가 하나의 놀이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안노 히데아키는 그림만 그린 것을 매우 좋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왜 성공한 애니메이션 감독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다고 그가 반드시 애니메이션만 만든 것은 아니다. 여고생의 원조교제 문제를 다룬 <love and pop>, Re : 큐티 허니를 재각색하여 만든 영화 <큐티 허니>도 있었다. 인간의 내면의 고뇌를 다룬 <식일>이란 작품도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자들이 실사영상을 도전하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실제 카메라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구상한 카메라로서 실사를 보려고 한 것이다. 덕분에 연출은 매우 신기하다. <love and pop>에서 장난감 프라모델 기차가 철로를 따라 가는 장면이 인상 깊은 부분 역시 그런 연출력이다. 애니메이션이란 표현주의 미학이므로, 상상하는 것에 대한 현상화에 큰 비중을 둔다.

 

놀이로서 통한 노동이 되려면 사람들이 스스로 시인이 되어야 하고, 가수가 되어야 하고, 작가도 되어야 한다. 단지 퀄리티가 다소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런 것들로 통해 집단 내의 창조성을 꽃을 피울 수 있다. 집단 내에서 그것을 용인할 수 있는 것이란 정말 쉽지 않다. 왜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과 물화에 대해 논했을까? 이런 사회구조에 맺힌 관념의 틀이란 매우 벗어나기 힘든 굴레다. 물론 혁명과 쿠데타, 심지어 전쟁이 일어나도 어디서는 계속 노동해야 한다. 혁명을 해도 쿠데타를 해도 밥은 먹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며, 잠도 자야 한다.

 

인간은 문화를 만드는 존재에서 이제는 문화의 속박에 살아간다. 문화에 의한 속박과 물화된 인격에서 문화의 소비자에서 문화의 생산자로 가지 않으면 창조성이란 불가침의 영역이다. 게다가 특이성을 너무 추구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만큼 이질적인 존재가 된다. 문화콘텐츠라는 아이디어 상품에서 이런 한계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치 고장 난 기계부품처럼 되어 버려지는 인간이 당연한 세상에서 노동이 놀이로서 전환할 가능성이 낮다. 물론 어느 소규모 사회나 단체에서 가능해도 그들만 가능하면 그들의 상품이지 그 이상이 되기 어렵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포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로베스피에르조차도 자신들의 혁명이 성공해도 이것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만이 자유롭고 주변이 자유롭지 못하면 자신들의 자유에 대해 주변에서 방해하여 결국 우리의 자유를 잃게 된다는 점이다. 놀이라는 노동은 곧 자신들의 놀이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확대하는 것이 곧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되는 점을 배제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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