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핸드폰의 노후에 따라 새로운 핸드폰 하나를 구매했다. 핸드폰을 교체하면 반드시 거쳐야 할 작업이 기존 핸드폰을 정리하는 것이다. 기존 핸드폰에 있는 주소와 데이터를 새로운 단말기로 이전 후 초기화하여 최종 정리한다. 핸드폰 자료정리를 하려면 우리 일반인들이 할 수 없으니 자신이 구매한 단말기의 업체 서비스센터로 간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서비스센터 직원이 문제가 있다거나 서비스의 질을 따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장 보기가 불편하고 피곤한 감이 드는 것은 무조건 5점 만점에 5, 십점 만점에 십점 같은 평가제도다. 평가제도의 도입이 고객에 질 높은 서비스를 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필요 이상의 불편함과 부담감이 온다. 기본적으로 인성 쪽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손님이나 고객에게 큰 불편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게에 와서 행패부리는 유형도 다분하다. 핸드폰 단말기 교체하고 나가는 와중에 서비스센터 데스크에 앉아있는 안내원에게 괜히 트집잡는 아저씨를 보았다.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떼를 쓰고 화를 내어도 그 사람의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오히려 시간을 지체시키고, 거기서 해결되지 않은 점에서 더 기분만 상할 뿐이다. 이런 모습에서 과연 서비스산업에서 고객의 눈에 맞추어 일을 하는 것은 맞겠지만, 그들은 필요 이상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것이다. 고객센터에 가면 행패부리는 인간은 정말 드문 케이스고, 특별히 업체의 실수가 아닌 이상 고객은 화를 내거나 쓸데없이 시비를 걸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서비스평가를 요구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피곤한 일이다. 핸드폰 단말기를 교체하고 데이터 이송한 뒤에도 심지어 요금제 관련 변경으로 통신사 방문 때도 그렇다. 모두 직접 본사에서 확인전화가 오면 높은 점수를 달라는 것이다. 충분히 친절하게 업무를 했고, 그 업무에 대해 나는 불편함도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저 한 마디와 본사에서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은 무척 불편하다. 본사에서 오는 전화 한 통에 응답하는 시간은 30초 이내일 것이다. 30초에 목숨 걸 이유도 없고, 30초를 할애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다.

 

단지 그 30초의 통화에 각각 한 사람들의 평판이 결정되고, 그들은 고객의 확인전화 후에 희()는 없고 단지 비()만 올 뿐이다. 세상은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오로지 비만을 생각하고 업무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이 직업에 매개에 의해 하나의 평가대상이 되는 것은 도구로 되는 것과 같다. 직원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와 초조함, 고객에겐 불편함을 안겨주는 친절함은 조금 잘 못되어가는 우리 모습 같다.

 

게다가 고객에게 이런 평가를 강요하는 것도 고객에게도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고객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찾아와 그 목적에 대한 합리적인 결과를 평가하고 싶은 것이지, 자신을 응대하는 직원을 평가하고 싶어 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타인에 대한 판결을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이루어진다. 감정노동이 이젠 새로운 노동문제로 볼 때이다. 감정노동에 육체적으로 변화가 없어 보이지는 않으나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어 생리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서비스센터직원과 손님의 시작은 인간과 인간이지 주인과 자본의 노예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세상은 자본의 노예를 손님과 직원에게 강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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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메모리즈>를 본다는 것에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현재 인류의 수명은 대략 80세 이후로 증가했다. 인류의 생명이 증가한 만큼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은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플라스틱 메모리즈>에서 등장한 인간형 사이보그 기프티어는 인간과 달리 수명이 94개월 정도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처음 태어나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이고, 짧은 시간도 아니지만 그런다고 긴 시간도 아니다. 어중간한 수명시간에 기프티어를 구매한 인간은 난해한 입장이 놓인다.

 

기프티어는 외모와 인격, 설사 에너지가 되는 요소도 인간과 거의 유사하다. 인간이 아닌 자가 차와 과자를 먹는다는 것은 거의 인간과 같은 식문화를 가진 것과 같다. 그들은 인간과 같은 인격과 삶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에 비해 더 유한한 삶을 사는 존재다. 우리 인간은 현재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당장 삶에 대한 의미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과 닮은 그 무엇인가를 보고, 그 대상이 같으면서도 다르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어디가 같으며 다를까?

 

기프티어의 모습을 보면, 인간 같이 생긴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움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보여주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에게 기프티어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로 된 것이다. 기프티어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 그들은 인형과 같을 것이다. 인형이라 하여 가만히 멈추어진 인형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인형을 말이다. 이점에 대해 과거의 인형이 가진 존재성과 상당히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uncanny valley effect)"주) 이란 단어가 있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생긴 것이 있다면 인간은 섬뜩한 느낌을 느낀다. 언캐니 효과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은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 <공각기동대>이다. 특히 2기 이노센스의 경우 섹스로이드의 움직임과 모습, 영화포스터에서 부서진 인형들은 언캐니의 섬뜩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행동하거나 또는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죽어있는 대상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언캐니한 요소들은 공각기동대 이후 변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핸드 메이드 메이> 같은 경우 사이보그 여성 메이가 주인공과 최후에 연인이 되는 것이나, <이브의 시간>에서는 인간과 기계인간의 공감대까지 등장한다. 특히 <이브의 시간>에서 남자주인공 리쿠오는 피아니스트로 등장하나, 어느 공연장에서 기계인간이 자신보다 더 깊고 훌륭한 연주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덕분에 피아노를 제대로 칠 수 없게 되고, 기계인간에 대한 알 수 없는 낯선 감정과 거부감이 들었다.

 

그 감정은 다시 자신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사미라는 여성형 기계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기계인간은 단지 기계라고 생각하는 리쿠오의 누나, 이에 반해 리쿠오는 사미에게 흥미를 가지면서 기계인간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언캐니한 대상을 언캐니하지 않게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플라스틱 메모리즈>에서 극단적인 요소로 드러난다. 과거 순정물인 <쵸비츠>의 경우 인간과 기계인간의 사랑은 모호한 관계에서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면, <플라스틱 메모리즈>는 그 과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단지 조건은 기존의 기계인간들은 반영구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기계인간 상태에 따라 이성적 판단능력이 달라질 뿐이다. <플라스틱 메모리즈>는 기존의 기계인간과 다르게 신체적 능력이 월등하지 않고, 이성적 능력도 그 신체에 맞추어 잘 조절되어 있다. 프로그래밍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이기보단 그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능동적으로 활동한다. 기계인간은 수명이 보통 인간에 비해 다 짧지만, 그 존재 자체는 인간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고방식이 애니메이션에 보여주는 것인가? 우선 작품 1화만 보면 알겠지만, 기프티어를 수거하러 가는 고객의 집을 가면 알 수 있다. 회수요원이 고객의 집에 방문하면 그 집안의 가족들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 자녀가 없는 노부모 등과 같은 인간이다. 가족의 구성은 남녀의 결합과 더불어 자녀를 출산하면서 그 구성원을 충족시킨다. 하지만 가족이란 관계가 현대로 갈수록 혈연적 관계가 점점 멀어지며, 커뮤니티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인간과 기프티어는 처음부터 가족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가족적인 관계였다. 가족의 관계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족의 대체는 인간의 입양보다 기프티어라는 점에서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다. 기프티어는 인간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편리한 관계로서 가족이다. 가족구성원을 형성하는 점에서 최근 일본이나 한국 모두 저출산 시대에서 자녀 없는 가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가족을 가지지 않은 것이 의도적인지 혹은 비의도적인지는 상황적으로 다르나,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플라스틱 메모리즈>에서 기프티어의 존재란 인간은 어떤 삶을 받아 들이야 것이고, 결국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고, 혼자가 싫어도 누군가 있어도 다시 이별의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이별의 순간을 참을 수 없어 혼자만의 고립을 추구하면 인간은 고독과 허무에 의해 살아가는 원동력을 잃고 만다. 기프티어의 회수는 회수되는 기프티어 본인에게도 슬픔이고, 기프티어를 떠나보내는 가족 역시 슬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받아 들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으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인간은 자신을 두고 인간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감정 없는 인간은 마치 인형 같다고 말한다. 인형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곁에 인형을 두는 인간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밟지 않았다면 인간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까? 슬픔을 느끼지 못한 것만큼 더 슬픔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니까.



주1)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인형이나 만화 캐릭터, 로봇과 같은 인공체들이 인간을 닮아 갈수록 호감이 상승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정도가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플라 익스프레스>를 보고 어린이 관객들이 공포를 느낀다거나 <파이널 판타지>의 너무나 인간 같은 캐릭터들이 무섭고 징그럽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감정이입이 안되는 상황 등이 그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픽사의 <인크레더블>이나 <슈렉>같은 애니메이션들은 오히려 2차원의 평면적 캐릭터를 만들거나 완전히 인간과 다른 초록 괴물을 창조한다. 애니메이션에 있어 인간 형상 언캐니 효과에 대한 논의는 서울시립박물관 연구논문집 <현대미술과 미술관>의 수록 논문, 김윤아, 그것은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인가: 인간의 형상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미술관, 2009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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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가면 자신이 존경하는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들은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어려서 대통령이 될거야 나는 어려서 아인슈타인이 될거야, 모두 어느 거대한 인물이나 위인들을 거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나는 어려서 꿈이 그렇게 있는 게 아니었다. 엉뚱하고 사고만 치고, 간식을 좋아하고, 오락실을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아이들치고 조금 뒤떨어진 아이다. 달리기 하면 멀리서 힘들게 숨을 쉬며 걸어오면서 끝내 마지막 엔드라인을 끊어내는 그런 인간이다.


그래서 어릴 적에 뭐가 되고 싶은가에서 기억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대부분 어릴 적 아이들의 꿈은 대통령과 장군에서 점점 갈수록 외교관과 공무원 끝내는 월급이 제대로 나오는 직장인으로 낙향할 것이다. 그게 현실이고 안타까운 우리의 모습이다. 꿈을 갖는 것이 그 하나로 죄가 되는 나라 대한민국인 것이다. 꿈을 가져서 죄인이 되는 게 아니라 그 꿈으로 인해 주변 사람에게 죄인이 되어야 하거나(망상의 극치로나) 또는 그런 점 때문에 허경영 후보와 같은 대반에 오를 수 있다.


직업과 관련하여 아무래도 좋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하고 싶은 직업은 물리치료사였다. 그러나 공부를 못해 나는 물리치료학과를 가지 못하고, 물리치료학과와 같이 교양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의 공대로 진학했다. 지금은 모두 연락이 없어졌으나 물리치료학과에 동기나 선후배들 몇 사람 친하게 지냈다. 뭐 그래도 그곳에 가지 않으나, 친하게 지낸 사람이 있으니 대리만족으로 끝내야지. 그래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도 전역하고 했으니 다시 꿈에 대해 물어본다면, 지금 총각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같이 인생을 보내는 것이라 본다.


하지만 글제목처럼 가장 존경해야하는 것과 꿈에 대해 말하자면 전혀 다르게 갈 수 있다. 꿈은 되고 싶은 것이나, 왜 되고 싶은가를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우리는 되고 싶은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면 너무 막연하게 좋은 것만 추구하게 된다. 일상과 전혀 관계 먼 우리가 평생 살아도 제대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존재에 대해 말이다. 과거 어느날 나는 버스기사 아저씨가 참 대단하다고 여겼다.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막 입문하여 버스를 타면서 버스기사들의 운전을 보았다.


참고로 내 차는 수동이다. 2006년 마티즈로 시작해 지금의 SM5까지 모조리 수동으로 몰았다. 수동으로 차를 운전한지가 9년이 된 것이다. 이제 자연스레 자동보다 수동으로 모는 게 편한 시기로 왔다. 자동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아 짜증난다. 바로 대부분 버스가 수동인 점에서 수동을 모는 사람으로서 버스기사의 운전은 정말 환상적이다. 요새 오토기어인 버스가 나와도 아직도 버스는 수동이 많다. 5단 기어에서 6단기어를 모는 버스기사는 수많은 승객을 제 시간을 맞추며 거리를 활보한다.


내가 승용차운전하면서 버스운전이 사나운 것은 안다. 하지만 버스가 차선 변경하면 양보하는 이유는 버스기사가 너무 위대해보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모두 엉뚱하거나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다. 대한민국 1% 이내, 그러니깐 자기가 차를 몰지 않아도 남이 몰아주지 않으면 이동하지 못할 경우 당신은 무엇을 타고 다니는가? 하다못해 장거리 운전에서 김여사가 김기사 운전해~ 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가족이라면 누구든지 버스를 타지 않을 수가 없다. 서울에서 부산에 가든 광주로 가든 어디를 가든 KTX가 있어도 지하철이 있어도 버스만큼 목적지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은 없다.


당신이 운전하거나 혹은 당신 옆에 운전기사가 붙어있지 않으면 말이다. 버스가 다니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발이 묶이고, 움직이지 못하며, 대다수 사람들은 고생할 것이다. 자가용이 있어도 그 한계는 있으며, 자가용이 없는 사람들, 운전면허증이 없는 사람들, 더 이상 운전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딱히 버스기사만이 존경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나,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따지자면 버스기사만 존경해야할 존재가 아니라 사실 지하철, 기차 운전수 하다못해 정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에서 대단한 사람들은 국가나 대기업의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유지시켜준 분이다. 기본적으로 부모님과 가족들은 제외해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더 이상 부모나 가족들보다 상위에 존재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내 일상을 유지해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면 존경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중해야 하는 게 너무 많다. 자기 사무실에 누추한 복장으로 청소하는 아주머니, 아파트 경비실의 수위들이 있기에 우리는 편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거기에 안락할 경우 우리는 망각한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만, 그 사소한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차질이 빚으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상당한 인물로 여기거나 받들어 모시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생활이 과연 어디서부터 가능한가라는 것을 느끼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언제나 인간은 현실을 망각하는 것인가? 일상에 대한 재발견은 바로 우리 삶을 재발견하는 것이고, 우리의 인생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이루어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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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이란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들을 말하나, 사실 장난감은 우리 어린 아이들만이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라 어른들이 가지고 노는 것일 수 있다. 장난감은 영어로 toy, plaything로 사용된다. 다 큰 여성들도 인형을 수집하거나 다 큰 어른도 게임기를 장난감을 사용한다. 장난감이란 단순히 아이들만을 위한 물건만이 아니다. 단지 아이들이 좋아할 뿐이다. 문제는 장난감이 성상이 플라스틱이나 나무, 금속 등과 같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장난감에 첨부된 성분이 벤젠, 페놀, 카드뮴, 납 등과 같은 매우 해로운 것들이 들어갈 경우가 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장난감을 한자 단어로 적절히 사용하면 玩具 製品이다. 한자어로 되어 있는데 완구제품이라고 하고, 완구세트라고 한다. 그런데 저 제품이 완벽하려면 우선 성분이 전혀 사람들에게 위해성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제조사가 유명한 레고가 아니라 (주)三靑이고, 좋은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장난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주)三靑의 경비능력을 배양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장난감으로 통해 성공하기보단 경비능력으로 성공한 三靑은 玩具 製品에 깨끗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제조과정에서 실수로 납과 카드뮴, 벤젠 등을 묻히게 되었다.

그런데 원래 벤젠과 카드뮴, 납 등은 인체에 들어가면 암에 걸리거나 골수에 악영향을 주어 빈혈이나 뼈 조직이 약해지고, 일본의 이타이이타이병은 카드뮴 중독에 의한 병인데, 이타이란 아프다는 일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玩具 製品 출시를 결정한 업체는 (주)三靑이 아니라 거대기업 (주)新世界 주주총회로 통해 판매가 가능했다. 우리 어린이들 같은 사람들은 불량한 玩具 製品에 노출되었네요. 문제는 필요한 사람이 구매가 아니라 억지로 반 강제적으로 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글을 읽는 분들 오늘 뉴스 보시고 느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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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멈추지 않고, 지금도 혹은 앞으로도 계속 흘러가는 존재다. 그 존재라는 것은 공간 위에 의해 처음 생성되겠지만, 이후 시간적인 기능으로 기록된다. 즉 인간의 시간이란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인간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더라도, 인간의 시간을 기록한 영상은 되돌릴 수 있는 기능이 생겼다. 우리가 미디어로 접하는 영상들은 모두 기록되어 녹화되어 다시 처음부터 재생되거나 역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거나, 그 재생된 시간처럼 자신의 시간이 같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자유자재로 변해도, 그 시간을 조정하는 인간과 그 시간이 조정된 콘텐츠를 보는 인간 역시 비가역적인 존재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역사라는 말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로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지나간 것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연결되어 있는 사슬처럼 연속된 하나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예전에 흥행한 영화 <변호인>에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이 작품 설정상 등장한 적이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있기에 현재 우리가 다시 접하고 판단할 수 있다. E.H 카는 역사에 대해 역사가의 의무로서 생각하겠지만, <굿바이 E.H 카>에서는 역사라는 것은 역사가에 의해 정립되는 게 아니라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민중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역사라는 것은 누구나 자신에게 하나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는 가치관이다. 인간이 살아온 현재는 결국 과거의 시간이 축척되어온 하나의 과정인 점에서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역사를 본인의 영역이 아니라 그 이전의 영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현대인들의 정체성에 부딪히는 문제가 아니라 과거 우리 수많은 인류가 부딪힌 문제였다. 하지만 현대사회 인간에게 역사라는 가치는 그저 지루한 소재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통계조사 젊은 세대로 넘어갈수록 우리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언제 일어나고 그것에 대한 경위나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1950년 한국전쟁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이나, 1905년 을사늑약에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탈된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자주권, 그리고 이어지는 1910년 한일병합 같은 일들이다.

이런 근현대사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도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는 현실에서 이제 그 이전의 시대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욱 더 알 수가 없다. 자신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은 이상 어떠한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린 이런 부분에 대해 깊은 성찰과 비판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최근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장르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금회 네이버카페 애니큐어에서 실시하는 프로젝트 6번째가 “역사적 소재와 만화애니메이션의 만남”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역사적 소재에 의해 만화애니메이션만 논하는 것은 조금 부적당하고 여기고 있다. 만화애니메이션이란 것은 하나의 서사를 가진 매체이고, 문학소설이나 TV 드라마, 영화 등과 같은 다수의 미디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는 점이다. 역사라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기록한 fact이다. 하지만 fact란 만들어진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실과 진실은 다를 수가 있고, 자신이 속해있는 진영이나 국가, 사회에 따라 기록은 달라진다. 한국의 역사에서 아직까지 고조선에 대해 논란이 쌓여 있고,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에서 한반도 북쪽으로 넘어서지 못한 것이 과연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이다.

한국의 민족에서 원래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라, 북방과 남방이 섞여 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의 시조가 단군이라면, 고조선의 영토를 거의 보존한 국가는 고구려로서 한국의 선조는 북방 계열인가? 아니면 고구려와 백제 멸망 이후 살아남은 남방 계열이 선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인류학적으로 북방민족의 기원은 자신들의 토지가 적합하지 않기에 사냥과 승마에 능하고, 남방민족은 비옥한 토지가 있기에 농경문화가 잘 정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가야왕국이 김해평야인 점에서 식량과 물의 관계는 문명과 국가 성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역사적인 요소에서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 혹은 문화적 상황, 기후와 토양, 식량 등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오늘날 우리에게 그 역사라는 과거의 유산들이 이어져 내려온다. 당시에는 당연한 것들이나, 지금 우리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역사와 역사의 소산물이다. 따라서 역사적 소재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요소에서 문화콘텐츠 관계는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최근 이런 일이 있다고 한다. 어느 드라마를 방영하거나 혹은 어느 영화를 상영하는데, 누군가 강력한 스포일러를 유발했다는 점이다. 가령 <정도전>에서 조선개국공신이 정도전이 죽고,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죽는다는 점이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각각 등장하는 주인공이 죽는 것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어버린 현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쇼를 보려는 관객에겐 짜증나는 스포일러이겠지만, 일반 상식수준 정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도전이나 이순신 모두 역사적 인물로서 한 사람은 조선개국 이후 왕과 신하의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에서 죽어야 했고, 한 사람은 과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대결하다가 죽게 된다. 물론 이순신의 죽음은 왜국과의 전쟁보단 조선 내부의 권력적 암투에 의한 갈등도 매우 크다. 그런 점에서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관점을 보기보단 다양한 조건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한국 대표 연예인에 일본에서 ‘욘사마’라고 불리는 배용준 씨가 출연한 <태왕사신기>에서 연출한 장면들은 너무 터무니없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한국드라마 중에서 왕과 왕비를 시해하려는 무리가 이상한 요술을 사용해서 암살한다는 설정 역시 상당한 오류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만약 사전에 시청자로 하여금 제대로 된 역사적 인식과 사실을 알릴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제 사극드라마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는 제작진에 의해 설정을 재조정하여 가상의 이야기나 인물, 사건 등을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드라마로는 꾸준히 KBS1방송에서 했고, 그 외의 방송사에서 제작했지만, 최근 극장가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영화들이 계속 이어져 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콘텐츠에 대해 우리는 그 당시의 역사를 역사도서보다는 드라마나 영화로 통해 판단해 나가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시대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서 영상으로 통해 보는 것이 훨씬 더 잘 이해하기 쉽고,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정확한 문헌적인 정보에 의해 분석한 게 아니라 그저 연출가와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에 우리가 깊이 파고들면 역사적 사실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정보로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나 영화는 대중들에게 친숙하기에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가 쉽다. <굿바이 E.H 카>에서 모든 사람이 역사가가 되는 것은 좋으나, 문제점은 모든 사람들이 역사가가 되기 위한 사전 지식이 없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그나마 한국에선 대부분 문화콘텐츠가 영화나 드라마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우리 애니큐어가 지정한 것은 만화애니메이션이다. 국내 만화책은 모르나 애니메이션으로 역사적 소재를 제대로 다른 작품은 거의 없다. 해보았자, 위인들을 소재로 한 교육용 애니메이션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차라리 web-toon이나 만화를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 만화책에서 몇 편 제작되고 있다고 하나, 한국 만화시장규모와 인식을 고려하면 매우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어떻게 볼 것인가? 솔직히 말하여 일본의 문화콘텐츠에서 만화애니메이션의 규모는 매우 거대하며, 최근에 라이트노벨, 피규어, 음반 등도 활발하여 일본의 하위문화는 단순히 하위문화 공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을 보면 항상 느끼나, 그들은 자신들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만화애니메이션 내에 반영하고 있다.

언제나 벚꽃의 등장은 자신들의 문화적 요소를 잘 들어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은 그런 문화적 정체성만 드러내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관념도 심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작품에서 대표적으로 나오는 설정이 바로 전국시대와 메이지유신에 대한 이야기다. 전국시대와 관련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일본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메이지시대의 도쿠가와 막부를 지키기 위한 신선조 그리고 유신자사들의 싸움은 늘 드라마나 영화, 심지어 만화애니메이션에 심하게 반영되어 이따.

전국시대에 대한 소재로 미소녀 모에로 통해 만들거나, <바람의 검심>이나 <박앵귀> 같은 작품들은 메이지 시대 초반의 갈등들을 다룬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소재로 하기에 전쟁이란 것은 많은 인간들을 죽이고, 가옥과 밭을 파괴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나, 만화애니메이션에선 위대한 영웅들이 활보하는 거대한 서사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싸우는 장수들은 엄청난 동경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한 인물로 묘사한 점이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은 거기서 희생되는 많은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전쟁의 목적은 평화 내지 정의라는 이름으로 승부한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정치적 대의는 백성 혹은 국민이란 존재를 위해서라고 한다. 전쟁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과연 그런 것인가? 과거 어느 영주의 싸움은 그 영주의 영토에 사는 주민 모두들에게 부여된 전쟁이라고 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지배계층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사지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죽는 것이 과연 영웅이라고 칭송해야할 전쟁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화애니메이션에서 역사적 소재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미화된 점이 분명한 문제다. 2015년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 <전국시대> 시리즈를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 <전국시대>를 보면 그 당시 장수들을 외모나 성격 등의 설정을 지나치게 미화시켰으며, 그 캐릭터에 반대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저하시킨 점이다. <의풍당당 카네츠구와 케이지>를 보면 주인공 2명과 일부 등장인물을 제외하면 모두 하찮은 존재로 묘사한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에서 역사적 소재로 만든 작품들의 문제란 바로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점이고, 그들이 하는 행동들에 대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는 주요 이용대상자가 젊은 계층과 학생들이다. 그들이 즐기는 만화애니메이션에 역사적 소재는 역사적 인식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큰 문제점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에서 일본열도를 통일한 대업에 대해 큰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이 임진왜란의 실패라는 점에서 하나의 비극으로 볼 수 있다.

서사와 역사의 차이점은 서사는 끝이 나면 또 다른 서사로 이어지는 것이나, 역사는 또 다른 역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사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나,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온 이야기다. 그러나 만들어온 이야기를 단순히 만화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로 통해 충분히 역사적 인식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역사적 사건들을 소설이나 영화로 제작하여 흥행하면 사회적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가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을 때 사회에 큰 충격이 주었다.

장애복지시설에 일어난 폐단이 불러일으킨 사건에 대해 사회적 이슈는 매우 대단했다. 단순히 역사적 소재라는 것은 먼 과거만이 아니라 최근의 이야기도 역사적 소재인 것이다. 영화 <변호인>에선 부림사건이 이외에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나오는데, 현재 대법관 임명 안을 두고 후보자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개입한 법조인이란 점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미디어콘텐츠가 생각보다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점이다. 물론 최규석 작가의 <100℃>란 작품 역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를 전후배경을 삼은 작품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일본이나 한국에서 제작된 만화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등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역사적 인식을 심어주거나 혹은 반성하게 해줄 수 있는 전환지점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역사적 소재가 콘텐츠로 제작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허구의 서사일 뿐이다. 사실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 아래 스스로 찾아갈 수밖에 없다. 단지 조금 아쉬운 것은 역사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승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패자의 기록은 늘 어리석은 존재로 될 뿐이다. 아니라면 치욕과 모욕 그리고 고통과 억압의 상처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와 죄악, 혹은 부당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외압과 강탈을 좀 더 명확히 찾아내지 않는다면 똑같은 비극은 반복되고, 그 비극의 수혜자는 바로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예다. 만약 미화되거나 조잡스럽게 조작된 콘텐츠를 비판 없이 수용한다면 과연 제대로 된 미래가 나올까? 물론 보는 그 순간은 재미로 끝나면 모르지만,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따르게 된다. 특히나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장르는 오락이나 재미로 받아들이기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인문학1> 마지막 편에서 재미있는 정리가 나온다.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디지털은 사진의 기록적 성격을 파괴한다. 이로써 조롱당하는 것은 역사,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주의 의식이다. 아날로그 기록사진은 역사에 봉사하는 이미지였다. 그것은 문자로 이루어진 ‘상징계(The symbolic)'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조작사진은 증언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의 의무에서 독립된 순수 자율적 이미지로서 환영과 허구로 이루어진 ’상상계‘의 현상이다. 백남준은 이미 1970년대 초에 더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은 ’이미저리(imagery)'나 ‘비디오리(videory)'뿐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거처를 옮기고 있다. 사실은 허구로, 증명은 날조로, 진리는 오락으로 대체 된다.”

우리가 주로 다루는 만화애니메이션을 생각하자면, 이들은 완벽한 이미지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조작된 영상물이다. 최근 영화와 드라마 같은 실사영상물이 아니라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경우 더욱 완벽한 허구와 오락거리다. 게다가 날조된 설정과 인물이라면 더욱 완벽한 상상의 세계가 아닌가? 하지만 제 아무리 상상의 세계 역시 현실적 기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19세기까지는 현실이 상상의 세계를 지배한 시기지만, 20세기부터 점점 역전되어 이제는 상상의 세계가 현실을 지배한다. 역사적 소재로 본다는 만화애니메이션이 주제라고 하나, 그런 주제로 본다면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해 너무 간단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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