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멈추지 않고, 지금도 혹은 앞으로도 계속 흘러가는 존재다. 그 존재라는 것은 공간 위에 의해 처음 생성되겠지만, 이후 시간적인 기능으로 기록된다. 즉 인간의 시간이란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인간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더라도, 인간의 시간을 기록한 영상은 되돌릴 수 있는 기능이 생겼다. 우리가 미디어로 접하는 영상들은 모두 기록되어 녹화되어 다시 처음부터 재생되거나 역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거나, 그 재생된 시간처럼 자신의 시간이 같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자유자재로 변해도, 그 시간을 조정하는 인간과 그 시간이 조정된 콘텐츠를 보는 인간 역시 비가역적인 존재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역사라는 말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로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지나간 것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연결되어 있는 사슬처럼 연속된 하나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예전에 흥행한 영화 <변호인>에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이 작품 설정상 등장한 적이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있기에 현재 우리가 다시 접하고 판단할 수 있다. E.H 카는 역사에 대해 역사가의 의무로서 생각하겠지만, <굿바이 E.H 카>에서는 역사라는 것은 역사가에 의해 정립되는 게 아니라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민중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역사라는 것은 누구나 자신에게 하나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는 가치관이다. 인간이 살아온 현재는 결국 과거의 시간이 축척되어온 하나의 과정인 점에서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역사를 본인의 영역이 아니라 그 이전의 영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현대인들의 정체성에 부딪히는 문제가 아니라 과거 우리 수많은 인류가 부딪힌 문제였다. 하지만 현대사회 인간에게 역사라는 가치는 그저 지루한 소재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통계조사 젊은 세대로 넘어갈수록 우리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언제 일어나고 그것에 대한 경위나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1950년 한국전쟁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이나, 1905년 을사늑약에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탈된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자주권, 그리고 이어지는 1910년 한일병합 같은 일들이다.
이런 근현대사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도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는 현실에서 이제 그 이전의 시대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욱 더 알 수가 없다. 자신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은 이상 어떠한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린 이런 부분에 대해 깊은 성찰과 비판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최근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장르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금회 네이버카페 애니큐어에서 실시하는 프로젝트 6번째가 “역사적 소재와 만화애니메이션의 만남”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역사적 소재에 의해 만화애니메이션만 논하는 것은 조금 부적당하고 여기고 있다. 만화애니메이션이란 것은 하나의 서사를 가진 매체이고, 문학소설이나 TV 드라마, 영화 등과 같은 다수의 미디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는 점이다. 역사라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기록한 fact이다. 하지만 fact란 만들어진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실과 진실은 다를 수가 있고, 자신이 속해있는 진영이나 국가, 사회에 따라 기록은 달라진다. 한국의 역사에서 아직까지 고조선에 대해 논란이 쌓여 있고,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에서 한반도 북쪽으로 넘어서지 못한 것이 과연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이다.
한국의 민족에서 원래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라, 북방과 남방이 섞여 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의 시조가 단군이라면, 고조선의 영토를 거의 보존한 국가는 고구려로서 한국의 선조는 북방 계열인가? 아니면 고구려와 백제 멸망 이후 살아남은 남방 계열이 선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인류학적으로 북방민족의 기원은 자신들의 토지가 적합하지 않기에 사냥과 승마에 능하고, 남방민족은 비옥한 토지가 있기에 농경문화가 잘 정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가야왕국이 김해평야인 점에서 식량과 물의 관계는 문명과 국가 성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역사적인 요소에서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 혹은 문화적 상황, 기후와 토양, 식량 등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오늘날 우리에게 그 역사라는 과거의 유산들이 이어져 내려온다. 당시에는 당연한 것들이나, 지금 우리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역사와 역사의 소산물이다. 따라서 역사적 소재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요소에서 문화콘텐츠 관계는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최근 이런 일이 있다고 한다. 어느 드라마를 방영하거나 혹은 어느 영화를 상영하는데, 누군가 강력한 스포일러를 유발했다는 점이다. 가령 <정도전>에서 조선개국공신이 정도전이 죽고,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죽는다는 점이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각각 등장하는 주인공이 죽는 것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어버린 현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쇼를 보려는 관객에겐 짜증나는 스포일러이겠지만, 일반 상식수준 정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도전이나 이순신 모두 역사적 인물로서 한 사람은 조선개국 이후 왕과 신하의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에서 죽어야 했고, 한 사람은 과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대결하다가 죽게 된다. 물론 이순신의 죽음은 왜국과의 전쟁보단 조선 내부의 권력적 암투에 의한 갈등도 매우 크다. 그런 점에서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관점을 보기보단 다양한 조건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한국 대표 연예인에 일본에서 ‘욘사마’라고 불리는 배용준 씨가 출연한 <태왕사신기>에서 연출한 장면들은 너무 터무니없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한국드라마 중에서 왕과 왕비를 시해하려는 무리가 이상한 요술을 사용해서 암살한다는 설정 역시 상당한 오류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만약 사전에 시청자로 하여금 제대로 된 역사적 인식과 사실을 알릴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제 사극드라마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는 제작진에 의해 설정을 재조정하여 가상의 이야기나 인물, 사건 등을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드라마로는 꾸준히 KBS1방송에서 했고, 그 외의 방송사에서 제작했지만, 최근 극장가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영화들이 계속 이어져 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콘텐츠에 대해 우리는 그 당시의 역사를 역사도서보다는 드라마나 영화로 통해 판단해 나가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시대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서 영상으로 통해 보는 것이 훨씬 더 잘 이해하기 쉽고,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정확한 문헌적인 정보에 의해 분석한 게 아니라 그저 연출가와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에 우리가 깊이 파고들면 역사적 사실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정보로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나 영화는 대중들에게 친숙하기에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가 쉽다. <굿바이 E.H 카>에서 모든 사람이 역사가가 되는 것은 좋으나, 문제점은 모든 사람들이 역사가가 되기 위한 사전 지식이 없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그나마 한국에선 대부분 문화콘텐츠가 영화나 드라마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우리 애니큐어가 지정한 것은 만화애니메이션이다. 국내 만화책은 모르나 애니메이션으로 역사적 소재를 제대로 다른 작품은 거의 없다. 해보았자, 위인들을 소재로 한 교육용 애니메이션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차라리 web-toon이나 만화를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 만화책에서 몇 편 제작되고 있다고 하나, 한국 만화시장규모와 인식을 고려하면 매우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어떻게 볼 것인가? 솔직히 말하여 일본의 문화콘텐츠에서 만화애니메이션의 규모는 매우 거대하며, 최근에 라이트노벨, 피규어, 음반 등도 활발하여 일본의 하위문화는 단순히 하위문화 공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을 보면 항상 느끼나, 그들은 자신들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만화애니메이션 내에 반영하고 있다.
언제나 벚꽃의 등장은 자신들의 문화적 요소를 잘 들어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은 그런 문화적 정체성만 드러내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관념도 심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작품에서 대표적으로 나오는 설정이 바로 전국시대와 메이지유신에 대한 이야기다. 전국시대와 관련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일본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메이지시대의 도쿠가와 막부를 지키기 위한 신선조 그리고 유신자사들의 싸움은 늘 드라마나 영화, 심지어 만화애니메이션에 심하게 반영되어 이따.
전국시대에 대한 소재로 미소녀 모에로 통해 만들거나, <바람의 검심>이나 <박앵귀> 같은 작품들은 메이지 시대 초반의 갈등들을 다룬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소재로 하기에 전쟁이란 것은 많은 인간들을 죽이고, 가옥과 밭을 파괴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나, 만화애니메이션에선 위대한 영웅들이 활보하는 거대한 서사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싸우는 장수들은 엄청난 동경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한 인물로 묘사한 점이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은 거기서 희생되는 많은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전쟁의 목적은 평화 내지 정의라는 이름으로 승부한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정치적 대의는 백성 혹은 국민이란 존재를 위해서라고 한다. 전쟁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과연 그런 것인가? 과거 어느 영주의 싸움은 그 영주의 영토에 사는 주민 모두들에게 부여된 전쟁이라고 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지배계층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사지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죽는 것이 과연 영웅이라고 칭송해야할 전쟁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화애니메이션에서 역사적 소재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미화된 점이 분명한 문제다. 2015년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 <전국시대> 시리즈를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 <전국시대>를 보면 그 당시 장수들을 외모나 성격 등의 설정을 지나치게 미화시켰으며, 그 캐릭터에 반대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저하시킨 점이다. <의풍당당 카네츠구와 케이지>를 보면 주인공 2명과 일부 등장인물을 제외하면 모두 하찮은 존재로 묘사한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에서 역사적 소재로 만든 작품들의 문제란 바로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점이고, 그들이 하는 행동들에 대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는 주요 이용대상자가 젊은 계층과 학생들이다. 그들이 즐기는 만화애니메이션에 역사적 소재는 역사적 인식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큰 문제점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에서 일본열도를 통일한 대업에 대해 큰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이 임진왜란의 실패라는 점에서 하나의 비극으로 볼 수 있다.
서사와 역사의 차이점은 서사는 끝이 나면 또 다른 서사로 이어지는 것이나, 역사는 또 다른 역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사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나,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온 이야기다. 그러나 만들어온 이야기를 단순히 만화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로 통해 충분히 역사적 인식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역사적 사건들을 소설이나 영화로 제작하여 흥행하면 사회적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가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을 때 사회에 큰 충격이 주었다.
장애복지시설에 일어난 폐단이 불러일으킨 사건에 대해 사회적 이슈는 매우 대단했다. 단순히 역사적 소재라는 것은 먼 과거만이 아니라 최근의 이야기도 역사적 소재인 것이다. 영화 <변호인>에선 부림사건이 이외에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나오는데, 현재 대법관 임명 안을 두고 후보자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개입한 법조인이란 점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미디어콘텐츠가 생각보다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점이다. 물론 최규석 작가의 <100℃>란 작품 역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를 전후배경을 삼은 작품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일본이나 한국에서 제작된 만화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등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역사적 인식을 심어주거나 혹은 반성하게 해줄 수 있는 전환지점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역사적 소재가 콘텐츠로 제작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허구의 서사일 뿐이다. 사실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 아래 스스로 찾아갈 수밖에 없다. 단지 조금 아쉬운 것은 역사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승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패자의 기록은 늘 어리석은 존재로 될 뿐이다. 아니라면 치욕과 모욕 그리고 고통과 억압의 상처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와 죄악, 혹은 부당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외압과 강탈을 좀 더 명확히 찾아내지 않는다면 똑같은 비극은 반복되고, 그 비극의 수혜자는 바로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예다. 만약 미화되거나 조잡스럽게 조작된 콘텐츠를 비판 없이 수용한다면 과연 제대로 된 미래가 나올까? 물론 보는 그 순간은 재미로 끝나면 모르지만,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따르게 된다. 특히나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장르는 오락이나 재미로 받아들이기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인문학1> 마지막 편에서 재미있는 정리가 나온다.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디지털은 사진의 기록적 성격을 파괴한다. 이로써 조롱당하는 것은 역사,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주의 의식이다. 아날로그 기록사진은 역사에 봉사하는 이미지였다. 그것은 문자로 이루어진 ‘상징계(The symbolic)'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조작사진은 증언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의 의무에서 독립된 순수 자율적 이미지로서 환영과 허구로 이루어진 ’상상계‘의 현상이다. 백남준은 이미 1970년대 초에 더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은 ’이미저리(imagery)'나 ‘비디오리(videory)'뿐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거처를 옮기고 있다. 사실은 허구로, 증명은 날조로, 진리는 오락으로 대체 된다.”
우리가 주로 다루는 만화애니메이션을 생각하자면, 이들은 완벽한 이미지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조작된 영상물이다. 최근 영화와 드라마 같은 실사영상물이 아니라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경우 더욱 완벽한 허구와 오락거리다. 게다가 날조된 설정과 인물이라면 더욱 완벽한 상상의 세계가 아닌가? 하지만 제 아무리 상상의 세계 역시 현실적 기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19세기까지는 현실이 상상의 세계를 지배한 시기지만, 20세기부터 점점 역전되어 이제는 상상의 세계가 현실을 지배한다. 역사적 소재로 본다는 만화애니메이션이 주제라고 하나, 그런 주제로 본다면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해 너무 간단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