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고, 한길사에서 발간된 정식완역본입니다. 예전에 읽은 돋을새김에서 나온 <에밀>과 다르게 상당히 내용이 깊이가 있고, 읽는 내내 감탄이 멈추지 않는다. 괴테가 손에는 셰익스피어지만, 왜 영혼은 <에밀>인가에 대해 보면, 셰익스피어는 대문호로서 세상에 큰 이름을 남기나, 루소의 <에밀>은 문학을 떠나 정치, 사회, 경제, 교육, 철학, 역사 등 모든 인문사회학에서 두루두루 섭렵할 수 있는 깊이가 존재한다.

 

칸트의 3대 비판서조차도 <에밀>을 읽은 것에 대한 효과였다. 인간은 처음 태어나면 이성이 아니라 감각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인간은 이성 이전에 감정이 존재한다. 관념이란 것에 대해 가지는 것보다 그 관념을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이성이 가능하려면 모든 개인적인 역사주의는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처음 태어난 아이가 억지로 지식에 물들일 경우 순수이성을 가지기란 어렵다. 오히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배제되어 몸으로 익히는 순간 순수이성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주의자인 롤즈나 그 롤즈의 후예인 마이클 샌델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전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큰 히트를 쳤다. 내가 읽기 전에 풍문은 별 5개 중에 5개면, 처음 읽고 나서 별이 4개로 줄고, 롤즈의 <정의론>, <만민법>, <공정으로서의 정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으면서 별이 3개로 줄고, 현재 루소를 읽으면서 별이 2개로 줄어들었다.

 

내가 <정의란 무엇인가> 내지 또는 여기에 덧붙이어 강신주 교수의 서적 같은 것을 경계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족하거나 불량하거나 또는 미숙해서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들의 책을 읽는 것에 끝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 책을 읽은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독자의 편향성이다. 강신주 교수의 책을 보면 그가 다학박식한 분이란 점은 확연하다. 하지만 그의 책을 보고 그의 책에 나온 다른 도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강신주 교수는 다른 책을 추천한다. 루소의 <에밀>과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추천하는 것이 생각난다. 철학적 시 읽기 시리즈에서 나온 <스펙타클의 사회>는 강신주 교수만이 아니라 진중권 교수나 이택광 교수 뿐만 아니라 외국 철학가조차도 추천하는 도서다. 하지만 이 책을 잡아드는 국내 독자는 얼마 없을 것이다. 책을 읽음으로서 다른 책으로 넘어가게 하는 것이 지식의 전파에서 중요하다. 

 

단지 그것으로 읽어서 나는 이 책을 읽어 있어로 만족하는 부류들에 대해 그 자체로서 내가 좋다 나쁘다로 구분짓을 수 없으나, 그런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책에서 나온 철학자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간단하게 말하는 온오프라인 상의 사람들을 보면 다소 걱정이 든다. 실제 그들의 철학이나 사상은 쉽지가 않다. 단지 쉽게만 보이려고 적은 것이지 그들의 오묘한 철학적 명제가 그래 간단히 읽혀질 것이라면 왜 계속 사람들이 꾸준히 연구하고 고민하는가?

 

독서모임에 어느 분이 스피노자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아직 스피노자를 읽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스피노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사상을 남긴 것보단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다. 자신의 모든 이익을 포기하고, 타인의 보편적 윤리를 위해 평생 고통으로 살아간 실천하던 지식인 그 정도다. 스피노자에 대해서 더 추가할 만한 것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이 알튀세르가 그 자신을 두고 스피노자주의라고 밝힌 것이다.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말하는 범주가 거기까지다. 그렇지만 알튀세르의 서적은 몇 권을 읽었기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재생산에 대해 어느 정도 내 의견을 전달이 가능하다. 그런 서적을 읽음으로서 전달하는 것과 그런 서적을 읽은 사람이 그 책과 자신 생각을 넣은 서적은 당연히 다르다. 다른 임시적 모임에 제일 짜증나던 부분은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칸트주의를 강조한 것에 대해 칸트가 최고라고 말하던 학생들이었다. 나이도 20~30세 사이이니, 대학생과 대학원생, 또는 졸업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그 책을 읽으면서 실제 칸트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 칸트의 서적은 1페이지도 읽지 않고서 칸트가 좋다 만다를 논하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칸트는 독일인이고, 샌델은 미국인다. 미국인의 서적을 번역한 도서는 원래의 서적 즉 독어로 번역한 제목과 차이가 있었다. 번역자조차 원전을 안 읽고 모르는 상태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원전을 자신이 찾아 1번이라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저런 이유다. 정확한 명제를 모르고 말하는 것과 설사 그렇게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지만, 판단력에 대한 올바르지 않은 선택은 추후에 잘못된 선택을 지정하게 된다.

 

그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그 손가락에 끼여진 반지나 엑세사리만 보는 사람들로서 그 손가락이 지칭하는 점 그 자체는 작겠지만, 가리키는 방향의 각도나 넓이는 가늠할 수 없다. 책이 책을 부른다는 말처럼 그 책을 읽어 모든 것이 알았다고 생각하는 판단은 위험하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런 책에는 쉬운 책이 절대 들어가 있지 않는다. 

 

여담으로 최근에 강준만 교수가 낸 서적을 두고 생각하나, 2000년 전후 그의 서적은 유용하나, 지금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진보의 문제점은 있지만, 그 트렌드나 성향이 잘못 잡았다. 이번 6·2 지방선거나 선박침몰 피해자에 대해 강준만 교수가 지지하던 인물을 살펴보면 전혀 제대로 한 게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리는 진보의 길이라니, 덧붙이자면 그가 지지한 사람은 진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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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배우가 선박침몰사고로 죽은 희생자의 가족에게 막말을 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참 답답하기 짝이 없다.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글을 인용하면서 정작 중요한 점은 정치적인 입장에서 헌법에 대한 기본적인 맥락을 제외했다. 즉 문학적으로 말하면서도 정치철학적으로 배제된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반대로 이제는 우리는 역사가 시보다 철학적인 상황이 도래했다.


하지만 역사라고 해도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국민 대부분이 그 현장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세계라는 이미지로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는 이미지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은 결국 문맹인으로 되는 것처럼 가상세계의 이미지가 제 아무리 실재하는 현실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하나의 가상이다. 우리의 현실은 역사적 가상이란 시로서 움직이고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그 배우의 문제점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도 그만의 논리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국가의 기본법률은 헌법이고, 헌법에 명시된 국가정부와 행정기구가 과연 그렇게 제대로 대응했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적인 기록을 본다면 인간이 극단적으로 몰리는 것에 대한 비관찰성이다. 타인의 관찰은 넘어가도, 결국 자신의 개인적 내력으로서 자신의 비극적 삶을 관찰하게 해준다.

 

단지 실수는 자신의 형님이 돌아가신지 10일이 지났다면, 그 사망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죽었고, 그 원인과 배경을 상세히 나열해야 한다. 선박사고는 정해진 용량초과, 안전도구 미비, 선원들의 직무자각인식(비정규직 내지 근로조건 열악도 포함), 해경과 해수부의 관료조직의 부패, 거기에 연류된 정경유착과 암묵적인 비리가 원인이다.

 

누군가 분명히 약속을 하고, 그렇게 해준다고 선언했지만, 전혀 뒤에 일어난 반응은 시원치 않다. 약속을 먼저 했다면 약속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내세워야 한다. 물론 피해자 측의 과도한 발언을 문제삼는다면, 그것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인물에 대해 과오가 있다면 인정해야 하나, 그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욕을 해서 욕을 했다는 어리석은 판단이다.

 

부모의 죽음에서 그것은 자신의 배우인생이란 개인적 책임이지, 사고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어린 생명과 다르다. 병으로 죽은 것과 사고로 죽은 것에서 무엇이 같을까? 만약 형님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그 과정과 원인, 상황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닌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위대하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위대함만 보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작품 그 자체를 비평한다. 

 

그러나 가장 착각하고 있는 것은 배우가 배우로서 셰익스피어를 말한다면,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헌법을 논해야 한다. 국가의 주인이 누군인가부터 시작하여 아무리 간접의회민주주의 정치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헌법정신을 두고 발언해야하는 점이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법은 법을 위해 존재하는가? 법을 만든 자를 위해 있는가? 법 그 자체를 초월해 있는 자를 위한 것인가? 노모스 법 위의 군림하는 자 즉 정치적으로 통치하려는 자인가? 대한민국은 절대왕정의 군주제가 아니다.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처럼 그 나라의 정치를 보면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희생자라는 약자를 궁지로 모는 현실에서 우리의 앞날은 어두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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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8-2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만애비 님, 이 회색톤다운 주황은 으아앗
부디 친절한 색으로 바꿔주시기를요!

만화애니비평 2014-08-28 15:44   좋아요 0 | URL
교체했습니다~
 

 


1. 영화리뷰 시작전에 

인간의 인식지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지식의 네트워크 시스템 아래에서 헤엄치고 있다. 다양한 정보와 그 정보로 통해 우리는 생활의 영위를 즐긴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시장 아래 자본에 국경이 없기에 가능한 서비스다. 그렇다면 구글과 같은 대형검색 사이트의 이용은 무엇으로 봐야 할까? 트위터나 페이스북 역시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이런 정보 이용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발전해 간다. 소유물에 대한 권리와 더불어 그 소유에 대한 재생산에서 계속 증식하고 반복되어 간다. 문제는 증식의 결과가 정보의 과잉화이다.

 


심지어 예술과 같이 일반인들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분야도 그렇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은 레니메이드로 생산된 남성용 소변기에 서명 한 번 했는데, 이제는 다다이즘 예술이라면 누구나 봐야할 과정이다. 예술이 아닌 대중 산업 활동의 사소한 물품도 예술인가? 예술의 과잉은 정보의 과잉만큼 휘황찬란하다. 따지고 보면 서울 남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시 전경이나 부산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은 어떠한가? 어두운 하늘 아래 불빛이 잔잔하게 올라오며,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듯한 느낌이 온다. 아니 심지어 환락가나 유흥가와 같이 유혹과 성적인 욕망으로 넘쳐난 곳도 예술이 보인다.

 

적나라한 색의 네온사인이 서로를 마주보며 돌아가고 있다. 일정한 시간으로 패턴이 정해지며, 도시의 욕망이 화려한 환상의 공간처럼 보인다. 억압된 충동에서 표출되는 욕망의 표출에서 우리가 아는 예술 역시 그런 욕망이 표출과 억압의 표출, 이상에 향한 집착 등에서 탄생된다. 그런 만큼 우리 사회는 자기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의지와 욕망에 충실하게 따른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과학적인 분석으로서 경제성을 따진다. 그런데 그 경제성에서 오히려 과학적이기보다는 신화적으로 변모된다.

 

 

2. 미디어와 욕망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거리에 가면 많은 간판과 디자인, 그리고 우리가 입고 마시고 즐기는 상호까지 말이다.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의 기호이다.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욕망은 그 욕망을 성취하면 또 다른 욕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욕망의 대상을 투여하기 좋은 것이 미디어의 세계이다. 특히나 우리는 문자문화로서 세상을 보는 것보다 영상문화로 세상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문자처럼 계속 반복하여 지식과 판단력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영상은 순간적으로 지식과 판단력을 요구한다.

 

순간적이고 부동화 되지 않은 매체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보단 그것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포로가 된다. TV 드라마와 혹은 극장 영화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보다는 우리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낮은 것에 대해 집착한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캔디 이데올로기, 그리고 역으로 온달 콤플렉스가 끊이지 않을까? 그래도 적어도 온달 콤플렉스보단 신데렐라의 신화에서 우리는 많이 이끌린다. 드라마의 세계에서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은 우리 사회로 하여금 더욱 더 타인에게 욕망하도록 한다.

 

생각해보면, 영상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옷과 구두, 가방과 차량 등등 그 많은 것들이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으로 찾아온다. 자본시장에서 보이는 미디어의 효과는 즉 상품의 기호를 대상인물로 하여금 매체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대중문화에 대한 spectacle을 요구한다. spectacle은 1번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그 spectacle이 새로운 spectacle로 이어지고, 어떤 spectacle의 무너짐은 또 다른 spectacle로 등장한다. 인류가 존재하고 나서 자본주의시장과 더불어 영상미디어의 지속성에서 spectacle은 영원한 우리의 지배자다.

 

 

3.영화와 대중

그래서 미디어라는 것에는 항상 권력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그 권력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외교적이든 좋다. 미디어로 통한 대중들의 의식장악은 좋든 싫든 하나의 종교적 제의와 같다. 영상은 이미지와 더불어 소리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영상기호학적으로 영화는 영상, 대사. OST, 효과음(소음), 그리고 서사다. 문자서사와 영상서사에서 같은 스토리를 진행해도 그 감정의 기복과 재미는 당연히 후자가 앞선다. 문자서사는 우리가 생각해야 하나, 영상서사는 우리에게 생각을 하게 어렵게 만든다. 눈과 귀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므로 가역적인 선택권이 없다.

 

신드롬의 여파에서 영화와 드라마는 막대한 영향을 가진다. 최근 영화 <광해>를 보자. 조선왕조 선조시대, 무능한 왕과 어리석은 신하로 인해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영화에서 <광해>는 사라진 기록에서 하나의 faction을 추구하나, 그 <광해>라는 영화의 광해군으로 통해 많은 흥행을 일으켰다. 광해군이란 인물로 통해 우리가 선택하고자 하는 왕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에서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이다. 미디어에서 대중을 파고들어가는 그 심리적 호응과 공감에서 메시아주의적인 요소와 더불어 마녀사냥광란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교조주의적인 가치관이 하나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폭력이란 단순히 사람의 신체에 대한 물리적 가격이나 폭언만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내에서도 충분하다. 인간이 옆에 있어도 마치 없는 것처럼 혹은 처음부터 제외된 존재처럼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이 인간이란 존재인데도, 인간으로 관념적인 인식조차 부정당하는 이상 생물학적인 동물이 있어도 사회적인 존재로서 존중받지 못한다. 그래서 <광해>는 그런 인간 내면에 쌓인 억압과 해방에 대한 욕망을 노래한 것이다. 결론은 그 욕망으로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전해준 것이다.

 

 

4. 미완의 이야기

단지 영웅을 두고 만든 서사에서는 그가 과업이 완수되든 혹은 되지 않든지, 누구나 그의 임무를 맡지 않으려 할 것이다. 영웅은 누구나 되고 싶으나, 그가 거치는 여정이나 매우 고되고 괴로운 일이다. 거기서 자신이 할 수 없음에 거기에 몰입하는 인간들은 영웅의 과업완료에서 만족하고 극장에서 나오나, 다시 갈증을 느낀다. 극장의 가상세계는 가상세계이지 결코 현실 안이 아니다. 단지 현실 안에서 우리의 시간과 돈을 내어 관람할 뿐이다. 오히려 현실 속에 사는 인간들은 더욱 더 괴리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영웅을 바라보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그 영웅처럼 되고 싶은 것이냐? 그런 점에서 이번에 상영하는 영화 <26년>은 매우 독특한 서사적 관점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영웅을 바라지도 않고, 영웅을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지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다. 영웅서사의 특징은 어느 등장인물이 거대한 모험 후에 과업을 완료할 경우 상으로 새로운 세계나 권력을 가지게 된다. 특히 한국의 무속신화에서는 신작을 부여받거나 신령으로 승격된다. 인간이 본래 인간이 아니라 신이란 존재로 신화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건국신화에서는 나라를 세우거나 혹은 나라를 이어받는다. 또한 영웅서사의 특징은 대부분 주인공이 남성이란 점에서 과업완료에서는 여성과의 혼인이 필수적이다.

 

영웅의 조건은 자신만의 세계와 혼인이란 통과제의다. 그런다고 모든 영웅이 이런 과업을 완수하는 것은 아니다. 도중에 사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아쉬움으로 가득하기에 우리는 그 버려진 역사의 시간을 하나의 신화로 만든다. 삼국지의 유비와 제갈량, 한고조 유방과 패권을 다투던 항우와 그의 여인 우희, 이들의 이야기는 계속 소설과 영화, 게임과 만화로 계속 나온다.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원통함이 이들의 비장미를 한층 올린다. 그런데 이런 비장미의 세계를 영웅이 아니라 일반 사람이라면 어떠한가라는 점이다.

 

 

5. 신화와 26년

길거리에 흔히 보일 것 같은 사람들에서 말이다. 등장인물은 신화적이지 않지만, 그들의 행동은 신화의 세계를 단절하고 자신이 스스로 희생한다. 그들에게 그런 단절을 하게 만든 것은 억압과 폭력이란 신화가 있었다. 그 신화는 그들의 문명이 아니라 어느 거물의 권력에서 비롯된 희생의 plot 이었다. 그들은 제의 속에 희생된 자들이고, 그 희생은 1번이 아니라 평생 남길 수 없는 상처가 된 희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물과 그 거물이 만들어낸 괴물적인 사회의 존치를 위한 신화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그들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정말 도덕적인지 부도덕인지에 대한 이성의 판단 대신 인간이 만들어낸 배타적인 무의식적 공포가 그들을 악귀로 만들었다. 인간에게 부여된 메시아주의는 곧 마녀광란이다. 누군가 위대한 구원자가 되려면 반대로 구원자가 응징해야할 원인제공자가 필요하다. 그 원인제공자들은 흔하게 넘치는 영웅서사영화에서는 광기에 빠지거나 혹은 비이성적이거나 양심이 없는 자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원인제공자들이 오히려 거대하고 강력한 조직이 아니라 볼품없이 약하고 규모도 적다.

 

<26년>의 영화에서 반정부조직과 이적단체로 몰린 어느 도시의 주민들은 금방 제압되고 모두 주저앉을 정도로 나약했다. 그러나 언론과 미디어에서는 자국의 위협을 제거했으며, 매우 신속하게 타격을 가한 점을 자랑으로 내세운다. 진실과 그 진실에서 전해지는 사실은 분명 존재하면서도 우리의 사회는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로 전이되고, 그것은 1980년 5월부터 시작하여 영화원작인 만화와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던 지금까지 시뮬라시옹(simulation)이 되었다. 오히려 왜곡된 거짓이 하나의 거대한 교조주의로 탄생했다.

 

 

6. 영화의 시작

그래서 메시아주의는 1980년 5월에 잠시 완성되었으나, 그 희생자들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살아있는 한 메시아주의는 계속 진행되고, 그 메시아주의에 의해 마녀사냥은 일어난다. 지역주의이란 차별에서 말이다. 이 영화는 매우 특이하게도 이근안이란 고문기술자와 그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한 김근태 전 의원을 소재로 한 <남영동 1985> 이후에 나왔다. <남영동 1985>는 실존인물 김근태의 <남영동>이란 수기에서 직접적 사실로 서사를 꾸몄다면, <26년>은 강풀의 원작을 하였고, 실제 사건이 있더라도 직접 그가 그 현장에 있지 않고 증인과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었기에 간접적 사실로 서사를 꾸몄다고 볼 수 있다.

 

서사를 이루던 원작의 발단과정과 본래 서사형태가 수기와 만화라는 점에서 서로 간의 차이가 드러난다. <남영동 1985>는 암울한 어둠이 내리는 감옥에서 디스토피아 세계를 불편한 카메라로 보여준다면, <26년>은 상상력을 하늘로 띠우면서 재미와 감동 그리고 슬픔과 분노를 느끼기 위한 추임새들이 들어간다. 다소 한국에서 상투적으로 나오는 조폭영화의 코믹한 설정을 넣음으로 관객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는다. 대신 <남영동 1985>은 지속적 고문과정과 학대만 나왔기 때문에 관중들은 감정의 기복을 느끼지 않는다.

 

단지 어둡고 답답한 심정만 유지한다. <26년>은 이에 반해 카메라의 앵글이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과감하고 지나친 클로즈업을 자제한다. 특히 소품의 배치나 건물의 배치들은 구도의 안정감으로 통해 관객에게 카메라로 불편한 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사건의 진행에서 감정을 자극한다. 이 영화에서 영상이미지의 묘미는 바로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조합이다. 구상은 처음 어느 여성이 총을 들고 누굴 노린다. 그 후에 갑자기 어느 방이 나오고, TV에서 거물이 등장한다.

 

 

7. 비극의 시작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빅브라더처럼 말이다. 영화는 실사이미지에 갑자기 애니메이션 화면으로 바뀐다. 실사영화는 카메라 중심의 미학이라면, 애니메이션은 작가의 미학이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를 촬영한다면 애니메이션은 만들고 싶은 세계를 촬영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의 영화 대신 반리얼리즘한 애니메이션이야 말로 만화의 원작에서 보여주는 극단적인 전달력을 보여준다. 시를 읽던 어느 문학도가 있는 방에 어느 여인이 아이를 업으며 행복한 가정을 보여준다. TV 옆엔 결혼한 부부의 행복을 상징하는 장식물들이 장롱 위에 놓여있다.

 

그런데 어디서 날라 오는 총알, 그리고 머리를 관통하여 피를 뿌리는 여인, 시나리오의 비극은 여기부터다. 길에 우연히 걷다가 군인들이 시민에게 발포한다. 당시 누가 그 발포를 했는가? 거물은 군인의 자위권이라고 하나, 무장력이 형편없는 일반사람에게 총을 겨누고 발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총알은 날라 오고, 어느 남매가 길을 달린다. 총에 맞은 사람들, 가다가 넘어서 곤봉을 맞고 죽는 사람들, 그런 아귀와 같은 상황에서 누나는 남동생의 손을 붙잡고 뛴다. 그리고 갑자기 뭔가 관통하는 소리, 누나는 배에 총을 맞아 내장이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 중의 하나다. 어디선가 어느 아낙네가 아들을 데리고 시체들이 쌓인 구릉지에 간다. 거기서 자신의 남편을 발견한다. 이미 부패가 되었는지 턱 상단으로 해골이 조금씩 보인다. 어느 건물 어느 군인이 사람을 쏜다. 그 사람은 죽어가며 우리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묻자 군인은 당황하고, 자기의 다리 한쪽을 칼로 베어버린다. 그리고 옆에 있던 전우에게 가니 그는 더 이상 이성도 찾을 겨를 없이 총의 개머리판으로 사람의 머리를 내리친다. 이미 죽었는데, 미친 듯이 내려치는 그의 광기는 안경을 낀 전우의 자제로 결국 정신이 드나, 자신의 손에 묻은 피에 절규한다.

 

 

8. 영상기법

이런 장면이 실사장면이 아닌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한 점에서 상당히 포스트모던한 연출을 하였다. 실사 ☞ 애니메이션 ☞ 실사의 연결은 병렬기법이란 애니메이션 연출을 사용했고, 그 병렬기법 아래 애니메이션 내부에서 실사의 영상의 조합은 병치기법을 사용했다. 애니메이션의 표현주의 미학에서 암울한 분위기와 잔혹한 상황, 그들이 느끼던 공포와 분노, 슬픔과 원망을 스크린의 전부를 채워버렸다. 그렇게 1980년 5월 그 도시의 폭풍은 지나갔다. 하지만 폭풍은 지나가도 상처는 남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되 살은 자는 평생 상처를 이어지며 살아간다. 그것이 자신을 몰아넣고 가혹한 여생이 되어도 말이다. 오히려 죽는 것이 속편해도 그냥 죽는 것이 불가능한 그들에게 현실에서 어떤 구원도 오지 않는다.

 

이미 현실은 구원의 메시아를 차단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권력은 그들과 마주한다. 언론, 국가기관, 심지어 여론까지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 크리틱>에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이란 삼분위 체계가 이미 거물에게 존재했다. 어떤 여론과 저항이 와도 끄덕도 없다. 그래도 그는 영원히 추앙된다. 그의 생일에 많은 사람들이 엎드려 절을 할 때, 그의 모습이 클로즈업이 된다. 얼굴전체가 아니라 코 위로 눈과 이마가 보인다. 거물에게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의 눈과 이마 아래로 올라오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경찰이 맡은 신호시스템에서 거물의 이동에서 모든 것이 정지되어야 했고, 거물의 이동에는 수많은 고급승용차가 따라 붙는다. 이러기에 과거에 상처를 받은 자들은 절망에 빠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아무 것도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 가정이 기울이게 되어 양아치에서 조폭이 된 진배, 그의 어머니는 평생을 트라우마로 미쳐 지낸다. 군인만 봐도 놀라고, 아들이 군제대하여 군복 입은 모습을 보고 놀라 식칼을 휘두른다. 그 칼에 진배의 오른쪽 눈가에 상처가 난다. 그리고 어머니는 계속된 정신병으로 결국 병원에 머문다.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고통에서 평생 지울 수 없는 분노와 증오로 살아간다. 그의 인생이 깡패로서 3류 인생으로 살아가나, 그 누구보다 삶의 의지가 있었다.

 

 

9. 담배와 오이디푸스

조직에서 두목에게 서울에 담배 좀 사러간다는 시시한 변명거리는 오히려 담배를 사는 것이 보편적이고, 그 보편적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것이다. 담배는 흔히 일상적으로 피기도 하나 답답하고 미칠 것만 같은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를 면하기 위해 피는 경우가 많다. 담배를 사러 가고, 진배의 소란에 교도소에 갇힌 조폭두목은 담배를 사는 것에 대해 오히려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조직이 와해하여 진배의 졸개들 역시 담배를 같이 사서 푸고 싶다고 한다. 그들이 단지 양아치 깡패와 같이 3류 인생일망정 그들은 깊은 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무서운 것이 없는 진배, 그에게 찾아온 김회장, 그는 자신의 다리 한쪽을 베어버린 군인이었다. 그를 보면 이 노래가 생각났다. 밥 딜런의 원곡이고, 후에 guns &roses가 부른 knocking on heaven's door에서 총을 든 군인이 전쟁이란 참혹한 비극에서 평화를 원하는 것을 말이다. 그는 평생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그는 오이디푸스였다. 오이디푸스왕은 테베의 왕 라이오스의 아들로 신탁에 의하면 라이오스는 아들인 오이디푸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예언에 라이오스는 아들을 버리고, 후에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인다.

 

하지만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왕 신화이야기에서 죽어도 현실의 상황은 다르다. 김회장은 자신이 군인시절 스스로 다리를 한쪽다리를 베어 절름발이가 된다. 참고로 오이디푸스라는 단어에 절름발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영화의 <박하사탕>의 남자주인공은 자신의 한쪽다리에 물이 차서 걷지 못한다고 할 때, 군화를 벗은 그의 발에는 많은 피가 흘렸고, 그의 다리가 총상을 입음에 절름발이가 되었다. 오이디푸스에게 가해진 정치적 폭력은 거세가 되어 그를 복종하게 만들거나 혹은 불구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마지막 이룰 수 없는 그들의 간절한 소원에서 김회장은 거물과 만나면서 오이디푸스의 실험을 맞이한다.

 

 

10. 이성과 광기

그러나 김회장은 단순히 원수만 갚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로 인해 피해본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기를 바란 것이다. 진배의 어머니에게 찾아가 대신 사과한 모습에서 이 영화의 이미지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병실 안에 창문이 열려 마치 황혼의 빛이 아름답게 김회장과 준배의 어머니의 화해를 상징하는 미쟝센 구도는 보는 이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 대신 글을 적는 나는 울 수 없다. 옆에 앉던 여성은 계속 울고 있고, 다른 쪽의 남성도 눈물을 흘리며 훌쩍 거렸다. 나는 울 수가 없는 것은 거기서 눈물을 흘리면 그 때의 감정과 기분을 거기서 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적는 입장에서 다소 그들의 입장이 되는 몰입을 생각해야 하나, 그 감정의 기복이 거대하므로 부동의 자세로 볼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게 표출했다면, 글의 내용에서 비추어지는 전달하려는 의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 심정을 그대로 가슴에 묻어두고 글을 적어야 하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답답함을 같이 공유하기보단 공유시켜야 하는 점이 중요했다. 물로 나 역시 공유하고 있다고 하나, 그 공유를 개인으로 하기에 이 영화의 비극성은 아쉽다.

 

인간이란 언제나 이성이 있기에 냉정하고 판단력을 신중하게 보일 수 있으나, 이 영화는 판단력과 이성의 영역을 배제했다. 도발적이고, 순간적이며, 저돌적이다. 뒤는 알 수 없이 그저 죽을 각오로 뛰어드는 모습에 상당히 참신하고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여자주인공 심미진, 그녀의 어머니는 이마에 총을 맞고 죽고, 아버지는 정신적 충격에 폐인이 되어 그 광기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거물의 집 앞에서 분신자살을 한다. 그나마 그녀가 이성을 유지한 이유는 아버지의 존재고, 진배 역시 어머니의 존재로 살아왔다. 그러나 심미진의 부친상에서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11. 평화와 폭력

길거리에서 사격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가족에게 준 비극에서 광기는 아버지가 가져갔기에 가능했으나, 이제 그 광기의 대상자는 없어진 이상 그녀가 마음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정혁은 그런 광기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에게 누나가 있었으나, 누나가 죽고 그는 혼자 산다. 그를 대신하여 광기를 받쳐주지 못했기에 아니 그 광기를 받쳐준 자가 없었기에 그는 의지할 자가 없었다. 그는 결국 국가에 못된 사람 잡자고 갔으나,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를 절망으로 빠지게 한다. 게다가 관료체계인 경찰에서 그는 자주 자신의 현실에서 갈등을 느낀다.

 

분노로 쌓인 무의식적 자기안의 폭발인가? 아니면 사회적 권력에 의한 복종인가? 그는 결국 계속 고민하고 작품에서 큰 plot을 전개하는 요인이 된다. 그런 광기에 빠진 인물들 속에서 유일한 침착한 자, 그는 김회장의 비서인 김주안, 똑똑한 엘리트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설 경호업체의 직원이다. 그러나 그 역시 광기를 숨기며 더 위협적인 공격성을 가졌다. 아니 오히려 침착하고 냉정하게 보이기에 그의 행동들은 더 위험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이런 분노와 원망, 광기와 절망으로 살아온 이들이 이때까지 그 거물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평화라는 단어는 정말 난해한 단어이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폭력이 필요한 것이 아이러니가 되었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 영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거물을 죽이려 했고, 거물은 권력을 잡아 자신의 권위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위해 즉 자신만의 평화를 위해 학살을 펼쳤다. 그리고 자신만의 평화는 그들의 권력을 나눈 자들에게 평화를 주고, 다시 그 평화는 언론과 미디어로 통해 평화롭다는 이미지를 주었다. 영상으로 보이는 spectacle에서 인간의 욕망은 결국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비롯됨을 보여주었다. 그때 문화정책 3S는 Sports, Screen, Sex였다. 인간의 경쟁의식과 성적본능 그리고 그것을 유도하는 미디어라는 새로운 방법이 도입된 것이다.

 

 

12. taction에서 fiction으로

인간에게 욕망을 선사한 점에서 인간들은 동물화 되어간다. 대중문화는 대중들이 생산하는 문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대중들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란 정치적인 도구로서 영화다. 그렇다면 <26년>은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정치적 도구로서 영화라는 설정이 매우 강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단순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증폭시킨다. faction이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와 그 시나리오 안에서 겪은 인간의 분노를 fiction이란 영화로 만든다. 그리고 그 fiction은 미완의 미를 거두고 다시 faction으로 연결된다.

 

어떤 사고가 있어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하루가 다가오고, 그렇게 시끄러워도 오늘 역시 서울의 거리는 시원하게 차들이 소통한다.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던 심미진의 망설임에서 그 망설임은 여지없이 관객들에게 던지고 간다. 서사의 목적이 미완으로 그치는 영화에서 <26년>은 <32년>과 <37>년으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에서 강철 같이 냉혹한 경호 대장 역시 또 나오고 버틸 것이다. 그도 역시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트라우마로 누군가 명령받기를 거부한다. 거물 앞에서 총을 겨누며, 자신이 살기 위해서 거물이 필요하다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13. 루소와 사회계약론

비합리적인 정체성 확인 합리적인 사고가 마비된 점에서 그 냉정한 경호 대장 역시 광기에 얽매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런 광기의 합리화를 여기저기 볼 수 있다. 그것은 메시아주의적인 광기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긍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녀를 만들어야 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다. 영화에서 시작되는 신화의 탈출시도 역시 신화적인 부분이었다. 억압에 대한 해방욕구, 그리고 그것은 폭력이 된다. 프랑스혁명의 영웅이자 폭정의 정치가로 되어야 했던 로베스피에르는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라고 연설한다.

 

어떻게든 인간은 폭력을 피할 수 없이 좋게 해결할 수 없을까?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사회계약을 위반하고 어긴 자에 대하여 그 사회의 일원이 아니며, 만일 그런 자가 정치를 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시민들이 그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혁명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루소가 그렇게 말한 <사회계약론>이란 도서는 민주주의국가에서 대부분 채용하는 사상이다. 아니면 차라리 <사회계약론>에서 폴란드 로렌공작이 의회에서 발언한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가 이 영화의 슬로건으로 우리에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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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들어가기 전에

현대에 들어서면서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 내지 지방자치단체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인지하면서 이른바 스토리텔링이란 것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어느 지역에 위치한 관광명소나 혹은 그 고장에서 나오는 상품 등을 하나의 이야기를 부여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지, 또한 자신들이 선보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주는지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상품이나 관광명소가 우월하고 탁월해도 그것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상품에 대한 가치를 두고 현대사회는 본래 그 상품이 정말 가치가 우수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물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면 모른다는 것이다.

 

관념론적인 용어일 수 있겠지만, 실제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정보나 자료를 우리가 인지하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즉 실존하는 상품은 그 실존하는 상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제 아래 실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상품을 하나의 가치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상품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것은 홍보와 광고이며, TV와 각종 미디어로 알려진 상품은 그 상품에 대한 가치로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에 대한 이미지로 구성되어 만들어진다.

 

현대사회에 말하는 소비사회란, 즉 이미지로 통한 소비, 기호로 통한 소비다. 예를 들어 내가 읽은 서적에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인간이 착용하는 의상은 그 나라와 기후에 따라 의상형태가 바뀐다. 여름에는 더위를 줄일 수 있는 얇고 가벼운 천을 소재로 의상을 만들고, 겨울에는 두껍고 추위에 강한 의상을 만든다. 하지만 겨울이란 날씨에 우리는 그 계절적 속성에 어울리지 않은 의상을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겨울거리를 걷다 보면 많은 여성들이 짧은 미니스커트 내지 핫팬츠를 입는 경우가 있다. 그 의상들은 겨울이란 계절적인 조건을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은 옷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킹이나 레깅스와 같은 의상을 보조로 하여 길가를 왕래한다.

 


그렇다면 의상은 기능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요소로서 기동하며, 그 기동성에는 이미지라는 인간의 정신적 매체에 의해 존재되어 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로 매개로 되어 현실에 드러나는 스펙타클이란 점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통해 현대사회의 인간은 자신을 보여주기보단 그것에 맞추며 살아간다. 물론 그런 요소는 한겨울의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마찬가지다. 여름용 청바지보단 천으로 만든 여름용 신사바지가 더 시원하겠지만, 여름용 신사바지보단 여름용 청바지를 젊은 남성층은 선호한다. 즉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서 자신의 사회적 객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서브컬처에 논하는데 있어서 대중문화의 상품과 문화콘텐츠 그리고 소비사회의 이미지라는 기호적 소비가 왜 화두로 꺼내는 것인가? 결론은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라는 서브컬처 속에는 서로 다른 분위기와 흐름이 있겠지만, 근원적인 인간이 원하는 것이나 또는 인간이 마주해야할 상황과 운명을 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근원적으로 들어가기에 대중문화로서는 대중이란 집단에 대한 관찰이 가능하고, 서브컬처로서는 그 근원적인 이야기의 본질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비평에 대하여

비평이란 단어는 참으로 어려운 의미로 볼 수밖에 없다. 흔히 비평하면 어떤 것을 작품을 보고 그것에 대해 관람자가 자신이 본 주관적인 비평을 인식주의 비평이나 또는 어느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나 감동을 주는 특징을 찾는 것을 형식주의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비평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본래 비평이란 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한 판단에서 전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귀납적이든 혹은 연역적인 논리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주관적인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 주관적인 인간들이 공통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의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다고 모두가 그런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만약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명제에서 백조에서 검은 색 내지 노란 색을 가진 종이 나올 수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동물의 색에 따라 종의 명칭을 붙였는데, 다른 색이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 경험주의적인 관찰도 좋지만, 그 관찰이 100% 옳은 수는 없다. 비평적 관점은 100% 옳은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틀리는 것이 아니다. 결론은 비평적 관점도 객관적이나 그 객관성 내에도 주관성이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이야기 소재로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도 각자의 작품을 보면 다른 관점을 전개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조차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비평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간단히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지식적 범주와 인식적 범위는 각기 다르다는 점이고, 영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만화 등과 같은 문화콘텐츠라도 그 작품에 대한 배경적 지식과 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지식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 크게 차이날 수 있다. 비평이란 문화적인 요건에서 아직까지 국내 상황은 주로 문학과 영화에 치중되고 있으며, 문학은 대중문화적인 요소와 더불어 고급예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고, 영화는 대중문화의 일부분으로 크게 활용되고 있다.

 

영화는 또한 대중문화로서 시간 죽이기(Killing-Time)로서 매우 탁월하게 적용되고 있다. 영화라는 매체는 영화관에 이미지로 매체로 그 영화가 실재하지 아니한데도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스펙타클화를 이룩한다. spectator라는 열렬한 관중들은 자신들이 환호성을 올리면 올릴수록 정작 본인은 스스로 구경거리에 몰입하는 부외자로 된다. 영화를 보면서 거기에 빠지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타인에 의해 조작되어지는 허수아비 내지 바비 인형으로 된다는 점이다.

 

그런다고 작품을 관람하는 이상, 그 작품에 대하여 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읽으면 비평가의 의무라는 편이 있다. 벤야민이 논하기를 “우리가 점점 생장해 가는 작품을 비유적으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라고 본다면, 해설자는 마치 화학자처럼 그 앞에 서 있고 비평가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그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설자의 경우에는 다지 나무와 재만이 그의 분석의 대상이 된다면 비평가의 경우에는 그 불꽃 자체만이 하나의 수수께끼,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것의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따라서 비평가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지나간 것)의 무거운 장작더미와 체험된 것의 재위에서 아직도 살아서 타오르고 있는 생생한 진리를 물어 보는 데 있다(372~373페이지 <발터 벤야민의 비평개념과 예술개념>).”라고 되어 있다.

 

비평가라는 연금술사는 단지 그 영화라는 필름만 분석하여 나열하는 게 아니라 필름 위에서 춤을 추는 영상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알아가는 것이다. 다른 장르는 둘째치더라도 영화라는 영상매체가 효과적인 이유는 책은 우리 인간은 읽어야 하는 것이지만, 영화는 사람들은 읽기보단 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영화보기에서 영화읽기는 다른 식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영화읽기가 가능한 만큼 영상매체 중의 하나인 애니메이션이나 또는 애니메이션의 원류가 되는 만화나 최근 흥행중인 라이트노벨은 단순히 보기를 떠나 읽기가 가능한 콘텐츠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따라서 흔히 영화이론에서 말하는 영화읽기가 구조주의-기호학이란 것에서 도입되었다면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같은 서브컬처 역시 그런 관점을 통해 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비평은 위에서 인상주의 비평이나 또는 형식주의 비평을 언급했지만, 사실 비평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그 비평에 해당되는 관점은 매우 차이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구조주의 비평 이전의 비평이라면 마르크스주의가 있으며, 영미의 신비평, 여성주의 등 다양한 비평적 관점이 존재한다. 비평이란 것은 어느 작품에 대해 무엇을 보고 어떻게 판단하여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찾아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보는 것이 맞는가를 찾아봐야할 것이다.

 


어떤 유치한 이야기라도 그 안에는 철학적인 담론이 존재하고 있으며, 문학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상매체 역시 Narrative라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비평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거기에 게임과 코스튬플레이 세계는 아직까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세계이며, 여전히 서브컬처라는 오타쿠 문화라는 이유로 멸시당하고 억압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서브컬처는 대중문화와 달리 근원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 본연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대중문화는 언제나 진부한 Cliche를 차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 원인은 관객이 가지고 있는 은근히 영화내용과 영화인물 그리고 영화문화에 기대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그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그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 트레일러 영상을 보고 스토리를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인스톨을 시켰다. 그리고 위기라는 심리적 배반에 의해 조성된 기대심리를 클라이맥스로 이어져 마지막에는 정반의 변증법에서 합이라는 결론으로서 즐겁게 극장을 나온다. 화면은 눈을 자극하여 극장가 안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영화는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정작 그 영화의 스토리나 인물은 기억해도 그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아니라면 인상 남는 장면이나 인물에 대해 회상하며 후기를 쓰거나 또는 사진이나 그림을 포스트의 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리뷰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리뷰인가? 후기인가? 단순히 보자면 후기가 될 것이고, 감상적 리뷰 혹은 자신만의 경험에 의한 인상주의 비평이 되겠지만, 비평이란 단어 대신 감상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글들이 인터넷에 넘친다는 점이고, 적당히 스토리만 찾아 그것에 대한 나열과 배치만 하여 작품 내에 가진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매우 많다. 물론 작품이 의미하는 바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면 서술자가 제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도 한계성이 도달할 것이다. 단지 그 한계성은 작품에 대해 비평을 넘어 작품을 만드는 그룹에 대한 직설적인 공격으로 이어질 것이다.

 

③ 서브컬처 비평의 문제점

서브컬처에 대해 비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이유는 그 공간이 너무 좁다는 점과 아직까지 이런 세계에 대해 다들 낯설거나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찾기를 좋아한다. 그런 점은 위에서 지적한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자신의 한계성 내지 작품의 한계성으로 인해 발생되는 직설적 공격, 즉 비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서브컬처의 비평이 제일 어려운 이유는 기본적으로 비평을 할 수 있는 인력이 없다는 점이다. 비평하는 것은 결국 영상매체 내지 문화콘텐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더불어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적인 수준을 겸비해야 한다.

 

가령 한국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3번째 오타쿠 붐을 일으킨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경우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 본인은 포스트모더니즘 내지 해체주의적인 미학을 연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칭호는 포스트모더니티적인 감독과 더불어 20세기 후반 불안정한 시대적 모습과 청소년들의 심리를 표현했다. 안노 히데아키가 그런 철학도서를 보고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본인과 애니메이션 스텝들이 가지는 심리적 요소가 작품 내로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감독 본인은 그것을 이해하고 만들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의 해체주의적인 미로서 볼 수 있는 것은 철학자들은 세상의 원리를 발견하는 업무를 하기 때문이다.

 

독일 경제학자·철학자·사회학자·사상가인 카를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철학자 중에서 세계를 변화시킨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철학자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온 것처럼 안노 히데아키가 만든 작품들이 굳이 그가 어려운 인문도서를 옆에 차고 있지 않아도 그런 내용을 만들 수 있던 것은 안노 히데아키라는 인물이 어떻게 세계를 보고 있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분석하기 이전에 우리는 안노 히데아키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의식과 무의식적 의도가 담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는 것에서 읽어내려면 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작품 내에서 감독이 일부러 패러디(풍자적 모방) 내지 페스티쉬(유희적 모방) 또는 오마쥬로 연출할 수 있고, 그 작품의 모티브가 자신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 의도될 수 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기존 로봇 메카닉 장르에 큰 전환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명제는 정의의 추구이고, 절대적인 의지와 굴복하지 않는 모습이다. 형이상학적 미라는 절대적인 가치 아래서 주인공이 선(善)의 대변자가 되어 악(惡)을 처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그리고 적이라고 불리는 사도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은 사도라는 적인지 아니면 가까운 인간인지 구분이 모호하게 해준다.

 

특히나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더불어 오이디푸스신화의 반입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선 오이디푸스신화를 알려면 그리스비극에서 아주 유명한 <오이디푸스왕> 이야기를 알아야할 것이며, 오이디푸스신화로 통해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역시 파악해야 한다. 즉 인간의 무의식적인 성적인 욕망과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되는 문제까지 말이다. 덧붙이자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딸에 대한 대립관계구도가 나온다. 가족이란 구성체가 안정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문제점의 시작점이란 점에서 이 작품은 기존에 가진 로봇애니메이션의 가치를 해체시킨 것이다.

 

만약 이런 관점을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본 것과 이러하지 않은 관점으로 같은 작품을 보는 것은 큰 전환점이 이어진다. 서브컬처의 비평에서 가장 힘든 과제는 애니메이션 마니아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영화나 문학 등과 같은 전공자가 참여하거나 또는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이야기를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일부 인터넷에 존재하는 리뷰어의 글에는 비평적인 관점보단 작품에 대한 줄거리와 인물소개, 그리고 개인적 감상문에 불과한 글들이 넘친다. 물론 그들의 활동이 잘못된 것은 아니고, 그들이 자신만의 글을 적는 것 역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비평이란 것은 그런 개인적 주관으로만 가득한 글을 인정할 수 없으며, 그 작품에 대한 제작진 내지 감독, 그리고 유사작품을 데이터베이스화 시킨 것 역시 비평이라고 볼 수 없다. 비평의 관점에선 작품이 의미하는 바를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평가하여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평문화에 대해 한국 자체적으로 활성화 되지 않은 것이 문제이며, 비평문화가 활성화된 곳은 인문학과 영화에만 치중된 것이다. 하위문화는 대중문화와 비교하여 그 종류와 콘텐츠가 활발하지만, 대중들의 외면(웹툰과 같은 무료로 감상할 수 있는 콘텐츠는 활성화)과 전문가들의 무관심, 그것을 소비하는 향유자들의 거리감으로 인해 하위문화에 대한 비평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하위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중문화를 즐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우아한 취미를 가졌다는 착각을 가지며 살고 있지만) 하위문화라는 것은 오타쿠라고 멸시하면서 아직까지 어른이 덜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현실이고, 정작 그런 부당한 현실에 처해진 향유자들은 그런 현실로부터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거부하며, 심지어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조차 낯설게 대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문가 내지 연구자들은 향유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위문화 그 자체에 대한 비평과 하위문화 향유자들이 소비하는 작품에 대한 비평이 어려운 이유는 아마 이런 사회적 구조와 인식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④ 어떻게 비평해 나갈 것인가?

서브컬처 비평이 어려운 이유는 그 문화적인 산업규모가 국내여건이 너무 열악하다는 점과 그것을 비평할 수 있는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나 언론학, 영화학, 영상학 교수나 전문가들이 글을 적고 있지만, 그 규모나 수는 매우 저조하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서적 역시 많지 않다. 물론 출판되어도 일반 서점가에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경우도 많으며, 설사 있다고 해도 직접 구매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여하여 읽는 경우도 드물다.

 

비평이란 것은 창작과 달리 직접 비평하는 사람이 스스로 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만화애니메이션 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단법인을 조직하여 활동하거나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비평가란 조직은 따로 구성되어 있지 아니하며, 그나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비평은 감상 내지 후기, 리뷰라는 카테고리로서 글이 저장되나, 비평적 가치를 드러내는 글이 아니라 의미가 모호한 리뷰로 들어가는 현실이다. 리뷰라는 것은 Review, 즉 “다시 보다.”로 될 것이고,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면 감상과 비평으로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네이버사전에서 Review라는 것은 비평이란 의미에 더 가깝다.

 

비평을 한다는 것은 리뷰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국내 커뮤니티에서 비평은 Critical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크리틱이란 비평가가 보는 비평이란 좋지 못한 방향으로 논평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실 긍정적인 요소를 동시에 본다면 Review & Critical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 나갈 수밖에 없다. 비평이란 것은 단순히 작품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으로서 무엇을 더 볼 수 있는지도 관찰해야 하는 점이다. 작품 내의 이야기로 모든 것을 결부 짓을 수 있겠지만, 작품 외로 이어지는 세계를 넘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평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만으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적는 방법은 자신이 추구하는 성향이나 혹은 편집자나 독자의 성향을 반영하여 움직일 수 있으나, 비평이란 본인 자신이 편집자로 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충고에 따라 소설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충고에 따라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할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비평이란 것은 미학과 같이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예술이란 삶을 빛의 굴절처럼 바라본다면, 미학은 철학이란 칼로 예술을 가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비평이란 철학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하며, 철학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한다는 것처럼 철학적 사상 역시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문제다. 영화에서 말하는 구조주의사상이 프랑스 사상가인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자크 라캉, 미셀 푸코, 롤랑 바르트,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루이 알튀세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후기구조주의로 이어졌으며, 구조주의 이전에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 소쉬르가 존재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경우 낭만주의 사상가인 루소까지 이어진다.

 

이런 철학자의 도식적인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철학이 세계의 변화를 주기 전에 먼저 그 변화를 주기 전에 세계 그 자체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을 감상하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면 그 세계관을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평적 입장을 접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비평은 철학에서 시작되므로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먼저 서사에 대한 연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을 읽음으로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역사라는 개인의 이야기이며, 그 개인은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시라는 이야기는 정해진 주인공이 실존하던 인물이 아니며,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 혹은 인간의 욕망과 터부에서 나온 신화적 인물이라면 누구나 그 상황에 처해질 수 있는 계기가 도래한다는 점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은 비록 환상적인 이야기나 표현이 많으나, 그 자체가 하나의 시라는 이야기이므로 우리에겐 하나의 개연성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개연성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개연적인 부분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에서 기존의 관념 안에서 만든 작품은 모더니즘이라면 그것은 해체, 보완, 추가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이다. 최근 애니메이션은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 기법을 다 적용하는 추세이므로 그렇게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이 낯선 것은 아니다. 단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적 근본과 그 사상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일단 위에서 언급한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이다. 선과 악의 해체, 절대적인 미를 추구할 주인공파일럿의 혼돈, 불완전한 결말과 이야기 흐름은 해체주의 특성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그래서 비평이란 관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활습관이나 삶의 축척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다양한 관점과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또한 만화, 애니메이션은 그림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전문용어를 상황에 따라서 이해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의 미학이므로 영화용어도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들을 파악하고 서술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노력과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비평은 남에 의해 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클 수밖에 없는 분야다. 남의 비평문을 보고 따라 적는 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남의 비평문으로 통해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해석과 관련하여 비평하고자 하는 당사자는 미학적인 요소를 키워야 하는 이유는 대부분 철학자는 미학자로서 글을 쓰며, 미학의 기본적인 틀은 철학으로부터 시작이다. 그렇기에 미학적 관점을 가진다는 점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하위문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라이트노벨의 경우 국내 문학과 및 문예창작학과 전공자들도 참여하고 있어서 사실 심도 있게 다룰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은 충분히 미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화콘텐츠다. 그러나 모든 하위문화 콘텐츠를 쉽지는 않으나 충분히 다룰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코스튬플레이의 경우 다른 서브컬처와 달리 콘텐츠를 영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인간이 연기하거나 혹은 그 연기했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영상매체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비평은 단순히 작품을 비평하는 것만이 아니고, 작품을 만든 제작사, 감독, 각본, 작가가 아니라, 그 사진이 찍히는 당사자라는 점이 어려운 난관점이다. 칸트의 <판단력비판>과 같이 미에 대한 연구에서 미란 외형미와 내재미를 두 가지를 다 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지나칠 경우 다른 미적 영역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국내 코스튬플레이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본다면 코스튬 플레이문화는 남성보다는 여성에 의한 피사체가 많다는 점이고, 이 피사체라는 코스튬플레이를 촬영하는 부류는 여성보다는 남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외형미적인 요건에서 외모와 몸매 등은 충분히 촬영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고, 인간이 가진 성적 무의식적인 요소에서 아니마(Anima)라는 남성성 안의 여성성에서 남성은 자신들의 무의식에서 원하는 여성에게 카메라 셔터를 눌릴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다른 입장에 놓인 상황이라면 부조리하겠지만, 인간의 무의식적인 요소를 본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비평에서 외형미가 내재미보다 크게 상회하면 그 사진은 단순히 코스튬플레이로 통해 새로운 자신을 만나는 것보단, 단지 자신의 미모를 조금 더 귀엽게 예쁘게 섹시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자신의 얼굴은 그대로 가지고 있겠지만, 자신이 정작 쓰고 있어야 할 가면(코스튬 플레이하고자하는 캐릭터)은 없고, 단지 자기의 얼굴만이 남는 것이다. 촬영자가 촬영할 때 피사체를 촬영할 때, 그 피사체가 자신이 촬영하고자 하는 작품의 캐릭터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그 당사자만이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하지만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몰입은 오로지 코스튬 플레이어만 할 수 있다. 문제는 코스튬플레이어가 추구하는 캐릭터는 대부분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미소녀라는 점이다. 미소녀캐릭터에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언제나 좋은 이미지를 가진 인물을 하고 싶어 하기에 많은 코스튬플레이어들이 같은 작품의 같은 인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내용보단 명확하게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기에 타인과 상대해야하는 인물들에겐 항상 카리스마적인 요소나 가와이이한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처럼 코스튬플레이문화에서 레디-메이드라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점을 본다면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는 서로 다른 관점으로 대중들이 향유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근원적인 요소는 다르지 않은 점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가와이이한 요소는 귀여운 미소녀로 볼 수 있겠지만, TV에 등장하는 아이돌가수나 연예인에게도 적용된다. 그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기에 단지 보는 대상이 다를 뿐 그 안에 내재된 욕망은 같다는 점이다. 현재로서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비평문화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며 일부 의상학, 만화애니메이션, 언론학 관련 학과나 학회에서 논문이 드물게 나오는 수준이다.

 

논문을 참조하자면 코스튬플레이에 대해 비평하자면 인류학적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고,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변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기도 하다. 코스튬플레이의 기원이 어느 영웅의 옷을 따라 입어 그와 같은 인물이 되고 싶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다. 즉 자신의 의지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상과 동일시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코스튬플레이를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매우 주술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원래의 근원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라면, 지금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미디어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미디어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환경에서 원하는 대상은 하나이나, 그 대상이 되고자하는 인원은 매우 많다는 점이다.

 

대상이 실존하고, 그리고 인격이 가진 그 자체만으로 비평의 관점은 상대에 따라 큰 정신적 스트레스로 이어질 수 있으며, 외형미에 치중하는 부류라면 상당히 어긋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외형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재미를 추구하지 않은 것이 코스튬플레이문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에는 그로테스크한 연출이나 상황이 매우 많다. 그로테스크란 인간이 보기엔 낯설고 역겨우며, 매우 혼돈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충격이야 말로 인간이 기존에 가지지 못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점을 만든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유치한 장르라고 지탄받아도 그래도 프랑스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이고, 애니메이션은 영화와 더불어 제7의 예술로 인정받는다. 예술로서 인정받는 이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상상력의 산물이므로 어떤 이미지가 나올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학이란 말이 있다. 그 미래의 윤리학의 원천이 되는 상상력, 이미지가 현실로 바뀌는 일들이 종종 보곤 한다. 이미지가 에너지인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그리고 문학적 요소가 들어간 라이트노벨이 미래사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문화콘텐츠다. 그런 문화콘텐츠에 대한 이해와 판단으로 이들이 나아갈 길을 더 넓고 다양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비평은 작품을 만드는 자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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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경제에 대한 짧은 단상

 

내가 가장 사람들에 대해 어리석다고 여기는 것은 사람들은 경제, 경제 이야기하는데, 선거에서 경제를 중심이 되어 사람들이 모이나 사실 인간을 중심으로 경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가장 멍청한 부류는 부동산가격에 대해 신경쓰는 존재인데, 그들은 아직도 생각하지 못한다. 집값은 왜 높게 오르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나, 물가가 왜 이리 상승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상가나 점포의 지대료가 상승하므로 당연히 상품의 가격이 올라간다.

 

부동산으로 이익보다는 금액과 물가상승으로 손해보는 금액에서 어느 것이 더 클까? 물론 자본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런 리스크는 적으나 집 한 채 잡고 오기 부리는 대대수 사람들, 아니 유권자들을 보면 멍청함에 입을 다물 수 없다.

 

아마 집 가격은 년간 몇 백 만원 단위로 오르지만, 상품들은 100원부터 시작하여 몇 천원 단위로 올라가기에 그런 차이점을 쉽게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먹고 자고 입는 것에 대해 매일매일 필요하므로 거기에 소모되는 금액에서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마트에서 살 게 없고, 10만 원을 들고 가도 몇 개 잡으면 다 소모된다."라고 말이다. 그것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물가의 상승은 결국 부동산이란 과잉적인 화폐 인플레이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역으로 소비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도 화폐의 이동이 이런 고가에만 몰입되어서 그렇다. 계속 블루오션을 외면하는 국민적 정서와 국가정책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선거에서 국민은 현명하다고 하나, 사람들은 서로 정치이야기는 하나, 정치철학과 경제학에서 말해주지 않는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정말 무지하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런 점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 토크빌이 말하듯이 그 나라의 정치적 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이라고 말한다.

 

과연 지식은 권력을 쌓고, 권력은 지식을 생산하여 은폐하면, 지식으로부터 소외된 자는 계속 돌고 돌 뿐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신화를 보고 믿지를 말아라. 그것은 그 사람의 역사이지 당신의 역사가 아니다. 차라리 패배의 이야기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거기서 거기다. 일확천금을 노리기보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즐기는 삶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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