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SAF에 와서 많은 것을 보고 갑니다. 이번 PISAF 행사는 여유롭게 시간을 잡고 즐기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무실 업무가 있어서 3박 4일에서 2박 3일로 끝나게 되었네요. 오늘 2박을 보내고 3일차는 지방에 내려가서 사무실 출근합니다. 그래도 강연 내용을 제대로 듣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한 직접 사회자, 발제자, 토론자로 나오신 교수님과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건국대학교 김윤아 교수님, 공주대학교 이화자 교수님, 한림대학교 권재웅 교수님 등과 인사를 나누었으니 다음에 또 만나면 술 한잔 하면 되죠.

 

 

이번 학술대회 포럼에서 아시아 애니메이션에 대한 가능성을 계속 탐구하는 것인데, 예전부터 PISAF에선 이런 큰 테두리 안에서 계속 연구하려 했습니다. 작년에 업무로 인해 가지 못했으나 대략적으로 국내·외 교수진들과 연구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단지 이번 특징은 연상호 감독의 작품과 신보 아키유키 감독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가 나온 것이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우선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과 <사이비>에서 저는 <돼지의 왕>은 영화관에서 보았으나 아직 <사이비>는 보지 않았습니다. 전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학원이란 공간이 폭력으로 얼룩지는 것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란 말처럼 학교폭력은 단순히 문제학생보다는 우월주의에 의한 차별에서 태어난 것이죠. 문제아로 찍힌 철수를 보면 가만히 있으면 그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지만, 나름 가정환경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2 친구를 괴롭히는 학생들과 계속 싸우다가, 자살을 하게 되는 모습이 나오죠. 겉으로는 학원폭력과 가난이라는 이유로 멸시당한 것에 대한 최후의 발악으로서 말이죠. 그러나 이면에는 다른 친구가 그를 옥상에서 밀어 강제로 추락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연하신 연구자 발제에서, 그분은 연상호 감독의 작품에서 네티즌의 리뷰를 보았으나 근원적인 영역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물론 그 리뷰어 중에 한 사람은 저도 마찬가지나). 그것은 억압받은 피지배층의 연대는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서 연대는 불가능하고 연대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결과는 부정적이란 사실입니다. 그 원인은 어느 문제에 봉착할 때 그 근본 지점을 하나씩 풀어가기보단 그저 빨리 회피하고 싶다는 인간의 급성이 아닐까 합니다. 바로 <돼지의 왕>에서 철수를 밀어 죽인 이유는 철수가 극단적 태도를 버린 것에서 시작하죠.

 

 

철수 어머니는 가난한 여성으로 생계를 위해 노래방에서 도우미로 활동합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결국 사회적 불평등과 문화적 불평등 더 나아가 근본적인 교육적 불평등으로 이어집니다. 어머니의 직업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아무 죄가 없지만, 결국 그 영향이 가는 구조에서 말이죠. 철수의 극단적 반항은 바로 어머니에 대한 가족문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철수를 위해 새로운 삶을 제시하면서 철수의 삶은 다르게 전개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결국 철수의 친구가 집단 괴롭힘 내지 왕따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박탈되는 셈이죠. 그렇다면 누군가는 계속 그런 자리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을 하나의 신화로서 승화시키는 방법이죠. 결국 철수의 죽음은 철수 친구무리를 괴롭히는 학생들의 문제로 종결지으면서 철수 친구들은 폭력으로부터 벗어납니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해결은 사회구조적인 합의 내지 원만한 대화가 아니라 폭력의 극단적 수단인 죽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 극으로 몰아 파멸시키는 방법이 과연 사회적 연대로 정당한가? 그런 점에서 과거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예로서 들 수 있겠죠. 이데올로기를 떠나 흔히 말해 진보진영이라는 사람들이 자기네들 사람을 제외함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결과론적으로 전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죠.

 

 

바로 연대라는 지점에서 <돼지의 왕>은 누군가 희생시키는 방법은 결국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또한 <사이비>는 인간의 근본적인 모습과 그 근본적 모습에서 멀어진 인간의 외적인 형상에 대해 괴리감을 보여주더군요. 인간이 갑자기 나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떤가에서 평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급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원래 사람은 나쁜 것인가 아닌 것인가에서 원래 나쁜 사람이 겉으로 착한 척하는 것이라 볼 수 있죠. 도저히 논리적이지 못한 상황을 두고 비논리적인 억측으로 몰고 가는 사이비종교 모습에서 우리의 현실을 봅니다.

 

 

인간의 얼굴이란 가면에서 우리는 2가지로 대하는 것이죠. 하나는 극단적으로 믿는 것과 하나는 극단적 배타적인 요소로 이분법적으로 세상살이를 하는 점이죠. 이런 모습은 인간의 연대에서 극성끼리 모여 배타적 자세로서 우월감을 느끼기 다른 누군가를 밟고 무시하거나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이런 방법들이 과연 올바른 연대인가? 라는 질의에서 그것은 아니고, 우리 한국사회는 이런 비정상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연대로서 잘못된 결과를 도출하는 셈이죠. 그 원인은 근본부터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장 답을 내놓는 것을 바라며, 그것을 위해서는 누군가 희생되어야 하는 신화적인 은폐와 조작이 탄생하는 셈이죠.

 

 

연상호 감독의 작품을 발제한 분은 곽영빈 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의 연구원이고, 토론자는 강윤주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입니다. 연상호 감독의 작품을 다루는 세션에서 이제 다른 작품으로 다루는 세션으로 넘어갔습니다. 2010년대 애니메이션에서 큰 흐름을 만든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가 나오더군요. 이 주제의 발제는 일본 요코하마 국립대학교 인문학자인 아키코 스가와 시마다 교수님이고, 토론자는 국립공주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이화자 교수님이었습니다. 출처의 소개에서 먼저 <요술공주 샐리>부터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까지라는 마법소녀의 파워를 말해주는데, 이것은 상당히 오덕적인 영역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생각 이상으로 인류학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마법소녀 내지 마녀라는 개념이 없었고, 마녀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온 개념입니다. 마녀는 추하고 못생기고 악하고 아주 나쁜 존재로 그려지며 대부분 늙은 할머니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서구사회의 논리에서 여성-남성의 이분법적인 관계에서 여성을 하위로 두고 억압하기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중세유럽 고전주의 시대에 여자는 아주 불결한 존재이고, 여자의 월경은 거의 악마의 장난으로 볼 정도였죠. 그런 고전주의 시대에서 마녀의 존재는 없었으나 17~18세기 마녀사냥이 시작하면서 마녀라는 존재가 결국 사회를 좀 먹는 인간이 된 셈이죠.

 

 

마녀는 없으나, 마녀가 필요한 이유는 누군가 희생함으로서 다른 누군가 이익을 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또한 십자군원정 이후 급박한 재정 상태와 정치적 불안함은 마녀사냥이란 광기로서 그 반항심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겁니다. 마녀의 이미지가 일본에 넘어가면서 마법소녀로 변경되는데, 그러한 마법소녀의 존재는 일본 애니메이션 장르의 하나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번 발표를 두고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학과 박인하 교수님도 참 관심을 가지셨는데, 그 이유는 박인하 교수님도 예전에 논문을 저술하실 적에 마법소녀에 대한 장르연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마법소녀의 문제점은 여성이란 존재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느냐 입니다. 그것은 성적으로 생물학적인 섹슈얼리티 내지 더 나아가 사회적인 젠더로서 다양한 조건이 따르기 때문이죠. 본래 일본은 2차 세계대전까지 군국주의국가로서 파시스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여성은 매우 인권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에서 여성은 남성 아래서 인구생산(군인)을 위한 성적인 착취, 그리고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로 인해 산업경제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일본이 전쟁이 끝나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통해 군수물자 기지국이 되면서 경제성장을 누렸습니다.

 

 

경제성장에서 산업구조는 농업과 어업 중심이라면 옆 나라의 전쟁으로 공업화가 되어 산업구조는 기계 및 중화학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토목산업(항만 및 도로)과 부동산경기가 성장하고, 특히 무역으로 인해 해양 쪽에 많은 이익이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노동력의 충원, 대가족에서 소그룹인 핵가족으로 변모되면서 여성 역시 산업일선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것은 경제적 입지를 가진 것 동시에 사회에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권리가지 오른 겁니다. 일본에 1987년 일본 남녀고용평등법에서 기존에 산업구조에서 남성만이 차지한 게 아니라 여성도 새로운 경제인구로 등장한 셈이죠.

 

 

이런 사회적 구조가 마법소녀 변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맨 처음 마법소녀들은 그저 수동적인 연애관계에서 남성의 마음에 들어야 하죠. 가정에 충실하고 소녀다운 성향과 취미, 그리고 아직 사춘기 내지 그 이전의 소녀로서 성인여성에 대한 동경심이 작용했죠. 어린 소녀의 목적은 성인여성이 되어 남성의 사랑을 받는 것, 결국 마법이란 여성을 남성에게 필요한 존재로서 길들이게 되게 하는 하나의 헤게모니인 셈이죠. 그런 요소는 1970년대까지 진행되다, 1980년대 올라오면서 버블경제의 문제로 여성의 경제활동이 소비사회의 큰 축으로 대두됩니다.

 

 

서브컬처에서 미소녀 내지 로리콘 중심이 되는 남성중심 콘텐츠에서 역으로 BL, 백합 등의 여성만의 취향이 도래하고, 이것은 21세기 하위문화 시장에서 큰 축을 형성합니다. 그런 관계는 마법소녀에게 하나의 아이콘으로 등장하고, 그저 남자의 사랑을 받는 마법소녀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라이벌이 등장하고, 갈등의 관계에 놓입니다. 즉 사회적 여성들의 적은 남성이 아니라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적 지위로서 대립관계가 형성되는 점이죠. 이전에 신체적인 요소는 성인여성이 되는 것은 큰 키와 풍만한 가슴 그리고 여성의 매력을 중시한다는 것이나, 이제는 사회적 대립구도로 등장하는 것이죠.

 

 

계속 여성의 학력과 경제력 성장은 단순히 내적인 영역이 아니라 외적인 영역에서 마법소녀의 역할이 대두되고, 사회적 문제나 일상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마법소녀가 등장하게 되죠. 그들은 사회적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점에서 마법은 환상이라도 그 환상의 공간에서 욕망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 환상적 공간으로 통한 사회적 문제해결이란 새로운 경로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지만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의 경우 전사로 나온 미소녀들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턱시도가면에 의해 힘을 발휘하는 히로인 우사미의 모습에서 여성은 혼자의 힘이 아니라 남자의 힘이 없으면 큰 위기해결을 하지 못하는 요소가 나타납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마법소녀들은 남성사회의 기존 이데올로기에 대한 긍정 내지 수호라는 헤게모니로서 움직였다면, 이번에 등장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존의 마법소녀들은 기성사회의 수호라면 이번에 등장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마법소녀들은 대다수를 위한 마법소녀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기도 하고, 특히 극장판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반역의 이야기>에서 호무라의 악마화는 결국 마법소녀의 공식을 파괴한 셈이었죠. 아쉬운 것은 마법소녀의 강력한 힘과 매력을 보여준 것은 좋으나, 교수님이 의도한 시간이 너무 부족하여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못한 점, 발제자이신 스가와 교수의 발표를 하면서 통역자분이 이 작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점, 토론을 맡으신 이화자 교수님도 일본어가 아주 유창하나 이 작품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질의한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으나 일반적인 마법소녀에 대한 내용이었고, 이 작품에서 의미하는 바를 두고 근원적인 요소로 가지 못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마법소녀 장르에서 상당히 안티테제로서 큰 전환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큐베하고 계약한 소녀는 소울잼을 받음으로써 그 힘으로 마녀를 제거하나, 막상 그 일을 하면 할수록 더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겁니다. 논문이 영어로 되어 문체 전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고, 게다가 발표자의 시간문제로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저는 질문했죠. “기존의 마법소녀는 기존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것이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그런 구조에서 벗어납니다.”

 

 

통역하신 이화자 교수님은 제 말을 스가와 교수님에게 전달했지만, 제가 전달한 내용보단 강연한 내용을 비슷하게 말하더군요. 제가 일어나 영어를 잘 하지 못하여 어떤 말을 정확하게 한지는 파악하지 못하나 제가 원한 질의는 아니었습니다. 일단 제가 교수님에게 마도카의 팬이란 점, 또한 제가 오타쿠란 점을 밝혔습니다. 게다가 교수님의 발표용 프린트물을 넣은 바인더 자체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그림이 새겨진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작품을 좋아하는 것만으로 매우 기쁜 표정을 짓더군요.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요일 발표당일은 시간적 여유로 제가 다른 분과의 저녁약속으로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나왔지만, 금요일 다른 강연에서 그 교수님이 오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직 미숙하나 영어와 일어를 섞으면서 교수님에게 질의를 드렸죠. 제가 주목하는 것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마법소녀 내지 마녀가 된 존재에 대한 점이죠. 우선 그 이전의 마법소녀로 활동한 중세의 아가씨, 클레오파트라, 성녀에서 마녀로 된 잔 다르크의 경우는 인류문명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이란 점입니다.

 

 

이에 반해 마도카를 비롯한 5명의 소녀는 문명화를 지나 도시의 마천루 전경처럼(직접 그 장면을 교수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자본주의 현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이죠. 문명에 대한 역사적 관찰에서 결국 문명의 전쟁은 누군가 타인을 약탈하여 지배하기 위한 하나의 착취로부터 시작입니다. 그 전쟁에서 문명화를 겪었다는 점에서 현대는 전쟁보다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타인을 착취합니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현실에서 상당히 무기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무기력한 인간들이 마녀에게 홀린 것이란 점은 결국 인간은 자신들의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영역에서 자리 잡은 자기파괴가 삶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것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자연의 착취를 할 수 없으면 그 착취의 대상은 인간으로 변한다.” 것처럼 인류의 문명화란 결국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큐베의 존재는 그 자체로 속임수로 보일 수 있으나, 큐베는 그런 인류문명에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합리적으로 대변하는 관념적 존재인 겁니다. 큐베는 큐베 그 자체의 존재가 아니라 큐베로 매개되어 보인 것입니다. 흔히 군중의 전체의지에 따른 이기심이 하나의 정당한 권위를 얻을 경우,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어느 약자는 희생당하고, 그 희생양은 처음에 숭고한 존재로 비추어지다가 어느 순간 희생당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린 소녀들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희생당하는 존재로 되는 겁니다. 왜 마도카가 모든 마녀를 없애도 이상한 존재들은 계속 등장할까요? 마녀라는 존재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부작용을 대신 액막이용으로 사용되다가 그런 매개체가 사라지게 되어 새로운 악령이 출현한 셈이죠. 교수님께 또 이야기 드린 것인 산업화와 도시화는 환경을 파괴하고, 그것이 발푸르기스의 밤이 된 것이라 말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태풍이 와도 토네이도 같이 내륙에서 발생하는 돌풍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토네이도가 간헐적으로 발생하여 피해를 주는데, 일본에서 슈퍼 셀이 발생하는 경우가 다소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토네이도와 같은 돌풍이 발생하려면 열에너지와 더불어 수증기가 필요합니다. 기상정보를 참조하면 토네이도 평지 같이 바람의 흐름이 더딘 곳에서 자주 일어나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는 산을 없애고 평지를 늘리며, 바람의 흐름을 막습니다. 흔히 바람길의 조성이 있는 이유는 도시의 공기순환이 원활하지 못해 결국 열이 빠지지 못해 열섬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열섬현상은 일반적으로 같은 기온조건이라도 3~4도가 더 높습니다.

 

 

공기의 정체, 높은 열, 그리고 습기가 많은 일본에서 고기압의 정체가 결국 지표면에 공기압이 증가되어 이것이 하나의 회전운동으로 변화합니다.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판단하자면 도시화와 산업화는 대기오염과 기상이변을 일으키고, 최근 지구온난화로 태풍의 발생빈도와 위력이 증가하였습니다. 열에너지가 그만큼 축척된 셈이죠. 그런 과학적인 부분을 말씀드리니 스가와 교수님이 매우 놀라시더군요. 문명화와 더불어 도시화, 공업화는 인간의 자연생태계 붕괴로 이어지고 결국 자연재해로 일어나죠. 일반인들은 마녀의 존재를 모른다는 점이고, 발푸르기스의 밤이 하나의 기상재해로서 보여준다는 점이죠.

 

 

발푸르기스의 밤이 온다고 해서 세계가 망하는 게 아니라 마도카가 사는 도시에 큰 타격을 주는 셈이죠. 이게 인간이 그동안 자연과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한 대가라는 점에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기존 마법소녀의 안티테제로서 어떻게 보여주느냐로 되겠죠. 참고로 교수님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여성의 직업을 강조했습니다. 마도카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도시형 커리어우먼, 어머니 친구는 마도카의 선생님이란 점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더군요. 약간의 페미니즘 즉 여성주의로서(우리나라 여성가족부에서 말하는 개념은 전혀 페미니즘은 철학사상적으로 전혀 페미니즘이 아니에요.) 마법소녀 장르가 성장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참고적으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외에도 <케이온>을 아느냐 물어봤더니 아신다고 하더군요. 마도카도 케이온도 팬이고, 제가 이 작품에도 페미니즘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니 동의하시더군요. 대신교수님의 입에서 유리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그거은 바로 백합이었죠. 물론 동성연애로 치부하기에 분명히 지나치겠지만, 백합 요소라는 여성의 친밀한 모습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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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이디푸스왕 이야기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엄청 유명한 이야기고, 인간의 근본과 더불어 정신분석에서 자주 거론되는 왕이다. 그는 테베의 왕인 라이오스의 아들이며, 또한 그의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다. 매우 아름다운 이오카스테에서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신탁에 의하면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결과를 받았다. 이런 결과에 의해 아버지는 오이디푸스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신하에게 명령하나, 차마 어린 아이를 죽일 수 없었던지 오이디푸스는 숲 속에 내버려지고, 그 때 우연히 발견한 사람이 이웃 국가의 왕에게 오이디푸스를 건네준다. 당시 이웃집 왕과 왕비는 자녀가 없었기에 오이디푸스를 양자로 삼고 키워주나, 다시 그 부부조차도 신탁에 의하면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알게 되었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길러준 이웃 국가의 왕과 왕비를 위해 여행을 떠난다.

 

길을 떠나며 오이디푸스는 건장한 청년이었기에 혈기를 멈출 수 없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어떤 행인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 행인과 그 행인 옆에 있던 경호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이나, 실랑이를 벌일 때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위기에 행인 일행은 죽였다. 그런 일이 있으면서 오이디푸스는 계속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테베 쪽으로 가면서 소문을 들었는데, 테베 길가에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등장하여 행인의 이동을 막고, 만약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할 경우 지나가는 행인은 스핑크스의 뱃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런 문제로 인해 테베에서는 스핑크스를 처리해주는 사람에겐 테베의 왕이 되는 영광과 더불어 테베 최고의 미인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당시 왕은 테베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왕이 죽은 후 왕비가 혼자인 점에서 국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왕의 자리가 누군가 맡겨줘야 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에게 찾아가 수수께끼 문제를 해결했으며, 스핑크스는 그대로 자살하고 만다.

 

2. <잔향의 테러>에서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잔향의 테러>에서 숫자 9와 12는 본(VON)이라 하는 계획을 시행한다. 그들이 시행하면서 이상한 가면을 쓰면서 9는 스핑크스 1호, 12호는 스핑크스 2호라고 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에 스핑크스는 1마리로 등장하며, 실제 스핑크스는 9이다. 그가 수수께끼 문제를 내고, 거기에 대한 폭탄제조와 전반적인 작전을 지시하고 준비하기 때문이다. 12는 9의 친구로서 같이 연구소에서 자라난 사람으로 9의 옆을 보조해준다. 그들이 스핑크스로 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는 단순히 스핑크스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적인 존재이나, 태어난 순간부터 사회에 귀속되어 억압받는 것 자체가 사회적 인간이 된다. 특히 인간은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며, 언어는 사회적인 단어로서 윤리와 도덕의식까지 반영된다. 즉 인간이 언어로서 사회성을 가지는 것은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법이나 제도를 지켜야 하며, 이것은 곧 하나의 권력이 된다.

 

여기에 그 권력으로 인한 피해자 혹은 다시 스핑크스에 의해 소환된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로 시바자키 형사다. 유능한 형사이고, 경찰청 내 간부와 상당히 친분이 있는 시바자키 형사는 본래라면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경찰청 내 상당히 외진 부서인 문서보관실에서 담배나 피고, 신문이나 읽는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보면 깔끔한 인상보단 마치 격리되어 유배 온 사람처럼 무력해 보인다. 그의 전력은 과거 어느 비리사건을 쫓다가 일본 내 국회의원 중 큰 권력을 가진 마미야 의원의 뒤를 쫓다가 그렇게 좌천된 인물이다.

 

그래서 스핑크스가 시바자키를 두고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오이디푸스왕 이야기에서 스핑크스를 물리친 사람이 실제 오이디푸스라는 점이고, 다른 식으로 본다면 시바자키 형사는 실제 오이디푸스처럼 거세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는 한 쪽 다리를 제대로 걷지 못한다. 아기이던 자신을 도망치지 못하게 발목을 고의로 상처 낸 것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라는 단어적 의미는 다리가 부은 사람이란 것도 있다. 다리가 부은 것은 이미 한 번 자신이 거세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체적 구조에서 결함이 발생한 점, 그것은 아기이던 자신이 어른들에 대해 대항할 수 없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이다. 따라서 시바자키 형사가 당한 좌천은 곧 오이디푸스처럼 다리 한 쪽을 다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순히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는 친부살해 근친상간만 다룬 것은 아니다. 오이디푸스라는 권력적인 관계를 사회적으로 환원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스핑크스의 등장에서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처럼 아버지를 살해하고, 오이디푸스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시바자키 형사는 왕이 될 생각보다는 엄청난 비리와 부패를 저지른 마미야 의원을 처벌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런 계기는 자신도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으며, 그 계기로 인해 시바자키 형사는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인 아버지인 즉 권력이란 것이다. 시바자키 형사가 추적한 마미야 의원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시바자키 형사를 부당한 권력으로 짓누르고, 시바자키 형사가 맡은 사건을 모두 수포로 몰아간다.

 

3. 군국주의의 잔재

스핑크스가 처음에 탈취한 것은 원자폭탄이다. 원자폭탄은 상당히 위험한 물건으로 폭탄이 폭발할 경우 엄청난 고열과 폭풍 그리고 방사능으로 인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큰 타격을 준다. 일본에 떨어진 2개의 핵폭탄은 2차 세계대전 열세에 몰린 일본이 항복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핵폭탄의 충격은 일본사회에서 큰 정신적 충격 즉, 트라우마가 되었다. 마미야 의원과 시바자키 형사가 말하는 70년 전이라면 당연히 1945년 8월에 떨어진 핵폭탄에 대해서다. <잔향(残響)의 테러>에서 잔향이란 ‘실내(室內)에 놓여 있는 발음체(發音體)에서 나는 소리가 그친 뒤에도 남아서 들리는 소리’이다.

 

아직까지 없어지고 남아있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기에 스핑크스가 테러를 벌이는 것은 결국 아직까지 잊지 말고 계속 기억해달라고 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남긴 이유는 스핑크스와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5는 본래 일본 어느 의학연구기관에서 실험체가 된 사람들이고, 연구실에서 9호와 12호는 탈출에 성공하나, 5호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채 남은 실험대상자들은 모두 죽게 된다. 그들이 비인격적으로 비윤리적으로 받아야했던 과거는 그들의 존재성을 말살했으며, 그것이 잘못된 일임이고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을 추진하는 자들은 역으로 자신들의 의지가 정당하다고 한다.

 

권력이란 거대한 힘으로서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정의란 눈으로 드러나지 못하므로, 결국 그 정의라는 이름을 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은 힘으로 통한 방법이다. 마미야 의원이 70년 전의 미국에 당한 핵폭탄에 과거 일본의 기상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일본 내 정치, 사회, 경제 권력자들이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한 가문 후손이 있다는 점과 극단적인 우익성향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과 반성보단 되레 그 시대를 가고 싶은 자도 있다.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파시스트적인 요소가 다른 이유가 있는데, 전체주의는 권력자의 폭압으로 국민이 고통 받는 독재정치를 말하는 것이고, 군국주의는 국가조직부터 시작하여 모든 국민들이 군사체계가 되는 군사 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마미야 의원의 우익적 성향이 문제되는 것은 그의 논리는 군국주의로 환원하여 과거의 일본 제국주의를 되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미국이 가지고 있는 강한 핵폭탄과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아이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가두어 강제적으로 서번트 증후군을 일으켜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강제로 뇌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혹은 육체적으로 무리가 뒤따르기에 수많은 실험대상 아이들이 죽게 되었다.

 

4. 스핑크스의 테러리즘

심지어 5호조차도 그 증상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으며,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인 시바자키 형사와 마지막 대화를 한 후에 죽고 만다. 이미 스핑크스의 모든 수수께끼를 시바자키 형사가 풀었기 때문에 9호는 안심하고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스핑크스가 처음 나타난 동기는 신화와 애니메이션은 다르지만, 스핑크스가 가지는 의미는 그 세계에 대한 파멸 내지 위기다. 스핑크스로 활동하던 9호와 12호는 자신들이 부당하게 국가권력에 의해 유린당했으며, 아무리 그런 일들을 폭로해봤자 이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이었다.

 

만약 그런 제보가 있다면 분명 권력자들이 경찰과 언론을 통제하여 어떤 식으로 입막음을 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런 일은 그 실험 프로젝트를 맡은 책임자가 폭로하기 전에 자살로 위장한 암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따라서 2명의 스핑크스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세상의 안목을 자신들에게 돌리는 것이고, 그들이 원하게 무엇인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말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폭로는 결국 테러리즘에 입각할 수밖에 없고, 그들의 행동은 아나키스트적인 반국가적 행동에 기인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라는 조직은 국가라는 존재로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국가라는 조직에 들어간 있는 인간에 의해 움직인다.

 

그 인간들의 이익과 권력에 부합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면 관료체제의 기득권자들은 분명 진실의 폭로를 곧이 받아들일 수 없는 셈이다. 스핑크스는 단순히 국가를 전복하자는 게 아니라 국가에 의해 잊어지고 버려진 조계를 고발하려는 것이었다. 단지 그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국가전체를 흔들 수 있는 테러가 필요했고, 최후 수단은 핵폭탄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명을 살상하지 않았다. 테러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과 허황된 망상에 젖어 사람들을 희생시킨 권력자와 비교할 경우 누가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와 다르게 일본정부도 그렇고, 일본에 개입하는 미국도 그렇듯이 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던지 상관없는 마찬가지였다. 스핑크스가 숨긴 핵폭탄을 탈취하기 위해 경찰호송차를 습격하고, 심지어 12호마저 사살하는 행동력, 9호가 핵발전소에 폭탄을 터뜨려도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모습에선 누가 어떻게 되든지 자기들만 무사안위하고 이익을 보면 문제없다고 한다. 국가라는 것은 감정을 가지지 못하나, 국가의 운영하는 인간은 감정을 가지겠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동하면 그 감정을 국가를 이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버린다. 감정을 버리는 것은 윤리적인 가치관마저 버리는 것과 같다. 즉 이성적인 판단력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감정적으로도 윤리의식을 가질 수 있기에 감정을 버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간성을 버리는 것과 같다.

 

자신들만의 정의라는 것은 곧 모든 것을 그 하나를 위해 어떤 희생과 피해가 일어나도 감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은 인간의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에 부합되기에 정의는 윤리가 아니라 힘에 의해 통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미야 의원이 하려는 행동은 분명 보편적 윤리성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자신이 애국자인 것처럼 당당하게 행동한다. 시바자키 형사가 오이디푸스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런 망상에 잡힌 일본의 아버지들을 죽이기 위해 아들인 시바자키 형사가 동원된 것이다.

 

5. 부조리한 현실,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거세

시바자키 형사에 대해 스핑크스 1호는 오이디푸스인 시바자키 형사가 자신들을 찾아주길 원했다고 한다. 딱히 2사람 모두 군국주의 과거 일본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지만, 그런 의식에 고취된 인간들이 결국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옳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바자키 형사는 동료와 같이 맥주를 마시면서 자신이 10대 시절에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1969년 도쿄대학 야스다강당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신좌파 운동으로 전공투 운동이 있었다. 그 배경은 베트남전쟁의 종식(베트남전쟁의 원인은 통킹만 조작을 미군이 하면서 발생했다)을 원하는 것과 등록금 인상과 각종 사회문제에 대하여 대학생들이 저항한 것이다.

 

세계에서는 당시 혁명과 저항의 역사가 있었다.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5월 혁명이 벌여졌고,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의 반대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 여성인권 문제 등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저항운동은 주로 대학생과 10대 학생에 의해 주도되었다. 프랑스에선 다음해 선거에서 드골정권이 막을 내리나, 미국과 일본은 이내 진압되고 만다. 시바자키 형사가 말한 10대의 저항의식, 만약 시바자키 형사의 10대 모습처럼 스핑크스 역시 10대인 점에서 무엇을 향하여 저항하고 있는가? 일본의 전학공투회의 같은 학생운동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부조리에 저항하던 젊은이들의 외침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오이디푸스가 되어야 했다. 오이디푸스가 되는 것은 역시 자신들의 발목을 큰 상처를 입은 후에 절룩거리는 인생이 되어야했다. 사회적 부조리에 대항하던 젊은이들이 실패의 역사를 걸었지만, 시바자키 형사는 스핑크스로 통해 그 부조리에 대해 밝혀내었고, 그 부조리를 밝힘과 동시에 자신을 거세하던 마미야 의원을 비롯한 각료들이 역으로 거세를 당하게 된다. 그들을 거세당해야 이유는 무엇인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인민을 정부의 희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를 기꺼이 인민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민주주의국가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헌법이다. 헌법에 의해 국가기관과 조직, 심지어 군대조차도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헌법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법률이 헌법으로부터 시작하며, 모든 법률이 적용 역시 헌법 위에 올라갈 수는 없다. 일본의 헌법조차도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고 있으며, 그 어떤 경우라도 국민 개인의 인권을 침해받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현실에서 헌법은 그저 휴지종이처럼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 국회의원은 국민의 투표로 인해 선발되는 국민의 대표 중에 하나다. 그렇지만 실제 그들이 하는 행동은 공공의 이익으로서 국민들을 위해 일을 하는지 혹은 자신들만의 이익과 환상에 봉사하는지 알 수 없을 경우가 허다하다.

 

시바자키 형사가 그토록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국가권력들은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고 은폐했으며, 심지어 스핑크스를 쫓는 과정에서 시바자키 형사를 경찰업무에서 제외시키기도 한다. 이런 피해는 누구에게 가는 것인가? 민주주의국가 정치제도에서 관료체계의 권력과 이익이 우선되는 것은 결국 관료주의 정치형태가 되는 셈이다. 관료주의에서는 어떤 공평한 기준으로부터 누가 먼저 그 혜택을 받아야 하는지를 눈에 쉽게 드러난다. 관료주의 정치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적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는 “그 나라의 정치를 보면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국민의 수준이 거론되는 이유는 바로 리사의 모습이다. 리사는 아주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나, 적어도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이지메를 당하고, 어머니는 심각한 집착으로 인해 학교와 가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청소년이다. 청소년이 공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소는 학교와 가정이지만, 그녀의 모습은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이 없다. 그런 리사의 현실을 만든 것은 리사의 본인의 선택인가? 아니라면 누구의 선택인가? 인간은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도처의 사슬에 묶여 얽매인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6. 오이디푸스왕 이야기 결론부와 시바자키 형사

부조리한 현실 앞에 사회구조적인 부분들은 개인에게 돌아간다. 물론 과대 해석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사가 학생이란 점이고, 학교라는 곳은 ‘사회의 축소판’이므로 그 사회가 병들었다면, 그 사회가 존재하는 학교 역시 병이 들며, 그 학교 안의 학생들 역시 병이 들어간다. <잔향의 테러>에서 그런 부조리에 대한 저항에서 시바자키 형사는 스핑크스를 자살(물론 병이지만)하게 해준다. 스핑크스와 그리고 5호를 비롯한 조계의 고통은 시바자키 형사가 기억해주고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진실을 밝힌다.

 

진실의 밝힘은 관료들의 허황된 욕망과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게 하여 지난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점이고, 국가의 주인이란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과 같다. 어떻게 보면 인권이란 자연권이란 말처럼 아버지를 거세한 시바자키 형사는 권력보다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자연권을 돌리는 것을 추구한 셈이다. 대신 시바자키는 오이디푸스와 다른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왕 이야기 후반부에 테베에 큰 재앙이 터지는데, 그 이유는 신이 인륜을 저버린 어느 죄인이 테베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죄인은 오이디푸스왕이었고,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두 눈을 찔러 실명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신의 죄와 수치 때문에 자살하고, 오이디푸스의 형제자매이자 딸과 아들들은 이후 다른 비극으로 모두 죽고 만다. 오이디푸스는 추후 테세우스라는 영웅으로 통해 안식을 받고 죽는다. 그의 죄는 너무 무거워 그가 유일하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땅에는 저주가 드리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시바자키 형사는 자신의 형사 자리를 되찾았으며, 마미야 의원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진실도 밝혀주었다. 오이디푸스왕처럼 두 눈을 멀게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두 눈을 뜨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바자키 형사가 두 눈을 멀지 않게 된 이유는 그는 정상적으로 아내와 결혼하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인륜을 져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인륜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7. 마무리하면서

<잔향의 테러>에서 스토리 주제는 테러리즘으로 통한 테러리스트가 왜 테러를 일으키는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테러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통해 스핑크스가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부조리하게 죽어간 친구들과 인간으로서 살아가지 못한 자신들의 존재성을 알리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소통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과거에 자신들을 속박한 문제를 다 정리해야 하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만약 그런 행동을 할 경우 생존할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알았으며, 그렇게 죽어도 단지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누군가에게 각인되어도 그들의 정보는 어디에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의 은폐와 조작 속에서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인간이 되어야 했다. 자신들의 존재성을 알리는 이유는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그들은 실존하고 있어도 사람들 사이, 즉 사회적인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은 존재다. 자신들의 이름이 없는 것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고, 그들이 존재한다는 관념적인 요소가 없다면 그들은 사회에서 없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육체적으로 살아있어도 사회적으로 관념적으로 살아있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있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죽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5호로 통한 미국과 일본의 긴장관계도 보인다. 일본의 극우적 성향은 반미적인 요소를 가진 것이고, 친미적 우파는 정치적(군국주의적 성향)인 요소보다는 자본주의적 성향 즉 경제적 요소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경제적인 요소보단 사회에 대한 관념적인 요소, 즉 정치적 성향을 드러냈다. 하지만 주제는 정치적 목적보단 단지 스핑크스의 존재성이었다. 하지만 그 모티브 요소에서 그런 설정을 가지고 온 것은 오늘 날의 일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도 스핑크스는 VON이란 단어처럼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한다. 자신은 이제 죽어가면서 희망을 외치는 것은 아직까지 시바자키 형사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점이고, 그가 있다면 분명 자신과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어질 것이다. 결국 스핑크스가 하고 싶은 일이란 자신들의 존재성을 알림으로서 부조리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것과 같다. 그들의 최후의 테러는 핵폭탄을 고공폭발이 아니라 성층권에서 폭발하는 초고공폭발이었다. 핵폭발에서 가장 효과적인 살상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고공폭발이다. 대신 강력한 에너지로 모든 전기기계들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간이 과격해지는 것을 보면서 교수대에 목을 매달아하는 사람들은 죄를 짓는 사람보단 그렇게 짓게 만드는 자라는 것을 우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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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ㅍ 2014-10-18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리뷰. 덕분에 작품의 이해가 잘 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4-10-18 10:38   좋아요 0 | URL
아니 애니메이션 리뷰인데...
 


1. 기본적인 조사내용

<모모큔 소드>를 보면서 조사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모모큔이란 이름은 모모타로 전설에서 본뜬 점이고, ② 아베노 세이메이는 기원전 10세기에서 11세기까지 활약한 음양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모모타로 이야기는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는 오니가시마에 가서 꿩, 원숭이, 개와 더불어 도깨비를 제압하여 보물을 가지고 온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베노 세이메이는 일본에서 아주 많은 소재에 등장하는 음양사라는 점에서 <모모큔 소드>는 2가지 신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 등장한다. ③ 마지막으로 카쿠야공주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삼천실복숭아를 모우는 이유는 카쿠야공주가 달에 가기 위한 동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힘을 모우는 것에 있어서 조정과 조정의 신하인 아베노 세이메이 일행하고 같이 행동한다.

 

세 가지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하나에 뭉쳐 현대적 감각과 더불어 주인공인 모모코와 모모코의 라이벌인 오니히메가 등장한다. 원래의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Animation의 Anima는 영혼이고, Animate는 살아있지 않은 존재에 혼을 불어 넣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만드는 것이다. Anima라는 것이 영혼이란 점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공간에서 살아있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이야기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새롭게 만들고 해석하고 때로는 변모되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인 판소리를 보면 그 흐름이 전설과 신화에서 비롯되고, 등장인물조차도 신화나 전설의 인물이다. 가령 심청전의 용왕은 바다의 신이고, 어부들이 생각하는 바다라는 존재를 하나의 인격화한 존재다.

 

 

2. 이야기의 변주곡

그 이야기가 동화로도 되고, 때로는 소설로도 되지만, 현대에 와서 새롭게 각색되기도 한다. 예전에 한국 대표적인 판소리 주제인 춘향전을 소재로 <쾌걸 춘향>이란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이야기하기는 것은 단순히 그 원류 그대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형되고 탄생하고 왜곡되어진다. 그런 만큼 스토리텔링은 정해진 이야기만이 아니라 수용자가 새롭게 변화된 이야기로서 드러날 수 있다. 전설이나 신화가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저작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신화와 전설은 통시적인 것이 아니라 공시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이나 200년 전이나 우리 인간은 서로 다른 문화적 조건과 사회적 현상, 정치적 입지가 부여된다. 그런다고 우리가 그 이전 시대의 인간과 다른 문명이라고 해도 그들과 같은 공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계속 덧붙이거나 빼거나 또는 이상하게 흘러갈 수 있다. 적어도 이야기가 변모된다는 것은 시대적인 변화와 더불어 그러면서도 과거의 이야기와 접점이 맞물려 있다. 고정된 것과 유동적인 것이 서로 결합하여 부딪혀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부딪힘의 미학이란 바로 변증법적으로 서로 대립되겠지만, 서로 대립되기에 기존의 이야기가 전승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잊은 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결국은 도태되거나 박물관 속에 전시된 유물 수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모큔 소드>는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3. 복숭아에 대한 판단

<모모큔 소드>에서 모모큔의 모모는 결국 모모코의 이름에서 애칭으로 불리는 것이다. 모모라는 것은 복숭아, 즉 도화(桃花)에서 나오는 열매다. 복숭아나무에서 나오는 과실 복숭아를 이 작품과 혹은 모모타로 신화에서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모모큔 소드>만의 리뷰만 아니라 좀 더 나아가면 일본의 문화, 그리고 동아시아문화라는 인류학적인 영역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복숭아는 원산지가 중국으로 한국에서나 혹은 일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과실나무다. 복숭아의 역사적인 기록에서 한국은 이미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상, 대략 삼국시대 내지 전부터 존재한 것이다.

 

복숭아의 원산지가 중국인 이상, 왜 중국의 나무가 일본으로 갔는가에서 결국은 삼국사기의 문헌정보로 판단해보면 한국의 과거 고대국가에서 일본으로 복숭아가 넘어간 사실이다. <모모큔 소드>에서 가장 생각해야 점은 복숭아라는 점이다. 복숭아가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서 어떤 모티브로 작용하는 점이다. 복숭아가 복사나무라고 불리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여름에 자주 먹는 과일이기도 하나, 복숭아의 나무인 복사나무는 절대로 제사상에 올리지 않은 게 특징이다. 복사나무의 가지는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으며, 그런 것들은 한국 전설에 등장하기도 한다. 모모타로 원전전설에서 생각할 점은 모모타로 복숭아에서 태어난 점에서 복숭아가 귀신만 아닐 도깨비와 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유령이나 귀신, 악귀 등을 쫓아내는 힘이 있던 것이다.

 

한국에서 악령을 내쫓는 것은 팥을 이용하여 동짓날에 죽을 해서 먹는데, 일본도 그런 유사한 풍속이 있다는 점이다. 문화의 유사성에서 복사나무 가지나 팥의 경우 농경문화의 특성이다. 복사나무는 여름에 과일을 맺기에 양기를 많이 받아야 좋은 열매를 가질 수 있다. 양기를 품은 나무인 만큼 음기를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이고, 그 양기가 좋은 복숭아만큼 인간의 신체에 매우 탁월한 영양소를 공급한다. 가령 모모타로 전설에서는 복숭아를 먹은 두 노부부가 갑자기 젊어져서 할머니가 젊은 여자처럼 임신할 수 있다고 한 점이다. 복숭아는 다양한 비타민과 무기물질, 그리고 노화에 탁월한 음식이고, 신체 면역력에 매우 좋은 효과를 보여준다.

 

결국 복숭아란 음식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고, 새로 들어온 음식으로 그 효과는 보통 인간들에게 좋은 음식이었다. 하지만 전설에서 복숭아는 일본의 오니가시마 내지 한국의 귀신들을 물리치는데 효과적인 과일이다. 그렇다면 복숭아의 문화성은 무엇인가? 복숭아가 분명 중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일본으로 넘어간 점과 복숭아는 다른 과일과 비교하여 좋은 영양소가 많다는 점이다. 그것의 관련성은 천녀(天女)로 이어진다.

 

  

4. 천녀(天女)와 선교(仙敎)

일본의 종교 관념을 보면, 기본적으로 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그 중에서 일본 창조신을 이어받은 천황(天皇)이란 존재가 있다. 21세기에 일본은 겉모습만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천황은 아직까지 존재하며, 소화와 평성으로 이어지면서 천황은 결국 하늘의 황제이다. 물론 일본 천황에 대해 일일이 논할 수 있는 조건과 상황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천황을 꺼낸 이유는 천녀대가 존재하는 것은 선교적인 종교가치관이 작품 내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천녀가 사는 세계는 하는 천상의 세계다. 인간의 세계를 크게 3가지인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다. 천녀가 하늘, 오니가시마가 땅, 인간은 지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구조는 무(巫)라는 한자와 잘 맞아 떨어진다. 모모타로의 이야기의 간단한 소개로서는 판단하는 것은 섣부를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천녀대란 존재는 선교라는 인간을 초월한 신선이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복숭아의 시작은 중국이고, 중국에서 시작된 선교에서 복숭아는 자주 나온다. 우리나라 고전을 토대로 제작한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서 전설에 등장하는 귀신이나 도깨비 또는 선녀 내지 옥황상제 같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등장한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어느 효심이 깊은 청년이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한 채 늙은 어머니 혹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그의 부모님은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청년은 늘 마음이 아픈 모습이 나온다. 이때 청년은 신선을 만나거나 또는 선녀 혹은 꿈속에서 조상님 내지 옥황상제를 만날 때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병이 깨끗하게 사라져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복숭아의 소재가 항상 누군가의 병을 치료하는 점에서 약으로 사용되나, 한편 악귀가 사람에 씌워지거나 또는 이유 없는 병에 시달리는 경우에도 천도복숭아가 거론된다. 복숭아라는 것이 결국 거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천녀장 스메라기는 삼천실복숭아의 힘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만약 그 힘이 잘못 사용될 경우 큰 재앙이 발생할 것이란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모큔 소드>는 복숭아와 천녀라는 존재로서 기존 이야기에 선교 혹은 도교(道敎)적인 가치관이 부여된 점이다. 복숭아의 가진 힘을 인정하는 것은 도교 내지 선교의 종교적 가치를 담은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5. 오니의 존재

오니의 존재는 귀신 내지 도깨비를 지칭한다. 도깨비는 한국이나 일본 모두 존재하는 이야기며, 한국에서는 동굴에서 도깨비가 나오거나 또는 무덤 앞에서 등장한다고 한다. 주로 음의 기운이 강한 곳에서 도깨비란 존재가 나오기에 복숭아로서 도깨비를 퇴치할 수 있다고 민간신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모큔 소드>에서는 복숭아에 대해 오니들이 무서워하기보단 복숭아의 힘을 오히려 노리는 것이 특이하다. 게다가 오니들은 복숭아의 힘으로 카쿠야공주의 우주선을 가동하거나 또는 오니가시마를 움직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 오니의 존재, 그들의 본질적 요소가 조금 의아하다.

 

보통 이런 모험물의 경우 선악의 이분법적인 논리로서 주인공이 정의의 편, 상대편은 강력하고 악랄하며 온갖 못된 행동만 골라서 하는 악의 축이다. 그런데 오니의 존재는 과연 악의 축인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처음에 복숭아를 두고 서로 다투는 오니와 모모코의 대립에서 점차 이상한 축으로 흘러간다. 같이 협동하기도 하고, 모모코의 비밀이 담긴 물건을 잃어버릴 때 자코키가 모모코의 물건을 가지고 협박한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오니히메가 자코키가 주운 물건을 도리어 모모코에게 준다. 이때 자코키는 자키오에게 오니히메가 한 행동을 고발하지만, 자키오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그의 딸이라도 오니족의 일원으로서 자키오는 오니히메에게 그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이에 오니히메는 오니로서 긍지를 갖고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자키오는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오니히메가 한 행동은 이른바 정언명령, 타인의 선적 가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한 공공선을 넘어 공동선적인 가치다. 정의론적 가치로서 판단한다면 오니히메는 자신이 충분히 모모코의 약점을 가지고 이익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워하며 정정당당하게 모모코와 겨루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니라는 존재는 교활하고 악랄하며 저주스러운 존재라는 관념적 이분법을 해체하고 만다. 후에 가면 오히려 오니히메는 자신의 정체성을 아버지인 자키오와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다. <모모큔 소드> 11화 오프닝 후 오니히메가 자키오를 찾아가 자신의 출생비밀에 대해 털어놓고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루어진다.

 

오니히메 : 그럼 왜 절 친자식처럼 키우신 겁니까?

자키오 : 천계가 혐오하고 부정해온 것, 그건 바로 힘과 우리 오니의 존재. 그리고 오니랑 천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녀석에게 있어 너 같은 아이는 오니 이상으로 창피하고 혐오스러운 존재지. 그래서 널 주워 길렀다. 널 버린 녀석들을 부정하기 위해서

오니히메 : 단지 그것 때문에?

자키오 : 이상을 위해 버리고 부정한 것들로 인해 멸망한다. 정말 우습지 않느냐?

 

약간 뻔한 스토리와 여성캐릭터의 가슴움직임(버스트 무빙)에 상당히 비중을 두는 <모모큔 소드>에서 이런 대화를 나온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아무리 유치한 이야기라도 그 안에는 분명히 철학적인 담론이 있다는 점을 말이다. 오니히메와 자키오의 대화는 인간의 실존과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한다. 본질적으로 오니히메는 오니족 수령의 딸이고 후계자이겠지만, 정체성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오니히메는 오니히메라는 자키오의 말과 자신이 이때까지 묶게 만든 사슬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런 말에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문구가 생각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에 묶여 있다.” 오니히메에게 진정한 사슬은 없었다. 그 누가 무엇이라 하여도 오니히메는 오니히메였고, 오니히메의 부하이며, 사디스트 마족인 엔키는 오니히메는 그 무엇이라고 하여도 자신의 친구라는 점은 변함없다고 한다. 사회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존재로서 오니히메는 친구를 얻은 것이다. 분명 오니히메는 모모코와 라이벌이 되어야 하나, 그 라이벌적인 존재가 서로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된 점이다.

 

그 누구의 이름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이름으로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모험장르 내지 용사마왕장르에서 교과서적으로 악의 축이어야 할 오니히메가 과연 악인가? 라는 질문에서 오히려 악이 아니라 단지 악으로 규정되었을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어떻게 보면 오니히메의 존재성을 두고 판단하면 진정 악은 누구인가? 판단은 도덕인가 혹은 윤리적인 가치인가로서 판단해야 한다. 도덕이란 것은 그 사회의 권력에 의한 법적 제도적인 규율으로서 단순히 천녀사회에서는 오니는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폭력적인 존재로 각인되었지만, 자키오 입장에서 (설사 오해라고 할지라도) 천녀장조차도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존재로 보인다.

 

선악의 저편으로서 자키오는 적의 우두머리지만, 그가 가진 오니라는 긍지는 과연 악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오니히메에게 오니라는 긍지를 가지고 행동했는가? 라는 것은 곧 오니일지라도 자신의 정의에 의해 행동했는가라는 것이다. 신념이란 가치 아래 오니히메의 행동은 윤리적인 가치에서 정말 옳고 정당한 행동을 한 것이다. 단지 오니의 자코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오니의 반역자로서 오니히메를 처벌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의라는 것은 윤리와 도덕이란 입장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이는 것이다.

 

작품 상황 그 자체에서는 오니족이 나쁜 것으로 처음에 판단하겠지만, 작품 후반에 갈수록 오히려 천녀 쪽의 가치가 틀렸다는 알아보게 해준다. 모모코와 오니히메는 쌍둥이 자매이고, 두 사람은 어머니의 유물인 반지를 서로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천녀사회에서 매우 아름다고 자상하며 천녀 중에 천녀인 분이나, 아버지는 오니족 일원이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존재, 우리는 단순히 하늘과 땅의 위배된 존재로서 보이나, 그 너머에는 인간이 자신들과 다른 존재에 대해 느끼는 배타심을 보여준다. 배타심에 의해 모모코의 부모는 죽임을 당하고, 자신들은 버림 받은 하늘과 땅의 버림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땅의 지하에 살던 오니족 우두머리인 자키오는 오니히메를 자신의 딸로 삼고, 딸로서 대해준다. 무표정하고 다소 감정이 없는 자키오라도 그가 오니히메에게 보여준 모습은 사랑하는 딸을 위해 행동하는 아버지와 같았다. 천녀사회에서 부정했던 오니히메에 대한 가치를 부정한 그로서는 부정의 부정은 긍정 혹은 부정에서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간 셈이다. 천녀사회에서 부정한 존재이나, 오니에게는 긍정적인 존재이며, 그것 자체가 상대방에 대해 또 다시 부정이란 가치관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6. 복숭아의 농경사회

오니족과 모모코의 대결에서 최종적으로 모모코의 승리로 이어지고, 이후 자키오 대신 오니족은 오니히메의 통솔로 들어간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니족은 오니가시마의 붕괴로 인해 땅 밑이나 혹은 동굴 다르게는 인간이나 천녀사회에 의해 포박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농사를 짓고, 평화로운 농경사회 구조를 이룬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인류학적인 요소로 그들은 어떻게 바라보는 게 정당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결론 자체가 오니족이 오니족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니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모모타로는 오니족을 침범하면서 보물을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모모타로의 이야기에서 복숭아는 일본에서 한국 내지 중국에서 유입된 물품이며, 일본은 중국과 교류하기보단 삼국시대의 백제와 교류를 더 많이 했다. 또한 지리적인 조건에서 한국의 고대국가들과 무역을 더 많이 한 일본으로서 천녀사회는 결국 일본으로 유입된 도교 내지 선교 문화이다. 도교 내지 선교 문화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한국으로 유입되어 다시 일본으로 넘어간 점에서 (일본 자체는 이런 점을 무척 부정하겠지만) 모모타로 내지 모모코 이야기는 기존 원주민과 유입민족의 대립관계로 볼 수 있다.

 

복숭아라는 것은 인간이 과수원으로 가꾸는 열매이며, 농경사회인 중국과 한국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농경문화보단 어업에 더 가까우며, 오니가시마를 신화적 요소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본다면 그들은 노략질을 하던 해적에 가깝다는 점이다. 오니가시마의 오니들은 본래 농사를 짓지 않았으며, 그들이 해적일 가능성은 모모타로 이야기에서 오니족들이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략질을 일삼은 그들이 보물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자주 주변 마을이나 부락에 폐를 끼칠 가능성이 높다.

 

 

 

고대 일본은 지금처럼 통일된 국가가 아닌 세분화된 점도 그렇지만, 아직까지 일부 농경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메라기 천녀장부터 천녀대의 의상은 도교와 선교의 의상으로 일본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복식문화가 아니다. 따라서 <모모큔 소드>는 기존 해적질을 하던 원주민과 높은 문화(하늘을 나는 천녀)를 가진 부족이 만나 서로 대립하다가 모모코와 오니히메처럼 두 부족의 교류가 처음 이루어질 때 잘 되지 않았거나(혹은 인질로서 서로 결혼하는 방법에서 잘 되지 않았거나) 분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샤머니즘(한국의 전통무속신앙)적으로 본다면 천녀는 하늘이고, 오니는 땅, 인간은 중심이다. 한국에서 천지인에서 하늘은 아버지고, 땅은 어머니이니 그 사이에 인간이 태어난 것처럼(단군신화) 인간은 오니 내지 신선이 둘 될 수 있거나 혹은 그 두 부류로부터 올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모큔 소드> 최종 승리자를 보면 천녀이기도 하겠지만, 오니족 역시 멸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농경사회를 보여주는 입장에서 농경사회는 인간만의 문화인 점에서 최종 승리자는 인간이란 점이다. 천녀들은 인간사회에 큰 영향을 주기보단 그저 아이돌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어째보면 아이돌이란 존재는 TV 가상매체에 등장하는 신과 같은 존재다. 신은 원래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관념 내지 혹은 환상에 존재한다. 신의 모습이 무언가 특별한 형체를 가지기보단 인간의 모습을 가진 것은 신이 인간을 탄생시키는 것보다 인간이 신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천녀들은 신앙적인 대상으로 작품 내에서 인간세계에 직접으로 개입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돌로서만 개입한다. 아이돌이란 숭배의식이 담긴 현실사회의 문화다. 그에 반해 오니는 힘으로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니 역시 인간과 같은 모습이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힘에 의한 폭력과 지배하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다. 단순히 오니와 천녀를 구분하기보단 그 존재에겐 인간의 모습이 담긴 사실이 더 중요할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오니와 천녀들은 서로 적으로 마주하겠지만, 최종 목표는 적이기보다는 서로 통할 수 있는 존재다. 오니히메가 마지막 화에 모모코와 서로 즐거운 표정을 검을 겨눌 때, 두 사람은 미소를 짓고, 모모코의 할머니는 두 사람을 위해 간식을 준비한다. 게다가 천녀대는 두 사람의 결투를 보러 오며, 모두가 누가 이기든 관계없다고 한다. 이게 <모모큔 소드>에서 말하는 작품의 미학적 가치일 것이다. 서로 다르기에 우리는 서로 처음에 싸울 수밖에 없겠지만, 니체는 인간은 서로 싸워봐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래야지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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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4-09-05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만화애니비평 2014-09-05 19:14   좋아요 0 | URL
오덕력은 모든 걸 돌파합니다!

카스피 2014-09-0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축하드립니당^^

만화애니비평 2014-09-05 19:14   좋아요 0 | URL
캄사하옵니당..후후훙

봄밤 2014-09-06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만화애니비평 2014-09-06 10: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당..오오오오~!!
 

어느 국수주의자가 법원 판결을 받았는데, 유죄를 선고 받았다. 문제는 그의 언질이었다. 헌법이나 형법을 찾아보면 공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 명예훼손에서 공공의 이익이 해당될 경우 충분히 면죄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결국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그 사회의 공공성에 문제가 발생될 경우 거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공공성을 무너뜨리는 인간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공공의 이익인데도 공공의 이익이 아닌 것처럼 떨어지고 있다. 

 

그래 되어버리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먼저 개인적으로 자신이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당하는 사람이 본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친구, 그리고 가까운 몇몇 사람라고 볼 수 있을까?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행태는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의 비인식성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타인에게 가겠지만,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란 안일한 사고가 문제다.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큰 명제를 남겼는가?

 

역사적인 사건은 개인의 서술이라고 해도, 그 개인은 역사적으로 보면 큰 정치적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정치적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치적 인물 뒤에 숨은 이름 없는 희생자들은 시로서 나타낼 수 있다. 영화 (허무)<명량>에서 성웅 이순신은 역사적 존재고, 정치적인 행위자이기도 하다. 전쟁은 정치적인 입장을 국가가 무력을 동원한 자국내에서 합법적인 폭력이다. 그 폭력이 수반되는 무서운 전투에서 장군의 죽음이 전쟁의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다.

 

전쟁의 지휘관은 작전의 수립과 진행 그리고 종결로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장수가 아무리 제갈공명이라고 해도 수중의 병사가 100명만 있다면 적의 만명의 어떻게 이길 것인가? 전장은 숲이나 성과 같은 매복이나 장기전이 불가능한 평평한 곳이라면? 그 순간만큼은 제갈공명은 아무 필요가 없다. 그 병사 100명의 무술능력과 판단력에 의해 좌우된다. 그 이름 없는 병사 100명 하나하나가 무장의 빛을 발휘하면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병사 갑을병정을 두고 우리는 충분히 이야기를 지어내고 만들 수가 있고, 그 것이  전쟁의 당락과 국가의 운명조차 넘어갈 수 있는 플롯이 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거대한 서사 앞에 놓인 작은 존재이나, 그 서사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개인적으로 힘들지만, 가치관의 부합으로 통해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이름 없는 병졸이나 현재 이름 없이 살아가는 국민이라도 살아있는 존재다.

 

이들의 죽음 내지 혹은 몰락 또는 억압은 지금은 어둠에 가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것이 밝혀지고 세상에 드러날 때 그들의 가려진 이름은 알려지게 된다. 이미 죽은 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그렇게 고생하며 살아온 자나 그 살아온 자에 의해 남겨진 자에 대해서는 정신적 보상이 따른다. 그 공공적인 가치를 위해서 말이다. 문제는 그 공공적인 가치가 아니라 공공의 이름으로 공공성을 망치는 존재들은 어떻게 하는 가이다.

 

첫 번째로 개인에게 닥칠 수 있다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은 항상 우린 망각한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며, 인간은 항상 이성적일 수 없고, 무의식에 의해 지배될 가능성도 높고, 감정의 기복에 휩말려 자신의 현재를 망각하기도 한다. 그것이 당연히 인간이란 점을 인정하고, 그 문제점을 인식해야 그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문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순간 인간은 고쳐진다. 문제는 그것이 개인에게 한정된다면 모르지만 타인의 영역에서 곤란한다.

 

가령 내가 운전하고 가는데, 좌회전을 해야 하는 순간, 나는 1차선, 옆 차는 2차선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좌회전 하는 도중, 2차선에 있던 차량이 내가 가는 1차선의 넘어 좌회전을 한다면 누가 문제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사고와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만의 노력과 판단만으로 넘어갈 수 없다. 결국 사회적인 문제는 개인 혼자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길가다가 갑자기 도로가 꺼지거나 건물이 갑자기 무너지거나 지하철에서 불이 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인가? 

 

두 번째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 공공의 영역의 문제다. 그런데 그 공공의 문제를 지적하고, 거기에 대한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근본을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가령 철학을 왜 배우는가에서 철학은 문제의 답을 주지 않지만, 그 문제가 되는 원인 그 자체의 결과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재발의 방지라는 예방적 차원이다. 인간은 항상 망각하는 존재이므로 그 망각의 샘으로부터 숨겨진 상처와 환부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찢어진 상처나 병으로 물든 환부를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불편하다.

 

그 불편함이 나의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이라면 분명 외면할 터이다. 하지만 그 문제가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사회전반으로 일어난다면 결국 자신의 주변에서 충분히 시각적으로 감지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명제가 될 수 있고, 그것은 어느 대상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비판이 되는 대상은 인간의 형체가 없는 것으로 되나, 그 인간의 형체가 없는 것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다.

 

결국 어느 누군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왜 공공의 이익에 대한 부분에서 명예훼손이 가능해도 그것이 아닌 경우 불가능한 것은 공공성이 아니라 개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판결받은 국수주의자는 자신이 말하는 공공성이란 이름 아래 그것이 정의라는 명제로서 비난했지만, 그 비난은 결국 거짓이었고, 조작된 것이다. 그의 특징은 전체 중에 작은 부품이 있다면 그 부품 하나 자체를 전체로 확대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논리나 윤리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한 오류라는 것도 있지만, 역으로 그것이 도리어 그 발언을 최초로 실시한 국수주의자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국수주의자의 똑똑하다고 여기고 싶은 어리석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부여된 또는 지지하는 세력을 두고 강하게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그 세력은 바로 국민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이거나 또는 연결된 대상이다. 그래서 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거나 혹은 옹호 내지 지지 또는 못본 척하며 기만하고 있을 존재다. 그런데 그 국수주의자가 그토록 비방과 비난을 날려 이때까지는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 내지 이슈로 되었다가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법원에서 판사의 결정은 거짓된 정보로 공공과 상관없이 고의로 없는 사실을 만들어 명예훼손한 것은 명백한 죄고, 게다가 반성의 기미나 피해자에 대한 사과 내지 예방적 태도가 없다는 것으로 6개월의 징역을 내린다. 예전에 부당한 국가권력에 징역살이하던 자들은 추후에 그 누명과 부당한 권력에 대한 보상으로 명예로 이어지나, 그런 식으로 남을 비하하거나 모독한 자에게 어떤 대우가 내릴까? 그저 혼자 미쳐 날뛰는 돈키호테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편하다.

 

득이 되는 자들은 교묘히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고, 자신의 입과 손을 더럽히지 않고 알아서 처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더러운 말과 더러운 글을 만드는 입과 손을 가진 자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거나 혹은 자기 나름의 계산을 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만약 법적인 처벌로 간주되어 그가 궁지에 몰릴 때 예전에 그의 활약으로 득본 자는 그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대신할 것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와 엮인다는 것만으로 분명 마이너스가 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은 계속 나오고, 집단적인 커뮤니티 활동자들은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 커뮤니티 회원이 구속되거나 잡혀가도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잡혀가는 사람들이 자기와 가까운 자도 아니고, 그가 잡혀간다고 해서 그들은 위기의식보단 겉으로 부당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조소를 날리기 때문이다. 국수주의자들은 부지런히 활동하여 애국한다고 하나, 그들이 애국한다고 생각하여 그 대상이 되는 국가라는 존재는 실존의 존재가 아니라 가상의 존재다.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그 자리에서 운영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그 애국이란 이름 아래 이익을 보는 자다. 그런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이들에게 결국 법의 집행에 걸릴 경우 어떻게 대응할까? 도와줄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할 것인가? 도와줄리가 없다.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이 걸린 일이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자에 대해 옹호하는 것에서 여론이나 미디어에 의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실추된 명예는 자신의 이익으로 연결된다.

 

프로테메우스는 인간에 불을 주어 늘 자신의 간을 독수리에게 뜯어 먹히는 신세가 된다. 그래도 인류의 번영을 위해 불을 준 자는 인간에게 문명이란 이름을 가진 양날의 검을 주었다. 그러나 그 검을 받은 인류는 그 문명을 옳게 쓰는 것보다 옳지 않은 일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옳지 않은 일로 이익을 받는 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처음에 이익(돈, 명예, 허영심만 남는 자존심)을 노리지만, 막상 어느 기회로 위기가 찾아오면 그들은 신속하게 버림을 받는다.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잡이공선>에서 총을 잡고 폭군처럼 군림하던 십장 같은 남자는 결국 선원의 반란에 의해 고용주에게 잔인하게 내쳐진다. 이때까지 받을 돈도 못 받고, 빈털털이가 되어 비참하게 내쫓기게 된다. 결국 이런 일도 저 <게잡이공선>처럼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국수주의자는 충분히 재기가 가능할 수 있으나, 일을 계속 크게 만드는 그의 모습에서 불리한 자신의 상황을 여론으로서 재반격하려 하지만, 상황은 너무 늦었다. 없는 것은 이미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조작하여 비난한 것은 기록에 남겨진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 반성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살아가는 이유일 터이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책들은 한 때 그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이며, 지금 가장 저주하는 대학교 선배의 책을 넣어두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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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9-0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아리러니입니다. 정말 롤모델로 생각했던 이를 이제는 적이 되어 만날 싸우니...
하여튼 네 무덤에 침을... 이 책 읽었을 때 신선했던 생각이 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4-09-05 11:25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진중권이란 사람이 참 대단하다고 여겼습니다. 어째 이런 날카로운 패러디의 조소가 나올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