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마단 사럽 지음, 전영백 옮김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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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는 뭐라고 나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단지 "현대사상지도" 구조주의편에서 구조를 이렇게 설명한다.

 

<구조란 무엇인가. 이 개념 자체는 오래됐다. 일반적으로는 부분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구성요소 및 요소 간의 여러 차이로 이루어진 전체이자, 개개의 요소가 변환되어도 변하지 않고 존속하는 전체로 정의된다. 그러나 구조주의에는 구조 개념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점이 중요하다. 첫째로 구조를 자기완결적이며, 실재적인 체계가 아니라 어떤 변환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떠오르는 것이라고 보는 점. 둘째로 구조를 사물에 내재하는 자연적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개개의 것이 그것을 통해 비로소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출현하는 차이의 쳬계로 간주하는 점. 셋째로 그런 구조가 인간의 다양한 사회적 역사의 실천에 우연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더욱 난감하다. 단지 구조주의는 자본을 지은 칼 마르크스, 영원회귀사상을 강조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인간의 무의식을 꺼내어 이성사고로 생각하던 서구사고에서 새롭게 등장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언어도 하나의 과학이며 체계를 지닌 것이라고 설명한 소쉬르의 언어학(기호학)으로 통해 생성되었다. 물론 초기 구조주의자들은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 루이 알세튀르, 로랑 바르트, 미셀 푸코, 자크 라캉으로 대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점은 여기 등장한 구조주의자 중에서 미셀 푸코와 자크 라캉은 후기 구조주의로서도 등장하는 점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 다음에 온 프랑스 사상운동이다.

 

그래서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는 딱 내가 잘라 말하기 어렵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현대사상에서 정치, 철학, 사회, 언어,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크게 대두된 점은 분명하다. "현대사상지도"에서 후기 구조주의는 이렇게 설명한다.

 

<의식이 이데아적으로 현전하는 표상, 텍스트에 위임된 일의적인 의미, 근대의 진보를 담당해온 이성 및 자율적 주체, 사회나 역사를 전체로서 통제하는 제도나 법 등, 모든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존재자의 동일적인 현전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의심을 제기하는 것이 다음에 오는 포스트구조주의의 근본 전략이다. 게다가 그것은 다른 형태의 사상체계를 제시하기보다는 의미, 주채, 법을 설정하려는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텍스트 자체에 규범적인 동일성을 자기해체하는 계기가 포함되고 있으며, 동일성의 수립이 그 유일한 근거가 차이를 억압하고 은폐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폭로하는 내재적 비판을 전개한다.>

 

어째거나 나는 이 책을 보는 이유는 이런 복잡다양한 내용을 이해하기 보다는 철학자, 정신분석하자, 사회학자가 어느 인물이 있고 그들은 어떠하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에서 이 책을 보았다. 처음 내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를 알게 된 계기는 사상이나 철학을 통해서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다가 우연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주제로 한 논문들을 접하면서 알게된 사상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해체적으로 분석한 논문과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비평적 텍스트로 접근하여 신세기 에반게리온 서사구조를 분석한 논문 등 다양한 학문을 접함으로서 비로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철학이 있다는 것과 그 사상철학 기반에는 후기구조주의가 있었고, 다시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소쉬르로 연결된 것을 알았다.

 

물론 이들 중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연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를 본 입장에서 마르크스가 상당히 사회구조적으로 글을 적는 점과 당대 명문의 글뿐만 아니라 유명한 문학가의 서적을 보고 인용하고 적절하게 집필했던 것으로 매우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사회철학자였다.

 

어째든 아직 인문학에 접하지 않은 일개 애니메이션 오타쿠 주제에 현대사상이나 철학 그리고 사회를 논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뒤따르나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알았다. 내가 사실 이 책을 처음 접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비평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7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1장 라캉과 정신분석

2장 데리와 해체이론

3장 푸코와 사회과학

4장 후기구조주의의 흐름

5장 식수,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비: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

6장 리오타르와 포스트모더니즘

7장 보드리야르와 문화적 실천

 

1장에서 라캉의 접함 조금 신선했다. 내가 은근슬쩍 들어본 프로이트라는 존재를 여기 라캉으로 통해 존재를 더욱 각인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이어받았으나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조금 새롭게 보았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정신분석에 남성의 페니스 즉 동물적성기에 집중했다면 라캉은 팔라스 즉 남근에 집중했다.

 

프로이트적인 면은 동물적인 성적인 비유가 많다면 라캉은 오히려 문화와 역사적인 흐름으로 보기 편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서구사회는 이성중심의 남성권력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므로 모든 언어적인 형태나 사회적인 구조가 남성지배적인 흐름을 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팔라스에서 우리 인간이 태어나면서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가질 수 없음에 대한 상처로부터 언어를 배우고 언어를 배우는 것은 곧 사회적인 존재로 되는 것인듯 하다.

 

라캉의 이론은 조금 이해하기 난해하다. 물론 라캉의 이론적인 부분에서 내가 평소 많이 사용하는 인식이 많다. 그러다 아이가 어른으로 되는 과정에서 어린시절의 모습을 고찰함은 다소 뭐라고 표현하기가 그렇다. 그러나 정말 내가 공감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떄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내가 애니메이션 오타쿠 생활하면 라캉의 이론 중에서 욕망과 인정부분을 코스프레 세계에서 보는 것 같다. 과연 코스프레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만족하기 위해 하는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을 만족하기 원하는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인물들은 주로 남성 즉 사회적으로 경제적인 부를 어느 정도 소지한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보이는 피사체는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싶은 존재이고, 코스프레 하는 사람들은 그런 욕망에 대해 (자기를 내보이려는 것을) 욕망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특히나 오타쿠 6대 욕구 중에 '과시욕구'가 강하게 반영된 점과 이런 사회적 현상을 보는 것으로 이른바 사진에 잘 찍히는 것을 입어야 잘되는 코스프레라는 오류적인 사고를 담긴 한국 코스프레 오류적 부분이 보인 듯하다. 어느 코스프레이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쁘거나 잘 빠지거나 혹은 조금 노출이 입는 의상이나 도발적인 포즈가 잘 찍힌다. 결론은 이것다. 위의 붉은 글씨처럼 그들이 욕망하는 대상주체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욕망이다. 그 욕망의 근원은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이고, 이른바 훔쳐보기나 흝어보기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고, 게다가 그 사회적인 부분이 성립되려면 언어는 필수다. 언어가 단순히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만이 아니라 모든 시니피에가 담긴 시니피앙에서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언어는 하나의 권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최근 스탈당의 "적과 흑"이라는 사실주의적인 고전소설을 읽어봤는데, 이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시적으로 읽어봄으로 "적과 흑"에 대해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소설에서는 당시 성경을 라틴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소설세계만 아니라 중세유럽사회에서 성경은 자국어가 아닌 라틴어로 많이 만든 점이다.

 

그것은 종교의 힘으로 왕권을 인정받는 유럽에서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었다.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계층은 한정적이고, 게다가 국민들은 자국어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문맹인이다. 그런 문맹인들이 원전의 성경을 읽는 것은 권력에 대한 침투이다. "적과 흑"의 줠리앙은 시골 목수의 소렐가문에서 태어난 비천한 신분이나 그의 우수한 두뇌와 라틴어 실력으로 귀족세계로 들어가서 후작의 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언어라는 것은 곧 지식을 알고 지식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언어로 통해 자신의 입장과 권력을 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언어가 대부분 남성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 점에서 사회적인 현상들은 언어학적인 부분에서 설명하는 점이 많다. 기본적으로 구조주의 자체가 소쉬르의 언어학을 기반으로 했으니 더욱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2장은 데리다와 해체이론이다. 솔직히 데리다를 내가 알던 부분은 이른바 반 플라톤주의에 대한 대표자이다. 그의 서구사회의 형이상학에 대해 해체하고자 했다. 그래서 처음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나는 해체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해체만이 아니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보완, 추가, 계승 등과 같은 다양한 애기들이 있었다. 그래도 데리다의 도발적인 면은 강렬한듯 하다.

 

물론 모든 것을 해체함은 올바르지 않다. 그런데 바꾸어 볼때 사회의 어느 합리주의적인 면에서 뒤집어 보면 상당히 비합리적인 부분이 많다. 그런 점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품거나 다르게 보거나 또는 역으로 시도해보자는 의지는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해체라는 단어는 상당히 매혹적인 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가령 인종차별, 남녀차별, 지역차별이 하나의 당위성이 된 곳에서 이런 해체적인 태도가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3장은 사회과학을 제대로 연구한 미셀 푸코이다. 미셀 푸코는 본래 역사쪽인데 어떻게 하여 철학쪽으로 글이 더욱 강화되었다. 미셀 푸코의 글을 보고 사람들은 니체적인 부분이 많다고 한다. 니체는 당시 독일에 살면서 사회주의나 민주주의 사상을 거부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평등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평등하지 않을까나?

 

어째든 니체에 대한 사상적인 부분을 미셀 푸코가 많이 받았으며 그는 상당히 계보학적인 면으로 고찰한다. 그가 고찰한 것은 권력에 대한 부분이다. 권력은 언제 어디서든 존재한다. 그리고 권력과 대중에 관계 또한 현대사회의 제도가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우리는 우리의 고민이나 문제를 스스로 풀기보단 제도적인 부분에서 많이 찾는다. 사랑은 연예상담가, 심리는 정신분석가 등등 하지만 이런 부분에 너무 얽매이면 인간은 자기의 의지가 아닌 제도적인 혹은 국가체계적인 하나의 권력체계에 모든 것을 맡기어 버린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규제해 버리니 자유라는 단어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의문도 든다.

 

또한 인간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점에서 인간에게 권력을 주게 하는 것은 언어라는 것이 크다. 언어는 곧 그 사람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지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권위적 지표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선생에게 지식을 배우지 않은가? 상위 계급을 지닌 선생은 지식을 가짐으로써 학생들에게 하나의 권력성을 정당화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권력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에서 다양한 체계적인 부분에서 언어로 통해 많은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의 한마디나 혹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어느 정치가의 한 마디로 대중들의 판도가 이래저래 바뀌지 않은가? 권력은 언어의 위상으로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점이다.

 

4장은 후기구조주의의 흐름인데, 후기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운동과 많은 연계성이 있다. 이 후기구조주의는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과 인상깊다. 당시 프랑스 정권은 드골이었는데, 그의 정치권에서는 노동자의 억압, 사회적인 문제 등 다양한 담론에 대해 프랑스 노동자와 소르본대학 학생들이 모여 혁명을 일으켰다. 물론 당시 드골은 물러나지 않으나 그래도 이 사건으로 인해 세계는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음은 분명하다.

 

미국에서는 노암 촘스키와 같은 언어학자가 월남전에 대한 반대서명과 일본에서는 1969년 야스다강당사건과 같은 일들이 벌여졌다. 세계는 1차와 2차세계대전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국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아닌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자본주의 이원화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벌어진 일일 것이다. 국가정치가 외교적으로 대립되어 그 국가정치가 군사외교적으로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하여 자신들의 정권에 대해 합리적임을 주장하자 많은 문제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어지러운 20세기에 다양한 사건을 보았고, 국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세계적으로나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사회구조가 국가정부의 독재성을 보이는 것은 시대적 흐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독재성에 당위성을 주어 국민들을 통제하는 부분은 확실히 비판을 받음은 분명하다.

 

5장은 식수,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바와 같은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설명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주의이고, 대학교 인문학 계통에서 여성학이 창설되어 강의하고 있다. 그런데 페미니즘을 보면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남녀차별로 시작하여 사회 전반적인 차별문제와 복지나 사회약자문제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기울리는데 반해 한국 여성부는 그저 억지로운 모습만 보인다.

 

여기서도 그런 부분을 지적하는데 기존 사회와 문화 정치는 팔라스 즉 남근중심의 체계였다면 새로이 여성들이 급부상하면서 기존의 남근적인 부분을 여성적인 부분으로 서로 대화를 하거나 소통하기 보다는 그 남근적인 부분을 여성들이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부분에서 인정하나 그런 것들을 보면 단순히 지위와 권력만 자신에게 부여되면 평등이라는 하나의 교조적인 태도가 변모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지위과 권력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의무와 책임은 뒷전으로 물러날 경우 어긋난 사회현상이 보인다. 어째든 이 부분에서는 재미있는 해석이 보인다. 과거 오래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명작의 고전으로 남은 그리스신화이다. 여기서 엘렉트라신화와 관련하여 아가멤논 왕이 자신의 아내인 클리템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한다. 이때 아폴로가 클리템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는 것을 옳다고 했는데, 이 두 사람을 죽인 장본인은 아가멤논왕의 막내아들인 오레스테스였고, 이 오레스테스의 누나가 엘렉트라이다.

 

그런데 이 아폴로에게 이 2사람을 죽이라고 충고한 존재가 아테네 즉 전쟁의 여신이다. 아테네는 제우스 머리에서 나온 여신으로 전형적인 남성적인 여신이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페이트 나이트 스테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거기서 아서왕을 본따서 만든 캐릭터인 세이버가 이 아테네 여신과 흡사한 면이 많다. 신화 속에 등장해도 현대인들의 무의식에서 역시 그런 여성들이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6장은 리오타르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리오타르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내가 아는 문학도의 이야기로는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 나서 한번 이 편을 보니 왜 그런가라는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이 보인다. 세상에는 다양한 담론이 오가는 거대서사가 있는데, 솔직히 거대서사를 뭐라고 표현하기 힘드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끊임없이 역사를 만든다. 바로 그런 역사적인 부분이라든지 혹은 사회이론적인 부분을 거부하는 것이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애초에 거대서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반대되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나는 무조건인 부분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담론을 제공하는 거대한 존재로서 보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볼만큼 제대로 알지는 못하나 단순히 기존의 사고에만 얽매히는 것도 문제는 옳은 게 아닌가? 최근에는 나는 이런 문구를 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를 해체해야한다고, 2010년대에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이 낡아버린 사상이 될런지도 모른다.

 

7장은 보드리야르와 문화적 실천이다. 내가 처음으로 철학이라는 거대한 학문을 접한 이유는 바로 이 장 보드리야르 덕분이었다. 우연히 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논문에서 나는 장 보드리야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때 해체주의를 만든 데리다의 이름도 보았다.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접한 게 된 것도 다 2사람의 이름이다.

 

그런데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이른바 가상과 현실을 논하는 시뮬라시옹이 유명하다. 이른바 메트릭스 철학자라고 하나, 막상 본인은 자기와 메트릭스와 관련없다고 하나 어째거나 보드리야르의 이론에서 현개사회의 본질을 조금 헤쳐보인다. 그의 이론에서 시뮬라크르는 3가지로 나누었다. 이 이론을 뭐라 표현하기 그러나 1번 시뮬라크르는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와 관계 있는 듯하다. 인간에게 눈에 보이지 않은 이데아 세계가 있다. 그 세계의 형상들을 눈앞에 조각이나 미술상으로 만든다.

 

그런데 2번째 시뮬라크르는 초기 모더니티 사회에서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에 의해 붕괴되고 모더니티 사회로 가는데, 이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해졌다. 예술들은 하나의 영상으로 제작되어 영화나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영화나 사진은 사본 그 자체로 단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3번째 시뮬라크르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티 사회로 들어가면서 진정한 시뮬라시옹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통신발전과 매체의 발전은 사람들간의 전달매체 관계에서 실재 대신 가상이 차지하고 이른바 하이퍼-리얼리티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TV나 PC 옆에서 실재 일어났는지 혹은 아닌지 모르는 일들을 일어난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 정보에 의해 길들어지면 미디어에 의한 권력으로 통해 우리는 수동적인 피지배 존재로 된다.

 

얼핏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스펙타클 이론과 많이 유사하다. 어느 서적에 보면 보드리야르는 기 드보르의 이론에서 많이 가져왔다고 하기도 한다. 아마 68혁명의 덕분일까? 어째거나 마지막편은 보드리야르로서 끝맺음을 남긴다.

 

보고 느낀 것이지만 정말 어렵고 복잡하고 생각할 게 많다. 전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고 난뒤에 미셀 푸코가 니체적인 부분을 많이 계승하고 후기구조주의라는 것이 니체적인 부분이 많아 봤는데, 조금 혼돈스러워졌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 그냥 모르고 스쳐가는 편이 더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뭔가 도움이 되는 듯하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구조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그 이론적인 부분이 틀리지 않았거나 혹은 수정해야할 부분이 새롭게 보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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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암살사건
조셉 로지 감독, 리처드 버튼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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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많이 감상하지 않은 나로서 영화배우에 대해 잘은 모른다. 물론 국내 배우 이름 몇몇이나 진짜 유명한 해외배우 이름 몇몇 정도는 기억한다. 그런데 1972년 리처드 버튼과 알랑 드롱이라는 유명한 배우가 동시에 영화에 나온 줄은 몰랐다. 영화 제목은 트로츠키 암살사건이다. 제작감독은 조셉 로지로 내가 알고 있는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대신 그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영화를 제작한 점과 이번에 제작한 트로츠키 암살사건 역시 영국에 있을 때 제작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든 만큼 이번에 출연한 알랑 드롱의 경우, 그가 1960년 전후로 등장하여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남배우라는 점과 지금도 왕성히 영화감독으로 활동한 점에서 그가 30대 중후반에 들어서게 되면서 그의 연기관록이 이미 쌓은 만큼의 시기이니, 제목 그대로 트로츠키 암살사건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 영화의 묘미는 트로츠키의 죽음에서 알랑 드롱이 연기한 킬러의 역할은 매우 고뇌와 두려움 그리고 허탈한 담담히 잘 드러난다.

 

 

트로츠키, 그는 레프 내지 레온 트로츠키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조지 오웰의 문학소설인 “동물농장”이다. 소설과 더불어 영화로도 봤지만, 트로츠키라는 인물에 흥미가 가는 것은 그가 나폴레옹이라는 흉악한 돼지에 의해 무참히 정치적 숙청을 당하면서 동물농장의 미래를 불행한 폭풍우를 맞이하게 된다. 그때 나폴레옹에게 무참히 쫓겨난 스노볼이란 작은 돼지가 바로 트로츠키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을 겪은 러시아와 그것에 대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은 러시아의 무능한 차르 왕권과 봉건사회를 허물었다.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과 동시에 트로츠키는 레닌과 동시에 러시아혁명의 영웅으로 추대되고, 트로츠키는 그 탁월한 능력과 윤리적인 가치,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자질로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큰 장벽이 있었다. 그의 태생은 유태인이었다.

 

 

아무리 다 같이 무능한 봉건사회에 핍박받는 군중이라도 러시아란 나라에서는 러시아인이 있었으나, 유태인이었던 트로츠키로서는 민족의 벽에서 자신이 레닌 이후 최고 대표를 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처음부터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트로츠키의 지식인적인 요소에 많은 사람들이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이에 레닌이 지목한 6명 중에서 조셉 스탈린은 매우 난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는 군권을 조금씩 잡아가면서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트로츠키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모든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세력에서 트로츠키 주변 인물들을 배제하고, 트로츠키의 의견에 대해서는 매우 합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선동을 했다. 그게 레닌 사후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면서 어느덧 1929년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다른 국가로 추방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트로츠키라는 인물은 러시아혁명의 주요핵심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 의해 그는 그렇지 못한 자라고 하였으며, 러시아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중에서 트로츠키와 같이 활동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은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다. 무능한 차르왕권과 귀족들의 악정에 지친 국가를 프롤레타리아의 국가로 가자고 한 볼셰비키 혁명이 어느덧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것은 마치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요, 우리 전 인류에게 큰 선물로 다가온 임마누엘 칸트가 1789년 자신이 살던 옆 나라인 프랑스에서 큰 혁명이 일어나자 다른 행동을 보였다.

 

 

그가 늘 산책 가는 시간에 산책을 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혁명에 대해 긍정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다. 체계가 전복되어도 다른 체계가 기존 체계를 따라 가는 것에서 혁명이 일어나도 근본의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어떻게 생각해보면 현대의 민주자유주의에서 그 시초는 프랑스혁명이 맞다.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목이 단두대 아래 나누어지면서 봉건사회의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원인은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로 인해 농민과 노동자들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게 하나의 분노로 표출되었다. 또 다른 계급인 부르주아는 아무리 능력과 재산이 있어도 태생적인 문제로 자기의 능력을 펼칠 수 없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서로 단합하여 왕족을 무너뜨렸다. 왕족이 무너져 세상이 변할 줄 알았으나 농민과 노동자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 왕족과 귀족 자리를 부르주아가 대신하여 차지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본다면 그 근본의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체제가 변화되어도 원점이라는 점이다. 물론 칸트의 생각을 본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을 토대로 꾸준히 봉건사회에서 공화제로 가고 있었다. 단지 그 과도기적인 기간 아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역사란 항상 희생을 토대로 세우진 것일까?

 

 

어째든 그런 역사적인 변증법적인 현실을 보아도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씩 변화하는 듯하다. 그래도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런 끝없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는 만큼 그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의식 역시 끝없이 등장한다. 그런 존재가 바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사이었다. 트로츠키는 비록 자신이 러시아에서 추방되어도 저 멀리 남미 멕시코에 있어도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1964년 마르크스가 만든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의 정신을 유지하여 레닌이 세운 제3의 국제노동자협회, 국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인 코민테른을 올바로 지속하기 위해 제4의 국제노동자협회를 창설한다. 그 이유는 트로츠키가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숙청한 스탈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탈린이 소비에트 연방이란 공산주의국가가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무장한 공산주의로 전략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과 분단선에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마찰을 빚는 북한이 바로 스탈린에 의해 노동자를 이름만 내걸고 노동자를 억압하는 독재국가로 된 것처럼 말이다.

 

 

트로츠키는 11년 동안 망명생활하면서 계속 스탈린과 투쟁한다. 영화에서 보면 뭔가 집필을 하고, 연설을 하여 녹음하여 방송하며, 스탈린에게 저항한다. 그러나 스탈린에겐 강력한 무기와 병력, 그리고 권력이 있었으나, 트로츠키에겐 큰 힘이 없었다. 그는 멕시코 어느 마을에서 정원이 달린 집에서 가축을 돌보고 식물도 재배하며, 밤에는 원고를 집필한다. 그의 무장력이 얼마나 없었으면, 트로츠키를 암살하려고 하는 라몬 메르카데르이 반트로츠키파를 이용하여 그를 살해하려고 할 때 트로츠키 일원들은 무력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스탈린의 청부를 받은 그들에겐 위장경찰복과 손에는 기관소총이 들려 있었다. 운 좋게 트로츠키는 무사할 수 있었으나, 그의 충직한 부하 쉘던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스탈린에 대한 저항심과 그 저항심과 더불어 지식인으로서 의무, 그런 그를 받쳐주는 아내 나타샤만이 존재했다. 트로츠키는 고립된 인물이었다. 영화에서 프랑스에서 지원금이 들어와야 하나, 1940년 8월 트로츠키가 살해되기 전 6월에 프랑스는 나치에 의해 점령당했다.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의 광기와 그 광기 속에서 제국주의들의 욕망에 의해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식민지 국가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그런 현상에서 트로츠키의 존재는 스탈린에게 큰 혹이었다. 그의 한마디가 세계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런 트로츠키의 제거야 말로 스탈린의 최고 목적이었다. 당시 1929년에는 스탈린이 트로츠키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쉽게 죽이지 못했기에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죽는다. 라몬 메르카데르의 손에 들린 피켈이 그의 뒷머리를 가격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트로츠키는 이미 죽음을 늘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서랍에는 권총 하나가 있었으며, 스탈린이 항상 자기를 노리고 있음과 오랫동안의 망명과 저항으로 트로츠키는 병이 있었다. 밤에 일찍 잠을 들지 않고, 글을 읽고 쓰는 지식인으로서 살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백발의 노년이라도 눈빛이 항상 살아있었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인생을 본다면 끊임없는 투쟁과 혁명정신이다. 프랑스 위대한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어떻게 보자면 진정한 인간주의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이 트로츠키가 분명하나 그런 그도 폭력이라는 수단은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폭력을 부당한 폭력을 종언하기 위한 방법이었고, 스탈린과 스탈린 이전의 차르 왕권은 폭력을 지속하기 위한 폭력이었다.

 

 

그리고 그 폭력에 저항하던 그는 테러리즘이란 폭력 아래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살아서도 혹은 죽어서도 스탈린에게 저항한 이유로 노동자의 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심지어 반트로츠키파의 행동을 보면 그들 역시 노동자 내지 일반 서민인데도, 트로츠키를 노동자의 배신자로 보고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1990년 스탈린주의로 물든 소비에트 연방은 붕괴되고, 이제는 공화국으로 변모되어 폭력으로 유지되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없어졌다. 물론 본래부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폭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권력유지에 힘쓰던 사람들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체제라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더불어 트로츠키라는 인물이 다시 재조명되고, 마르크스-트로츠키주의도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00% 트로츠키를 옳다고 하지 않는다. 사실 마르크스가 1867년 자본이 나올 때 17년 정도 집필했다. 그런 이유가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 유럽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외교가 계속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회가 바뀌고 거기에 따라 수정하는 것이 말이다. 트로츠키가 말한 것은 당시에 맞은 답이나 지금은 틀린 답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를 계속 알아보는 것은 그가 그냥 그대로 멈추는 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과 이상에 대해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세계를 위해 현실을 본다는 것인가? 아니면 헤겔처럼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가? 어지러운 세계전쟁 속에서 파시스트들은 다른 국가를 짓밟고, 노동자와 농민은 계속 착취당하고 살며, 스탈린은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척, 노동자와 농민을 위하는 척하며 그들을 착취한 현실에서 누가 가장 현실적인가? 라몬 메르카데르는 자신과 같이 호흡하던 요원의 대화에서 현실적이지 못한 인물이 트로츠키라고 했다. 현실의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트로츠키가 비현실적이지 못했다는 말에 과연 당시 사람들은 이성적일까? 현실적일까? 라고 생각해보면 참 난감하다.

 

 

니체가 말했듯이 정치는 권력에 향한 의지라는 말처럼 인간의 권력이 있는 자에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나 그 권력이 향하는 곳이 과연 옳고 그릇된 것을 판단해본다면 옳지 않은 것에 가고 있고, 게다가 그것이 하나의 도덕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가 당시 살아가던 사회의 도덕에 대해 깊이 유감을 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사회의 도덕에 대한 유감은 트로츠키가 살아가는 시대나 지금 내가 살아가던 시대 역시 유감적인 일들은 계속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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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이상용 지음 / 홍시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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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허락하는 모든 것은 정말 영화에서 허락하는 것은 너무 많고도 다양해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영화라는 것이 어떻게 보자면 현실을 너무 현실처럼 보이기 위해 다루었는지 아니라면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하는지 만들었는지 약간 의문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두운 자리에서 밝은 화면에 향해 몰래 숨어 보는 관음적인 시선이므로 영화는 본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본다.

 

그런다고 그 영화가 실제 있는 사실은 아니다. 전부 아니라고 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우리 앞에서나 옆에서 바로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잘 구성된 각본과 잘 어울리는 배경과 연출이라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관찰이 아닌 관전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마치 야구장이나 축구장에 몰려든 많은 관전자들처럼 거기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영화가 하나의 관찰의 도구로 본다. 단지 모든 사람이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찰하고 싶다는 사람에 한해서이다. 이번에 읽은 이 영화가 허락하는 모든 것은 그야말로 영화에 빠진 한 영화평론가의 글처럼 그는 영화에 단순히 빠진 것이 아니라 그 영화에 빠져 들어가서 자신을 빠지게 한 것들을 손으로 잡아 올린다.

 

확실히 영화는 어는 것을 보는 가에서 차이나기 보다는 어떻게 보는가에서 차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도서에서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다양한 담론과 화제에 감독과 더불어 그 영화의 시대상에 대해 논하고 있다. 마치 영화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담고 있는 신화에 지나지 않아 이제는 그 신화되는 것에 대해 틀어보기도 하고 조롱해보기도 한다. 혹은 신화의 주인공인 영웅에게 하나의 우상보다는 하나의 평범함으로 전제하려 한다.

 

일관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일관되지 않고 격리된 시간과 공간 인간인지 아닌지의 모호함에 따라 오히려 더 우리로 하여금 격리되어 있다고 여기게 하는 장치까지 거론한다. 사실 영화가 사실적인 내용일수록 우리는 착각에 빠진다. 왜냐하면 영화는 필름에 담고 있는 하나의 복사물이지 그 자체가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실적이지 않아야 우리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하여 영화가 하나의 사실성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잊고 싶은 일들이나 잊어버린 일들을 스크린으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단지 있던 인물이 실존인지 혹은 실존인양 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공간에서는 분명 있었던 일이다. 공간은 그대로이나 사람은 그대로이지 못한 이유는 시간은 공간 그 자체는 불변으로 남겨두나 공간의 존재를 각인시켜 주는 그 공간의 존재를 위한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으면서 딱 확실히 구분하여 말할 수 없는 많은 영화들이 홍수처럼 소개되면서 그 속에는 있는 인간의 인식,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역사와 신화, 문학과 철학 속에서 말이다. 영화를 훔쳐보는 혹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대놓고 보고 있든 영화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단지 중요한 점은 우리 인간들은 행동함에 있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성 외의 무의식적인 영역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영역을 카메라의 앵글로 담아낸다.

 

그래서 영화는 인간의 자기모습을 보는 것이고, 인간 스스로의 모습에 환호와 야유를 보낸다. 그러나 만약 그 영화 속의 모습이 평소 당신과 나의 모습이라면? 영화가 허락하는 모든 것에서 당신의 이야기도 피할 수 없다. 아니라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가 자신의 일상이 아닐지언정 자신의 삶과 완전 다르다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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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 - 깨어 있는 시민이 던져야 할 7가지 질문
김병준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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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내지 국회의원 선거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관심이 모인다. 특히 이들 선거로 통한 정치적인 참여와 주장에 대한 발언은 결국 투표자 내지 지지자들에 대한 이익과 연결된다. 즉 정치라는 큰 사회적 구조에 따라 국가경제 구도가 크게 변하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 경제가 변화가 오면 국민생활에 많은 여파가 온다.

 

따라서 정치자들의 정치적 행보에 따라 많은 변수가 오는 것이 국가 경제와 사회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이 나왔다고 하자? 그렇다면 투표자와 지지자들이 원하는바 모두가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대통령들이 당선 직후에 지지도가 엄청나게 상승하는데 반해, 임기 말이 되면 지지도가 급격하게 감소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들 대통령이 정치를 못해서 사회적 경제적인 흐름을 맥을 제대로 잡아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몰아붙인다. 물론 대통령이 많은 정치적 권력을 생각하면 대통령의 능력과 선택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과연 모든 정치적 행보는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 책의 논지는 정치의 모든 선택은 국민이라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주주의에서 투표로 통해 대표로 뽑아 간접적인 정치행보라고 하여 그 투표자들이 모든 것을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묻는다.

 

오히려 국민 스스로 더욱 거기에 대하여 생각과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직접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지 않으나, 그 정책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과 매체로 통한 정보의 전달력은 결국 국민 스스로가 분위기를 만들어가거나 또는 분위기에 휘말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문제는 대부분의 현대사회에서의 언론과 매체는 대형 미디어로 통한 일방적인 정보전달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정보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오류라는 치명적인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이번에 본인이 읽은 도서인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는 그런 정치적인 상황과 여부에 대한 점을 단순히 국민이 가만히 있거나 언론에 휘둘리기 보다는 정확한 정보와 올바른 판단이 요구되는 것은 제시하는 책이다.

 

특히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 정책을 맡은 김병준 교수가 저술한 이 책은 정치학과 정책학적으로 모든 정치적인 현상이 단순히 대통령 하나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이 강조한 “깨어있는 시민”을 강조하면서 시민 계몽주의적인 그의 입장을 여기에 잘 나타내고 있다. 진보적인 대통령이면서도 신자유주의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대통령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경제성장과 분배에 대해 여기서 담론을 나누고 있다.

 

가령 페이지36을 보면 <진보주의자들은 반대할 줄만 안다. 말하자면 ‘정의롭지 못한’ 상황이 있으면 이를 반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대안이나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며 왜 추구하는지에 대한 합의도 없다. 결국 반대만 한다. 그리고 반대하는 데는 한 목소리를 내지만 집권을 하기나 대안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분열하게 되어 있다.>

 

정말 그렇다. 어떻게든 정치적인 결정으로 통한 정책실행에서 많은 반대론이 있었다. 가령 공군 출신자인 본인으로 과거 정권에 B-747 구매에 대하여 상당히 동의했다. 당시 공군장병 중의 하나라는 사실과 실제 군사작전 업무에서 대통령 의전행사나 국빈행사 관련하여 업무를 봤을 때 대통령 전용기가 B-737은 규모에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외국 순방을 다닐 경우 B-747 급의 대형항공기만 가능했다. 일반 항공기는 순항거리와 능력이 장거리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전용비행기 교체에서 반대를 하던 사람들이 지금에서 다시 하자고 했다. 대통령 전용기 B-747이 없는 문제로 국가에서 많은 예산을 일반 민간항공기 대여에 사용해야 했다. 1번 대여하는데 수십억에서 수백억이란 금액이 필요하므로 당시 공군장병 입장으로 꼭 필요한 일이 무산되었다. 물론 지금 반대한 사람이 B-747 유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으나, 그런 국가정치외교적인 업무에 대하여 생각하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정책추진에서 많은 권력적인 요소는 국회에서 나오나, 그것을 흔들 수 있는 기반은 국민들로부터이다. 국민들이 얼마나 깨어나기에 충실하냐의 따라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대통령이란 소리와 함께 신자유주의자 선봉자란 두 가지의 의미를 합하여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발생되었으며, 국가가 최대한 시장 간섭을 배제한 시장구조다.

 

하지만 좌파라는 것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 노동자의 인권과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것이다. 이 2가지의 토끼를 잡으려면 결국 한 쪽에 치우치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 정치사회에서 언제나 나오는 말은 경제위기, 빈곤층의 생계문제, 양쪽으로 분열된 경제 등은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원하던 국민에 대한 계몽주의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그 계몽이란 과거에 신화적인 요소에 젖은 사람들은 억지로 정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계몽이 또 다른 억압이란 신화를 창조하는 아이러니가 다시 발생하는 일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면 그 구성원에 따라 사회적인 변화가 바뀐다. 신자유주의적인 부분과 관련하여 현대국제사회는 모든 것이 자본주의에 의거한 경제활동에 따라 변화한다. 과거 중국과 같은 공산국가(국가자본주의이지만)도 역시 시장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은 국제적인 경제, 정치, 외교, 군사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즉, 세계변화에 따라 국내에서도 충분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그 변화에 따라 시장중심의 사회에서 소수약자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는 점이다.

 

대기업 중심과 수도권 위주의 개발정책에서 소외된 중소기업과 비수도권 내지 비정규직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시장과 계층의 분리는 결국 사회적인 왜곡 현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특히 내수시장과 관련하여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시장 활성화가 되지 않으면 사회적인 경제구조는 위기가 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결국 유리한 위치에 있는 계층과 유리하지 않은 계층의 차이를 좁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경제활동이 대기업에서 잘 되면 중소기업에 저절로 내려온다고 하나 막상 그것이 잘 되면 계층단절이라거나 서민경제의 위기는 그렇게 쉽게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페이지210의 내용은 보면 <더욱이 더 어려운 것은 제1차적인 분배의 영역에 있어서 수출을 해서 엄청나게 돈을 벌어와서 기업은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고, 대기업의 노동자들까지 엄청나게 배당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중소기업으로 흘러가지 않고 또 일반 다른 서비스산업으로도 확산되지 않는 소위 생산과 분배과정이랄까, 산업간 분배과정이랄까. 이 부분에 있어서의 단절이 어떻게 극복돼야 될 것이냐에 관해서 아직 어느 두뇌집단도, 정부를 포함한 어느 두뇌집단도 그 점에 관해서 ‘이것이다’라고 우리가 할 만한 정책 제안을 해온 곳이 없습니다. 정말 밤잠 안 자고 고심해도 거기에 대한 해답을 준 우리 한국의 두뇌집단은 없습니다.>

 

이 말은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대기업 회장과 함께 간담회에서 한 이야기다. 국가경제의 발전과 거기에 따른 시장규모 확대, 또한 분배의 증대는 전반적으로 다 같이 잘 살아가자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인정했다. 인간의 욕망은 부정하기 보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고 이것을 통해 어떻게 절충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정부의 정책, 기업의 경제구조, 시민들의 의식구조가 적절히 맞물려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국민경제는 개선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반사이익으로 혹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정치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책임전가하려고 한다. 그런다고 해서 당장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문제의 본질로부터 멀어져서 해결의 구체적인 대처기능까지 상실할지도 모른다. 결국 얼마나 제대로 알고 판단하는 몫은 결국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할이다.

 

그것이 제대로 갖추지 않은 시민들이 가득하면 죽음으로 이르는 병이라는 니체의 말처럼 정말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죽음으로 갈지도 모르겠다. 무용지식은 정말 무서운 이야기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올바른 지식은 반드시 시민들이 갖추어야 할 정치적인 의무이기도 하다.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겠지만, 99%를 위한 대통령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통령을 선택하는 유권자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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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 Unbowe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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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실제가 아닌 가상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서사매체가 가상이라고 할지어도 그것은 현실적인 요소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時, 서사)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이 있듯이 역사는 개인의 기록이나 시라는 어느 이야기 거리들은 개인의 기록보다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이야기란 점이다.

 

그러나 최근에 시라는 서사(敍事, narrative)는 가상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것도 많으나 이제는 실화를 배경으로 각색하는 픽션(fiction)이 아닌 팩션(Faction)이란 장르가 최근 많은 영화에서 보인다. 이번에 내가 감상한 부러진 화살은 바로 픽션의 세계인 영화에서 팩션이란 하나의 진실을 담은 가상적인 스토리가 펼쳐지는 영화인 것이다.

 

보통 영화라는 매체 즉 서사구조를 가진 매체에서는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진행되는 내용들은 어떤 갈등을 소재로 하여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느 누군가를 희생 내지 자신들의 정의로서 통해 적에 응징으로 이어진다.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해결로 통해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반드시 갈등의 존재와 더불어 그 갈등의 해결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번 부러진 화살에서는 갈등의 해소란 없다. 오로지 갈등의 진행형을 담고 있다. 기본적으로 서사라는 narrative는 어떤 사회나 조직에 대해 특정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이루어지는 하나의 제의와 같다. 그런데 부러진 화살에서는 갈등의 해소 대신 계속 이어짐은 이 영화에서 의미하는 주제가 지배계급과 그 사회의 종속의 당연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 당연성에 대해 반항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권력에 대한 의문이다. 이 영화의 갈등은 대학 입시문제에서 틀린 답을 출제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부당함을 내세운 김경호 교수로부터 시작된다. 김경호 교수는 시험문제가 틀렸으니 이 시험 문제에 대해 정정과 더불어 진실을 알려 올바른 교육가치관을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교 측은 자신들의 실수로 인해 교수진과 학교명예에 큰 금이 간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김교수의 진실공방은 무산된다. 문제는 김교수의 의견이 묵살이 아니라 김교수의 교수직까지 박탈당한 것이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교수직에서 임용되지 못한 채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올바른 가치관과 진실을 풀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임용이 다시 허락되는 것으로 당시 잘못된 교육현실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공방은 오히려 역으로 몰리게 된다. 그의 진실성은 어디에도 밝힐 수가 없으며, 단지 그가 정치적인 약자라는 이유로 또는 같은 편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재임용은 무산된다.

 

그런데 그 재판의 과정에서 과연 제대로 된 재판이었는가 혹은 아니었는가 라는 중대한 문제가 걸렸다. 당시 김교수의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김교수가 의문을 제기한 대학교 출신의 판사였다. 그 판사에게 모교에 대한 권력의 결탁은 학벌사회가 만연한 엘리트들의 권력 유지의 방법이었다. 물론 김교수 역시 대단한 엘리트이었으며, 상당한 수학학자였다. 그러나 김교수는 엘리트에 머물기 보다는 지식인으로 전환되어갔다.

 

자신이 지식인으로 넘어간 동기는 바로 부당한 권력 앞에서 진실이 왜곡되고, 그것마저 바로 잡으려 했지만, 권력의 결탁으로 인해 자신의 정당한 입지마저 사라진다. 김교수는 그 재판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대한민국 법치국가에 대한 불합리성과 부패함에 분노하여 자신의 소송을 기각한 판사에게 석궁을 들이댄다. 문제는 그 석궁이 발사되었느냐? 아니면 발사되지 않았느냐이다.

 

법이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강제적 제도이다. 그러나 사실 법이란 제도는 인간에게 정당한 가치관을 적용하기 보다는 인간을 감시하고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권력의 도구로 되어버렸다. 법이란 상당히 강력한 공권력과 더불어 막강한 권력을 부여한다. 정치라는 것은 권력에 대한 의지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처럼 법의 집행에서는 그 법의 집행자라는 법관에게 큰 위력을 안겨주는 것이다.

 

법은 하나의 거대한 지식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세력에게 집중된다.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언어의 권력자이고, 그 권력은 특정 세력들에게 다른 세력들에 대한 정치적인 지배행위 즉 헤게모니적인 행위로서 이어진다. 부러진 화살에서는 그런 헤게모니적인 요소가 상당히 잘 보인다. 김교수가 석궁을 쐈다고 한다면 그 감추어진 진실과 더불어 그 진실에 대한 증거, 법정에서 열리는 법적인 행위절차가 과연 올바르게 진행 되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특히나 처음 재판 이후, 두 번째 재판에서 그런 모습들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박변호사가 김교수의 변화를 맡으면서 재판과정에 보이던 법적행위 절차들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법적인 절차를 둘러보아도 이성적인 논리로서 설명이 가지 않는다. 혈흔이 뭍은 옷이 있는데, 안쪽 옷과 겉옷은 혈흔이 묻어 있는데, 왜 중간 옷에는 혈흔이 없는가? 혈흔이 있다면 과연 그것이 피고인과 같은 혈액인지 검사해야 하지 않은가 라는 합리적인 재판과정을 모두 무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무시하는 이유는 바로 피해자 즉 김교수에게 형사소송을 제기한 사람이 김교수에게 부당함 재판을 내린 같은 판사라는 이유다. 같은 권력을 가진 존재에게 법적인 행위로서 처벌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권력적인 존재인 사법부의 위엄이 흔들리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정치적인 자유와 법적인 평등은 보장받는다. 그리고 그런 제도에서 반드시 이행하는 것이 정부이며, 그것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사법부의 임무이다.

 

그러나 부러진 화살에서는 판사라는 공정해야한 존재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공정했다. 거기에 검사들의 대표로 나오는 심검사는 법적인 문제를 옳게 진행하기 보다는 오히려 판사와 검사의 권력유지라는 체계로 이어진다. 권력을 가진 두 존재가 권력을 위해 김교수를 피고인으로 몰아넣고 그를 사회적 정치적 매장으로 인해 자신들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무소불위적인 법에 대한 권력에서 대항마는 법을 아는 다른 법조인들은 즉 변호사들이다.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박변호사는 상당히 법에 대한 의무감과 진실성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신념이 강한 마음이야 말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는 언제나 술에 취해 있고 뭐든지 될 때로 되라고 하는 최악의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가 최악의 변호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학하고 책임을 물게 하는 피해의식이었다.

 

2001년 부평에서 공장노동자를 위해 그는 인권노동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위해 온 몸으로 경찰이란 권력 앞에서 대항했다. 하지만 그가 벌인 투쟁에서 같이 참여한 노동자들은 모두 심한 폭행으로 부상을 당했으나, 그는 당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자신도 같이 맞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경찰들은 변호사란 직책이란 권력에서 다른 노동자를 습격했다.

 

그는 그것이 분했던 것이다. 그 후에 인권노동변호사 운동에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되었다. 아무도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은 김교수의 변호사, 그가 드디어 맡은 것이다. 그가 맡은 이유는 단순히 김교수를 위해서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억지로 맡을지 모르나, 그가 선택한 변호사의 의무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깡패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김교수와 만날 적에 카메라의 모습을 보면 미디엄 샷 내지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통해 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처음 두 사람은 카메라 화면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다. 미디엄 샷으로 둘의 관계는 극과 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재판과 세 번째 재판과정에서 그들은 매우 가까워진다. 마지막에 다다르면 그들은 재판에서 지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패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만족했다.

 

현대사회에서도 억울한 누명과 부당한 대우에 대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권력에 대항한 것이다. 특히 오른쪽으로 카메라를 계속 돌아가는 워킹-인사이드(walking-inside) 기법으로 통해 처음에는 어긋난 두 사람이 결국은 화합을 한다. 문제는 두 사람이 화합을 했을망정 서사의 중요한 갈등인 이 사회구조라는 세계와 화합하지 못한다.

 

단지 두 사람은 투쟁만 진행할 뿐이었다. 두 번째 재판에서 어떻게든 김교수에게 유죄를 내리려 했던 이판사는 김교수의 가진 확고한 의지와 그 의지 속에서 찾아낸 법적인 근거와 진실의 증거와 증인으로 자신의 최소한의 법적 양심에게 무릎을 꿇는다. 비록 그는 권력유지를 위해 김교수에게 불리한 처우를 내리려 했으나, 김교수와 박변호사의 합리적인 변론과 더불어 주변에서 진실을 보는 대중들 앞에서 그는 부장판사직을 버린다.

 

이판사가 나와 재판을 벌일 과정에서 수많은 카메라 앵글이 그를 클로즈업 하나, 그의 얼굴은 정면보다는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이앵글에서 그의 입장이 여실히 보인다. 법을 집행하는 법관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봐야할 존재이다. 즉 재판을 여는 법정에서 재판관이 머무는 자리가 가장 위치적으로 높은 자리이다. 따라서 원고, 피고, 증인 심지어는 관람하는 방청객까지 재판관을 우러러 봐야 한다.

 

재판관이 앉아있는 자리야 말로 권력의 최고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상징을 가진 재판관이 정당한 법적 절차와 양심적인 행위를 어길 때마다, 그리고 거기에 대처하기가 어려워지는 이판사의 곤란함을 보여줄 때마다 카메라는 계속 재판관은 얼굴 위로 클로즈업한다. 그것은 곧 보통 사람이 우러러 봐야할 재판관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내려다보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이용된 것이다.

 

그런다고 재판관의 권력을 무시하지 못한 것도 나온다. 두 번째 재판과정도 그렇지만 세 번째 과정에서 나온 신판사의 경우 그의 모습은 머리 위로 비추는 클로즈업보다는 살짝 눈을 올려보는 클로즈업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하이앵글로 신판사를 내려보지만 이내 곧 다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다가 다시 올려다보게 된다. 김교수와 박변호사의 변론이 그에게 도저히 닿질 않음을 카메라로서 보여준다.

 

오히려 신판사의 눈으로 밑을 내려 보는 것이 더 권력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어깨 너머 샷으로 보는 관점에서 주로 재판관의 뒷모습에서 정면을 보는 것을 연출한다. 어깨 너머 샷은 카메라가 관찰자라기보다는 카메라의 메인이 되는 사람 즉 카메라에서 뒷모습이 나오는 사람이 보는 세상이다. 신판사라는 인물이 얼마나 권력지향적인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부러진 화살에서는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 재판에서 패배한 김교수이었고, 그는 안산교도소로 이감되나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전쟁을 예고했다. 아직까지 한국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교정세계에서는 일재의 잔재가 깔려 있고, 일제 잔재 뒤로 독재의 잔재로 이어졌다. 폭력과 권위로서 모든 죄수를 다루는 공간에서 김교수는 재소자에게 부당한 행위를 강조하는 두 교도관의 이름  세 글자를 메모한다.

 

그리고 영상화면이 끝난 후에 검은 글씨 뒤로 그는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도 법정공방으로 투쟁한다고 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김교수의 안산교도소의 수감으로 통한 것이나, 그것은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부합되지 않은 결말이며, 다시 결말을 보기 위해서는 그에게 주어진 갈등과 고민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부차적으로 이 작품에서는 많은 사회적인 문제와 더불어 교도소의 암울한 현실을 말해준다. 그가 처음 수감될 때 옆에 있던 수감자들이 와서 김교수에게 법적자문을 받는 것을 보여준다. 범죄를 저질러도 부당하게 법적처벌을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김교수는 자신이 스스로 배운 법적 지식을 이용하여 다른 수감자의 억울함을 해소한다. 이에 반면에 김교수는 상당한 감옥소의 폭행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판사가 그만두고 신판사가 교체될 쯤에 판사들은 김교수를 법적인 제도에서 그를 잡으려 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조건에서 잡으려 한다. 교도소에서 독방으로 혼자 공부하던 김교수를 다른 수감자와 같이 생활하도록 하는데, 문제는 그 수감자 한 명이 상당히 비정상적인 사고를 지진 인물이란 점이다. 그는 김교수가 오자말자 폭력과 협박으로 김교수를 괴롭히고, 남자밖에 없는 교도소에서 남자가 남자를 성폭행하는 변태행위까지 저지른다.

 

물론 변호사와 가족들의 면회로 통해 그 문제는 해결되나, 은근히 그런 수감자 옆에 붙이게 하여 김교수를 지치게 하는 법의 치사한 방법들은 권력의 압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도 김교수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지식인이란 사실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자신의 의지였다. 세 번째 재판과정에서 김교수는 멀리서 유학 가서 귀국한 아들을 만나 수갑이 채워진 채로 아들의 두 손을 마주 잡는다.

 

그의 수갑은 범죄자가 찬 수갑은 분명하나, 그 수갑은 억압받은 자신의 현실에서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세계에서는 공정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부여받은 하나의 시련으로 보여준다. 김교수는 미래를 위해 굴복하지 않았으나, 그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것은 원칙과 공평함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수학학자에게 논리라는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 즉 정답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이 오답이란 확고한 흑백논리를 가진다.

 

그러나 김교수가 가진 흑백논리가 오히려 더 우리가 가져야할 논리로서 다가온다. 그 흑백논리는 정말 공정하고 과학적인 논리로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논한 논리는 윤리 없이는 논리가 성립되면 안되는 것처럼 김교수 역시 그의 논리는 양심을 지키기 위한 윤리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을 준 세상은 윤리를 가진 논리가 아니라 이익을 가진 논리였다.

 

즉 기회주의적이고, 집단이기주의적인 사회모습에서 그는 싸운 것이다. 어쩌면 부러진 화살은 화살이 부러지고, 그 화살이 발견되지 않아 증거인멸로 인해 김교수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살이 부러진 것은 화살 그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양심이 부러진 것이라는 것을 런닝타임 100분 동안 계속 관객에게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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