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건달 (1disc)
조진규 감독, 박신양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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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전형적인 한국의 저급한 3류틱한 조폭영화라는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3류 이상의 재미있는 요소와 학술적인 요소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문제는 결론적인 서사구조에서 보이는 점은 역시 3류는 그렇고 2류에 머물고 2류 중에서도 약간 떨어지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보이는 중요한 요소는 분명 있다. 그것은 건달이 하고 있는 박수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서 고전이나 혹은 주요한 전통문화를 찾아가면 무속신앙에 대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巫라는 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神壇樹(신단수)라는 것에서 신단에 해당되는 나무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박달나무는 檀이란 단자이고, 한국의 최초 국가라는 고조선을 건립한 단군의 단자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그래서 한국의 최초의 왕은 무당이라는 뜻이다. 무당의 의미에서 현대에는 그저 미신에 불과하나 미신의 세계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이유는 그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신앙 내지 문화에서 우리민족의 자화상 내지 존재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0세기 위대한 사상가이자 인류학자인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로 알려져 분으로 그의 저서인 <슬픈열대>와 더불어 명작인 <야생의 사고>를 읽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야만인을 대하는 어리석은 문명의 야만을 반성해야 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야만인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 문명인들은 알 수 없는 미스테리 내지 혹은 미신 내지 미개한 문화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적 조건과 더불어 오랫동안 살아온 문화의 소산이다.

 

오히려 야생의 사고라고 여기는 부분에서 문명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도리어 미개인들이 훨씬 웃돌고 있을 수 있다. 린네가 발견한 식물분류법보다 더 세분화된 지식으로 알아보는 원주민들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원주민에서 문명의 식물학자와 원주민 중에서 누가 식물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으로 원주민들의 에믹의 요소보단 에틱으로 대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문화유물론적인 요소에서도 물질이 문화를 구성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연적, 지리적, 기후적인 요소로서 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박수건달이란 영화로 돌아보면 한국의 문화적, 자연적, 지리적 특성에 대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을 맡은 박신양 씨는 작품에서 조폭건달로 나온다. 그런 그가 무병에 걸려 무당이 되는 것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부산의 어느 어촌마을의 어항을 이전하여 그 자리에 큰 건물을 세울 계획을 세운다. 지금도 부산의 어항에 가면 마을주민들이 모여 용왕제를 열고 한다. 용왕제에 무당을 부르고 어민과 마을주민이 모여 한데 어울려 술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민중문화에서 굿이란 하나의 문화는 공동체적인 문화형성과 더불어 집단의 공동체 정신을 재확인 후에 더 견고하게 다지는 계기라는 것이다.

 

굿이란 것과 혹은 제사를 지낸 이유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무속신앙에서 기본적인 원리는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이다. 위로를 하는 대상이 죽은 자에 대한 위로가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인 것이다. 제사문화에서 한국의 정신이란 바로 공동체적인 정신이다. 그런다고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아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그 소수의 부족과 씨족 혹은 마을주민이 어울리는 작은 공동체로 이루기 때문이다. 박수건달에서 무당이란 자는 결국 그런 의식행사를 진행하고 만들어주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이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은 제사장과 더불어 임금이란 군장을 맡는다. 그가 왕으로서 제정일치를 추구한 것은 왕권이 결국 주종관계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는 오이디푸스(거세공포와 더불어 죽은 아버지 죽음에 대한 위로와 슬픔, 살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적인 부자관계로서 국가와 부족을 이끈다. 기본적으로 한국이란 농경문화를 가진 민족이었고, 어민이라고 해도 100% 물고기를 잡지만은 않았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가축도 기른다. 농경문화의 자급자족인 생활요소가 결국 공동체의식을 키운 것이다.

 

놀이라는 문화가 노동이 수반되기에 특히 농민과 더불어 어민도 민요를 부르며 고기를 낚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기계의 발달로 좋은 장비로 물고기를 잡는다고 해도, 결국 여러 사람들이 많은 배를 동원하여 집단으로 고기를 낚는 방법도 존재하고, 바다에 나가면 풍랑과 재해로 사고를 당할 수 있으므로 서로간의 연락망을 항시 유지하고, 그것을 위해 친분을 유지한다. 그래서 용왕제 굿판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좋은 볼거리라는 점이다. 작중에서 박신양 씨도 박수건달이 되어 최종적인 위기 전편이 굿판의 모험이다.

 

오이가 위에 떨어지는 바로 두 동강이 나는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무당역에서 위기에 봉착하나, 무당의 신기로 그 위기를 모면한다. 현대과학기술로도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것이 칼 위에서의 무당의 춤이다. 본래 무당이란 용어에서 샤먼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샤먼은 미친듯이 춤을 추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초자아적인 세계에 보이는 현실공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무당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을망정, 그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무속인은 2가지로 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하여 누군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심정이 있다. 그런 무의식적인 불안과 고민이 무당의 존재를 탄생하게 한다.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혼의 존재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기적의 이야기는 신화와 설화로서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당의 문제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그런 욕망의 대변인이란 점에서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또한 개인 대 개인으로서 보자면 어느 개인에 대하여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해주는 존재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우리 현대인이나 과거에 살던 사람이나 정신적 불안을 영원히 떨친 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문명이 시작된 이래 말이다. 그러나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처럼 중세시대 유럽시대에 광인들이 나오면 그들을 분리하거나 제거하거나 혹은 가두지 않았다. 그들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억압이나 혹은 표현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정신병원이 생긴 이래로 그런 자들은 더 이상 거리를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광인 중에서 물이 어는 추운 날에도 덥다는 말을 하고 속옷만 입는 자도 있다.

 

인간이 가진 육체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을 모두 무시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무당 역시 현대에서 보면 그저 굿만 하고, 점만 치는 사람으로 떨어진 셈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에서 진정 무당의 존재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건달이고, 무당 남성은 박수라고 하기에 박수건달이란 작명은 분명 어울린다. 박신양 씨가 하는 행동을 보면 죽은 자가 빙의하여 살아있는 자를 만나게 한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살아있는 자가 안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억압되어 그것이 하나의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갇혀있는 말을 표출하게 하거나 혹은 과잉행동을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마음의 병이 있는 인물들은 박신양 씨의 이야기에 모두 울고 통곡을 한다. 하지만 박수건달인 박신양 씨도 같이 울고 통곡을 한다. 무당이란 자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가는 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은 무의식적 공간에 깊숙하게 들어가 공유하는 자라는 것이다. 박수건달에서 보이는 한국인의 恨이란 것으로 통해 원래는 무속문화가 인간을 넓리 이롭게 하는 단군신앙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시작되나, 현실은 그저 자기만족에 취하려는 고객과 더불어 그것을 이용하는 상술이 존재하는 게 대부분이다.

 

구복신앙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 무속신앙의 한계점이고, 지금은 기독교, 불교, 수많은 종교들이 대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천주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란 존재로 통해 넓리 사랑을 전파하는 박애사상이나, 혹은 불교의 부처님이 자비로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박애정신에서 종교의 시작과 교리 및 기타 문화적 조건을 달라도 철학적 베이스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급격하게 신격화 된다. 보살과 부처를 모신 무당의 집에 기독교 신자가 예수님도 영원하다고 하여 그 무당은 예수님의 조각상을 보살과 부처님과 같이 모셨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보살과 부처 이전에 무속신앙은 도교신앙과 결합하여 장군상과 신선, 동자상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은 자신(들)만이 가지는 불안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인에게 간다. 그리고 진짜 무속인을 만나면 그들은 울고웃고, 그저그런 무속인을 만나면 웃거나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올 것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진짜 무당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어항을 개발하려고 조폭을 투입하여 이전하고, 그러기 위해 굿을 했다는 점은 폭력조직이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힘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래서 <박수건달>은 한국의 무속에 대해 재밌게 다른 점은 높게 인정하나, 그 전개가 한계라는 점이다.

 

집필시간 :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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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톰 후퍼 감독, 휴 잭맨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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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프랑스혁명의 상징성에서 보여주는 어두운 현실과 더불어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프랑스혁명을 찾아보면 총 5번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프랑스혁명은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 함락과 더불어 앙시앵레짐(구체제)의 해체를 만든 프랑스대혁명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혁명은 더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일어난 것이 1830년, 이후가 1848년, 잔혹하고 안타까운 1871년 파리꼬뮌, 이후로 1968년 5월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사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사상과 20세기의 사상은 조금 차이가 있다. 18세기와 19세기 혁명의 정신적 지주는 장 자크 루소였다면, 20세기의 프랑스혁명은 카를 마르크스였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 역시 장 자크 루소의 승계자라고 보는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의 발견자>처럼 장 자크 루소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기여와 더불어 프랑스라는 나라 그 존재성마저 기여한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영화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에서 프랑스의 상징인 3가지 색이 블루, 화이트, 레드이다.

 

그것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공화국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프랑스공화국의 그 시초를 이룬 것은 역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이다. 이것을 읽지 않고 프랑스를 말하는 것조차가 어려울 수 있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삶의 철학까지 인간 그 자체로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추구하기 위해 투쟁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그런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대한 투철한 반사의식이 보인다.

 

영화라는 2시간 조금 넘는 런닝타임에서 충분히 만끽할 수 없으나, 장발장이 감옥에 투옥되어 힘들게 살아온 것에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미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불평등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있다. 선천적인 것은 인종과 성별이란 생물학적 요소로 볼 수 있으나, 후천적인 요소는 사회적 지위, 경제적 여건 그리고 정치적 입장이다. 구체제에서 저술한 <인간불평등기원론> 그리고 이후에 나온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무척 위험한 도서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상에서 지금도 루소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루소가 물어보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 비참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 제목에서 레미제라블에서 레란 res라는 것으로 다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미제라블은 비참하다는 말이다. 레미제라블은 다시 비참해진다는 의미이다. 비참한 역사적 되풀이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릐메르 18일>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역사는 2번 되풀이 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으로(소극으로), 희극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나, 루이 16세를 단두대 아래에서 하나를 이슬로 만들었던 프랑스가 다시 왕정군주제로 변모했다.

 

당초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하고, 국민공회를 설치하여 세계민주주의역사에서 큰 획을 긋은 자코뱅당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잠시 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의 죽음 이후 테르미도르당의 부패한 정치행위와 무능함은 결국 프랑스를 힘들게 만들었고,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루소에 대해 경배했거만, 추후에는 루소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레미제라블에서 황제가 있는 프랑스는 결국 나폴레옹이 집권시절이다.

 

그러나 주인공 장발장이 갇힌 것은 영화배경이 되는 1815년에서 19년 전에 잡힌 1796년이란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빵 하나를 훔친 것이 큰 죄가 된 것처럼 여전히 프랑스의 하층민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의 영웅에서 당통, 로베스피에르, 마라가 있으나, 결국 혁명의 원인은 대의를 가진 마리우스 같은 인물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빈곤한 농민과 피지배계층의 불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분노였다. 장발장이 가진 것은 처음에 오로지 분노였으나, 어느 성당의 신부님의 구원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훌륭한 도시의 시장이었고, 탁원한 공장의 운영자였다. 만약 신부님의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계속 어두운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프랑스혁명 시기나 혹은 장 자크 루소의 관련 서적을 봐도 프랑스 성직자의 부패와 비리는 여전했다는 점이다. 신의 운명에 점찍어 모든 것을 정하는 방식이란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신의 은총을 내린 것은 장발장과 코제트, 마리우스라는 일부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든 소설이나 주인공 위주 서사는 결국 주인공만을 보게 되는 한계점에서 주변 인물의 운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한계성이 있다. 그래도 영화는 충실하게 그 비참한 서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일반적인 대사보다 오페라 내지 뮤지컬적인 요소로 통해 감정의 기복을 더욱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에서 그런 진지한 요소는 처음에 장발장이 노예로서 죄수생활을 할 때 24601번으로 가석방 나오는 모습이다.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에게 깃발을 들고 오라고 한다. 깃발은 프랑스의 삼색기, 마지막에 장발장이 죽고 나서 그의 꿈은 역시 삼색기가 흔들리는 광장이다.

 

자유, 평등, 박애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릐메르 18일>처럼 공화국의 상징은 보평, 포병, 기병에 의해 무참히 밟힌다. 그래도 붉은 색의 깃발은 잊을 수가 없다. 검고 어두운 불운한 현실에서 붉은 색의 희망을 찾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붉은 색이란 영화 중간에 혁명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들의 붉은 눈물처럼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나무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들은 총과 칼을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가? 혁명의 기본적 문제에서 장발장과 코제트의 어머니 판틴처럼 그들은 현실이 아닌 미래를 잡아가길 원한 것이다.

 

장발장은 자기의 어린 조카가 굶주려서 빵을 훔쳤으나, 결국 수감되고, 조카는 굶주림과 병으로 죽게 된다. 그리고 판틴은 어린 코제트를 살리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고 몸을 팔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 그리고 비참한 인생의 종말은 죽음이었다. 희망이란 단어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에게 박애정신만큼 위대한 정신이 없다. 자유와 평등이 존재에서는 개인적인 부분에서 존재할 수 있으나, 프랑스혁명을 이끈 로베스피에르가 군중에게 외친 것처럼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가 있어야지 자신의 자유가 계속 누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자유란 결국 박애정신이 되는 것이다. 마리우스 친구가 그렇게 죽어갔으나 삼색기와 더불어 붉은 색의 깃발을 흔든 것은 박애정신이다. 그 박애정신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냉혹한 자베르 경감마저 경의로서 자신의 훈장을 어린 소년에게 바친다. 그 소년의 모습이 동서출판사에 나온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서적표지와 어울리지 않은가?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틀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결국 1830년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혁명 이후 사라지는 별들이었으나, 위대한 민중들의 의지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레미제라블은 소설이므로 배경은 1832년으로 되어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바리케이트 너머라는 웅장한 노래처럼 그 너머를 향해 죽음이란 것을 택한 이들의 절대적 신념에 그저 가슴이 쓰릴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 친구들은 모두 죽으나, 마리우스가 장발장에 의해 구출되고, 후에 코제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문제는 마리우스는 귀족의 집안이란 점에서 프랑스혁명가로서 마리우스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저 남자인 마리우스만 성공한다. 영화에서 혁명은 실패해도 사랑은 성공했다는 스토리라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판틴이 죽어가는 장발장을 데리고 나오는 모습에서 장발장의 영혼은 사랑에 대한 노래에서 혁명을 일으킨 민중들의 노래와 합류한다.

 

어찌보면 지금은 구체제에 순응할 수 없는 코제트(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와 마리우스이나, 언제가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이것을 모두에게 전해주는 박애정신이 넘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후 제일 비참한 1871년 파리꼬뮌에서는 당시 몇 만명이 넘는 파리시민이 싸우다 전사하고, 포로로 잡혀도 살해당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3세는 결국 파리시민을 무참하게도 배반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잔혹하고 급박했을까? 13~14세 소년소녀들이 총과 대포를 나르고, 팔이 하나 없어져도 저항하는 모습이 나온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 코제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슬픈 이야기다.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게 아니라 죄를 계속 만들 수밖에 없는 비참한 환경을 말이다. 자베르 경감은 법을 무조건 지키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역사의 뿌리인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3가지 체계에서 입법, 행정, 사법에서 입법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오로지 잘못된 법을 바꾸는 것은 입법에서 가능하고, 민주주의는 입법에서 시작하는 점에서 말이다. 입법에서 잘못된 관례나 법규를 바꾸고 새로운 제도는 정비하는 것은 법이란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국가의 법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한 것은 법이란 결국 힘이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밖에 되지 않는 점이다. 자베르에게 자비를 베푼 장발장에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나, 그것의 기반은 박애정신이다. 자베르 경감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만의 정의라는 법이 결국 박애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베르가 장발장에게 이길 수 없었던 것은 처음 자베르경감이 장발장을 그저 죄인으로 보았을 뿐이었으나, 장발장이 누구보다 더 박애정신이 넘치는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죄인으로 보자니 그에게 받은 자비는 자신의 양심을 찌르고, 그를 인정하자니 자베르경감은 자신의 존재적 의미에서 모순을 겪는다. 2명이 존재할 수 없다면 1명은 물러나야 한다. 결국 자베르경감은 자신의 도덕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신이 주는 정의가 법인 자베르경감, 신이 주는 정의는 결국 사랑이란 장발장에서 현실은 자베르경감에 가까우나,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은 장발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쉽지 않다. 낭만주의 문학인 점에서 낭만주의란 목숨을 걸고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로 위험한 일들이 주인공에게 펼쳐진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계속 되풀이 되는 소극이 된다. 물론 소극에서 당하는 자들은 비극이나 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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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만화의 세계 살림지식총서 120
박인하 지음 / 살림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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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가 논문을 정식 논문을 적어본 일을 생각하면 3번인 것 같았다. 첫 번째는 대학교 학부시절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것이 아니라 학과 자체적으로 실시한 세미나 발표를 위한 논문이었고, 두 번째 논문은 대학원 석사학위를 받기 위한 논문이었다. 출신대학과 전공이 공과대학인 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논문의 주제가 다르더라도 기본적인 성향과 맥락은 서로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부터는 다른 논문으로 되었다. 그 논문은 공학석사와 전혀 무관한 논문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2011년 작업한 이 논문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중점으로 연구하고, 국내 각종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행사가 있을 경우 주관하고 운영하는 학회에 제출했다.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아마 학회 중에서 사람들에게 상당히 낯설고 신기한 학회가 아닌가 싶다. 가끔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로 통해 보면 만화애니메이션학과가 있는 대학이나 고등학교가 있는 것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인지하는 반면, 학회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는다. 물론 그 대부분 사람들이란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프레 등 한국에서 하위문화를 즐기는 부류다. 사실 이런 하위문화에 대한 연구가 1990년대부터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국내 대학에서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과가 있다는 점에서 대중은 물론, 하위문화를 즐기는 사람들도 낯설어 한다.

 

그나마 최근에 TV에도 문화콘텐츠사업의 일환으로 국내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인터넷에서도 마케팅전략으로서 웹툰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사용되기도 한다. 아마 그런 시대적 성향에서 가장 많이 개선한 것은 웹툰이 아닌가 싶다. 만화책이란 하나의 도서보단 인터넷으로 언제라도 볼 수 있는 편리성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아니라면 웹툰이 일정기간에 작가가 인터넷 매체업체와 계약을 하여 작품을 올린 경우 수익을 얻는 점에서, 웹툰을 보는 독자나 인터넷 이용자들은 무료로 본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웹툰의 그런 특성 때문에 만화의 친화성이 강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것은 웹툰의 성향을 고려하면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 주제를 만들 수 있어도 우리나라 문화적 여건을 고려하면 다양한 작품이 나오더라도 다양한 장르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작품흐름 즉 Cliche적 요소가 매우 강한 점이다. 물론 문학과 영화 심지어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도 Cliche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Cliche 요소만 강조하는 것도 작품을 다양성을 떨어지게 만든다.

 

다양한 장르와 작품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재와 주제가 필요한 점이다. 같은 연애물이라도 판타지나 전쟁, 정치, 사회적 문제 접근을 동시에 노릴 수도 있고, 학원물이라도 연애나 판타지 같은 것에 같이 만들어가기 보단 조금 더 순수하게 학원물로서 만들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작품 내에 보이는 성향이 결국 대중의 입맛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나, 작품이 대중의 입맛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경우 기존 작품과 다른 세계와 가치관으로 통해 제3세대 애니메이션 세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런 장르의 분류에서 내가 맨 처음에 제기한 논문 세 번째가 조금 생각난다. 당시 내가 제출한 논문은 최근 2010년 이후에 발매된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 국내 애니메이션 수용자가 선호하는 특성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인터넷 카페에 최근 나온 애니메이션 몇 가지를 올려놓고 투표를 하여 어느 작품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작품은 특성은 무엇이고, 작품의 장르도 조사하는 내용이었다. 이때 선호도에 대한 연구이기에 장르의 분류화에서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방영하는 사이트 내지 네이버 지식인에서 장르의 분류를 결정한 점에서 논문심사결과는 만족하지 못했다.

 

4명의 심사위원 중에서 3명이 부동의이고, 1명은 부분 동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읽은 <장르만화의 세계>를 읽어본 후에 조금 인용하여 작성했다면 약간 결과는 다르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2013년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컴퍼런스 주제로서 장르 만화에 대한 발표가 있었는데, 발표하던 교수님의 파워포인트 강연과 그 주제에 대한 안내책자를 읽어보면서 박인하 교수님의 <장르만화의 세계>가 상당히 많이 인용된 것을 최근에 알았다. 만화의 장르를 나누고 결정하는 점에서 하나의 세분화를 만드는 것은 작가로서는 조금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으나, 만화의 장르를 조금 세분화 하는 점은 만화라는 것이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란 점이다.

 

가령 일본 만화책에서 닥터 노구치의 경우 일본 의사 노구치의 일생을 다룬 전기물이면서도 한편 의사라는 직업으로 통해 살아가는 노구치를 의학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는 초밥을 다루거나 음식을 다룬 작품이나, 보통 일반 대중들이 알 수 없는 전문분야를 작가가 작품 내의 주인공으로서 부드럽게 풀어가면서 이야기의 재미와 주제를 알리는 방법도 있다. 장르 만화의 효과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점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우리가 알기 어려운 부분이나 흥미로운 부분을 만화나 애니메이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 전에 내가 영화비평문으로 적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인 <이브의 시간>에서 이브라는 가게에 들어오는 로봇이 마치 인간처럼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 로봇에게는 인간과 같은 생명이 없으나, 그래도 로봇이기에 국가적으로 법률을 적용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로봇 법률”, 이 법의 조항에서 제1조는 “로봇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태어났다.”, 13조는 “로봇은 인간을 죽이거나 해쳐서는 안 된다”이다.

 

사실 <이브의 시간>에서도 로봇으로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온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로봇이 억지로 프로그램이 작성되어 실행하는 것보단 로봇 자체적인 판단과 감정으로서 실행하는 모습이 나온다. 주변에 존재하는 제도나 사물, 문화적인 조건도 장르만화에 차용될 수 있고, 그것이 하나의 작품의 진행에서 큰 전환점으로 될 수도 있다. 장르만화의 창작은 이야기 흥미를 유발시키면 무궁무진하게 진행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영화에서도 콘티가 필요하여 만화를 그릴 때가 있는데, 만화로 나온 그 작품 자체가 콘티가 될 수 있다.

 

장르만화는 단순히 만화로 머무는 게 아니라 허영만 화백의 <아스팔트 사나이> 내지 <식객>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 <아스팔트 사나이>는 레이스를 소재로 하였기 때문에 일반대중을 생각했을 때 조금 낯선 세계이고, <식객>의 경우 요리 자체가 인간 식생활과 연결되어 있으나, 요리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소재거리는 우리가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특히 <타짜>와 같은 도박의 경우, 우리 일상생활에서 노출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든 점에서 흥미와 재미를 유발한다.

 

만화가 만화 안에서가 아니라 만화와 다른 매체나 문화의 접목은 만화가 가진 허구적 성향에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부여할 수 있다. 가령 <노다메 칸타빌레>과 같은 경우 클래식을 소재로, <신의 물방울>은 포도주를 소재로 했기에 작품의 이야기와 전개는 허구일지 몰라도 그 클래식 음악이나 포도주 자체는 실존하는 것을 차용했기에 키치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고, 또한 mania 세계에서 본다면 만화가 낯선 사람이라도 흥미를 유발하기가 좋다. 이전에 방영된 <이니셜 D>라는 만화책에서 나온 하치로쿠(86)라는 차량이 다시 자동차 회사에서 재생산되어 발매되는 점을 보면 장르만화가 판타지뿐만 아니라 현실적 요소를 잘 적용하여 일반 대중과의 교류나 정보제공에 큰 도움이 되는 점이다.

 

국내 만화책에 대해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중고등학생 위주의 청소년 내지 젊은 계층이 많이 찾는 점에서 학원물이 절대적으로 많이 나온다. 게다가 만화를 넘어 라이트노벨 시장이 일본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라이트노벨 작가들이 나오는 점을 고려하면 장르만화는 만화책으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라이트노벨 시장까지 넘어보며, 만화와 라이트노벨을 각색하여 만든 애니메이션까지 염두를 두어야 한다.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의 박기수 교수님의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에서 강하게 지적한 것처럼 국내 만화애니메이션의 흥행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서사다. 서사의 탄탄한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으로서 가져야할 소재와 이야기 거리이다. 그런 점에서 장르만화는 국내에서 불황인 만화시장에서 조금 고려해야할 사항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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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학개론
권경민 지음 / 북코리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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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라는 것은 그저 사람들에겐 재미로 보는 시간 때우기 용으로 생각하기 쉽다. 만화라는 것은 다른 매체에 비해 정보전달하는 요건이 매우 수월하면 게다가 구매하기 쉬운 콘텐츠 중에 하나이다. 누구나 눈을 가지고 있으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며, 누구나 글만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재빠르게 이야기의 흐름을 단번에 파악한다. 다른 정보매체와 다르게 만화라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같이 대하기가 좋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앞서 지나간 샷이나 시퀀스를 그대로 보내야 한다. 만약 복선의 배치가 깔려 있을 경우 그 상황을 다시 재정리하기 위해서 시간을 역행하여 과거로 돌아가야 하나, 자신의 집에 DVD로 시청하지 않으면 많이 어렵다.

 

왜냐하면 다중영상매체는 실시간으로 방영 내지 상영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다시 시간을 역행하기란 어렵다. 또 다시 한 번 봐야하거나 재방송을 기다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에 반해 만화는 문학처럼 시간적인 흐름을 되돌릴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전체 만화책 100페이지 중에서 현재 보는 곳이 90페이지일 경우를 생각하자. 보통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위기-결정-결말이란 단계에서 90페이지가 있는 90% 정도를 보면 항상 최고의 위기상태인 절정에 이른다. 이때 등장하는 갈등의 주체나 정체에 대한 정보력이 부족하거나 상황적 전개가 다소 이해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른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

 

시간적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만화이다. 물론 실존적으로 우리 인간의 시간은 역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만화라는 세계는 시간의 역행이 가능하고, 다중영상매체처럼 움직임 내지 소멸의 미학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게다가 만화는 이미지를 내포하기 때문에 시간적 흐름과 동시에 공간적 요소도 가지고 있다. 만화 중에서 단 1장의 그림으로 풍자나 세상을 비판하는 만평 같은 만화는 공간적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우리가 글로 쓰거나 말로 하는 것보다 만평에서 나오는 그림 내지 혹은 4컷에서 나오는 시사카툰이 오히려 더 강렬한 비판과 재미를 준다.

 

만화라는 것이 어렵지 않으므로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하기에 가벼운 소재가 된 것 같이 보인다. 사실 생각해보면 만화도 일반적인 서양화 내지 동양화를 비롯한 회화예술 요소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사실 미술실에서 데생하는데 필요한 연필이나 만화를 그리기 위해 사용하는 연필은 별도로 만들어진 것보다 오히려 그 연필 자체로 이용하고 있다. 물론 전문 만화작가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이나 전문예술가가 사용하는 미술도구들에서 조금 차이점이 보일지도 모르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도구를 이용하고 있다. 그리기 위한 방법에서 만화는 회화예술에서 사용하는 기법이나 연출들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장르나 예술에서 가지고 있는 요소를 과감히 차용한다.

 

지난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학술적인 요건이 강화된 컴퍼런스 주제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토대로 만든 장르만화 세계에서 Beck이란 작품이 여러 가지 장르 중에서 하나로 소개된 바가 있었다. 이미지라는 세계로 이루어진 만화에 소리라는 절대적 시간적 흐름이 반영될 수 있는가? 라는 의미에서 장르만화라도 음악이 가진 특성을 만화에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컴퍼런스 발표에서 나온 주제 중에 작은 단락에도 나왔다.

 

사실 만화라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에서 이미 만화로 만들어진 이상 하나의 허상을 이루는 존재다. 그러나 그 허상에서 만화는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하나의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다. 달리는 자전거와 자동차에서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선으로 묘사하고, 선의 배치로 통해 강렬함을 전달한다. 표현주의적 미학을 가지고 있기에 만화라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 전달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그런 만화를 두고 우리는 그저 보고 있다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까? 이미 프랑스에서 만화라는 것은 제9의 예술이란 정식명칭을 부여받고 있다. 대중들이 쉽게 접하는 문화생활에서 영화는 제7의 예술이다. 그 이전의 건축이나 클래식음악, 무용 등과 같은 여러 예술에 대해 대중들의 기호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고, 대중들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다른 예술에 비해 어렵지 않은데도 대우를 받으나 만화는 그러지 못하다. 게다가 영화라고 해도 장르나 분류를 보면 예술성을 강조한 영화도 있으며, 특히 아방가르드, 인디 장르 등도 역시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

 

삐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라는 서적처럼 대중들은 문화와 예술로 통해 하나의 구별 점을 만들어내고, 그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부분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 만화라는 존재가 정말 유치하거나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별 짓기>라는 책제목처럼 편력된 성향이 결국 정립시킨 문화적 상황이다. 2013년 여름에 극장가에서 개봉된 <설국열차>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실사 영화로 제작된(물론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이 상당히 들어가나) 이 작품은 원작은 프랑스 예술만화였다.

 

만화라면 유치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던 한국의 문화정체성에서 <설국열차> 영화의 흥행은 만화 <설국열차>의 관심도가 증가했으며,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는 <설국열차>를 그리고 제작한 프랑스 만화작가와 한국 영화감독 봉준호 씨가 나오기도 했다. <설국열차>가 아니더라도 웹툰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웹툰 소재가 광고나 드라마형식을 만들기도 했다. 혹은 하나의 만화책으로 이루어진 <식객> 역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만화에서 보이는 다양한 소재나 재미 등이 영화와 드라마로서 콘텐츠 요소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더 이상 만화라는 것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위치에 머무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만화와 웹툰작품이 흥행하고, 때에 따라서는 다른 콘텐츠로 제작된다고 해고 그것은 일시적인 요소다. 중요한 것은 이런 요소를 어떻게 더 개발하여 발전시키어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하여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대중적으로 접근과 동시에 어떻게 하면 만화라는 것도 예술적 가치가 높고 다양한 담론이 가능한 세계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가이다.

 

결국 만화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고, 어떻게 다시 봐야 하는지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남서울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 권경민 교수가 집필한 <만화학 개론>은 그런 흐름에서 만화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책일 것이다. 국내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도서에서 만화보다는 애니메이션 쪽에 더 많은 도서가 있는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 관련 도서는 영상학이나 영화학 전공자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으며, 국내에도 영화학 관련도서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영화학 도서에서도 애니메이션 한 장르나 소재로서 소개된다. 하지만 그 정보를 제공해주는 질적, 양적인 부분은 많이 부족한 현실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애니메이터 내지 만화가들이 만든 책이 절실한 부분이고, 설사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만화가와 애니메이터 입장에서 만든 다소 한계점이 존재한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 자체를 잘 풀어갈 수 있어도, 관점의 차이 내지 담론적인 요소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다. 국내 만화와 애니메이션 개론이나 이론에 대한 도서를 보면 관련 분야에 종사하거나 전문교육을 받는 사람에게 적당할지 모르나, 일반적으로 초심자 내지 혹은 교양으로서 접근하는 사람에게 소개해줄만한 도서는 어려운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내 입장을 생각해보면 프랑스 구조주의, 구조주의 이전의 소쉬르의 언어학(기호학),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등을 알게 된 동기는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한 도서를 보면서였다. 사실 만화라는 것이 이미지라고 해도 하나의 그림체로서 기호이며, 기표로 통해 기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부여된 점이다. 서사의 진행에 따라 이미지 표상과 흐름에서 전달되는 이데올로기의 분석은 쉽지 않다. 정확하게 정리하면 그렇게 분석하기 위해 독자로 하여금 배경적인 지식과 학문적 요건을 쌓기가 어렵다.

 

쌓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런 세계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지시키게 하고, 그것이 간단히 무엇인지 정보로 제공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가령 대중들이 흔히 무슨 뜻인지 모르고 남발하는 “스펙타클하다.” 내지 영화나 광고포스터에서 나오는 “초강력한 스펙타클한 전개” 등에서 스펙타클이란 단어가 어디서부터인가에 생각해보면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는 것은 쉽지가 않다. 최소한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가 되는 사회”라는 의미처럼 주요 핵심을 간추려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그냥 보고 간단한 것이나 알고 보면 생각이상으로 어려우며, 다른 학문과 많은 연계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만화를 만화로서만 대하는 것으로 만화를 이해하기가 부적당하다. 만화의 연출이나 묘사방법에서도 몽타주나 미장센, 시퀸스와 같은 영화용어를 적용할 수 있다. 특히 화면 안에 이원적인 것을 동시에 넣어 상황의 극대화 내지 갈등의 증폭 역시 좋은 방법이다. 물론 <만화학개론> 책 1권을 읽고 만화전문가 내지 만화비평가, 만화작가로 될 수는 없다. 이 책은 개론도서이지 전문적인 요소를 더 들어간 서적은 아니다. 하지만 만화라는 것이 무궁무진한 작품을 가진 세계이고, 무궁무진하게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세계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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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에반게리온: Q (30p 화보집) - 디지팩 + 화보집 + 아웃박스
안노 히데아키 감독, 하야시바라 메구미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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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다. 위대한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만들고 그것을 비극 시로 만든 것은 소포클레스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을 보면 마치 이번 이카리 신지의 앞에서 나타나게 된다. 독일 사회경제학자 마르크스가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에 대하여 “역사적 사건은 반복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난다.”는 말을 남긴다. 그 의미는 바로 신지가 저지른 그 비극의 씨앗이 이미 한 번은 비극으로 나타났는데, 한 번은 희극으로 끝이 난다로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를 보면서 내가 판단한 내용은 ‘You Can (not) Advance’라는 명제에서 신지가 과연 성장했는가? 혹은 하지 않았는가? 라는 변증법적인 질문이다. 이와 반대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에서는 ‘You are (not) alone’에서 결국 신지의 결말은 alone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Advance로 보였으나 그것이 결국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You Can not Advance’라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바로 신지에 의한 서드 임펙트의 시행이다.

  

 

미사토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레이가 사도에게 잡혀먹어 중간에서 고민하던 신지에게 자신의 길을 가라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신지에 대한 경멸의 눈빛을 감추지 못해 증오가 표출된 정도이다. 그것은 미사토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까지 신지와 레이, 그리고 초호기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이다. 신지에게 초호기를 비롯하여 에바에 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에바 자체가 신지의 어머니인 유이의 몸과 영혼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에바와 달리 유일하게 초호기만 조종석이 LCL 용액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에바 시리즈는 LCL용액이 아니라 뇌파와 에바하고 연결하여 신경조직을 연결한다. 즉 <신세기 에반게리온>부터 시작하여 <신극장판 에반게리온>까지 사이버펑크 장르 유효성은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신지가 서드 임팩트의 원인과 결과이다. 신지와 초호기의 비밀을 아는 자는 이카리 사령관, 후유츠키 부사령관 그리고 리츠코 박사일 것이다. 그러나 서드 임팩트가 일어난 후 14년이 지나자 리츠코는 이카리 사령관을 떠나 Wille의 미사토와 합류한다. 즉, 리츠코 박사는 초호기와 신지의 비밀을 알았다고 해도 이카리 사령관이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없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에서도 나오는 장면이고, 먼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온 장면 중에서 레이가 영호기 테스트 중에 폭주를 일으키는 소동에서 리츠코 박사는 이카리 사령관이 레이를 소중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질투감을 느끼는 부분이 나온다. 심지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자기 어머니인 레이코에 대한 질투심과 그것에 대한 모방심리 내지 보복심리로서 이카리 사령관과 리츠코는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런 리츠코가 미사토의 Wille에 갔다는 사실은 기존의 에반게리온에 대한 관념을 모두 흔드는 것과 같다. 

 

신지가 우선 에바 초호기를 타고 레이를 구하는 순간 서드 임팩트로 이어지는 것은 결국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고,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이카리 사령관과 후유츠키 부사령관이었다. 신지가 신으로 가는 것에서 레이라는 존재가 왜 나타나는가? 라는 의문에서 바로 고대 그리스 위대인 시인인 호메로스와 그리고 위대한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신화를 되돌릴 수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에게 버림받고, 추후 다른 나라의 왕의 양자로 들어가 신탁에서 아버지를 죽인다고 듣기에 자신을 양자로 받아주던 나라에서 떠난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느 남자들과 시비가 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남자들의 일행 모두 때려죽인다. 그런 후에 테베이란 나라에서 심한 재앙에 걸렸는데, 몸은 사자 머리는 인간인 스핑크스가 인간을 괴롭혀서 만약 스핑크스의 재앙을 막는 자에게 테베의 왕과 더불어 이오카스테라는 미모의 여왕과 결혼해준다는 엄청난 조건이 따랐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 스핑크스를 처단하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놓는다. 게다가 지혜롭고 용감한 오이디푸스는 덕까지 겸비하여 정치적으로 매우 우수한 왕이었다.

 

 

어느 날 테베이란 국가가 자꾸 재앙이 걸리고, 흉년까지 겹치어 백성들이 몹시 고통을 받았는데, 이때 신탁을 받은 결과 어느 누군가가 천륜을 어기어 신이 노여움을 샀다고 한다. 만약 그 천륜을 어긴 자로 하여금 죗값을 받지 않으면 그 저주는 영원히 이어지게 되어 추후 테베이란 왕국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오이디푸스 왕은 그 저주의 원인을 찾다가 그 원흉이 바로 자신이란 사실을 안다.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일행은 아버지 라이오스와 호위병이고, 여왕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였다.

 

 

이것이 탄로 나자 여왕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칼로 찔러 맹인이 되다가 영웅 테세우스의 인도 아래 숨을 거둔다. 하지만 저주는 남아 오이디푸스의 아들 2명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죽고, 그 여동생인 안티고네 역시 오빠의 시체를 장을 치르려다 죽게 된다. 신지의 죄는 바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윤리인 근친상간이란 죄를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문명에는 자연적인 흐름을 거슬려 그것을 파괴하는 것에서 문화는 시작된다. 자연의 존재를 문화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 문명을 만든 주체적 에너지다.

 

 

그런데 그 노동이란 것은 현재 국가경제체계처럼 자본주의체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농경사회라도 존재했다. 농경사회는 중앙집권화를 이룬 왕권을 중시한 구체제적인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임금과 아버지는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임금과 아버지의 옆에 있는 어머니 내지 여왕을 노리는 것은 무서운 죄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신지가 저지른 죄가 바로 근친상간의 시도라는 점이다. 아야나미 레이가 어머니의 분신조차 몰랐으나, 그래도 2사람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이끌린다. 신지의 초호기 탑승도 그러하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도 이카리 사령관이 다른 인간들은 에바초호기에 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LCL이란 용액이 어머니의 양수라는 점에서 신지는 에바 초호기가 곧 어머니의 자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에바의 에너지원은 물론 코어의 핵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을 무한대로 이끌어내는 것은 에바와 조종사와의 싱크로 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에바 초호기 S2기관을 가진 이유는 에바초호기와의 싱크로가 400%이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도 필요 이상의 싱크로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생존본능 내지 투쟁본능과 같은 무의식적인 기질이 결국 에바초호기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지가 에바초호기와 높은 싱크로를 보여주어도 그것은 자궁 안에 있는 아들일 뿐이지 레이처럼 물리적인 육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신지가 레이에게 손을 뻗어 직접적인 성적 행위가 없더라도 여성의 육체를 지닌 어머니의 클론인 레이를 원했다는 것이다. 레이와 신지가 비로소 손을 잡아 하나가 되려는 순간 카오루가 보낸 롱기누스의 창에 의해 서드 임팩트가 불완전하게 끝이 난다.하지만 적어도 중요한 점은 신지가 하던 것은 인간이 문명사회에 의해 진행되어온 근친상간 발상을 무의식적으로 시도한 것과 인간의 욕망이 신화로서 구전되어도 그 신화적인 욕망을 하나의 사실로 만드는 순간, 신화는 현실의 터부에서 벗어나는 계율을 파괴한 것이다.

 

 

그래서 신지는 꿈의 세계에서 인정되는 신화를 현실에서 실재로 반영하려는 것이 곧 신화의 파괴, 질서의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그 질서의 파괴로 인해 기존 세계관은 파괴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오이디푸스왕과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관계가 결국 테베의 붕괴로 이어지려 했다. 신지의 그런 행위가 결국 14년 후에 깨어날 때 미사토를 비롯한 전 NERV 요원들에게 증오와 분노를 산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미사토가 신지에 대해 증오를 하더라도 그 증오가 반드시 신지를 세상에서 말살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애증이 담긴 눈빛이었다. 신지의 목에 폭탄을 달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는데, 미사토는 새로운 복제 레이가 조종하는 “아담스의 그릇”에게 구출당한 신지를 그대로 보낸다.

 

 

일부러 멀리까지 가는 것을 보고 스위치를 눌러 굳이 신지를 죽일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신지에게 에바에 타지 말라고 권고한다. 미사토가 신지와 대립적인 관계인 NERV로 간다고 해서 미사토 자체가 신지에 대한 절대적 적대감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들은 아스카로 통해 알 수 있다. 아스카는 신지를 처음 우주에서 만날 때 “빠가 신지!”라고 한다. 정말 적이라고 여겼다면 그런 호칭을 아스카가 사용할 이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적 사건에서 서드 임팩트는 비극으로 끝났으나 포스 임팩트는 희극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변증법적인 논리다.

 

 

카오루의 역할에서 만약 그가 희생이란 극적플롯이 없었다면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의 개별적 역사적 사건에서 비극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만약 되풀이 된다면 그것은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End of Eva>에서의 나오코 박사와 리츠코 박사의 최후처럼 될 뿐이다. 나오코 박사는 어린 레이를 교살한 죄책감에 자살하고, 리츠코는 레이에게 질투심을 느껴 이카리 사령관 앞에서 NERV 본부를 자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카리 사령관에게 살해당한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리츠코는 미사토와 같이 있음으로서 어머니와 같은 비극으로 피한다.

 

 

말 그대로 한 번의 비극이 두 번의 비극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작품에서 조금 특이한 점에서 인류보완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조금 나중에 다룰 부분이나, 인류가 리린이 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게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선 유이는 인간이 진화하여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점에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예고편에 나오는 수많은 에바들은 결국 서드 임팩트로 통해 인류가 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진화하지 않은 것이 바로 리린이 아닐까 한다. 본래의 릴리스의 주변을 보면 수많은 에바의 유해가 있다. 그것은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일부만 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서 리린의 왕은 이카리 사령관으로 나온다. 그가 한 것은 신의 죽음이다. 본래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기존 관념의 틀을 깨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해체주의 미학으로서 당초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의 어머니와 초호기에 대한 비밀을 풀어간 것은 미사토가 추적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알게 했다면, 이번에는 후유츠키 사령관이 직접 신지에게 설명하여 그 비밀을 폭로한 것이다. 곧 작품의 진행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알게 만들어 작품 내에서 주인공에게 비밀이어야 하는 것이 이미 비밀이 아니게 만든 점이다.

 

 

그런 역할을 후유츠키가 맡고, 그것을 하게 한 것은 이카리 사령관의 인격의 불안정이다. 이카리 사령관은 신지가 NERV에 오고 난 뒤로 모든 시나리오를 관여하고 유도한다. 심지어 신지의 탈출과 더불어 카오루의 죽음까지 말이다. 카오루를 죽이게 금 유도하고, 그 카오루의 동일한 존재인 사도까지 죽이게 유도한다. 네메시스의 등장과 분더의 출동, 롱기누스 창과 더불어 한 짝의 창을 같이 뽑아야 하나, 알고 보니 롱기누스의 창만 2개만 있었다. 덕분에 신지는 그것이 어느 창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임을 부정하기 위해 혼자 뽑는 순간 카오루는 제1사도에서 제13사도 되어버린다.

  

이때 기존 작품과 다른 점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A에서는 인류보완계획에 대해 죽음의 욕망이 아닌 삶의 욕망인 에로스적인 요소를 조금 가미하여 신지가 지금의 세상이 다소 힘들어도 그래도 살만하다고 여기고, <End of Eva>에서는 모든 진화의 최종단계는 타나토스, 즉 죽음의 욕망으로 본다. 제레의 욕망은 바로 타나토스적인 죽음의 욕망이다. 하지만 이카리 사령관은 제레와 같은 시나리오를 가지기보단 유이가 가진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후유츠키와 같이 행동을 한다.

 

 

이미 죽은 유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자연의 모든 섭리, 혹은 그 섭리가 신이란 관념적 존재로 만들었다면 이카리 사령관은 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도구가 바로 에바 시리즈다. 에바로 통해 인간을 진화하고 신을 넘어볼 수 있는 위협성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신을 죽이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신을 죽인 남자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신을 정말 죽인 것이 아니라 신이란 존재를 인간의 신화적 욕망에 의해 탄생했기에 그 인간이 가진 관념을 바꾸는 것이다. 리린의 왕이란 것에서 모든 권력적 힘이 이카리 사령관에게 있고, 그의 책략을 모두를 기만하고 속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른바 프로파간다라고 하여 군중심리나 유도로서 이카리 사령관은 자신만의 신화를 위해 모든 인물을 하나의 도구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희생되는 제물은 당연히 자신의 아들인 신지이다. 서드 임팩트와 더불어 포스 임팩트를 일으킬 수 있는 인간은 신지만 가능했다. 신화적 욕망에 의해 제물로 바치면 제의적 구조에 의해 신화는 은폐로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신의 모습을 따라한 에바가 계속 나온다는 것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은 별도의 세계관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주제는 ‘You Can (Not) Redo’이다. 이미 한 번의 비극을 겪은 신지가 다시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 결론은 다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제시될 뿐이다. 작품을 감사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신지의 손에 들린 워크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선 단지 타인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기에 귀를 닫아주는 도구에 불과한 워크맨이 계속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주요한 아이템으로 나온다. 그것은 아버지 이카리 사령관과 아들인 신지를 유일하게 이어주는 도구다.

 

 

신지가 벌을 받은 이유와 죄를 지은 이유는 단순히 그가 오이디푸스왕이 저지른 신화에서 이름을 따온 오이디푸스콤플렉스만이 아니라, 레이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와 다름없다는 점과 같다. 신지가 왜 초호기와 싱크로가 0.00%인 이유는 바로 신지는 어머니를 따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권위에 따른 것이다. 마음속 깊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실생활에선 서로 꺼리는 모습이 나오나, 그 워크맨은 바로 이카리 사령관이 젊은 시절에 자주 사용한 물건이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신지에게 전해준 아버지의 물건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오로지 워크맨으로 이어지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아야나미 레이가 워크맨을 잡고 신지와 결합하려한 점에서 신지가 아버지와 비슷한 인간이 되어 감을 보여주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도 역시 워크맨은 나온다. 워크맨을 잡던 신지는 수리 이후 계속 이용하나 에바13호기 파괴 이후 그 워크맨을 버리고 가는 장면이 나오고, 그 모습을 복제 레이가 본다. 아마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으나 레이가 그 워크맨을 줍는 것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레이는 완벽한 인형으로 나오나, 마지막에는 그 인형적 모습에서 탈피한다.

 

 

NERV 본부와 교신이 되지 않아 명령체계를 따르지 못하고, 그런다고 생존적인 조건에서 아스카와 신지하고 같이 활동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전개에서 가장 활약상이 뛰어난 인물은 미사토와 아스카다. 초반에 신지는 주인공의 역할보단 그저 보조에 불과하고, 전체 1/3에선 미사토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런 후에 신지가 탈출하여 2/3은 카오루와 관계, 최후 1/3은 NERV와 Wille의 전투로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기존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와 파>는 신지가 주인공으로 되어 신지를 바라보는 작품인물이 미사토였다면, 이번에는 미사토가 신지에게 바라보고 있음으로 나온다. 

 

그 외적으로 캐릭터를 보면 아스카의 설정이 돋보인다. 고양이귀를 상징하는 빵모자와 모자 앞면에 2개의 버튼이 달려있다. 하나는 해골무늬에 한쪽 눈을 가리는데, 그것은 자신의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 가지의 색이다. Blue, Red, White 이것은 분명 프랑스 국기를 의미한다. 실제로 그런 비슷한 문양을 프랑스에서 사용하고, 특히 1789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에서 프랑스시민이 모두 달고 다닌 마크와 유사하다. 딱히 프랑스대혁명과 아스카에게 프랑스 국기의 의미인 자유-Blue, 평등-White, 박애-Red의 요소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나, 캐릭터에 대한 아이템은 기호학적으로 의미가 있음은 분명하다.

 

 

영상연출에서 돋보이는 것은 우선 초반의 우주에서의 신지와 초호기의 수거이다. 로켓엔진이 분사하는 모습은 여전히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처럼 매우 세심한 작업이 보인다는 점과 마치 실제 우주에서 물체가 유영하는 듯한 연출을 보이려 했다는 점이다. 기억이 또 남는 장면은 신지가 심리적 불안에 의해 괴로워하는 점에서 신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어지럽게 화상이 떨리는 부분과 신지를 중심으로 카메라의 회전으로 왼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walking-outside라고 하며,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그남자와 그여자의 사정>에서 사용한 방법이다.

 

 

또 다른 기법으로 서로 다른 화면이 겹치고 겹치게 보이는 프로몽타주 기법이다. 이것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오고, TVA 25~26회에서 신지의 얼굴에서 다른 영상이 계속 이래저래 바뀌는 모습이 나오는 점에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통해 이미지의 연출효과는 좋아졌으나 그 근본적 연출이나 혹은 시나리오에서 보이는 작품세계관은 기존 가이낙스로부터 크게 탈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든 생명의 진화는 멸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은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새로운 생명이 존재하려면 기존의 모든 생명은 멸망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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