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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1985
정지영 감독, 이경영 외 출연 / 루커스엔터 / 2013년 5월
평점 :
1. 영화리뷰 시작전에
본 영화인 <남영동 1985>를 리뷰하기 전에 나는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발췌한 몇가지 문구들을 나열하였다. 왜 그렇게 했는가에서 고문과 고문으로 통해 보여지는 인간의 모습과 그 인간이 살아가던 사회의 현상들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그런 점을 위해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제10장 '빗자루와 악마의 연회', 제11장 '대 마녀광란'이다. 마녀사냥과 그리고 메카시즘이란 이른바 공안정국의 빨갱이 사냥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에서 다음의 문구들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던 민족과 국가를 떠나 공시적으로 통용되는 폭력과 공포의 도구화다.
(1) 그 당시 마녀광 비평가인 요한 매토이스 메이파라트는 고문실에서 본 다음과 같은 광경들을 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서술하고 있다. 나는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손발, 머리통에서 나온 눈알들, 다리에서 떨어져 나온 발목들, 관절에서 뒤틀린 힘줄, 몸통에서 뒤틀린 견갑골, 부풀린 동맥, 밀려진 정맥, 천정까지 끌어올려졌다가 바닥으로 동댕이질 쳐지고 빙글빙글 회전시키고 머리를 거꾸로 하여 공중에 매달리는 희생자들을 보았다. 나는 고문자들이 피의자들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회초리로 두들기고, '스크루'로 손가락을 찌부러뜨리고, 무거운 물건을 몸에 묶어 공중에 매달고, 굵은 밧줄로 꽁꽁 묶고, 유황으로 지지고, 뜨거운 기름을 온 몸에 바르고, 불로 그을리는 모양들을 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인간의 육체가 얼마만큼 폭행당할 수 있는가를 목격한 대로 묘사하면서 이에 대한 개탄해 마지않는다.
(2) '고백서'와 관련된 불행한 것은 그 고백서들이 대개는 마녀 피의자들을 고문하여 받아진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마녀들이 악마와 계약을 맺고 하늘을 날아 악마의 연회에 참석했다고 고백하기까지 고문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또 악마의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처음 자백한 것을 번복하려 하면 그 자백을 재확인하기까지 더욱 악랄한 고문을 당하겠느냐. 대부분의 피의자들은 화형을 선택했다.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회개한 마녀들은, 그 대가로 장작더미에 불이 붙기 전에 교살당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
(3) 그 추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자백할 때, 수사관은 그녀에게 말했다. "만약 지금까지 자백한 것들을 부인할 의사가 있으면 지금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내가 더 유익하게 하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법정에서 그 사실을 부인한다면, 당신은 다시 내 손아귀로 돌아와 이제까지보다 더 지독한 꼴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돌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다." 마르가레타가 법정에 끌려갔을 때는 그녀의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손에는 포승이 묶여져 피가 배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그녀의 옆에는 간수와 수사관이 서 있고 그 뒤에는 경비대가 무장을 하고 서 있다. 자백서가 낭독되면, 수사관은 그 자백서를 추인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묻는다.
(4) "나는 악마의 연회에서 자네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 하지만 고문을 덜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네. 마침 그때 자네의 얼굴이 떠올랐네. 이곳에 끌려오는 길에 자네를 보지 않았었나? 그때 자넨 내가 마녀일리 없다고 말했었지? 용서하게. 그러나 또 다시 고문을 받게 되면 자네의 이름을 또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거네." 그 노파는 다시 고문대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첫 진술을 다시 확인했었다. 그 희생자들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 악마의 연회에 참석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믿었다 하더라도 이런 고문 행위가 없었다면, 그 마법광란 속에 그토록 많은 희생자들이 어떻게 생겨났을지 이해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5) 마법광란은 모든 저항할 수 있는 잠재에너지를 분산시켰다. 마법광란은 가난한자와 무산자들의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서로간이 사회적 거리감을 조장시키며, 서로 의심하게 하고, 이웃끼리 서로 싸우게 하며, 모든 사람들을 소외되게 했고,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불신을 고조시켰고,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했으며, 단순한 지역적인 문제에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고 좌절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법광란은 부의 재분배와 사회계급 타파를 요구하고 교회제도와 사회제도에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가난한 자들로부터 박탈하였다. 마녀광란은 과격한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거꾸로 바꾸어놓은 것이었다. 마법광란은 사회 특권층의 마법적 총탄이었다. 바로 이것이 마녀광란의 감추어진 비밀이었다.
2. 고문의 시작과 서사의 시작
지나친 고문과 그 고통으로 인해 어느 한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점들은 대상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잔인한 말로를 보여준다. 물론 영화리뷰 함에서는 스토리와 인물, 그리고 카메라 샷과 샷의 전환 및 촬영기법에 대해 조금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영상과 소리가 아무리 효과를 탁월하게 하더라도, 그것은 그 작품의 서사를 돋보이기 위한 것이고, 서사라는 것은 결국 그 내용에서 의미하는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달이다. 영화는 흔히 정치로서의 도구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도구가 되는 영화는 솔직히 말하여 아름답지 못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언제나 진실보다는 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 쉽게 잘 넘어간다.
특히 영화는 환상으로 가득한 가상의 현실이다. 현실과 가상이 뒤바뀌어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것 즉 시뮬라크르(simulacre)인 것이다. 그런 가상의 이미지가 단절이 아닌 끊임없이 재생산과 재생산, 그리고 전혀 무관한 의미로 작용하여 어느 것들이 진실로 옳은지 알 수 없다. 진실은 하나이나, 사실은 다수다. 그 사실에 대한 허구는 그 사실의 수보다 더 많은 수를 가지고 있다. 사실에 대해 만드는 것은 구성하기 나름이다. 그 방법이 문학적 재능인지 아니면 육체의 폭력으로 통해 이루어진 재능인지는 선택자의 의해 만들었으나, 적어도 타인에 대한 공격에서는 2가지 다 매우 거칠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전자가 무서울지도 모른다. 육체의 폭력은 항상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상처나 멍과 같은 외관적 흔적, 혹은 각종 신경질환이나 내장손상과 같은 내재적 흔적들로 말이다.
3. 파시즘과 인간
순수하게 정신적인 속임수는 고통조차 받아들일 수 없기에 더 잔혹하다.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국 나는 인식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실존적 가치를 저하시킨다. 아니 더 잔인한 것은 그 인식의 대상이 눈앞에 있어도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점이다. 인식하지 않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로서 그 대상은 존엄성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본다는 사실은 정말 끔찍한 것이다. 예전에 나치 수용소 중에서 아우슈비치 수용소가 상당히 유명하다. 거기 소장으로 임명된 아이히만은 매우 끔찍한 홀로코스트, 즉 학살의 악마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막상 그의 재판소에 갈 때 그는 평범한 남성에 어떤 악의도 없이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관료주의체계의 인물이었다. 오히려 악의와 감정을 담아 상대방을 폭력과 억압을 행하는 사디즘의 포효가 아름다울지 모른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은 곧 미움과 동시 애정이란 아이러니한 감정이 오고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영동 1985>에서는 이런 감정을 담은 폭력과 감정이 없는 폭력의 차이를 보여준다. 차라리 개인의 감정이 담긴 폭력은 상대방이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도구로서 보이는 폭력 마치 라디오를 바라보며 전기공이 테스트를 하는 고문은 더 잔혹하고 끔찍하다.
4. 감독과 카메라
이런 상황을 정지영 감독은 카메라앵글로서 놓치지 않는다. 대담한 클로즈업과 그보다 더 대담한 익스트림 클로즈업, 지나친 고통과 비참한 상황은 발가락의 떨림으로 제스처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보통 영화들처럼 인간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보다는 인간이 욕망하지 않고 싶은 것을 욕망하게 한다. 환상의 영웅을 내세우기보단 비참한 희생자를 내세운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폭력과 고문, 그리고 고독과 절망을 보여준다.
따스한 햇살도 허락하지 않은 차갑고 어두운 방에 불려온 김종태의 시선에 보인 백열등의 전구는 마치 대낮에 태양을 보는 듯한 괴리감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인 김종태의 슬픔, 증오, 분노, 아픔, 절망과 거기에 보상되어진 자신의 현 모습에서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자막과 한쪽 눈에 비춘 고문증언자들의 모습에서 이 영화의 런닝 타임 106분은 마무리 되어 <남영동 1985>의 서사는 끝이 났으나, 그 서사의 끝은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다.
5. 이성의 시대 도래
그리고 그 서사의 주인공은 언제나 관객이다. <부러진 화살>에서도 서사의 결말이 항상 결말 같지 않은 요소를 이번에도 강조한 것이 <남영동 1985>다. 그 강조는 오히려 <부러진 화살>보다 <남영동 1985>에 가깝다. 전자는 법정권력 아래에 대한 의구심이라면, 후자는 우리 사회에 가진 전반적인 역사와 사회 그리고 인권에 대한 의구심이다. 헌법이란 것은 인간이 가지야 할 최소한의 권리, 즉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최소한의 보장이다. 그 헌법이 유린되었고, 그 헌법이 지향해야할 세계인권정신이 묻어지고, 폭력의 하나의 미로 숭배되는 점에서 그 사회는 파시즘의 날개를 피운 것이다. 파시즘은 대중들에 대한 통제와 더불어 권력의 유지가 되는 수단을 이어진다. 나치의 괴벨스가 왜 선동적인 구호로서 대중들을 폭력적으로 만들었을까?
위 지문과 생각하여 말해보자.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은 15~17세기 유럽이었다. 당시 17세기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즉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관념적인 사고였다. 그렇다면 생각을 한다는 이성적 행위에서 인간의 존재성은 바로 자신이 정상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이나, 과연 그 판단이란 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비판하는 이성을 가정할 교조주의로서 볼 것인가? 17세기에 마녀사냥이 성행했고, 죄 없는 자들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마녀가 아닌데도 마녀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김종태는 고문에 의해 아닌 사실을 말해야 했다. 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인상 깊다. 100% 재현성이 아니나, 내용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김선생, 나는 당신이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소, 나는 당신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 그 사실을 말하기를 원하는 것이오."
6. 폭력의 미학
결국 사실이 아닌 거짓이 사실로 되어버린 것이다. 김종태가 실제로 있었던 공간과 거기서 행한 시간적 존재와 달리 다른 시간과 공간을 구성하도록 했다. 문제는 그것이 분명 잘못된 사실임에도 불구하도 거짓자백을 위해 잔인한 고문을 행한 것이다. 복도 옆으로 항상 들리는 남자와 여자의 비명들, 그리고 그 비명이 마치 일상 속에서 들리는 소음처럼 무덤덤한 관료주의자들까지 비정상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아주 침착하게 대응하고 분석적으로 움직이는 장의사의 행동은 소름이 끼치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의 혼을 가져갈 정도다. 그가 가진 죽음의 손길을 대사처럼 "나는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나가 6개월 만에 죽거나 혹은 3개월 만에 죽일 수 있어."는 마치 고문이 하나의 기술이고, 자신의 미를 관철하는 예술인 것처럼 말한다. 폭력이 미적 가치로 올라가는 것은 파시스트들의 특징이다. 이 영화는 결국 파시즘이란 폭력의 정치가 이루어진 시대를 다루었기에 그의 고문은 결국 예술로 된 것이다.
그가 처음 독불장군 김종태를 고문하면서 옆에 있던 수사관들이 모두 놀라며 심지어 박수까지 친다. 박수가 나온다는 것은 결국 장의사의 고문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폭력에도 미학은 존재하는 것인가? 다시 17세기 유럽으로 가보자. 그 시대에는 그토록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든 마녀사냥이 끝날 생각도 없이 오히려 더 가속화되었다. 마녀사냥 제물대에 항상 희생될 마녀가 필요했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서 소녀와 부인, 할머니와 장정, 이제는 남녀노소 가릴 것도 없이 말이다. 그들의 몸에서 튀어나온 인간의 신체조직들에서 고문가들은 무엇을 느꼈는가? 이 가여운 자들이 인간으로 보였는가? 아니면 진짜 마녀로 보였을까? 마녀가 아님은 알면서도 마녀가 만들어야 하는 그 사명감은 재정이 부족한 왕궁과 교회의 창고에 먼지조차 들어오지 못할 기회였다.
7. 가려진 가해자
그들은 마녀로 몰린 자들의 재산은 모두 국고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재정도 채우고, 국민들도 공포정치로 통제하고, 1석2조의 효과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보이는 그 효과는 마녀사냥의 마녀처럼 권력기구의 정당성을 부여할 빨갱이가 필요했다. 고문자들도 김종태나 다른 인물이 빨갱이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도 빨갱이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결국 그들이 바라는 진급이란 관료체계의 목적과 자신이 가진 자리에 대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보상된다. 이 영화는 그런 그들의 욕망을 현실화하기 위한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즉 욕망의 성과는 고문의 잔혹성으로 등가 된다. 단지 고문에서 장의사의 예술성은 그들의 욕망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욕망까지 채워 주기 때문이다.
욕망의 충족에서 억압과 해방 그리고 폭력으로 감추어진 하나의 신화가 탄생한다. 신화(神話)의 탄생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부여한다. 우리 모두가 되고 싶은 화려한 환상의 신화인가? 아니면 우리가 모두 거부하는 희생의 욕망인가? 이 영화의 종말에선 그 신화는 김종태에서 장의사 이두한까지 손을 뻗친다. 이두한은 분명 1985년도에 아주 우수한 고문기술자였으나, 정권교체 후에 그는 범죄자가 되어야 했고, 수배 중에 구속 후에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러나 정작 장의사와 장의사를 부른 자, 그리고 장의사와 함께한 자들의 모습만 비추고 그들의 뒤에서 뒷손 쥐고 숨어있는 자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결코 나오지 않는다.
8. 등장하지 않은 인물
왜냐하면 괴물과 같은 고문기술자는 있어도 왜 고문기술자가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존재에 대한 동기유발성에서 또 다른 추리가 시작된다. 장의사는 남영동이 아니라 다른 곳인 지방까지 순회를 할 정도로 바쁜 고문기술자다. 그가 간곳의 반사회적 낙인이 찍힌 자는 누구나 굴복을 한다. 그래서 폭력의 미학이 되었던 당시 시대에 이두한의 모태인 이근안은 고문이 예술인 것이다. 나 역시 그의 고문은 예술이라고 본다. 예술이라고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테스크 적으로 괴상하고 섬뜩하며 인간에 즐거움이 아닌 오히려 즐겁지 아니함을 주는 것이어야 말로 예술이 된다.
부정하고 싶은 것을 부정하면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부정이 되는 그 괴상하고 비틀림이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대한 사유를 품게 하는 것이다. 저것은 아름답지 못하고 추하고 비틀렸기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가? 행복한 환상 속에는 무엇을 바꿀 의지는 없다. 현실과 환상 그리고 비현실적 상황은 누구나 비정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남영동 1985>는 단순히 고문당하는 김종태만을 피해자로 몰아넣지 않는다. 그의 고문을 위해 집에도 못가고 며칠째 같이 있는 수사관들, 그리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이계장의 모습에선 작품에서 보여주는 피해자의 영역은 점차 넓어진다.
9. 장의사의 미학
작품 중간에 김종태가 겉으로 승복한 척하나 다시 한 번 번복할 때 장의사는 그가 끝까지 저항하려고 했기보다는 장의사가 이때까지 쌓아온 관록을 부정해서였다. 단순히 반국가적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미학을 망쳤기 때문이다. 그 분노로 장의사는 마치 김종태를 개처럼 여긴다. 허리띠를 풀어 개목걸이로 걸고 옷까지 다 벗겨 마치 개가 걸어가게 했으며, 음식을 내어 국과 밥을 발로 섞게 하여 먹으라고 한다. 이런 비인간적 행위를 하던 장의사는 김종태를 개취급하기 소총을 가지고 와 겨누고, 자신의 미학을 짓밟은 대가로 총기 개머리판을 김종태의 성기를 내치려고 했다. 이때 이계장이 말려서 위기는 모면했으나, 장의사 이외의 다른 수사관마저 그 공포의 절망 속에서 자신들이 고문당하지 않아도 마치 고문당하는 것처럼 괴로워했다.
10. 사디즘의 미학
이계장이 김종태에게 감정을 품은 것은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그에게 소주를 억지로 마시게 한 것과 개인적인 울분에서 김종태를 구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적감정에 미안했는지 우유와 빵을 주었고, 장의사의 고문에 굴복하지 않는 김종태의 행동에 자신의 영혼이 파탄 나는 것을 느꼈다. 발로 마구 밟고 밟으면서 하는 말이 “제발 말 좀 들어라 말이야!"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감정적인 폭력 즉 상대방에 대한 가학적 행위에 대한 의지를 지닌 것이 더 인간적이었다. 끝에 보면 알겠으나 이계장 이외에 김계장이 김종태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되어 그 옆에서 수행하는 비서관으로 나온다.
감옥에 자기 대신 갇힌 이두한을 만나기 전에 김종태는 고뇌한다. 그럴 때 이계장은 자기도 같이 갈까요? 하고 물어보나, 김종태는 아니 괜찮다고 한다. 솔직히 자기 자신도 그 상황에 대한 악몽과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결코 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정신과 영혼을 파괴시켰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감정의 기복도 없이 전기스위치를 누르며 휘파람을 불면서 그 중에서 클레멘타인의 멜로디를 부는 그 모습은 정말 장난 이런 장난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장의사는 시간의 할당을 채우는 샐러리맨 같은 모습이었다.
11. 일상 안의 비일상
그러나 당하는 자와 보는 자는 치가 떨릴 정도로 괴로워한다. 전기고문, 물고문에서 김종태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의 떨리고 멈추어버린 발을 클로즈업하며 그를 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도 클로즈업을 한다. 영화 전체적으로 보면 클로즈업이 거의 절반에 이룰 정도로 많이 나온다. 그 만큼의 급박함, 그 만큼의 고통은 보는 이에게 숨을 막히게 만든다. 특히나 김종태가 아내에 대한 추억과 망상, 고문으로 고통 받는 장면에서 영상이미지가 이중으로 겹치는 르포몽타주는 김종태로 하여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점이 탈피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 상황인데 야구중계, 라디오음악방송의 세상이야기는 그저 평화롭다.
그러나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김종태의 비명소리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대립이 아니라 사운드와 사운드의 대립이 이어지는 사운드로 연출하는 몽타주다. 고문에 괴로워할 때 고문 후에 지칠 때 옆에서 장난치는 이계장과 김계장의 천덕꾸러기 같은 행동들은 김종태 뿐만 아니라 사실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던 것이다. 이계장과 김계장의 장난은 그들이 처해진 고문행위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상생활들이 비일상생활으로 되었기에 그들에게 장난이란 남영동 고문실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유희였다.
12. fiction vs faction
그 유희 속에서만 오로지 정상적인 인간은 마치 장의사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고문으로 지쳐 영혼마저 소진한 김종태를 바라보며 “지금은 내가 고문하지만, 세상이 바뀌면 대신 네가 나를 고문해”라는 식으로 아주 차가운 미소를 띠운다. 물론 세상이 바뀌고, 이두한은 교도소에서 김종태에게 사과하나, 김종태는 그 사과를 받지 않은 채 나오려 하나, 갑자기 이두한 휘파람에서 클레멘타인의 멜로디가 나온다. 모든 것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끝나지 않았다면 어디서 다시 시작이고, 끝이란 말인가? 계속 언급하나 정지영 감독의 작품은 fiction이 아니라 faction이다. 만들어진 사실과 만들어진 허구가 만나 만들어진 거짓 같은 사실이 나오고, 그것은 더욱 강렬하다.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에 의해 창조되므로 fiction이나 그 영화의 시나리온 도서 <남영동>은 사실이다. 사실을 거짓인 영화로 만들었으나 그 거짓의 세계인 영화가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거짓을 나타내는 매체로 탄생한 것이다. 문제는 항상 정지영 감독은 영화가 신화적인 공간에서 우리가 욕망하지 않은 인물로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개연성이 발휘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하나, 영화 <남영동 1985>는 역사를 전제한 영화다. 따라서 시보다 역사에 가까우나, 오히려 더 시적인 존재로 각인된다.
13. 불멸의 마녀사냥
그것은 처음 지문처럼 언젠가 마녀사냥으로 죽게 되는 사람은 당신의 이웃이고, 그 당신의 이웃의 이웃은 결국 당신에게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고문당한 자 중에서 단순히 그 당시 민주화 운동만 아니라 평범한 국민들도 아무것도 모른 채 고문당했고, 잊을 수도 없는 지난날의 악몽이 21세기에 들어오고 나서 겨우 누명을 벗었다는 것이다. 누명을 벗고, 국가로 손해 배상하여 보상받는다고 그들의 지난날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고문이란 것은 저기 스크린으로 보이는 한 인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 영화는 강조한다. 고문의 역사는 단순히 어느 개인을 파멸로 몰아넣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긋난 굴레에서 계속 방황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