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비평 2
풀빛미디어 편집부 지음 / 풀빛미디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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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직업이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업종이 아닌 상태에서 계속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세계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일러스트, 라이트노벨, 그밖에 기타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로 토대로 직업의식을 가진 분들에 비하면 나의 관심은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 그 세계의 사람들을 알고 따라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튬 플레이 등과 같이 한국에서 이른바 Sub-culture라는 하위문화를 꾸준히 관심을 갖는 것은 여기에 무한한 이야기의 에너지와 소재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본 영화중에서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상영된 <설국열차>가 있었고, 그 이전에 강풀 작가의 원작인 <26년>이 있었다. 전자는 프랑스 예술만화라고 한다면 후자는 한국 웹툰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두 작품에서 어느 것이 더 우월하냐는 말을 가리기 보다는 두 작품으로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만화의 광활한 범위는 어디까지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아직까지 한국 만화산업계의 아쉬움은 소비자에 대한 연구방법이다. 왜 내가 그것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설국열차>를 BICOF 행사 상영장소에 원작 만화작가와 영화제작인 봉준호 감독이 참석하였을 때, 그 자리에 영화인 <설국열차>로 통해 만화 <설국열차>를 가깝게 다가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란 점이다. 게다가 영화 <26년>에서 강풀의 원작만화보다는 영화가 가지는 미디어적인 요소에 더 많은 흥행요소를 일으켰을 것이다. 강풀의 <26년>은 그저 가상의 존재로서 이야기가 진행되나, 영화 <26년>은 실존하는 배우가 등장하여 하나의 허구를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허구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존재하지 않아도 그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인물은 실존인물이다.

 

따라서 파생 실재라는 실사영상의 특성에 따라 대중문화에서 많은 대중들을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영화 <설국열차>도 영화감독 봉준호, 영화배우 송강호 라는 네임드가 엄연히 존재했기에 그 흥행도가 보장될 수 있었다. 물론 흥행적 요소에 담론하고 있는 서사구조와 그 서사구조를 표현하기 위한 영상과 사운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생각해보면 이번에 상명대학교 만화학과에서 2번째로 제작한 <만화비평 2>를 읽으면서 만화비평이 절실한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만화라는 것이 이제는 단순히 사회에서 비주류로서 머물기에는 너무 많이 대중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우리 대중들은 여전히 만화와 만화를 비롯한 웹툰,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너무 경시하는 요소가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무료로 웹툰과 게임을 하면서도 만화책과 PC 및 콘솔게임을 즐기는 사람에 대한 인식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시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일 곤란한 상황은 일반적인 대중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는 사람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제일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그 부류에 속한 사람 내부나 혹은 그 내부에서 외부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 자체도 힘든 상황이란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 문제의식은 비단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콘텐츠 향유자만 겪는 문제라면 그들이 처해진 사회적 조건에서 분명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다고 그런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의 업무를 하고 있는 현직 종사자에겐 또 다른 문제이다. 이들에게 시장이 되어야 하는 향유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은 상품을 팔아야 만화산업이 발전과 동시에 만화가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만화 비평 2>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하면, 너무 만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지 않았나 싶었다.

 

만화라는 것은 곧 만화가가 만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의미를 주고 싶은 하나의 소통의 공간이다. 소통을 원하는 대상에 대해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고, 반대로 들어야 하는 이들의 사고나 생각, 행동이나 현상에 대해 무감각하지 않나 하는 우려감이 들었다. 물론 <만화 비평>을 한다는 것은 순수하게 만화작품만이 아니라 만화문화와 그에 제반된 사회적 현상까지 같이 담론하는 것이 옳다. 만화라는 것은 결국 대중문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하나의 놀이문화라는 점이다.

 

누구나 쉽게 만들고 읽고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이 만화가 가지는 본질적 가치다. 그런다고 너무 쉬운 것만 추구할 경우 만화는 너무 저급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따라서 만화는 한 가지 가치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두루 가져야 한다. 이미지에 대한 인간의 판단요소에서 산업디자인과 예술디자인의 차이에서 산업디자인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대부분 동일한 것이라면, 예술디자인은 모든 사람들의 사고와 판단력이 다르게 되어야 한다. 결국 인간이 모두 같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른 생각하는 것이 당연히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는 셈이다.

 

만화란 그렇게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다. 만화가 문학과 별개인가? 혹은 아닌가라는 의문에서는 예전에 읽어본 <서사철학>에서 만화 역시 서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만화는 만화로서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스토리텔링으로 매우 훌륭한 것이 될 수 있다. 만화문학이 될 수 있는 점은 만화에서 보이는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어느 특별한 이야기까지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불운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에 대해 만화라고 말하지 마란 법이 없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지닌 문학작품인 조지 오웰의 <1984>를 생각하면, 그런 암울한 감시국가의 모습을 만화로 그려내면 더욱 효과적인 전달력을 보여줄 수 있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의 암울한 현실과 비참한 서민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한국만화 역사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 얽힌 카툰적인 요소가 강했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대부분 한국인들인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간단한 몇 글자와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 당시 민중들은 쉽게 이해하고 느꼈을 것이다.

 

만화의 무서움과 위대함은 바로 전달력과 파급력이다. 1972년 군사정권 시절 유신헌법 개정 전에 문화정책으로 만화분서갱유 사건이 일어난다. 만화로 통해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만화는 인간이 가지는 욕망과 의지를 그려낼 수 있기에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국가에서는 성적(性的)인 요소를 통제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성적인 담론인 남녀연애가 자유로우면 인간의 기본 권리인 자유와 평등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령 여자는 무조건 돈 있고 능력 있는 남자만 만나면 된다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위치평가 절하 및 사회적인 활동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고, 남성들에게는 자신의 재력이 풍족하지 못한 대다수에게 박탈의식과 더불어 사회 불만을 야기한다. 물론 인간의 삶에서 돈의 가치는 중요하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면 남녀관계는 사랑이 아닌 <섹스와 돈>으로 절하된다. 만화에서 만약 자유연애를 꿈꾸는 여자나, 혹은 성적 호기심이 넘치는 남자아이에 대한 소재를 금지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표현에 대한 자유를 억압한다.

 

만화라는 것은 바로 인간이 평소 자신 안에 부족한 것에 대해서나 혹은 자신의 안에 넘치는 것에 대하여 표현할 수 있는 매체이다. BICOF에서 한국 대표 만화가라고 볼 수 있는 최규석 작가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만화가로 될 수 있는 계기는 고등학교 수업 시간 중에 수학시간에 느끼는 지루함이었다. 1주일 4시간 수업이 잡힌 수학시간에 이해되지 않은 과목을 계속 앉아 듣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 그래서 최규석 작가는 수학시간에 망상을 하고 그것을 하나의 스토리로 응축하여 전개했다고 한다.

 

최규석 작품 중에 <습지생태보고서>라는 만화책은 직접 만화가와 주변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실의 씁쓸함에 대해 재미를 담아내는 작품이다. 그런 작품이 나온 것은 어떻게 보면 그가 어둠이나 혹은 지루함에서 보인 해방의식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그 억압에 대한 반항 내지 저항의식이 작품을 만들 수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단지 작품이 의미하는 내용과 상황은 분명히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 폴리스>와 같은 작품은 작가 본인이 이란에서 살면 겪은 이야기를 만든 작품이다. 그 작품을 보면 상당히 우울하고 슬프고 때로는 절망한다.

 

같은 만화책이라고 해도 분명 거기에 담겨진 내용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전달에서 우리 혹은 나 같은 독자가 보는 만화에 대한 느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적어도 만화라는 것은 그리기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리기로 통해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만화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은 바로 표현에 대한 의지와 자유에 대한 고찰이다.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진지하게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는 것이 만화다. 하지만 우리에겐 만화는 여전히 진지한 것과 다르게 늘 다른 공간의 세계다.

 

만화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번 <만화비평 2>에서 보인 것은 만화에 대해 얼마나 우리가 알고 있는가에서 만화가에 대한 인터뷰 및 대담을 좋았다고 본다. 만화가들이 다수 나와 무슨 생각으로 만화를 대하고 그리고 전달되는지 듣는 것은 한국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평소 만화와 애니메이션 리뷰를 하는 입장에서 한국 만화독자들이 이 책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보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다.

 

만화가들은 정작 자신의 만화를 두루 보기 원하나, 그런 만화가의 의지와 생각을 담은 <만화비평>은 그렇게 잘 전달되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만화라는 것은 쉽게 접해도 만화에 대한 연구와 비평은 보통 학술지보다 더 어려운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때까지 만화에 대한 비평지가 학회 학술지로서 나오기보단 일반적인 도서로 나온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게다가 1987년 1월 박종철 서울대학교 학생이 고문치사로 죽고,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박종철 학생을 기리는 마음에서 박종철출판사라는 곳이 생기며, 우리의 영원한 벗인 박종철 학생을 기리는 마음으로 생긴 출판사라면, 이한열만화상 역시 만화동아리에서 만화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선배로서 그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 카툰 부분의 <정리해고>와 이야기만화의 <자판기 아저씨>는 우리 시대의 아픈 이야기와 인간 개인이 가지는 본성에 대하여 웃음이 나오면서 씁쓸한 기분을 들게 한다. 한 가지 기분이 아닌 다양한 기분을 들게 하여 다양한 감정을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것과 인식해도 제대로 각성하지 못한 이야기가 바로 만화로 통해 쉽게 접근 가능한 것이다.

 

<만화비평 2>는 기존에 나온 <만화비평>과 다르게 어느 작품에 대해 리뷰와 비평이 들어가 있었고, 비평적인 고찰에서는 미학적인 관찰과 더불어 예술적인 요소로서 만화를 읽어가는 것을 제시했다. 또한 만화리뷰에서는 나 같은 독자가 보는 리뷰가 아니라 만화작가나 혹은 만화지망생이 적는 만화리뷰 역시 독특한 재미였다. 만화를 비평한다는 것은 영화나 미술, 문학 등과 같은 기존 문예계통과 큰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한국 사회다. 하지만 꾸준히 만화에 대한 고찰로 통해 만화가 가지는 큰 가치를 보여주는 것 역시 만화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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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
박인하 지음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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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이란 나라에 만화라는 것을 말하기란 정말 어렵다. 만화라는 인식 자체가 이미 어린 아이들이 보는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시간 죽이기를 위한 도구, 또는 불량하거나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은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텍스트라는 글이 아닌 그림으로 이루어진 서사구조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봐도 이해하기가 어렵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가 가지는 전달력은 매우 효과적이면서도 탁월한 것이다. 만화가 왜 이렇게 탄압을 받게 되는 것일까? 최근에 제정되어 발효 중인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법의 취지로는 아동청소년들을 보호하자고 하는 것이나 막상 뒤돌아보면 사회전반저인 성에 대한 담론이나 표현의 자유 내지 의지를 박탈하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나, 한편으로 생물학적으로 동물이란 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성적인 충동이나 본능적 요소를 부정하기보단 억지로 막는 것보다 합리적인 대안이나 혹은 그 감정을 하나의 예술적인 감각으로 승화하는 편이 더 탁월하다.

 

그런 점에서 성에 대해 무조건 개방적이라든지 혹은 무차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독특한 아이템으로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지나 청소년기라는 제2차 성징기로 통해 남녀들은 자신의 몸에 변화를 알고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상대성에게도 흥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 시절 여자의 나체를 보지 않아도 남자아이들은 몽정을 하고 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성의 비밀에서 상상력이 발휘되고, 그 상상력은 청소년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위대한 예술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가령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여자의 음부를 가리고 있는 아프로디테가 큰 조개에서 탄생하는 장면이다. 여신의 음부를 가린다고 해도 유방이 돌출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스시대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예술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하나의 외설인가? 아닌가에서 이미 예술로 인정받은 바이다. 만화에서 만약 유두가 나오면 그것은 하드코어라는 포르노 그래픽으로 차별당할 뿐이다. 물론 그것을 급격하게 강조하고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은 분명 문제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장면이 필요한 계기가 있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을 당하는 민주운동가인 김종태의 역할을 맡은 박원상 씨가 고문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가 드러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모자이크로 처리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남성의 성기노출이 영화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고문을 하는 과정에서 인권을 무시한 채 옷을 전부 벗겨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했기 때문이다. 상황적 연출이라든지 혹은 그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은 의미를 상기하기 위해서 상상력 내지 혹은 reality한 요소를 부각해야 하는 점이다. 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를 읽으면서 한국의 그런 상상력 부재를 만들 수밖에 없는 한국의 만화문화에서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이 서평 초반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선 만화에 대해 말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만화란 생각해보면 고대 라스코벽화에서 시작하여 고전주의 이전이나 당 시대, 그 이후의 르네상스 내지 바로크와 로코코, 심지어 아방가르드 예술인 큐비즘까지 만화에 차용되기 때문이다. 박인하 교수도 잘 지적한데로 국내 만화학과 아니 만화학과를 지나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강의 중인 교수진 대부분이 만화가보다는 서양화학과 많다는 것을 인정하다. 국내 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활동 중인 각 대학의 교수들이나 혹은 박사과정을 밟는 분들도 회화를 전공한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만화는 회화처럼 예술적 영역으로 보자면 비슷하기도 하나 다른 부분은 회화는 개인적이고 일부 특정계층을 위한 것이라면, 만화는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것이야 한다. 심지어 예술만화를 보더라도 기법이나 회화구도가 독특해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만화기 때문에 예술적 요소를 더 실감이 넘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기 위해 기준이나 방법조차 모른다. 이른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하는 기준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기준을 정하는 기준의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화에 대해 그저 일반적인 세견으로 정하는 것보다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현상에 따라 context적인 요소로 만화를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만화역사에서 주로 코믹스보단 카툰이 발달했다고 소멸한 이유는 만화라는 것은 그림으로 되어 있으며, 어려운 글을 쓰기보단 누구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역사에서 한국은 풍자만화가 시초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시대정신과 더불어 그것에 대해 탄압하려 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와 군사정권에는 풍자만화는 오히려 규제대상이고, 오로지 명랑만화로 가야만 했다. 만화라는 것은 아이들이나 혹은 시간을 때우는 하나의 유치한 변모한 것이다.

 

우리 만화란 그렇게 암울한 시대와 폭력적인 정치적 이해에 따라 문화적으로 쇠퇴한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억압하고, 그저 주조공장에서 나오는 주조물처럼 되기를 바란 것이다. 만약 인간이 주조물의 원재료인 금속이나 플라스틱인 경우 문제가 없으나 인간은 생물이란 점이다. 동물은 감정을 가지고, 때로는 성적본능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인간의 본연의 욕망은 사회적 통제에 반발하기 마련이다. 그런 반발심이나 또는 자유분방함을 만화로 표현하거나 즐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 내적 심리에 쌓여 있는 스트레스나 억압적 기제를 해방하는 것과 같다.

 

또한 그런 억압적 요소는 인간의 본연보단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태어난 이후 사회적으로 살아가면서 성립되는 것이다. 인간의 불평등은 태어날 때 생물학적인 불평등을 가지기도 하나 사회적인 요건으로 교육정도, 가정경제력, 권력의 현황, 그 인간이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에 따라 불평등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어가는 그 순간, 아니 죽어서도 불평등적인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은 늘 자기에게 불안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것을 해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이나 억압을 해방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폭력과 자신에 대한 자해성이면 심각하겠지만,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돌린다는 것은 좋은 이야기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화를 보면서 일본을 항상 생각하는 것은 일본의 만화와 그리고 만화와 관련된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이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넘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요건이 되어 스토리텔링이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겉으로 만화를 무시하나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허영만 화백의 <식객>이나 영화로 상영한 <Beat>는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고, 일본 만화원작인 <꽃보다 남자>나 국내 작가가 만든 <풀하우스>, <궁> 등과 같은 작품도 흥행을 거두었다.

 

만화책의 소재가 결국 드라마와 영화의 세계로 가는 점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도가 하나의 문화산업으로 큰 효과를 보는 것을 생각하면 만화의 발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만화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문화에서 보이는 한계점에 부딪히나 그것을 제일 쉽게 나타내기 좋은 것이 만화다. 만화는 영화, 드라마처럼 거대한 자본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문학소설처럼 생각한 내용을 글로서 계속 나타낼 필요 없이 생각하는 그 자체를 그리면 되는 것이다. 단지 그리기 위해서는 그림에 대한 실력이 필요하나,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박인하 교수가 인터넷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엉덩국이란 고등학생 만화가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었다. 그림실력이나 이야기흐름은 흔히 속된 말로 병맛만화라고 하나, 그 병맛에 담긴 대중들의 호응이나 그림 뒤에 보이는 한국사회의 모순은 큰 흥행을 불러 일으켰다. 그 덕분에 엉덩국은 인터넷에서 많은 팬을 보유하게 되었고, 최근에 스마트폰 어플까지 등장하여 만화의 새로운 조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분명 정식 만화가도 아니고 만화학과 학생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보여준 만화의 역량은 사회적 이슈로 된 것은 분명하다.

 

만화라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누구나 만들고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점은 누구나 자기의 생각이나 의지를 표현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만화에 사소한 것만이 아니라 사소하지 않은 것들까지 넣어 나온다는 것은 때로는 누구에겐 불편한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책 본문에서 과거 만화문화 탄압이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만화라는 그 자체보단 사회적 흐름과 시대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만화라는 것은 현실과 별개로 보고 있겠지만, 사실 만화 역시 현실에 의해 가장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영향을 쉽게 받으므로 그만큼 많은 주제와 표현들이 올라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만화를 쉽게 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많은 몸부림이 필요하다. 만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그 만화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것이며 또한 무엇이 있으며,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만화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화라는 것은 쉽게 볼 수 있어도 막상 만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다. 만화는 그 자체를 보면 만족할 수 있어도, 만화라는 것은 무엇언지를 알려면 그 자체를 넘어 메타적인 영역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다루는 서적들을 읽으면서 생각한 점은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만화 역시 영화나 문학과 같이 비평적 영역에서 다루는 것은 옳겠지만, 비평만이 아니라 대중들까지 읽으면서 같이 즐길 수 있는 입문서가 부족한 점이다. <즐거운 만화가게>의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표지에 있다.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는 이들은 까까머리의 애부터 아이를 돌보는 큰 누나도 있다. 많은 어린아이들이 추억의 만화로 불릴 만화책을 서로 나누어 본다.

 

만화라는 것은 서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왜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면 결론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고, 그 인간다움에는 행복이 있을 것이고, 행복에는 즐거움이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거대한 시장경제구조에 놓인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다. 상대적인 경제적 부로서 우리의 행복의 척도를 부의 절대적 상급자에 맞춰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즐거움을 향하여 살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을 보거나 또는 조깅, 배드민턴, 테니스 등과 같은 운동이나 꽃꽂이나 다도와 같은 여러 가지 취미생활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취미생활이 인간에게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억압으로 인해 지쳐있는 심신을 위로할 수 있다. 만화라고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지 말란 법이 없다. 오히려 만화책처럼 손쉽게 구하고 읽고 즐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경직되고 단순한 것에 지나 상상력을 펼쳐 우리가 알지 못한 것도 알고, 볼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다. 만화라는 즐거움은 새로운 상상력이 있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반전도 있다.

 

조금 슬픈 이야기나 박인하 교수의 아버지 일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자신의 자녀에게 관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져봤다. 그런 관대함이 박인하 교수를 탄생하게 해준 것이다. 그 분께서는 자신의 자녀에게 즐거움과 동시에 추억까지 안겨주었다. 즐거운 만화가게 그것은 분명히 만화라는 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 아니라도 만화라는 것이 얼마든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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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에서 일본을 만나다
조성기 지음 / 어문학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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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에서 일본을 만나다>를 읽는 순간, 예전에 일본 애니메이션 관련 연구도서를 읽은 것과 상당한 매치와 더불어 아쉬움이 느껴졌다. 미국 일본문학 전공 교수 수전 네피어가 만든 인문으로 보는 저패니메이션인 <아니메>라는 도서를 먼저 읽었고, 그리고 철학 사상 그리고 인문학을 연구하는 수유 너머에서 만든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그리고 한창완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의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 그 외의 저패니메이션의 서적을 읽었기에 이미 읽는 순간부터 <아니메에서 일본을 만나다>는 낯선 도서가 아니라 그 이전의 도서에 비교되는 도서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잘 정리된 내용은 전반적인 context라는 연관성이다. 가령 역사적인 사건부터 시작하여 문화와 관습, 기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인자를 반영한 점이다. 그러나 그렇게 길게 뻗은 만큼 내용의 주제성은 약간 아쉽게 다가왔다. 일반적인 문화지식으로 다가가면 좋은 입문서일지 모르나 깊이를 들어가기에는 너무 내용 자체가 저자의 생각에 치우친 것이 아닐까 하는 심정이다. 애니메이션이란 단어가 Animation이고, 원래 Animate라는 생명이 없는 존재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기에 애니메이션에서 일본문화의 밀접성은 그 문화와의 특이성이 있다는 것을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경우 전통사상으로 본다면 무(巫)를 기반한 원시적인 문화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그런 무라는 것으로 통해 샤머니즘과 단군신화의 웅녀를 토대로 한 토테미즘은 전통적인 원시문화가 잔존함을 알려준다. 일본의 경우에는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보다는 차라리 애니미즘이라고 하는 물신숭배에 가깝다. 따라서 물신숭배인 애니미즘이 깊이 반영된 일본인들의 무의식에 애니메이션으로 영상을 표출함은 매우 독특한 문화 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즉,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를 영상이라는 형이하학적인 시각으로 만들어내는 점에서 일본의 아니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보기엔 어린아이나 혹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그저 즐기는 세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이 서적에는 제법 신화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신화라고 하여 레비 스트로스 내지 혹은 마빈 해리스 등과 같은 인류학자들의 해석하는 신화학 영역보다는 그 신화라는 것을 소개하고 그것이 일본 문화에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치중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일본문화라는 것을 아니메라는 영상미학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것은 분명하다. 단지 아쉬운 부분은 깊이성에 대한 부분이다. 일본의 벚꽃이라는 것은 흩어져서 날라 없어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즉 유미주의라는 소멸의 미학이 일본의 작품 내지 생활양식에 깊이 박혀있다는 것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함이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미학 도서에서 일본은 불꽃놀이와 벚꽃놀이를 좋아하는 것을 설명한다. 불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번쩍 빛이 나면서 소멸해가는 모습이다. 큰 불덩어리가 작게 세분화 되어 없어지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고, 벚꽃놀이에서 나무에 달린 벚꽃보단 그 나무에서 바람에 의해 날아가거나 떨어지는 벚꽃이 아름다운 법이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속 5㎝>이란 작품은 초속 5㎝로 떨어지는 것은 결국 벚꽃의 꽃잎이란 점이다.

 

과연 그것은 우리에게 어느 미를 안겨주는 것인가? 미학이란 것은 아름다움을 찾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론 20세기까지 존재한 아방가르드에서는 반미학이라고 하여 기존의 관념을 전복하고 새롭게 보여주는 가치도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라는 반미학 역시 미학으로 대체되는 순간 아방가르드의 존재의 의미는 사라진다. 20세기 마지막 아방가르드인 상황주의 인터내셔널(IS) 그대로 해체하고 사라지고 만다.

일본의 미학은 그런 반미학적인 요소는 없다. 왜냐하면 일본의 상징에서 예전에 <국화와 칼>이란 서적을 들은 바가 있었다. 화쟁과 전쟁, 그것은 서로 도모하여 친하게 지내거나 혹은 서로를 겨누고 싸우는 것이다. 화를 추구하는 정신에서 벚나무 아래의 차 한 잔은 분명 서로 간의 친목을 도모하나, 사쿠라 라는 벚나무 꽃잎을 일어로 들어보면 왠지 우리는 평화보단 전투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기분이다. 소멸해 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인가? 사무라이 정신에서 그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원래 일본이란 섬이 기후적으로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고, 지진이나 해일 그리고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나기에 그들은 항상 죽음의 위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일본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면 나무, 돌, 물 등과 같은 자연적인 요소가 많이 내포된 단어가 많다. 자연 속에서 그들의 인간생활은 결국 자연적인 요건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기에 애니미즘이란 물신숭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요소는 우리가 자주 알고 보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이 많은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은 탈아시아론에 대한 점으로 자기 민족중심적인 작품과 더불어 옥시덴탈리즘 역시 강하다. 서구가 동양이나 아랍문화권에 대해 가볍게 보는 문화적인 용어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면, 역으로 동양이 생각하는 서양의 이미지는 옥시덴탈리즘이다. 탈아시아적인 요소에서 그들만이 추구하고 만들어내는 유럽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바로 그런 옥시덴탈리즘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일본이란 국가적인 특성과 더불어 민족성 성향, 그리고 역사라는 과정이 문화라는 것에 의해 농축되고 표출되는 것이다. 문제는 애니메이션이란 의식적인 것보단 무의식적 영역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화된 일본인의 사고를 애니메이션 영상이란 것으로 통해 언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를 하나의 언어로 통하여 일본을 보는 것에서 애니메이션만큼 좋은 것이 없다. 작가나 혹은 애니메이터들이 만들어낸 작품을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결국 작가나 대중이나 모두 비슷한 사고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문학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등장하는 칼과 벚꽃은 일본인에 대해 충분히 공통적인 요소로 도출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모든 것을 귀결할 수 없으나 일본인이란 특징이 본래 옆 사람에 대해 참견하지 않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그 개인적 성향으로 인해 집단주의적 행동도 강하다.

 

그들이 러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광기에 빠진 것이 가능한 이유도 그런 민족적 기질에 가깝다는 것이다. 신화학적으로 신화는 결코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는 과거, 현재, 미래의 대화방법이다. 일본인의 신화적인 요소가 곧 문학적 요소와 더불어 그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정체성은 하나의 문화적 상품과 더불어 문화적 공격도 생각할 수 있다. 언어는 곧 그 문화의 특성과 더불어 하나의 권력적 요소를 지닌다. 나 역시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나, 그것을 좋아하기에 일본에 대한 호의도가 있는 것은 나 이외의 많은 향유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이다.

 

그렇게 잘 알기에 우리는 애니메이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일본을 봐야 하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것이 만들어졌던 하나의 과정을 봐야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는 역사와 문화, 기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전제되는 게 당연하다. 물론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좋으나, 이 서적은 너무 과거에 중점을 둔 게 아쉬웠다. 가령 전공투와 단카이 세대에 대해 자세히 다룬 것이 좋았다고 본다. 애니메이션이란 산업이 일본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고, 이때 시대상과 더불어 경제호황과 불황 그리고 사회적 불안이 연결되는 것은 상세히 다루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타쿠 문화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부분은 저패니메이션 관련 도서에서는 중점으로 다룬다. 이 책에서는 너무 팔을 여기저기 뻗치는 만큼 현대적인 조건과 현상에 대해 약간 아쉬웠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지만, 그 현재의 조건성도 새롭게 추가되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도 다양한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좋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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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국내에서 미술에 대해 혹은 미학에 대해 일반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그렇게 잘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미학에 관심이 생긴 나라고 하여도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미술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미학(美學)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영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영상매체에 의해서다. 그리고 미학을 알기 위해 우연히 진중권 교수의 <미학 오디세이>를 접했고, 그의 도서 중에서 미학 이외에도 다른 문화평론이나 사회에 대한 의견을 담은 도서를 보았다.

 

 

그런 와중에 미학에서 이번에는 미술사에 대한 책을 냈었을 때, 흥미가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미술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예술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술은 인간의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처럼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일부계층들이 아니면 미술에 대해 접근하기가 어렵다. 대부분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미술은 그저 그림 그리는 사생대회나 점토나 색종이 오려붙이기란 실기로 점수 매기는 것에 치중하고, 미술의 본질적인 미(美)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시절, 특히 석고상이나 그림이 벽에 걸린 미술교육실에서 내가 배운 것은 미술인가? 아니면 수능을 치기 위한 방법인가? 안타까운 사실은 미술이란 과목은 수능조차도 나오지 않은 소외과목이었다. 그저 내신에서 적당히 시험보기 위해 이론 수업을 하며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손재주가 없는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도 벅차고, 사생대회에 나가 풍경화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 미술시간은 그저 악몽이었다. 그림을 잘 못 그리면 점수가 낮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미술이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미술은 그야말로 수능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고, 내신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교과과정으로 전혀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것처럼 느꼈다. 어떻게 보면 미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을 알아야 했다. 세계사나 현대사 혹은 윤리도덕 같은 것들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윤리도덕 시간에 비록 짧은 수업시수이나 그곳에 나온 철학가나 사상가 그리고 그들이 저술한 많은 도서들이 결국 예술이란 큰 흐름에 조류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미술이란 과연 나 같은 일반인들과 분리된 존재인가? 라는 의문을 가졌다.

 

 

고등학교 시절 최신 미술에 대한 정보는 거의 피카소에 이르면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단지 피카소가 인상주의 내지 큐비즘이란 입체적인 회화를 쓴 것만 말하지 왜 그가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2~3년 이내였다. 미술 그러니깐 미술을 포함하는 예술이란 것은 우리 인간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같이 흘러가는 하나의 시대적인 거울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요새 깨닫고 있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미학 오디세이>도 그러하나 <교수대 위의 까치>와 같은 도서 역시 그러하다.

 

 

미술이란 예술에서 보인 그림의 한 폭은 우리에게 그 시대에 어떤 사람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왜 그런 식으로 그리게 되었는지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히 외우기 식으로 고전주의 → 바로크 → 로코코 → 신고주의 → 인상주의 등등으로 넘어가는 것이 과연 우리 생활사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에서 없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동안 <미학 오디세이>나 <서양미술사> 등의 도서로 통해 다르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미술에서 보여준 것이야 말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진 가치를 보여주고, 그것이 그 시대에서 당연한 도덕적인 관념이었을 것이다.

 

 

도덕이란 것은 단순히 윤리하고 다른 것이다. 미적인 가치, 즉 당시 사회에서 가져야 할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근대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다른 것이 되어야 했다. 인간에게 관념이란 것이 있기에 그 관념으로 하여금 거대한 흐름에 순응되어야 한다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예술로 하여금 하나의 숭고함을 부여하였다. 서양의 오래된 성당이나 교회, 회화, 동상을 등을 보면 그것은 예술을 위해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었다. 인간의 지배를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고전예술성을 지나 근대로 오면서 마르크스주의의 도래에 따른 인간은 거대한 관념이란 조류보단 역사적 자아를 가진 하나의 주체로서 보면서 예술이란 것은 기존에 가진 성질과 달리할 수밖에 없다.

 

 

고전적으로 예술의 존재는 지배계급인 왕족, 귀족, 성직자, 기사 등에 의해 유지되었다면, 근대의 유럽에선 모더니스트로 통해 예술은 예술을 위한 것이 되어야 했고, 또는 예술은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딱히 예술사를 논하기에 나의 지식에 한계성이 있으나, 적어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예술은 변모한 것이다. 예술에서 미술은 계속 변해가고 있으며, 예술이 인간에게 정치적, 미학적으로 고정관념을 부여하고 통치자에게 하나의 정당성을 제시한다면 그것에 대해 파괴하는 것도 존재한다.

 

 

아방가르드라는 전위는 예술이면서 예술임을 부정하며, 또한 순수하게도 대중문화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대중문화에서 벗어날 경우 엘리트주의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기에 아방가르드 역시 대중들을 정치적인 해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에 한계성이 있었다. 미술이란 것은 관념에 의한 것을 시각적으로 혹은 이번에 소개된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청각이나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다다이즘과 관련하여 마르셀 뒤샹의 <샘>에서 예술은 그저 작품에 보이는 미적 감각일까? 아니면 작가의 명세로 통한 것인가?

 

 

미술이란 영역에서 이런 실험들은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령 어느 유명한 작가 및 교수가 있는데, 그의 작품은 늘 많은 관심과 다양한 평들이 따른다. 그가 만약 전화로 오늘 필요한 작품을 목수나 대장장이에게 이야기하여 주문하면 그건 누구의 작품인가? 언제 한번 어떤 미술대학 교수의 블로그에서 재미난 일화를 보았다. 어느 미술가가 거리의 걸인을 데리고 와서 물감이 어지럽게 뿌려진 동판을 닦게 했다는 것이다. 걸레에 모든 물감이 제거될 일은 있을 수가 없고, 대신 아주 이상하게 색이 덥힌 동판이 되었다. 물론 그것은 작품으로 인정받았겠으나, 한편 폭로로 통해 그것은 우습게 되어버린 해프닝이었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가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다”라고 했다. 교수의 이름은 결국 상품이고, 상품은 결국 기호인 교수로 통해 이루어졌다. 미술이란 것도 결국 자본주의 안에서 기호라는 기표에 의해 의미조차 없는 것도 의미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듯 현대사회로 오면서 미술 역시 현대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고,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앤디 워홀이란 팝아티스트를 보자. 그는 마릴린 먼로나 마오 쩌둥이나 코카콜라 등의 이미지를 복제하여 다양한 색으로 펼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코카콜라는 우리 모두가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라도 세계 최고의 부자라도 그들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모두 같은 맛이다.

 

 

옛날 우리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었던가? 걸인의 찬, 왕후의 밥이라고, 단지 조금 유감인 것은 우리는 쌀로 지은 밥만 먹는 게 아니라 반찬도 같이 먹기에 코카콜라처럼 느낄 수 없는 점이다. 코카콜라를 비롯한 많은 인스턴트 식품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이기에 미술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가? 누구나 간단히 접하기에 팝아트에선 자본주의에 대한 친화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잭슨 폴록을 발견하여 미국 미술평론에 큰 영향을 준 그린버그의 상황을 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래 트로츠키주의자인 그린버그는 아주 특이한 상황에 놓인다. 1940년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피켈을 맞고 사망한다.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트로츠키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한 스탈린에서 그린버그는 아주 애매한 상황에 놓였다. 스탈린이란 트로츠키의 적을 따를 수도 없고, 그런다고 마르크스주의자인 트로츠키가 없는 이상 노선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50년대 메카시즘이 미국 내에서 열풍하자 더욱 그린버그에겐 스탈린에 대한 적대적 성격과 동시에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스탈린을 배격하는 기존의 예술정신이 미국의 자본주의적 성향에 따른 것이 아닌데도, 그것이 하나의 미국의 상징이 되어야 했다. 미국은 개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기에 예술은 정치적 입장보단 개인의 역량으로 매겨지고, 그것은 곧 미국의 정치적 자유가 있다고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이 된다. 정말 그것은 정치적 자유가 있기에 가능한 예술인가? 단지 그렇게 보이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잭슨 폴록은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처럼 그 순수성을 지향하는 작품이 나온다.

 

 

미국의 아방가르드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바로 이해하지 못하나 적어도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다른 점은 분명하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예술과 삶의 경계는 허무는 것이라면, 미국은 자유가 있다고 하는 냉소주의에 대한 이념적 우위를 만들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은 직접적으로 전쟁을 겪었고, 전쟁에 의한 정신적 충격에서 나올 필요가 있었다. 또한 프랑스에선 드골에 저항한 5월 혁명에 의해 늘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날이란 그룹이 미국의 팝아트에 대한 부정적인 관조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방가르드는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달리 사회전체에 대한 혁명적 기류보단 그저 개인적 만족감이 더한 것 같았다. 미니멀리즘을 보는 순간 나는 특수촬영을 하는 셋트장이 생각났다. 특히 일본의 울트라맨과 같은 외계초능력자가 거인화되어 괴수를 무찌르는 장면에서 소품들이 미니어쳐가 되는 모습을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놓여있는 모순에 대한 혁명적인 구호보다 그저 공간적 배치에 따라 미의 가치가 그냥 있다는 정도로 보였다. 미국과 유럽의 미술은 그런 차이성이 보인 것 같았다.

 

 

현대미술에서 보인 특이사항은 이런 기존에 보여준 예술에 대한 반란이다. 아니라면 원래 상태에서 다른 방법으로 진행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처음으로 모더니즘 이후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후기 모더니즘이란 단어를 보았다. 처음 본 낯선 개념, 그것은 결코 이해가 바로 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미술적 영역이 아니라 미학적 영역에서 사상까지 연계된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미디어의 발달은 실제와 가상의 차이를 벗어나 차라리 가상이 현실을 대체하는 세상이 되었음을 알린다. 미술이란 그저 행위에 대한 결과에서 미술 자체가 행위라는 것도 그러하나, 그것은 세상이 거대한 서사에서 탈피하려는 포스트모던을 보여준다.

 

 

그런다고 그것 역시 한계성이 온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을 가진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전사에 의해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단 어느 누군가에 의해 조장되고 그 누군가를 위한 이익이 된다는 점이다. 열렬한 행위자일수록 가장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지루한 구경꾼이기에 미술로 통해 행위자는 그것을 따르기도 혹은 파괴하기도 한다.

 

 

우리가 예술과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 있는 이유는 팝아트에서 코카콜라가 전시될 수 있듯이 코카콜라 역시 우리가 가까이 하는 존재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기에 가장 예술로 보기 어려운 것이 될 수 있다. 혹은 가장 예술적인 작품 역시 모조와 복제가 있기에 예술작품의 숭고함이 떨어진다. 아니라면 우리 스스로 예술가가 되어 삶과 예술의 경계를 파괴하는 전위적인 존재가 되면 좋겠으나, 그것 역시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마저도 잘 꾸미며 예술이 되기에 아이러니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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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6-07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야.. 뭘 이리 길게 쓰셨습니까.. ㅎㅎㅎ 하여튼 성실 그 자체유....
난 슬슬 진중권이 쓴 미학 이야기'가 이젠 다 비슷비슷해서 약발이 좀 떨어진 듯해요...
뭐 미학오디세이에서 햇던 말 서양미술사도 보면 비슷한 말이고...
하여튼 미학을 이렇게 알기 쉽게 흥미쥔쥔하게 소개하는 것도 기술은 최고 기술임..

만화애니비평 2013-06-07 12:57   좋아요 0 | URL
뭐 그건 최고죠...ㅎㅎ
국내에 이런 양반이 없으니 단지 중권이 아찌의 오덕적인 면은 본 받아야 할 가치라고..ㅎㅎㅎ
이전에 공각기동대와 한스 밸머의 관계에서 많은 영감도 받고..
이제 후학을 양성하면 좋겠다고 봅니다..ㅎㅎ
 
남영동 1985
정지영 감독, 이경영 외 출연 / 루커스엔터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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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리뷰 시작전에 

본 영화인 <남영동 1985>를 리뷰하기 전에 나는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발췌한 몇가지 문구들을 나열하였다. 왜 그렇게 했는가에서 고문과 고문으로 통해 보여지는 인간의 모습과 그 인간이 살아가던 사회의 현상들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그런 점을 위해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제10장 '빗자루와 악마의 연회', 제11장 '대 마녀광란'이다. 마녀사냥과 그리고 메카시즘이란 이른바 공안정국의 빨갱이 사냥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에서 다음의 문구들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던 민족과 국가를 떠나 공시적으로 통용되는 폭력과 공포의 도구화다.

 

  

(1) 그 당시 마녀광 비평가인 요한 매토이스 메이파라트는 고문실에서 본 다음과 같은 광경들을 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서술하고 있다.  나는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손발, 머리통에서 나온 눈알들, 다리에서 떨어져 나온 발목들, 관절에서 뒤틀린 힘줄, 몸통에서 뒤틀린 견갑골, 부풀린 동맥, 밀려진 정맥, 천정까지 끌어올려졌다가 바닥으로 동댕이질 쳐지고 빙글빙글 회전시키고 머리를 거꾸로 하여 공중에 매달리는 희생자들을 보았다. 나는 고문자들이 피의자들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회초리로 두들기고, '스크루'로 손가락을 찌부러뜨리고, 무거운 물건을 몸에 묶어 공중에 매달고, 굵은 밧줄로 꽁꽁 묶고, 유황으로 지지고, 뜨거운 기름을 온 몸에 바르고, 불로 그을리는 모양들을 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인간의 육체가 얼마만큼 폭행당할 수 있는가를 목격한 대로 묘사하면서 이에 대한 개탄해 마지않는다.

 

(2) '고백서'와 관련된 불행한 것은 그 고백서들이 대개는 마녀 피의자들을 고문하여 받아진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마녀들이 악마와 계약을 맺고 하늘을 날아 악마의 연회에 참석했다고 고백하기까지 고문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또 악마의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처음 자백한 것을 번복하려 하면 그 자백을 재확인하기까지 더욱 악랄한 고문을 당하겠느냐. 대부분의 피의자들은 화형을 선택했다.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회개한 마녀들은, 그 대가로 장작더미에 불이 붙기 전에 교살당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

 

(3) 그 추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자백할 때, 수사관은 그녀에게 말했다. "만약 지금까지 자백한 것들을 부인할 의사가 있으면 지금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내가 더 유익하게 하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법정에서 그 사실을 부인한다면, 당신은 다시 내 손아귀로 돌아와 이제까지보다 더 지독한 꼴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돌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다." 마르가레타가 법정에 끌려갔을 때는 그녀의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손에는 포승이 묶여져 피가 배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그녀의 옆에는 간수와 수사관이 서 있고 그 뒤에는 경비대가 무장을 하고 서 있다. 자백서가 낭독되면, 수사관은 그 자백서를 추인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묻는다.

 

(4) "나는 악마의 연회에서 자네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 하지만 고문을 덜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네. 마침 그때 자네의 얼굴이 떠올랐네. 이곳에 끌려오는 길에 자네를 보지 않았었나? 그때 자넨 내가 마녀일리 없다고 말했었지? 용서하게. 그러나 또 다시 고문을 받게 되면 자네의 이름을 또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거네." 그 노파는 다시 고문대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첫 진술을 다시 확인했었다. 그 희생자들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 악마의 연회에 참석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믿었다 하더라도 이런 고문 행위가 없었다면, 그 마법광란 속에 그토록 많은 희생자들이 어떻게 생겨났을지 이해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5) 마법광란은 모든 저항할 수 있는 잠재에너지를 분산시켰다. 마법광란은 가난한자와 무산자들의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서로간이 사회적 거리감을 조장시키며, 서로 의심하게 하고, 이웃끼리 서로 싸우게 하며, 모든 사람들을 소외되게 했고,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불신을 고조시켰고,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했으며, 단순한 지역적인 문제에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고 좌절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법광란은 부의 재분배와 사회계급 타파를 요구하고 교회제도와 사회제도에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가난한 자들로부터 박탈하였다. 마녀광란은 과격한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거꾸로 바꾸어놓은 것이었다. 마법광란은 사회 특권층의 마법적 총탄이었다. 바로 이것이 마녀광란의 감추어진 비밀이었다.

 

2. 고문의 시작과 서사의 시작

지나친 고문과 그 고통으로 인해 어느 한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점들은 대상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잔인한 말로를 보여준다. 물론 영화리뷰 함에서는 스토리와 인물, 그리고 카메라 샷과 샷의 전환 및 촬영기법에 대해 조금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영상과 소리가 아무리 효과를 탁월하게 하더라도, 그것은 그 작품의 서사를 돋보이기 위한 것이고, 서사라는 것은 결국 그 내용에서 의미하는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달이다. 영화는 흔히 정치로서의 도구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도구가 되는 영화는 솔직히 말하여 아름답지 못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언제나 진실보다는 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 쉽게 잘 넘어간다.

 

특히 영화는 환상으로 가득한 가상의 현실이다. 현실과 가상이 뒤바뀌어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것 즉 시뮬라크르(simulacre)인 것이다. 그런 가상의 이미지가 단절이 아닌 끊임없이 재생산과 재생산, 그리고 전혀 무관한 의미로 작용하여 어느 것들이 진실로 옳은지 알 수 없다. 진실은 하나이나, 사실은 다수다. 그 사실에 대한 허구는 그 사실의 수보다 더 많은 수를 가지고 있다. 사실에 대해 만드는 것은 구성하기 나름이다. 그 방법이 문학적 재능인지 아니면 육체의 폭력으로 통해 이루어진 재능인지는 선택자의 의해 만들었으나, 적어도 타인에 대한 공격에서는 2가지 다 매우 거칠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전자가 무서울지도 모른다. 육체의 폭력은 항상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상처나 멍과 같은 외관적 흔적, 혹은 각종 신경질환이나 내장손상과 같은 내재적 흔적들로 말이다.

 

 

3. 파시즘과 인간

순수하게 정신적인 속임수는 고통조차 받아들일 수 없기에 더 잔혹하다.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국 나는 인식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실존적 가치를 저하시킨다. 아니 더 잔인한 것은 그 인식의 대상이 눈앞에 있어도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점이다. 인식하지 않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로서 그 대상은 존엄성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본다는 사실은 정말 끔찍한 것이다. 예전에 나치 수용소 중에서 아우슈비치 수용소가 상당히 유명하다. 거기 소장으로 임명된 아이히만은 매우 끔찍한 홀로코스트, 즉 학살의 악마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막상 그의 재판소에 갈 때 그는 평범한 남성에 어떤 악의도 없이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관료주의체계의 인물이었다. 오히려 악의와 감정을 담아 상대방을 폭력과 억압을 행하는 사디즘의 포효가 아름다울지 모른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은 곧 미움과 동시 애정이란 아이러니한 감정이 오고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영동 1985>에서는 이런 감정을 담은 폭력과 감정이 없는 폭력의 차이를 보여준다. 차라리 개인의 감정이 담긴 폭력은 상대방이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도구로서 보이는 폭력 마치 라디오를 바라보며 전기공이 테스트를 하는 고문은 더 잔혹하고 끔찍하다.

 

4. 감독과 카메라

이런 상황을 정지영 감독은 카메라앵글로서 놓치지 않는다. 대담한 클로즈업과 그보다 더 대담한 익스트림 클로즈업, 지나친 고통과 비참한 상황은 발가락의 떨림으로 제스처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보통 영화들처럼 인간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보다는 인간이 욕망하지 않고 싶은 것을 욕망하게 한다. 환상의 영웅을 내세우기보단 비참한 희생자를 내세운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폭력과 고문, 그리고 고독과 절망을 보여준다.

 

따스한 햇살도 허락하지 않은 차갑고 어두운 방에 불려온 김종태의 시선에 보인 백열등의 전구는 마치 대낮에 태양을 보는 듯한 괴리감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인 김종태의 슬픔, 증오, 분노, 아픔, 절망과 거기에 보상되어진 자신의 현 모습에서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자막과 한쪽 눈에 비춘 고문증언자들의 모습에서 이 영화의 런닝 타임 106분은 마무리 되어 <남영동 1985>의 서사는 끝이 났으나, 그 서사의 끝은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다.

 

5. 이성의 시대 도래

그리고 그 서사의 주인공은 언제나 관객이다. <부러진 화살>에서도 서사의 결말이 항상 결말 같지 않은 요소를 이번에도 강조한 것이 <남영동 1985>다. 그 강조는 오히려 <부러진 화살>보다 <남영동 1985>에 가깝다. 전자는 법정권력 아래에 대한 의구심이라면, 후자는 우리 사회에 가진 전반적인 역사와 사회 그리고 인권에 대한 의구심이다. 헌법이란 것은 인간이 가지야 할 최소한의 권리, 즉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최소한의 보장이다. 그 헌법이 유린되었고, 그 헌법이 지향해야할 세계인권정신이 묻어지고, 폭력의 하나의 미로 숭배되는 점에서 그 사회는 파시즘의 날개를 피운 것이다. 파시즘은 대중들에 대한 통제와 더불어 권력의 유지가 되는 수단을 이어진다. 나치의 괴벨스가 왜 선동적인 구호로서 대중들을 폭력적으로 만들었을까?

 

위 지문과 생각하여 말해보자.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은 15~17세기 유럽이었다. 당시 17세기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즉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관념적인 사고였다. 그렇다면 생각을 한다는 이성적 행위에서 인간의 존재성은 바로 자신이 정상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이나, 과연 그 판단이란 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비판하는 이성을 가정할 교조주의로서 볼 것인가? 17세기에 마녀사냥이 성행했고, 죄 없는 자들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마녀가 아닌데도 마녀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김종태는 고문에 의해 아닌 사실을 말해야 했다. 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인상 깊다. 100% 재현성이 아니나, 내용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김선생, 나는 당신이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소, 나는 당신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 그 사실을 말하기를 원하는 것이오."

 

 

6. 폭력의 미학 

결국 사실이 아닌 거짓이 사실로 되어버린 것이다. 김종태가 실제로 있었던 공간과 거기서 행한 시간적 존재와 달리 다른 시간과 공간을 구성하도록 했다. 문제는 그것이 분명 잘못된 사실임에도 불구하도 거짓자백을 위해 잔인한 고문을 행한 것이다. 복도 옆으로 항상 들리는 남자와 여자의 비명들, 그리고 그 비명이 마치 일상 속에서 들리는 소음처럼 무덤덤한 관료주의자들까지 비정상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아주 침착하게 대응하고 분석적으로 움직이는 장의사의 행동은 소름이 끼치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의 혼을 가져갈 정도다. 그가 가진 죽음의 손길을 대사처럼 "나는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나가 6개월 만에 죽거나 혹은 3개월 만에 죽일 수 있어."는 마치 고문이 하나의 기술이고, 자신의 미를 관철하는 예술인 것처럼 말한다. 폭력이 미적 가치로 올라가는 것은 파시스트들의 특징이다. 이 영화는 결국 파시즘이란 폭력의 정치가 이루어진 시대를 다루었기에 그의 고문은 결국 예술로 된 것이다.

 

 

그가 처음 독불장군 김종태를 고문하면서 옆에 있던 수사관들이 모두 놀라며 심지어 박수까지 친다. 박수가 나온다는 것은 결국 장의사의 고문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폭력에도 미학은 존재하는 것인가? 다시 17세기 유럽으로 가보자. 그 시대에는 그토록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든 마녀사냥이 끝날 생각도 없이 오히려 더 가속화되었다. 마녀사냥 제물대에 항상 희생될 마녀가 필요했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서 소녀와 부인, 할머니와 장정, 이제는 남녀노소 가릴 것도 없이 말이다. 그들의 몸에서 튀어나온 인간의 신체조직들에서 고문가들은 무엇을 느꼈는가? 이 가여운 자들이 인간으로 보였는가? 아니면 진짜 마녀로 보였을까? 마녀가 아님은 알면서도 마녀가 만들어야 하는 그 사명감은 재정이 부족한 왕궁과 교회의 창고에 먼지조차 들어오지 못할 기회였다.

 

 

7. 가려진 가해자 

그들은 마녀로 몰린 자들의 재산은 모두 국고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재정도 채우고, 국민들도 공포정치로 통제하고, 1석2조의 효과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보이는 그 효과는 마녀사냥의 마녀처럼 권력기구의 정당성을 부여할 빨갱이가 필요했다. 고문자들도 김종태나 다른 인물이 빨갱이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도 빨갱이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결국 그들이 바라는 진급이란 관료체계의 목적과 자신이 가진 자리에 대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보상된다. 이 영화는 그런 그들의 욕망을 현실화하기 위한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즉 욕망의 성과는 고문의 잔혹성으로 등가 된다. 단지 고문에서 장의사의 예술성은 그들의 욕망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욕망까지 채워 주기 때문이다.

 

욕망의 충족에서 억압과 해방 그리고 폭력으로 감추어진 하나의 신화가 탄생한다. 신화(神話)의 탄생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부여한다. 우리 모두가 되고 싶은 화려한 환상의 신화인가? 아니면 우리가 모두 거부하는 희생의 욕망인가? 이 영화의 종말에선 그 신화는 김종태에서 장의사 이두한까지 손을 뻗친다. 이두한은 분명 1985년도에 아주 우수한 고문기술자였으나, 정권교체 후에 그는 범죄자가 되어야 했고, 수배 중에 구속 후에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러나 정작 장의사와 장의사를 부른 자, 그리고 장의사와 함께한 자들의 모습만 비추고 그들의 뒤에서 뒷손 쥐고 숨어있는 자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결코 나오지 않는다.

 

 

8. 등장하지 않은 인물

 

왜냐하면 괴물과 같은 고문기술자는 있어도 왜 고문기술자가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존재에 대한 동기유발성에서 또 다른 추리가 시작된다. 장의사는 남영동이 아니라 다른 곳인 지방까지 순회를 할 정도로 바쁜 고문기술자다. 그가 간곳의 반사회적 낙인이 찍힌 자는 누구나 굴복을 한다. 그래서 폭력의 미학이 되었던 당시 시대에 이두한의 모태인 이근안은 고문이 예술인 것이다. 나 역시 그의 고문은 예술이라고 본다. 예술이라고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테스크 적으로 괴상하고 섬뜩하며 인간에 즐거움이 아닌 오히려 즐겁지 아니함을 주는 것이어야 말로 예술이 된다.

 

 

부정하고 싶은 것을 부정하면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부정이 되는 그 괴상하고 비틀림이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대한 사유를 품게 하는 것이다. 저것은 아름답지 못하고 추하고 비틀렸기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가? 행복한 환상 속에는 무엇을 바꿀 의지는 없다. 현실과 환상 그리고 비현실적 상황은 누구나 비정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남영동 1985>는 단순히 고문당하는 김종태만을 피해자로 몰아넣지 않는다. 그의 고문을 위해 집에도 못가고 며칠째 같이 있는 수사관들, 그리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이계장의 모습에선 작품에서 보여주는 피해자의 영역은 점차 넓어진다.

 

 

9. 장의사의 미학

 

작품 중간에 김종태가 겉으로 승복한 척하나 다시 한 번 번복할 때 장의사는 그가 끝까지 저항하려고 했기보다는 장의사가 이때까지 쌓아온 관록을 부정해서였다. 단순히 반국가적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미학을 망쳤기 때문이다. 그 분노로 장의사는 마치 김종태를 개처럼 여긴다. 허리띠를 풀어 개목걸이로 걸고 옷까지 다 벗겨 마치 개가 걸어가게 했으며, 음식을 내어 국과 밥을 발로 섞게 하여 먹으라고 한다. 이런 비인간적 행위를 하던 장의사는 김종태를 개취급하기 소총을 가지고 와 겨누고, 자신의 미학을 짓밟은 대가로 총기 개머리판을 김종태의 성기를 내치려고 했다. 이때 이계장이 말려서 위기는 모면했으나, 장의사 이외의 다른 수사관마저 그 공포의 절망 속에서 자신들이 고문당하지 않아도 마치 고문당하는 것처럼 괴로워했다.

 

 

10. 사디즘의 미학

 

이계장이 김종태에게 감정을 품은 것은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그에게 소주를 억지로 마시게 한 것과 개인적인 울분에서 김종태를 구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적감정에 미안했는지 우유와 빵을 주었고, 장의사의 고문에 굴복하지 않는 김종태의 행동에 자신의 영혼이 파탄 나는 것을 느꼈다. 발로 마구 밟고 밟으면서 하는 말이 “제발 말 좀 들어라 말이야!"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감정적인 폭력 즉 상대방에 대한 가학적 행위에 대한 의지를 지닌 것이 더 인간적이었다. 끝에 보면 알겠으나 이계장 이외에 김계장이 김종태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되어 그 옆에서 수행하는 비서관으로 나온다.

 

 

감옥에 자기 대신 갇힌 이두한을 만나기 전에 김종태는 고뇌한다. 그럴 때 이계장은 자기도 같이 갈까요? 하고 물어보나, 김종태는 아니 괜찮다고 한다. 솔직히 자기 자신도 그 상황에 대한 악몽과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결코 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정신과 영혼을 파괴시켰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감정의 기복도 없이 전기스위치를 누르며 휘파람을 불면서 그 중에서 클레멘타인의 멜로디를 부는 그 모습은 정말 장난 이런 장난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장의사는 시간의 할당을 채우는 샐러리맨 같은 모습이었다.

 

 

11. 일상 안의 비일상

 

그러나 당하는 자와 보는 자는 치가 떨릴 정도로 괴로워한다. 전기고문, 물고문에서 김종태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의 떨리고 멈추어버린 발을 클로즈업하며 그를 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도 클로즈업을 한다. 영화 전체적으로 보면 클로즈업이 거의 절반에 이룰 정도로 많이 나온다. 그 만큼의 급박함, 그 만큼의 고통은 보는 이에게 숨을 막히게 만든다. 특히나 김종태가 아내에 대한 추억과 망상, 고문으로 고통 받는 장면에서 영상이미지가 이중으로 겹치는 르포몽타주는 김종태로 하여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점이 탈피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 상황인데 야구중계, 라디오음악방송의 세상이야기는 그저 평화롭다.

 

 

 

그러나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김종태의 비명소리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대립이 아니라 사운드와 사운드의 대립이 이어지는 사운드로 연출하는 몽타주다. 고문에 괴로워할 때 고문 후에 지칠 때 옆에서 장난치는 이계장과 김계장의 천덕꾸러기 같은 행동들은 김종태 뿐만 아니라 사실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던 것이다. 이계장과 김계장의 장난은 그들이 처해진 고문행위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상생활들이 비일상생활으로 되었기에 그들에게 장난이란 남영동 고문실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유희였다.

 

12. fiction vs faction

 

그 유희 속에서만 오로지 정상적인 인간은 마치 장의사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고문으로 지쳐 영혼마저 소진한 김종태를 바라보며 “지금은 내가 고문하지만, 세상이 바뀌면 대신 네가 나를 고문해”라는 식으로 아주 차가운 미소를 띠운다. 물론 세상이 바뀌고, 이두한은 교도소에서 김종태에게 사과하나, 김종태는 그 사과를 받지 않은 채 나오려 하나, 갑자기 이두한 휘파람에서 클레멘타인의 멜로디가 나온다. 모든 것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끝나지 않았다면 어디서 다시 시작이고, 끝이란 말인가? 계속 언급하나 정지영 감독의 작품은 fiction이 아니라 faction이다. 만들어진 사실과 만들어진 허구가 만나 만들어진 거짓 같은 사실이 나오고, 그것은 더욱 강렬하다.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에 의해 창조되므로 fiction이나 그 영화의 시나리온 도서 <남영동>은 사실이다. 사실을 거짓인 영화로 만들었으나 그 거짓의 세계인 영화가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거짓을 나타내는 매체로 탄생한 것이다. 문제는 항상 정지영 감독은 영화가 신화적인 공간에서 우리가 욕망하지 않은 인물로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개연성이 발휘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하나, 영화 <남영동 1985>는 역사를 전제한 영화다. 따라서 시보다 역사에 가까우나, 오히려 더 시적인 존재로 각인된다.

 

13. 불멸의 마녀사냥

그것은 처음 지문처럼 언젠가 마녀사냥으로 죽게 되는 사람은 당신의 이웃이고, 그 당신의 이웃의 이웃은 결국 당신에게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고문당한 자 중에서 단순히 그 당시 민주화 운동만 아니라 평범한 국민들도 아무것도 모른 채 고문당했고, 잊을 수도 없는 지난날의 악몽이 21세기에 들어오고 나서 겨우 누명을 벗었다는 것이다. 누명을 벗고, 국가로 손해 배상하여 보상받는다고 그들의 지난날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고문이란 것은 저기 스크린으로 보이는 한 인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 영화는 강조한다. 고문의 역사는 단순히 어느 개인을 파멸로 몰아넣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긋난 굴레에서 계속 방황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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