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1985
정지영 감독, 이경영 외 출연 / 루커스엔터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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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통한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 영화로 통한 정치적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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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무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
승효상 지음 / 눌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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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어떻게 하면 인간일 수 있는 것인가? 철학적 의문적 사고에서 레비나스는 제1의 철학은 윤리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윤리와 도덕을 분리한다. 가령 전에 베스트셀러로 팔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많이 인용했는데, 거기서 번역자의 실수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기전에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윤리 대신 도덕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원래 독일어로 된 칸트의 원전 도서와 영어로 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의 번역을 다르게 봐야 한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도덕이란 단어가 왜 위험한가에서 도덕은 하나의 사회적인 인식이나 관념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에서 미덕이란 단어가 붙는다. 가령 한국에서 시간이 늦어 오는 것도 미덕이라거나 혹은 덤으로 끼워주는 것이 미덕이라거나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미덕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윤리적 판단이나 선험적 기준에서 결코 좋은 것이 될 수만은 없다. 가령 어느 도시에 온 사람이 시골에 와서 마을주민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한다는 고정적 사고가 하나의 도덕이다.

 

단순히 도덕은 어느 국가만이 아니라 작은 소규모 사회나 공동체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이란 것은 위험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하나의 결정적 판단에 오류로 등장할 수 있다. 특히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코뱅파이 왕당파를 제거하고, 내부적으로 만든 국민공회의 상징성을 너무 지나치게 부여한 나머지 국민공회를 비판하는 자에 대해 제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영화 <당통>에서 실제 1793년에 일어난 일을 재각색한 팩션으로서 그 당시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국민공회 정부는 제일 중요한 자유의 요건에서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부정했다.

 

같이 자코뱅클럽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내부적으로 지롱드파와 대항하며, 외세침략까지 막아낸 동료들을 어느 순간 기요틴 아래에서 화려한 칼날로 그들의 목과 몸을 분리했다. 그리고 그 시대에서 그것이 하나의 도덕이다. 도덕이란 단어가 위험한 이유는 옳은 일이 나올 수 있어도 옳지 않을 경우가 허다했다. 국민공회의 경우 그들은 모든 법적인 통제 위에 있고자 했다. 국민공회를 무시한 자는 프랑스공화국을 무시하여 국민의 아래에 있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국민의 위에 있었다. 이로서 프랑스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배반했다.

 

웃기는 일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사회계약론>을 항상 들고 다니며, 하나의 상징을 부여했다.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가 루소의 가르침에 가장 반대되는 행위를 했으니 말이다. 도덕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처음에는 옳은 일을 해도 뒤에 지나가면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다고 이런 역사적 모순을 부정만 할 수 없다. 지금 프랑스가 문화, 예술, 철학의 나라가 된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다. 프랑스 파리에 3대 박물관인 루브리 박물관이 있다. 이것이 대중에게 공개된 이유는 국민공회가 국민을 위해 미술관으로 모두 공개한 이유다.

 

모순의 역사에서 그렇게 인간의 역사는 진보적으로 때로는 후퇴하기도 한다. 변증법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과도기 뒤에 도래하는 과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도 크고 잔혹하며 때로는 숭고하다. 영화 <당통>에서 당통은 자기의 목이 잘리기 전에 사형집행인에게 부탁을 한다. 사형집행인에게 자기 목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파리의 수많은 시민들에게 보여 달라고 말이다. 그는 어긋난 프랑스대혁명의 취지를 군중에게 각인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대혁명은 끝이 난다. 영화 <레미제라블>처럼 19세기에서도 계속 혁명은 일어나도 왕당파와의 끊임없는 투쟁을 벌인다.

 

 

그래서일까? 역사란 언제나 힘이 있는 자에게 영광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의 당연한 미덕이 되었다. 힘과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인간 스스로 신화를 만들어내고, 그 신화의 벽에 폭력, 억압, 착취라는 것을 만들었다. 민주자유주의국가에서는 그런 것들을 부정하나, 아직까지 이 3가지 단어는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숭고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란 슬로건은 여전히 빛을 보고 있다. 이 3단어가 아무리 사람들이 외쳐도 타인들은 왜 고통 받고 있을까? 그것에 대한 의문은 곧 윤리적인 철학적 사고로 이어지나, 가끔 그것이 거론되는 것이 바르지 않은 것 같다.

 

 

그것에 대한 의문을 건드는 사람은 마치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들거나 또는 용의 비늘을 건드는 행위와 같으리라. 이익도 되지 않고 충분히 자신에게 불리한 길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역사에 언제나 있는 법이고, 그것을 택하여 그의 생전에는 언제나 쓰라린 패배와 고통, 좌절, 그리고 절규만이 들린다. 때로는 허무하게 죽기도 억울하게 죽기도 한다. 내 인생에 길이 남을 영화 <당통>에서 스스로 기요틴 아래 목을 받친 당통이나, 당통을 죽일 수밖에 없던 로베스피에르가 존경하던 장 자크 루소,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편안한 길을 버린 카를 마르크스, 러시아혁명의 영웅이나 스탈린에게 살해당한 레온 트로츠키 등을 보면 언제나 역사에서 새로운 바람을 부는 이에게 비참한 죽음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비참하게 만든 자는 권력을 잡았고, 아주 후세에 이르러는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그런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사회가 과도기란 이유로 그들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도 어렵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이 주인이고, 양심의 자유가 있는데 말이다. 헌법에서 제시하는 민주주의정신과 현실의 도덕과는 괴리감으로 가득하다. 바로 그 괴리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으로 인해 갈등이 생겨 그것을 차근차근 해결해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다.

 

 

민주주의라는 사회구조는 절대로 평온하지 못하다. 오히려 시끄럽고 때로는 논란이 되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일이 많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회 내부의 갈등을 조율하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스스로 짊어가는 이가 누구냐는 것이다. 말과 행동은 일치될 수 없기에 그 행동의 주체는 항상 모든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즉, 상징적 존재가 되어야 하나 그 상징적인 존재가 신성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벌거숭이가 될 정도로 고통의 굴레를 지나가야 한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그런 짐을 지고 가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다. 물고문에 전기고문에 죽기도 하고, 살아도 몸과 정신이 성치 않아 고통스럽게 눈을 감는 이들도 있다. 이번에 소개한 승효상 교수의 <노무현의 무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은 바로 그런 굴레의 짐을 스스로 지고 가다 운명을 맞이한 어느 남자에 대한 추모서적이다. 책 본문에 인상 깊은 구문이 있다. 승효상 교수는 네이버캐스트 지식인의 서재에서 2번째로 나올 정도로 아주 박식하고 뛰어난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건축학으로 인정받으며, 한국종합예술대학교 학생들에게 건축을 가르친다.

 

 

그의 건축이 되던 노무현 비석,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술이야 말로 삶이고 정치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고, 미학이란 것은 철학의 칼로 예술을 가르는 것이라고 한다. 노무현의 죽음을 삶의 광학으로 보면 어떤가? 삶의 광학에서 그의 죽음은 그저 허무함과 아쉬움, 그리고 원망까지 섞여 있다. 오늘 회사에서 다른 부서의 상사가 자신은 노무현이 죽어서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왜 죽어야 하는 것이냐고 한다. 그런 말은 아는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던 그의 입장을 내가 직접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의 자살을 두고,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스스로 권력으로부터 추방시키고, 이제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으로부터 추방시켰다. 쓸쓸한 한국의 지식인이던 한 시민주의자는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승효상 교수는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가 저술한 <권력과 지식인>을 두고 노무현에 대해 논한다. “지식인이란 지역성, 주관성, 현재의 시점이라는 각각의 것들과, 보편성이라는 것 간의 상호작용에 반응하며, (중략)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지식인인 한,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하며,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여야 한다.”고 했다. 이때까지 프랑스혁명과 역사에 대한 명제로 통해 우리가 인류문명이 오면서 되풀이되는 비극적 인간의 모습에서 무엇이 바뀌고 찾았는가? 그런 노무현의 죽음이기에 그의 죽음은 상징성에 대한 부여가 쉽지 않음이다. 예술에서 그 중에서 특히 건축이란 인간에 대하여 유물론적인 구조이면서 가장 관념적인 부분을 지배하기 쉽다.

 

 

건축물을 보면 우리가 사는 집과 아파트, 빌딩과 조형물, 심지어 오랜 시간을 견딘 유적에도 존재한다. 건축물에 대한 미적인 부분에서 서양에서는 당연히 성당과 교회일 것이다. 그것들은 예술이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하다. 예술에서 숭고함을 너무 추구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하나의 기적과 같은 신앙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예술에서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그의 무덤은 작은 비석만 놓여 있다. 높지도 않아 거의 바닥에 누워있고,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여전히 시민주의자였다. 아마 법을 전공하였고, 대한민국 헌법 역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기본 되는 점과 존 롤즈의 <정의론>과 같이 정치적 자유주의를 추구한 대통령이었다. 그것에 대한 상징은 역시 시민이었다. 시민 대 시민, 만인 대 만인의 투쟁보다는 시민 대 시민이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의 비석은 우뚝 서있지도 않고 누워있다. 그의 비석 주변의 광장은 신성한 장소이기보단 누구나 밟을 수 있는 공간이다. 경계로 되어 있는 부분은 그의 작은 비석 주변이다.

 

 

그 누구라도 노무현의 비석에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승효상 건축가가 바라본 광학적인 삶이다. 노무현의 비석으로 가는 길은 독특하다. 입구에서 시작하여 마치 역삼각형이 퍼지는 모습, 그 앞에는 작은 호수 수반이 있다. 물이라는 공간 즉 생명을 말한다. 생명이 깃든 수반, 그것을 시작하여 죽은 자의 비석으로 간다. 노무현의 광장은 살아있는 자의 삶과 죽어있는 자의 죽음을 연결하는 통로다. 단지 그 수반의 모양은 미국 페미니스트 예술가인 주디 시카고의 작품인 <디너파티>와 흡사하다.

 

 

조금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생명의 공간 같기도 하나, 그 종점은 죽은 자가 있다. 하지만 죽음은 한 갈래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퍼진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고,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죽음의 시간 앞에 선다. 그래서 죽었다는 것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실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역삼각형의 공간을 보면 우리는 여러 갈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 중심에 노무현의 비석이 외롭게 누워있다.

 

 

그 외로운 비석 옆을 걸어가면 많은 직사각형 돌들이 틈틈이 메운다. 그의 삶과 죽음까지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아파하던 모든 이들의 소원과 명복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작은 비석까지 밟고 갈 수 있다. 비석으로 이루어진 길을 밟으며 같이 그들의 마음에 공감한다. 이 광장은 끝까지 시민 대 시민으로 남은 것이다. 스스로 권력 속으로 은폐하여 신화화하지 않으려한 노무현, 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이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는 신이 되었다.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신이 아니라 인간의 억압을 해방하려고 한 신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사회적 타살이란 자살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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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1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500점이길래 대단하다 했는데 20000점이니 후덜덜하네요....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3-03-19 22:43   좋아요 0 | URL
이게 다 덕심인겁니다! ㅋㅋㅋ
 
만화보다 쉽고 재미있는 만화 리뷰 쓰기 새로운 글쓰기의 보고 세상 모든 글쓰기 (랜덤하우스코리아) 18
박석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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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리뷰해보는 입장에서 만화애니메이션 리뷰라는 것에 대해 무엇일까? 라는 고민은 종종 해본다. 나 같은 경우 제법 만화와 애니메이션 리뷰를 쓰기가 제법 기간이 되었고, 최근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고 하는 라이트노벨과 같은 sub-culture에서 대중적으로 사람들이 접하는 소설과 영화까지 리뷰하게 되었다. 게다가 책도 철학, 미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과 같은 인문사회학 도서까지 서평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부족한 면들이 많은 점들을 인정하고 있으나, 전방위적인 글을 적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리뷰라는 것이 단순히 어느 특정 장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여러 가지 관점으로 통해 보고 듣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 시작이 나에게 sub-culture라는 것이다. 그래도 sub-culture라고 할지어도 만화 리뷰를 쓴다는 것은 결코 만화만 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른바 만화 읽기, 또는 구조주의 기호학으로 통해보는 영화보기에서 영화읽기와 같은 애니메이션 리뷰는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지나 하나의 분석적 텍스트의 해석과 더불어 학술적인 영역으로 구축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담론을 제시하는 문화가 기본적으로 약하다. 게다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그런 담론을 만들 수 있는 공간적 규모나 시간적 흐름이 부족하다. 박석환 선생님도 언급한 부분도 있으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만화라는 것을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만화가 프랑스에서 제9의 예술이라고 한다. 만화 역시 예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예술적 가치로 인정받을 수 없으나 만화작가라고 하면 프랑스에선 하나의 예술작가로 인정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작가들의 작가정신 내지 다양한 실험정신과 오랫동안 누적된 문화적 소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프랑스 만화책인 <푸른 알약>과 그 후의 <페르세폴리스>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코믹스의 개념과 다른 하나의 예술과 사회적 담론,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고발의식이 무척이나 강했다. 만화라는 것이 작가의 손에 의해 상상력과 서사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종이 위에 펼치지 공간이란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 공간을 우리 독자들은 서로 누리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윤리는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은가? 정해진 틀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 우연히 아마 미술학을 강연하는 교수님인듯 싶은데, 그분의 블로그에 우연치 않게 들어가서 예술과 예술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가치관을 적은 글을 보고 크게 공감했다. 예술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해야할 운동이고, 특히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과 예술은 예술로서 머물기보단 예술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저항이란 것을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문학,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을 계속 봐도 어느 작품의 특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기존의 틀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끝이다. 비평가는 그런 새로운 시도에 대해 다르게 보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전환, 사상의 전개란 매우 중요한 것 같았다. 그런데 만화라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에서 <만화 리뷰 쓰기> 머리말 이전에 중요한 어구가 나온다.

 

 

‘만화는 꿈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꿈을 실현하고, 독자는 주인공을 동경한다. 만화 리뷰는 그 꿈을 먼저 경험하고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현실의 답답함을 느낀다. 다소의 내가 도망칠 공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권태감이 밀려온다. 인간에게 놀이와 여가생활은 그래서 필요하다. 하지만 같은 것만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을 접하기에는 뭔가 대중문화에서는 한계성이 보인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리뷰에서 지나 이제는 비평까지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들어가면 문화를 연구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만화 리뷰 쓰기>에서 저자 분은 영국 버밍험대학에서 운영하는 현대문화연구소를 중심된 “문화연구”라는 분야를 언급했다. 문화연구는 단순히 대중문화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현대문화연구소의 도서를 읽지 않았으나, 적어도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로 통해 문화연구는 영미 문화인류학에 큰 영향을 준 점과 본래 나 같은 경우 사상적으로 문화인류학에 관심을 갖고 비평을 했기 때문에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만화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생각이나 무의식적인 사고를 그대로 그림으로 옮길 수 있다. 만화가 예전에 억압이나 탄압이 되는 이유도 만화라는 매체가 다양한 사고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처음 한국에 만화역사를 들여다보면 만화는 그저 오락물이 아니라 시대풍자물이나 혹은 항일정신으로 시작되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은 아주 간단한 한글과 그림만 그려도 대략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시사만화가 대부분 1장으로 된 점과 그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강하게 전달하고 싶은가에 대한 수사학적인 관점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그런다고 만화는 이제 1장 위주에서 혹은 4컷으로 나오지 않는다. 책 한 권에 150페이지가 넘고, 이제 단편이 아닌 장편 서사로 나온다. 그만큼 만화에서도 서사의 전개되어 그 안에서 담론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만화에 대해 보는 것에 읽기 위해서는 다양한 담론은 반드시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문화연구라는 것은 비판적 분석이 요구되기에 많은 학문적 기초가 필요하다. 텍스트가 의미하고 시대적 상황과 거기서 찾아내는 미적인 요소란 무엇인가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만화 리뷰 쓰기>에서도 제시한 것처럼 다양한 학문을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아는 문화연구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의거해서 만들었다. 한국에서 아직까지 마르크스주의가 낯설지 모르나, 프랑스의 구조주의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문화산업 이론에서도 마르크스주의는 유용하다. 예전에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서적을 읽다가 그가 한국 하회마을에 방문한 사진을 보았다. 그의 인생에서 3가지가 자신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지질학”이라고 했다.

 

 

프랑스 최고의 학술기관의 교수에다가 세계적인 지식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현실은 조금 아쉽기만 하다. 문화비평에 대한 도서는 문화적 분석을 중시하므로 다양한 사상과 자유로운 담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오늘 블로그 활동에서 영국의 철학자 겸 수학자인 버드런트 러셀 경을 좋아하는 같은데, 그 분의 블로그에 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고 말이다. 예전에 만화규장각에서 출간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한국 만화문화의 비평을 열어준 분이 김현이라는 문학비평가였다.

 

 

이분의 어록에서 “만화를 어린애들이 보는 유치한 수준의 그림이 아니라 구파라가 새로이 만들어내려 하는 한 예술의 형태”, “단순하게 유치한 것으로 생각하는 나의 사고 자체가 사실은 유치한 것”,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 “만화비평이 가야 하는 것은 결국 그 사회 비평적 성격의 만화적 형태가 대중들의 어떤 심리와 결부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곳이다.”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아마추어로 만화리뷰와 비평을 하는 나에게 만화리뷰나 혹은 만화비평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만화를 읽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의미하는지 찾아내어 리뷰어 내지 비평가가 새롭게 재구성하여 창조하는 것이다. 리뷰와 비평은 제2의 창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만화규장각에서 독자리뷰 게시판에 활동한지 3년 정도 되어가지만, 늘 만화를 리뷰 및 비평하면서 새로운 담론이 늘고 있음을 느낀다. 최근에 아이큐점프에서 연재하고 있는 <금지소년>을 단행본으로 접해보면서 내가 아주 중고등학교 시절에 보던 만화의 내용이나 그림체 심지어 시대적인 조류가 많이 교체되었음을 느낀다. 작가분인 임진주, 임애주 자매가 그런 코믹스를 그리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장르까지 그리는 점에서 한국에도 다양한 만화작가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정부의 규제가 너무 강화되었다는 것이 불만이다.

 

 

만화 대부분은 젊은 계층과 특히 학생들이 많이 본다. 만화를 아직까지 유해요소로 보는 어른들은 아주 많다. 만화가 모든 공부의 방해요소로 보는데, 내가 아직 학창시절만 하더라도 내가 만화를 보기 위해서는 만화방에 가거나 혹은 책을 대여해야 했다. 주간지 만화책을 사면 집에 보관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으며, 보기 위해서 방에 몰래 감추어야 했다. 만화책도 그렇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소년챔프라는 만화였다. 아마 <슬램 덩크>나 <사신전>, <노노보이>와 같은 만화를 아는 분이라면 이 추억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몰래 사서 봐야 한 점에서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풀 공간이나 혹은 잠시나마의 오락을 즐긴 여유조차 어른들을 바라지 않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에 대한 법률이 과거의 아동청소년 보호법의 법보다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조치들은 만화시장을 축소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형태가 되는 꼴이다. 전에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국내에서 19금으로 설정되었는데, 막상 영화를 봐도 진짜 잔인한 요소는 나오지 않고, 성적으로 과격한 부분도 없었다. 외국에서는 <피에타>를 두고 청소년들이 감상 후에 서로 토론을 했다고 하니 우리의 담론문화가 약한 것과 표현의 자유가 부족함을 다시금 느낀다.

 

 

만화를 보고 리뷰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표현적인 영역을 보는 것이다. 특히 소재가 문제라는 것이다. cliche 요소가 강한 것은 그만큼 표현주의적 미학을 가진 만화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이다. 그래서 분석과 비판이란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좋았는지 말이다. 하지만 만화 역시 표현의 자유라면, 만화를 보고 글을 적는 것도 일련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 만화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어야 하듯, 비평가는 자유롭게 담론을 이끌어 가야 한다. 대신 자유라는 것은 무책임하면 방종이라는 점과 거기에 합당한 책임을 지어야 하는 점이다.

 

 

개인적 작품과 사견들이 공론화되는 순간 그 그림과 글들은 만든 자들이 책임을 져야할 가치관이다. 예전부터 나도 생각했으나 <만화 리뷰 쓰기>에서도 그런 책임의식을 강조한 것 같았다. 만화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이 가까울지 모르나, 화면 위에 문자텍스트보단 그림 이미지만 나열하고 단 몇 줄만 적고 리뷰라고 지칭하는 태도는 책임감 없는 글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애니메이션은 사실주의가 아니라 표현주의이기 때문에 무엇을 나타내고 싶은지가 중요하다. 그것은 글을 적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와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힘들겠지만, 옆에 있는 일본의 경우를 보면 그 나라의 불안한 심리나 사회적 어둠을 소재로 만든 작품이 많다. 보더라도 다소 문제성이 보인 소재도 역시 나와 그것을 비판적으로 대할 수 있으며, 또는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다소 역사주의적 관점일 수 있겠으나, <사기꾼, 우시지마>라는 작품은 작년에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인 <화차>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화차>를 언급해서 그런데 만화는 사실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소재거리가 많다.

 

 

허영만 화백의 <비트>, <식객>, <타짜> 등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인기를 구사했다. 또는 신영우의 <키드갱>과 같은 것도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했다. 그 외에 많은 만화가 드라마 소재거리로 이용되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 방송작가들의 패턴에 얽매인 매너리즘에 빠진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 시청자도 그런 것에 빠져 있다는 의미이다. 대표적인 한국 드라마에서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작품을 보면 신데렐라 콤플렉스나 캔디 이데올로기가 항상 존재한다. 틀에 박힌 구조에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것은 드라마 <삼순이>를 보더라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문화적 비판에서 일반 국민들이 리뷰어나 비평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단지 소비만 하는 구조에서 그 문화에 대한 비판적 수용은 국민 스스로가 문화적 의식을 전반적으로 상승할 수 있으며, 작가의 매너리즘적인 요소를 바꿀 수 있는 하나의 칼자루가 된다. <만화 리뷰 쓰기>에서도 독자의 리뷰나 비평은 만화가로 하여금 새로운 전환점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순수하게 작가의 작품을 이래저래 건드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인기드라마 여론몰이에서 등장인물의 출연부분까지 바꾸는 형태가 발생된다.

 

 

단순히 만화를 쓰는 방법에 대한 책에서 왠지 모르게 한국 대중문화와 사회적 비판까지 들어가니 내가 이 책을 읽은 후의 서평이 왠지 모르게 판을 키운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화를 그리거나 보는 사람들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결코 만화가 다른 세상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했다면 만화분서갱유나 혹은 규제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만화와 그 만화문화로 통해서도 충분히 사회와 소통이 가능하다. 그래도 그 소통하는 길에도 분명히 그것을 위한 전과정이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화 리뷰 쓰기>는 만화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를 적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도 조금 권할 만하다. 가장 흔하게 주변에 보이기에 가장 쉽게 혹은 어렵게 담론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만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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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서양미술사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서양의 미술의 역사를 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미술이라는 것은 조각과 건축, 석고 등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화폭에 담은 회화일 것이다.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의 고전예술편에서 보인 대부분의 예술들이란 모두 회화 중심적이다. 반면 나중에 읽을 <서양미술사>의 모더니즘 편은 사진을 이용한 것도 많을 것이고, 게다가 아방가르드 예술을 다루기 때문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를 알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 이전의 이야기도 다룰 필요가 있다.

 

예전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읽어서일까? 어째든 고전예술을 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포스트모던의 이전의 이전인 전근대적인 영역을 읽어봐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전적인에서 중세 르네상스와 바로크와 로코코, 낭만주의 다시 현대에 와서는 새로운 예술의 세계에서 인간은 예술에 대해 바라봄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가능성을 열어준다. 일단 나는 예술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것은 인간이 즐겨야 할 하나의 대상이라고 여기나 솔직히 예술이란 것은 왠지 모르게 우리 일반사람들과 분리된 영역으로 자리 잡는 것 같았다.

 

프랑스 사회학자이면서 양심적 지식인 중에 하나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에서 예술이란 취향과 취미로서 인간의 계급과 신분이 갈림길이 나뉜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누가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를 읽고 누가 따분하게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읽으며 알 수 없는 그림으로 가득한 화랑에 가려고 한다는 말인가? 물론 가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나 그것이 전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문화적 수준이나 여건이 잘 구비된 서울경기 수도권이면 모르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본력의 차이로서 직접적 구별 짓는 것도 가능하나 그것을 직접 현찰로서 보여주기란 어렵다. 단지 자본의 매개로 한 상표나 기호들이 알 수 있게 해주고, 혹은 취미와 취향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전에 여성들이 원하는 남성에 대한 취미 호감도에서 승마와 클레이 사격, 요트타기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취미생활이나 자본력을 생각하면 전혀 단순하지 못한 취미다. 그것은 자본력의 지표를 알게 해주는 알레고리적인 자본주의 구조의 구별 짓기이다.

 

그런다고 이것은 지적인 미를 가지지 못한 취미일 뿐이다. 미를 추구하는 것은 물론 자본에 의한 부분도 있으나 자본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미학(美學)이란 것을 처음 접할 때 내 자신은 미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답이 없다. 미학을 정립한 인물이 임마누엘 칸트로서 그의 저서인 <판단력 비판>을 읽어보면 미란 개인적 취향이나 철학보다 보편적이라고 했다. 솔직히 고전예술을 다룬 <서양미술사>에서 어느 한 미술비평가인 빙켈만이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72점 만점에 절반 수준을 준 것을 본다면 과연 그렇다.

 

단지 그는 자신만의 입장에서 미를 관찰하려고 했다. 단지 그는 남들과 다른 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그리스의 미는 남성중심문화이다. 특히 스파르트왕을 소재로 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테르모필레를 지키는 레오니다스”라는 작품을 보면, 빙켈만이 원하는 작품일 것이다. 동성연애자란 사실에서 그는 이미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났다. 현대에서 게이라는 성정체성에 대한 의문적 영역에서 그나마 관대한 편이다. 근대시대에는 그것은 용서받기 힘든 입장일 것이다. 그렇기에 빙켈만의 시점이 헤겔의 미학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되고, 그의 관점에 대한 부분이 현대에도 미치는 것만으로 대단할 수 있다.

 

그런다고 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고전예술을 읽는 것은 단순히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닐 터이다. 빙켈만이 추구하는 것은 아마 동성애라고 해도 그리스시대의 동성애일 것이다. 우리의 문화와 다르게 그리스에서 말한 에로틱이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어른 남자와 소년의 관계이다. 어른남자가 가진 지혜를 어린아이에게 전해주는 것에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빈 해리스의 <작은 인간>을 보면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는데,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로 날린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3대 스승과 제자는 소년애자였다고 한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잘 생기지 않음에도 많은 소년들이 그에게 구원을 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국가정체>를 읽어보면 빙켈만이 추구하는 이상적 영역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의 시민들은 모두 전쟁을 하면 참여하는 군인이기도 했다. 평소 폴리스 정치에 입문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들은 전쟁에서는 그 누구보다 위대한 장수이고 병사였다. 영화 <300>의 주인공이라 볼만한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강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 하지만 여성에게 열려있지 않은 영역은 남근중심사회의 그리스에서 남성 자체가 미의 대상이다. 그래서일까? 그리스미학을 보면 조각상들이 남성의 육체미를 한참 뽐을 낸다. 원반을 던지는 남자의 경우 석상이란 단단한 원재료에서 아주 부드럽고 유연한 포즈를 취한다. 그리스의 아름다움이란 남성의 육체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움 기준을 지금 시각에서 다룬다는 것은 웃긴 일인 것은 미학에서 미란 그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사건으로 모두 이루어진 하나의 산물이란 점이다.

 

미란 당시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당연한 속성을 부여한 산물이다. 때에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그런 부분은 지금까지 내려온다. 유럽의 유명한 성당이나 교회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 시대의 건축기술과 내부의 채화와 유리창에 비추는 큐비즘 같은 빛의 조화에서 큰 감동을 느끼며 예술이라고 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충실한 신도 내지 신부님은 예술이 아니라고 볼 것이다. 그것은 곧 주님의 영광이고 은총이나 또는 은혜이고 복음의 전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한 취향비판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말이다. 반드시 칸트가 아니더라도 이 책에서는 미술비평가들의 등장을 아주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미술비평가들은 미술품에 대한 담론으로 통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게 하는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전에 읽어본 진중권 교수의 <현대 미학강의>에서 마르틴 하이데거 편을 참고하면 오히려 비평가들이 넘치고, 감정사나 전문가의 증가는 작품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라 한다.

 

당시 작품을 만든 작가들에 대해 생각하면 같은 소재로 만들어도 그 자체가 원본이라면 이제 영상복제가 가능해지기에 원본 대신 사본이 넘치면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나리자가 미술관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걸려 있다. 그것이 원본이 아니더라도 원본보다 더 가까운 원본으로서의 사본이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것이 숭고의 대상, 즉 예술이기보단 하나의 의식적인 상징이라면 상징성의 해체는 시뮬라크르라는 이중적인 잣대에 의해 해체된다. 그런다고 해도 그리스도나 석가모니의 사진이나 그림들이 예술적 가치보단 신앙적 가치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사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한국문화재를 보면 대부분 불교미술인 것들이 많다. 미술적 가치에서 저것은 예술보단 불교신자에겐 하나의 신앙심을 자극하게 되는 숭고한 존재다. 미술의 자체를 보면 예술로서 영역보단 정치적 사회적 요소가 강하다. 혹은 아니라면 그리스의 기술적인 요소도 그렇다. 절대 황금비율은 지금도 내려와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교통카드도 적용된다. 인간의 미라는 것은 단순히 어느 것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 취미에 대한 판단은 역시 개인적 영역이다. 그런다고 기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딱히 정해진 기준만 따라 가는 것이 아니.

 

칸트는 ‘기준에 대한 기준’을 정립하려기 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당대 평가는 그 시대의 조류에 의해 결정되는 통시적인 부분이 강하다. 물론 지금이라도 그리스 고대석상이나 다비드의 그림이나 후대에 나온 피카소나 마그리트의 그림이라도 당대 평가가 엇갈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기준에서 후대로 나오면 이 작품들은 공시적으로 인정받는다. 예술작품에 대해 우리가 보는 것들이 후대로 가면 가치를 정하기란 어렵다. 당시의 기준이 있다면 후대의 기준이 있고, 후대의 기준으로 그 작품들을 만들어보는 시도는 그리 쉽지 않다.

 

단지 따라 그리는 정도로 생각하는 모방 수준인가? 상상력의 세계에 있는 재현이라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음에 대한 가시화에서 우리의 상상력과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은 다를 것이다. 러시아 화가가 그린 성벽그림이 타원이 되어 있어서 보는 이에게 저것은 직각이 아니라서 이상하다고 하나, 러시아 당시 기준에는 직각인 것이다. 보는 시점과 각도와 그리고 원근감을 다양성을 추구했기 그렇다. 그것이 그 당시의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미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반드시 그것이 오늘 날 우리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를 풀어주는 것에 해결되지 않는다. 예전에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미학이란 어느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좋은 옷을 사주거나 혹은 월급액수를 늘리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미학을 알아야 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로 통한 미적 감각을 살리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어차피 영원성이 부여된 존재가 아니라 유한성의 존재다. 그림으로 보는 존재성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무한성 즉 영원성이다.

인간 개인은 유한적이나 그 유한적이기에 욕망으로 드러나는 영속성은 그림으로서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 인간이 유한적 존재이기에 자신이 유한에서 무한적 존재성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기여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자본의 중요성은 인정하나, 자본으로 해결되지 않은 영혼과 정신의 목마름은 예술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몇 만 원짜리 전시회에 가서 모르고 내가 거기 다녀온 것만 이야기하는 것보단 차라리 그 전시회에 걸린 그림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다. 최근에 피카소의 그림이 수백억에 이른 금액에 팔린다고 한다.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어긋난 세상에 대한 패러디다. 그 패러디들을 계속 유지하는 자들이 피카소의 패러디 같은 그림을 산다. 그렇다면 승리자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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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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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반적으로 설계나 디자인 쪽으로 부르는 단어 중에 조감도라는 것이 있다. 조감도(鳥瞰圖)란 시선이 인간이 아니라 새가 보는 시선이란 점이다. 사람은 지면 위에 두 다리로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데 있어서 정면과 측면이 위주이고, 사물의 높이가 높으면 우러러 보는 것이고, 낮으면 아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 도시의 사물들을 보자. 길가에 많은 사람들, 지나가는 차들, 그리고 sky scraper, 즉 마천루의 빌딩이다. 우리 인간은 현재 나무와 꽃으로 이루어진 들판과 숲이 아니라 차갑고 무거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라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인간이 만들었으나, 오히려 인간보다 높은 곳을 점지한 사물들, 특히 건축물들을 보면 우리 고개를 더 이상 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높다. 먼 곳에 있다면 원근법으로 시야에 들어올 줄 모르나, 적어도 바로 눈앞의 빌딩이라면 무리일 것이다. 게다가 목도 저려 올 것이고, 한 낮의 태양은 눈을 아프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물의 배치를 직접 볼 수 없기에 우리는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그게 바로 조감도다. 새의 눈으로 보는 것은 하늘에서 보는 지면의 모습이다. 어느 대상 건물보다 높은 건물에 올라가지 않거나 혹은 헬기를 타고 하늘 위를 날지 않으면 보기가 어렵다.

 

보통 상황에서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 63빌딩이나 남산타워를 생각하면 좋은 예이다. 그런 점에서 <교수대 위의 까치>라는 작품은 조감도로서 보는 그림이 아니라 교수대위에 까치를 올려놓음으로서 조감도라기 보단 언덕에서 보는 전경을 마치 까치가 보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조감도적인 영역보다는 그저 까치가 교수대 위에서 보고 있다는 것에서 까치가 왜 교수대 아래를 보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까치가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 목을 매달아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에 까치를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교수대에서 목에 행어를 맨 사람이 죽은 뒤에다. 그 사람이 죽었다면 비로소 까치는 그 자가 시체란 사실을 안다. 그러나 교수대 위의 까치는 까치라는 제목처럼 까치가 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까치가 보고자 하던 대상이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들은 당시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피터르 브뤼힐이라고 한다. 당시 그가 살던 네덜란드는 이런 그림이 나올만한 상황이라고 한다. 본문을 보면 가톨릭의 횡포에 반대하는 칼뱅주의 신교도들이 가톨릭교회의 성상을 파괴하는 봉기를 일으킨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다보면 마녀사냥은 16세기부터 유럽을 강타하고 17세기에 극에 처한다. 곧 그것은 교황과 왕권의 결탁에 따른 부정한 재산축제나 무능한 정치적 행위에 따른 사회적인 불만이 고조된 점이다. 그런 것들이 민중들을 억압하기 위해 광기의 역사 중에 역사인 마녀사냥을 일으킨 것이다. 오히려 제정신이 아닌 자가 정상이고, 정상인들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에서 칼뱅주의 반란자들은 곧 제압의 대상이 되었다. 책에서도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보복이 1567년에 시작되었고, 악명 높은 공안평의회라는 기구로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저승의 신인 하데스가 키우는 개인 케르베로스에게 먹이로 주었을 것이다.

 

죽음이 일상처럼 되어버린 세상은 정상일 가능성이 없다. 인간의 고통에서 최고의 고통은 아마 죽음일 것이다. 혹은 죽음조차 행복이라고 여길 수 있는 고문이 더 잔혹한 고통일줄 모른다. <문화의 수수께끼>에서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더 잔혹하고 철저한 고문을 받아 고통스러워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이 행복했다. 교수형이나 참수형이라면 행운일지 모른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과정이 화형이라고 한다. 나무장작에 올린 사람이 그대로 뼈가 보일정도로 불에 타는 과정을 광장에서 펼쳤다. 이때 사람들은 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언젠가는 자신이 될지 모를 상황이나 사람들은 희생자를 마녀 내지 악마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는 그 어느 개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 개인이었고, 그 개인을 만든 것은 사회적 구조다. 권력의 비리와 부패에서 그 대체적 희생물은 언제나 약자인 군중이었다. 군중은 거기에서 자신은 무관하다고 본다. 사실 무관한 것은 바르나 그것부터 틀린 답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비단 정치적 자유주의를 원했던 사람이었나? 그냥 아무 것도 아닌데도 잡혀간 사람도 많았다. 삼청교육대에는 평소 원한이 있던 자를 무고하여 보냈으니 교수대위의 까치는 여전히 날라 다니고 있다.

 

그런 교수대위나 혹은 장작더미 위나 고통스럽게 죽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가끔 어느 사형은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행하는 사람이 대중들이다. 돌을 던져 죽이는 사형에서 대중들은 잊고 있다. 자신이 던지는 돌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부조리하게 살아가는 대중들, 그리고 그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권력과 그 권력에 입맛을 다시는 지식인들, 이 모두가 부조리였다. 피터르 브뤼힐의 그림에서는 이런 부조리를 비웃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까치가 당시 세상을 보는 시점이라니? 새가 판단할 수 없는데, 새가 판단하라는 것은 이성의 상실을 의미할 것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문구가 이 책에서도 나오는데, 사형은 최고의 구경거리고, 한편으로 사형은 군중의 알 수 없는 심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놀이였다. 책에서도 교수대 아래에서 춤을 추거나 혹은 똥을 누는 모습은 사형이란 하나의 제의적 성격이 다르게 보인다. <감시와 처벌>에서 프랑스 왕 루이를 살해하려한 하급관리관 다미엥의 죽음은 앙시앵레짐의 폭력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다미엥의 죽음처럼 특정 인물을 살해한 인물은 모르나, 강도나 범죄자의 죽음은 특이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도덕적 행위에 따른 문제이기도 하나, 그 시대적 배경과 밀접하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도둑질하지 않으면 죽을 운명, 거기에 군중들은 감화되어 교수대 위의 죄수를 풀어주고, 심지어 사형집행인을 살해한다. 부조리한 것에 대해 부조리로 응하는 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다. 헤겔의 미학처럼 찬, 반, 합처럼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다. 차라리 아도르노처럼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다.

 

인간의 부조리에서 진중권 교수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미학이 반드시 아름다운 서양미술사 위주로 가는 것이라고 보여주지 않는다. 다소 더럽고 광기에 빠지며, 불완전한 것을 다루기도 한다.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Non-Finito이란 미완성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한다. 때로는 미완성이기에 더욱 완성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완벽한 대상을 창조하면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에서 예술적 영역인 산업디자인의 발달로 인해 조금 의미가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산업디자인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일정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가령 빨간 자동차에서 호스를 들고 있는 소방관이 있고, 그 주변에 119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다면 분명 화재신고는 119라는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중권 교수가 <미학 오디세이>에서 자주 사용하는 그림인 르네 마그리트나 에셔의 작품을 보자? 그것은 일정한 의미를 두기 어렵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보면 다른 해석이 나온다. 물론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일치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철학보다 취미판단이 더 보편적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불편한 것에 대한 의미, 혹은 알아보기가 힘든 것에 대한 의미, 낯설기 만들기에 대한 의미에서 <교수대 위의 까치>는 매우 재미있는 그림들을 소개한다. 다소 서양예술사-고전예술편을 보고 난 뒤에 봐도 이해력을 올리기는 좋을지 몰라도 전혀 무관하게 책 내용이 진행된다.

 

아름다움을 논하기보단 차라리 진중권 교수가 살아오면서 조금 특이한 감상력인 지적 호기심을 전달해 준 점에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 라는 의문이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모호한 것들을 다룬다. 모호함에서 아이와 어른의 이야기다. 지금의 사회에서 어른과 아이는 전혀 다른 신분으로 다룬다. 아이라는 대상은 곧 학생이다. 학생은 어른이 아니면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가 전혀 없다. 학교라는 제도가 결국 아이라는 사람을 구분 짓게 하는 하나의 제재가 되었다. 옛날에 학교라는 제도가 없고, 설사 있더라도 일부 귀족이나 성직자에게 열려 있는 특수적 조건이라면 말이 다르다.

 

태어난 아이들은 치아가 조금씩 나기 시작할 때부터 집안일을 돕는다. 사소한 가사부터 시작하여 농장일과 목동일도 한다. 우리는 천사적인 인간을 묘사할 때 주로 양을 치는 목동을 사용하고, 그 목동은 어린 소년이다. 아주 어린 소년이 가장 아름다운 천사와 부합한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관점이다. 그러면 그 목동은 일을 하고 있고, 자신의 가치는 자신의 노동이란 마르크스의 말처럼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이 아니라 작은 어른이란 의미가 새롭다.

 

지금의 시대와 전혀 다른 관념이 존재하기에 아이들의 모습은 어린 아이의 모습보단 어른의 축약판에 가까웠다. 보통 성인들의 신체등신이 7등신 내지 8등신이 기본이나 어린 아이들은 거기에 비해 5등신 내외이고 초등학교(요새는 성장발육이 빠르나) 다니는 아이들만 해도 6등신 체형이 많다. 그들에게 성인들의 등신을 부여한다는 점은 산업사회 이전의 농경사회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노동력을 이미 어린 시절부터 발휘하는 점이나, 군대 안에서도 10대 중반의 청소년이 근무하는 내용도 볼 수 있다.

 

잔 다르크라는 소녀 역시 10대인데도 전쟁영웅이 되었다. 그런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어른들의 축소판이란 점에서 조금 재미있던 내용이었다. 독창적인 그림읽기라고 하나, 그것은 독창적인 시각보단 당시 독창적 그림들을 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독창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독창적인 것을 찾아내어 다시 꺼낼 수 있는 그 방법이다. 우리는 항상 상상력을 억압하고 독창성을 냉대한다. <교수대 위의 까치> 결코 낯익은 요소가 아니라 한 번 우리가 생각해서 나쁠 것은 없다. 인간이 매일 밥만 먹고 살 수 없고, 같은 것을 다른 식으로 무한 반복하여 보는 레디메이드 콘텐츠에 길들여져 가는 것도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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