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리뷰해보는 입장에서 만화애니메이션 리뷰라는 것에 대해 무엇일까? 라는 고민은 종종 해본다. 나 같은 경우 제법 만화와 애니메이션 리뷰를 쓰기가 제법 기간이 되었고, 최근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고 하는 라이트노벨과 같은 sub-culture에서 대중적으로 사람들이 접하는 소설과 영화까지 리뷰하게 되었다. 게다가 책도 철학, 미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과 같은 인문사회학 도서까지 서평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부족한 면들이 많은 점들을 인정하고 있으나, 전방위적인 글을 적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리뷰라는 것이 단순히 어느 특정 장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여러 가지 관점으로 통해 보고 듣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 시작이 나에게 sub-culture라는 것이다. 그래도 sub-culture라고 할지어도 만화 리뷰를 쓴다는 것은 결코 만화만 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른바 만화 읽기, 또는 구조주의 기호학으로 통해보는 영화보기에서 영화읽기와 같은 애니메이션 리뷰는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지나 하나의 분석적 텍스트의 해석과 더불어 학술적인 영역으로 구축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담론을 제시하는 문화가 기본적으로 약하다. 게다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그런 담론을 만들 수 있는 공간적 규모나 시간적 흐름이 부족하다. 박석환 선생님도 언급한 부분도 있으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만화라는 것을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만화가 프랑스에서 제9의 예술이라고 한다. 만화 역시 예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예술적 가치로 인정받을 수 없으나 만화작가라고 하면 프랑스에선 하나의 예술작가로 인정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작가들의 작가정신 내지 다양한 실험정신과 오랫동안 누적된 문화적 소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프랑스 만화책인 <푸른 알약>과 그 후의 <페르세폴리스>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코믹스의 개념과 다른 하나의 예술과 사회적 담론,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고발의식이 무척이나 강했다. 만화라는 것이 작가의 손에 의해 상상력과 서사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종이 위에 펼치지 공간이란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 공간을 우리 독자들은 서로 누리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윤리는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은가? 정해진 틀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 우연히 아마 미술학을 강연하는 교수님인듯 싶은데, 그분의 블로그에 우연치 않게 들어가서 예술과 예술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가치관을 적은 글을 보고 크게 공감했다. 예술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해야할 운동이고, 특히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과 예술은 예술로서 머물기보단 예술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저항이란 것을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문학,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을 계속 봐도 어느 작품의 특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기존의 틀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끝이다. 비평가는 그런 새로운 시도에 대해 다르게 보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전환, 사상의 전개란 매우 중요한 것 같았다. 그런데 만화라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에서 <만화 리뷰 쓰기> 머리말 이전에 중요한 어구가 나온다.
‘만화는 꿈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꿈을 실현하고, 독자는 주인공을 동경한다. 만화 리뷰는 그 꿈을 먼저 경험하고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현실의 답답함을 느낀다. 다소의 내가 도망칠 공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권태감이 밀려온다. 인간에게 놀이와 여가생활은 그래서 필요하다. 하지만 같은 것만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을 접하기에는 뭔가 대중문화에서는 한계성이 보인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리뷰에서 지나 이제는 비평까지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들어가면 문화를 연구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만화 리뷰 쓰기>에서 저자 분은 영국 버밍험대학에서 운영하는 현대문화연구소를 중심된 “문화연구”라는 분야를 언급했다. 문화연구는 단순히 대중문화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현대문화연구소의 도서를 읽지 않았으나, 적어도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로 통해 문화연구는 영미 문화인류학에 큰 영향을 준 점과 본래 나 같은 경우 사상적으로 문화인류학에 관심을 갖고 비평을 했기 때문에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만화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생각이나 무의식적인 사고를 그대로 그림으로 옮길 수 있다. 만화가 예전에 억압이나 탄압이 되는 이유도 만화라는 매체가 다양한 사고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처음 한국에 만화역사를 들여다보면 만화는 그저 오락물이 아니라 시대풍자물이나 혹은 항일정신으로 시작되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은 아주 간단한 한글과 그림만 그려도 대략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시사만화가 대부분 1장으로 된 점과 그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강하게 전달하고 싶은가에 대한 수사학적인 관점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그런다고 만화는 이제 1장 위주에서 혹은 4컷으로 나오지 않는다. 책 한 권에 150페이지가 넘고, 이제 단편이 아닌 장편 서사로 나온다. 그만큼 만화에서도 서사의 전개되어 그 안에서 담론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만화에 대해 보는 것에 읽기 위해서는 다양한 담론은 반드시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문화연구라는 것은 비판적 분석이 요구되기에 많은 학문적 기초가 필요하다. 텍스트가 의미하고 시대적 상황과 거기서 찾아내는 미적인 요소란 무엇인가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만화 리뷰 쓰기>에서도 제시한 것처럼 다양한 학문을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아는 문화연구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의거해서 만들었다. 한국에서 아직까지 마르크스주의가 낯설지 모르나, 프랑스의 구조주의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문화산업 이론에서도 마르크스주의는 유용하다. 예전에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서적을 읽다가 그가 한국 하회마을에 방문한 사진을 보았다. 그의 인생에서 3가지가 자신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지질학”이라고 했다.
프랑스 최고의 학술기관의 교수에다가 세계적인 지식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현실은 조금 아쉽기만 하다. 문화비평에 대한 도서는 문화적 분석을 중시하므로 다양한 사상과 자유로운 담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오늘 블로그 활동에서 영국의 철학자 겸 수학자인 버드런트 러셀 경을 좋아하는 같은데, 그 분의 블로그에 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고 말이다. 예전에 만화규장각에서 출간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한국 만화문화의 비평을 열어준 분이 김현이라는 문학비평가였다.
이분의 어록에서 “만화를 어린애들이 보는 유치한 수준의 그림이 아니라 구파라가 새로이 만들어내려 하는 한 예술의 형태”, “단순하게 유치한 것으로 생각하는 나의 사고 자체가 사실은 유치한 것”,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 “만화비평이 가야 하는 것은 결국 그 사회 비평적 성격의 만화적 형태가 대중들의 어떤 심리와 결부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곳이다.”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아마추어로 만화리뷰와 비평을 하는 나에게 만화리뷰나 혹은 만화비평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만화를 읽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의미하는지 찾아내어 리뷰어 내지 비평가가 새롭게 재구성하여 창조하는 것이다. 리뷰와 비평은 제2의 창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만화규장각에서 독자리뷰 게시판에 활동한지 3년 정도 되어가지만, 늘 만화를 리뷰 및 비평하면서 새로운 담론이 늘고 있음을 느낀다. 최근에 아이큐점프에서 연재하고 있는 <금지소년>을 단행본으로 접해보면서 내가 아주 중고등학교 시절에 보던 만화의 내용이나 그림체 심지어 시대적인 조류가 많이 교체되었음을 느낀다. 작가분인 임진주, 임애주 자매가 그런 코믹스를 그리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장르까지 그리는 점에서 한국에도 다양한 만화작가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정부의 규제가 너무 강화되었다는 것이 불만이다.
만화 대부분은 젊은 계층과 특히 학생들이 많이 본다. 만화를 아직까지 유해요소로 보는 어른들은 아주 많다. 만화가 모든 공부의 방해요소로 보는데, 내가 아직 학창시절만 하더라도 내가 만화를 보기 위해서는 만화방에 가거나 혹은 책을 대여해야 했다. 주간지 만화책을 사면 집에 보관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으며, 보기 위해서 방에 몰래 감추어야 했다. 만화책도 그렇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소년챔프라는 만화였다. 아마 <슬램 덩크>나 <사신전>, <노노보이>와 같은 만화를 아는 분이라면 이 추억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몰래 사서 봐야 한 점에서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풀 공간이나 혹은 잠시나마의 오락을 즐긴 여유조차 어른들을 바라지 않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에 대한 법률이 과거의 아동청소년 보호법의 법보다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조치들은 만화시장을 축소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형태가 되는 꼴이다. 전에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국내에서 19금으로 설정되었는데, 막상 영화를 봐도 진짜 잔인한 요소는 나오지 않고, 성적으로 과격한 부분도 없었다. 외국에서는 <피에타>를 두고 청소년들이 감상 후에 서로 토론을 했다고 하니 우리의 담론문화가 약한 것과 표현의 자유가 부족함을 다시금 느낀다.
만화를 보고 리뷰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표현적인 영역을 보는 것이다. 특히 소재가 문제라는 것이다. cliche 요소가 강한 것은 그만큼 표현주의적 미학을 가진 만화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이다. 그래서 분석과 비판이란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좋았는지 말이다. 하지만 만화 역시 표현의 자유라면, 만화를 보고 글을 적는 것도 일련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 만화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어야 하듯, 비평가는 자유롭게 담론을 이끌어 가야 한다. 대신 자유라는 것은 무책임하면 방종이라는 점과 거기에 합당한 책임을 지어야 하는 점이다.
개인적 작품과 사견들이 공론화되는 순간 그 그림과 글들은 만든 자들이 책임을 져야할 가치관이다. 예전부터 나도 생각했으나 <만화 리뷰 쓰기>에서도 그런 책임의식을 강조한 것 같았다. 만화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이 가까울지 모르나, 화면 위에 문자텍스트보단 그림 이미지만 나열하고 단 몇 줄만 적고 리뷰라고 지칭하는 태도는 책임감 없는 글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애니메이션은 사실주의가 아니라 표현주의이기 때문에 무엇을 나타내고 싶은지가 중요하다. 그것은 글을 적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와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힘들겠지만, 옆에 있는 일본의 경우를 보면 그 나라의 불안한 심리나 사회적 어둠을 소재로 만든 작품이 많다. 보더라도 다소 문제성이 보인 소재도 역시 나와 그것을 비판적으로 대할 수 있으며, 또는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다소 역사주의적 관점일 수 있겠으나, <사기꾼, 우시지마>라는 작품은 작년에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인 <화차>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화차>를 언급해서 그런데 만화는 사실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소재거리가 많다.
허영만 화백의 <비트>, <식객>, <타짜> 등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인기를 구사했다. 또는 신영우의 <키드갱>과 같은 것도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했다. 그 외에 많은 만화가 드라마 소재거리로 이용되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 방송작가들의 패턴에 얽매인 매너리즘에 빠진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 시청자도 그런 것에 빠져 있다는 의미이다. 대표적인 한국 드라마에서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작품을 보면 신데렐라 콤플렉스나 캔디 이데올로기가 항상 존재한다. 틀에 박힌 구조에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것은 드라마 <삼순이>를 보더라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문화적 비판에서 일반 국민들이 리뷰어나 비평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단지 소비만 하는 구조에서 그 문화에 대한 비판적 수용은 국민 스스로가 문화적 의식을 전반적으로 상승할 수 있으며, 작가의 매너리즘적인 요소를 바꿀 수 있는 하나의 칼자루가 된다. <만화 리뷰 쓰기>에서도 독자의 리뷰나 비평은 만화가로 하여금 새로운 전환점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순수하게 작가의 작품을 이래저래 건드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인기드라마 여론몰이에서 등장인물의 출연부분까지 바꾸는 형태가 발생된다.
단순히 만화를 쓰는 방법에 대한 책에서 왠지 모르게 한국 대중문화와 사회적 비판까지 들어가니 내가 이 책을 읽은 후의 서평이 왠지 모르게 판을 키운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화를 그리거나 보는 사람들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결코 만화가 다른 세상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했다면 만화분서갱유나 혹은 규제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만화와 그 만화문화로 통해서도 충분히 사회와 소통이 가능하다. 그래도 그 소통하는 길에도 분명히 그것을 위한 전과정이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화 리뷰 쓰기>는 만화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를 적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도 조금 권할 만하다. 가장 흔하게 주변에 보이기에 가장 쉽게 혹은 어렵게 담론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만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