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이대현.김혜원 지음 / 다할미디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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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하면 보통 우리 일반 사람들은 “나는 영화 좋아해! 저번에 그 영화 좋았어! 재미있었어! 좋은 작품이야, 에이 별로야!” 수많은 반응이 오고간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산업에 대한 취미생활에 대한 부분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으나, 다소 위선과 가식의 냄새가 나는 점에서 재미가 없다. 영화를 왜 보는가? 라는 점에서 단지 나오기 때문에 혹은 killing time이란 영역에 집착하여 어떻게 보면 kill in the name으로 될 판국이다. 영화라는 것은 하나의 우리에게 존재성에 대한 의문을 준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본래 영상에서 1초에 24프레임의 이미지가 겹치고 우리 인간이 미쳐 볼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영화라는 것은 인간이 시각정보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를 보게 해준 하나의 새로운 세계이다.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모습이나 카메라 앵글에서 보이는 피사체의 행동들은 감독이 의도하든지 혹은 의도하지 않아도 보이고 싶거나 보이지 않을 것들이 보인다.

 

영화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것에서 매우 재미있는 이유는 그것은 우리라는 인간들을 마치 타자로서 대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대한 카메라의 시선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과 머나먼 존재에서 때론 자신과 같은 모습을 발견한다. 하지만 cliche의 영역에서 지나친 소재의 남발은 우리에게 몰입감만 요구한다. 영화 역시 문화산업의 일환이므로 경제적 요소가 배제될 수 없다. 영화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 추구에 당연히 부합되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에 접근한 영화이기에 영화라는 속성에서 우리는 당연성에 대해 당연성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영화로 소통하기와 영화처럼 글쓰기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보편적 관점에서 서술해야 하는 미학적 가치와 더불어 그것이 하나의 헤게모니로 이어지는 아이러니는 영화에서 예술이냐? 아니면 입맛 맞추기 급급한 인스턴트 햄버거이냐? 물론 인스턴트 식품도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할 수 있다.

 

영화로 소통하는 것이란 그 함축된 의미와 숨은 의미를 잡아낼 수 있고, 영화처럼 글쓰기를 하면 그 세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 진중권 교수의 서적 <icon>에서 문화비평을 논한다. “문화비평이라는 이름의 글쓰기는 결국 말 없는 사람을 읽는 작업이다. 그것은 말 없는 사물에 인간의 목소리를 주어 그것들이 스스로 자신을 말함에 이르게 해야 한다.” 이것에서 가장 좋은 것은 영화다. 영화에서 배우들은 말을 하고 대사를 나눈다.

 

하지만 보는 자가 주체이지 보이고 있는 자가 주체가 아니다. 결국 자신의 말을 하지 않은 채 그것에 의해 지배당하는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담론화에서 자신의 상상력과 판단력으로 문화를 수용하여 재생산하여 사적인 영역의 현상화를 위한 길에서 영화 역시 좋은 소재다. 나는 어제 그것을 봤어! 너도 그것을 봤니? 그것 재미있지로 모두 끝이 나고 동의와 동질감을 느끼고 있을 때 영화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이미 안드로메타 성운에서 헤엄치고 있다.

 

영화든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서사의 허구성에서 오히려 개인의 역사가 아닌 무의식적 신화의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서사의 맛이다. 영상서사에서 영화는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진 모습을 보여준다. 단지 조금 다른 점은 스토리텔링 소재들이 이전에는 가상이야기에서 이제는 진실이 재구성되어 보이는 것이다. 영화의 본질에서 허구로 통해 허구의 인식이 중요한데, 사실과 허구의 재구성이 해체되어 하나의 사실감으로 변모될 위험이 있다.

 

그것이 때로는 순기능을 할 수 있지만, 때로는 악기능을 한다. 스펙타클이란 단어 연발에서 우리 대중들이 영화를 두고 스펙타클한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보고 무단히 거기에 얽매여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스펙타클이다. 예전에 아는 분의 추천으로 파이팅클럽을 봤는데, 인간이 속한 사회에 어떻게 인간은 속박을 벗으려 하나, 그 속박을 푸는 방법조차도 속박이었다. 스펙타클의 사슬을 푸는 것은 개인의 의지이지, 결코 남의 의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단지 스펙타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스펙타클을 전복해도 다른 스펙타클로 올라오고 수많은 스펙타클이 각기 서로에게 또 다른 스펙타클로 재생산된다. 때로는 스펙타클이 하나의 사실을 만들어버리는 시뮬라크르 세계다. 최근 pata-physics의 세계에서 스펙타클이란 진실한 의미도 부여한다. 피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다면 받아들여 즐기고 소비하자! 하지만 이런 과정을 위해서는 영화로 통해 소통해야 한다. 소통조차 불가능한데 어떻게 그것을 본다고 해서 말할 수 있으랴?

 

영화처럼 글쓰기는 자신이 영화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다. 영화에 가려진 이야기를 찾아 우리 인간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영화란 다소 불편한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편안한 영화에서는 우리 모습이란 없다. 단지 욕망의 신화에서 완벽한 허상만 존재한다. 현실에 있을 것까지도 않을 불편한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를 비추어준다. 전에 회사원이란 영화를 보았다. 살육이 하나의 회사일이 되어버린 잔혹한 세상에서 평범한 인간이 매우 잔인함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남들과 같이 밥먹고 야유회가고 출장가고 그런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살인과 폭력이란 무서운 행동이 있더라도 죄책감이 없다. 그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이다. 나라는 존재는 단체라는 패거리에 숨겨 자신을 타자화 시킨다. 그때부터 괴물은 탄생하기 시작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에 가서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의 악마 소장인 아이히만을 봤을 때, 그는 너무 단조로운 인간이었다. 사디즘이 없고 그저 권태롭게 보이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건 우리 보통 사람들이 그렇다. 사디즘의 미학이 오히려 고통과 상처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의 감정을 가진 채로 폭력을 수반하는 것이 더 미학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나도 모른 채 타인을 죽이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파시즘적인 영역에서 문화란 집단광기 도구의 방법이다. 독일 나치의 괴벨스의 프로파간다의 위력은 완벽한 우리를 추구함이다. 완벽하기에 너무 완벽하기에 결점은 모두 제거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다.

 

이미 자신만의 구원성이란 신화적 열망은 결국 스스로 파탄하는 것이다. 회사원은 그런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소 내용을 보면 이퀄리브리엄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감정을 잃은 인간이 무척이나 잔혹하다. 그 잔혹한 인간이 오히려 그 세계를 부순 영웅의 창조가 된다. 회사원은 영웅 대신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동기는 사랑하는 여자가 죽은 것에서 집단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이다. 폭력의 사회는 결국 폭력으로 구원할 절대적 신화로 이어지는 것인가?

 

영화로 소통하는 것은 결국 불편한 것에 대한 의미를 잡아 보는 것이다. 순수하게 포장되어 있는 바비인형은 아무 것도 낳지 못한다. 아이들에 의해 즐겁게 가지고 노는 도구에 불과하다. 문제는 바비인형을 만들고 즐기는 것은 우리 인간이다. 스스로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기에 갖가지 험상궂은 바비인형이 탄생한다. 물론 바비인형 스스로는 자신이 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외적으로 완벽하게 꾸며져 있으니 말이다.

 

영화처럼 글쓰기에서 헤겔과 아도르노 식의 변증법은 매우 효용이 있을 것이다. 찬, 반, 합에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인가? 또 다른 부정인가? 영화의 세계에서는 이런 방법이 계속 통용된다. 회사원이란 영화는 부정의 부정이 결국 긍정이 되었다. 파괴적 이데올로기의 정당화란 카타르시스의 염원을 관객에게 부른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이 또 다른 부정을 낳는 그로테스크에선 우리는 어떻게 보면 좋을까? 지구 종말에서 위기를 넘어도 해결되지 않은 채 또 다른 여정을 걷는다.

 

최근 영화 <남영동 1985>에서 실제 인물인 김근태 전 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각색했다. 서사의 마무리는 부정의 부정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고문전문가의 휘파람 소리에서 또 부정의 시기가 온다는 것으로 영화서사를 마무리해도 그 영화서사의 소비자에게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제부터의 영화는 당신이 감독이야! 이런 의미를 던진다. 문제는 그 영화감독들의 인원이 다소 부족함에서 <남영동 1985>는 신화의 파괴로서 신화를 만들려 했으나 결국 신화의 한 조각으로 되어버렸다.

 

어째든 이 책을 보면서 과거에 내가 영화비평을 해본 작품이 있었다. 아니 영화리뷰라고 해야 하나? 생계를 위해서나 전문가 세계가 아니라 아마추어적인 취미와 성향에서 영화텍스트에 대한 재생산은 반가운 내 자신을 만난다. <부러진 화살>, <고지전>, <글러브>, <코쿠리코 언덕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 영화가 아닌 소설로 본 <걸리버 여행기>, <고백>은 내가 소설과 영화라는 문자서사와 영상서사에 대한 텍스트 세계에 있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물론 가끔씩 영상서사를 분석한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은 영상서사의 분석은 시청이 2시간 내외라면 글을 적는 시간 역시 2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아니 그 이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영상서사에 대한 의미해석과 주변 정보 관계 그리고 좀 더 보완할 상황은 스스로 찾아야 할 숙제다. 그래서 영화보기보다 영화읽기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을 아는 맛만큼 보기만 하는 것 이상으로 즐거움을 준다. 영화로 세상과 소통하고 영화처럼 글쓰기를 하여 영화를 보는 것에서 주인공은 영화 속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판단하는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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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바보들 - 틀린데 옳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의 심리학
크리스 무니 지음, 이지연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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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이 소개한 게 웃기네, 폭스뉴스와 동급 아래에 있는 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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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중영화인가
조안 홀로우즈 외 지음, 문재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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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중영화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이 책에서는 대중문화와 영화 그리고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왜 대중영화인가>에서 영화에 대한 부분보다 영화로 통해 문화와 사회적인 접근에 가깝다. 오히려 철학과 사회학으로 무장한 도서이기에 영화를 알아가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단지 영화라는 것이 무엇을 담론하고 있는가이다. 단순히 어느 영화에 하나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라는 것에 통해 대중들을 알아가는 것이 올바르고 정확할 것이다.

 

 

narrative, 즉 敍事라는 단어는 단순히 인물이 어느 특정 공간과 시간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안정한 어느 상태에서 불안의 요소가 침범하여 혼란 및 위기를 초래한 후 그것을 매듭짓는 것이 이른바 narrative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narrative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영화 1편 보고 나서 “재밌다. 혹은 재미없다” 로 맺을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라는 것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그것에 대한 인식적 비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영화라는 것은 연극이나 오페라와 같이 서사적으로 진행될 때 무대 위의 연기자와 무대 앞의 관객과 일치되는 시간을 보여준다. 그것들이 보여주는 시간이 2시간이라고 하여 얼마든지 시간을 늘릴 수 있어도 그 한계성이 존재한다. 즉 오페라와 연극은 유한의 시간 속에서 관객을 대한다면,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영화는 연속성이 없는 존재들을 계속 모으고 모아 영원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영화 자체에 유한적인 영역과 무한적인 영역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화와 드라마의 실사영상의 경우, 등장인물들은 분명 실존했으나, 그곳에서는 실존하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스크린 속에 비추어진 그들은 마치 있는 존재로 여긴다. 왜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그들에게 빠지는 것일까? 실제 우리는 어느 인물에 대해 직접 만나지 않았어도 그 인물이 영화 속의 인물처럼 할 것이란 기대감으로 일어나 있다. 혹은 어떤 특정인물에게 극단적 집착에 통해 물신숭배까지 일어난다. 페티시즘이라고 하여 이른바 sexuality 요소에 큰 부각점을 준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특징은 다른 영화도서와 달리 그 물신주의에 대한 연구가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매우 신화적이다. 유한적인 인간이 존재하여 영원히 반복되어도 계속 그 유한한 인간이 없는 무한의 시간이 되어 유한의 인간들과 상존하기 때문이다. 신화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멈춘 공간이므로 언제라도 무한의 영역이고, 유한의 인간에겐 하나의 경외심, 존경심, 욕망, 분노, 폭력 등의 요건이 된다. 인간에게 주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을 욕망할 수 있는 공간이 영화다.

 

 

인간이 자신의 세계가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에서 인간적인 사회적 존재가 된다. 물론 언어라는 매개로 통해 주어진 사회의 틀에 적응해야 하고, 그 욕망은 결국 사회의 억압을 자신에 대해 정당화하는 것이다. 신화적 요소에 영화란 결국 욕망의 집결체인 인물이 있다는 점이다. 본인 같은 경우 영화와 드라마 같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 내지 만화 같은 표현주의를 좋아한다. 어떻게 본다면 미학적으로 스토리텔링에 대한 그 강조를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고, 다른 점으로 본다면 오타쿠라는 존재다.

 

 

그렇다고 하여 오타쿠 같은 존재가 영화비평이론도서나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면 일반인들에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를 이은 자크 라캉, 그리고 문화의 사회학 다루는 삐에르 부르디외다. 다들 프랑스 철학자라는 점에서 프랑스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파고 들어가면 언젠가는 만날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연구 자료에서 문화라는 것은 그 사람들이 수준이나 판단력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속하게 됨에 따라 문화의 차별공간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의 연구를 이 책에서 인용한 것으로 “부르디외는 고급예술을 감상하는 데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듯이, 대중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렬한 팬들은 이들 형식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미학적·장르적 관습과 해석 기술의 복잡한 망을 숙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렬한 팬들은 미학적·관습적 해석기술이 거의 전무하다. 그런다고 하여 대중들이 미학적·관습적 해석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을 보든 영화를 보든지 간에 문화의 소비에서 그들의 개별적인 차이는 존재하고, 그런다고 누군가 우월한가라는 전제 아래 분명 대중들은 실사영상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가지 모두 그런 우월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미학적·관습적 해석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일부 사람들에 한하여 소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 차이점을 발생하게 하는 요인은 취미나 환경적인 요인도 포함되나, 바로 문화자본이란 것이 인정된다. 대중문화에서 문화자본이란 자신이 어느 환경에서 무엇을 즐기고 있는가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중문화는 저급문화에 속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의해 항상 대중들이 앞장서서 문화를 만들어내는 전위적인 요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순적적이게도 저급문화와 고급문화 모두 지양하는 전위적인 예술 즉 아방가르드 장르는 오히려 엘리트주의로 변모되었다. 모더니즘 예술에서 선두주자인 아방가르드는 저급문화와의 차이와 부르주아의 고급문화 역시 비웃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려 보고 자기들의 관념으로 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엘리트주의적으로 가기가 충분했던 것이다.

 

 

어쩌면 아방가르드 문화는 그 아방가르드에서 한층 전위적으로 가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이므로, 아방가르드는 대중문화에서 광고, 카피, 영화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결국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은 대중들의 문화산업에서의 spectacle를 탈피하기 위해 시도했으나, 그것마저 실패한다. 가령 Guy Debord라는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은 <Society of the Spectacle>이란 영화를 상영하면서 현대사회가 문화로서 인간을 지배하는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한다.

 

 

그런 그가 오히려 자신이 스펙타클화하는 것을 막기 스스로 자취를 감춘다.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한 번 도달하면 그곳에 머무는 게 아니라 계속 그 과정을 찾아간다. 전위적은 끊임없는 자신의 탈피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불가능하고, 상당히 일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올 확률이 높기에 다시 대중문화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대중문화가 대중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대중에 의해서인가 라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는 mass culture라는 수동적인 영역이 강하다. 가령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주장한 대중문화의 기호는 대중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를 생산한 것들에 의해 대중들이 이끌려가는 것이란 점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star라는 영화배우에 의해서도 그것을 결정된다. 영화의 장르와 감독을 보는가? 아니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는가? 결국 작품적 가치와 작가주의적 요소에 대중들은 선호함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인물들이란 존재적인 부류에 옹호를 한다. 그것에는 당연히 신화가 따른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소유욕구, 그 욕구는 욕망으로 이어져 1번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찾고 찾는다. 그러면 상실과 일시적 회복이란 게임 속에서 그 감정은 더 큰 상실감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본다면 연예인에 대한 마니아적인 요소를 지나 스토커 기질까지 추가함은 아마 그런 의미가 아닌가 싶다. 욕망의 대상에서 타인들의 욕망 속에서 더욱 자신의 욕망을 추가함으로 자신의 알고 있는 현실과 영화 내지 이미지 세계의 인물의 가상세계를 구분 못하는 Hyper-reality 부분을 실감하듯이 말이다. 이런 욕망의 세계이기에 영화는 욕망으로서 사회의 욕망을 대변한다. 우리가 영화라는 장치 속에 잠든 욕망은 무엇인가?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서 페미니즘으로 넘어가면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에 대해 그것이 narrative화한다고 본 것이다.

당연히 스토리에는 어떤 주제가 있고, 그것은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를 추구할 것이다.

 

 

또한 그 이데올로기 헤게모니적인 요소를 부여하여 보는 이에게 어느 특별한 감정을 줄 것이다. 실제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주로 보는 헐리웃 영화는 가히 신화적이라 할 것이다. 다른 국가나 민족들 자국에 대한 역사나 전통이 있기에 그들만의 신화가 존재한다. 영국에 아서왕전설이나 유럽의 각종 요정이야기가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미국은 신화가 없었다. 있다면 원래 그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던 인디언들이다.

 

 

하지만 서구의 이분법적인 관념은 이들을 미개민족으로 보고, 모두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미국의 신화는 전쟁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폭력으로 이루어진 미학이란 점에서 전쟁영화는 미국영화의 대표주자다. 그래서 서부영화를 보면 인디언들은 언제나 난폭하고 여성들을 겁탈하며 식량과 가축을 탐낸다. 여기에 비해 백인 서부 총잡이들은 보안관 마크에 중절모를 쓰고 말을 타면서 권총을 속사한다. 카우보이라는 gunman으로서 신화적인 요소를 추구하고, 언제나 사라지지 않은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은 패권주의적인 신화를 반영한다.

 

 

여기서도 자본주의의 합리화 여성의 종속도 강조된다. 토지라는 거대한 자본이 폭력과 처벌이란 이름 아래 정의화 되고, 여성들은 남성과 그 남성이 소유한 무기에 의해 모든 것이 안정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 반항하는 페미니스트적인 요소가 추가했으나, 어떻게 보면 그 페미니스트의 자질에서 자신을 오히려 얽매이는 존재로 전략하지 않은가 라는 글도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영화는 대중들을 상대로 만들고, 영화로 통해 보는 군중들은 그것을 비판적 수용이 아닌 무조건 수용이다. 단지 문화자본에 따라 그것이 감각적으로 미적으로 좋다와 나쁘다로 갈리게 된다. 왜 대중영화인가에서 narrative로 통해 보는 영화에서 단순히 스토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담론하는 것을 중시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대중들을 보는 눈에 대해 봐야하는 것이 어떤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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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 - 테마미술강의 004
에릭 홉스봄 지음, 양승희 옮김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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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나, 적어도 아방가르드는 이른바 전위예술(前衛藝術)라고 하여 평범하기를 거부하고 색다른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프랑스 예술가 중에 예술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큐비즘 즉 입체주의(立體主義) 회화는 근현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작이다. 하지만 미술은 어떻게 보면 그런 입체주의 내지 초현실주의의 등장 자체가 위기와 몰락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과거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文藝理論)을 참고하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논한다. 거기서 발터 벤야민은 과거에 미술을 보면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것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과거 회화들은 주로 추상화보다는 초상화가 많았다. 대부분 인물이나 사물들의 직접적인 색채, 광도, 채도, 구도 등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미술계의 마술가처럼 불리는 램브란트 야경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램브란트의 야경에서 중앙에 마치 밤 아래 등불이 비추어지는 것처럼 보여 옆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조명이 멀어짐에 따라 광도가 떨어진다. 빛의 세기가 감소하니 주변 인물들은 어두운 화면에 놓여있다. 그 정도로 실사와 흡사한 이미지를 화가들이 그려온 것이다. 초상화를 보면 가끔 그의 잔주름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상기하듯이 강렬한 인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매체에 의해 전도된다.

 

본문에서 인쇄술이 발달함에 따라 문학작품들이 책으로 복사되어 여러 사람들이 소유하고 열람하듯이, 사람들의 특징을 살려주는 이른바 사진기가 등장하고, 1번의 촬영으로 여러 번의 현상이 가능하기에 더 이상 화가처럼 계속 그릴 필요는 없다. 아무리 초상화를 여러 번을 그린다고 해도 그 초상화는 화가에 따라 다르고, 같은 화가가 똑같은 그림을 여러 번을 그릴지라도 그 미술 하나의 가치는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기 속의 인물을 보면 모두 같은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화가의 재능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더 진실한 이미지를 채워주는 사진이기에 화가의 임무의 사실주의적으로 그리는 화폭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물론 모두 망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재능은 어느 사회에 대한 일반화적인 문화가 아니라 특수성을 뛰었다고 보도 무방할 것이다.

 

더구나 19세기 후반 사진은 그나마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적이지 못하고, 단지 일부 특권층에게 한정되어 있으나, 21세기에 넘어온 현대사회에 카메라는 일반 대중들에게 보급되고, 지금은 핸드폰 자체 카메라로도 화질이 좋은 영상을 취득한다. 더 이상의 화가의 임무는 개인의 인물을 그리는 저장의 기능으로서 무효화한 것이다. 그러면 예술적으로 미술은 그냥 있는 그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찾아갈 것이다.

 

재미나는 부분이나 이 책을 읽다보니 과거의 화가였던 히틀러가 화가를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히틀러와 맞먹을 정도로 난폭한 스탈린 역시 화가를 싫어했다. 이들의 폭력과 억압은 결국 화가로 하여금 추상주의 내지 초현실주의로 변모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을 탄생시킨 셈이다. 특히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것은 스페인 프랑코로 인한 내전의 비극을 다루었고, 아비뇽의 여인들 역시 그러하다.

 

예술은 어떻게 보면 그 사회의 이면을 비추어지는 역할을 해야 하나, 다른 점에서는 영상의 실사화로 통해 미술 역시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제일 인상 깊은 장면은 사진기 자체의 편집인 프로몽타주로 통해 사진 위에 다른 사진 이미지를 붙여 큐비즘의 영상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표현력을 심어준다. 사진의 기술이 미술의 입장을 바꾼 것이다.

 

있는 그 모습보다는 그 모습 뒤에 가려진 모습에서 아방가르드는 표현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대중과 거리는 멀어지기 시작한다. 아방가르드는 그렇게 독자적 노선보단 오히려 상품로고나 이미지로서 뛰어난 효과를 보기도 한다.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예술의 신성화보다는 예술에 가진 신격화의 배제가 가까울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지 않았으나, 과거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처럼 현대사회의 spectacle이란 문화적 소비에 따른 대중문화현상들은 우리가 문화라는 것은 정치, 사회, 경제 이변에 깔린 것들을 보여주며, 인간이 문화를 만들기보단 오히려 인간이 문화에 종속함에서 아방가르드는 그런 문화에 종속된 인간을 고발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에서 아방가르드 예술품 중에 기계문명 사회를 보여주는 전위적인 시도를 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계문명에 젖은 사회에서 아방가르드는 결국 기계문명과 자본주의사회에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앤디 워홀과 같은 팝아트나 또는 레디메이드로서 샘을 보여준 마르셀 뒤샹과 같은 다다이스트가 있다.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는 예술이 죽었다보다는 예술이 너무 많이 퍼져있어서 어느 것이 예술인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의 노력은 매우 효과적이다. 이때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 이때까지 보고 들을 수 없는 모두 표현을 아방가르드에서 보여주고 들려준다.

 

프랑스 최후의 아방가르드라고 불리는 상황주의자 같은 경우, 그들은 전위예술로 통해 일상에 침투되어 있는 정치적인 헤게모니들을 오히려 역으로 돌리려고 했다. 가령 영화라는 것이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도구나 장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를 도구나 장치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는데, 만약 관객들이 표를 반화하면서 항의하는 모습을 일반 사람들은 매우 당혹할 처지나, 상황주의자들은 오히려 기뻐하며 우리가 의도한 것처럼 되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가 추구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보다 아니라 지금과 미래에 초점이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단 과거에 집착하는 점이 크다. 그들의 패배는 아마도 인간의 심리일 수밖에 없다. 물론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을 늘 창조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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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집 Self Portrait
동아기획 / 1996년 9월
평점 :
품절


김현식 사후에 다시 나온 앨범인 7집 Self Portrait, 그것은 완전한 미완의 앨범이었다 .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존재, 그의 존재는 너무나도 타오를 같은 불꽃처럼 눈부시다,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불꽃은 꺼지기 전에 가장 눈부시다고 한다고 할까나?

 

이 음반을 들으면 그의 명하모니카곡 "한국사람"이 들린다. 무척이나 하모니카 소리가 우울하고 슬프고 아름답고 뭔가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 든다. 한국사람이란 제목처럼 우리 한국인 내에 간직하고 있는 恨(한)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Live Voice에는 어린시절부터 시작해 故 유재하 선생의 이야기도 나온다. 가난한 시절, 배고픈 시절, 그리고 외로운 시절...김현식이란 이름을 들으면 외로운 사랑의 가객이다. 사랑하는 것은 정말 아름답고 즐거워야 하는데, 그의 목소리에서 느끼는 사랑은 외로움이다.

 

그가 부모님을 여의고, 시골에 내려와 시골에선 서울촌놈이라 무시받고, 다시 서울로 갈 때는 시골촌놈이라 무시당했다. 그리고는 많은 반친구와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을 참을 수 없음은 결국 지난 어린시절을 비뚫어 버린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뭔가 달랠 수 없는 기분, 뭔가 찾고 싶은 기분, 인간의 가슴 한편에 숨쉬고 있는 박탈감은 그로 하여금 한의 소리를 내게 했다. 지금 나는가수다 내지 추억의 앨범에서 김현식 노래가 나온다. 그러나 정말 그의 노래를 부른 가수들 중에서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줄 사람은 거의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가수가 가창력과 테크닉, 카리스마로 무장해도 김현식에게 이길 수 없었다.

 

김현식은 그 한과 열정, 눈물,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지르는 비명과 절규를 어떻게 이길 수 있으랴? 병상에서 죽기 전에 부른 곡들은 들으면 그렇게 좋게 들리지 못한다. 그의 목소리는 초반에 그렇듯이 이미 간경화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술과 담배, 그것만으로 부족하였는지 결국 외로움까지 그를 엄습했다.

 

그에게 가족이 있었고, 자신의 피를 나눈 아이도 있지만, 그런다고 그에겐 모두 채울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이번 비정규적인 정규앨범 7집을 들으면 김현식의 가창력보다는 그 feel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1980년대의 뮤지션이 그러하듯, 대부분 외국 팝송을 많이 따라 불렀다. 우리의 서구화된 문화는 그때 가서 빛을 발한다. 특히 락, 발라드, 팝, 블루스...

 

신촌블루스와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던 김현식은 이미 한국 최고의 락블루스 보컬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노래를 들을 때 김현식의 애창곡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갈라진 목소리가 나온 것을 듣고 그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명곡 팝송의 보컬과 비슷했다. 아니 거의 그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죽음과 조우했다. 그가 죽기 전에 이미 그의 친구 겸 동료인 유재하의 죽음도 상기시켰다.

 

봄여름가을겨울 멤버 4명이 모였는데, 그럼 재하는? 라는 대사에서 환절기란 농담은 그의 인간적인 모습까지 옅볼 수 있었다. 김현식의 자화상이 담긴 7집 Self Portrait는 그렇게 김현식의 넋두리를 비친 채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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