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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중영화인가
조안 홀로우즈 외 지음, 문재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왜? 대중영화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이 책에서는 대중문화와 영화 그리고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왜 대중영화인가>에서 영화에 대한 부분보다 영화로 통해 문화와 사회적인 접근에 가깝다. 오히려 철학과 사회학으로 무장한 도서이기에 영화를 알아가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단지 영화라는 것이 무엇을 담론하고 있는가이다. 단순히 어느 영화에 하나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라는 것에 통해 대중들을 알아가는 것이 올바르고 정확할 것이다.
narrative, 즉 敍事라는 단어는 단순히 인물이 어느 특정 공간과 시간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안정한 어느 상태에서 불안의 요소가 침범하여 혼란 및 위기를 초래한 후 그것을 매듭짓는 것이 이른바 narrative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narrative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영화 1편 보고 나서 “재밌다. 혹은 재미없다” 로 맺을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라는 것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그것에 대한 인식적 비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영화라는 것은 연극이나 오페라와 같이 서사적으로 진행될 때 무대 위의 연기자와 무대 앞의 관객과 일치되는 시간을 보여준다. 그것들이 보여주는 시간이 2시간이라고 하여 얼마든지 시간을 늘릴 수 있어도 그 한계성이 존재한다. 즉 오페라와 연극은 유한의 시간 속에서 관객을 대한다면,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영화는 연속성이 없는 존재들을 계속 모으고 모아 영원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영화 자체에 유한적인 영역과 무한적인 영역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화와 드라마의 실사영상의 경우, 등장인물들은 분명 실존했으나, 그곳에서는 실존하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스크린 속에 비추어진 그들은 마치 있는 존재로 여긴다. 왜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그들에게 빠지는 것일까? 실제 우리는 어느 인물에 대해 직접 만나지 않았어도 그 인물이 영화 속의 인물처럼 할 것이란 기대감으로 일어나 있다. 혹은 어떤 특정인물에게 극단적 집착에 통해 물신숭배까지 일어난다. 페티시즘이라고 하여 이른바 sexuality 요소에 큰 부각점을 준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특징은 다른 영화도서와 달리 그 물신주의에 대한 연구가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매우 신화적이다. 유한적인 인간이 존재하여 영원히 반복되어도 계속 그 유한한 인간이 없는 무한의 시간이 되어 유한의 인간들과 상존하기 때문이다. 신화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멈춘 공간이므로 언제라도 무한의 영역이고, 유한의 인간에겐 하나의 경외심, 존경심, 욕망, 분노, 폭력 등의 요건이 된다. 인간에게 주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을 욕망할 수 있는 공간이 영화다.
인간이 자신의 세계가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에서 인간적인 사회적 존재가 된다. 물론 언어라는 매개로 통해 주어진 사회의 틀에 적응해야 하고, 그 욕망은 결국 사회의 억압을 자신에 대해 정당화하는 것이다. 신화적 요소에 영화란 결국 욕망의 집결체인 인물이 있다는 점이다. 본인 같은 경우 영화와 드라마 같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 내지 만화 같은 표현주의를 좋아한다. 어떻게 본다면 미학적으로 스토리텔링에 대한 그 강조를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고, 다른 점으로 본다면 오타쿠라는 존재다.
그렇다고 하여 오타쿠 같은 존재가 영화비평이론도서나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면 일반인들에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를 이은 자크 라캉, 그리고 문화의 사회학 다루는 삐에르 부르디외다. 다들 프랑스 철학자라는 점에서 프랑스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파고 들어가면 언젠가는 만날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연구 자료에서 문화라는 것은 그 사람들이 수준이나 판단력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속하게 됨에 따라 문화의 차별공간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의 연구를 이 책에서 인용한 것으로 “부르디외는 고급예술을 감상하는 데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듯이, 대중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렬한 팬들은 이들 형식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미학적·장르적 관습과 해석 기술의 복잡한 망을 숙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렬한 팬들은 미학적·관습적 해석기술이 거의 전무하다. 그런다고 하여 대중들이 미학적·관습적 해석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을 보든 영화를 보든지 간에 문화의 소비에서 그들의 개별적인 차이는 존재하고, 그런다고 누군가 우월한가라는 전제 아래 분명 대중들은 실사영상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가지 모두 그런 우월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미학적·관습적 해석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일부 사람들에 한하여 소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 차이점을 발생하게 하는 요인은 취미나 환경적인 요인도 포함되나, 바로 문화자본이란 것이 인정된다. 대중문화에서 문화자본이란 자신이 어느 환경에서 무엇을 즐기고 있는가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중문화는 저급문화에 속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의해 항상 대중들이 앞장서서 문화를 만들어내는 전위적인 요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순적적이게도 저급문화와 고급문화 모두 지양하는 전위적인 예술 즉 아방가르드 장르는 오히려 엘리트주의로 변모되었다. 모더니즘 예술에서 선두주자인 아방가르드는 저급문화와의 차이와 부르주아의 고급문화 역시 비웃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려 보고 자기들의 관념으로 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엘리트주의적으로 가기가 충분했던 것이다.
어쩌면 아방가르드 문화는 그 아방가르드에서 한층 전위적으로 가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이므로, 아방가르드는 대중문화에서 광고, 카피, 영화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결국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은 대중들의 문화산업에서의 spectacle를 탈피하기 위해 시도했으나, 그것마저 실패한다. 가령 Guy Debord라는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은 <Society of the Spectacle>이란 영화를 상영하면서 현대사회가 문화로서 인간을 지배하는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한다.
그런 그가 오히려 자신이 스펙타클화하는 것을 막기 스스로 자취를 감춘다.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한 번 도달하면 그곳에 머무는 게 아니라 계속 그 과정을 찾아간다. 전위적은 끊임없는 자신의 탈피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불가능하고, 상당히 일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올 확률이 높기에 다시 대중문화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대중문화가 대중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대중에 의해서인가 라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는 mass culture라는 수동적인 영역이 강하다. 가령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주장한 대중문화의 기호는 대중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를 생산한 것들에 의해 대중들이 이끌려가는 것이란 점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star라는 영화배우에 의해서도 그것을 결정된다. 영화의 장르와 감독을 보는가? 아니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는가? 결국 작품적 가치와 작가주의적 요소에 대중들은 선호함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인물들이란 존재적인 부류에 옹호를 한다. 그것에는 당연히 신화가 따른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소유욕구, 그 욕구는 욕망으로 이어져 1번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찾고 찾는다. 그러면 상실과 일시적 회복이란 게임 속에서 그 감정은 더 큰 상실감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본다면 연예인에 대한 마니아적인 요소를 지나 스토커 기질까지 추가함은 아마 그런 의미가 아닌가 싶다. 욕망의 대상에서 타인들의 욕망 속에서 더욱 자신의 욕망을 추가함으로 자신의 알고 있는 현실과 영화 내지 이미지 세계의 인물의 가상세계를 구분 못하는 Hyper-reality 부분을 실감하듯이 말이다. 이런 욕망의 세계이기에 영화는 욕망으로서 사회의 욕망을 대변한다. 우리가 영화라는 장치 속에 잠든 욕망은 무엇인가?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서 페미니즘으로 넘어가면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에 대해 그것이 narrative화한다고 본 것이다.
당연히 스토리에는 어떤 주제가 있고, 그것은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를 추구할 것이다.
또한 그 이데올로기 헤게모니적인 요소를 부여하여 보는 이에게 어느 특별한 감정을 줄 것이다. 실제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주로 보는 헐리웃 영화는 가히 신화적이라 할 것이다. 다른 국가나 민족들 자국에 대한 역사나 전통이 있기에 그들만의 신화가 존재한다. 영국에 아서왕전설이나 유럽의 각종 요정이야기가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미국은 신화가 없었다. 있다면 원래 그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던 인디언들이다.
하지만 서구의 이분법적인 관념은 이들을 미개민족으로 보고, 모두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미국의 신화는 전쟁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폭력으로 이루어진 미학이란 점에서 전쟁영화는 미국영화의 대표주자다. 그래서 서부영화를 보면 인디언들은 언제나 난폭하고 여성들을 겁탈하며 식량과 가축을 탐낸다. 여기에 비해 백인 서부 총잡이들은 보안관 마크에 중절모를 쓰고 말을 타면서 권총을 속사한다. 카우보이라는 gunman으로서 신화적인 요소를 추구하고, 언제나 사라지지 않은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은 패권주의적인 신화를 반영한다.
여기서도 자본주의의 합리화 여성의 종속도 강조된다. 토지라는 거대한 자본이 폭력과 처벌이란 이름 아래 정의화 되고, 여성들은 남성과 그 남성이 소유한 무기에 의해 모든 것이 안정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 반항하는 페미니스트적인 요소가 추가했으나, 어떻게 보면 그 페미니스트의 자질에서 자신을 오히려 얽매이는 존재로 전략하지 않은가 라는 글도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영화는 대중들을 상대로 만들고, 영화로 통해 보는 군중들은 그것을 비판적 수용이 아닌 무조건 수용이다. 단지 문화자본에 따라 그것이 감각적으로 미적으로 좋다와 나쁘다로 갈리게 된다. 왜 대중영화인가에서 narrative로 통해 보는 영화에서 단순히 스토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담론하는 것을 중시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대중들을 보는 눈에 대해 봐야하는 것이 어떤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