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 - Unbowe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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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실제가 아닌 가상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서사매체가 가상이라고 할지어도 그것은 현실적인 요소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時, 서사)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이 있듯이 역사는 개인의 기록이나 시라는 어느 이야기 거리들은 개인의 기록보다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이야기란 점이다.

 

그러나 최근에 시라는 서사(敍事, narrative)는 가상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것도 많으나 이제는 실화를 배경으로 각색하는 픽션(fiction)이 아닌 팩션(Faction)이란 장르가 최근 많은 영화에서 보인다. 이번에 내가 감상한 부러진 화살은 바로 픽션의 세계인 영화에서 팩션이란 하나의 진실을 담은 가상적인 스토리가 펼쳐지는 영화인 것이다.

 

보통 영화라는 매체 즉 서사구조를 가진 매체에서는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진행되는 내용들은 어떤 갈등을 소재로 하여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느 누군가를 희생 내지 자신들의 정의로서 통해 적에 응징으로 이어진다.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해결로 통해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반드시 갈등의 존재와 더불어 그 갈등의 해결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번 부러진 화살에서는 갈등의 해소란 없다. 오로지 갈등의 진행형을 담고 있다. 기본적으로 서사라는 narrative는 어떤 사회나 조직에 대해 특정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이루어지는 하나의 제의와 같다. 그런데 부러진 화살에서는 갈등의 해소 대신 계속 이어짐은 이 영화에서 의미하는 주제가 지배계급과 그 사회의 종속의 당연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 당연성에 대해 반항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권력에 대한 의문이다. 이 영화의 갈등은 대학 입시문제에서 틀린 답을 출제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부당함을 내세운 김경호 교수로부터 시작된다. 김경호 교수는 시험문제가 틀렸으니 이 시험 문제에 대해 정정과 더불어 진실을 알려 올바른 교육가치관을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교 측은 자신들의 실수로 인해 교수진과 학교명예에 큰 금이 간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김교수의 진실공방은 무산된다. 문제는 김교수의 의견이 묵살이 아니라 김교수의 교수직까지 박탈당한 것이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교수직에서 임용되지 못한 채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올바른 가치관과 진실을 풀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임용이 다시 허락되는 것으로 당시 잘못된 교육현실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공방은 오히려 역으로 몰리게 된다. 그의 진실성은 어디에도 밝힐 수가 없으며, 단지 그가 정치적인 약자라는 이유로 또는 같은 편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재임용은 무산된다.

 

그런데 그 재판의 과정에서 과연 제대로 된 재판이었는가 혹은 아니었는가 라는 중대한 문제가 걸렸다. 당시 김교수의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김교수가 의문을 제기한 대학교 출신의 판사였다. 그 판사에게 모교에 대한 권력의 결탁은 학벌사회가 만연한 엘리트들의 권력 유지의 방법이었다. 물론 김교수 역시 대단한 엘리트이었으며, 상당한 수학학자였다. 그러나 김교수는 엘리트에 머물기 보다는 지식인으로 전환되어갔다.

 

자신이 지식인으로 넘어간 동기는 바로 부당한 권력 앞에서 진실이 왜곡되고, 그것마저 바로 잡으려 했지만, 권력의 결탁으로 인해 자신의 정당한 입지마저 사라진다. 김교수는 그 재판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대한민국 법치국가에 대한 불합리성과 부패함에 분노하여 자신의 소송을 기각한 판사에게 석궁을 들이댄다. 문제는 그 석궁이 발사되었느냐? 아니면 발사되지 않았느냐이다.

 

법이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강제적 제도이다. 그러나 사실 법이란 제도는 인간에게 정당한 가치관을 적용하기 보다는 인간을 감시하고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권력의 도구로 되어버렸다. 법이란 상당히 강력한 공권력과 더불어 막강한 권력을 부여한다. 정치라는 것은 권력에 대한 의지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처럼 법의 집행에서는 그 법의 집행자라는 법관에게 큰 위력을 안겨주는 것이다.

 

법은 하나의 거대한 지식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세력에게 집중된다.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언어의 권력자이고, 그 권력은 특정 세력들에게 다른 세력들에 대한 정치적인 지배행위 즉 헤게모니적인 행위로서 이어진다. 부러진 화살에서는 그런 헤게모니적인 요소가 상당히 잘 보인다. 김교수가 석궁을 쐈다고 한다면 그 감추어진 진실과 더불어 그 진실에 대한 증거, 법정에서 열리는 법적인 행위절차가 과연 올바르게 진행 되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특히나 처음 재판 이후, 두 번째 재판에서 그런 모습들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박변호사가 김교수의 변화를 맡으면서 재판과정에 보이던 법적행위 절차들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법적인 절차를 둘러보아도 이성적인 논리로서 설명이 가지 않는다. 혈흔이 뭍은 옷이 있는데, 안쪽 옷과 겉옷은 혈흔이 묻어 있는데, 왜 중간 옷에는 혈흔이 없는가? 혈흔이 있다면 과연 그것이 피고인과 같은 혈액인지 검사해야 하지 않은가 라는 합리적인 재판과정을 모두 무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무시하는 이유는 바로 피해자 즉 김교수에게 형사소송을 제기한 사람이 김교수에게 부당함 재판을 내린 같은 판사라는 이유다. 같은 권력을 가진 존재에게 법적인 행위로서 처벌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권력적인 존재인 사법부의 위엄이 흔들리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정치적인 자유와 법적인 평등은 보장받는다. 그리고 그런 제도에서 반드시 이행하는 것이 정부이며, 그것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사법부의 임무이다.

 

그러나 부러진 화살에서는 판사라는 공정해야한 존재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공정했다. 거기에 검사들의 대표로 나오는 심검사는 법적인 문제를 옳게 진행하기 보다는 오히려 판사와 검사의 권력유지라는 체계로 이어진다. 권력을 가진 두 존재가 권력을 위해 김교수를 피고인으로 몰아넣고 그를 사회적 정치적 매장으로 인해 자신들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무소불위적인 법에 대한 권력에서 대항마는 법을 아는 다른 법조인들은 즉 변호사들이다.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박변호사는 상당히 법에 대한 의무감과 진실성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신념이 강한 마음이야 말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는 언제나 술에 취해 있고 뭐든지 될 때로 되라고 하는 최악의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가 최악의 변호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학하고 책임을 물게 하는 피해의식이었다.

 

2001년 부평에서 공장노동자를 위해 그는 인권노동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위해 온 몸으로 경찰이란 권력 앞에서 대항했다. 하지만 그가 벌인 투쟁에서 같이 참여한 노동자들은 모두 심한 폭행으로 부상을 당했으나, 그는 당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자신도 같이 맞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경찰들은 변호사란 직책이란 권력에서 다른 노동자를 습격했다.

 

그는 그것이 분했던 것이다. 그 후에 인권노동변호사 운동에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되었다. 아무도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은 김교수의 변호사, 그가 드디어 맡은 것이다. 그가 맡은 이유는 단순히 김교수를 위해서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억지로 맡을지 모르나, 그가 선택한 변호사의 의무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깡패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김교수와 만날 적에 카메라의 모습을 보면 미디엄 샷 내지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통해 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처음 두 사람은 카메라 화면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다. 미디엄 샷으로 둘의 관계는 극과 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재판과 세 번째 재판과정에서 그들은 매우 가까워진다. 마지막에 다다르면 그들은 재판에서 지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패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만족했다.

 

현대사회에서도 억울한 누명과 부당한 대우에 대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권력에 대항한 것이다. 특히 오른쪽으로 카메라를 계속 돌아가는 워킹-인사이드(walking-inside) 기법으로 통해 처음에는 어긋난 두 사람이 결국은 화합을 한다. 문제는 두 사람이 화합을 했을망정 서사의 중요한 갈등인 이 사회구조라는 세계와 화합하지 못한다.

 

단지 두 사람은 투쟁만 진행할 뿐이었다. 두 번째 재판에서 어떻게든 김교수에게 유죄를 내리려 했던 이판사는 김교수의 가진 확고한 의지와 그 의지 속에서 찾아낸 법적인 근거와 진실의 증거와 증인으로 자신의 최소한의 법적 양심에게 무릎을 꿇는다. 비록 그는 권력유지를 위해 김교수에게 불리한 처우를 내리려 했으나, 김교수와 박변호사의 합리적인 변론과 더불어 주변에서 진실을 보는 대중들 앞에서 그는 부장판사직을 버린다.

 

이판사가 나와 재판을 벌일 과정에서 수많은 카메라 앵글이 그를 클로즈업 하나, 그의 얼굴은 정면보다는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이앵글에서 그의 입장이 여실히 보인다. 법을 집행하는 법관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봐야할 존재이다. 즉 재판을 여는 법정에서 재판관이 머무는 자리가 가장 위치적으로 높은 자리이다. 따라서 원고, 피고, 증인 심지어는 관람하는 방청객까지 재판관을 우러러 봐야 한다.

 

재판관이 앉아있는 자리야 말로 권력의 최고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상징을 가진 재판관이 정당한 법적 절차와 양심적인 행위를 어길 때마다, 그리고 거기에 대처하기가 어려워지는 이판사의 곤란함을 보여줄 때마다 카메라는 계속 재판관은 얼굴 위로 클로즈업한다. 그것은 곧 보통 사람이 우러러 봐야할 재판관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내려다보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이용된 것이다.

 

그런다고 재판관의 권력을 무시하지 못한 것도 나온다. 두 번째 재판과정도 그렇지만 세 번째 과정에서 나온 신판사의 경우 그의 모습은 머리 위로 비추는 클로즈업보다는 살짝 눈을 올려보는 클로즈업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하이앵글로 신판사를 내려보지만 이내 곧 다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다가 다시 올려다보게 된다. 김교수와 박변호사의 변론이 그에게 도저히 닿질 않음을 카메라로서 보여준다.

 

오히려 신판사의 눈으로 밑을 내려 보는 것이 더 권력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어깨 너머 샷으로 보는 관점에서 주로 재판관의 뒷모습에서 정면을 보는 것을 연출한다. 어깨 너머 샷은 카메라가 관찰자라기보다는 카메라의 메인이 되는 사람 즉 카메라에서 뒷모습이 나오는 사람이 보는 세상이다. 신판사라는 인물이 얼마나 권력지향적인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부러진 화살에서는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 재판에서 패배한 김교수이었고, 그는 안산교도소로 이감되나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전쟁을 예고했다. 아직까지 한국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교정세계에서는 일재의 잔재가 깔려 있고, 일제 잔재 뒤로 독재의 잔재로 이어졌다. 폭력과 권위로서 모든 죄수를 다루는 공간에서 김교수는 재소자에게 부당한 행위를 강조하는 두 교도관의 이름  세 글자를 메모한다.

 

그리고 영상화면이 끝난 후에 검은 글씨 뒤로 그는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도 법정공방으로 투쟁한다고 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김교수의 안산교도소의 수감으로 통한 것이나, 그것은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부합되지 않은 결말이며, 다시 결말을 보기 위해서는 그에게 주어진 갈등과 고민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부차적으로 이 작품에서는 많은 사회적인 문제와 더불어 교도소의 암울한 현실을 말해준다. 그가 처음 수감될 때 옆에 있던 수감자들이 와서 김교수에게 법적자문을 받는 것을 보여준다. 범죄를 저질러도 부당하게 법적처벌을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김교수는 자신이 스스로 배운 법적 지식을 이용하여 다른 수감자의 억울함을 해소한다. 이에 반면에 김교수는 상당한 감옥소의 폭행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판사가 그만두고 신판사가 교체될 쯤에 판사들은 김교수를 법적인 제도에서 그를 잡으려 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조건에서 잡으려 한다. 교도소에서 독방으로 혼자 공부하던 김교수를 다른 수감자와 같이 생활하도록 하는데, 문제는 그 수감자 한 명이 상당히 비정상적인 사고를 지진 인물이란 점이다. 그는 김교수가 오자말자 폭력과 협박으로 김교수를 괴롭히고, 남자밖에 없는 교도소에서 남자가 남자를 성폭행하는 변태행위까지 저지른다.

 

물론 변호사와 가족들의 면회로 통해 그 문제는 해결되나, 은근히 그런 수감자 옆에 붙이게 하여 김교수를 지치게 하는 법의 치사한 방법들은 권력의 압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도 김교수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지식인이란 사실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자신의 의지였다. 세 번째 재판과정에서 김교수는 멀리서 유학 가서 귀국한 아들을 만나 수갑이 채워진 채로 아들의 두 손을 마주 잡는다.

 

그의 수갑은 범죄자가 찬 수갑은 분명하나, 그 수갑은 억압받은 자신의 현실에서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세계에서는 공정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부여받은 하나의 시련으로 보여준다. 김교수는 미래를 위해 굴복하지 않았으나, 그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것은 원칙과 공평함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수학학자에게 논리라는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 즉 정답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이 오답이란 확고한 흑백논리를 가진다.

 

그러나 김교수가 가진 흑백논리가 오히려 더 우리가 가져야할 논리로서 다가온다. 그 흑백논리는 정말 공정하고 과학적인 논리로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논한 논리는 윤리 없이는 논리가 성립되면 안되는 것처럼 김교수 역시 그의 논리는 양심을 지키기 위한 윤리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을 준 세상은 윤리를 가진 논리가 아니라 이익을 가진 논리였다.

 

즉 기회주의적이고, 집단이기주의적인 사회모습에서 그는 싸운 것이다. 어쩌면 부러진 화살은 화살이 부러지고, 그 화살이 발견되지 않아 증거인멸로 인해 김교수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살이 부러진 것은 화살 그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양심이 부러진 것이라는 것을 런닝타임 100분 동안 계속 관객에게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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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에 대한 권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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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인간들이 누리는 권리라는 것이 무엇일까? 혹은 그 권리를 당연한 것이고, 만약 당연하다면 과연 그것이 나만 우리만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지은 저자는 “에티엔 발리바르”로 프랑스 파리10(낭테르)대학의 교수로 재직한 사람이다. 번역자는 이전에 자크 데리다가 저술한 마르크스의 유령을 번역한 진태원 교수이다. 진태원 교수가 주로 프랑스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 다양한 도서를 번역하는 것으로 아는데, 여기서 진태원 교수의 연구목적을 이 책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아니 애초부터 진태원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참고로 역자후기를 유심히 보면 2011년 9월에 번역을 완료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갈등과 원인들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책으로 통해 과거 프랑스에 있었던 일들과 그리고 그 일들을 서술하는 발리바르의 연구에서 과연 무엇이 문제이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을 할 수 있다.

다소 철학적인 범주라기보다는 정치학 범주에 가까운 이 책은 정치라는 것 역시 철학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들을 나에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발리바르는 프랑스란 국가에 대한 문제점을 소개했다. 그 문제점이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는 자유와 평화 등 같은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를 잘 지키고 보전한 국가로 알고 있다.

게다가 루이16세 국왕과 마리 앙투와네트 여왕을 날카로운 단두대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만든 국가이다. 그 후에 자코뱅파, 왕당파, 나폴레옹, 독일과의 전쟁, 세계 제1차 및 2차 대전 등등 그 만큼 많고 많은 전쟁과 혁명, 사건들이 늘 존재했던 나라이다.

또한 위대한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프랑스 혁명 전에 있다가, 20C에 도달해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 문학자 롤랑 바르트, 실천하는 철학자 미셀 푸코, 프로이트를 이은 정신분석학의 권위자 자크 라캉 등 이른바 프랑스에서 등장한 구조주의와 그 뒤를 이은 후기 구조주의는 21C에 살아가는 지금 현실에서도 그들의 철학과 사상들은 위대한 업적으로 남겨져 있다. 또한 프랑스는 철학과 더불어 피카소를 배출한 예술의 명국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자유와 평화, 철학과 예술이 발전한 나라에도 멍은 있었다. 아니 확실히 정말 이런 문제는 잘못되었다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것은 오래전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고,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알제리에 가한 행동들 역시 과연 자유와 평화를 외친 국가라는 슬로건에 부합되는가이다.

이전에 다른 도서에서 paris-match 즉 파리의 마치라는 사진을 보았다. 이 사진에는 어느 흑인 소년이 프랑스 국기를 보며 경례를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 의미는 과거 프랑스에서 알제리 독립전쟁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전쟁이 합당하고 정의롭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광고인 것이다.

흑인소년이 프랑스 국기를 보고 경례한다는 의미는 결국 흑인소년은 알제리 국가국민이고 그들은 프랑스에 충성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흑인의 선택 범주에서 어른이 아닌 소년의 의미는 아직 그들은 어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지배하여 올바르게 그들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서양이 동양, 아프리카, 혹은 문화적 수준이 자신들보다 미개한 나라와 민족들은 문화적으로 우수한 국가와 민족에게 통치를 받는 것이 합당한 파시즘이 이르게 된다. 그런 파시즘을 이 책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다루고 있다. 파시즘은 상당히 무섭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파시즘적인 정치노선으로 통해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자국민들을 전체주의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히틀러의 나치즘은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더불어 잔인한 반인륜적 행위를 저질렀다. 문제는 이런 파시즘에 대항하는 여러 연합국 노선이 당시 그들의 투쟁은 옳으나 그 후가 문제다. 그들 역시 파시즘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파시즘을 척결한 순간부터 자신들은 파시즘이 아니라고 하는 안일한 의식구조다.

혹은 그런 의식구조가 자기들에겐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고, 그런 자유와 평등이 없는 국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최근 들어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이른바 자본주의국가와 대립되던 (스탈린주의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은 탈이데올로기와 탈냉전으로 이어지겠지만, 그런다고 하여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프랑스는 아주 잔인한 법을 시행한다. 어떤 정치인 법을 발효한다. 문제는 그 법에서 프랑스의 외국인들을 강제로 비행기로 태워 추방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권과 의식에 대한 눈곱만큼의 인정도 없이 보냈다. 게다가 비행기 안에는 산통으로 괴로워하던 임부도 있었다. 임산부가 그 긴 시간동안 비행기 안에서 산통으로 괴로워하면 임산부와 태아의 생명이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강제출국을 시켰다. 이게 과연 인권적이란 말인가? 그러나 프랑스에선 오히려 이것이 인권적이라 말한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이 프랑스어로 프랑스 안의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이른바 국민사회국가라는 것으로 자기 자신들이 파시스트로 변모한 것도 모른채 파시즘에 빠진 것이다. 또한 유럽에서 극단적인 극우들은 유대인들의 묘지를 훼손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네오-나치즘이라고 했다.

이미 죽은 자들의 무덤인 묘지를 훼손할 필요가 없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애국주의를 외친다. 타자와의 경계선을 정하여 자신들의 가치가 옳다고 폭력적인 행동이 결국 애국이란 단어로 연계되는 게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태이다. 최근 얼마 전에는 어느 극우인물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사람 100명 정도가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과연 이런 행동들이 왜 일어나는가?

이른바 국민을 위해서라는 슬로건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혹은 그 국민이 구성하는 국가를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함과 불편함을 자기 스스로 개선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아닌 타자들에게 전가하여 자기비판에서 도피한다. 이런 방법은 프랑스에서 우파나 좌파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국가경제를 위해서라든지 혹은 노동자를 위해서라든지 어느 쪽이든 파시즘으로 빠진다.

그러나 본인들은 파시즘이 아니라고 한다. 파시즘은 계속 가속화되어가고 있으나, 그 주범들은 각성하지 못한 채 계속 자신들의 파시즘을 정당화할 희생양을 찾는다. 특히 그것이 외국인이란 존재에 가장 부합된다. 초기 그들이 유입될 때에는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노예일수고 있고, 혹은 아메리카 드림처럼 해외이주로 통한 성공을 꿈꾸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처음 낯선 타국에 와서 제대로 기반을 갖출 리가 만무하다.

그들은 최하의 조건에서 시작하여 갖은 허드렛일이나 위험한 일들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들도 점차 교육을 받고, 주변 현지인과 교류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사회에서 새로운 존재로 등장한다. 문제는 그들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내치는가?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차별적인 행위들은 여지없이 터진다.

그런 행위를 저지르는 국민들은 자신들이 과연 자유와 평등에 의거한 인민주권을 외치는 것에서 과연 옳은가?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만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들을 몰락시키려 한다. 방법은 많다. 법적으로 강제퇴거와 출국시키거나 또는 사회구조적으로 견디기가 어렵게 하던가? 그러나 그런 일들은 아주 쉽게도 혹은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그렇게 만들고 실행하는 이들은 자유와 평화를 외치고 있다. 프랑스에서 바로 그 무섭고도 잔인한 파시즘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되어가고 있는 셈인 것이다.

아마 그런 내용을 진태원 교수가 이 책을 번역하여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한 것이라면 우리 역시 그런 파시즘에 빠져있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파시즘에 대항하여 생긴 대항세력 역시 파시즘화되어 간다면 결국 파시즘끼리 싸움이다. 그래도 문제는 먼저 파시즘으로 무장하여 파시즘을 만들게 한 원인부터 찾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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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주요 본문에 대한 해설.번역.주석
조대호 역해 / 문예출판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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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形而上學)의 시작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 알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이란 철학, 미학, 신학, 자연과학 등 많고 많은 분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형이상학을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사유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들의 출발을 찾아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어보며 생각한 것은 형이상학이란 정말 어려운 학문이나, 그 학문적 영역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내용이나 또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분야에서나 흔히 겪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일단 meta-physics라는 것은 physics의 물리학적인 범주에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장 인가의 눈에 보이는 것이든 혹은 보이지 않은 것에도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이었다. 지금은 자연과학이란 분야는 형이상학적보다는 형이하학적에 가깝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갖가지 풀리지 않은 분야나 또는 새롭게 정립되는 분야 때문에 자연과학이 고대그리스에선 철학자의 영역인 반면 지금은 과학자 또는 그 과학을 실용적으로 이용하는 공학자의 영역가지 올라갔기 때문에 자연과학은 철학에서 가장 멀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현미경의 발달이 아주 크지 않았나 싶다. 현미경의 발달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는 형이상학 영역에서 인간 그 존재에 대해 연구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해 연구하면서 인간 신체와 관련된 의학이나 또는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기상학, 천체학, 생물학에서 당시 인간들에게 볼 수 있는 대상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인간의 세포가 보이고, 인간 주변에 있는 미생물들이 보이며, 지구 멀리 존재하는 태양계 행성까지 보게 되었다. 게다가 인간 신체구조와 작동원리, 해부학적인 학문발달은 인간 그 자체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진 사고와 다른 것을 증명했다. 물론 과학기술 발달은 인간의 인식을 변화할 수 있으며, 그 인식의 변화에서 인간 사고영역까지 변모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그런 인간의 존재론, 인식론, 마지막으로 신학 영역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란 학문으로 심리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철학 등의 영역으로 다룬 것이다. 단지 조금 내가 생각을 달리하게 된 부분은 형이상학에서는 물리, 논리, 윤리 3가지로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윤리학을 다루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윤리학 교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간간히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자료언급과 주석이 달리기도 하였다. 일단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그 서적 원본은 번역하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형이상학을 연구한 철학교수가 연구한 내용으로 적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들어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형이상학이란 학문영역은 인간의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영혼적인 부분이 많기에 쉬운 도서는 아니다.

단지 그 다루는 내용들이 너무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너무 많이 접한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나가는 생활 속을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인간의 사유라는 것에 대해 단지 사유할 것인가? 아니라면 그 사유에 대하여 다시 더 사유를 하여 그 사유의 존재 근본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점에서 어떻게 본다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단순히 일정한 틀에서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다고 하여 이 도서를 읽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100% 옳다고 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와 현대사회는 당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신학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아테네의 민주사회라는 것을 자신의 스승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예와 동물에게 사고할 능력도 없거니와 그들은 어떻게 해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 시대엔 노예사회가 존재했고, 지금은 존재하지 - 일부는 존재하겠지만 - 않는 것이 당연하다. 노예라는 존재도 결국 인간이고, 노예 역시 인간으로서 가지는 감정과 이성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러면 노예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면 그가 세운 형이상학에서 아무리 논외로 설정해도 그가 세운 학문적 뿌리에서 명백한 오류를 저지른 점은 분명하다.

그래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면 재미는 장면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같이 있는 그림을 본다. 플라톤을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며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보면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다. 진리는 플라톤에게 이데아 세계에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있다. 어떻게 보면 형이상학이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일 수 있겠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존재에 대한 존재에 다가가니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현실에서의 존재들에 대한 사유적인 사고에 대해 분명 사유의 대상은 눈에 보이나 사유 그 자체는 눈에 보일 리가 없다. 그런다고 하여 그것을 그저 있다고 하여 거기서 끝나기만 한다면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왜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는 질문처럼 있음에 대해 탐구하고 사유하는 형이상학은 여전히 인간의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영혼에 대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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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
김윤아 지음 / 일지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내가 보고 있던 어느 도서 한 부분에 이런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언캐니 밸리 이펙트(uncanny valley effect)"이다. 예전에 내가 은근히 생각해보고 영상관련 학문 도서 및 애니메이션 관련자료에서 조금 연계된 내용이 있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인형이나 만화 캐릭터, 로봇과 같은 인공체들이 인간을 닮아 갈수록 호감이 상승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정도가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플라 익스프레스>를 보고 어린이 관객들이 공포를 느낀다거나 <파이널 판타지>의 너무나 인간 같은 캐릭터들이 무섭고 징그럽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감정이입이 안되는 상황 등이 그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픽사의 <인크레더블>이나 <슈렉>같은 애니메이션들은 오히려 2차원의 평면적 캐릭터를 만들거나 완전히 인간과 다른 초록 괴물을 창조한다. 애니메이션에 있어 인간 형상 언캐니 효과에 대한 논의는 서울시립박물관 연국논문집 <현대미술과 미술관>의 수록 논문, 김윤아, 「그것은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인가: 인간의 형상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미술관, 2009년 참조] 

평소에 애니메이션 관련 글을 적는 입장에서는 이 말은 상당히 인상이 깊다. 이른바 애니메이션 캐릭터라는 존재들은 현실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현실에 없는 허구의 존재이다. 문제는 실제 존재들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담고 있으므로 그들이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문제로 인해 삶의 에로스와 죽음의 타나토스가 교차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라는 것은 실사영상으로 통해 삶의 모습과 더불어 죽어있을 그들을 불려오는 하나의 환영소환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실사 안에 찍혀 있는 피사체에서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들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허무의 공간이란 것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죽어있는 자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자들을 만드는 것으로 이른바 죽음의 각인을 새겨주는 영화와 달리 영원성을 부여한다. 

원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원래 없어질 수가 있다는 소멸의 현상을 변증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영상에서는 빈 공간조차도 하나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존재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런가?
 

죽음이 원래 없던 이들을 탄생하는 것에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말할 수 있는가? 그냥 TV나 영화관에서 보이는 유치하고 저속한 수준의 미디어로 비추어 볼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편견과 오류와 자만에 불과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말하려면 우리가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오락과 재미로 부여하기 보다는 그 이상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살펴본 도서에서 애니메이션에 얼마나 높은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지 기술한 도서가 있었다. 
 

그 책은 바로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란 도서이다. 이 도서의 큰 특징은 이른바 장인-작가주의적인 작품을 다룬다는 점과 상업적인 요소를 지닌 대규모 자본집약적인 제작방식보다는 1인 내지 소주정예로 이루어진 개인 중심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제작방식이 대규모 노동보다는 감독이 직접 모든 것을 구상하고 그리고 제작하므로 애니메이션이 모두 만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작품에서 보이는 가치관과 예술성은 매우 뛰어나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편의 미학강의를 받는 것과 같다. 미학은 미(美)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그 미라는 것이 단순히 예쁘고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는 모습보다는 그 내적인 가치와 담론을 어떻게 보여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예술이라는 인간 내부에 있는 하나의 억압 내지 표현욕구가 타인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 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게 하는가에서 미학의 가치를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미학은 예술에 대해 철학이란 칼로서 광학적으로 본다는 말처럼 애니메이션 내에서도 예술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안다는 것은 애니메이션 미적 가치를 올리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단순히 우리의 인식 속에 있는 고정된 관념보다는 그 이상의 이상과 사유로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특히나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런 고정된 관념과 인식에 대해 확실하게 해체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이 있어야 한다. 책의 본문에서 이런 문구가 나온다.  

<아도르노는 “타락한 세계를 고발하기 위해서, 능욕당한 미의 명예를 위해서 예술은 추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잔혹해야 하고 혼돈을 가져다 주어야 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의 공범자가 되어 화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기만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닌 것이다. 예술은 삶에 대한 부정성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하며 그 방식은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일 때만, 자신의 타자성을 내세우고 모순과 불협화음, 비동일성, 분열 속에서 스스로를 지킨다고 역설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애니메이션 및 영화 각종 이야기를 가진 서사구조에서는 평화로운 세계 내지 혹은 원만한 공간에서 하나의 침입자 및 원인제공자가 그 세계와 공간을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그 세계와 공간이 위태롭게 됨에 따라 불안정한 구조로 빠지고, 이에 대해 영웅이나 대항조직이 생기며 이들은 다시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이것이 보통 narrative의 정해진 간단한 패턴공식이다.
 

보통 이런 공식들은 자기반성보다는 외부의 인자를 찾아오기 때문에 그 갈등의 시발점이 정말 외부의 존재들이 의도적으로 했는지 아니라면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게 했는지가 알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자주 보는 영화 중에서 베트남전쟁 영화가 있다. 거기서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갖은 음모와 위협을 제공하고, 미국군은 여기에 대해 매우 어렵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오고가면서 관객의 긴장감을 도모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에 맞이함에서 영화는 안정된 공간을 찾고 세상은 평화가 다시 찾아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세상 베트남전쟁은 통킹만 사건으로 통한 첩보자작극이란 폭로로 통해 베트남전쟁은 정말 세계 평화의 - 악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 위협을 저지함에서 모든 것이 마친다. 이것이 보통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 혹은 영화관에 보러 가면서 미리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관객의 틀이다. 그렇지만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은 이런 고정된 인식이나 일반 대중들의 사고를 가진 관객의 생각들을 오히려 전복시킨다.
 

영화로 통한 장치가 아니라 영화로 통한 정치적인 강조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들이 기용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보기가 참 좋다는 것보다는 보기가 그다지 좋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준다. 정해진 방식과 모습 그리고 연출로는 기존 사고의식에 빠져 있는 인간의 한계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허나 무조건적으로 이런 과격하고 전도적인 방식으로만 관객들을 자극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리데릭 벡이란 감독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제작기간이 5년이란 시간을 소요되었는데, 막상 상영시간은 단 30분 내외이다. 그는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혼자 작화작업을 하였으며, 작품 내의 마치 몽상의 세계를 꾸미기 위해 화학약품으로 펜이 묶은 셀을 닦음으로서 한쪽 눈을 잃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겪은 만큼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관객들을 사로잡게 되었고,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 나무를 심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감독이 주지하고자 하는 의도나 가치가 그대로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들에 우리는 과연 예술적 가치를 배제하고 그대로 넘기야 하는 것일까?
 

때로는 이런 작품적 가치를 이해하고 논하기 위해서는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게다가 예술 애니메이션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여 다른 애니메이션에도 예술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애니메이션인지 혹은 애니메이션을 위한 예술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을 위한다고 하여도 애니메이션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고, 그것이 미학적으로 풀어가서 철학적인 사유로 논한다면 애니메이션 과연 그저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ps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이 책을 저술한 김윤아 교수님에게 직접 서명을 받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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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의 탄생 - 글쓰기의 새로운 전략
조셉 윌리엄스.그레고리 콜럼 지음, 윤영삼 옮김, 라성일 감수 / 홍문관(크레피스)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논증이 탄생은 논리적인 증명만을 원하는 도서가 아닌 듯하다. 오히려 논증으로 탄생하는 것은 언어로 통하여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 그 말로 통해 활자라는 매체로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단순한 자기가 하고 싶은 주장만 제기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주장과 거기에 동반되는 의견, 그리고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해 서로 토의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이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논리만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 논리로 통해 어떻게 상대방과 관계와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것이냐는 것이다. 진정한 논증은 자신과 우리만이 아니라 상대편과 타인의 발전을 같이 고민해야할 숙제인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 이외의 모든 상황을 지혜롭게 넘길 수 있는 하나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 무기는 총과 칼처럼 남을 다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자신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핸디캡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을 알릴 수 있는지 혹은 그 뜻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지는 대화로 풀어가는 현대인들의 큰 과제이다. 그런 점에서 논리정연하게 글을 적어서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도록 유도해야 하며, 거기에 대해 상대방에 대한 입장 역시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그런 글의 대화로서 풀어가는 그 과정을 3가지 단어로서 전제를 세운다. 그것은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이다. 즉 논리, 입장, 감정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에토스다. 분명 책 제목이 논증의 탄생이나 논증이 탄생하는 것에서 로고스보다는 에토스를 중시한 점에서 나는 조금 놀랬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말하고픈 내용을 글로 적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를 남에게 전달한다는 전제 아래서 시작일 것이다.

내 생각을 전달함에서 상대방이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의 글을 적는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잘못된 것보다 글을 적은 본인들의 잘못이 크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글을 잘 적을 것인가? 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하지만 단순히 어떻게 글을 잘 적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만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고민이 될 것이다.

문건을 작성할 때 어떤 명확한 주장과 전제를 정했는지, 그 주장과 전제를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이유와 근거를 찾아내는지? 정확한 이유와 근거도 있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문장을 꾸며서 간단명료하면서 상대방이 납득하기 쉽게 적을 수 있을까 등 다양한 언어기술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처음 읽은 나는 겉으로 읽기만 해서는 분명히 어려운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것이 어렵지 않더라도 이 책에 적혀 있는 안내들을 따라 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는 글을 적어가는 방법과 기술 그리고 많은 사례를 통해 추후 글을 적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 글을 적는 것은 기술과 방법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논리적인 사고로 통해 상대방과 대화로서 풀어갈 수 있지만, 그 논리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 그리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논리를 이끌 수 있는 감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글의 요소라는 점이다.

어떻게 보자면 지나치게 논리적인 글을 상대방에게 차가운 칼날을 들이대는 것과 같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글은 너무 뜨꺼워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글을 적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과 자신이 내세우고 싶은 전제가 자신에게 모두 합당할지 모르나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납득시키어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할까? 단어 위치나 문장구조나 어휘구사 하나하나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하는 언어라는 마술에서 이 책에서는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이 책에 적혀있는 부분만 매달리면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에토스는 이 책을 읽어서 얻어지는 보물이 아니라 평소 글을 적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 그 자체에서 생기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의 탄생이란 이 책에서는 그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충분히 그런 부분을 숙지하고 있다면 언제가 글을 제대로 적고 싶어 하는 미숙한 나에게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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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7-01-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또 놀람 ㅋ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인 강원국 샘이 이 책이 추천을 하셨어요 그래서 리뷰를 보니 만화애니비평님의 리뷰가 퐉!감탄하고 있어요 법학 답안지를 쓰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젤 중요한 점이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부분을 논증하는 법이에요 ㅎ 이 책이 도움이 될까 고민은 하지만ㅋ 함 읽어볼라구요 ㅋ 제가 질문을 좀 못 알아듣고 글을 잘 못 쓰는 경향이 있어서요 ㅠ 눈이 많이 옵니다 길 조심해서 다니세요!!!

만화애니비평 2017-01-23 13:41   좋아요 0 | URL
추운데 잘 지내고 있나요?
이 책을 국문학도에게 소개받아 읽어보았습니다.
아직 비문이나 문맥오류가 많으나, 그래도 이 책 덕분에 많은 교정과 실력을 늘리게 되었지요. 전 남부권이라 눈발을 봐도 눈쌓인 것은 보기 힘드네요. 감기 조심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