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설국열차
CJ 엔터테인먼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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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를 보면서 생각한 점은 어느 정도 사전에 내가 판단하던 내용이 들어맞은 것과 그 이상의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다른 내용이 있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설국열차>에서 제일 중요한 갈등 요소는 바로 계급적 요소로 생각하는 것보다 그 계급이 구성된 원인에 대한 고찰이었다. 시놉시스부터 차량의 제일 뒤편에 탑승하는 승객들이 섭취하는 음식은 재료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든 단백질 블록이다. 인간의 식량 문제에서 단백질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인간의 생체조직을 이루기 때문이다.

 

 

단백질의 영양소는 다른 영양소인 지방과 탄수화물처럼 유산소 운동으로 통해 에너지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은 당장의 생존문제가 달려있으며, 인간 번식에 필요한 정자 및 난자와 같은 생식활동도 단백질의 보충이 필수적이다. 그런 단백질이 <설국열차>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재가 된다. 왜냐하면 영화 후반부에 가면 34세의 커티스의 17세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인류의 오만함과 어리석은 환경오염으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했다.

 

 

그리고 설국열차가 등장한 원인은 바로 윌포드가 만든 유람열차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존이 불가하기 때문에 존재한 것이다. 이때 설국열차는 이미 탑승하고 있던 승객이 있는 반면 탑승하지 않은 승객이 있다는 점이다. 빙하기가 찾아온 후에 열차 밖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있는 되기 위해 설국열차에 탑승해야 했다. 승객정원은 천 명 정도, 이 많은 인구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살아남기 위한 숙제이다. 

  

왜냐하면 정해지지 않은 승객이 탑승할 때 이미 탑승한 승객들과 그 승객의 부하들이 뒤늦게 탑승한 승객들의 짐을 모조리 빼앗았고, 식량이 부족한 사태에서 뒤늦게 탑승한 승객들은 생존이 걸린 문제가 있었다. 모든 것을 빼앗겼으니 식량이 존재할 리가 없다. 이때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원인은 최후의 인간으로서 모습을 상실할 때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식량이나 재원을 공급받을 수 있는 정상적인 세계에서 그런 비난을 듣지, 비정상적 상황에서는 인간을 사로잡아먹는다는 것은 이미 문화인류학적인 연구에서도 들어난 사실이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도서는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이었다.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은 자연환경적인 하부구조가 문화적 구조를 만들기 때문에 설국열차에 탑승한 불청객들은 밀림 속의 원시부족이 아니나, 그들이 되어야 했다. 원시민족 내지 혹은 원시부족이 아니더라도 남미의 아즈텍문명의 식인문화는 바로 단백질의 관건이었다. 커티스가 17세가 될 때 어느 산모를 죽였고, 그 산모의 아이를 먹으려고 했을 때 길리엄의 희생으로 그 아이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커티스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에드가였다.

 

 

커티스는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어야 연명이 가능한 지옥과 같은 시기를 견딘 사람이었다. 그리고 길리엄을 비롯한 원로들은 팔이나 다리 일부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당시 아비규환과 같은 식인의 향연을 막아내기 위해서다.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자기희생이란 숭고함과 더불어 불청객 탑승 1달 뒤에 단백질 블록이 난민들에게 공급된다. 그 덕분에 난민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탑승객들 중 일부는 2세를 생산하여 인류를 영속하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아이들에 대해 윌포드는 억지로 인구수를 점호하여 아이들 몇 명을 억지로 데리고 간다. 이들의 생사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윌포드는 인구통제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고,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났을 대 윌포드로부터 설국열차의 비밀을 듣는 순간 그에게 납득 당한다. 이것은 설국열차는 지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류라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이외에는 그 어떤 인간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유치원에서 7인의 도주자에 대한 내용을 복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설국열차에서 내려 땅을 밟자말자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얼어 죽고 만다. 결국 설국열차가 아니면 그 어떤 인류는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보호받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설국열차 시스템은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달리는 열차는 영구적으로 달릴 수 있는 영구적인 엔진을 가지고 있었고, 열차 내부에는 물을 만드는 시설, 생선을 키우는 수족관, 고기를 저장할 수 있거나 또는 채소를 키울 수 있는 정원이 존재했다. 결국 승객들에게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교육기관을 비롯하여 여가 및 오락 등과 같은 여러 문화시설도 구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선택된 인간이기보단 처음부터 승객인 것이다.

   

  

그러나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은 2가지로 나오는데, 그것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설국열차의 불평등은 분명 후천적인 것으로 시작(그것은 빙하기가 올 때 미리 탑승한 승객과 그렇지 못한 승객)하여 선천적으로 구분 짓게 만들었다. 그것은 열차의 어느 장소에서 태어났다는 조건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불평등에 대해 커티스는 불만을 느끼고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것의 결론은 결국 생존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열차가 아무리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달려도 물을 정수할 수 있는 능력이 정해져 있다는 점과 식량이 될 식물과 동물 역시 종족 번식 및 성장에 어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식량이 모든 기차 안의 사람들에게 열람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모두 공멸하지 않은가? 결국 인구조절은 필수불가결이고, 윌포드는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찾아온 커티스에게 열차의 주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앞으로 자기 수명이 다하면 그 자리를 커티스에게 이양할 계획이었다.

 

 

커티스는 처음에는 윌포드의 제안에 긍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설국열차는 사회구조적인 요소로 보면 식량과 재원이 정해져 있는 밀림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의로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메모를 전해주는 이유는 인구조절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7인의 탈주자와 4년 전의 반란 역시 윌포드가 계획한 내용이었다. 누군가 꾸준히 선동하여 분쟁 내지 투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결국 식량부족에 모두 공멸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불청객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앞 칸에 승객들도 계속 늘어나면 그만큼 인구통제의 영역은 불청객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설국열차는 계급체계가 분명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화폐가 존재해야 하며, 이익과 이윤을 추구해야 하나 그 추구할 수 있는 수단적 요건이 없었다. 식량도 윌포드의 부하가 임명한 사람이 직접 만드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19세기 독일수상인 비스마르크가 독일통일을 이끌던 국가사회주의체계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권력을 지닌 윌포드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인구통제를 끊임없이 시도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가 아니고 대신 문화유물론적으로 밀림의 세계이기에 커티스는 윌포드의 사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열차가 멈추는 순간 인류는 모두 멸망할 것이고, 지나치게 많은 인간들에게 공급할 식량과 물조차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설날 기념으로 인구조절인원에서 74% + 18인은 설국열차 최하층 인간에게 부당하나, 설국열차라는 생태계에서는 필요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에서 제시된 생태 환경적 조건이 자연계가 아니라 문화 생태적으로 인간의 세계에서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제가 조금 있었다. 열차에 대해 완벽성을 추구한 윌포드였으나, 열차 역시 영구적으로 돌아가기 위해 엔진이 영구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단지 그 관리요소에서 기계부품의 교체만 이루어지면 되나, 사실은 그렇지 아니했다. 설국열차 초반에 소년 2명이 억지로 통제요원에게 잡혀가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원인은 바로 열차 엔진의 기능을 유지해줄 부품이 필요했다. 빙하기로 인해 지구문명은 더 이상 만들 수가 없었다.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하여 인간의 노동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력이 존재하더라도 그 노동을 할 수 있는 생산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공장은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파묻히고, 시설물들은 동파되거나 눈사태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노동을 투입할 수 없어서 부품을 얻을 수 없기에 윌포드는 결국 5세 미만의 아이들을 하여금 열차의 정비를 하도록 한다.

 

 

워낙 기계가 미세하고 예민하기에 작은 몸을 가진 아이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공간은 마치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어린아이에게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공장주가 생각나게 만들었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아니나,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 열차 그 자체가 생태계라고 하던 윌포드는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커티스는 혁명의 중단에서 다시 혁명의 재장전으로 이어지고, 열차의 엔진은 멈추고 모든 열차 안의 사람들은 죽고 만다. 

 

 

오로지 살아남은 사람은 흑인소년 1명과 남궁 민수의 딸인 요나, 서구적인 시각에서 보면 참으로 거북할지도 모를 요소다. 왜냐하면 백인남성중심이 서구사회와 게다가 그 열차의 주인은 백인남성이 윌포드다. 자본가였던 그가 그 생태계의 정점에 있었고, 그의 사상은 결국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어 그것을 부정해야할 새로운 가치가 필요했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2명의 어린 소년과 성숙한 소녀에서 인류는 이 2명만 존재했다.

 

새로운 인류의 기원이 되어야 할 사람이 동양여성과 흑인남성이란 점은 아마 미국 헐리웃 영화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말이다. 설국열차에서 그런 기존 가치관의 붕괴는 이미 작품 초반부터 나와 있다. 지구온난화의 문제를 걱정하여 많은 나라에서 오존층이 형성되어 있는 성층권에 새로 개발한 가스를 살포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문명화에 따른 환경오염은 인간 스스로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파괴했다는 변증법적인 문제를 보여준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오히려 인간의 생존조차 위협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욕망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실존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자신의 실존 없이 결코 인간은 욕망할 수 없다. 욕망의 주체가 사라진다는 것만으로 인간은 욕망을 누리기 위해 생존을 누려야 한다. 생존하게 되면서 그 자신에 대하여 순간적인 욕망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생존에 대해 투쟁의식에서 남궁 민수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보안설계 전문가였으나, 한편으로 지구환경 시스템에 대해 꾸준히 고찰하고 연구하고 있었다. 같은 궤도를 18번을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추락한 비행기를 보면서 처음에 후미만 보이고, 그 다음에 동체부위가 보인다면 다음에는 분명 비행기 전방도 보일 것이란 점이다.

 

 

인류의 어리석은 빙하기가 자연 스스로 해빙기를 맞이하는 점이고, 지구 지표면을 감싸는 얼음이 녹게 될 정도면 인간은 얼어 죽지 않고 얼마든지 2다리로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남궁 민수가 그렇게 Kronol을 원한 이유는 그것이 환각물질이란 점도 있어나, 한편으로 강력한 인화물질이란 점이다. Kronol이란 물질이 실존하지 않더라도 nol이란 단어가 후미에 들어가면 메탄올, 에탄올, 프로판올과 같은 탄화수소 결합물질인 알코올을 의미한다. 알코올의 경우 인간에게 환각작용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마취제로 사용된다.

 

 

실험실에서 사용되는 알코올램프 역시 탄화수소가 강력한 인화력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그것을 이용하여 설국열차 출입문을 부수고 나가려는 남궁 민수는 인류의 생존에서 대안지점은 설국열차의 생태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해빙기를 맞이하는 지구환경시스템에 맞추는 것이다. 설국열차의 인구통제는 결국 열차 내에서 생기는 에너지의 한계성이다. 그 에너지는 달리는 열차의 동력이다. 동력의 한계와 더불어 그 동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들의 노동착취라는 이율배반 속에서 인간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비로소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작품의 연출적인 요소에서 운 좋게도 2013년 BICOF(부천국제만화축제) 행사에서 <설국열차> 영화제작자인 봉준호 감독을 비롯하여 만화원작가인 쟝-마르크 로셰트(그림)와 뱅자맹 르그랑(글)을 초빙하여 대담을 본 것이다. 영화연출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이 남는 부분은 커티스가 사람들을 이끌고 정수시설이 있는 곳에 갈 때 윌포드의 부하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도끼를 들고 있던 경비대는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을 보자 생선 한 마리에 도끼로 배를 가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물러나지 않으면 바로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말이다.

 

 

그리고 그 경고를 뒤로 한 채 결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커티스를 중심으로 클로즈업이 되어 슬로우 모션으로 찍히는 장면은 생사를 넘어 자신의 실존적 가치를 찾는 그의 여정이 보인다. 자신의 살인과 식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속박된 커티스에게 유일한 그 해방구는 설국열차의 엔진을 점령하는 것이다. 그런 여정에서 그의 격렬한 싸움과 그것을 본 경비대가 터널에 들어갈 때 모든 조명을 끄고, 적외선 스코프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을 무참하게 도살할 때이다. 그 후에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과 최악의 재앙을 준 프로메테우스의 선물 불이 도착하자 커티스는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은 불의 발견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처럼 투쟁에서도 문명의 우세(총, 도끼, 적외선 스코프와 같은 도구)를 가진 경비대에게 역시 문명적 조건(횃불)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인류 스스로 멸망은 문명에 의해 시작하고, 그 문명에 의해 인류는 초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문명의 소재적인 요건에서 카메라의 클로즈업, 슬로모션, 적외선 촬영은 인간의 투쟁의 긴박함을 제시해준다. 조금 아쉬운 부분인 점은 요나의 선지능력이다. 왜냐하면 몽타주적인 요소에서 요나의 능력으로 인해 제거되어야 했다. 가령 문 앞에 도끼부대가 있다면 문을 열려고 하는 커티스 일행과 도끼를 들고 커티스 일행을 노리는 부대들의 모습을 각각으로 비춘다면 격렬한 싸움이 되거나 혹은 엄청난 위기가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문을 열면 안 된다는 요나의 대사와 도끼를 들고 생선의 배를 가르는 장면은 몽타주적인 요소를 배제한 미쟝센적인 요소에 치중했다. 좁은 공간이란 열차 속에서 공간적 상황과 어두운 화면, 좁은 통로 등과 같은 요소는 분명 커터스의 위기를 강조하기 좋은 장면이었다. 또한 지배계급이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경우도 좋은 표현이다.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장면은 워킹 인사이드로 통해 윌포드야 말로 자신들의 구세주라는 표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급박한 회전 내지 빠른 전환, 또는 롱샷(주로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한 외부에서 달리는 열차를 촬영하는 장면에 치중)의 비율이 적었기 때문에 좁은 공간의 한계성을 그대로 보여준 방법이었다. 상황은 분명히 급박하나 카메라의 연출은 왠지 모르게 급박한 느낌보단 순서를 꾸준하게 이어가는 느낌이 강한 것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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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2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리뷰 공모작이군요. 이거 나랑 라이벌 관계네...ㅋㅋ 전 이 영화 안 봐서 모르겠네요. 내가 봉준호 영화를 개봉관에서 놓치다니 ....

만화애니비평 2013-12-27 16:32   좋아요 0 | URL
그냥 닥치는대로 올리는 중입니다~!ㅎㅎㅎ
 
박수건달 (1disc)
조진규 감독, 박신양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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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전형적인 한국의 저급한 3류틱한 조폭영화라는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3류 이상의 재미있는 요소와 학술적인 요소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문제는 결론적인 서사구조에서 보이는 점은 역시 3류는 그렇고 2류에 머물고 2류 중에서도 약간 떨어지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보이는 중요한 요소는 분명 있다. 그것은 건달이 하고 있는 박수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서 고전이나 혹은 주요한 전통문화를 찾아가면 무속신앙에 대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巫라는 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神壇樹(신단수)라는 것에서 신단에 해당되는 나무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박달나무는 檀이란 단자이고, 한국의 최초 국가라는 고조선을 건립한 단군의 단자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그래서 한국의 최초의 왕은 무당이라는 뜻이다. 무당의 의미에서 현대에는 그저 미신에 불과하나 미신의 세계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이유는 그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신앙 내지 문화에서 우리민족의 자화상 내지 존재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0세기 위대한 사상가이자 인류학자인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로 알려져 분으로 그의 저서인 <슬픈열대>와 더불어 명작인 <야생의 사고>를 읽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야만인을 대하는 어리석은 문명의 야만을 반성해야 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야만인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 문명인들은 알 수 없는 미스테리 내지 혹은 미신 내지 미개한 문화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적 조건과 더불어 오랫동안 살아온 문화의 소산이다.

 

오히려 야생의 사고라고 여기는 부분에서 문명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도리어 미개인들이 훨씬 웃돌고 있을 수 있다. 린네가 발견한 식물분류법보다 더 세분화된 지식으로 알아보는 원주민들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원주민에서 문명의 식물학자와 원주민 중에서 누가 식물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으로 원주민들의 에믹의 요소보단 에틱으로 대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문화유물론적인 요소에서도 물질이 문화를 구성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연적, 지리적, 기후적인 요소로서 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박수건달이란 영화로 돌아보면 한국의 문화적, 자연적, 지리적 특성에 대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을 맡은 박신양 씨는 작품에서 조폭건달로 나온다. 그런 그가 무병에 걸려 무당이 되는 것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부산의 어느 어촌마을의 어항을 이전하여 그 자리에 큰 건물을 세울 계획을 세운다. 지금도 부산의 어항에 가면 마을주민들이 모여 용왕제를 열고 한다. 용왕제에 무당을 부르고 어민과 마을주민이 모여 한데 어울려 술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민중문화에서 굿이란 하나의 문화는 공동체적인 문화형성과 더불어 집단의 공동체 정신을 재확인 후에 더 견고하게 다지는 계기라는 것이다.

 

굿이란 것과 혹은 제사를 지낸 이유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무속신앙에서 기본적인 원리는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이다. 위로를 하는 대상이 죽은 자에 대한 위로가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인 것이다. 제사문화에서 한국의 정신이란 바로 공동체적인 정신이다. 그런다고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아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그 소수의 부족과 씨족 혹은 마을주민이 어울리는 작은 공동체로 이루기 때문이다. 박수건달에서 무당이란 자는 결국 그런 의식행사를 진행하고 만들어주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이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은 제사장과 더불어 임금이란 군장을 맡는다. 그가 왕으로서 제정일치를 추구한 것은 왕권이 결국 주종관계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는 오이디푸스(거세공포와 더불어 죽은 아버지 죽음에 대한 위로와 슬픔, 살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적인 부자관계로서 국가와 부족을 이끈다. 기본적으로 한국이란 농경문화를 가진 민족이었고, 어민이라고 해도 100% 물고기를 잡지만은 않았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가축도 기른다. 농경문화의 자급자족인 생활요소가 결국 공동체의식을 키운 것이다.

 

놀이라는 문화가 노동이 수반되기에 특히 농민과 더불어 어민도 민요를 부르며 고기를 낚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기계의 발달로 좋은 장비로 물고기를 잡는다고 해도, 결국 여러 사람들이 많은 배를 동원하여 집단으로 고기를 낚는 방법도 존재하고, 바다에 나가면 풍랑과 재해로 사고를 당할 수 있으므로 서로간의 연락망을 항시 유지하고, 그것을 위해 친분을 유지한다. 그래서 용왕제 굿판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좋은 볼거리라는 점이다. 작중에서 박신양 씨도 박수건달이 되어 최종적인 위기 전편이 굿판의 모험이다.

 

오이가 위에 떨어지는 바로 두 동강이 나는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무당역에서 위기에 봉착하나, 무당의 신기로 그 위기를 모면한다. 현대과학기술로도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것이 칼 위에서의 무당의 춤이다. 본래 무당이란 용어에서 샤먼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샤먼은 미친듯이 춤을 추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초자아적인 세계에 보이는 현실공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무당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을망정, 그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무속인은 2가지로 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하여 누군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심정이 있다. 그런 무의식적인 불안과 고민이 무당의 존재를 탄생하게 한다.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혼의 존재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기적의 이야기는 신화와 설화로서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당의 문제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그런 욕망의 대변인이란 점에서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또한 개인 대 개인으로서 보자면 어느 개인에 대하여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해주는 존재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우리 현대인이나 과거에 살던 사람이나 정신적 불안을 영원히 떨친 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문명이 시작된 이래 말이다. 그러나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처럼 중세시대 유럽시대에 광인들이 나오면 그들을 분리하거나 제거하거나 혹은 가두지 않았다. 그들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억압이나 혹은 표현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정신병원이 생긴 이래로 그런 자들은 더 이상 거리를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광인 중에서 물이 어는 추운 날에도 덥다는 말을 하고 속옷만 입는 자도 있다.

 

인간이 가진 육체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을 모두 무시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무당 역시 현대에서 보면 그저 굿만 하고, 점만 치는 사람으로 떨어진 셈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에서 진정 무당의 존재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건달이고, 무당 남성은 박수라고 하기에 박수건달이란 작명은 분명 어울린다. 박신양 씨가 하는 행동을 보면 죽은 자가 빙의하여 살아있는 자를 만나게 한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살아있는 자가 안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억압되어 그것이 하나의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갇혀있는 말을 표출하게 하거나 혹은 과잉행동을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마음의 병이 있는 인물들은 박신양 씨의 이야기에 모두 울고 통곡을 한다. 하지만 박수건달인 박신양 씨도 같이 울고 통곡을 한다. 무당이란 자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가는 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은 무의식적 공간에 깊숙하게 들어가 공유하는 자라는 것이다. 박수건달에서 보이는 한국인의 恨이란 것으로 통해 원래는 무속문화가 인간을 넓리 이롭게 하는 단군신앙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시작되나, 현실은 그저 자기만족에 취하려는 고객과 더불어 그것을 이용하는 상술이 존재하는 게 대부분이다.

 

구복신앙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 무속신앙의 한계점이고, 지금은 기독교, 불교, 수많은 종교들이 대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천주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란 존재로 통해 넓리 사랑을 전파하는 박애사상이나, 혹은 불교의 부처님이 자비로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박애정신에서 종교의 시작과 교리 및 기타 문화적 조건을 달라도 철학적 베이스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급격하게 신격화 된다. 보살과 부처를 모신 무당의 집에 기독교 신자가 예수님도 영원하다고 하여 그 무당은 예수님의 조각상을 보살과 부처님과 같이 모셨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보살과 부처 이전에 무속신앙은 도교신앙과 결합하여 장군상과 신선, 동자상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은 자신(들)만이 가지는 불안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인에게 간다. 그리고 진짜 무속인을 만나면 그들은 울고웃고, 그저그런 무속인을 만나면 웃거나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올 것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진짜 무당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어항을 개발하려고 조폭을 투입하여 이전하고, 그러기 위해 굿을 했다는 점은 폭력조직이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힘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래서 <박수건달>은 한국의 무속에 대해 재밌게 다른 점은 높게 인정하나, 그 전개가 한계라는 점이다.

 

집필시간 :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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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톰 후퍼 감독, 휴 잭맨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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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프랑스혁명의 상징성에서 보여주는 어두운 현실과 더불어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프랑스혁명을 찾아보면 총 5번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프랑스혁명은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 함락과 더불어 앙시앵레짐(구체제)의 해체를 만든 프랑스대혁명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혁명은 더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일어난 것이 1830년, 이후가 1848년, 잔혹하고 안타까운 1871년 파리꼬뮌, 이후로 1968년 5월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사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사상과 20세기의 사상은 조금 차이가 있다. 18세기와 19세기 혁명의 정신적 지주는 장 자크 루소였다면, 20세기의 프랑스혁명은 카를 마르크스였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 역시 장 자크 루소의 승계자라고 보는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의 발견자>처럼 장 자크 루소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기여와 더불어 프랑스라는 나라 그 존재성마저 기여한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영화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에서 프랑스의 상징인 3가지 색이 블루, 화이트, 레드이다.

 

그것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공화국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프랑스공화국의 그 시초를 이룬 것은 역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이다. 이것을 읽지 않고 프랑스를 말하는 것조차가 어려울 수 있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삶의 철학까지 인간 그 자체로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추구하기 위해 투쟁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그런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대한 투철한 반사의식이 보인다.

 

영화라는 2시간 조금 넘는 런닝타임에서 충분히 만끽할 수 없으나, 장발장이 감옥에 투옥되어 힘들게 살아온 것에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미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불평등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있다. 선천적인 것은 인종과 성별이란 생물학적 요소로 볼 수 있으나, 후천적인 요소는 사회적 지위, 경제적 여건 그리고 정치적 입장이다. 구체제에서 저술한 <인간불평등기원론> 그리고 이후에 나온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무척 위험한 도서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상에서 지금도 루소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루소가 물어보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 비참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 제목에서 레미제라블에서 레란 res라는 것으로 다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미제라블은 비참하다는 말이다. 레미제라블은 다시 비참해진다는 의미이다. 비참한 역사적 되풀이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릐메르 18일>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역사는 2번 되풀이 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으로(소극으로), 희극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나, 루이 16세를 단두대 아래에서 하나를 이슬로 만들었던 프랑스가 다시 왕정군주제로 변모했다.

 

당초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하고, 국민공회를 설치하여 세계민주주의역사에서 큰 획을 긋은 자코뱅당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잠시 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의 죽음 이후 테르미도르당의 부패한 정치행위와 무능함은 결국 프랑스를 힘들게 만들었고,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루소에 대해 경배했거만, 추후에는 루소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레미제라블에서 황제가 있는 프랑스는 결국 나폴레옹이 집권시절이다.

 

그러나 주인공 장발장이 갇힌 것은 영화배경이 되는 1815년에서 19년 전에 잡힌 1796년이란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빵 하나를 훔친 것이 큰 죄가 된 것처럼 여전히 프랑스의 하층민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의 영웅에서 당통, 로베스피에르, 마라가 있으나, 결국 혁명의 원인은 대의를 가진 마리우스 같은 인물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빈곤한 농민과 피지배계층의 불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분노였다. 장발장이 가진 것은 처음에 오로지 분노였으나, 어느 성당의 신부님의 구원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훌륭한 도시의 시장이었고, 탁원한 공장의 운영자였다. 만약 신부님의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계속 어두운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프랑스혁명 시기나 혹은 장 자크 루소의 관련 서적을 봐도 프랑스 성직자의 부패와 비리는 여전했다는 점이다. 신의 운명에 점찍어 모든 것을 정하는 방식이란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신의 은총을 내린 것은 장발장과 코제트, 마리우스라는 일부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든 소설이나 주인공 위주 서사는 결국 주인공만을 보게 되는 한계점에서 주변 인물의 운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한계성이 있다. 그래도 영화는 충실하게 그 비참한 서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일반적인 대사보다 오페라 내지 뮤지컬적인 요소로 통해 감정의 기복을 더욱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에서 그런 진지한 요소는 처음에 장발장이 노예로서 죄수생활을 할 때 24601번으로 가석방 나오는 모습이다.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에게 깃발을 들고 오라고 한다. 깃발은 프랑스의 삼색기, 마지막에 장발장이 죽고 나서 그의 꿈은 역시 삼색기가 흔들리는 광장이다.

 

자유, 평등, 박애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릐메르 18일>처럼 공화국의 상징은 보평, 포병, 기병에 의해 무참히 밟힌다. 그래도 붉은 색의 깃발은 잊을 수가 없다. 검고 어두운 불운한 현실에서 붉은 색의 희망을 찾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붉은 색이란 영화 중간에 혁명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들의 붉은 눈물처럼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나무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들은 총과 칼을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가? 혁명의 기본적 문제에서 장발장과 코제트의 어머니 판틴처럼 그들은 현실이 아닌 미래를 잡아가길 원한 것이다.

 

장발장은 자기의 어린 조카가 굶주려서 빵을 훔쳤으나, 결국 수감되고, 조카는 굶주림과 병으로 죽게 된다. 그리고 판틴은 어린 코제트를 살리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고 몸을 팔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 그리고 비참한 인생의 종말은 죽음이었다. 희망이란 단어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에게 박애정신만큼 위대한 정신이 없다. 자유와 평등이 존재에서는 개인적인 부분에서 존재할 수 있으나, 프랑스혁명을 이끈 로베스피에르가 군중에게 외친 것처럼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가 있어야지 자신의 자유가 계속 누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자유란 결국 박애정신이 되는 것이다. 마리우스 친구가 그렇게 죽어갔으나 삼색기와 더불어 붉은 색의 깃발을 흔든 것은 박애정신이다. 그 박애정신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냉혹한 자베르 경감마저 경의로서 자신의 훈장을 어린 소년에게 바친다. 그 소년의 모습이 동서출판사에 나온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서적표지와 어울리지 않은가?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틀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결국 1830년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혁명 이후 사라지는 별들이었으나, 위대한 민중들의 의지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레미제라블은 소설이므로 배경은 1832년으로 되어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바리케이트 너머라는 웅장한 노래처럼 그 너머를 향해 죽음이란 것을 택한 이들의 절대적 신념에 그저 가슴이 쓰릴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 친구들은 모두 죽으나, 마리우스가 장발장에 의해 구출되고, 후에 코제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문제는 마리우스는 귀족의 집안이란 점에서 프랑스혁명가로서 마리우스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저 남자인 마리우스만 성공한다. 영화에서 혁명은 실패해도 사랑은 성공했다는 스토리라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판틴이 죽어가는 장발장을 데리고 나오는 모습에서 장발장의 영혼은 사랑에 대한 노래에서 혁명을 일으킨 민중들의 노래와 합류한다.

 

어찌보면 지금은 구체제에 순응할 수 없는 코제트(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와 마리우스이나, 언제가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이것을 모두에게 전해주는 박애정신이 넘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후 제일 비참한 1871년 파리꼬뮌에서는 당시 몇 만명이 넘는 파리시민이 싸우다 전사하고, 포로로 잡혀도 살해당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3세는 결국 파리시민을 무참하게도 배반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잔혹하고 급박했을까? 13~14세 소년소녀들이 총과 대포를 나르고, 팔이 하나 없어져도 저항하는 모습이 나온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 코제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슬픈 이야기다.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게 아니라 죄를 계속 만들 수밖에 없는 비참한 환경을 말이다. 자베르 경감은 법을 무조건 지키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역사의 뿌리인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3가지 체계에서 입법, 행정, 사법에서 입법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오로지 잘못된 법을 바꾸는 것은 입법에서 가능하고, 민주주의는 입법에서 시작하는 점에서 말이다. 입법에서 잘못된 관례나 법규를 바꾸고 새로운 제도는 정비하는 것은 법이란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국가의 법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한 것은 법이란 결국 힘이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밖에 되지 않는 점이다. 자베르에게 자비를 베푼 장발장에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나, 그것의 기반은 박애정신이다. 자베르 경감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만의 정의라는 법이 결국 박애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베르가 장발장에게 이길 수 없었던 것은 처음 자베르경감이 장발장을 그저 죄인으로 보았을 뿐이었으나, 장발장이 누구보다 더 박애정신이 넘치는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죄인으로 보자니 그에게 받은 자비는 자신의 양심을 찌르고, 그를 인정하자니 자베르경감은 자신의 존재적 의미에서 모순을 겪는다. 2명이 존재할 수 없다면 1명은 물러나야 한다. 결국 자베르경감은 자신의 도덕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신이 주는 정의가 법인 자베르경감, 신이 주는 정의는 결국 사랑이란 장발장에서 현실은 자베르경감에 가까우나,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은 장발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쉽지 않다. 낭만주의 문학인 점에서 낭만주의란 목숨을 걸고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로 위험한 일들이 주인공에게 펼쳐진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계속 되풀이 되는 소극이 된다. 물론 소극에서 당하는 자들은 비극이나 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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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만화의 세계 살림지식총서 120
박인하 지음 / 살림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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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가 논문을 정식 논문을 적어본 일을 생각하면 3번인 것 같았다. 첫 번째는 대학교 학부시절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것이 아니라 학과 자체적으로 실시한 세미나 발표를 위한 논문이었고, 두 번째 논문은 대학원 석사학위를 받기 위한 논문이었다. 출신대학과 전공이 공과대학인 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논문의 주제가 다르더라도 기본적인 성향과 맥락은 서로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부터는 다른 논문으로 되었다. 그 논문은 공학석사와 전혀 무관한 논문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2011년 작업한 이 논문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중점으로 연구하고, 국내 각종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행사가 있을 경우 주관하고 운영하는 학회에 제출했다.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아마 학회 중에서 사람들에게 상당히 낯설고 신기한 학회가 아닌가 싶다. 가끔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로 통해 보면 만화애니메이션학과가 있는 대학이나 고등학교가 있는 것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인지하는 반면, 학회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는다. 물론 그 대부분 사람들이란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프레 등 한국에서 하위문화를 즐기는 부류다. 사실 이런 하위문화에 대한 연구가 1990년대부터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국내 대학에서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과가 있다는 점에서 대중은 물론, 하위문화를 즐기는 사람들도 낯설어 한다.

 

그나마 최근에 TV에도 문화콘텐츠사업의 일환으로 국내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인터넷에서도 마케팅전략으로서 웹툰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사용되기도 한다. 아마 그런 시대적 성향에서 가장 많이 개선한 것은 웹툰이 아닌가 싶다. 만화책이란 하나의 도서보단 인터넷으로 언제라도 볼 수 있는 편리성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아니라면 웹툰이 일정기간에 작가가 인터넷 매체업체와 계약을 하여 작품을 올린 경우 수익을 얻는 점에서, 웹툰을 보는 독자나 인터넷 이용자들은 무료로 본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웹툰의 그런 특성 때문에 만화의 친화성이 강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것은 웹툰의 성향을 고려하면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 주제를 만들 수 있어도 우리나라 문화적 여건을 고려하면 다양한 작품이 나오더라도 다양한 장르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작품흐름 즉 Cliche적 요소가 매우 강한 점이다. 물론 문학과 영화 심지어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도 Cliche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Cliche 요소만 강조하는 것도 작품을 다양성을 떨어지게 만든다.

 

다양한 장르와 작품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재와 주제가 필요한 점이다. 같은 연애물이라도 판타지나 전쟁, 정치, 사회적 문제 접근을 동시에 노릴 수도 있고, 학원물이라도 연애나 판타지 같은 것에 같이 만들어가기 보단 조금 더 순수하게 학원물로서 만들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작품 내에 보이는 성향이 결국 대중의 입맛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나, 작품이 대중의 입맛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경우 기존 작품과 다른 세계와 가치관으로 통해 제3세대 애니메이션 세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런 장르의 분류에서 내가 맨 처음에 제기한 논문 세 번째가 조금 생각난다. 당시 내가 제출한 논문은 최근 2010년 이후에 발매된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 국내 애니메이션 수용자가 선호하는 특성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인터넷 카페에 최근 나온 애니메이션 몇 가지를 올려놓고 투표를 하여 어느 작품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작품은 특성은 무엇이고, 작품의 장르도 조사하는 내용이었다. 이때 선호도에 대한 연구이기에 장르의 분류화에서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방영하는 사이트 내지 네이버 지식인에서 장르의 분류를 결정한 점에서 논문심사결과는 만족하지 못했다.

 

4명의 심사위원 중에서 3명이 부동의이고, 1명은 부분 동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읽은 <장르만화의 세계>를 읽어본 후에 조금 인용하여 작성했다면 약간 결과는 다르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2013년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컴퍼런스 주제로서 장르 만화에 대한 발표가 있었는데, 발표하던 교수님의 파워포인트 강연과 그 주제에 대한 안내책자를 읽어보면서 박인하 교수님의 <장르만화의 세계>가 상당히 많이 인용된 것을 최근에 알았다. 만화의 장르를 나누고 결정하는 점에서 하나의 세분화를 만드는 것은 작가로서는 조금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으나, 만화의 장르를 조금 세분화 하는 점은 만화라는 것이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란 점이다.

 

가령 일본 만화책에서 닥터 노구치의 경우 일본 의사 노구치의 일생을 다룬 전기물이면서도 한편 의사라는 직업으로 통해 살아가는 노구치를 의학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는 초밥을 다루거나 음식을 다룬 작품이나, 보통 일반 대중들이 알 수 없는 전문분야를 작가가 작품 내의 주인공으로서 부드럽게 풀어가면서 이야기의 재미와 주제를 알리는 방법도 있다. 장르 만화의 효과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점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우리가 알기 어려운 부분이나 흥미로운 부분을 만화나 애니메이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 전에 내가 영화비평문으로 적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인 <이브의 시간>에서 이브라는 가게에 들어오는 로봇이 마치 인간처럼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 로봇에게는 인간과 같은 생명이 없으나, 그래도 로봇이기에 국가적으로 법률을 적용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로봇 법률”, 이 법의 조항에서 제1조는 “로봇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태어났다.”, 13조는 “로봇은 인간을 죽이거나 해쳐서는 안 된다”이다.

 

사실 <이브의 시간>에서도 로봇으로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온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로봇이 억지로 프로그램이 작성되어 실행하는 것보단 로봇 자체적인 판단과 감정으로서 실행하는 모습이 나온다. 주변에 존재하는 제도나 사물, 문화적인 조건도 장르만화에 차용될 수 있고, 그것이 하나의 작품의 진행에서 큰 전환점으로 될 수도 있다. 장르만화의 창작은 이야기 흥미를 유발시키면 무궁무진하게 진행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영화에서도 콘티가 필요하여 만화를 그릴 때가 있는데, 만화로 나온 그 작품 자체가 콘티가 될 수 있다.

 

장르만화는 단순히 만화로 머무는 게 아니라 허영만 화백의 <아스팔트 사나이> 내지 <식객>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 <아스팔트 사나이>는 레이스를 소재로 하였기 때문에 일반대중을 생각했을 때 조금 낯선 세계이고, <식객>의 경우 요리 자체가 인간 식생활과 연결되어 있으나, 요리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소재거리는 우리가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특히 <타짜>와 같은 도박의 경우, 우리 일상생활에서 노출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든 점에서 흥미와 재미를 유발한다.

 

만화가 만화 안에서가 아니라 만화와 다른 매체나 문화의 접목은 만화가 가진 허구적 성향에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부여할 수 있다. 가령 <노다메 칸타빌레>과 같은 경우 클래식을 소재로, <신의 물방울>은 포도주를 소재로 했기에 작품의 이야기와 전개는 허구일지 몰라도 그 클래식 음악이나 포도주 자체는 실존하는 것을 차용했기에 키치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고, 또한 mania 세계에서 본다면 만화가 낯선 사람이라도 흥미를 유발하기가 좋다. 이전에 방영된 <이니셜 D>라는 만화책에서 나온 하치로쿠(86)라는 차량이 다시 자동차 회사에서 재생산되어 발매되는 점을 보면 장르만화가 판타지뿐만 아니라 현실적 요소를 잘 적용하여 일반 대중과의 교류나 정보제공에 큰 도움이 되는 점이다.

 

국내 만화책에 대해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중고등학생 위주의 청소년 내지 젊은 계층이 많이 찾는 점에서 학원물이 절대적으로 많이 나온다. 게다가 만화를 넘어 라이트노벨 시장이 일본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라이트노벨 작가들이 나오는 점을 고려하면 장르만화는 만화책으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라이트노벨 시장까지 넘어보며, 만화와 라이트노벨을 각색하여 만든 애니메이션까지 염두를 두어야 한다.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의 박기수 교수님의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에서 강하게 지적한 것처럼 국내 만화애니메이션의 흥행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서사다. 서사의 탄탄한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으로서 가져야할 소재와 이야기 거리이다. 그런 점에서 장르만화는 국내에서 불황인 만화시장에서 조금 고려해야할 사항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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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학개론
권경민 지음 / 북코리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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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라는 것은 그저 사람들에겐 재미로 보는 시간 때우기 용으로 생각하기 쉽다. 만화라는 것은 다른 매체에 비해 정보전달하는 요건이 매우 수월하면 게다가 구매하기 쉬운 콘텐츠 중에 하나이다. 누구나 눈을 가지고 있으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며, 누구나 글만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재빠르게 이야기의 흐름을 단번에 파악한다. 다른 정보매체와 다르게 만화라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같이 대하기가 좋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앞서 지나간 샷이나 시퀀스를 그대로 보내야 한다. 만약 복선의 배치가 깔려 있을 경우 그 상황을 다시 재정리하기 위해서 시간을 역행하여 과거로 돌아가야 하나, 자신의 집에 DVD로 시청하지 않으면 많이 어렵다.

 

왜냐하면 다중영상매체는 실시간으로 방영 내지 상영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다시 시간을 역행하기란 어렵다. 또 다시 한 번 봐야하거나 재방송을 기다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에 반해 만화는 문학처럼 시간적인 흐름을 되돌릴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전체 만화책 100페이지 중에서 현재 보는 곳이 90페이지일 경우를 생각하자. 보통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위기-결정-결말이란 단계에서 90페이지가 있는 90% 정도를 보면 항상 최고의 위기상태인 절정에 이른다. 이때 등장하는 갈등의 주체나 정체에 대한 정보력이 부족하거나 상황적 전개가 다소 이해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른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

 

시간적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만화이다. 물론 실존적으로 우리 인간의 시간은 역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만화라는 세계는 시간의 역행이 가능하고, 다중영상매체처럼 움직임 내지 소멸의 미학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게다가 만화는 이미지를 내포하기 때문에 시간적 흐름과 동시에 공간적 요소도 가지고 있다. 만화 중에서 단 1장의 그림으로 풍자나 세상을 비판하는 만평 같은 만화는 공간적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우리가 글로 쓰거나 말로 하는 것보다 만평에서 나오는 그림 내지 혹은 4컷에서 나오는 시사카툰이 오히려 더 강렬한 비판과 재미를 준다.

 

만화라는 것이 어렵지 않으므로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하기에 가벼운 소재가 된 것 같이 보인다. 사실 생각해보면 만화도 일반적인 서양화 내지 동양화를 비롯한 회화예술 요소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사실 미술실에서 데생하는데 필요한 연필이나 만화를 그리기 위해 사용하는 연필은 별도로 만들어진 것보다 오히려 그 연필 자체로 이용하고 있다. 물론 전문 만화작가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이나 전문예술가가 사용하는 미술도구들에서 조금 차이점이 보일지도 모르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도구를 이용하고 있다. 그리기 위한 방법에서 만화는 회화예술에서 사용하는 기법이나 연출들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장르나 예술에서 가지고 있는 요소를 과감히 차용한다.

 

지난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학술적인 요건이 강화된 컴퍼런스 주제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토대로 만든 장르만화 세계에서 Beck이란 작품이 여러 가지 장르 중에서 하나로 소개된 바가 있었다. 이미지라는 세계로 이루어진 만화에 소리라는 절대적 시간적 흐름이 반영될 수 있는가? 라는 의미에서 장르만화라도 음악이 가진 특성을 만화에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컴퍼런스 발표에서 나온 주제 중에 작은 단락에도 나왔다.

 

사실 만화라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에서 이미 만화로 만들어진 이상 하나의 허상을 이루는 존재다. 그러나 그 허상에서 만화는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하나의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다. 달리는 자전거와 자동차에서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선으로 묘사하고, 선의 배치로 통해 강렬함을 전달한다. 표현주의적 미학을 가지고 있기에 만화라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 전달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그런 만화를 두고 우리는 그저 보고 있다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까? 이미 프랑스에서 만화라는 것은 제9의 예술이란 정식명칭을 부여받고 있다. 대중들이 쉽게 접하는 문화생활에서 영화는 제7의 예술이다. 그 이전의 건축이나 클래식음악, 무용 등과 같은 여러 예술에 대해 대중들의 기호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고, 대중들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다른 예술에 비해 어렵지 않은데도 대우를 받으나 만화는 그러지 못하다. 게다가 영화라고 해도 장르나 분류를 보면 예술성을 강조한 영화도 있으며, 특히 아방가르드, 인디 장르 등도 역시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

 

삐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라는 서적처럼 대중들은 문화와 예술로 통해 하나의 구별 점을 만들어내고, 그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부분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 만화라는 존재가 정말 유치하거나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별 짓기>라는 책제목처럼 편력된 성향이 결국 정립시킨 문화적 상황이다. 2013년 여름에 극장가에서 개봉된 <설국열차>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실사 영화로 제작된(물론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이 상당히 들어가나) 이 작품은 원작은 프랑스 예술만화였다.

 

만화라면 유치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던 한국의 문화정체성에서 <설국열차> 영화의 흥행은 만화 <설국열차>의 관심도가 증가했으며,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는 <설국열차>를 그리고 제작한 프랑스 만화작가와 한국 영화감독 봉준호 씨가 나오기도 했다. <설국열차>가 아니더라도 웹툰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웹툰 소재가 광고나 드라마형식을 만들기도 했다. 혹은 하나의 만화책으로 이루어진 <식객> 역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만화에서 보이는 다양한 소재나 재미 등이 영화와 드라마로서 콘텐츠 요소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더 이상 만화라는 것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위치에 머무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만화와 웹툰작품이 흥행하고, 때에 따라서는 다른 콘텐츠로 제작된다고 해고 그것은 일시적인 요소다. 중요한 것은 이런 요소를 어떻게 더 개발하여 발전시키어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하여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대중적으로 접근과 동시에 어떻게 하면 만화라는 것도 예술적 가치가 높고 다양한 담론이 가능한 세계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가이다.

 

결국 만화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고, 어떻게 다시 봐야 하는지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남서울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 권경민 교수가 집필한 <만화학 개론>은 그런 흐름에서 만화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책일 것이다. 국내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도서에서 만화보다는 애니메이션 쪽에 더 많은 도서가 있는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 관련 도서는 영상학이나 영화학 전공자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으며, 국내에도 영화학 관련도서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영화학 도서에서도 애니메이션 한 장르나 소재로서 소개된다. 하지만 그 정보를 제공해주는 질적, 양적인 부분은 많이 부족한 현실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애니메이터 내지 만화가들이 만든 책이 절실한 부분이고, 설사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만화가와 애니메이터 입장에서 만든 다소 한계점이 존재한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 자체를 잘 풀어갈 수 있어도, 관점의 차이 내지 담론적인 요소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다. 국내 만화와 애니메이션 개론이나 이론에 대한 도서를 보면 관련 분야에 종사하거나 전문교육을 받는 사람에게 적당할지 모르나, 일반적으로 초심자 내지 혹은 교양으로서 접근하는 사람에게 소개해줄만한 도서는 어려운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내 입장을 생각해보면 프랑스 구조주의, 구조주의 이전의 소쉬르의 언어학(기호학),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등을 알게 된 동기는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한 도서를 보면서였다. 사실 만화라는 것이 이미지라고 해도 하나의 그림체로서 기호이며, 기표로 통해 기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부여된 점이다. 서사의 진행에 따라 이미지 표상과 흐름에서 전달되는 이데올로기의 분석은 쉽지 않다. 정확하게 정리하면 그렇게 분석하기 위해 독자로 하여금 배경적인 지식과 학문적 요건을 쌓기가 어렵다.

 

쌓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런 세계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지시키게 하고, 그것이 간단히 무엇인지 정보로 제공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가령 대중들이 흔히 무슨 뜻인지 모르고 남발하는 “스펙타클하다.” 내지 영화나 광고포스터에서 나오는 “초강력한 스펙타클한 전개” 등에서 스펙타클이란 단어가 어디서부터인가에 생각해보면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는 것은 쉽지가 않다. 최소한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가 되는 사회”라는 의미처럼 주요 핵심을 간추려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그냥 보고 간단한 것이나 알고 보면 생각이상으로 어려우며, 다른 학문과 많은 연계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만화를 만화로서만 대하는 것으로 만화를 이해하기가 부적당하다. 만화의 연출이나 묘사방법에서도 몽타주나 미장센, 시퀸스와 같은 영화용어를 적용할 수 있다. 특히 화면 안에 이원적인 것을 동시에 넣어 상황의 극대화 내지 갈등의 증폭 역시 좋은 방법이다. 물론 <만화학개론> 책 1권을 읽고 만화전문가 내지 만화비평가, 만화작가로 될 수는 없다. 이 책은 개론도서이지 전문적인 요소를 더 들어간 서적은 아니다. 하지만 만화라는 것이 무궁무진한 작품을 가진 세계이고, 무궁무진하게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세계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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