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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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노무현의 인생에서 보는 한국의 살아있는 민주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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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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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 입장보단 스탈린과 북한의 통신자료나 미국에서의 자료등을 인용하여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정리했기 때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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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 - Seed Novel
온점 지음, 모밍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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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을 보면서 문득 최근에 김월희 작가가 저술한 <2병 데이즈> 4권의 후기편이 생각난다. 김월희 작가는 <2병 데이즈> 1권 발매당시 여주인공 흑련과 린의 대화에서 괴벨스의 부분으로 인해 엄청나게 큰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다. 정작 본인은 그것이 정말 옳은 게 아니라 단지 작품 전개상 중2병이란 속성에 대한 강화를 맞추기 위한 하나의 모티프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나 그의 고충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인지해야 했다.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종료 이후 계속 진행 중인 <2병 데이즈>로 통해 자신이 내놓은 작품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보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책임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쓰는 글이란 조심스러운 부분이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타인의 의견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 감상과 혹은 비평적인 관점으로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에 대해 읽은 소감, 즉 라이트노벨을 직접 구매하고 읽으면서 서평까지 쓰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번 편은 유감스럽다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비평이나 감상적인 요건은 개인의 입장에서 나온다. 그 개인의 입장이 되는 사고와 판단은 물론 모든 것이 그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과 지식적 조건 등에 의해 좌우된다. 하지만 적어도 개인적 논평에서 나오는 부분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1권에 비해 재미, 감동, 의미 등과 같은 요소들이 전혀 와 닿지 않은 느낌이었다. 라이트노벨이 경소설이라고 하여 재미 내지 즐거움을 준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라이트노벨 역시 일반 소설과 같은 서사구조를 지닌 문자서사이므로 소설과 비교하면 안 된다는 점은 없다.

 

개인적 비평적 관점에서 보자면,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은 내 기준으로는 낙제점을 받은 것이다. 라이트노벨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라이트노벨이란 장르와 소재에 대한 기본적인 성향과 요건을 생각하면서 서평을 쓰지만, 그런다고 그것은 그 조건일 뿐이지 다른 소설과 비교하는 연장선상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번 편은 작품의 주인공인 에프 킬러의 주인공보다는 에프 킬러의 지역 점장에서 문제였다. 이야기 2편 전체의 주제는 에프 킬러 점장의 과거와 그녀를 찾으러 온 붉은 이리의 과장이 오면서다. 2사람은 자매이었고, 언니 쪽인 점장은 납치되어 10년 전에 에프 킬러 총장에게 구출 후에 계속 이 조직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때 쌍둥이 자매인 붉은 이리의 간부 시현은 이래저래 팔린 채 돌아다니다가 조직의 일원이 되어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악의 조직이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2권은 너무 클리셰적인 요소가 강했다. 뭔가 안 봐도 알 것 같은 느낌, 게다가 점장의 아버지가 조직의 두목인 것까지는 좋으나, 자매의 어머니가 어떤 정식부인이 아니라 숨겨놓은 애인이란 설정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소녀?”라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볼 것인가? 소녀라는 기준을 명사적 의미로 살펴보면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아니한 어린 여자 아이. 그렇다면 성숙이란 기준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해당되겠지만, 어린 여자 아이라면 어느 기준으로 맞추는 것이 올바른가?

 

차라리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이제 갓 아가씨의 향기가 풀풀 나는 그녀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어린 소녀의 티가 벗어나 있었는지 얼굴의 볼 살의 흔적이 보였고, 아직 마음이 어린지 눈가에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라는 표현이 조금 나아보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2권은 점장을 찾으러 온 시현이 쌍둥이자매의 상봉이란 명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언니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고, 그녀를 자신의 보호아래 두기 위해 에프 킬러를 자본력으로 와해하는 것에서 차라리 자본에 대한 부족을 우회적으로 돌리는 게 좋았겠지만, 속성이 빈곤 코미디이기 계속 그것을 고수했다.

 

물론 그런 점을 고수한 점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이 작가의 본래 설정한 의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설정은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 글을 쓰면서 생각해야할 조건이다. 어차피 서사에서 어느 문제가 나오고,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과업의 부여는 이미 정해진 틀이다. 그 틀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조합하고, 어떻게 이끌어가는 것이 작가 내지 스토리텔링의 숙제다. 조직의 살림을 궁핍하게 만들어 데려오는 것과 마지막에 점장을 두고 펼친 결투가 너무 클리셰인 점에서 신선한 맛은 없었다.

 

라이트노벨이 환상적 요건과 비일상적인 요소를 반영했으면, 그 자체로서 진행한다면 모르나, 적어도 현실적 요건인 등장한다면 그것에 대한 요건을 충족해야 하나, 그 조건이 어울리지 않으면 당연히 이야기 흐름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주연은 주인공과 하춘식이나, 하춘식의 등장은 그다지 나오지 않고, 마지막 부분 결투에서 사신처럼 보이는 모습, 그리고 주인공이 길거리에서 방황할 때 자신의 집에서 재워준 것 말고는 큰 활약은 없다. 물론 그것도 이야기 속에서 작은 이야기에 해당되므로 나쁘다는 점은 아니다.

 

하지만 마법소녀 하춘식이 사는 집은 혼자서 자기에는 큰 집이란 점이 조금 어긋난 것이다. 하춘식이 밤이 되자 잠을 자야 하는데, 자기 방이 아니라 거실이나 남는 방에 주인공을 재우면 그만이다. 굳이 자신의 방에서 침대에서 잔다고 해도, 밑에 주인공을 재워줄 이유는 없다. 그래서 작가의 설정 자체가 너무 흐름 속에서 어긋난 것이 문제였다. 재미요소는 여전히 같은 방식이 계속 나오는 점에서 이 라이트노벨 이외에도 다른 라이트노벨도 비슷한 내용이 매권마다 다른 상황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권에서 계속 되풀이 되는 설정이라면 지겨운 것은 분명하다.

 

일단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의 모든 발단은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그것을 아는 딥블루, 그리고 총장이란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2권을 전부를 먹어버린 시현의 등장과 주인공의 대립과 화해는 너무 질질 끄는 느낌이었다. 새로 등장한 인물이 1명인데, 그 등장으로 1권을 통째로 차지한다는 것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예전에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에서 엔들리스 에이트가 방송에서 그 반복에 해당되는 편만큼 애니메이션으로 나왔다. 애초부터 설정부터 그렇다면 반복적인 요소와 그것에 대한 가십감은 작품 내의 주인공만 아니라 보는 관객들도 충분하다.

 

라이트노벨 원작에도 그런 반복이 있어서 지겨움을 느끼게 만든 것과 그렇지 않은데도 지겨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엄연하게 다르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은 초반에 빈곤을 소재로 한 코미디지만, 어느 순간 하렘구조가 성립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주인공 자체가 생김새나 행동이 여자라고 하나 적어도 주변적 인식에서(모르는 사람 제외) 남자라는 것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진행된다. 3권은 조금 더 나은 이야기로 다가오면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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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삶을 상상하는 방법을 제안하다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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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애니메이션 방송프로그램 중에서 엄청난 흥행과 성공을 거둔 <진격의 거인>이란 작품이 있었다. 나는 <진격의 거인>을 두고 초점을 식량에 맞추었다. 각 성벽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식량일 것이다. 왜냐하면 식량이란 것은 농경사회와 같은 1차 산업에서 농민에 의해 수확되는 상품이다. 그런데 그 상품은 농민이 물물교환이란 최초의 경제로 통해 상업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모든 식량이 엄청난 거부의 상품 지배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식량은 제일 외곽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 가운데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비로소 그 중요도를 인지할 수 있다.

 

물론 제일 외곽도시가 무너지고, 피난민들이 더 안쪽으로 피난오고 나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식량은 한정적이었고, 피난민들에게 나누어줄 식량은 매우 모자란 것이다. 거기에 대해 피난민 중에 수십 만 명을 거인에 대한 검색과 퇴치, 그리고 식량을 위한 개간지로 내모는 장면이 있었다. 거기에 간 수많은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거인에게 포식당한 채 죽게 된다. 그렇다면 식량이란 가치로 통해 무엇을 볼 수 있는가? 하다못해 사령관조차도 거인의 대규모 습격에서도 만일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모두 잡혀먹을 것이고, 지킨다고 해도 식량부족으로 모두 자멸할 것이라고 한다.

 

이른바 식량이란 것이 경제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고, 국가통제수단에서 제일 중요한 도구이다. 거인이란 존재는 외부의 위험으로 각인되었다면, 식량은 내부의 문제로 들어갈 수 있다. 식량의 보급은 결국 생명과 직결되고, 식량으로서 인간은 만인 대 만인이란 투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식량과 거인으로 가치로 본 문화적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미국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이란 책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의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관념인가? 물질인가?

 

모든 문화가 조성되는 것은 물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초에는 인간이 생태적 조건, 기후적 조건, 지리적 조건, 지질학적 조건 등과 같은 환경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격의 거인에 대한 논쟁과 담론에서 일본극우성향이 담겨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견해로 작품에서 보여줄 모티프이지, 그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본이란 나라가 가진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현상에서 젊은 세대들이 겪는 사회적 갈등과 좌절이 기초해서라고 본다. 이미 기성세대에 의해 경제구조는 이루어져 있고, 차후 세대는 그곳에 진입할 수 없다. 게다가 <진격의 거인>에서 거인이란 존재는 누가 무엇을 위해 그들을 보내고, 어떻게 거인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근본을 알 수 없는 거인들이 외부에 있다가 어느 순간 내부의 스파이에 숨어있고, 마지막 편에서는 거인이 성벽 안에 숨어 있다. 그렇다면 거인이란 적은 외부의 적인지 내부의 적인지 다시 의문이 생기는 순간이 왔다. 이런 점을 두고 페이스북에서 만화평론가인 박인하(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학과) 교수님은 <진격의 거인>이 단순한 우익적인 요소로 보는 게 아니라 일본 내의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고 여겼다. 그 지문을 보면 아래와 같이

 

“예컨대 진격의 거인 경우 잇쇼켄메이의 정신이 군국주의의 정신일까,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역사성이 있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고요. 더불어 전 진격의 거인에서 잇쇼켄메이 정신보다는, 울트라맨 이후 익숙하게 반복되는 공포 메타포인 거대한 타자의 내습이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벽에 둘려 쌓인 현재, 그리고 그 안에서 목숨을 건 조사병단. 이게 군국주의일까요, 아니면 현대 무기력한 일본사회의 모습에 대한 메타포일까요? 전 후자 쪽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내가 주목한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에 대해 관심이 보인 이유는 인문학적 관점에서(물론 박인하 교수님은 문학전공자다) <진격의 거인>을 보자는 시선이 무엇으로 연결 되는가이다. 이 책에서는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작품 개인적인 독립개체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사회적인 흐름과 역사적인 조건 그리고 문화적인 현상으로 풀이한다. 진격의 거인에서는 개인과 사회라는 자아와 거대한 타자를 말한다. 개인의 존재성에서 우리 인간은 국가란 무엇이고? 사회란 어느 존재인가? 우리의 가치가 우리를 위한 것이 결국 국가와 사회의 발전이 되는지, 혹은 그것과 상관없이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는 지까지도 말이다.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에서 보인 개인과 타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현대사회의 우리 인간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자기가 살아오는 조건과 현실 그리고 이상에서 말이다. 따라서 시초를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윈피스>부터 시작이다. 알다시피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일본 최고의 오타쿠 집단인 가이낙스에서 만든 작품이다. 엄청난 흥행과 더불어 작품 자체가 열혈이란 점에서 많은 남자팬들을 만들기도 한 작품이다. 문제는 <천원돌파 그렌라간>이란 작품이 말하는 근대성이란 무엇인가이다.

 

거대한 목적을 위한 계속되는 진화에서 인간의 딜레마가 나온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두고 전에 우익적 성향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에 대해 서구문명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모두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보면 계속 그렌단의 규모는 주인공을 토대로 규모가 커지고 결국에 나선왕을 쓰러뜨리고, 우주와 은하계까지 넘어간다. 그런 점에서 계속 자기의 영역을 확장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세력과 함께하여 계속 진행되는 진화적인 관점은 대동아공영 전술적인 요소가 반영되었다는 관점은 어느 정도 부합된다.

 

그러나 그런 성향은 일본이란 국가적 특성, 즉 섬에 위치한 나라에다가 주변에 바다로 인해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지정학적인 조건에 기인한다. 그런 성향은 <기동전사 건담>에서 지구인이 지구가 아닌 우주를 선택한 것은 지구환경이 척박해지고, 살아가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란 눈부신 신화에서는 숨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물가는 오르고, 부익부 빈익빈이란 치명적 경제적 양극이다. 이런 양극으로 인해 “몫을 가진 자”와 “몫이 없는 자의 몫”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몫이 바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소외다.

 

왜 <진격의 거인>이 흥행하고, 국내에도 큰 호응이 오는가? 최근 88만원 세대와 같은 젊은 세대들의 좌절을 어떻게든 뛰어넘고 싶어도 넘지 못한 벽이 되었다. 만약 그 벽에 향하여 전력 질주하다가 바로 쓰러진다. 결국 자기나라에서 이룰 수 없는 조건,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하나, 그것조차 어렵다. 20세기는 1차 및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미 판도는 구성되어 있고, 21세기에 오면서 다른 국가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삼는 것은 국제적인 위협요인이 된다. 그런다고 상대편에서도 호락호락하게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국내적으로 정착된 안정을 파괴할 수 없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지하세계의 사람들처럼 그저 위기에 떨며 살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운명이란 타이틀로 투쟁할 것인가? 만약 나선왕이 최후의 적이라면 식민지에 대한 열망일지 모르나, 나선왕 역시 과저에 안티-스파이럴과 싸우던 전사였고, 그는 인류생존을 위해 인류를 지하로 가두었다. 작품에서 100만 명이 되면, 안티-스파이럴이 등장하여 인류를 모두 멸망시킨다고 한다. 일본이란 국가와 민족이 지닌 콤플렉스 요인이 하나의 모티프로서 작용할 수 있지만, 결론은 인간의 진화와 퇴보라는 선택의 갈래였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과 문명의 발전은 과연 진보했고, 인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진화를 했는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분도 아도르노와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자로 통해 인간의 진보는 진정한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는 것이다. 작품에서도 스스로 희생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앞에 갈 수 있는 것은 뒤에 따라오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결국 진화라는 것은 누군가 희생되거나 퇴화되어야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누군가 사라지기 때문에 진화를 한다. 그런 것은 인류문명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이 더딘 미개부족은 무기와 문명을 지닌 사람에 의해 무참히 죽는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란 서적에서 인간의 문명이 결국 덜 발달된 문명을 가진 부족을 멸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근대라는 관점은 결국 거대한 국가의 형성에 의해 조건이 되고, 그 조건에서 식민국가와 지배국가로 나누어진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그런 근대적인 국가관이 담겨있으면서 한편으로 인간의 진보와 퇴보를 다룬다. 그런 의문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부터 시작하여 21세기에도 계속 의문되는 상황이다. 근대라는 정체성에서 거대서사가 주요관점이라면 근대를 지난 탈근대 즉 post-modern이 도래한 것이다.

 

<윈피스>는 바로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달리 근대성에서 탈근대성이란 개인의 초점에 맞추어져 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오로지 나선왕의 타도에서 안티-스파이럴과의 투쟁 그리고 화해이다. 왜 인간은 문명사회에서 억압받을 수밖에 없는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도 반계몽적인 사상을 남긴 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에술에 대하여> 및 <인간불평등기원론>으로 통해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위적인 존재가 되어 그것이 불평등과 사회적 부조리를 만든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희생한다고 말한다. 특히 루소의 경우 법은 권력자를 위해 존재하는 악적인 존재라고 여겼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가? 독일 심리학자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다가, 자연의 착취가 불가능해지면 인간을 착취한다.”고 한다. 안티-스파이럴이 인류가 멸망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욕망과 이기심, 그로 인한 전쟁과 환경파괴 등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공략대상이 자연이 아닌 인간으로 행해지고, 결국 인간을 지배하는 인간으로서 우월감을 만끽한다. 루소가 지적하는 인간의 지배는 단순히 농노사회나 봉건사회의 계급만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도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역시 자본이란 화폐자본이 아니라 지식, 예술적 취향, 취미생활 등으로 문화자본이 존재한다고 한다(물론 내가 적는 글 역시 지식과 미학적 요소가 있기에 이것 역시 문화자본이다. 권력에 대한 해체에서 지식이 권력을 생산하는 점에서 그 권력의 지식을 해체하는 것 역시 지식이다).

 

인간에게 불평등이란 조건은 영원불멸하다. 그렇다면 불평등이 없으려면 나선왕처럼 압제로 통해 모두 같은 조건에 처하게 하는 점이다. 물론 그 조건 아에서 불평등은 생기는 게 아이러니다. 근대성을 추구하는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모두가 같은 큰 뜻을 위해 싸우는 거대서사로 진행된다. 거대서사와 달리 <윈피스>는 무엇인가? 작가의 의도대로 <윈피스>는 개인적 목적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점이다. 즉 리오타르가 제시하는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해적이란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각자의 목적을 두고 서로 인정하는 조건에서 <윈피스>는 자유분방함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내에서 세계의 국가는 없으나 단지 해군이란 기관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해적과 대립된다. 그러나 해군을 모두 봐도 모두 정의가 있는 게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부당하며, <윈피스> 내의 주인공과 대립된다. 해군이란 조직은 국가권력이다. 어떻게 보면 아나키스트적인 요소로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국가와 사회는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가는 점에서 매우 낭만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도 지적하고 나 역시 지적한 것처럼 <윈피스>에서 현실적 조건이 없다. 우리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일상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활적 요소가 부재된 <윈피스>는 하나의 꿈과 같은 존재다. 애니메이션이 일반인들에게 유치할지도 모르나, 애니메이션이 나름 깊은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는 원인은 애니메이션의 정의에서 생각할 수 있다. 가령 신화는 그 민족이 가진 집단적 무의식이라면, 꿈은 개인의 신화다. 그런 신화적 요소를 가장 잘 돌출할 수 있는 매체가 바로 애니메이션이다. 일단 애니메이션에서 Anima란 단어는 라틴어로 영혼이고, Animate란 존재하지 않은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혼을 불어넣는 뜻이다.

 

그렇다면 혼이 없는 존재가 혼을 가진 하나의 매체가 되는 게 Animation이다. 참고로 종교사상에서 Animism이란 종류가 있다. 무생물에게 영혼이 있다. 이것은 주로 일본에서 통용되는 민속적인 종교적 관념이고, 한국에도 존재하는 종교적 관념이다. 인간의 의식하는 것과 동시에 무의식적인 요소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인간이 일상생활에 억눌린 억압에 대한 해방과 더불어 터부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평상 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영웅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안의 주인공에 열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한다. 역사란 어느 특정 개인의 이야기지만, 시란 특정 개인이 아니라 누구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즉 개연성이란 것이고, 고대 그리스에서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적 이야기를 볼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비참한 얼굴로 탄식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어머니와 성관계를 나누어 아이를 출산하지 않았지만, 자신 역시 그런 비극이 올 수 있다는 하나의 개연성에 대해 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적이고, 자유분방한 <윈피스> 주인공에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현실에서 억압당하고 자신을 드러나지 못한 채 타인에 의해 조성될 수밖에 없다. 예전에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서적에 소개된 인물로 자크 라캉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로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떄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는가? 근대성에서 현대성으로 넘어갈 때 포스트모던 시대에 도래함에서 개인주의가 활성화되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되었다. 그것은 근대시민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나,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이 근대사회 이전에 농경사회에서는 대가족이라면, 지금은 대가족에서 핵가족이 되어 가족이란 커뮤니티 조건과 능력이 축소되었다. 교육과 출산 등과 같은 크고 작은 일이 가족이나 혹은 부족에서 처리했다면, 이제는 가족 대신 사회에서 처리한다.

 

우리의 존재는 결국 사회생활로 통해 인정받기 원하며, 거기에 대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를 바란다. 결국 기표라는 표상에 의존하게 되고, 장 보드리야르의 의견처럼 인간은 기호를 소비하고, 상품은 기호고, 기호는 상품이게 된다. 기호라는 것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인간은 미디어란 정보에 의해 사로잡히고, 거기에 모든 것이 매개가 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되는 사회다. 이미지란 표상의 기호가 결국 인간을 좌우한다. 우리는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라 나이키를 신고, 차를 모는 것이 아니라 벤츠를 몬다.

 

인간의 가치가 하나의 기호로서 정해지고, 그 기호는 자본이란 매체로 통해 결정된다. 그런 와중에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자본에 의해 자기 삶을 구분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존재성은 무엇인가? <강철의 연금술사>는 저자가 생각하는 가치관인 것 같았다. 자신의 팔은 없고, 동생의 육체는 소멸하여 갑옷에 혼이 들은 채 모험을 하는 형제, 하지만 형제는 그 어떤 정의감이나 혹은 이상을 위해 활동하지 않는다. 단순히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보편적인 도덕에 의해 행동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선의 가치란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타인을 위해 베푸는 정언명령이란 개념이 있다.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보이는 형제의 활동은 거대한 음모나 국가적 위기를 대응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현실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그 공간에서 형제의 우애, 친구와 우정, 주변인들과 화목한 생활을 바란다.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사회에는 의도하지 않은 행복을 준다. 그들이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정의의 사도보단 인간이 가진 감정에 의해서다. 인간이 타인에게 베푸는 이유는 이성보단 감정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성은 논리로서 움직이고, 그것은 자신의 조건과 현실에서 손익을 확실히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손익의 관계를 넘어 그 자체로 하고 싶은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보이는 세상은 분명 허구다. 애니메이션은 현실부재라는 안티-리얼리티이고, 실사영상은 파생실재라는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하지만 실사영상의 문제점은 리얼리티가 오히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하이퍼 리얼리티를 구성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현실부재라는 조건에 의해 보는 세계가 가상임을 인식한다. 물론 지나치게 몰입한 사람의 경우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있다는 여기는 과도한 행위를 하나,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존재성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에서 <충사>에 대해 논하는데, 충사만큼 Animism(애니미즘)을 잘 구현한 작품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해 말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고찰한다. 가령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에서 흑백으로 구성된 화면에 주인공은 고양이다. 고양이는 주인인 젊은 여성을 보면서 대사를 한다. 고양이가 인간을 본 후에 말을 하고 사고할 수 있지 않으나, 그것으로 통해 보는 것은 인간사회의 소외와 외로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고양이로 통해 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는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있다.

 

고양이가 보는 일본 메이지유신 후의 사회란 정말 발전하고 좋은 사회인가? 오히려 인간은 더 비참하게 보이고, 어중간한 요소가 사라져 그것을 풍자한다. 죽은 지식인의 사회처럼 애니메이션은 우화적인 요소와 문학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그런 이런 애니메이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낄 수 있는가? 저자의 도서에서 대안은 역시 애니메이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미야자키 감독은 항상 작품 내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 그리고 인간과 다른 존재의 부딪힘이었다.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고 거기에 같이 이웃처럼 지내는 <이웃집 토토로>나, 인간과 자연의 갈등을 그린 <원령공주>, 과거(마녀)와 미래(과학소년)의 공존을 그린 <마녀배달부 키키> 등을 보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가지지 못한 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간의 감수성을 되찾을 것을 전달한다. 물론 그의 전달방법 역시 자본주의적이나 말이다. 인간이란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찾고, 인간적인 요소를 찾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을 감독으로 최근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언급되었다. 그의 작품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늑대아이>에서 전자는 인간이란 시간적 존재이듯이, 비가역적인 시간에서 가역적인 행동으로 통해 한 소녀가 알아가는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후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이을 자연과 인간에 대한 화해와 경계다.

 

늑대아이는 인간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늑대로 살아갈 것인가? 정체성의 여부에서 남매는 다른 길을 선택하나, 그래도 어머니는 모두 좋다고 여긴다. 저자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나, 아니 비슷할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와 더불어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가 존재한다. <늑대아이>에서 아버지는 가장 행복해야할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여 그 자신이 늑대라는 정체성을 드러난 상태이다. 그에 반해 계속 동물원에 살아가는 늑대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존재는 늑대이나 늑대라는 자연적 존재로서 드러나지 못한다. 결국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늑대로서 늑대인 채로 죽는 아버지는 일본의 유미주의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가장 아름다울 때 죽는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놀이인 하나비 불꽃놀이에서 불꽃이 터질 때 가장 예쁘나 소멸한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사쿠라, 벚꽃나무 역시 벚나무의 꽃잎이 나무에 붙을 때보단 떨어지는 순간이 아름답다고 한다. 결국 떨어지게 되면 다시 되돌리지 못할 죽음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단지 1년이 지나면 다시 벚나무의 꽃잎은 활짝 피고 새로운 생명과 죽음이 반복된다. 죽음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삶이란 새로운 욕망과 희망을 주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곧 죽는 것과 같다는 것이 인간이고, 죽음이 있기에 인간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하나 밖에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의문에서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나에게 행복하냐는 말을 하면 아마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도 많다. 물론 친구를 만나고,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즐겁고, 그건 분명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만들 수가 없고, 결국 사회적 조건에 의해 변해간다.

 

내일 당장 내 친구가 자동차에 치일지도 모르고, 형제 중에 로또 복권이 당첨될지도 모른다. 그런 조건에서 우리의 삶을 돌이켜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물론 애니메이션을 인문학으로 본다고 해도 답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왜 그런가? 것과 동시에 어떤 것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는가? 남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보다 자기가 느끼는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행복을 찾는 길 중에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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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Salo Or 120 Days Of Sodom (살로, 소돔의 120일) (Criterion Collection) (한글무자막)(Blu-ray) (1975)
Criterion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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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가 저술한 <소돔의 120일>에서와 달리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기본적으로 가학성을 띄고 있으나, 그 주제가 다른 것을 보았다. 기본적으로 <소돔의 120일>은 사드가 1784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약 37일 동안 혼자 깨알 같은 글씨로 소설을 만든 것이라면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사드가 저술한 도서를 영화로 각본하여 만든 것이다.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제작한 <살로소돔의 120일>은 분명 <소돔의 120일>에서 가지고 온 모티브나 등장인물 요소에서 유사한 점은 있으나 다른 점도 있다.

 

마장의 역할, 즉 4인의 무자비한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뽑은 성기가 아주 큰 남성이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선 도락자를 위해 선발이라면,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파시스트의 부하라는 점이다. 총을 들고 있어서 억울하게 잡힌 사람들에게 위협적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4인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기도 한다. 아니 그들도 즐기기도 한다. 소돔이란 것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부여받은 성적 윤리를 배신한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에 대한 다소의 거부감이 있다고 하여도 그들 역시 인간적 권리를 부여 받을 자격이 그들을 탓할 수 없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관계없이 DNA, 즉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본인들도 힘겨워 하는 점이다. 적어도 그들은 타인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악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 등장한 남색을 즐기는 4인방은 자기만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모든 것에 대한 생명력을 인정하기보단 그 생명력을 부정하는 신적 모독에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가톨릭 내지 프로테스탄트도 아니기에 딱히 무엇이라 말하기가 어려우나 적어도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국 정서적으로도 <소돔의 120일>과 <살로소돔의 120일>은 금기를 위반한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20대 아름다운 여성, 그들은 남자 4인방들의 딸들로 그 딸들은 그 상대 남자에 대한 아내로 삼아진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근친상간에 남색까지 인정되므로 어느 사회에서 금기로 다루던 인간의 윤리를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민족과 국가에서는 딸이 아버지와 혹은 아들이 어머니와 성적관계를 갖는 것이 허용된다고 하나 보편적으로 근친상간은 크나큰 죄악이 성립된다. 동성연애라도 고대그리스도 <소돔의 120일>처럼 하지 않는다.

 

에로스란 단어가 사실은 남녀 간의 사랑보단 오히려 늙은 현학적인 남자와 그 남자를 흠모하는 젊은 소년이 같이 자리를 하는 것이다. 고대그리스 사회에서는 동성연애가 하나의 문화적인 권력의 유지인 셈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에로스의 위치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바뀌고 또한, 에로스는 1968년 프랑스 파리의 5월 혁명에선 하나의 생명력으로 폭발한다.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서적을 봐도 그렇지만, 결국 에로스는 생명을 이어가려고 하는 생존욕구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에로스적인 욕구는 인간의 번식에 대한 요건도 중요하다. 생명의 연계성에서 에로스야 말로 우리 인류는 보존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Libido 즉 무의식적인 성적 에너지가 원천적이라고 하여도 에로스란 생명을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그 에로스라는 것을 모조리 부정한다. 그저 모든 생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파괴의 향연을 즐기는 것이다. <소돔의 120일>나 <살로소돔의 120일>에서 귀족 역할을 한 포악한 자는 역시 어머니를 저주한다. 자신을 이 세상에 나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큰 죄고, 자신의 생명력은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적관계로 통한 성적쾌락으로 만족했기에 보상은 충분하다는 사실이다.따라서 이미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을 창부보다 못한 대우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런 4인의 포악한 행위를 4명의 늙은 창부의 이야기로 통해 몰고 간다.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1부가 희생자들의 모아 저택에 가는 것과 2부는 변태적 성욕, 3부는 분비물과 고문에 대한 이야기, 4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소돔의 120일>은 성적쾌락을 위해 1부에서 4부까지를 다룬다면, <살로소돔의 120일>은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그들은 파시스트에 대한 비판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남색을 하고 어린 소녀의 순결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분뇨를 먹이거나 자기 얼굴에 소변을 뿌리라는 이상한 도락에서 벗어나 채찍질과 가학적인 폭력, 그리고 4부에서 보인 육체적인 가해는 영화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은 당시 루이16세 즉 앙시앵 레짐이란 구체제 속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감옥의 역사에서 처음 나오는 인물은 다미엥이다. 다미엥은 주군인 루이15세를 살해하려다 체포된 하급관리로 그의 사형은 물리적인 신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왕의 신성성을 내세워야 한다.

 

다미엥의 죽음은 그렇게 쉽지 않다. 상처를 내고 수은 같은 것을 붓고, 최후에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다. 당시 프랑스에도 매우 잔혹한 처벌방법이 있었다. 사드의 원작을 봐도 4부에 나온 잔혹한 고문과 처형방법은 프랑스에서 기존에 있던 방법이다. 4부를 보면 사람을 잔혹하게 죽여 성욕을 해결하는 미치광이 도락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그 4인방은 희생자를 대상으로 눈을 도려내거나 손톱과 발톱을 뽑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며, 최후에 팔과 다리를 자른다.

 

그들이 베어버린 사람의 몸이란 그저 자신들이 자연적으로 물러 받은 생명에 대한 고귀함을 부정하고, 오히려 자연적이란 죽음을 선사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로스가 아닌 타나토스, <소돔의 120일>의 미학적 요소는 바로 타나토스의 극치이다. 파괴와 죽음의 욕망을 희생자에게 전가하여 성적 쾌락을 느낀다. 물론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도 고문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4인방은 성적욕망을 느낀다. 법원장은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만든 여자가 형을 집행 받는 순간 사정을 한다고 한다.

 

결국 생명을 부수는 것으로 성적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파괴적이고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쾌락을 추구함이 <소돔의 120일>이다. 그렇지만 <살로소돔의 120일>은 다르다. 그런 요소를 쾌락으로 즐기는 것도 있으나 오히려 파괴와 변태적인 가학으로 통해 파시스트의 미학을 추구한 점이다. 폭력의 미학이란 결국 파시스트가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파시스트이면서 본인이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폭력의 미학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정의의 미학으로 여길 것이다.

 

오히려 폭력으로 실행되는 의지가 오히려 정의라는 명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폭력의 이면에는 진실의 은폐와 권력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렇다. 파시스트가 추구하는 폭력성에서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누가 직접 고문과 살해했는지 모르나, 아마 4인방이 직접 할 가능성이 높으나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마장을 비롯한 파시스트 군대가 직접 그 행위를 돕는다. 그 의미는 그들의 폭력성에서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구조가 폭력의 무질서야 말로 오히려 질서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정치적 의미를 목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다. 단지 정치적인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도락자 내지 미치광이 변태들이 성직자, 귀족, 상인들과 같이 당대 상류계층이란 것이다.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에서 당시 사드가 워낙 방탕한 생활을 공개적으로 즐긴 것을 생각해보면 사드는 금욕주의를 내세우며 뒤에서 변태적 성욕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을 비꼬는 것이다. 영화는 상류계층에 대한 비꼬는 것보단 오히려 파시스트들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마지막에 왜 살육의 현장을 망원경으로 보면서 즐거워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폭력을 일으키는 자들이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면 조장하는 것이다. 폭력이어야 말로 오히려 정치적으로 정의를 두는 것이 파시즘에서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정치적인 수단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공포이다. 상대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거나 혹은 폭력을 가해 공포의 도가니로 만드는 것만큼 큰 쾌락이 없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통한 공포로서 인간의 통치에 대해 합리적으로 만들며, 그 공포의 정치로 지배할 수 있다는 하나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사디즘이란 성적 쾌락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타나토스의 미학이라면,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우월주의를 폭력이란 수단으로 보여주는 과정이다. 왠지 보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 퍼지는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본다. 폭력이 정의라고 믿는 하나의 광기에서 그것이 곧 사회적 미학으로 이어지는 것이 파시스트적 요소다. 가십거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대한 각종 폭력적 수단(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이 용인되기에 저런 영화가 지금 봐도 다소 공감되었다.

 

영화가 1975년에 제작된 점에서 최신영화와 비교하여 화질이나 카메라 앵글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해도 영화배우의 능력에서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소돔의 120일>의 1부에서 이야기꾼으로 나오는 뒤클로 역을 바까리 부인이 맡았는데, 그녀를 비롯한 이야기꾼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이야기를 하고 춤도 춘다. 하나의 음률로 통해 마치 뮤지컬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4부에서 분위기가 조금 어두울 때 만담형식을 가진 이야기꾼의 재능은 그야말로 이 영화가 가진 맛인 것이다. 화면의 구도가 세련되지 못함에도 연기를 하는 배우의 연기력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추악하고 잔혹하고 변태적이며 불결한 요소를 어김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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